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하게 나를 죽이라” |
영조와 맞선 김일경, ‘사초’를 위해 죽은 김일손, 상식을 뒤엎은 신채호…
시대를 논리를 뛰어넘어 미래와 대화했던 역사의 선각자들을 만나보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newhis19@hanmail.net
역사평론가 이덕일씨는 한국사에서 금기가 되었던 부분이나 시대와 불화했던 인물들의 이야기, 일제 식민사관을 걷어내고 한국사의 대륙성과 해양성을 오늘에 되살리는 작업들을 꾸준히 해 왔습니다. 현재 사단법인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조선선비 살해사건> <사도세자의 고백> <살아있는 한국사> <역사에게 길을 묻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습니다. |
몇 년 전 받은 전화 한 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덕일 선생님이십니까? 저 아계 후손입니다.”
필자는 선조 임금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의 후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분은 자꾸 경종과 영조 임금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학 세대가 아니라 호에 익숙지 않기 때문에 아계의 이름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까봐 삼가면서 조선 후기에 아계라는 호를 썼던 인물들을 떠올려보았다. 한 명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의 후손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계 후손의 전화를 받다
‘아계(?溪) 김일경(金一鏡·1662~1724).’
조심스럽게 확인해보니 과연 ‘일자 경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필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김일경의 후손이 살아 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김일경은 조선 후기 그 누구 못지않게 유명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유명한 만큼 금기시됐던 인물이기도 하다. 소론 강경파이던 그는 경종 원년(1721) 12월 경종의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사대신을 사흉(四凶)이라고 공격하는 신축소를 올려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는 신축환국(辛丑換局)을 달성한 주역이었다. 그러나 경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노론이 지지하는 영조가 즉위하면서 가장 먼저 사형됐던 인물이다.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그는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맞섰다. <영조실록>의 사관이 “김일경은 공초(供招)를 바칠 때 말마다 반드시 선왕의 충신이라 하고 반드시 ‘나’(吾)라고 했으며 ‘저’(矣身)라고 하지 않았다”(<영조실록> 즉위년 12월8일)라고 부기할 정도로 영조를 부인했다. 경종에게는 사육신 못지않은 충신이던 그는 영조에게는 역적이 되어 부대시처참(不待時處斬)됐다. 연좌된 그의 자식들도 절멸됐다. 게다가 영조 31년 나주벽서 사건이 일어나자 김일경의 아들 중에 혹시 살아남은 자가 있을지 모르니 찾아서 처단하라는 왕명이 내려지고, “역적 김일경의 종손 가운데 성명을 바꾸고 중이 된 자가 있다”는 정보가 있자 발본색원을 지시할 정도로 김일경의 후손은 영조·노론과는 한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던 처지였다. 그리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아주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노론이 계속 집권했기 때문에 김일경은 신원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후손 중 한 명이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노론은 조선 멸망에 협조한 대가로 일제시대 때도 그 세력을 온존했으며, 특히 역사학계는 노론 유력 가문의 후예로서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에 참가했던 한 사학자가 해방 이후에도 태두의 지위를 누리는 바람에 김일경은 학문적으로도 신원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내 저서를 보고 비로소 노론의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각에서 그 시대를 바라보는 역사학자가 등장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서 전화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암에 걸려 있었던 그분은 2년쯤 뒤 세상을 떠나셨다. 필자는 지금도 그분을 생각하면 역사의 붓을 잡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돌이켜보곤 한다.
필자 자신이 비주류의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질 때문인지 필자는 역사의 음지에 가려진 시대와 인물들에게 더 큰 관심이 갔다. 그러나 역사의 음지에 묻혀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역사의 음지에 묻혀 있는 이유가 판단 대상이다. 아계 김일경처럼 왕권을 위협하는 거대 정당에 맞서 싸우든지, 백호 윤휴(尹?)처럼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에 맞서 싸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든지, 명재 윤증(尹拯)처럼 증오의 시대에 사랑의 정치를 역설하다가 은둔하든지, 이가환·이승훈처럼 폐쇄된 사회에서 개방된 사회를 지향하다가 사형되든지, 소현세자처럼 열린 미래를 지향하다가 독살되든지 했어야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노론의 나라를 떠난 정약종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쓰는 동안 수없이 내면에서 물어왔던 질문이 있다. 정약전·약종·약용 중에 누구의 인생을 살 것이냐는 질문이다. 정조 15년(1791) 전라도 진산에서 양반 윤지충이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진산 사건이 발생하자 정약용과 큰형 정약전은 천주교를 버렸지만 작은형 정약종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정조 사후 노론이 남인들을 천주교도로 몰아 멸절시키고자 설치한 죽음의 국청에서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당당히 꾸짖고 형장으로 나갔다. 그렇게 노론의 나라를 떠나 하늘로 간 정약종의 인생은 범인이 쉽게 따를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정약용이 소내(苕川) 고향집의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붙인 것은 그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노자>(老子)의 “망설이면서(與)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같이 주저하면서(猶)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여유당은 그가 정조 없는 노론의 세상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겨우 죽음을 면하고 귀양길에 오른 그는 세상과 절연하고 훗날 ‘다산학’이라 불리는 학문의 성을 쌓았다. 반면 정약전은 정약용이 ‘선중씨(정약전) 묘지명’에서 “공(정약전)이 바다 가운데 들어온 때부터는 더욱 술을 많이 마셨는데 상스러운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들과 패거리가 되어 친하게 지냈다”라고 쓴 것처럼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필자가 형제의 처지가 되었다면 정약용처럼 살았을까 아니면 정약전처럼 살았을까? 정약용의 반 정도 학문을 하고, 정약전의 반 정도 어부가 되었을 것이라는 자답이 돌아왔다. 제대로 된 학자도 되지 못하고 제대로 된 어부도 되지 못할 필자의 한계임을 스스로 안다.
