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서 왕세기의 연주 엿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명성이 남아 전설이 된 악사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김성기(金聖器·1649~1724)가 그런 악사다. 거문고와 퉁소, 그리고 작곡, 시조로 명성이 났다. 그가 죽은 지 100년 가까이 되는 조수삼의 시대에도 그의 음악과 행적을 두고 이야기할 만큼 그의 명성은 오래되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인생과 예술은 그만큼 아름답고 감동적인 대목이 많다.
그런 연유로 나는 그의 인생과 예술을 재구성해 <조선의 프로페셔널>이란 책에서 다룬 적이 있다. 제법 많은 자료를 동원해 자세히 살폈으므로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듯했다. 그러나 최근에 장유승 선생이 임상정(林象鼎·1681~1755)의 문집 <자오록>(自娛錄)에서 김성기와 그 제자를 다룬 새 글을 찾아 <문헌과 해석>에 발표했다. 그 글 덕분에 그의 삶에서 큰 의문이 남는 대목이자 깊은 인상을 던지는 대목인 스승과 제자 관계를 재조명할 근거가 생겼다. 그 점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삶을 다시 한번 조명해보고픈 욕심이 들었다.
먼저 김성기가 어떤 인물인지를 간단하게 짚어보자. 그는 숙종 연종 연간의 저명한 음악이다. 조수삼이 활약하던 19세기 전반으로부터 거의 150년 전에 활동한 악사이다. 그는 과거 음악을 철저하게 공부한 바탕 위에서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 그만의 악보를 만들었고, 현재 그 악보가 전해진다. 그는 숙종조 최고의 악사로 평가를 받았다. 장악원에 소속되어 음악을 연주했으나 장년기 이후에는 완전히 세상과 인연을 끊고서 현재의 서울 마포 강가에 숨어버렸다. 세상을 버리고 마포 강가에 숨어버린 행적조차 신비롭다.
그는 너무도 유명해서 그가 누구로부터 음악을 전수받았고, 또 누구에게 전해주었는지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관심을 표했다. 조수삼은 <추재기이>에서 그런 호기심을 극단적으로 표현했다.
“거문고 악사 김성기는 왕세기(王世基)로부터 거문고를 배웠다. 왕세기는 새 음악을 만날 때면 언제나 비밀에 부쳐두고 전수하려 하지 않았다. 김성기는 밤이면 밤마다 왕세기 집으로 가서 창 뒤에 바짝 붙어서 몰래 훔쳐 들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하나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연주하였다. 그런 사실을 너무 의심스럽게 생각한 왕세기가 어느 날 밤 거문고 곡을 연주하다 미처 반도 끝내지 않았을 때 별안간 냅다 창문을 열어젖혔다. 김성기가 깜짝 놀라서 땅바닥에 거꾸러졌다. 왕세기는 그제야 그를 크게 기이한 사람으로 여기고 그가 지은 것을 모조리 김성기에게 전수하였다.”
해당 내용의 전체 문장이다. <추재기이>의 글치고는 변격이다. 다른 글은 대체로 인물의 집안·출신·지역을 설명하는 내용을 앞세우지만 이 글만은 그런 도입부가 없다. 새삼스럽게 그의 인생 내력이나 소소한 행적을 밝힐 필요가 없다고 작자는 본 듯하다. 그만큼 그에 관한 정보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내용은 순전히 김성기가 스승인 왕세기로부터 음악을 전수받는 하나의 에피소드만을 다뤘다. 새 음악을 전수받기 위해 밤마다 스승의 집 창문 뒤에 숨어서 창틈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공부하는 김성기! 음악의 비밀을 감추려는 왕세기가 낌새를 차리고 냅다 열어젖힌 창문 사이로 마주친 두 눈동자!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음악을 매개로 교감이 이루어져 제자에게 자신의 모든 음악을 전해준다는 사연이다. 조선시대에 음악하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음악의 전승이 얼마나 비밀스럽고 엄격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홍복원→이지윤→김성기’ 밝힌 남원군
김성기 사후 거의 100년 뒤 인물인 조수삼이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일을 어떻게 이렇게 상세히 묘사할 수 있었을까? 어떤 기록을 보았거나 선배로부터 들어서 재생해놓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 종적을 찾을 수 없다. 더욱이 왕세기란 인물은 오로지 이 기록에만 등장한다. 과연 왕세기는 누구일까? 이 사연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적으로 신빙하기가 어렵다. 왕세기란 인물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며, 다른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 사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김성기의 삶과 음악에서 스승으로부터 음악을 전수받고 제자에게 다시 전수하는 것이 신비롭고 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의 음악 스승과 제자에 얽힌 사연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 뒤를 추적해보자.
정래교는 만년의 김성기를 직접 만난 문인이다. 정래교는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전기를 지었다. 본래는 상의원(尙衣院)에서 활을 만드는 장인인 김성기가 음악을 좋아해 일터에 나가 물건을 만들기는커녕 남의 뒤를 따라다니며 거문고를 배웠다고 전기에서 기록했다. 하지만 그가 거문고를 배운 인물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 발굴된 임상정의 <남원군(南原君)이 손수 필사한 거문고 악보의 서문>에는 그의 스승을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임상정은 장악원정(掌樂院正)까지 지낸 만큼 음악에도 조예와 관심이 깊었다. 그가 언젠가 김성기의 제자인 남원군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공은 거문고 솜씨를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았습니까?”
“맞네. 자네는 예전에 어은(漁隱) 김성기란 분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그분이 바로 내 거문고 스승일세. 옛날 융경(隆慶) 만력(萬曆) 연간에 홍복원(洪復元)이라는 사람이 거문고로 유명하여 중국 사신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네. 홍복원은 이지윤(李志尹)에게 전수했고, 이지윤은 어은에게 전수했네. 이것이 내가 거문고 솜씨를 전수받은 유래일세.”
김성기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는 시기에 그의 수제자인 남원군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다. 김성기의 스승은 이지윤이고, 이지윤의 스승은 홍복원이 틀림없다. 그가 장악원 소속이었으므로 이지윤과 홍복원 모두 장악원 소속 악사였을 것이다.
남원군을 포함해서 4대째 이어지는 사승(師承) 계보가 명확하게 밝혀졌다. 끈끈한 사승 관계는 음악의 전승을 책임지는 악보 만들기로 표현되었다. 김성기는 속악(俗樂)이 갈수록 어지러워지는 현상을 염려해 홍복원과 이지윤 두 스승이 전해준 곡을 책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오류를 바로잡는 작업을 마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떴고, 남원군이 뒤를 이어 악보를 완성했다. 현재 전해지는 김성기의 악보인 <낭옹신보>(浪翁新譜)에는 각각의 곡마다 누가 채보했는지를 밝혀놓았는데 대부분의 곡 하단에는 ‘원태전기’(原台傳記)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다. 여기서 ‘원태’는 남원군(南原君) 대감을 지칭하고, ‘전기’는 낭옹의 음악을 전해서 기록한다는 의미다.
맹인 악사 주세근에게 ‘묘법’ 남겨
이렇게 해서 김성기의 스승과 제자는 분명하게 밝혀진 셈이다. 물론 스승과 제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 있을 수 있으므로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임상정과 비슷한 시대의 학자인 이영유(李英裕)가 쓴 글에서 그런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가 쓴 <악공 김성기에 얽힌 사연>에는 그의 또 다른 제자인 맹인 악사 주세근(朱世瑾·?~1749)이 등장한다. 스승이 죽은 해인 1724년 겨울의 기억을 되살려 주세근이 말한 내용이다. 죽기 직전 서강으로부터 성 안에 들어온 김성기는 주세근의 손을 붙잡고 빈집의 밀실로 데리고 들어가 쓸쓸히 마주 앉아 비파를 꺼내놓고 몇 곡 탔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고려의 옛 가락이다. 고려의 옛 가락은 오로지 이 곡만 남아 있다. 개성 기생 황진이로부터 나온 이 곡은 김성천(金成川) 댁의 여종이 악기를 탈 줄을 몰라 입으로 연주하여 내게 전해주었다.”
