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 열전_02

醉月 2009. 10. 29. 09:19

불굴의 소녀, 잔다르크 vs 류관순

» 17살 때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패색이 짙던 조국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전장에 나섰던 잔다르크. 류관순은 ‘조선의 잔다르크’라 칭할 만하다.
잔다르크와 류관순은 둘 다 소녀의 몸으로 구국에 나서 민족의 수호자로 승화하는 등 닮은 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17살에 조국의 위난을 보고 떨쳐 일어났다는 점부터 같다. 1412년 프랑스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잔다르크는 17살 때인 1429년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패색이 짙던 조국을 구하기 위해 전장에 나선다. 1902년 역시 농부의 딸로 태어난 류관순도 17살 때인 1919년 3·1운동에 온몸을 던져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다.

두 사람은 또 종교적 열정과 정치적 신념을 결합해 어떤 고난에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인간상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잔다르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천사장 미카엘의 계시를 받고 전장에 뛰어들었으며, 류관순도 독실한 감리교인으로서 온갖 고비마다 투철한 신앙심으로 헤쳐나갔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은 또 직관에서 비롯되는 탁월한 정치적 통찰력을 발휘한다. 잔다르크는 (1) 프랑스가 하나님으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았으므로 반드시 승리한다 (2) 하나님으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역대 프랑스 왕의 대관식을 열던 랭스를 점령해 먼저 대관식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관순은 자신이 왜 그처럼 극한적 비타협투쟁을 벌이는지 이렇게 설명했다. “2천만 동포의 10분의 1만이라도 순국할 것을 결심한다면 독립은 저절로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적국의 탄압을 직접 경험하면서 성장했다. 잔다르크의 고향 동레미라퓌셀은 주민들이 프랑스의 샤를 황태자를 지원한다는 이유로 영국군과 부르고뉴군으로부터 여러 번 습격·약탈·살인·방화·납치의 피해를 겪었다. 류관순의 경우도 가족들이 세우고 다니던 매봉교회가 의병들을 돕는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여러 번 불태워졌다. 두 사람 다 적국에 붙잡혀 타협을 거절한 채 순국한 점도 같다.

류관순은 비록 잔다르크처럼 직접 전쟁터에 나가 결정적인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이런 유사성 때문에 프랑스쪽의 인정을 받아 파리 잔다르크기념관에 영정이 봉안되기에 이른다. 일본의 일부 교과서도 그를 사진과 함께 ‘조선의 잔다르크’로 묘사하고 있다.

 

[류관순] 한민족의 영원한 잔다르크

인물화폐 여성후보 3위 류관순… 역사상 그 어떤 남성 위인에도 뒤지지 않는 용기를 발휘하다

»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3·1운동 때 의암 손병희 선생도 고문실로 끌려갔다. 여러 놈이 고개를 젖혀서 눕힌 뒤 손 발 사지를 장의자에 붙들어 맸다. 입과 코에 걸레조각을 올려놓고 물을 들이붓는 것이다. 입과 코로 물이 들어가며 숨이 칵칵 막힌다. 5분, 10분 계속하면 배가 불러올 뿐만 아니라 숨이 막혀 기절하고 만다.… 그 다음날 또 고문실로 끌려가 ‘학춤’을 춘다. 바른손을 어깨 위로 돌리고 왼손을 허리 뒤로 돌려서 두 엄지손가락을 한데 단단히 매고 천장에 박아놓은 못에다가 바른 팔꿈치를 거는 것이다. 그 아래에는 숯불이 이글거리는 화롯불을 갖다놓는다. 동여맨 엄지손가락이 끊어질 듯이 아픈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깻죽지가 물러가고 가슴이 뻐개지며, 화롯불의 화기는 온몸을 엄습해 일초 동안도 견뎌내기 어렵다.… 의암은 보석으로 나온 뒤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혹독한 고문을 이기고…


“장로교의 대표로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남강 이승훈 선생도 숱한 고문을 당했다. 취조실에서 격검대로 하나둘 하나둘 하고 군호를 맞춰가며 어깨와 등 그리고 아무 데나 때리는 것은 오히려 대접해주는 셈이다. 고문실 장의자에 눕히고 잡아맨 뒤 고춧가루가 섞여 있는 설렁탕 국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는 것이다.… 게다가 화롯불에 부젓가락을 달궈 허벅지를 쑤셔댄다.… 남강 역시 출옥 뒤 일찍 돌아갔다.”