역사를 업으로 삼게 되면서 종종 역사가를 생각한다. 그중 세 사람 정도가 마음을 흔든다. 한 사람은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이다. 사마천은 흉노 토벌에 나섰다가 중과부적으로 포로가 된 이릉(李陵) 장군을 옹호했다가 한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잘 알려진 대로 궁형을 받았다. 그는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치욕 중에 으뜸가는 것은 궁형을 받는 일입니다. 궁형을 받은 자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습관은 까마득한 옛날부터입니다. …(저는)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벌금형으로 대신할 만한 재산도 없었고, 친척이나 친구로부터 한마디의 도움조차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토로했다. 그가 궁형의 치욕을 감수하고 살아남은 이유는 개인 사마천의 목숨보다, 사대부 사마천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이 후세에 <사기>(史記)를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음이 두려워 궁형을 택한 것이 아님을 <사기> 본기의 순서는 잘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섬겼던 한나라의 개국시조 고조 본기보다 그와 싸웠던 항우 본기를 앞 순서에 두었다. 임금도 아니었던 항우를 개국시조의 본기보다 앞세운 것은 승자의 자리에서 역사를 바라보지 않는 그의 시각을 나타낸다. 그리고 자신을 궁형에 처한 무제를 미신이나 좋아하는 용렬한 군주로 그렸다. 역사가의 붓이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죽음으로 지킨 ‘조의제문’
연산군 때의 사관 김일손(金馹孫)은 사림 영수 김종직의 제자였다. 그는 이미 죽은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에 실으려다가 화를 입게 된다.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의제를 단종에 비유하고 수양대군을 항우에 비유한 ‘조의제문’은 “신하(수양대군)가 임금(단종)을 찬시(簒弑·자리를 빼앗고 죽임)했다”는 기록을 후대에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김일손은 ‘조의제문’에 “충분(忠憤)이 깃들어 있다”고 덧붙였는데, 이것이 유자광 같은 훈구 공신들에게 간파되면서 무오사화가 발생한다. 사화(士禍)는 ‘선비가 화를 입었다’는 뜻이지만 무오사화를 사화(史禍)라고도 쓰는 이유는 김일손·권경유·권오복 같은 사관들이 사지가 찢겨 죽는 능지처참을 당했기 때문이다. 경상도 청도군에서 지병인 풍병을 치유하다 의금부에 체포된 김일손은 “내가 잡혀가는 것이 사초(史草·실록의 기초기록) 때문이라면 반드시 큰 옥사(獄事)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사초는 사관의 목숨을 걸고 후대에 전해야 할 진실이었다. 김일손 역시 김일경처럼 모든 자손들이 연좌돼 멸절됐다. 김일경의 핏줄은 우여곡절 끝에 보존됐지만 김일손의 핏줄은 폭군 연산의 거듭된 추적으로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자식보다 소중하게 전하고자 했던 ‘조의제문’은 <연산군일기>에 그의 국문 기록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단재 신채호는 식민사관의 틀을 깨고 우리 역사의 무대가 얼마나 넓고 광활한지를 가르쳐준 역사가이다. 게다가 그는 역사 기록의 한자 한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제의 실증사학자들 이상으로 입증한 사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평양패수고’(平壤浿水考)에서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던 평양의 ‘한사군 낙랑군’을 최씨의 낙랑국과 구별해 부정한 기록을 보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사료를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사기>를 쓰기 위해 살아남은 사마천, ‘사초’를 전하기 위해 죽어야 했던 김일손, 상식을 뒤엎었던 신채호! 이 세 역사가의 공통점은 그 시대가 아니라 다음 시대와 대화한 데 있다. 그 시대의 논리를 뛰어넘는 역사 인식이 세 역사가에게는 있었다. 역사의 진정한 몫은 이렇게 다음 시대와 대화하는 것이리라. 과거를 가지고 미래와 대화하는 것이 역사학의 본질이다. 필자 역시 다음 시대와 대화하는 기분으로 과거의 역사 인물들을 초대하고 과거의 사건들을 되새겨볼 것이다. 이를 통해 시대와 불화했던, 그래서 그 시대에는 버림받았던 인물들이 미래와 화해할 수 있다면 감히 바랄 수 없는 망외의 소득일 것이다.
죽어서도 대동법을 외치다
백성의 피를 짜내는 공납을 폐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건 김육의 집념…
양반 지주들의 집요한 반대와 맞서싸운 경제관료가 그리워지는 시대
효종 즉위년(1649) 9월 좌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모친상으로 사직하자 효종은 조익(趙翼)을 좌의정으로, 잠곡(潛谷) 김육(金堉)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다. 김육은 와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효종은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세 번째 사직서를 반려한 것은 절대 사직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김육은 우의정 자리를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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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그는 그해 11월 자신을 쓰려면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실시하라는 내용의 상차(上箚)를 올려 대동법 정국을 열었다.
“신을 쓰시려면 대동법을…”
“왕자(王者)의 정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우선할 일이 없으니 백성이 편안한 연후에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의 변란(天變)이 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이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군(人君)이 재변을 만나면 두려워하며 몸을 기울여 수성(修省)하는데 여기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고 오직 백성을 보호하는 정사를 행하여 그들의 삶을 편안케 해주는 것뿐입니다.”(<효종실록> 즉위년 11월5일)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정치가 최고의 정치라는 뜻이다. 김육은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대동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동법은 역(役)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대동법이 어떤 법이기에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라고까지 말한 것일까?
대동법은 지방의 특산물을 납부하는 공납(貢納)을 대체한 법으로서 광해군 즉위년(1608)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되다가, 인조 원년(1623) 강원도로 확대됐지만 더 이상의 확대는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주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지방의 특산물을 국가에 바친다는 소박한 충성 개념에서 시작된 공납은 국가 수입의 60%를 차지하는 주요 세원(稅源)이 됐으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종류가 수천 가지인데다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산물이 부과되기도 했으며,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으로 나뉘어 시도 때도 없이 부과됐다. 더 큰 문제는 불평등한 부과 기준이었다. 공납은 군현·마을 단위로 부과돼 가호(家戶) 단위로 분배되는데, 각 군현의 백성 수와 토지 면적이 달랐음에도 ‘공안’(貢案·공납부과대장)의 부과 액수는 비슷했다. 작은 군현과 작은 마을의 백성들이 불리할 것은 불문가지였다. 더 큰 문제는 한 군현·마을 안에서 대토지를 가진 양반 지주와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전호(佃戶·소작인)가 같은 액수를 부담하거나 가난한 전호들이 더 많이 부담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정경유착의 원조라 할 방납업자(防納業者)들까지 농민 착취에 가세했다. ‘놓일 방’(放)자가 아니라 ‘막을 방’(防)자를 쓰는 이유는 공납업자들이 관리들과 짜고 농민들이 마련한 공물을 퇴짜 놓고 자신들의 물건을 사서 납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조 16년(1638) 충청감사였던 김육은 “공납으로 바칠 꿀 한 말(斗蜜)의 값은 목면(木綿) 3필(匹)이지만 인정(人情)은 4필”이라고 상소했는데, 인정이 바로 방납업자들의 수수료였다. 배보다 큰 배꼽인 인정은 모두 빈농들의 피땀이자 고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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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 장사 하며 백성을 이해하다
