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오, 나난 옌가 하노라.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조선 중기 유학자 조식(曺植) 선생의 시조이다.
참고서에서는 이 시조를 자연의 경치를 읊은 한정가(閑情歌)라고 설명을 하고 있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풀이를 해 보자.
‘두류산’은 지금의 지리산이다.
조식 선생이 지리산 자락에 집을 짓고 후학을 양성했으니 지리산의 경치를 잘 알았을 것이다.
시조의 내용인 즉,
‘지리산의 두 골짜기 물이 합쳐지는 곳이 아름답다는 말을 예전부터 듣고 오늘 와 보니 정말 아름답구나.
복사꽃이 떠 있는 맑은 물에 산 그림자가 잠겨 있구나.
아이야, 무릉도원, 지상낙원이 어디냐,
나는 바로 여기가 지상낙원이라 생각되는구나’ 뭐 이런 정도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분명 자연의 경치, 즉 지리산의 두 골짜기 물이 합쳐지는 곳의 아름다움을 읊은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곳이 어디이며,
그 모양이 어떠한가이다. 이 시조에서 읊고 있는 ‘두류산 양단수’의 참모습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그리고 신화비평 혹은 원형비평을 모를 때에는 그저 겉으로 드러난 한정가일 뿐이었다.
1970년대 초반. 육군에서는 북의 남침을 대비한 효과적인 방어 전략 수립을 위해 전 국토를 면밀하게 조사하였다.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육군 항공대에서는 남한의 전 국토를 대상으로 항공사진 촬영 작업에 들어갔다.
지리산을 촬영하다가 생긴 일.
항공사진을 찍던 병사는 지리산의 쌍계사를 지나던 중,
흠칫 놀라고 말았다.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한 듯이 조종사를 향해 선회할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천천히 쌍계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접근을 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쌍계사와 그 부근의 모습들.
눈을 씻고 다시 보아도 그것은 조물주의 조화일 뿐 달리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볼 때,
혹은 평지에서 올려다 볼 때, 우리는 자연의 형상이 인간의 육체 어느 부분을 무척 닮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궁둥이를 닮은 산,
여인의 가슴을 닮은 두 봉우리,
인간의 얼굴을 닮은 바위 등등.
그러나 이들이 본 것은 그런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명확한 것이었다.
비행기에 탑승했던 군인들은 모두 키들키들 웃으며 몇 바퀴나 더 선회하면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흔히 여성의 육체를 이야기하면서 WXY를 거론하는데,
바로 여성의 육체 중 Y부분이 눈 아래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두 골짜기의 물이 합쳐지면서 한줄기로 흐르고 그 양 옆의 능선은 분명 다리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당시 산림녹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Y의 중앙 부분, 그러니까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의 중앙 부분만 소나무로 울창하게 덮여 있고 그 가운데에 쌍계사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벌거벗은 여인의 하반신을 몇 십만 배 확대하여 펼쳐놓은 것과 같은 산자락의 모습! 병사들을 정말이지 몇 번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황홀해 했을 것이다.
지금은 산림녹화가 잘 되어 구분을 하기가 힘들지만 쌍계사를 중심으로 한 계곡은
바로 여성의 하반신의 형상을 닮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은 여성의 하반신 중 어디인가.
바로 여성의 성기 부분이 되는 것이다.
조식 선생도 그러한 자연의 형상을 알고 있었을까?
신화비평(혹은 원형비평)으로 해석해 보자.
산은 남성을 상징하는 것이요, 물은 여성이다.
그것도 그냥 물이 아니라 분홍빛 복사꽃이 떠 있는 물이다.
그러면 바로 여성의 음부이다.
그 여성의 음부에 산 그림자가 박혀 있다.
이렇게 되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대강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조식 선생이 알고 있었을까?
여성의 음부에 남성의 그것이 박혀있는 모습을 보면서 짐짓 미소를 지으며 시조를 읊으셨을까?
그래서 그곳을 무릉도원,
지상낙원이라 하셨을까? 점잖은 유학자의 눈에 비친 참으로 묘한 자연의 모습을 이렇게 풀어내신 것일까?
이 시조를 신화비평으로 해석할 때, 도저히 고등학생들이 배울 교과서에 실어서는 안될 내용이다.
