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조용헌의 영지 기행_07

醉月 2012. 7. 23. 06:41

에너지 응집된 수양도량 琵瑟山(비슬산) 大見寺(대견사) 터

높은 곳에서 통찰사상 나와… 일연도 35년 머물며 <삼국유사> 구상한 듯

 

경상도 사람들의 기질을 가리켜 ‘태산교악’(泰山喬嶽)이라 표현한다. ‘태산처럼 떡 버티는, 또는 큰 산처럼 무뚝뚝한’ 성격이 많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태산과 교악은 어디인가? 경상도에 높은 산이 많지만 대구를 둘러싸고 있는 팔공산(八公山)과 비슬산(琵瑟山)이 아닌가 싶다. 두 산 모두 1,000m가 넘는다. 250만 명이 사는 대도시를 1,000m급의 고봉이 둘러싸고 있는 형국인데, 필자가 세계의 여러 대도시를 둘러보았지만 대구와 같은 산세는 없다. 대구는 ‘산악도시’라고 보아야 한다.


▲ 1 비슬산 정상 부근 1,000m 지점에 800평가량의 평평한 지형에 대견사 터가 있다. 터 뒤로 바위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한국에서 산 기운을 가장 직접적으로 강하게 받는 도시가 대구인 것 같다. 큰 산이 옆에 있으면 간(肝)도 크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구사람들과 술을 마셔 보니까 간 큰 남자가 많았다. 이 산악도시의 북쪽에 팔공산이 있고, 남쪽에 비슬산이 있다.

 

팔공산은 바위가 험하게 돌출되어 있어서 양기가 강해 남자에 비유할 수 있다. 비슬산은 팔공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드러워 여자에 비유할 수 있다. 대구의 아버지 산이 팔공산이라면 비슬산은 어머니 산이라고 하면 될까. 자식들 입장에서는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중요하다. 젖을 주고 밥을 먹여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기 때문이다.

 

풍수의 좌향론(坐向論)에서 보아도 남쪽이 더 중요하다. 인군남면(人君南面)인 것이다. 임금은 남쪽을 향해서 앉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남쪽이 따뜻하지 않은가. 대구 사람들이 ‘앞산’이라고 부르는 산도 비슬산 자락에 해당한다. 아침에 일어나 쳐다보는 산이 앞산이고, 이 앞산이 비슬산인 것이다.

 

팔공산은 양기 넘치지만 비슬산은 부드러워
비슬산 정상은 1,084m인데, 정상 아래쪽의 위치인 1,000m 높이에 자리 잡은 절터가 바로 대견사지(大見寺址)다. 고려시대에는 보당암(寶幢庵)이라 불렸고, 조선시대에는 대견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일제 때인 1917년에 총독부에 의해 강제로 폐사되었다고 한다. 왜 일제가 강제 폐사를 시켰을까 의문이다. 현재는 폐사지로 남아 있지만, 금년 하반기부터 달성군과 교구본사인 동화사(桐華寺)가 협력해 절을 복원하는 공사에 들어간다고 한다.

▲ 2 고려시대 요가수행 스님들이 바위에 ‘유가심인도(瑜伽心印圖)’를 새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바위 뒤에는 조그만 동굴이 있다.
필자는 이 대견사 터를 15년 전 무렵부터 여러 번 답사한 적이 있다. 첫째는 절터의 바위에 새겨진 ‘유가심인도(瑜伽心印圖)’를 보기 위해서였다. 암벽에 여러 겹의 둥그런 환(環)이 가슴과 허리 부분에 새겨져 있는 희한한 모양이다. 아마도 인체 내부의 차크라(chakra, 산스크리트어로 원 또는 바퀴: 에너지 중심을 의미) 모습을 표현한 듯하다. 참선과 호흡이 잘 되면 몸의 경락이 열리고, 이 열린 경락의 모습을 바위에 새겨놓은 것이다. 인도의 요가에서는 이를 ‘차크라’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산 중턱에 있는 유가사(瑜伽寺)가 원래 고려시대 유가종(瑜伽宗)의 본산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깊은 듯하다. ‘유가’(瑜伽)는 인도의 ‘요가’(yoga)를 한문으로 음사한 표현이다. 따라서 유가사는 고려시대 요가 수행을 하던 요가행자들의 본산이었고, 요가수행의 결과로 인체 내의 7개 차크라가 열린 모양을 비슬산 정상 부근의 대견사지 바위 암벽에 새겨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대견사지는 고려시대 스님들 가운데 요가수행의 고단자들이 머물렀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유가심인도’가 바로 그 증거이다.

