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醉月 2008. 8. 18. 07:34

우리네 인생살이가 결국은 부질없는 것이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흔히들 꿈을 비유로 든다.
인생이 일장춘몽이란 것이다.
또한 정신세계 관련 분야에 자주 기웃거리는 사람이라면,
원래는 좀더 깊이 있는 인식론 문제를 논할 때 쓰여야 하는 장자의 꿈 이야기까지
이런 맥락에서 언급되는 것을 종종 듣는다.
일단은 꿈이란 것의 신기루 같은 성격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꿈에 불과한 삶에 큰 욕심을,
집착을 가져선 안 되겠다는 결론을 맺는다.
결론이야 옳지만 과연 꿈이란 것이 실제로 그렇게 허망한 것일까?

허망하고 안 하고를 떠나,
사실 꿈처럼 신비로운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기계를 오래 쓰기 위해,
과열을 방지하기 위해 때때로 작동을 멈추듯,
사람도 육신을 쉬게 하기 위해 잠을 잔다는 것까지는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왜 꿈을 꾸는 것일까?
학계에선 개와 고양이 같은 동물들도 분명히 꿈을 꾸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들이 나름대로 수면 시기라는 것을 갖고 있으며,
그들 모두가 각자의 의식 수준에 맞게 인간의 꿈과 유사한 현상을 경험하고 있을 가능성도
대단히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니, 생명의 특질을 반反엔트로피,
즉 유기체적인 질서 구현 성향에서 찾지 않고 의식 자체에서 구하는 경우,
세상의 존재물 모두는 제각각인 의식 수준 속에서 나름대로의 꿈을 꾸고 있다고까지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모든 추론은,
수면이란 현상과 꿈이란 현상이 반드시 함께 한다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
  
우리는 꿈꾸기 위해 태어났다

지금도 꿈 없는 잠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그것을 숙면이라 하고
그런 잠을 자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는 주장들이 심심찮게 제기된다.
그렇지만 잠과 꿈의 상관 관계를 알게 해주는 서구 과학자들의 흥미로운 실험들이 이미 있었다.
그들은 먼저,
잠자면서도 안구가 빠르게 움직이는 시점엔 분명히 꿈을 꾼다는 사실을 감안해서,
그런 현상이 발생 후 종료되자마자 곧 잠을 깨우는 식으로 전체 수면량을 줄이는 실험을 했다.
이 경우 전체적인 수면 시간의 부족분과는 상관없이 피실험자들은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다음엔 거꾸로 그런 현상이 막 시작되려 하면 잠을 깨우는 식으로 실험했는데,
절대 수면량을 평균치보다 대폭 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두 극히 피곤해 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꿈이,
잠을 자다 그저 부수적으로 체험되는 현상이 아니고
오히려 꿈을 꾸기 위해 우리는 잠을 자는 것이라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해준다.
 
이렇게 반드시 꿈을 꾸어야 한다는 것 자체도 신비롭지만
정말로 꿈이 신비로운 이유는 물론 따로 있다.
의외로 많은 이들이 상식을 존중하고 미신을 배격한다는 미명하에 여전히 꿈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뇌 호르몬 분비에 따른 단순한 시신경 관련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게 아니면,
수면시 육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저 “반응적으로” 떠오르는 영상의 흐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
꿈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무지한 이들은,
아니 무지하길 원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그런 꿈을 꾸고서도 전혀 의식조차 못하겠지만,
너무나도 많은 경우 우리들의 꿈은 다름 아닌 미래의 상황들을 표현해낸다.
 