공납폐의 해결책은 사실 간단했다. 부과 단위를 가호(家戶)에서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바꾸면 되는데, 그것이 바로 대동법이었다. 이렇게 바꾸면 토지를 많이 가진 지주는 많이 내고 토지가 없는 전호는 면제되게 된다. 대동법이 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된 것은 남인 정객 이원익(李元翼)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영의정 이원익이 경기도에서는 공납 대신 토지 1결당 쌀 12말을 걷는 대동법을 실시하자고 주장했는데,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왕의 교지 가운데 선혜(宣惠)라는 말이 있어 담당관청의 이름으로 삼았다”(<광해군일기> 즉위년 5월7일)라고 전하고 있다. 대동법 주관 관청이 ‘백성들에게 은혜(惠)를 베푸는(宣)’ 선혜청(宣惠廳)인 것은 이 법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경기·강원도에 이어 정작 농토가 많은 하삼도(下三道·경상, 전라, 충청)로 확대 실시하는 것은 어려웠다. 양반 지주들의 반발이 심했기 때문이다. 양반 지주들의 나라에서 양반 지주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법을 시행하기는 어려웠다. 김육의 대동법 상소는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대동법을) 양호(兩湖·충청, 전라) 지방에서 시행하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방도로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신이 이 일에 급급한 것은 이 일은 즉위하신 초기에 시행하여야지 흉년이 들면 또 시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세운(歲運)이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이는 하늘이 편리함을 빌려준 것입니다. 명년의 역사(役事)는 겨울 전에 의논해 정하여야 시행할 수 있습니다. 신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효종실록> 즉위년 11월5일)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즉위 초에, 또 약간 풍년이 들었을 때 전격적으로 시행해야지 시간을 끌면 갖가지 명분의 반대론에 밀린다는 내용이었다. 조광조와 같이 사사(賜死)당했던 사림파 김식(金湜)의 증손자였던 김육은 성균관 유생이던 광해군 때 북인 정권의 실력자 정인홍을 비판했다가 정거(停擧·과거 응시 금지) 조치를 당하고 경기도 가평에서 10여 년간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숯을 팔아 생계를 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초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김육은 자신의 정치 인생을 일관되게 대동법에 걸었다. 이 상소 11년 전인 인조 16년(1638)에도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대동법을 충청도에 확대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 그는 “대동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합니다. 경기와 강원도에 이미 시행하였으니 본도(本道: 충청도)에 시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습니까”라면서 “지금 만약 시행하면 백성 한 사람도 괴롭히지 않고 번거롭게 호령도 하지 않으며 면포 1필과 쌀 2말 이외에 다시 징수하는 명목도 없을 것이니, 지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은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인조실록> 16년, 9월27일)라고 주장했다. 대동법 시행은 양반 지주들뿐만 아니라 아전들도 꺼렸다. 대동법을 시행하면 김육의 상소대로 ‘다시 징수하는 명목이 없을’ 정도로 투명해지기 때문에 부패의 여지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인조는 충청도로 확대 실시하는 데 찬성했으나 다른 관료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대동법 불가하면 나를 벌주라
그 뒤 와병으로 물러났던 김육은 효종 때 우의정에 제수된 것을 대동법을 다시 촉발시키는 계기로 삼기 위해 배수진을 친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신으로 하여금 나와서 회의하게 하더라도 말할 바는 이에 불과하니, 말이 혹 쓰이게 되면 백성들의 다행이요, 만일 채택할 것이 없다면 다만 한 노망한 사람이 일을 잘못 헤아린 것이니, 그런 재상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였으니, 신이 믿는 바는 오직 전하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감히 별폭(別幅)에 써서 올립니다.”(<효종실록> 즉위년 11월5일)
대동법을 실시하려면 자신을 쓰고 그렇지 않으면 ‘노망한 재상’으로 여겨 쓰지 말라는 말이었다. 따로 올린 ‘별폭’에서 김육은 대동법이 백성들뿐 아니라 국가에도 이익이라고 논증했다. “양호(兩湖·충청, 호남) 지방의 전결(田結)이 모두 27만 결로서 목면이 5400동(同)이고 쌀이 8만5천 석이니, 능력 있는 관료에게 조처하게 하면 미포(米布)의 수가 남아서 반드시 공적인 저장과 사사로운 저축이 많아져 상하가 모두 충족하여 뜻밖의 역(役)에 역시 응할 수가 있습니다.”(<효종실록> 즉위년 11월5일)
그러면서 김육은 “다만 탐욕스럽고 교활한 아전이 그 색목(色目)이 간단함을 혐의하고 모리배들이 방납(防納)하기 어려움을 원망하여 반드시 헛소문을 퍼뜨려 교란시킬 것이니, 신은 이점이 염려됩니다”라고 반대파들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했다. 대동법 시행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내게 된 양반 지주들과 부패한 아전들, 그리고 방납으로 배를 불리던 방납업자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갖가지 명목을 들어 반대했다.
김육의 상소에 대해 효종이 “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大戶)가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소민(小民)이 원망한다고 하는데, 원망하는 대소가 어떠한가?”라고 물었고, 여러 신하들은 “소민의 원망이 큽니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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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大戶), 즉 양반 지주들이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소민(小民), 즉 가난한 백성들이 원망한다는 뜻이다. 효종은 “대소를 참작하여 시행하라”고 사실상 소민들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비록 숫자는 적어도 반대하는 세력이 양반 지주들이기 때문에 그 확대는 쉽지 않았다. 효종 즉위년 12월 좌의정 조익이 대동법 시행을 주청하고 우의정 김육은 “대동법은 지금 모든 조례(條例)를 올렸으니, 전하께서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라고 가세했으나 효종은 대답하지 않았다고 기록은 전한다(<효종실록> 즉위년 12월3일). “대소를 참작하여 시행하라”던 효종이 대답을 않는 것으로 바뀐 것은 그사이 양반 지주들의 반대가 심했다는 뜻이다.
근대화의 씨앗을 뿌리다
대동법 반대세력은 김육이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라고 말한 것이 방자하다며 일제히 공격했다. 방자하다는 명목으로 대동법 시행을 무산시키려는 것이었다. 효종 초의 조정은 이 문제로 둘로 갈려 집권 서인이 분당되기도 했다. 대동법 실시에 찬성하는 김육·조익·신면(申冕) 등 소수파는 한당(漢黨)이 되고, 반대하는 이조판서 김집(金集)과 이기조(李基祚)·송시열(宋時烈) 등 다수파는 산당(山黨)이 됐다. 김육 등이 한강 이북에 살고, 송시열 등이 연산(連山), 회덕(懷德) 등 산림에 살기 때문에 붙은 당명이었다.
조정 내에서는 반대론자들이 다수였지만 김육은 대동법에 대한 소신을 꺾지 않았다. 그는 효종 2년(1651) 영의정에 임명되자 드디어 대동법을 충청도에 확장 실시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좌의정으로 물러났다가 효종 5년(1654) 다시 영의정이 되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해 대동법을 호남에 확대하려 했는데, 그 시행을 앞두고 효종 9년(1658) 9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직후 대동법은 전라도 해읍(海邑)에 확대 실시됐다가, 현종 3년(1662)에는 전라도 산군(山郡)에도 실시됐다. 드디어 숙종 34년(1708)에 황해도까지 실시됨으로써 전국적인 세법이 됐다. 꼭 100년 만에 전국적인 세법이 된 것이다.
대동법 시행은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됐다. 대동법에 반대하던 산당 영수 송시열도 대동법의 효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점이 이를 말해준다. 효종이 “호서(湖西·충청)의 대동법을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가?”라고 묻자 송시열은 “편리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좋은 법이라고 하겠습니다”(<효종실록> 9년 7월12일)라고 답했던 것이다.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면서 국가경제도 발전시킨 대동법은 조선의 역사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대동법이 실시됨으로써 조정은 과거 공납으로 충당하던 물품을 조달하기 위한 새로운 물자공급 체제를 수립해야 했는데, 이런 필요성에 따라 생겨난 직업이 공인(貢人)이었다. 관청 물품을 납품하는 공인들은 선불로 받은 물품값으로 수공업자에게 자본을 대주고 제작게 하는 선대제(先貸制)를 실시했다. 이는 상업자본의 수공업 지배 형태로서 자본주의 발달사 초기에 나타나는 상업 자본주의의 모습이었다. 대동법이 촉발한 이런 변화는 조선사회 내부에서 자본주의, 즉 근대화를 지향하는 씨앗이 생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변화들이 다른 요인들에 의해 굴절되면서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했지만 조선 사회 내부에 세계사의 발전 흐름에 부응하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대동법은 보여준 것이다. 대동법에 모든 것을 걸었던 잠곡 김육, 대동법의 경세가라고 불렸던 능력 있는 한 양심적 경제관료의 신념이 역사에 남긴 자취는 이처럼 컸던 것이다. 서민경제가 무너졌다고 아우성치는 오늘 어찌 김육 같은 경제관료가 그립지 않겠는가.
