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가을, 프랑스 군인이 찍은 사진 한 장이 청나라와 유럽 사회를 뒤흔든다. 중국인 왕웨이친의 능지처참형 장면은 동양, 특히 조선이나 중국의 야만성과 동일시되며, 전제왕정의 개념 또는 이미지의 일부를 형성한다. ‘중국적 잔혹성’의 단서가 된다. 이 수사학은 동양 세계를 ‘야만’으로 규정하고, 야만을 멈추기 위해선 유럽인이 개입해야 한다는 식민주의의 합리화로 둔갑한다. 동양만큼 ‘잔혹한’ 형벌을 가했던 유럽이 동양을 야만국가로 둔갑시키는 것에는 식민지배의 계략이 숨어 있다. |
#처형1
1904년 가을, 베이징 선무문 채소시장 앞. 병사 두 명이 바구니와 처형할 때 쓸 칼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다른 병사들은 죄수의 몸 상체가 사형집행인, 즉 회자수(?子手)와 그의 조수에게 잘 드러나도록 옷을 벗기고 변발을 삼각대에 묶었다. 회자수가 죄수의 가슴 부위부터 시작해 이두박근과 허벅지 살을 차례대로 조각조각 도려내기 시작했다. 살을 저미는 작업 도중에 회자수가 신속한 손놀림으로 죄수의 심장을 단번에 찔러 목숨을 끊었다.
그러고 나서 죄수의 사지를 차례로 절단했는데, 처음에는 팔목과 발목, 그 다음으로 팔꿈치와 무릎, 마지막으로 어깨와 엉덩이 부분을 잘라냈다. 숙련된 회자수는 죄수의 신체 부위를 서른여섯 개 남짓으로 나누어버렸다. 회자수가 일을 마치고 나서 관리들에게 소리쳤다.
“시아르언르어(殺人了)!”
티모시 브룩이 ‘능지처참’(박소현 역, 너머북스, 2010)에서 소개한 왕웨이친(王維勤)이란 죄수의 처형 장면이다. 이 처형이 있은 지 몇 달 뒤인 1905년 4월 능지형은 청나라 법전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능지
지난 호에서 공자가 자신의 아버지 묘소도 몰랐던 사람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경위를 알아보았다. 공자 부모가 정식 혼인이 아닌 야합(野合)에 의해 맺어졌다는 기록은 공자가 아버지 묘소를 몰랐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편에 나오는 간단한 문구에 대한 해석의 오류가 낳은 결과였다. 그것도 당시 가장 탁월했던 경학(經學)의 대가 정현(鄭玄)이란 학자의 오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오류의 가능성 앞에 좀 더 겸손할 수밖에 없다.
문구 해석의 오류가 역사의 왜곡을 초래하는 미시적 요인이라면, 이번 호에서 다룰 주제는 왜곡의 거시적 요인이다. 곧 어떤 역사적 사실에 앞서 사람들이 갖게 되는 편견, 선입관 때문에 생겨난 왜곡이다. 편견이나 선입관에는 문화적, 정치적 차이가 한몫을 한다. 중국의 형벌제도 중 하나인 능지형(凌遲刑)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서구 언론과 지식인들의 호들갑이 오늘의 주제다. 호들갑치고는 꽤나 강력했지만.
능지처참이니 참수니 하는 말, 사극(史劇)에서 들어보았으리라. “능지처참하라!”는 명령과 동시에 집행된다고 생각하는 혹형(酷刑)에 대한 이미지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참수(斬首)는 목을 벤다는 뜻이다. 능지는 몸을 조각내는 형벌이다. ‘Death by a thousand cuts’ ‘천(千) 조각을 내어 죽임’, 이게 더 실감나려나 모르겠다. 이 끔찍한 말은 동양, 특히 조선이나 중국의 처형 장면과 동일시되며, 곧 전제왕정의 개념 또는 이미지의 일부를 형성한다.
사진과 헤테로토피아
왕웨이친의 처형, 능지형을 알 수 있게 해준 앞의 사진. 중국인이 찍은 것일까? 아니다. 1904년 반청(反淸) 반외세 단체인 의화단(義和團)을 진압한 뒤 프랑스 등 외국 정부는 공사관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를 얻었고, 이 사진은 바로 프랑스 공사관에 배치되었던 군인들이 찍은 것이다. 이 처형이 있을 것을 알고, 사진기를 갖고 대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건이 있기 10년 전인 1894년만 해도 사진은 전문 사진사들만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900년 이후 휴대용 사진기가 개발되면서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다. 기술적, 정치적으로 완벽한 타이밍에 왕웨이친은 능지형에 처해졌다.
