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시 비평과 詩話
어느 시대고 많은 작품이 생산되면 으례 이의 옥석을 구분하려는 비평의 욕구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범람하는 작가와 작품의 홍수 속에서 악화와 양화를 구별해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문학이 펼쳐질 수 있게 하기 위해 비평 활동이 전개된다. 그런데 이 악화니 양화니 하는 개념이나 문학의 바람직한 전개 방향이란 것이 고정불변일 수 없다는 데서 시대마다, 또 평자마다 개성이 드러나고 견해가 갈리게 된다.
오늘날 시단에 비평이 존재하듯, 과거에도 한시를 중심으로 한 비평활동은 꾸준히 펼쳐져 왔다. 과거의 비평활동은 크게 選集類의 간행을 통한 방법과, 詩話의 저술을 통한 방법이 있었다. 전자가 규모가 크고 간접적이라면, 후자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문학사의 움직임이 활발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저술되고 있다.
시화란 문자 그대로 시와 관계된 이야기이다. 명칭이 모호하듯, 그 다루고 있는 범위 또한 총체적이고 광범위하다. 우리나라에서 시화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고려 중기 이후이다. 《파한집》 《보한집》 《백운소설》 《역옹패설》등의 표제가 말하고 있듯, 형성기 시화는 시에 대한 전문적이고 비평적 안목의 제시이기 보다는 한가한 여가에 시와 관계된 읽을만한 이야기 거리를 모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조선 시대로 접어들면서 점차 전문적 양상을 띄게 되어, 작품에 대한 구체적 품평이나 한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이해, 또는 詩作에 대한 이론적 견해 표명 등으로 심화되는 양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중기 이후에는 역대의 시화를 한데 묶어 총서로 간행하는 시도가 생길 정도로 성황을 보게 되었다. 숙종 때 홍만종이 펴낸 《시화총림》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홍만종은 《시화총림》에서 역대의 저술 중 시화만을 따로 추려 모두 24종 900칙에 가까운 방대한 내용을 집대성하였다. 이는 《동인시화》와 같은 독립된 저술은 모두 제외한 것이었다. 이밖에도 이와 유사한 類編書 들이 구한말까지 계속 간행되어, 현재 수십 백종에 달하는 시화가 전해지고 있다.
시화는 말하자면 `행복한 시읽기`의 소산이다. 짧은 지면의 제약으로 우선 오늘날 음미해 봄직한 두어 가지 화제만을 가지고 그 一斑을 맛보기로 한다. 비록 그렇다 해도 온 솥의 국 맛은 한 숟갈만 맛 보아도 알 수 있는 법이다.
2. 詩魔의 죄상
"네가 오고부터 모든 일이 기구하기만 하다. 흐릿하게 잊어 버리고 멍청하게 바보가 되며, 주림과 목마름이 몸에 닥치는 줄도 모르고, 추위와 더위가 몸에 파고드는 줄도 깨닫지 못하며, 계집종이 게으름을 부려도 꾸중할 줄 모르고 사내종이 미련스러운 짓을 하더라도 타이를 줄 모르며, 동산에 초목이 우거져도 깎아낼 줄 모르고, 집이 쓰러져가도 고칠 줄을 모른다. 재산이 많고 벼슬이 높은 사람을 업수이 보며, 방자하고 거만하게 언성을 높여 겸손치 못하며, 면박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며, 여색에 쉬이 혹하며, 술을 만나면 행동이 더욱 거칠어지니, 이것이 다 네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이규보가 <시 귀신을 몰아내는 글.驅詩魔文>에서 詩魔 즉 시 귀신을 힐난하는 대목의 일부이다. 시마가 내게 들어오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시마가 내게 온 뒤로부터 나타난 이상한 증상들이다.
이규보는 다시 시 귀신의 구체적인 죄악상을 이렇게 나열한다. 첫째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데, 붓만 믿고 찧고 까불게 만드는 죄, 둘째 오묘하고 신비한 이치를 파헤쳐 기밀을 누설하면서도 당돌하여 그칠 줄 모르고,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죄, 셋째 삼라만상의 천만 가지 형상을 닥치는대로 하나도 남김 없이 붓 끝으로 옮겨 내어 겸손할 줄 모르게 하는 죄, 넷째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기만 하면 즉시 공격하여 상 주고 벌 주기를 제멋대로 하며, 정치를 평론하고, 만물을 조롱하며 뽐내고 거만하게 만드는 죄, 다섯째 목욕을 싫어하게 하고 머리 빗기를 게으르게 하며, 괜스레 신음 소리를 내고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들어 온갖 근심을 불러들이는 죄가 그것이다. 멀쩡하던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시 귀신이 있으니 이를 아니 쫓고 어찌할 것이랴.
