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에서 자란 쌀과 누룩으로 빚은 전통 막걸리가 사라지고 있다. 언제부턴가 양조장에선 미국 밀가루로 술밥을 만들고, 일본 누룩으로 막걸리를 빚고 있다. 우리의 재래누룩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고 있는데…. |
친구야! 나는 지금 술을 찾아 일본에 와 있다. 당연히 일본 술이지. 담배도 그 나라 공기와 함께 피워야 제 맛이라는데, 술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니. 그런 연유로 술 한잔 맛보자고 일본까지 왔다. 호사를 한다고 나무라겠지만, 어찌 단순히 술 한잔이겠는가. 술 속에 문화가 있고, 한 나라의 역사가 담겨 있거늘. 돌아보면 우리는 일본을 무시해왔다. 그들을 우리 뒷자리에 앉아 있는 ‘키 작은 족속’쯤으로 여겼다. 우리의 시선은 항상 중국으로 향했다. 종종 귀찮게 구는 일본을 뒷발질하듯 무시하면서. 그것이 중화(中華)사상인 듯싶다. 중국에서 먼 나라일수록 더 막돼먹은 족속이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뒤통수를 얻어맞아야 했다. 임진왜란과 한일강제합방, 두 번씩이나. 일본에 오니 그 생각부터 앞선다. 이제 일본을 똑바로 봐야겠다. 마음속으론 한없이 무시하고 지우고 싶지만, 그것만이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길이 아닐까 싶어서다. 내가 와 있는 곳은 히로시마에 있는 주류총합연구소다. 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일본의 국가기관이다. 현재 이곳에서는 일본 양조장 사람들을 대상으로 2개월 코스의 청주(淸酒) 실무자 교육을 하고 있다. 나는 지금 그 강의를 듣는 중이다. 일본 술을 만들려고? 글쎄,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부러운 것이 있다. 내 옆자리에는 서른두 살의 일본 청년이 양조기술을 배우고 있다. 아버지가 하는 양조장을 이어받을 친구인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비즈니스 전공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그가 유학을 다녀오고 사장이 되는 것은 부럽지 않다. 양조장을 이어받겠다는 의욕이 부러운 거다. 우리 양조장은 어디 그런가. 양조장 주인은 자식에게 고시공부를 시키거나 의사가 되기를 바랄지언정 양조장을 물려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큰 주류회사는 술로 돈 벌어 좀더 ‘의젓한’ 사업에 진출할 궁리를 해대고. 일본 술 강의를 들으면서 깜짝 놀란 게 있다. 일본도 우리처럼 쌀술이 전통술이라는 것이다. 일본이 세계 명주의 반열에 올려놓은 ‘사케’가 바로 쌀술이다. 사케는 ‘술 주(酒)’자를 일본말로 훈독(訓讀)한 거다. 쌀로 만든 일본 청주, 그 사케가 이제는 와인처럼 고유명사로 쓰인다. 사케를 만들 때 쓰는 재료가 일본 누룩인 코오지(麴)다. 이것도 ‘누룩 국(麴)’자를 일본말로 훈독한 것이다. 코오지는 우리 누룩과 달리, 찐 쌀알에다 오리제(Aspergillus oryzae)라는 황국균을 뿌려 배양한 균사체다. 일본은 담박한 맛을 찾아 쌀누룩으로 선택했고, 우리는 맛과 향이 풍부한 밀누룩을 취했다. 그런데 강의시간에 이런 얘기를 들었다. ‘코오지균은 국균(國菌)’이라는 것이다. 균이 어디 머리에 일장기를 두르고 있겠느냐만, 하여튼 제 나라 균이라고 강사는 역설하더라. 이 말을 들으니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긴 한숨이 나오더라. 왜냐고? 우리 누룩의 처지가 생각나서 말이다. 3개밖에 안 남은 누룩곡자 내가 일본에 오기 전에 들른 곳이 있다. 우리의 누룩 제조장이다. 현재 우리나라 양조장에 전통 누룩을 공급하는 업체는 딱 3군데, 진주곡자, 상주곡자, 송학곡자다. 지역 이름을 땄으니 두 곳은 경상도에 있는 줄 알 테고, 송학곡자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리에 있다가 광산구 삼거동으로 이사했다. 내가 찾아간 곳은 송정리 옛 송학곡자 터다. 지난해 여름에 한번 들렀다가 감동을 받아 다시 찾아간 것이다. 양조장은 소설이나 영화의 배경으로 나올 법한 풍경이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여자 후배가 술 빚는 동네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좋은 곳을 소개해달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양조장 주인 때문에 단념했다. 내가 이렇게 양조장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알면 그 사람이 엄청 화를 낼 것이다. 방송국에서 찾아와 문을 열어 달래도 거절할 정도로 완고하거든. 