그는 성천부사를 지낸 김아무개 집의 여종으로부터 고려의 옛 가락을 배웠다고 했다. 그 곡이 저 유명한 개성 기생 황진이로부터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진실성은 차치하고라도 신비스럽게 꾸며진 느낌이 든다. 황진이에 얽힌 사연은 너무나 세속화돼서 그녀를 거론하면 진실성이 사라질 듯하다. 하지만 황진이는 거문고 연주에서 최고라는 평을 받은 악사였고, 그녀가 소장한 거문고는 귀중한 물건으로 취급되어 19세기까지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공교롭게도 김성기가 복원해놓았다고 하는 옛 음악인 <삭대엽 평조 제일>(數大葉 平調 第一)의 곡은 황진이의 시조로 널리 알려진 “어져 내 일이냐 그릴 줄을 모르더냐/ 있으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이다. 그가 황진이로부터 전승됐다고 하는 고려의 옛 가락이 이 시조를 직접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황진이가 전래한 음악과 관련성이 있을 법하다.
이야기가 옆으로 흘렀으나 어쨌든 김성기의 음악에는 고려 음악의 전통이 담겨 있다는 말이 된다. 왕세기도 옛 음악을 되살리려는 그의 노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인물은 아닐까? 더욱이 왕세기의 성에서 알 수 있듯 그가 고려 유민이라는 점도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는 주세근에게 “나만이 이 곡을 연주하여 묘법(妙法)을 터득했다. 끔찍이 아껴서 남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던 곡이다. 이제 나는 늙었다. 네게 전해줄 테니, 남에게 가볍게 전하지 않는 것이 옳다”라고 말했다. 어렵게 배운 기량과 곡을 함부로 남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전통을 따르라고 당부했다. 제자들도 자신이 배운 것처럼 따라 하기를 바랐다.
실상 이러한 방식은 음악만이 아니라 전통사회에서는 어떤 분야든 공통이다. 스승으로부터 전수받는 방식이 그대로 제자한테 전수하는 방식이 되었다. 한번 스승과 제자로 인정하면 부자간의 관계처럼 모든 것을 전해주었다.
임상정의 글로 돌아가 이제는 김성기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제자들의 행적을 보자. 앞서 주세근도 그렇지만 제자들에게 김성기는 카리스마가 강한 스승이었다. 그 가운데 종친인 남원군은 신분이 천한 악공을 스승으로 깍듯이 모셨다. 천한 자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느냐고 누군가 문제제기를 했을 때 남원군은 “재능이 있는 곳이 바로 스승이 있는 곳이다.
나는 재능을 스승으로 삼을 뿐 귀천이 있고 없고는 모른다”라고 말했다.
남원군은 스승이 죽은 뒤에도 사모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가 스승의 무덤을 찾아가 추모의 의식을 치르는 모습은 음악하는 스승과 제자 사이가 얼마나 끈끈하고 절실한 정으로 연결되었는지를 인상 깊게 보여준다.
스승의 무덤에서 연주하는 제자들
남원군과 이현정을 비롯한 제자들이 스승을 그리워해 가기(歌妓) 대여섯 명을 데리고 무덤을 찾아가 술과 안주를 올렸다. 술을 붓고 나서 남원군이 직접 몇 곡을 연주하고, 다른 제자들은 각자 익힌 곡을 연주해 하루 종일 마음을 위로하다가 연주를 마치자 대성통곡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일을 신익은 장례를 치를 때의 사연으로 비장한 파토스를 담아 묘사했다.
“김성기가 죽자 이현정은 남원군과 함께 시신을 지고 광릉(廣陵)의 산에 가서 장사를 지냈다. 그때 하늘의 구름은 빛을 바꾸었고, 산골짜기에는 어둠이 몰려왔다. 새와 짐승들은 모여들어 구슬프게 울면서 오르내렸다. 둘은 큰 잔에 술을 따라 무덤 위에 뿌리고 서로 마주 보고 통곡하였다. 통곡을 마치자 거문고를 안고서 제각기 자기가 배운 것을 연주하였다. 연주를 채 마치지도 않았는데 백양나무에서 처량한 바람이 일어나 우수수 소리를 내었다. 둘은 거문고를 던지고 다시 대성통곡하였다. 길가를 지나던 사람들은 누구도 그들이 왜 그러는지를 몰랐다.”
남원군은 스승의 장례를 치르고서 이런 시를 지었다.
백아(伯牙)의 거문고를 막 청산에 묻었으니
천하에는 이제부터 옛 음악이 끊어졌네.
필마로 홀로 왔다 다시 홀로 떠나면서
몇 줄기 눈물만을 가을 하늘에 뿌리노라.
거장을 잃고 난 세상의 적막감과 위대한 스승을 보낸 제자의 고독감이 필마 타고 홀로 왔다 홀로 간다는 표현에 스며 있다. 김성기의 스승과 제자들의 사연에는 그 시대 음악인의 열정과 순정이 느껴진다.
‘이야기 주머니’ 김옹은 김중진
전문적으로 재담을 구연(口演)하는 직업인은 재담꾼이다. 사람들에게 허리가 부러지도록 웃음을 선사하고 그들로부터 금전을 받는 직업이다. 이들의 존재는 여러 문헌에 조금씩 나타나다가 18세기 들어 제법 그 수효가 늘어난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재담꾼으로 한 사람을 들라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우선 <추재기이>에는 ‘설낭’(說囊), 즉 이야기 주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린 김옹(金翁)이 등장한다.
뇌물 받은 형조 관리 풍자
“이야기 주머니 김옹은 고담을 잘하여 듣는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배꼽을 잡는다. 그는 한 대목 한 대목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면 핵심을 꼭꼭 찔러서 이러쿵저러쿵 잘도 말한다. 말하는 재간이 뛰어나 귀신이 도와주듯 민첩하다. 그래서 우스개 이야기(滑稽)하는 사람들 가운데 우두머리라 할 만하다. 그 심중을 냉정하게 살펴보면, 또 모두가 세상을 가볍게 보고 풍속을 경계하는 말이다.”
고담을 잘한 김옹의 특징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모든 사람이 포복절도할 만큼 익살이 넘치는 우스개 이야기를 잘했고, 이야기는 단순한 우스개에 머물지 않고 주제가 선명하고 풍자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재담 예술계의 우두머리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이야기 주머니’는 그런 솜씨를 상징하는 별명으로 당시 사람들이 김옹을 부르는 말이거나 아니면 조수삼이 김옹을 지칭한 말이다. 이야기 주머니는 재미있는 고담을 많이 아는 사람을 지칭하는 ‘이야기 보따리’와 거의 유사한 의미이리라.
조수삼의 설명을 보면, 그 시대에는 우스개 이야기를 직업적으로 구연하는 전문가가 꽤 있었고, 그들 사이에 김옹이 최고수였음을 알 수 있다. 재담이 전문적인 공연물로 공연된 시대임을 감안하면, 김옹을 한 시대의 대표적 재담꾼으로 자리매김하려 한 조수삼의 태도를 짐작할 만하다. 그렇다면 그가 장기로 삼은 레퍼토리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조수삼이 쓴 시에 담겨 있다.
지혜는 진주처럼 둥글둥글
어면순은 골계담의 으뜸이다.
꾀꼬리와 따오기는
소란스레 소송을 걸더니
황새란 벼슬아치
판결은 지극히 공정도 하다.
시의 전반부는 의미가 분명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후반부는 꾀꼬리와 따오기와 황새가 등장하는 ‘황새결송’이란 이야기가 틀림없다. 이 이야기가 김옹이 장기로 삼은 대표작이었기에 시에서 거론했을 것이다. 한편, 이 이야기는 <삼설기>(三說記)란 단편소설집에 들어 있다. 한 시골 부자가 뇌물을 받은 형조 관리로 인해 패할 리가 없는 소송에서 지고 난 뒤 풍자적으로 해본 이야기다. 꾀꼬리와 뻐꾸기와 따오기가 목소리 자랑을 하다가 황새에게 우열을 부탁했다. 당연히 질 수밖에 없는 따오기가 미리 황새에게 뇌물을 주어 꽥 소리를 지르고서도 일등이 되었다. 새의 우열 다툼을 통해 뇌물로 송사의 승패가 정해진다는 당시 사법제도의 비리를 풍자했다.
‘황새결송’은 평이한 사건의 서술에 그치지 않고 웃음을 동반하는 묘사와 대화체가 흥미롭게 전개되어, 재담꾼의 사설이 소설로 정착되었음을 추정할 만하다.
조수삼이 골계의 우두머리(滑稽之雄)라고 칭송한 재담꾼이라면, 다른 기록에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소은고>(素隱稿)에는 김중진(金仲眞)이란 유명한 재담꾼이 등장한다.
“정조 임금 때 김중진이란 사람이 있었다. 나이가 늙지 않았는데도 이가 모두 빠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롱하여 ‘오이무름’(瓜濃)이라 불렀다. 그는 익살스런 농담(?諧)과 통속적인 이야기(俚談)를 잘했다. 세태와 인정을 곡진하고도 섬세하게 묘사해서 곧잘 들을 만했다.”