“3·1운동 당시 학생대표로 활동했던 김원벽도 몇달 동안 고문을 받았다.… 물 먹이고, 주리 틀고, 때리는 것으로도 입을 열지 않자 일본 경찰은 ‘잠 안 재우기 고문’을 동원했다. 눈을 조금 감기만 하면 바늘 끝으로 살을 찔러서 깜짝 놀라 깨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루 이틀 잠을 못 자게 한 뒤 잠깐 눈을 붙이게 한다. 그래서 잠이 들락말락하면 사정없이 두들겨서 깨우는 것이다.… 그 역시 출감 뒤 요절했다.”

» 충남 천안시 류관순 기념 매봉교회 안에 있는 류관순 기념동상.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조흔파는 <왜경고문비화>에서 3·1운동 뒤 체포된 민족지도자들이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전하고 있다. 민족지도자로 존경받는 의암이며 남강조차도 일본 제국주의 경찰은 얼마나 악독하게 고문했는지 느낄 수 있다. 특히 3·1운동과 관련한 체포자, 사망-부상자 수를 자세히 보면 일제가 시위자들을 체포하는 대신 진압 과정에서 기술적으로 무더기 학살하는 음모를 실행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예컨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체포자가 4만6948명인 데 반해 사망자가 무려 7509명, 부상자가 1만5961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건 체포를 통한 해산이 목적이 아니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류관순은 이 과정에서 체포된 조선인 4만여명 가운데 하나다. 그는 이 3·1운동의 불길 속에서 그 누구보다 밝고도 처절한 불꽃을 태웠다. 18살, 꽃 같은 나이에 조국의 해방을 위해 숨진 그는 겨레의 별이 되고 신화가 됐다.

류관순은 1902년 충청도 천안에서 독실한 감리교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류중권은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여 개화한 사람으로 사재를 털어 ‘흥호학교’라는 사립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관순은 그 뒤 장학생으로 서울 이화학당(이화여고의 전신)에 입학해 신식학문을 배우며 애국정신을 키웠다. 그는 정동제일교회에 다닐 때도 매일같이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기도했다고 한다. 1919년 3월1일 만세시위가 터지자 관순은 뒷담을 넘어서 다른 5명의 ‘시위특별결사대’와 함께 시위 행렬에 참가했다. 3·1운동의 여파로 학교가 휴교하자 관순은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갔다. 관순은 이곳에서 만세운동을 조직하기로 결심하고, 우선 가족이 다니던 매봉교회 어른들에게 만세시위에 대해 알리고 천안에서도 시위를 벌여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렇게 여학생의 몸으로 기독교인들, 동리 유지들, 향교의 유림까지도 설득해 참여케 한다. 시위 예정일이 아우내 장날인 1919년 4월1일로 잡히자 관순은 경찰의 눈을 피해 천안·목천·연기·청주·진천·안성 등지의 학교와 교회 그리고 유림을 돌며 시위 참가를 독려했다.

4월1일이 되자 관순은 장터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강제로 합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에게 갖은 학대와 모욕을 가했습니다. 10년 동안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온갖 압제에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 다 같이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

 

현대 여성들에게 자부심을 주는 존재

만세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거리행진이 벌어졌다. 일본 헌병에 이어 천안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 20여명이 들이닥쳐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일본 헌병의 총검 공격으로 사람들이 여기저기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장터는 피와 주검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이날 관순의 아버지 류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도 일본군이 휘두른 칼에 학살됐다. 관순은 주모자로 지목돼 체포됐다. 그는 천안헌병대를 거쳐 공주검사국, 공주재판소, 서울복심법원재판소, 서대문형무소로 넘어가는 동안 계속해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관순은 이렇게 옮겨가는 과정에서 사람이 모인 곳을 지날 때면 으레 ‘대한독립 만세’를 불러 호송하는 헌병들을 당황하게 했으며, 그 결과 칼에 찔리기도 했다. 공주재판소 법정에서 관순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선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들은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 그러자 검사가 “너희들 조선인이 무슨 독립이냐”고 핀잔을 주자 관순은 일어나 걸상을 들어 검사를 내리쳤다. 최종적으로 관순은 3년에서 7년으로 형이 더 늘어났다. 관순은 감옥에서도 여러 번 만세를 불러 그때마다 죽도록 매를 맞았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3·1운동의 1주년이 되는 날에도 감옥에서 만세투쟁을 벌이도록 조직했다. 이렇게 감옥에서도 굽히지 않고 수감투쟁을 하던 관순은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 영양실조 등으로 1920년 10월 감방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지난 1월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실시한 ‘10만원권 모델’을 묻는 설문에서 류관순은 1위 광개토대왕(40.7%), 2위 백범 김구(17.7%), 3위 신사임당(16.4%)에 이어 15.7%로 4위에 올랐다. 그가 2위권에 육박하는 호감을 네티즌으로부터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류관순이 ‘역사상 그 어떤 남성 위인에도 뒤지지 않는 용기를 발휘했다’는 점이다. 조흔파의 <왜경고문비화> 류관순 편을 보자.

