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_02

醉月 2009. 10. 30. 18:15

칼을 찬 선비, 칼을 품은 선비

명종 치하 ‘사화의 시대’에 제수된 벼슬을 한사코 거부한 남명 조식…

“문정왕후는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상소로 조정 흔들어

언제부턴가 선비와 칼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72)은 달랐다. <남명선생 별집(別集)> ‘언행총록’(言行總錄)은 조식이 “칼을 차는 것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경상감사 이양원(李陽元)이 조식에게 부임 인사를 하며 “무겁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자 “뭐가 무겁겠소. 내 생각에는 그대 허리춤의 금대(돈주머니)가 더 무거울 것 같은데…”라고 답한 일화가 전해지는데, 그의 칼에는 검명(劍銘)이 새겨져 있었다.

 

과거를 버리고 학문을 얻다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시비를 결단하는 것은 의다.”(義內明者敬/ 外斷者義)

» 칼을 차는 것을 좋아했던 남명 조식. 그는 명종 때의 정치가 하늘의 뜻, 즉 백성들의 마음과 어긋난다고 보았다. (사진/ 권태균)

칼에 새긴 글은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는데 많은 사대부들이 형이상학을 논할 때 경(敬)과 의(義)를 새긴 칼을 차고 다녔다는 자체가 남다름을 말해준다. 증조부가 한양에서 경상도 삼가현(三嘉縣)으로 이주하면서 조식의 집안은 이 지역에 정착했는데, 그도 어린 시절 과거 공부를 했으나 곧 과거가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알게 된다. 20살 때인 중종 15년 문과 초시에 합격했으나 송인수(宋麟壽·1499∼1547)가 선물한 <대학>(大學)의 책갑에 쓴 발문에 “과거 시험은 애초에 장부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라고 쓴 것이 이를 말해준다. 19살 때인 중종 14년(1519) 조광조가 죽는 기묘사화가 발생하는데, 숙부 조언경이 함께 파직된 것도 과거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조식은 25살 때 친구와 산사에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던 중 원나라 허형(許衡)의 글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윤(伊尹)에 뜻을 두고 안자(顔子)의 학문을 배워, 벼슬길에 나아가면 큰일을 해내고, 초야에 숨어살면 자신을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글이었다. 이윤은 탕왕(湯王)이 하(夏)나라의 폭군 걸왕(桀王)을 정벌하고 은(殷)나라를 세우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인물이며, 안자(顔子), 즉 안회(顔回)는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사자성어를 만들 정도로 가난을 선비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인물이다. 벼슬에 나가면 대대적인 개혁을 하고 초야에 은거하면 가난 속에서 도를 찾는 선비가 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벼슬에 나가 이윤처럼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기에는 당시 정치 상황이 좋지 않았다. 부친과 모친의 권유로 몇 번 더 과거에 나가기는 했으나 <대학> 발문에, “문장이 과거문장(科文)의 형식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이미 마음은 과거를 떠나 있었다. 30살 때 김해로 이주해 신어산(神魚山)에 산해정사(山海精舍)를 짓고 45살 때까지 거주했는데, ‘산해’(山海)는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큰 학문을 하겠다는 뜻으로서 주자학의 굴레에 갇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연보>에 따르면 조식은 37살 때인 중종 32년(1537) “세상의 도리가 어긋나고 시속이 흐려져 과거로 출세한다는 것은 곧 이에 가담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고, 어머니께 예를 갖추어 아뢰고 과거 공부를 영영하지 않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바로 그해 학문을 가르쳐주기를 청하는 정지린(鄭之麟)을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그가 훗날 북인(北人)이란 당파를 형성하는 첫 제자였다.

세상사는 묘한 것이어서 과거를 포기한 이듬해부터 벼슬이 찾아왔다. 38살 때 이언적(李彦迪)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했다. 이윤(伊尹)에게 뜻을 두고서도 그 뜻을 펼칠 수단인 벼슬을 포기한 것은 당시 정치 지형에 대한 거부 때문이었다. 당시는 척신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하는 사화의 시대였다. 45살 때인 인종 1년(1545)의 을사사화로 여러 친구가 희생된다. 병조참의 이림(李霖)은 사사(賜死), 사간원 사간 곽순(郭珣)은 옥사(獄死), 성운(成運)의 형 성우(成遇)는 이들을 옹호하다가 ‘역적을 구원하고 공신을 모욕한다’고 장사(杖死)한다. 조식은 죽을 때까지 이들을 잊지 못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분노했다. 명종 2년(1547)에는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대학>을 보내주었던 친구 송인수가 사사(賜死)당했다. 명종의 모후 문정황후와 그 동생 윤원형이 주도한 사화였다. 명종 3년(1548) 전생서(典牲暑)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명종 6년(1551) 종부시 주부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거절한 것은 이런 정치 환경에 대한 거부감의 표출이었다.

» 조식의 묘에서 바라본 지리산 천왕봉. 조식은 죽는 순간까지 처사의 재야 정신을 지켰다. (사진/ 권태균)

지금 읽어도 놀라운 단성현감 사직상소

조식의 거듭된 출사 거부는 뜻밖에도 퇴계 이황과 작은 논쟁으로 이어진다. 명종 8년(1553) 이황은 조식에게 편지를 보내 벼슬을 사양한 데 대한(‘여조건중’(與曹楗仲))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자 조식은 이황에게 답장을 보내 “식(植)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어찌 자신을 아껴서 그랬겠습니까?”라고 답하면서 “단지 헛된 이름을 얻음으로써 한 세상을 크게 속여 성상(聖上)에게까지 잘못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도둑이라 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물건(관직)을 훔치는 데 있어서겠습니까?(‘퇴계에게 답합니다’(答退溪書))”라고 덧붙였다. 퇴계 이황은 조식의 편지에 마음이 상했다. 사림의 종주인 자신의 천거마저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식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천거했는지가 아니라 그 시대의 의미였다. 두 사람의 이런 출사관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조식이 명종 10년(1555)에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즉 ‘단성현감(丹城縣監) 사직상소’였다.

조식이 단성현감 제수를 사양하는 이유로 먼저 든 것은, 자신은 헛된 명성만 있지 벼슬을 감당할 만한 인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뒤이어 명종 즉위 뒤의 정사에 대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혹평했다.

“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天意)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면서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오직 재물만을 불립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신은 이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며 낮에 하늘을 우러러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한탄하고 아픈 마음을 억누르며 밤에 멍하니 천장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명종실록> 10년 11월19일)

이는 명종의 10년 치세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와 인심이 떠났다’는 말은 명종에게 천명이 떠났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더 놀라운 표현이 등장한다.

“자전(慈殿·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명종실록> 10년 11월19일)

문정왕후에 대한 언급은 당대의 금기였다. 조식의 친구들이 죽은 을사사화나 양재역 벽서 사건은 모두 문정왕후와 관련된 것이었다. 명종 2년(1547) 경기도 광주의 양재역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 등이 권세를 종간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는데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벽보가 붙은 것이 양재역 벽서 사건인데, 조식의 친구 송인수를 비롯해 많은 사림들이 죽었고, 이후 문정왕후에 대한 언급은 금기 중의 금기가 되었다. 그런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지칭하고, 명종을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라고 했으니 평상시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언급인데 하물며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실권을 장악한 사화 때였다. 그러나 윤원형과 문정왕후는 조식을 죽이지 못했다. 은거 선비의 사직 상소를 가지고 죽이는 것은 도리어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단성현감 사직상소’는 은거 처사 조식을 단숨에 전국 제일의 선비로 만들었다. 사관(史官)이 ‘사신은 논한다’에서 “유일(遺逸·은거한 인사)이란 이름을 칭하고 공명을 낚는 자가 참으로 많은데, 어질도다. 조식이여!”라고 칭찬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퇴계집> ‘언행록’에 따르면 이황은 오히려 조식의 상소를 비판했다.

“선생은 남명의 상소를 보고 사람에게, ‘대개 소장은 원래 곧은 말을 피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자세하고 부드러워야 하며 뜻은 곧으나 말은 순해야 하고, 너무 과격하여 공순하지 못한 병통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아래로는 신하의 예를 잃지 않을 것이요, 위로는 임금의 뜻을 거슬리지 않을 것이다. 남명의 소장은 요새 세상에서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지만, 말은 정도를 지나 일부러 남의 잘못을 꼬집어 비방하는 것 같았으니 임금이 보시고 화를 내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 조식이 61살 되던 해에 지리산 덕천동에 지은 산천재. 그는 72살 때인 선조 5년 이곳에서 삶을 마쳤다. (사진/ 권태균)

백성은 나라를 엎을 수도 있는 존재

그러나 조식은 척신 윤원형이 주도하던 명종 치하에서 ‘임금의 뜻을 거슬리지 않고’ 의를 추구할 수 없다고 보고 상소를 올린 것이다. 사관은 조식의 상소를 둘러싼 논란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오늘날과 같은 때에 이와 같이 염퇴(恬退·고요하게 은거함)한 선비가 있는데, 그를 높여 포상하거나 등용하지는 않고 도리어 그를 공손하지 못하고 공경스럽지 못하다고 책망하였다. 그러니 세도가 날로 떨어지고 명절(名節)이 땅에 떨어진 것이 당연하며, 위망(危亡)의 조짐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명종실록> 10년 11월19일)

조식이 분개한 것은 명종 때의 정치가 하늘의 뜻과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하늘의 뜻이란 곧 백성들의 마음이었다. ‘민암부’(民巖賦)에는 이런 생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경>(書經) ‘소고’(召誥)의 “백성의 암험함을 돌아보아 두려워하소서”란 글에서 나온 ‘민암’(民巖)은 ‘백성은 나라를 엎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민암부’는 ‘단성현감 사직상소’가 평소 그의 소신임을 말해준다.

“…백성이 물과 같다는 말은/ 예로부터 있어왔으니/ 백성은 임금을 받들기도 하지만/ 백성은 나라를 엎어버리기도 한다/ …한 사람의 원한과 한 아낙의 하소연이 처음에는 하찮지만/ 끝내 거룩하신 상제(上帝)께서 대신 갚아주시니/ 그 누가 감히 우리 상제를 대적하랴/ …걸(桀)왕과 주(紂)왕이 탕(湯)왕과 무(武)왕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바로 백성에게 신임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부로서 천자가 되었으니/ 이처럼 큰 권한은 어디에 달려 있는가?/ 다만 우리 백성의 손에 달려 있다/ …백성을 암험하다 말하지 말라/ 백성은 암험하지 않느니라.”

백성이 나라를 엎어버리기도 하고 천자가 되는 것도 백성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조식과, 백성은 사대부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피지배층이라고 생각하는 주자학자들과는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식의 사상은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았다. ‘단성현감 사직상소’에서 “불씨(佛氏·석가모니)의 이른바 진정(眞定)이란 것은 다만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일 뿐이니, 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데 있어서는 유교와 불교가 한가지입니다”라며 불교와 유교의 근본원리가 같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인물이 조식이었다.

조식은 45살 때 모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48살 되던 해에 삼가현 토동(兎洞)에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학문에 몰두했는데, <장자>(莊子) ‘재유’(在宥)에 나오는 ‘뇌룡’은 ‘고요히 있지만 신비한 조화가 드러나고 천둥 같은 소리가 난다’는 뜻으로서 은거함으로써 세상을 움직이겠다는 의지이다. 이황이 “남명의 본 바는 실로 장·주와 같다”라고 비판한 것은 조식이 이처럼 장자의 학설도 배척하지 않고 수용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조식은 61살 되던 명종 16년(1561) 지리산 덕천동에 산천재(山川齋)를 지어 이주했는데, ‘산천’이란 <주역>(周易) ‘대축괘’(大畜卦)의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밖으로 빛을 드러내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그는 갓 즉위한 선조가 교지로 부르자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려 사양하면서 개혁을 주문했다. 그리고 72살 때인 선조 5년(1572) 산천재에서 세상을 마쳤다. 세상을 떠나기 전 제자들이 사후의 칭호를 묻자 “처사로 쓰는 것이 옳다. 만약 이를 버리고 벼슬을 쓴다면 이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처사의 재야 정신을 죽는 순간까지 지녔던 것이다.

 

북인 제자들, 대거 의병장으로

칼을 찬 선비 조식의 진가는 임진왜란 때 발휘되었다. 그의 제자들이 대거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이다. 제자이자 외손서인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해 수제자(首門) 격인 정인홍(鄭仁弘)과 김면(金沔), 그리고 조종도(趙宗道)·이노(李魯)·하락(河洛)·전치원(全致遠)·이대기(李大期)·박성무(朴成茂) 등 쟁쟁한 의병장들이 모두 조식의 제자였다. 그의 제자들로 형성된 북인은 의병장을 대거 배출하며 정권을 장악했고, 처사 조식은 선조 36년(1602)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광해군과 전란 극복에 힘쓰던 북인은 인조반정으로 정계에서 축출되고, 주요 인사들이 사형되면서 정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조식이 64살 때인 명종 19년(1564) 이황에게 보낸 편지는 오늘의 현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질하는 법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서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칩니다.”(‘퇴계에게 드립니다’(與答退溪書)

 

혁명을 꿈꾸며 농사를 짓다

아버지와 형을 당쟁으로 잃고 벼슬 대신 농사와 학문을 택한 성호 이익…

서얼·농민·노비의 등용 주장하고 중화주의 거부한 조선후기 철학의 혁명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당쟁과 뗄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의 가문은 서울의 정동(貞洞)이 기반이던 남인 명가였으나 정작 그의 출생지는 평안도 벽동군(碧潼郡), 부친 이하진(李夏鎭)의 유배지였다. 출생 한 해 전에 서인이 남인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1680)이 일어나면서 부친이 유배된 것이다. 대사간을 역임한 부친은 이익을 낳은 이듬해(1682) 배소(配所)에서 55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숙종실록> 8년(1682)조는 이하진이 ‘분한 마음에 가슴 답답해하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갓난 이익에게 당쟁은 운명이었다. 이익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둘째형 이잠(李潛)이 숙종 32년(1706)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를 옹호하며 집권당 노론을 강력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이익은 다시 당쟁에 휘말린다.

» 성호 이익은 골방에 갇혀 책만 파는 지식인이 아니라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독서를 병행하는 사농의 삶을 살았다. 이익의 초상.(사진/ 권태균)


헤아릴 수 없이 형장을 맞다 죽어간 형

“춘궁(春宮·세자)을 보호하는 자는 귀양 보내어 내치고 김춘택(金春澤)에게 편드는 자는 벼슬로 상주니, 어찌 전하께서 춘궁을 사랑하는 것이 난적을 사랑하는 것만 못하시어 그렇겠습니까? 권세 있는 척신(戚臣)이 일을 농간한 것입니다.”(<숙종실록> 32년 9월17일)

이 상소에 격분한 숙종은 일개 유학(幼學)에 지나지 않는 이잠을 친국(親鞫)하면서 분개했다.

“죄인이 지극히 방자하다. 내 앞에서도 도리어 이러하니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이러한 놈은 내가 참으로 처음 보았다. 각별히 엄하게 형신(刑訊)하라.”(<숙종실록> 32년 9월17일)

숙종은 이잠을 ‘반드시 죽여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며 나장(羅將)이 신장(訊杖)을 가볍게 친다는 이유로 가두라고 명할 정도였다. 이잠은 묶은 것을 풀어주면 실토하겠다고 청했지만 거부당한 채 형장(刑杖)만 열여덟 차례 맞다 장사(杖死)했다. 한 번 형신에 약 30대씩이니 이잠이 맞은 대수는 세기도 어려웠다. 경종 때 소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 보궐정오>는 이잠이 ‘이 상소를 올려 스스로 춘궁(春宮)을 위하여 죽는다는 뜻에 붙였는데, 그 어머니가 힘껏 말렸으나 그만두지 않고, 드디어 극형을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잠은 노론이 세자(경종)를 내쫓으려고 한다고 주장하다가 사형당한 것인데, 이 주장은 훗날 경종독살설에 의해 사실로 입증되기도 했다. 장희빈을 죽인 노론으로서는 그 아들까지 제거해야 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조국가에서 저군(儲君)이라 불리는 세자의 지위를 흔드는 것도 반역이란 점에서 이잠의 상소는 남인 당론을 뛰어넘는 우국충정일 수 있었다. 그러나 숙종이 스스로 노론의 정견을 가지면서 세자의 충신이었던 이잠은 숙종의 역적이 되어 죽어갔다.

