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醉月 2008. 8. 21. 09:21

 고려말에 발생한 시조는 조선조에 와서 성하여 위로는 군왕으로부터 아래로는 무명의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두루  사랑을 받았거니와, 

술좌석에서고 즉흥적으로 부르고 화답할  수 있는 양식적 특성 때문에 술을 소재로 하거나 취락을 주제로 한 시조의 작품은 유난히도 많다.


  대추볼 붉은 밤은 어이 듯들으며

  벼 벤 그루에게는 어이 나리는고
  술 익자 체장사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황희-


  가을이 무르익으니 대추, 밤이 먹음직스럽게  익어간다. 햇대추,햇밤 알을 안주삼아 

국화주를 마심도  운치 있는  일일  터이어니와 논바닥에  게가 몰려오니 이야말로  안주 감으로는  십상이다.

이  기분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체장사가 동네 들어와  "체 사시오!"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다닌다.

체는  술 거를 때 쓰는 도구다.

하기야  옛날 주당들은 가양주를  담가 놓고 체가  없으면 베두건으로도 걸러 먹었다 하니  체 없어 술을 못 먹으랴만 

시기를 맞춘 체장사 출현이 한층 구미를 보태는  것이다.

정작  술꾼은 안주도  가리잖고 청탁도  불문이다. 그저 술이란 이름만 붙었으면 술술 잘 넘어간다

 
  주객이  청탁을  가리랴  다나  쓰나  마구  걸러

  잡거니  권하거니  양대로 먹으리라.

  취하고 초당 밝은 달에 누웠은들 어떠리.  -실명씨-


  그러다 보니  술꾼이 술을  못 구해  안달하는 모습은 애연가가  버려진 꽁초찾느라 쓰레기통  뒤지는 만큼이나 가긍하다. 

시성 두보는 처자가  굶은 판국에 피난지에서 받은  구호미를 팔아  술을 사  먹었다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뒷집에  술쌀을 꾸니  거친 보리  말  못 찬다.

  즈는 것  마구  찧어 쥐빌어 괴어내니

  여러 날 주렸던 입이니 다나 쓰나 어이리.  -김광욱-


  이렇게 마셔대니  제 정신이  아니다. 시간  관념이 없으니  날짜 가는 걸  알 턱이 없고 어디서 먹었는지 공간 관념조차 없다.


  날이 언제런지 어제런지 그제런지

  월파정 밝은 달 아래 뉘 집 술에 취하였던지

 진실로 먹음도 먹었을새 먹은 집을 몰라라.  -실명씨-


  그러나 술이라  하면 말 물켜듯(사설시조)  하는 이런 이들은  폭주가일지언정 애주가는  아닐  성싶다.

주흥을  제대로  즐기고자  하는 이들은  좀  까다로운 장식이 필요하다.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 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하니

  언제면 꽃 아래 벗데리고 완월장취하리오.  -이정보-


  꽃과 술, 달과 벗 이 넷을 사미라 했다.

꽃 그늘 아래서 달구경하며 마음 맞는 벗과 주거니  받거니 마시는 술,

그래서  밤 깊도록 마시고 마셔도  주흥은 더욱 도도해지는 것이다. 

어떤 작품에서는 '거문고  가진 벗'이라고  했으니 풍악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이렇게 고루 조건을  갖추는 일이 흔치 않았던지라 이미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마냥 행복하겠단다.


  술 얻으면  벗이 없고,

  벗 얻으면  술이 없다.

  오늘은 무슨  날고?

  술 있고 벗 있다. 두어라 이난병이니 종일취하리라.  -실명씨-


  '두어라'  는 더  이상  바라지 않겠다는  안분에서  나온 슬기로운  체념이다.
그러나 벗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은 주객들만의 예기가 아닐  것이다.

소월이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님은 사랑에서 좋아라/ ...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

'님과 벗' 하면서 벗과 술 외에 놓치지 않았던 '님'말이다.


  금준에 술을 부어 옥수로 상권하니

  술맛도 좋거니와 권하는 임 더욱 좋다.

  아마도 미주미행은 너뿐인가(하노라.).  -실명씨-


  강릉가면 흔히  듣는 말이 '경포대에는  달이 6개' 라는  것이다.

하늘에 하나, 바다에  하나,  호수에  하나,  그리고 술잔  속에  하나, 

나머지들은  님의  두 눈동자에  각각 하나씩이란다. 

님과 벗이  각기 상보적  매력과 가치를  가진다
해도  굳이 고르라면  주우쪽보다는 아무래도  주색쪽이 승할  듯 싶다. 

다음과 같은 호색한의 시조 맛을 보라.


  금준에 주적성과  옥녀의 해군성과

  옥내의  해군성이

  양성지중에 어느  소리 더 좋으냐?

  아마도 월침삼경에 해군성이 더 좋아라.  -실명씨-


  금동이에 술 따르는 소리도 좋지만 더 좋은 건 미인이 치마 벗는 소리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