‘사문난적’ 이 될지라도… 송시열의 숙적 백호 윤휴…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에 반기 든 학자… 조선의 위기에 대한 복고적 해법에 반대하여 다원 사상 체제를 주창 양란(兩亂·임진왜란, 병자호란)은 조선 사회체제의 파탄을 의미했다. 더 정확히는 양반 사대부 지배체제의 파탄을 의미했다. 지배층의 무능을 여실히 목도한 피지배층들은 체제 변화를 요구했다. 체제 변화 요구는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하나는 주자학(성리학) 유일사상 체제의 폐기이고 다른 하나는 신분제의 완화이다. 이런 요구에 대해 사대부 계급은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
서인 영수 송시열(宋時烈)로 대표되는 한 세력은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와 신분제를 강화하는 복고적 노선을 걸었다. 조선 성리학의 주류는 이들에 의해 예학(禮學)으로 바뀌게 된다. 예란 본질적으로 피지배층의 지배층에 대한 강제적 의무에 지나지 않는데 행동 규범에 불과한 예(禮)가 성리학의 주류가 된 것이다. 성리학은 이제 노골적으로 지배층의 계급이익에 복무하는 학문이 되었다.
정통 성리학과 거리가 먼 가계
백호(白湖) 윤휴(尹?)로 대표되는 일단의 사대부들은 이런 경향에 반대했다. 서인들이 편찬한 <효종실록> 사관(史官)의 윤휴에 대한 평은 이런 상황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윤휴는 소싯적부터 글을 읽어 이름이 있었는데, 논변(論辨)이 있을 때면 반드시 자기의 견해를 옳게 여겼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대부분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견해와 배치되었으나 재주가 조금 있어 늘 경륜(經綸)의 소유자로 자임하였는데 그 무리들이 서로 받들어 칭찬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우려하였다.”(<효종실록> 9년 12월13일) 윤휴에 대해 우려하는 ‘식자’란 정통 성리학자들을 뜻하는 것이다. 윤휴의 학문 대부분이 주자학의 주창자인 남송(南宋)의 정이(程이?) 형제·주희(朱熹)의 견해와 배치됨에도 ‘그 무리들이 서로 받들어 칭찬하였다’는 것은 주자학에서 탈피하려는 사대부들이 있었음을 뜻한다. 백호 윤휴는 왜 주희와 배치되는 견해를 갖게 되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의 가계와 학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윤휴는 광해군 10년(1617) 윤효전(尹孝全)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광해군 때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북인으로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었다. 윤휴의 외조부 김덕민(金德敏)은 북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친구 성운(成運)의 제자였다. 성운은 성리학자들이 이단으로 보았던 노장(老莊)에 심취했던 인물이다. 윤휴는 양명학을 소개한 이수광(李?光)의 차자(次子·둘째아들) 이민구(李敏求)에게도 사사했다. 부친과 외조부, 이민구는 모두 정통 성리학자들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에게 학문을 배운 윤휴는 주희를 금과옥조로 떠받들지 않게 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민했기 때문에 곧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당시 유명한 학자였던 윤선거(尹宣擧)는 윤휴를 이렇게 평했다. “윤휴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깨달아 학문에 뜻을 두어 마음을 세우고 행실을 닦는 데 고인(古人)에 집착하지 않고, 독서(讀書)·강의에서 주설(註說)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언론과 식견이 실로 사람들보다 뛰어난 데가 있었다. 장단점을 서로 보완하는 데는 속유(俗儒)에 비할 바가 아니라 하여 깊이 사귀었다.”(‘윤선거 연보’) 윤휴와 숙명적 라이벌이 되는 송시열도 한때는, “백호는 학문이 높아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으며 전인(前人)들이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이치를 발견해낸다”라고 칭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윤휴가 <중용>(中庸)·<대학>(大學) 등의 경전(經傳)을 주희와는 달리 해석하면서 두 사람은 충돌하게 된다.
여러 차례 벼슬을 거부하다
윤휴의 일생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은 20살(1636) 때 겪었던 병자호란이었다. <백호전서> 부록 행장(行狀)에 따르면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윤휴는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송시열을 만나, “지금 이후로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것이오. 혹시 우리가 정치를 하게 된다면, 결코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고 북벌을 단행하자는 다짐이었다.
이후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문명이 높아가자 효종 6년(1655)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의 추천으로 세자시강원 자의(咨議)에 제수된 것을 비롯해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스스로 포의(布衣)라 일컫고는 끝내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에 그의 명성이 더욱 크게 떨치어서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나 모두 윤포의(尹布衣)로 일컬으면서 그 얼굴을 서로 알기를 원하였다”(<숙종실록> 3권 1년 4월25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체계가 주희와 다른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인 내부에서 그를 둘러싼 사문난적 논쟁이 벌어진다. 그 계기는 윤휴가 <중용주>(中庸註)에서 주희와 다른 해석을 하자 송시열이 비난하며 고치기를 요구한 데서 시작되었다. “윤휴가 중용주를 고치자 송시열이 가서 엄히 책망하니, 윤휴가 ‘경전(經傳)의 오묘한 뜻을 주자만이 알고 어찌 우리들은 모른단 말이냐’라고 말하므로 송시열은 노하여 돌아왔다. 또 편지로 그를 책망하여 뉘우치기를 바랐으나 윤휴가 끝내 승복하지 않으므로 송시열은 드디어 그를 끊어버렸다.”(<송자대전>(宋子大全) ‘연보’) 집권 서인에게 주희는 일개 학자가 아니라 성인이었는데, 윤휴가 그와 다른 학문 체계를 수립하자 격하게 반발했다. <숙종실록>의 사관이 “(윤휴는)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자사(子思)의 뜻을 주자가 혼자 알았는데, 내가 혼자 모르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사문(斯文)의 반적(叛賊)이다”(<숙종실록> 3년 10월17일)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그러나 모든 서인이 윤휴를 비판한 것은 아니다. 윤선거는 윤휴의 학문을 지지했는데, 이 때문에 큰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효종 4년(1653) 윤 7월 충청도 강경의 황산서원(黃山書院·현 죽림서원)에 서인 학자들이 모인 것은 윤휴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서였다. <송자대전> 부록의 ‘송시열 연보’에는 송시열과 윤선거 사이의 논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송시열이 “하늘이 공자를 이어 주자를 냈음은 진실로 만세의 도통(道統)을 위한 것이다. 주자가 난 이후로 현저해지지 않은 이치가 하나도 없고 밝아지지 않은 글이 하나도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 소견을 내세워 마음대로 억설(臆說)한다”고 비판하자 윤선거는 “의리는 천하의 공적인 것인데, 지금 희중(希仲·윤휴의 자)에게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무슨 일인가?”라고 답했다. ‘천하의 공적인 의리를 어찌 주희 혼자 독점할 수 있느냐’는 말로, 주희 혼자 경전 해석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반발이다. 이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다. 윤선거가 중국의 여러 학자들도 경전에 주석을 달지 않았느냐고 따지자 송시열은 “윤휴처럼 주자의 장구(章句)를 치워버리고 스스로 새로 주석을 내어, 마치 서로 승부를 겨루어 앞서려고 한 것 같겠는가?”라고 반박했다. 중국의 다른 학자들은 주희의 주를 보충하는 수준이었지만 윤휴는 주희의 주를 대치했다는 것이다. 윤선거가 “이는 희중이 너무 고명한 탓이다”라고 말하자 송시열은 드디어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이 나왔다.
