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선불교 100년, 침묵의 천둥소리

醉月 2012. 7. 15. 10:53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불교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500년간 불교는 철저하게 배척되었고, 모진 탄압을 피해 스님들은 산으로 산으로 몸을 숨겼다. 처참하게 짓밟혔던 불교가 다시 민중들에게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경허 스님이 나타나면서부터였다. 돌림병으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생사生死의 도리를 깨달은 경허 스님은 부단한 수행을 거듭했고 1900년대를 전후해 영남과 충청, 호남 지역에서 닫혔던 선원의 문을 열었다. 선풍禪風이 다시 불기 시작한 것이다. 경허 스님은 혜월, 수월, 만공 등의 제자를 남기고 1912년 열반에 들었다.


경허 스님이 열반한 그 해, 성철 스님은 태어났다. 평생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지만 스님이 저잣거리에 던진 수많은 화두는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절친한 도반이었던 부산 묘관음사 향곡 스님과 백양사 서옹 스님도 같은 해 태생이다. 이 스님들은 봉암사 결사를 비롯한 흐트러짐 없는 수행으로 한국불교를 다시 꿈틀거리게 했다. 현재 제방에서 정진하는 대다수 스님들은 경허로부터, 성철과 향곡, 서옹으로부터 그 가르침을 이어받아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 그렇게 한국의 근현대 선불교禪佛敎는 2012년 오늘에 이르러 100년을 맞았다. 꼭꼭 닫혀 있는 선원禪院의 문틈을 통해 선사禪師들이 허공에 남긴 침묵의 천둥소리를 들어보았다.

 

깨달음의 자리, 좌복.
선사들은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수많은 날들을 좌복 위에서 온 몸을 던져 화두와 한판 대결을 펼친다. 깨달음의 자리에 다가갈수록, 마음에 그었을 수많은 번뇌의 선만큼이나 좌복의 주름도 하나둘 늘어간다.

  




죽비는 소리로 수좌들을 깨운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아야 할 때, 정진의 시작과 끝을 알릴 때, 한 철 동안 스님들과 함께 하는 죽비는 또 다른 도반이다.




잠겨버린 문.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숟가락 하나 꽂혀 있는 공양구供養口뿐이다. 몸에 착 달라붙어 있던 신발까지 벗어 던지고 수좌는 문 없는 문으로 들어간다. 90일 동안 처절하게 자신과 싸워야 하는 무문관無門關은 그래서 지옥이 되기도 하고 극락이 되기도 한다. 3년여 동안 무문관에서 살았던 한 수좌는 그곳에서 생명의 ‘무상함’과 모든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다고 한다.


“여름 어느 날엔가 공양구로 파리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파리가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해 며칠 못가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을 보며 인생이란 것이, 생명이란 것이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또 무문관 안에서 정진하는 수좌들을 위해 사중의 모든 대중들이 뒷바라지를 합니다. 옥바라지보다 더 힘들다고 합니다. 하루에 한 번이지만, 제 시간에 공양을 넣어줘야 수좌들이 정진을 잘할 수 있습니다. 모든 대중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정진하기 때문에 한눈을 팔 수 없습니다.”




수좌들이 포행을 나간 사이, 선방은 다시 고요에 빠졌다.
닫힌 문을 박차고 나와 세상에 깨달음의 노래를 들려줄 선사, 누구 없는가?

 

혜국 스님 인터뷰

1961년 해인사에서 일타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범어사에서 혜수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은 후 대승사, 봉암사, 칠불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십 안거를 성만했다. 1969년 해인사에서 20만 배 정진을 마친 뒤 오른손 세 손가락을 연비했으며, 이후 태백산 도솔암에서 2년 7개월간 생식과 장좌불와로 용맹정진했다. 이후 경봉 스님, 성철 스님, 구산 스님 회상에서 수행정진했다.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충주 석종사 금봉선원장으로서 수행가풍 진작에 전념하고 있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돌아올 오늘이라”
도道를 향해 걸어가는 선사의 삶

삶이 고달프다. 삼포세대라 불리는 젊은이들은 급기야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선망의 대상인 사회 저명인사와 연예인들도 힘겨운 삶으로 인해 자살까지 생각했다는 고백을 줄지어 쏟아놓고 있다.
그렇다면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참선에 매진하는 선사禪師들의 삶은 어떠할까.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지식 혜국 스님(65)을 찾아가 삶과 죽음의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을 물었다. 동안거 해제를 사흘 앞둔 충주 석종사 금봉선원에 투명한 겨울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선불교는 따로 있지 않다
-금봉선원에 방부들인 수행납자들(47명)의 한 철 공부가 잘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요즘 수좌들에게서 비교적 열심히 마음을 비우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입니다. 세상 공부의 진척 척도는 그릇을 얼마나 채우느냐에 맞춰져 있다면, 간화선 수행은 내 마음을 얼마나 비웠는가에 있어요.
비우고 또 비워 나중엔 비운다는 생각조차 끊어져야 합니다. 한순간의 진척보다는 평생 얼마만큼 지치지 않고 계속 애를 쓰느냐가 중요해요. ‘나’가 없어져버리는 날, 즉 성불할 때까지 비워나가야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근현대 한국불교를 이끌고 있는 중심에 선불교가 있습니다. 그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선불교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부처라는 사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부처님 말씀을 굳게 믿고 걸어가는 게 우리 선불교입니다.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불교가 한창 탄압받을 때, 참선수행하는 선사들이 선의 등불을 꺼뜨리지 않고 선맥을 이어왔어요. 그리고 선불교 안에 화엄, 법화, 공의 핵심이 전부 다 들어있습니다. 통불교로서 선종이 발전하며 한국불교를 이끌어온 것이죠.