호기심이 생겼을 것이다. 유럽 법령에서 사라진 혹형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대한 반응이 사진으로 나타났을 터이다. 그리고 휴대용 사진기에 찍힌 이 사진을 통해 베이징의 능지형은 문화적 기억으로 ‘영구보존(archiving)’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진이 없었다면 이 사진이 입증하고 있는 중국과 서양, 동양과 서양의 간극은 이듬해에 메워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들로 인해 중국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동들이 정상적인 것처럼 벌어지는 공포와 혐오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이질적 세상)로 인식되었다.
선정적인 사진의 파급효과는 상상보다 심각했다. 사진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편견을 유럽 대중의 의식 속에 불어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국의 고문당한 육체가 주는 관능적 이미지가 다시 유포되기 시작했다. 중국인은 극한의 고통을 초래하는 기술을 완성했다는 ‘중국적 잔혹성’의 수사학(修辭學)이다. 수플리스 시누아(supplice Chinois·잔혹한 형벌). ‘중국의 형벌’이라는 관념. 뒤에 살펴보겠지만, 이 수사학은 식민주의의 합리화, 즉 이 야만을 멈추기 위해서는 우리 유럽인이 개입해야 한다, 서구 문명만이 이 폭력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사명감으로 진화했다.
#처형2
“손에 2파운드 무게의 뜨거운 밀랍으로 만든 횃불을 들고, 속옷 차림으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문 앞에 사형수 호송수레로 실려와, 공개적으로 사죄할 것.” 다음, “위 호송수레로 그레브 광장에 옮겨간 다음, 그곳에 설치된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에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 녹인 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버린다.”
1757년 3월 2일, 시종(侍從) 무관(武官)이 된 뒤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5세를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체포되어 반역죄로 극형을 받은 로베르 다미엥에 대한 판결이다. ‘암스테르담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분명히 이 사건은 판결문 그대로 집행됐다. 부통이라는 치안관의 목격담은 한층 상세하고 끔찍해서 차마 다 옮길 수 없지만, 사실 전달을 위해 확 줄여 조금만 소개한다.
“유황을 태웠으나 그 불길이 너무 작았기 때문에 죄수 손등의 피부만 약간 상하게 했을 뿐이다. 그 다음에는 소매를 팔뚝 위까지 걷어 올린 사형집행인이 45㎝ 정도의 불에 달군 특제 쇠집게를 집어 들고, 먼저 오른쪽 다리의 장딴지를, 다음에 넓적다리를, 오른팔의 근육 두 군데를, 다음에는 가슴을 찢었다. 집행인이 아무리 체력이 강하고 억센 사람이라 하더라도 쇠집게로 집고 있는 곳의 살을 같은 방향으로 두세 번 비틀어가면서 잘라내는 데 무척 애를 먹었다. 그리고 잘라낸 부분에는 각각 6리브르 화폐 크기만한 흉측한 구멍이 드러났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 보면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멜 깁슨이 처형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서양 회자수가 등장하는데, 그는 자신의 공구 주머니를 쭉 펼쳐 보인다. 바로 그것이다. 영화에서는 다 보여주지 않았지만 다미엥에 대한 판결문에서 보듯이 회자수는 가지고 온 공구를 다 써서(그렇지 않으면 번거롭게 연장을 그렇게 들고 올 리가 없다!) 죄수에게 ‘고통을 주며’ 처형했다. 여기서 일단 ‘고통’을 기억하고 가자. 멜 깁슨 영화의 마초주의와는 별개로 이 장면은 시청각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혹형