윤선거 대 송시열, 학문 대 종교
“공은 주자는 고명하지 못하고 윤휴가 도리어 더 낫다고 여기는 것인가? 또한 윤휴 같은 참람한 사문난적을 고명하다고 한다면, 왕망(王莽)·동탁(董卓)·조조(曹操)·유유(劉裕) 같은 역적들도 모두 고명한 탓이겠는가? 윤휴는 진실로 사문난적으로서 모든 혈기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죄를 성토해야 한다. 춘추(春秋)의 법이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를 다스릴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편당을 다스리게 되어 있으니 왕자(王者)가 나타나게 된다면 공이 마땅히 윤휴보다 먼저 법을 받게 될 것이다.”(<송자대전> ‘송시열 연보’ 숭정 26년조)
윤휴의 사상을 지지하는 자는 왕자가 나타날 때 모두 죽게 될 것이라는 협박이니 이미 학문 논쟁이 아니었다. 송시열에게 성리학은 학문이 아니라 종교 교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윤휴는 달랐다. 윤휴는 사상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윤휴는 율곡 이이, 퇴계 이황의 학설도 비판했다. 그는 율곡의 ‘이선기후’(理先氣後)나 퇴계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 등을 모두 비판하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내세웠다. 송시열은 이황이나 이이는 비판할 수 있어도 주희는 비판할 수 없었다. 송시열에게는 사서(四書·논어, 맹자, 중용, 대학) 자체보다 사서에 대한 주희의 해석이 더욱 중요했다. 송시열에게는 <논어> <중용>보다 주희가 주(注)를 달아놓은 <논어집주>(論語集注)·<중용집주>(中庸集注)가 더 중요한 경전(經典)이었다. 이런 경전을 윤휴가 개작한 것을 송시열은 좌시할 수 없었다. 윤휴는 <중용해설>(中庸解說)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氣)가 처음 생기는 것을 태극이라 하고 음양이 나뉘는 것을 양의(兩儀)라 하며 기가 합해서 형태를 이룬 것을 사상(四象·태양, 태음, 소양, 소음)이라 한다. 태극이 생기면 음양과 양의를 주관하고, 나뉘면 태양(太陽), 소음(小陰), 소양(小陽), 태음(太陰)이 된다. 사상(四象)은 합해지면 음양과 체용(體用)을 겸하니 태극은 기(氣)이다.” ‘태극은 기(氣)이다’라는 한마디는 교조화된 조선의 주자학을 전면에서 부인하는 것이었다. 만물의 근원적 존재인 태극(太極)에 대해 주희는 이(理)라고 설명했던 것이다. 송시열에게 주자학은 종교 교리였으나 윤휴에게는 일개 학문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양자 사이의 화해는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선거는 시종일관 윤휴의 사상을 지지했다. 그래서 송시열과 윤선거는 현종 6년(1665) 계룡산 자락의 동학사(東鶴寺)에서 다시 만나 논쟁을 벌였다. 송시열과 윤선거를 비롯한 이유태, 송주석(宋疇錫) 등 서인 중진들이 모였는데, <송자대전> ‘혹인(或人)에게 답함’에는 그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그 다음에 또 윤휴의 사정(邪正)을 정변하였는데 어조가 양쪽이 다 거세었습니다. 저녁 무렵에 내(송시열)가, ‘이렇게 한가하게 다툴 필요 없으니 시험 삼아 한마디로 결정하는 것이 좋겠네. 공(윤선거)이 시험 삼아 말해보게. 주자가 옳은가 윤휴가 옳은가, 또 주자가 그른가 윤휴가 그른가’라고 말하자 그가 골똘히 생각하고 나서, ‘흑백(黑白)으로 논하면 희중(希仲·윤휴)은 흑(黑)이고 음양(陰陽)으로 논하면 희중은 음(陰)이네’라고 말하므로, 내가 ‘공이 이제야 비로소 크게 깨달았네. 이는 사문(斯文·성리학)의 다행이자 친구 간의 다행이네’라고 말했습니다. 윤선거는 일이 있다고 먼저 돌아갔습니다.”(<송자대전> ‘혹인(或人)에게 답함’)
노론과 소론의 분당을 예고해
‘주자가 옳은가 윤휴가 옳은가’라고 묻는데, ‘윤휴가 옳다’고 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가는 윤선거 자신이 사문난적으로 몰려 매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선거가 일이 있다며 먼저 돌아간 것은 마음속으로는 송시열의 이분법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논쟁은 송시열과 윤선거의 논쟁이지만 그 배경에는 조선의 정치체제, 사상체제에 대한 체제갈등이 내포되어 있었다. 윤휴와 윤선거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를 폐기하고 다원 사상체제로 조선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견해인 반면 송시열은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를 더욱 강화해 조선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견해였다. 조선의 방향에 대한 갈등이었던 것이다. 이 논쟁에 내재한 갈등의 싹은 숙종 때 서인이 송시열 중심의 노론과 윤선거의 아들 윤증 중심의 소론으로 분당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백호 윤휴②…송시열에 맞서 예송논쟁에 뛰어들고 북벌을 주창한 전사… 호포제로 백성의 아픔을 덜어주려 했던 학자는 왜 사약을 들어야 했나 |
1659년 북벌 군주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만 40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했다. 효종은 승하 한 달 전쯤 송시열과 독대를 자청해 북벌에 적극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효종은 혈기와 지기(志氣)가 손상될 것이 두려워 내전(內殿)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며, ‘주색을 끊고 경계하여 정신이 맑고 몸도 건강해졌으니 어찌 앞으로 10년을 보장할 수 없겠는가’라며 북벌에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만에 그는 급서했다. 효종의 죽음은 엉뚱하게 예송(禮訟) 논쟁을 낳았다. 효종의 계모 자의대비 조씨가 얼마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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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 논쟁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조선 역사를 당쟁망국론으로 규정지은 대표적인 소재였다. 그러나 예송 논쟁은 어느 것보다 현실적인 정쟁이었다. 바로 효종의 왕통 계승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를 배후에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막부의 장군 계승을 두고 벌어진 싸움을 ‘싸움만을 위한 싸움’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왕통 계승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
상복에는 다섯 종류가 있었다. 3년복인 참최(斬衰)와 1년복인 재최(齊衰), 9개월복인 대공(大功), 5개월복인 소공(小功) 그리고 3개월복인 시마(?麻)가 그것이다. 부모 사망시 자식은 모두 3년복인 참최를 입게 되어 있었고,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부모도 상복을 입었는데, 장자상(長子喪)에는 3년, 둘째아들(次子)부터는 1년복을 입어야 했다. 효종은 왕통(王統)을 이었지만 가통(家統)으로 보면 소현세자 다음의 차자였다. 여기에서 효종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느냐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조정에서 의견을 묻자 송시열은 1년복이 맞다고 주장했고, 송시열과 함께 양송(兩宋)으로 불렸던 송준길도 같은 의견이었다. 둘은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당대 최고 성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조정은 1년복으로 결정하려 하였다.
이때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인물이 윤휴였다. 그는 <의례>(儀禮) 참최장(斬衰章) 주석의 “제일 장자가 죽으면 본부인(嫡妻) 소생의 제이 장자를 세워 또한 장자라 한다”라는 구절을 인용해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휴의 반론은 커다란 파문을 낳았다. 그러자 송시열은 같은 <의례> 참최장 주석의 “서자(庶子)는 장자가 될 수 없으며” “본부인 소생의 둘째아들 이하는 다 같이 서자라 일컫는다”라는 구절을 내세워 1년복설이 맞다고 다시 주장했다. 송시열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에게 <의례>에 가통을 계승했어도 3년복을 입지 않는 네 경우를 예로 들었다. 이를 사종지설(四種之說)이라 하는데, 여기에 문제의 ‘체이부정’(體而不正)이 들어 있었다. 체이부정은 효종처럼 아버지를 계승(體)했으나(而) 가통을 이은 적장자(嫡長子)가 아닌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경우 3년복을 입지 않는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정태화는 깜짝 놀라, “자고로 왕가의 일은 비록 처음에는 심히 작은 일이라도 훗날 그것으로 큰 화를 입는 수가 있다”며 이를 인용해서는 안 된다고 만류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국제’(國制), 곧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인용하는 편법을 사용했다. <경국대전>에는 장자와 차자의 구별 없이 모두 1년복으로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속으로는 효종을 차자로 대우해 1년설을 주장했지만 겉으로는 <경국대전>을 인용해 장자로 대우한 것처럼 편법을 쓴 것이다.