오물거리는 모습부터 우스꽝
김중진은 ‘오이무름’이란 별명으로 불린 명성이 높았던 재담꾼이라고 했다. 이 기록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하다. 우선 김중진이 정조 임금 때 사람임이 드러났다. 18세기 후반이 그의 전성기였다. 다음으로 늙지 않았을 나이에도 이가 모두 빠져 오이무름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글의 저자는 오이무름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를 노인이 먹기 좋은 오이무름이란 음식을 그가 즐겨 먹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궁색하다. 내 추정으로는 이가 빠져 오물거리는 모습이 쭈글쭈글해진 오이와 비슷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용모만으로도 사람을 웃겼으며, 웃음을 유발하는 용모가 그의 별명으로 굳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이무름은 그의 캐릭터 특징을 잘 드러낸 예명인 셈이다.
그런데 이 오이무름이란 직업적 재담꾼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재담꾼으로 여러 곳에 등장한다. 18~19세기 왈자 패거리의 문화를 잘 보여주는 ‘무숙이타령’에는 봄날 흥겹게 노는 곳에 당대 최고의 대중예술가들이 등장한다.
“노래 명창 황사진이, 가사 명창 백운학이, 이야기 일수 외무릅이, 거짓말 일수 허재순이, 거문고의 어진창이, 일금 일수 장계랑이, 퉁소 일수 서계수며, 장고 일수 김창옥이, 젓대 일수 박보안이, 피리 일수 □(원본 확인 불가)
오랑이, 해금 일수 홍일등이, 선소리의 송흥록이 모흥갑이 다 가 있구나.”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각 분야의 명인들이 줄줄이 나온다. 모두가 실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 송흥록·모흥갑이 판소리 명창으로 유명한 것을 비롯해 박보안을 비롯한 음악가는 당대의 각 악기 명인으로 유명하다. 그 가운데 재담꾼으로는 외무릅과 허재순이 등장한다. 외무릅은 이야기의 최고수로 끼어 있다.
이 ‘외무릅’이 <소은고>에 실린 오이무름과 동일인임은 불문가지다. 또 <청구야담>에는 “인색한 양반을 풍자한 오물음(吳物音)은 재담을 잘한다”(諷吝客吳物音善諧)는 야담이 한 편 실려 있다. 야담은 “서울에는 오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 고담(古談)을 잘해 세상에 명성이 나서 정승 판서 집을 두루 다녔다. 성품이 오이를 익힌 나물을 좋아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오이물음이라고 불렀다”라는 사연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오씨 성은 ‘오이물음’의 ‘오’를 성으로 착각하여 추정한 것이다. 김중진이란 본명보다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기 때문이다. 결국 외물읍이 김중진과 동일인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청구야담>에서도 오이를 삶은 나물을 좋아했기 때문에 오이물음이라고 불렸다고 했으나 역시 그릇된 추정이다. 정리하여 말하면, 서너 곳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오이물음 곧 ‘외무릅’은 동일인이며, 정조 임금 시절 최고의 재담꾼으로 명성이 있었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추재기이>에서 골계의 우두머리라고 말한 이야기 주머니 김옹과는 어떠한 관계일까? 나는 김옹 역시 외무릅과 동일인이 틀림없다고 판단한다. 당시에 재담꾼을 전문직업으로 한 사람들 가운데 외무릅만큼 지명도가 높은 재담꾼이 많지는 않다. 연암 박지원이 <광문전>에서 묘사한 광문도 유명한 재담꾼의 한 사람이고, ‘무숙이타령’에 등장하는 거짓말 최고수 허재순이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런 무리들 가운데 재담꾼 집단의 대표는 외무릅이다. 당대 최고의 대중예술가 집단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조수삼은 재담꾼 최고수로 외무릅 김중진을 꼽았을 가능성이 높다.
‘세 선비 소원담’ 인생 진실 담겨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외무릅의 가장 뚜렷한 이미지는 노인이 아닌데도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수삼이 ‘김씨 늙은이’라고 부른 것은 노인임을 표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노인처럼 이 빠진 김중진의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표현한 말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정조 임금 시절 최고의 재담꾼 외무릅의 존재는 뚜렷하게 부각된다. ‘이야기 주머니 김옹’ ‘오물음’ ‘외무릅’ ‘김중진’으로 제각기 표현된 재담꾼이 동일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가 장기로 한 재담의 내용과 특징을 찾아보면 그 사실은 더 분명해진다. 그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천부적 재능을 가졌던 것으로 묘사되고, 특히 그의 구연의 특징은 대중을 웃기기에만 애쓰는 저차원의 우스개 재담을 넘어 세태와 인정을 유달리 곡진하게 잘 표현했고, 흥미만을 추구하지 않고 풍자의 기능과 주제의 선명성도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매우 수준 높은 재담의 미학을 추구한 예술가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한 미학의 실례가 바로 ‘세 선비 소원담’(三士發願說)이다. 우선 이 이야기는 <소은고>에 실려 있다. 세 선비가 하늘에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각자의 소원을 말한다. 첫 번째 선비는 큰 벼슬아치가 되는 소원을, 두 번째 선비는 큰 부자가 되는 소원을 말했다. 옥황상제는 모두 들어주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선비는 부귀도 공명도 싫다면서 시골에 묻혀 편안히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기 바란다는 평범한 소원을 말했다. 이 뜻밖의 소원에 옥황상제는 그가 소원한 것은 이른바 청복(淸福)으로서 그런 청복은 하늘도 정말 아껴서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다면서 자기도 옥황상제 노릇을 벗어던지고 그런 삶을 살고 싶노라고 했다. 평범하게 사는 행복의 가치를 말한 이 이야기는 줄거리 자체도 긴장미와 흥미가 있다. 또 사람의 의중을 절묘하게 뒤집으면서도 가만히 되뇌어보면 인생의 진실이 담겨 있다.
<소은고>에서는 이 이야기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사연을 전개했으나 큰 진리를 비유한다”고 평가했다. ‘세 선비 소원담’은 외무릅의 유명한 레퍼토리로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 인기는 후대에 <삼설기>란 단편소설집에 ‘삼사횡입황천기’(三士橫入黃泉記)라는 단편소설로 각색되어 실린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저승차사의 실수로 인해 생사치부책에 기록된 수명보다 빨리 저승에 끌려간 세 선비가 염라대왕으로부터 보상조로 각자의 소원을 말한다는 내용이다. 줄거리는 동일하고 사설이 흥미롭게 불어났다.
또 서유구는 <임원경제지> ‘이운지’(怡雲志) 서문에서도 똑같은 줄거리를 설명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청복을 희구하는 심경을 표현했다. 다만 그는 선비를 넷으로 설정하여 문장을 잘하는 문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첨가했다. 서유구는 이야기에 앞서 “세상에 떠도는 속된 이야기 가운데에는 그럴듯한 이치가 담긴 것이 없지 않다”고 했다. 이 레퍼토리가 당시 얼마나 큰 유명세를 탔고, 더욱이 그의 재담 특징인 그럴듯한 이치를 담는 미학이 살아 있음을 짐작할 만하다.
그런 이야기 전개의 특징은 <추재기이>에서 대표적 레퍼토리로 든 ‘황새결송’에도 똑같이 나타난다.
“관에 구멍 뚫어 ‘공수거’ 인생”
한편, <청구야담>에도 외무릅의 재담 한 편이 구연 상황과 함께 실려 있다. 재산이 매우 많지만 인색하기 짝이 없는 종실(宗室) 노인이 서울에 살았다. 그는 재물을 터럭 끝만큼도 남에게 주는 법이 없고 심지어는 아들 넷에게도 분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그가 하루는 외무릅을 불러다 고담을 시켰다. 외무릅은 그 기회에 멋진 재담 하나를 떠올렸다.
그는 서울 장안에 사는 천하 구두쇠 이동지(李同知) 사연을 구연했다. 팔자가 좋아 부자로 사는 이동지는 임종할 때까지 재물 재(財) 한 글자를 가슴에서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가 임종을 앞두고 아들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남겼다. “죽음을 앞두고 보니 그 많은 돈을 가져가지 못해 한이다. 평생 재물에 인색한 것이 후회스럽다. 그러니 내가 죽은 뒤엘랑 양손을 좍 펴고 쥐게 하지 마라. 관 좌우에 구멍을 뚫어 편 손을 내놓아 행인들로 하여금 내가 산처럼 재물을 쌓아놓고도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줘라!” 자식들이 유언을 거역하지 못해 시키는 대로 하여 운구했다. 외무릅이 종실 노인집에 오는 길에 관 밖에 손이 나와 있는 것을 목도하고 이상하게 여겨 물었더니 그런 사연을 말해주더라고 했다. 종실 노인이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을 조롱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지만 이치가 그럴듯해서 후한 상을 내리고 모든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었다.
