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륜동 일대에서 문묘 지키는 일 하던 정학수…
혜화동 골짜기 송시열 집터에 큰 서당 세우고 유생 끌어모아
▣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조선시대의 교육 1번지는 어디였을까? 두말할 나위 없이 현재의 서울 종로구 명륜동 일대였다. 이곳은 당시 반촌(泮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반(泮)이란 글자는 국학(國學)을 뜻하므로 현재의 대학가라는 말과 통한다.
유일한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이 있었고 공자를 제사하는 문묘(文廟)가 있었기에, 각종 경제적 혜택이 주어졌다. “반촌은 문묘의 행랑”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문묘에 적용되는 치외법권적 권위가 확대돼 이 일대는 형리가 마음대로 출입하며 범인을 색출하지도 못했다.
반촌, 교육특구의 지위와 명성
조선 500년 동안 성균관을 거쳐 과거에 급제하는 길이 거의 유일한 성공의 길이었다.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면, 공인받은 정규 코스를 거치지 않고 다른 길을 밟아 고관에 이르기 어려웠다. 그런 만큼 성균관과 과거급제는 개인과 집안의 성공을 보장하는 제도였고, 당연히 온갖 부패의 온상이었다. 그 실태의 구구한 내용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그냥 넘어가자. 어쨌든 성균관 일대는 조선시대 유일의 고등교육기관이 위치한 지역적 특성 때문에 교육특구로서 지위와 명성을 누렸다.
당연히 이곳은 훗날 이름을 천하에 떨친 수많은 인재들이 거쳐갔다. 그런데 18세기 후반에 인재들의 전당인 이 반촌에 성균관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사설 교육기관이 들어섰다. 송동(宋洞)이란 곳에 정학수(鄭學洙)란 사람이 서당을 차린 것이다.
송동은 당시 행정구역으로 숭교방(崇敎坊)에 속했고, 현재의 명륜동과 혜화동에 걸쳐 있다. 송동은 어떠한 곳인가? 효종 때의 정승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산 곳이라고 해서 송동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 옆에는 그의 정적인 윤휴(尹携)가 산 포동(浦洞)이 있었다. 우암 본인과 당시 사람들이 송동이란 지명을 사용했으므로, 우암이 살았기에 송동이라 부른다는 설은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어쨌든 18세기 이후로 송동은 우암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굳어졌다. 송동은 또 봄철 복숭아꽃을 감상하는 한양의 대표적 유원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조선 후기부터 구한말까지 친구들과 어울려서 이곳을 찾아와 노닐고 시를 남긴 상춘객이 부지기수다.
우암의 전설이 여전히 강하게 살아 있는 이 송동에 정학수란 인물이 개인 서당을 차린 것이다. 정학수는 대체 누구일까? 그에 관한 기록은 <추재기이>를 제외하면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자세한 사실을 파악하기 어렵다. 겨우 심로숭(沈魯崇)의 <산해필희>(山海筆戱)와 <승정원일기> 등을 참고해 대략만 짐작할 수 있다. 심로숭이 남긴 기록에는 그를 반촌 사람이라고도 했고, 또 수복(守僕)이었다고도 했다. 성균관 수복은 바로 문묘를 지키는 노비로서 제사와 청소 따위의 일을 맡은 사람이었다. 신분은 노비이지만 가장 낮은 직급의 관원이었다. 심로숭의 기록은 <승정원일기>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정조 원년에 역적 토벌을 상소한 성균관 전복(典僕) 100여 명의 이름 가운데 정학수의 이름이 포함돼 있다. 이해 겨울에 다시 반예(泮隸)인 정학수를 감옥에서 방송(放送)한다고 나와 있다. 전복과 반예는 수복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 정학수가 반촌에 사는 사람을 위해 서당을 열었다. 문제는 그 규모가 일반 서당과는 달랐다는 점이다.
<추재기이>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성균관 동쪽은 바로 송동(宋洞)이다. 이 동네에는 꽃과 나무가 매우 많은데 그 가운데 강당(講堂)이 드높게 서 있다. 바로 정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곳이다. 아침저녁으로 경쇠를 울려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불러모으고 흩어지게 하였다.”
경치가 아름다운 혜화동 골짜기에 정학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큰 규모의 강당을 세웠고,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어 그는 아예 경쇠를 울려서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려야 했다. 마치 현재의 학교에서 종이나 벨을 울리는 것과 비슷하다. 학생 수가 많지 않으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정학수의 서당은 꽤 큰 규모로 학교나 학원의 체제를 갖춘 번듯한 교육기관이었으리라. 보통 서당은 개인 집 사랑방에 여는 소규모 학교인 반면, 정학수는 집을 번듯하게 크게 짓고서 많은 학생들을 받았다. 강당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학수가 세운 강당 건물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었을까? 종로구에 있는 서울과학고등학교 서쪽 명륜동 1가 2-24번지 일대에는 거대한 암벽이 있다. 그 바위 위에 ‘증주벽립’(曾朱壁立)이란 우암 친필 글씨가 각자(刻字)돼 있다. 증자(曾子)와 주자(朱子)처럼 우뚝 서겠다는 의미의 글씨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호이다. 이 글씨는 그 아래에 우암의 집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바로 우암의 글씨가 있는 이 바위 아래에 정학수가 강당을 세웠다.
서당터에 보성고·서울과학고 들어서
그런 추정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20년 넘게 성균관에서 공부했고, 나중에 그 체험을 220수의 ‘반중잡영’(泮中雜詠)이란 연작시로 남긴 윤기(尹愭·1741~1826)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반수(泮水)의 동북쪽에는 이른바 송동이란 곳이 있다. 조용하고도 경치가 빼어나다. 흰 바위가 깎아지른 듯이 솟아 있고 여기에 ‘증주벽립’이란 큰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반촌 사람인 정조윤(鄭祚胤)이 그 아래에 집을 짓고 또 서당(書堂)을 만들어서 학도들을 교육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가서 노닐었다.”
이 글에서 말하는 내용은 정학수의 활동과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이러한 묘사에 부합하는 사람으로 정학수를 제외하곤 생각하기 어렵다. 정조윤의 이름만 정학수로 바꾸면 된다. 정조윤은 정학수의 자이거나 이름을 잘못 들어 오기한 것이리라. 윤기가 성균관에 재학할 때의 일임을 감안하고, 정학수를 찾아간 또 다른 시인 신광하(申光河·1729~96)의 생존 연대와 비교해보면, 바위 아래에 서당을 짓고 교육활동을 한 사람은 동일인이다. 이 두 시인이 정학수를 만난 연대는 1770~80년대일 것이다.
‘증주벽립’ 각자가 있는 바위 아래에 서당을 지었음을 윤기의 기록은 확인해준다. 정학수는 바로 우암 송시열의 집터에 자신의 집과 서당을 세웠다. 그런데 정학수가 서당을 세웠던 곳에는 1925년에 보성고등학교가 건립됐고, 1987년 보성고가 방이동으로 이전한 뒤에는 서울과학고등학교가 들어섰다. 공교롭게도 그가 서당을 세운 곳이 근대 이후에는 명문 고등학교의 학교 부지로 계속 사용됐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매우 흥미롭다.
정학수는 신분이 노비였다. 수복이 일반 노비와는 처지가 다르다고는 해도, 아무리 우대해봐야 일반 사대부와 동등하지는 않다. 양반 사대부가 아니었지만 정학수는 당시에 교육자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조수삼은 그를 두고 “그의 문하에서 학업을 성취한 자가 많아 반촌 사람들이 그를 정 선생이라고 칭송하였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을 비롯해 전국에서 사설 서당이 일반 백성 교육을 담당하며 급속도로 확산됐다. 대부분 훈장이 개인 자격으로 설립했다. 서울에서는 중인 계급들이 이러한 교육에 열정을 보여 유명한 훈장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몽리(李夢鯉)나 신의칙(申矣則) 같은 중인 계층 인물이 정학수 당대에 훈장으로 유명했다. 이들은 학도들이 예법을 잘 지키고 스승을 잘 따르도록 유도한 훌륭한 스승으로 인정받았다. 이런 사설 서당은 교육 기회가 미치지 않는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교육을 제공했다. 정학수는 서울의 수많은 서당 가운데서도 규모가 가장 큰 서당을 운영하는 훈장이었다고 추정된다.
정학수가 신분이 낮고 서당의 훈장에 불과했으나 많은 학생을 가르치고 규모가 큰 서당을 유지할 정도면, 당시 사대부와 긴밀한 교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런 증거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 가운데 앞서 언급한 윤기가 있고, 신광하란 시인이 있으며, 또 정학수의 위상을 잘 이해한 사람에 심로숭이 있다.
윤기가 성균관에서 지내다가 한가한 틈을 타서 친구들과 정학수 서당을 찾아가 시를 지은 것처럼, 신광하도 성균관 재학 중에 정학수 서당을 찾았다. 저명한 시인인 신광수의 아우이자 그 자신도 유명한 시인인 신광하는 여가를 이용해 정학수의 서재를 찾아가 이런 시를 읊었다.
잔설 남은 솔 숲길에 오솔길 나뉘고
서재의 경전 읽는 소리 멀리서도 크게 들리네.
주인은 서둘러 뛰어나와 계곡으로 내려오고
제자들은 문을 열고 흰 구름을 쓸고 있네.
송동(宋洞)을 이젠 정곡(鄭谷)이라 불러도 무방하리
곽태(郭泰) 같은 은사라야 모군(茅君) 같은 신선을 만나지.
산집에 봄빛이 먼저 찾아들지 않으련만
복사꽃 살구꽃 천 그루는 벌써 피려 하네.
멀리서도 서당방 글 읽는 소리가 들리고, 정학수가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며, 제자들이 숲에 낀 흰 구름 속에서 빗질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산비탈에 있는 옛날의 서당방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시이다. 그 다음, 이곳이 과거에는 송시열이 살았기에 송동이라 불렸으나, 이제는 정학수가 서당을 지어 교육하므로 정곡으로 불러도 좋겠다고 했다. 이 골짜기의 상징이 우암에서 정학수로 바뀌었다고 한 것이다. 자신과 정학수를 중국의 유명한 은사와 신선으로 견주어보는 호기도 부렸다.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쳐도, 교육자로서 정학수의 위상을 대단히 크게 평가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시가 나오기 어렵다.
정학수 예찬하다 성균관 쫓겨나
그런데 신광하가 쓴 이 시가 큰 문제를 일으켰다. 성균관의 서재(西齋)에 기숙하는 유생들이 이 시를 보고서 우암을 모욕했다고 하여 신광하를 쫓아낸 사건이 일어났다. 송동을 정곡으로 바꿔도 되겠다는 시구가 우암을 모욕했다고 노론 학생들은 느꼈다. 당시 성균관에서는 노론은 서재에, 소론과 기타 당파 학생은 동재에 기숙했다. 신광하는 남인이었다. 당시 성균관의 여론을 주도하던 노론 학생들이 그를 성토해 성균관에서 축출했다. 시 한 구절 잘못 써서 퇴학당한 것이다.