그곳은 30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듯한 퇴락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내가 찾았을 땐 쓸쓸하고 적막해서, 순식간에 폐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금천양조장과 어깨를 맞대고 있던 예전 송학곡자 제조장의 풍경이 그렇다는 말이다. 송학곡자가 이사한 뒤로 그렇게 방치됐다. 그곳엔 누룩을 띄우던 누룩방이 20개가 넘는다. 누룩방 안에는 누룩을 얹던 시렁과 누룩을 디딜 때 잡던 끈이 낡을 대로 낡은 채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벽에는 누룩방을 데우기 위해 쌓아둔 연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음산하지만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어 좋았다. 주인은 결코 보여주고 싶지 않은 풍경이었을 게다. 하지만 말로만 듣던 누룩방의 옛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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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국을 대표하는 술이 뭐냐고 물을 때 첫 번째나 두 번째에 튀어나오는 술이 막걸리다. 일본에 오니 진로소주를 알아주더구나. 막걸리는 명성만 알고 있고. 그래 막걸리,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막걸리를 우리 술이라고 말하지. 그런데 그 막걸리가 일본식 누룩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내가 이곳에서 일본 사람들에게 한국의 전통 술이 막걸리라고 시원스레 말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나라 3대 누룩 제조장인 송학곡자를 끼고 있던 금천양조장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만든 막걸리도 일본 누룩 코오지로 빚는다. 금천양조장에서는 아침 일찍 술을 짜서 팩에 담아, 우유처럼 배달한다. 그 광경이 보고 싶어 아침 6시에 양조장을 찾아가려 했다. 그런데 양조장에서 “아침 6시는 너무 이르니 8시에 오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하는 수 없이 아침 시간을 배회하다가 시간에 맞춰 갔다. 그런데 이미 막걸리 배달은 나간 뒤더라고. 내가 갔을 때 양조장엔 술 빚는 사람 2명, 배달하는 사람 3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잘 나갈 때는 직원이 50명이 넘었다고 하더라. ‘다국적’ 막걸리 금천양조장 주인은 서흥빈(60)씨다. 아버지 서남철(1917~1993)씨의 뒤를 이어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다. 한때 송정리에서 잘 나가는 유지였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터. 그런데 지금 형편은 별로다. 흥빈씨는 심장이 좋지 않아 수년간 병원 신세를 진 탓인지, 건강이 안 좋아 보였다. 하지만 오래된 양조장이고, 술맛도 좋아서 주인에게 뭔가 희망 찬 소리를 듣기를 바랐다. 헌데 첫마디가 “막걸리? 우리 대에서 끝났다”는 거였다. 왜냐고 물었더니, 단속 때문이란다. 방충망 없으면 걸리고, 술 빚고 남은 재료 양이 정확하지 않아도 걸리고, 위생검사 나오면 걸리기 십상이란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검사하는데 그 등쌀에 술도가 해먹기 어렵다는 거다. 그래서 언제든지 문 닫을 각오로 공장을 돌린다고 한다. 이웃한 도시의 한 양조장은 조껍데기 술을 만들다가 색소를 넣어서 영업정지를 당하고, 또 다른 양조장은 사카린을 넣어서 3개월 영업정지를 당하고, 또 다른 양조장은 조만간 문을 닫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위법행위를 비호할 생각은 없지만, 오죽했으면 그랬겠느냐는 생각이 들더라. 모두들 올 한 해를 넘길 수 있을지 걱정이라더군.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우리의 전통 술, 막걸리가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하니 말이다. 막걸리 값은 10년째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750ml들이 20병이 들어가는 막걸리 한 짝에 1만6000원이란다. 쉽게 말해 생수보다 더 싼 게 막걸리인 셈이다. 그러니 800개가 넘는 국내 막걸리 양조장 중에 형편 좋다고 얘기하는 곳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수밖에. 정부는 정부대로 속수무책이고. 나는 양조장 주인의 우울한 얘기를 듣고만 있을 수가 없어 마당으로 나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제조장으로 들어갔다. 