줄거리만으로는 흥미성이 떨어지지만 외무릅 재담의 특징이 그대로 살아 있다. 외무릅 같은 뛰어난 재담꾼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앞이나 특별히 초청하는 부귀한 사람들 앞에서 구연을 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재담의 기예는 다른 대중적 연예에 자리를 물려주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의 공연은 조선 후기 도시적 시정문화의 전성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진정한 남자 못 찾고 떠난 명기 한섬
<추재기이>에는 그런 기생이 3명 등장하는데 제주도 기생 만덕과 정인을 따라 죽은 기생 금성월, 그리고 한섬(寒蟾)이다. 만덕과 금성월은 이미 소개했다. 한섬 역시 저 두 기생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명성이 있었다. 과연 어떤 행적을 보인 인물일까? 먼저 <추재기이>부터 살펴보자.
“한섬은 전주 기생인데 황교(黃橋) 이판서(李判書)가 그를 집으로 데려다 가무를 가르쳐 온 나라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한섬이 나이가 들어 집으로 돌아간 지 한 해 남짓 지나 판서가 세상을 떴다. 한섬이 즉시 말을 달려 판서의 묘에 이르러 한 번 곡하고 술 한 잔 따르고 술 한 잔 마시고 노래 한 곡 불렀다. 다시 두 번째 곡하고 두 번째 잔을 따르고 두 번째 잔을 마시고 두 번째 노래를 불렀다. 이렇듯이 하루 종일 돌려가며 한 뒤 자리를 떴다.”
아주 간단한 기록이다. 나이가 든 전주 기생 한섬이 자신을 뛰어난 예인으로 길러준 후원자가 죽자 극진한 예를 다해 추모했다는 사연이다. 아무리 큰 은혜를 입었어도 배반하는 자 많은 것이 세상 형편이고 더욱이 사망한 뒤에는 못 들은 척하면 그만일 것을, 한섬은 지극 정성으로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것도 평범한 유교적 예법이 아니라 예인들의 독특한 방법으로 말이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낸 것은 망자를 애도한 가기(歌妓)의 독특한 애도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사연만으로 한 시대 명사의 틈에 끼일 수 있을까? 디테일을 생략한 조수삼의 이야기 전개 때문에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 줄거리에 비밀이 있다.
소실로 데려가 대가 없이 인정 베풀어
<시필>(試筆)이란 책에 실린 비슷한 사연을 보면 왜 그런지 다소 의문이 풀린다. 그 전문을 보자.
“전주 기생 한섬은 침선비(針線婢)로 뽑혀 서울에서 노닐었다. 뒷날 용모도 추레해지고 의지할 데가 없어지자 이정보 판서께서 불쌍히 여겨 자기 집에 살게 했다. 그러나 한 번도 관계를 맺지 않고 잘 대우했다가 만년에 재물을 많이 딸려서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이 판서가 죽은 뒤 소식을 들은 기생이 술을 싣고 판서의 무덤을 찾아갔다. 무덤에 이르러 술을 따라 무덤에 뿌리고 다시 큰 술잔에 술을 따라 스스로 마시고는 ‘대감께서 평생 술을 즐기시고 노래를 즐기셨지요!’라고 말한 뒤 마침내 노래를 길게 뽑았다. 노래를 마치고 통곡하고 곡을 마치고서 다시 술을 따라 무덤에 뿌렸다. 술이 다 떨어지자 애통해하다 기절하여 묘 앞에 거꾸러졌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바로 떠나갔다.”
한섬의 동일한 사연을 다룬 기록으로 전하는 이에 따라 디테일이 약간 달라졌을 뿐이다. 조수삼의 건조한 기록보다는 인과관계가 훨씬 설득력 있게 묘사되어 이 사연이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감동을 불러일으킨 이유를 수긍케 한다. 여기서는 나이가 든 한섬을 소실로 데려다가 대가 없이 인정을 베푼 측면과 한섬이 애통해하다가 기절하는 장면까지 등장하여 훨씬 더 감성적인 색채를 가미했다. 어쨌든 서로 다른 두 종의 기록에 등장할 만큼 이 사연은 유명세를 탄 이야기였다. 하지만 단순히 이 에피소드가 특이해서 이렇게 기록에 전해진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만큼 화제의 당사자인 한섬이 나라 안에 명성이 자자한 대중적 인기인이었고, 그 상대역인 이 판서 역시 매우 유명했기에 그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조차도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 한섬을 키웠다는 황교 이판서는 대체 누구일까? 그는 영조 때 대제학과 예조판서를 지낸 이정보(李鼎輔·1693~1766)다. 서울 종묘 동쪽에 있는 황교 다리 부근에 살았기에 조수삼은 그를 ‘황교 이판서’라고 불렀다. 이정구(李廷龜)·이명한(李明漢) 집안의 후손으로 대표적인 경화세족(京華世族) 출신이다. 특히 음악에 뛰어난 실력이 있어서 스스로 곡을 만들어 지금도 시조집에 그가 지은 시조가 80수 가까이 전한다. 그런 실력으로 고관을 지내는 중에도 가객과 가기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시조를 유행시킨 당사자로 유명한 이세춘(李世春)과 거문고의 김철석(金哲石), 그리고 추월(秋月)·계섬(桂蟾)·매월(梅月) 등의 가기가 그 문하에 출인한 당대 최고의 음악인이었다. 이들의 모습은 <청구야담>에 ‘기생 추월이 늘그막에 옛일을 말하다’와 이옥(李鈺)의 ‘가객 송귀뚜라미 전기’에 문학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므로 이정보는 곧 당대 최고 음악가들이 모여드는 살롱의 주도자였고, 한섬은 그에 의해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기로 양성된 셈이다. 한섬은 그런 이정보에게 끝까지 제자로서 신의와 도리를 다했기에 여성의 의리와 예인의 의리를 한꺼번에 보여준 ‘기특한’ 존재였다.
전주 출신 기생 한섬의 사연은 두 종의 기록 외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앞서 말한 <청구야담>에 이정보의 대표적인 제자 중 하나로 나오는 계섬(桂蟾)이 바로 한섬(寒蟾)과 동일인이라고 추정된다. 계섬을 심로숭(沈魯崇)은 계섬(桂纖)으로 썼다. 그런 추정의 이유는 이정보가 키운 대표적 제자로서 그 행적과 이름이 매우 유사한 데 있다. 그에 관한 사연이 기록에 의해 전해진 것이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이름과 행적이 기록자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에서 차이가 있으나 큰 줄거리는 비슷하다.
심로숭이 전한 ‘계섬’과 동일인물 추정
대표적인 기록이 심로숭이 쓴 <계섬전>(桂纖傳)이다. 그는 늙은 계섬을 직접 만나 사연을 듣고 상세하게 전기를 썼다. 여기에도 앞서 한섬의 존재를 부각시킨 처신이 다시 등장한다. 이정보가 죽자 계섬은 아버지를 잃은 듯 날마다 곡을 했다. 마침 나라 잔치를 준비하느라 날마다 관아에 모여 연습해야 했지만 그는 아침저녁으로 상가에 가서 상식을 올렸다. 담당자가 곡하다 목이 쉴까 염려했기에 계섬은 곡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드디어 장례를 마쳤을 때 계섬은 이렇게 행동했다.
“공의 장례가 끝난 뒤 계섬은 제수와 술을 장만해서 공의 묘로 달려갔다. 한 잔 올리고 한 번 노래하고 한 번 곡하기를 하루 종일하고 돌아갔다. 그런 사연을 들은 공의 자제들이 묘지기를 책망하자 계섬은 몹시 한스럽게 여기고 다시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한량들과 노닐다가 술이 거나해져 노래를 하고 나면 왕왕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다소 차이가 나지만 줄거리는 비슷하다. 이정보의 묘는 지금 경기 이천시 율면 신추리에 잘 보전되고 있다. 계섬과 한섬이 혼동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동일한 행위를 다른 제자가 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심로숭은 이 계섬의 인생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계섬은 전주 출신이 아니라 황해도 송화(松禾)의 노비 출신이다. 심로숭이 글을 쓴 1797년에 나이가 62살이라고 했으므로 1736생이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해 한양 귀족들의 잔치 자리와 한량패의 술판에 계섬이 없으면 부끄러운 일이었다. 참판 원의손(元義孫)이 그 명성을 흠모하여 계섬을 데리고 10년을 살았으나 말 한마디 어긋나자 바로 그 곁을 떠나버렸다. 그 이후 당대의 이름난 가객이 모여든 이정보 문하에 들어가 노래를 익혔다. 이정보는 계섬을 가장 아꼈는데 사적 호감에서가 아니라 재능을 아꼈기 때문이다. 악보에 맞춰 몇 년을 배운 뒤로 계섬은 온 나라에 명성이 자자하여 지방에서 올라온 기생들이 그로부터 노래를 배울 정도였다.
