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한의학의 원류를 찾아서_08

醉月 2012. 8. 23. 07:18

 

한의학과 중의학 등 동양의학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문화권에서 장중경(張仲景, 150~ 219)의 가치는 남다르다. 여전히 그가 남긴 의학 이론과 처방을 주요하게 쓰는 한의사가 부지기수이며, 파생되어 발전한 학파도 상당수다. 특히 일본에서는 그의 처방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각종 관련 파생 약품이 개발되어 있다. 한국에서도 장중경의 처방으로 각종 질환을 치료하는 한의사가 많으며, 정규 교과과정으로 편입돼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래서 의성(醫聖) 장중경이라는 호칭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장중경의 이름은 기(機)이며 자(字)는 행(行)이다. 지금의 허난성에 해당하는 동한 남양(南陽)에서 태어났다. 남양은 동한(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光武帝)의 고향이다. 광무제는 전한(前漢)의 재상 왕망(王莽)에게 찬탈당한 한(漢)나라를 되찾아 재건한 황제였으며, 남양 지역은 뛰어난 풍수지리와 문화 역사적인 조건으로 역대로 인물이 많은 곳으로 유명했다. 장중경은 어릴 때부터 유가 경전을 즐겨 읽었고 총명함이 남달랐기에 가문에서는 장중경이 장차 벼슬길로 나아갈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장중경이 훗날 의학자와 의사의 길을 걷게 되는 데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편작의 일생을 다룬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에는 인술을 펼친 편작의 비범함이 담겨 있다. 관심과 호기심이 날로 커지면서 의서를 서서히 접하는 단계에 이른다. 당시 의사는 그리 존경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이는 용의(庸醫)라 불리는 의사들이 의술에는 관심이 없고 환자의 돈을 갈취할 궁리만 하는 행태가 심했기 때문이며, 유학자와 관료를 가장 귀하게 여긴 당시 풍토도 있었다. 어느 시대에도 재물을 추구하며 의를 그르치는 자들은 있기 마련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남양 일대에 이름 높은 명사 중에 하옹(何顒)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동탁(董卓)도 하옹의 진가를 알아보고 여러차례 등용을 권했을 정도였다. 하옹은 신병을 이유로 거듭 등용을 고사하고 칩거했다. 장중경이 16세 되던 해 아버지는 중경을 데리고 하옹을 만났다. 아버지는 내심 중경의 재능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하옹은 중경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아버지에게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의사가 될 자질이 있다고 말해준다. 이때부터 가문에서는 의학자의 길을 걷겠다는 중경의 뜻을 점차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중경은 날개를 단 듯 앞으로 뻗어나가게 된다.


홀로 의서를 탐독하길 수년, 중경은 스승을 찾아 나선다. 당시 남양에서 가장 이름 높은 의사는 장백조(張伯祖)였다. 장중경은 장백조를 찾아가 예를 갖춘 뒤 제자로 삼아주길 청했다. 장백조는 장중경의 됨됨이와 자질을 장기간에 걸쳐 살핀 뒤 제자로 받아들였고, 그의 학문과 경험을 전수했다. 장중경은 장백조의 가르침으로 황제내경, 난경 등 의학서적을 독파하기 시작했고, 장중경의 진료를 측근 거리에서 보면서 하루하루 실력을 키워갔다. 장백조도 서서히 장중경에게 치료의 기회를 주었고, 일취월장을 거듭해 남양 지역에서 장중경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장백조의 전수를 받은 장중경은 양려공(陽勵公)을 스승으로 모시고 임상 경험을 더욱 쌓았다. 또 양양 지역의 왕신선이라 불리는 외과 의사를 찾아가 전수받는 등 천리가 멀다하지 않고 스승을 찾았고, 각 의가의 비방을 찾아 나섰다. 당시 의가들 사이에는 서로 견제하고 비방하는 악습이 있었고 비방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지만, 장중경은 명리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명성에도 불구하고 늘 자신을 낮춰 예를 갖췄기에 각 의가의 정수를 전해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훗날 장중경은 자신만의 이론을 구축하고 수많은 처방을 만들어 천하에 공개했으니, 그에게 도움을 준 의가들의 선심도 더욱 좋게 발휘된 것이 아닌가 한다.


청나라 명의 장지총(張志聰)은 “불명사서자불가이위유, 불명상한론자불가이위의(不明四書者不可以爲儒, 不明傷寒論者不可以爲醫)”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즉, 사서에 밝지 않다면 유학자가 될 수 없고, 상한론에 밝지 않다면 의사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서는 아시다시피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뜻하고, 상한론은 장중경이 훗날 저술한 의서다. 장중경과 그의 저작이 후대에 어느 정도의 위상을 떨치게 되는지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장중경과 동시대 인물로 화타가 있었다. 화타는 장중경의 저서를 생전에 접할 수 있었고, “저진시일본구활인명적호서(這眞是一本救活人命的好書)“이라는 찬사를 남겼다. 즉, 진실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좋은 서적이라는 뜻이다.

 

장중경이 활약한 시대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후한 말기 난세였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이 자웅을 겨뤄 전쟁이 끊이지 않아 유랑민이 넘쳐났고, 전염병과 부상으로 신음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런 세태를 틈타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이비 종교와 학설이 판을 쳤고, 의학에서도 인술과 연구 보다는 가짜 약을 팔기 급급한 돌팔이 의사가 많았다. 질병에 죽고 가짜약의 합병증에 죽고, 환자들은 의지할 곳이 없었다.