푸코는 ‘감옥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은 그의 ‘감시와 처벌’(오생근 역, 나남, 2003)에서 고통의 극대화를 위해 세밀하고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중세 형벌제도를 고찰했다. 다미엥의 처형은 여느 능지형을 훨씬 능가하는 잔혹성을 보여준다. 이는 신체 자체를 형벌의 대상으로 삼는 형벌제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두 가지를 짚어보자. 첫째, 서유럽도 그렇게 형벌이 잔혹했으니까 오십보백보일 뿐 중국 형벌을 두고 왈가왈부할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중국 형벌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던 유럽인의 편견이 갖는 한계를 보여주는 증거의 하나는 된다. 또한 혹형에 대한 문화적, 미학적 혐오에도 불구하고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에서 행했던 살해, 혹형과 고문의 실상을 고려하면 왕웨이친의 처형을 두고 유럽인의 반응은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유럽 군대는 의화단을 진압하면서, 진압이 아니라 거의 ‘학살’했다. 나폴레옹 군대는 스페인의 애국자들을 능지형과 유사한 방식으로 처형했는데, 이는 프란치스코 고야의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 보면, 서유럽에서 혹형이 사라진 것은 중국보다 100년 정도 앞선다. 문제는 시기가 아니다. 시기를 놓고 논의하다보면, 중국보다 유럽이 먼저 개명(開明)했다느니, 그게 그거라느니 하는 선형적(線型的) 논란에 빠진다. 마치 한 줄 위를 가는 것처럼 한 사회가 지나간 길을 다른 사회가 지나간다고 보는 단순한 사유로는 사태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조차 이런 사유 습관에 젖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은 이런 인식 태도는 역사학과 거리가 멀다. 역사학의 출발은 먼저 왜 A사회와 B사회가 다른가, 그다음은 왜 A사회는 C사회로 갔는데 B사회는 C사회로 가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단선적·단계적 발전? 그런 거 없다.
둘째, 국가 권력의 폭력성 문제는 일단 이번 논의에서 제외한다. 종종 외신에서 보도되듯이 경찰에 의해 발생한 대민(對民) 폭력 사건의 경우, 해당 경찰에 대한 처벌은 매우 경미하다. 공권력의 행사라는 논리 때문이다. 또 공권력도 합법, 불법일 때에 따라 상황이 다르다. ‘중국의 잔혹성’이라는 수사학에는 사실 형벌로서의 혹형만이 아니라, 불법(不法) 또는 비법(非法) 폭력의 이미지도 섞여 있다. 실제로 불법, 비법 폭력을 ‘중국의 잔혹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제출한 연구도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주제는 합법적 공권력으로서의 형벌, 혹형임을 다시 확인하고자 한다.
신체
원래 인간의 몸은 형벌의 마당이다. 신체를 대상으로 금고, 징역, 유배, 거주제한 등이 벌어진다. 근대의 이런 형벌도 ‘신체에 대한 형벌’이다. 그러나 근대 형벌제도에서 징벌과 신체의 관련이 과거의 신체형과 동일하지 않다. 중세 유럽이나 동아시아 왕조국가에서 형벌은 신체 자체에 가해졌다.
근대 형벌제도에서 신체는 ‘도구 또는 매개체’와 같은 것이 된다. 즉, 신체를 감금한다든지, 혹은 노동을 시킨다든지 해서 신체에 제재를 가하지만, 그 목적은 개인에게서 권리인 동시에 재산으로 생각되는 자유를 박탈하기 위한 것이다. 이 형벌제도에 의하면 신체는 구속과 박탈의 체계, 의무와 제한의 체계 속에서 취급된다. 육체적 고통, 신체 자체의 괴로움은 이미 형벌의 구성요소가 아니다. 징벌은 견딜 수 없는 감각의 고통을 다루는 기술의 단계에서 그 모든 권리 행사를 정지시키는 경제의 단계로 이행해버린 셈이다. 푸코의 이러한 지적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이 신체 자체에 대한 행형(行刑)에서 신체 권리 박탈이라는 행형으로의 변화가 고상한 인도주의(Humanism)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국가 형벌 권력의 효율적 작동을 위한 재편이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18, 19세기 형벌제도 개혁자들은 신체형이 민중을 위협하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었다.
신체는 세균 전파라든지 수명 같은 생물학적 생존의 토대나 사건의 대상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권력은 신체가 직접적으로 정치의 영역 속에 들어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직접적 영향력을 가했다. 생산하는 신체인 동시에, 복종하는 신체. 푸코는 신체형이 되기 위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첫째, 형벌은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평가하고, 비교하고, 등급을 정할 수 있는, 어떤 분량의 고통을 만들어내야 한다. 둘째, 고통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규칙이 수반되어야 한다. 세칙(細則)에 따라 계산되어야 한다. 셋째, 신체형은 일종의 의식(儀式)을 구성한다. 목을 베어 매다는 효시(梟示)를 생각하면 된다.