이잠의 상소 사건이 일어나자 ‘이잠의 친척이나 친구들은 혹시 화가 미칠까 두려워 손을 흔들며 피했다’고 전하는데, 스물여섯이었던 이익은 그때 선영이 있는 첨성촌(瞻星村)으로 이주했다. 성호(星湖)라는 호는 여기에서 딴 것인데, 행정구역상으로는 광주(廣州)에 속했지만 실제로는 서해 가까운 안산에 속한 지역이었다.

첨성촌으로 이주한 그는 “화난(禍難)을 당해서 곤박(困迫)한 지경에 빠져 과거 공부에 뜻을 접었다”라고 과거 공부를 포기했음을 밝혔다. 그러나 그는 “집에 장서 수천 권이 있어서 때로 이를 보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게 되었다”라고 공부마저 포기하지는 않았음을 전한다. 게다가 벼슬길이 막힌 채 골방에 갇혀 책만 파는 머리만 큰 지식인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 그는 ‘성호 농장(星湖之莊)에서 몸소 경작(耕作)했다’는 기록처럼 스스로 농사를 지으면서 농사와 독서를 병행하는 사농(士農)일치의 삶을 살았다. 그는 “사(士)가 때를 얻지 못하면 농(農)으로 돌아가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는 데 힘쓰고, 또 그 지식은 후생을 가르치면 족하다”(<향거요람서>(鄕居要覽序))라고 농사와 독서를 병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는 “농포(農圃) 일무(一畝)를 가꾸어 내 손으로 남과(南瓜·호박)를 심어 누렇게 익는 것을 기다려 수장(收藏)했다가 겨울철에 지져서 돼지국을 만들어 반찬으로 먹으면 그 맛이 달다”라는 글도 남겼다. 농경에 종사하면서 그 시대 사대부들이 천시하는 노동의 철학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노동의 철학 속에서 그는 사회 개혁을 주장한다.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반드시 변혁(變革)이 따르게 마련인데, 이는 통상적인 이치이다”라며 개혁을 시대의 요구라고 주장하고, ‘몸소 농사의 어려움을 아는 자 가운데 덕망 있는 인재’를 등용하자고 주장했다. 이런 인재들만이 극심하게 편중된 토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왕도정치는 전지(田地)의 분배를 근간으로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구차할 뿐이다. 분배가 균등치 못하고 권리의 강약이 같지 않은데 어찌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면서 균전제를 주장했다. 그의 균전법(均田法)은 일종의 한전법(限田法)으로서 일정 규모 이상 농토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 이익은 당쟁의 본질을 이해관계라 보고, 노동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호사설>(맨 위)과 이익의 간찰.(사진/ 권태균)

“당쟁의 근원은 이해관계다”

이익은 집권 노론의 정치 보복으로 부친과 형을 잃었으나 남인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이익은 부친과 형의 정견을 올바르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실제로 남인들의 정견은 노론보다 객관적으로 시대정신에 부합했다. 그러나 이익은 남인의 자리라는 현상을 뛰어넘어 부친과 형을 죽인 당쟁의 본질에 천착했다. 당쟁의 본질에 천착하다 보니 정치의 본질에 대해서는 오히려 소박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맹자(孟子)가 왕도를 논한 것을 보면 ‘보민’(保民) 한 구절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보민이라는 것은 바로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주고 모이게 하며, 싫어하는 것을 베풀지 않을 따름이요, 집에까지 가서 날마다 보태주는 것은 아니다.”(<유민환집>(流民還集))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정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소박한 생각이 실천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정치는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인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극적 가족사를 뛰어넘은 그의 정치 평론은 마치 현재의 정치 상황을 말하는 듯 생생하다.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그 싸움은 이해관계에서 생긴다. 이해가 절실할수록 당파는 심해지고, 이해가 오래될수록 당파는 굳어진다. …이제 열 사람이 모두 굶주리다가 한 사발 밥을 함께 먹게 되었다고 하자. 그릇을 채 비우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난다. 말이 불손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말이 불손하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다른 날에… 태도가 공손치 못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싸움이 태도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다른 날에는… 밥 먹는 동작에 방해를 받는 자가 부르짖고 여럿이 이에 응하여 화답한다. 시작은 대수롭지 않으나 끝은 크게 된다. 그 말할 때에 입에 거품을 물고 노하여 눈을 부릅뜨니, 어찌 그다지도 과격한가. …이로 보면 싸움이 밥 때문이지, 말이나 태도나 동작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해(利害)의 연원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는 그 그릇됨을 장차 구할 수가 없는 법이다.”(‘붕당론’, <성호집> 권25, 잡저)

‘말이 불손하다’ ‘태도가 공손치 못하다’는 등의 여러 명분으로 포장하지만 당쟁의 연원은 이익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주위의 ‘여럿이 이에 응하여 화답’하지만 싸움 끝의 이익은 정치인이 가져간다는 것이다. ‘대개 이(利)는 하나인데 사람이 둘이면 당이 둘이 되고, 이는 하나인데 사람이 넷이면 당이 넷이 되는’ 당쟁의 구조가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 붕당(朋黨)의 화도 그 근원을 따지면 벼슬하려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혹 이로써 죄를 얻어 멀리 내쫓김을 당한다 할지라도 얼마 안 되어 그 거리의 원근을 따져서 높은 지위로 뽑아올리니, 마치 자벌레가 제 몸을 한 번 굽혀서 한 번 펴기를 구하는 것처럼 죽을 경우를 겪어도 꺼리지 않는 이가 있다.”(‘귀향’, <성호사설> 제23권)

당쟁이 치열하다 보니 최소한의 명분도 사라지고 오직 자당에 유리한가 불리한가만 따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한 비판은 격렬하다.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고 서학도 수용

“당파의 폐습이 고질화되면서 굳이 자기 당이면 어리석고 못난 자도 관중(管仲)이나 제갈량(諸葛亮)처럼 여기고, 가렴주구를 일삼는 자도 공수·황패(?遂·黃覇·중국 한나라 때 명 목민관들)처럼 여기지만 자기의 당이 아니면 모두 이와 반대로 한다.”(‘당습소란’(黨習召亂), <성호사설> 제8권)

»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이익이 세운 사상체계는 조선 후기 철학의 혁명이었다.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이익 사당.(사진/ 권태균)

당쟁의 구조를 간파한 이익이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편당심이다. 이익은 ‘편당 속에서 성장하면 비단 남에게 밝히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깨닫지 못한다. 참으로 밝은 지혜에다 결단성을 지니지 않으면 이를 뛰어넘어 높은 경지에 오르기 어렵다’(‘당론’(黨論))며 편당심을 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쟁의 문제점에 대한 이익의 해결책은 신선하다. ‘이(利)가 나올 구멍을 막고 백성들의 마음을 안돈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벼슬아치의 사익을 창출하는 정치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야 이를 탐해 ‘벼슬을 하려는 자가 적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조선 후기 들어서 시대의 요구와는 거꾸로 소수 벌열에게 권력이 집중되는데, 이익은 이런 왜곡된 정치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획기적인 제안을 한다. ‘오늘의 벼슬아치들은 모두 종당(宗黨·친척당)과 사돈붙이가 아님이 없어서… 서로 결탁하여 대를 이어가면서 벼슬을 독차지’하는 직업 정치인들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공경(公卿)들에게 미천한 사람들의 농사일을 알게 하려면 반드시 벌열이란 칼자루 하나를 깨뜨려 없애고, 몸소 농사의 어려움을 아는 자 가운데 덕망 있는 인재를 가려 높여서 등용해야만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농사꾼 중에 인재를 발탁하자’(薦拔?畝), <성호사설> 제10권)

이익은 사대부만이 아니라 서얼·농민, 나아가 노비까지도 등용하자는 획기적인 방안을 내놓는다. 세습적 직업 정치가인 소수 벌열에게 집중된 정치구조를 깨트리고, 노동의 어려움을 아는 덕망 있는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안으로 이익은 천거제를 주장한다. ‘전형(銓衡·인사)을 맡은 자로서 시골 인재를 추천하지 않은 자는 벌을 주자’고까지 주장한 것이다.

이익의 이런 주장들이 그 시대의 상식을 뛰어넘은 것처럼 그의 사상 역시 주자학을 뛰어넘었다. 다산 정약용은 중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이 능히 천지가 크고 일월이 밝은 것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이 선생(이익)의 힘입니다.”(‘둘째형님께 답합니다’(答仲氏))라고 말했다. 정약용은 또 이익의 옛집을 방문하고, ‘(이익이) 추구하는 바가 공자·맹자에 접근했으며, 주석은 마융·정현을 헤아렸다’라는 시구를 남겨 이익이 주희를 거치지 않고 공맹에게 직접 다가가고, 주희 이전 고대 한(漢)나라 학자들의 주석으로 유학을 해석했다고 평가했다.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았던 이익은 사신들을 통해 들어온 서학(西學)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다.

 

만년에 흉년 계속되며 어려움에 처해

그는 이탈리아 신부 로드리게즈(중국명·陸若漢)가 정두원(鄭斗源)에게 준 각종 과학서적과 망원경 등을 예로 들면서 “그가 우리에게 준 물건들은 모두 없앨 수 없는 것들이다. 나도 천문(天問)과 직방(職方)은 읽어보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서양 학문에 개방적이었다. 밖에 대한 개방적인 자세 속에서 안으로는 우리 것을 찾자고 주장했다. 이익은 안정복(安鼎福)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인(東人·조선인)이 동사(東史·조선사)를 읽지 않고, 거친 상태로 내버려두어 자고(自古)로 이에 유의하는 사람이 없다”면서, “동국(東國)은 다름 아닌 동국이다. 그 규제(規制)와 체세(體勢)는 스스로 중국사와는 다르다”라고 말했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모두 버리고 중국인이 되기 위해 광분하던 소중화 시대에 ‘동국은 다름 아닌 동국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상의 주체성은 혁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한때 열심히 농사지어 다소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기도 했지만 만년에 흉년이 계속되면서 “1년 중 친척 중에 20세가 된 자로 죽은 사람이 열두 명인데, 그 태반이 기병(飢病·굶주림)으로 인한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게다가 외아들 맹휴(孟休)의 와병 때, “늙은 몸으로 일찍부터 밤까지 간호하여 근력도 다하고 가산도 탕진”할 정도로 노력했으나 아들은 먼저 세상을 떠난다. 영조 39년(1763) 83살의 고령이 된 이익에게 첨중추부사(僉中樞府事)의 직이 내려졌으나 그해 12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보면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그가 스스로 농사지으면서 세웠던 사상체계는 조선 후기 철학의 혁명이었다.

 

허허, 어찌 야단스럽게 고문하느냐

유학자들이 친일로 기울 때 독립운동하다 ‘앉은뱅이’가 된 심산 김창숙…

아나키스트들과 의거를 일으키고 해방 뒤엔 이승만 정권에 맞서 싸우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없었다면 한국의 유교는 역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전 시기에 걸쳐서 유교는 지배적 사상이었으나 유학자였던 양반 사대부들은 국망(國亡)에 무심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한 직후인 1910년 10월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수여한 76명의 한국인들은 모두 양반 유학자였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는 이완용·송병준 등과 대원군의 조카 이재완(李載完), 순종의 장인 윤택영(尹澤榮), 명성황후의 동생 민영린(閔泳璘) 등이 귀족 작위를 받았다고 전한다. 이때 일제는 1700여만원의 임시은사금을 지배층들에게 내려주었는데, 김창숙은 <자서전-벽옹(躄翁·앉은뱅이 노인) 73년 회상기>에서 “그때에 왜정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창숙은 유림으로서 독립운동에 나선다.

» 심산 김창숙이 없었다면 한국의 유교는 역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항일투쟁과 반독재 투쟁에 평생을 바쳤다.(사진/ 권태균)


1879년 음력 7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김창숙은 조선 중기의 명현(名賢)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13대 종손으로서 유림의 정통성을 갖고 있었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자 김창숙은 대유(大儒) 이승희(李承熙)와 함께 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목을 베자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렸다. 고종은 아무런 회답이 없었고 김창숙은 통곡하고 돌아왔다. 그 뒤 송병준(宋秉畯)·이용구(李容九) 등의 일진회가 한일합방을 청원하자 김창숙은 뜻을 같이하는 유학자들을 모아 “이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다”라며 처벌을 주장하는 건의문을 중추원에 보냈다. 성주 주둔 일본 헌병분견대 소장 노전(盧田彌之介)이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곧 반역이 아닌가?”라며 건의문 취소를 요구하자, 김창숙은 “사직(社稷·나라)이 임금보다 중한지라, 난명(亂命·혼미한 상태에서 내린 명령)은 따르지 않는 것이 바로 충성하는 길이다”라고 답한다.

 

단재와 함께 친일파의 집을 털다

나라가 끝내 멸망하자 김창숙은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방황하다가 ‘선세(先世)의 유업’을 망치겠다는 모친의 꾸짖음을 듣고 경서(經書)에 매진했다. 김창숙은 <자서전>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성의정심(誠意正心)·수신제가(修身齊家)·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가 모두 여기서 벗어나 딴 데 구할 것이 아님을 믿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유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선비 김창숙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김창숙은 1919년 ‘독립선언서’를 보고는 한탄했다.

“우리나라는 유교의 나라였다. …지금 광복운동을 선도하는 데 3교(천도교·기독교·불교)의 대표가 주동을 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유교를 꾸짖어 ‘오활한 선비, 썩은 선비와는 더불어 일할 수 없다’ 할 것이다.”

김창숙은 곽종석(郭鍾錫) 등 전국의 유림 130여 명을 규합해 파리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낸 ‘파리장서사건’, 즉 ‘제1차 유림단사건’을 주도했다. 한국의 유림이 역사 앞에 겨우 체면치레를 하게 된 것이다. 그는 1921년 2월 상해에서 북경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우당 이회영(李會榮), 단재 신채호(申采浩)와 의기투합한다. 우당과 단재는 아나키스트인데, 아나키스트와 유림이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 비타협적 항일 의지로 이루어진다. 김창숙은 아나키스트들과 국내 친일파 자금이 흘러든 북경 모아호동 고명복의 집을 털기도 했다.

“모아호동은 귀족들이 사는 곳으로 경비가 철통같아 일을 끝내려면 치밀한 사전계획이 필요했다. …김창숙이 앞장을 섰고 이을규·이정규·백정기가 그 집으로 잠입하여 값진 물건을 빼내어 무사히 돌아왔다. …다음날 모아호동 사건은 각 신문마다 대서특필되었다. 교포는 물론 중국인들까지도 모두 깜짝 놀랐다. 전 수사진이 동원되어 범인 체포에 나섰다.”(정화암,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독립을 위한 실천에는 주저하지 않는 선비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김창숙은 일제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하기도 했다. 북경 정부의 임시집정 단기서(段祺瑞)의 비서였던 김달하는 독립운동가로 위장한 일제의 밀정이었다. 김달하가 조선총독부에서 경학원 부제학 자리를 비워놓았다고 회유하자 김창숙은 “네가 나를 경제적으로 곤란하다고 매수하려 드는구나. 사람들이 너를 밀정이라 해도 뜬소문으로 여겨 믿지 않았더니 지금 비로소 헛말이 아닌 줄 알았다”라며 이회영과 상의해 제거를 논의했고, 의열단 유자명(柳子明)이 두 사람의 말을 듣고 1925년 3월 다물단(多勿團)과 합작해 김달하를 제거한 것이다.

