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욕심 많은 암흑시대…“공자의 정명正名으로 횃불 밝히자”
일전에 어떤 분이 e메일을 보내왔다. ‘개판 5분 전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이었다. 그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고급공무원, 국회의원, 판사, 검사, 3권 분립, 요인들은 말로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충성을 한다고 손 들고 서약만 했지, 사리사욕과 권력 쟁탈에 눈멀고 귀먹어 국가와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한심한 나라. 학생들은 일진회인가 뭔가 하면서 조폭 흉내를 내고, 대기업들은 영세기업을 뜯어먹으면서 살고 있는 나라. 사기꾼들은 해외에서 활보하면서 여유만만, 말단 공무원부터 판사들까지 대통령을 조롱하고, 지역의 무식한 잡배들은 검경(檢警)의 앞잡이가 되고, 수십억 원대의 체납자들은 ‘내 배 째라’해도 속수무책이고. 나라를 말아먹는 집단들은 큰소리 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산화한 사람은 죄인이 되고. 국회의원들은 그만둬도 월 100만 원 넘게 받아 처먹고. 감방 갔다 나온 놈들은 국회의원 하겠다고 기자회견하고. 학생이 선생님을 폭행하는 나라. 한글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이 언론인 행세하는 나라. 장관은 20일만 해도 죽을 때까지 연금 타먹는 나라.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괴상한 나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세계에 알려졌던 나라가 부모를 죽이고 노인을 제집 강아지만큼도 못한 것으로 취급하며, 도둑과 사기꾼이 구더기같이 만연한 나라. 어린이 보호소에 보내는 3~4세 아이의 부모에게는 1개월에 40만 원 주면서 6·25 참전 국가유공자란 80 늙은이에게는 12만 원 주며 생색 내는 썩어빠진 국가, 대한민국이란 나라. 우리나라.”
“노인을 제집 강아지만 못한 것으로 취급하는 나라”
다소 과장된 표현이 없지 않고, 또 군데군데 비속어가 섞여 있기도 했다. 꽤 장문으로 구성된 내용이라 도중에 부분적으로 생략하고 옮겨 실었다. 이 글은 대한민국이 망하기를 바라는 냉소적인 마음으로 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을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이 글에서 지적한 대로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다 그렇다면 벌써 나라가 망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우려되는 바가 없지는 않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아가다가는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 것이라는 걱정이 앞선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돼가는 것일까?
우리 사회가 자꾸 이렇게 돼가는 것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계속 욕심을 키워가기 때문이다. 과거의 우리는 욕심을 버리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단군할아버지 때는 동굴에 들어가 햇빛을 보지 않고 마늘과 쑥을 먹으며 욕심을 버리는 노력을 했었고,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때는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욕심을 버리는 노력을 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때는 유교라는 가르침을 통해 역시 욕심을 버리는 노력을 했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유교의 가르침이 오히려 나라를 망친 원흉이란 누명을 쓰면서 욕심을 버리는 노력을 그다지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욕심을 채우는 일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다.
욕심은 채울수록 커진다. 그러므로 욕심을 채운 뒤에는 더 커져버린 욕심을 더 채우기 위해 정신을 잃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제들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정신을 잃어버린 데에 기인한다. 이를 해결할 근본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욕심을 없애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욕심을 점점 더 키워가기만 한다면 나라는 자꾸 위험한 곳으로 치닫다가 급기야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욕심을 없애더라도 다 없애는 경우가 있고 덜 없애는 경우가 있다. 덜 없애면 ‘덜 없다’가 되고, ‘더럽다’가 된다. 욕심을 덜 없앤 사람이 정치를 하면 정치를 더럽게 하고, 행정을 하면 행정을 더럽게 하며, 경영을 하면 경영을 더럽게 하고, 교육을 하면 교육을 더럽게 한다. e메일에서 지적한 내용은 더러운 정도가 지나친 경우를 주로 다룬 것이다.
