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거창에는
크고 독특한 모양새의 바위가 많다.
위 두 사진은 수승대 거북바위를 각기 다른 방향에서 본 모습.
거북이를 빼닮은 모습 뒤편에는
옛 선비들의 글귀가 가득 새겨져 있다.
왼쪽은 국내 최대크기의 단일바위라는 문바위.
오른쪽은 탑을 쌓은 듯한 4층바위다.
위·아래 그림은 거창사건추모공원에서 볼 수 있는 석상.
'민간인 학살'의 뼈아픈 역사를 보여준다.
강호진의 묘(생 1949. 5. 10 / 졸 1951. 2. 9), 이영구의 묘(생 1950. 6. 7 / 졸 1951. 2. 9), 정옥순의 묘(생 1935. 8. 9 / 졸 1951. 2. 9), 정정자의 묘(생 1944. 7. 6 / 졸 1951. 2. 9)….
육면체 윗면과 앞면을 사선으로 깎은 비석은 검은색이다. 단면에 이름을, 비석 오른쪽 면에는 날짜를 새겼다. 태어난 날을 뜻하는 '생(生)' 아래 새긴 날짜는 제각각이다. 그러나 죽은 날을 뜻하는 '졸(卒)' 아래 새긴 날짜는 모두 같다.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청연묘역'에 모신 원혼은 모두 50위다.
청연묘역을 지나 신원면 대현리에 들어서면 '거창사건 추모공원'에 닿는다. 공원 가운데 조성한 묘역에는 비석 669기가 줄지어 서 있다. 청연묘역에 세운 비석과 똑같은 모양새다. 비석 오른쪽 '졸' 아래 새긴 날짜는 1951년 2월 9·10·11일 중 하나다. 1951년 2월 9~11일은 육군 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이 신원면을 훑고 간 날짜와 일치한다.
신원면 일대에서 암약하던 빨치산을 없애겠다며 육군이 내놓은 작전 '견벽청야(堅壁淸野)'. 육군은 집과 식량을 태우고 주민을 몰살하며 작전을 실행한다. 박산골 517명, 탄량골 100명, 청연마을 84명 그리고 연행 도중 사살 당한 18명까지 '거창사건 희생자'는 719명이다. 나라를 믿던 국민에게 국민을 믿지 못한 나라가 저지른 만행은 비열하고 잔혹했다. 처참한 사살 현장은 거창·함양·산청 그리고 하동·마산까지 이어진다. 이 나라가 경남 곳곳에 저지른 씻을 수 없는 죄다.
1996년 1월 5일 국회는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거창사건 추모공원'은 이 법을 근거로 2000년 10월 착공해 2004년 10월 준공됐다.
거창(居昌) 옛 이름은 거타(居他)·거열(居列)·아림(娥林) 등이다. 모두 '넓고 큰 밝은 들'이라는 뜻을 담은 지명이다. 하지만, 거창에는 이런 이름에 어울리는 들이 별로 없다.
거창군 전체면적(804.14㎢)에서 산(613.58㎢)은 76%를 차지한다. 농사지을 땅이라고 해 봐야 고작 15% 정도다. 애초에 논밭 농사로 살림을 불릴 만한 땅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1960년대까지 거창 주민 75%는 농민이었다. 없는 땅을 일궈 나오는 수확은 뻔했다. 애써 땀 흘려도 영세농민 수준을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그나마 1940년대부터 뛰어든 사과 생산이 서서히 자리매김하면서 이곳 농민들 살림은 폐기 시작한다.
지명과 달리 거창이 지닌 자산은 산이다. 덕유산과 가야산 자락이 둘러싼 거창은 전형적인 고산 분지다.
덕유산 줄기인 삼봉산(1254m), 대봉(1300m), 지봉(1302m), 거봉(1390m), 상여덤(1400m), 덕유산 하봉(1594m) 등이 전라북도 무주와 경계를 이룬다.
또 가야산 줄기인 수도산(1317m), 단지봉(1327m), 민봉(1259m), 두리봉(1133m)은 경북 김천시와 거창군 사이를 가른다.
거창과 합천 사이에는 두무산(1039m), 남산(1140m), 의상봉(1046m), 비계산(1126m), 오도산(1134m), 문재산(1126m)이 우뚝 솟았다. 월봉산(1288m), 금원산(1353m), 기백산(1331m) 너머가 함양, 솔봉산(645m), 매봉산(800m) 너머가 산청이다.
표고 200m 이상 분지인 거창에는 들어오는 물이 없고 나가는 물만 있다. 거창을 둘러싼 산들은 낙동강 지류인 황강·남강·감천·금강 발원지다. 경남 사람 상당수는 거창에서 솟는 물에 기대는 셈이다. 이 같은 자연환경은 '북부 경남 중심'이라는 이곳 사람들 자랑에 힘을 보탠다.
덕유산과 가야산이 품은 절경 또한 '국립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다. 사방을 둘러봐도 겹치고 또 겹치는 산줄기는 서 있는 자리마다 다른 눈맛을 안긴다. 완만한 능선과 깊은 녹음이 덕유산이 지닌 멋이라면, 가야산은 하늘을 찌를 듯한 뾰족한 산세로 다른 매력을 뽐낸다. 두 산은 또 산세에 걸맞은 풍성한 숲과 깊은 계곡을 이 땅에 내주었다.
여기 사람들이 제 지역 풍경을 자랑할 때 먼저 꼽는 곳은 수승대(위천면)이다. 주변에는 요수정, 관수루, 황산마을 고가촌 등이 있다. 수승대는 해마다 '거창국제연극제'가 열리는 무대이기도 하다. 월성계곡(북상면)과 금원산(위천면) 계곡도 빼놓을 수 없겠다. 거창군은 금원산 일대에 자연휴양림과 생태수목원을 조성해뒀다. 더불어 거창군 동쪽에 자리한 분지 가조면은 온천이 유명하다. 이곳 사람들은 강알칼리성(pH 9.7)을 띠는 물이 전국 최고 수질이라고 내세운다.
하지만, 풍요로운 산세가 여기 사람에게 늘 자랑거리만 안긴 것은 아니었다. 바깥과 통하기 어려운 고산분지는 유배지로 적당했다. 거창은 권력에 밉보인 조선 선비들이 몰린 곳이기도 했다. 물론 이들 중에는 권력이 불편하게 여겼을 뿐 소양은 남다른 인물도 있었다. 그들은 척박한 땅에 무시 못할 문화적 자산을 남겼다. 그렇다 하더라도 애초부터 이곳은 변방이었다. 거창이 '북부 경남 중심지'를 내세운 시기는 일제강점기 법원·검찰·세무서가 들어서면서부터라고 보는 게 맞다.