이런 점에서 중세의 신체형은 잔인하지만 야만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유, 절차와 과정, 양형(量刑), 효과 등이 치밀하게 계산된 문명적 행위다. 그러므로 중세의 신체형을 야만적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적 잔혹성’의 경우처럼 아직 다른 차원의 형벌이 온존하는 세계를 ‘야만’으로 규정하려는 ‘문명세계’의 계략이다. ‘문명’이 ‘문명’을 대신한다고 하면 명분이 서겠는가? ‘문명’이 ‘야만’을 척결해야 한다고 해야 침략과 폭력이 정당화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자신들의 폭력은 다시 피지배자들의 야만성을 통해 합리화된다. 저 야만인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폭력과 혹형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고문
신체형에 대한 통찰에도, 역시 푸코가 관찰한 서유럽과 중국은 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통 자체에 대한 인식의 차이다. 고통의 문제는 고문과 처형을 나누어 살펴보아야 될 듯하다. 현행법상 고문은 한국의 사법체계에서 불법에 해당한다. 그러나 중세법에서 고문은 합법이었다. 이를 형신(刑訊)이라고 했다. 조선의 형신에는 죄에 따라 말로 하는 평문(平問)과, 신체에 고통을 주는 곤장, 압슬(壓膝), 낙형(烙刑)이 있다. 고문은 엄연한 사법적 행위다(현대의 고문은 불법이기 때문에 기준도 없고 따라서 훨씬 무자비하다. 미국 관타나모 기지의 고문을 떠올리면 된다).
중세법에는 죄를 입증할만한 모든 증거가 수집된 뒤에 유죄성이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즉 피의자에 대한 무죄추정의 원칙이 아니라, 범죄자로 인지되는 개별적인 증거 요소가 있을 때마다 단계적으로 하나씩 유죄성이 구성되었다. 예를 들면, 절반쯤 완전한 증거가 하나 있을 경우, 그것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용의자가 무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절반 유죄인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반역 사건 고변에 언급되면 언급된 만큼 죄가 있는 것이다. 중대한 범죄일수록 경미한 증거라 하더라도 당사자는 ‘어느 정도’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퍼시 크릭쉥크의 화보집 ‘중국인의 형벌’에 나오는 못 박힌 판자에 무릎 찧기, 허리 자르기, 토막내기.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관념은 이런 화보를 통해 대중화됐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을 ‘야만화’해 식민지화할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할 무렵 이 화보집이 출간됐다.
요컨대 형사사항에서의 논증은 진실인지 허위인지를 가르는 이분법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연속적인 점증법의 원칙을 따랐다. 예를 들면, 논증에서 어떤 단계에 이른다는 것은 바로 유죄성의 단계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그것은 처벌의 한 단계를 내포한다. 용의자인 한, 그는 어떤 종류의 징벌을 마땅히 받아야 하며, 무죄의 상태에서 혐의의 대상이 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혐의가 곧 유죄성이다.
한편 처형 단계를 놓고 보면 고통이 갖는 의미는 유럽과 중국에서 전혀 달랐다. 예를 들어 처형의 고통으로 따지자면 목을 매다는 교형(絞刑)이 목을 베는 참형보다 더 클 텐데도, 참형이 교형보다 더한 극형으로 여겨졌다. 이 점이 처음 고통이라는 키워드로 중국 처형에 접근했던 관찰자들이 당혹스러워한 대목인데, 일부는 적절하게도 중국 처형의 등급은 고통이 아니라 신체 훼손 정도라는 점을 이해했다. 실제로 그러했다.
그런데 서양인 목격자들은 중국 처형의 무미건조함, 집행자의 사무적인 태도에 놀랐다. 구원의 의식도, 죄수와 회자수, 성직자 사이의 연극적 요소도 없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성직자와 죄수 사이에 벌어지는 것과 같은 대결과 협상도 없었다. 단순한 처형. 그럴 수밖에. 중국의 처형은 말 그대로 집행이었지, 프랑스 다미엥 처형에서 나타나는 계산된 고통의 의례와는 달랐다. 그렇지만 이 차이는 곧 유럽 관찰자들에게 이질적으로 다가왔고, 그 단순성이 야만성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이질감에 권력이 쥐어지면 곧장 대상에 대한 경멸로 이어진다.
