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 열전_01

醉月 2009. 10. 23. 08:45

정화의 대항해가 계속됐다면

만일 정화 함대의 대항해가 계속됐다면 세계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1. 아메리카=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스페인의 코르테즈 정복대는 1521년 당시 병력 1600명으로 15문 정도의 대포와 초기 머스킷총, 석궁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 정도 화력으로 아스텍군 7만~수십만명을 격파해 멕시코 일대의 식민지화를 결정지었다. 정화 함대는 그 100년 전인데도 대포와 발사무기 등 화력을 갖추고 있었다. 중국이 먼저 아메리카를 식민지화했거나 이런 화력을 연합군으로서 아스텍이나 잉카제국에 지원했다면 스페인 정복대의 아메리카 점령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 정화 함대의 중심선박인 보선 상상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인터넷판에 실린 것이다.
중국-스페인 해전에서도 중국이 이길 가능성이 높다. 정화 함대는 아메리카로 가는 태평양 항로와 대서양 항로를 확보한 채 100년 이상 아메리카를 경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와의 조공무역을 가동했다면 아메리카 문명권의 엄청난 금은이 중국으로 들어가 중국 경제의 세계 영향력 극대화와 중국 군사력 및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달로 이어졌을 것이다.

2. 유럽=정화 함대가 유럽을 먼저 공격하거나 유럽을 조공 체제로 편입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정화 함대의 무장력은 유럽 전체의 해군력보다 우월했다. 그러나 조공 체제 편입 이상의 강도 높은 지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메리카와 달리 유럽은 오랜 전쟁 경험이 광범하게 축적돼 있고 당시 군사력의 발달도 빨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중국 입장에서는 보급선이 지나치게 긴 점, 중간지대에 강력한 이슬람 세력이 존재한다는 점도 치명적 약점이 된다.

3. 제국주의=세계는 유럽식의 약탈 제국주의와 전혀 다른 길을 경험했을 것이다. 중국이 아메리카 등을 지배하는 형태는 조공무역에 편입시키는 중화질서에의 복속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영락제는 “번국의 백성들을 우호적으로 대하라”고 명령했다. 주만 함대는 멕시코 지역의 원주민과 교역하고 옻칠기 기술 등을 전수하는 과정에서도 대단히 평화적이고 호혜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고 멘지스는 분석한다. 어쨌든 오늘날 세계의 패권은 미국 아닌 중국이, 세계어의 지위도 영어 아닌 중국어가 누렸을 것이다.

 

“정화 함대의 기록을 불태워라”

 1천년 동안의 중국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대사건… 왜 그들의 아메리카 경영은 실패했나

1421년 여름 카리브해에서 갈라진 주문의 분견대는 북아메리카로 향했다. 그러나 푸에르토리코에서 허리케인을 만나 배 9척을 잃는다. 비미니 제도에서 발견된 ‘비미니 로드’라는 석조물은 이때 위기 상황에서 배를 해안에 상륙시키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주문 함대는 쿠바를 거쳐 오늘날 미국령인 로드아일랜드에 닿는다. 나중에 아메리카에 온 콜럼버스와 베라차노 같은 초기 항해자들은 바로 이곳에서 이 명나라 선원들의 후손을 만나게 된다. 함대는 캐나다 해안을 따라 북으로 계속 올라갔다. 정화 함대에는 황제의 이런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 일러스트레이션 | 장광석
“세상 동서남북의 끝을 찾아서 확인하라. 모든 항해의 기준별의 정확한 위치도 알아내라.”

놀라운 항해술과 지도제작 능력


그린란드를 돌아간 함대는 적어도 북극점 250마일(약 400km)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일부 중국학자들은 북극점까지 갔다고 주장한다. 나중에 탐험가 난센이 부근에서 발견한 이상한 철제 리벳들의 성분을 정확히 분석하면 이 주장이 맞는지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주문 함대는 다시 시베리아 북부 해안을 타고 동쪽으로 항해한다. 1507년 제滂?‘발트세뮐러 세계지도’에 놀랍게도 시베리아 북부 해안이 백해로부터 베링해협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이런 항해술과 지도제작 능력을 갖춘 것은 정화 함대밖에 없다. 그들은 달의 기울기로 정확한 경도를 결정할 수 있었고, 당시 이미 600년 이상 되는 대양 항해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 1507년 제작된 ‘발트세뮐러 세계지도’. 정화 함대의 궤적을 추정케 해준다.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 북부 해안을 답사한 뒤 그 지도를 제작한 것은 그로부터 300여년 뒤의 일이다. (멘지스는 오늘날에도 무동력선은 아프리카 서안의 케이프 베르데에서 적도 해류를 타면 그대로 카리브해로 들어가고, 멕시코 만류를 따라 미국 동부 해안을 올라간 다음 다시 해류를 타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북대서양 중앙부에 있는 아조레스 제도를 거쳐 다시 케이프 베르데로 되돌아온다고 밝히고 있다. 콜럼버스도 대서양의 해류 등의 영향으로 바로 이 항로로 여행했다.)

