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조선의 비주류 인생_08

醉月 2009. 10. 25. 07:22
조선의 악사, 김성기 ‘라인업’

전설이 된 음악인 김성기, ‘스승과 제자’ 관계 더듬어보며 재조명한 그의 삶

각 시대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음악인이 있게 마련이다. <한양가>를 보면, “금객(琴客) 가객(歌客) 다 모였구나! 거문고 임종철이, 노래에 양사길이, 계면(界面)에 공득이며”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여기에 나오는 임종철·양사길·공득이는 이 가사가 만들어지던 시대에 내로라하는 인기 악사들이었다. 세월과 함께 그들의 명성은 씻은 듯이 사라졌지만…. 어떻게 보면, 음악인만큼 명성이 쉽게 사라지는 존재도 없으리라.

» 조선의 악사, 김성기 ‘라인업’.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창밖에서 왕세기의 연주 엿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명성이 남아 전설이 된 악사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김성기(金聖器·1649~1724)가 그런 악사다. 거문고와 퉁소, 그리고 작곡, 시조로 명성이 났다. 그가 죽은 지 100년 가까이 되는 조수삼의 시대에도 그의 음악과 행적을 두고 이야기할 만큼 그의 명성은 오래되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인생과 예술은 그만큼 아름답고 감동적인 대목이 많다.

그런 연유로 나는 그의 인생과 예술을 재구성해 <조선의 프로페셔널>이란 책에서 다룬 적이 있다. 제법 많은 자료를 동원해 자세히 살폈으므로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듯했다. 그러나 최근에 장유승 선생이 임상정(林象鼎·1681~1755)의 문집 <자오록>(自娛錄)에서 김성기와 그 제자를 다룬 새 글을 찾아 <문헌과 해석>에 발표했다. 그 글 덕분에 그의 삶에서 큰 의문이 남는 대목이자 깊은 인상을 던지는 대목인 스승과 제자 관계를 재조명할 근거가 생겼다. 그 점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삶을 다시 한번 조명해보고픈 욕심이 들었다.

먼저 김성기가 어떤 인물인지를 간단하게 짚어보자. 그는 숙종 연종 연간의 저명한 음악이다. 조수삼이 활약하던 19세기 전반으로부터 거의 150년 전에 활동한 악사이다. 그는 과거 음악을 철저하게 공부한 바탕 위에서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 그만의 악보를 만들었고, 현재 그 악보가 전해진다. 그는 숙종조 최고의 악사로 평가를 받았다. 장악원에 소속되어 음악을 연주했으나 장년기 이후에는 완전히 세상과 인연을 끊고서 현재의 서울 마포 강가에 숨어버렸다. 세상을 버리고 마포 강가에 숨어버린 행적조차 신비롭다.


그는 너무도 유명해서 그가 누구로부터 음악을 전수받았고, 또 누구에게 전해주었는지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관심을 표했다. 조수삼은 <추재기이>에서 그런 호기심을 극단적으로 표현했다.

“거문고 악사 김성기는 왕세기(王世基)로부터 거문고를 배웠다. 왕세기는 새 음악을 만날 때면 언제나 비밀에 부쳐두고 전수하려 하지 않았다. 김성기는 밤이면 밤마다 왕세기 집으로 가서 창 뒤에 바짝 붙어서 몰래 훔쳐 들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하나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연주하였다. 그런 사실을 너무 의심스럽게 생각한 왕세기가 어느 날 밤 거문고 곡을 연주하다 미처 반도 끝내지 않았을 때 별안간 냅다 창문을 열어젖혔다. 김성기가 깜짝 놀라서 땅바닥에 거꾸러졌다. 왕세기는 그제야 그를 크게 기이한 사람으로 여기고 그가 지은 것을 모조리 김성기에게 전수하였다.”

해당 내용의 전체 문장이다. <추재기이>의 글치고는 변격이다. 다른 글은 대체로 인물의 집안·출신·지역을 설명하는 내용을 앞세우지만 이 글만은 그런 도입부가 없다. 새삼스럽게 그의 인생 내력이나 소소한 행적을 밝힐 필요가 없다고 작자는 본 듯하다. 그만큼 그에 관한 정보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내용은 순전히 김성기가 스승인 왕세기로부터 음악을 전수받는 하나의 에피소드만을 다뤘다. 새 음악을 전수받기 위해 밤마다 스승의 집 창문 뒤에 숨어서 창틈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공부하는 김성기! 음악의 비밀을 감추려는 왕세기가 낌새를 차리고 냅다 열어젖힌 창문 사이로 마주친 두 눈동자!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음악을 매개로 교감이 이루어져 제자에게 자신의 모든 음악을 전해준다는 사연이다. 조선시대에 음악하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음악의 전승이 얼마나 비밀스럽고 엄격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홍복원→이지윤→김성기’ 밝힌 남원군

김성기 사후 거의 100년 뒤 인물인 조수삼이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일을 어떻게 이렇게 상세히 묘사할 수 있었을까? 어떤 기록을 보았거나 선배로부터 들어서 재생해놓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 종적을 찾을 수 없다. 더욱이 왕세기란 인물은 오로지 이 기록에만 등장한다. 과연 왕세기는 누구일까? 이 사연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적으로 신빙하기가 어렵다. 왕세기란 인물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며, 다른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 사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김성기의 삶과 음악에서 스승으로부터 음악을 전수받고 제자에게 다시 전수하는 것이 신비롭고 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의 음악 스승과 제자에 얽힌 사연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 뒤를 추적해보자.

정래교는 만년의 김성기를 직접 만난 문인이다. 정래교는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전기를 지었다. 본래는 상의원(尙衣院)에서 활을 만드는 장인인 김성기가 음악을 좋아해 일터에 나가 물건을 만들기는커녕 남의 뒤를 따라다니며 거문고를 배웠다고 전기에서 기록했다. 하지만 그가 거문고를 배운 인물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 발굴된 임상정의 <남원군(南原君)이 손수 필사한 거문고 악보의 서문>에는 그의 스승을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임상정은 장악원정(掌樂院正)까지 지낸 만큼 음악에도 조예와 관심이 깊었다. 그가 언젠가 김성기의 제자인 남원군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공은 거문고 솜씨를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았습니까?”

“맞네. 자네는 예전에 어은(漁隱) 김성기란 분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그분이 바로 내 거문고 스승일세. 옛날 융경(隆慶) 만력(萬曆) 연간에 홍복원(洪復元)이라는 사람이 거문고로 유명하여 중국 사신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네. 홍복원은 이지윤(李志尹)에게 전수했고, 이지윤은 어은에게 전수했네. 이것이 내가 거문고 솜씨를 전수받은 유래일세.”

김성기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는 시기에 그의 수제자인 남원군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다. 김성기의 스승은 이지윤이고, 이지윤의 스승은 홍복원이 틀림없다. 그가 장악원 소속이었으므로 이지윤과 홍복원 모두 장악원 소속 악사였을 것이다.

남원군을 포함해서 4대째 이어지는 사승(師承) 계보가 명확하게 밝혀졌다. 끈끈한 사승 관계는 음악의 전승을 책임지는 악보 만들기로 표현되었다. 김성기는 속악(俗樂)이 갈수록 어지러워지는 현상을 염려해 홍복원과 이지윤 두 스승이 전해준 곡을 책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오류를 바로잡는 작업을 마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떴고, 남원군이 뒤를 이어 악보를 완성했다. 현재 전해지는 김성기의 악보인 <낭옹신보>(浪翁新譜)에는 각각의 곡마다 누가 채보했는지를 밝혀놓았는데 대부분의 곡 하단에는 ‘원태전기’(原台傳記)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다. 여기서 ‘원태’는 남원군(南原君) 대감을 지칭하고, ‘전기’는 낭옹의 음악을 전해서 기록한다는 의미다.

 

맹인 악사 주세근에게 ‘묘법’ 남겨

이렇게 해서 김성기의 스승과 제자는 분명하게 밝혀진 셈이다. 물론 스승과 제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 있을 수 있으므로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임상정과 비슷한 시대의 학자인 이영유(李英裕)가 쓴 글에서 그런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가 쓴 <악공 김성기에 얽힌 사연>에는 그의 또 다른 제자인 맹인 악사 주세근(朱世瑾·?~1749)이 등장한다. 스승이 죽은 해인 1724년 겨울의 기억을 되살려 주세근이 말한 내용이다. 죽기 직전 서강으로부터 성 안에 들어온 김성기는 주세근의 손을 붙잡고 빈집의 밀실로 데리고 들어가 쓸쓸히 마주 앉아 비파를 꺼내놓고 몇 곡 탔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고려의 옛 가락이다. 고려의 옛 가락은 오로지 이 곡만 남아 있다. 개성 기생 황진이로부터 나온 이 곡은 김성천(金成川) 댁의 여종이 악기를 탈 줄을 몰라 입으로 연주하여 내게 전해주었다.”

그는 성천부사를 지낸 김아무개 집의 여종으로부터 고려의 옛 가락을 배웠다고 했다. 그 곡이 저 유명한 개성 기생 황진이로부터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진실성은 차치하고라도 신비스럽게 꾸며진 느낌이 든다. 황진이에 얽힌 사연은 너무나 세속화돼서 그녀를 거론하면 진실성이 사라질 듯하다. 하지만 황진이는 거문고 연주에서 최고라는 평을 받은 악사였고, 그녀가 소장한 거문고는 귀중한 물건으로 취급되어 19세기까지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공교롭게도 김성기가 복원해놓았다고 하는 옛 음악인 <삭대엽 평조 제일>(數大葉 平調 第一)의 곡은 황진이의 시조로 널리 알려진 “어져 내 일이냐 그릴 줄을 모르더냐/ 있으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이다. 그가 황진이로부터 전승됐다고 하는 고려의 옛 가락이 이 시조를 직접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황진이가 전래한 음악과 관련성이 있을 법하다.

이야기가 옆으로 흘렀으나 어쨌든 김성기의 음악에는 고려 음악의 전통이 담겨 있다는 말이 된다. 왕세기도 옛 음악을 되살리려는 그의 노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인물은 아닐까? 더욱이 왕세기의 성에서 알 수 있듯 그가 고려 유민이라는 점도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는 주세근에게 “나만이 이 곡을 연주하여 묘법(妙法)을 터득했다. 끔찍이 아껴서 남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던 곡이다. 이제 나는 늙었다. 네게 전해줄 테니, 남에게 가볍게 전하지 않는 것이 옳다”라고 말했다. 어렵게 배운 기량과 곡을 함부로 남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전통을 따르라고 당부했다. 제자들도 자신이 배운 것처럼 따라 하기를 바랐다.

실상 이러한 방식은 음악만이 아니라 전통사회에서는 어떤 분야든 공통이다. 스승으로부터 전수받는 방식이 그대로 제자한테 전수하는 방식이 되었다. 한번 스승과 제자로 인정하면 부자간의 관계처럼 모든 것을 전해주었다.

임상정의 글로 돌아가 이제는 김성기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제자들의 행적을 보자. 앞서 주세근도 그렇지만 제자들에게 김성기는 카리스마가 강한 스승이었다. 그 가운데 종친인 남원군은 신분이 천한 악공을 스승으로 깍듯이 모셨다. 천한 자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느냐고 누군가 문제제기를 했을 때 남원군은 “재능이 있는 곳이 바로 스승이 있는 곳이다.

나는 재능을 스승으로 삼을 뿐 귀천이 있고 없고는 모른다”라고 말했다.

남원군은 스승이 죽은 뒤에도 사모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가 스승의 무덤을 찾아가 추모의 의식을 치르는 모습은 음악하는 스승과 제자 사이가 얼마나 끈끈하고 절실한 정으로 연결되었는지를 인상 깊게 보여준다.

 

스승의 무덤에서 연주하는 제자들

남원군과 이현정을 비롯한 제자들이 스승을 그리워해 가기(歌妓) 대여섯 명을 데리고 무덤을 찾아가 술과 안주를 올렸다. 술을 붓고 나서 남원군이 직접 몇 곡을 연주하고, 다른 제자들은 각자 익힌 곡을 연주해 하루 종일 마음을 위로하다가 연주를 마치자 대성통곡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일을 신익은 장례를 치를 때의 사연으로 비장한 파토스를 담아 묘사했다.

“김성기가 죽자 이현정은 남원군과 함께 시신을 지고 광릉(廣陵)의 산에 가서 장사를 지냈다. 그때 하늘의 구름은 빛을 바꾸었고, 산골짜기에는 어둠이 몰려왔다. 새와 짐승들은 모여들어 구슬프게 울면서 오르내렸다. 둘은 큰 잔에 술을 따라 무덤 위에 뿌리고 서로 마주 보고 통곡하였다. 통곡을 마치자 거문고를 안고서 제각기 자기가 배운 것을 연주하였다. 연주를 채 마치지도 않았는데 백양나무에서 처량한 바람이 일어나 우수수 소리를 내었다. 둘은 거문고를 던지고 다시 대성통곡하였다. 길가를 지나던 사람들은 누구도 그들이 왜 그러는지를 몰랐다.”

남원군은 스승의 장례를 치르고서 이런 시를 지었다.

백아(伯牙)의 거문고를 막 청산에 묻었으니

천하에는 이제부터 옛 음악이 끊어졌네.

필마로 홀로 왔다 다시 홀로 떠나면서

몇 줄기 눈물만을 가을 하늘에 뿌리노라.

거장을 잃고 난 세상의 적막감과 위대한 스승을 보낸 제자의 고독감이 필마 타고 홀로 왔다 홀로 간다는 표현에 스며 있다. 김성기의 스승과 제자들의 사연에는 그 시대 음악인의 열정과 순정이 느껴진다.

 

‘이야기 주머니’ 김옹은 김중진

시대의 재담꾼 이 빠져 ‘오이무름’으로 불려… 선명하고 풍자적인 웃음 선사

20세기 이전 대중문화의 실상은 어떠했을까? 그런 의문을 품고 조선 후기 대중문화의 모습을 추적해보면, 현대와는 상당히 다르지만 독특한 예술문화를 향유한 정황이 속속 드러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재담(才談)이다. 재담은 조선 후기 한양에서 독특한 대중예술의 하나로 인기를 누린 기예였다. 익살을 섞어가며 재치 있게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인 재담은 고담(古談) 또는 덕담(德談), 신소리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재담은 말재간이 좋은 사람이 흥미 삼아 말하는 수준이 아니라, 전문적 직업으로 하나의 공연예술로 정착돼 인기를 누렸다. 재담은 20세기 들어와서도 재담과 만담(漫談)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가 수십 년 전부터 개그나 코미디로 변신을 거듭했다. 직업적 대중예술로서 인기를 누린 재담은 한 사람이 대중 앞에 등장해 공연하거나, 고객의 초빙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 즐겁게 함으로써 대가를 받는 식이었다. 지금은 그 존재 의의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100년 전에는 매우 인기 있는 대중예술의 하나로 도시공간에서 흔하게 공연되었다.

» ‘이야기 주머니’ 김옹은 김중진.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전문적으로 재담을 구연(口演)하는 직업인은 재담꾼이다. 사람들에게 허리가 부러지도록 웃음을 선사하고 그들로부터 금전을 받는 직업이다. 이들의 존재는 여러 문헌에 조금씩 나타나다가 18세기 들어 제법 그 수효가 늘어난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재담꾼으로 한 사람을 들라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우선 <추재기이>에는 ‘설낭’(說囊), 즉 이야기 주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린 김옹(金翁)이 등장한다.

 

뇌물 받은 형조 관리 풍자

“이야기 주머니 김옹은 고담을 잘하여 듣는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배꼽을 잡는다. 그는 한 대목 한 대목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면 핵심을 꼭꼭 찔러서 이러쿵저러쿵 잘도 말한다. 말하는 재간이 뛰어나 귀신이 도와주듯 민첩하다. 그래서 우스개 이야기(滑稽)하는 사람들 가운데 우두머리라 할 만하다. 그 심중을 냉정하게 살펴보면, 또 모두가 세상을 가볍게 보고 풍속을 경계하는 말이다.”

고담을 잘한 김옹의 특징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모든 사람이 포복절도할 만큼 익살이 넘치는 우스개 이야기를 잘했고, 이야기는 단순한 우스개에 머물지 않고 주제가 선명하고 풍자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재담 예술계의 우두머리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이야기 주머니’는 그런 솜씨를 상징하는 별명으로 당시 사람들이 김옹을 부르는 말이거나 아니면 조수삼이 김옹을 지칭한 말이다. 이야기 주머니는 재미있는 고담을 많이 아는 사람을 지칭하는 ‘이야기 보따리’와 거의 유사한 의미이리라.


조수삼의 설명을 보면, 그 시대에는 우스개 이야기를 직업적으로 구연하는 전문가가 꽤 있었고, 그들 사이에 김옹이 최고수였음을 알 수 있다. 재담이 전문적인 공연물로 공연된 시대임을 감안하면, 김옹을 한 시대의 대표적 재담꾼으로 자리매김하려 한 조수삼의 태도를 짐작할 만하다. 그렇다면 그가 장기로 삼은 레퍼토리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조수삼이 쓴 시에 담겨 있다.

지혜는 진주처럼 둥글둥글

어면순은 골계담의 으뜸이다.

꾀꼬리와 따오기는

소란스레 소송을 걸더니

황새란 벼슬아치

판결은 지극히 공정도 하다.