공장장과 직원 한 명이 한창 술밥을 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술밥은 미국에서 온 밀가루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 술밥으로 일본식 코오지를 만들고, 코오지에 다시 밀가루를 쪄 넣어 술을 만들더라. 미국 농산물에 일본식 기술과 한국의 노동력이 가세해서 만든, 우리도 모르는 새에 다국적화된 술이 바로 지금의 막걸리인 것이지. 물론 우리의 전통 막걸리는 밀가루 막걸리가 아니다. 밀은 누룩을 만들 때만 쓰고, 쌀로 막걸리를 만들었다. 1965년 무렵 먹고살기 어렵던 시절에 나라에서 쌀 막걸리를 금지했다. 그때 대체된 게 미국산 밀가루다. 하루아침에 재료가 변하니, 술을 망치는 양조장이 많아진 것이지. 그때 전국적으로 확대된 게, 찐 밀가루에 백국균(Aspergillus kawachii)을 뿌려 만든 일본식 누룩이다. 백국균을 사용하면 향과 맛은 거칠지만, 유산균 생성능력이 좋아 잡균 오염의 걱정을 덜면서 술을 빚을 수 있거든. 그 백국균으로 일본은 지금 소주를 만드는데, 우리는 막걸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술 마시러 버스타고 온다네” 금천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만드는 공장장은 정종(66)씨다. 그 이름을 듣고 “공장장님은 천상 술도가에 있어야 할 분이군요”라고 말하면서 한참 웃었다. ‘정종(正宗)’은 한 시절, 우리 땅에서 일본 청주의 대명사로 불리던 이름이야. 일본인들이 ‘마사무네’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일본 술도가의 이름으로 많이 쓰이지. 정종씨는 스물두 살에 광주 학천주조장에서 일을 시작해 지금껏 양조장밥을 먹고 살아왔다더라. 광주의 합동양조장을 빼고서, 전라남도에서 가장 많은 봉급을 받고 일하는 공장장이라더군. 그만큼 솜씨가 좋아서 양조장을 돌아다니면서 술맛을 바로 잡아주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자부심도 강해. 양조장 마당에 눈이 내려 공장장이 거처하는 방에 들어가 얘기를 나누면서 막걸리 한잔을 마셨다. 막걸리는 좀 거친 듯하지만 목에 맺힌 것 없이 부드럽고, 혀를 간질이면서 목구멍을 유연하게 타고 넘어가더군. 내가 마셔본 여느 막걸리보다는 가볍고, 은근한 향에 맛이 구수했다. 공장장 왈, “그 술을 먹으려고 멀리서 버스 타고 술 받으러 오는 충성스런 고객도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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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도 막걸리업계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회원이 20명이고, 그중 사장을 겸한 사람이 7명인 공장장 모임이 있는데, 하나같이 앞날을 걱정한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송학곡자 제조장으로 건너갔다. 1969년 생긴 송학곡자가 금천양조장에서 분가해 삼거동 지금의 자리를 잡은 것이 5년 전 일이다. 금천양조장에서 차로 10분 거리. 그곳에서 총무부장을 하는 30대 중반의 박근상씨를 만났다. 그는 전라도 지역의 술도가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누룩을 팔고 있다고 했다. 옛날에는 통밀을 빻아 물을 20% 정도 축인 다음 힘 좋은 장정들이 발뒤꿈치로 꼭꼭 눌러 누룩을 만들었대. 하지만 송학곡자에서는 이제 기계의 힘을 빌리고 있더군. 프레스처럼 생긴 기계가 꽉꽉 눌러주는데 한 번 눌러서는 제대로 안 뭉쳐지니, 두세 차례 반복해서 누르더라고. 뭉쳐진 누룩은 누룩방으로 옮겨지고. 시골 가정집에서는 누룩을 여름에 많이 띄우는데, 그건 온도와 습도 때문이다. 누룩은 32~42℃에서 잘 뜨거든. 일본 코오지도 마찬가지야. 누룩이 가장 좋아하는 온도가 인간의 체온이란다. 한동안 누룩방 온도를 온풍기로 조절하다가 이제 다시 연탄불을 사용한다더군. 누룩도 온풍기 바람보다는 연탄난로의 따뜻함을 좋아한다는 거야. 그렇게 누룩방에서 열흘 정도 지나면 누룩은 공기 중에 떠도는 곰팡이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지. 잘 뜬 누룩은 겉이 하얗고 노란 꽃이 보인다. 잘 뜬 누룩은 건조실로 옮겨져서 다시 열흘 정도를 보내. 누룩이 완성되려면 모두 스무 날 남짓이 걸리는 셈이다. 누룩은 우리 술의 소중한 씨앗이다. 누룩이 잘돼야 술맛이 좋아지기 때문이지. 그런데 지금 전통 재래누룩을 쓰는 곳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전통주 지정을 받은 업체뿐이야. 전국적으로 40개 정도에 불과해. 그 다음이 막걸리 양조장인데, 그곳에서는 대부분 일본식 코오지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 누룩은 극히 일부에서만 사용한다. 