1951년 '거창사건'도 이곳 지형이 아니었다면 피할 수 있는 비극이었을지 모른다. 오만하고 잔인한 공권력이 민간인을 학살하며 내세운 핑계는 험한 산세를 근거로 삼은 빨치산이었다.
문화적 자산만 보면 거창과 이웃 함양은 닮았다. '선비의 고장' 함양이 무엇을 내세워도 거창 사람들은 웬만해서 지지 않는다. 함양에 김종직(1431~1492)·정여창(1450~1504)이 있다면 거창에는 갈천 임훈(1500~1584)·동계 정온(1569~1641)이 있다.
임훈은 1540년(중종 35년) 벼슬에 올라 1553년(명종 8년) 사직서참봉, 이듬해 집현전참봉으로 임명됐다. 이후 제용감창봉 등에 임명됐으나 사퇴해 늙은 아버지를 모신다. 나라는 그 효를 칭송해 1564년 정려문(旌閭門)을 내린다. 1566년 언양현감으로 다시 발탁된 임훈은 군자감주부·비안현감·장앙원정·광주목사 등을 지낸다. 퇴계 이황(1501~1570)·남명 조식(1501~1572) 등 당대 뛰어난 유학자와 교류하며 학문과 인품을 널리 알렸다. 북상면에는 임훈이 살던 '갈계리 임씨고가'와 후진을 키우고자 지은 '갈천서당'이 남아 있다.
정온은 1601년(선조 39년) 진사가 돼 1610년(광해군 2년) 문과에 급제했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게 피살되자 정항 처벌과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분노한 광해군은 정온을 국문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다. 훗날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자 유배에서 풀려난 정온은 대제학·이조참판까지 역임한다. 병자호란 때는 끝까지 화의를 반대하기도 했다. 강화도가 청나라에 함락되자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덕유산에서 은거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위천면에는 '정온선생 종택'이 남아 있으며 후손들이 살고 있다.
조선 선비 문화를 상징하는 누정(樓亭·누각과 정자) 이야기가 나오면 거창 사람들 어깨에는 절로 힘이 들어간다. 거창에는 춘풍루·앙진루(거창읍), 자전루(웅양면), 화엽루(북상면), 관수루(위천면), 소심루(남하면) 등 6개 누각이 있다. 더불어 지역에 고루 퍼진 정자는 89개로 이 땅에 누정 건물만 95개에 이른다.
풍류는 선비 문화를 이루는 축이고 누정은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누정이 많은 거창은 선비들 자취가 풍성하게 남은 곳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함양 선비', '거창 사과'라는 통칭을 여기 사람들은 거스르려하는 면이 있다. 선비 문화는 함양 게 아니라 '안의현(安義縣)' 것이라고 비트는 데는 그런 섭섭함이 담겼다. 하지만, 함양에 대한 시샘이 섞였더라도 안의현을 끄집어내는 말에는 근거가 있다.
안의현은 거창군 마리면·위천면·북상면과 함양군 안의면·서하면·서상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이다. 1417년(태종 17년)부터 안음현(安陰縣)으로 불리다가 안의현이 된 것은 1767년부터다. 이후 1895년 진주부 안의군, 1896년 경상남도 안의군이 됐다가 1914년 거창과 함양으로 나뉘면서 안의군은 사라졌다.
옛 안의현에 속했던 지역에 선비 문화 자취와 유적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안의현이 거창과 함양으로 나뉘면서 두 지역이 내세울 만한 선비 문화를 공유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선비의 고장'이라는 수식을 함양이 선점했다는 게 거창 처지에서는 못내 아쉽다. 그렇더라도 기민한 함양군 행정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높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는 애초부터 변방이었다. 권력은 늘 이 땅과 이곳 사람들을 외면했고 핍박했다. 그러다 이에 저항하면 서슴없이 짓밟았다. 거창을 잘 아는 사람들은 여기 사람들 바탕에 깔린 기질을 '저항정신'에서 찾곤 한다. 이는 아무래도 강직한 성품을 내세우고 싶은 뜻이 강하다. 하지만, 저항 정신이 강하다는 것은 저항할 일이 그만큼 많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거창은 서러운 역사를 품은 땅이다.
거창읍 가지리 개화마을에는 '인민사(仁民祠)'가 있다. 1932년 이곳 사람들이 평민 이승문을 추모해 세운 사당이다. 이승문은 1862년 '거창농민항쟁'을 이끈 이들 가운데 한 명이다. 평민을, 그것도 지배계급 처지에서 보면 역모죄인을 후세 사람들이 의롭다고 받든 것이다.
거창농민항쟁은 가혹한 군포 징수를 견디다 못한 백성이 들고 일어난 사건이다. 농민을 이끈 이들은 이시규·최남규·이승문이다. 4개월 남짓 이어진 항쟁은 결국 관군에게 진압된다. 항쟁을 이끌었던 주모자는 처형당했다.
현재 인민사는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지 오래다. 건물은 위태롭고 주변은 잡초만 무성하다. 하지만, 지배계급에 대항한 평민에게 당시 사람들이 느꼈던 연민은 흔적이나마 남아 있다.
거창 양반도 더 센 권력 앞에서는 소외된 집단이었다. 1728년 '무신란(戊申亂)'은 경종(1688~1724)이 죽고 영조(1694~1776)가 즉위하자 위기를 느낀 소론(少論)이 노론(老論)과 영조를 없애고자 일으킨 난이다. 이때 안음현과 거창 일대에서 난을 주도한 인물이 정희량이다. 정희량 고조부가 바로 동계 정온이다. 충청·안동·안의에서 기세 좋게 일으킨 난은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관군에게 진압된다.
양반들 싸움에 등이 터진 쪽은 백성이었다. 안음현은 역적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지명을 잃었다. 이곳에 살던 백성은 어딜 가나 죄인 취급을 받았다. 몰락을 겁낸 지배계급이 권력을 차지하고자 벌인 저항이 낳은 대가였다. 그 대가는 벼슬길 막힌 양반 못지않게 백성에게도 가혹했다.