반면에 욕심을 다 없애면 ‘다 없다’가 되고 ‘답다’가 된다. 그런 사람이 ‘다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욕심을 깨고 깨어 끝까지 깬 사람이다. 끝까지 깨서 ‘깨끝’한 사람이다. 말하자면 다운 사람이 깨끗한 사람이다. 대통령다운 사람이 정치를 하면 깨끗한 정치를 하고, 행정가다운 사람이 행정을 하면 깨끗한 행정을 한다. 경영자다운 경영자가 경영을 하면 깨끗한 경영을 하고, 교육자다운 교육자가 교육을 하면 깨끗한 교육을 한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가 이상사회다. 이상사회를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의 목적이고, 교육의 목표다.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물었다. 공자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 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답게 되는 것, 그렇게 되도록 인도하는 것이 정치라 했다. 이러한 공자의 정치사상을 정명사상(正名思想)이라 한다. 정명이란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이름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임금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임금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고, 신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신하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며,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아버지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고, 아들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아들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욕심을 없애도록 유도할 때 가능한 일이다. 정명사상의 내용은 제자인 자로와의 문답에서 나온다.
공자의 정치, 정명사상(正名思想)
자로가 공자에게, “정치를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할 것이다.”
그러자 자로가 말했다.
“그런 것뿐입니까? 왜 핵심을 말씀하시지 않고 이렇게 겉도는 이야기만 하십니까? 어찌 바로잡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자로는 눈앞의 급한 문제를 바로 해결하는 것이 정치라 생각한 것이다. 지금의 상황으로 말한다면, 정치인들의 비리를 바로 척결하고, 경제적으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문제, 말하자면 저축은행의 문제 등을 바로 해결하며, 학교 안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들을 엄벌에 처함으로써 학교문제를 즉각 해결하는 것 등이 정치의 급선무라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잡는 것을 제일 먼저 하겠다는 공자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핵심을 비켜가는 것이라 비난한 것이다. 자로의 말을 들은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로야 네가 왜 이렇게 촌스러운가! 군자는 자기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법이다. 이름이 바르게 되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며,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 도덕적 삶과 법질서가 유지되지 않는다. 도덕적인 삶과 법질서가 유지되지 않으면 형벌이 정확하게 시행되지 않고, 형벌이 정확하게 시행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가 이름을 정확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만들어놓으면, 말이 알맞게 나오는 법. 알맞게 나온 말에는 반드시 실천이 따른다. 그래서 군자는 말을 구차스럽게 하는 법이 없다.”
공자가 정치의 근본에 대해서 이처럼 장황하게 말한 까닭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치의 근본은 사람들로 하여금 욕심을 없앰으로써 각각의 일을 깨끗하게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모든 문제는 사람들의 무한한 욕심 추구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리더들은 욕심을 줄이는 정책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욕심을 자꾸 키우면서 법이나 제도를 보강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선거를 치를 때마다 후보들은 표를 얻기 위해 사람들의 욕심을 더 부추긴다.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더 황폐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근본부터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되었다. 자로처럼 문제를 성급하게 해결하려 하면 문제가 점점 더 복잡하게 얽힐 것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근본 문제부터 차근차근 해결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지엽적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법이다. 공자의 정명사상이 오늘날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큰 진리가 행해지면 모든 사람이 천하의 주인”