시의 전반부는 의미가 분명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후반부는 꾀꼬리와 따오기와 황새가 등장하는 ‘황새결송’이란 이야기가 틀림없다. 이 이야기가 김옹이 장기로 삼은 대표작이었기에 시에서 거론했을 것이다. 한편, 이 이야기는 <삼설기>(三說記)란 단편소설집에 들어 있다. 한 시골 부자가 뇌물을 받은 형조 관리로 인해 패할 리가 없는 소송에서 지고 난 뒤 풍자적으로 해본 이야기다. 꾀꼬리와 뻐꾸기와 따오기가 목소리 자랑을 하다가 황새에게 우열을 부탁했다. 당연히 질 수밖에 없는 따오기가 미리 황새에게 뇌물을 주어 꽥 소리를 지르고서도 일등이 되었다. 새의 우열 다툼을 통해 뇌물로 송사의 승패가 정해진다는 당시 사법제도의 비리를 풍자했다.

‘황새결송’은 평이한 사건의 서술에 그치지 않고 웃음을 동반하는 묘사와 대화체가 흥미롭게 전개되어, 재담꾼의 사설이 소설로 정착되었음을 추정할 만하다.

조수삼이 골계의 우두머리(滑稽之雄)라고 칭송한 재담꾼이라면, 다른 기록에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소은고>(素隱稿)에는 김중진(金仲眞)이란 유명한 재담꾼이 등장한다.

“정조 임금 때 김중진이란 사람이 있었다. 나이가 늙지 않았는데도 이가 모두 빠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롱하여 ‘오이무름’(瓜濃)이라 불렀다. 그는 익살스런 농담(?諧)과 통속적인 이야기(俚談)를 잘했다. 세태와 인정을 곡진하고도 섬세하게 묘사해서 곧잘 들을 만했다.”

 

오물거리는 모습부터 우스꽝

김중진은 ‘오이무름’이란 별명으로 불린 명성이 높았던 재담꾼이라고 했다. 이 기록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하다. 우선 김중진이 정조 임금 때 사람임이 드러났다. 18세기 후반이 그의 전성기였다. 다음으로 늙지 않았을 나이에도 이가 모두 빠져 오이무름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글의 저자는 오이무름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를 노인이 먹기 좋은 오이무름이란 음식을 그가 즐겨 먹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궁색하다. 내 추정으로는 이가 빠져 오물거리는 모습이 쭈글쭈글해진 오이와 비슷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용모만으로도 사람을 웃겼으며, 웃음을 유발하는 용모가 그의 별명으로 굳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이무름은 그의 캐릭터 특징을 잘 드러낸 예명인 셈이다.

그런데 이 오이무름이란 직업적 재담꾼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재담꾼으로 여러 곳에 등장한다. 18~19세기 왈자 패거리의 문화를 잘 보여주는 ‘무숙이타령’에는 봄날 흥겹게 노는 곳에 당대 최고의 대중예술가들이 등장한다.

“노래 명창 황사진이, 가사 명창 백운학이, 이야기 일수 외무릅이, 거짓말 일수 허재순이, 거문고의 어진창이, 일금 일수 장계랑이, 퉁소 일수 서계수며, 장고 일수 김창옥이, 젓대 일수 박보안이, 피리 일수 □(원본 확인 불가)

오랑이, 해금 일수 홍일등이, 선소리의 송흥록이 모흥갑이 다 가 있구나.”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각 분야의 명인들이 줄줄이 나온다. 모두가 실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 송흥록·모흥갑이 판소리 명창으로 유명한 것을 비롯해 박보안을 비롯한 음악가는 당대의 각 악기 명인으로 유명하다. 그 가운데 재담꾼으로는 외무릅과 허재순이 등장한다. 외무릅은 이야기의 최고수로 끼어 있다.

이 ‘외무릅’이 <소은고>에 실린 오이무름과 동일인임은 불문가지다. 또 <청구야담>에는 “인색한 양반을 풍자한 오물음(吳物音)은 재담을 잘한다”(諷吝客吳物音善諧)는 야담이 한 편 실려 있다. 야담은 “서울에는 오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 고담(古談)을 잘해 세상에 명성이 나서 정승 판서 집을 두루 다녔다. 성품이 오이를 익힌 나물을 좋아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오이물음이라고 불렀다”라는 사연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오씨 성은 ‘오이물음’의 ‘오’를 성으로 착각하여 추정한 것이다. 김중진이란 본명보다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기 때문이다. 결국 외물읍이 김중진과 동일인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청구야담>에서도 오이를 삶은 나물을 좋아했기 때문에 오이물음이라고 불렸다고 했으나 역시 그릇된 추정이다. 정리하여 말하면, 서너 곳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오이물음 곧 ‘외무릅’은 동일인이며, 정조 임금 시절 최고의 재담꾼으로 명성이 있었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추재기이>에서 골계의 우두머리라고 말한 이야기 주머니 김옹과는 어떠한 관계일까? 나는 김옹 역시 외무릅과 동일인이 틀림없다고 판단한다. 당시에 재담꾼을 전문직업으로 한 사람들 가운데 외무릅만큼 지명도가 높은 재담꾼이 많지는 않다. 연암 박지원이 <광문전>에서 묘사한 광문도 유명한 재담꾼의 한 사람이고, ‘무숙이타령’에 등장하는 거짓말 최고수 허재순이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런 무리들 가운데 재담꾼 집단의 대표는 외무릅이다. 당대 최고의 대중예술가 집단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조수삼은 재담꾼 최고수로 외무릅 김중진을 꼽았을 가능성이 높다.

 

‘세 선비 소원담’ 인생 진실 담겨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외무릅의 가장 뚜렷한 이미지는 노인이 아닌데도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수삼이 ‘김씨 늙은이’라고 부른 것은 노인임을 표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노인처럼 이 빠진 김중진의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표현한 말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정조 임금 시절 최고의 재담꾼 외무릅의 존재는 뚜렷하게 부각된다. ‘이야기 주머니 김옹’ ‘오물음’ ‘외무릅’ ‘김중진’으로 제각기 표현된 재담꾼이 동일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가 장기로 한 재담의 내용과 특징을 찾아보면 그 사실은 더 분명해진다. 그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천부적 재능을 가졌던 것으로 묘사되고, 특히 그의 구연의 특징은 대중을 웃기기에만 애쓰는 저차원의 우스개 재담을 넘어 세태와 인정을 유달리 곡진하게 잘 표현했고, 흥미만을 추구하지 않고 풍자의 기능과 주제의 선명성도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매우 수준 높은 재담의 미학을 추구한 예술가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한 미학의 실례가 바로 ‘세 선비 소원담’(三士發願說)이다. 우선 이 이야기는 <소은고>에 실려 있다. 세 선비가 하늘에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각자의 소원을 말한다. 첫 번째 선비는 큰 벼슬아치가 되는 소원을, 두 번째 선비는 큰 부자가 되는 소원을 말했다. 옥황상제는 모두 들어주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선비는 부귀도 공명도 싫다면서 시골에 묻혀 편안히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기 바란다는 평범한 소원을 말했다. 이 뜻밖의 소원에 옥황상제는 그가 소원한 것은 이른바 청복(淸福)으로서 그런 청복은 하늘도 정말 아껴서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다면서 자기도 옥황상제 노릇을 벗어던지고 그런 삶을 살고 싶노라고 했다. 평범하게 사는 행복의 가치를 말한 이 이야기는 줄거리 자체도 긴장미와 흥미가 있다. 또 사람의 의중을 절묘하게 뒤집으면서도 가만히 되뇌어보면 인생의 진실이 담겨 있다.

<소은고>에서는 이 이야기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사연을 전개했으나 큰 진리를 비유한다”고 평가했다. ‘세 선비 소원담’은 외무릅의 유명한 레퍼토리로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 인기는 후대에 <삼설기>란 단편소설집에 ‘삼사횡입황천기’(三士橫入黃泉記)라는 단편소설로 각색되어 실린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저승차사의 실수로 인해 생사치부책에 기록된 수명보다 빨리 저승에 끌려간 세 선비가 염라대왕으로부터 보상조로 각자의 소원을 말한다는 내용이다. 줄거리는 동일하고 사설이 흥미롭게 불어났다.

또 서유구는 <임원경제지> ‘이운지’(怡雲志) 서문에서도 똑같은 줄거리를 설명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청복을 희구하는 심경을 표현했다. 다만 그는 선비를 넷으로 설정하여 문장을 잘하는 문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첨가했다. 서유구는 이야기에 앞서 “세상에 떠도는 속된 이야기 가운데에는 그럴듯한 이치가 담긴 것이 없지 않다”고 했다. 이 레퍼토리가 당시 얼마나 큰 유명세를 탔고, 더욱이 그의 재담 특징인 그럴듯한 이치를 담는 미학이 살아 있음을 짐작할 만하다.

그런 이야기 전개의 특징은 <추재기이>에서 대표적 레퍼토리로 든 ‘황새결송’에도 똑같이 나타난다.

 

“관에 구멍 뚫어 ‘공수거’ 인생”

한편, <청구야담>에도 외무릅의 재담 한 편이 구연 상황과 함께 실려 있다. 재산이 매우 많지만 인색하기 짝이 없는 종실(宗室) 노인이 서울에 살았다. 그는 재물을 터럭 끝만큼도 남에게 주는 법이 없고 심지어는 아들 넷에게도 분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그가 하루는 외무릅을 불러다 고담을 시켰다. 외무릅은 그 기회에 멋진 재담 하나를 떠올렸다.

그는 서울 장안에 사는 천하 구두쇠 이동지(李同知) 사연을 구연했다. 팔자가 좋아 부자로 사는 이동지는 임종할 때까지 재물 재(財) 한 글자를 가슴에서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가 임종을 앞두고 아들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남겼다. “죽음을 앞두고 보니 그 많은 돈을 가져가지 못해 한이다. 평생 재물에 인색한 것이 후회스럽다. 그러니 내가 죽은 뒤엘랑 양손을 좍 펴고 쥐게 하지 마라. 관 좌우에 구멍을 뚫어 편 손을 내놓아 행인들로 하여금 내가 산처럼 재물을 쌓아놓고도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줘라!” 자식들이 유언을 거역하지 못해 시키는 대로 하여 운구했다. 외무릅이 종실 노인집에 오는 길에 관 밖에 손이 나와 있는 것을 목도하고 이상하게 여겨 물었더니 그런 사연을 말해주더라고 했다. 종실 노인이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을 조롱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지만 이치가 그럴듯해서 후한 상을 내리고 모든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었다.

줄거리만으로는 흥미성이 떨어지지만 외무릅 재담의 특징이 그대로 살아 있다. 외무릅 같은 뛰어난 재담꾼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앞이나 특별히 초청하는 부귀한 사람들 앞에서 구연을 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재담의 기예는 다른 대중적 연예에 자리를 물려주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의 공연은 조선 후기 도시적 시정문화의 전성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진정한 남자 못 찾고 떠난 명기 한섬

이정보 묘 앞에서 통음한 의리의 예인, 숱한 호걸들 버리고 쓸쓸한 말년

18세기에는 명성이 자자한 기생들이 아주 많다. 제각기 뛰어난 가무와 인물로 명성을 남겼으나 그들 모두가 후대까지 명성을 전하지는 못했다. 특별한 그 무엇이 있는 자만이 운 좋게 존재를 뒤에 남겼다.

<추재기이>에는 그런 기생이 3명 등장하는데 제주도 기생 만덕과 정인을 따라 죽은 기생 금성월, 그리고 한섬(寒蟾)이다. 만덕과 금성월은 이미 소개했다. 한섬 역시 저 두 기생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명성이 있었다. 과연 어떤 행적을 보인 인물일까? 먼저 <추재기이>부터 살펴보자.

» 진정한 남자 못 찾고 떠난 명기 한섬.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한섬은 전주 기생인데 황교(黃橋) 이판서(李判書)가 그를 집으로 데려다 가무를 가르쳐 온 나라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한섬이 나이가 들어 집으로 돌아간 지 한 해 남짓 지나 판서가 세상을 떴다. 한섬이 즉시 말을 달려 판서의 묘에 이르러 한 번 곡하고 술 한 잔 따르고 술 한 잔 마시고 노래 한 곡 불렀다. 다시 두 번째 곡하고 두 번째 잔을 따르고 두 번째 잔을 마시고 두 번째 노래를 불렀다. 이렇듯이 하루 종일 돌려가며 한 뒤 자리를 떴다.”

아주 간단한 기록이다. 나이가 든 전주 기생 한섬이 자신을 뛰어난 예인으로 길러준 후원자가 죽자 극진한 예를 다해 추모했다는 사연이다. 아무리 큰 은혜를 입었어도 배반하는 자 많은 것이 세상 형편이고 더욱이 사망한 뒤에는 못 들은 척하면 그만일 것을, 한섬은 지극 정성으로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것도 평범한 유교적 예법이 아니라 예인들의 독특한 방법으로 말이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낸 것은 망자를 애도한 가기(歌妓)의 독특한 애도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사연만으로 한 시대 명사의 틈에 끼일 수 있을까? 디테일을 생략한 조수삼의 이야기 전개 때문에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 줄거리에 비밀이 있다.

 

소실로 데려가 대가 없이 인정 베풀어

<시필>(試筆)이란 책에 실린 비슷한 사연을 보면 왜 그런지 다소 의문이 풀린다. 그 전문을 보자.

“전주 기생 한섬은 침선비(針線婢)로 뽑혀 서울에서 노닐었다. 뒷날 용모도 추레해지고 의지할 데가 없어지자 이정보 판서께서 불쌍히 여겨 자기 집에 살게 했다. 그러나 한 번도 관계를 맺지 않고 잘 대우했다가 만년에 재물을 많이 딸려서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이 판서가 죽은 뒤 소식을 들은 기생이 술을 싣고 판서의 무덤을 찾아갔다. 무덤에 이르러 술을 따라 무덤에 뿌리고 다시 큰 술잔에 술을 따라 스스로 마시고는 ‘대감께서 평생 술을 즐기시고 노래를 즐기셨지요!’라고 말한 뒤 마침내 노래를 길게 뽑았다. 노래를 마치고 통곡하고 곡을 마치고서 다시 술을 따라 무덤에 뿌렸다. 술이 다 떨어지자 애통해하다 기절하여 묘 앞에 거꾸러졌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바로 떠나갔다.”

한섬의 동일한 사연을 다룬 기록으로 전하는 이에 따라 디테일이 약간 달라졌을 뿐이다. 조수삼의 건조한 기록보다는 인과관계가 훨씬 설득력 있게 묘사되어 이 사연이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감동을 불러일으킨 이유를 수긍케 한다. 여기서는 나이가 든 한섬을 소실로 데려다가 대가 없이 인정을 베푼 측면과 한섬이 애통해하다가 기절하는 장면까지 등장하여 훨씬 더 감성적인 색채를 가미했다. 어쨌든 서로 다른 두 종의 기록에 등장할 만큼 이 사연은 유명세를 탄 이야기였다. 하지만 단순히 이 에피소드가 특이해서 이렇게 기록에 전해진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만큼 화제의 당사자인 한섬이 나라 안에 명성이 자자한 대중적 인기인이었고, 그 상대역인 이 판서 역시 매우 유명했기에 그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조차도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 한섬을 키웠다는 황교 이판서는 대체 누구일까? 그는 영조 때 대제학과 예조판서를 지낸 이정보(李鼎輔·1693~1766)다. 서울 종묘 동쪽에 있는 황교 다리 부근에 살았기에 조수삼은 그를 ‘황교 이판서’라고 불렀다. 이정구(李廷龜)·이명한(李明漢) 집안의 후손으로 대표적인 경화세족(京華世族) 출신이다. 특히 음악에 뛰어난 실력이 있어서 스스로 곡을 만들어 지금도 시조집에 그가 지은 시조가 80수 가까이 전한다. 그런 실력으로 고관을 지내는 중에도 가객과 가기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시조를 유행시킨 당사자로 유명한 이세춘(李世春)과 거문고의 김철석(金哲石), 그리고 추월(秋月)·계섬(桂蟾)·매월(梅月) 등의 가기가 그 문하에 출인한 당대 최고의 음악인이었다. 이들의 모습은 <청구야담>에 ‘기생 추월이 늘그막에 옛일을 말하다’와 이옥(李鈺)의 ‘가객 송귀뚜라미 전기’에 문학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므로 이정보는 곧 당대 최고 음악가들이 모여드는 살롱의 주도자였고, 한섬은 그에 의해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기로 양성된 셈이다. 한섬은 그런 이정보에게 끝까지 제자로서 신의와 도리를 다했기에 여성의 의리와 예인의 의리를 한꺼번에 보여준 ‘기특한’ 존재였다.

전주 출신 기생 한섬의 사연은 두 종의 기록 외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앞서 말한 <청구야담>에 이정보의 대표적인 제자 중 하나로 나오는 계섬(桂蟾)이 바로 한섬(寒蟾)과 동일인이라고 추정된다. 계섬을 심로숭(沈魯崇)은 계섬(桂纖)으로 썼다. 그런 추정의 이유는 이정보가 키운 대표적 제자로서 그 행적과 이름이 매우 유사한 데 있다. 그에 관한 사연이 기록에 의해 전해진 것이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이름과 행적이 기록자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에서 차이가 있으나 큰 줄거리는 비슷하다.

