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인생의 잣대

醉月 2008. 8. 19. 08:16

‘얼마’란 ‘얼 + 마’이다.
여기서 ‘마’란 수메르 언어의 ‘Me(머)’에 해당하며, 상태를 측정하는 단위의 뜻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얼마’란 ‘얼’이 어느 정도 진보되었는지를 물어 보는 말이다.
모든 삶의 기준은 ‘얼’이다. 인생에서 결국 남는 것은 얼의 진보냐 아니면 퇴화냐 뿐이다.
흔히들 행복과 불행을 인생 역정으로 보지만 이것은 사람들의 주관적 관념일 뿐이다.
삼라만상은 발전과 퇴화라는 양대 축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 인간 또한 이 가운데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는 행복과 불행, 천국과 지옥의 축이 아닌, 얼의 진보와 퇴화라는 수레바퀴에 매여 울고 웃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인생의 잣대로 얼[道]을 살필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치우친 것이 있으면 온전한 것이 있고, 구분 것이 있으면 펴진 것이 있다.
오목하여 빈 것이 있으면 가득 찬 것이 있고, 낡아 해진 것이 있으면 새로운 것이 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남는 것이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얽힌 것들에 의해 미혹되기 쉬운 법이다.
그렇기에 성인은 오직 불변하는 얼(道)만을 간직하여 만 법의 기준으로 삼는다.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蔽則新 少則得 多則惑 是以 聖人 抱一 爲天下式 [도덕경22])

 

장사꾼이 이익과 손해를 따질 시점은 장사가 끝난 다음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가치를 따질 시점은 육신이 죽은 다음이다.
이 때 남는 얼의 상태를 가지고 인생의 손익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말하기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러 온 것이 이생의 삶인데,
하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면 세상에서 임금 노릇을 하였어도 헛수고인 것이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많은 보물을 가졌고,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으며, 가장 많은 처첩을 거느렸다.
그러나 그는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1:3]” 하였다.
솔로몬은 권욕과 물욕과 색욕을 모두 취하였다. 몸뚱이를 기준으로는 최고의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그러나 몸뚱이가 한 줌의 재로 변하면서 솔로몬의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었다. 남은 것은 탐욕에 찌들어 있는 흉측한 ‘얼’뿐이다.
결국 솔로몬은 인생이라는 장사에서 빚만 지게 된 것이다.

아소카 왕의 동생은 방탕한 생활을 했다. 왕은 그를 깨우치게 하려고 한 가지 계교를 내었다.
어느 날 왕의 후궁들이 동생에게 몰려가 놀게 하고는 왕이 그곳에 나타났다.
왕은 짐짓 화를 내며 국법에 따라 사형에 처하겠다고 했다.
신하들이 말리자 왕은
“얼마나 임금 노릇이 하고 싶으면 왕의 여자를 유혹했겠는가? 처
형하기 전에 일주일간 왕과 똑같이 즐기도록 하라”고 했다.
매일같이 산해진미와 미녀들이 시중을 들었다. 그러나 그 앞에는 험악한 장수가 칼날을 빼 들고 외쳤다.
“이제 6일 남았습니다”,
“이제 5일 남았습니다” 하며 외쳤다.
일주일이 지나자 왕이 찾아갔다.
“그 동안 잘 즐겼는가?”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어찌 즐길 정신이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왕은
“인생은 그런 것이니라. 곧 죽을 목숨인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렇게 방탕하게 지낸다면 어찌하겠는가?”
하고 타일렀다.
 
인생은 학교라는 말이 있다. 얼을 세우기 위한 과정이라는 뜻이다. '인생여조로(人生如朝露)'라고 그 과정이 그리 길지만은 않다.
앞의 일화에서처럼 곧 죽을 목숨이 인생인 것이다.

이렇게 빠른 시간이나 세월을 가리키는 말로 ‘얼른’이 있다.
얼른이란 빨리라는 뜻의 날쌔게, 금세, 당장, 냉큼, 선뜻, 후딱, 싸게, 속히, 즉각…등의 가속 부사와 비슷한 의미지만,
쓰임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얼른은 ‘얼 + 는’이다. ‘는’은 ‘늘다’, ‘자라다’의 뜻이다. 얼이 자라나는 것이 얼른이다.
그래서 ‘얼른 무엇을 하라’ 하면 얼이 자라나도록 부지런히 힘쓰라는 것이다.
얼에 관계가 있는 경우에는 얼른을 쓰고, 그 밖의 경우에는 빨리를 쓴다.
가령, 공부를 하라고 할 때는 ‘빨리’를 쓰지 않고 ‘얼른 공부를 하라’고 한다.
‘여기로 와서 이것 좀 봐’ 할 때는 얼른을 쓰지 않고 ‘빨리 여기로 와서 이것 좀 봐’ 한다.
앞으로는 얼른과 빨리를 구분해서 써야 할 것이다.

일전에 신문의 한 사설에서 ‘천천히’라는 뜻을 지닌 이스탄불의 ‘야와시’와 중국의 ‘만만디’를 인용하며
우리 나라의 ‘빨리 빨리’ 습성을 비판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실상 우리의 습성은 성질이 급하여 서두른다는 뜻의 ‘빨리 빨리’가 아니라 ‘얼른 얼른’이다.
인생은 결국 순식간에 소멸될 것인 바, 그 안에 얼른 얼을 자라게 하라는 구도의 의지인 것이다. 

여하튼 얼른 몸살이를 청산하고 얼른 얼이 자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서경》에 이르기를,
“하루를 닦지 않으면 3년이 뒤쳐지고, 하루 음행을 범하면 역시 3년이 뒤로 밀린다一日不修如退三秋一日犯色退三秋” 하였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歲月不待人’ 하였으니, 하루라도 얼닦기에 소홀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신 있게 ‘얼마’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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