사람들은 욕심을 버릴수록 마음이 맑아지고 깨끗해진다. 그런 사람들이 군자이고 천사다. 그런 사람들이 가득한 나라가 천국이고, 그런 사회가 이상사회다. ‘예기’라는 책의 ‘예운편’에는 이상사회에 대한 공자의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큰 진리가 행해지면 모든 사람이 천하의 주인이 된다. 그런 세상에서는 어질고 유능한 자들이 리더가 되어 사람들을 미덥게 만들고 화목하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의 부모만을 받들지 않고 남의 부모도 자기의 부모처럼 받든다. 또 자기의 자녀만을 챙기지 않고 남의 자녀도 자기의 자녀처럼 챙긴다. 그래서 모든 노인은 삶을 잘 마감할 수 있고, 모든 젊은 사람은 일터에서 일을 할 수 있으며, 어린이들은 모두 잘 자랄 수 있었다. 홀아비와 과부와 고아와 자녀 없는 노인들, 그리고 폐질자(廢疾者·장애인)들까지 모두 잘 봉양받을 수 있다. 남자들은 모두 어울리는 직분을 가지고 있고, 여자들은 다 시집을 간다. 돈이나 재물이 땅에 떨어져 버려지는 것은 싫어하지만, 그것을 주운 자가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은 없다. 힘든 일은 자기가 먼저 나서서 하지만,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불만을 토로하는 모의들이 일어나지 않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들과 사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없다. 그래서 문을 밖으로 열어두고 닫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를 대동(大同)이라 한다(大道之行也 天下爲公 選賢與能 講信修睦 故人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使老有所終 壯有所用 幼有所長 矜寡孤獨廢疾者 皆有所養 男有分 女有歸 貨惡其棄於地也 不必藏於己 力惡其不出於身也 不必爲己 是故 謀閉而不興 盜竊亂賊而不作 故外戶而不閉 是謂大同).”
위의 내용은 지상에 건설된 천국의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천국에서는 모두가 하나다.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에 천하는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다. 천하가 모두의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천하의 주인이다. 모두가 주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다.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가 다 주인공이다. 사람의 욕심으로 보면 장미꽃은 가치가 있지만 오랑캐꽃은 가치가 없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장미꽃 백만 송이를 합해도 오랑캐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을 흉내 낼 수 없다. 오랑캐 꽃 하나를 피우기 위해 태양이 계속 비추었고, 지구가 쉬지 않고 돌았으며,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으며, 소쩍새도 울었다. 말하자면 전 우주가 동원되어 오랑캐꽃 한 송이를 피운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보면 오랑캐꽃 한 송이는 우주의 주인공이다.
이처럼 천국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 된다.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같고 모든 존재가 다 주인공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습이 다 같고 능력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모습과 능력은 사람마다 다르고 물체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그중에서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가 나서서 사람들을 한마음을 가지도록 유도하고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도록 가르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 받들지 않고 자기 자녀만 챙기지 않는다. 모두의 부모를 자기 부모처럼 받들고 모두의 자녀를 자기 자녀처럼 보살핀다. 그래서 노인들과 젊은이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외로운 이와 병든 이들까지 모두가 만족스러운 삶을 누릴 수 있다. 특히 천국에서는 노인들이 할 일을 다 마치고 죽는 것을 즐거운 일로 여긴다. 모두가 하나로 여기고 사는 사람은 모두가 다 살기를 바란다. 모두가 다 사는 방식은 늙은 사람이 죽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늙어서 할 일을 마친 사람은 자기 몸이 죽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마치 할 일을 다 마친 잎들이 곱게 물들어 떨어지는 것처럼, 곱게 늙어 행복하게 죽는다. 그렇게 죽는 것을 공자는 ‘잘 마친다’는 의미에서 ‘종(終)’이라 했다.
천국에서는 남자들은 각각 자기에게 알맞은 직업을 가지고 능력을 발휘한다. 경쟁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쉽고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 경쟁을 한다. 그래서 가장 힘 있는 자의 순으로 쉽고 편한 일을 한다. 그렇게 되면 힘 있는 자들이 편한 일을 하고, 힘없는 자들은 힘든 일을 하거나 아예 하지 않고 놀거나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힘 있는 자가 힘든 일을 찾아서 하고, 힘없는 자가 편한 일을 찾아서 한다. 모든 사람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일을 하므로 최고의 능률을 발휘하는 사회가 된다.
