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대(金代)와 원대(元代)를 대표하는 의학자 네 명을 일컬어 금원사대가라고 한다. 주단계(朱丹溪)는 그 중 한 사람으로 무주 희오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진형(震亨), 자는 언수(彥修)다. 훗날 그는 단계 혹은 단계옹이라는 명칭으로 주로 불린다.
주단계는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했고 기억력이 아주 뛰어나 하루에 천자를 외울 수 있었다. 30세에 그는 일대에서 이름 높은 유학자인 허문의 선생을 모시고 남송의 유학자 주희의 학설을 배웠다. 그의 재능과 학식은 낭중치추라 금새 눈에 띄었고, 문학과 역사 및 철학 분야에도 깊은 조예가 있어, 허 선생도 그를 유독 아꼈다. 지병으로 고생하던 허 선생은 어느 날 단계에게 “내가 병에 걸린 지 오래됐는데 나를 치료해줄 좋은 의사가 없구나, 네가 총명하고 탐구를 좋아하니 만약 의학을 배운다면 반드시 훌륭한 의사가 될 것이야”라고 말했다. 주단계는 30세 되던 해 어머니가 위장병을 앓아서 모친을 치료하기 위해 의학을 잠시 독학을 한 바 있었다. 평소 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단계는 스승의 조언에 벼슬길을 포기하고 의학에 매진하기로 결심한다.
주단계는 무림현의 명의 나지제(羅知悌) 선생을 찾는다. 나지제는 일찍이 어의를 지낸 바 있어 태무선생으로 불리고 있었으며, 금원사대가의 한 사람인 유완소의 직계 제자로 다른 금원 사대가인 이동원, 장종정의 이론에도 해박했다. 훗날 주단계가 금원사대가의 마지막 한 사람이 된다는 점에서 금원사대가 세 명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던 나지제와 주단계의 만남은 운명이라 할 수 있다.
나지제는 종래로 제자를 받지 않았기에, 주단계도 보기 좋게 몇 차례 문전박대 당했다. 어느날 이 광경을 보다 못한 한 사람이 나지제를 찾아와 주단계가 허문의의 수제자로서 학식과 명성이 있는 사람인데 냉대하기 보다는 제자로 받아들임이 어떻겠냐고 조언한다. 이미 주단계의 인물됨과 정성에 탄복하고 있던 나지제는 못이기는 척 주단계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이때 주단계의 나이는 이미 44세였다. 늦깎이도 이런 늦깎이가 없었다. 하지만 주단계는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나지제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나지제의 진료를 측근 거리에서 지켜 보았으며, 황제내경과 난경 등 주요 의서를 상세하게 가르침 받았다. 수년 후 주단계는 고향을 찾아 허문의 선생의 지병을 치료했고 이때부터 명성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주단계의 시대는 비교적 태평하고 안정적인 시절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이 있기 마련인지, 당시 온종일 주색(酒色)을 즐기고 고량진미에 빠져 있는 자가 허다했다. 주색은 신체와 정신을 크게 손상시키는 법. 특히 색을 탐하는 자와 거처가 일정하지 않았던 자들은 신체의 근간이 되는 음정(陰精)이 모자라기 마련이었다. 훗날 주단계가 자음파(滋陰派)를 창립한 것도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와 밀접하다 하겠다. 자음은 음을 기르고 보충한다는 뜻이다.
자음파의 핵심은 ‘양은 늘 남기 마련이고, 음은 늘 부족하기 마련이다(陽常有余,陰常不足)’에 있다. 그래서 양을 보충하는 따뜻하고 뜨거운 약물 대신 음을 보하는 청량한 약물을 즐겨 사용했다. 이와 함께 고량진미에 빠져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음식과 식욕을 절제하고 성생활을 문란하게 하지 말 것을 제안했다. 이를 통해 인체를 꾸리는 에너지를 지칭하는 상화(相火)가 함부로 날뛰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상화가 날뛰면 음과 정을 손상해 신체가 더욱 허약해지기 때문이다.
혹자는 주단계가 음만 보할 뿐, 양기는 보하지 않은 반쪽자리 학문을 했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단계의 학설은 당시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일 뿐, 그도 양기를 보충하고 위장을 따뜻하게 하는 방법과 약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주단계는 많은 임상을 거쳐 주옥같은 처방을 다수 완성했고, 후학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동의보감에도 주단계의 이론과 처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밤낮이 뒤바뀐채 향락과 술, 건강을 해치는 음식에 빠져 있는 현대인이 많다는 점에서 주단계가 남긴 업적을 다시 재조명하는 작업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하겠다.
그의 저서는 단계심법(丹溪心法), 격치여론(格致餘論), 국방발휘(局方發揮) 등이 있다. 주단계를 끝으로 금원사대가의 학설은 각기 다른 색채로 색을 발하면서 후대에 의학이 발전하는 큰 계기를 제공한다. 사실 송대 태의국에서 편찬해 널리 보급한 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惠民和齊局方)은 처방을 쉽게 쓰는 지침이 되기도 했지만, 증상과 환자의 상태를 꼼꼼하게 진찰하고 이에 걸맞는 치료법을 적절히 사용하는 변증시치의 묘를 잃는 폐단을 낳기도 했다. 한의학의 생명은 변화무쌍한 생동력에 있다고 볼 때, 주단계를 비롯한 금원사대가의 등장으로 한의학은 다시 본궤도에 올라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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