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미쳐야 미친다

醉月 2008. 8. 14. 07:50

미쳐야 미친다
벽(癖)에 들린 사람들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그저 하고 대충 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하다 혹 운이 좋아 작은 성취를 이룬다 해도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복권 당첨처럼 노력이 따르지 않은 한 때의 행운은 오히려 그의 인생을 망친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남이 미치지 못할 경지에 도달하려면 미치지 않고는 안 된다. 미쳐야 미친다.
미치려면(及) 미쳐라(狂). 지켜보는 이에게 광기(狂気)로 비칠 만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미친 듯이 몰두하지 않고는 결코 남들보다 우뚝한 보람을 나타낼 수가 없다.
조선의 18세기는 이런 광기로 가득찬 시대였다.

이전까지 지식인들은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기가 떳떳해야 남 앞에 설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 무자기(毋自欺) 공부,
마음이 달아나는 것을 막는 구방심(求放心) 공부에 힘을 쏟았다. 이런 것이야 시대를 떠나 누구나 닦아야 할 공부니까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사물에 대한 탐구는 완물상지(玩物喪志), 즉 사물에 몰두하면 뜻을 잃게 된다고 해서 오히려 금기시했다.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를 강조하기는 했어도, 어디까지나 사물이 아니라 앎이, 바깥이 아니라 내면이 최종 목적지였다.

이런 흐름이 18세기에 오면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진다. 세상은 바뀌었다.
지식의 패러다임에도 본질적인 변화가 왔다. 이 시기 지식인들의 내면풍경 속에 자주 등장하는,
무언가에 온전히 미친 마니아들의 존재는 이 시기 변모한 지적 토대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 학자 오다 스스무가 쓴 《동양의 광기》(다빈치, 2002)를 읽다가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벽전소사(癖顛小史)》! 명말청초 본명을 감춘 문도인(聞道人)이란 이가 엮고, 원굉도(袁宏道)가 평을 쓴 책 이름이었다.
무언가에 미친 벽(癖)이 마침내 광기(顛)와 결합되어 정신병리학적으로 볼 때 이상 성격이나 왜곡된 욕망, 강박 증상 따위를 빚어내는,
속된 말로 이른바 ‘또라이’들의 열전을 모은 책 이름이었다.
흥분한 나는 그 길로 중국과 일본을 수소문해서 여러 사람을 괴롭힌 끝에 힘들게 이 책을 손에 넣었다.
막상 구하고 보니 49명의 벽(癖)에 대해 소개한 몇 쪽에 지나지 않는 작은 책자였다. 이 중에는 자못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벽도 적지 않다.

유옹(劉邕)은 부스럼 딱지를 잘 먹었다.
맛이 복어와 비슷했다. 한번은 맹영휴(孟霊休)를 찾아갔다.
그는 이에 앞서 자창(炙瘡)을 앓고 있었다. 부스럼 딱지가 침상 위에 떨어지자 유옹은 가져다 이를 먹었다.
맹영휴는 크게 놀랐다. 부스럼이 미처 떨어지지 않은 것까지 모두 떼어 유옹에게 먹게 했다.
유옹이 가자 맹영휴는 하역(何朂)에게 편지를 썼다. "유옹이 저를 먹어 치우는 바람에, 마침내 온 몸에 피가 흐르는 군요.“
‘창가벽(瘡痂癖)’ 즉 부스럼딱지를 즐겨 먹는 벽이 있었던 유옹에 관한 항목의 전문이다.

이밖에 화훼에 미쳐 귀족 집에 꽃이 대야만한 산다화(山茶花)가 한 그루 있단 말을 듣고는 애첩과 맞바꾼 장적(張籍)을 비롯하여
온갖 종류의 벽(癖)에 들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소개되어 있었다.
나는 이 벽(癖)이야말로 18세기 지식인을 읽는 코드로 확신하고 있던 차였다.
자료를 처음 받던 날, 책을 들고 온 연구실을 미친 사람처럼 환호하며 왔다 갔다 했다.
부스럼 딱지를 먹는 벽이야 변태적인 식욕일 뿐이지만, 18세기 지식인들은 이처럼 벽에 들린 사람들,
즉 마니아적 성향에 자못 열광했다. 너도나도 무언가에 미쳐보려는 것이 시대의 한 추세였다.
이런 것은 결코 이전 시기에는 만나 볼 수 없던 현상이다.

박제가(朴斉家)의 <백화보서(百花譜序)>를 보면 꽃에 미친 김군(金君)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이 벽(癖)이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다.
대저 벽(癖)이란 글자는 질(疾)에서 나온 것이니, 병중에서도 편벽된 것이다.
하지만 독창적인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사람만이 능히 할 수 있다.

