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한의학의 원류를 찾아서_05

醉月 2012. 7. 24. 11:50

明代 대표 의학자 장경악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한다. 참혹한 전쟁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역사, 정치, 경제, 문화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한의학적으로는 당시 선조의 어의(御醫)였던 허준(許浚, 1539~1615)이 활약하던 시기로, 임진왜란 후 평생의 경험과 연구를 집대성해 동의보감을 편찬한다. 조선에 허준이 있었다면 비슷한 시기 중국 명대에는 장경악(張景岳, 1563~1640)이 있었다.


당시 명나라 군대를 이끌던 총지휘관 송응창(宋應昌)의 젊은 참모 중에는 훗날 명의와 대의학자로 이름을 날린 장경악이 속해 있었다. 어쩌면 허준과 장경악은 서로 마주쳤을지도 모를 일로, 이들은 격변하는 역사 속에 각자 의학의 길을 걸으며 일가를 이룬다.


그 시기는 장경악의 짧은 무인 생활 중 한 장면이자, 출세와 공명의 뜻을 접고 의도(醫道)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된 때이기도 하다. 전쟁의 참혹함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장경악이 어떤 인물이며 어떤 업적을 남겼던 것일까?

 

장경악은 이름이 장개빈(張介賓)이며 자는 회경(會卿), 호가 경악(景岳), 별호(別號)는 통일자(通一子)이다. 명나라 말기 회계(춘추(春秋) 시대 저장(浙江) 성 동쪽에 있던 도시) 사람이다.


그가 무인으로서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은 그가 무인 가문에서 태어난 것과 관련 있다.

 

장경악의 조상은 주원장(朱元璋)을 도와 명조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주원장은 훗날 장씨 일족에게 식록(食祿) 1000호(千戶)를 봉(封)하고 장(張)씨를 소흥위(紹興尉)의 지휘사(指揮使)로 임명했다. 세습직이었다.


장경악은 어릴 때부터 병법에 관심이 많았고 유가(儒家) 경전도 두루 읽었다. 아버지 장수봉(張壽峰)은 총명한 장경악에게 큰 기대를 걸고 그가 13세 되던 해 북경으로 같이 올라간다. 천자가 있는 곳에 살면서 장경악이 대성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 때 만난 인연이 북경의 명의 김몽석(金夢石)이었다. 장경악은 김몽석을 스승으로 모시고 의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을 배운다. 북경의 호족과도 어울리며 식견을 더욱 넓혔으며 특유의 호탕한 기질을 더 강하게 키운다.


김몽석은 과거(科擧) 시험에 필요한 팔고문(八股文)을 가르치는 대신 선대의 지혜가 담긴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을 가르쳤다. 비록 벼슬길에 가깝지 않지만 여기에는 우주의 이치와 인륜이 담겨 있다. 이 때 쌓은 탄탄한 학문적 기초는 훗날 장경악이 주옥같은 저서를 짓는 데 밑거름이 된다. 그의 저서들이 하나같이 이론이 논리정연하고 명백한 것은 그의 성장 배경과도 관련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상류 사회에는 이학과 도교 사상이 성행했다. 장경악은 역학, 천문, 성리학, 음률, 병법에 통달했으며 의학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장경악은 이후 막부에 입대해 동북 지방을 돌아다녔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 외에도 유관(榆關, 지금의 산하이관)과 봉성(鳳城, 지금의 랴오닝 펑청현)과 압록강 남쪽에도 족적을 남겼다. 당시 북경의 이족이 일어나, 요서의 정세가 어지러웠다. 수년간의 무인 생활 후 염증을 느끼고, 이후부터 벼슬길에 관심을 끊고 평소 뜻을 두던 의술에 매진한다.


그의 명성은 짧은 시간 안에 퍼졌고 의성(醫聖)으로 불리는 한나라 명의 장중경(張仲景)과 금·원나라 명의 이동원(李東垣)의 재림이라는 말도 듣는다. 57세 되던 해 장경악은 남방으로 돌아가 향년 78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임상 진료와 저술 활동에 매진한다.


현재 한의사들은 동의보감 외에도 장경악이 남긴 저서를 즐겨 본다. 청나라와 조선 말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학설과 연구가 많이 있었지만, 현재 한의학의 기틀의 상당 부분은 이미 명대와 조선 중기에 모양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경악의 대표적인 저서는 한의학의 원전인 ‘황제내경(黃帝內經)’을 가장 체계적으로 재해석했다는 평을 듣는 ‘유경(類經)’이 있다. 황제내경의 내용을 12가지 유형으로 나눠 원문과 주석을 달았다. 역대 의가들이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같은 해 ‘유경도익(類經圖翼)’과 ‘유경부익(類經附翼)’을 다시 편찬해, 유경에 대해 자세한 해석과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고 그림을 통해 상세히 설명했다. 유경도익은 11권으로 운기, 음양오행, 경락경혈, 침구의 조작 등 그림을 그려 설명했다. 유경부익은 4권으로 역학, 고대 음률과 의학과의 관계를 깊이 다뤘고 자신의 의학 이론을 정립해 서술했다.