 

심로숭이 전한 ‘계섬’과 동일인물 추정

대표적인 기록이 심로숭이 쓴 <계섬전>(桂纖傳)이다. 그는 늙은 계섬을 직접 만나 사연을 듣고 상세하게 전기를 썼다. 여기에도 앞서 한섬의 존재를 부각시킨 처신이 다시 등장한다. 이정보가 죽자 계섬은 아버지를 잃은 듯 날마다 곡을 했다. 마침 나라 잔치를 준비하느라 날마다 관아에 모여 연습해야 했지만 그는 아침저녁으로 상가에 가서 상식을 올렸다. 담당자가 곡하다 목이 쉴까 염려했기에 계섬은 곡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드디어 장례를 마쳤을 때 계섬은 이렇게 행동했다.

“공의 장례가 끝난 뒤 계섬은 제수와 술을 장만해서 공의 묘로 달려갔다. 한 잔 올리고 한 번 노래하고 한 번 곡하기를 하루 종일하고 돌아갔다. 그런 사연을 들은 공의 자제들이 묘지기를 책망하자 계섬은 몹시 한스럽게 여기고 다시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한량들과 노닐다가 술이 거나해져 노래를 하고 나면 왕왕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다소 차이가 나지만 줄거리는 비슷하다. 이정보의 묘는 지금 경기 이천시 율면 신추리에 잘 보전되고 있다. 계섬과 한섬이 혼동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동일한 행위를 다른 제자가 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심로숭은 이 계섬의 인생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계섬은 전주 출신이 아니라 황해도 송화(松禾)의 노비 출신이다. 심로숭이 글을 쓴 1797년에 나이가 62살이라고 했으므로 1736생이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해 한양 귀족들의 잔치 자리와 한량패의 술판에 계섬이 없으면 부끄러운 일이었다. 참판 원의손(元義孫)이 그 명성을 흠모하여 계섬을 데리고 10년을 살았으나 말 한마디 어긋나자 바로 그 곁을 떠나버렸다. 그 이후 당대의 이름난 가객이 모여든 이정보 문하에 들어가 노래를 익혔다. 이정보는 계섬을 가장 아꼈는데 사적 호감에서가 아니라 재능을 아꼈기 때문이다. 악보에 맞춰 몇 년을 배운 뒤로 계섬은 온 나라에 명성이 자자하여 지방에서 올라온 기생들이 그로부터 노래를 배울 정도였다.

1766년 이정보가 죽었을 때 계섬의 나이 31살이었다. 기생의 나이로는 늙었다고 할 때이다. 다른 기록에 ‘계섬이 나이가 들었다’고 할 법하다. 그 뒤로 한양의 큰 부자 상인 한상찬(韓尙贊)과 살았으나 그도 마음에 차지 않아 버리고 떠났다. 40살 무렵 불도에 귀의하여 정선군 산중에 전답과 집을 마련하여 떠났다. 산에 들어간 뒤로는 짧은 베치마를 걷어붙이고 광주리를 끼고 나물과 버섯을 따러 산이며 강을 오갔다. 그런 생활을 하며 밤낮으로 불경을 외우며 살았다.

 

“홍국영은 귀신도 모르게 죽을 것”

그 뒤에 다시 세상에 나왔다가 당대의 풍류남아 심용(沈鏞·1711∼88)과 어울렸다. 경기 파주군 시곡촌(柴谷村)에 있는 심용의 시골집 뒤에 거처를 정해 살았다. 거처가 심로숭이 사는 미륵산과 5리밖에 떨어지지 않아 어울려 지냈다. 산중에 나무를 엮어 울타리를 삼고, 바위를 깎아 섬돌을 만들었다. 대여섯 칸 되는 초가에 둥근 창을 냈고, 병풍·서안·술동이·그릇 등이 가지런히 놓여 화사하면서도 깔끔했다. 집 앞에 작은 밭을 가꿔 채소를 심었고, 논 몇 마지기를 소작을 맡겨 먹고살았다. 날마다 불경을 송독하며 보살로 살아갔다. 그런 노년 생활을 심로숭은 제법 상세하게 그렸다.

한편, 정선으로 은퇴했던 계섬이 잠깐 다시 세상으로 나온 일도 언급했다. 정조가 등극하고 난 뒤 홍국영(洪國榮·1748~81)이 권력을 잡았다가 지나치게 극성하자 정조가 물러가게 했다. 그때 정조는 그에게 많은 노비를 하사했는데 계섬도 그중에 끼어 있었다. 홍국영이 부르자 할 수 없이 산중에서 나온 계섬은 고관들의 잔치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 곧이어 홍국영이 완전히 실각하자 계섬은 기생명부에서 빠져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명성을 유지한 계섬의 행적이 약간 보인다.

하지만 심로숭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으나 계섬과 홍국영 사이에는 제법 복잡한 인연이 있다. 친아들이 일찍 죽은 이정보는 이건원(李建源)을 양자로 들였고, 이 무렵 그 친동생 이관원(李觀源)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다. 1777년 홍계희(洪啓禧)의 손자 홍상범(洪相範)이 강용휘(姜龍輝) 등을 사주하여 막 등극한 정조를 시해하려고 궁궐 담을 넘은 역모 사건이 발생했다. 이관원의 장인 홍계능(洪啓能)이 그 주모자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관원도 연루되어 처형되어야 했으나 “아비가 왕가의 신하였으니 살려두어 후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애걸하여 겨우 살아나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홍국영은 이정보와도 가까운 인척 관계가 있어 어릴 적부터 그 집을 왕래했다. 홍국영에게 계섬이 노비로 하사되었다는 기록이 올바른 정보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면 이러한 사유 때문이리라.

<계서야담>에 이 사건과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이정보의 첩은 전주 기생으로서 홍국영이 어렸을 때 이 기생이 머리를 빗기고 세수를 시켜주었다. 이관원 집안이 풍비박산되었을 때 그의 집에 머물던 기생이 홍국영을 찾아가 이관원을 살려달라고 빌려 했으나 문전박대를 당했다. 아침을 기다려 입궐하는 수레를 막고서 “우리 대감 집안을 왜 멸망시키느냐?”고 하소연했으나 그대로 쫓겨났다. 기생은 통곡하며 “하늘이 아시리라. 홍국영은 귀신도 모르게 죽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관원이라면 앞서 무덤에서 통곡하는 계섬을 쫓아낸 자제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그를 도우려 한 의기를 보인 전주 기생이라면 아무래도 한섬 또는 계섬일 것이다. 심로숭의 기록과 <계서야담>이 서로 차이가 나지만 홍국영과 계섬의 이야기라는 점을 놓고 보면 동일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계섬은 이정보 집안과 밀접하게 이어진다. 이렇게 사후에도 계섬은 이정보 집안과 사연이 이어진다. 그리고 모두 계섬의 의리와 관련된다.

 

이상적인 남성상은 이정보였을까?

언젠가 계섬은 심로숭에게 지나온 인생 이야기를 풀어놓은 적이 있다. 소싯적부터 명성이 나서 당대의 영웅호걸을 수없이 만났다. 그들은 호화스런 저택과 휘황찬란한 비단으로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 그런 사람이 많아지고 화려한 생활이 이어질수록 이상하게도 마음속은 채워지지 않았다. 세상이 우러러보는 영웅호걸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채워줄 진정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 계섬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언젠가 이정보가 이런 말을 했다.

“지금 세상에는 너만 한 남자가 없으므로 너는 끝내 그런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노년의 삶을 보면 계섬은 진정한 지기를 만나지 못한 회한을 쓸쓸히 지니고 있다. 그런 그에게 “당신의 전기를 내가 써주었으니 내가 당신의 진정한 남자가 아니냐”고 심로숭은 농담을 던졌다.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여인에게 진정한 지기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일 듯하다. 그 쓸쓸한 바람을 계섬은 분명 알았을 것만 같다. 그런 진정한 남자까지는 아니라도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고 키워준 이정보를 그런 남자에 가깝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한 시대의 이름난 가기 계섬은 오로지 한 수의 시조를 남겼다. 그의 본색과 직접 연결되는 내용은 아니지만 쓸쓸한 마음자리는 보여주는 듯하다. 그 시조는 이렇다.

청춘은 언제 가며 백발은 언제 온고

오고 가는 길을 알았다면 막을 것을

알고도 못 막는 길이니 그를 슬퍼하노라

 

여승과 주고받은 연애편지

양반 남자가 비구니를 유혹하며 주고받은 가사인 ‘승가’와 의금부 도사 남휘의 관계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시대 가사 작품 가운데 ‘승가’(僧歌)란 것이 있다. 4편의 연작으로, 제목만 놓고 보면 ‘스님의 노래’이므로 승려가 지은 불교가사로 보인다. 국문학계에서는 실제로 꽤 오랫동안 특이한 불교가사로 간주해왔다. 굳이 특이하다고 말한 이유는 이 작품이 불교를 찬양하는 내용이 아니라 거꾸로 불도를 잘 닦고 있는 여승을 세속의 양반 남자가 유혹해 환속시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 여승과 주고받은 연애편지 /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한강변에서 마주친 그대를 못 잊어

성(聖)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 속인과 사랑한 뒤 파계하는 제재는 동서양 문학에서 드물지 않다. 남자가 여자를 파계시키기도, 여자가 남자를 파계시키기도 한다. 이 노래는 도봉산 망월사라는, 지금도 잘 유지되는 절에 사는 비구니를 한 남자가 파계시키는 내용이다. 망월사에서 한강변을 따라 길을 나선 여승을 한 남자가 우연히 보았다. 남자는 동대문 근처까지 동행한 뒤 여승을 잊지 못하고 구애하는 가사를 지어 망월사에 보냈다. 여승은 불도를 닦는 처지임을 들어 거절했으나 남자는 자기와 살자는 가사를 다시 지어 보냈다. 두 번의 구애를 받고 여승은 마침내 승낙하는 가사를 보냈다. 비구니는 성(聖)과 속(俗)의 갈등에서 결국 속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연만도 흥미로운데다 편지로 왕복한 대화 형식도 신선하다. 작품성을 높이 인정받지는 않았으나 특이한 가사로서 주목을 받아왔다. “어와 보고 싶네. 저 선사(禪師) 보고 싶네. 반갑기도 그지없고 기쁘기도 측량없네. 네 여인의 고운 모습으로 남자복색 무슨 일인가. 저렇듯이 고운 얼굴 은누비에 쌓인 모양, 삼오야 밝은 달이 떼구름에 싸였는 듯, 납설(臘雪) 중에 한매화(寒梅花)가 노송에 걸렸는 듯.” 처음 본 여승의 미모에 반해 들뜬 심경을 직설적으로 토로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작자가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았다. 많은 이본이 남아 있어 꽤 흔하게 불린 가사임을 알 수 있지만 작자를 보여주는 정보는 거의 없다. 남도사(南都事) 또는 남철로 작자명이 쓰인 것이 있어 남씨 성의 양반 사대부 정도로만 알았을 뿐이다.


그런데 <추재기이>에는 창작된 배경과 동기를 보여주는 ‘삼첩승가’(三疊僧歌)란 기사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인즉 이렇다.

“남 참판(南參判)이 소년 시절에 길을 가다 여승을 보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잊지 못해 긴 노래를 지어서 사랑하는 마음을 호소했다. 그 여자도 답하는 노래를 지어 세 편을 주고받았다. 이후 그 여자가 머리를 기르고 남씨 집안의 첩이 되었다. 지금도 승가 세 편이 세상에 전해진다.”

이 기록을 현재 각종 노래집에 실린 가사와 견주어보면 정확하게 부합한다. 조수삼은 분명히 승가를 잘 알았을 것이다. 그가 살던 시대에도 많이 불리는 인기 있는 레퍼토리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노래에 얽힌 사연까지 잘 알려졌으므로 <추재기이>에 실었다.

여기까지는 학계에서 이미 밝혀졌다. 그런데 많은 역사기록을 뒤지다 보니 이 노래의 작자를 찾게 되었다. 임천상(任天常·1754~1822)이 편찬한 <시필>(試筆)이란 책에 승가의 작자와 그의 특이한 행적을 기록한 대목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를 들면 이렇다.

“도사(都事) 남휘(南徽)는 용맹하고 지략이 있었으며, 의기(意氣)를 좋아했다. 소싯적에는 방탕하게 놀기를 즐겨서 행동을 자제하지 않았다. 언젠가 여승을 만났는데 몹시 아름다웠다. 승가를 지어 유혹하여 마침내 집에 데리고 와 첩을 삼았다.

지금 세상에 전해지는 승가가 바로 이것이다.”

 

“가슴에 불이 난다”며 “살려달라”

의금부 도사를 지낸 남휘란 사람이 승가를 지은 작자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다른 내용은 <추재기이>와 비슷하다. 매우 신뢰할 만한 사료이기에 이를 바탕으로 남휘를 추적해보았다. 뜻밖에도 오래된 족보를 비롯해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 그의 행적이 제법 많이 실려 있었다. 그는 1671년에 태어나 1732년에 죽은 양반으로 당시에는 유명세를 탄 인물이었다. 병자호란 때 전사한 남이흥(南以興) 장군의 증손자로 무인 집안 출신이며, 또 친척 가운데 무인이 많았다. 그도 병법을 잘 알고 무인의 자질이 있다 하여 여러 사람에게 추천을 받아 권무청(勸武廳) 부장(部將)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남휘 본인은 무인으로 출세하기를 바라지 않고 문학에 힘써 1708년 진사시에 2등으로 급제했다. 도중에 아예 출근을 하지 않아 조정에서는 그를 유배 보내자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기도 했다. 후에는 부장에서 의금부 도사로 직책을 바꿔 근무했다. 그는 참판을 지내지는 않았는데 조수삼은 잘못 알고 있었다. 그는 호방한 무인의 풍모와 문장을 갖춘 인물이었다. 여승에게 “세상에 갓 쓴 사람 나뿐이라 하랴마는 문무겸전(文武兼全) 호걸사(豪傑士)야 우리밖에 또 있느냐”고 자랑한 것이 허황한 거짓은 아닌 셈이다. 그렇다고 번듯한 문집을 남긴 사람은 아니었으나 문학을 향한 의욕이 구애 편지를 가사로 쓰게 만들었던 듯하다.

그런 남휘가 일반 여성이 아닌 여승을 유혹해 첩으로 삼은 동기가 어디에 있을까? 그는 15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 있었다. 임천상이 지적한 것처럼, 소싯적에는 방탕하게 놀기를 즐겼고, 행동을 자제하지 않았다. 게다가 만년에 유명한 거부가 된 것으로 보아 젊어서도 집안이 가난하지는 않았다. 이미 결혼해 부인이 있었으나 20대 젊은 나이에 여승을 보고 미모에 반해 구애를 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난봉꾼이라고 손가락질당하기 딱 좋으나 당시에는 용인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상대가 여승이란 것이 특별했다.

한편, 그는 여러 사람에게 추천을 받아 숙종대왕을 알현까지 했으나 부장을 수행할 마음이 없다며 출근도 하지 않을 만큼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한마디로 집안 좋고 인물 좋고 부유하고 성정이 호방하기에 마음에 드는 여성을 보자 망설이지 않고 첩으로 삼으려 했으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상대방을 유혹하고 설득했을까?

“두미(斗尾) 월계(月溪) 좁은 길에 남 없이 둘이 만나 추파(秋波)를 보낼 적에 눈에 가시 되었단 말인가. 광나루 함께 건너 마장문(馬場門) 돌아들 때 그이 가는 길이 남북으로 나뉘었소. 단순호치(丹脣晧齒) 반개(半開)하고 삼절죽장(三節竹杖) 잠깐 들어 ‘평안이 행차하시오 후일 다시 보사이다.’ 말가죽 잡고 바라보니 한없는 정이로다. 아장아장 걷는 걸음 가슴에 불이 난다. 한 걸음 두 걸음에 길이 점점 멀어가니 이 전에 걷던 말이 어이 그리 빨라졌나.”

여승을 보고 자신이 얼마나 가슴을 졸이고 반했는지를 고백한 대목이다. 그러더니 마지막 대목에서는 “왼손편 못 울기는 옛말도 들었더니 짝사랑 외기러기 나 혼자뿐이로다. 선사님 생각해보소. 내 아니 가련한가. 우연히 만나보고 무죄하게 죽게 되니 이것이 뉘 탓인가. 불상치도 않은가 저근듯 생각하여 다시금 생각해보소. 대장부 한 목숨을 살려주면 어떠할꼬”라며 아예 강짜를 놓는 투다. 너 때문에 나 죽게 됐으니 내 목숨 좀 살려달라는 하소연이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작업’을 거는 바람둥이의 허튼 수작에 불과해 보이기도 한다.