쫓겨난 신광하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강 나루터에 이르렀다. 마침 뱃사공을 송가(宋哥)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신광하가 뱃사공에게 물었다.
“네 성이 무엇이냐?”
“송가입니다.”
그러자 신광하가 대뜸 그를 꾸짖었다.
“내가 송이라는 글자 하나를 잘못 시에 써서 성균관에서 쫓겨났거늘, 네가 감히 우암의 성을 성으로 썼단 말이냐?”
그때 배 안에 노론 출신 진사가 있었다. 신광하는 이렇게 뱃사공을 꾸짖어서 분풀이를 했다.
위의 일화는 심로숭의 문집에 나온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송동이란 지명이 원체 자랑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하필이면 다른 학자도 아닌 성균관 수복이라는 미천한 신분의 서당 훈장을 치켜세워서 정곡이라 바꿔 불렀으니 화를 단단히 돋울 만도 했다. 그러나 심로숭은 송동이니 정곡이니 하는 지명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지은 시에서 선현을 모욕할 의도를 담지는 않았을 텐데 노론 선비들이 과민반응을 보였다고 보았다. 결국 신광하의 축출은 역으로 우암을 욕보이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이런 일화도 정학수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서당 훈장이었음을 넌지시 말해준다.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정학수는 한 시대 최고의 학원 강사였다고 평가하면 지나친 것일까? 그런 교육자에게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좋은 평가는커녕 아무런 언급도 남기지 않았다. 같은 수준으로 인정하기를 꺼렸다. 조수삼이 교육자로서 그의 인물됨을 예찬한 다음 시가 거의 전부라고 해야 하리라.
꽃과 나무 아래
강당으로 가는 길이 나 있거니
저녁 되고 아침 되면
경쇠 소리 들으며 학생들 오가네.
사방의 훌륭한 인재를
교육하는 분은 누구인가?
품이 넓은 두루마기에 큰 띠 두른
정 선생이라네.
박뱁새, 그의 입은 오케스트라
절묘한 경지, 손님들이 도망가려 하다
구기란 입으로 하는 기예로서,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목소리와 새나 짐승 울음을 비롯한 각종 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규경은 이를 ‘성희’(聲戱)라고 불렀다. 현재에도 ‘성대모사’라는 이름으로 연예인들이 이런 재주를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구기는 성대모사의 초보적 재주가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공연하는 전문적인 기예다. 조선조 전 기간을 통해 이러한 구기가 연행됐으나,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널리 공연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다. 조선 초기의 야사인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함북간(咸北間)과 대모지(大毛知), 불만(佛萬)이란 예능인의 구기 재주가 소개됐다. 그 가운데 함북간의 재능은 이렇다.
“우리 이웃에 함경도에서 온 함북간이란 자가 있었다. 피리도 제법 불고 이야기와 광대놀이를 잘했다. 남들의 생김새와 행동을 보기만 하면 바로 흉내를 냈는데 누가 진짜고 가짜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또 주둥이를 오므려 각종 피리 소리를 냈는데 소리가 몹시 웅장하여 몇 리까지 퍼졌다. 비파와 거문고 소리도 입에서 나오면 가락이 잘 어울렸다. 궁궐에 들어가기만 하면 상을 많이 받았다.”
함북간은 단순한 성대모사에 그치지 않고 음악까지 입으로 연주한 수준이었다. 궁궐까지 들어가 상을 받았으므로 임금 앞에서 공연한 인기인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구기는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널리 성행해 근대까지 각종 무대에서 꾸준히 연행됐다. 중국의 구기에 대해 서울대 이창숙 교수가 ‘만뢰(萬籟 )를 울려 내는 입의 재주-구기(口技)’(<문헌과해석> 21호)에서 상세히 설명했다. 이 교수는 구기를 요령 있게 설명한 <청패유초>(淸稗類鈔)의 글을 소개했다.
“구기는 백희(百戱)의 일종으로 구희(口戱)라고도 한다. 동시에 각종 음향과 여러 사람의 목소리, 조수의 울음소리를 내어 청중을 즐겁게 한다. 세상에서는 격벽희(隔璧戱) 또는 초성(肖聲), 상성(相聲), 상성(象聲), 상성(像聲)이라고도 부른다. 팔선탁을 가로로 놓고 장막을 둘러친 다음 그 속에 한 사람이 숨어서 오직 부채 한 자루, 나무토막 하나만 사용한다. 듣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한 사람이 하는 줄 모른다.”
이 글을 보면, 구기는 일정한 형식을 갖춰 공연됐다. 많지는 않지만 절묘한 경지에 도달한 예능인의 공연 실례가 몇 가지 전한다. 그 하나가 명말청초 사람 장조(張潮)가 편찬한 <우초신지>(虞初新志) 1권에 실려 있다. 이 책은 조선에서도 널리 읽혔다. 그 글은 바로 임사환(林嗣環)이 쓴 ‘추성시자서’(秋聲詩自序)다.
“서울에 구기를 잘하는 자가 있습니다. 손님을 모아 잔치를 열어 대청의 동북쪽 구석에 팔 척 병풍을 펴고 구기 하는 사람이 병풍 안에 앉았는데, 탁자 하나, 의자 하나, 부채 하나, 무척 하나뿐이었습니다. 많은 손님들이 둘러앉고, 잠시 후 병풍 안에서 무척을 두 번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자 모두들 조용하여 떠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멀리 깊숙한 골목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자 아낙이 놀라 깨어 하품을 하고는 사내를 흔들어 방사(房事)를 요구합니다. 사내는 잠결에 중얼거리며 처음에는 시큰둥합니다. 아낙이 계속 흔들어 깨우자 둘의 말이 점차 뒤섞이더니 침상이 삐꺽거립니다. 이윽고 아이가 깨어 크게 울자 사내가 아낙에게 아이를 달래라고 합니다. 젖을 물리자 아이는 젖을 물고 울고 아낙은 아이를 다독이며 자장자장 달랩니다. (중략) 별안간 한 사람이 ‘불이야!’라고 크게 외치자 사내가 일어나 크게 외치고, 아낙도 일어나 크게 외치고, 두 아이가 일제히 웁니다. 갑자기 수백 수천 명이 크게 외치며, 수백 수천 아이가 울며, 수백 수천 마리 개가 짖습니다. 그사이에 집을 끌어당겨 무너뜨리는 소리, 불이 터지는 소리, 휭휭 바람 소리가 수백 수천 함께 일어납니다. 또 수백 수천의 살려달라는 소리, 집이 흔들리는 소리, 물건 빼앗는 소리, 물 뿌리는 소리가 섞여 나옵니다. (중략) 그러자 손님들은 낯빛이 변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떨쳐 팔뚝을 내고 두 다리를 떨며 모두들 먼저 나가려고 서두릅니다. 문득 무척을 한 번 내려치자 모든 소리가 끊기고, 병풍을 걷자 사람 하나, 탁자 하나, 의자 하나, 부채 하나, 무척 하나뿐이었습니다.”
황새 형님과 뱁새 아우
절묘한 구기를 빼어난 문장으로 묘사한 명문이다. 이런 정도까지 구기의 기예가 가능한지 나로서는 의문이 들 만큼 환상적이다. 어쨌든 명청 시대에 구기는 매우 인기 있는 공연의 하나로 정착됐다.
조선 후기에 구기가 얼마나 성행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여러 가지 정황과 기록을 통해 그런 현상을 추정할 수 있다. 구기가 성행하자 빼어난 구기 기예를 발휘해 명성이 난 사람들이 등장했다. 우리가 살펴볼 박뱁새가 그런 유명한 예능인의 한 사람이다. <추재기이>에는 박뱁새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뱁새의 형은 ‘황새장사’라고 불리니 넓적다리가 길고 힘이 세기 때문이다. 박뱁새는 신장이 채 세 자가 되지 않고 얼굴 크기는 작기가 대여섯 살 난 아이와 같기 때문에 ‘뱁새’라고 불린다. 뱁새는 구기를 잘해서 입으로는 생황과 퉁소를 불고, 코로는 거문고와 비파 음악을 연주한다. 동시에 함께 연주하되 소리가 즐비하고, 화음을 잘 이루므로 세상에서 아주 빼어난 음악대라고 평한다.”
뱁새라는 이름의 키 작은 사내가 어린아이 같은 용모를 했고, 입과 코로 음악을 연주해 인기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박뱁새로만 부른 것은 뱁새가 그의 별명이자 예명임을 말한다. 박뱁새가 지닌 구기의 특징은 새나 사람의 소리를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코와 입으로 동시에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그 음악 소리가 화음을 잘 이뤄 사람들은 매우 빼어난 음악대로 평가할 정도였다.
조수삼은 박뱁새의 구기를 더 이상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특별히 그는 뱁새의 사연에 그의 형을 끼워넣었다. 뱁새와 달리 형은 키가 커서 황새장사, 곧 관협(鸛俠)이라 불렸다. 키가 껑충 큰 한량이었음을 표현한 말이다. 생김새가 너무도 다른 형제는 일반 평민들처럼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기보다는 아무래도 기방 주변에서 생활했던 것 같다. 도회지 기방에서 뱁새는 아주 인기 있는 공연의 하나인 구기를 공연하며 생활했고, 거기에서 형은 ‘황새’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그의 보디가드 겸 후원자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추정은 박뱁새를 묘사한 조수삼의 다음 시에서도 엿보인다.
노래도 아니요 휘파람도 아닌 음악이
구름 위 하늘까지 솟구치네.
코에서는 거문고 비파 소리
입에서는 생황과 퉁소 소리.
협객 소굴의 아름다운 음악에는
우스개 이야기가 따라다니니
“형님은 황새
아우는 뱁새라네.”
시의 후반부에 묘사하듯이 이들의 활동 무대는 ‘협객의 소굴’(俠藪)이고, 두 형제는 사람들에게 독특한 대조를 보이는 형제로 소문이 나 있었다. 형까지 음악 공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꺼꾸리’와 ‘장다리’처럼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하는 연출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도 있다. 정통적인 음악과는 달리 이러한 구기의 음악 연주는 사람들의 웃음을 동반하는 대중적 요소를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박뱁새는 구기의 예능을 공연함으로써 생활하는 전문인이었다. 다시 말해 취미로 구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기를 전문적 예능으로 공연하고 돈을 버는 직업인이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이러한 전문적 예능인의 활동 무대가 도회지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또 하나의 좋은 사례가 바로 군할(君瞎)이라는 구기 전문인이다. 그에 관한 사연은 필자가 3년 전에 발굴해 소개한 <녹파잡기>(綠波雜記)란 책에 전한다.