1951년 거창사건은 죽은 자는 물론 산 자에게도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떠안긴다. 1961년 5·16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권은 희생자 명예회복을 염원하던 유족과 유족회 간부를 오히려 반국가단체 구성원으로 몰아붙였다. 그것도 모자라 유족들이 1954년 가까스로 조성한 박산골 합동묘소를 서슴없이 파헤친다. 유족들은 '부관참시(剖棺斬屍)'로 그 서러운 날을 기억한다. 군사정권은 이후 연좌제 칼까지 씌우며 유족들 입을 막고 손발을 묶는다.
신원면 대현리 박산골 묘역에는 군·경이 정으로 글자를 쪼개고 쓰러뜨린 비석이 그대로 남아 있다. 거창 사람 기질이라는 저항정신은 서러운 역사가 억지로 떠맡긴 부채일지도 모르겠다.
거창에 검찰청이 들어선 것은 1908년이다. 이어 1909년 법원, 1929년에는 세무서가 들어선다. 해방 전에 주요 행정기관 3개가 들어선 것이다. 거창은 산청·함양·합천 등 북부경남을 아우르는 행정 중심지가 된다. 이는 거창 사람들이 북부경남 '터줏대감'을 자처하는 근거가 됐다.
1960년대 인구 14만 명을 웃돌던 거창은 1980년대 들어 인구 10만 명 선이 무너진다. 거센 이촌향도(離村向都) 바람이 거창이라고 피해갈 리 없었다. 현재 거창 인구는 6만 4000여 명이다. 그래도 거창 인구는 늘 주변 산청·함양·합천보다는 많았다. 내세울 만한 2·3차 산업이 없는 거창에서 그나마 사람들을 붙든 것은 행정·교육기관이었다. 그 덕인지 산청·함양 또는 합천을 한 지역구로 묶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자는 대부분 거창 출신이었다. 자연스럽게 '정치인은 거창 출신'이라는 자랑거리가 보태졌다.
행정과 더불어 군세를 북돋운 것은 교육기관이다. 거창여고, 거창고, 거창중앙고, 거창대성고, 가조익천종합고, 아림고, 대성일고 등 거창에 있는 고등학교는 7개다. 이 가운데 거창고와 대성고가 '교육 도시' 거창을 이끈 양대 사학으로 꼽힌다. 이들 사학은 최근 입시 명문으로 눈길을 더 끌고 있다. 거창에서 멀리 타지역 '유학생'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한때 '거창에 있는 학교를 거창 학생들이 못 다닌다'고 할 정도로 '명문대 바라기' 행렬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곳을 아끼는 이들은 예전과 달리 모여드는 인재들이 거창 인재로 자리매김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행정·교육기관은 자연스럽게 사람을 끌어들였다. 거창읍은 이른바 배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주변 군(郡)지역과 달리 거창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시민사회운동이 세련된 흐름으로 움튼다. 거창에서 시민사회운동 시발점은 1970년대 후반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 자양분은 1950년대 교육 운동에서 찾는 게 마땅하다. 그 중심에는 거창고가 있다. 거창고는 1956년 제3대 교장인 전영창이 선진적인 교육이념을 실천하며 지역에서 유별난 학교로 자리매김한다. 이후 민청학련 사건에 얽혀 옥고를 치렀던 정찬용이 1976년 거창고 선생으로 오면서 지역사회운동 전방위에 걸쳐 활기를 더한다.
거창고를 중심으로 한 교육운동이 지역 시민사회운동 한 축을 이끌었다면 다른 한 축은 농민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1979년 5월 거창에는 농민이 주도한 모임인 '농우회'가 생긴다. 농우회는 훗날 거창군 농민회 모태가 된다. 농우회 창립을 주도한 표만수·이상모 씨 등 농민은 1978년 크리스천아카데미가 운영한 농민운동가 지도자교육생 출신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교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선한 이가 정찬용이다.
1982년에는 '거창YMCA 지역사회개발센터'가 건립된다. 현재 거창 시민사회를 이끄는 단체들은 그 뿌리를 YMCA에 두거나 YMCA를 거쳐 조직화했다고 보면 된다. 환경 문제에 집중하는 '푸른산내들', 지역 행정 감시 역할에 비중을 둔 '함께하는 거창'이 대표적이다. 거창 시민사회단체 큰 축은 이들 단체와 더불어 거창농민회와 전교조로 보면 된다. 이들 단체는 분야·주제별로 각자 또는 교류하면서 지역사회에 자극을 공급한다. 행정·교육 그리고 풍부한 자연과 더불어 거창 자존심을 지키는 저력이다.
거창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저마다 수승대에 대한 기억을 품고 있다. 거북바위에 스며있는 옛 풍류가 멋을 흉내 내듯, 꽃잎 띄운 술잔 기울이며 시 한 자락 마음 놓고 읊기도 했다. 이런 별천지가 바깥사람들에게 알려질까 마음 졸이던 것은 옛 시간으로 남고, 이제 넘쳐나는 외지 손님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거창이 가야·백제·신라 접경지대에 놓여 치열한 다툼의 장이었다는 점은 '수승대'라는 이름에서도 끄집어낼 수 있다. 신라 땅에 발 들여 놓아야 하는 백제 사신들은 앞서 수승대에 꼭 들러 마음을 다스렸다 한다. 보내는 사람들 처지에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근심 수(愁)' '보낼 송(送)'을 따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 물론 훗날 1543년 유람차 들렀던 퇴계 이황 선생이 그 연유를 듣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 하여 소리가 비슷한 '수승대(搜勝臺)'로 바꿀 것을 권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거열산성군립공원에서도 거창이 백제·신라 땅을 오갔다는 사실을 찾게 된다. 건계정주차장에서 건흥산을 40~50분가량 오르면 563m 꼭대기 지점에 다다른다. 여기서 둘레 2.1㎞에 이르는 거열성(居烈城)을 마주하게 된다. 삼국시대 말 백제 혹은 신라에서 쌓았던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다만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그 후예들이 거열성을 거점으로 부흥을 꾀했는데, 3년 후 이 땅은 다시 신라 손에 들어가게 된다.
거창은 이렇듯 삼국시대 지리적으로 주목받는 곳이었고, 고려시대 합천 해인사 영향까지 더해져 불교문화도 꽃피웠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사찰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양평리 석조여래입상·상림리 석조보살입상·농산리 석조여래입상·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심우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이렇게 불상 5개가 국가지정 보물이라는 사실은 내세울 만하다.
