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다섯 수레 책과 정보의 양

醉月 2008. 8. 13. 07:13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란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은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두보의 시에 나오는데, 원래는 장자(莊子)가 친구 혜시(惠施)의 장서를 두고 한 말이다.
다섯 수레에 책을 가득 실으면 대체 몇 권이나 될까?
천 권이나 이 천 권 쯤 될까?
당시의 책이 죽간에 쓰여진 것을 감안한다면,
다섯 수레를 가득 채운다 해도 고작 몇 백 권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형편에서 그것은 그때까지 문자로 남은 지식의 총량에 가깝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공자는 주역을 읽고 또 읽어 죽간을 묶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
이 말을 요즘 식으로 바꾸면 책을 하도 읽어 책장이 너덜너덜해졌다는 말쯤 된다.
책 한 권의 부피는 만만치가 않았고,
이것을 옳게 간수하기도 쉽지 않았다.
두루마리를 거쳐 오늘날의 책의 형태로 된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10년 독서면 천하 일을 다 알 수 있었다던 옛 사람들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허생은 아내의 바가지를 견디다 못해 10년 책 읽기의 기한을 다 못 채운 것을 탄식하며 집을 나선다.
그리고는 변부자에게 돈을 꾸어 몇 년만에 엄청난 돈을 벌었다.
무능력해서 돈을 못 버는 것이 아니란 것을 확인시킨 뒤,
그는 다시 원래의 가난한 독서인으로 돌아왔다.

 
독서의 목적은 지혜를 얻는데 있었지,
지식의 획득에 있지 않았다.
세상을 읽는 안목과 통찰력이 독서에서 다 나왔다.
책 속의 구절 하나 하나는 그대로 내 삶 속에 체화되어 나를 간섭하고 통어하고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네들이 읽은 책이래야 권수로 헤아린다면 몇 권 되지 않았다.
그 몇 권 되지 않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읽다 못해 아예 통째로 다 외웠다.
그리고 그 몇 권의 독서가 그들의 삶을 결정했다.

 
요즈음 아이들은 배우지 않는 과목이 없다.
모르는 것이 없어 묻기만 하면 척척 대답한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숙제를 보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내용들을 다룬다.
어떤 어려운 주제를 내밀어도 아이들은 인터넷을 뒤져서 용하게 찾아낸다.
그런데 그 똑똑한 아이들이 정작 스스로 판단하고 제 힘으로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시켜야 하고,
해 줘야 한다.
판단 능력은 없이 그저 많은 정보가 내장된 컴퓨터 같다.
그 많은 독서와 정보들은 다만 시험 문제 푸는 데만 유용할 뿐,
삶의 문제로 내려오면 전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10대나 20대에 쓴 박제가나 이덕무의 글을 읽다 보면 그 해박한 지식과 폭넓은 경륜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난공불락의 성채와도 같이 사람을 압도하는 박지원의 그 예지에 가득찬 문장들은
대부분 지금 나보다 더 어린 나이인 30대에 쓰여진 것들이다.
지금도 국학의 고전으로 읽히는 많은 책들이 대부분 그들이
2,30대의 젊은 나이에 쓴 것을 알고는 놀란 적이 있다.
일제시대에 나온 김태준의 《조선한문학사》는 지금도 대학 교수들이 주석을 달아 수업교재로 쓴다.
이 책은 그가 20대에 학부 졸업논문으로 쓴 것이다.
제 생각조차 옳게 글로 쓰지 못하는 20대의 대학생이나 대학원생들을 보면
혹시 정보양의 증가는 인간의 통찰력과 반비례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입만 열면 지식기반사회를 말하고 정보화 사회를 되뇌인다.
사람들은 너나 없이 초고속 인터넷으로 중무장을 하고,
정보 사냥에 혈안이 되어 있다.
사랑이란 단어를 검색했더니 몇 십만 개의 정보가 뜨더라는 어느 광고의 카피처럼,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사람들은 방향도 모르고 휩쓸려 간다.
그런데도 컴퓨터만 잘하고 영어만 잘 하면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만 같다.

문제는 정보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정보를 선택하고 판단하고 제어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그 능력은 컴퓨터를 잘 만지고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한다고 해서 저절로 갖춰지는 것이 아니다.
토익 시험에 만점을 받는다고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문제는 저기에 있는데,
해법은 언제나 여기서 찾으려 든다.
도스토옙스키는 "세상에는 인간을 다루는 방법에 관한 책만 있고, 인간에 관한 책은 없다"고 통탄했다.
지혜에서 나오는 경륜의 목소리는 찾아볼 수가 없고,
얄팍한 상술과 손잡은 경박한 정보만 차고 넘친다.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은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쓰고 버리는 1회용품처럼 몇 달만 지나면 휴지가 되고 말 정보들로 서점은 차고 넘친다.

 
도구적 지식이 판을 치는 사회에는 깊이가 없다.
깊이가 만들어내는 그늘도 없다.
우주를 읽고 사물을 관찰할 줄 알았던 선인들의 인문적 소양이 더 없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이른 아침 마당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다가 책상을 치며,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고 외치던 박지원의 독서가 새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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