1766년 이정보가 죽었을 때 계섬의 나이 31살이었다. 기생의 나이로는 늙었다고 할 때이다. 다른 기록에 ‘계섬이 나이가 들었다’고 할 법하다. 그 뒤로 한양의 큰 부자 상인 한상찬(韓尙贊)과 살았으나 그도 마음에 차지 않아 버리고 떠났다. 40살 무렵 불도에 귀의하여 정선군 산중에 전답과 집을 마련하여 떠났다. 산에 들어간 뒤로는 짧은 베치마를 걷어붙이고 광주리를 끼고 나물과 버섯을 따러 산이며 강을 오갔다. 그런 생활을 하며 밤낮으로 불경을 외우며 살았다.
“홍국영은 귀신도 모르게 죽을 것”
그 뒤에 다시 세상에 나왔다가 당대의 풍류남아 심용(沈鏞·1711∼88)과 어울렸다. 경기 파주군 시곡촌(柴谷村)에 있는 심용의 시골집 뒤에 거처를 정해 살았다. 거처가 심로숭이 사는 미륵산과 5리밖에 떨어지지 않아 어울려 지냈다. 산중에 나무를 엮어 울타리를 삼고, 바위를 깎아 섬돌을 만들었다. 대여섯 칸 되는 초가에 둥근 창을 냈고, 병풍·서안·술동이·그릇 등이 가지런히 놓여 화사하면서도 깔끔했다. 집 앞에 작은 밭을 가꿔 채소를 심었고, 논 몇 마지기를 소작을 맡겨 먹고살았다. 날마다 불경을 송독하며 보살로 살아갔다. 그런 노년 생활을 심로숭은 제법 상세하게 그렸다.
한편, 정선으로 은퇴했던 계섬이 잠깐 다시 세상으로 나온 일도 언급했다. 정조가 등극하고 난 뒤 홍국영(洪國榮·1748~81)이 권력을 잡았다가 지나치게 극성하자 정조가 물러가게 했다. 그때 정조는 그에게 많은 노비를 하사했는데 계섬도 그중에 끼어 있었다. 홍국영이 부르자 할 수 없이 산중에서 나온 계섬은 고관들의 잔치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 곧이어 홍국영이 완전히 실각하자 계섬은 기생명부에서 빠져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명성을 유지한 계섬의 행적이 약간 보인다.
하지만 심로숭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으나 계섬과 홍국영 사이에는 제법 복잡한 인연이 있다. 친아들이 일찍 죽은 이정보는 이건원(李建源)을 양자로 들였고, 이 무렵 그 친동생 이관원(李觀源)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다. 1777년 홍계희(洪啓禧)의 손자 홍상범(洪相範)이 강용휘(姜龍輝) 등을 사주하여 막 등극한 정조를 시해하려고 궁궐 담을 넘은 역모 사건이 발생했다. 이관원의 장인 홍계능(洪啓能)이 그 주모자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관원도 연루되어 처형되어야 했으나 “아비가 왕가의 신하였으니 살려두어 후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애걸하여 겨우 살아나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홍국영은 이정보와도 가까운 인척 관계가 있어 어릴 적부터 그 집을 왕래했다. 홍국영에게 계섬이 노비로 하사되었다는 기록이 올바른 정보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면 이러한 사유 때문이리라.
<계서야담>에 이 사건과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이정보의 첩은 전주 기생으로서 홍국영이 어렸을 때 이 기생이 머리를 빗기고 세수를 시켜주었다. 이관원 집안이 풍비박산되었을 때 그의 집에 머물던 기생이 홍국영을 찾아가 이관원을 살려달라고 빌려 했으나 문전박대를 당했다. 아침을 기다려 입궐하는 수레를 막고서 “우리 대감 집안을 왜 멸망시키느냐?”고 하소연했으나 그대로 쫓겨났다. 기생은 통곡하며 “하늘이 아시리라. 홍국영은 귀신도 모르게 죽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관원이라면 앞서 무덤에서 통곡하는 계섬을 쫓아낸 자제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그를 도우려 한 의기를 보인 전주 기생이라면 아무래도 한섬 또는 계섬일 것이다. 심로숭의 기록과 <계서야담>이 서로 차이가 나지만 홍국영과 계섬의 이야기라는 점을 놓고 보면 동일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계섬은 이정보 집안과 밀접하게 이어진다. 이렇게 사후에도 계섬은 이정보 집안과 사연이 이어진다. 그리고 모두 계섬의 의리와 관련된다.
이상적인 남성상은 이정보였을까?
언젠가 계섬은 심로숭에게 지나온 인생 이야기를 풀어놓은 적이 있다. 소싯적부터 명성이 나서 당대의 영웅호걸을 수없이 만났다. 그들은 호화스런 저택과 휘황찬란한 비단으로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 그런 사람이 많아지고 화려한 생활이 이어질수록 이상하게도 마음속은 채워지지 않았다. 세상이 우러러보는 영웅호걸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채워줄 진정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 계섬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언젠가 이정보가 이런 말을 했다.
“지금 세상에는 너만 한 남자가 없으므로 너는 끝내 그런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노년의 삶을 보면 계섬은 진정한 지기를 만나지 못한 회한을 쓸쓸히 지니고 있다. 그런 그에게 “당신의 전기를 내가 써주었으니 내가 당신의 진정한 남자가 아니냐”고 심로숭은 농담을 던졌다.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여인에게 진정한 지기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일 듯하다. 그 쓸쓸한 바람을 계섬은 분명 알았을 것만 같다. 그런 진정한 남자까지는 아니라도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고 키워준 이정보를 그런 남자에 가깝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한 시대의 이름난 가기 계섬은 오로지 한 수의 시조를 남겼다. 그의 본색과 직접 연결되는 내용은 아니지만 쓸쓸한 마음자리는 보여주는 듯하다. 그 시조는 이렇다.
청춘은 언제 가며 백발은 언제 온고
오고 가는 길을 알았다면 막을 것을
알고도 못 막는 길이니 그를 슬퍼하노라
여승과 주고받은 연애편지
한강변에서 마주친 그대를 못 잊어
성(聖)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 속인과 사랑한 뒤 파계하는 제재는 동서양 문학에서 드물지 않다. 남자가 여자를 파계시키기도, 여자가 남자를 파계시키기도 한다. 이 노래는 도봉산 망월사라는, 지금도 잘 유지되는 절에 사는 비구니를 한 남자가 파계시키는 내용이다. 망월사에서 한강변을 따라 길을 나선 여승을 한 남자가 우연히 보았다. 남자는 동대문 근처까지 동행한 뒤 여승을 잊지 못하고 구애하는 가사를 지어 망월사에 보냈다. 여승은 불도를 닦는 처지임을 들어 거절했으나 남자는 자기와 살자는 가사를 다시 지어 보냈다. 두 번의 구애를 받고 여승은 마침내 승낙하는 가사를 보냈다. 비구니는 성(聖)과 속(俗)의 갈등에서 결국 속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연만도 흥미로운데다 편지로 왕복한 대화 형식도 신선하다. 작품성을 높이 인정받지는 않았으나 특이한 가사로서 주목을 받아왔다. “어와 보고 싶네. 저 선사(禪師) 보고 싶네. 반갑기도 그지없고 기쁘기도 측량없네. 네 여인의 고운 모습으로 남자복색 무슨 일인가. 저렇듯이 고운 얼굴 은누비에 쌓인 모양, 삼오야 밝은 달이 떼구름에 싸였는 듯, 납설(臘雪) 중에 한매화(寒梅花)가 노송에 걸렸는 듯.” 처음 본 여승의 미모에 반해 들뜬 심경을 직설적으로 토로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작자가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았다. 많은 이본이 남아 있어 꽤 흔하게 불린 가사임을 알 수 있지만 작자를 보여주는 정보는 거의 없다. 남도사(南都事) 또는 남철로 작자명이 쓰인 것이 있어 남씨 성의 양반 사대부 정도로만 알았을 뿐이다.