주문 함대는 그렇게 베링해협을 통과해 중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남쪽 항로로 들어간 주만 함대와 홍보 함대는 브라질쪽으로 내려간다. 그들은 오리노코강 삼각주 지역에 정박했다가 남대서양의 포클랜드 군도로 갔다. 그 뒤 함대는 오늘날 아르헨티나에 해당하는 파타고니아에 상륙해 동식물을 채집하고 연구하며 6개월을 보낸다. 이런 추정은 1430년 명나라에서 출판된 <서양번국 풍물화집>(The Illustrated Record of Strange Countries)에 파타고니아 특산 동물로 지금은 멸종한 ‘밀로돈’이 그림과 함께 묘사돼 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다. 화집에는 “중국에서 서쪽으로 2년을 항해한 곳에서 발견했다”고 적혀 있다.

밀로돈은 키 3m에 무게 200kg이나 나가는 동물로 1513년 제작된 <피리 레이스 세계지도>에도 묘사돼 있다. (<피리 레이스 지도>는 멘지스가 정화 함대의 궤적을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되는 초기 세계지도이다. 이 지도는 1428년 제작된 세계지도에서 가장 중요한 ‘남아메리카 부분’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1428년 지도는 포르투갈에서 사라졌는데, 콜럼버스의 항해에 참가했던 한 선원이 이 지도의 ‘남아메리카 부분’을 가지고 있다가 오스만 터키에 포로로 잡히면서 다시 등장한다. 오스만 터키의 제독 피리 레이스가 그 중요성을 알고 새 세계지도에 집어넣도록 지시한 것이다. 따라서 1492년 콜럼버스가 남아메리카를 그린 문제의 1428년 세계지도를 가지고 항해에 나섰다는 추론은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다. 멘지스는 1428년 지도의 최초 원본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제작 능력과 항해능력을 보유하고 있던 정화 함대의 지도일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다.)

» 1513년 제작된 ‘피리 레이스 세계지도’.
남중국 원산인 아시아계 닭이 남아메리카 곳곳에서 무더기로 발견된다는 사실도 정화 함대와 남아메리카의 밀접한 연관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거꾸로 남아메리카 원산인 옥수수도 이때 중국과 필리핀 등에 전래됐다.

아메리카에 첫 식민지를 건설하다

주만과 홍보의 함대는 마젤란해협 부근에서 서로 헤어진다. 주만의 함대는 태평양으로 들어가 차가운 훔볼트 해류를 타고 남아메리카 동부 해안을 거슬러 올라갔다. 홍보의 함대는 남반구 항해에서 기준별이 된 카노푸스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남극해의 남셰틀랜드 제도로 내려갔다.

주만 함대는 페루 해역에서 남적도 해류를 타고 다시 서쪽으로 밀려갔다. 그들은 투오모토 군도와 피지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에 상륙했다. 뉴캐슬 바로 북쪽 해안에 닻을 내린 그들은 돌로 수비대 시설을 세우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어느 곳보다 풍부한 선박 잔해와 중국 특산품이 발견된다. 금을 채굴한 흔적도 남아 있다. 주만 함대는 그 뒤 인도네시아에 해당하는 스파이스 제도까지 갔다. 놀랍게도 그들은 중국으로 가지 않고 다시 해류를 타고 북아메리카로 되돌아갔다. 미국의 서부 해안에 도달한 함대는 해안을 따라 남아메리카까지 내려가며 곳곳에 정박했다. 새클라멘토에서는 정화 함대의 선박 잔해의 흔적, 벼 등이 확인됐고, 중국계로 보이는 사람들이 인디언들과 함께 살았다는 신빙성 있는 기록도 남아 있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도 정화 함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닻이 발견됐다. 무엇보다 멕시코 서해안 마초아칸에서 지금도 제작되는 옻칠기·직물염색 제품 등은 정화 함대와 이곳 원주민들이 교역을 했으며, 중국인들이 장기간 거주하며 이 기술들을 전수해주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베네수엘라 인디언 가운데서는 중국인 혈통을 증명하는 DNA가 확인되고 있으며, 페루 인디언 가운데서는 중국어를 말하는 인디언들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주만 함대가 아메리카에 상륙해 결국 첫 식민지까지 건설했음을 보여준다. 그 뒤 주만 함대는 다시 적도 해류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1423년 10월 중국으로 귀환한다. 주만의 함대 가운데 중국에 도착한 것은 총 25척 가운데 단 한척이다.