바야흐로 김군은 꽃밭으로 서둘러 달려가서 눈은 꽃을 주목하며 하루 종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오도카니 그 아래에 자리를 깔고 눕는다. 손님이 와도 한 마디 말을 나누지 않는다.
이를 보는 사람들은 반드시 미친 사람 아니면 멍청이라고 생각하여, 손가락질하며 비웃고 욕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비웃는 자들의 웃음소리가 채 끊어지기도 전에 생동하는 뜻은 이미 다해버리고 만다.
김군은 마음으로 만물을 스승 삼고, 기술은 천고에 으뜸이다.
그가 그린 《백화보》는 병사(瓶史), 즉 꽃병의 역사에 그 공훈이 기록될 만하고,
향국(香国) 곧 향기의 나라에서 제사 올릴 만하다. 벽(癖)의 공이 진실로 거짓되지 않음을 알겠다.
아아! 저 벌벌 떨고 빌빌대며 천하의 큰일을 그르치면서도 스스로는 지나친 병통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 이 첩을 본다면 경계로 삼을 만하다.

《백화보》는 꽃에 미친 김군이 일년 내내 꽃밭 아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꽃술의 모양, 잎새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책이다.
김군은 아침에 눈만 뜨면 꽃밭으로 달려간다. 꽃 아래 아예 자리를 깔고 드러누워 하루 종일 꽃만 본다. 아침에 이슬을 머금은 꽃망울이 정오에 해를 받아 어떻게 제 몸을 열고,
저물 녘 다시 오무렸다가 마침내는 시들어 떨어지는지, 그 과정을 쉴 새 없이 관찰하고 그림으로 그린다. 그리는 것만으로 부족해서 글로 옮겨 쓴다.
손님이 찾아와도 혹 꽃피는 모습을 놓치게 될까봐 말도 시키지 말라는 표정으로 꽃만 바라본다.
그의 이런 행동을 보고 사람들은 ‘저 사람 완전히 돌았군! 미친 게 틀림없어’ 하며 혀를 차거나, ‘젊은 사람이 어쩌다가 실성을 했누’ 하며 안됐다는 표정을 짓기 일쑤다.

하지만 그런가?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자만이 능히 할 수 있다”고 박제가는 힘주어 말한다.
미치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홀로 걸어가는 정신이란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출세에 보탬이 되든 말든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신이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이것저것 따지기만 해서는 전문의 기예, 즉 어느 한 분야의 특출한 전문가가 될 수 없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바로 벽이다.

《백화보》라는 책! 남들 하는 대로 하고, 주판알을 튕기는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해냈다.
미쳤다는 손가락질, 멍청이라는 놀림에도 아랑곳없이, 손님이 와도 시간이 아까워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하는 열정 끝에 이 책을 완성했다.
박제가는 김군을 바보라고 손가락질하던 사람은 훗날 자취조차 없겠지만, 꽃을 사랑해 그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그의 이름은 후세에 길이 남을 것을 확신했다.
그를 미쳤다고 비웃던 자들, 전전긍긍하면서 아무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하며 스스로 정상인이라고 만족하는 자들의 비웃음은 한 줌 값어치도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김군은 시간만 나면 꽃을 그렸던 모양이다. 박제가의 친구 유득공의 문집 중 <제삼십이화첩(題三十二花帖)>이란 글에도 김군의 꽃 그림 책에 관한 이야기가 한 편 더 실려 있다.
유득공의 글을 보면, 김군의 꽃 그림 책이 단순한 소묘에 그치지 않고 꽃잎과 잎새의 빛깔까지 묘사한 채색화였음을 알 수 있다.
복사기가 있던 시절도 아니니, 그의 꽃 그림 책은 오로지 한 부밖에는 만들어질 수 없는 책이었다.
세상은 부질없고 모든 것은 변해 가는데, 그의 그림책 속의 꽃들은 늘 변치 않고 절정의 순간을 보여준다.
세상은 부질없지 않다고, 변치 않는 것도 있다고 일러주는 것만 같다. 그가 한 일을 어찌 미친놈 멍청이의 짓이라 하랴.
나는 그가 친구도 마다하고, 출세도 마다하고, 오로지 꽃을 관찰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준 것이 너무도 고맙다.
그가 꽃 그림에 채색을 얹고, 꽃술의 모양과 잎새의 빛깔을 관찰하면서 느꼈을 그 무한한 감사와 경이와 희열을 함께 누리고 싶다.