그런데 <추재기이>에는 창작된 배경과 동기를 보여주는 ‘삼첩승가’(三疊僧歌)란 기사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인즉 이렇다.
“남 참판(南參判)이 소년 시절에 길을 가다 여승을 보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잊지 못해 긴 노래를 지어서 사랑하는 마음을 호소했다. 그 여자도 답하는 노래를 지어 세 편을 주고받았다. 이후 그 여자가 머리를 기르고 남씨 집안의 첩이 되었다. 지금도 승가 세 편이 세상에 전해진다.”
이 기록을 현재 각종 노래집에 실린 가사와 견주어보면 정확하게 부합한다. 조수삼은 분명히 승가를 잘 알았을 것이다. 그가 살던 시대에도 많이 불리는 인기 있는 레퍼토리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노래에 얽힌 사연까지 잘 알려졌으므로 <추재기이>에 실었다.
여기까지는 학계에서 이미 밝혀졌다. 그런데 많은 역사기록을 뒤지다 보니 이 노래의 작자를 찾게 되었다. 임천상(任天常·1754~1822)이 편찬한 <시필>(試筆)이란 책에 승가의 작자와 그의 특이한 행적을 기록한 대목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를 들면 이렇다.
“도사(都事) 남휘(南徽)는 용맹하고 지략이 있었으며, 의기(意氣)를 좋아했다. 소싯적에는 방탕하게 놀기를 즐겨서 행동을 자제하지 않았다. 언젠가 여승을 만났는데 몹시 아름다웠다. 승가를 지어 유혹하여 마침내 집에 데리고 와 첩을 삼았다.
지금 세상에 전해지는 승가가 바로 이것이다.”
“가슴에 불이 난다”며 “살려달라”
의금부 도사를 지낸 남휘란 사람이 승가를 지은 작자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다른 내용은 <추재기이>와 비슷하다. 매우 신뢰할 만한 사료이기에 이를 바탕으로 남휘를 추적해보았다. 뜻밖에도 오래된 족보를 비롯해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 그의 행적이 제법 많이 실려 있었다. 그는 1671년에 태어나 1732년에 죽은 양반으로 당시에는 유명세를 탄 인물이었다. 병자호란 때 전사한 남이흥(南以興) 장군의 증손자로 무인 집안 출신이며, 또 친척 가운데 무인이 많았다. 그도 병법을 잘 알고 무인의 자질이 있다 하여 여러 사람에게 추천을 받아 권무청(勸武廳) 부장(部將)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남휘 본인은 무인으로 출세하기를 바라지 않고 문학에 힘써 1708년 진사시에 2등으로 급제했다. 도중에 아예 출근을 하지 않아 조정에서는 그를 유배 보내자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기도 했다. 후에는 부장에서 의금부 도사로 직책을 바꿔 근무했다. 그는 참판을 지내지는 않았는데 조수삼은 잘못 알고 있었다. 그는 호방한 무인의 풍모와 문장을 갖춘 인물이었다. 여승에게 “세상에 갓 쓴 사람 나뿐이라 하랴마는 문무겸전(文武兼全) 호걸사(豪傑士)야 우리밖에 또 있느냐”고 자랑한 것이 허황한 거짓은 아닌 셈이다. 그렇다고 번듯한 문집을 남긴 사람은 아니었으나 문학을 향한 의욕이 구애 편지를 가사로 쓰게 만들었던 듯하다.
그런 남휘가 일반 여성이 아닌 여승을 유혹해 첩으로 삼은 동기가 어디에 있을까? 그는 15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 있었다. 임천상이 지적한 것처럼, 소싯적에는 방탕하게 놀기를 즐겼고, 행동을 자제하지 않았다. 게다가 만년에 유명한 거부가 된 것으로 보아 젊어서도 집안이 가난하지는 않았다. 이미 결혼해 부인이 있었으나 20대 젊은 나이에 여승을 보고 미모에 반해 구애를 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난봉꾼이라고 손가락질당하기 딱 좋으나 당시에는 용인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상대가 여승이란 것이 특별했다.
한편, 그는 여러 사람에게 추천을 받아 숙종대왕을 알현까지 했으나 부장을 수행할 마음이 없다며 출근도 하지 않을 만큼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한마디로 집안 좋고 인물 좋고 부유하고 성정이 호방하기에 마음에 드는 여성을 보자 망설이지 않고 첩으로 삼으려 했으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상대방을 유혹하고 설득했을까?
“두미(斗尾) 월계(月溪) 좁은 길에 남 없이 둘이 만나 추파(秋波)를 보낼 적에 눈에 가시 되었단 말인가. 광나루 함께 건너 마장문(馬場門) 돌아들 때 그이 가는 길이 남북으로 나뉘었소. 단순호치(丹脣晧齒) 반개(半開)하고 삼절죽장(三節竹杖) 잠깐 들어 ‘평안이 행차하시오 후일 다시 보사이다.’ 말가죽 잡고 바라보니 한없는 정이로다. 아장아장 걷는 걸음 가슴에 불이 난다. 한 걸음 두 걸음에 길이 점점 멀어가니 이 전에 걷던 말이 어이 그리 빨라졌나.”
여승을 보고 자신이 얼마나 가슴을 졸이고 반했는지를 고백한 대목이다. 그러더니 마지막 대목에서는 “왼손편 못 울기는 옛말도 들었더니 짝사랑 외기러기 나 혼자뿐이로다. 선사님 생각해보소. 내 아니 가련한가. 우연히 만나보고 무죄하게 죽게 되니 이것이 뉘 탓인가. 불상치도 않은가 저근듯 생각하여 다시금 생각해보소. 대장부 한 목숨을 살려주면 어떠할꼬”라며 아예 강짜를 놓는 투다. 너 때문에 나 죽게 됐으니 내 목숨 좀 살려달라는 하소연이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작업’을 거는 바람둥이의 허튼 수작에 불과해 보이기도 한다.
이런 수작에 여승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한 몸 바치나니 하실 대로 하소서”
“어와 뉘시던가. 경화(京華) 호걸 아니신가. 내 이름 언제 듣고 내 얼굴 언제 봤는가. 무심히 가는 중을 반기기는 무슨 일인가. 머리 깎은 중의 얼굴 덜 미운 데 어디인데 저렇듯이 눈에 들어 병이 차마 난단 말인가”라며 당혹스럽다는 듯이 서두를 꺼낸 뒤 답장을 받고 보니 마음이 산란하다고 말하고는 결연히 거절하는 답서를 역시 가사체로 써서 보냈다. “날 같은 인생을 생각도 마르시고 의술을 모르거든 남의 병을 어이 알고 인명이 재천(在天)커든 내 어이 살려내리. 천금 같은 귀한 몸을 부질없이 상치 말고 공명에 뜻을 두어 속절없이 잊으시고 무관한 중의 몸을 더럽게 아옵시고 영화로 지내다가 홍안분면(紅顔粉面) 고운 님을 다시 얻어 구하셔서 천세나 누리소서”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남휘는 다시 “아마도 선사님 만나 운우정(雲雨情)을 맺게 되면 약 아니라도 나으려니 선사님 덕이 될까 하노라”는 가사를 지어 보냈고, 여승은 마침내 “장부일언은 쳔년불괴(千年不壞)라. 여러 말 쓰르치고 일언에 결(決)하나니 믿나니 낭군이요 바라나니 후사(後事)로다. 한 몸 바치나니 하실 대로 하소서”라고 승낙하는 답장을 보냈다.
이때 여승은 나이 22살이었다. 남휘도 그 비슷한 나이로 보인다. 그러면 1690년대 초반에 둘 사이에 사연이 발생했을 것이다. 남휘가 부장으로 재직할 때였다. 유치한 사랑 타령 같기도 하나 300년 전 젊은 연인이 연애하는 구체적 모습이 이렇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비슷한 신분의 젊은 남성과 여성이 나눈 사랑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양반집 남성과 당시로서는 신분이 천했던 여승의 처지이므로 가능했다. 그런데 이 가사가 당시부터 대단히 인기가 있었고 그로부터 거의 200년 동안이나 널리 불렸다. 남녀 사이에 오간 비밀스런 구애의 가사가 인기를 얻은 이유는 무엇일까?