-참선 수행의 근본 목적은 깨달음에 있을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요?
본래 부처로 돌아가는 걸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없던 세계가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자유로 돌아가는 것이죠. 내 마음 안의 번뇌망상을 화두로 바꿔, 텅 빈 허공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허공에 대고 침을 뱉어도, 먹물이나 똥물을 끼얹어도 절대 더럽혀지지 않아요.


-깨달음을 어떻게 사회에 회향해야 할까요?
흔히 ‘이 세상은 썩었다,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걸 자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썩은 적이 없어요. 세상은 항상 청정합니다. 다만 바뀌어야 할 게 있다면 우리 마음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근본 마음을 길들이고 수행하는 쪽으로 가려하지 않고, 이 몸뚱이 편리를 좇아 편안한 쪽으로만 가려 합니다. 깨달음의 사회화는 의식 개혁 운동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인류의 평화와 진정한 행복은 마음을 비우면서 온다는 진리를 늘 깨우쳐주는 것이죠.

번뇌망상이라는 진흙으로 부처를 조성하다

-성철 스님의 경책으로 20만 배를 하게 되셨는데요.
열세 살에 출가해 부처님 공부는 하지 않고 학교 공부만 하는 모습이 안타까우셨는지, 하루는 성철 큰스님이 해인사로 한 번 왔다 가라 하셨어요. 스물한
살때였죠. 큰스님 앞에 다가가 앉으니, ‘지금 글보고 공부하는 놈이 누구냐?’하고 물으셨는데 아무대답도 못했어요. 잠시 후 옆에 있던 물건을 하나 들어 보이셨어요. ‘보이느냐?’ ‘네, 보입니다.’ ‘무엇으로 보느냐?’ ‘눈으로 봅니다.’ 갑자기 불을 끄시더니 다시 물으십니다. ‘보이느냐?’ ‘깜깜해서 안 보입니다.’ ‘부엉이나 고양이는 깜깜해도 잘 보는데 너는 고양이만도 못하단 말이냐?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귀로 듣는 것이 아니며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몸뚱이는 내가 아니다. 꿈속에서 사는 삶은 그만 살고, 내가 누구인지 아는 공부를 하거라.’ 그러면서 ‘어억’소리를 지르며 ‘몇 근이나 되느냐?’ 물으시는데 대답을 못했죠. ‘21일 동안 하루 5천배씩 하면 니 스스로 답이 나올 것이다.’ 해서 절을 시작했어요. 10만 배에 가까워질 무렵, 절을 하다보니 나는 없어지고 오직 절하는 모르는 놈이 절을 하고 있는거예요. 그 체험을 큰스님께 말씀드렸더니, ‘조금 더 해라.’하셔서 10만 배를 더 하게 되었죠. 그때서야 비로소 이 몸뚱이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이생에 반드시 참나 를찾아야겠다’는 발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손가락 세 개를 소지공양하고 장좌불와하며 치열하게 수행하셨는데, 공부는 잘 되셨나요?
해인사 장경각에서 평생 참선의 길을 가겠다는 결의로 손가락을 불에 태워 동여맨 채, 태백산 도솔암에 들어갔습니다. 가자마자 장좌불와에 생식하며 살았어요. 그렇게 하면 참선이 상당히 진척 있을 줄 알았는데 맨 마찬가지인 겁니다. 별별 망상이 다 떠올라요.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 생각, 어머니 생각, 국수 먹고 싶은 생각 등 온갖 번뇌망상이 엄청나게 떠오르는 거예요. ‘내가 이런 망상이나 피우려고 이 심산유곡에 와서 눕지도 않고 밥도 안 먹으며 이 고생하는가’ 싶었지요.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정진에 전념하려 해도, 끊임없이 망상 떠오르고 아니면 졸고 앉아있는 거예요. 그 시절 엄청나게 방황했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땐 성철 큰스님 찾아 뵙고 경책과 조언을 구했지요. 다시 돌아와 또 하고 또 하다 보니 번뇌망상 다루는 법을 깨치게 됩니다.