거창에는 누정(樓亭·누각과 정자) 문화가 발달해 있다. 누각이 6개, 정자가 119개다. 이는 거창이 빼어난 경관을 안고 있었고, 힘 있는 집성촌이 많았으며, 누정을 관리할 경제적 여력이 있었다는 것을 달리 말해준다. 특히 거창신씨(居昌愼氏) 문중은 누정 10개를 세우고 보살펴, 이 지역에서 '거창신씨 거창신씨'하는 이유를 알게 한다. 또 한편으로 수승대에 있는 요수정(樂水亭)은 흔치 않게 정자 내부에 방이 있다. 이는 거창이 겨울엔 만만치 않은 산간지역 기후임을 떠올리게 한다.
여러 선비를 배출한 안의현(安義縣)은 이후 안의군으로 되었다가 1913년 거창군·함양군에 나뉘어 편입됐다. 일제가 굳이 안의지역을 찢어놓은 것은 이곳 사람 기개를 표현한 '함양 사람 열이 안의 송장 하나 못 이긴다'는 우스갯소리가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정유재란(1597년) 때 안의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켜 혼내줬다는 점도 뒷받침된다. 어떤 이는 "지금도 안의 사람들 동창회 하면 그 지역 사람 전부 다 오는 듯하다. 대단하다"며 혀를 내두른다.
오늘날 거창 북상면·위천면·마리면은 안의 지역에 속했던 곳이다. 거창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내세우는 인물인 정온(1569~1641) 선생 종택이 위천면에 자리하고 있다. 함양이 자랑하는 정여창(1450~1504) 선생에 대해 거창 사람들은 '함양 사람이 아니라 안의 사람'이라며 이곳과의 연결고리를 잇는다. 하지만 무신란(1728) 때 안의 사람이던 정희량(鄭希亮·?~1728)이 가담했다 실패하면서 안의뿐만 아니라 거창도 나라 눈 밖에 났다한다. 이 지역 선비들이 큰일 할 길도 함께 막혔을 수밖에 없었을 테다. 이 때문인지 이 지역에서 역사적 인물을 들춰보고자 하면 심심하기는 하다.
거창읍 가지리 쪽에는 그 의미와 달리 외면받고 있는 사당이 있다. 1862년 거창민란을 주도한 송재 이승모를 모신 '인민사(仁民祠)'다. 1932년 지역민이 나서 양반도 아닌 평민 사당을 세웠다. 1980년대 도올 김용옥 선생이 농활 학생을 이끌고 거창을 찾았다가 인민사를 보고 '평민 사당은 이례적'이라며 아주 놀라워했다고 한다. 현대사에서 거창 농민·사회운동은 유별난 면이 있는데, 그 출발점을 여기서 찾으려는 이들도 있다. 한때 지역 뜻있는 이들이 인민사에서 추모제를 올리기도 했지만, 다시 발걸음은 끊겨 지금은 폐허로 내버려져 있다.
거창의 현재 모습으로 시선을 옮겨보면 도시와 시골이 함께 보인다. 군 단위이니 시골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웬만한 도시에 밀리지 않을 법한 읍 중심가 규모에 놀라게 된다. 이곳 사람들은 "유명 메이커 중에서 안 들어온 게 없다"고도 한다. 특히 수두룩한 입시학원은 '교육 거창'의 한 단면을 보게 한다. 들리기로는 '아빠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외지에서 엄마만 아이와 함께 들어온 이들이 많다'고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 이름 알려진 거창고등학교 외 다른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가운데는 '거창고 애들도 못 푸는 문제를 내가 어떻게 풀어'라고 내뱉기도 한단다.
읍내 거창박물관에는 1864년 판 재간본인 대동여지도가 전시돼 있다. 밀양 박씨 문중에서 보존하다 기증한 덕인데, 이런 소중한 것을 누구나 자유롭게 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감사할 일이다.
읍내를 벗어나 아래쪽으로 눈 돌리면 신원면이 들어온다. 거창 사람들 머릿속 한 곳에는 여전히 '거창 사건'이 자리한다. 특히 많은 노인은 봉인했던 눈·귀·입을 계속 풀지 못하고 있다. 신원면 거창사건추모공원 한 묘비에 새겨진 글귀 하나를 옮겨본다.
'아버지! 정말 불러 보고 싶었던 말입니다. 소자와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육십오 일을 함께 살았다고 어머니께서 살아생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그러나 불효자는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살아 생전 말씀하시더군요. 너거 아버지 얼굴 볼라카면 명겅놓코 네 얼굴 보라고요. 아버지! 소자가 정말 아버지를 닮았습니까? 그렇게 비명에 아버지를 먼길 보내시고 천 구백 구십 구년 이월 삼일 어머니께서도 먼저 가신 아버지 길 따라 가셨는데 혹시 얼굴 알아 보시고 만나셨는지요. 만나셨다면 근심 걱정 없는 영원한 안식처인 그 먼 곳에서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 영원히 영원히 누리소서. 갓난아이가 오십대 중반을 바라보며. 소자 성제 통곡으로 씀'.