장중경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역작 상한론(傷寒論) 서문에는 당시의 풍토를 개탄하는 구절이 나온다. 그는 사람들이 신묘한 의술에 정진하지 않아 군주와 부모의 병을 고치지 못하고, 사람들을 재난에서 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권세에 빌붙어 명리만 추구하니 덧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중경의 업적은 그의 곧은 마음가짐에서 비롯됐다. 더군다나 난세에서 그러했으니 조조, 유비, 손권에 비할만한 난세영웅이라 할 수 있겠다.


당시는 전반적으로 기온이 낮은 시대로 질환의 상당수가 한기(寒氣)와 관련돼 있었다. 역사 기록으로도 조비가 늦가을에 군사훈련을 하려 했으나 강물이 얼어 취소했다는 기록도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실이 많이 남아 있다. 장중경도 상한론 서문에서 건안(建安) 이래 십여 년 만에 일가 친척의 2/3가 죽었고, 열에 일곱은 상한으로 사망했다고 썼다.


전편에 서술한 바와 같이 차곡차곡 의술을 익혔던 장중경은 훗날 장사 태수로 부임하게 된다. 당시 장사는 전임 태수 손견을 비롯해 군웅이 겨루던 곳으로 전염병이 끊이지 않았다. 장중경은 태수로 부임한 뒤에도 업무를 보는 외에 환자를 틈틈이 진료해 뚜렷한 성과를 남겼다. 그는 상한 즉 외부의 한사의 침입으로 병이 발생하는 것에 있어서 병을 태양(太陽), 양명(陽明), 소양(少陽), 태음(太陰), 소음(少陰), 궐음(厥陰) 등 6경(經) 병으로 구분했다. 이는 일종의 침입 단계 혹은 인체의 상태에 따른 병의 진행 부위를 파악하는 개념이다. 여기에 진단을 위한 객관적인 기준과 근거를 마련했다. 한의학의 원전이라 불리는 황제내경이 병의 원인과 생리, 병리에 대해 다뤘다면, 상한론에 이르러서는 질병의 진단하고 치료하는 기술을 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 상한론의 진단법과 처방은 정확하고 신속한 것으로 유명하다.


후한 환제(桓帝) 제위 시기, 어느 해 봄 하남 완성 일대에 질병이 창궐했다. 마을마다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장중경을 찾는 인파가 끊이지 않았다. 용릉(舂陵)에 사는 유원외(劉員外)라는 사람도 그 중 하나였다.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장중경의 명성을 듣고 그를 찾아온 것이다. 장중경이 유원외의 집에 도착해 보니 그의 아들은 불덩이에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온 상태였다. 잘못된 투약으로 합병증까지 생긴 상태였다. 장중경은 잠시 진찰한 뒤 처방전을 적어주고는 서둘러 다른 환자를 보기 위해 자리를 떴다. 장중경은 달이 산봉우리를 넘어가서야 마지막 환자를 보고 집에 올 수 있었다. 유원외는 장중경이 남기고 간 처방대로 약을 지어 아들에게 먹였다. 처방의 내용은 갈대뿌리, 띠뿌리, 민들레 뿌리였다. 조촐한 처방이었지만 이삼일이 지나자 아들은 정신이 돌아오고 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갈대뿌리는 한의학에서 노근이라 하고, 띠뿌리는 백모근이라 하며, 민들레 뿌리는 포공영이라고 한다. 모두 열을 내려주고 항균, 항바이러스, 면역증강 작용 등 훗날 밝혀진 우수한 약재들이다. 보름 후 아들은 완쾌했고 유원외는 잔치를 열어 장중경을 초대했다. 하지만 장중경의 마음은 여전히 죽어가는 환자들의 고통스런 모습으로 가득했기에 편안히 잔치에서 웃고 떠들며 즐길 수 없었다. 잔치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중경은 정중히 유원외에게 인사하며 “의사가 환자를 구함이 본분이자 책임인데, 어찌 다른 사람의 물건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유원외도 장중경의 인품을 알았기에 웃으며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장중경은 끝까지 사례를 하려는 유원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며 대신 다른 방법으로 사례를 해달라고 말한다.

 

유원외는 그날 저녁 아들의 병을 치료한 처방을 크게 써붙여 거리에 걸었다. 거기에는 어떤 증상에 이 처방을 쓰며, 누가 처방했으며, 어떻게 달여서 복용하는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유원외의 아들이 걸렸던 병은 유행성 질환으로 일대에도 유사한 환자가 많았고, 방을 보고 여러 환자들이 같은 약재를 구해서 먹은 뒤 완쾌했다. 당시 장중경이 사용한 처방은 세 가지 뿌리를 사용했다 하여 삼근탕(三根湯)이라 불렸으며, 현재에도 유효한 처방이다.

 

고대명의를 연재하며 살펴본 많은 명의들은 사보다는 공을 위하고, 자신보다는 환자를 위하며, 돈벌이보다는 진료와 연구에 매진했다. 이는 편집자가 작위적으로 한 면만 보고 기술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술과 의술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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