‘번뇌망상도 과거전생에 내가 필요해서 스스로 잠재의식에 저금해놓은 내 소중한 인생이다. 미워하고 싸울 대상이 아니라, 감싸안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번뇌망상이라는 진흙을 가지고 부처를 조성할 수 밖에 없다. 번뇌망상을 화두로 바꾸어서 텅 빈 허공속으로 만드는 길, 이것이 바로 공부구나. 번뇌망상
이여, 어서 오게. 우리 한번 부처가 되어보세.’ 거기에서 공부라는 것은 절체절명의 필연임을 알게 된거죠. 공부를 안 할 수가 없어요. 내가 공부, 공부가 내가 되니 공부랄 게 없어요. 삶 자체가 바로 공부이기 때문에, 아침에 눈뜨면 같이 눈뜰 줄 알고 걸어다니면 같이 걸어다니게 되는 거죠. 가는 곳곳마다 덜어내고 덜어내서 더 덜어낼 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잘 사는 것이 영원히 잘 사는 길

-후학들을 지도하며 어려운 점은 없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홀로 걷도록 해주면, 걷지 않고 걸어 달라고 합니다. 참선은 철저한 자기 체험입니다. 우리 사회의 주입식 교육으로 인해, 어려움을 이겨내고 고통을 승화시키는 데 익숙하지 않으니 공부가 더디고 힘들어지는 거죠. 내가 도를 향해 걸어가는 게 아니라, 앉은 자리에서 도를 끌어당기려고 합니다. 이 길은 철저한 고독의 길이에요. 고독을 이겨낼 때 대자유가 오고, 이겨내지 못하면 우울증이 옵니다. 스승이 할 일은 홀로 걸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지 대신 걸어주는 게 아니에요.



-공부가 안 될 때는 어떻게 헤쳐나가야 합니까?
내 안의 번뇌망상은 수백 생 동안 쌓아온 잠재의식입니다. 금생에 공부해봐야 기껏 몇 십 년인데, 저절로 잘 될 리가 없어요. 공부가 안 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그릇을 키워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공부가 안 되는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 결코 퇴보하지 않으면 공부를 이뤄낼 것입니다. 전적으로 본인 노력의 문제입니다.

-올해 동안거는 전국 99개의 선방에서 2,400여 명의 수좌들이 정진했습니다. 스님께서 한창 제방선원에서 안거를 나시던 60년대 말 70년대 초보다 수행납자들이 10배 가까이 늘어났는데요. 앞으로 한국불교가 선수행 가풍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까요?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스님으로부터 성철 스님을 거쳐 근래의 송담 스님, 진제 스님까지 선맥이 내려올 수 있었다는 건 불교의 명맥을 잇게 한 보물 중 보물입니다. 남방불교엔 그곳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수행법이 있고, 티벳불교도 마찬가지로 티벳 지역에 맞는 수행법이 성하게 마련이에요. 우리나라에서 선맥이 지금까지 이어왔다는 건 간화선 수행이 우리에게 체질적으로 맞는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수행법을 받아들이더라도 우리의 뿌리를 기본적으로 살려나가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거쳐야 해요. 그러므로 선불교 뿌리 자체를 부정하고 다른 수행법만을 고집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옛 선사들이 가르쳐온 간화선법을 가능하면 지켜나가며 수행하는 것이 한국불교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행 따로 삶 따로 이분화되지 않고, 수행과 삶이 하나가 될 때 선불교의 대중화와 세계화가 이뤄질 것입니다.

-일각에선 간화선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가령 수행을 점검해주는 스승 부재, 깨달음의 신비주의, 하심下心부족 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일단 그러한 비판은 근거가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겠죠. 비판이 있다면 받아들여서 고쳐나갈 일이지, 비판 자체를 거부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공부 점검해줄 스님이 없다는 데는 다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점검해줄 스승이 없는 게 아니라 점검 받으려는 스님이 없는 건 아닐까요.


송담, 진제 스님 두 분만 해도 점검 받으러 찾아오는 스님들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드리지 못하고 삶으로 응용 못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선사들이 주로 산 속에서 수행에 전념하다보니, 현대 사회의 복잡한 일들을 미처 헤아리지 못해요. 간혹 동문서답하는 것처럼 본질에서만 이야기하지 직접 아픔을 어루만져주지 못하고 있어요. 이러한 하심은 우리 선사들이 앞으로 배우고 키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경쟁도 심화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다들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삶은 더욱 팍팍하고 고단해져갑니다. 지혜롭고 행복하게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만족을 알 때 행복을 알게 됩니다.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자꾸 채우려고 하면 절대 행복은 오지 않아요. 이제라도 마음농사를 잘 지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자가 됐다는 것은 행운 중의 행운입니다. 우리는 모두 완전한 부처예요. 다만 번뇌망상으로 내가 조금 더럽힌 것뿐이니, 그것만 닦아내면 됩니다. 내가 부처니,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각자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내가 부처이듯 상대방도 부처임을 인정하고, 오늘
하루를 잘 사는 것이 영원히 잘 사는 길입니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돌아올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아, 1912년! 그리고 100년
근현대 불교에서 얻은 것과 잊은 것, 그리고 잃은 것

조선의 불교는 일제의 병탄에 밀려 바람에 몸이 쏠리듯이 꺼져갔다. 살아남으려는 온갖 방편이 와글거리는 속에서 선사들은 맹렬한 화두 참구를 통해 세상을 관통하는 가파른 길을 찾아나갔다. 버거운 날들이 쏟아지는 속에서 그들은 낮은 포복으로 근대를 타고 넘었다.