남휘는 평범한 사대부와는 달리 기걸하고 호방한 사람으로서 자신과 첩 사이에 오간 가사를 혼자서만 간직하지 않고 남들에게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뒤 가사가 널리 세상에 퍼졌을 것이다. 내 판단으로는 그들의 사연이 지금도 흥미롭지만 당시에는 더욱 큰 반향을 일으켰으리라. 이 승가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이렇게 사랑을 직접적으로 고백한 가사가 없었다. 남녀 간 사랑을 다룬 가사라고 해야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처럼 남성이 여성 화자가 되어 군주를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연군가사가 있을 뿐이었다. 승가는 남녀 사이의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거의 최초의 가사다. 구체적 상대를 향해 구애하는 호소력 강한 작품이다. 도덕과 충성, 자연 애호와 은둔을 주제로 하는 사대부의 점잖은 가사에 비교하면 이 가사는 그야말로 풍속을 해치는 도전적인 가사였으리라. 그러나 그 점이 바로 당시 사람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해 매료시키지 않았을까? 대중의 심리를 파고든 새로운 주제이자 감동적인 내용이 아니었을까?
남휘와 여승은 그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전하는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남휘는 의금부 도사를 지낸 뒤 재산 증식에 힘써 거부가 되었다. 그가 죽던 해 <승정원일기>에는 부평부사가 그에게 600석의 쌀을 빌려 문제가 된 사건이 나온다. 그만큼 그는 부자로 인정받은 듯하다. <시필>에도 거부인 그의 특이한 행적이 두 건이나 등장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다음 이야기다.
“남 도사는 거부가 되었다. 누군가 부자가 되는 방법을 묻자 남 도사는 뜰에 서 있는 나무로 올라가라 하고 양손으로 가지를 잡은 채 허공에 매달리라고 했다. 곧이어 한 주먹을 놓게 하고, 또 한 주먹을 놓으라고 했다. 그 사람이 놀라면서 ‘그러면 낙상합니다!’라고 하자 남도사는 그제야 ‘내려오게! 그것이 부자가 되는 방법이야. 돈 한 푼 쓸 때도 그 주먹을 놓듯이 하게!’라고 말했다.”
슬하의 서녀 셋, 여승의 아이일까
부자가 되는 방법으로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가 바로 남휘의 사연이다. 그는 박규문(朴奎文)·이장(李樟)과 함께 경기 부천시의 옛 이름인 계양(桂陽)의 호걸로 불렸다고 전한다. 족보에는 슬하에 서녀(庶女) 셋을 두었다고 나와 있다.
여승과 사이에서 나은 소생이 들어 있을 법도 하다.
한때 문무 겸전한 호남아로, 나이 들어서는 거부라는 명성을 누렸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남휘란 이름은 사라지고 그저 남 도사란 범칭으로 불렸다. 다른 모든 명성은 사라지고, 젊은 시절 호기로운 구애의 도구로 썼던 가사만이 세상에 오래 전해져 큰 인기를 누렸다. 문학의 힘은 이런 데 살아 있다.
18세기 대중스타 광대 달문
» 18세기 대중스타 광대 달문 /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
두 주먹이 한입에 들락날락
그는 18세기 대중의 스타로서 손색이 없다. 그렇기에 연암 박지원이 그의 인생을 묘사한 <광문전>(廣文傳)이란 전기를, 홍신유(洪愼猷)는 ‘달문가’(達文歌)라는 장편시를 써서 그의 독특한 인생을 묘사했다. 이규상·이옥·유재건·조수삼도 그의 인생을 다룬 글을 썼고, <파수록>과 <동야휘집> 같은 야담에도 그의 행적이 등장한다. 웬만한 고관대작은 이 정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도대체 그의 무엇이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었을까?
먼저 그를 기억하고 묘사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극히 추악한 그의 외모를 떠올렸다. 그를 직접 만나본 박지원은 그가 정말 못생겼다고 말했다. 입이 아주 큰 것이 외모 가운데 두드러졌다. 얼마나 큰지 두 주먹이 들락날락했다. 달문은 툭하면 주먹을 쥐어 입에 넣어 사람들을 웃겼다. 당시에 아이들은 상대에게 욕을 퍼부을 때면 “네 형은 달문이다”라고 놀렸다 한다. 달문이 그 말을 듣게 되면 “달문이 보고 싶으냐?” 하고 불쑥 입을 벌리고 껄껄 웃고는 주먹을 쥐어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추악한 외모에 천한 일을 했으나 달문은 안평대군의 후손이라고 했다.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으나 그의 성이 이(李)씨라는 사실은 말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이 무언지도 몰랐다. 박지원은 그의 이름을 광문(廣文)이라고 불렀다. 그에게 성은 필요가 없었다.
달문은 평민 대접도 받지 못하는 거지로 살았다. 한평생 주거가 일정치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아 상투도 올리지 못하고 머리를 길게 땋고 살았다. 나이 들어 머리를 땋은 패션이니 기괴하기 짝이 없는 꼴로 보였다. 홍봉한(洪鳳漢)은 그 시대에 달문과 같은 꼴을 하고 다니는 파락호(破落戶)가 아주 많고, 괴상망측한 몸가짐이 풍속을 손상시킨다고 걱정했다. 남들이 결혼하라고 권하면, 그는 “누구나 잘생긴 얼굴을 좋아하지. 사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야. 나는 본래 못생겨서 아예 용모를 꾸밀 생각도 하지 않아”라고 변명하곤 했다.
유명해지기 전에 달문은 거지 두목이었다. 종로 시장통에서 빌어먹고 다닐 때 거지 아이들이 그를 우두머리로 떠받들었다. 그때 한 사건이 벌어졌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날 거지들이 모두 구걸하러 밖에 나가고 달문만이 아픈 아이와 움막에 남았다. 아이가 덜덜 떨며 끙끙대기에 달문이 잠깐 나가 밥을 빌어와 보니 아이는 벌써 죽어 있었다. 마침 돌아온 패거리들은 달문이 죽였다고 의심하고 달문을 패서 내쫓았다. 달문은 그날 수표교 다리로 가서 거지들이 버린 죽은 아이의 주검을 수습해 묻어주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상인이 달문이 행한 의로운 행실을 소문냈다.
의로운 행실로 장안에 입소문
달문은 그 덕분에 약국에서 일하게 되었다. 달문이 장안의 명사로 떠오르게 된 사건이 그때 발생했다.
그 사연을 <추재기이>는 이렇게 묘사했다.
“언젠가 달문이 어떤 약방을 갔는데, 주인이 값이 나가는 인삼 몇 뿌리를 내보이며 ‘이 물건 어떤가?’라고 물었다. 달문이 ‘정말 좋은 물건’이라고 대꾸했다. 주인이 마침 내실로 들어가고 달문은 등을 돌리고 앉아 문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주인이 나와 물었다. ‘달문이, 인삼은 어디 있는가?’ 달문이 고개를 돌려보니 인삼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자 웃으며 ‘때마침 사고 싶어하는 사람이 나타나 제가 벌써 넘겼습니다. 이제 바로 값을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튿날 주인이 쥐를 잡으려다 세워놓은 약궤 뒤에서 종이로 싼 물건을 발견했다. 꺼내어 살펴보니 바로 어제의 그 인삼이었다. 주인이 깜짝 놀라 달문을 불러 ‘자네는 어째서 인삼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고 팔았다고 거짓말을 했는가?’라고 캐물었다. 달문이 ‘인삼은 제가 벌써 봤는데 갑자기 잃어버렸으니, 제가 모르는 일이라고 말씀드리면 주인께서 저를 도둑놈이라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대꾸했다. 그 말을 듣고서 주인은 부끄러워하며 꾸벅꾸벅 머리를 조아리며 미안하다고 했다.”
약국 주인은 잘 아는 부자와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달문을 칭찬했다. 달문의 행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안의 화젯거리가 됐고, 누구나 인정하는 의롭고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 됐다.
그 때문에 달문이 빚보증을 서주면 담보를 묻지 않고 천금(千金)이라도 당장 내줄 만큼 달문은 신용 그 자체였다.
쾌남아 달문은 소싯적에 거지들과 어울리면서 당시 하층 사회에서 크게 유행했던 각종 연희를 골고루 배웠다. 각종 연희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광대로 발돋움했다. 특기를 보인 연희는 만석중놀이와 철괴무, 팔풍무였다. 만석중놀이는 황진이의 미모에 빠져 파계했다는 지족(知足)선사를 조롱하는 내용의 탈춤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공연됐다. 철괴무(鐵拐舞)는 이철괴(李鐵拐)라는 기괴한 모습의 신선을 흉내내 추는 춤으로 산대놀이의 하나로 공연됐고, 팔풍무(八風舞)는 남사당놀이의 땅재주넘기와 유사한 놀이다.