김달하를 처단한 직후 김창숙은 국내로 잠입했다. 김창숙은 이회영과 내몽골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북경 정부의 전 외교총장 서겸(徐謙)을 통해 북경 정부의 실권자 풍옥상(馮玉祥)과 교섭해 내몽골 수원성(綏遠省) 포두(包頭)에 3만여 정보(町步)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이곳에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던 이회영은 이 방면에 많은 경험을 갖고 있었다. 자금 마련을 위해 김창숙은 1925년 8월 북경을 떠나 서울로 잠입했다. 서울에서 정수기 등과 비밀결사 ‘신건동맹단’을 조직하고는 직접 영남으로 내려가 자금 마련에 나섰다. 그러나 3·1운동의 열기가 사라진 뒤여서 반응이 신통치 않자 김창숙은 사람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 김창숙이 우당 이회영과 자주 어울렸던 베이징 후고루원 마을. 그는 아나키스트들과 친일파의 집을 털고 밀정을 처단하기도 했다. (사진/ 권태균)

“내가 이번에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온 것은 나라 사람들이 호응해줄 것을 진심으로 기대했던 것이오. 전후 8개월 동안 겪고 보니 육군(六軍·천자의 군대, 많은 숫자의 군사라는 뜻)이 북을 쳐도 일어나지 않을 지경이고 방금 왜경이 사방으로 깔려 수사한다니 일은 이미 낭패되었소. …내가 지금 가지고 나가는 자금으로는 황무지 개간 사업을 거론하기도 만 번 어려울 것이니… 이 돈을 의열단 결사대의 손에 직접 넘겨주어 왜정 각 기관을 파괴하고 친일 부호들을 박멸하여 우리 국민들의 기운을 고무시킬 작정이요….”(<자서전>)

일부 자금만을 확보한 김창숙은 1926년 3월 압록강을 건너 다시 상해로 향했다. 그가 출국한 뒤 국내에서는 그와 접촉했던 수백 명의 전국 유림들이 검거되는 ‘제2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한다. 상해에서 김창숙은 유자명에게 청년 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하는 문제를 상의했는데, 유자명은 자서전 <한 혁명자의 회억록>에서 이렇게 썼다.

“그때 김창숙 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고향에 가서 친구들에게 돈을 모아가지고 왔는데, 이 돈으로 폭탄과 권총을 사서 적인(敵人)들과 투쟁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 …나석주(羅錫疇)는 그때 천진에 있었는데, 나는 김 선생과 폭탄과 권총 한 개를 사서 상해에서 배를 타고 천진에 가서 나석주를 만나 서로 상의한 결과 나석주는 자신이 행동하겠다고 말했다.”(유자명, <한 혁명자의 회억록>)

 

일제의 고문, 웃으며 받다

1926년 세모를 물들였던 나석주 의사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중국인 노동자 마중덕(馬中德)으로 변장해 입국한 나석주는 1926년 12월28일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과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총격전을 벌여 경기도 경찰부 전전(田畑唯次) 경부보와 동양척식회사 토지개량부 대삼(大森太四郞) 차석 등 3명을 사살하고 총알이 떨어지자 교전(交戰) 중 자결했다.

1926년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임된 김창숙은 유자명에 의해 의열단 고문으로도 추대된다. 그러나 그해 12월 지병인 치질이 재발해 들것에 실려 상해 공공조계(公共租界)에 있는 영국인 경영의 공제병원에 입원했다. 이듬해 2월에 재수술을 받고 가료를 하던 중 일본 영사관 형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장기(長崎·나가사키)와 하관(下關·시모노세키)을 거쳐 입국한 김창숙은 대구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형구를 야단스레 벌려놓고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나는 웃으며 ‘너희들이 고문을 해서 정보를 얻어내려느냐? 나는 비록 고문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종이와 붓을 달라 하여 시 일절을 써주었다. ‘조국 광복을 도모한 지 십 년에/ 가정도 생명도 돌아보지 않았노라/ 뇌락(磊落·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음)한 일생은 백일하에 분명한데/ 어찌 야단스럽게 고문하는가.’”(<자서전>)

이때 변호사 김완섭(金完燮)이 변호를 자청하며 거듭 만나자고 요청하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 군은 무슨 말로 변호하겠는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김완섭이 ‘입회한 간수의 기록이 필시 조서에 들어가 앞으로 재판에 크게 불리할 것’이라고 염려하자, “나는 일찍이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군은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초연했다.

» 김창숙의 생가. 그는 말년에 집 한 칸도 없이 여관과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사진/ 권태균)

1928년 14년형을 선고받은 김창숙은 대전형무소에서 감옥 생활을 시작했다. <자서전>에서 “나는 고문을 받은 이래 병이 더욱 악화되어 두 다리의 마비로 진작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일어날 때 남의 부측을 받아야 했다”고 쓰고 있다. 대구경찰서에서 받은 고문 때문에 불구자가 되었던 것이다. 김창숙은 1933년 신임 전옥(典獄·간수장) 궁기(宮崎)가 절을 할 것을 종용하자 “감옥 생활 6, 7년 동안 옥리에게 머리 숙여본 적 없다”면서, “내가 너희를 대하여 절을 하지 않는 것은 곧 나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고수함이다”라고 거부했다. 이 시절 김창숙뿐만 아니라 전 가족이 독립운동에 나서 고초를 겪었다. 장남 환기(煥基)는 1927년 고문사했으며, 차남 찬기(燦基)도 투옥되었는데, 아들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김창숙은, “네가 옥에 갇힌 지 벌써 이태가 지났구나… 너의 허약한 체질로 몇 년씩 고문을 받아왔으니 결국 큰 병에 걸린 것이 당연하겠구나. 비록 그렇긴 하나 네 애비가 8년의 옥고를 치르고 큰 병에 걸리고도 아직 죽지 않은 것을 네가 생각하라… 때로 <소학> <논어> <맹자> 등 마음을 다스리는 데 절실한 책을 읽고 생각해라”라는 편지를 보냈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성명 발표

김창숙은 여러 번 와병으로 사경을 헤맸으나 그때마다 살아남았다. 1934년 9월에 위중하자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는데, 이때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945년 8월에는 건국동맹(建國同盟) 남한 책임자로 피선되었다는 혐의로 성주 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8·15 해방으로 옥문을 나섰다.

비록 해방은 되었지만 해방 정국은 김창숙에게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해방 뒤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나서는 한편 난립된 전국 유림을 유도회(儒道會) 총본부로 통합하고 위원장에 올랐다. 그리고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굳어지자 1948년 3월 김창숙은 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앙·조성환·조완구와 ‘7인 지도자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미·소 양국이 군사상 필요로 임시로 정한 소위 38선을 국경선으로 고정시키고 양 정부 또는 양 국가를 형성하면 남북의 우리 형제자매가 미·소 전쟁의 전초전을 개시하여 총검으로 서로 대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니… 반쪽 강토에 중앙정부를 수립하려는 지역 선거에는 참가하지 아니한다.” 2년 뒤에 벌어질 6·25 전쟁의 참화를 정확히 예견한 성명서였다. 그 2년 뒤 김창숙은 서울에서 6·25를 겪었다.

서울시 인민위원장 이승엽이 지지를 종용하자 단칼에 거절한다.

 

집 한 칸 없이 세상 떠난 통일운동가

1951년 1·4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난했는데, 그해 봄 이승만 ‘하야경고문’을 발표했다가 부산형무소에 수감된 것을 필두로 반이승만 투쟁에 나섰다. <자서전>에서 그는 이미 미 군정 산하 민주의원 회의석상에서 이승만에게 “당신은 오늘 이미 민족을 팔았거니와 다른 날에 국가를 팔지 않는다 보장하겠소?”라고 성토했다고 전하고 있다. 1952년 이승만이 당선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들고 나오자 이시영 등과 함께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하려다가 괴청년들의 습격으로 모시 두루마기가 피투성이가 되는 테러를 당하고 부산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의 급서로 이승만이 당선되자 “이제 전국의 민심은 각하에게서 이탈되었다”라면서 재선거를 요구하는 ‘대통령 3선 취임에 일언을 진(進)함’이란 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반이승만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김창숙을 모든 자리에서 쫓아내는 공작으로 맞섰다. 교육부는 1956년 ‘김창숙 명의’로는 신입생 모집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공문을 보냈고, 그는 결국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에는 성균관장, 유도회 총본부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1958년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운동에 나서고 81살 때인 1959년에는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에 나서면서 이승만 대통령 사퇴권고 서한을 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축출되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自統) 대표로 추대되어 통일운동에 나섰다. 그는 집 한 칸도 없이 여관과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84살 때인 1962년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1957년 지은 ‘통일은 어느 때에’라는 시는 아직도 완수하지 못한 역사의 임무를 전해준다. “조국 광복에 바친 몸/ 엎어지고 자빠지기/ 어언 사십 년/ …천하는 지금/ 어느 세상인가/ 사람과 짐승이 서로들 얽혔네/ 붉은 바람 미친 듯/ 땅을 휘말고/ 태평양 밀물 넘쳐서/ 하늘까지 닿았네// 아아, 조국의 슬픈 운명이여/ 모두가 돌아갔네/ 한 사람 손아귀에/ …/ 반역자의 주먹에//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므나.”

 

신동, 통곡하며 책을 불태우다

세종이 칭찬한 수재, 매월당 김시습… 단종이 물러난 뒤 끝없는 방랑

김시습(金時習·1435~93))에게 가장 많이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신동’(神童)이란 말이다.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김시습이 유양양(柳襄陽)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요약한 내용이 전해진다.

“나는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능히 글을 알아서 일가 할아버지 최치운(崔致雲)이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세 살에 글을 지을 수 있어서, ‘복숭아는 붉고 버들은 푸르르니 봄이 저무는구나/ 푸른 바늘로 구슬을 꿰니 솔잎 이슬이로다’(桃紅柳綠三春暮/ 珠貫靑針松葉露)라는 구절을 지었다. 다섯 살 때 <중용>과 <대학>을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배웠다.”


검은 물 들은 옷을 입고 산인이 된다면…

»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 그는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을 깨쳤고 다섯살 때 <중용>과 <대학>을 배웠다.(사진/ 권태균)

<패관잡기>는 다섯 살 때 정승 허조(許稠)가 집에 찾아와 ‘내가 늙었으니 노(老) 자를 가지고 시를 지으라’고 하기에, 곧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老木開花心不老)라고 지어서 허 정승이 무릎을 치면서 “이 아이는 이른바 신동(神童)이다”라고 감탄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김시습이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는 ‘국민 신동’이 된 계기는 세종과의 일화이다. <해동잡록>(海東雜錄)은 세종이 다섯 살 때의 김시습을 부른 이야기를 전한다. 세종이 승정원으로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명해 물었다. 박이창이 무릎 위에 앉히고 세종을 대신해, “네 이름을 넣어 시구를 지을 수 있느냐?”라고 묻자 곧 ‘올 때 포대기에 쌓인 김시습’(來時襁湺金時習)이라고 대답했고, 또 벽에 걸린 산수도(山水圖)를 가리키면서 “네가 또 지을 수 있겠느냐?”고 하자, 곧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小亨舟宅何人在)라고 지었다. 박이창이 대궐로 들어가 아뢰니, “성장하여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기용하리라”라는 전교(傳敎)를 내리며 크게 칭찬하고 비단 30필을 주며 가지고 가게 했더니 그 끝을 서로 이어서 끌고 나갔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때부터 그는 ‘김오세’(金五世)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김시습이 유양양에게 보낸 편지에는 “세종이 ‘내가 보고자 하나 남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우니, 마땅히 드러내지 말고 교양시켜서 자라고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겠다’라고 했다”면서 ‘내려주신 물건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김시습의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인데, 자호(自號)를 동봉(東峯), 또는 청한자(淸寒子), 혹은 벽산청은(碧山淸隱)이라고 하였다. 그의 선대는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서 국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즉위하지 못하고 명주(溟州·강릉) 군왕(郡王)으로 봉함받았던 김주원(金周元)이다. 그의 부친 김일성(金日省)은 음서(蔭敍)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사대부였으나, 그는 설잠(雪岑)이란 법명을 가진 승려이기도 했다. 그러나 촉망받던 그의 인생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단종 폐위 사건이 그의 운명을 예기치 못한 길로 끌고 간다. <매월당집> ‘유적수보’(遺蹟搜補)는 “나이 21살 때 삼각산 속에서 글을 읽고 있다가 단종이 손위(遜位)하였다는 말을 듣자 문을 닫고서 나오지 않은 지 3일 만에 크게 통곡하면서 책을 불태워버리고 미친 듯 더러운 곳간에 빠졌다가 그곳에서 도망하여 행적을 불문(佛門)에 붙이고 여러 번 그 호를 바꾸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김시습은 이때부터 세상에 뜻을 잃고 각지를 방황하는데, <관서를 유람한 기록>(遊關西錄), <관동을 유람한 기록>(遊關東錄), <호남을 유람한 기록>(遊湖南錄) 등의 시문집은 이런 방랑의 자취들이다. 이 중 <관서를 유람한 기록> 뒷부분의 ‘방탕하게 관서를 유람한 기록 뒤에 덧붙이는 글(後志)’에서 방랑의 소이를 적고 있다.

“내 어려서부터 방탕하여 명리를 좋아하지 않고, 생업도 돌보지 않고,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으로 포부를 삼아, 평소에 산수에 방랑하면서 좋은 경치를 만나면 시를 읊고 구경하고자 했었다. 일찍이 거자(擧子·과거 준비생)가 되었을 때 친구들이 지나면서 지필을 주면서 다시 과거에 힘쓸 것을 권했으나 오히려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을 만나 내가 스스로 말했다.

‘남아가 세상에 태어나 도를 행할 수 있는데 자신의 몸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인륜을 어지럽히는 부끄러운 일이다. 만약 행하는 것이 불가하다면 혼자 그 몸을 착하게 하는 것이 옳다.’

사물 밖에 둥둥 떠서 살면서 도남(圖南)과 사막(思邈)의 풍모를 우러르고 사모하려 했으나 우리나라 풍속에 이런 일이 없었으므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만약 검은 물을 들인 옷을 입고 산인(山人)이 된다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용장사에 머물며 <금오신화> 집필

이 글은 김시습의 변신 이유를 잘 말해준다. 원래 과거에는 뜻이 없던 중 ‘감개한 일’, 즉 세조의 왕위 찬탈을 만나 세상일에 미련을 버렸다. 도남이나 사막 같은 선인(仙人)을 사모했으나 조선에는 그런 사례가 없어서 고민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깨닫고 승려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김시습은 유자(儒者)였다가 유자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김시습의 전기를 쓰는 사람들은 김시습이 마음속으로는 계속 유자였다고 강조한다. 앞의 ‘유적수보’는 “세상에 전해오기를, 매월당이 태어날 때에 성균관 사람들이 모두 공자가 반궁리 김일성의 집에서 나오는 것을 꿈꾸고 이튿날 그 집에 가 물어보니 아이(매월당)가 태어났다고 하였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 역시 김시습이 유자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김시습이 과거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는 것은 유학 자체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음을 암시한다.

» 경주에 있는 용장사 터. 김시습은 이곳에 머물며 안정을 되찾았고,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했다.(사진/ 권태균)

그는 21살 때부터 29살 때까지 전국을 돌아다녔다. 송도를 거쳐 관서(關西·평안도)와 관동(關東·강원도), 그리고 호남을 유람했다. 인생의 황금시기를 유람으로 소비했던 것이다. 그러나 “머리를 깎은 것은 세상을 피하려는 뜻이고,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의 뜻을 나타내려 함이다”라고 말한 대로 세상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그의 기행도 세상을 버리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반증이다. 술을 마시고 거리를 지나다가 영상(領相) 정창손(鄭昌孫)을 만나자, “네놈은 그만두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꾸짖었고, 정창손은 못 들은 체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겨 교유하던 자들이 모두 절교했다고 ‘유적수보’는 전한다. 이런 일화들은 역으로 그가 세상사에 가진 관심을 말해주는 것이다. 윤근수(尹根壽)의 <월정만필>(月汀漫筆)에는 김시습의 도인(道人)적 일화가 전해진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등 당대의 명사들이 김시습의 주거지인 용산 수정(水亭)에 찾아와 담소했는데, 내일은 풍악산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담소하던 김시습이 갑자기 창밖으로 떨어져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크게 다쳤다. 친구들이 그를 정자 안에 메어다 놓고, “이렇게 많이 다쳤으니 내일 어떻게 떠나겠는가?”라고 말하자, “자네들은 누원(樓院)에 가서 기다리게. 곧 조섭해서 조금이라도 낫게 되면 떠나겠네”라고 답했다. 다음날 아침 누원에서 김시습이 전혀 다친 기색이 없이 태연자약하게 웃으며 이야기했고, 남효온이 “자네는 어찌하여 환술을 써서 우리를 속이는가?”라고 말했다는 일화이다.

