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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영지 순례] 천왕봉 때리는 벼락을 기다린 곳, 지리산 산천재

醉月 2022. 12. 8. 17:37

힘이 있을 때 산에 들어가서 사는 게 좋다. 되도록 젊었을 때 입산해서 사는 게 어떨까 싶다. 힘이 쇠약해지면 산에서 사는 게 힘들다. 우선 일상생활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는 산중턱에 위치한 거처에까지 올라 다니는 게 힘이 들었다. 물건을 하나 사는 것도 그렇고, 일상생활이 산속에 살면 불편하다. 힘 떨어지면 도시에 사는 게 좋다고 본다.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도시에서 약간 부대끼면서 사는 것도 괜찮다. 도시의 대학 근처에서 사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식사하고 대학 캠퍼스 산책하는 것도 좋고, 각종 문화 행사도 구경하고, 젊은 애들 대학촌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 기를 받는다.

젊어서는 산이 좋고 나이 들면 도시가 좋다. 이게 일반적인 공식이지만 조선 중기의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 선생은 반대로 실행하였다. 60세가 되던 1561년에 경남 산청군 덕산면 지리산 천왕봉 밑으로 들어왔다. 환갑에 입산한 셈이다. 그것도 지리산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지점을 택해서 들어왔다. 여기에다 강학 공간을 세웠으니 그 이름이 산천재(山天齋)이다. 1561년에 천왕봉 밑에 입산하여 1572년에 죽었으니 꼭 11년을 산천재에 머물렀다. 인생의 대미를 여기서 장식한 것이다. 물론 산천재 11년 동안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키웠다. 최영경, 오건, 정인홍, 하항, 김우옹, 정구 등 많은 학자들을 길렀다. 말년 11년 동안에 이렇게 실력이 뛰어난 제자들을 키워내는 것도 특이하다. 터가 명당이라서 그런 것일까?

산천재에서 바라다보면 마당 정면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천왕봉이 보인다. 지리산 전체에서 이 지점처럼 천왕봉이 온전한 모습으로 보이는 뷰포인트도 드물다. 아주 잘 볼 수 있는 드문 자리이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 한라산을 빼면 남한 땅에서는 최고봉이다. 남명 선생이 이 터를 잡은 가장 큰 이유는 천왕봉을 전망할 수 있는 지점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만큼 천왕봉에 대한 애착이 컸다. 물론 일반 학자도 천왕봉을 좋아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도시 생활 다 작파하고 산으로 온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 ‘귀거래사’를 입으로 읊기는 많이 읊었지만 이걸 실행에 옮긴 인물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선생은 작파를 하고 결단을 내려서 여기로 왔으니 그의 산에 대한 애착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환갑 나이에 모든 것을 털고 정리해서 여기로 이사왔다는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옛날 사람 환갑이면 아주 노인에 해당한다. 따라서 입산(入山)을 혈기로 결단을 내린 게 아니다. 아주 완숙한 경지, 노회한 경지에 이른 나이에 들어온 것이요, 터를 잡은 셈이다. 이 터를 보면 남명의 기질과 캐릭터가 드러난다. 자신이 흠모한 봉우리가 천왕봉이라는 것은 남명의 종교적 대상이었다고 보인다. 남명에게 천왕봉은 종교였다. 왜 종교였을까? 천왕봉과 같은 부동심, 가장 높게 우뚝 솟아 있으면서도 말이 없는 존재, 그 기개와 불언(不言). 남명이 산천재에서 천왕봉을 바라다보고 남긴 시가 있다.