서인이 1년복을 주장하고 남인이 3년복을 주장한 것은 두 당파가 지닌 세계관의 표출이었다. 서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주자학적 정치이념은 신권(臣權) 중심의 지배구조로서, 국왕은 사대부 중의 제1사대부이지 사대부를 초월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반면 남인들은 국왕을 사대부의 위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로 받아들였다. 송시열과 윤휴가 대립하는 와중에 남인 윤선도가, “송시열이 종통(宗統)은 종묘와 사직을 관장하는 임금(효종)에게 돌려보내고 적통(嫡統)은 기왕에 죽은 장자(소현세자)에게 돌려보내니 종통과 적통을 어찌 두 가지로 할 수 있습니까?”라며 송시열을 강하게 공박하고 나서 예송 논쟁은 격렬해졌다. 이는 송시열이 역적이니 죽여야 한다는 것과 같은 상소였기 때문에 서인들이 모두 나서 윤선도를 공격했고, 현종으로서도 예송 논쟁이 왕통 계승 문제로 비화하는 것이 유리할 리 없다는 생각에 서인의 손을 들어 윤선도를 삼수(三水)로 귀양 보냈다. 그리고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으로 결정하고 다시는 거론하지 못하게 국법으로 금했다. 1차 예송 논쟁은 표면상 송시열의 승리로 끝난 것이었다.
삼번의 난, 북벌을 위한 절호의 기회
그러나 양자의 대립은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북벌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효종은 기해독대 때 송시열에게 ‘정예 포병(砲兵) 10만을 기른 다음 기회를 봐서 곧장 쳐들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효종은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라고 말했다. 효종의 북벌 계획은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조선군의 북벌이 한족(漢族)의 호응 봉기를 낳을 것이라는 전략이었다. 효종 생전에는 그런 호기가 오지 않았지만 15년 뒤인 현종 15년(1674)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 ‘삼번(三藩)의 난’으로 불리는 오삼계(吳三桂)의 난이 그것이었다. 오삼계는 청나라와 싸우던 명나라의 마지막 주력군이었으나 1644년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점령하자 청나라와 손잡고 이자성을 멸망시켰다. 오삼계는 이 공로로 청나라로부터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지고 윈난성과 구이저우성을 다스리게 되었다. 정남왕(靖南王) 경정충(耿精忠),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도 그런 인물들이었는데, 이들의 세력이 커지자 강희제는 1673년 철번령(撤藩令)을 내려 권리를 박탈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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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오삼계는 1673년(현종 14년) 11월 윈난성에서 명(明)의 부흥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고, 같은 처지의 경정충과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尙之信)도 호응하면서 삼번의 난으로 발전했다. 윈난·구이저우·쓰촨·후난·광시 등 여러 성이 합세해 삽시간에 중국 남부 전역이 전쟁터로 변했다. 바로 효종이 예견하던 상황이었다.
이때 북벌의 기치를 든 인물이 윤휴였다. 조선은 삼번의 난이 일어난 지 4개월 뒤 사신들을 통해 이 정보를 입수했다. 대만에서도 정경(鄭經·정금)이 봉기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자 현종 15년(1674) 7월1일 포의(布衣) 윤휴는 비밀 상소를 올렸다. 북벌을 주창하는 상소였다. 그는 오삼계의 난을 하늘이 만들어준 기회라면서 즉각 군사를 일으키자고 주청했다. 윤휴는 “이때 군대를 동원하고 격서를 띄워” 북벌하자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상께서 유업을 계승하려는 마음이 우리 조종과 선왕을 감격시키거나 천하 후세에 할 말을 남길 수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라고 말했다. 윤휴는 “병사 1만 대(隊)를 뽑아 북경을 향해 나아가 등을 치고 목을 조이는 한편, 바다의 한쪽 길을 터 정인(鄭人·정경)과 약속해 힘을 합쳐서 심장부를 혼란시켜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육군을 북경으로 진군시키고 수군을 정금과 합세시키자는 전략이었다. 윤휴의 밀소가 입소문을 타고 전파되자 상당한 반향이 일었다. 당황한 것은 정권을 잡고 있는 서인 대신들이었다. 좌의정 정지화(鄭知和)는 현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즘 윤휴의 밀소 때문에 바깥이 꽤 시끄럽습니다. 인조조에서는 저들(청나라)과 관계된 문제이면 ‘상소문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하신 하교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단속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현종실록> 15년 7월5일)
송시열이 북벌의 화신이라고?
북벌을 주장하는 상소문은 받아들이지 말자는 주청이었다. 서인 정권에 북벌은 말뿐이지 실제 시행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현행 고교 국사 교과서는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중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했다”(115쪽)라고 기록하고 있다. 효종이 기해독대 때 송시열에게 “경이 은밀히 동지들과 의논해보도록 하라”고 부탁하자, 송시열은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뜻의 ‘수기형가’(修己刑家)가 북벌의 선결 조건이라고 답했을 뿐이다. 훗날 송시열은 ‘수기형가’ 넉 자로 북벌의 책임을 때우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음에도 현행 국사 교과서는 마치 그가 북벌의 화신인 것처럼 그릇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윤휴의 북벌론은 상당한 반향을 낳았으나 다음달 현종이 갑자기 의문사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2차 예송 논쟁을 계기로 남인이 정권을 잡음에 따라 윤휴는 드디어 집권당의 일원으로 조정에 진출하게 되었다.
집권당의 책임 있는 중진이 된 윤휴는 북벌을 계속 주장했다. 윤휴는 이를 위해 1만 승의 병거(兵車·전차)와 화포(火砲)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휴가 군제(軍制) 변통을 강하게 주장한 것도,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민생 안정을 위한 것이자 북벌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문란한 군정(軍政)은 백성들에게 큰 고통이었다.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軍布)를 받는 백골징포(白骨徵布)와 갓난아이에게도 받는 황구첨정(黃口簽丁)이 대표적이었다. 더 큰 문제는 양반들은 군포 징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점이었다. 많은 토지를 가진 양반 사대부는 군포 징수에서 면제되고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농민들만 군포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양반들도 군포를 내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윤휴가 숙종 3년(1677)에 주장한 호포제(戶布制)와 구산제(口算制)는 모든 양반들도 군포를 부담하자는 것이었다. 호포제는 양반과 상민을 구분하지 말고 모든 호(戶)에 부과하자는 것이고, 구산제는 각 호의 인구에 따라서 차등 부과하자는 것이었다. 윤휴의 이런 주장은 양반 사대부들의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양반들에게도 호포를 징수하는 것은 양반과 상민들을 구분해놓은 자연의 질서와 상하관계의 질서를 부정하는 처사라는 것이었다. 남인 온건파였던 영의정 허적은 호포제 자체는 찬성했으나 어린 임금 즉위 초에 민심을 동요시킬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서인에 비해 열세였던 남인으로서 갓 집권한 마당에 대다수 사대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호포제를 실시하기에는 부담이 컸던 것이다. 윤휴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양반 사대부들의 계급 이기주의를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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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포제로 말할 것 같으면, 백골(白骨·죽은 사람)이나 아약(兒弱·어린아이)의 살가죽을 벗겨내고 골수(骨髓)를 부수는 가혹한 정치에 얼굴을 찡그리고 가슴을 치는 근심과 괴로움과, 놀고 먹는(游食) 선비나 운 좋은 백성들이 부역을 피하고 스스로 편하게 지내는 자의 원망 중 어느 것이 더 크겠습니까?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이 명분 없는 것입니까, 저것이 명분 없는 것입니까? 이것이 백성의 원망이 되는 것입니까, 저것이 백성의 원망이 되는 것입니까? 민심의 향배와 천명(天命)의 거취가 장차 백성들의 편안하고 편안하지 아니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운 좋은 백성이나 호우(豪右·부유층)의 편안하고 불편함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까?”(<숙종실록> 3년 12월19일)
윤휴를 죽여서 청나라를 달래다
이당규(李堂揆)와 김석주(金錫胄) 등 호포제에 찬성하는 양반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호포제는 대다수 양반들의 반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이 미완의 개혁은 영조 때 균역법으로 낙착되었다가, 대원군 때 호포법으로 최종 결정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이었다.