김시습은 서른한 살 때 경주 남산 금오산(金鰲山) 남쪽 동구 용장사(茸長寺)에 머물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곳이 바로 금오산실이며 당호가 매월당이었다. 그는 “금오산에 살게 된 이후 멀리 나가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쓴 대로 안정을 되찾았고, 서른일곱 살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비롯해 여러 시문집을 지었다. 이 시절 김시습은 생장지인 서울을 객관(客官), 서울에서 꾸는 꿈을 객몽(客夢)이라고 할 정도로 금오산을 마음에 들어했으나 이곳도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었다.

 

물질을 중시하는 기 철학 주장

율곡 이이(李珥)가 선조의 명으로 지은 <김시습 전기>는 47살이 되던 성종 12년(1481)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글을 지어서 조부와 부친에게 제사를 지냈다”며 제문까지 실었는데, 이는 한때 입산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시비에 휘말렸던 이이가 김시습을 유자로 치장하기 위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이후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충청도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 주석했다가 이곳에서 쉰아홉인 성종 24년(1493) 2월 병사했다. 현재도 무량사에는 작자 미상인 김시습의 초상화가 전해지고 있다.

김시습에 대한 후대의 평가에서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는 서로 달랐다. 이황은 “매월당은 한갓 괴이한 사람으로 궁벽스러운 일을 캐고 괴상스러운 일을 행하는 무리에 가깝지만, 그가 살던 시대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그의 높은 절개가 이루어졌을 뿐이다”라면서 낮게 평가했다. 반면 선조의 명으로 <매월당 전기>를 쓴 율곡 이이는 “절의를 표방하고 윤기(倫紀)를 붙들었으니, 그 뜻을 궁구해보면 가히 일월(日月)과 빛을 다툴 것이며… 백대의 스승이라 하여도 또한 근사할 것입니다”라고 극찬했다. 두 대유(大儒)의 서로 다른 평가는 실상 김시습의 사상에 대한 서로 다른 판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김시습은 불교에 입도해 선도에 심취했지만 정작 그 철학적 기초는 물질을 중시하는 기(氣) 철학이었다.

“천지 사이에는 오직 하나의 기가 운동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 나타나는 현상을 말하면 굽혔다 피기도 하고, 차기도(盈) 하고 비기도(虛) 한다, …펴면 가득 차고, 구부리면 텅 비지만, 가득 차면 도로 나오고 텅 비면 도로 돌아간다. 나오면 ‘신’(神)이라 하고 돌아가면 ‘귀’(鬼)라 하지만 그 실리(實理)는 하나요, 그 나눔이 다를 뿐이다.”(‘귀신설’(鬼神說))

이는 만물의 본질이 기, 즉 물질이라는 주기론(主氣論)으로서 그 시대 사대부의 상식인 주리론(主理論)을 정면에서 거부한 것이다. 그는 만물의 본질을 이(理)로 보는 주자학의 주리론이 사대부 지배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한 이념임을 간파하고 주기론을 주창한 것이다.

“천지 사이에 나고 또 나서 다함이 없는 것은 도(道)요, 모였다 흩어졌다,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이(理)의 기(氣)다. 모이는 것이 있으므로 흩어진다는 이름이 있게 되고, 오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간다는 이름이 있게 되었으며, 생(生)이 있기 때문에 사(死)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으니, 이름이란 기의 실사(實事)다. 기가 모인 것이 태어나서 사람이 되고… 기가 흩어진 것은 죽어서 귀(鬼)가 된다.”(‘생사설’(生死說))

 

“군주와 필부는 머리카락 차이”

김시습보다 66살 뒷사람인 퇴계 이황(1501~1570)까지도 주리론에 따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했던 판국에 그의 주기론은 사상계의 혁명이 아닐 수 없었다. 주기론은 율곡 이이(1536~84)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선 성리학의 정통 이론의 하나가 된다.

그는 비록 세상을 버린 것 같았지만 “의(義) 아닌 부귀는 뜬구름과 같다는 변(辨)”을 쓴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의에 주리고 백성들의 고통에 슬퍼했다.

“임금이 왕위에 올라 부리는 것은 민서(民庶)뿐이다. 민심이 돌아와 붙좇으면 만세토록 군주가 될 수 있으나, 민심이 떠나서 흩어지면 하루 저녁도 기다리지 못해서 필부(匹夫)가 되는 것이다. 군주와 필부의 사이는 머리카락(毫釐)의 차이로 서로 격해 있을 뿐이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창름(倉?·곡식 창고)과 부고(府庫·재물 창고)는 백성의 몸이요, 의상과 관(冠·모자)과 신발은 백성의 가죽이요, 주식(酒食)과 음선(飮膳)은 백성의 기름이요, 궁실(宮室)과 거마(車馬)는 백성의 힘이요, 공부(貢賦·세금)와 기용(器用·물건)은 백성들의 피다. 백성이 10분의 1을 내서 위에다 바치는 것은 원후(元后·군주)로 하여금 그 총명을 써서 나를 다스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음식을 받게 되면 백성들도 나와 같은 음식을 먹는가를 생각하고, 옷을 입게 되면 백성들도 나와 같은 옷을 입는가를 생각해야 한다.”(‘애민의’(愛民義))

왕조 시절에 가슴 서늘한 논설이 아닐 수 없다. 성호 이익(李瀷)은 <성호사설> ‘신동’(神童)조에서 “어려서 총명하고 영리했던 수재가 차츰 장성해서는 도로 그 빛나던 재질이 줄어든 것을 보았으니… 공명과 사업이 반드시 이런 사람들(신동)에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뛰어난 머리로 세상을 속이고 백성들을 등친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역사에서 끝내 세상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을 버렸던 김시습이 진정한 천재가 아니겠는가?

 

능지처참에 부관참시, 그 사관의 길

훈구파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34살에 죽은 김일손

연산군 4년(1498) 7월1일. 윤필상·유자광 등 훈구 공신들이 차비문에 나가서 연산군에게 비사(秘事)를 아뢰겠다고 청하자 도승지 신수근이 안내했다. 사관 이사공(李思恭)이 참석해서 듣기를 요청하자 신수근은 “그대가 참예하여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막았다. 잠시 뒤 의금부 경력(經歷) 홍사호와 의금부 도사(都事) 신극성이 명령을 받고 경상도로 달려갔는데, <연산군일기>는 “바깥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알지를 못했다”고 전한다. 홍사호와 신극성이 달려간 곳은 경상도 청도군인데, 연산군은 액정서(掖庭署)의 하례(下隸) 중에 말 잘 타는 자를 보내 의금부 도사가 잡아오는 걸음이 빠른지 느린지를 보고하게 할 정도로 재촉했다. 그렇게 체포된 인물은 김일손인데, 마침 풍병(風病)을 앓고 있었다. 의금부 경력 홍사호가 나타나자 김일손은 이렇게 말했다.

» 흐린 시대에 쓴소리를 적은 대가로 연산군은 김일손을 능지처참하고 그의 첩자들까지 죽였다. 경북 청도군에 있는 김일손의 묘.(사진/ 권태균)


무오사화의 피비린내를 예언하다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史草)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큰 옥(獄)이 일어날 것이오.”(<연산군일기> 4년 7월12일)

그의 예견대로 일어나는 큰 옥사가 바로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무오사화는 당초 실록을 편찬하는 실록청 기사관(記事官·정6품) 김일손과 직속 상관인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김일손은 이극돈이 세조 때 전라감사가 된 것은 불경을 잘 외웠기 때문이고, 또 정희왕후 상(喪) 때 향(香)을 바치지도 않고 장흥(長興)의 관기 등을 가까이했다고 사초에 기록했다. 이극돈이 고쳐줄 것을 부탁했으나 김일손은 단칼에 거부했다.

발단은 두 개인 사이의 갈등이지만 그 배후는 복잡했다. 이극돈은 수양대군의 즉위를 계기로 등장한 훈구파의 일원이었고, 김일손은 훈구파의 정치행위에 극도의 불신감을 가진 사림파였기 때문이다. 구세력인 집권 훈구와 신세력인 신진 사림의 대립이었는데, 양자의 가장 큰 차이는 세조의 즉위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사림파는 세조의 즉위 자체를 부인하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이극돈이 유자광을 끌어들이고, 유자광이 다시 노사신·윤필상·한치형·신수근 등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이 훈구세력들의 세계관이 같았기 때문이다.

발단은 이극돈에 대한 사초였지만 정작 문제가 된 것은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가 의경세자의 후궁인 귀인 권씨를 불렀으나 권씨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적은 내용이었다. 세조가 며느리를 탐했다는 의혹을 살 소지가 있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세조 10년(1464)생인 김일손은 세조가 사망했던 1468년에 다섯 살에 불과했으므로 세조 때의 궁중 비사를 알 수 없는데도 이를 적은 것은 배후가 있다는 논리였다. 연산군이 김일손에게 ‘세조조의 일을 어디에서 듣고 기록했는지 대라’고 말하자 김일손은 “들은 곳을 하문하심은 부당한 듯하옵니다”라고 거부했다. “사관이 들은 곳을 만약 꼭 물으신다면 아마도 <실록>이 폐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국왕이 볼 수 없었던 사초까지 강제로 본 인물이었다. 거듭된 심문에 김일손은, 귀인(貴人)의 조카 허반(許磐)을 댔을 뿐 나머지는 “국가에서 사관을 설치한 것은 역사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므로, 신이 직무에 이바지하고자 감히 쓴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이같이 중한 일을 어찌 감히 사람들과 의논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본심을 다 털어놓았으니, 신은 청컨대 혼자 죽겠습니다”라고 거부했다.

연산군은 훈구공신 윤필상·유자광 등에게 김일손의 국문을 맡겼으니 심문이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초 이 사건은 조선 최초의 사화로까지 번질 일은 아니었다. 유자광이 이를 세조 체제를 부정하는 대역죄로 몰고 가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유자광은 김일손을 심문할 때, “황보인과 김종서의 죽음을 절개라고 쓴 것은 누구에게 들었느냐?”, “소릉(昭陵·단종의 모후의 능)의 재궁(梓宮·시신)을 파서 바닷가에 버렸다고 쓴 것은 누구에게 들었느냐?”라는 등 세조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를 주로 물었다. 황보인과 김종서는 세조(수양대군)가 계유정난을 일으키던 날 살해한 인물들이었다. 소릉은 단종의 모후 권씨의 무덤인데 세조의 꿈에 나타나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고 말한 이후 파헤쳐졌다는 무덤이다. 김일손이 충청도 도사(都事) 시절 “예로부터 제왕은 배위 없는 독주(獨主)가 없거늘, 문종만은 배우자 없는 독주이옵니다”라며 소릉 복위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에 이를 세조 체제를 부인하는 역심으로 몰기 위한 것이었다. 연산군은 “소릉 복구를 청하고, 난신들을 절개로 죽었다고 쓴 것은 너의 반심(叛心·반역하려는 마음)을 내포한 것이다”라고 동조했다. 소릉 복위 문제도 작은 것은 아니었지만 ‘조의제문’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연려실기술> ‘무오사화’조는 “유자광은 옥사가 점차 완화되어 제 뜻대로 다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밤낮으로 죄 만들기를 계획했는데, 하루는 소매 속에서 책 한 권을 내놓으니 곧 김종직의 문집이었다”라고 전하는데 문집 속에 든 글이 바로 ‘조의제문’이다. 김종직은 성종 23년(1492) 이미 사망한 뒤였다.

 

세조 체제를 부정하는 대역죄로 몰고 가

<연산군일기>는 “유자광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구절마다 풀이해 아뢰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은유법으로 쓰였기에 그 뜻을 알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조의제문’은 “정축년(丁丑年·세조 3년) 10월 나는 밀양에서 경산(성주)으로 가다가 답계역에서 잤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습으로 와서,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西楚覇王·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彬江·중국 남방의 강)에 잠겼다’라고 말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라고 시작하는 그리 길지 않은 글이다. 문제는 이 글의 정축년 10월이 단종이 세조에게 살해당한 세조 3년 10월을 뜻한다는 점이다. 김종직은 항우에게 죽은 의제를 단종에 비유하고 항우를 세조에 비유해 단종을 죽인 인물이 수양임을 암시한 것이다. 의제의 시신이 ‘빈강에 잠겼다’라는 내용도 ‘노산이 해를 당한 후 그 시신을 강물에 던졌다’는 <아성잡설>(鵝城雜說) 등의 기록을 후대에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자광은 은유로 가득 찬 ‘조의제문’의 내용을 연산군에게 상세히 해석해주었는데, 예를 들면 ‘어찌 잡아다가 제부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라는 문장은 ‘김종서와 노산군(단종)이 왜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했는가’라고 쓴 것이다”라는 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유자광의 설명을 듣고 연산군은 흥분했다. 그 역시 훈구파처럼 항상 반대하기 좋아하는 사림파를 제거할 호기로 생각한 것이다.

» 김일손은 훈구파의 정치행위에 극도의 불신감을 가진 사림파였다. 김일손의 위패를 모신 자계서원.(사진/ 권태균)

연산군의 부친 성종이 사림을 등용한 것은 사림의 성향을 몰라서가 아니라 왕권을 능가하는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등장한 사림은 훈구파의 비정과 비리를 강하게 공격했고, 훈구파는 몇 차례 역습하려 했으나 성종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사림파의 존재 자체가 왕권을 강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런 대국적 흐름을 보는 안목이 부족했다. 그는 사림파의 쓴소리 자체가 듣기 싫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높이 평한 ‘죄’

연산군이 유자광이 가르쳐준 대로 어전회의에서 ‘조의제문’을 풀이하자 자리에 참여한 신하들은 입을 모아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입으로만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눈으로도 차마 볼 수 없습니다. …그 심리를 미루어보면 병자년(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난 해)에 난역을 꾀한 신하들과 무엇이 다르리까”라고 외쳤다. ‘난역을 꾀한 신하들’이란 사육신을 비롯해 단종 복위운동을 일으켰던 인물들을 뜻한다. 이런 ‘조의제문’에 대해 김일손은 거꾸로 “충분(忠憤)이 깃들어 있다”고 공개적으로 정의했다. 충성스런 분노가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조의제문’을 ‘입으로만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눈으로도 차마 볼 수 없다’는 훈구파와 ‘충분이 깃들어 있다’는 사림파가 한 하늘 아래 살기는 어려웠다. 연산군과 훈구파는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꺼내어 시신의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를 행했다. 이미 죽은 사람의 목을 베는 판국에 산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김일손·권오복·권경유 세 사신(史臣)은 대역죄로 몰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했다. 사화(士禍)는 선비가 화를 입었다는 뜻이지만 무오사화는 사관(史官)들이 화를 입었기 때문에 사화(史禍)라고도 불린다. 김일손이 사형당하는 날 연산군은 ‘백관(百官)이 모두 가 보게 하라’고 명하고 “근일 경상도와 제천 등지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도 바로 이 무리들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옛사람은 지진이 임금의 실덕에서 온다 하였으나, 금번의 변괴는 이 무리의 소치가 아닌가 여겨진다”라고 말했다. 나아가 연산군은 그해 7월27일, 김일손 등을 벤 것을 종묘사직에 고유하고, 백관의 하례를 받고 중외에 사령(赦令)을 반포했다.

죽을 때 김일손의 나이 만 34살에 불과했다. 김종직의 문하에는 김굉필·정여창처럼 개인 수양인 ‘수기’(修己)를 강조하는 한 계열과 좀더 적극적 사회 참여인 ‘치인’(治人)을 강조하는 한 계열이 있었는데, 김일손은 바로 치인 계열의 대표이다. <월정만필>은 김일손이 정광필과 양남어사(兩南御史)가 되어 용인의 객관에 같이 묵었을 때 ‘시사를 논하는데 강개하여 과격한 말을 많이 했다’고 전한다. 그럴 정도로 김일손은 뜨거운 피를 갖고 있었다. <패관잡기>는 “계운(季雲·김일손의 자)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선비였으나, 불행한 시대를 만나 화를 입고 죽었다”고 애석해 했다.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은 “공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주요, 묘당(廟堂)의 그릇이었다. …인물을 시비하고 국사를 논의함은 마치 청천백일 같았다. 애석하도다. 연산군이 어찌 차마 그를 거리에 내놓고 죽였는가”라고 연산군을 비판하고 있다.