누룩의 또 다른 활로 밀가루로 술을 빚으면 나중에 술지게미를 압착하여 짜낼 때 덜 삭은 밀가루가 풀죽이 되어 압착포에 엉겨 붙어 여과를 방해하거든. 이를 막기 위해 거친 누룩이 여과망을 통과하면서 길을 터주게끔 재래누룩을 쓰는 것이지. 그 사용량은 극히 미미하다. 통상 하루에 술 10말을 빚는다면 한 달에 누룩 15kg짜리 한 개로 충분하니 말이다. 누룩 15kg이 2만4000원에 불과하니, 송학곡자는 막걸리 양조장만 바라보고 누룩을 만들 수 없는 처지인 거지. 그렇다고 소주회사가 재래누룩을 쓰는 것도 아니야. 갈수록 누룩이 필요한 곳이 사라지고 있어. 우리 누룩의 처지가 얼마나 가련한지. 박근상씨는 집에서 술을 빚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1kg들이 봉지에 든 누룩이 잘 팔린다고 하더라.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이야기였다. 비록 소량이지만 누룩을 찾는 업종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조경업자들이 소나무에 영양분을 주기 위해 사가고, 유기농 오이 재배를 하거나 포도농사 짓는 사람이 사가고, 병아리 키우는 사람이 사간다더군. 특히 병아리를 대규모로 키우는 농장에서는 누룩을 왕겨와 섞어 재차 발효시켜서 모이로 주면 항생제 기능을 휼륭히 해내면서 병아리의 생존율이 높아진다는 거야. 항생제가 들어 있는 사료를 주는 것보다 값은 비싸지만, 전체적인 수익이 늘어나는 것이지. 일본에서는 무나 오이에 술지게미를 넣어 과자나 가공식품을 만들고, 심지어 화장품도 만든다고 한다. 우리 누룩으로 빚은 술지게미에도 그에 못지않은 좋은 성분이 들어있을 텐데, 우리는 그 방향의 연구가 전혀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한국의 술을 찾기 위해서는 누룩의 위상을 높여야 해. 그런 연구가 뒤따르지 않으니 일본 코오지가 쓰나미처럼 밀려들어 한반도를 휩쓴 거지. 심하게 말하면 술에 관한 한 우리는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에 살고 있는 셈이다. 우리 조상이 전해준 누룩을 방치하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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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막걸리의 부활을 기다리며
간혹 누룩을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 차라리 박물관에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버려진 강아지처럼 초라한 몰골로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는 처량한 신세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말이다. 송학곡자 제조장을 다 둘러보고 금천양조장으로 다시 왔다. 양조장 주인의 불편한 얼굴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헤어지기 전에 물어봤다. “제가 잘못한 것이 있나요?” 하고. 그랬더니 주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더군. 내가 공장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것을 누군가가 보고서 “공장을 팔려는 거냐”고 묻더란다. 나를 부동산업자로 본 거지. 막걸리 양조장의 처지가 엿보여 마음이 안 좋더군. 양조장 문을 나서는데 눈발이 날렸어. 그 눈발 속에 몇 가지 소망을 빌었다. ‘젊은 사람이 막걸리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막걸리학교라도 생겨서, 여러 동네의 막걸리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시음도 하고 술 빚기 강습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미국 밀가루가 아니라 우리 땅에서 자란 우리 쌀로 만든 막걸리가 생겼으면 좋겠다. 우리 누룩을 써서 만든 향 곱고 맛 좋은 막걸리가 되살아났으면 좋겠다’고. 이제 우리 것을 제대로 바라보는 눈이 생기고, 전통이 얼마나 훌륭한 상품인지를 아는 시대다. 그리고 막걸리가 살아야 우리 술이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 테니, 좋은 막걸리가 생겨날 것으로 믿는다. 지금 이 순간 어디선가 그런 막걸리를 만드는 사람도 있을 테고. 친구야 혹시 오다가다 맛좋은 막걸리를 만나거든 내게 문자메시지 날려라. 달려가서 함께 한잔 하게 말이다.
허시명 여행작가, 전통술품평가 soolstory@empa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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