이런 수작에 여승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한 몸 바치나니 하실 대로 하소서”

“어와 뉘시던가. 경화(京華) 호걸 아니신가. 내 이름 언제 듣고 내 얼굴 언제 봤는가. 무심히 가는 중을 반기기는 무슨 일인가. 머리 깎은 중의 얼굴 덜 미운 데 어디인데 저렇듯이 눈에 들어 병이 차마 난단 말인가”라며 당혹스럽다는 듯이 서두를 꺼낸 뒤 답장을 받고 보니 마음이 산란하다고 말하고는 결연히 거절하는 답서를 역시 가사체로 써서 보냈다. “날 같은 인생을 생각도 마르시고 의술을 모르거든 남의 병을 어이 알고 인명이 재천(在天)커든 내 어이 살려내리. 천금 같은 귀한 몸을 부질없이 상치 말고 공명에 뜻을 두어 속절없이 잊으시고 무관한 중의 몸을 더럽게 아옵시고 영화로 지내다가 홍안분면(紅顔粉面) 고운 님을 다시 얻어 구하셔서 천세나 누리소서”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남휘는 다시 “아마도 선사님 만나 운우정(雲雨情)을 맺게 되면 약 아니라도 나으려니 선사님 덕이 될까 하노라”는 가사를 지어 보냈고, 여승은 마침내 “장부일언은 쳔년불괴(千年不壞)라. 여러 말 쓰르치고 일언에 결(決)하나니 믿나니 낭군이요 바라나니 후사(後事)로다. 한 몸 바치나니 하실 대로 하소서”라고 승낙하는 답장을 보냈다.

이때 여승은 나이 22살이었다. 남휘도 그 비슷한 나이로 보인다. 그러면 1690년대 초반에 둘 사이에 사연이 발생했을 것이다. 남휘가 부장으로 재직할 때였다. 유치한 사랑 타령 같기도 하나 300년 전 젊은 연인이 연애하는 구체적 모습이 이렇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비슷한 신분의 젊은 남성과 여성이 나눈 사랑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양반집 남성과 당시로서는 신분이 천했던 여승의 처지이므로 가능했다. 그런데 이 가사가 당시부터 대단히 인기가 있었고 그로부터 거의 200년 동안이나 널리 불렸다. 남녀 사이에 오간 비밀스런 구애의 가사가 인기를 얻은 이유는 무엇일까?

남휘는 평범한 사대부와는 달리 기걸하고 호방한 사람으로서 자신과 첩 사이에 오간 가사를 혼자서만 간직하지 않고 남들에게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뒤 가사가 널리 세상에 퍼졌을 것이다. 내 판단으로는 그들의 사연이 지금도 흥미롭지만 당시에는 더욱 큰 반향을 일으켰으리라. 이 승가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이렇게 사랑을 직접적으로 고백한 가사가 없었다. 남녀 간 사랑을 다룬 가사라고 해야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처럼 남성이 여성 화자가 되어 군주를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연군가사가 있을 뿐이었다. 승가는 남녀 사이의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거의 최초의 가사다. 구체적 상대를 향해 구애하는 호소력 강한 작품이다. 도덕과 충성, 자연 애호와 은둔을 주제로 하는 사대부의 점잖은 가사에 비교하면 이 가사는 그야말로 풍속을 해치는 도전적인 가사였으리라. 그러나 그 점이 바로 당시 사람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해 매료시키지 않았을까? 대중의 심리를 파고든 새로운 주제이자 감동적인 내용이 아니었을까?

남휘와 여승은 그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전하는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남휘는 의금부 도사를 지낸 뒤 재산 증식에 힘써 거부가 되었다. 그가 죽던 해 <승정원일기>에는 부평부사가 그에게 600석의 쌀을 빌려 문제가 된 사건이 나온다. 그만큼 그는 부자로 인정받은 듯하다. <시필>에도 거부인 그의 특이한 행적이 두 건이나 등장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다음 이야기다.

“남 도사는 거부가 되었다. 누군가 부자가 되는 방법을 묻자 남 도사는 뜰에 서 있는 나무로 올라가라 하고 양손으로 가지를 잡은 채 허공에 매달리라고 했다. 곧이어 한 주먹을 놓게 하고, 또 한 주먹을 놓으라고 했다. 그 사람이 놀라면서 ‘그러면 낙상합니다!’라고 하자 남도사는 그제야 ‘내려오게! 그것이 부자가 되는 방법이야. 돈 한 푼 쓸 때도 그 주먹을 놓듯이 하게!’라고 말했다.”

 

슬하의 서녀 셋, 여승의 아이일까

부자가 되는 방법으로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가 바로 남휘의 사연이다. 그는 박규문(朴奎文)·이장(李樟)과 함께 경기 부천시의 옛 이름인 계양(桂陽)의 호걸로 불렸다고 전한다. 족보에는 슬하에 서녀(庶女) 셋을 두었다고 나와 있다.

여승과 사이에서 나은 소생이 들어 있을 법도 하다.

한때 문무 겸전한 호남아로, 나이 들어서는 거부라는 명성을 누렸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남휘란 이름은 사라지고 그저 남 도사란 범칭으로 불렸다. 다른 모든 명성은 사라지고, 젊은 시절 호기로운 구애의 도구로 썼던 가사만이 세상에 오래 전해져 큰 인기를 누렸다. 문학의 힘은 이런 데 살아 있다.

 

18세기 대중스타 광대 달문

추악한 외모에도 가는 곳마다 사람 모은 당대 최고의 예능인, 말년에 역모 휘말려

조선 후기에도 현대 대중문화계에서 볼 수 있는 스타가 존재했을까? 문화와 예술의 양상이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대중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린 스타가 존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양반문화와는 달리 대중의 관심을 끌어모은 대중문화가 성장한 때문이다. 그런 스타들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명성과 부를 거머쥐기도 했다. 가수와 악사, 바둑기사, 재담꾼, 판소리 광대와 같은 예술가들이 그런 축에 드는데, 이번에 살펴볼 광대 달문(達文·1707~?)도 그중 한 명이다. 달문은 거지, 광대, 사치품 거간꾼, 기생의 기둥서방, 재담꾼, 방랑자가 이력이다. 천하의 못생긴 남자로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인생 만년에는 역모 사건에 연루돼 귀양까지 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워낙 대중적 인기가 높아 그에 관한 이야기는 한 시대를 풍미했다.

» 18세기 대중스타 광대 달문 /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두 주먹이 한입에 들락날락

그는 18세기 대중의 스타로서 손색이 없다. 그렇기에 연암 박지원이 그의 인생을 묘사한 <광문전>(廣文傳)이란 전기를, 홍신유(洪愼猷)는 ‘달문가’(達文歌)라는 장편시를 써서 그의 독특한 인생을 묘사했다. 이규상·이옥·유재건·조수삼도 그의 인생을 다룬 글을 썼고, <파수록>과 <동야휘집> 같은 야담에도 그의 행적이 등장한다. 웬만한 고관대작은 이 정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도대체 그의 무엇이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었을까?

먼저 그를 기억하고 묘사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극히 추악한 그의 외모를 떠올렸다. 그를 직접 만나본 박지원은 그가 정말 못생겼다고 말했다. 입이 아주 큰 것이 외모 가운데 두드러졌다. 얼마나 큰지 두 주먹이 들락날락했다. 달문은 툭하면 주먹을 쥐어 입에 넣어 사람들을 웃겼다. 당시에 아이들은 상대에게 욕을 퍼부을 때면 “네 형은 달문이다”라고 놀렸다 한다. 달문이 그 말을 듣게 되면 “달문이 보고 싶으냐?” 하고 불쑥 입을 벌리고 껄껄 웃고는 주먹을 쥐어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추악한 외모에 천한 일을 했으나 달문은 안평대군의 후손이라고 했다.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으나 그의 성이 이(李)씨라는 사실은 말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이 무언지도 몰랐다. 박지원은 그의 이름을 광문(廣文)이라고 불렀다. 그에게 성은 필요가 없었다.


달문은 평민 대접도 받지 못하는 거지로 살았다. 한평생 주거가 일정치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아 상투도 올리지 못하고 머리를 길게 땋고 살았다. 나이 들어 머리를 땋은 패션이니 기괴하기 짝이 없는 꼴로 보였다. 홍봉한(洪鳳漢)은 그 시대에 달문과 같은 꼴을 하고 다니는 파락호(破落戶)가 아주 많고, 괴상망측한 몸가짐이 풍속을 손상시킨다고 걱정했다. 남들이 결혼하라고 권하면, 그는 “누구나 잘생긴 얼굴을 좋아하지. 사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야. 나는 본래 못생겨서 아예 용모를 꾸밀 생각도 하지 않아”라고 변명하곤 했다.

유명해지기 전에 달문은 거지 두목이었다. 종로 시장통에서 빌어먹고 다닐 때 거지 아이들이 그를 우두머리로 떠받들었다. 그때 한 사건이 벌어졌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날 거지들이 모두 구걸하러 밖에 나가고 달문만이 아픈 아이와 움막에 남았다. 아이가 덜덜 떨며 끙끙대기에 달문이 잠깐 나가 밥을 빌어와 보니 아이는 벌써 죽어 있었다. 마침 돌아온 패거리들은 달문이 죽였다고 의심하고 달문을 패서 내쫓았다. 달문은 그날 수표교 다리로 가서 거지들이 버린 죽은 아이의 주검을 수습해 묻어주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상인이 달문이 행한 의로운 행실을 소문냈다.

 

의로운 행실로 장안에 입소문

달문은 그 덕분에 약국에서 일하게 되었다. 달문이 장안의 명사로 떠오르게 된 사건이 그때 발생했다.

그 사연을 <추재기이>는 이렇게 묘사했다.

“언젠가 달문이 어떤 약방을 갔는데, 주인이 값이 나가는 인삼 몇 뿌리를 내보이며 ‘이 물건 어떤가?’라고 물었다. 달문이 ‘정말 좋은 물건’이라고 대꾸했다. 주인이 마침 내실로 들어가고 달문은 등을 돌리고 앉아 문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주인이 나와 물었다. ‘달문이, 인삼은 어디 있는가?’ 달문이 고개를 돌려보니 인삼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자 웃으며 ‘때마침 사고 싶어하는 사람이 나타나 제가 벌써 넘겼습니다. 이제 바로 값을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튿날 주인이 쥐를 잡으려다 세워놓은 약궤 뒤에서 종이로 싼 물건을 발견했다. 꺼내어 살펴보니 바로 어제의 그 인삼이었다. 주인이 깜짝 놀라 달문을 불러 ‘자네는 어째서 인삼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고 팔았다고 거짓말을 했는가?’라고 캐물었다. 달문이 ‘인삼은 제가 벌써 봤는데 갑자기 잃어버렸으니, 제가 모르는 일이라고 말씀드리면 주인께서 저를 도둑놈이라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대꾸했다. 그 말을 듣고서 주인은 부끄러워하며 꾸벅꾸벅 머리를 조아리며 미안하다고 했다.”

약국 주인은 잘 아는 부자와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달문을 칭찬했다. 달문의 행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안의 화젯거리가 됐고, 누구나 인정하는 의롭고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 됐다.

그 때문에 달문이 빚보증을 서주면 담보를 묻지 않고 천금(千金)이라도 당장 내줄 만큼 달문은 신용 그 자체였다.

쾌남아 달문은 소싯적에 거지들과 어울리면서 당시 하층 사회에서 크게 유행했던 각종 연희를 골고루 배웠다. 각종 연희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광대로 발돋움했다. 특기를 보인 연희는 만석중놀이와 철괴무, 팔풍무였다. 만석중놀이는 황진이의 미모에 빠져 파계했다는 지족(知足)선사를 조롱하는 내용의 탈춤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공연됐다. 철괴무(鐵拐舞)는 이철괴(李鐵拐)라는 기괴한 모습의 신선을 흉내내 추는 춤으로 산대놀이의 하나로 공연됐고, 팔풍무(八風舞)는 남사당놀이의 땅재주넘기와 유사한 놀이다.

홍신유는 그의 공연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팔풍무를 잘 추어 용이 꿈틀거리는 듯. 몸을 뒤로 젖혀 머리가 발에 닿으면 배꼽이 볼록 하늘로 솟네. 사지는 뼈가 없는 듯 어느새 몸을 돌려 뒤집더니 갑자기 가슴을 휙 바꿔 똑바로 섰다가 갑자기 거꾸러진다. 흘겨만 볼 뿐 똑바로 보는 법 없고, 비뚤어진 입에서는 온전한 발음 나오지 않네. 산대놀이 좌우(左右)부와 장안의 악소배(惡少輩)들이 달문이를 모셔다 상좌에 앉히고 귀신 모시듯 떠받드네.”

묘사된 것처럼 인기리에 공연되던 산대놀이나 남사당패 놀이에서 달문은 발군의 실력을 뽐냈다. 연희꾼들 사이에서 최고의 예능인으로 꼽혀 존경을 받았다. 이런 연희는 하층민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는데, 달문은 거지들과 어울리면서 빼어난 연희 재능을 습득할 수 있었다. 달문의 빼어난 실력은 한양을 벗어나 전국적인 명성을 누렸다. 달문이 호남과 영남의 여러 고을을 돌아다닐 때 가는 곳마다 인기를 얻었다. 달문의 경우를 놓고 보면, 당시 대중문화의 판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둥서방 하며 명기 휘어잡아

달문이 연희에서 최고라고 해도 그것이 바로 생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문에게 장사를 권했다. 달문은 일본과 중국에서 수입한 물건을 부잣집과 대갓집에 중개하고 흥정해 이문을 남기는 일을 했다. 그런 일을 하다 보니 몇 푼의 이문에 쫓아다니는 꼴이 서글퍼졌다. “사내 대장부가 마당에 노는 닭처럼 모이 한 알 다툴까보냐?” 하며 그 짓도 그만두고 유흥가로 진출했다. 달문은 기방에 들어가 기생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며 살았다. 이른바 조방(助幇)꾼이다. 조방꾼으로 등장한 달문을 기생들은 크게 반가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달문은 이미 명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 달문에게 기생들은 처음에는 으스대다 나중에는 애교로 바뀌고, 그 다음에는 고분고분해졌다. 달문은 이 바닥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장안의 명기(名妓)들이 제아무리 곱고 아름다워도 달문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한 푼어치 값도 나가지 않았다. 기방에서 달문이 지낸 모습을 <광문자전>에는 이렇게 소개했다.

“언젠가 한양의 논다 하는 자들이 당시 장안에서 검무와 미모로 이름난 운심(雲心)의 집을 찾았다. 마루 위에 술상을 차리고 가야금을 연주시키고 운심에게 춤을 추라고 했다. 그러나 도도한 운심은 일부러 지체하면서 좀체로 춤추려 하지 않았다. 그때 달문이 운심의 집에 들렀고, 술자리 상좌에 앉아 좌중을 압도하며 무릎장단을 맞추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자 운심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광문을 위해 검무를 추었다. 좌중의 모든 사람이 한껏 즐기고 친구가 되어 헤어졌다.”

조방꾼 달문이 기방을 주도한 솜씨와 위세를 잘 보여주는 사연이다. 이렇게 달문은 조방꾼으로 새벽에는 장군의 연회에 불려가고, 저녁에는 왕손의 잔치에 나갔다. 그때 달문이 기생과 함께 모셨던 인물 가운데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와 명재상 조현명이 들어 있다. 하지만 달문은 잔치 자리에서 먹다 남은 술과 식은 안주를 걷어 먹는 일에 처량한 마음이 들었다.

 

전국 순회공연하며 명성 절정

달문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누구에게도 간다온다 말 없이 한강으로 나갔다. 배를 타고 충주로 가서 문경새재를 넘어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동래로 갔다. 때는 영조 23년(1747)이었다. 마침 통신사가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 동래에 도착했을 때였다. 통신사 행렬에는 수많은 예능인이 끼어 있는데 달문을 보고 모두 환영했다. 동래 사람들도 달문의 명성을 전부터 들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몰려들어 자기들 집으로 데려가 안주를 잘 차려놓고 술을 대접했다. 그렇게 사람들과 어울려 익살과 해학의 솜씨를 발휘하며 반년을 즐겼다.

달문은 그런 생활에도 지루함과 싫증이 났다. 다시 방랑을 시작해 전라도와 충청도를 두루두루 노닐고 다시 대동강을 건너고 청천강을 거슬러 올라가 의주 통군정(統軍亭)에 올랐다. 통군정은 중국 사신이 왕래하는 요지라, 기생들이 늘 잔치를 벌이는 곳이었다. 달문은 또 장기를 발휘했다. ‘달문가’에는 의주에서 노는 모습을 “휘장 안에는 비단 치마 늘어앉고 촛불 아래 대피리 줄풍류 난만하다. 봉두난발에 귀밑머리 튀어나와 반절에 기운이 펄펄 넘치네. 뜰 앞에 온갖 춤 어우러지고 술잔을 받아 마셔 얼굴은 불그레하네”라고 묘사했다. 이후 백두산과 금강산까지 등반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구경꾼들로 북적였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꾼다면, 달문은 전국 순회공연을 한 셈이다. 그러면서 더욱 전국적인 명성을 쌓았다. 명성이 높아지자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일이 발생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역모 사건에 그가 연루된 것이다. 영조 40년(1764) 달문이 58살 되던 해에 그는 역모 사건에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역모와 관련된 중죄인의 사건만을 기록한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과 <영조실록> <일성록>에 사건의 과정과 처리가 기록돼 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이태정(李太丁)이란 자가 경상도에서 중과 노비, 점쟁이 등 나라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역모를 꾀했는데 역모에 가담했던 자근만(者斤萬)이란 자가 관에 밀고했다. 주모자인 이태정이 달문의 동생이고, 자근만은 달문의 아들이라 자처해 사람들을 끌어모았기에 달문이 함께 체포됐다.