▲ 1 비슬산 대견사 터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바위. 바로 그 앞의 넓은 평지에 대견사가 있었다.
대견사지가 지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고려 일연(一然,1206~1289) 스님과의 인연이다. 일연은 9세에 출가해 22세 때인 1227년 승과(僧科)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고려시대에 승과는 요즘의 행정고시, 사법고시처럼 고시의 하나였다. 고시에 장원급제한 일연이 초임지로 발령받은 절이 바로 비슬산 정상의 보당암이었다. 지금의 대견사지가 고려시대 보당암이었으니까, 22세의 팔팔한 수재였던 일연이 대견사로 부임한 것이다.

 

비슬산 일대는 일연이 자신의 인생에서 총 35년간 머물렀던 산이다. 일연은 비슬산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대견사는 특히 의미가 깊다. 승과 급제 초임발령지였으니까. 일연은 대견사에서 상당기간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한다.(일설에는 22년간 머물렀다고 함) 인생에서 가장 팔팔한 20~30대의 시절을 대견사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일연이 남긴 필생의 저술인 <삼국유사>의 뼈대는 이 대견사 시절에 구상된 것으로 본다. ‘영천(경북)의 4재(才)’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이자, <삼국유사>의 원문 토씨 하나까지도 그 오류를 밝혀낼 만큼 삼국유사에 정통한 문경현(前 경북대교수·79) 선생의 주장에 의할 것 같으면, ‘유사(遺事)는 비슬산에서 잉태하여 운문사(雲門寺)에서 낳았다’고 한다.

 

일연은 포산 이성조에 ‘내 일찍 포산(包山: 비슬산)에 살 때 두 스님의 아름다운 자취를 기록하여 써 두었기에 지금 아울러 지술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필자는 한국인의 정체성, 즉 원형심성(原型心性, Archetype)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책이 <삼국유사>라고 생각한다. 이 <삼국유사>는 하루아침에 쓸 수 있는 책이 아니고 수십 년간 자료를 모으고, 이야기를 채취하고, 현장을 답사하고, 조직적으로 스토리를 구성하는 힘이 있어야 쓸 수 있는 책이다. 그 골격이 비슬산 1,000m 높이에 자리 잡은 대견사에서 이루어졌다. 대견사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영지가 분명하다.

 

대견사는 산 정상 부근인데도 불구하고 평평한 지형이다. 터 뒤로는 바위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고, 바닥도 비교적 평탄하다. 터의 면적은 800평 정도 된다. 돌탑이 서 있는 자리에서 왼쪽 밑을 바라보면 돌로 쌓은 축대가 보인다. 이 축대가 명물이다. 지금부터 1200년 전인 신라시대 헌덕왕 무렵에 이 절이 처음 창건되었으니까 그 당시에 쌓은 것으로 본다면, 1200년 역사를 지닌 축대이다.

 

신라시대의 축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셈이다. 남미의 잉카제국 축대나, 일본의 오사카성 축대를 보면 매우 정교하게 돌 사이가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신라 축대는 돌과 돌의 배치가 불규칙해서 엉성한 것처럼 보인다. 작은돌, 큰돌을 삐뚤삐뚤 배치한 형태이다. 그 돌 틈 사이사이를 작은 돌로 메워 놓았다. 그러나 튼튼하다. 엉성한 것 같으면서도 살펴보면 튼튼하고 안정감이 있는 축대가 대견사 축대이다. 한국식 축대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는 의미 깊은 유물이기도 하다. 원래는 터가 좁았을 것이지만, 이 축대를 쌓음으로써 바닥의 터가 넓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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