예전 시화를 보면 이러한 시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이 이현욱이란 사람에게 붙었던 시마이다. 그는 시마에 둘러 씌인 뒤 짓는 시마다 기막힌 佳句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 뒤에 시마가 떠나고 나자 단 한 글자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허균의 《학산초담》에 나오는 이야기다. 연산조의 최연이란 이도 <逐詩魔>란 글을 통해 시마의 죄악상을 낱낱히 고발하고 있다. 이로 보면 강신무가 접신하듯, 시마가 사람에게 들면 그는 신들린 듯이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며 시만 생각하고, 시만 쓰게 되며, 그 결과 쓰는 시마다 뛰어난 작품 아닌 것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시마`란 놈은 무슨 이마에 뿔이 달린 귀신이 아니라, 다름 아닌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드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규보가 적시하고 있는 `시마의 죄상`이란 것도 되읽어 보면, 나는 이렇듯 오로지 시만 생각하며 산다는 그야말로 전업 시인으로서 누리는 특권에 대한 `즐거운 비명`일 뿐이다. 평소 얼마나 시에 골몰하며 생활의 매 순간 순간을 시와 관련지었으면, 스스로 시 귀신에 씌었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을까.
옛 사람의 시구 중에는 "다섯 글자의 시귀를 읊조리기 위해, 일생의 심력을 다바치었네. 吟成五字句, 用破一生心"나, "安이란 한 글자를 읊기 위하여, 여러 개의 수염을 비벼 끊었네. 吟安一箇字, 撚斷幾莖 "라 한 것이 있다. 또 "두 구절을 삼년 만에 얻고서, 한 번 읊조리매 눈물이 주루룩 흐르네. 兩句三年得, 一吟雙淚流"나, "시 읊조리는 괴로움 알고 싶은가. 가슴 속에 가을 서리가 있는듯 하네. 欲識吟詩苦, 秋霜若在心"과 같은 구절을 보면, 옛 사람이 한 구절의 시를 얻기 위해 고심참담하던 광경이 눈 앞에 선하게 떠오르는 듯 하다. 두보 같은 이는 아예 "말이 사람을 놀래키지 못하면 죽어도 그만 두지 않으리. 語不驚人死不休"라고까지 만장의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으니, 이래 저래 일상사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시와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었던 옛 사람들의 시정신을 읽을 수 있다.
이 시마를 다소 점잖게 표현하여 詩癖이라고도 한다. 글자 그대로 시에 痼疾이 든 것이다. 송나라 때 매요신 같은 시인은 아예 〈詩癖詩〉를 지었는데, "인간의 시벽이 돈에 대한 욕심보다 더하니, 애간장 졸이며 시귀 찾느라 몇 해 봄을 보냈던고. 호주머니 비어 가난해도 개의하지 않았고, 읊은 것에 새로운 시귀 많은 것만 기뻐했었다.人間詩癖勝錢癖, 搜索肝脾過幾春. 囊 無嫌貧似舊, 風騷有喜句多新"고 하여, 시에 고질이 든 자신의 삶을 술회하기도 하였다.
3. 시를 쓰면 궁해진다
허구 헌 날 이렇듯 시만 생각하다 보니, 그 생활이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시화를 빈번하게 장식하는 화제 가운데 "시가 사람을 능히 궁하게 한다. 詩能窮人"는 말이 있다. 시가 무슨 조화가 있어 사람을 궁하게 할까마는, 폐백사하고 시만 생각하고 앉았으니, 궁함이 뒤따라오는 것은 또 당연할 법하다.
어느 여류 시인이 자신은 시를 쓸 때 먼저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켜고 실연의 기억과 같은 슬픈 일을 생각하노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니와, 대체 문학은 모든 것이 충족된 만족 속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무언가를 상실하거나 무참하게 버려진 느낌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나는 법이다. 중국의 《사명시화》에는, "요즘 두보의 시를 배우는 자를 보면 부유하게 살면서도 궁상스런 근심을 말하고, 태평한 시절을 만나서도 전쟁의 고초를 말하며, 늙지도 않았으면서 늙은이 흉내를 내고, 병도 없으면서도 끙끙댄다."고 하여, 시인들의 유난스런 `무드 잡기`를 꼬집은 바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두보를 배우면 가난해 진다고 해서 아예 두시를 배우지 못하게 한 경우까지 있었다. 커튼 치고 촛불을 켠다고 좋은 시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진실이 없이 자기 최면의 위장된 수식으로 이루어진 시는 교언영색의 자기기만일 뿐이다. 이에 그친다면 시인은 기능적인 언어조립공에 불과할 것이다.