“…관순은 취조를 받을 때에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곤 했다. 약이 오른 왜놈들은 다른 피의자에게 더 지독한 고문을 가했다. 국부에다가 수도 호스를 박고서 수돗물을 틀어놓기도 했으며… 거의 20개월 동안 하루같이 고문을 받았는데… 추운 겨울에 밖에 묶어 앉히고 수도 호스로 물벼락을 퍼부어 입은 옷과 살이 꽁꽁 얼어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면 집어다가 이글거리는 난로 옆에 놓아서 녹히곤 했으며, 어떤 때는 밧줄로 오랫동안 마구 때린 뒤 까부라지면 캄풀주사로 회생시키고 다시 때리곤 했다.”

» “화폐도 산업이다.” 중국 정부가 발행한 미인도 시리즈 기념주화 모조품.
그래도 관순의 영혼은 꺾이지 않았다. 연약한 육신이 일제의 물리력에 100%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계속 항전한 것이다. 역사상 류관순이야말로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고 조작돼온 ‘용기’의 월계관을 남성의 이마로부터 들어내 여성에게 씌워준 ‘일대 사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점차 여러 부분에서 남성들과 경쟁을 벌여야 하는 현대 여성들에게 류관순의 존재는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이어진다.

“슬픔도 힘” 한민족적 논법을 증명하다

또 하나의 요소는 관순이야말로 ‘슬픔도 힘’이라는 매우 한민족적인 논법을 증명하는 최고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제국주의와 독재에 패배하기만 해왔던 제3세계 민중들이 역사를 사랑하는 방식은 바로 죽을지언정 결코 굴복하지 않는 투사나 혁명가에 대한 연민과 존경이라고 할 수 있다. 니카라과의 산디노가, 볼리비아에서 죽은 게바라가, 필리핀의 호세 리잘이, 김구가 그런 대상인 셈이다. 이 과정에서 죽지도, 지지도 않는 승리자가 있다. 그 승리자와 민중의 관계는 일정 기간의 허니문이 지나면 치자와 피치자(잘못 발전하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그것으로 전환하곤 한다. 거기에는 이성과 현실은 존재하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감성과 상상력이 없다. 따라서 민중은 역사적으로 현실의 승리자와는 오래 ‘연애’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역사가 이성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기에 류관순이 있는 사이트에선 이 시대에도 눈물과 존경과 놀람과… 무엇보다 어린이들의 감동이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 어떤 인물의 사이트에도 이런 종류의 파토스는 없다. 그것은 바로 슬픔의 힘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벤처, 생명의학

19세기 자본주의의 팽창은 단지 해외에 식민지를 만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갈 수 없는 곳, 인간이 볼 수 없는 것들…. 그야말로 세계의 모든 것들이 이른바 식민(Colonization)의 대상이었다. 세계일주 열풍, 극지방을 먼저 정복하려는 각 나라들의 치열한 경쟁은 국가적 명예를 건 ‘벤처올림픽’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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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의 신화는 총 한번 쏘아보지 못하고 세균 감염에 죽어가는 크림전쟁의 양상 때문에 가능했다.

미지의 세계도 예외는 아니다. 19세기 서구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세균을 향한 정복전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뤄졌다.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구한다는 사명감만이 작용했던 것은 아니다. 현미경으로 보이는 세계, 새로운 생물종을 남보다 먼저 발견하고 정복하려는 사회적 욕망이 의학적 탐구의 열정과 맥을 같이하였다. 근본적으로 전쟁이었던 것이다. 영국의 제너를 비롯해서 프랑스의 파스퇴르, 독일의 코흐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세균전을 수행하는 장군들이고 전략가들이었다. 20세기 중반의 미국-소련 사이의 우주경쟁을 무색케 하는 의학전, 화학전이 열강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다.