거창에서 놓치지 않고 둘러봐야 할 곳
◎수승대 거북바위 = 거북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바위 곳곳에는 소나무가 자리하고 있고, 둘레에는 퇴계 이황이 '수송대'에서 '수승대'로 개명할 것을 제안한 5언 율시를 비롯해 풍류가 담긴 글이 가득하다. 위치: 위천면 황산리 890
◎월성계곡 사선대 = 바위 4개가 포개진 형상을 하고 있고, 바위 꼭대기에서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보고 있으면 바람에 흔들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느낌이며, 그 아래 월성계곡 맑은 물소리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위치: 북상면 월성리
◎거열산성 = 거열산성군립공원 내 건흥산 563m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다. 삼국시대 백제가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자연석과 잘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3~9m 높이로 2.1km에 걸쳐 쌓여 있다. 위치: 거창읍 상림리 거열산성군립공원 내
◎양평리 석조여래입상 = 높이 4m에 이르는 석가여래석불이다. 8세기 통일신라 전성기 양식을 계승한 지역 대표 불교 문화재다. 위치: 거창읍 양평리 479-1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 = 1111년 고려시대 천연동굴 암벽에 불상을 새긴 마애불이다. 표정이 토속적이며, 특이한 대좌형식이 담겨있다. 위치: 위천면 상천리 산 6-2
◎황산마을 옛 담장 = 황산마을은 거창 신씨 집성촌으로 황토와 돌을 사용한 토석담장이 예스러움을 담고 있다. 2006년 문화재청에서 등록문화재로 지정했으며 10여 곳에서는 민박도 한다. 이 마을에는 벽화담장도 있어 대비되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위치: 위천면 황산1길 85
◎인민사 = 1862년 진주에 이어 거창에서도 민란이 있었는데 이를 주동한 가지리 출신 이승모의 의로운 정신을 기리기 위해 민이 세운 사당이다. 지금은 관리되지 않아 폐허로 방치돼 있다. 위치: 거창읍 가지리 567
◎거창박물관 = 고 최남식·김태순 씨 유물 기증을 계기로 1988년 전국 최초 군 단위 공립박물관으로 개관했다. 현재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1300여 점이 종류별로 전시돼 있어 지역 역사를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다. 위치: 거창읍 수남로 2181
◎거창사건 추모공원 = 1951년 신원면에서 국군에 의해 희생당한 민간인 719명 넋을 기리기 위해 2004년 조성됐다. 천유문·위패봉안각·참배광장·위령탑·제1묘역·청연묘역·박산합동묘역·역사교육관·학살터 등이 있다. 특히 박산합동묘역에는 5·16 군사정부가 정으로 쪼은 흔적이 담긴 위령비가 쓰러져 있다. 위치: 신원면 대현리 551
◎거창사과테마파크 = 사과관과 체험관으로 나뉘어 있다. 거창읍 정장리에 있는 사과관에서는 전시품·공원을 둘러볼 수 있다. 고제면 봉계리에 있는 고제체험관에서는 고지대에 펼쳐진 재배단지를 구경할 수 있으며 분양을 통한 직접 재배도 가능하다. 거창읍 정장리 및 고제면 봉계리
◎청소년수련원 내 천문대 = 공해가 없는 지역에 있어 밤하늘이 워낙 깨끗해 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관측할 수 있다. 겨울에도 은하수를 볼 수 있다. 청소년수련원 이용자 대상이지만, 그 외 사람들도 전화로 시간을 맞추면 이용 가능하다. 위치: 북상면 월성리 1608, 전화 055-945-2913
◎당산리 당송 = 600년 된 높이 18m 적송으로 천연기념물 제410호다. 광복·한국전쟁 등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울음소리를 낸다는 영송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3일 전에도 울음소리를 냈다고 한다. 위치: 위천면 당산리 331
[거창사람] 천연기념물 '당산리 당송' 마을 주민
거창군 위천면 당산리에는 천연기념물 제410호 '당산리 당송'이 있다. 높이 18m·둘레 4.05m로 껍데기는 거북등 모양을 하고 있다. 밑동에는 도끼 자국이 남아있는데, 여러 모진 세월을 견디며 60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소나무에는 영험함이 깃들여 있다고 전해진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1945년 광복, 1950년 6·25 때 몇 달 전부터 밤마다 '웅~ 웅~ 웅~'하고 울며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려줬다 한다.
마을을 찾아 소나무를 둘러보고선, 옆 정자에 예닐곱 모여있는 할머니에게 "소나무 울음소리 들어보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가운데 가장 젊은 분이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실 때 여기 우리 어머니가 들으셨다"라고 했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그날 기억을 전해 줬다.
"우리 아들이 밤에 안 들어와 새벽 2시쯤 집 앞에 나가 기다리고 있었거든. 그런데 소나무에서 소 우는 소리처럼 '웅~ 웅~'하는 소리가 계속 나는 거야. 계속 나. 영판 소 우는 소리야. 그땐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
며느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한번 운 게 아니고 여러 번 울었나 봐. 우리 어머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여럿 들었다네. 그러고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그리됐다 하더구먼. 그제야 우리는 '아이고. 그래서 소나무가 울었네'라고 생각한 거지. 이제는 소나무 울면 안 되지. 나라에 안 좋은 일 일어나는 거니까."
이야기가 이어질 때 할머니 아들이 나와 "그때가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시기 3일 전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소나무에 대한 오래전 기억을 덧붙여 전했다. "내 어릴 때 이런 소나무 세 개 있었는데, 하나는 늙어서 죽고, 또 하나는 태풍 사라 때 쓰러져 죽었어. 그래도 이 나무는 용케 살아남았지. 이제 나이가 다 됐는데, 천연기념물 지정돼서 일주일에 한 번 약치고 그렇게 관리하기 때문에 근근이 살아가는 것 같다."
이 마을은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소나무에 제사를 지내며 마을과 나라의 평안을 기원한다.
거창 금원산 자연휴양림을 찾았습니다. 고산 분지 지형인 거창은 사방이 산입니다. 그 한쪽은 가야산, 다른 한쪽은 덕유산인데 모두 국립공원입니다.
애써 형용사를 붙일 필요 없이 훌륭한 산세를 끼고 있는 지역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훌륭한 산은 당연히 좋은 숲과 계곡을 끼기 마련입니다. 거창군이 금원산 일대에 조성한 자연휴양림 역시 그런 자연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예가 되겠습니다.
금원산 자연휴양림에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계속 올라가면 문바위를 만납니다. 사실, 바위라고 하니까 바위인줄 알지 그냥 보기에는 높은 절벽이었습니다. 바위 밑에 있는 안내를 보면 '단일 바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바위'라고 해놓았습니다. 사실을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덩치가 컸습니다.
문바위를 돌아 조금 올라가면 '가섭암지 마애삼존불상'으로 가는 길이 나옵니다. 마애삼존불상은 골짜기 큰 바위굴에 새겨진 마애불입니다. 가섭사지 뒤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바위굴을 만나게 되고 바위굴 안으로 이어진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바위 안에 삼존불이 새겨져 있습니다. 마침 올라갔을 때는 몇몇 분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요. 옆에 사람이 얼쩡거려도 전혀 신경 쓰지 않더군요.
문바위와 삼존불은 고려시대 이 자리에 있었던 절에 들어가 있는 시설이었다고 합니다. 문바위가 일주문 역할을 하고, 마애삼존불이 있는 동굴이 암자 역할을 했겠지요. 1770년대까지 절이 있었다는 곳에는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다만, 석재 몇 개만 볼 수 있습니다.