 

흐린 물에 갓끈을 씻으려 하다

반면 김종직에 대해서는 상반된 두 평가가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사림의 종주(宗主)로 떠받들지만 허균은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짓고 ‘주술시’를 기술했던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이미 벼슬을 했다면 이분이 우리 임금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었으니 그의 죄는 더욱 무겁다”면서 “그의 명성만 숭상하여 지금까지 대유(大儒)로 치켜올리는 것을 안타까워한다”(김종직론, <성소부부고>)라고 평했다. 성호 이익도 <성호사설> ‘김일손 만시(挽詩)’에서 “김종직은 하나의 문사(文士)일 뿐이다. 세조조에 급제하여, 후에 벼슬이 육경(六卿·판서)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조의제문’을 보면 분명히 우의(寓意)한 작품이었으니 이 무슨 도리란 말인가?”라고 비판 대열에 가담했다.

김일손은 정5품 정도의 벼슬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으나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세계관을 펼쳤다. 그의 호 탁영자(濯纓子)는 ‘갓끈을 씻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초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 중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에서 따온 것이다. 창랑의 물이 흐린데 갓끈을 씻으려 한 김일손. 그만큼 세상에 분노했고, 그만큼 세상을 사랑한 것이리라.

흐린 물에 갓끈을 씻으려 한 대가는 사후에도 가혹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의 갑자사화 때 ‘김일손의 집 땅을 깎아 평평하게 하라’고 명하고, 이미 사망한 김일손의 부친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의 첩자(妾子) 김청이(金淸伊)·김숙이(金淑伊)까지도 목을 베어 죽였다. 이들을 죽이며 연산군은, “세조께서는 가문을 변화시켜 임금이 되신 분인데, 이와 같은 말을 차마 하였으니, 어찌 이보다 더한 난신적자가 있겠는가”라고 비판했다. 임금이 될 수 없었던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었던 무리수는 이렇게 먼 훗날까지 역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중종반정 뒤 김일손은 복관되고 문민공(文愍公)이란 시호도 내려졌지만 중종 때 다시 김일손과 같은 사림 조광조가 죽는 기묘사화가 일어난 것처럼 역사의 어두움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었다.

 

정말 율도국을 세우려 했는가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사형당한 허균, 그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

교산 허균의 생애처럼 수수께끼에 쌓이고, 생전은 물론 사후까지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된 경우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부친 허엽(許曄)은 동인 영수였으며, 이복형 허성(許筬)과 동복형 허봉(許?), 그리고 누이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1563~89)는 모두 당대의 유명 문사였고, 허균의 조카사위(허성의 사위)는 선조와 인빈 김씨 소생의 의창군(義昌君)으로서 왕가의 사돈이었다. 그럼에도 허균의 일생은 순탄하지 못했다. 유몽인(柳夢寅)은 <어우야담>에서 “역적 허균은 총명하고 재기가 뛰어났다”면서 어린 시절의 일화를 소개했다.

» 강원도 강릉에 있는 허균의 생가. 허균의 성장과정은 사주처럼 순탄치 못했다.(사진/ 권태균)


“사주처럼 살다니, 이상하기도 하다”

“9세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작품이 아주 좋아서 여러 어른들이 칭찬하며, ‘이 아이는 나중에 마땅히 문장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모 사위 우성전(禹性傳)만은 그 시를 보고, ‘훗날 그가 비록 문장에 뛰어난 선비가 되더라도 허씨 문중을 뒤엎을 자도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어우야담>)

당대 명사였던 우성전이 어린아이의 시에서 ‘허씨 문중을 뒤엎을’ 그 무엇을 봤는지는 몰라도 그만큼 허균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 허균 자신도 ‘운명을 풀이하는 글’(解命文)에서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나는 기사년(己巳年·1569, 선조 2년) 병자월(丙子月·11월) 임신일(壬申日·3일) 계묘시(癸卯時)에 태어났다. 성명가(星命家·사주, 관상가)가 이를 보고, ‘신금(申金)이 명목(命木)을 해치고 신수(身數)가 또 비었으니, 액이 많고 가난하고 병이 잦고 꾀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겠다. 그러나 자수(子水)가 중간에 있기 때문에 수명이 짧지 않겠으며, 강물이 맑고 깨끗하여 재주가 대단하겠고, 묘금(卯金)이 또 울리므로 이름이 천하 후세에 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전부터 이 말을 의심해왔으나, 벼슬길에 나온 지 17~18년 이래 전패(顚沛·엎어지고 자빠짐)와 총욕(寵辱·영예와 모욕)이 반복되는 갖가지 양상이 은연중 그 말과 부합되고 보니 이상하기도 하다.”(<성소부부고>(惺所覆?藁 ))

그의 운명은 사주처럼 순탄하지 못했다. 그가 열두 살 때 경상도 감사였던 부친이 객사했으며, 열다섯 살 때 그와 가까웠던 친형 허봉이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갔으며, 김성립(金誠立)에게 출가한 누이 난설헌은 시댁과의 불화와 자식들의 잇단 사망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허균이 스무 살 때인 1588년(선조 21년) 허봉은 끝내 서울 땅을 밟지 못하고 금강산에서 병사했다. 생전에 허봉은 허균에게 “온갖 일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어서 높은 재주로도 영락하여 풀섶을 떠도는구나”(‘아우에게 보냄’, <하곡집>(荷谷集))란 편지를 보냈는데, 마치 허균의 미래를 암시한 듯하다.

허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이는 두 사람으로, 둘째형의 친구였던 손곡(蓀谷) 이달(李達)과 누이 허난설헌이다. 허균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이달은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명으로 꼽혔으면서도 서얼이란 이유로 출사하지 못했다. 허균이 훗날 서얼들과 친하게 지내고, <유재론>(遺才論)에서 “천한 출신과 서자들도 중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이달을 통해 서얼도 평등한 사람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허난설헌은 ‘느낌을 노래함’(感遇)이란 시에서 “양반댁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 높은 다락에선 풍악 소리 울렸지만/ 가난한 이웃들은 헐벗고 굶주려/ 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라고 분노할 정도로 사회의식이 강했는데, 그녀가 죽은 뒤 허균이 유작 시집을 간행한 것은 그만큼 깊은 감화를 받았음을 뜻한다.

이런 와중에 겪은 임진왜란은 형과 누이의 죽음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허균은 모친 김씨와 만삭의 아내 김씨를 데리고 덕원과 단천 등으로 피난 갔는데, 이 와중에 부인 김씨와 어린 아들이 모두 죽고 말았다. 이때 허균 일가는 하루에 한 끼 먹기도 어려웠다고 전해지는데 이런 경험을 통해 허균은 백성들의 고통스런 삶을 타인의 것으로 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왜 이이첨의 수하가 됐을까

허균은 26살 때인 선조 27년(1594) 정시 문과 을과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서게 된다. 선조 30년(1597)에는 문과 중시(重試·당하관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과거)에 장원해 벼슬이 정6품 예조좌랑으로 뛰어오르고, 중국에 다녀와 병조 실세인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승진했다. 체제 내에 안주해도 미래가 보장되는 인생길에 접어든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형화된 삶을 거부했다. 선조 32년(1599) 황해도사가 되었으나 경창(京娼·서울 기생)을 데리고 부임했으며, 중방(中房·지방수령의 종자)이라는 무뢰배들을 거느리고 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한 것이 시작이었다.

선조 34년 충청·전라 지방의 세금을 걷는 전운판관이 되었을 때는 부안의 유명한 시인이자 기생인 매창(梅窓·1573~1610)과 교류한다. 둘은 정신적인 관계였는데 허균은 광해군 1년(1609) 매창에게 쓴 편지에 “그대는 분명 성성옹(惺惺翁·허균)이 속세를 떠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웃을걸세”라고 쓰고 있다. 매창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겠다는 약속을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약속을 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 그만큼 위험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정계를 떠나지 못했고 사복시정(司僕寺正)과 공주목사 등을 역임하면서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다가 광해군 1년(1609) 형조참의(參議·정3품)로 승진한다. 그러나 이듬해 전시(殿試)의 대독관(對讀官)이 되어 과거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조카와 조카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혐의로 탄핵받고 42일 동안 의금부에 갇혀 지내다가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를 갔는데, 허균이 죄를 뒤집어썼다는 여론도 있었다.

광해군 5년(1613) ‘칠서(七庶)의 옥(獄)’이 일어나면서 그의 운명은 칼끝에 서게 된다.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 등 명가 출신의 서자 7명이 여주 남한강가에 토굴을 파고 무륜당(無倫堂)이라 이름 짓고 스스로를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 불렀다. 이 중 박응서가 한 은상(銀商)을 살해했다가 체포되는데, 북인 모사(謀士) 이이첨이 이를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을 제거하기 위한 ‘계축옥사’(癸丑獄事)로 확대했다. 살인강도 사건이 역모로 확대된 것이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연루된 김응벽이 “허균이 김제남의 집에 드나들며 날마다 상의했습니다”라고 자백했다고 전하는데, 실제로 이 서자들과 친하게 지낸 허균이 큰 공포를 느낀 것은 당연했다. 김제남과 서자들은 모두 사형됐지만 허균은 안전했는데, <광해군일기>의 사관은 이 사건의 불똥이 자신에게 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이첨에게 접근한 덕분이라고 적고 있다.

» 허균은 정말로 율도국을 건설하기 위해 군사를 모은 걸까. 허균의 <홍길동전>(왼쪽)과 <호민론>(사진/ 권태균)

“서양갑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제자인 심우영 등이 모두 역적죄로 복주되자, 허균이 마침내 화를 피한다 칭하고 이이첨에게 몸을 맡기니 이이첨이 매우 후하게 대우했다. 그때 과거 시험의 글이나 상소를 그가 대신 지어준 것이 많았다.”(<광해군일기> 5년 12월1일)

바로 이 대목에서 허균 인생의 수수께끼가 시작된다. 이이첨에게 붙어 목숨을 부지하고 출세를 도모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다. 허균은 왜 이이첨의 수하가 된 것일까? 이이첨의 후원을 얻은 뒤부터 허균은 출세가도를 달렸다. 광해군 6년(1614) 호조참의, 이듬해에는 요직인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문전정시에서 1등을 하여 종2품 가정(嘉靖)대부의 가자를 받았다. 그리고 광해군 8년(1616)에는 형조판서까지 올라갔다.

허균은 광해군 9년(1617) 말부터 시작되는 인목대비 폐출 논의에 앞장서 두고두고 논란거리를 제공한다. 그의 외손 이필진은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의논에 끼어든 것은 본심이 아니었고 간흉(奸凶·이이첨)의 꾐에 빠진 것”이라고 말했지만, 남의 사주로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폐비 논의에 앞장섰다. 허균은 폐모에 반대하는 북인 영수이자 영의정인 기자헌(奇自獻)과 대립각을 세울 정도였다. 그런데 폐모에 반대한 기자헌이 귀양에 처해지자 아들 기준격이 부친을 구하기 위해 비밀상소를 올리고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하면서 파란이 일어난다. 허균도 자신을 변호하는 맞상소를 올리는데 광해군은 웬일인지 진상을 조사하지 않고 묻어두었다. 이런 와중에 허균과 이이첨이 멀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허균의 딸이 양제(良?·세자의 후궁)로 내정된 것이다. 이이첨이 허균을 제거 대상으로 바라보는 와중에 광해군 10년(1618) 8월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벽서의 작성자가 허균이란 소문이 돌면서 광해군은 과거 기준격의 상소문을 국청에 내려 조사하게 했다. 허균은 8월16일 자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를 딸의 집으로 옮겨놓고 다음날 체포된다.

하인준(河仁浚)·현응민(玄應旻)·김윤황(金胤黃) 등 허균과 가까웠던 수십 명이 체포되어 문초를 받는데, 현응민은 “앞뒤의 흉서는 모두 자신이 한 것이고 허균은 알지도 못한다”고 주장했으나 하인준·김윤황과 허균의 첩이었던 추섬은 심한 고문 끝에 “남대문의 방문은 허균이 작성했다”고 자백한다. 이 자백들은 허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그는 끝까지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허균은 8월24일 하인준 등과 함께 사형에 처해지는데, 이를 기록한 사관은 그의 죽음에 여러 의문이 있음을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허균은 아직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결안을 할 수 없다면서 붓을 던지고 서명하지 않으니, 좌우의 사람들이 핍박하여 서명케 하였다”라는 내용이나 “기자헌은 허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예로부터 형신도 하지 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라는 평들이 그런 예이다. 게다가 광해군이 협박에 못 이겨 사형에 동의했다고 적고 있다.

“왕이 일렀다. ‘오늘 정형(正刑·사형집행)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심문한 뒤에 정형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이첨 이하가 같은 말로 아뢰었다. ‘지금 만약 다시 묻는다면 허균은 반드시 잠깐 사이에 살아날 계책을 꾸며 다시 함부로 말을 낼 것이니 도성의 백성들을 진정시킬 수 없을까 걱정됩니다.’ 왕이 끝내 군신들의 협박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따랐다.”(<광해군일기> 10년 8월24일)

 

 

실제로 군사를 동원하려고 시도

사관은 이이첨이 그 전에 “심복을 시켜 몰래 허균에게 말하기를 ‘잠깐만 참고 지내면 나중에는 반드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고 하고, 또 허균의 딸이 곧 후궁으로 들어갈 참이므로 다른 근심이 없으리라는 것을 보장한다면서 온갖 수단으로 사주하고 회유했으나 이는 허균을 급히 사형에 처하여 입을 없애려는 계책이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뒤늦게 속았음을 깨달은 허균은 “크게 소리치기를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였으나 국청의 상하가 못 들은 척하니, 왕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둘 따름이었다”(<광해군일기> 10년 8월24일)라고 적고 있다.

허균은 실제 역모를 꾸몄을까? <광해군일기> 10년 3월19일치는 “허균이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궁을 도륙하려다 자신이 거꾸로 역모에 걸려 죽었다”라고 전하고 있고, 8월21일치는 “이때에 허균이 무사를 많이 모으고 은밀히 승군을 청해서는 곧바로 대비궁을 범하여 일을 먼저 일으키고 나중에 아뢰려고 하였는데 왕도 이미 허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허균의 죽음에는 의문이 있지만 군사를 동원하려고 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허균이 군사를 모은 것은 대비궁에 난입하기 위한 것으로서 광해군도 허락했다는 것인데, 여기에 수수께끼의 열쇠가 있다. 황정필의 공초에 따르면 허균은 승군과 황해도·평안도·전라도의 군대를 동원하려고 했다는데, 실제 군사를 동원했다면 인목대비가 최종 목표였을까? 대비궁을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동원해 실제로는 조선에 율도국을 건설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호민론>(豪民論)에서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民)일 뿐이다”라며, “견훤(甄萱)·궁예(弓裔) 같은 사람이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시름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라고 썼던 허균. 그는 진정 율도국을 건설하려 했는가?

 

여성과 빈민은 같은 처지다

시대의 모순에 맞서 싸운 저항시인 허난설헌

천태산인(天台山人) 김태준은 <조선한문학사>(朝鮮漢文學史·1931)에서 허난설헌이 ‘소천지(小天地·조선)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을 세 가지 한으로 여겼다고 적었다. 그러나 허난설헌은 조선의 다른 여성들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동인 영수 허엽(許曄)의 딸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주들도 진서(眞書·한문)를 배우지 못하던 시대에 그는 둘째오빠 허봉의 배려로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한시(漢詩)를 배울 수 있었다.

» 허난설헌의 시비와 무덤. 그는 모순된 조선 현실에 시로 맞서 싸운 저항시인이었다.(사진/ 권태균)


8살에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을 지을 정도였던 여동생의 영특함을 높이 산 조치였다. 허난설헌은 이달과의 만남을 통해 사회 모순에 눈뜨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백광홍(白光弘)·최경창(崔慶昌)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평가될 정도로 당시(唐詩)에 능했던 이달은 서얼이란 이유로 등용되지 못했다. 문(文)의 나라 조선에서 뛰어난 문재(文才)임에도 서얼이란 이유로 천대받는 이달을 보면서 허난설헌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을 떴다. 허난설헌이 최경창과 백광홍을 예로 들면서 “낮은 벼슬아치 녹 먹기 어렵고/ 변군(邊郡)의 벼슬살이 근심 많아라/ 나이 들어 벼슬길 영락하니/ 시인이 궁핍하다는 말 이제야 알겠네”(‘견흥’(遣興)) 라고 노래했다. 서얼이 아니었던 최경창·백광홍의 궁핍에 대한 노래는 역으로 서얼 출신 이달의 궁핍 정도를 짐작게 한다.