“군할이라 하는 사람은 퉁소를 잘 분다. 입에 닿는 대로 불어도 자연스럽게 음률에 들어맞는다. 고금의 가곡을 불기만 하면 저마다 대단히 정교하고 오묘하다. 또 온갖 새 울음소리를 흉내내는데 온 좌석이 그 소리를 듣고 뒤로 자빠진다. 과부의 곡소리를 흉내내면 애원하는 소리가 처절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떨구게 만든다. 개성과 평양 사이를 오가는데 다투어 그를 초치하여 거의 비어 있는 날이 없다. 모두들 군할이 드물게 찾아오는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
일제까지 명맥 유지
1810~20년대 평양의 기방 풍경을 묘사하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군할이란 이름으로 보아 장님인 듯하고, 박뱁새와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박뱁새가 한양을 주 활동 무대로 삼았다면, 군할은 평양과 개성을 주 활동 무대로 삼았다. 군할은 퉁소를 연주하는 음악가이지만 그의 특기는 구기에 있었다. 박뱁새와는 달리 그는 온갖 새 울음소리를 흉내내고 과부의 곡소리를 흉내내는 성대모사를 주특기로 했다. 군할의 빼어난 구기 솜씨에 반해서 평양과 개성의 기방에서는 번갈아 그를 초청해 공연하게 했다. 공연 일자가 꽉 차서 하루도 빈 날이 없었다고 하니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만하다.
이렇게 기방을 무대로 구기 공연을 하는 직업적 예능인은 정통 예술인과는 구별되는 대중적 민간예술인으로서 대중의 기호에 맞는 공연을 했다. 한편, 이들 직업인과는 달리 취미로 구기를 하는 인물들도 여러 기록에 등장한다. 구기가 흥미로운 취미로 널리 퍼진 당시 사회상을 엿보게 한다. 그 가운데 하나의 사례가 성호 이익 선생의 조카인 이철환이 쓴 <상산삼매>(象山三昧)란 책에 등장한다.
이철환은 1753년에 예산의 가야산에 올랐을 때 절에서 회잠(會岑)이라는 17살의 사미승이 구기의 재능을 펼치는 장면을 목도했다. 회잠이 입술을 모아 입김을 불어 나각(螺角)과 유사한 소리를 잘 냈고, 자연스럽고 교묘한 소리가 법당을 가득 메웠다고 전했다. 그는 전에도 어떤 선비가 입으로 거문고 음악을 멋지게 연주한다는 소문을 듣고 꼭 만나려 했다고 밝혔다.
구기를 천박한 기술로 보는 시각이 없이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나 인기를 구가한 구기는 20세기 들어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 사정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만 해도 전문 구기 연예인은 명맥을 유지했다. 박춘재(1881~1950)라는 경기와 서도 소리를 잘하는 명창이 하나의 사례이다. 그는 한국 최초로 레코드를 취입한 이요, 일제 초엽의 저명한 음악인이다. 그리고 이른바 ‘재담소리’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이 재담소리는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됐다. 그가 1910년대 초반에 녹음한 레코드에는 <각색 장사치 흉내>나 <각색 장님 흉내> <개넋두리> 같은 레퍼토리가 있는데 이는 재담소리의 일종이면서 실제 내용을 보면 구기 공연이다. 앞서 군할이 과부의 곡소리를 흉내낸 기능이나 다를 바 없다. 박춘재는 박뱁새와 군할의 뒤를 화려하게 장식한 마지막 구기 예술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황혼 무렵에 미인이 있답니다
초보적 연구도 한 건 없어
100년 이전 조선시대에는 성의 문화가 기방(妓房)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관청에 소속된 관기와 관의 예속을 벗어난 사창(私娼)들이 기방에서 성과 술과 음악과 춤을 팔았다. 도회지의 부유한 남자들은 돈을 싸들고 가서 기생들이 제공하는 성과 놀이를 샀다.
이른바 색주가에서는 남녀 간에 성을 사고파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에는 큰 도회지마다 많은 색주가와 기생들이 존재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곳에는 돈이 모여들기 때문에 돈을 물 쓰듯 쓰는 곳이라 하여 ‘소금와자’(銷金鍋子)로 불렸다. 그렇기 때문에 색주가에는 기생에게 빌붙어 사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기생의 뒤를 보아주고 행세하는 기부(妓夫)를 비롯해 기생을 관리하는 기생어멈 가모(假母), 그리고 밥을 해주는 찬비나 잔심부름을 하는 행랑아범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기생을 찾아오는 오입쟁이를 기생에게 연결해주는 거간꾼이 있었다. 그런 남자를 조선시대에는 ‘조방꾼’이라 불렀다. 사전에는 창루 등에서 남녀 사이의 일을 주선하고 잔심부름 따위를 하는 사람을 조방꾼이라고 정의했다. 그런 제도가 사라졌으므로 지금은 이 말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조방꾼에 해당하는 말을 흔히 사용하는 말에서 찾아본다면 ‘뚜쟁이’라는 어휘가 그에 가깝다.
조방꾼이 행하는 일이 그리 떳떳하지 못하고 대단할 것이 없으므로 이들의 존재가 문헌에 나타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 중에 겨우 몇 가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연암 박지원의 저명한 작품인 <광문전>에 등장하는 광문이 이러한 조방꾼의 성격도 지니고 있어 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또 연암의 ‘광문전 뒤에 쓴다’(書廣文傳後)란 글에 소아기(小阿其)란 이름의 기생과 최박만(崔撲滿)이란 이름의 조방꾼이 당시 한양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린다고 밝혔다. 기생이 높은 명성을 누리는 것은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으나, 조방꾼이 큰 명성을 누린다고 병칭된 것이 주목을 요한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오입쟁이와 기생 양편에서 거간하는 조방꾼 역할의 중요성 때문이 아닐까? 음지에서 암약하는 기방의 속성상 그들 사이를 매개하는 거간꾼의 활약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당시 기방 사회에서 조방꾼의 존재는 예상보다 비중이 크고 힘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조방꾼의 기능과 위상에 대해서는 초보적 연구가 한 건도 없다.
여하튼 한양 최고의 조방꾼이라고 연암의 글에서 분명히 제시된 최박만의 이름이 다른 저작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가 어떠한 이유로 유명한지 알 수 없다.
입이 무거워 ‘벙어리’라오
조방꾼을 박지원은 ‘조방’(助房)이라 표현했다. 일반적으로는 ‘조방’(助幇)이라 쓴다. 그런데 이 표현을 ‘방한’(幇閒)이라 쓸 수도 있다. 조방꾼을 묘사한 <추재기이>에서는 이 표현을 썼다. 본래 이 어휘는 중국에서 사용해 봉건시대에 관료나 부호들의 보살핌을 받는 식객(食客)을 지칭한다. 부잣집 주인들이 바둑을 두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릴 때 도와줘 주인의 여가생활에 동반자 노릇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다. ‘방한’은 원대 이래의 희곡에서 자주 등장한다. 저명한 소설가 루쉰(魯迅)은 이렇게 권력자와 부자들의 여가에 봉사해 먹고사는 부패한 문인을 분석한 글을 쓰기도 했다.
<추재기이>에는 우연찮게도 이런 ‘방한’으로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벙어리 방한(啞幇閒)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방한계의 우두머리(幇閒袖領) 이중배(李仲培)다. 이렇게 조수삼은 방한이란 용어를 썼지만 실제론 조방꾼이다. 이들의 행적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먼저 벙어리 방한부터 살펴보자. 그는 ‘벙어리 조방꾼’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성은 최씨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벙어리였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벙어리이기는커녕 그는 용모가 준수하고 말을 매우 잘하는 사람이었다. 최는 기생과 오입쟁이를 맺어주는 능란한 재주를 지녔는데, 둘 사이의 은밀한 관계에 대해 절대 비밀을 유지했다. 그런 사연으로 그의 고객과 기생들에게 ‘벙어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는 한두 곳의 기방에 매여 일하는 자가 아니라 수많은 관기와 사창을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이 바닥의 우두머리였다. 기생들의 정보를 손아귀에 쥐고서 그들을 돈이 많은 세도가와 부잣집 자제들과 중매해주는 일을 전문적으로 도맡아 했다. 조수삼은 그가 “날마다 세도가와 부잣집 자제들을 불러모아 꽃에 취하고 버들에 드러눕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가 조방꾼 세계의 우두머리 행세를 하며 기방을 장악한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일종의 사업 방침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남녀 간에 관계를 맺어주려고 하면 그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누가 누구와 하룻밤을 보냈는지 그 비밀스런 관계를 잘 아는 최씨는 그런 사실을 입을 봉했다. 비밀을 지킨다는 신의를 깨뜨리지 않았다. 그는 한평생 이 원칙을 버린 일이 없었다. 비밀이 보장된 만남을 주선하는 그를 바람기 있는 남자와 기생들은 아끼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최씨는 아예 ‘벙어리 조방꾼’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것이다.
10명에게 하룻밤을 약속하다
전문적인 조방꾼으로서 최씨는 큰 세력을 갖고 꽤 큰 명성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 덕분에 많은 돈을 벌었다. 그 자신이 그렇게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손님들이 제공하는 재물을 받아 입는 옷과 쓰는 재물이 그의 고객인 부잣집 자제들과 차이가 없었다.
그가 고객을 기생에게 데려가는 구체적인 방법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조수삼이 그를 평가한 다음 시에서 짐작할 뿐이다.
“황혼 무렵에 미인이 있답니다!” 말하려는 듯
손가락을 해처럼 오므리고 시선은 서쪽으로 돌리네.
사람을 만나 홀로 꽃가지를 잡고 웃으니
젊은이들 앞 다투어 글자 없는 수수께끼를 짐작하네.
그가 암시를 하듯이 손가락과 꽃을 이용해 의중을 묻는 것이 나온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무슨 암호처럼 남녀 간의 약속을 맺어주기 위한 신호로 보낸다. 말로 거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시선을 피해 고객과 약속하는 신호를 보내는 장면을 제시했다. 조방꾼 최씨는 이렇게 고객과의 비밀 약속을 잘 지켜준 것을 무기로 하여 당대에 명성을 누렸다.
조수삼은 또 한 사람의 조방꾼을 주목했다. 이번에는 손님을 농락하는 데 일가를 이룬 조방꾼이었다. 그가 바로 이중배다. 그 역시 조방꾼 세계에서 우두머리로 행세하던 사람이었다. 조수삼은 그의 다른 재능이나 특징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가 언젠가 벌인 일종의 사기 사건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했다.
이중배는 언젠가 자신과 거래를 하던 부잣집 자제에게 이런 통지를 했다.
“오늘 밤에 국색(國色)이 한 사람 나타났습니다. 오늘이야말로 그런 미인과 사랑을 나눌 절호의 기회입지요. 그러니 미인을 맞이하는 비용 1천전(錢)을 장만하여 옵시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통지를 한 명이 아니라 열 명의 손님에게 따로따로 보내어 약속한 다음 한 사람당 1천전씩 받아냈다는 점이다. 1천전이면 10냥으로 당시에는 매우 큰돈이었다. 각자 따로 약속을 정했기 때문에 서로들 눈치를 채지 못하고 천하절색과 밤을 보낼 단꿈을 꾸었다.