하지만 정작 그는 박제가의 글에서나 유득공의 글에서나 김군으로만 남아있을 뿐 제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의 책도 지금에 와서는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늘 그가 궁금하던 터에 유재건(劉在建, 1793-1880)의 《이향견문록(里郷見聞録)》을 읽다가 그의 이름이 김덕형(金徳亨)인 것을 뒤늦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에는 그가 특별히 화훼 그림에 솜씨가 뛰어나 한 폭이 완성될 때마다 사람들이 다투어 소장했다는 이야기와 그의 《백화첩(百花帖)》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고,
박제가의 친구인 유득공(柳得恭)이 그의 꽃 그림에 얹어 써준 시 두 수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신분은 규장각(奎章閣)의 서리(胥吏)였다.

일제시대에 간행된 《명가필보(名家筆譜)》속에 박제가와 유득공이 친필로 쓴 〈백화보서〉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그림도 어느 소장가의 서재 속에 간직되어 있을 것을 기대한다.
다음 글은 표구에 미친 방효량(方孝良)에 관한 이야기다. 정조의 사위로 그림에 벽이 있던 홍현주(洪顕周)가 장황벽(装潢癖)이 있던 방효량을 위해 써준 글이다.
원래 제목은 <벽설증방군효량(癖説贈方君孝良)>이다. 긴 제목을 풀면, ‘벽에 대하여. 방효량 군에게 주다’란 뜻이다.
장황은 서화의 표구를 가리키는 옛말이다. 표구란 말은 일본에서 들어왔다. 홍현주는 글의 서두에서 먼저 벽에 대해 길게 설명한 뒤,
자신의 그림 수집벽과 그에 못지 않은 방효량의 장황벽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앞은 생략하고 중간부터 읽어본다.

내가 평소에 달리 좋아하는 바가 없지만, 오직 그림에 대해서는 벽이 있다.
옛 그림으로 마음에 차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보면, 비록 화폭이 온전치 않고 장정이 망가졌더라도 반드시 비싼 값에 이를 구입하여,
목숨처럼 이를 애호하였다. 아무개가 좋은 그림을 지녔다는 말을 들으면 문득 심력을 다해서 반드시 찾아가 눈으로 보고 마음에 녹여들어 아침 내내 보고도 피곤한 줄 모르고,
밤을 새우고도 지칠 줄을 모르며, 밥 먹는 것도 잊고 배고픈 줄도 알지 못하니,
심하도다 나의 벽이여! 앞서 말한 부스럼 딱지를 즐기거나 냄새를 쫓아다니는 자와 아주 흡사한 부류라 하겠다.

오래된 그림은 흔히 썩어 문드러진 것이 많아 이따금 손을 대기만 하면 바스라지곤 한다.
내가 매번 장차 오래되어 없어질 것을 염려하곤 했다. 방효랑은 평소 그림에 대한 안목을 갖춘 사람이다.
벽에 있어서도 또 보통 사람과는 다른 데가 있다. 옛 그림의 종이가 손상되고 비단이 문드러진 것을 보기만 하면 반드시 손수 풀을 쑤어 묵은 장황을 새로 고치느라 애를 써 마지않는다.
바야흐로 눈대중으로 가늠해서 손으로 응하면 규격이 절로 들어맞아 조금의 어긋남도 없다. 평소 생활함에 있어서도 풀 그릇 곁을 벗어나지 않았다.
장황을 할 때는 비록 큰 재물을 준다고 해도 그 즐거움과 바꾸려 들지 않았다. 신기하고 교묘한 솜씨는 거의 포정(庖丁)이 소를 잡는 것이나,
윤편(輪扁)이 바퀴를 깎는 것과 서로 아래 위를 겨룰 만하였다.

그래서 내가 소장한 옛 그림 중에 썩거나 손상된 것은 모두 그의 손을 빌어 낡은 것을 새롭게 하고 수명을 오래 연장할 수 있게 되었다.
심하도다, 방군의 벽이여! 또 나에게 비할 바가 아니로다. 나의 그림에 대한 벽이 방군의 장황에 대한 벽을 얻어, 옛 그림의 문드러진 것이 모두 온전하게 되었다.
매번 한가한 날에는 그와 더불어 책상을 마주하고 함께 감상하곤 하였다.
어리취한 듯 심취하여 하늘이 덮개가 되고 땅이 수레가 되는 줄도 알지 못하였으니 온통 여기에만 세월을 쏟더라도 싫증나지 않을 듯하였다.
심하구나! 나와 방군의 벽이여. 인하여 벽에 대한 글을 써서 그에게 준다.