 

남편 없는 집에서 외로움에 떨다

이달을 통해 사회 모순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던 허난설헌은 열여섯 무렵 혼인하면서 사회 모순에 직접 발을 디디게 된다.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과거에 거듭 낙방했다. 허난설헌은 ‘강남에서 독서하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寄其夫江含讀書)에서 “규방에서 기다리는 마음 아프기만 한데/ 풀이 푸르러도 강남 가신 님은 오시질 않네”라고 노래하고, ‘연꽃을 따며’(采蓮曲)에서는 “물 건너 님을 만나 연꽃 따 던지고/ 행여 누가 봤을까 반나절 얼굴 붉혔네”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훗날 이수광(李?光)이 <지봉유설>에서 “이 두 작품은 그 뜻이 음탕한 데 가까우므로 시집에 싣지 않았다”고 평할 정도로 아내의 사부곡(思夫曲)까지 음탕으로 몰던 사회였다. 허난설헌은 사부곡까지 음탕으로 몰던 조선 남성들의 처신을 조롱했다.

“누가 술 취해 말 위에 탔는가/ 흰 모자 거꾸로 쓰고 비껴탄 그 꼴/ 아침부터 양양주에 취하고 나선/ 황금 채찍 휘둘러 대제(大堤·중국 호북성 양양(襄陽) 남쪽에 있던 색주가)에 다다랐네./ 아이들은 그 모습에 손뼉 치고 비웃으며/ 다투어 백동제(白銅?·악곡 이름)를 불렀다네.”(‘색주가를 노래함’(大堤曲))

과거에 거듭 낙방하고 난설헌과도 사이가 서먹해진 김성립은 기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허난설헌이 ‘술집의 노래’(靑樓曲)에서 “길가에는 술집 10만이 늘어서 있고/ 집집마다 문밖에는 칠향거(七香車·향목으로 만든 수레)가 멈춰 있네”라고 노래한 것은 색주가나 드나들던 남편 같은 인물들에 대한 풍자였다.

허난설헌의 불행은 혼인생활만이 아니었다. 18살 때(1580) 아버지 허엽이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한데다 어머니마저 세상을 떴으며, 게다가 스물한 살 때인 선조 16년(1583)에는 가장 의지하던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가 갑산으로 귀양길에 올랐다. 허봉은 이듬해 귀양에서는 풀려났으나 도성에는 들어오지 못한 채 선조 21년(1588) 38살의 나이로 금강산에서 역시 객사했다.

남편 없는 집에서 허난설헌은 외로움에 떨었다. “시름 많은 여인 홀로 잠 못 이루니/ 먼동 틀 때면 비단 수건에 눈물 자국 많으리”(‘사계를 노래함’(四時詞))라는 노래나 “비단 띠 비단 치마 눈물 흔적 쌓인 것은/ 임 그리며 1년 방초 한탄함이로다(‘규방의 한’(閨怨))”라는 노래는 불행했던 결혼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다.

허난설헌은 이 불행이 남성에 종속되어 살아야 하는 데서 나왔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한정’(恨情)에서 “인생의 운명이란 엷고 두터움 있는데/ 남을 즐겁게 하려니 이 내 몸이 적막하네”라고 노래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조선 남성들에 대한 실망은 진정한 남성상에 대한 희구로 나타났다.

“선봉대 나팔 불어 진영문을 나서는데/ 붉은 깃발은 얼어붙어 날리지 않네/ 구름은 캄캄한데 서쪽 신호불이 반짝이고/ 밤 깊은데 기병은 평원을 사냥하네/ …/ 장군은 밤중에 용성(龍城) 북으로 진군하고/ 전사들의 북소리 병영을 울린다/ …/ 금창은 선우(單于·흉노족의 왕) 임금의 피로 씻고/ 백마 타고 천산(天山)의 눈을 밟고 개선하네.”(‘변방을 노래함’(塞下曲))

중국 고대 한(漢)나라 장수의 북방 흉노족 정벌을 그린 노래로서 비록 중국 남성을 빌렸지만 허난설헌이 바라는 남성상이 담겨 있는 노래이다. 색주가의 남성을 조롱하고, 대륙을 달리는 기상을 지닌 그를 조선의 여성인 시어머니가 사랑할 리 없었다. 허균이 ‘훼벽사’(毁璧辭)에서 “돌아가신 나의 누님은 어질고 문장이 있었으나, 그 시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라고 쓴 것이 이를 말해준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시어머니에게 미움받은 그의 의지처는 두 아이였으나 남매에게도 비극이 잇달았다.

» 허난설헌이 그린 <양간비금도>. 허난설헌은 둘째오빠 허봉의 배려로 한시를 배울 수 있었다. (사진/ 권태균)

슬픈 세상을 떠나 도교의 세계로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잃더니/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프구나 광릉(廣陵·아이들 묻힌 곳) 땅이여/ 두 무덤 마주 보고 나란히 서 있네/ 사시나무 가지에 바람 소소히 불고/ 도깨비 불빛은 숲 속에서 반짝이누나/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희 혼을 불러서/ 너희들 무덤에 술잔을 붓노라.”(‘자식을 애곡함’(哭子))

이런 불행은 그를 도교의 세계로 안내했다. 도교는 현실에 상처받은 그에게 피안의 세계였다. 이덕무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서 “규수 허경번(許景樊·허난설헌)은 뒤에 여도사가 되었는데 일찍이 광한궁 백옥루(白玉樓)의 상량문을 지었다”라고 쓴 것처럼 ‘여도사’란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슬픔이 가득 찬 세상을 떠나 ‘흰 봉황새 타고’ 도교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 것이다. ‘신선이 노니는 노래’(遊仙詞)에서 “피리 부는 소리 잠시 꽃 사이에 끊기는 동안/ 인간 사는 고을에는 일만 년이 흐른다오”라고 노래한 것에선 허무한 인간 세상을 떠나 신선들의 세상으로 가고 싶었던 그의 심정이 드러난다. 허난설헌은 ‘달 속에 있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의 마지막 구절에서 피안의 세계를 구체화한다.

“육지와 바다가 변해도 바람 수레를 타고 오히려 살아서, 은창(銀窓)으로 노을을 눌러, 아래로 구만리 머나먼 세계를 굽어보리. 옥문이 바다에 임하면 웃으며 삼천 년 동안 맑고 얕은 상전(桑田)을 보도록 하시며 손으로 삼소(三?)의 해와 별을 돌리면서 몸은 구천(九天)의 풍로(風露) 속에 머물게 하소서.”

그러나 이런 세계는 마음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허난설헌은 문제의 본질에 접근했다. 불행은 개인적인 성향이 초래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산물이란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모순된 사회구조의 정점에 억압이 있었다. 허난설헌은 억압이 모든 문제의 본질이란 인식을 갖게 되었다. 여성의 시각을 넘어서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동질감을 갖게 된 것이다.

“양반댁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 높은 다락에선 풍악 소리 울렸지만/ 가난한 이웃들은 헐벗고 굶주려 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느낌을 노래함’(感遇))

이처럼 피지배층의 빈곤과 지배층의 부유를 비판하던 허난설헌의 분노는 피지배층을 억압하는 모든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로 확산되었다.

“수(戍)자리 고생 속에 청춘은 늙어가고/ 장정(長征)의 괴로움에 군마도 여위어가네.”(‘변경을 지키러 나가는 노래’(出塞曲))

“모든 백성들이 달공이 쳐들고/ 땅바닥 다지니 땅 밑까지 쿵쿵거리네/… / 성 위에 또 성을 쌓으니/ 성벽 높아 도적을 막아내겠지/ 다만 무서운 적(恐賊) 수없이 몰려와/ 성 있어도 막지 못하면 어찌 할 거나.”(‘성 쌓는 원한을 노래함’(築城怨))

 

노동의 소외까지 간파하다

‘가난한 이웃·수자리 군인·축성하는 백성’은 모두 사회구조의 하부에 있는 피지배층들이었다. 축성으로도 막지 못할 ‘무서운 적’은 바로 그 백성들이란 함의가 담겨 있었다. ‘가난한 여인을 읊음’(貧女吟)에서 허난설헌은 ‘여성’과 ‘빈민’이 같은 처지임을 간파한다.

“용모인들 남에게 떨어지리오/ 바느질 김쌈 솜씨 모두 좋은데/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에/ 중매 할미 모두 나를 몰라준다네/ 추워도 주려도 내색을 않고/ 온종일 창가에서 베만 짠다네/ 오직 아버님만은 불쌍하다 생각하시지만/ 이웃의 남들이야 어찌 이를 알리요// 밤새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는데/ 삐걱삐걱 베틀 소리 차갑게 울리네/ 베틀에는 한 필 베가 짜였는데/ 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 손으로 가위 잡고 가위질하면/ 추운 밤 열 손가락 곱아오는데/ 남 위해 시집갈 옷 짜고 있건만/ 자기는 해마다 홀로 산다네.”(‘가난한 여인을 읊음’)

노동자가 노동의 결과물에서 소외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나오기 300여 년 전에 시인의 직관으로 간파한 소외론이었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을 인류(동료인간)로부터 소외시키는 데 나아간다”라는 마르크스의 말과 ‘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라는 난설헌의 시구는 같은 인식의 소산이다. ‘이웃의 남들이야 어찌 이를 알리요’라는 구절은 가난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되는 여성의 아픔을 절절히 노래한 절창으로서 그 자신이 가난한 여인에게 깊게 동감하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시구이다. 이렇게 허난설헌은 한 여성의 시각을 넘어 사회 전체의 모순에 칼을 들이대는 저항시인이 되었다.

허균은 “우리 누님은 스물일곱에 세상을 떠났다”라면서 “그래서 삼구홍타(三九紅墮)라는 말이 바로 증험되었다”라고 덧붙였다. 삼구홍타는 허난설헌이 23살 때(1585) 지은 ‘꿈에 광상산에서 노닐며’(夢遊廣桑山詩)에서 “연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져 달빛 서리 차갑네”(芙蓉三九朶/紅墮月霜寒)라고 노래한 것이 27살 때 죽을 것을 예견했다는 뜻이다. 야사 <패림>(稗林)도 27살 때의 어느 날 목욕 뒤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27)의 수인데,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눈을 감았다고 전한다. 허균이 “유언에 따라서 다비(茶毘)에 붙였다”고 증언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한 많은 세상에 그는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시집 간행

허난설헌이 세상을 떴을 때 동생 허균은 만 20살이었다. 그는 누이의 시를 묶어 <난설헌집>(蘭雪軒集)을 간행해 서애 유성룡으로부터, “이상하도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 허씨 집안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라는 발문을 받았다. <난설헌집>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 의해 중국에서도 출간되면서 소천지 조선을 넘어 중국에까지 문명이 알려졌다. 숙종 37년(1711)에는 분다이야(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되었으니 조선 여인 최초의 한류였던 셈이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개인적인 한으로 삭이는 대신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파악하고, 그 부당함을 노래했다.

그는 불행했던 한 여류시인이 아니라 모순된 현실에 시로 맞서 싸운 저항시인이었던 것이다.

 

하룻밤에 잘려나간 북벌의 꿈

조선 건국의 기틀이 된 토지 개혁을 주도하고 요동 정벌을 추진하다 살해당한 정도전

정도전은 고려 우왕 1년(1375) 북원(北元) 사신의 접대를 거부했다가 지금의 전남 나주 지방인 회진현(會津縣)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된다. 친명 정책을 주장하던 그에게 권신(權臣) 이인임·경복흥이 사신 접대를 맡기자, “나는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든지, 오라 지워서 명나라로 보내겠소”라고 반발한 결과 유배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부친은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지낸 정운경(鄭云敬)이었지만 모친이 서녀(庶女)였기 때문에 벼슬길에 오르는 데 많은 고초를 겪었던 정도전이었지만 신념에 따라 친명 외교를 추구하다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가 유배 가자 그의 부인은 “끝내는 국법에 저촉되어 이름은 더럽혀졌으며, 행적이 깎이고,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 가서 풍토병이나 걸리고 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이 망하였습니다”(‘가난’)라고 원망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는 유배에서 화려한 벼슬길보다 더 큰 교훈을 얻었다.

» 정도전이 수복을 꿈꿨던 요동 벌판. 정도전이 사병을 혁파하고 군제를 단일화하려고 하자 왕자와 공신들은 크게 반발했다.(사진/ 권태균)


그는 부인에게, “예전의 내 친구들은 정이 형제보다 깊었는데 내가 패한 것을 보더니 뜬구름처럼 흩어졌다”고 답했듯이 친구들을 잃었지만 대신 민중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부곡민들이 유배객을 환대해준 데 감격해, “세상의 버림을 받아 멀리 귀양 왔는데… 모두가 지극히 후대해주었다. 내가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감동하여 그 시말(始末)을 적어서 나의 뜻을 표시한다”(‘소재동기’(消災洞記))라고 느낌을 적었다. 정도전은 유배 생활 때 천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유배 생활을 통해 민중의 삶 배워

이것이 중요한 전기였다. 정도전이 토지개혁에 집착한 것은 토지 문제를 백성들의 시각으로 바라본 결과였다. <고려사> ‘식화(食貨)’조는 “요즈음 들어, 간악한 도당들이 남의 토지를 겸병함이 매우 심하다. 그 규모가 한 주(州)보다 크며, 군(郡) 전체를 포함하여 산천(山川)으로 경계를 삼는다”라고 전할 정도로 토지가 소수에게 집중되었는데, 이는 대다수 농민들이 몰락한 결과였다. 대다수 농민들은 권세가에게 땅을 빼앗기고 전호(佃戶·소작인)가 되거나 노비가 되었다.

유배에서는 풀렸지만 왜구의 창궐과 권세가들의 박해 때문에 정착하지 못하던 그는 우왕 9년(1383) 함경도 함주(咸州)로 이성계를 찾아가 그의 군대를 보고,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말한다. ‘무슨 일’이 무엇인가는 이심전심으로 통했다. 둘의 만남은 정도전의 혁명이념과 이성계의 혁명무력의 만남이자 결합이었다. 이듬해인 우왕 10년(1384) 10년 만에 다시 벼슬길에 오른 정도전은 이성계의 후원으로 승승장구한다.

1388년 5월 위화도 회군으로 극도로 어수선한 정국은 정도전의 기획에 의해 토지개혁 정국으로 전환된다. 그해 7월 같은 역성혁명파 조준(趙浚)이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을 필두로 간관 이행(李行), 전법판서 조인옥(趙仁沃) 등이 잇달아 사전(私田) 개혁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정도전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위화도 회군의 또 다른 주역 조민수를 “사전 개혁을 저해하므로 대사헌 조준이 논핵하여 내쫓았다”라는 <고려사절요>의 기록대로 토지개혁 정국으로 이성계의 경쟁자 조민수까지 제거했다. 정도전은 “전제(田制·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호강자(豪强者)가 남의 토지를 겸병하여 부자는 밭두둑이 잇닿을 만큼 토지가 많아진 반면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부전’(賦典) <조선경국전>)라는 분노를 토지개혁 정국으로 연결했던 것이다. 정도전이 구상하는 토지개혁은, “옛날에는 토지를 관에서 소유하여 백성에게 주었으니, 백성이 경작하는 토지는 모두 관에서 준 것이었다. 천하의 백성으로서 토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경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부전’)라고 말한 대로 국가가 토지를 몰수하여 공전(公田)으로 만든 다음, 백성들의 수대로 나누어주는 계구수전(計口授田) 방식을 추구했다. 이들은 공양왕 2년(1390) “기존의 모든 토지 문서(公私田籍)를 서울 한복판에 쌓은 후 불을 질렀다. 그 불이 여러 날 동안 탔다”는 <고려사> ‘식화지’의 기록처럼 모든 토지문서를 불태운 뒤 그 토대 위에서 공양왕 3년(1391) 새로운 토지제도인 과전법(科田法)을 반포했다.

그러나 과전법은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지는 못하고 직역자에게만 토지를 주는 방식으로 후퇴했는데, 이는 권세가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정도전은 ‘부전’에서 그 실태에 대해 이렇게 썼다.