거창군 위천면에는 '정온 선생 고택'이 있습니다. 동계 정온(1569~1641)은 거창이 자랑하는 선비입니다. 이웃 함양이 '선비의 고장'을 내세우며 꼽는 인물이 일두 정여창이라면, 거창 역시 선비 문화 자산이 뒤떨어지지 않음을 내세우며 정온을 꼽습니다. 함양에 일두 고택이 있듯, 거창에 정온 고택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정온 선생 고택에 도착하니 입구는 공사 중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경남의 재발견' 취재를 하면서 유난히 보수 중인 옛 건물을 많이 만나게 되는군요. 지방자치단체에서 한창 보수하는 기간인가 봅니다. 안에 들어서자 어수선한 밖과는 달리 잘 정돈돼 있었습니다. 고택은 크게 앞뒤로 2동이 서 있는데, 뒤에 있는 건물에는 정온 선생 후손이 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옛 건물을 가장 잘 보존하는 방법은 사람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요즘 집과는 구조가 달라 살기 불편한 면도 있습니다만, 사람이 살면 건물 생명력도 그만큼 길어집니다.
정온 선생 고택도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부엌이나 시설을 조금씩 손을 보면서 후손들이 살고 있어서 그런지 집 구석구석 사람 사는 냄새가 느껴졌습니다.
마침 인기척 때문에 나온 분이 이 집안 며느님이셨는데,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 살만 하다고 하시네요. 잠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 했는데 일정에 쫓겨 좋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사람이 한꺼번에 많이 올 때는 어쩔 수 없지만, 간혹 한 두 명씩 오면 늘 차를 대접한다고 하시는군요. 고마운 마음만 받았습니다.
거창 위천면에는 거창 신 씨 집성촌인 '황산고가마을'이 있습니다. 1700년대 중반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彛) 선생이 오면서 번성한 씨족 마을로 인근에서 손꼽히는 대지주들이 살던 곳이었다 합니다.
이곳에는 등록문화재 제259호로 지정된 황산마을 옛 담장이 있어, 잠시 돌담길 걸으며 옛 정취에 빠져 봄직합니다. 한쪽에는 벽화마을도 있어 또 다른 풍경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황산마을에는 전통한옥 민박집이 10곳 넘게 있어 하룻밤 이어가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거창에서 만든 관광안내책자 숙박 정보를 보면 이곳 민박집 대표가 모두 신 씨인데, 단 한 명만 정 씨인 점이 눈길 끌기도 합니다.
이 마을에는 정갈한 밥상도 준비돼 있습니다. 농촌진흥청 향토음식지원사업인 '농가 맛집'이기도 한 '돌담 사이로'라는 곳이 유은(裕隱) 고택에 있습니다. 남편이 인근 덕유산에서 채취한 목이버섯·꾀꼬리버섯·표고버섯·곤드레·아주까리·취나물·고사리·부지깽이 같은 것들이 밥상에 오른다고 하는데, 저희 경남의 재발견 팀은 일정이 맞지 않아 그 맛을 보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굴곡 많은 우리네 현대사에서 거창은 뒷걸음질치는 곳이 아니었다. 1979년 농우회가 조직됐고, 이후 아림농민회·거창농민회로 이어졌다. 1980년대 초에는 마을단위 한들농민회가 있기도 했다. 농민운동 동력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1984년 우리문화연구회를 만들어 농민운동에 힘을 보태기도 한 한대수(56·사진) 씨를 찾았다. 그는 현재 거창귀농학교·아시안1인극협회 대표를 맡고 있다.
한 씨는 이 지역 농민·사회운동이 강성이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은 데서 찾았다.
"거창고를 설립한 전영창 선생이 유신에 반대하면서 그 졸업생들이 사회운동에 이바지하는 등 하나의 세력이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거기에다 크리스천아카데미 교육받은 분들, 김대중 추종하는 몇몇 분이 합해지면서 반정부 투쟁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거창YMCA가 1984년 만들어지면서 그쪽을 통해 지식인들이 외부에서 많이 모였죠. 또한, 거창엔 법원·세무서·교육청이 있어 공무원·교사가 많았는데, 이들이 지역운동을 선도하지는 못하더라도 힘을 주는 역할은 한 듯합니다."
이 말을 듣고 보면 거창이 그리 배타적이지는 않나 보다. "지역 토호들 처지에서 반감은 있었겠지만, 자기들 이권에 크게 침해하지는 않는 걸로 받아들인 듯합니다."
1970년대 중반 거창에 온 정찬용 전 참여정부 인사수석 얘기가 빠질 수 없다. "전영창 선생이 '거창고를 설립했지만, 외지 학생이 많아 오히려 이곳 아이들을 바깥으로 쫓아내는 것 같다. 거창으로 봐서는 잘한 것 같지는 않다. 여기서 지역 인재를 길러봐라'고 해 오게 됐다 합니다."
이렇게 거창에 발들인 정찬용 전 인사수석은 1984년 거창YMCA 총무를 맡으며 제2 고향을 활발히 이끌었다.
이래저래 종합해 봤을 때, 이곳 사람들은 바깥사람들을 포용해가며 자신들만의 저항정신을 펼쳐 나간 듯하다.
한 씨는 덧붙였다. "1862년 진주민란에 이어 여기서는 이승모·이승진 같은 분들이 주도해 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기린 사당이 있는데 지금 방치돼 있습니다. 이러한 분을 받드는 추모제에서 시작해 거창 저항정신 당위성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지역에서 이런 부분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거창군청 건물 입구에는 사과 조형물 두 개가 나란히 하며 눈길을 달라 한다. 거리 곳곳 알림판·시내버스정류장도 앙증맞은 사과 모양을 하고 있다. 사과테마파크도 있어 고제면 봉계리에서는 체험시설, 거창읍 정장리에서는 사과관 및 공원을 접할 수 있다. '거창 사과'가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이쯤 되면 먹을거리로 이 지역이 무엇을 내세우려는지 알만하다.
사과가 우리나라에 씨앗을 내린 것은 1906년 일본에서 국광·홍옥을 받아들이면서다. 거창에서는 1930년 한 일본인이 거창읍 10여 농가에 묘목을 심으면서로 전해진다.
그래도 거창 사람들은 "1940년 계림농원을 설립한 최남식 선생이 이 지역 최초 보급자"라고 말한다. 본격적인 대량 생산 및 보급 시발점으로 받아들이면 될 듯하다.
1966년 정부 지원 아래 생산량·재배 면적이 급격히 늘어났고, 오늘날에는 1700여 농가가 한해 2만 8000t을 생산하며, 576억 원 매출을 올리고 있다.