질병 연구는 또 다른 특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전쟁터에서 군대의 전력을 보호하는 것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전쟁터에서 총에 맞아 죽는 군인들보다 병에 걸려 죽는 군인의 수가 거의 두배에 이르렀다. 아주 작은 부상조차도 병원균이 우글거리는 야전병원에서는 환자를 그대로 감염에 노출시켜 결국 죽음으로 내모는 형편이었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의 신화는 군인들이 총 한번 쏘아보지 못하고 병으로 죽어가는 크림전쟁의 양상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처럼 2차감염 등이 현저하게 줄어든다면 그런 신화의 약발도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질병의 연구는 국가전력 증강계획의 일부이기도 했다. 제너의 종두법에 따른 천연두 백신을 제일 먼저 사들이도록 지시한 것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이었다. 제너는 나아가 영국 정부의 청탁으로 천연두 백신을 프랑스에 판매하는 대신에 프랑스에 포로로 잡힌 영국군의 석방을 이뤄내기도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미국 국방부는 질병과 관련한 벤처 연구에 적잖이 투자하고 있으며, 그 연구 결과를 최우선적이고 독점적으로 미군에 활용하는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천연두와 제너, 그리고 지석영

» 천연두 백신의 개발자로 과학사에 이름을 남긴 에드워드 제너.
몇년 전까지만 해도 비디오테이프의 첫 부분에선 이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호환, 마마보다도 더 무서운 음란물 테이프….” 얼마나 천연두가 끔찍했으면 청소년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음란물 경고문구에까지 등장시켰을까? 요즘 사람들은 상상하기조차 힘들지만 천연두는 인류에게 그만큼 끔찍한 재앙이었다.

치사율 30%에, 심각한 곰보 자국을 얼굴에 남기는 천연두의 재앙을 막기 위해 인류는 온갖 경험과 지혜를 짜냈다. 심지어 천연두 환자의 고름을 정상인의 몸에 주입하는 방법도 있었다. 인도에서부터 유래한 전통예방법인 ‘인두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천연두에 감염되는 경우가 많은 등 부작용이 심했다. 어쨌든 이 방법은 초보적인 면역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천연두 백신의 개발자로 과학사에 이름을 남긴 에드워드 제너의 업적은 이 인두법을 우두법으로 바꾼 데 있다. 시골 의사였던 제너는 천연두에 걸린 소에게 감염된 적이 있는 농부들은 인간천연두에는 감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천연두에 걸린 소에게서 고름을 짜내 인공적으로 사람의 몸에 주입했다. 동물실험조차 거치지 않은 생체실험이었다. 다행히 피시술자는 성공적으로 천연두에 면역기능을 갖게 되었다. 소천연두균은 인간천연두균보다 독성이 약해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항체를 생성해주었기 때문이다.

제너의 시대에 면역이나 항체와 같은 개념은 물론 존재하지 않았고, 천연두가 세균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은 더더욱 알려지지 않았다. 제너 자신도 그런 사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는 경험해서 아는 일들을 과학적으로 재구성한 것뿐이다. 천연두 백신의 개발로 그는 한순간에 부와 명예를 얻었다. 국왕으로부터 직접 여러 차례의 하사금을 받았고, 자신의 발명품을 팔아 돈방석에 앉았다. 당시 제너의 가장 큰 반대자들은 인두법의 시술로 돈을 벌던 의사들이었다.

한국에는 1882년 지석영이 처음으로 우두법을 들여왔다. 개화파로서 서구 의학을 국내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데 앞장섰던 그는 일본에서 우두를 들여왔다. 맨 처음 자신의 2살 난 처남에게 시술해 이 땅에 첫 번째 종두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수구척사파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갑신정변 때 지석영의 종두학교는 성난 군중에 의해 불타버렸고, 그는 도피해야만 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영결식에서 영결사를 읽은 것으로 전해지는 친일 행적 때문에, 지석영은 지난해 고향인 부산시가 선정하는 ‘부산을 빛낸 21인’의 명단에서 빠지기도 했다.