“전하(이성계)께서는 잠저(潛邸·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집)에 계실 때 친히 그 폐단을 보고 개탄스럽게 여기어 사전 혁파를 자기의 소임으로 정하였다. 그것은 대개 경내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인구를 헤아려서 토지를 나누어주어서 옛날의 올바른 토지제도를 회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는데, 당시의 구가(舊家) 세족(世族)들이 자기들에게 불편한 까닭으로 입을 모아 비방하고 원망하면서 여러 가지로 방해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부전’<조선경국전>)

그러나 정도전은 “백성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비록 옛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토지제도를 정제하여 1대의 전법을 삼았으니, 전조(前朝·고려)의 문란한 제도에 비하면 어찌 만배나 낫지 않겠는가?”(‘부전’)라고 토지개혁의 성과를 자부했다. 혁명은 아니더라도 혁명에 가까운 개혁이란 뜻이었다.

 

명나라,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

이성계는 과전법 제정 이듬해 조선을 개창하는데 그의 즉위에 많은 조짐들이 있었다고 각종 사료는 전한다. “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다시 삼한(三韓)의 강토를 바로잡을 것이다”라는 말도 그중 하나인데, 木子는 곧 李자의 파자(破字)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새 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조작의 혐의가 짙은 이런 조짐들 때문이 아니라 한 해 전에 반포한 ‘과전법’ 덕분이었다. 과전법으로 개혁정책의 혜택을 입은 백성들이 새 왕조 개창을 지지했기에 고려의 구신(舊臣)들은 농민들을 새 왕조 개창에 반대하는 봉기로 내몰 수 없었던 것이다. 토지개혁이 조선 개창의 원동력이었는데 그 토대는 정도전이 마련한 것이었다.

» 정도전의 초상. 모든 백성에게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주려했던 그의 꿈은 끝나버린 것일까.(사진/ 권태균)

조선의 유학자들이 비판받는 두 가지 큰 이유는 보수적 사고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때문인데, 두 가지 모두 양란(兩亂·임진, 병자난) 이후에 두드러진 현상이다. 정도전은 불교를 극력 비판하는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썼지만 과전법 시행에서 보듯이 보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또한 친명 외교정책을 주장하다가 유배까지 갔지만 사대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대주의는커녕 요동 수복을 모색했던 인물이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이 개국 직후인 1392년 10월 계품사(啓稟使) 및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간 것은 표면상 새 나라 개창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명 태조 주원장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에게 1393년 5월 태조 흠차 내사(欽差內史) 황영기(黃永奇) 등을 사신으로 보내, “사람을 요동으로 보내 포백(布帛)과 금은으로 우리 변장(邊將)을 꾀었다”고 비판하고 또 “요사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여진족을 꾀여 가권(家眷) 500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몰래 건넜으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소”라고 항의했다. 정도전이 요동 수복을 위해 사람을 포섭하고, 여진족을 회유하는 첩보활동을 했다는 항의이다. 주원장은 또 “어찌 그대의 고려에서 급하게 병화(兵禍)를 일으키는가? …짐은 장수에게 명해서 동방을 정벌할 것이지만… 여진인들을 모두 돌려보낸다면 짐의 군사는 국경(國境)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오”(<태조실록> 2년 5월23일)라고 협박했는데, 이는 명의 당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선이 기마민족인 여진족과 손잡고 북벌에 나선다면 명나라로서 막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정도전은 태조 2년 11월에는 구정(毬庭)에 군사들을 모아놓고 진도(陣圖)에 따라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격구를 빙자한 요동정벌 훈련이었다.

드디어 명나라는 태조 5년(1396) 2월 ‘표전문(表箋文) 사건’을 빌미로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했다. 정도전은 명의 의구심을 풀기 위해 그해 7월 판삼사사(判三司事·종1품)에서 봉화백(奉化伯)으로 물러났으나 주원장은 만족하지 않고 태조 6년(1397) 4월, “정도전이란 자는 왕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 왕이 만일 깨닫지 못하면 이 사람이 반드시 화(禍)의 근원일 것이다”라며 정도전의 인도를 거듭 요구했다.

 

사병 혁파에 왕자와 공신들 반발

정도전과 함께 북벌에 적극적이었던 남은(南誾)은 “사졸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라고 상서(上書)했다. <태종실록>에는 정도전이 태조에게 했다는 의미심장한 구절이 전한다.

“정도전이 지나간 옛일에 외이(外夷)가 중원(中原)에서 임금이 된 것을 차례로 들어 논하여 남은의 말을 믿을 만하다고 말하고, 또 도참(圖讖)을 인용하여 그 말에 붙여서 맞추었다.”(<태종실록> 5년 6월27일)

‘외이가 중원에서 임금이 된 것’은 바로 중원을 정복했던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고족의 원나라 등을 뜻하는 것이었다. 13년 전(1384) 함주의 이성계를 찾아가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국왕이 되는 길을 제시했던 정도전이 이제는 황제가 되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정도전은 조선군이 압록강을 넘으면 명과 조선 중 하나가 끝장나는 전면전이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북면 변방에서 태어나 개국의 위업을 달성한 이성계로서 ‘동명왕의 옛 강토 회복’은 남은 생애를 걸만한 일이었다. 급기야 명나라는 표전문 문제로 자국에 억류한 조선 사신 정총·김약항·노인도를 사형했다. 정총이 태조 이성계의 부인 현비(顯妃) 강씨의 승하 소식을 듣고 흰 상복을 입었다는 이유였다. 이 사건은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을 더욱 분개하게 했다. 인신(人臣)으로 국모의 상을 당해 상복을 입었다고 사람을 죽인 만행에 대한 분개는 당연했다. 정도전은 태조 6년(1397) 12월22일 동북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가 되어 함경도 지역의 주군 구획과 호구 정리, 성보(城堡) 수리, 그리고 군관의 재품(才品) 등을 파악하고 정비했다. 이 역시 전쟁 준비였다. 이성계는 재위 7년(1398) 함경도에 있는 정도전에게 서신과 옷 등을 내려주면서 임금이란 명칭 대신에 ‘송헌거사’(松軒居士)라는 당호(堂號)를 사용할 정도로 깊은 신임을 보였다.

그러나 요동 정벌을 위해 각 왕자와 공신들이 소유한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군제를 단일화하려 하자 커다란 반발이 일어났다. 사병 개혁에 대한 반발이었다. 요동 정벌에는 고토 회복이라는 역사적 당위성뿐만 아니라 사병 혁파라는 국내 정치적인 요소도 들어 있었다. 정도전은 요동 정벌이란 대의명분으로 군제를 단일화함으로써 여러 왕자들과 공신들이 갖고 있던 사병을 관군으로 편재하려 한 것이다. 왕자들이 진법 훈련에 사병들을 참가시키지 않자 이성계는 회안군 방간(芳幹), 익안군 방의(芳毅), 정안군 방원(芳遠), 흥안군 이제(李濟) 등 왕실 종친들의 부하 장수들에게 태 50대를 내렸다.

 

‘지극한 정치’의 꿈은 아직도 진행중

이때 대다수의 왕자들은 이성계의 강력한 명에 복종해 사병 혁파에 응했지만 이방원과 방간이 이에 거부해 난을 일으키면서 요동 수복은 목전에서 좌절되었다. 태조 7년(1398) 8월 이방원은 이성계가 와병 중인 틈을 타 전격적으로 난을 일으켰다. 제1차 왕자의 난이었다. 이방원과 방간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정도전은 남은의 첩 소동(小洞)의 집에서 이직과 술잔을 나누고 있다가 살해된다. 그만큼 전격적인 쿠데타였다. 정도전뿐만 아니라 남은·심효생·이근·장지화 등 북벌을 주장하던 인물들은 모두 살해됐다. 새 나라 개창에 성공했던 정도전이 꿈꾸었던 요동 정벌은 이렇게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모든 백성에게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히려 했던 정도전, 요동 수복을 꾀했던 그의 꿈들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유학정치로 진골에 맞서다

당나라에서 문명을 떨친 뒤 신라 개혁에 뛰어든 최치원의 투쟁과 좌절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은 “(최치원은) 서울(경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역사 기록에 전하는 것이 없어 그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라고 전하고 있다. 세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그의 가문이 진골이 아닌 육두품임을 뜻한다. ‘최치원 열전’은 또 “어려서부터 정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12세에 바다를 따라 배를 타고 당나라로 들어가려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어린 나이에 해외 유학을 결심한 것은 신라에서는 진골이 아니면 출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때 부친 최견일은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니 힘써 공부하라”고 격려했다. 부친이 말한 과거는 신라가 아니라 당나라의 과거였다. 골품제 사회인 신라에서는 진골이 아니면 출세할 수 없었던 반면 세계제국 당나라는 빈공과(賓貢科)를 설치해 뛰어난 외국인들을 등용했다. 최치원은 세계의 유수한 인재들이 몰리는 빈공과에 유학 6년 만에, 18살의 나이로 단 한 번에 급제했다. 당나라 시인 고운(顧雲)이 “열두 살에 배 타고 바다를 건너와/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켰네/ 열여덟 살에 글 싸움하는 과거에 나아가/ 화살 한 대로 금문책(金門策)을 깨었네”(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箭射破金門策,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라는 시를 남겼을 정도로 열여덟 살 최치원의 과거 급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진골의 특권, 신라를 목조르다

» 육두품 출신인 최치원은 12살 때 진골이 아니면 출세할 수 없는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갔다. 최치원의 초상.(사진/ 권태균)

급제 뒤 몇몇 관직을 거치던 최치원은 당 희종(僖宗) 6년(879)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진압사령관인 제도행영병마도통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황소를 토벌하는 격문’(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썼다. “광명 2년(881) 7월8일에 제도도통검교태위 모(某)는 황소에게 고한다”로 시작되는 ‘토황소격문’을 읽던 황소가 간담이 서늘해져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가 회자되면서 최치원의 문명은 당나라 전체에 높아져갔고, ‘토황소격문’은 당나라 전체에 필사되어 돌아다녔다. 최치원은 4년간 고변의 군막에서 표(表)나 격문 등을 저술하는 일에 종사한 공으로 879년 도통순관에 승차되면서 당 희종으로부터 비은어대(緋銀魚袋)와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황제에게 인정받은 최치원은 당에서 출세할 수 있는 모든 요건을 갖춘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견딜 수 없었다.

“가을바람에 오직 괴로이 읊나니/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 적구나/ 창밖 삼경에 비가 내리는데/ 등 앞의 외로운 마음 고향을 달리네.”(秋風惟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가을밤 비 내리는데’(秋夜雨中), <동문선>)

그는 귀국을 결심했다. 귀국 결심을 알리자 당 희종은 큰 혜택을 주었다. ‘최치원 열전’에는 “나이 28세에 이르러 귀국할 뜻을 가지자 당 희종이 이를 알고 광계(光啓) 원년(885, 헌강왕 11년)에 조칙을 지닌 사신으로 보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의 사신 자격으로 귀국하게 했던 것이다.

‘최치원 열전’이 헌강왕이 “그를 붙들어두려고 시독 겸 한림학사 등의 벼슬을 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헌강왕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는 헌강왕도 신라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당시 신라는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한 시기였다. 신라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핵심 요인은 진골들의 특권이었다. 신라는 출신 신분이 아니라 당나라처럼 능력이 평가받는 사회가 되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최치원의 정치사상과 행정 경험이 반드시 필요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익힌 정치사상과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 했다. 그의 정치사상이란 유학(儒學)정치 사상을 뜻한다. 유학정치 사상은 과거제를 기본으로 운용되는 체제로서 신분제를 기본으로 운용되는 신라의 골품제와는 전혀 다른 정치사상이었다. 신라는 능력이 아니라 출생 당시의 출신성분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는 폐쇄적인 사회였다. 최치원은 이를 유학정치 체제라는 좀더 개방적인 사회제도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진골 귀족들은 이를 거부했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은 “최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당나라에 유학해 얻은 바가 많아서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신라가 쇠퇴하는 때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받은 ‘의심과 시기’는 그가 육두품 출신이기에 더욱 거세게 가해졌다. 최치원 자신이 육두품을 ‘득난’(得難)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 역시 지배계급의 일원임에는 틀림없으나 진골 위주의 신라 사회에서는 중간 지배계층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최치원의 승부수, 시무책 10여 조

신라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은 헌강왕이나 그 뒤를 이은 진성왕이나 모두 느끼는 과제였다. 두 왕이 모두 최치원을 중용하려 했던 것은 이런 개혁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각지에서 빈발하는 농민 봉기는 신라 사회가 근본적인 개혁에 나서지 않을 경우 내부에서 무너져버릴 것임을 말해주었다. 최치원은 진성여왕 9년(895) 난리 중에 사찰을 지키다 죽은 승병들을 위해 만든 해인사 경내 한 공양탑의 기문(記文)에서 “당나라에서 벌어진 병(兵)·흉(凶)이란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 멈추면서 동쪽 신라로 옮겨와 그 험악한 중에서도 더욱 험악하여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흩어져 있었다”라고 애도했다. 변화를 거부한 결과 신라는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내전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으나 진골은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중앙 정계의 이런 상황에 좌절한 최치원은 지방직인 외직을 자원해 대산군(大山郡·전북 태인), 천령군(天嶺郡·경남 함양), 부성군(富城郡·충남 서산) 등지의 태수를 전전했다. 부성군 태수로 있던 진성왕 7년(893)에는 하정사에 임명되어 당에 가려 했으나 흉년이 계속되면서 농민들이 초적(草賊)으로 변해 길을 막는 바람에 가지 못했을 정도로 신라 사회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 조선의 서거정이 극찬한 최치원의 <계원필경>. 최치원은 사후에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최치원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가 귀국 10년째인 진성여왕 8년(894) 신라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종합적 개혁안인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린 것은 그의 승부수였다. 시무책에는 당연히 신분보다는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는 진골의 신분적 특권을 축소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위기에 빠진 신라 사회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진성여왕은 최치원의 시무책을 즉시 가납하고 그를 육두품 중의 최고 관직인 제6관위 아찬에 봉했다. 그러나 아찬 정도의 품계로 진골들의 특권과 싸우며 개혁정치를 추진할 수는 없었다. 그의 시무책은 진골 귀족들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시대와 조우하지 못한 불우한 천재 최치원은 은둔의 길을 택했다. 40여 살 장년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난 최치원은 경주 남산과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세상의 시름을 잊으려 애썼다. 육두품 출신의 그로서 체제 내의 개혁이란 처음부터 잘못된 단추였는지도 모른다.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유랑 속에서 생을 마쳤다. <삼국사기>는 그가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전하고 있으나 그때가 언제였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죽음의 경위마저 불분명하게 생애를 마친 것이다.

최치원은 자신을 ‘썩은 유학자’(腐儒) 또는 ‘유문의 끄트머리 학자’(儒門末學)라며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그는 지증(智證)·낭혜(朗慧)·진감(眞鑑) 등 선승들의 탑비문을 찬술하고, 노장사상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이런 견지에서 유·불·도 삼교의 통합을 주장했다.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서 그는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 교(敎)를 설치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삼교(三敎)를 포함하는데 군생(群生)을 접촉하여 교화한다”라고 말했다. 이 글에서 최치원은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魯司寇·공자)의 주지(主旨)요, 무위의 일에 처하여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주사(周柱史·노자)의 종지(宗旨)이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봉행하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석가)의 교화인 것이다”라고 신라 고유의 풍류도에 삼교를 접합시켰다. 그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상과 종교가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통합주의자였다. 또한 그는 신라인이면서도 고구려와 백제 역사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시중(太師侍中)에게 올린 편지에는 식민사관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들을 담고 있다.