아홉은 가지 않고, 꽃그림자만 어른
약속한 밤이 되어 열 명의 오입쟁이들이 하나둘 약속한 기생집에 이르렀다. 기름을 바른 창문은 깨끗하고, 창호지를 통해 새어나오는 등불빛은 환했다. 창문에는 고운 그림자가 내비쳤다. 무려 10냥의 돈을 선불로 내고 약속한 절세미인이 저 방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제각각 약속하고 찾아온 사람들은 모두 그 기생과 보낼 밤을 떠올리며 조바심을 냈다. 그러나 자리를 함께하고 기다리는 나머지 아홉 놈의 손님이 사라져야 가능하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면서 열 명의 남자가 제각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저 아홉 놈이 어째서 지금 와가지고 이 어르신의 일을 망쳐놓는단 말이냐!’
그런 얄궂은 상황에서 이중배는 혀를 끌끌 차면서 낭패라는 듯이 욕지거리를 해대며 좌불안석 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뻔질나게 했다. 빨리 약속한 만남을 이뤄줘야겠는데 손님들이 공교롭게 아홉 명이나 찾아와서 훼방을 놓고 있어 미치겠다는 투였다. 그런 이중배의 행동을 보고서 열 명의 손님은 이중배도 나머지 아홉 놈을 미워하고 있다고 하나같이 생각했다.
그렇게 제각기 아홉 놈이 빨리 자리를 떠야 일이 성사될 거라고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새벽닭이 울고 밤도 다 새버렸다. 천하절색과의 멋진 하룻밤을 고대하던 남자들은 기대가 물거품이 돼버렸다. 돈 10냥만 날려버린 꼴이었다.
먼동이 터오자 이중배는 자신도 무진 애를 썼지만 눈앞에서 너희도 확인한 것처럼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투였다. 자기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막걸리를 내오고 간단한 안주를 차려서 목을 축이게 하고는 손사래를 쳐서 날이 밝았으니 어서 돌아가라고 하여 보냈다. 문을 나서고서도 열 명의 사내는 이중배의 술책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여전히 눈치채지 못했다.
이중배는 돈 몇 푼 안 들이고 사내 한 명당 10냥씩 100냥이라는 거금을 단박에 손에 쥐었다. 창문 안에 앉혀놓은 여자가 천하절색인지 천하박색인지는 누구도 확인하지 못했다. 이런 맹랑한 사기를 쳤음에도 사기를 당한 자들은 자기가 당했는지조차도 몰랐다.
조수삼은 이런 이중배의 사기 사건을 이렇게 시로 묘사했다.
열 놈의 오입쟁이가 붙어앉아 돌아가지 않을 때
주렴 너머 꽃그림자는 언뜻언뜻 어른거리네.
그들에게 그래도 박주산채일망정 주어 보냈다는,
이중배의 속임수가 지금껏 전해오네.
열 명의 오입쟁이가 앉아서 저쪽의 어른거리는 미인의 그림자를 곁눈질하며 조바심을 내는 장면의 표현이 재미있다. 이 사기 사건에서 하이라이트 중 하나가 바로 막걸리에 변변찮은 안주를 내놓아 목을 축이게 하는 장면이다. 끝까지 오입쟁이를 놀려먹인 대목으로 완벽한 사기를 멋지게 끝맺는 장면이다. 조수삼은 인상적인 두 장면을 시로 묘사해놓았다.
이 이야기는 조방꾼이 기생과 오입쟁이를 중매하면서 양쪽을 감쪽같이 속여 잇속을 차린 것으로 당시에는 꽤 인구에 회자된 사건이었으리라. 동시에 여러 명을 상대로 하여 사기를 치는 이러한 방법이 당시에는 고단수의 사기로 알려졌다.
뒷골목의 명성에 힘입어 당당히
이러한 사기 사건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영조 때의 유명한 호걸인 김억(金檍)도 이런 술수를 부린 적이 있다. 그는 큰 부자인데다 천성이 호방하고 사치스러워 음악과 여색을 마음껏 즐겼다. 그는 늘 색깔이 화려한 비단옷을 휘황찬란하게 차려입고 다녔다. 칼 수집 벽(癖)이 있는 그는 칼을 구슬과 자개로 꾸며서 방과 장롱에 죽 걸어놓고는 날마다 한 개씩 바꿔 찼다. 칼이 많아서 1년을 하나씩 차도 다 차지 못했다.
그런 김억에게는 총애하는 기생 여덟 명이 있었다. 그들끼리는 서로의 존재를 모르게 했다. 어느 날 밤에 김억은 그 기생 여덟을 함께 불러 술을 마셨다. 기생들은 제각기 ‘김억이 총애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라고 생각해 여덟 명이 동석하고서도 투기할 줄을 몰랐다.
김억이 쓴 권모술수가 앞에서 살펴본 이중배의 사기와 방식이 똑같다. 조방꾼은 직업상 이러한 술수의 발휘에 노련할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이러한 허랑방탕한 인간까지도 도시 뒷골목의 명성에 힘입어 문사들의 붓에 당당히 오르게 되었다.
도덕을 점치는 소경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상황이 어땠을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점치는 행위나 점쟁이에 관한 기록이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 유가의 논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메스를 가하는 교조적 유학자가 넘치던 조선 사회에서 미신을 전파하는 불온한 자를 기록하거나 우호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그래도 귀신같이 맞히는 점쟁이의 도움을 받은 선비들이 간혹 있어서 그들의 이름과 행적이 문헌에 종종 나타난다.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황해도 봉산군의 장님 점쟁이 유운태(劉雲台)도 그런 사례의 하나다. 그는 조선시대 족집게 점쟁이의 계보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명사였다. 그만큼 선비들이 관심을 기울인 점쟁이도 없다. 맹인 점쟁이 사회의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했으므로 그의 존재는 문사들의 기록에도, 민중의 구비(口碑)에도 살아 있다.
19세기의 위대한 학자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맹인 점쟁이의 현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나라 맹인(盲人)은 황해도 봉산(鳳山)과 황주(黃州) 사이에서 많이 배출된다. 해서 지역은 땅이 꺼지는 재변이 있어서 맹인이 많다고 세상에는 전하는데, 그 말이 틀리지 않다. 맹인은 사(士)·농(農)·공(工)·상(商) 어디에도 끼지 못하므로 의식(衣食)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반드시 주역 점을 배우고, 겸해서 경문(經文)을 외어 생계를 꾸려간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맹인 점쟁이들은 홍계관(洪繼寬)·유은태(劉殷泰)·함순명(咸順命)·합천(陜川)의 맹인을 그들 직업의 할아버지로 여긴다.”
조선조 맹인 점쟁이의 유래와 역사, 현황 그리고 사계의 최고 권위자가 누구였는지를 잘 요약했다. 전문 분야의 역사를 꿰고 있는 이규경의 언급이므로 믿을 만하다. 그가 언급한 점쟁이의 사연은 하나하나가 아주 흥미롭다. 그중에서 세조 때 인물인 홍계관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해 지금도 아이들에게까지 잘 알려졌다. 그는 재능을 시험하려 한 임금의 앞에서 쥐 한 마리를 다섯 마리라고 했다. 임금을 기롱한 죄로 처형당할 찰나 쥐의 배를 갈라보자고 하여 배에서 새끼 네 마리가 나와 화를 모면하고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신복(神卜)이라는 명성을 얻은 점쟁이가 바로 홍계관이다. 이 전설적인 명복(名卜)들에게는 이런 반전이 있고 스릴이 있고 탄성을 자아내는 에피소드가 늘 따라다닌다.
이규경이 말한 유은태(劉殷泰)는 곧 유운태(劉雲台)이다. 가운데 글자가 발음이 약간 달라졌다. 이규경이 맹인 점쟁이의 주요 배출지로 지목한 봉산 출신이다. 이 점쟁이는 과연 어떤 행적을 보였기에 명복의 대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던 것일까?
<추재기이>에는 그의 행적이 이렇게 나타나 있다.
“유운태는 봉산의 맹인이다. 일곱 살에 눈이 멀었는데 여섯 살 때부터 벌써 <사기>(史記)를 읽었고 고체시(古體詩)를 지었다. 눈이 먼 후에도 부지런히 공부하여 열세 살에는 경서(經書)를 암송하였다. <주역>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선천(先天)·후천(後天)의 학문에 큰 힘을 쏟아 점술에 크게 통달했다. 백 번을 점쳐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아 드디어 온 나라에 이름이 났다. 스스로 호를 봉강선생(鳳岡先生)이라 하였다. 사람들이 찾아와 의심스런 일을 해결해달라고 하면, 곧잘 효도와 공손함, 충성과 신의의 도리를 잘 말해주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엄군평(嚴君平)의 풍모가 있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일곱 살에 눈이 먼 유운태는 무지한 일반 점쟁이와는 격이 달랐다. <사기>를 읽었고, 시를 지을 줄 알며, 경서를 암송해 공부를 제법 많이 했다. <주역>을 깊이 연구해 실력을 쌓은 점술가로서 기반이 탄탄하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아 온 나라에 점쟁이로 명성을 드날렸다.
엄군평보다 더 어진 사람
이렇게 유명한 점쟁이가 활동한 시기를 조수삼은 밝혀놓지 않았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18세기 중·후반이 그의 활동 연대로 추정된다. 추정의 근거는 유운태를 실제로 만나서 점을 친 사람들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사람을 만났을까? 영조 시대 시인으로 명성이 높은 신광수(申光洙·1712~75)는 1760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평안도를 여행했다. 평안도로 가는 길에 그는 봉산을 들러 하룻밤을 묵으며 유운태를 만났다. 이때 점을 치고 그에게 시 두 편을 지어주었다. 시의 제목은 ‘봉산의 점술가 유운태에게 준다’이다.
남쪽에서 명성을 들은 지 벌써 십 년째
유씨(劉氏)는 엄군평보다 더 어진 사람
봉산은 천 리 길이라 와볼 길이 없었지.
필마(匹馬) 타고 서관(西關) 가는 오늘에야
시를 지어 내놓고서 복채로 대신하네.
복채를 달라지 않아 세상에 명성 가득하네.
길 떠나며 참빗을 정표로 남기노니
헤어진 뒤 머리 빗으며 그리움을 달래보소.
남쪽이라 하면 그의 고향 충청도 한산이다. 시는 유운태의 명성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넉넉하게 보여준다. 신광수 같은 풍류의 시인이 봉산에 와서 다른 사람도 아닌, 맹인 점쟁이를 찾은 것이 의외다. 이전에 안면을 튼 것도 아니므로 유운태의 명성을 듣고 찾아갔음이 분명하다. 시의 내용으로는, 신광수도 점을 쳤다.
그런데 신광수가 점을 치고서 복채를 내놓은 것 같지 않다. 하기사 신광수는 ‘관산융마’(關山戎馬)와 같은 시를 내놓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시인이므로 유운태가 그의 명성을 몰랐을 리가 결코 없다. 실리만으로 따져도 두둑한 복채보다도 시를 받는 것이 이익이다. 또 제아무리 유운태가 명복이라고는 하나, 신광수 같은 시인으로부터 시를 받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니 유운태가 복채를 받았을 리가 없다.