선불교 100년을 지켜온 선사들
조선의 근대는 가혹했다. 1912년 1월부터 조선의 표준시가 폐지되고 일본의 중앙표준시가 적용되었다. 총독부는 조선민력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민간에 배포했다. 식민지 백성들은 제국의 초침에 맞춰 일어나고 일했다. 전국에 걸쳐 토지조사사업도 실시되었다. 조선 땅은 국유화되는 절차를 거친 후에 일본인 회사와 지주들에게 헐값에 불하되었다.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먹을 게 없는 이들은 들짐승처럼 산에 올라 소나무 껍질을 벗겨 그 사이를 긁어냈다. 그런 다음에 집에 들고 와서는 솥에 삶아 두드려 부드럽게 목화같이 만들었다. 안 그러면 떫어서 먹질 못했다. 어린아이들은 흙을 먹었다.


 

일제는 한일병합 초기부터 조선말의 맞춤법 통일안을 주도면밀하게 진행해나갔다. 버젓이 제 나라 글자를 두고도 한자를 쓰며 중화의 변방에 있던 조선을 그들은 함부로 가엾어 했다. 1912년 4월에 총독부 학무국은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펴내어 말과 글조차 통치했다. 1912년에는 대한제국의 사법제도도 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의 3심제도로 바뀌었다.

 

명덕신벌明德愼罰을 지향했던 왕도정치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의 법치로 다급하게 바뀌었다. 사법기관의 구성과 법관 인사문제 등이 모두 총독의 재량에 맡겨져 사법권의 독립은 무시되었다. 이러한 가혹한 시대상황 속에서 1912년을 치열하게 살아낸 선사들, 바로 그들이 한국 근대불교의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경허, 백용성, 박한영, 만공, 한암, 만해 같은 이들이 많이 알려진 이들이다. 이들외에도 있다. 무형문화재 단청장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석정 스님은 우리나라의 드러나지 않은 숨은 선지식으로 호남의 학명 선사와 영남의 혜봉 선사를 꼽았다.

 
백학명(白鶴鳴, 1867~1929) 스님은 출가한 지 25년째 되던 1912년에 월명암에서 공안집을 읽다가 문득 “만법과 더불어 짝을 짓지 않는 자, 그는 누구인가”라는 글귀에서 막혀 더 읽어 내지 못했다. 만법과 짝하는 것이 죄다 망념이라면 진심은 그 너머 어디엔가 있을 텐데, 진심을 진심이라 하면 그 또한 망념에 불과할 것이었다. 마음이 갈팡질팡할 때마다 그는 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만해 스님이 변산반도의 월명암에 기거 중이던 학명 스님을 찾은 때는 1923년 봄이었다. 두 사람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장대 위에 꼿꼿이 서서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는 심정을 토로했다. 만해 스님이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학명 스님은 하산했다. 그는 퇴락할 대로 퇴락해 있던 내장사內藏寺를 일으켰다.



 


선원을 새로 짓고 흩어져 있던 부도浮屠를 모아 부도전에 안치했다. 황무지를 개간해 전답 80두락을 일구었고 벼 40여 석을 수확할 만한 농토도 확보했다. 1912년에 출생한 이들은 한국 근대불교의 2세대에 해당되는 이들이다. 먼저 현대 불교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성철 스님이 바로 이 해에 태어났
다. 경허-혜월로 이어지는 법맥을 계승한 향곡 스님도 같은 해에 태어났다. 또 임제의 ‘참사람(眞人)’을 역설했던 백양사의 서옹 스님 역시 1912년생이다.


1912년생들은 광복과 6.25동란으로 이어지는 거친 세월을 살아냈다. 불교 내부적으로는 1950년대 중반부터 진행되어 6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이른바 불교정화운동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은 이승만 정권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다급하여 강렬했고, 쓸어버려야 할 것과 남겨둬야 할 것을 가릴 틈도 없이 정화는 진행되었다. 그 결과 한국불교는 통합종단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불교의 근대화 과정에서 축적된 유산의 절반 이상이 묻혔다.
이승만 정권과 유신정권의 지원을 받은 무리한 정화는 이후 불교가 정치권에 끌려다니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형국은 군사정권 시절 내내 이어졌다. 1990년대 중반, 사회 전체의 민주화 바람에 힘입어 조계종단 내부에서도 자정과 쇄신의 기류가 형성되었고 그 결과 개혁종단이 출범했다. 하지만 개혁종단 역시 정치권에서 쉬 자유롭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렀다.


자성과 쇄신은 사무침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 불교계의 화두는 다시 자성과 쇄신이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공중파를 통해 불교계 내부의 문제점이 보도되는가 싶더니, 얼마 전 봉은사 문제가 부각되면서 조계종단과 정치권의 불미스러운 밀월관계가 폭로되었고, 정치권력에 대한 불교계의 이중적인 태도가 드러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조계종단에서는 2011년 6월에 종단차원에서 ‘자성과 쇄신의 5대 결사’를 전담할 결사추진본부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종교평화선언이라는 것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종교평화선언은 정작 불교계 내부에서 먼저 문제가 되고 있다. 처음엔 화쟁위원회와 일부 불교계 인사들의 의견차이인가 싶더니 곧 화쟁위원회와 종정스님 간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번졌다. 또 종정예경실의 음모론이 제기되는가 싶더니 급기야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의 기조에 맞춘 것이라 는 얘기까지도 들린다. 자성과 쇄신은 첫 단추부터 뭔가 잘못 꿰어지고 있다.