또한 천국에서는 모든 여자가 시집을 간다. 경쟁사회에서는 능력 있는 여자일수록 능력 있는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 그래서 능력 없는 여자는 능력 없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든지 아니면 자존심이 상해 아예 시집을 가지 않는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여자들이 자기를 필요로 하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기 때문에 모든 가정이 조화를 이룬다. 돈이나 재물이 땅에 떨어져 있을 때는 줍지만, 줍는 사람이 가지지 않고 주인을 찾아준다. 힘든 일은 서로 나서서 하지만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한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불만을 가진 사람이 없고, 도둑이나 사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문을 열어두고 닫지 않는다.
요임금의 대동
공자는 대동을 이상적인 사회로 삼았다. 대동은 지상에 건설한 천국이다. 공자가 꿈꾼 이상사회의 모델은 바로 요임금의 대동이었다. 그러나 요임금의 대동 또한 모델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전에 있었던 환한 나라, 즉 환국(桓國)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논어’에서 공자는 동이(東夷)족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동이족의 나라는 예로부터 군자들이 사는 나라였다. 군자들이 사는 나라는 천국이다. 천국은 환한 나라다. 우리 민족의 유래가 환국에서 비롯된 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자가 말한 요임금의 대동사회는 환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단군시대 때 추구했던 이상사회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었다. 홍익인간이란 사람들이 모두 주인공이 되어 만족하게 사는 사회다. 그런 사회가 이상사회이고 그런 나라가 천국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홍익인간의 내용은 공자가 말한 대동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천국은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이다. 한국이란 말은 ‘하나밖에 없는 나라’란 뜻이고 천국이란 뜻이다.
한국인들은 예부터 천국 건설을 꿈꾸었다. 그리고 때로는 천국을 실현하기도 했다. 단군시대 때는 이 땅을 신시(神市)로 만들었고,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때는 이 땅을 불국토(佛國土)로 만들었다. 조선시대 때는 지상천국의 건설을 꿈꾸었고, 실현시켰다. 조광조 선생의 도학정치는 지상천국을 만들기 위한 꿈이었고, 세종대왕은 그것을 실현시켰다. 세종 때의 한국은 천국이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지금도 천국에서 경험한 삶이 유전자 속에 기억되어 전해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라는 말을 많이 한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내 집’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집’이라고 한다. ‘내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라고 한다. 이런 말투는 천국에서 통하는 말투다. 공자가 말한 이상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부모만 받들지 않고 남의 부모도 자기 부모처럼 받든다고 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이상사회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자본주의도 변하는 것…암흑시대에 횃불 올릴 때
그래서 한국인들에게는 안타까움이 많다. 이상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면 할수록 그렇지 못한 현실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다. ‘개판 5분 전 대한민국’이란 제목의 e메일을 보내온 사람 또한 안타까운 마음에서 글을 쓴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래서는 안 되는 나라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는 안타까움이 녹아 있다. 우리 마음에는 이상사회로 향하는 꿈이 있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욕심을 버린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그러므로 이상사회란 그야말로 실현가능성이 없는 꿈일 뿐이라고. 이는 현재의 자본주의가 영원히 변치 않는 사회제도라고 전제한다면 타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자본주의 제도도 변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고 있다. 욕심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하고, 군자가 되어야 한다고 설파한 공자의 논어가 영원한 스테디셀러인 것을 보면 이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지금은 자본주의라는 제도로 인해 많은 문제가 노출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노선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사람들이 자꾸 욕심을 부리느라고 진리를 보는 눈이 멀어가고 있다. 진리를 보는 눈이 먼 시대가 암흑시대다. 지금이 바로 그 암흑시대에 진입한 것처럼 보인다. 대한민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이 다 그렇다. 지금 시급한 것은 암흑을 밝히는 횃불을 다시 피우는 것이다. 그 일은 천국에서의 삶의 경험이 아직도 유전되고 있는 한국인들이 나서면 가능하다. 한국인들의 안타까움은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가 될 것이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노래한 것처럼,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찬란히 빛났던 한국이 다시 불을 밝혀서 세상을 비추어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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