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천사(葉天士, 1667~1746)는 청대를 대표하는 천재 의학자로 이름은 계(桂)이고 호는 향암(香岩)이다. 그는 강희(康熙) 6년 청대의 전성시기에 소주에서 태어났으며, 건륭제 통치 기간까지 활동하면서 걸출한 업적을 남겼다.
섭천사의 집안은 이름 높은 의학 명문가였다. 조부는 이름이 시(時)이며 자(字)는 자범(紫帆)으로, 소주에서 이름 높은 소아과 전문의였다. 의술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덕이 높아 환자의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형편이 어려운 환자에게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귀한 한약재를 아낌없이 주었으며, 아이의 대소변을 더럽게 생각하지 않고 정성으로 진료했다. 섭시의 명성과 인덕은 삽시간에 소주로 퍼져나갔다.
부친의 이름은 조채(朝采)이며 자(字)는 양생(陽生)이다. 그는 의업을 이어 받아 소아과를 비롯해 부인과와 내과를 비롯한 다른 진료 과목에도 뛰어난 의술을 발휘했다. 강소성과 절강성까지 이름이 나서 집 앞은 늘 환자로 북적였다. 그는 문학, 음악,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독서를 즐겼다. 섭천사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어릴 때부터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타고난 재능으로 각종 서적을 독파했다.
섭천사는 12세 때부터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의학을 배웠고 의사의 마음가짐과 의덕에 대해서 깊은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만 본격적인 의술을 배울 시기인 14세 되던 해 아버지 조채가 타계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신세가 됐다. 부친은 재물을 모으지 않았기에 문하에 있던 제자와 문객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의사의 길을 걷기로 마음 먹은 섭천사는 아버지의 제자인 주씨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아버지가 남긴 의술을 빠르게 습득했다. 타고난 천재성과 근면함으로 배움이 빨랐기에 곧 청출어람의 경지에 이르렀다. 주씨는 섭천사에게 새로운 스승을 만날 것을 권고한다. 길을 떠난 섭천사는 10년간 17명의 스승을 만나 다양한 분야의 가르침을 받았다.
스승 중에 왕자접(王子接)이라는 명의가 있었는데 지금의 전염병에 해당하는 온병(溫病)에 조예가 깊었다. 섭천사는 왕자접의 가르침을 받고 발전시켜 훗날 온병의 대가가 된다.
당시 중국에도 치료법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경우가 있었다. 역사를 살펴봐도 1232년 하남성 변경 지역에서 온역병이 창궐해 백만여 명이 사망했고, 외국과 활발한 교류로 성홍열 등 전염병이 들어오기도 했다. 청대에만 300여 차례의 온역병이 유행했다.
하지만 1500년 전 장중경이 남긴 상한론 이론으로는 온역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장중경이 비록 의성으로 불리는 불세출의 명의였지만, 후대에 발생할 전염병까지 예측할 수는 없었다. 섭천사는 온병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토대로 진단법과 치료법을 정리했으며, 생전에 상당한 연구 성과와 치료 사례를 남기게 된다. 청대에 이르러 동양 의학은 몇가지 새로운 이론을 추가하게 되는데, 온병에 대한 이론이 주요한 사례다.
하지만 무엇보다 섭천사가 훗날 뛰어난 임상 업적을 남긴 바탕에는, 어릴 때부터 몸에 익힌 학문을 대하는 태도와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배운 의사의 마음가짐이 있었다.
섭천사는 30세가 되던 해 강남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가 되었다. 그의 명성은 다른 성을 비롯해 양자강 건너 지역까지 퍼졌고, 일부 조정의 인사들도 섭천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얻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티끌만큼의 자만심과 허영심이 없었기에, 줄곧 환자 곁에서 임상 의사로서 삶을 놓지 않고 살아간다.
숱한 명의들이 많은 의서를 남긴 것과는 달리 섭천사는 진료와 연구에도 시간이 빠듯해 이렇다 할 저작을 남기지 않았다.
대신 그의 제자들이 섭천사의 진료 기록과 일화를 수집해 서적을 출간하는데, 수제자인 화수는 섭천사가 세상을 떠난 후 섭씨의안(葉氏醫案)을 분류해 ‘임증지남의안(臨證指南醫案)’을 편찬했다.
출간 이후 당시 거의 모든 의사들이 임증지남의안을 구해 공부했고, 최근에도 임상 지침서로 출판될 정도다. 이외에도 섭천사의 고손자인 섭만청(葉萬靑)은 가보로 보관하던 의안을 정리해 섭천사의안존진(葉天士醫案存眞)을 발간했다.