자근만이 달문의 아들을 사칭한 이유는 이렇다. 경상도 개녕에 있는 수다사에서 밥을 빌어먹던 자근만이 절의 스님들이 달문을 화제로 올려 이야기하면서 모두 그를 칭찬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보게 됐다. 자근만은 더 잘 얻어먹기 위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기가 바로 달문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스님들이 깜짝 놀라 자근만을 후하게 대접했다. 역모를 꾀하던 이태정은 달문의 동생을 사칭한 자근만이 후한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자기를 작은아버지라고 불러주면 함께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꾀어 달문의 동생을 사칭했다. 박지원도 이 사건의 내막을 기록하면서, 평생 총각으로 산 달문에게 동생과 아들이 나타나자 수상하게 여긴 자가 관에 고발해 사건이 드러났는데 나중에 대질심문을 하여 거짓임이 드러났다고 했다.

 

동생과 아들 사칭해 역모 꾀해

그해 4월17일 영조는 이태정을 사형에 처하고 달문은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데 인심을 미혹시켜 역적 이태정이 그 모습을 본뜨고 그 말투를 본뜨게 했다. 비록 본건에는 연루된 일이 없으나 사람 자체를 말하자면 난리의 근본이므로 변방에 유배 보낸다”고 하여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귀양 보냈다. <실록>에는 “달문이란 자는 무뢰한으로서 세상에 알려졌는데 머리가 반백인데도 총각의 모습을 꾸며 인심을 현혹하고 풍속을 어지럽혔다”고 기록돼 있다. 이에 나이가 많은데도 머리를 땋아 내린 자는 적발되는 대로 무겁게 다스리라고 전국에 공포했다고 한다. 달문의 인기를 노리고 달문의 스타일을 흉내내어 역모에 이용한 이 사건을 통해 달문의 인기가 어느 정도이고 얼마나 유행을 선도했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달문은 경성에 유배갔다가 다음해 9월5일에 방면됐다. 달문이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돌아오자 늙은이며 젊은이 모두 구경하는 바람에 한양의 저잣거리가 며칠 동안 텅 비었다고 한다. 달문의 인기는 그 사이에도 식지 않았다. 그러나 달문은 더 이상 옛날의 화려한 명성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후 그는 갑자기 한양에서 종적을 감췄다.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명성을 뒤로한 채 사라진 그를 사람들은 추억했다. 18세기 시정 사회에서 인기를 누리던 광대 달문의 인생은 시작도 끝도 종적을 알기 어렵다.

 

인기 제일이었던 ‘낭독의 달인’들

높은 문맹률·낮은 경제력 때문에 소설 암송해 들려주는 전문가들 각지에서 활약

몇 년 전부터 방송과 신문에서는 책을 읽어주는 기획이 자주 등장했다. ‘낭독의 재발견’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저 눈으로 읽어 내려가는 독서(讀書) 또는 간서(看書)의 무미함에서 벗어나 소리내어 읽고 듣는 것은 혼자서 독서하는 고독함 대신 사람 사이의 교감을 선사한다. 대개 작가나 아나운서가 잔뜩 분위기를 잡고서 읽음으로써 청자의 감성에 호소한다. 이러한 낭송과는 달리 주로 아이들에게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일은 이전부터 꽤 많이 활성화됐다. 모름지기 책이란 눈으로 읽는 것만큼이나 입으로 낭송해야 한다는 게 오랜 전통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 또한 전통의 복원이고 책 읽는 근본으로 되돌아가자는 노력의 하나이리라.

» 인기 제일이었던 ‘낭독의 달인’들 /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소설은 귀로 듣는 것이 더 일반적

그러나 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야기책은 아예 읽는 것이라기보다는 듣는 것이라고 해야 더 합당하다. 그런 이야기책의 대부분은 물론 소설책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따질 것 없이 소설을 널리 읽었고, 소설을 낭독하는 것이 대중의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많은 소설책은 한문으로 쓰여서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극소수였다. 한글로 쓰인 것이라고 해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조금 더 불어나는 정도에 그쳤다. 요컨대, 아무리 소설이 유행한다 해도 그 감상은 눈으로 하는 것보다 귀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만큼 문맹률이 높았다.

한편, 문맹과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제아무리 글을 읽을 줄 안다고 해도 책을 사거나 빌려서 볼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은 제한됐다. 이래저래 이야기책은 읽는 사람보다는 듣는 사람이 더 많았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시대가 제공하는 교양과 즐거움인 이야기책을 읽는 쾌락에 동참하고 싶지만, 읽지를 못하는 대중을 위해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다. 문맹자를 고객으로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사람이 그들이다. 그러나 문맹자만이 고객은 아니었다. 낭송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소설을 읽어주는 것이 예술 단계로까지 성장했고, 글을 아는 사람도 듣는 즐거움을 위해 낭송자를 불러들였다.


조수삼의 <추재기이>에는 전기수(傳奇叟)란 이름의 직업적 낭독자가 등장한다. 그 사연의 전문을 들어보자.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노인은 동대문 밖에 산다. 언문(諺文)으로 쓴 이야기책을 입으로 줄줄 외우는데 <숙향전>(淑香傳), <소대성전>(蘇大成傳), <심청전>(沈淸傳), <설인귀전>(薛仁貴傳) 따위의 전기소설들이다. 매달 초하루에는 청계천 제일교(第一橋) 아래 앉아서 읽고, 초이틀에는 제이교(第二橋) 아래 앉아서 읽으며, 초사흘에는 이현(梨峴)에 앉아서 읽고, 초나흘에는 교동(校洞) 입구, 초닷새에는 대사동(大寺洞) 입구, 초엿새에는 종루(鐘樓) 앞에 앉아서 읽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기를 마치면 초이레부터는 거꾸로 내려온다.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가고, 올라갔다가 또 내려오면 한 달을 마친다. 달이 바뀌면 또 전과 같이 한다.

노인이 전기소설을 잘 읽었기 때문에 몰려들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노인 주변을 빙 둘러 에워쌌다. 소설을 읽어가다 몹시 들을 만한, 가장 긴장되고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갑자기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다음 대목을 듣고 싶어서 앞다투어 돈을 던지면서 ‘이게 바로 돈을 긁어내는 방법이야!’라고 했다.”

 

주기적으로 번화가 옮겨가며 공연

동대문 밖에 사는 노인은 동대문에서부터 종루까지 당시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곳의 한 모퉁이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책을 암송해 들려주었다. 여섯 곳을 지정해놓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사람을 불러모았다. 사람들은 그가 어느 날 어디에서 판을 벌이는지 알았다. 그의 레퍼토리는 <숙향전>과 <소대성전>을 비롯한 언문소설인데 이것들은 당시에 인기를 누렸다. 그는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장면과 인물의 개성을 살려서 들려주는 특별한 구연(口演)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청중을 불러모았다. 그가 좌정한 곳은 당시 가장 번화한 거리의 목이 좋은 자리였을 것이다. 그런 장소를 독차지한 것을 보면 그는 제법 위세가 있는 행상 겸 기능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평범한 구연자와는 격이 다른 직업적인 전문가였다. 가장 긴장되고 드라마틱한 대목에서 중지함으로써 청중으로부터 보수를 받아내는 방법도 그런 수완의 한 측면이다. 이런 수완은 다른 기예에서도 종종 사용되는 방법이었다.

 

이야기에 빠져 이야기꾼 살해하는 일도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중국에서 이렇게 소설책을 읽어주는 장면을 구경하고 바로 조선의 골목과 시장에서 <임장군전>(林將軍傳)을 입으로 외워 구연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박지원이 떠올린 구연자가 <추재기이>에 등장한 전기수와 동일인은 아닐지 몰라도 크게 다름이 없다. 이렇게 불특정한 다수의 청중을 상대로 이야기책을 재미있게 읽어주는 직업인이 번화한 도시에서 출현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 사람을 조수삼은 ‘전기수’라고 불렀다. 전기는 소설이나 이야기책을 가리키므로 전기수는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노인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런 직업인을 부르는 일반적 호칭으로 사용됐다는 증거는 없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서울에서는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만한 증거가 남아 있다. 정조 14년 8월10일 우연하게 발생한 살인사건을 판결하면서 국왕 정조는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옛날 한 남자가 있었는데 종로 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소설책 읽는 것을 듣다가 영웅이 크게 실의(失意)한 대목에 이르렀다. 문득 눈초리를 찢고 침을 뱉더니 담배 써는 칼을 잡아 소설책 읽는 사람(讀史人)을 쳐서 그 자리에서 죽였다. 왕왕 맹랑하게 죽는 일과 우스운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국왕이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상당히 널리 알려진 사건일 것이다. 여기서는 소설책 읽어준 사람을 ‘독사인’이라고 했다. 사(史)는 곧 패사(稗史)로서 소설책을 의미하므로 독사인은 전기수와 같은 말이다. 종로에 있는 담배가게가 청중을 모아놓고 소설책을 읽는 장소로 사용됐다. 당시 종로의 담배가게는 다른 가게와 비교해 규모가 크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다.

전기수나 독사인이 청중을 모으는 장소는 이렇게 인파가 모여드는 곳이었다. 상당한 인기를 끌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대단히 감동적으로 이야기책을 구연해 청중을 완전히 소설 속으로 몰입하게 만들었고, 그 때문에 현실과 허구를 분간하지 못하고 구연하는 사람을 살해하는 일까지 발생했던 것이다.

이런 사건을 보면, 당시 시장 한 모퉁이에서 수많은 청중에게 둘러싸인 채 이야기책을 흥미진진하게 구연하는 전기수와 그의 구연에 몰입한 청중들이 뿜어내는 분위기를 다소나마 유추해볼 만하다.

이러한 이야기꾼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편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만큼 전문적이지도 못하고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한 그룹으로, 떠돌이 행상처럼 이곳저곳 그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부류도 있었다. <이향견문록>에 등장하는 이자상(李子常)이란 사람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이자상은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각종 술서(術書)를 모두 읽었다. 그는 백화문으로 쓰인 소설책을 모조리 꿰뚫었다. 그렇지만 혼자 힘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지 못할 만큼 가난해서 재상집에 출입했는데 소설책을 잘 읽는 솜씨를 인정받은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군문(軍門)으로부터 적은 봉급을 받았고, 친지들의 집에 자주 기식했다.

<이향견문록>에 실렸으므로 당시에는 꽤 명성을 획득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장기는 바로 소설이란 소설을 모두 꿰뚫고 있는 전문성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가지 못했고, 대신에 소설을 잘 구연해 그 재능으로 재상가를 돌아다니며 먹고살았다. 그는 앞서 나온 전기수나 독사인처럼 시장으로 나가 청중을 모아놓고 소설책을 읽을 만큼 상업적인 수완이 없었다. 본격적으로 전기수로 나서지도 못하고 다른 생계도 없었다.

 

여성에게 접근하는 ‘작업’ 수단?

이런 부류의 이야기책 읽어주는 직업인이 한양과 시골에서 활동한 증거가 제법 나온다. 예컨대, 구수훈(具樹勳)의 <이순록>(二旬錄)에는 여장한 남자가 사대부집을 출입하며 성적 추문을 일으킨 사건이 실려 있다. 그런데 여장 남자가 여성들에게 접근한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소설책을 잘 읽어주는 기술이었다. 이렇게 재상가의 사랑방이나 사대부가의 안채에 사람들이 모여 소설책을 잘 읽는 전문가를 초빙해 감상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앉아 가락을 넣어 소설책을 흥미진진하게 구연하는 것을 듣는 장면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 독자 한 사람이 책과 대면하는 고독한 독서 행위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 시절 여러 목소리로 낭송하는 한 사람과 그 주변에 모인 많은 청중이 책을 매개로 이야기의 세계로 몰입하는 방식은 고풍스러우면서도 낭만적이다. 하나의 문화로, 하나의 유흥거리로 퍽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렇다면 소설책을 구연하는 것을 들은 청중의 느낌은 어떠했을까? 홍봉한(洪鳳漢)의 아들인 홍낙인(洪樂仁)이 역관 김홍철(金弘喆)이 구수하게 구연한 <수호전>을 듣고서 이런 시를 남겼다.

청탁(淸濁)과 높낮이를 입놀림에 내맡기고

깊은 밤 등불 앞에서 안석에 기대 누웠네.

정강(靖康) 시대 호걸들이 산채로 들어갔다니

김성탄(金聖嘆) 문장은 소설가 중에 으뜸이지.

변화가 무궁하여 귀신들도 놀라게 하고

결말을 예측 못해 용도 내쫓네.

궁조(宮調)와 우조(羽調)가 서로 어울려

변방에서 저녁 뿔피리 듣는 것보다 훨씬 낫구나.

혼자서 <수호전>을 읽는 것을 들었으므로 전기수가 구연한 것과는 꽤 다르다.

그런데 소설책을 구연하는 독특한 방식이 조선의 한양에만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중국에서도 일찍부터 발전해 인기가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박지원도 중국에서 <서상기>를 암송해 들려주는 장면을 목도했다. 이렇게 소설을 구연한 대표적인 명인이 명나라 말엽의 설서가(說書家) 유경정(柳敬亭)이다. 장대(張岱)가 지은 <유경정설서>(柳敬亭說書)에 그의 사연이 흥미롭게 묘사됐다. 중국이나 다른 나라의 비슷한 문화는 더 이상 말하지 말자.

조선으로 돌아오면, 한양만이 아니라 향촌에서도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직업인들이 찾아들었다. 경기 안산에 살았던 문사 유경종(柳慶種)의 <해암고>(海巖稿)에는 <서유기>를 암송하는 떠돌이 구연자를 만난 일이 기록돼 있다. 그는 “엊그제 남의 집에서 <서유기>를 암송하는 자를 보았다. 한문과 언문을 섞어 외웠는데 소리가 유장하고 곡절이 있어 정말 들을 만했다. 아깝다! 그 재능을 잘못 사용하여 남에게 부림이나 당하다니!” 그리고 이런 시를 지었다.

서유기 외우는 자 나타나

쉴 새 없이 말이 쏟아져나오네.

기이한 재능을 헛되이 쓰는 것은 아까우나

환상적 사연을 자세히도 말하네.

한 부(部)의 <수신기>(授神記) 책과도 같고

천 가지 연극 마당인 듯하네.

청아한 목소리에 곡절도 교묘하여

오래도록 귓전에 맴돌아 잊지를 못하겠네.

이 사람은 여기저기 초청을 받아 소설책을 들려주고 삯을 받는 사람으로 보인다. 아예 <서유기>를 통째로 외워서 흥미 있게 들려준 모양이다. 소리가 유장하고 곡절이 있어 지극히 들을 만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단순히 암송하지 않고 등장인물의 성격을 목소리로 잘 묘사한 듯하다. ‘천 가지 연극 마당’이라고 했으므로 등장인물의 개성을 여러 가지 목소리와 태도로 잘 살려서 구연한 듯하다. 이렇게 안산 등지까지 소설책을 외워서 멋들어지게 구연해주는 직업인이 활동했다. 그만큼 수요가 있고, 그에 따라 그런 직업인이 공급됐다.

 

향촌에서도 활약한 낭독자들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전기수 문화는 언제까지 인기를 얻고 사라졌을까? 19세기에도 18세기를 이어 성행한 것으로 보이고, 이들의 후예는 20세기 초까지도 꽤 활동해왔다. 그러나 근대적인 고독한 소설 읽기가 성행하고, 대중의 기호를 자극하는 현대적 대중문화가 도시로 몰려오면서 이야기책 읽어주는 사람은 옛 문화가 잔존하는 향촌에서만 명맥을 유지했다.

지금도 전기수의 후예라고 부를 만한 분이 남아 있다. 정규헌씨는 1936년생으로 충남 청양 출생이다. 부친인 정백섭씨를 따라 어릴 적부터 소설을 가락을 얹어 읽어주는 활동을 했으나 생활이 안 돼서 1968년을 끝으로 다른 직업을 가졌다. 충청도에서도 오지라고 할 만큼 교통이 불편한 청양에 현대 문물의 세례가 가장 늦게 들어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춘향전> <심청전> <신유복전> <조웅전> <장끼전> 등을 외워서 그를 초청한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가락을 얹어서 구수하게 소설을 구연하는 그는 기능을 인정받아 충남도지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받았다.