 

[파스퇴르] “세균의 세계를 완전정복하라”

인류질병 해결의 길을 제시한 세균학과 면역학의 아버지 루이 파스퇴르, 그가 곧 한국에서 부활한다

 

21세기, 새로운 세균전이 시작되고 있다. 인류가 ‘세균의 완전정복’을 호언한 것을 비웃듯이 세균의 대대적인 역습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루이 파스퇴르(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1980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천연두의 절멸을 선포했다. 세균에서 비롯된 전염병은 지나간 시대의 흔적처럼 여겨졌다. 언젠가 다시 천연두 백신을 만들기 위해 엄중하게 경비하며 보관하는 천연두균을 완전히 없애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던 의학계의 낙관론을 비웃듯이, 세균들은 오만한 인류를 향해 통렬한 어퍼컷을 날렸다. 천연두 정복 2년 뒤 인류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의 공포에 빠져들어야 했다. 1990년대에는 어떤 항생제도 듣지 않는 괴질성 에볼라바이러스의 창궐 앞에 몸을 떨어야 했고, 21세기의 문을 연 9·11 테러 직후에는 탄저병균의 ‘백색 분말’ 앞에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역사가 처음 시작되는 것처럼 갑자기 이 미생물들은 인류 앞에 존재를 내밀기 시작했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에서 조류독감, 광우병, 구제역에 이르기까지 병균들은 새롭게 변신한 몸으로 무장하고 인간을 공격하고 있다.


‘산학협동’으로 포도주산업 일궈

다시 밀어닥친 이 길고도 험난한 세균과의 싸움 한복판에 한 거인이 서 있다. 루이 파스퇴르 (Louis Pasteur)다. 우리에게는 우유살균법으로 더 친근하게 알려진 이름이지만, 그는 세균학과 면역학의 아버지이고 광견병과 탄저병 백신 등 많은 백신을 만든 화학자이자 의학자이다. 바로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19세기 이후 인류에게 가장 다양하고 광범한 혜택을 가져다준 인물 가운데 랭킹 1~2위를 다투고 있다.

» 루이 파스퇴르가 말년에 세운 파스퇴르연구소.
1864년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학의 한 실험실. 화학과 교수인 파스퇴르가 목이 구부러진 플라스틱병을 앞에 놓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끓인 설탕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설탕물은 몇주일째 아무 변화도 없이 그냥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미 이 조그만 유리병이 가지는 의미를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 기술적으로 공기가 차단된 유리병 속의 물체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생명현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그것이 바로 이 실험의 요체였다. 한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생명은 생명으로부터만 기원한다는 자연속생설(自然續生說)이 수백년을 지배해온 자연발생설을 뒤집는 순간이었다. 나아가 공기를 차단하면 어떠한 생명현상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현상을 일으키는 또 다른 생명체들이 공기 속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이름은 바로 ‘세균’이었다.

파스퇴르는 화학자로서 출발했다. 농업지역인 스트라스부르대학의 화학과 교수로서 그는 포도주를 상하게 하는 원인의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인근 농장주들로부터 연구 의뢰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가 발견한 것이 ‘효모’다. 파스퇴르는 효모가 포도주 맛을 결정하는 핵심임을 깨닫고는 곧 가장 적합한 효모를 배양해냈다. 나아가 포도주 맛을 상하게 하는 나쁜 세균들을 살균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바로 그의 이름을 딴 저온살균법인 ‘파스퇴라이제이션’(Pasteurization)이다. 산학협동의 결과로 프랑스의 포도주는 세계 제일의 경쟁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의 연구는 이처럼 의학·화학·생물학 등 여러 분야에 걸치는 것이었고 그 밑바닥에는 늘 세균이라는 작은 생물이 있었다.

» 파스퇴르연구소는 AIDS 백신 제조공장을 짓기 위해 한국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파스퇴르가 고안한 S자형 유리 플라스크들.
파스퇴르 시대만 해도 사람들은 세균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이 비과학적이고 심지어 미신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파스퇴르는 세균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입증한 최초의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는 탄저병 세균을 분리해내고 그 병균과 백신을 각기 다른 그룹의 양떼에게 주사했다. 그 결과 병균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것과, 백신을 통해 그 질병을 미리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동시에 증명했다. 이제 사람들에게 질병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가 몸이 아프다면, 그것은 어딘가가 세균에 감염됐다는 것을 뜻하게 됐다.

19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질병의 원인은 이른바 ‘나쁜 공기’(miasma)거나 ‘체질’이었다. 나쁜 공기란 오늘날과 같은 환경오염이 아니라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사악한 기운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질병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파스퇴르는 세균의 존재를 ‘발견’한 데 이어 그 세균을 약화시켜 인체에 주입하면 면역기능이 생긴다는 것도 입증했다.