후대 의사들의 섭천사를 향한 존경심은 대단했다. 청대 의학가 석운옥(石韞玉)은 섭천사를 장중경, 화타와 함께 일류 의사로 꼽았다. 청사고(淸史稿)에는 양자강 남북을 통틀어 섭천사가 의술의 아버지로 칭송받고 있으며, 무수한 의사들이 그를 스승으로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1746년 숨을 거둔 섭천사(葉天士)는 임종시 후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의(醫)라는 것은 할 수 있다 하여도 할 수 없는 것이니, 필히 하늘이 내려준 영민한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이오, 만권의 책을 본 연후에야 가히 의술로서 환자를 치료할 수 있으니, 그렇지 않다면 사람을 죽이는 자 적지 않을 것이오, 약이 칼이 될 것이라. 내가 죽거든 자손은 함부로 경솔하게 의(醫)를 논하지 말라’
그의 유언에는 그의 인생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숱한 독서와 공부 끝에 의사가 되었으며, 작은 이치와 의술이라도 배울 수 있다면 천리가 멀다 하지 않고 자신을 낮춰 스승으로 모셨다. 당대의 천재로 불리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가 재능만으로 업적을 이뤘다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작용이 있고 효과가 있다는 것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러기에 만병통치약이 없고 사람과 상황을 잘 가려서 진단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의사의 도리라 하겠다.
섭천사가 살던 소주 지역에 한 고관이 있었는데 그의 서른 살 아들이 주색에 빠져 살았다. 하루는 이 아들이 집안에서 은화를 훔치다가 들켜 아버지에게 크게 꾸중들었다. 충격을 받고 쓰러진 아들은 감기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더니 정신이 혼미해지며 일어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용한 의사를 모셔와 왕진케 했다. 그는 아들이 허한 것을 보고 인삼을 끓인 독삼탕을 연달아 복용케 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차도가 없었고, 오히려 피부가 시체처럼 굳어가면서 피부에 몽우리가 수없이 생겨났다. 가족은 임종을 준비해야 함을 직감하고 크게 상심했다. 한 지인이 섭천사를 찾아가 보라고 말했고, 간곡한 요청을 들은 섭천사가 도착했다. 그는 한참을 진찰하더니 큰 소리로 웃으며 40대를 때려도 죽지 않을 병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 뒤, 손수 처방한 약을 먹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들은 3일 후 말을 할 수 있게 됐고 5일이 지나자 일어섰으며 한 달 후 정상을 회복했다.
독삼탕을 먹이느라 은화 천냥을 쓴 아버지는 섭천사에게 약값을 치르겠다고 했다. 섭천사는 농담으로 은화 1000냥을 들여서 치료 못한 병이니 2000냥을 내라고 했으나 이내 가족들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웃으며 8푼짜리 무씨로 만든 약이라고 했다. 무씨는 한의학에서 나복자라고 하며 기침, 천식, 식적, 복부팽만, 가슴답답함, 설사, 이질을 치료하며 소화를 돕고 더부룩한 것을 제거하며 기를 내려 담을 삭게 하는 효과가 있다. 사실 아들의 병은 허해서 온 것이 아니라 순환이 원활하지 않고 기가 막혀서 온 병이었던 것이다.
건륭제 때 강남의 한 순무사(巡撫使)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스무살에 과거에 합격하니 집안의 경사였다. 잔치가 연일 이어졌고 아들은 못 먹던 술을 연신 먹었더니 몸이 말이 아니었다. 결국 5~6일 후 눈이 붉게 부어 오르더니 극심한 통증이 이어졌다. 명의로 이름이 높았던 섭천사를 초빙해 왕진케 했다. 섭천사는 진찰 후 눈병은 대수롭지 않으나 며칠 안에 발에 종기가 생겨 치료가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힘든 공부 끝에 뜻을 이룬 직후에 얻은 중병에 아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슬펐다. 섭천사는 애걸복걸하며 살 방도를 묻는 그에게 종기가 생기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방법인즉슨 왼 손으로 오른발바닥을 450번 문지르고, 오른손으로 왼발바닥을 똑같이 문지르면서 결코 화내지 않고 초조해 하지 않으며 마음을 조용히 하라는 것이었다. 7일 후 섭천사는 경과를 살피기 위해 들렀다. 아들은 섭천사를 보자마자 눈은 완쾌했는데 그보다는 종기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물었다. 섭천사는 껄껄 웃으며 종기가 생긴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대는 부유한 집안에서 어려움 없이 자라 모든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줄 알기 때문에 치료가 힘들다 생각했다네. 그래서 먼저 죽음으로 겁을 줘 내 말을 따르게 했고, 잡념을 버리고 마음을 닦게끔 한 것이었지. 손으로 발바닥을 문지르면 자연히 화기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눈병이 나을 것이요, 만약 조급함과 울분을 참지 못한다면 화기가 생겨서 눈병이 악화될 것이기에 마음을 다스리라 한 것이라네.”
그의 의술이 기록되어 있는 임증지남의안에는 여러 가지 치료 사례가 많이 있다. 공통점이라면 질병의 핵심을 짚어 간결한 처방으로 병을 치료했다는 점이다. 앞서 무씨로 중병을 치료한 예나, 말로써 콧대 높은 명문세가의 자제의 마음을 다스린 것에서도 이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섭천사의 업적이 현대 시대에 의미가 깊은 이유는 그의 숭고한 의사로서의 마음가짐이 의료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함은 물론이요. 실타래같이 얽힌 질병의 원인과 환자의 사연 앞에서 초연하게 핵심을 짚어낸 유유자적한 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 섭천사의 성 섭(葉)은 잎사귀를 뜻하는 엽(葉)과 한자가 같으나, 성을 지칭할 때는 엽이라 읽지 않고 섭이라고 읽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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