숙종 6년(1680) 경신환국으로 정권이 다시 서인에게 넘어가면서 정국은 급변했다. 숙종은 윤휴를 사사(賜死)시키고 말았다. 과거 윤휴가 숙종에게 “대비(大妃)를 조관(照管)하라”고 말하고, 도체찰사부의 부체찰사에 다른 사람이 임명되자 어전에서 불쾌한 기색을 나타냈다는 등 죄 같지 않은 죄명이었다. <당의통략>은 윤휴가 사약을 마시며 “조정에서 어찌해서 유학자를 죽이는가?”라고 항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생을 포의로 지내다가 조정에 나온 지 불과 6년이 되던 해였다. 예송 논쟁에서 왕가를 높이고, 북벌을 주창하고, 호포제로 백성들의 아픔을 덜어주려 했던 학자 관료의 죽음치고는 허무한 것이었다.
그런데 윤휴의 죽음은 중국의 정세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숙종 4~5년 무렵부터 삼번의 난과 정경의 난은 기세를 잃어가고 있었다. 숙종 4년 8월 오삼계가 죽고 손자 오세번(吳世藩)이 뒤를 이었으나 현저하게 열세에 몰리고 있었다. 청군은 숙종 5년 웨양을 탈환하고, 이듬해에는 상지신(尙之信)이 사사됐다. 삼번의 난이 종막을 맞게 된 것이다. 숙종은 청나라의 승리가 명확해진 시점에서 북벌론자 윤휴를 사사함으로써 종전 뒤 청나라의 의혹에서 벗어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냉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양명학자의 커밍아웃 주자학 유일 시대에 위험을 무릅쓰고 양명학 지지를 밝힌 정제두… 계급적 특권을 고집하는 사대부에 반대하며 강화학파의 전통 수립 조선 후기는 주지하다시피 주자학 유일사상의 시대였다. 송시열이 “하늘이 공자를 이어 주자를 냈음은 진실로 만세의 도통(道統)을 위한 것이다. 주자가 난 이후로 현저해지지 않은 이치가 하나도 없고 밝아지지 않은 글이 하나도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주자학은 완전무결한 사상체계이자 정치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주자가 중세 학문계에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대학>이란 책의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대학>은 <논어> <맹자> 등과 함께 사서(四書)의 하나지만 원래는 전한(前漢)의 대성(戴聖)이 편찬한 <예기>(禮記) 49편 중 한 편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학>은 주희(朱熹·주자)가 <대학장구>(大學章句)라는 주석서를 내면서 사서(四書)의 하나로 편입되었다. <대학> 자체보다 <대학장구>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런 시대에 주자를 비판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런 위험을 무릅썼던 인물이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였다. 정제두는 <대학서>(大學序)에서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간담이 서늘해질 주장을 펼친다.
‘친민’과 ‘신민’의 차이
주희가 대학에 주석을 붙이면서 경문(經文) 본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원래의 뜻을 되찾기 위해 글을 짓는다는 것이다. 정제두는 <대학> 본문도 주희와는 달리 읽는다. “대학의 도는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과 친(親)함에 있으며(在親民), 지선(至善)에 그침에 있다. …친(親)은 본자대로 따른다.”(<대학>, 정제두) ‘친(親)은 본자대로 따른다’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원래 <예기>에 속해 있을 때 이 구절은 재친민(在親民), 즉 ‘백성과 친함에 있다’였는데, 정자(程子)가 “친(親)자는 마땅히 신(新)자로 써야 한다”면서 재신민(在新民), 즉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로 바꾸어놓았던 것이다. 재친민과 재신민은 외형상 ‘친’(親)과 ‘신’(新) 자 한 자 차이지만 그 내용은 하늘과 땅 차이처럼 크다.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는 사대부 자신을 백성보다 우위에 놓고 백성을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인 반면 ‘백성과 친함에 있다’는 사대부 자신과 백성을 동일선상에 놓고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민에는 인간을 존비(尊卑), 상하(上下) 관계로 구분하는 신분제를 옹호하는 속뜻이 숨어 있다. 정제두는 신민을 다시 친민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정제두가 이런 과감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 왕양명(王陽明·1472~1528)의 학설을 지지하는 양명학자이기 때문이다. 왕양명은 <전습록>(傳習錄)에서 “백성의 모든 곤고함 중에서 내 몸의 절실한 아픔이 아닌 것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에게 천하 백성은 자신과 둘이 아닌 하나였다. 왕양명은 같은 책에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정신병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천하의 인심이 곧 내 마음이다. 세상 사람들 중에 미친 자가 있는데, 내가 어찌 미치지 않겠는가? 상심한 사람이 있는데 내가 어찌 상심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왕양명은 <전습록 서애록(徐愛錄)>에서 주자학의 신민설(新民說)을 비판한다.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곧 친민으로서 친민에는 백성들을 교화하고 함양한다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지만, 신민은 한쪽만 강조해서 치우친 것이다”라는 비판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17살 때 <양명집>(陽明集)을 구해 읽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에서 양명학이 처음부터 금기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퇴계 이황(李滉)이 <전습록변>(傳習錄辨)에서 양명학을 ‘사문(斯文·주자학)의 화’라고 비판한 다음부터 금기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에는 양명학의 핵심인 ‘치양지설’(致良知說)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으니 <전습록> 전체를 보지 못하고 비판한 셈이 된다.