한의학의 근간을 이루는 이론은 상당 부분 금나라와 원나라의 4학파를 지칭하는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에 의해 완성됐다. 하지만 시대별로 음양과 질병, 치료법이 달랐기에 이론과 학설도 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장경악은 사대가의 학설에 해박했으며, 풍부한 임상 경험을 통해 시대 상황에 맞는 온보(溫補) 학설을 주창했다. 그의 학설은 사대가의 학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역할을 했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의 처방이 널리 쓰일 정도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장경악이 이룬 업적에 비해 한국에서 익히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허준과 비슷한 시대의 인물로 허준의 역작 동의보감에 장경악의 학설과 처방이 실릴 수 없었던 이유가 크다.


허준은 장경악 이전의 의가들의 처방과 이론을 연구하고 동의보감을 집필하는 데 활용했다. 하지만 동의보감의 요약본으로도 불리는 의서로 후대에 편찬한 방약합편에는 장경악의 처방이 일부 들어가 있다. 아마도 조선 중기 이후 장경악이 조선에 알려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장경악의 진단법과 처방은 현대 중의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각에서는 장경악의 진단방법이 현대 중의학의 진단 기준의 70~80%를 결정했다는 주장도 나올 정도다. 처방도 아직까지많이 쓰이고 있어서 중의학 처방의 60%는 장경악 처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장경악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학풍을 추구했고 과감하고 분명한 논조로도 유명하다. 비슷한 사례는 체질의학의 창시자인 조선 후기 이제마(李濟馬)가 있다. 이제마는 무인 출신으로 기존의 학문을 참고하되,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면서 사상 의학이라는 한국 특유의 의학을 만들어 냈다. 그는 과단성이 있고 실증적이었으며 논리적인 인물이다. 무인 출신의 장경악과 이제마의 모습은 많이 닮아 있다.


전편에서 밝혔듯이 장경악의 이름은 개빈(張介賓)이고 호는 경악(景岳), 별호(別號)는 통일자(通一子)다. 역대로 호에 一자가 들어갈 때는 도가 사상의 영향을 깊게 받은 경우가 많은데, 이 때 一은 근본과 진리를 뜻하는 경우가 많으며 도(道)나 진(眞)과 상통한다. 장경악은 도가 사상이 담긴 황제내경에 통달했다는 점에서 유의성이 있겠다.


당시 의사들 사이에 장경악은 장숙지(張熟地)로도 불렸다. 장숙지는 장경악이 숙지황(熟地黃)이라는 약재를 즐겨 썼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숙지황은 음(陰)이 허할 때 보하는 대표적인 약물로 현재 한의계에서도 가장 많이 쓰는 약재 중 하나다.


장경악은 온보(溫補) 파의 대표주자다. 온보 파는 신체의 음기를 보하기 위해 차가운 성질의 약을 주로 사용한 한량(寒凉) 파의 상반된 의미로도 볼 수 있는데, 장경악은 자신의 저서 경악전서에서 한량 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장경악은 모든 활동의 근본이 양기임을 강조했으며 양기의 근간이 되는 음기 또한 보해야 함을 설파했다.


한량 파도 음기를 중요하게 봤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점이 있지만, 장경악은 따뜻한 성질을 가진 약재를 활용해 음기를 보충했다. 대표적인 것이 숙지황이 포함된 처방이다. 숙지황은 생지황을 아홉 번 쪄서 말린 것으로 생지황이 차가운 약재인 데 반해, 숙지황은 따뜻한 성질을 가지면서도 음기를 보충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역대 의가들은 황제내경을 필두로 하는 원서를 토대로 시대에 맞는 이론과 처방을 개발했고, 다음 시대의 의가는 전 시대의 이론과 처방을 연구하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개발했다.


장경악 또한 후대에 여러 이유로 비판을 당하게 되지만, 현재 한의학계에서는 비판의 이유에서 타당하지 않은 점을 거론하기도 한다. 역대의 주장과 장단점은 후대에 이르러 소중한 자산이 됐다.


재미있는 사실은 장경악은 경악전서의 한 부분인 전충록(傳忠錄) 양부족론(陽不足論) 편에서 자신의 주장을 충분히 설파한 뒤 말미에 “이것 또한 편벽된 견해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그의 학설은 주단계 등의 음부족론(陰不足論)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며, 실제로는 자신의 전체적인 학설을 설명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후대에서 전체 숲을 보지 않고 작은 나무를 보고 비판할 것을 아마도 예견했던 모양이다.


장경악이 온보파의 대표주자로서 양기를 보하는(이를 위해 음기를 보하는 것도 강조했다) 따뜻한 성질을 가진 약물을 주로 사용했지만, 차가운 약물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차가운 약물은 온도가 낮다는 뜻이 아니라, 복용했을 때 체온을 낮추거나, 설사를 하는 등 아래로 기운이 내려가게 하는 등 진정과 하강의 작용을 하는 약물을 말한다. 따뜻한 약물은 반대로 이해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장경악이 명나라 소흥 지방을 지날 때 일화다. 한 아이가 쇠못을 삼켜서 토해도 나오지 않았고 코피를 심하게 흘리고 있었다. 당대 명의로 이름 높았던 장경악을 알아본 아이의 부모는 치료를 부탁했고, 장경악은 망초라는 약재를 구해 오게끔 한 뒤 자석, 돼지기름, 꿀 등을 배합해 복용하게 했다.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못을 대변으로 배설했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여기에서 사용한 망초라는 약물은 설사를 시키는 아주 차가운 성질의 약재이지만, 장경악은 상황에 따라 이런 약물도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 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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