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물고기의 즐거움

醉月 2008. 8. 21. 08:04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호수(濠水)의 다리 위를 거닐고 있었다.
장자 : 물고기가 유유히 노닐고 있구먼.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일 게야.
혜자 : 자네는 물고기도 아니면서 어찌 그 즐거움을 안단 말인가?
장자 : 그러면 자네는 내가 아니면서 어찌 내가 그 즐거움을 모르리라 생각하는가?
혜자 : 물론 나는 자네가 아니니 자네를 알 리 없지. 마찬가지로 자네도 물고기가 아니니,
         그들의 즐거움을 알 리 없지 않은가? 더 이상 할 말이 있을까?
장자 : 얘기를 처음으로 돌려 생각해 보세. 자네가 애초 "네가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느냐?"고 물은 것은,
         내가 그 즐거움을 알고 있음을 자네가 이미 알고서 물은 것 아닌가?
         나는 물고기가 아니라도 그것의 즐거움을 알 수가 있다네.

 

논리로만 따진다면 장자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지금 장자와 혜자 사이의 논리 싸움에 시비를 가르자는 뜻은 없다.
그저 장자가 짐작한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 말해 보자는 것이다.
장자는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을까?
우선 고려해 볼 수 있는 것은,
장자가 만물제동(萬物齊同)의 관념 아래 인간으로서의 자기와 물(物)로서의 물고기가
즐거움이란 경지에 대해 공유하는 바가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는 점이리라.
하지만 '어락(魚樂)'에 대한 보다 치밀한 이해는 '물화(物化)'의 경지로부터 구할 수 있다.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한 파악은 특정한 인지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히 대상을 접함으로써 느껴진 즐거움[樂]이 아니다.
대상에 대한 의식 소멸의 결과에 의한 것이다.
대상에 대한 의식의 소멸이 곧 물화의 상태이다.
이는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일체의 편견을 버리고 대상의 실상(實相)을 파악함을 의미한다.

즐거움[樂]이란 심미범주는 심미대상에 대한 심미주체의 주관적 감수 가운데 가장 차원 높은 것으로,
심미주체와 심미객체가 완전 합일되는 가운데 심미체험이 이루어짐을 말한다.
이 단계에서 모든 모순은 제거되고 정신은 최대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며,
물아양망(物我兩忘)과 천인합일(天人合一)이 가능하게 된다.
장자는 감각 기관에 의해 느껴 드러나는 희로애락(喜怒哀樂)과 같은 정감으로서의 정(情)은 배척하였다.
소위 무정설(無情說)이라 불리는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감각기관에 의한 인식으로는 도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대상에 의해 느껴 나타나는 희로애락 같은 인간의 정은 오히려 순박한 자연 본성을 잃게 하거나
해를 끼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슬픔과 즐거움은 자연의 덕을 손상하며,
기쁨과 노여움은 자연의 도를 벗어나게 하며,
좋아함과 미워함은 자연의 덕을 상실시킨다.
증오, 욕심,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은 우리의 타고난 덕을 교란시킨다.

장자에게는 정(情)이 없는 것이야말로 진정(眞情)이며,
모든 감동을 간직한 정이 된다.
장자는 분명 물고기의 즐거움을 말한 바 즐거움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닐진대,
그렇다면 그가 마음에 품은 즐거움이란 어떤 종류의 것인가?

이 세상에 지극한 즐거움이란 있을까, 없을까?
자기 몸을 온전하게 살리는 길이 있을까, 없을까?
이제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무엇에 의거하고,
무엇을 피하고,
무엇에 몸을 두고,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멀리 하고,
무엇을 즐기고,
무엇을 싫어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장자가 여기 언급한 지락(至樂)이란 최고의 즐거움으로써, 상대적인 즐거움을 초월한 절대적 즐거움을 뜻한다.
인생의 즐거움이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오랜 궁리 끝에 장자가 얻은 결론은, 무위(無爲)야말로 진정한 즐거움의 근원이란 것이다.
사람의 인생이란 끊임없이 걱정스러운 일과 함께 살아가는데,
이렇게 하여 안락하게 몸을 보전하려는 것은 도와 동떨어진 삶이란 것이다.
장자는 참으로 온전하게 몸을 보전하는 것은 오직 무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제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이나 그들이 즐기고 있는 일을 보건대, 나에게는 그들의 즐거움이란 것이 과연 즐거운 일인지,
아니면 즐겁지 않은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세상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것을 보건대,