2044년에 이르면 조계종단의 신규출가자는 21명에 그칠 것이라는 충격적인 연구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출가자 숫자가 그러할진대 불교신자는 늘어날까. 탄압은 종교를 사라지게 하지 못한다. 종교는 대개 자진自盡한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고,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종교를 찾지 않게 되고 종교는 마침내 자진하고 만다. 만해는 일제강점기에 조선불교계의 개혁방향을 두고, 어쩔 수 없어서 고치는 것이 아니라 고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사무침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봤다. 이 사무침을 바탕으로 해서 안으로는 탄력적으로 계율과 청규를 정비해 나가고, 밖으로는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면서 불교 본연의 가치를 추구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종교는 오직 백성들의 눈치만 봐야 한다는 것이 만해가 말한 ‘대중불교’의 의미이다.

길에서 길을 찾았던 심방尋訪
송만암(宋曼庵, 1876~1957) 스님은 대강백이면서 선농일치를 실천한 선승이었고 호남고불총림을 건립한 주역이었다. 정화 과정에서 비구와 대처 간의 갈등이 깊어졌을 때 그는 오늘날의 총무원장격인 교정敎正직에 있었다. 그는 승가체제를 교화승과 수행승으로 양분하는 점진적인 개혁을 제안했으나 끝내 받아 들여지지 않자 뒤돌아보지 않고 백양사로 내려갔다.


심방尋訪을 개신교의 전도방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 근대 불교계에서는 일반적인 일이었다. 이혜봉(李慧峰, 1874~1956) 스님은 본래 고종 시절에 정4품 관직에 있었으나, 일제의 강점 과정에서 피신하여 상주 남장사에서 출가했다. 전국비구니회 회장을 지낸 광우 스님이 그 분의 일점혈육이다. 해외 포교로 널리 알려진 숭산 스님이 그의 손제자이며 근대의 대표적 불교학자인 김동화 박사 또한 그의 제자이다. 또 관응 스님과 석정 스님 등도 그에게서 사사했다.


혜봉 스님이 쓴 일기 형식의『혜봉선사유집』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중에서 1930년 2월경에 있었던 일을 살펴보면, 심방이 근대의 선사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달 17일 아침에 남장사를 출발하여 읍내 포교당으로 내려온 그는 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를 때운 후에 구미 일대의 사찰과 신도의 집을 차례로 방문했다. 어떤 신도의 집을 정해 그 곳에 며칠씩 머물면서 근동의 신도들을 모아 다화茶話를 나누는 형식으로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심방을 마치고 남장사로 돌아온 날은 3월 2일 정오쯤이었다. 그 날 일기에는, “점심 후에 피곤을 견디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와 지쳐 누웠다가 문득 일어나 창을 여니 이미 서산이 붉었다”고 적혀있다. 이렇게 근대의 스님들은 보름 가까이 출타하여 꼬박 걸어 다니면서 신도들을 심방했다. 광복과 정화를 거치면서 불교계는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역사적 명분에 힘입어 이판승 중심으로 급속히 재편되었다. 스님들은 더 이상 심방하지 않았다.




장대 끝에서 기꺼이 한 발자국 내딛는 이 누구인가
선禪의 본령은 전위前衛이다. 익숙한 것에 대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전면적이고 지속적인 회의가 선의 본령이다. 말(言語)에 대한 무한 부정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듯이, 선은 끝없는 자기반성과 부정 속에서 비로소 온전해진다. 그런데 전위에 서는 게 생각처럼 잘 안 된다. 왜 안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왜 두려울까.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라는 중국 송나라 때 선사가 있다. 선을 한 번쯤이라도 넘겨다 본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간화선의 주창자이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 “요즘 배우는 이들이 얻는 바가 없는 까닭은 병이 어디에 있기 때문인가. 바로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스스로 믿지 못하면 조급한 마음에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온갖 것에 끄달려 돌고 돌 뿐 제 안에서 비롯되지 못한다. 만약 네가 바깥에서 뭔가를 구하려는 마음을 그만 둘 수 있다면, 곧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으리라.”


피신할 곳을 찾고 기댈 곳을 염두에 두는 전위는 이미 전위가 아니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가 선의 본령이다. 적어도 일제강점기의 선승들은 장대 끝에서 기꺼이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만해 스님과 가까웠던 이들은 그가 굶어 죽었다고 증언한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겉보리 한 줌 배급받을 수 없던 시절에, 그는 권력 눈치 보지 않고 굶어서 죽는 길을 택했다. 일제 강점기의 선사들은 선의 본령과 수행자의 길을 그렇게 지켜냈다.