사람들이 꿈을 통해 어떤 미래의 사건을 예지하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실로 아주 흔한 일이었다.
꿈이 미래 예지와 관련돼 있다는 일화를 단 한 가지라도 알지 못 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십중팔구 독자들 자신이 개인적으로 직접 그러한 경험을 했을 것이라고까지 짐작된다.
이것은 결코 어떤 특출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과거 몇몇 방송국에서 선보인 “미스터리 프로그램”들엔 이런 경험들이
대단히 희귀하고 신기한 체험들로 등장하곤 했지만
제대로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 그런 일화들은 아주 많이 널려 있다.
그렇다면 미래를 드러내는 꿈이란 도대체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이고,
이런 꿈이 모든 존재물에 보편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꿈은 현실에 대한 상징 체계
꿈이 반드시 미래만을 그려내는 것은 아니다.
유명한 은비가 에드가 케이시의 “읽어냄”에서도 지적되었듯이
꿈은 때로 자기 성찰을 위한 내용을 보여주기도 하고 우리의 숨은,
진정한’ 바람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물론 이런 꿈들도 원래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역시 미래에 대한 꿈인데
단지 그렇게 해석되기도 하는 경우들이라 평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자기가 꿈을 꾸고 있음을 자각하는 자각몽이 훈련을 통해 의도적으로 꾸어질 수 있고
나아가 자각몽을 꾸는 이들이 동일몽 내지는 집단몽을 함께 꾸기까지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고려하면,
미래의 예시 외 내용들도 전개될 수 있는 영역이
우리들 꿈의 세계엔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꿈이 적어도 자연적으론,
주로’ 미래 상황만을 묘사하고 있다는 확신은 단지 필자의 것만이 아니다.
오래 전에 작고하셨지만 우리나라엔 위대한 꿈 연구가 한건덕韓建德 씨가 계셨다.
안타깝게도 선생의 학술적인 역작 『꿈과 잠재의식』은 이미 절판됐지만
아직도 그 분의 통속적인 꿈 해몽 참고서 몇 종류는 여전히 돌아다닌다.
프로이트나 융의 연구 전통을 따르는 심리학자들이나,
다른 실험주의적 전통의 학자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꿈의 미래 예지적인 성격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점에서
한건덕 씨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선생은 몸이 불편하셔서 늘 누워 잠만 주무시다가 과연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시다가 꿈을 연구하시게 되었다고 한다.
삼가 경의를 표한다.
 
우리의 꿈들 대부분은,
선생의 주장을 토대로 해서 설명해 나가자면,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미래를 표현한다.
이들은 상징몽,
고지告知몽,
현시現示몽이라 호칭될 수 있다.
이들 중 가장 드물게 사용되는 방식은 현시몽으로,
이 경우 세부까지 완전히 동일하진 않지만 거의 비슷한 미래 상황이 그 모습 그대로 보여진다.
때때로 기시감을 촉발시키는 원인 중 하나는 분명 이런 현시몽임에 틀림이 없다.
역사적으로 현시몽의 대표적인 예는 타이타닉호 침몰을 미리 꿈에서 보고
승선을 취소했던 사람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역시 드문 것이 고지몽인데 여기선 어떤 인격체의 소리나 몸짓,
글씨 등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미래 상황이 고지된다.
성경에 나오는,
꿈속에서 하느님의 지시를 받는 경우들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간혹 고지몽에서 고지되는 내용 자체가 상징적일 때도 있는데
이런 경우를 포함해서 실로 대부분의 우리 꿈들이 상징몽이라는 데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상징몽에서 사용되는 상징중엔 ‘개인 상징’들이 제일 많은데
그렇기에 자기 꿈의 해몽은 결국 자신만이 올바르게 할 수가 있다.
즉 사과를 싫어하는 이와 좋아하는 이가 제각기 꾼 사과를 먹는 꿈은 각기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민족 상징"을 고려해야 하는 경우란 주로 외국인 꿈을 해석할 때인데,
가령 중국인 꿈과 독일인 꿈에 똑같이 박쥐가 나타났다 해도
박쥐가 중국에선 복을,
독일에선 재앙을 의미하기에 전자는 길몽이 되고 후자는 흉몽이 된다.
그 수가 얼마 안 되는 ‘보편 상징’들은 인류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를 갖는데
예를 들어 큰불이나 맑은 물은 누구에게나 길조를 의미한다.
이외 다양한 종류의 상징들이 대부분 경우 서로 섞인 채로
하나의 이야기를 형성하는데 궁극적으론 바로 그 이야기가 미래 상황을 드러낸다.
결국 결정적인 것은 그런 이야기가 전개되는 양태인 것이다.
크게 불이 나도 곧 꺼지는 이야기라면 잠시 크게 흥하긴 하지만 곧 망하게 되는 미래를 보여준다.
한국인의 경우 살찐 돼지는 큰 재물 획득의 기회만을 나타낼 뿐
그 기회를 잡을 것인가 놓칠 것인가는 그 돼지가 품에 안기는가 도망가는가와 연관된다.
꿈속의 일부 내용이 흐릿하면 그러함 자체가 그것으로 표상된 미래 상황의 전개 자체가 불투명함을 알려준다.
  