그들이 떼를 지어 즐거움을 탐닉하는 것이 마치 사지(死地)를 향해 달려가는 무리의
그칠래야 그칠 수 없는 상태와 같다.
그러면서 모두들 즐겁다,
즐겁다 하지만 나에게는 과연 그것이 즐거운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렇다면 즐거움이란 과연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나는 무위(無爲)를 진정 즐거운 것이라 여기고 있으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굉장한 고통이 되는 모양이다.
옛말에 최고의 즐거움은 세속적 즐거움이 아니고, 최고의 명예는 세속적인 명예를 초월하는 것이라 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시비라는 것도 쉬이 결정 내리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무위의 입장에서만은 무엇이 과연 옳고 그른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최고의 즐거움과 진정으로 자기를 온전케 하는 길은 오직 무위 속에서만 존재하는 듯 하다.

장자는 무위(無爲)를 통하여 얻어진 즐거움[樂]을 진정한 즐거움으로 여기는데,
이러한 무위로서의 즐거움을 세속인들은 이해할 수 없기에 오히려 그들은 큰 고통으로 여긴다.
따라서 지락(至樂)은 무락(無樂)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락은 즐거움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세속 일반인들이 삶을 영위하면서 자신들 나름대로 정한 상대적인 시비 판단과
심미 판단에 의해 얻어지는 즐거움이 아니며, 그런 것들을 초월한 의미로서의 즐거움이다.
그것은 바로 천락이자 지락을 의미한다.
이는 곧 도를 체득한 뒤의 무한의 자유이며 소요자재(逍遙自在)하는 의경(意境, 정신경지)이다.
이 천락은 욕망과 주관적 편견에서 빚어진 시비호오의 정이 아니고, 그런 것들을 초월한 정(情)이다.
결국 이 천락은 생리적 욕망 같은 내적 감정에 속박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함으로써 천지 만물과 상통하는 정이라 할 수 있다.

무위(無爲)인 채로 있어도 저절로 존귀해지고, 소박한 채로 있건만 천하의 그 누구도 그보다 아름답지 못하다.
천지의 도인 무위의 도리를 명백히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만물의 근본이라고 할 만 하며 하늘과 일체가 되는 일이다.
또 천하를 고르게 조화시키는 일도 되고 사람들과 화합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과 화합하는 것을 일러 인락(人樂)이라 부르고, 하늘과 조화하는 것을 일러 천락(天樂)이라 부른다.

그런데 장자가 의도하는 즐거움에 대해 못내 아쉬운 바가 없지 않다.
그는 물화(物化)를 통해 소위 천락(天樂) 혹은 지락(至樂)이라는 궁극의 경지에 다다른다 했지만,
그럼으로써 다른 한편 사람마다의 고유한 욕망 자체까지 말살해 버린 우도 범하고 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제 색깔을 갖춘 욕망이란 것은,
사실상 미의식을 받쳐 주는 원천적 기제(機制)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유가의 일률적인 미의식을 부정코자 출발했지만, 결국은 또 다른 보편적 미의식을 낳고 만 것 아닌가.
또한 천락이란 경지는 그 논리의 발전에 따라 사실상 생명을 부정하는 단계로까지 이어지게 되어,
삶은 유위(有爲)요 죽음이 곧 무위(無爲)라는 데까지 이른다.
무위는 곧 천락을 담보하는 통로이니,
이에 자기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는 즐거워 북을 치고 흥에 겨워 노래까지 부르게 된 것이다.
도가의 논리는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 했는데, 돌아올 지점을 놓쳐 버린 것일까?
가히 엽기미(獵奇美)의 원조라 할 것이다.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0) 2008.08.21
시작하면서  (0) 2008.08.21
여유롭고 희망적인 삶을 살게 하는 仁  (0) 2008.08.20
옛종이에 쓴글  (0) 2008.08.20
인생의 잣대  (0) 2008.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