 

석가모니의 심정으로 한국불교를 일으킨 선사


덕숭산에 인연을 맺어 출가한 사람들에게 경허 스님은 자상하고 따뜻한 할아버지 같은 존재로 무척이나 친숙한 분이다. 수덕사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한국불교의 전통과 덕숭총림의 가풍을 논할 때에는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으로부터 시작한다. 세월이 빨라 벌써 경허 스님께서 열반하신 지 100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수덕사 대중들에게는 그리 긴 시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연년 행사와 일상생활 중에 경허 스님이 늘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덕숭산에만 있는 ‘노스님’
덕숭산에서는 어른스님께 ‘큰스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노스님’이라고 한다. 아직 수덕사가 지켜오고 있는 소박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가진 호칭이다.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께도 마찬가지로 ‘노스님’ 호칭을 사용한다. 불교 암흑의 시대를 밝힌 대선지식들께서 개척한 도량에서 그 법맥을 이어가는 제자와 법손들이 부르는 호칭으로는 ‘노스님’만한 것이 없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4~5대에 이르는 먼 관계일 수도 있지만 경허 노스님이란 호칭이 이런 물리적 거리를 사라지게 한다. 그래서 감히 ‘나의 스승 경허 스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산중의 스님들이나 재가불자들이 자주 ‘큰스님’호칭을 사용하고, 근래에는 크나 작으나 너나 할 것 없이 ‘큰스님’이라는 호칭이 범람하는 형편이라 노스님이란 호칭이 더욱 의미가 새롭다. 이렇게 소박하게 노스님이란 호칭을 사용하지만, 덕숭산의 수행자들에게 경허 스님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가슴에 가득 차고도 넘친다. 바로 한국불교의 중흥조이며 근현대 간화선의 대종장으로 오늘의 한국불교가 있게 한 분이 경허 스님임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세간에는 경허 스님의 기행과 무애행에 대한 일화들이 흥미 위주로 전해져서 선사禪師의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면이 적지 않다. 이제라도 경허 스님에 대한 치열한 구도자와 선불교 계승자로서의 시각과 한국불교 증흥조로서 스님의 위상에 걸맞은 연구와 접근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사무치는 존경심으로 정진하는 후학들
오늘의 대한민국이 김구, 안창호, 신채호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상과 실천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하듯이, 오늘의 한국불교도 경허, 만공 두 선사의 깨달음과 전법전등이 바탕이 되었음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경허 스님께서 사시던 시대는 조선 500년 불교 억압과 탄압의 긴 어둠 끝에 선맥은 이미 끊어 졌었다. 경전을 가르치던 강사였던 분이 전염병이 창궐하는 마을에서 새로운 발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 홀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경허 스님의 오도송은 이런 시대적 상황과 깨달은 분의 외로움에 대한 깊은 탄식이 담겨 있다.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네. 의발을 누구에게 전할꼬?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리오.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네!”


마치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과 전법에 대한 고민의 순간을 접하는 느낌이다. “탐욕과 분노에 불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법을 깨닫는 일이 쉽지 않다. 이 법은 세간을 거스르고 미묘하고 난해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욕망의 격정에 빠진 자 암흑으로 휩싸인 자를 깨닫게 하기는 어렵다.”
범천의 권청에 의해 법을 설하기로 결심하기까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는 홀로 깨달은 자의 깊은 외로움과 크나큰 막막함을 느
끼셨을것이다.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네.”라며 탄식하던 경허 스님의 심정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심정과 다르지 않았음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경허 스님은 서산 천장암에서 6년간 깨달음 뒤의 공부를 끝내고 부석사浮石寺와 개심사開心寺등 충남 일대를 왕래하면서 전법교화 활동을 하며 크게 선풍禪風을 떨치고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등에 선원을 개설하고 한국불교의 선풍을 크게 진작하셨다.

 

선사께서 쓰신 글들을 보면 말미에 항상 ‘호서귀납 경허 성우湖西歸衲鏡虛惺牛’라는 글을 쓰신 것을 발견할수 있다. ‘호서로 돌아가는 승려’라는 뜻이다. 당신께서 주석하시던 천장암, 부석사, 개심사를 염두에 둔 것이다.

 

지금도 당신을 가슴에 담고 노스님으로 생각하는 법손들이 살아가고, 당신 법의 계승자 만공 스님께서 뿌리를 내리고 법을 펴신 덕숭총림 수덕사가 당신이 머무시는 도량이다. 이 도량에 사무치도록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의 길을 따르는 제자들이 오늘도 정진의 나날을 지내고 있다.

 

인생사와 세상사에서 보여 주셨던 깊은 혜안


멋모르고 친구 따라 백련암에 올라 성철 스님을 친견했다. 해맑은 얼굴에 이글거리는 형형한 눈빛은 마주 쳐다볼 수 없는 선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평생 지켜갈 좌우명 주실 것”을 말씀드렸더니, “절 돈 만원을 내 놓으라.”고 하셨다. 3,000배가 아닌 1만 배의 절을 24시간 이내에 부처님께 올리고 오라는 처분을 내리신 것이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서 백련암으로 출가하여 40여 년에 이르고 있다.