조식 선생이 누구인가.
간단하게 생애를 살펴보자.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본관은 창령(昌寧),
호를 남명(南冥)이라 한다. 1507년,
연산군 1년에 경상도 삼가현 토골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였으나
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분이다.
1531년 김해의 탄동으로 이주, 이곳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제자 교육에 힘썼으며,
그의 학문의 경지를 인정한 조정에서는 그가 과거를 치르지 않았음에도
1939년부터 헌릉 참봉, 전생서주부, 종부시주부, 단성현감, 조지서사지 등을 제수하였지만 일절 나아가지 않았고,
1561년에는 지리산의 덕천동으로 이거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강학에 더욱 힘쓴 유학자이다.
1567년 5월, 왕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같은 해 8월 상서원판관에 임명하며 두 번씩이나 부르자
입궐하여 왕에게 치란(治亂)에 관한 의견과 학문의 도리를 표하고는 곧바로 낙향했고,
그 뒤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직 후진 양성에만 힘을 쓴 분이다.
그의 학문은 아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행하는 실천궁행으로 유명한데,
특히 그의 후학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많이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가르침이란 국가의 위기 앞에 수수방관한다거나 탁상공론을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몸을 던져 참여하는 투철한 실천주의였다.
조선 중기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이황과 쌍벽을 이루며 경상우도의 학문을 주도하였는데,
두 학자는 직접 상면한 적은 없지만 서로 안부의 편지를 교환할 정도로 우의를 다졌으나,
학문적으로는 약간 마찰을 빚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상도 학자들은 두 사람을 모두 존경하여 두 학자의 문하를 번갈아 드나드는 유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평생은 은둔하며 학문 연구에만 힘쓰다가 1572년에 죽었는데 그가 죽은 후 곧 대사간에 추증되고
이어 1615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기까지 했다.
진주와 김해의 여러 서원에 제향되었으며 <남명집>, <남명학기유편>, <파한잡기> 등 여러 권의 저서를 남긴 분이다.
그런 분이 그런 내용의 시조를 읊었을까?
하도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자연의 형상이 그러하고,
신화비평이란 문학해석학의 결과가 그러한 것을.
아니 어쩌면 유학자의 눈에 비친 우스꽝스런 자연의 형상을 그렇게 멋지게 풀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조식 선생의 다른 시조들도 읽어보자.
금오(金烏) 옥토(玉兎)들아 뉘 너를 쫏니관대
구만리 장천(九萬里 長天)에 허위 허위 단니난가
이 후(後)란 십리(十里)에 한 번씩 쉬염쉬염 니거라
어떤 시조집에는 작자가 김상헌으로 적혀 있는 것이 있는데,
조식 선생의 것으로 더 많이 알려진 시조이다.
‘해와 달아 누가 너희들을 쫓아다니길래 멀고 먼 하늘을 그렇게 바삐 다니느냐,
이 후부터는 십리에 한 번씩 쉬엄쉬엄 다니거라’는 내용.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대유학자도 세월이 빨리 가고 몸이 점점 늙어가는 것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청량산(淸凉山) 육육봉(六六峯)을 아나 니 나와 백구(白鷗)
백구(白鷗)야 헌사하랴 못 미들손 도화(桃花)로다
도화(桃花)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魚舟子) 알가 하노라
수록한 시조집에 따라 작자가 퇴계 이황으로 혹은 조인이란 사람으로 되어 있기도 한데
조식 선생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 시조이다.
‘청량산에 있는 열 두 봉우리의 아름다운 경치를 알고 있는 이는 나와 백구 뿐인데,
백구야 야단스럽게 떠들 필요가 있겠느냐 못믿을 것은 복사꽃이구나,
복사꽃아 떠내려 가지 말아라 혹시 어부가 알면 어떻하느냐’는 내용.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중국의 도화원기에 빗대어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도 복사꽃이 나온다.
복사꽃이 떠내려가 어부들이 알면 그들이 와서 함께 구경하게 될 것을 걱정하셨나 보다.
혼자만 즐기시려고.
조식 선생, 욕심도 많으시다.
아마도 정신수련의 고단자라 육신통으로 본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