홍신유는 그의 공연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팔풍무를 잘 추어 용이 꿈틀거리는 듯. 몸을 뒤로 젖혀 머리가 발에 닿으면 배꼽이 볼록 하늘로 솟네. 사지는 뼈가 없는 듯 어느새 몸을 돌려 뒤집더니 갑자기 가슴을 휙 바꿔 똑바로 섰다가 갑자기 거꾸러진다. 흘겨만 볼 뿐 똑바로 보는 법 없고, 비뚤어진 입에서는 온전한 발음 나오지 않네. 산대놀이 좌우(左右)부와 장안의 악소배(惡少輩)들이 달문이를 모셔다 상좌에 앉히고 귀신 모시듯 떠받드네.”
묘사된 것처럼 인기리에 공연되던 산대놀이나 남사당패 놀이에서 달문은 발군의 실력을 뽐냈다. 연희꾼들 사이에서 최고의 예능인으로 꼽혀 존경을 받았다. 이런 연희는 하층민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는데, 달문은 거지들과 어울리면서 빼어난 연희 재능을 습득할 수 있었다. 달문의 빼어난 실력은 한양을 벗어나 전국적인 명성을 누렸다. 달문이 호남과 영남의 여러 고을을 돌아다닐 때 가는 곳마다 인기를 얻었다. 달문의 경우를 놓고 보면, 당시 대중문화의 판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둥서방 하며 명기 휘어잡아
달문이 연희에서 최고라고 해도 그것이 바로 생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문에게 장사를 권했다. 달문은 일본과 중국에서 수입한 물건을 부잣집과 대갓집에 중개하고 흥정해 이문을 남기는 일을 했다. 그런 일을 하다 보니 몇 푼의 이문에 쫓아다니는 꼴이 서글퍼졌다. “사내 대장부가 마당에 노는 닭처럼 모이 한 알 다툴까보냐?” 하며 그 짓도 그만두고 유흥가로 진출했다. 달문은 기방에 들어가 기생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며 살았다. 이른바 조방(助幇)꾼이다. 조방꾼으로 등장한 달문을 기생들은 크게 반가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달문은 이미 명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 달문에게 기생들은 처음에는 으스대다 나중에는 애교로 바뀌고, 그 다음에는 고분고분해졌다. 달문은 이 바닥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장안의 명기(名妓)들이 제아무리 곱고 아름다워도 달문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한 푼어치 값도 나가지 않았다. 기방에서 달문이 지낸 모습을 <광문자전>에는 이렇게 소개했다.
“언젠가 한양의 논다 하는 자들이 당시 장안에서 검무와 미모로 이름난 운심(雲心)의 집을 찾았다. 마루 위에 술상을 차리고 가야금을 연주시키고 운심에게 춤을 추라고 했다. 그러나 도도한 운심은 일부러 지체하면서 좀체로 춤추려 하지 않았다. 그때 달문이 운심의 집에 들렀고, 술자리 상좌에 앉아 좌중을 압도하며 무릎장단을 맞추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자 운심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광문을 위해 검무를 추었다. 좌중의 모든 사람이 한껏 즐기고 친구가 되어 헤어졌다.”
조방꾼 달문이 기방을 주도한 솜씨와 위세를 잘 보여주는 사연이다. 이렇게 달문은 조방꾼으로 새벽에는 장군의 연회에 불려가고, 저녁에는 왕손의 잔치에 나갔다. 그때 달문이 기생과 함께 모셨던 인물 가운데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와 명재상 조현명이 들어 있다. 하지만 달문은 잔치 자리에서 먹다 남은 술과 식은 안주를 걷어 먹는 일에 처량한 마음이 들었다.
전국 순회공연하며 명성 절정
달문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누구에게도 간다온다 말 없이 한강으로 나갔다. 배를 타고 충주로 가서 문경새재를 넘어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동래로 갔다. 때는 영조 23년(1747)이었다. 마침 통신사가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 동래에 도착했을 때였다. 통신사 행렬에는 수많은 예능인이 끼어 있는데 달문을 보고 모두 환영했다. 동래 사람들도 달문의 명성을 전부터 들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몰려들어 자기들 집으로 데려가 안주를 잘 차려놓고 술을 대접했다. 그렇게 사람들과 어울려 익살과 해학의 솜씨를 발휘하며 반년을 즐겼다.
달문은 그런 생활에도 지루함과 싫증이 났다. 다시 방랑을 시작해 전라도와 충청도를 두루두루 노닐고 다시 대동강을 건너고 청천강을 거슬러 올라가 의주 통군정(統軍亭)에 올랐다. 통군정은 중국 사신이 왕래하는 요지라, 기생들이 늘 잔치를 벌이는 곳이었다. 달문은 또 장기를 발휘했다. ‘달문가’에는 의주에서 노는 모습을 “휘장 안에는 비단 치마 늘어앉고 촛불 아래 대피리 줄풍류 난만하다. 봉두난발에 귀밑머리 튀어나와 반절에 기운이 펄펄 넘치네. 뜰 앞에 온갖 춤 어우러지고 술잔을 받아 마셔 얼굴은 불그레하네”라고 묘사했다. 이후 백두산과 금강산까지 등반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구경꾼들로 북적였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바꾼다면, 달문은 전국 순회공연을 한 셈이다. 그러면서 더욱 전국적인 명성을 쌓았다. 명성이 높아지자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일이 발생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역모 사건에 그가 연루된 것이다. 영조 40년(1764) 달문이 58살 되던 해에 그는 역모 사건에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역모와 관련된 중죄인의 사건만을 기록한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과 <영조실록> <일성록>에 사건의 과정과 처리가 기록돼 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이태정(李太丁)이란 자가 경상도에서 중과 노비, 점쟁이 등 나라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역모를 꾀했는데 역모에 가담했던 자근만(者斤萬)이란 자가 관에 밀고했다. 주모자인 이태정이 달문의 동생이고, 자근만은 달문의 아들이라 자처해 사람들을 끌어모았기에 달문이 함께 체포됐다.
자근만이 달문의 아들을 사칭한 이유는 이렇다. 경상도 개녕에 있는 수다사에서 밥을 빌어먹던 자근만이 절의 스님들이 달문을 화제로 올려 이야기하면서 모두 그를 칭찬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보게 됐다. 자근만은 더 잘 얻어먹기 위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기가 바로 달문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스님들이 깜짝 놀라 자근만을 후하게 대접했다. 역모를 꾀하던 이태정은 달문의 동생을 사칭한 자근만이 후한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자기를 작은아버지라고 불러주면 함께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꾀어 달문의 동생을 사칭했다. 박지원도 이 사건의 내막을 기록하면서, 평생 총각으로 산 달문에게 동생과 아들이 나타나자 수상하게 여긴 자가 관에 고발해 사건이 드러났는데 나중에 대질심문을 하여 거짓임이 드러났다고 했다.
동생과 아들 사칭해 역모 꾀해
그해 4월17일 영조는 이태정을 사형에 처하고 달문은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데 인심을 미혹시켜 역적 이태정이 그 모습을 본뜨고 그 말투를 본뜨게 했다. 비록 본건에는 연루된 일이 없으나 사람 자체를 말하자면 난리의 근본이므로 변방에 유배 보낸다”고 하여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귀양 보냈다. <실록>에는 “달문이란 자는 무뢰한으로서 세상에 알려졌는데 머리가 반백인데도 총각의 모습을 꾸며 인심을 현혹하고 풍속을 어지럽혔다”고 기록돼 있다. 이에 나이가 많은데도 머리를 땋아 내린 자는 적발되는 대로 무겁게 다스리라고 전국에 공포했다고 한다. 달문의 인기를 노리고 달문의 스타일을 흉내내어 역모에 이용한 이 사건을 통해 달문의 인기가 어느 정도이고 얼마나 유행을 선도했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달문은 경성에 유배갔다가 다음해 9월5일에 방면됐다. 달문이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돌아오자 늙은이며 젊은이 모두 구경하는 바람에 한양의 저잣거리가 며칠 동안 텅 비었다고 한다. 달문의 인기는 그 사이에도 식지 않았다. 그러나 달문은 더 이상 옛날의 화려한 명성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후 그는 갑자기 한양에서 종적을 감췄다.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명성을 뒤로한 채 사라진 그를 사람들은 추억했다. 18세기 시정 사회에서 인기를 누리던 광대 달문의 인생은 시작도 끝도 종적을 알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