22년간 시봉하며 배운 가르침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에 이르니 나에게 는 백련암 출가 만 40년이 되는 해가 되었다. 1972년 1월에 백련암으로 출가하여 큰스님이 열반에 드실 때까지 가까이서 22년을 시봉하였으니 크나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공양주 소임 살 때인 행자시절 얘기다. 하루는 어느 중년의 스님이 백련암에 점심시간이 지나 올라 오셔서 공양을 차려드리게 되었다. 10여 분쯤 지났을 무렵 그 스님이 마루 끝에 나오셔서 “이 절 공양주가 누구냐?”고 소리치며 공양주를 찾는다고 해서 다급히 달려가 “제가 공양줍니다.”하고 절을 올렸다.

 

스님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뭉치를 내 발등 쪽으로 내동이치시면서 노발대발했다. “내 이빨 물어내라, 이놈아!” 뭉친 종이가 터지며 씹던 밥알들이 이리저리 튀어 올랐다. 왠지 서러운 생각이 밀려들며 ‘내가 절 떠나면 그만 아이가!’하는 마음뿐이었다. 저녁 예불을 마치니 큰스님께서 찾으신다는 전갈이 왔다. “낮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그래, 이빨 물어줬나?” “절 생활을 잘 익히지 못하고 주변에 불편만 끼치고 있으니 하산해야 되지 않겠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내 이빨은 어떻게 물어줄래? 나도 니 밥 얻어먹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큰스님께서도 내가 지어 드린 공양을 드시며 더러 돌을 씹고 계셨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뒤늦게 알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는 심정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으로 공양주 소임 더욱 충실히 하겠습니다.”



3,000배의 또 다른 힘
마음을 잡고 행자 공양주 생활을 열심히 마쳤다. 그런데 스님 열반에 드신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더 큰 일을 깨닫게 되었다. 그럼 큰스님께서는 평생 잘한 공양주 공양은 몇 개월 드시지 못하시고, 새로 온 공양주가 숙달될 때까지 어느 날은 돌을 씹으셨다가, 어느 날은 죽 밥을 드셨다가, 또 어느 날은 덜 퍼진 생쌀을 씹으신 날도 비일비재하셨겠구나, 하는 뒤늦은 깨우침이었다.

 

바깥에서는 종정스님으로 계셨으니 모두들 호강하신 줄 아시는데 현실에서는 선머슴아들이 해 올리는 공양을 드시기가 힘드셨을 터이다. 그런데도 겉으로는 별일 없으신 듯 보내신 세월들을 무어라 참회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큰스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오는 신도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부처님께 3,000배 하고 보자.”고 하셨다. 또 “내 상좌는 해인사 주지나 삼직 소임 등을 살지 않고 말사 주지로도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대중에 공표하시고 방장方丈직을 수행하셨다.


누구에게나 3,000배라는 고리를 설치함으로써 권력이나 금력, 사이비신도들이 큰스님 주변에 쉽게 가까이 할 수 없는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직계상좌들을 해인사 요직에서 멀리 있게 함으로써 요새 흔히 말하는 친인척 관리를 철저히 하신 셈이 되었다고도 본다. 인생사와 세상사에 깊은 혜안을 가지시고 당신 주변을 철저히 관리해 오셨다는 것을 이제 와서야 알아채고 새삼 탄복하고 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같지만 아무나 지켜갈 수 있는 원칙이 아니지 않을까? 작년에 지상에서 치열히 논쟁했던 ‘대승비불설’이나 ‘남전비불설’등의 결론을 큰스님께서는 40, 50년 전에 이미 말씀하셨던 모습을 BTN 성철 스님 법문에서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돈점논쟁도 큰스님께서는 결론 내리신 지 오래인데, 보조 국사의 수심결적 점수론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저간의 사정이다. 부처님과 육조 스님의 근본 생각을 바로 깨치는 길에 많은 이들이 동참하기를 큰스님 탄신 100주년을 맞아 염원해 본다.

 

바람찬 날에 핀 꽃, 봉암사
한국의 ‘특별선원’ 봉암사에 가는 날이면 괜스레 마음이 고요해진다. 목적이 취재든 참배든 마찬가지다. 동안거 해제 다음날 일찍 길을 나섰다. 언제나 그렇듯, 절 입구 관리사무소에 도착하니 거사님이 나와 “어떻게 오셨냐?”고 묻는다. “수좌首座 적명 스님을 친견하러 왔다.”고 하자 단단하게 묶여있던 ‘출입통제선’이 내려진다. 봉암사는 1982년 조계종립 특별선원으로 지정된 이후 1년에 딱 한번 부처님오신날에만 대중들에게 문을 열어줄 정도로 ‘오직 정진’만 하는 도량이다.




