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옛종이에 쓴글

醉月 2008. 8. 20. 07:52

한오백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말을 소리나는 대로 적을 글자가 없었다.
문자가 없는 세상을 당연히 여기고 살았던 것이다.
글자는 중국에서 빌어 온 뜻글자뿐이었다.
천상, 생각이나 느낌을 적으려면 한자로 뜻만을 옮겨 놓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어렵기로 치면 한자는 세상이 알아주는 글자이고,
먹고살기도 바쁜 민중은 한자를 배울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중국 문자를 깨친 양반을 빼고는,
온 국민이 글씨까막눈이로 수 천년을 지냈다 하겠다.

그렇다고, 우리 겨레가 원래 재주가 비상한데,
우리말을 소리대로 써보려는 생각이 없을 리 없다.
천 오 백년 전에 이미 우리 글자를 만들어보려는 욕구가 간절했던 모양이다.
신라 때 시인들이 한자의 소리와 뜻을 따서 우리말 노래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 노래가 신라인의 정서를 읊은 향가이고,
그 노래를 표기한 글자를 향찰문자라 말한다.
비록 한자로 우리 시정을 노래했으나,
신라 사람들은 향가를 짓고 노래하면서 스스로 감격하고 흥분했으리라 생각된다.
향찰문자를 잘 다듬고 발전시켰더라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지 아니했더라면,
한자의 획을 떼어다가 제 글자를 만들어 지금까지 쓰고 있는 일본인처럼,
우리도 지금까지 향찰문자를 썼을 것이다.
남녀간에 연애편지를 쓸 때에도 향찰문자를 써서 ‘當身乙 思朗合伊多’라고 말이다.


애석하게도 오늘날까지 향가를 짓는 시인이 없고,
따라서 향찰도 사라졌지만,
몇 수의 신라 향가가 남아 있어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향가를 영구히 보존한 공로자는 두 스님이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선사가 14수,
‘균여전’을 지은 균여 대사가 11수를 그들의 책 속에 보존해 놓았던 것이다.
신라 향가전집인 ‘삼대목’이 숨어서 나타나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 시집이 출현한다면 한국 고대시가의 세계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향가 스물 다섯 수는 옛 노래의 진수를 보여주는 보배로운 문학작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신라 노래를 온전히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5세기 신라 가인들이 지은 노래를,
21세기 잘난 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달겨 붙어도 향찰문자를 해독하지 못한 시구가 남아 있다.
신라 시인들이 부활하여 가르쳐 주기 전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다.
천 오 백년 전 우리말을 한자의 음과 훈을 따서 쓰고,
더러 원 한자를 섞어 놓은 시가 향가인데,
천년도 더 오랜 세월,
엄청나게 바뀐 오늘의 말과 한자를 가지고 향가를 풀자니 풀릴 리가 없다.
당대의 학자가 향찰문자의 원리를 적어놓지 아니했고,
신라 시대와 가까이 살았던 고려나 조선 학자들이 향가를 해석해 놓지도 아니했다.
천여 년 동안 어느 누구도 향가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퇴계 율곡 선생도 ‘삼국유사’를 보았겠지만 향가는 건너뛰었을 것이다.


옛 조상이 지은 시작품을 후손들이 알아보질 못하니 민망한 노릇인데,
그 시를 엉뚱하게 딴 나라의 후예학자가 해독해 냈다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향가 해석을 처음 시도한 분이 누구냐 하면,
식민지 조선에 단 하나의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오구라 신페이 교수였다.
조선말이 서툰 일본 학자가 옛 조선말을 연구하기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오구라 교수가 나름대로 신라 노래를 풀어서,
‘향가 및 이두의 연구’를 발간하자 세상이 놀랐다.
우리 학자들은 모두 쥐구멍에 숨었다.
신페이 교수는 남의 나라 노래를 해독한 업적으로 일본 천황 폐하가 하사하는 학술상을 타는 영광을 누렸다.


조선의 선비들이 다 쥐구멍에 머리를 감추고 있었는데,
단 한 분 숫돌에 이를 갈며 나타난 학자가 있었다.
그 분이 바로 저 유명한 양주동 교수였다.
양 교수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고 시를 짓던 학자요 시인이었다.
양 박사는 자칭 신동이요,
타칭 동방의 대 천재였다.
보통 사람이 성내도 무서운 법인데 분개한 천재가 진노했으니 예삿일이 아니었다.
양 교수는 그 날부터 향가 25수를 여러 장 베껴서,
안방, 건넛방, 대청, 심지어 화장실 벽에도 도배를 해 놓고,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오며 가며 향가의 풀이에 골몰하였다.
변소에 앉아 일을 보다가 한 단어를 깨치면,
바지를 추켜 올리지도 않고 뜰에 나와 처용무를 추었다.
향가에 미쳐서 가장의 머리에 이상이 생겼다고 가족들이 놀라기도 하였다.


무애 선생은 일본 학자가 향가를 풀이한 지 10여 년 후에 거저
‘고가연구’를 온 천하에 내놓게 되었다.
이 역저는 조선 학계의 위신을 세우고,
공부하는 학자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이 저서가 나오자 이번에는,
오구라 신페이 교수에게 큰 상을 수여한 일본 학자들이 쥐구멍을 찾게 되었다.


한국학자로서 한국의 옛 향가를 최초로 해독한 분이 양주동 박사라면,
신라 향가를 최초로 서예작품으로 승화시킨 분이 인재 손인식 서백이 아닌가 한다.
작년 10월,
서울 한복판 예술의 거리,
인사동 백악예원에서 열린 인재 서예전은 매우 뜻깊은 일대 행사였다.
전시회에 맞춰 출간한 세 권의 저서를 보면,
손 서백이 단순한 서예가의 경지를 뛰어넘어
민족의 찬연한 유산인 향가에 대한 애착과 연구가
얼마나 깊고 넓게 온축되어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시집 ‘붓꽃’은 손 서백의 손을 떠나지 않은 붓을 꽃으로 시화한 시편들이다.
일찌기 붓을 꽃송이로 노래한 시인은 없다.
서예시인만의 세계다.
수상집 ‘아름다운 만남’은 시인으로서 손 서백이 오랜 동안에 걸쳐
신라 노래의 깊은 세계를 찾아서 소중히 음미하고 마침내 찬탄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기록한 에세이집이다.
이 책은 향가를 찬미한 여러 시인들과 아울러 엮은 향가수상록으로서
대단히 특색이 있다 하겠다.
이번 전시의 주저서인 ‘옛빛찾기’는 이왕에 출간한 ‘먹빛찾기’의 세계를 더 심화 확대시켜서,
손 서백이 심혈을 기울인 향가서품을 통하여 민족 전통의 옛 얼을 서예 작품으로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여러 가지 서체로 향가의 주제를 보여주고 현대어로 전편을 쓰기도 하고
백납병풍에 향가의 전모를 집약하여 작품화하기도 하였다.


시인이요 서예가인 손 예인은 골동수집가로 일가견이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팔도강산에 묻혀 있던 수 백년 묵은 옛 한지를 죄 모을 수 없다.
가장 오래된 옛 종이에 가장 오래된 옛 시를 쓴 이번 인재 전시회는 옛 종이,
옛 노래가 조화를 이뤄서 한국의 옛 빛을 되찾은 뜻깊은 서예의 잔치라 하겠다.
전시장을 메운 신라의 후예들 모두가 옛 빛의 황홀경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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