방효량(方孝良)은 왕실의 정원을 관리하는 정 6품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를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아주 미천한 신분은 아니었다. 섬세한 안목과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장황 기술을 그는 생활 속에서 아주 즐겼던 모양이다.
아무리 낡아 헐어진 옛 그림도 그의 손을 한 번 거치고 나면 아연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는 장황에 몰두하면 어떤 큰 재물과도 바꾸려 들지 않을 만큼 그 자체를 즐겼다.
그리고 장황을 마친 후 새롭게 태어난 작품 앞에서 하루 종일 이리 보고 저리 보며 마음을 쏟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다.

이런 것은 영리를 목적으로 대가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오직 옛 그림을 수선하여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그 자체가 기뻐 그는 이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림을 목숨처럼 아껴 소장하는 벽이 있던 홍현주가 함께 있었다.
벽(癖)과 비슷한 뜻으로 바보라는 뜻의 치(痴), 또는 치(痴)자도 많이 보인다. 모두 병들어 기댄다는 뜻의 녁(疒)자를 부수로 하는 글자들이다.
모두 무엇에 대한 기호가 지나쳐 억제할 수 없는 병적인 상태가 된 것을 뜻한다. 치(痴)는 상식으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벽(癖)에 대한 일반의 반응을 반영한다.
이 시기 문인들의 호에는 아예 바보 또는 쪼다라는 뜻으로 치(痴), 즉 멍청이란 말이 들어간 것이 적지 않다.

정철조(鄭哲祚, 1730~1781)는 벼루를 잘 깎기로 이름났다.
그래서 그의 호는 석치(石痴)다. 그는 당당히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正言)의 벼슬까지 지낸 인물인데, 당대에 그가 깎은 벼루를 최고로 쳤다.
예술에 안목이 있다는 사람 치고 그의 벼루 한 점 소장하지 못하면 아주 부끄럽게 여겼을 정도였다고 했다.
이규상(李奎象, 1727-1799)이 동시대 각분야의 재주꾼들을 모아 기록한 《병세재언록(并世才彦録)》에는 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죽석(竹石) 산수를 잘 그렸고, 벼루를 새기는 데 벽이 있었다. 벼루를 새기는 사람은 으레 칼과 송곳을 갖추고, 새김칼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는 단지 차고 다니는 칼만 가지고 벼루를 새기는데, 마치 밀랍을 깎아내는 듯하였다. 돌의 품질을 따지지 않고, 돌만 보면 문득 팠는데, 잠깐 만에 완성하였다.
책상 가득히 벼루를 쌓아두었다가 달라고 하면 두말 없이 주었다.
정철조에게서도 마니아적인 특성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돌을 깎아 벼루를 만드는 일 그 자체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
그것으로 생계의 수단을 삼지 않는다. 또 돌의 재질을 가리지 않고 보이면 보이는 대로 파서 그것으로 작품을 만든다.

정철조는 그림에도 탁월한 재능을 지녔고, 기중기와 도르레, 멧돌과 수차 같은 기계들을 직접 설계하고 제작하기까지 했다.
그의 집엔 방 안 가득 천문기구가 가득 차 있었고, 서양 천문학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 하지만 당대 그에 대한 평가는 냉랭하였던가 보다.
정인보(鄭寅普)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술주정뱅이로만 여겼으니, 어찌 시대와의 만남이 불행하여 구차히 재앙을 면하기만을 바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슬퍼했다.

이렇듯 꽃에 미친 김덕형이나 장황에 고질이 든 방효량, 벼루에 빠진 정철조 말고도 18, 19세기로 접어들면 어느 한 분야에 미쳐 독보의 경지에 올라선 마니아들이 자주 등장한다.
칼 수집 벽이 있어 칼마다 구슬과 자개를 박아 꾸며서 방과 기둥에 주욱 걸어놓고, 날마다 번갈아 찼지만 1년이 지나도록 다 찰 수 없었다는 영조 때 악사 김억(金檍),
매화에 벽이 있어 뜰에 매화 수십 그루를 심어 놓고, 시에 능한 사람이라면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매화시를 받아와 비단으로 꾸미고 옥으로 축을 달아 간직하여 `매화시광(梅花詩狂)`으로 불렸던 김석손(金祏孫) 같은 인물들이 그들이다.