자연은 이곳 사람들에게 사과 받아들일 조건을 선사했다. 거창은 대륙성 기후로 일교차가 커 사과 당도 높이기에 알맞다. 밤 기온이 뚝 떨어질수록 낮에 축적된 포도당이 덜 빠져나가 그만큼 당도도 높아진다. 또한, 거창은 약산성 토질이라 사과와 잘 맞다.
1980년대에는 거창읍을 비롯해 남상면·가조면 같은 곳이 특히 부합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온난화때문에 사과는 다른 곳을 찾았다. 오늘날 그곳이 거창 최북단인 고제면이다. 덕유산 자락에 있어 해발이 높고 일교차가 심한 곳이다. 거창군 평균 고지가 220m인데 고제면은 400m 이상으로 평균 기온도 읍내보다 5도 이상 낮다.
옛 시절 고제면은 '겨울잠 자던 곳'이었다. 산골 오지에다 겨울에 폭설이 자주 내려 옴짝달싹하기 어려운 척박한 동네였다. '깡촌'이 그러하듯 살림살이가 넉넉할 리도 없었다. 그런데 고랭지채소를 하면서 어깨를 조금씩 폈고, 또 그러다 사과로 옮기면서 이젠 '부농' 얘기를 할 만하게 됐다. '고급 승용차에 삽자루 싣고 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는 데서 이 지역 분위기가 그려진다. 그렇다고 고제면 전체가 '부농'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는 않는다.
어디서나 늘 그렇듯 바깥사람들이 들어와 땅 재미를 보고, 여기 사람은 소농으로 남는 예도 있다.
이곳 사람들은 살림살이가 아주 어려웠던 옛 시절에 읍내 사과단지로 품 팔러 나갔다 한다. 이제는 농장 주인이 되어 반대로 읍내 사람들 일손을 빌린다 하니, 사과가 거창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아 보인다.
1980년대까지는 거창군 농가 60%가 누에고치를 생산하며 이 지역 소득에 큰 몫을 했지만, 그 자리에 역시 하나 둘 사과나무로 채워졌다 한다. 그 외 딸기·포도·오미자·버섯·고랭지 채소·산양 산삼 등은 지금 이 지역 소득에 보탬이 되고 있다.
밥상 음식을 둘러보면 뜻밖에 눈길 가는 것이 많지 않다. 거창군은 1000m 고지 산 13개가 173km에 걸쳐 에워싸고 있다. 88고속도로 뚫리기 이전에는 오지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그들만의 특별한 먹을거리가 생성될 법도 한데, 막상 그렇지도 않다. '비빔밥 하면 전주'가 떠오르듯, 군에서는 2006년부터 이 지역만의 향토 음식 만들기에 노력하고 있는데, 아직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그나마 축산업에 눈 돌리고 천을 끼고 있는 덕에 갈비탕(찜)·어탕 같은 것에서 이름을 내걸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이웃이라 할 수 있는 함양·산청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이들 지역보다 특별히 더 내세우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래도 '함양 안의갈비'와 '거창 원동갈비'를 같은 선상에 둔다. 거창 원동갈비 뿌리는 안의갈비에서 찾는 것이 맞을 듯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이름 면에서 밀리지 않는다며 "대구·김천·서울 같은 곳에서 일부러 먹으러 온다"고 자랑한다. 안의갈비찜·원동갈비찜 둘 다 먹어본 이들은 어느 것이 더 좋다를 떠나 양념에서 그 차이를 느끼기는 하는 듯하다. 거창읍 서변리 원동마을로 가면 식당 서너 군데가 있다. 갈비탕만 하는 집도 있고, 갈비찜을 내세우는 집도 있고, 둘 다 다루며 외관에 신경 쓴 곳도 있다.
거창읍 거창교~중앙교 사이에는 추어탕거리가 있다. 군이 지정한 향토음식점 네 곳에서 추어탕·어탕국수를 내놓고 있다. 가장 오래됐다는 추어탕집이 20년 채 안 됐으니, 그 내력이 그리 긴 편은 아니라 하겠다.
거창읍 거창시장 안에는 수제비·칼국수·국수를 내놓는 허름한 식당이 10여 곳 된다. 예전 장날 어르신들이 찾던 것들이라 지금도 가격을 쉬이 올리지 못해 국수 한 그릇 2500원에 내놓는다.
거창군 읍내에는 횟집이 종종 보이기도 한다. 바다 없는 곳이라고 생선 먹지 말라는 법 없지만, 눈길이 가기는 한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폐쇄된 지형에 제대로 뚫린 도로조차 없었으니 생선 구경은 애초 기대도 말아야 했다. 어쩌다 꽁치 먹을 기회가 있기는 했다. 큼큼한 냄새가 나 원래 그러려니 하고 먹었는데, 그게 썩은 냄새였다는 걸 안 건 한참 나중에서였단다. 그나마 1984년 88고속도로가 뚫리며 제대로 된 것을 만나게 됐다. 인근 함양에 '썩은 갈치 신세 면했다'는 예전 말이 있었듯, 거창 역시 옛 이야기일 뿐이다
거창에 가면 맛봐야 할 음식
◎갈비탕·갈비찜
〈대전식당〉 = 국내산 젖소. 갈비탕 특 1만 2000원·보통 9000원, 수육 특 4만 5000원·보통 4만 원, 공깃밥 1000원/거창군 거창읍 서변리 6-5/055-942-1818
〈원동별미갈비찜〉 = 국내산 젖소. 갈비찜 대 4만 5000원·중 4만 원·소 3만 5000원, 갈비탕 특 1만 2000원·소 9000원, 볶음밥 1인분 2000원·공깃밥 1000원/거창군 거창읍 서변리 31/055-942-1850
〈삼산이수〉 = 호주산. 갈비찜 대 4만 5000원·중 4만 원·소 3만 5000원, 갈비탕 특 1만 2000원·보통 9000원, 볶음밥 2000원·공깃밥 1000원/거창군 거창읍 서변리 4-2/055-942-1844
◎추어탕·어탕국수
〈구구추어탕〉 = 추어탕·어탕국수 6000원, 닭발 1만 원/거창군 거창읍 대평리 1485-50/055-942-7496
〈강촌추어탕〉 = 어탕수제비·어탕국수·추어탕 6000원/거창군 거창읍 김천리 1-2/055-944-7337
〈거창추어탕〉 = 추어탕·어탕국수 7000원, 미꾸라지튀김 대 3만 원·소 2만 원/거창군 거창읍 김천리 472-99/055-943-0302
〈금호추어탕〉 = 추어탕·어탕국수 6000원, 메기매운탕 대 4만 원·소 3만 원, 메기찜 대 4만 원·소 3만 원/거창군 거창읍 송정리 1/055-944-8005
◎수제비·국수
〈왕개미분식〉 = 국수 2500원, 수제비·칼국수 3000원, 비빔밥 4000원/거창읍 대평리 1179/055-944-1871
〈영남식당〉 = 야채수제비·보리밥·국수 3000원, 콩국수 4000원/거창군 거창읍 중앙리 858-1/055-944-5589