 

 

사후에 더 높은 평가 받아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변한·진한인데,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에 강병이 100만 명이어서 남으로는 오·월을 침공하고, 북으로는 유·연·제·노(幽·燕·濟·魯) 등의 지역을 흔들어서 중국의 큰 두통거리가 되었으며, 수나라 황제가 세력을 잃은 것은 저 요동 정벌로 말미암은 것입니다.”(<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중국의 근대 석학 곽말약이 편찬한 <중국사고지도집>(中國史稿地圖集)에 따르면 오·월은 중국 양자강 이남 지역을 뜻하고, 유·연은 북경 북쪽에서 만주 일대까지이며, 제·노는 산동성 일대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만주 일대는 물론 북경과 산동성 일대, 그리고 양자강 유역까지 뒤흔들었다는 뜻이다. <후한서>(後漢書) ‘광무제(光武帝) 본기’는 “(광무제) 25년(서기 49) 춘정월, 요동 변방의 맥인(貊人)이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침략했는데, 요동 태수 제융(祭?)이 불러 항복시켰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맥인은 바로 고구려를 뜻한다. 중국사회과학원에서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에 따르면 북평은 현재 북경 서남쪽 하북성 만성(滿城)현 부근이고, 어양은 북경시 밀운(密云)현 부근, 상곡은 하북성 회래(懷來)현, 태원은 오늘의 산서성 성도인 태원시다. 고구려가 중원 깊숙한 곳까지 진출했다는 뜻이다. 중국 남조시대의 <송서>(宋書) ‘백제 열전’에는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 리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점거하자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점령하였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라고 전하고 있다. 요서군과 진평군은 학자들에 따라 현재의 북경과 천진 사이라고 추정되기도 하고 북경 북쪽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 대륙에 진출했었다는 직접적인 증거지만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아무런 이유 없이 부정된 기록이기도 하다.

최치원은 진골 정치 체제에 도전했으나 6두품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좌절했던 지식인이자 정치가였다. 그가 신라 사회에 적용하고자 했던 유학정치 사상은 그의 당대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후 고려가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삼은 것은 최치원의 영향이 적지 않다. 그가 고려시대에 공자를 모시는 문묘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제향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최치원은 당대의 현실정치에서는 실패했으나 그의 유학정치 사상은 이후 고려와 조선의 주류 정치사상으로 기능했다. 유학정치 사상은 조선 후기에는 수구적 사상으로 전락했지만 이때만 해도 그 어느 사상보다 진보적이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답게 사후에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조선의 서거정(徐居正)이 최치원의 <계원필경>(桂苑筆耕)을 “우리 동방의 시문집이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부득불 이 문집을 개산비조(開山鼻祖)로 삼으니 이는 동방 예원(藝苑)의 본시(本始)이다”라 칭한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사대의 나라에서 황제를 꿈꾸다

북방을 지킨 조선 무인 이징옥, 수양대군과의 충돌에 얽힌 미스테리

태조 7년(1398) 요동정벌을 진두에서 지휘하던 정도전을 이방원이 주살한 뒤 명에 대한 사대(事大)는 조선의 가장 큰 외교정책이 되었다. 문종 사후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왕위를 꿈꾸던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년(1452) 8월 명나라 이부낭중(吏部郞中) 진둔(陳鈍)이 사신으로 왔을 때 하마연(下馬宴)을 주관하면서 사신의 자리를 임금의 자리인 북쪽에 설치하고 자신의 자리는 동쪽에 설치할 정도였다. 명 사신의 거듭된 양보로 동서로 대좌하게 되었으나 수양대군은 같은 해 10월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도 일개 낭중(郞中)인 웅장(熊壯)이 전하는 물품을, “황제께서 내리시는 것이니, 의리로 보아 앉아서 받을 수 없다”며 일어나서 공손하게 받아서 “조선은 본디 예의의 나라지만 예의를 아는 것이 이와 같다”는 칭찬을 들었다. 수양대군은 자신이 중국을 극진히 섬기는 사대주의자임을 분명히 각인시켜 훗날 일으킬 정변을 추인받고자 한 것이다.

» 이징옥은 무과에 급제한 뒤 생애의 대부분을 북방 지역에서 보냈다. 중국 지안 지방에 남아 있는 국내성 성벽.(사진/ 권태균)
명나라 사신의 횡포에 맞서다

이런 사대의 나라, 문약(文弱)의 나라 조선에서 경상도 양산(梁山) 출신의 이징옥(李澄玉)은 특이한 존재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 차천로(車天輅)가 쓴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이징옥이 14살, 형 이징석(李澄石)이 18살 때 어머니가 ‘살아 있는 산돼지를 보고 싶다’고 말하자 이징석은 그날로 산돼지를 활로 쏘아 잡아왔는데, 이징옥은 이틀 뒤 맨손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남들이 네 형의 용력이 너보다 못하다는데 맨손으로 돌아왔으니 웬일이냐”고 묻자 이징옥은 “문 밖에 나와 보소서”라고 답했다. 문 밖에는 큰 산돼지가 누워 헐떡거리고 있었다. 이틀 동안 산돼지를 쫓아 기운을 빼놓고 몰고 온 것이었다.

그는 국왕 호위를 담당하는 갑사(甲士)로 근무하던 중 태종 16년(1416) 무과 친시(親試)에 장원해 사복소윤(司僕少尹)으로 임명되었다. 이징옥은 급제 뒤 거의 모든 벼슬생활을 함경도에서 보냈다. 세종 13년(1431) 잠시 귀향해 모친을 뵙고 오라는 허락을 받은 이징옥에 대해 <세종실록>은 “이징옥이 9년 동안 귀성하지 못했다”라고 적을 정도였다. 세종 6년(1424) 아산(阿山)을 습격한 여진족의 공격을 막아낸 공로로 정3품 경원절제사로 승진한 것을 비롯해 이 과정에서 그는 여러 번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세종이 재위 10년(1428) 7월 이징옥에게 어약(御藥)을 내리는데, ‘풍질’ 때문이라는 사관의 기록처럼 풍질도 갖고 있었다.

이징옥은 세종 14년(1432) 병조참판에 임명되어 오랜만에 서울 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때 이징옥은 명 사신 윤봉(尹鳳)과 부딪치게 된다. 윤봉은 조선 출신의 환관인데, 중국 출신들보다 더 조선을 괴롭혔다. 윤봉은 태종에게 조선에 있는 자신의 형제들에게 벼슬을 줄 것을 요구해 형제 10여 명이 모두 서반(西班)의 사직(司直)·사정(司正) 등의 벼슬을 받았다. 세종 12년(1430) 사신으로 왔을 때는 뇌물을 주지 않는다고 소동을 부렸는데, 세종은 농사꾼 출신인 그의 아우 윤중부(尹重富)에게 당상관인 총제의 벼슬을 주며 달래야 했다.

세종 14년 윤봉이 다시 사신으로 왔을 때 접반사로 임명된 인물이 이징옥이었다. 그가 접반사가 된 것은 윤봉이 함길도를 거쳐 귀국하기 때문인데, 함길도를 거치는 이유는 해청(海靑), 곧 매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신들의 매 요구는 조선의 큰 골칫거리였다. 판서 신상(申商)이 “매년 매를 잡아 바치면 함길도 백성만이 아니라 온 나라가 쇠모(衰耗)하게 될 것”이라며 잡기 어려운 척하고 잡은 것도 몰래 놓아주자고 계청한 것이 사대의 나라 조선의 고민을 말해준다. 세종은 당초 이 계청을 받아들였다가 “내 지성으로 사대하였고, 철이 난 이래로 조금도 거짓된 일을 행함이 없었다”면서 정성껏 잡아 바치라고 명령을 바꾸었다. 이런 상황에서 접반사가 된 이징옥은 윤봉의 횡포에 분개하고 맞섰다. 경원에 도착한 운봉이 절제사 송희미(宋希美)에게 좋은 사냥개를 달라고 요청하자 이징옥은 “이미 뇌물을 주지 말라는 칙서가 있고, 또 나라의 명령이 있으니 사리에 비추어 좇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윤봉은 경성(鏡城)에서 수하를 시켜 백성의 개를 빼앗았는데, 이징옥은 개 주인에게 몰래 가져가게 했다. 윤봉이 이징옥에게 “재상(宰相)은 어찌 이처럼 사리를 알지 못하고, 개 한 마리를 아끼시오”라고 화를 내며 그 개를 다시 빼앗아왔다. 백성의 개 네 마리를 더 빼앗은 윤봉이 개 먹이를 요구하자 이징옥은 거부하면서 개 주인에게 일러 모두 가져가게 했다. 화가 난 윤봉이 개 주인을 핍박하자 개 주인은 개를 이징옥의 처소로 보냈고, 이징옥은 숨기고 내놓지 않았다. 윤봉의 부하들은 모피를 구하려다 실패하자 통역관 정안중(鄭安中)을 매질하고, 윤봉은 직접 탄자(彈子)를 쏘아 사람을 다 죽게 만드는 등 횡포가 말이 아니었다. 이런 윤봉과 맞서던 이징옥은 급기야 경성 사람이 잡은 해청 1연을 숲 속에 숨겨두었다가 몰래 놓아주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세종은 황희·맹사성 등의 대신을 불러 “내가 즉위한 이래로 사대의 일에서는 조금도 거짓을 행한 적이 없는데 이제 이징옥이 대사를 그르쳤으니 어찌하여야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징옥은 세종 14년 11월 의금부의 국문을 받고 외방에 부처(付處·유배형의 일종)되었다가 1년 뒤에야 풀려났다. 석방 뒤 영북진(寧北鎭) 절제사로 임명된 이징옥은 함길도에서 새로 관찰사로 임명받은 김종서(金宗瑞)를 만난다.

 

‘어금니가 있는 큰 돼지’라 불려

세종은 재위 15년(1433년) 1월 최윤덕(崔潤德)을 평안도 절제사로 삼고, 그해 12월에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삼아 압록강 유역의 4군(郡)과 두만강 유역의 6진(鎭) 개척에 나섰다.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할 수 있었던 데는 이징옥의 많은 도움이 있었다. <세종실록>의 아래 글은 이징옥에 대한 평가를 전하고 있다.

이징옥이 회령을 지키고 있는데,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여 정령(政令)이 매우 엄격하였으며, 적변(賊變)이 있으면 즉시 무장을 갖추어 성 밖으로 나가서 적을 기다리니, 싸움에 크게 이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러 부의 야인(野人·여진족)들이 매우 그를 두려워하고 꺼려서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그를 ‘어금니가 있는 큰 돼지’(有牙大豬)라고 불렀다. 야인 중에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 “그가 술 취한 틈을 타서 쏘아 죽이자”라고 모의하자 그 측근의 사람은 “비록 술에 취하더라도 범할 수가 없을 것이라”라고 말했다.(<세종실록> 18년 11월27일)

» 18세기에 제작된 해동지도의 일부분. 지도 상단에 ‘오국성’이라고 표시된 곳은 이징옥이 나라를 세운 뒤 도읍지로 삼으려 했다고 알려지는 국내성이다.(사진/ 권태균)
그러나 그는 무력만을 앞세우는 인물이 아니었다. 세종 16년(1434) 영북진 남면 고산성(古山城) 근처에 250여 호(戶)가 경작할 땅이 있으니 군사와 백성을 이주시켜 국경 방어의 요충지로 삼자고 조정에 건의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둔전(屯田)을 갈아서 먹을 것을 있게 해야 북방 영토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징옥이 세종 20년(1438) 3월 모친상을 당하자 세종은 100일 뒤에 기복출사(起復出仕)시키겠다고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김종서가 상언을 올려 “이징옥이 오랫동안 풍증(風症)을 앓고 있다”면서 “이징옥에게 2, 3년 동안 병을 치료하게 하자”고 청하자 세종은 이징옥을 경상우도(右道) 도절제사로 임명했다. 또한 80살이 넘은 아버지 이전생(李全生)에게도 첨지충추원사를 제수했다. 그러나 이징옥은 세종 22년(1440) 7월 중추원사(中樞院使) 겸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되는데, 여러 차례 부친을 모시게 해달라는 사직상소를 올렸지만 허락받지 못했다. 이징옥은 세종 29년(1447) 부친의 나이가 96살이라며 “관직에서 물러나 봉양을 허락해달라”고 계청해 허락을 받았으나 세종 31년(1449)에 몽골대군이 침공한다는 첩보가 잇따르자 다시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었다. 이때 <세종실록>의 사관(史官)은 “이징옥이 무예(武藝)가 있어 양계(兩界)를 20여 년이나 진압했는데 야인이 외복(畏服)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문종 즉위년(1450) 8월 부친이 사망하자 이징옥은 3년상을 치르겠다며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으며, 단종도 재위 1년(1453) “경이 북방에 머문 지 이미 30개월이 되었으니, 마땅히 교대되어야 하지만 변방의 숙장(宿將·경험 많은 장수)은 얻기 어렵다”면서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해 10월 계유정난이 발생하면서 운명은 전혀 예기치 못한 곳으로 흘렀다.

 

대금황제가 되려는 계획?

단종 1년 10월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상호군 송취(宋翠)를 의금부 진무(鎭撫)로 삼아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을 체포해 평해(平海)에 안치하라고 명령했다. 계유정난에 반발할 무장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직 도절제사를 체포할 경우 저항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김종서와 앙숙이었던 평안우도 도절제사 박호문(朴好問)을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해서 자리를 빼앗은 뒤 체포하려고 했다. 박호문에게 절제사 자리를 물려주고 귀향하던 이징옥은 휘하 장수를 불러 “새 도절제사와 면대하여 의논할 일이 있다”고 다시 돌아왔다. 여러 차례의 사직 요청을 거부하던 조정이 갑자기 사람을 보내 교체시킨 것이 석연치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징옥이 다시 나타나자 당황한 박호문은 큰 돌로 문을 막고 문틈으로 활을 쏘며 저항했으나 이징옥 휘하의 장사가 쏜 화살에 되레 죽고 말았다. 이징옥은 박호문의 아들 박평손(朴平孫)을 붙잡아 “네 아비는 과연 조정에서 제수한 것이냐?”라고 다그치자 두려움에 질린 박평손이 조정에서 제수한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박평손을 베어죽이려 하자 “어찌 조정에서 제수받지 않고 도절제사가 되는 자가 있겠습니까? 당신들이 이 절제사의 말을 따르면 뒤에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라고 소리치자 병사들은 박평손을 죽이지 못했다. 이런 소동을 통해 수양대군이 난을 일으켜 김종서·황보인 등을 죽이고 사실상 국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징옥은 군사를 일으켜 수양을 토벌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중요한 변화가 발생한다. 수양 쪽에서 작성한 <단종실록>은 종성(鍾城)에 도착한 이징옥이 종성 교도(敎導) 이선문(李善門)에게 “이 땅은 대금황제(大金皇帝)가 일어난 땅이다. 때에는 고금이 있으니 영웅도 다름이 없다. 내가 지금 큰 계책을 정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고 전하는데, ‘큰 계책’이란 바로 대금황제가 되려는 계획을 뜻한다. <단종실록>에는 이징옥이 “짐이 박덕하여 천명대로 한다고 보증하기는 어렵지만 감히 스스로 마지못해 위에 오른 지가 해가 넘었다. 지금 하늘이 다시 유시하시니, 내가 감히 상천(上天)의 명령을 폐하지 못하여 모년월일 새벽녘에 즉위하였으니, 경내의 대소 신민은 마땅히 그리 알라”고 직접 즉위까지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징옥이 여진족 완옌씨(完顔氏)가 세웠던 금나라(1115~1234)를 이은 대금(大金)을 재건해 황제에 올랐다는 것이다. <해동야언> ‘세조조’는 “이징옥이 글을 야인(野人·여진족)에게 보내서 대금황제라 자칭하고, 장차 오국성(五國城)에 도읍을 정한다고 하니 야인이 모두 복종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오국성은 송(宋)나라 두 황제인 휘종(徽宗)·흠종(欽宗) 부자가 금나라에 생포되어 구금되었다가 죽은 성이기도 한데, 고구려의 국내성 자리이다.

 

압록강은 진실을 알고 있을까

이징옥이 대금황제를 자칭한 이 사건에 대해 <단종실록>의 조작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조선 정조 때의 채제공(蔡濟恭)은 <번암집>(樊巖集)에서 이징옥은 수양의 불법성을 명나라에 직소해 단종의 실권을 회복시키려는 것이었지 대금황제가 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명나라 사신들의 횡포에 분개하던 그가 명나라에 호소해 단종의 실권 회복을 기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20여 년간의 북방 생활을 통해 그는 기마민족인 여진족을 규합하면 수양을 무찌르고 나아가 명나라와 한판 대결도 전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징옥은 단종 1년 종성 판관 정종(鄭種)과 이행검(李行儉)에게 살해당해 죽고 말았다. 과연 그는 사대의 나라 조선에서 대금제국 재건과 황제를 꿈꾸었을까? 광개토태왕비가 있는 국내성을 흐르는 압록강은 그 진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