 

조선시대에도 명품·신상이 있었으니

자기·벼루·서화 등 명품 골동품 수집에 재산을 탕진한 사람들…
중인·서민에까지 유행 번지며 ‘짝퉁’도 판쳐

중국 송나라에 팽연재(彭淵材)란 명사가 있었다. 서울로 올라가 10여 년이나 머물며 유학하는 동안 고향에 있는 식구들은 죽도 배불리 먹지 못했다. 견디다 못한 식구들이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팽연재는 나귀를 타고 일꾼에게 보따리를 단단하게 묶어서 지고 가게 했다. 고향에 도착했을 때 친지들은 보따리를 보고서 “이제야 춥고 배고픈 고생을 벗어나게 됐다”며 모두들 좋아했다. 팽연재도 만면에 희색을 머금고서 “나는 나라와도 견줄 만큼 부자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보따리를 풀자 이정규(李廷珪)가 만든 먹과 문여가(文與可)가 그린 묵죽(墨竹) 한 가지, 그리고 구양수(歐陽脩)가 쓴 <오대사>(五代史) 초고 한 질이 들어 있을 뿐,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조선시대에도 명품·신상이 있었으니 /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끼니 걱정하면서 골동품만 애지중지

명나라 문인 풍몽룡(馮夢龍)이 편찬한 <고금담개>(古今譚槪)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른바 서화골동(書畵骨董)에 빠져 먹고사는 것을 나 몰라라 팽개쳐두는 외곬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는 오래된 사연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을 포함해서 가족들이 끼니도 잇지 못할 형편임에도 고급 예술품과 희귀한 서적, 오래된 골동품을 소장하고 감상하는 유별난 호사 취미를 즐긴다. 범인들은 납득하기 어렵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비난만 할 수도 없다. 위에 나온 팽연재의 경우처럼 극단적인 사례가 조선에도 적지 않다. 극도로 소비적이고 호사스러운 서화골동 애호가가 조선시대 후기에 등장했는데, <추재기이>에 보이는 손(孫) 노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서울에 손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집안이 본래 부자였다. 유달리 골동품을 좋아하기는 했으나 골동품을 감정할 안목은 없었다. 당연히 그에게 가짜 물건을 가져다주고 비싼 값을 받아 챙기는 거간꾼이 많았다. 그렇게 골동품을 사다 보니 결국 노인은 그 많던 재산을 몽땅 거덜 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노인은 그때까지도 자신이 속임을 당했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노인은 혼자서 쓸쓸히 방 안에 앉아 단계연(端溪硯)에 오래된 먹을 갈아 묵향을 맡았다. 또 한나라 시대의 자기에 품질이 좋기로 이름난 차를 다려 마시면서 “이것만으로도 굶주림과 추위를 몰아낼 수 있어”라고 말했다. 그런 그를 불쌍히 여겨 아침밥을 가져다주는 이웃 사람이 있었는데, 노인은 그때마다 손사래를 치면서 “나는 중생들이 주는 것은 받지 않아”라고 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손 노인은 결코 양반 사대부가 아니다. 그렇다고 중인 계층으로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평민인 것 같다. 그렇지만 부자였던 손 노인은 귀족이나 지식인 계층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서화골동 취미에 맛을 들였다. 재물이 많다고 해서 지식이나 안목까지 자동적으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서화골동을 보는 안목이 뒷받침되지 않았으므로, 돈이 많은 수집가 손 노인은 서화골동품을 중개하는 장사치들의 좋은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진품이 아닌 위조품은 끊임없이 손 노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안타깝게도 손 노인은 그 사실을 끝까지 몰랐다.

재산을 탕진하여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저 유명한 명품 벼루 단계연에 낡은 먹을 갈아 향을 맡고, 한나라 때 자기에 이름난 차를 다려 마시는 손 노인의 모습은 바보 아니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다. 밥을 굶는 주제에 자신을 불쌍히 여겨 밥을 가져다주는 사람에게 “나는 중생들이 주는 것은 받지 않는다”고 오만하게 말하기까지 한다. 손 노인의 사연은 서화골동에 맹목적으로 빠진 괴짜 마니아의 희화화된 모습이다. 그렇지만 이런 부류 사람의 의식구조가 또렷하게 보인다. 평범한 사람과 선을 긋는 극단적 우월감을 바로 값비싼 서화골동품의 소유와 감상이라는 행위를 통해 발산하고 있다.

손 노인의 우스꽝스러운 사연은 여러 가지 현상을 말해준다. 당시 서화골동품 수집 열기와 모조품의 횡행, 그리고 양반 사대부를 벗어나 중인과 서민들에게까지 퍼진 애호 현상이다. 그 현상을 차례로 살펴본다.

서화골동 수집과 감상의 열기는 17세기 이후 18세기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부유층에 널리 퍼졌다. 당연히 여유가 있는 계층이 이런 열기를 선도했으나 신분이 아니라 경제적 부가 관건이었다. 18세기 전반기에 수집과 감상을 선도한 인물은 바로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1699∼1770)였다. 이조판서를 지낸 김동필(金東弼)의 아들로 태어나 벼슬길을 포기하고 오로지 희귀한 서화골동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고대의 비석이나 종정(鍾鼎)을 소장했고, 천하의 희귀한 서적을 수집했으며, 서재에서 유명한 향을 피우고, 중국에서 수입해온 고저(顧渚)의 우전차(雨前茶)를 다려 마시며, 단계(端溪)와 흡계(歙溪)의 벼루에 휘주산(徽州産) 먹을 갈아 호주산(湖州産) 붓으로 글씨를 썼다. 온갖 천하 명품으로 사치를 하면서 서화골동의 멋을 누렸다. 하지만 스스로는 “가난으로 끼니가 끊기고 방 안에 아무것이 없어도 금석문과 서책으로 아침저녁을 대신했고, 기이한 물건이 손에 이르면 가진 돈을 당장 주어버리므로 벗들은 등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식구들은 화를 냈다”고 변명했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서화골동을 즐겼다고 했으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수집에 열을 올렸던 것은 사실이다.

이렇듯이 그의 서화골동 취미는 최고급품 소비 지향과 맞닿아 있다. 그가 집을 살 때 뜰에 서 있는 소나무가 아름답다고 하여 소나무값으로 집값보다 더 많은 돈을 치렀다는 일화도 전한다. 괴벽해 보이는 이러한 행위는 고상한 귀족적 취미와 상관이 있다. 이 시기에는 옛 서화를 많이 소장한 것을 고상한 취미로 여기는 풍토가 형성됐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나타나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고 곳간의 재물을 다 주고 사는 것을 멋으로 알았다.

극단적 우월감이 호사스러운 취미로 이어져

김광수는 단순한 수집가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수집품을 예술가들에게 제공해 화가 이인상(李麟祥)과 심사정(沈師正), 문인 신유한(申維翰), 서예가 이광사(李匡師)에게 열람을 허락했다. 그의 수집품은 저명한 예술가의 창작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의 서화골동 수집도 만년까지 지속되지는 못했다. 노경에 이르러 “눈이 어두워졌으니 이제는 평생 눈에 갖다 바쳤던 것을 입에 갖다 바쳐야겠다”며 수집한 물건을 내놓았다. 그러나 팔리는 값은 산 값의 10분의 2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까지 몽땅 빠져서 입으로는 국물과 가루음식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사치스러운 수집가의 말로가 <추재기이>의 손 노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박지원의 ‘관재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에 나오는 그의 사연을 보면, 자존심이 강한 성격도 손 노인과 비슷하다.

김광수는 임종할 때 명의 유명한 화가인 구영(仇英)이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를 묘지에 부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림은 묘에 순장되지 않고 역시 유명한 소장가인 서상수(徐常修)의 소장품이 되었다. 이처럼 김광수는 서화골동 수집의 대명사로 불렸다.

서화골동의 수집과 감상이 유행하자 위조품도 많이 돌아다녔다. 저 손 노인처럼 안목이 없는 사람이 속기 쉬운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감식안이 높다고 하는 사람들도 속는 일이 많았다. 감상안이 높기로 유명한 김광수조차도 가짜 물건에 많이 속았다고 한다. 그의 제자로서 저명한 중인 계층 수집가인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1727~97)이 있는데, 그는 감식안이 높음에도 가짜 물건에 속았다. 그가 소장했던 김부귀(金富貴)의 <낙타도>(駱駝圖)는 중국에서 들어온 가짜 그림이었다. 김광국이 쓴 그림의 발문에 따르면, 김부귀는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지닌 조선 출신 화원으로 내각화사(內閣畵士)라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 쪽 자료에는 그런 인물이 없으므로 <낙타도>는 위작인 셈이다. 중국 상인이 비싼 값을 받고 조선의 수집가를 속여 가짜 작품을 판 것이다. 김광국조차도 이렇게 위작에 속았으니 손 노인 같은 부류가 가짜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미술사가인 장진성 서울대 교수가 분석한 결과이다. 현재도 간혹 위조한 고서화를 비싼 값에 사서 애지중지하며 보관하는 사람을 간혹 보게 된다.

 

위조품에 속아 큰 돈 들이는 경우도

한편, 상류층 사회에 불어닥친 서화골동 수집과 감상 열기는 부유한 중인과 평민들 사회에까지 퍼졌다. 이들 신분까지 열기에 가세한 이유는 사대부 사회의 눈에 뜨이는 호사 취미가 일부 아랫계층 사람들의 모방심리를 자극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 이후 부유한 중인이나 평민들이 서화골동 취미에 젖어 들어간 정황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박지원이 쓴 ‘발승암기’(髮僧菴記)란 글에 등장하는 김홍연(金弘淵)이란 왈자(曰者)가 있다. 그의 신분은 양반이 아니다. 큰 부자인 그가 가산을 탕진해가며 무분별하게 소비하는 물품에는 골동서화가 빠지지 않았다. 그는 집이 본래 부유해서 돈을 물 쓰듯 했고, 고금의 법서와 명화, 칼과 거문고, 골동과 기이한 화초를 널리 수집했으며, 마음에 드는 것을 한 번 보면 천금을 아끼지 않았고,

좋은 말과 이름난 매를 늘 좌우에 두었다.

김홍연처럼 중인과 평민 부유층의 소비생활에는 서화골동을 수집해 집안을 꾸미는 것이 빠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서화골동 수집은 상류문화의 표지가 되어 상류층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하 계층이 모방하는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그 때문에 서화를 구입하는 층이 늘어나 유명한 화가들의 경우에는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서화골동의 수집과 감상이 전 계층에 퍼져간 현상은 김홍도가 그린 그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홍도 자신이 김홍연처럼 고급 명품과 서화골동의 향유층에 속했다. 누군가 기이한 매화를 팔자 그는 그림값 30냥을 받아 20냥으로 매화 값을 치르고 8냥으로 술을 사서 동인(同人)들을 불러모아 매화 감상 술자리를 열었다. 생활비는 바로 바닥이 났다. 생활감각은 무디고 예술적 취향은 민감하게 발달한 사람의 광적인 행태이다. 서화골동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김홍도의 취향은 그림에 자연스럽게 반영됐다. <사인초상도>를 비롯한 몇몇 그림에는 서재 안의 풍경에 값비싼 외국 기호품과 서화골동과 명품 문방구가 자리를 잡고 있다.

19세기 들어 서화골동 취향은 더 확산됐다. 대표적인 사례로 자하(紫霞) 신위(申緯)를 들 수 있다. 신위는 자신의 서재에 놓인 물건 30종을 시로 읊은 적이 있는데, 그가 읊은 물건은 흔한 문방도구에 그치지 않고 대체로 골동품이었다. 조선을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에서 전해진, 오래되고 희귀한 물건이 많이 포함됐다. 중국 고대의 솥과 자기, 옥기를 비롯한 각종 골동품과 문방구가 들어 있고, 조선 골동품으로는 백제 때의 와연(瓦硯)과 고려 때의 비색(秘色) 청자 술잔, 고려 때의 검은 흙으로 만든 들병, 작천석연(鵲川石硯)이 있고, 일본 것으로는 왜척홍창금산수배(倭剔紅創金山水杯), 적간관연(赤間關硯)이 있었다. 그가 소장한 백제 와연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쓴 “기와는 천년 묵었건마는 벼루는 천연 그대로다”(瓦千年, 硯天然)라는 멋진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특히 비색 고려청자 술잔은 개성에 있었던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고택에서 출토된 물건이라며 다음 시를 지었다.

 

중인·평민에까지 확산된 ‘명품’ 열기

“고려의 비색 자기는/ 서긍(徐兢)부터 기록에 올랐네./ 분청에 흰 꽃을 품었으니/ 격이 높다고 평한 문헌이 있네.”

고려의 비색 자기를 골동품이나 예술품으로 감상한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그런데 신위는 분명하게 고려청자를 예술품으로 보고 이렇게 감상하는 시를 남겼다. 신위는 조선과 일본의 골동품과 문방구까지 차별 없이 사랑한 애호가였다. 신위는 경기도 장단의 옛 무덤에서 출토된 자기에 장편의 시를 남기고, 고려 비색 청자를 예찬한 시를 여러 편 남겼다.

신위는 고려청자 술잔을 얻고서 친구인 성해응에게 아예 사연과 미학을 논한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 글이 바로 ‘안문성자준기’(安文成瓷尊記)다. 이런 사실을 보면, 당시 지식인들의 골동서화 애호 분위기를 얼추 짐작할 만하다. 김정희와 성해응, 유본학 등을 비롯하여 이 시기 문사들의 서화골동 애호는 전 시대 사람들에 비해 더 한층 높아진 안목을 드러낸다. 손 노인의 경우도 그렇지만 위에서 살펴본 사례를 보면, 규모는 작지만 서화골동을 향유하고 매매하는 예술품 시장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돈 없는데 양반이라고 별수 있나

노동과 장사를 천시했지만 생존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장으로 흘러 들어온 몰락한 양반의 다양한 군상들

시장은 물건과 화폐가 유통되는 곳으로서 신분과 계층 같은 권위나 인격과 도덕 같은 인간의 내재적 가치가 대우받는 곳이 아니다. 화폐와 물건이 그런 가치에 앞서 대우받는 곳이다. 조선 후기의 시장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조수삼은 이러한 시장의 생리를 너무도 잘 알았고, 그 실상을 드러내는 한편 시장의 논리와는 달리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물질과 금전의 추구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개성 있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도 찾아내고자 했다. 그런 그의 시선에 포착된 한 부류의 독특한 인간군이 바로 비참하게 몰락한 양반이었다. 그들도 시장의 한 귀퉁이를 빌려쓴 셈이다.

» 돈 없는데 양반이라고 별수 있나.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조선 후기 들어 구걸하는 양반까지 나와

본래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은 시장을 멀리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말에서 선비와 상인의 거리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듯이, 사대부는 장사하는 사람과 시장을 멀리했다. 예의염치를 중시하는 양반 사대부가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일정한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스스로 양반임을 포기하는 짓이었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 들어 더 이상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운 극한에 도달한 양반들이 적지 않게 등장했다. 그러한 상황에 처한 양반들이 현실을 타개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시장에 나타나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극단에 몰린 사람은 아예 구걸하는 거지로 떠돌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런 부류는 자기 인생을 책임지는 편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보다 더 무기력한 존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에 편집된 야담 <어수록>(禦睡錄)에는 몰락한 양반 일가족의 죽음을 묘사한 짧은 일화가 실려 있는데 그런 무기력한 존재를 잘 보여준다.

한양의 소의문(昭義門) 밖에 홍(洪) 생원이 사는데 홀아비에 딸 둘을 두었다. 너무나 가난해 생계를 꾸려갈 방법이 없자 훈조막(熏造幕) 일꾼들에게 구걸하자 일꾼들이 십시일반으로 밥을 모아 주었다. 그는 그 음식을 잎사귀에 싸서 집으로 가져가 딸들을 먹였다. 여러 날 그렇게 하자 어느 날 취한 일꾼 하나가 그에게 “생원이 훈조막 부군당(府君堂)이나 되고 우리 상전 자식이나 되냐?”며 욕설을 하자 홍 생원은 눈물을 떨구고 집안으로 돌아갔다. 대엿새가 지났는데도 인기척이 없자 일꾼 하나가 집안을 들어가보았더니 부녀가 누워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일꾼이 불쌍히 여겨 급히 나와 죽을 끓여 가져다주었다. 홍 생원이 13살 난 큰딸에게 “너희는 이 죽을 먹고 싶지? 우리 셋이 간신히 굶주림을 참은 지 이제 엿새째라, 곧 죽게 되었으니 그동안 애쓴 것이 아깝다. 이제 이 죽 한 그릇이라도 저 사람이 계속 주면 좋겠지만 이 뒤로부터 당할 욕됨을 어찌 견디겠느냐?” 그럴 때 5살 난 딸이 죽 냄새를 맡고 힘겹게 머리를 치켜들자 큰딸이 손으로 머리를 눌러 “자자! 자자!” 달래서 다시 재웠다. 다음날 일꾼들이 가보았더니 모두 죽어 있었다.


‘홍 생원이 굶어 죽었다’는 이 비참한 사연은 조선 후기 기아 선상에 헤매는 사람들의 처지, 특히 생계를 꾸려나가는 데 극도로 무기력했던 몰락한 양반의 처지를 인상 깊게 보여준다. 그 부인이라도 있었다면 홍 생원 가족이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홍 생원은 구걸하다 차라리 죽어 욕을 당하지 않는 가장 무기력한 길을 택했다. 그만큼 양반 남성 신분은 노동과 장사를 천시했다.

 

“나무 사려” 대신 “내 나무”라고 외친 양반

홍 생원 같은 위기에 봉착한 양반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추재기이>에는 이렇게 생계의 위기에 봉착해 할 수 없이 시장으로 내몰린 양반들이 여러 명 등장한다. 그 가운데 장사에 나선 양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내 나무’이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내 나무는 땔나무를 파는 사람이다. ‘나무 사려!’라고 외치지 않고 ‘내 나무!’라고만 외친다. 심하게 눈보라가 치는 추운 날에는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외치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거리에 앉아 있다.

나무를 사러 오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품 안에 든 책을 꺼내 읽는데 고본(古本) 경서(經書)였다.”

어떤 특이한 땔감 장수의 사연인데 그 장사꾼의 이름은 없이 ‘내 나무’(吾柴)라는 별명만 있다. 그의 이름이 밝혀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실 그 당시에는 장사 밑천이 없는 서민이 입에 풀칠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일거리가 나무 장사였다. 그들은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다가 한양 사람에게 팔아 근근이 먹고살았다. 그 시절에는 동대문 안팎에 큰 땔감 시장이 섰다.