〈옛날집〉 = 칼국수·수제비·국수 4000원, 콩국수 5000원, 된장찌개·김치찌개 5000원/거창군 거창읍 김천리 375-1/055-943-0776
◎애우(쑥 먹인 한우)·애도니(쑥 먹인 돼지)
〈거창축협 한우팰리스〉 = 국내산 1등급 한우(170g 기준) 모둠 1만 3000원·등심 2만 3000원·갈빗살 2만 3000원·특수부위 모둠 2만 3000원·육회(200g) 1만 5000원, 후식류 된장찌개 백반 1000원·소면 2000원·냉면 4000원, 점심특선 육개장 6000원·냉면 6000원·곰탕 7000원·육회비빔밥 7000원·비빔냉면 7000원·불고기정식 9000원/거창군 거창읍 김천리 315-1/055-943-9203
〈거창 애도니〉 = 국내산 돼지(170g 기준) 삼겹살 8000원·목살 8000원·돼지갈비(200g) 8000원·훈제삼겹 9000원·돼지한마리(600g) 3만 원·떡갈비(360g) 8000원, 국내산 소고기류(150g 기준) 등심 2만 5000원·갈빗살 2만 5000원·꽃살 3만 원·소한마리(600g) 6만 5000원·육회(150g) 2만 원·한우불고기(250g) 1만 2000원, 점심특선 떡갈비정식 6000원·김치찌개 6000원·한우불고기정식 9000원/거창군 거창읍 상림리 527-4/055-942-5945
◎향토 음식점
〈돌담 사이로〉 = 산내음밥상 2만 원, 산채비빔밥+수육 1만 5000원, 산채비빔밥 9000원/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607/055-941-1181
〈신토불이〉 = 청국장·순두부·촌두부 6000원, 촌두부 김치찌개 7000원, 청국장 샤부샤부 3만 원, 촌두부전골 대 3만 원·소 2만 5000원, 황태전골 대 3만 원·소 2만 5000원, 황태구이 1만 5000원/거창군 고제면 농산리 306/055-943-4307
〈남덕유산 대표 산나물집〉 = 산채비빔밥 7000원, 산채정식 1만 원, 메밀파전 7000원, 한방백숙 4만 원, 옻닭 4만 5000원, 동동주 7000원/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1710-5/055-944-5351
〈옥계촌〉 = 옥계한방백숙·옥계옻닭·옥계제피백숙·옥계도리탕·오리훈제 4만 원/거창군 북상면 창선리 30/055-942-5197
거창시장에는 먹자골목이 있습니다. 일명 '수제비·국수' 골목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고향 떠난 이들이 찾으면 꼭 들리는 곳이라고 합니다.
가장 큰 강점은 착한 가격입니다. 어르신들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수제비·국수·칼국수 가격이 2500원에서 시작합니다.
각 식당은 허름하지만, 재래시장 특유의 친근함이 전해졌습니다.
저희는 '영남식당'이라는 곳을 찾았습니다. 다른 곳에 비해 늦게 시작한 곳이지만 이래저래 입소문이 퍼져 있는 듯했습니다.
야채수제비·국수, 그리고 보리밥 또한 3000원이었습니다.
야채수제비는 밀가루에 채소를 갈아 넣은 덕에 초록색·주황색·보라색, 이렇게 삼색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매우 고추 들어간 국물은 아주 맵싹했습니다. 전날 술을 먹은 탓에 식당 오는 길이 힘들었었는데, 국물 한입 한입 뜰수록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몸은 뜨거움에 부들부들 떨고, 입은 '으~ 시원하다~'를 연신 내뱉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문득 별스런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어릴 적 목욕탕에서 아저씨들이 뜨거운 탕에서 '시원하다~'를 외치는 것이 그리 이상해 보였는데, 이제 나도 그런 아저씨가 됐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참고로 저는 37살입니다.
어쨌든 땀 뻘뻘 흘리며 한 그릇 비우고 나니 몸이 한결 개운했습니다.
함께한 두 사람은 국수를 먹었는데요. 이들은 애초 시원한 것을 주문했지만, 주인아주머니가 잘못 알아듣고 뜨거운 것을 내왔습니다. 이들은 애꿎은 국수에 불만의 눈빛을 쏘아붙였습니다. 하지만 유일한 밑반찬으로 나온 김치와 제법 어울린 듯 투덜거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위천을 끼고 있는 거창은 추어탕·어탕국수를 지역 대표 음식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거창읍 거창교~중앙교 사이에는 추어탕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식당이 우후죽순 있는 건 아니고, 4곳이 단출하게 형성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저희는 '구구추어탕'이라는 곳을 찾았습니다. 1995년 문을 열었으니 아직 20년 채 되지 않았지만, 제법 입소문 난 곳이었습니다. 2008년 '거창군 향토음식점'으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추어탕·어탕국수 모두 6000원이었고, 안주용으로 1만 원 하는 닭발을 내놓고 있었습니다.
일행 4명은 추어탕·어탕국수를 두 그릇씩 주문했습니다. 큼직한 배춧잎 들어간 추어탕은 조미료가 느껴지지 않는 개운한 맛이었습니다. 어탕국수는 유난히 걸쭉한 특징이 있었고, 공깃밥은 별도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피 가루를 큰 병단지에 넣어둬 눈길이 갔습니다. 습기로 눅눅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배려인 듯했습니다.
생선은 잡고기·양식 미꾸라지·메기 등이 들어가며, 화약 조미료는 일절 쓰지 않고 다진 마늘을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식당 안은 어르신들로 가득 찼는데, 어탕국수를 좀 더 선호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 항상 건강하세요. 큰아들·큰며느리 올림'이라고 적힌 화분이 눈에 잘 보이게 놓여 있기도 했습니다. 주소: 거창군 거창읍 대평리 148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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