트릴링은 현대의 문화인들이 정치적으로는 부와 쾌락을 원하면서도, 예술적 실존적으로는 내핍과 괴로움을 원하는 모순적인 심리상태에 놓여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고통 속에서 오히려 만족을 찾는 이러한 또 하나의 본능적 충동이 결과로 시인에게 궁곤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 바로 `詩能窮人`의 생각이다. 《지봉유설》에 보면 시장에서 떡을 팔며 노래를 잘 부르는 자가 있었는데, 갑자기 돈이 많이 생기자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옛 시조에도,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 할샤. 일러 못다 일러 불러나 푸돗던가.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고 한 것이 있다.
또 시화에는 이 詩能窮人과 함께 "시는 궁해진 뒤에 좋아진다. 詩窮而後工"이란 말도 자주 보인다. 이 말은 구양수가 매성유의 시를 평하면서 그 서문에서 말한 이래로 널리 퍼졌는데, 부유하고 넉넉할 때 지은 시보다 궁곤 속에서 지어진 시가 훨씬 더 좋다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여도 수긍이 간다. 시인의 생활이 궁할수록 묘사하는 바가 더욱 더 예리하고 섬세하게 되는 것은 심리적 보상작용의 결과이기도 하다.
불가에서도 "주리고 추운 속에서 道心이 생겨난다. 飢寒發道心"는 말을 하거니와, 대체 窮의 상황은 시인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니 잃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되찾으려는 열망이 어느 때 보다 고조될 것이고, 이에 따라 예전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들이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닌 채 낯설게 다가올 것은 당연하다. 그의 감정은 극히 예민한 촉수가 되어 주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르나아르는 "사람은 권태 속에서 가장 열심히 산다. 마치 귀를 쫑긋 기울인 토끼처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권태 속에서 가장 열심히 산다는 이 역설적인 말은, 궁곤 속에서 시인의 정신이 오히려 맑고 투명하게 타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를 담고 있다.
그런데 詩能窮人은 시를 쓰는 행위의 결과로 궁하게 된다는 말이고, 詩窮而後工은 궁해진 뒤에 시가 좋게 된다는 말이다. 이로 보면 이 두 말은 서로 선후가 반대가 되어 의미가 다른데도, 실제 시화에서는 혼동해서 쓰고 있어 흥미롭다. 어느 것이 먼저인가. 窮이 먼저인가, 아니면 詩가 먼저인가. 물론 정해진 결론은 없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窮이 먼저든 시가 먼저든 시인은 늘 窮狀을 달고 다니는 직업이라는 사실만은 꼭같다. 실제로도 詩魔나 詩癖이 시인을 궁하게 만든 것인지, 궁한 속에서도 시만 짓다 보니 詩魔가 찾아 들어 시에 고질이 들린 것인지는 명확한 구분이 어렵다.