‘請看千石鍾(청간천석종)/ 非大扣無聲(비대구무성)/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천석이 들어가는 큰 종을 보시오/ 크게 치지 않으면 울리지 않네/ 어찌하면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남명이 천왕봉을 커다란 종(鍾)에 비유한 점이 주목을 끈다. 천석의 쌀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종이라고 표현하였다. 종은 소리가 나게 되어 있다. 종의 특징은 소리이다. 천왕봉이 종이라고 한다면 무엇으로 이 종을 때려야 소리가 난단 말인가? 천왕봉의 정상은 물론 바위로 되어 있다. 이 바위를 어떻게 때려야 소리가 날 것인가? 그 비밀은 천둥번개에 있지 않나 싶다. 천둥번개가 이 천왕봉의 바위 암벽을 때리면 소리가 날 것 아닌가! 천왕봉을 하나의 거대한 종으로 보는 관점은 고대부터 지리산 도사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전수되던 하나의 암호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리산은 불교, 유교 이전에 도교적 체취가 강한 산이었다. ‘지리산에 상주하는 도사가 5000명이다. 계룡산에는 800명의 도사가 항상 머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계룡산의 몇 배인가? 6배가 넘는다. 그만큼 지리산은 도사들의 천국이었다. 도사는 유교의 선비보다는 탈속적이다. 도시보다는 산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사에 일정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불교보다는 좀 더 세속적이다. 머리를 기르고 있어서 언제든지 시중에 내려와도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불교 승려는 머리를 깎고 있어서 시장에 내려오면 바로 눈에 띈다. 유교와 불교의 사이, 그 중간 위치에 도사가 있다. 평소에는 숨어 살지만 유사시에는 역사의 무대 뒤편에서 작업을 할 수도 있는 존재가 도사이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지리산 도사들이 도력을 얻는 소의 경전이 바로 ‘옥추경(玉樞經)’이었다. 옥황상제의 ‘玉’ 자와 북두칠성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별인 ‘樞星(추성)’의 ‘樞’가 삽입되어 있는 경전 명칭이 주목된다. ‘옥추’라는 단어는 ‘우주의 중심’을 표시한다. 우주의 중심은 무엇인가? 바로 천둥번개, 즉 뇌성벽력신이었다. ‘옥추경’은 ‘뇌성보화천존(雷聲普化天尊)’을 모시는 경전이다. 천둥번개신을 모시고 이 천둥번개의 위력과 파워를 얻기 위한 경전이 ‘옥추경’이다. 고려 때까지는 이 ‘옥추경’이 제도권에서도 유통되었지만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완전히 지하로 들어가 무당이나 도사들 사이에서만 조심스럽게 암송되었다.

‘옥추경’의 특징은 주문에 있다. 주문을 열심히 외우면 천둥번개신으로부터 파워를 얻게 된다. 그 파워를 얻으면 미래를 내다보고, 삿된 귀신을 쫓아내는 힘을 얻는다. 도가의 옥추경파들이 가장 신봉하던 봉우리가 바로 천왕봉이었다. 가장 높은 봉우리였고, 가장 높은 봉우리에 천둥번개가 강림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천왕봉의 번개 에너지를 얻기 위하여 설치한 베이스캠프가 해발 1450m에 자리 잡은 법계사(法界寺)였다. 법계사는 매우 높은 해발이다. 법계사 앞에 혓바닥처럼 쭉 뻗어 있는 바위 암반을 문창대(文昌臺)라고 부른다. 천왕봉에 번개가 치면 이 번개 에너지는 튕겨져서 문창대에 도달한다. 문창대의 번개는 다시 스리쿠션을 때려서 법계사로 들어간다. 그래서 ‘옥추경’을 신봉하던 도사들은 천왕봉 밑의 법계사를 아지트로 삼았다. 말하자면 도가의 인물들 사이에서 천왕봉은 천둥번개 에너지를 섭취할 수 있는 안테나였던 셈이다. 번개를 중계방송해 주는 안테나.

남명은 유학자였지만 노장사상(老壯思想)과 도가에 포용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지리산 도사들과 자연스럽게 교류도 하면서 천왕봉의 천둥번개 비밀을 입수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산천재는 천왕봉에 내리치는 천둥번개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에너지를 받아서 최영경, 정인홍, 곽재우 같은 걸출한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결국 남명학파 사단은 임진왜란에서 왜적들과 목숨을 내놓고 싸웠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