왜곡
브룩의 연구에 따르면 서구에서 근대 초기에는 중국 형벌의 합리성과 일관성을 강조하는 견해가 주를 이루었다가,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잔혹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현저히 변했다고 한다. 실제로 17, 18세기 서구 지식인들의 중국 이해는 대체로 우호적이거나 국민국가의 모델로 인식되기도 했다. 라이프니츠, 볼테르, 케네 같은 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견해다. 19세기에 오면 중국의 형벌과 사법절차는 일반적으로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의 결과로 여겨졌고, 잔혹성이 팽배한 사회의 퇴보적이고 반(半)야만적인 본성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이는 문명의 개념을 유럽이 전유(專有)하면서 문명이 유럽의 자의식이 되고, 유럽 이외의 문명과 유럽 식민지의 낮은 수준을 전제로 하는 식민주의적 사고방식과 결합되어 있었다. 야만에 대한 ‘문명화 의무’. E 사이드는 이를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고 불렀다.(박홍규 역,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1993)
아프리카의 노예화, 아메리카 인디언의 절멸을 거치는 동안, 유럽은 부와 권력의 측면에서 다른 지역과의 격차를 벌였다. 이러한 정치, 경제적 변화와 함께 유럽 사회를 다른 사회와 구별하는 지적 경향이 출현했다. 그런 경향으로는 서구에서 과학이 발달한 것이 일반적으로 서구 문화의 합리성을 입증해준다는 생각, 역사가 진보한다는 원리, 인간적 동정심과 개인주의가 순수 문명의 중요한 지표이며 잔혹성은 그 반대라는 견해, 법의 지배에 기초한 정부의 우월성,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동으로서 기독교의 부활, 귀족정치에 대한 낭만주의의 출현,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닌 인종우월주의가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이 시기, 기억할 필요가 있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식민지관(植民地館)이 최초로 등장했다. 그리고 1889년 다시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식민지관의 인종 전시로 제도화됐다. 역설적이게도 이 박람회는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열렸다. 이 박람회는 에펠탑과 함께 기억하시길. 에펠탑이 세워지던 바로 그 박람회다. 위압적인 에펠탑과 박제가 된 식민지 인종 간의 수직적 위계는 중국 형법제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야만과 문명의 이분법, 제국주의 권력장치의 다른 표현이었다.
전사(前史)
중국 상황과 좀 더 밀착해서 살펴보자. 중국의 잔혹성이라는 수사법과 이미지는 1차 아편전쟁(1839~1842)을 기점으로 강화됐다. 중국이 본격적으로 먹잇감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던 시기다.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중국 형벌에 대한 화보집이 발간되는데, 1858년 중국 사법제도의 전형적 특징으로 잔인무도함을 강조하는 크릭쉥크의 저작이 그것이다. 그해에 영국 파머스톤 정부는 청나라에 대한 전쟁의 구실을 만들었고, 그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재중(在中) 영국인의 면책 특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화보집의 저자 퍼시 크릭쉥크의 삼촌 조지 크릭쉥크는 파머스톤의 친구다. 같은 시기 홍콩 총독들은 중국적 형벌인 곤장과 채찍질은 식민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의 형벌은 악습이고 야만이지만 자신들이 하는 것은 괜찮다는 뜻이다.
앞에서 살펴본 왕웨이친 처형 사진에 담긴 관음증은 이미 그 전사(前史)가 있었던 셈이다. 이 흐름 속에서 참으로 드문 능지형이었던 왕웨이친의 처형 사진은 그 시각적 수용성 때문에 ‘중국적 잔혹성’에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루쉰의 소설 ‘약(藥)’이나 웨이슨 추이의 ‘옥 모란’같은 소설에서는 중국인들 스스로 그 잔혹성 이미지를 내면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루쉰의 소설에서 주인공 라오촨은 방금 처형된 시체의 피에 적신 만두가 폐병에 치료 효과가 있다고 믿게 됐다. 소설이라는 지어낸 이야기였지만, 또한 피-폐병-만두와 중국 형벌제도가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이는 야만성의 재현으로 받아들여졌던 듯하다. 이 점은 중국적 잔혹성의 수사학이 유럽인의 수사학과 이미지로만 재생산된 것이 아니라, 중국인 자신에게서도 내면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과거 중국에 관한 일부 사실이 이제 압도적 전설이 되었고, 지금도 중국에 대한 기억 속에 스멀스멀 기어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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