보일 듯 말 듯한 꿈의 이중성
그런데 앞서의 설명에서 
꿈이 “알려준다”느니 “보여준다”느니 하는 표현을 사실은 쓸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의외로(?) 우리들 꿈을 만드는 ‘작용’이
결코 우리들이 꿈 내용을 해독하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한건덕 선생이 “검열 기관”이라 호명하기도 했던
이런 ‘작용’의 존재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 고대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적어도 고대 그리스에선 분명히 확인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은비학적 이해에 따른다면,
인간의 본질은 원래 비물질적인,
신적인 것이었다 한다.
그런데 모종의 목적에 따라 자진해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을 다른 존재들과 함께 꾸려나가고 있는데 사실 육체를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비본질적인 “억압”이 되기에 자신의 신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꿈이란 현상을 고안해냈다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 장치”로서 마련된 꿈속에서
우리의 신성은 마음껏 미래를 보고,
또는 신적 능력 발휘의 일종의 변형으로서 우리의 의식이 알고 싶어하는 것을 쉽게 알아보기도 하는 것인데
문제는 이런 신성 발현의 결과가 우리에게 그대로 알려지면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이 모든 고생이 헛되게 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삼일 후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을 꿈을 통해 쉽게 본다면
그것을 피하려고 무진장 애를 쓸 것이고 그러다보면
본래 우리가 자진해서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목적에 위배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사실 우리가 흔히 “개꿈”이라 부르는 것들이 정말로는
이런 죽음 등과 관련된 극히 중요한 미래 상황을 표현한 꿈들임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그 의미가 해독되어선 안 되기에 의미 유추가 아주 어려운 상징들을 쓰고,
이야기의 전개 양태를 극도로 난해하게 만든 경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검열 기관”은 거의 모든 꿈을 애초에 상징몽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아예 꿈꾼 내용 자체가 잘 기억나지 않도록 육신에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꿈과 같은 일상이 은비학의 탐구영역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실로 흔하게,
어떤 경우엔 가장 결정적인 자기 죽음과도 관련해서,
꿈을 통해 미래를 실제로 내다볼 수 있다는 것은 태초에
이 “검열 기관”이 사뭇 느슨하게 작동하도록 설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이런 설정을 기획한 “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대체 어떤 “세계”일까?
그런 “세계”를 가칭 근원계라 한다면 그 근원계와 우리 세계는 과연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그 관계란 혹시 실제 우리 세계와 꿈의 세계가 갖는,
이른바 양태적인 상관 관계와 유사한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꿈속에서 주저하면서 돼지를 안은 것은 오직 양태적으로만,
즉 그렇게 하기까지의 어떤 생각이나 고민과는 상관없이 그런 사건의 연속적인 과정 그 자체로서만,
우리 실제 세계에서 엉겁결에 재물을 얻게 되는 미래 상황과 연관된다.
바로 그런 식으로 근원계는 우리들의 하루하루,
아니 매 순간마다의 삶과 연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에 그러하다면,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설파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이 근원계는 다름아닌
우리 세계의,
우리 삶의 존속 그 자체,
우리들 의식의 흐름 그 자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 세계의 모든 존재물이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우리의 현상계가 다름아닌 근원계 전체의 ‘꿈’일 수도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우리 일상의 꿈이 우리 미래의 전개 양상과 관련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꿈’은 결코 허망한 환상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꿈’의 실체를 알기 위해선 우리들 일상사에,
그것의 양태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은비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가장 건전한 동기는 바로 이렇게,
우리의 일상 생활 중 하나를 구성하는 현상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여
거기에서 발견한 의문점을 풀기 위해 근원계에 대한 탐구로까지
“올라간” 다음 다시금 “내려와” 일상의 우리 세계를,
우리 의식의 흐름 그 자체를 제대로 살펴보고자 하는 데서 찾아질 수 있다고 판단된다.
그렇기에 어떤 환상적인, 공상의 세계가 아닌,
항상 지극히 일상적인 세계가 은비학의 진실된 탐구 영역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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