죽음을 앞두고 양명학자 선언
양명학이 이단으로 몰리면서 조선에는 외주내양(外朱內陽)이란 일단의 학자군이 생긴다. 겉으로는 주자학자를 자처하지만 속으로는 양명학자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제두는 조선 후기에 유일한 외양내양(外陽內陽)의 선비였다. 정몽주의 11대손인 정제두는 종형이 영조의 부마이고, 부인이 윤선거(尹宣擧)의 종질이었던 서인 명가의 후손이었다. 이런 그가 시대의 이단이던 양명학에 심취하게 된 것은 고단했던 개인사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5살 때 부친을 여의고 16살 때는 아버지 역할을 대신 해주던 할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연보>는 백부도 이미 세상을 떠났고 종손마저 어려서 그가 초상과 장례를 주관하여 치렀다고 전한다. 17살 때 맞이한 부인 윤씨는 23살 때 잃고 말았다. 어린 아들도 잃은데다 그 자신마저 병들었다. 인생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24살 때 대과에 떨어지자 정제두는 모친께 과거 공부 폐지를 간청해 허락받는다. 동생인 정제태(鄭齊泰)는 과거에 급제할 것이라며 “형제가 모두 이록(利錄)을 일삼는 것은 불가하다”는 명분이었으니 이미 세상 명리에 관심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는 포기했으나 문명이 높아가자 32살 때인 숙종 6년(1680)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34살 때는 뒷일을 아우에게 맡기는 글을 쓸 정도로 병이 위독했다. 이때 박세채(朴世采)에게 남긴 유언 비슷한 편지에 정제두는 스스로 양명학자임을 밝힌다. “제가 여러 해 동안 분발하면서 생각해두었던 것들을 선생님께 모두 보여드리고 바른 길을 구하려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생각해보건대 천리(天理)가 곧 성(性)이라고 하지만 심성(心性)의 뜻에 대해서는 아마도 왕문성(王文成·왕양명)의 학설을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박세채에게 올리려던 글) 죽음을 앞두고 양명학자라고 선언한 것인데, 예상과는 달리 병에서 회복되자 양명학자를 자처한 그에게 수많은 시비가 인다.
비판의 유형은 다양했지만 양명학을 깊이 연구하지도 않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54살 때인 숙종 28년(1702) 윤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숙(大叔·박대숙)이 말한 글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대숙은 본설(本說)을 보지도 않고 한갓 자기 의견으로 억지로 논란한 것 같은데 이것을 어찌 명변(明辯)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왕씨(왕양명)의 설이란 것도 그 나름의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윤증에게 답하는 글) 정제두는 숙종 13년(1687) 박세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난달 민언휘(閔彦暉·민이승)와 더불어 수일 동안 고양(高陽)에서 만나 서로 토론한 일이 있습니다. …언휘는 늘 말하기를, ‘양지(良知)의 학문(왕양명의 학문)은 심(心)과 성(性)과 천(天)을 모르는 것이다’라고 해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만나 그의 이론을 듣고 저의 의혹을 좀 풀어볼까 했더니 정작 만나서 토론해보니 한마디도 요긴한 말이 없어 토론을 안 한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언휘는 양지의 설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박세채에게 보낸 편지)
다른 사상 용인하는 것이 학문의 자세
정제두의 <연보>에는 그가 민성제(민언휘)와 ‘우의가 돈독했다’고 적고 있지만 사실은 달라서 그는 정제두에게 위협적인 편지까지 보냈던 인물이다. “책 끝에 주륙(誅戮)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여놓았는데, 지금보다 더 나은 명변(明辯)이 있다면 지당하게 받아들이겠지만 죽이고 욕보이겠다고 화(禍)를 입히는 것이라면 나의 알 바가 아닙니다. 죽이고 욕보이는 것은 학문을 권장하는 길이 아닙니다. 제가 아직까지 자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그 도가 어떠한지를 모르는 것뿐입니다. 만약 그 도가 진실로 옳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면 학문을 논하다가 죄를 입어도 한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형은 어찌 나를 이렇게 낮춰보십니까?”(민성제에게 답하는 글)
다른 사상 용인하는 것이 학문의 자세
정제두는 양명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대신 이단의 딱지를 붙이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강하게 대들었다. 정제두가 바라는 것은 서로 다른 사상들을 용인하자는 것이고, 그것이 바른 학문의 자세라는 것이었다. 그가 민언휘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비록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혼자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너와 나의 구별을 될수록 두지 않는 것이 좋다고 여깁니다”라고 말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그 시대는 주자학 이외의 모든 사상은 이단으로 몰던 폐쇄된 시대였다. 숙종 22년(1696) 69살 노구의 윤증(尹拯)이 48살의 정제두에게, “전일(前日) 양명의 책들은 사우(士友)들이 걱정하던 바인데 지금은 혹 버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우려한 것은 소론 영수였던 윤증조차 이런 논란에서 자유스럽지 못했던 현실을 말해준다. 정제두는 자신에게 이단의 딱지를 붙이려는 주자학자들에게 참다운 도가 무엇인지 논하자며 당당히 맞섰다. 그는 박세채에게 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자의 싸움은 오직 그 의리를 위한 것이지 자기의 사욕 때문은 아닙니다. 공론(公論)의 결정은 옳고 그름에 달린 것이지 세력의 강하고 약한 것으로 정할 것이 아닙니다. …대저 힘으로 이겨봤자 천하의 의리를 공정하게 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며 백 세 후의 시비를 바로잡는 데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박세채에게 답하는 글) 조선에서 양명학 연구가 억압되었던 진정한 이유는 양명학이 갖고 있는 사민평등(四民平等) 사상 때문이었다. 왕양명은 사민(四民, 사·농·공·상)의 우열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사민의 역할에 대해서 이업동도(異業同道)라고 표현한다. “옛날 사민은 직업은 달랐지만 도는 같이 했으니(異業而同道), 그것은 마음을 다하는 점에서 동일하다. 선비는 마음을 다해 정치를 폈고, 농부는 먹을 것을 갖추었고, 장인은 기구를 편리하게 하였으며, 상인은 재화를 유통시켰다.”(왕양명, 절암방공묘표(節庵方公墓表)) 중요한 것은 이런 직업이 타고난 신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는 점이다. “각자는 타고난 자질에 가깝고 능력이 미칠 수 있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그 마음 다하기를 구하였다. 이러한 직업들의 궁극적 목적은 생인(生人)의 도에 유익함이 있기를 바라는 점에서 동일할 뿐이다.”(왕양명, 절암방공묘표)
이상설·박은식도 강화학파의 후예
‘타고난 자질에 가깝고 능력이 미칠 수 있는 것’을 직업으로 선택하면 된다는 것이다. 주자학자들이 겉으로는 왕양명의 ‘심과 성과 천’에 대한 사상을 비판했지만 속으로는 사대부의 계급적 이익을 인정하지 않는 철학사상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들에게 사대부의 계급적 이익은 하늘이 정해준 천경지의(天經之義)였던 것이다. 정제두는 정치를 의식적으로 멀리했다. 섣불리 당쟁에 휘말렸다가는 그의 사상이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초청장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천거로 몇몇 벼슬을 역임했지만 평택 현감으로 있던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남인 정권이 들어서자 벼슬을 내놓고 안산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숙종 20년(1694)의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차지한 뒤 여러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도리어 그는 61살 때인 숙종 35년(1709)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이주했다. 그의 <연보>는 이해 장손이 요사(夭死)하자 몹시 슬퍼해서 선조들의 묘가 있는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적고 있으나 이때는 노론 일당독재가 구축되고, 주자학이 유일사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던 때였다. 그는 학문의 자유를 위해 강화로 이주한 것이었다. 그 뒤 이광명(李匡明)·신대우(申大羽) 등 소론계 인사들이 이주하면서 강화도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의 조선에서 학문의 자유가 숨쉬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양명학은 이후 정제두 집안의 가학(家學)으로 전승되면서 그 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스스로 역사의 음지를 찾았던 양명학이 끼친 영향은 가학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조선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강화학파의 후예들은 대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초기 독립운동의 거물이었던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등이 모두 강화학파의 후예였으니 한 선비의 진실 지향 정신이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할 것이다. 진리를 향한 구도의 열정뿐, 무욕(無慾)의 삶을 살았던 정제두가 젊은 시절의 잦은 병치레에도 불구하고 88살의 장수를 누린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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