» 별호가 ‘삼보’였던 정화는 영문으로 ‘Sambo’ 또는 ‘Sin Bao’로 서양에 전해졌다. 그런데 ‘Sin Bao’가 아랍권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Sin Bad’로 오기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따라서 ‘신밧드의 모험’은 원래 ‘정화의 모험’인 셈이다.
정화 함대의 강력한 후원자인 영락제는 1424?타타르족을 정벌하러 갔다가 병으로 죽었다. 손자인 선덕제가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의도로 실시한 1430년의 제7차 대항해를 끝으로 명나라는 바다를 닫아버리기 시작했다. 환관과 라이벌 관계였던 한림학사들은 무능한 황제들을 부추겨 환관들이 주도하던 대항해 정책을 무너뜨렸다. 남경의 조선창을 폐쇄하라는 칙령이 포고됐다. 대양 항해 선박을 더 이상 만들지 말라는 칙령에 저항하던 사람들은 처형됐다. 중국의 찬란한 대항해 시대는 유학자 세력의 눈먼 이기심에 짓밟혀갔다. 그 마지막 장면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대양 강대국에서 내륙국가로의 추락

“1477년 한 야심적인 환관이 정화의 대항해에 대한 기록을 내줄 것을 병부에 요구했다. 병부의 부책임자였던 한림학사 유대하는 문서보관소에서 정화 함대가 만든 지도와 기록 등 방대한 분량의 문서를 압수한 뒤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병부의 각신(장관)에게는 ‘분실됐다’고 보고한다.

‘어떻게 문서보관소의 공식 문서들이 분실됐다는 말이오’

‘삼보(정화의 별호)의 서양 원정은 수만금과 수만의 양곡을 낭비했을 뿐입니다.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멋지고 비싼 물품을 가져온들 조정에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설사 그 옛날 문서들이 아직 보관돼 있더라도 이런 일이 재발되는 것을 뿌리째 뽑기 위해선 모조리 없애버려야 합니다.’

모든 사태의 전말을 알아챈 각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역시 공은 대단하오. 다음 이 자리는 확실히 당신 것이야!’”(루이즈 레바티즈 <중국이 바다를 지배하던 시대>(When China Ruled the Sea·국내 미번역)에서)

과연 정화 함대가 아메리카까지 갔는지 중국 역사나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나아가 이 분서 사건를 계기로 중국은 해양강국의 자리를 급속히 잃기 시작한다. 15세기가 되기도 전에 중국에서는 대형 보선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보선들은 조선소에서 썩고, 화약과 총포의 연구도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아메리카에 남은 중국인과 모국의 연결선은 다시 복원되지 않았다. 중국은 이제 대형 보선으로 대양을 누비던 강대국에서 중소형 평저선 따위로 대운하나 오가는 내륙국가로 전락했다. 분서 사건 뒤 채 30년도 지나지 않아 명나라는 해안 지역을 지속적으로 침범하는 왜구들조차 제대로 막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중국은 그 뒤 거의 600년 동안 강대국의 자리를 되찾을 수 없었다. 정화 함대의 기록을 불태운 것은 바로 지난 1000년 동안의 중국 역사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1421년 항해’가 재현된다

현재 중국에서는 정화 함대의 대형 보선을 복원해 ‘1421년 항해’를 그대로 재현하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과연 정화 함대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세계일주까지 할 수 있었는지 간접적으로 증명해보자는 시도인 셈이다. 이 프로젝트는 중국의 예비역 해군 장성과 해양학자 등이 추진하고 있으며 스폰서를 모으고 있는 상태이다. 멘지스도 지원 의사를 밝힌다. 보선을 복원한 뒤 1421년의 추정 항로를 따라 항해하며, 선원들은 당시 선원들이 먹던 방식으로 먹는 등 당시와 똑같은 조건을 재현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이전까지는 중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최종 목표다.