예전 굴원은 참소와 아첨이 임금의 밝음을 가려 바른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의로움이 행해지지 않음을 한탄하며 《초사》를 지어 그 심회를 펼쳐 보이고, 마침내 상강에 빠져 죽고 말았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고서 그 분노와 수치를 창조적 에너지로 삼아 불후의 걸작 《사기》를 완성시켰다. 이를 `發憤抒情`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대개 마음 속에 쌓인 憤을 발하여 응어리 진 情을 펼친 것이어서, 그 말이 인정의 말하기 어려운 것을 살펴 얻었던 것이다. 시인이 궁곤을 달고 다닌다는 말은 가난해야 시인의 자격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결핍의 불우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주저물러 앉지 않는 불굴의 정신, 남들이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주변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 속에서만이 시인의 정신은 밝게 빛난다는 말일 뿐이다. 궁곤이나 결핍은 시인의 정신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충분조건일 뿐, 能詩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4. 말이 씨가 되어
흔히 "글은 바로 그 사람. 文如其人"이라는 말을 한다. 대개 시에는 그 사람의 기상이 절로 스며들게 되니, 그 시의 한 구절로도 그 사람의 궁달을 점칠 수가 있다. 이를 달리 氣象論이라고도 한다. 옛 사람들은 언어의 힘을 믿었다. 우리 속담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시화를 읽다 보면 의외로 이런 예화와 자주 접하게 된다. 비유가 조금 유감스럽긴 하지만, 예전 어느 가수가 "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라는 노래를 부르더니, 실제 그렇게 되고 만 것 같은 예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앞서 무심히 한 말이 뒷 날의 예언이 되는 경우를 따로 詩讖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대개 이는 언어의 주술적 힘을 믿어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됨을 경계한 것이다. 입에서 나온다고 해서 다 말이 아닌 것처럼, 생각도 없이 되는대로 쓴 한 편의 시가 어느 날 재앙이 되어 내게 돌아오는 법이다. 말 한 마디, 시 한 구절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우홍적이란 이가 일곱 살에 어른이 `老`와 `春`자로 聯句를 짓게 하니, 읊기를 "늙은이 머리 위의 눈은, 봄 바람 불어도 녹지를 않네. 老人頭上雪, 春風吹不消"라 하였다.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으나 식자는 이를 보고 그가 요절할 것을 알았다. 《어우야담》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머리 위에 눈이 삶의 근심이 가져다 준 얼룩이라면, 봄 바람이 불어와 마땅히 이를 녹여 주어야 옳다. 그런데 그는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이미 녹일 수 없는 삶의 근심을 말하고 있으니, 그렇게 말한 것이다.
또 《수촌만록》에 보면 안명세가 아홉 살 때 그의 아버지가 진달래를 따서 연적에 끼워 놓고 시를 짓게 하니, 즉석에서 짓기를 "진달래 꽃 한 떨기, 푸른 산 중에서 와서, 연적에 생애를 부치었으니, 타향 나그네 신세와 한가지로다. 杜鵑花一악, 來自碧山中. 硯滴生涯寄, 他鄕旅客同"라고 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이 시를 보고 울었다. 그 시에 나타난 뜻이 처량하고 괴로워 멀리 현달할 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뒤에 그는 과연 사화에 연루되어 20대의 젊은 나이에 화를 당하고 말았다.
《지봉유설》에는 예전 중국의 유명한 기생 薛濤가 어렸을 때 우물가 오동을 읊은 시를 소개하고 있다. 시에 이르기를, "가지는 온갖 새들을 다 맞이하고, 잎새는 지나는 바람을 전송한다네. 枝迎南北鳥, 葉送往來風"라고 하였다. 또 송나라 때 어떤 소녀가 있었는데 들꽃을 노래하기를, "다정한 목동들이 자주 머리에 꽂고, 주인 없는 벌과 꾀꼬리 멋대로 깃들어 자네. 多情草木頻簪 , 無主蜂鶯任宿房"라 하였다. 결국 뒤에 모두 기생이 되었는데, 대저 시란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 시귀가 그의 운명을 이미 예견하였다는 것이다.
또 정승 尙震은 도량이 넓고 커서 남의 장단점을 말하는 법이 없었다. 판서 吳祥이 시를 지었는데, "희황 때의 좋은 풍속 땅을 쓴듯 사라지고, 봄바람 술잔 사이에만 남아 있구나. 羲皇樂俗今如掃, 只在春風酒杯間"라고 하였다. 그러자 상진이 "어찌 그리 박절하게 말하는가?"하며, "희황 때의 좋은 풍속 지금도 남았으니, 봄바람에 술잔 사이를 살펴 보게나. 羲皇樂俗今猶在, 看取春風酒杯間"라고 고쳤다. 두 글자 씩을 바꾸었을 뿐인데, 시의 의경은 판연히 달라졌다. 두 사람의 사고 방식의 차이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역시 기상이 같지 않은 까닭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 방식의 차이가 삶의 방식의 차이와 무관할 수 없는 것은 또 자명하다.
5. 말하지 않고 말하기
종래 시화에 보이는 한시 감상 태도는 세밀한 분석보다 총체적인 감상을 중시하여, 두 세 마디로 자신의 직관적인 느낌을 말하고 있을 뿐 논리적 분석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오늘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모호한 느낌을 갖게 되지만, 이는 그들의 문학 인식이 낮거나 구체적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1920년대 이미지즘 시인 아치볼트 매클리쉬는 〈시의 작법. Ars Poetica〉이란 시에서 "시는 의미해서는 안된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A Poem should not mean: but be"고 하고, 또 "시는 사실 그 자체를 말해서는 안되고 등가적이어야 한다. A Poem shuold be equal to: Not true"고 말하였는데, 이 말은 시의 언어는 직접 의미를 지시하는 대신 이미지를 통해 간접화된 방식으로 의경을 전달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흔히 현대시에서 말하는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iative)의 이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서구시에서 이러한 시 언어에 대한 인식이 도입되는 것은 19세기 중엽 이후이다.