이유신(李惟新)은 수석에 벽이 있어 아예 호를 호가 석당(石堂)이라고 했다.
신위(申緯, 1769-1847)도 돌에 미쳐 돌을 주우러 다녔고, 심지어는 중국 사신 길에서도 가는 곳마다 돌을 주워 수레에 가득 싣고 돌아오면서,
그 모습을 동행한 화가에게 그리게 해서 장편의 시를 지어 얹은 일도 있다.
이밖에 국화에 미쳐서 혼자서 무려 48종의 국화를 재배했다는 미원(薇原)의 심씨(沈氏), 매화를 아낀 나머지 그림값으로 받은 3천냥을 쾌척해 매화를 샀던
화가 김홍도(金弘道) 등도 모두 어느 한가지 벽에 들렸던 마니아들이다.

담배를 유난히 좋아했던 이옥(李鈺, 1760-1815)은 아예 담배에 관한 기록들을 주제별로 모아 《연경(煙経)》을 엮었고,
비둘기 사육에 관심이 있었던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발합경(鵓鴿経)》을 남겨,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성행했던 관상용 비둘기 사육에 관한 기록을 집대성했다.

이서구(李書九, 1754-1825)는 자신이 기르던 초록 앵무새를 관찰하면서 역대 문헌 속에 나오는 앵무새 이야기를 집대성해서 《녹앵무경(綠鸚鵡経)》을 지었다.
심지어 죄를 입고 귀양 가서도 이들의 이러한 정리벽은 고쳐지지 않았다.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의 《현산어보(玆山魚譜)》나, 김려(金鑢)의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그 엄청난 저작 들도
모두 벽의 추구가 낳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산물이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이런 마니아들의 세계를 이렇게 묘사한다.
비록 작은 기예라 해도 잊는 바가 있은 뒤라야 능히 이룰 수 있거늘, 하물며 큰 도이겠는가?
최흥효(崔興孝)는 온 나라에 알려진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다. 일찍이 과거를 보러 가서 답안지를 쓰는데, 한 글자가 왕희지와 비슷하게 되었다.
앉아서 하루 종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차마 능히 버리지 못하고 품에 안고 돌아왔다.
이는 얻고 잃음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이징(李澄)이 어려서 다락에 올라가 그림을 익혔는데, 집에서는 있는 곳을 모르다가 사흘 만에야 찾았다.
아버지가 노하여 매를 때리자 울면서 눈물을 찍어 새를 그렸다.
이는 그림에 영욕을 잊은 자라고 말할 만하다.

학산수(鶴山守)는 온 나라에 유명한 노래 잘하는 자이다.
산에 들어가 연습할 때 한 곡조를 부를 때마다 모래를 주워 신발에 던져 신발이 모래로 가득 차야만 돌아왔다.
일찍이 도적을 만나 장차 그를 죽이려 드니, 바람결을 따라 노래하자 뭇 도적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는 이른바 삶과 죽음을 마음에 들이지 않은 것이다.
내가 처음 이를 듣고는 탄식하여 말하였다. "대저 큰 도가 흩어진 지 오래 되었다. 나는 어진 이 좋아하기를 여색 좋아하듯 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저들이 기예를 함을 가지고도 족히 그 목숨과 바꾸었으니, 아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이다.
<형언도필첩서(炯言挑筆帖序)>의 앞부분이다.

우연히 왕희지와 같게 써진 글씨에 제가 취해서 과거 답안지를 차마 제출할 수 없었던 최흥효.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와중에 저도 몰래 눈물을 찍어 새를 그리던 이징. 모래 한 알로 노래 한 곡을 맞바꿔,
그 모래가 신에 가득찬 뒤에야 산을 내려온 학산수. 이들은 모두 예술에 득실을 잊고, 영욕을 잊고, 사생을 잊었던 사람들이다.

잊는다[忘]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해서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될지, 출세에 보탬이 될지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냥 무조건 좋아서,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한다는 말이다. 붓글씨나 그림, 노래 같은 하찮은 기예도 이렇듯 미쳐야만 어느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러니 그보다 더 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미쳐야 할 것인가?

순 가짜들이 그럴듯한 간판으로 진짜 행세를 하고,
근성도 없는 자칭 전문가들이 기득권의 우산 아래서 밥그릇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풍경이다.
그러나 진짜는 진짜고 가짜는 가짜다.
진짜 앞에서 가짜는 몸 둘 곳이 없다. 설 땅이 없다. 그
것이 싫어 가짜들은 패거리로 진짜를 몰아내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다.
한 시대 정신사와 예술사의 발흥 뒤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어느 한 분야에 이유 없이 미치는 마니아 집단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에 뚜렷한 이름 석 자조차 남기지 못하고 스러질 때가 더 많다.
하지만 한 시대의 열정이 이런 진짜들에 의해 안받침되고,
우연히 남은 한 도막 글에서 그들의 체취와 만나게 되는 것은 한편의 슬프고 또 한편으로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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