과감한 공개실험으로 승부수

이제 질병은 증상이 아니라, 그 증상을 일으키는 특정한 세균들에 의해 분류됐다. 그리고 치료는 그 세균들을 말살하는 쪽으로 모아졌다. 말하자면 대세균전이 치료법으로 확립됐다. 페니실린과 같은 항생제의 개발은 바로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는 세균학과 면역학의 문을 동시에 열어젖혔고, 현미경으로 보아야만 알 수 있는 미시의 세계가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전쟁터임을 보여주었다.

전쟁터는 늦게 발견됐지만, 전쟁은 빠르게 진행됐다. 1880년대까지 인간이 개발한 세균백신은 천연두, 광견병, 탄저병 등 겨우 열손가락을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20년 뒤 수백종의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과 그 백신이 탄생했다. 갑자기 세균은 인류생활을 지배하는 존재로 부상했다. 19세기 후반까지도 피묻은 손으로 수술하던 의사들이 진료 전에 반드시 손을 씻도록 된 것도 바로 세균전파설 때문이다. 모든 병원이 의무적으로 소독을 하게 됐다. 이제 인간들은 깨끗해 보이는 옷감, 음식 그리고 생활용품에서도 세균을 발견해냈다. 어디도 안전한 곳은 없었다. 신체적인 접촉은 물론, 잔을 돌리거나 키스조차도 위험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악수도 위험했다. 인간들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의 영역은 제한되기 시작했다. “당신이 지금 잡고 있는 지하철 손잡이에는 수백만 마리의 세균이 서식하고 있습니다”라는 으스스한 문구로 시작하는 멸균비누 광고는 바로 이 시대에 뿌리를 둔다고도 할 수 있다.

» 파스퇴르는 천재형보다는 노력형에 가까운 과학자다. 끈질기게 반복된 시행착오를 견뎌냈고, 탁월한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기도 했다.

‘세균혁명’에 따라 인간의 평균수명은 기록적으로 늘어났다. 세균시대의 마지막 위대한 발명품인 페니실린을 끝으로 정말 인간들은 세균의 세계를 ‘정복’했다고까지 믿었다.

파스퇴르는 천재형보다는 노력형에 더 가까운 과학자다. 무엇보다 그는 끈질기게 반복된 시행착오를 견디는 인내의 미덕이 대단히 뛰어났다.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도전자들과 일일이 맞서 싸워야 했고, 뇌졸중에 걸려 몸이 마비되는 병마와도 싸워야 했다. 인내보다도 더 탁월했던 것은 승부사로서의 기질이다. 어느 의미에서 그의 과학적 명성은 실험실에서 확립되었다기보다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미완성품을 과감하게 공개실험을 통해 입증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광견병백신 역시 아직 동물실험조차 다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강행한 것이다. 미친 개에게 물린 9살 난 소년에게 주사약을 투입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도박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체실험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었다. 다행스럽게 그의 모든 공개실험은 성공으로 끝났다.

나폴레옹 제치고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에

그는 과학자의 윤리라는 기준에서 의심받을 수 있는 행동도 여러 차례 벌였다. 사실 몇몇 실험은 그의 조수나 공동연구자의 실험을 가져다 자기 이름으로 내건 것이다. 그러나 국제적인 그의 명성은 그런 비난을 모두 묻어버렸다. 그가 자연속생설을 확고한 신념으로 가졌던 것은 과학적 발견의 결과라기보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신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최근 과학사 학자들은 그의 연구노트를 검토한 결과 그가 자연발생설에 유리한 실험결과들을 고의적으로 무시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광견병백신의 발명도 사실은 그 원인균을 확인하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는 “세균이 이 병을 전파한다”고 주장하고 백신까지 만들기는 했지만, 광견병 세균은 전자현미경으로나 관찰할 수 있는 바이러스다.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우뚝 서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으로 존경하는 인물’로 나폴레옹 등을 제치고 그에게 1위의 영광을 안겨주기도 했다. 파스퇴르가 말년에 국가적인 의학연구를 위해 연구소를 세우자고 제안했을 때 프랑스 정부와 국민은 기꺼이 거액을 내놓았다. 바로 세계적인 명성을 날리고 있는 ‘파스퇴르연구소’다. 이 연구소는 80년대 말 최초로 AIDS바이러스를 확인해냈다. 그리고 지난해 AIDS백신 제조공장을 짓기 위해 한국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파스퇴르는 우리 곁에 다시 부활할 참인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신생아일 때 맞는 그 종합백신이 아니라면, 당신이 지금 살아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