그러나 한시에서 이러한 원칙은 이미 천 년이 넘는 문학적 전통 속에서 불변의 준칙으로 엄격하게 지켜져 왔다. 이는 다시 말해 시인은 할 말이 있어도 직접 말하지 말고 사물을 통해 말하라는 것이다. 아니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것이다. 시는 어떤 사실이나 사물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시는 언어 그 자체로 살아 숨쉬는 생물체여야 한다. 시인은 외롭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면서도 독자를 외롭게 만들어야 한다. 괴롭다는 말을 해서도 안된다. 그래도 독자가 그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만약 시인이 나서서 직접 시시콜콜한 자기 감정을 주욱 늘어 놓는다면, 그것은 넋두리나 푸념일 뿐 시일 수는 없다.
돌아가던 개미가 구멍 찾기 어렵겠고 返蟻難尋穴
돌아오던 새는 둥지 찾기 쉽겠구나. 歸禽易見巢
복도에 가득해도 스님네 싫어 않고 滿廊僧不厭
한 사람 속객만이 많음을 싫다 하네. 一個俗嫌多
위 시는 무엇을 노래한 것인가. 개미는 왜 구멍을 찾지 못하며, 새는 둥지를 왜 쉽게 찾는가. 복도에 가득한데도 스님네가 싫어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속객은 왜 이것이 많음을 싫어할까. 위 시는 鄭谷이란 이가 낙엽을 노래한 것이다. 낙엽이 쌓이는 형상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시의 모든 상황은 석연해 진다. 그러나 스물 여덟자 어디에도 낙엽과 관계되는 말은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落葉歸根이라 했다. 한 인연이 끝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낙엽만이 아니다. 우리네 인생도 또한 그러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스님네가 이를 싫어하지 않는다 함은 담긴 뜻이 유장하다. 그러나 길이 낯선 나그네는 온통 뒤덮인 낙엽 때문에 길을 잃을까 근심스럽다. 이러한 정황 속에 蕭條한 가을날의 풍경이 어느덧 가슴을 가득 메운다.
예전 송 휘종황제는 그림을 몹씨 좋아하여 詩의 한 구절을 畵題로 주어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한번은 "어지러이 솟은 산, 옛 절을 감추었네. 亂山藏古寺"란 구절이 화제로 제출되었다. 화가들은 어지러이 솟은 봉우리의 한 구석에 고색창연한 절의 모습을 그리는데 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어떤 사람은 절 지붕이 숲 사이로 얼핏 보이는 광경을, 어떤 사람은 숲 위로 솟아 오른 절의 탑을 그렸다.
그런데 정작 일등으로 뽑힌 작품에는 화면 어디에도 절의 모습은 없었다. 다만 숲 아래 조그만 소로길이 나 있고, 그 길로 중 하나가 물을 길어 올라가는 모습을 그렸다. 중이 물을 길어 올라가니 그 위 어디께엔가 분명 절이 있을 것이나, 산이 너무 깊어 보이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절을 그리라 했는데, 절 대신 물 길러 나온 중을 그리는 것, 이것이 바로 말하지 않고 말하기이다.