납자衲子들의 영원한 고향
1947년 성철 스님 등이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며 3년여간 진행한‘결사結社’이후 봉암사는 납자衲子들이 꼭 한번쯤은 살아보고 싶은 ‘영원한 고향’으로 자리 잡았다. 봉암사에서 정진하지 않고서는 ‘명함’도 내밀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봉암사의 대소사에는 많은 스님들이 자기 일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힘을 모은다.
87명의 선객禪客들이 태고선원 큰방인 서당西堂과 성적당惺寂堂, 남훈루南薰樓에서 3개월 동안 화두와 한판 대결을 펼쳤던 봉암사 경내는 고요했다. 남
훈루 6시간, 서당 10시간, 성적당 14시간 등 차별화된 정진 시스템으로 스님들은 동안거를 보냈다.



대웅전에 들러 참배한 뒤 적명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동방장東方丈실로 갔다. 스님은 안거를 마친 한 스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결제結制와 해제解制에 대한 소감을 나누는 듯 대화는 유쾌했다.
대화가 끝나길 기다린 뒤 스님에게 ‘봉암사에 대한 몇 말씀’을 청했다. 적명 스님은 조계종 원로의원 고우 스님과 함께 선원 최고의 어른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영천 은해사 기기암 선원에서 주석하다 봉암사 대중들에 의해 2009년 2월 봉암사 수좌로 추대됐다. 대중들은 ‘조실祖室’로 추대했으나 스님은 한사코 ‘수좌’로 살겠다고 해 ‘조실 격 수좌’를 맡고 있다. 당시 동안거 해제 법회에서 적명 스님은 “수행을 위한 외적인 불사가 이제 원만하게 마무리된 만큼 ‘내적 불사’에 매진해야 한다.”며 종립선원으로서의 위상을 재정립하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3년간 딱히 한 일이 없어서, 뭐라 말씀드릴 게 없어요.” 스님은 미소로 말문을 열었다. 그렇지만 봉암사는 스님이 수좌로 온 이후 ‘특별선원’의 자리를 확실히 지키고 있다. 스님은 안거가 진행될 때마다 매월 한차례 법문을 한다. 참선의 구체적 방법에서부터 정진 도중 일어날 수 있는 장애를 물리치는 방법 등에 대해 자세하게 풀어준다. 또 동방장실 문을 항상 열어둬 납자들이 언제라도 찾아와 궁금한 것을 물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여느 선원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대중들과 함께 선방에 앉아 정진하는 것은 물론이다. 지난 동안거에는 올해 하안거부터 적용할 봉암사 내규內規를 만들어 수행가풍을 확고히 했다. 내규에는 ‘철저한 대중공의 원칙 고수’, ‘전대중의 울력 의무화’등을 명시해 놓았다.

“젊은 시절 봉암사에서 10여 명의 대중들이 같이 산 적이 있어요. 지금처럼 도량이 정리되어 있지도 않았어요. 여느 시골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조그만 사찰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떤 스님은 밭에서 김을 매고, 어떤 스님은 마루에 앉아서 바둑을 두고, 어떤 스님은 방에 앉아서 참선을 했습니다. 그러나 스님들은 서로에 대해 아무 말도 안했어요. ‘무한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비 스님은 당시를 ‘꿈 같은 시절’이었다고 말할 정도예요. 그때처럼 대중들이 서로를 믿고 탁마하는 도량으로 봉암사를 가꾸고 싶은 생각입니다.”

한국불교의 심장
적명 스님은 결제 때 대중이 오면 ‘최소 세 철에서 여섯 철 정도를 봉암사에서 살아보라’ 당부한다고 한다. 스님은 이 기간 동안 선禪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
으며, 또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단언했다.
“생사生死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선’에 있습니다. 진정한 대자유를 누릴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머리로 생각하고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체험을 하면 확신이 듭니다. 이를 위해 반드시 부처님 가르침과 선에 대한 확고한 믿음大信心이 있어야 해요. 이렇게 살면 가슴에 ‘수좌’라는 도장을 찍을 수 있을 것입니다.” 스님은 ‘참선이 목숨 걸고 해볼 만한 일’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렇다고 불교와 선이 깊은 산중에 처박혀 있는 것에도 단호히 반대했다. 최근 불교계에 제기되고 있는 ‘세상과의 괴리’지적에 대한 답도 내놓았다.



“선이 사회에 줄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어요. 두 가지 정도로 보는데, 첫째는 선정禪定이고 둘째는 깨달음입니다. 선정을 통해 사람들은 특별한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깨달음을 통해서는 나와 네가 둘이 아니不二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거죠. 이렇게 되면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이고 아무
런 시비와 분별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훗날 우리사회가 이렇게 된다면 그 중심에는 부처님께서 전한 무아無我와 연기緣起의 가르침이 있을 겁니다.”
봉암사는 2월 22일부터 한 달간의 산철결제에 돌입했다. 해제 기간이지만 정진에 결코 휴식은 없기 때문이다. 적명 스님 역시 대중들과 함께 정진한다. 요즘 선지식善知識이 없다고 난리다. ‘선지식 아닌 게 없다’는 조사祖師들의 가르침에도 ‘남 탓’만 하는 풍토는 여전하다. 그러나 이제 봉암사 일주문에 들어서면 이런 말도 할 수 없게 돼버렸다. 스승 적명 스님과 스승을 믿고 정진하는 90여 납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람찬 날에 핀 꽃, 봉암사는 이렇게 한국불교의 심장으로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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