한편, 유운태를 엄군평보다 현명하다고 평한 대목에 눈길이 간다. 단순히 복채를 채근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앞서 본 <추재기이>에서도 그를 엄군평의 풍모가 있다고 세상에서 말한다는 언급과 연관된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엄군평은 후한 시절의 은사로서 점쟁이의 전설이 된 인물이다. 그는 성도(成都)에서 점쟁이 노릇을 하면서 사람들을 충효와 신의로 이끌었다. 그는 하루에 돈 100전을 벌면 가게 문을 닫고 <노자>(老子)를 읽었다.
유운태를 엄군평에 빗댄 것은 직업적 점쟁이임에도 불구하고 점술로 사람을 현혹시키기보다는 윤리적 행동으로 이끈 도덕적 교사의 일면이 보이기 때문이다. 의심스런 일을 해결해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점을 쳐주기는 하지만, 점술만을 맹신하지 말고 부모께 효도하고 어른께 공손하며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들에게 신의를 지키는 게 더 앞세워야 할 일이라고 유도했던 것 같다. 사람답게 사는 도리가 앞날을 예견하고 비상한 방법으로 난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앞선다고 말해준 것이다. 이렇게 다급하게 찾아온 고객을 사람다운 길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그는 어른다운 덕망을 가진 대인처럼 보인다.
사형에 처할 때마다 점괘가 떠올라
그렇다면 이러한 평가가 어디까지 사실일까? 이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성대중(成大中·1732~1812)이란 학자 역시 유운태에게 점을 친 적이 있다. 그는 <청성잡기>에서 유운태에게 자기 운명을 점치게 한 사연을 실어놓았다. 유운태가 점을 치고서 “운수가 참 좋습니다. 봄바람 같은 온화한 얼굴이요 비단결 같은 고운 마음씨입니다. 벼슬살이를 할 때에는 살려주는 사람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점풀이를 들은 성대중은 그 뒤로는 늘 사람 살리는 것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인 양 했다. 그래서 사형에 처해질 옥사가 그 덕분에 뒤집혀진 경우가 많았다. 그가 지방관으로 재직한 평북 희천군에서 두 명의 죄수를 죽였고 경주에서도 두 명을 죽였지만, 그들은 중범죄를 저지른 자들이라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성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법으로서야 반드시 죽여 용서하지 못할 죄를 저지른 그들이었지만, 그들을 처벌할 때에도 맹인 점쟁이 유운태가 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유운태가 실제 점괘를 말해주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사람의 선한 의지를 일깨워주었다고 볼 수 있다. 유가의 선비인 성대중이 그런 유운태의 점괘풀이를 곧이곧대로 다 믿었을 리야 없겠지마는 그가 한 말을 따라 하는 게 좋은 지방관으로서 바람직한 길을 걷는 것 아닌가?
전국적인 명성을 지닌 이 점쟁이에 대해 후한 평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와 다른 평가를 성대중과 친한 이덕무가 내렸다. 1778년 북경을 가던 이덕무는 3월23일 봉산에 이르러 하룻밤 잘 때 이 점쟁이를 떠올렸다. 봉산에 머물면서 이 지역 명사로서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를 직접 만나지는 않은 듯하다. 이때의 생각이 기행문인 <입연기>에 실려 있다. 그는 “유은태(劉銀泰)는 봉산 사는 소경으로 운명을 점치는 사람이다. 가끔 기막히게 맞히기 때문에 이름이 나라 안에 쫙 퍼졌다. 남의 비위를 잘 맞추고 교묘하게 속이는 것에 불과하건만 그에 미혹된 사람이 많다”라고 평했다. 그가 신통력이 있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혹세무민하는 술수라는 것이다. 이덕무는 본래 점쟁이를 아주 싫어한 학자라서 혹평을 내렸으나 그의 명성까지 부정하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이구동성으로 유운태의 명성을 전하는 기록을 보았다. 정리하자면 유운태는 맹인 점쟁이의 전설이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신빙할 만한 학자의 언급이므로 그의 높은 명성과 위상은 받아들여야 하리라.
하지만 그의 신기에 가까운 점술과 명성은 이러한 역사 기록보다 오히려 야담에서 더 인상적으로 묘사된다. 19세기 최고의 야담집으로 손꼽히는 <청구야담>에는 ‘명복을 찾아가서 억울한 옥살이에서 풀려나다’는 제목의 야담이 실려 있다. 이 이야기가 실화인지 허구인지 명확한 판단을 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로는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 명복은 다름 아닌 유운태다. 야담의 줄거리는 이렇게 전개된다.
살인사건 진범을 잡다?
전주에서 과부 한 사람이 밤에 목이 잘린 채 죽었다. 핏자국을 따라가보니 서쪽 집 담 안에 그 목이 떨어져 있었다. 서쪽 집 주인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모진 심문을 당하며 여러 달 감옥에 갇혀서 거의 사경을 헤맸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억울함을 이기지 못했으나 진짜 범인을 찾을 길이 없었다. 두 아들은 이렇게 상의했다.
“봉산의 유운태는 나라의 명복이라 하니 찾아가서 물어보자!”
드디어 복채와 노잣돈을 후하게 갖고서 말 한 필을 끌고 봉산의 유운태 집을 찾아갔다. 그에게 자세히 사연을 말하고 진짜 범인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며 복채를 내밀었다. 유운태는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새벽에 점을 칩시다”라고 했다. 다음날 새벽에 유운태는 세수를 하고 도포를 입은 다음 대청에 나와 앉았다. 화로에 불을 태우고 앞에 책상 하나를 놓았다. 또 큰 병풍으로 주위를 둘러치고 그 속에 앉아서 향을 사르고 축문을 외우며 점을 쳤다. 괘를 얻고 나서도 한참을 풀이하더니 밖으로 나와서 두 아들을 불렀다.
“너희들은 이제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되 너희 집으로 들어가지 말라. 곧장 서남쪽 길을 따라 70리쯤 가다 보면 왼편으로 작은 갈림길이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길을 가면 그 아래에 삼밭 수십 무(畝)가 있고, 그 아래 수십 보 떨어진 곳에 초가집이 나타난다. 낮에는 삼밭에 숨고 저문 뒤에는 그 집 울타리 뒤에 잠복하고 있으면 반드시 알아차릴 일이 있을 것이다.”
두 아들이 그 말대로 따랐더니 과연 똑같았다. 밤에 그 집 울타리에 숨어서 귀를 기울였더니 신발을 삼던 남자가 일을 마치고 방 안에 들어가 기쁜 목소리로 아낙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아무 걱정이 없소. 아무개가 내 대신 심문을 자주 당해 이제 곧 죽게 됐소.”
그 말을 듣자마자 두 아들이 바로 뛰어들어가 그자를 포박해 관아로 끌고 갔다. 그자는 과부를 범하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아서 죽였노라고 순순히 실토했다.
재미는 있으나 믿기는 어려운 이야기다. 유운태가 기가 막히게 점을 잘 맞힌다고 말한 이덕무의 지적이 이러한 유일 것이다. 그러나 진범을 잡기 위해 점쟁이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의 사실성 여부를 떠나서 봉산 유운태의 명성이 민중들에게까지 널리 퍼진 정황은 적절하게 보여준다. 18세기의 명복 유운태에게는 더 흥미로운 사실이 많았을 것이다. 기록이 사라졌을 뿐이다.
마음을 훔쳐버린 도둑들
비 피하는 나그네를 집안으로 들였는데…
그때에는 집단을 이루어 야간은 물론 백주대낮에도 거리낌없이 양민을 해치고 재물을 약탈하는 군도(群盜)가 성행했다. 그런 군도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힘을 지니지 못한 치안 부재의 상황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심각했다. 한 가지 사례만 들면, 1887년 9월 수원의 지지대 고개에서 수원부사 부인의 행차를 군도가 대낮에 겁박해도 수원의 관군은 뻔히 바라만 보고 아무런 조처도 하지 못했다. 충청도 면천에 귀양와 있던 김윤식(金允植)은 그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 탄식하며 일기 <음청사>(陰晴史)에 그 사실을 기록해놓았다. 이 방대한 일기에는 군도의 출몰을 보고하는 기록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흉포한 사건이 두둔하거나 미화할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둑과 강도에 얽힌 사건은 흥밋거리 이야기로서 사람들의 입에 올랐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은 기록에도 남아 있다. 특히 기발한 방법으로 절도행위를 하거나 강도짓을 한 사건이 종종 등장한다. 그들은 흉기로 사람을 겁박하거나 상해를 가해 재물을 취하는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라, 사람의 의표를 찌르는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거나 피해자를 배려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매너가 있는 신사 강도나 아주 지적인 풍모가 보이는 강도라고나 할까? 증오할 수만은 없고 멋진 면을 지닌, 그러나 강도임에는 분명한 그런 유명 범죄자들이다. 특이한 만큼 기이한 행각의 도적과 강도의 사연이 여러 기록에 등장해 유명세를 탔는데 <추재기이>에도 한 편의 사연이 실려 있다.
아주 큰 부자인 남양(南陽) 홍씨(洪氏)는 손님을 좋아했다. 하루는 어떤 나그네가 비를 피하려고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를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그는 의외로 시도 잘 짓고, 술도 잘 마시며, 바둑도 썩 잘 두었다. 밖에서는 비가 종일 내리고 있었다. 무료함을 깨뜨릴 수 있겠다고 생각한 홍씨는 아주 기뻐서 아예 그더러 비도 오는데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다.
그렇게 대화도 나누고 식사도 하면서 밤중이 되었을 때, 나그네는 단소를 하나 꺼내 보여주며 “이것은 황새 정강이뼈로 만든 물건이랍니다. 어른께서 한 번 들어보실 만할 겁니다”라고 말하고는 주인을 위해 한 곡 멋지게 연주했다. 단소의 맑고 우아한 소리 탓인지 내리던 비는 어느 사이 그치고 구름 속에 감추어진 달빛이 어슴푸레 비췄다. 주인은 음악과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그때 나그네는 슬며시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들었다. 서슬 퍼런 칼날이 불빛에 번쩍였다. 그 칼을 보고서 주인은 그제야 나그네가 평범한 과객이 아니라 강도임을 깨닫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 순간 창밖에 누군가 다가와 “소인들이 이제 당도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옆에 있는 나그네는 강도단의 두목이고, 밖에 있는 자들은 졸개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좀전에 주인이 들은 단소 연주는 졸개를 부른 신호였음이 틀림없었다.
혼자 돌아온 나귀와 포대 하나
마당의 졸개들에게 두목은 오른손으로는 검을, 왼손으로는 주인의 손을 잡고 “주인께서 어지시므로 차마 다 가져가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모든 물건을 반으로 나누되 저 검은 나귀는 나눌 수 없으므로 그대로 남겨두어 나그네를 잘 대해준 주인장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노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모두가 “잘 알겠습니다!” 대꾸하더니 곧 이어 “일을 다 해결하였습니다!”라고 했다. 나그네는 그제야 일어나 주인에게 예를 표하고는 자리를 떴다.
강도들이 모두 나간 뒤에 주인은 온 집안의 물건을 일일이 점점해보았다. 물건은 크기를 따질 것 없이 모두 반으로 나누어 가져갔고, 상해를 당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나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하나밖에는….