은촉불 가을 빛은 병풍에 찬데 銀燭秋光冷畵屛
가벼운 비단 부채로 반디불을 치누나. 輕羅小扇搏流螢
하늘 가 밤빛은 물처럼 싸늘한데 天際夜色凉如水
견우와 직녀성을 오두마니 바라보네. 坐看牽牛織女星
杜牧의 〈秋夕〉이란 시이다. 깊어 가는 가을 밤, 창을 열고 방 안으로 날아드는 반디불을 부채로 치면서 하늘을 올려다 보는 여인이 있다. 가을 밤의 애상적 분위기가 물씬한 작품이다. 그러나 시어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더욱 깊은 심층적 의미를 캐낼 수 있다. 우선 은촉불, 그림 병풍, 비단 부채 등은 넉넉한 경제적 형편을 말하여 그녀가 귀한 신분의 여인임을 보였다. 그녀는 손에 부채를 쥐고 있다. 부채는 여름날엔 없지 못할 소중한 물건이지만, 가을이 되면 아무 짝에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이 `가을 부채`는 그녀가 버림 받은 신세임을 말해준다. 한 때 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나 이제는 쓸모 없이 잊혀진 그녀, 그녀의 창엔 반디불이 날아들고 있다. 반디불은 �은 풀더미 같은 황량한 곳에서 날아다닌다. 그 반디불이 그녀의 방안까지 날아들고 있으니, 그녀의 거처가 매우 황량하고 생활이 처량함을 알 수 있겠다. 님이 찾지 않으니 그 꽃밭엔 잡초만이 우거져 있을 것이다. 또 그녀는 반디불을 부채로 후려 침으로써 자신을 향해 끊임 없이 달려드는 처량함과 황량함을 몰아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물처럼 싸늘한 하늘은 밤이 어느 덧 깊었음을 말하며, 앉아서 별을 바라 본다 함은 아예 그녀가 잠 잘 생각을 버리고 근심에 겨워 긴긴 가을 밤을 새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가 보는 별은 무엇인가. 견우와 직녀성이다. 그들은 그래도 일년에 칠월 칠석 하루는 만날 수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신세는 어떠한가. 님은 한 번 떠나신 뒤로 돌아올 줄 모르고, 이 기나긴 기다림이 끝없이 이어져도 다시 님을 만날 날은 영영 올 것 같지가 않다. 이러한 초조감과 절망감이 견우와 직녀성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 위에 서리어 있다. 대개 시인은 이같이 진진한 사연을 단지 28자 안에 농축시켜 놓은 것이다. 만일 이러한 내용을 시시콜콜히 다 이야기해 버린다면 여기에 무슨 여운과 함축의 울림이 남겠는가.
7. 남는 이야기
김부식과 정지상은 문장으로 한 때에 명성이 나란하였다. 한번은 정지상이 다음과 같은 시구를 지었다.
절에서 독경소리 끝나자 마자 琳宮梵語罷
하늘 빛 유리처럼 깨끗해지네. 天色淨琉璃
독경소리가 맑게 하늘로 울려 퍼지니, 그 소리에 씻긴 듯 하늘 빛이 유리와 같이 맑아졌다고 했다. 청각을 시각으로 옮긴 절묘한 포착이 아닐 수 없다. 본시 독경소리와 맑아진 하늘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시인은 독경소리에 쇄락해진 마음을 맑아진 하늘에서 새삼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감적 심상의 교묘한 결합과 행간에 의미를 감추는 심층화의 수법은 한시가 아니고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심오처이다. 이를 본 김부식이 이 구절을 좋아 해서 정지상에게 그것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으나 정지상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김부식은 정지상에게 원한을 품어 결국 그를 죽이게 되었다고 한다.《백운소설》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시 한 구절 때문에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였다는 것은 그야말로 설화적 발상이지만, 또 한편으로 시에 대한 고인의 유별난 집착과 애호를 읽게 하는 측면도 있다.
劉希夷가 저 유명한 "해마다 해마다 꽃은 그 모습이건만, 한해 한해 갈수록 사람은 늙어 가네. 歲歲年年花相似, 年年歲歲人不同"란 시구를 지었는데, 그 장인 宋之問이 이 글귀를 사랑하여 자기에게 주기를 간절히 빌었으나 주지 않으므로 성내어 흙주머니로 눌러 죽였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또 《지봉유설》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이래 저래 시에 대한 고인들의 집착은 유난스럽기까지 하다.
역대의 시화는 이러한 유난스러운 집착이 빚어낸 정채로운 보석이다. 한시는 언어 표현의 함축미나 정서 표출의 세련미에서 다른 어떤 시가 양식보다 우수하다. 한시의 풍부한 표현미와 그 안에 담긴 선인들의 숨결은 가꾸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소중한 문학 유산이다. 먼지 쌓인 역사의 뒤켠에 그대로 방치하여 두기 보다, 그것들에 생기를 불어 넣고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과 인식이 안타까운 오늘이다. 한시가 지닌 높고 깊은 미학은 기교주의 형식주의에 찌든 오늘의 시단에도 새롭고 건강한 지평을 열 수 있으리라 본다.
이글에서 추려본 몇 개의 삽화들은 전체 시화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내용 가운데 극히 일부일 뿐이다. 지면의 제약으로 다루지 못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좀더 깊이 있는 접근을 해 보면 한시의 미학에 대한 이해가 더 용이할 듯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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