그런데 이 ‘내 나무’는 일반 땔감 장수와는 여러 가지가 달랐다. 그중 하나가 “나무 판다!”거나 “나무 사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매매하고 흥정을 붙이는 행위는 상인의 행위로서 양반 사대부가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였다. 이 나무 장수는 신분이 양반이라 팔기는 하되 판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 이유가 그가 양반임을 드러내려 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신분을 숨기고 싶었으나 부지불식간에 드러났다.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내 나무”였다. 내게 나무가 있으니 사가라는 말이다. 양반으로서 자의식과 자존심이 묻어나는 호객 행위이다. 그러니 그 많은 나무 장수들 틈에서 얼마나 도드라져 보였을까? 그 우스꽝스러움을 보지 않아도 알 만하다. 그 때문에 그는 시장에서 유명해졌다.

그의 유별난 행동은 여러 가지지만 그중 하나가 손님이 아무도 없을 때 품 안에서 책을 꺼내 읽는 것이다. 그는 품 안에 경서, 그것도 구하기 힘든, 아주 오래전에 간행된 고본을 지니고 다녔다. 현재는 나무꾼 신세지만 그의 집안이 과거에는 명문가였음을 암시한다. 조수삼은 이 인물을 놓고 이런 시를 지었다.

 

몰락했지만 책만은 팔지 않는 명문가 후손

“눈보라 거세게 치는 큰 거리에서

이쪽저쪽을 다니며 ‘내 나무’라고 외친다.

바보 같은 회계(會稽) 마누라라면 틀림없이 비웃겠지만

송나라 판본 경서는 품 안에 가득하다.”

여기서 바보 같은 회계 마누라는 곧 한(漢)나라 때의 명사 주매신(朱買臣)의 본처를 가리킨다. 이 여자는 집안이 가난해 땔나무를 하며 공부에만 열중하는 남편을 부끄럽게 여겨 이혼했다. 그런데 뒷날 주매신이 회계군 태수가 되어 부임하자 전처는 부끄럽게 여겨 자살했다. 이 시를 보면, 이 나무꾼이 언젠가는 성공할지도 모른다고 암시를 언뜻 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가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았다.

시에서 말한 송나라 판본 경서는 일반 사람은 소장하기 어려운 비싼 책이었다. 그런 귀한 재산을 팔지 않고 품 안에 끼고 읽는 것은 양반 후예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다. 그는 우스꽝스러울지 모르지만 나무라도 해서 생계를 유지하며 뒷날을 기약한 양반이었다. 그런 점에서 조수삼은 그런 기대라도 걸었던 것이다.

<추재기이>에는 이렇게 몰락한 양반임에도 책만은 팔지 않는 명문가 후손의 이야기가 또 나온다. 경호(磬湖)에 사는 박(朴) 생원은 책 수천 권을 소장했는데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책을 내다팔지 않았다. 낮이면 집을 나서 한강 일대를 비롯해 경성(京城) 안의 친지와 친구들을 찾아보고 밤이면 집에 돌아와 정성껏 두 아들에게 책을 가르쳤다. 두 아들은 뒷날 약간의 성취를 거두었다고 했다. 아마도 초시에는 합격해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는 했다는 말일 것이다. 이렇게 조상 전래의 귀중한 장서라도 지킨 부류는 그래도 형편이 나은 축이다. <추재기이>에는 아예 그런 기반조차 사라진 불쌍한 양반 여럿이 시장에 모습을 나타낸 사실을 기록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복홍(福洪)이란 거지다.

“복홍은 그 내력을 알 수 없다. 그에게 성이 무어냐고 물으면 “몰라!”라고 대꾸하고, 이름이 무어냐고 물으면 “복홍이야!”라고 대꾸하였다. 나이는 쉰여남은 살쯤 되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 나이에도 총각이었다. 날마다 성 안을 다니며 밥을 구걸하는데, 날을 가려서 문을 선택하는데 그 순서를 어기는 법이 없었다. 밤이 되면 사용하지 않는 관아에 들어가 잠을 자는데 볏짚으로 만든 멍석을 깔고 덮은 채 밤새도록 <맹자>를 암송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복홍은 한양의 유난스런 거지다. 아무 집이나 찾아가지 않고 꼭 일정한 룰에 따라 구걸할 집을 찾아갔다. 그는 이름만 있고 성이 없으며 식구도 없다. 자신의 내력을 철저하게 숨겼다. 그런 거지에게 사람들은 왜 호기심을 가졌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아무도 없는 괴기한 빈 관아 건물에 멍석을 깔고 덮은 채 밤새도록 <맹자>를 암송하는 것 때문이다. <맹자>를 암송한다는 것이 숨겨진 그의 이력을 표현한다. 비록 시장과 골목을 돌아다니며 구걸하고 노숙하는 부랑자일망정 그의 품성에는 양반 사대부의 피가 흐르고 공부하던 사람의 지성이 보존되고 있음을 말한다. 그가 꼭 양반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맹자>를 암송할 정도인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그에게 일종의 연민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복홍처럼 드러내놓고 구걸하는 거지는 아니라 해도 생계를 해결하지 못하고 남에게 빌붙어 살거나 간헐적으로 구걸하는 부랑자가 제법 있었다. 송(宋) 생원이 그런 인물이다. 송 생원이 한양의 저잣거리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생원이라고 불린 것을 보면 양반으로 보이지만 가난할 뿐만 아니라 돌아갈 가정도 없었다.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장난도 치는 떠돌이 부랑자인 그의 뒤를 철부지 동네 아이들이 졸졸 쫓아다녔다. 아마도 “송 생원, 송 생원!” 놀리면서 따라다녔을 것이다.

거지인 주제에 특이하게도 시를 잘 지은 것이 아이들을 몰고 다니는 이유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시를 지어보라고 운자(韻字)를 불러주면 그는 즉시 시를 지어냈다. 그리고 시 한 구절에 대가로 돈 한 푼을 달라고 했다. 동전 한 푼을 손바닥에 얹어 놓아주면 받았으나 땅에 던져서 주면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것을 보면 그는 시시한 거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절대로 구절만을 지을 뿐 시 전체를 말해주는 법은 없었다. 그가 지은 시에는 아름다운 구절도 제법 있었다.

 

시 지어주고 돈 한 푼 받는‘ 낭만 거지’도

“천리 타향에서 만난 벗을 만 리 멀리 보낼 때에

강으로 이어진 성곽에 꽃은 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린다.”

떠돌이 부랑인이 지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고운 시다. 고향의 역말 사람을 배웅하는 시인데 꽤 운치가 있다. 이런 멋진 시 한 구절 지어주고 돈 한 푼 받는 부랑인, 너무도 낭만적인 거지다. 그러나 그는 양반 신분을 지탱하지 못하고 시장 바닥을 떠도는 몰락한 신세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명문가인 은진 송씨라고 수군거렸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시장에서 사라졌는데 그 집안에서 부끄럽게 여겨 그에게 가정을 꾸려주고 출입을 막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내 나무’나 복홍, 송 생원은 모두 당시 시장에서 꽤나 이름이 알려진 존재들로 보인다. 시장 사람들에게 그들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한편으로는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조선왕조를 지탱하던 양반들이 더 이상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모습들이 하나둘씩 도시의 시장과 골목에서 발견되었다.

 

세상 남자가 다 배필이라던 당찬 노처녀

규방에서 한숨만 짓던 이들과 달리 당당하게 독신 삶 개척한 떡장수 삼월이

인간의 생활에서 노처녀·노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특별한 시선으로 볼 일은 전혀 아니다. 적당한 배우자를 찾지 못해 홀로 사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갈수록 자발적 선택에 따라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추세이다. 한국만이 아니라 경제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그런 추세이다. 그렇기에 독신 문제는 점차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할 가능성이 높다.

» 세상 남자가 다 배필이라던 당찬 노처녀.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15살 전후에 결혼, 20살 넘으면 노처녀 간주

그렇다면 100년 이전 사회에서는 어떠했을까? 독신으로 살아가는 노처녀·노총각 문제는 독특한 차원에서 사회문제의 하나였고, 그런 증거가 <추재기이>를 비롯한 여러 사료와 문학작품에 투영되었다. 그 시대에는 그들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이 존재했다.

당시에 노처녀·노총각으로 산다는 것은 꽤나 특별한 일이었다. 보통 15살을 전후해 결혼하는 조혼 풍습이 일반화해 20살을 넘기면 노처녀로 간주했다. 당시는 혼사를 부모가 좌우했고, 또 누구나 시집·장가를 가서 노처녀·노총각의 존재가 별로 없을 것만 같은 인상에 우리는 쉽게 사로잡힌다. 공교롭게 옛날 문헌에도 노처녀·노총각이 눈에 잘 뜨이지 않는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지 않기도 했고, 가정에서 쉬쉬하는 문제였기에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는 적지 않은 남녀가 가정을 꾸리지 못한 채 늙어갔다. 또 문학에서 다룰 만한 보기 좋은 주제도 아니었기에 이슈로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는 자발적 독신주의자의 존재를 비롯해 독신자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제법 많아진다. 그 가운데 남녀의 상이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연이 야담에 등장한다. 먼저 노총각의 경우로 두 가지 사연이 있다. 충청도 홍성에 사는 30살이 넘은 박 도령이라는 평민은 일찍 부모를 잃고 너무 가난해 머슴살이를 하느라 혼인할 수 없었다. 마침 혼처가 나타났으나 빈털터리인 그는 사또에게 혼수를 애걸하는 호소문을 냈다. 그 혼수를 구걸하는 글이 아주 재미있어 <청구야담>에 전문이 실려 있다. 또 떳떳한 양반 총각으로 동네 부잣집 좌수에게 청혼했다가 가난뱅이가 청혼했다 하여 갖은 욕을 당하는 박 도령이 등장한다. 이 박 도령을 도와 혼사를 맺게 한 사람이 바로 어사 박문수다. 가난하면 혼인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냉혹한 현실을 이 이야기는 과장되게 반영했다.


다음으로 <청구야담>에 노처녀 다섯을 단번에 혼인시키는 암행어사 설화가 실려 있다. 암행어사가 우연히 산골을 암행하다가 어떤 집에서 장성한 처자 다섯 명이 원님 놀이를 하는 장면을 목도했다. 처녀들은 원님, 형방, 급창, 사령, 박 좌수 이렇게 다섯 인물의 역할을 제각기 맡아 박 좌수란 죄인을 문초하는 연극을 했다. 원님이 동헌에 박 좌수를 불러놓고 “당신은 과년한 딸이 다섯이나 되는데 시집보낼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 문초에 박 좌수의 답은 이랬다. “저도 가장인데 왜 시집보내고 싶은 생각이 없겠습니까? 가세가 빈한하니 누가 가난한 집 딸을 데려가겠습니까? 게다가 적합한 혼처도 없습니다.” 그러자 원님은 이 마을 이 좌수 집에 스무 살 난 수재가 있고, 저 마을 김 좌수 집에 열아홉 살 난 수재가 있으니 그리로 시집보내라고 일일이 분부했다. 그러자 박 좌수는 잘 알겠다고 하며 문초를 모면했다. 처녀들은 이 역할극을 하며 박장대소하고 웃었다.

그 내용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암행어사가 동네 사람에게 탐문해본 결과 그 처녀들은 박 좌수댁 딸들로 나이가 23살부터 17살인데 하나같이 시집을 못 갔다는 것이었다.

어사는 관아에 출두해 처녀들이 역할극에서 말한 이웃 동네의 다섯 수재들에게 한꺼번에 혼사를 치르도록 주선했다.

 

영·정조가 직접 나설 만큼 사회문제화

이들 사연은 야담집에 실린 허구임에는 분명하다. 그나 허구로만 치부할 수 없을 만큼 사회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했다. 당시에 이런저런 사유로 결혼하지 못하거나 안 하는 남녀가 제법 존재했다는 사실은 많은 자료와 정황으로 밝혀진다.

결혼할 의사를 강하게 가지고 있음에도 나이만 먹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혼수였다. 혼사를 논하면서 재물의 유무를 말하는 것은 오랑캐 짓이라고 입버릇처럼 양반들은 말했으나 현실은 달랐다. 혼수가 마련되지 못하면 남자도 여자도 결혼하기에 쉽지 않은 것은 조선시대 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극심한 가난은 본인들의 의사와는 반대로 이렇게 젊은 남녀의 혼사를 방해했다. 위에서 본 사연은 혼수를 마련하지 못해 결혼하지 못하는 청춘남녀의 현실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매우 사실적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가 과연 실상을 얼마나 제대로 반영한 것일까? 앞서 야담에 등장하는 인물인 암행어사 박문수도 영조에게 20~30살을 넘긴 노처녀를 시집보내야 한다고 진언했고, 1749년 우의정 조현명은 36~37살이 되도록 결혼하지 못하는 사대부 집안의 처녀와 남자가 있다고 보고했고, 1750년 이종성은 “처녀가 나이가 많아도 시집가지 못한 자는 대개 양반의 딸이라”고 말할 만큼 노처녀의 존재는 사회문제로 거듭 조정에서 제기되었다. 영조와 정조는 간헐적으로 서울과 지방의 노처녀·노총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였고, 지방관들 역시 자체적으로 결혼을 권장하고 가난한 자를 위해 혼사 비용을 마련해주는 시책을 펼쳤다. 결혼 적령기에 혼인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의 화기(和氣)를 해치고 사회의 안전망을 훼손시킨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대책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그것이 직접적으로 인구 감소로 이어질 수 있기에 조정에서도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단순히 한 집안, 한 개인의 사적 문제를 넘어선, 중대한 국가·사회의 문제로 파악했다. 그래서 지방관이 할 일을 규정한 법전에서 대책을 마련해놓았고, 다산 정약용도 <경세유표>에서 남자는 30살, 여자는 25살까지 결혼하지 못하면 관에서 주선해 결혼시켜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조정의 노처녀·노총각 결혼시키기 정책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작품이 바로 이덕무의 산문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이요, 이옥의 희곡 <동상기>(東床記)다. 두 작품은 1791년 결혼 적령기를 넘긴 한양의 가난한 남녀를 정조의 왕명에 따라 결혼시키는 과정을 묘사했다. 주로 노총각의 입장에서 장가를 가게 된 즐거움을 묘사했다.

이들 작품은 일종의 정부 주도형 혼사시키기를 다루었고, 노처녀·노총각 문제를 공개적이면서도 지나치게 외면적으로 다룬 당시 사대부 의식을 반영했다. 여기에는 노처녀·노총각은 비록 가난으로, 신체적 결함으로 결혼하지 못하지만 결혼하고 싶어한다는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 노처녀·노총각의 내밀하고도 인간적인 감정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50살 넘겨도 처녀 복장에 화장 잊지 않아

이와는 달리 조선 후기에서 일제 시기까지 이른바 노처녀 담론을 주도한 가사 작품 <노처녀가>는 노처녀의 처지와 심리를 묘사하고, 당시 대중의 노처녀를 바라보는 시선을 잘 드러냈다. 사실 노처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연민이 주를 이루었다. 다음 사설시조에 그런 대중의 시선이 잘 드러난다.

달바자는 쨍쨍 울고 잔디잔디 속잎 난다.

삼년 묵은 말가죽은 오용지용 우짖는데 노처녀의 거동 보소. 함박 쪽박 드던지며 역정내어 이른 말이 바다에도 섬이 있고 콩밭에도 눈이 있지 봄꿈자리 사오나와 동뢰연(同牢宴)을 보기를 밤마다 하여 뵈니,

두어라 월노승인연인지 일락배락하여라.

여기서 동뢰연은 혼례에서 신랑과 신부가 교배를 마치고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누는 잔치다. 결혼 장면을 꿈꾸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노처녀의 모습이다. 이러한 시선에 바탕을 둔 <노처녀가>는 2종이 있다. 하나는 양반집 딸로서 반편인 아버지와 처사가 불민해 숙맥불변인 어머니가 딸을 시집보내는 데 무관심해 40살이 넘도록 시집가지 못한 답답함을 노래했고, 또 하나는 평민 처녀로 갖가지 불구에 못생겼기 때문에 시집가지 못한 설움을 묘사했다.

두 노래는 아주 인기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노처녀의 형상을 과장되게 묘사한 데 있다. 과장되었다고 한 것은 두 편 모두 가난이라는 현실적 장애보다는 판서를 지낸 아버지의 지나친 무관심, 천하박색으로서 40살을 넘겼다는 설정 때문이다. 시집을 가고 싶은데 처녀 스스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소극적이고 히스테리컬한 노처녀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했다. 대중이 노처녀를 바라보는 비딱한 시선이다.

반면에 <추재기이>에는 히스테리컬하기는 하지만 당당한 노처녀 삼월이가 등장한다. 삼월이는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당시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실제 인물이다. 조수삼이 작품을 썼을 당시에 삼월이는 50살을 넘긴 노처녀였다. 언제나 처녀 복장을 하고서 떡과 엿을 팔러다녔다. 앞서 본 노처녀들은 하나같이 집에 들어앉아 부모 탓, 팔자 탓만 하고 있는데 삼월이는 본인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당찬 노처녀였다.