어이없게도 감쪽같이 집안이 털린 주인은 강도를 당한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누설하지 말라고 아랫사람을 단속했다. 많은 재물을 잃기는 했으나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강도들이 재물을 몽땅 강탈할 수도 있었지만 은덕을 갚는다며 반만을 가져갔기 때문이리라. 강도임에는 분명하지만 의리와 금도(襟度)가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런 판단은 몇 시간이 지난 뒤에 사실로 드러났다.
강도떼가 물러간 그날 정오 무렵에 사라졌던 나귀가 저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나귀 등에 짚풀로 만든 포대가 실려 있었고, 포대 위에는 간단한 사연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못된 졸개가 명령을 어겼기로 삼가 그놈의 머리를 보내 사죄하는 바입니다.”
역시 대범하고 의리가 있는 강도답다. 두목의 명령을 어긴 부하의 목을 베어 조직의 위계를 세웠고, 주인과 약속을 지켜 큰 도둑임을 보여주었으며, 굳이 주인에게 잘린 목을 보내 공포심을 불어넣고 뒤탈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로서는 일거삼득이다.
기지를 발휘해 계획대로 차분하게 재물을 강탈하면서 주인을 최대한 예우한 이 강도는 평범한 도적과는 급이 다르다. 매너를 지키며 품위 있게 강도짓을 한 이 강도는 그런 자에게 기대할 수 없는 자신감과 여유와 금도가 보여 사연을 듣는 이로 하여금 상쾌함을 느끼게 만든다. 그렇기에 조수삼의 <추재기이>에까지 사연이 올랐을 것이다.
사건의 세부는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유형의 강도가 다른 기록에도 여럿 실려 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잡기>와 유희(柳僖)의 <문통>(文通)에도 기발한 강도가 등장한다. 앞 책의 강도는 이렇다. 한양의 부잣집 잔치에 나타난 한 걸인이 술과 음식을 배불리 먹은 뒤에 손톱을 깎는다며 손님이 찬 패도를 빌렸다. 패도의 섬뜩한 칼날로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이제야 죽을 자리를 얻었다고 하며 자살하려 하자 손님과 기생이 모든 재물을 내놓았다. 그는 종들의 호위까지 받아가며 안전하게 돌아갔다. 이자는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어 재물을 갈취하는 유형의 강도였다.
베개 위 놓인 물건을 가지러 오겠소
<언문지>(諺文志)를 쓴 19세기 전반의 학자 유희는 1812년에 협객 도둑을 도협(盜俠)이라 하고 그들에 관한 몇 가지 실화를 기록한 ‘도협서’(盜俠敍)를 썼다. 그 글에는 이규(李珪)나 강수평(姜壽平), 임점방(林占房) 같은 도둑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경기도 고을에서 발생한 한 사건이 흥미롭다. 노복의 재물 수만 냥을 강탈한 조정의 고관이 어느 날 감쪽같이 금고 속의 재물을 털렸다. 고관은 사방에 탐정을 보냈다. 탐정 하나가 벼랑 끝에서 십칠팔 세 되는 여장 남자를 용의자로 찾았는데 그가 고관에게 갖다주라며 봉물을 하나 던져주고 산을 넘어갔다. 탐정의 능력으로는 가지 못할 곳이었다. 고관에게 봉물을 전했고, 고관이 봉물을 열어보자 수놓은 베개 한 쌍과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편지를 본 고관은 낯빛이 확 바뀌더니 더 이상 도둑의 뒤를 좇지 않았다. 그 편지의 내용이 뒤에 밝혀졌다.
“삼년 전에 네가 남의 아내를 불러다 동침하였기에 함께 잔 베개를 가져왔으니 악행을 고치기 바란다. 그렇지 않을 때엔 베개 위에 놓인 물건을 또 가져오리니 그깟 수만 냥쯤이야 말해 무엇하랴!”
베개 위에 놓인 물건이란 곧 고관의 머리다. 이 도둑의 절도는 고관의 비리를 응징하는 의미가 있고, 잃은 돈을 찾으려 하면 머리를 베어갈 것이라고 섬뜩한 경고를 했다. 그의 솜씨라면 못할 것도 없다는 판단을 고관은 했을 것이다.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됐을 미소년은 일부러 담대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유희는 조수삼과 동시대 사람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대담하면서도 멋지고 신사적인 강도 이야기가 순전히 허구인 것은 아니다. 당시 사회 현실을 일정하게 반영한다고 보아야 한다. <계서야담>이나 <청구야담>에 선비가 군도의 두령이 되어 활약하는 이야기가 각각 실려 있다. 그들은 완력과 흉포함을 발휘해 재물을 강탈하는 수준 낮은 강도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모와 전략을 갖춘 선비로서 군도가 모인 산채의 두목이 되어 국가의 재물을 운송하는 비장의 행렬을 가장해 부자를 안심시킨 뒤 재물을 강탈하고 유유자적 사라졌다. 조금씩 성격이 다르지만 상식을 뛰어넘는 대범한 강도짓이 현실 속에서 종종 발생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두려워하자 검무를 춰 위로해
이렇게 대범하고 신사적인 조선 후기의 강도를 보면, 청나라 초엽의 장조(張潮)가 편찬한 <우초신지>(虞初新志)란 책에 실린 강도가 떠오른다. 기상천외한 강도의 전형이라고 할 사연으로, 양형선(楊衡選)이 쓴 ‘강도의 기록’(紀盜)이란 글에 나온다.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널리 읽힌 책이므로 이 강도의 형상은 지식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가능성이 높다. 도둑 가운데도 명사(名士)가 있어서 명사 도둑이라 부를 만한 실화이다. 상당히 긴 사연이지만 간단하게 살펴보면 이렇다.
소명이(蕭明彛) 선생이 애첩과 함께 가을걷이를 감독하러 별장에 머물 때 사건이 발생했다. 밤중에 지붕에서 소년 셋이 내려와 창문을 열고 들어온 뒤 선생의 잠을 깨우고 옷을 가져다 입게 하였다. 그리고 거실로 모셔다가 윗자리에 앉히고 둘러앉았다. 두목은 “저는 선생님의 글을 읽었습니다”라고 하며 한편 한편 외워서 들려주었다. 가장 좋은 작품은 무엇무엇이며, 그중에서 어떤 구절이 어때서 좋다고 말했다. 또 아무개 고관의 집에서 선생이 술을 열다섯 잔 거푸 마시는 호쾌한 장면을 보고서 흠모했고, 강남의 비문 가운데 선생의 작품이 걸작이라고 했다. 선생을 협박하려는 자가 있자 “이 소 선생님은 남들에게 하듯이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만류하고 술과 안주를 달라고 해서 먹었다. 술이 거나해지자 그들은 “저희들은 선생님의 명성을 들은 지 오랩니다. 천금의 노잣돈을 아끼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니 주머니를 털어 저희 바램에 보상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선생이 “어제 사백 금이 있었는데 그대들이 조금 늦게 왔소. 오늘 아침 벌써 성안으로 보내 남아 있는 것은 겨우 술값 27금과 인삼 여덟 냥과 옥띠 하나뿐이오. 이거라도 바치겠소.” 좌우에서 숨긴 것이 있다고 의심하자 두목이 “선생의 진실한 말이다”라며 만류했다. 한밤중이 되어 선생이 피곤하고 두려움에 떨자 그들은 검무를 추어 선생을 위로했다. 그들은 집의 구조를 분석할 줄 알았고, 선생의 장서를 둘러보며 일일이 평했다. 나군(羅君)이 글씨를 쓴 부채를 보고서는 “나는 이분과 친분이 있지요. 진귀하게 보관해야지요” 하며 가져갔다. 그들이 떠날 때 선생이 “그대들은 모두 소년 호걸일세. 내일까지 기다리면 사백 금을 주겠으니 어떤가?”라고 하자 “세상에는 지금껏 그런 일이 없다”라고 사양하며 떠났다. 선생은 그들이 나무배를 타고 유유히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런 강도면 문을 열어 맞이하겠네
지적인데다 예술을 알고 명사를 대접할 줄 아는, 그야말로 강도의 세계에서 만날 수 없는 명사다. 지은이는 이런 강도는 평범한 도둑과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고 했고, 책을 편찬한 장조는 이런 강도라면 문을 열어 맞이해야 한다고 평을 달았다. 과연 이런 강도가 존재했을까? 문인의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구체적이다. 아무튼 당시에 기상천외한 강도들의 통쾌한 사연이 민간에서 널리 전해졌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횡재를 포기하다
옛 주인 걸까, 새 주인 걸까
대중에게 일확천금의 꿈이 널리 퍼진 것은 천박한 자본주의의 도입 이후라고 해야 하나, 그 시작과 원형은 먼 과거로 올라간다. 어느 시대이든 금전의 가치를 무시한 적은 없지만, 조선 사회는 영·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재물이 인간과 사회의 중심적 문제로 자리를 잡아갔다. 윤리강상을 높이고 상업을 말단으로 취급해 이익과 금전을 천시하던 관념도 현실 앞에서 힘을 잃어갔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매점매석의 상행위이고, 횡재를 바라는 심리의 확산이다. 재물 앞에는 양반이나 상민이나 가릴 것 없다.
그렇다면 횡재를 얻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시대의 횡재 가운데 누군가 땅속에 묻어둔 금은보화를 얻는 것과 길거리에 흘린 재물이 든 보따리를 줍는 것이 흔하게 보인다. 금고가 아닌, 땅속에 묻어둔 재물의 발견이란 것이 원시적이고 허구적이어서 신빙하기 어렵기는 하다. 그러나 은행업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 현금과 금은보화를 안전하게 보관할 길이 마땅치 않았던 부자들은 그 방법을 적절히 이용했을 법하다. 그렇게 하여 사건들이 벌어지고, 구체적 사례들이 옛 기록에 등장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추재기이>에 첫 번째 사연으로 실려 있다.
서울 중심부에 있는 행정구역 장통방(長通坊)에는 오천동(梧泉洞)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여기에 사는 이아무개란 사람은 몇 대를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았다. 하지만 증손·현손 대에 이르러서는 가산을 탕패해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 하는 수 없이 살던 집을 홍씨에게 팔았다.
집을 산 홍씨가 대청마루 기둥 하나가 기우뚱해 무너질 것만 같아 보수를 시작했다. 공사를 하다가 기둥 아래에서 3천 냥이나 되는 은덩이를 파내게 됐다. 홍씨가 판단하기에 이 보물은 전 주인인 이씨의 선조가 감춰둔 것으로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홍씨는 이씨를 오라고 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은덩이를 가져가라고 했다. 그런데 이씨가 순순히 은을 받기는커녕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
“은은 우리 조상께서 감춰둔 것인 듯하오.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입증할 명문(明文)이 있는 것은 아니오. 게다가 이미 집을 당신에게 팔았으므로 이 집에서 나온 은도 당신의 물건이오.”
이유를 대며 이씨가 은을 사양하자 이번에는 홍씨도 자기 것이 아니라며 가져가라고 하여 서로 사양하는 바람에 결말이 나지 않았다. 서로 은을 두고 다툰 사연이 마침내 관아에까지 소문이 났고, 관아에서는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임금은 “우리 백성에 이렇듯 어진 사람이 있으니, 지금 사람이 옛사람보다 못하다고 누가 말하랴?”라고 하고는 은을 반분해 나눠갖게 하고 두 사람 모두에게 벼슬을 내렸다.
서울 집값의 수십 배에 달하는 거금
<추재기이>에 실린 사연의 전부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다. 3천 냥이면 당시 서울 집값의 수십 배에서 백 배에 달하는 거금이다. 자기 소유의 집에서 나온 것을 가진다 해서 문제 삼을 것도 없고, 더욱이 전 주인도 받지 않겠다는 것을 굳이 이유를 대서 양보하다니! 홍씨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사실은 이씨도 막상막하다. 이 다툼 아닌 다툼이 관아에까지 알려지고 임금의 귀에까지 들린 것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만큼 특이한 사례다. 임금이 표창하고 안 하고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어디까지가 허구고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서술이 구체적이어서 사실로 보이기는 하지만 입증할 만한 구체적 증거나 다른 기록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사건이 일어났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개연성을 방증할 유사한 사건의 기록이 적지 않게 보이기 때문이다.
신돈복(辛敦復·1692∼1779)이 쓴 <학산한언>(鶴山閒言)이란 책에는 부솔(副率) 벼슬을 한 김재해(金載海)의 사연이 실려 있다. 학문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그가 한 과부로부터 50, 60냥을 주고 집을 샀다. 집에 들어가 담장을 수리하느라 땅을 파다가 돈 100냥이 들어 있는 독을 얻었다. 과부의 돈이라고 판단하고 그는 부인을 시켜 편지를 내어 사유를 설명하고 가져가라고 했다. 과부는 몹시 감동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여겨 직접 그 부인을 찾아갔다. “그 물건이 꼭 우리 선조가 묻은 것이라 할 수 없으므로 차라리 반분하자”고 하자 그 부인이 “애초에 반분할 뜻이 있었으면 그냥 갖지 무엇하러 돌려주겠어요. 나는 남편이 있어 이 돈이 없어도 살 수 있으니 다 가지세요”라며 고사하고 받지 않았다. 과부는 하는 수 없이 돈을 가져왔으나 평생을 두고 김재해의 은공을 잊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김재해는 숙종 말년인 1713년 무렵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부솔의 직책에 있었다. 그는 저명한 성리학자인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었고, 김창협(金昌協)과도 교제한 성리학자다. 경서를 해설한 저작도 남겼다. 구체적인 정황이 설명돼 있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가지 않을 듯하다. 이 이야기를 <추재기이>의 사연과 비교한다면 어떨까? 다소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대동소이하다. 전 주인이 재물을 거절한 것과는 달리 과부는 받았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같은 이야기의 다른 버전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추재기이>가 <학산한언>의 이야기를 베낀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연들이 현실에서 발생했고, 그 이야기들이 사람들 사이에 적지 않게 유포됐다가 서로 다른 저작에 기록됐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몇 가지 사례가 발생했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에는 거액의 재물을 집 안 어딘가에 땅을 파고 숨기는 보관법이 이용됐다는 사실과, 자기의 재물이 아닌 경우 남이 무어라 하든 원주인에게 돌려주려는 양심을 지닌 사람들이 꽤나 존재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집값의 2배나 되는 돈과 그보다 30배가 넘는 엄청난 거금을 횡재라 여기고 제 호주머니로 넣지 않고 주인을 찾아주었다. 횡재를 포기하고 전 주인에게 양보하기란 양심이 없다면 힘들다. 더욱이 이씨의 경우는 재산을 탕패해 집까지 판 힘겨운 처지에다 정황상 자신의 조상이 묻어둔, 일종의 유산인 셈인데도 받지 않았다. 현재의 경제관념으로 본다면 바보 아니면 멍청이다. 각박한 현실에서 발생하기 어려운 미담이라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순진한 사람들이라고 평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순진한 사람들이 꽤나 존재했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한 사회가 조선 사회였다는 것도 부정하지 못한다.
청렴한 인간은 예외적 존재일까?
<추재기이>에서는 지금도 옛날 사람이 있다고 왕이 말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고대 중국에서 자기 소유물을 서로 양보한 사연을 직접적으로 가리킨다. 하지만 이런 사연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이래 사례가 이어진다. <삼국사절요>에는 신라 때의 인관과 서조가 솜을 서로 양보한 미담이 실려 있다. <고려사> ‘현덕수전’에는 노극청(盧克淸)이란 사람이 집값을 되돌려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노극청이 귀가해보니 아내가 은 12근을 받고 현덕수에게 집을 팔았다고 한다. 노극청은 전 주인에게 은 9근에 집을 사서 수리하지도 않았는데도 3근을 더 받는 것은 부당하다며 3근을 되돌려주려고 했다. 그러자 현덕수는 이미 매매가 이루어졌으므로 안 받겠다고 다투다 결국 그 돈을 절에 시주했다는 사연이다. 그 사연을 듣고 사람들은 “이끗만을 추구하는 말세의 풍속에도 이런 사람이 있단 말이냐”며 탄복했다. 이 사연을 <명종실록>에 실은 이규보는 아예 ‘노극청전’을 써서 그의 행동을 예찬했다.
앞서 본 이야기와 소재는 조금 다르지만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않으려는 청렴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의 사연인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규보가 평한 것처럼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이러한 사연은 아주 드물고, 그렇기에 이렇게 미담으로 전한다. 먼 옛날부터 현재까지도 깨끗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드물지만 없지는 않다.
그런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은 이야기로도 입증된다. 청렴한 사람들의 행동과는 딴판으로 서슴없이 굴러 들어온 횡재를 독차지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조 숙종 때에 막강한 왕실 권력을 쥔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1684~?)란 분이 있었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예술가를 후원한 사람으로 유명한데 그 재산의 형성이 의문을 낳았다. 그가 땅속에 묻힌 보물을 캐어 재산을 불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요는 종실 출신이지만 고아가 되어 몹시 가난했는데 견디다 못해 자살까지 시도했다. 두 번의 자살 시도에 실패한 그는 한양의 폐가에 몸을 뉘었다. 밤에 귀신이 나타나 자기 후손이 몰락해 이 집을 버리고 영남 지방으로 낙향했는데 마루 밑 깊숙이 백은(白銀) 십여 독을 숨겨놓았으니 자손에게 그것을 알려주어 생업을 꾸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보답을 하겠다는 약속과 함께였다. 귀신의 말대로 땅을 파서 엄청난 은을 얻은 서평군은 귀신과 맺은 약속을 저버리고 은을 독차지해 큰 부자가 됐다. 귀신은 서평군의 자손을 끊는 것으로 복수했다고 소문이 났다. 이 사연은 <계서고>(溪墅稿)의 ‘서평군에 관한 일을 쓴다’(書西平君事)에 실려 있다.
서평군의 사연은 땅속에 묻힌 보물을 찾아 부자가 된다는 횡재 이야기의 전형이다.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기는 어렵다. 그가 갑작스레 거부가 됐고, 그 배경이 석연치 않은 것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한 것 중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권력을 빙자해 남의 큰 재산을 갈취한 뒤에 남들 듣기에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주목할 사실은 땅속에 묻힌 재물로 어느 순간 부자가 된다는 욕망이 서평군 사연에 고스란히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런 이야기가 시대적 배경이 대체로 숙종조 이후 18·19세기에 집중되고, 등장하는 인물이 대체로 한양 사람이며,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도 거의 모두 한양이다. 숙종조 이후 도시화가 가속화되고, 인구가 집중되며, 상업도시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물신 숭배 풍조가 거세진 일면을 반영한 현상으로 해석할 만하다. 그렇다면 귀신과의 약속을 배반하고서 재물을 독차지한 서평군의 사례가 당시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이고, 앞서 살펴본 청렴한 인간은 예외적 존재였으리라.
내 조상이든 남의 조상이든 상관없이 그들이 남몰래 숨겨둔 보물단지의 발견은 이렇게 사람들 머릿속에서 꿈으로 자리잡았다. 어딘가에 숨겨진 보물단지는 그 시대의 로또처럼 여겨져 필기와 야담에도 등장했다.
그 시대의 로또, 숨겨진 보물단지
<청구야담>에 실린 한 과부의 사연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서울 옥인동에 거주한 여염집 청년과부가 아들 둘을 키우며 힘들게 살았다. 집 뒤 텃밭에 채소를 가꾸어 사는 과부가 밭을 갈다가 큰 옹기를 발견했는데 그 속에는 은화가 가득했다. 깜짝 놀란 과부는 바로 뚜껑을 덮고 흙으로 감추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고생고생하며 자식을 키웠다. 자식들도 고생하며 공부해 아전과 재상가의 겸종(傔從)이 되어 가정을 꾸렸다. 손자도 예닐곱 명이 됐다. 옹기를 발견한 지 30년이 되던 해 그 옹기를 파내어놓고 그 과부는 자식들에게 말했다. “그날 이것이면 부자가 되었겠지만 너희가 사치하고 교만해져 공부는커녕 주색잡기에 빠질까 염려하여 그대로 묻어두었다. 이제는 써도 되겠다.” 그들은 수만 냥을 얻어서 거부가 됐고, 그 재물을 빈궁한 사람들을 구휼하는 데 썼다.
이 과부도 땅속에 묻힌 보물단지라는 꿈을 이뤘다. 반면에 청렴한 자들이 한 행동이나 그것을 독차지해 세상을 호령한 태도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행운을 행사했다. 금전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평상심을 잃지 않고 인생을 영위한 다음 천천히 세상의 가지지 못한 자들과 그 재산을 공유했다. 이 과부의 사연도 허구일 수 있으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재물을 처리하는 당시 사람들의 행동방식 하나를 제시한 이야기로 이것 역시 현실 속에서 소재가 취해져 가공된 사연으로 보아야 하리라. 횡재를 바라보는 당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시선은 지금에도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다.
목욕을 하다 나오지 않아 보니…
한양에는 한 노파가 살고 있었다. 병석에 앓아누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다소 차도가 생겼을 때 노파가 물로 목욕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문을 걸어닫고 목욕통을 가져다가 물을 채워넣었다. 노파는 목욕통 속에 들어가 헤엄치며 목욕했다. 시간이 오래 흘렀는데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노파는 간데없고 물고기 한 마리만 헤엄치고 있었다.
노파가 물고기로 변했다는, 간단하면서도 황당한 이야기의 전부다. 상식적으로 판단해서 사실일 리가 없는 이 이야기는 다른 실화와 함께 실제로 발생한 사건으로 간주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사연을 기록한 <추재기이>에 이런 환상적인 사건이 실렸다고 해서 책 전체의 진실성을 해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추재기이>에 실린 것은 결코 자의적이거나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동서고금의 신화에서 사람이 물고기로 변한 이야기를 자주 확인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이 물고기로 변신하고, 한국의 동명성왕(東明聖王) 신화에서 하백(河伯)이 잉어로 변신하는 따위가 적지 않다. 신화나 설화에서 이러한 변신 모티브는 아주 중요하다. 19세기의 박물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만물이 다른 사물로 변화하는 일은 많지만 사람만은 그런 일이 없다. 그러나 이무기로, 범으로, 나비로, 물고기로, 돌로 변신하는 경우가 간혹 나타난다”고 하면서 패승(稗乘)이나 유설(類說)에 사례들이 보인다고 했다. 그가 지적한 것처럼, 사람이 동물 따위로 변신한 기괴한 이야기가 소설이나 야사에 적지 않게 등장한다.