삼월이는 특이하게도 50살인데도 언제나 처녀 복장을 하고 골목과 시장을 돌아다니며 떡과 엿을 팔았다. 50살 할머니로서 그 차림새는 사람들 눈에 확 띄지 않을 수 없었다. 삼월이는 장사를 해서 번 돈으로 화장품을 사서 아침저녁으로 화장을 했다. 남편도 없는데 늘 화장을 하는 이유는 온 세상 남자들이 모두 그녀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모습과 행동은 사람들 눈에 특이하게 보였을 테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잘 아는 특이한 떡장수로 유명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수삼의 눈과 귀까지 사로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그 나이면 당시에는 벌써 할머니 소리를 듣고도 남았다. 그런 삼월이의 독특한 인간됨은 너무도 특이해 민요로까지 불렸다. “배필이 많다는 처녀는 동네 입구 사는 삼월이라네.” 당시 한양에서 불린 민요로서 바로 노처녀 삼월이를 노래했다. 대중은 그만큼 삼월이를 특별하게 보았던 것이다.

다른 노처녀들과 다르게 삼월이가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앞에서 본 대부분의 노처녀들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이 없어 오로지 모든 권한이 부모에게 있었다. 당연히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반면에 삼월이는 스스로 떡과 엿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온 세상 남자를 남편 삼아 할머니임에도 나름대로 멋을 내고 다녔다.

 

매 같은 성미 노처녀의 인간승리

그런 노처녀 삼월이의 당당한 행동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도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언젠가 삼월이가 술에 취해 거리를 가다가 죄수를 참수형에 처해 목을 매달아놓은 장소를 지나갔다. 술기운 때문인지 그 흉측한 모습을 피하기는커녕 다가가서 손바닥으로 목만 달린 자의 뺨을 올려치면서 말했다. “삼간초옥(三間草屋)일지라도 침탈을 금하는 법이 있거늘 구중궁궐이야 말해 무엇하겠느냐? 네놈은 도적이라기보다는 진짜 바보다.” 좀 희한한 장면 묘사이기는 하나 삼월이의 성격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이런 행동을 노처녀의 히스테리로 돌리기는 힘들다. 조수삼은 삼월이를 이렇게 시로 묘사했다.

매 같은 성미로 눈썹을 그리고

매달아놓은 목이 앞에 있자 그 뺨을 치네.

“부서진 삼간초옥도 침탈을 금하거늘

감히 구중궁궐을 엿보려 하다니!”

조수삼은 삼월이의 매서운 성격을 포착했다. 할머니가 돼서도, 노처녀로 살면서도 당당하고 다부지게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으로 파악했다. 단순히 특이한 인물이기에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규방에 앉아 구시렁대는 여성과는 달리, 시장과 골목의 거리를 목 뻣뻣하게 세우고 활보하며 “세상 남자가 다 내 배필이야!”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노처녀 삼월이의 인간 승리를 표현한 듯하다. 수많은 현대 노처녀들의 선구자로서 그녀 인생의 의의를 말하면 좀 지나친 것일까?

 

유랑 예인 ‘거지 깡깡이’

장터와 골목 떠돌며 해금 연주로 구걸…
생활의 다양한 장면 모사로 인기 끌어

조선 후기에는 전국 각지에 유랑민들이 많았다. 농토에서 쫓겨난 유랑민들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 떠돌며 구걸해 먹고살았다. 자연재해가 발생할 때에는 그 수가 급격하게 불어났다. 유민들의 종류와 성격은 복잡해 그들 간에도 차이가 적지 않았는데, 일반적인 걸인과는 꽤 다른 성격의 유민들이 끼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부류가 바로 약간의 재주와 기예를 보여주고 쌀과 돈을 대가로 받아챙기는 유랑 예인이다. 유사시에는 유민들 틈에 끼어 민란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당패나 솟대쟁이패, 그리고 초라니패와 풍각쟁이패 같은 부류는 상당히 전문적인 기예 집단이었고, 대를 이어 집단을 구성해 높은 수준의 공연을 했다. 이들은 전국을 떠돌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터와 마을에서 공연하고 사람들로부터 공연 사례금을 받아 생활했다.

» 유랑 예인 ‘거지 깡깡이’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호기심과 동정심 자극하는 내용

이러한 직업적이고 전문화된 예인 집단 말고도 두세 명이 한패를 이루거나 혹은 단독으로 재주를 보여서 먹고사는 유랑 예인이 전국적으로 많이 분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기예를 보여주어 그들로부터 박수를 받아야만 먹고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벌이는 재주는 철저하게 대중적 호기심을 유발하고 그들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내용으로 짤 수밖에 없었다. 차원 높고 예술적 향기를 풍기는 사대부의 예술적 취향과는 애초부터 길이 달랐다. 이들은 사람들이 꾀는 장터와 골목을 떠돌았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런 유랑 예인을 정식 예술가로 인정해 그들의 솜씨와 특징을 버젓이 기록해줄 식자는 없었다. 그들이 공연이라고 벌이는 기예를 예술의 차원에서 보기보다는 기이한 구경거리의 시각으로 보았다. 후에는 양반들의 다양한 잔치 자리에 그들이 불려가 공연을 할 만큼 대접을 받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예술성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장터와 거리에서 민중의 예술적 욕구를 달래주고 기예의 수준을 향상시킨 공연이 늘어나면서 일부 식자들이 그런 유랑 예인의 존재에 관심을 가졌다. 지식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18세기 말엽의 문인인 강이천(姜彛天)이다. 18세기 한양의 다양한 도시 경관을 묘사한 그의 연작시 ‘한경사’(漢京詞)에는 이런 시가 실려 있다.


어려서부터 고향 떠나

객지를 전전하는 부부는

노래와 연주를 배워 익혀

한스럽고 슬픈 사연 풀어놓네.

이리저리 달라고 해도

돈과 쌀은 주지 않고

거리나 가득 메우고

에워싼 사람들뿐.

당시의 대표적인 도시 풍경을 묘사한 ‘한경사’이므로 이 시에 나온 장면은 시장과 거리에서 흔하게 맞닥뜨릴 법한 구경거리였다. 본래 작자는 당시 서울의 대중예술에 깊은 관심을 지녔다. 탈춤놀이를 구경하고서 ‘서울 남쪽에서 탈춤을 구경하다’란 장편시를 짓기도 했다. 위 시에서는 거렁뱅이 부부 한 쌍이 장터에서 노래도 부르고 악기도 연주한다. 둘러싼 구경꾼들은 구경만 할 뿐 돈과 쌀을 던지는 데는 인색하다. 이들의 노래와 연주가 한이 서리고 구슬프다고 한 것으로 보아 악기는 해금이나 피리였을 것이다.

 

구경꾼들, 돈과 쌀 던지는 데 인색

떠돌이 부부 예인은 거지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이렇게 기예로 먹고사는 존재를 강이천은 <이화관총화>(梨花館叢話)란 기록에서 다시 언급했다.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면서 이런 사연을 기록했다. 즉, 전에 서울에 어떤 거지가 있었는데 그가 입으로 연주하는 기예를 잘했다. 입으로 크고 작은 피리와 해금, 젓대를 비롯한 온갖 소리를 함께 내서 <영산회상>(靈山會相) 한 곡을 장엄하고 기묘하게 연주했다. 악기도 없이 소리가 나와서 가만히 들어보면 그의 목구멍에서 온갖 소리가 나왔다. 노래를 부를 줄 아느냐고 물었더니 거지는 “못한다”고 대꾸했다. 피리를 불어보고 가야금을 타보라고 했으나 정작 그런 악기는 연주할 줄 몰랐다. 그저 사람들에게 돈만 구걸했다.

앞서 본 부부와 달리 이 사람은 입으로 악기를 흉내내는 재주를 이용해 구걸하는 거지였다. 그런 기이하고 특이한 재주를 보고 신기해하고 호기심을 보이며 사람들이 꾀는 당시의 정황을 이야기의 행간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행인이 모이는 장터에서 이렇게 재주를 파는 유랑 예인이 즐겨 연주한 악기가 다름 아닌 해금이었다. 조수삼의 <추재기이>에 등장하는 유랑 예인도 바로 해금을 연주했다. ‘해금 켜는 노인’이란 제목에 나오는 유랑 예인은 작자가 직접 구경한 인물이다. 작자가 대여섯 살 때 해금을 켜면서 쌀을 구걸하는 걸인 노인을 보았다. 얼굴과 머리칼로 볼 때 대략 60여 살쯤 돼 보이는 걸인이었다. 한 곡을 연주할 때마다 그는 “해금아, 네가 노래 좀 연주하거라!”라는 말을 빠트리지 않고 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해금은 마치 노인의 소리에 장단을 맞추듯이 연주를 시작했다.

이 걸인의 해금 연주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평범하게 음악을 연주하기보다는 해금과 노인이 짝이 되어 마치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연극을 하듯이 연주했다. 아니 음악의 연주가 아니라 이인극 재담 공연 같았다. 그 노인의 공연은 이런 것이었다. 하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콩죽을 배불리 먹은 뒤 갑자기 배탈이 크게 나서 소동이 난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했다. 또 하나는 쥐가 갑자기 나타나 장독대로 들어가자 다급한 목소리로 “저놈의 큰 쥐가 된장독 밑으로 들어간다!”고 냅다 소리를 지르는 장면을 묘사했다. 또 남한산성에 도적이 쳐들어와 사람들이 이리로 달아나고 저리로 숨는 소동 현장을 묘사했다. 조수삼이 가장 재미있게 본 장면은 이 세 가지였다. 여러 장면은 음향이 단조롭지 않고, 복잡하고 다채로우며, 등장인물이 여럿이기도 하다. 적어도 여럿이 있어야 할 장면을 걸인은 해금을 가지고 곡진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듣는 사람은 마치 자신이 그 현장에 있는 듯 착각할 정도였다.

악기로는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장면 묘사를 노인은 해금으로 공연해 그 대가로 한푼 두푼 얻어냈다. 노인의 장면 묘사는 묘사 이상의 또 다른 의도가 있다고 작자는 해석해냈다. 이 사연을 두고 조수삼은 이런 시를 지었다.

“늙은 부부는 콩죽을 먹고

배탈이 크게 나 아프다고 소리친다.

큰 쥐란 놈이

장독대에 쌓아놓은 것을

뚫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해금과 더불어

주고받는 이런 대화는

가만히 듣고 보면 모두가

사람을 깨우치는 글이라네.

장면 묘사가 단순한 흥밋거리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내용이라고 해석했다. 콩죽을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난다든지 장독대에 쥐가 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활의 지혜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대여섯 살 어린아이를 신기하게 만들었던, 해금과 함께한 이 걸인의 공연에서 조수삼은 인생의 어떤 의의를 캐내고자 했다.

 

마주 보고 연극하는 듯한 재담

이것 말고도 작자는 이 걸인의 특이점을 찾았다. 자신이 환갑이 된 해에 그 노인이 또 집에 찾아와 같은 공연을 하면서 쌀을 구걸했다. 이상해서 노인의 나이를 따져보니 100살을 거뜬히 넘겼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연 조수삼의 추정이 옳은 것일까? 대여섯 살 때 한 번 본 사람을 다시 기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 판단으로는 그 걸인은 동일인이라기보다는 똑같은 레퍼토리의 공연을 하며 구걸하는 많은 유랑 예인 중 한 명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그런 신기한 재능을 생계 수단으로 익힌 익명의 유랑 예인이 한둘이 아니라 제법 많다는 현실을 조수삼은 미처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와 시골 마을에 흔하게 나타나 작은 공연을 벌이고 약간의 돈을 대가로 받는 이 해금 연주자들은 이른바 ‘거지 깡깡이’라고 천하게 부르는 직업적 유랑 예인이었다. 여기서 깡깡이는 해금을 천시해 부르는 말이다. 당시부터 근대까지 해금을 연주하며 구걸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해금과 피리는 그런 민중이 애호하는 대표적인 악기였다.

흥밋거리 넘어 경각심 일깨워

18세기 후반의 학자 유득공(柳得恭)이 쓴 <유우춘전>에서는 해금이 유랑 예인의 악기로 이용된 상황을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자가 언젠가 해금을 얻어 연주했더니 친구인 서상수(徐常修)가 듣고는 깜짝 놀라 “좁쌀이나 한 그릇 퍼줘라. 이건 거렁뱅이 깡깡이다”라고 외쳤다. 어리둥절한 작자가 “무슨 말이냐?”고 묻자 서상수는 “자네는 음악을 전혀 모르는군. …유우춘과 호궁기는 나란히 해금으로 유명하네. 자네가 해금을 좋아한다면 어째서 그들을 찾아가 배우지 않고 어디서 이 따위 거렁뱅이 깡깡이 소리를 배워왔나? 거렁뱅이는 깡깡이를 들고 남의 문전에서 영감, 할멈, 어린애, 온갖 짐승, 닭, 오리, 풀벌레 소리를 내고는 좁쌀을 던져주면 자리를 뜬다네. 자네의 해금 연주가 바로 이런 꼴일세”라고 핀잔했다. 그 말을 듣고서 정말 부끄러워했다고 유득공은 기록했다.

서상수가 핀잔한 것처럼 해금 연주자는 수준 높은 전문 악사도 있는 반면 대충 연주해 문전걸식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부류도 있었다. 그가 한 말의 행간에서 그런 부류의 연주가 도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의 하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 거렁뱅이가 연주하는 것은 정통의 고아한 음악이 아니라 영감과 할멈과 어린애를 비롯한 온갖 짐승의 소리를 흉내내는 것이었다. 여기서 영감과 할멈을 흉내낸다는 것은 앞서 해금 켜는 노인이 콩죽 먹고 설사하는 늙은 부부를 흉내낸 것도 포함될 것이다. 해금으로 흉내내기 좋은 레퍼토리가 많았고, 연주자의 능력과 기호에 따라 선택해 장기로 삼았을 것이다. 마치 신라 때 백결 선생이 거문고로 방아 찢는 소리를 모사했듯이, 악기로 현실 생활의 다양한 장면을 모사해 재미있게 재현하는 공연은 당시에 대중의 호기심에 부응하는 대중적 예술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해금은 그런 장면의 모사에 아주 적합한 악기로 애용되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해금으로 장면을 모사하는 기예가 성행했을까? 예전에 구기(口技) 전문가 박뱁새의 사연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조선 후기 대중사회에서 흉내내기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단순한 성대모사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고난도의 장면을 모사하는 단계를 공연으로 연출했다. 주로는 입으로 모사했으나 악기를 이용해 모사하는 기예도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그 방법이 일정하게 표준화해 거지들도 그런 재주를 활용해 구걸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수삼이 직접 구경한 노인은 그들 가운데서도 솜씨가 좋은 축에 속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눈을 돌려보면, 이러한 장면 모사 기예는 당시 동아시아 각국에서 대중적인 문화로 널리 퍼져 있었다. 조선과 밀접한 명나라 말엽에는 대도시에 악기를 이용한 모사의 기예가 성행했다. 조선에서는 해금이 이용됐으나 중국에서는 비파가 이용됐다. 사례를 한 번 보자. 명말 청초의 학자가 쓴 <기원기소기>(寄園寄所寄)란 필기(筆記)에는 이근루(李近樓)라는 북경의 유명한 맹인 악사의 재능이 소개됐다. 비파를 절묘하게 연주하는 그는 특히 장면 모사에 뛰어났다. 한평생 쌓인 나그네의 설움과 같은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했는데, 얼마나 잘 연주하는지 사람의 머리털을 위로 솟구치게도 하고 눈물이 마구 흐르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리를 바꿔 범패 소리를 냈고, 다시 손오공이 서역으로 떠나는 장면을 시원스럽게 묘사했다. 사냥할 때 온갖 짐승들이 울부짖는 을씨년한 장면도 비파 하나로 곡진하게 잘 나타냈다. 이 책에는 얼마나 장면 묘사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화가 소개되었다.

 

명나라에선 모사 악기로 비파 이용

“시어(侍御) 벼슬을 하는 아무개가 언젠가 소납암(蘇納菴)이란 분에게 ‘내가 여러 해 서울에 머물면서도 이근루의 비파 연주를 듣지 못했으니 유감’이라고 말했다. 얼마 뒤 그가 황명을 받들어 사천성으로 가야 했다. 소납암이 사천성 사람이라 홀로 그를 배웅했다. 술이 거나해지자 ‘미인이 술 한잔 권해도 좋겠지요?’라고 물었더니 시어가 그러면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때 문득 병풍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는데 소납암이 방금 말한 그 미인인 듯했다. 또 늙은 기생이 나타나 그 미인이 웃는 것에 화를 내면서 길게 소리를 지르며 혼냈다. 조금 이따가 미인이 말을 듣지 않고 욕지거리를 하며 그릇을 바닥에 내동댕이쳐서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는데 하나하나 실제와 똑같았다.

몹시 겁이 난 시어가 일어나 도망하려고 하자 소납암이 웃고서 ‘괜찮습니다!’라며 병풍을 치우라고 했더니 장님 하나가 비파를 안고 앉아 있을 뿐 다른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모든 소리가 비파에서 나온 것이었다. 시어가 깜짝 놀라며 ‘오늘에야 이근루를 만났구려!’라고 했다. 그 뒤 밤새도록 비파를 듣고 길을 떠나지 않았다.”

신기에 가까운 장님 악사의 비파 솜씨를 묘사했다. 젊은 기생과 늙은 기생이 그릇을 던지며 싸우는 장면을 비파만을 이용해 그야말로 리얼하게 묘사한 능력이 사연만으로도 경탄을 자아낸다. 이 저작의 저자는 청나라 당시에 북경을 비롯해 큰 도시에는 이 기예를 잘하는 이가 제법 있다고 전했다. 이런 정도라면 그야말로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