그 가운데 인간이 물고기로 변신한 전형적인 이야기는 중국 송(宋)나라 때 편찬된 방대한 설화집 <태평광기>(太平廣記)에 등장한다. 당나라 때 사람 설위(薛偉)는 청성현(靑城縣) 주부(主簿)가 되어 부임했다. 병이 든 그는 발열이 심해 견딜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집을 뛰쳐나가 숲을 지나 강가에 닿아 목욕을 하자 갑자기 몸에 열이 나면서 잉어로 변했다. 앞서 본 노파의 사연은 설위의 이야기에 견주어보면, 세부에서는 약간 차이가 나지만 기본적인 스토리는 비슷하다.
그렇다면 노파의 사연은 설위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추재기이>에 실린 이야기는 대체로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과 실화를 기록했다. 따라서 조수삼은 적어도 이 노파의 사연이 완전한 허구가 아니라 사실일 수도 있다고 믿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수삼이 젊은 시절에 편찬한 <연상소해>(聯床小諧)란 책에 나온 이야기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의 두 번째 이야기는 다름 아닌 미꾸라지로 변신한 노파의 사연이다. 역시 간단하므로 전체를 옮겨본다.
“해염(海鹽) 사람 왕숭(王嵩)의 어머니는 나이가 80여 세로 건강하기가 젊은 시절과 똑같았다. 하루는 욕실로 들어가더니 큰 미꾸라지가 되어 비늘과 지느러미를 휘저으며 헤엄을 쳤다. 그러자 그 아들이 바닷가에 놓아주었는데 꼬리를 흔들고 뒤를 돌아보며 한참을 있다가 물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의당(漪塘) 강사인(江舍人)이 내게 이 사실을 말해주었는데 강사인 역시 해염 사람이다.”
하체가 가렵더니 두 다리가 합쳐져
사건의 배경이 이젠 중국으로 바뀌었다. 조수삼은 여러 번 중국에 다녀왔는데 중국에 가서 사귄 사인(舍人) 벼슬을 하는 친구로부터 직접 이 이야기를 들었다. 구체적 지명과 인명이 제시되어 신빙성이 있음을 과시했다. 물고기가 아니라 미꾸라지로 변신한 것이 더 흥미롭다. 이야기 자체로만 판단하면, 중국에도 이렇게 물고기로 변신한 노파 이야기가 실화로 전승돼왔고, 우연히 북경에서 지인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서 흥미롭게 여겨 책에 기록해놓았다. 공교롭게도 먼 훗날 한양에서 또 비슷한 이야기를 듣고 기록에 옮겨놓았다. 사실로 믿기는 어렵지만 이 넓은 세상에 그런 기괴한 일 하나쯤 없을까 하는 심정으로 기록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조수삼 당대에 중국에서 이 이야기가 실제로 전승되었을까? 청나라 시대에 기괴한 이야기를 집성한 책으로는 포송령의 <요재지이>(聊齋志異)와 원매의 <신제해>(新齊諧), 기윤의 <열미초당필기>(閱微艸堂筆記) 삼부작을 꼽는데 대체로 18세기 후반의 저작이다. 우연히 <신제해>를 읽다가 물고기로 변신한 여인의 사연이 기록된 내용을 보았다.
저자인 원매의 조카 원치화(袁致華)가 사천성의 군량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주성(夔州城)을 지날 때 직접 겪은 이야기였다. 그가 성을 지날 때 길거리가 소란스러워 이유를 묻자 사람들이 말해준 사연인즉 이랬다.
아무개 마을의 서씨(徐氏)가 그 남편과 방사를 질펀하게 치른 뒤 아침에 일어나보니 여자의 얼굴과 피부는 전과 다름이 없는데 하반신이 물고기로 바뀌었고, 유방 밑으로 비늘이 자라 비린내가 났다. 입으로 말을 할 수 있는 여자는 울부짖었다.
그 여자는 변신의 과정을 이렇게 말했다.
“잠잘 때 통증은 없었고, 다만 하체가 가려워 긁었더니 점차로 두드러기가 생겼습니다. 어느새 두 다리에 합쳐지더니 굴신(屈伸)을 하지 못했고, 문지르자 물고기 꼬리가 돼버렸습니다. 이를 어쩌지요?”
그러면서 부부가 껴안고 통곡하더라고 했다. 조카가 집안사람을 보내 살펴보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자신도 가서 확인할 생각이었으나 공무가 바빠 그냥 돌아왔다.
간단한 줄거리만으로도 실제로 사건이 일어난 듯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여성이 물고기로 변신한 점은 동일한데 다만 변신의 동기가 몸이 아프거나 늙어서가 아니라 격렬한 부부관계였다. 그 점은 이 이야기의 환상성을 배가한다. 물고기로 변화하는 과정이 자세해 아주 그럴듯하다. 원매는 이 사건이 자신의 조카가 직접 겪었고, 그 집안 사람이 직접 확인했다고 함으로써 사실로 믿는 듯한 뉘앙스를 표현했다.
원매가 조수삼보다는 수십 년 전 사람이므로 물고기가 변신한 이야기가 비슷한 시대에 조선과 중국에서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 전파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정황을 놓고 보면, <추재기이>에 실린 변신 이야기는 중국 쪽에서 건너온 이야기를 조선의 상황에 맞게 각색해 유포한 것처럼 보인다.
홍어를 할머니로 인정할 것인가
그러나 정말 그럴까? 내 판단으로는 그렇지 않다. 물고기로 변신한 노파의 사연은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 사회에 전승되었다. 유독 물고기 종류가 홍어(洪魚)로 고정되고, 또 한 씨족의 조상과 관련한 설화로 유포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몽인(柳夢寅)이 지은 <어우야담>에 등장한다.
광해군 때 진사(進士) 유극신(柳克新)은 홍어의 자손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정작 유극신은 그 소문을 허황되다고 하기는커녕 실제로 그런 내력이 집안에 전해온다고 말해주었다.
외갓집 고조부 윗대에 나이가 팔십을 넘긴 할머니가 계셨는데 병환이 깊어 한 달을 넘겨 자리보전을 했다. 하루는 자손과 시비들에게 “내가 오래 병을 알아 너무 답답하다. 몸을 씻고 싶으니 조용한 방에 목욕물을 준비하되 누구도 엿보지 마라! 엿보게 되면 식구들에게 불길하리라!”라고 신신당부했다. 별실에 목욕통과 향탕(香湯)을 마련하고 문을 단단히 닫은 다음 다른 방에서 지키고 있자니 물을 뿌리고 파도를 치는 소리가 시간을 넘겨서도 그치지 않았다. 온 집안 사람들이 몸이 상할까 걱정해 별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들어오지 말라고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너무 시간이 오래되어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할머니는 온 몸이 거의 홍어로 바뀌어 있었다.
인간이 아닌 이물(異物)로 바뀐 할머니? 자식들로서는 두 가지가 큰 문제였다. 하나는 홍어를 할머니로 인정할 것인가? 또 하나는 홍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당황한 집안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비록 홍어로 변했지만 할머니의 분신이다. 물고기가 살아 있으므로 할머니가 죽지 않았고, 따라서 장례를 치르는 것은 불가하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 살 수 없으므로 홍어로 완전한 변신을 끝낸 다음 바다에 풀어준다. 변괴에 자손들로서는 잘 대처한 셈이다.
한국인이 즐겨 먹는 홍어로 변신한 한 명가집 할머니의 기괴한 사연이다. 사건이 벌어진 장소와 인물, 과정이 구체적이고도 그럴듯해서 실제로 사건이 일어난 듯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미를 지녔다. 더욱이 이 사연은 조상의 내력과 가문의 비밀이라는 요소와 결합해 더 큰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 사연에서 뼈대만 남으면 <추재기이>와 흡사한 이야기로 바뀐다.
조선 후기에는 워낙 <어우야담>이 널리 읽혔기 때문에 홍어로 변신한 사연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의 귀신담이나 기괴한 사연을 모아놓은 야담집인 <천예록>(天倪錄)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고성군의 시골 늙은이가 병이 들어 물고기로 변신했다’는 이야기의 사연은 다음과 같다.
죽음이 두려워 만든 환상일까
당시에 꽤 이름 있는 재상이 고성군수로 재직했다. 어느 날 고을의 좌수가 찾아왔다. 마침 식사 중이라서 군수가 밥상에 놓인 홍어탕 한 그릇을 먹으라고 주었더니 이상하게도 좌수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소식(素食)을 해야 하는 제삿날이라 먹지 못한다며 사양했다. 그러고는 슬픈 표정을 짓다가 그만 눈물을 뚝뚝 흘렸다. 깜짝 놀란 군수가 사연을 묻자 좌수가 말을 꺼냈다.
그에게는 세상에는 없는 망극한 사연이 있지만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이제야 군수에게 말한다면서 꺼낸 사연은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 이야기였다. 거의 100살 가까이 연로한 아버지가 언젠가 열병을 얻어서 불덩이같이 몸이 뜨거워지자 자손들은 곧 돌아가실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아버지가 집 앞에 있는 큰 냇물을 보면 병이 나을 듯하다고 고집했다. 아무리 말려도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셈이라”며 화를 내며 요구하는지라 결국 냇가로 데려갔다. 혼자만 있고 싶다고 또 고집해 하는 수 없이 혼자 있게 한 뒤에 다시 와보니 아버지가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가 홍어로 거의 다 변신했다. 아버지는 물에서 헤엄치다 사라졌고, 자식들은 아버지가 남겨놓은 모발과 이, 손톱을 모아 장사를 지냈다. 그 뒤로 자손들은 홍어를 먹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아들들은 남들이 홍어를 삶아 먹는 것을 보면 두렵고 떨리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고 고백했다.
홍어로 변신한 아버지 이야기는 부모를 향한 애틋한 감정까지 첨가됨으로써 기괴함과 눈물이 묻어난다. <천예록>의 저자는 이 사연을 놓고서 사람이 이러한 변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떳떳한 이치가 아니므로 변괴로 돌려야 한다고 평가했다. 한편, 나로서는 고령의 노인들이 물고기로 변신하는 사연이 특별히 궁금하다. 혹시 죽음이란 생명의 이화(異化)에 대한 두려움과 신비가 만들어낸 환상이나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죽음에 직면해 차라리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 물이나 바다로 회귀하고픈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이나 아닐까?
물고기로 변신한 많은 이야기는 <태평광기>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이렇게 다양하게 변형되면서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기괴하고 환상적인 사건으로 이해했다. 판타지가 유행하는 현대의 문화공간에서는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떠나 흥미로운 사연으로 재미있게 볼 여유가 더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