중국 지도부는 ‘아메리카 발견설’에 대해 현재 외형적으로는 반응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정화 함대에 대해 그들은 이미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명나라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에 차 있다고 분석하는 의견도 나온다. 영국의 우주과학자 마이클 마틴 스미스는 장쩌민 주석이 1996년 당대회 회기 중인데도 매우 이례적으로 국제우주비행사연맹(IAF) 총회에 참석해 발표한 개회사에서 그런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우주정거장은 15년 이내에 가능해질 것입니다. …달과 화성에도 기지를 건설할 것입니다. …중국 과학원 회원인 왕시지 동지는 우주야말로 육지, 바다, 하늘에 이어 인간이 자신을 적응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4번째 영역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나는 아폴로호의 달 착륙 50주년이자 정화 함대 항해 600주년인 2019년 무렵 우리가 달에 갔다가 귀환해도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인류의 복리와 장기적 진보를 위해 피도 흘리지 않고, 침략도 하지 않고 새 영역을 발전시키는 것보다 세계 속에서 중국의 위상을 높이는 것은 없습니다. 우주로 나아감으로써 중국은 다시 한번 지구상에서 가장 선진되고 진취적인 문명으로 부상할 수 있습니다. 중국 만세!”

‘선저우계획’(神舟計劃), 제2의 정화 대원정은 이미 시작됐다.

 

[야율초재] 미국엔 ‘야율초재’가 없는가

800년 전, 세계 최강의 군대 몽고군은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 햇빛을 가릴 정도의 무수한 화살로, 성벽을 무섭게 때려부수는 공성무기로 유라시아 모든 민족을 얼어붙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항하는 군대뿐만 아니라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를 가리지 않고 무수히 죽이고 또 죽였다. 그들의 이 학살은 ‘도성’(屠城)이라고 불렸다. 몽고군의 악명을 전 세계에 처음 알린 징기즈칸의 코라즘제국 침략(1219~1225년) 때 벌어진 끔찍한 대학살에 대해 역사가들은 이렇게 적고 있다.

 
» 야율초재 상상도(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이보다 더 잔인한 약탈은 없었다

“헤라트가 함락되자 160만명이 도시 밖으로 붙잡혀 나왔다. 그리고 학살이 시작됐다. 한때 코라즘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모두 120만명이 학살됐다. 몽고군 한명이 24명꼴로 죽인 것이다. 기독교 성서번역 도시로 유명한 메르브를 점령한 뒤 몽고군은 130만명의 인구를 남자, 여자, 어린애로 갈라 서라고 명령했다. 몽고군이 살려주곤 하던 기술자는 400명에 지나지 않았다. 몽고군은 사람들을 땅 위에 누우라고 명령한 뒤 난도질을 시작했다. 또 다른 도시 니샤푸르에는 174만7천명이 살고 있었는데 역시 대부분 학살됐다. 몽고군 대장 툴루이는 자기 매제가 화살에 맞아 전사한 것을 복수한다며 그렇게 한 것이다. 잘린 목은 아이는 아이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쌓아져 3개의 거대한 피라미드를 이뤘다.”


징기즈칸은 손자 무투겐이 마미얀 공략 때 전사하자 철저한 도성을 명령했다. “사람은 모두 죽여라. 나아가 모든 동물, 식물까지 죽여라.” 몽고군은 모든 나무란 나무까지 모조리 뽑아버렸다. 도시마다 살육 다음에는 방화가 이어졌다. 사마르칸트, 부하라, 메르브, 바그다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들에서 수많은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들이 살해됐다. 한 역사가는 “인류 역사상 이처럼 인구를 격감시킨 적은 없다”고 탄식했다.

몽고군의 이런 잔혹행위는 약탈이 일상화된 유목사회에서 길러졌다고 할 수 있다. <몽골비사>에선 몽고군의 잔학성을 다음과 같이 조장하고 칭송하고 있다.

“많은 적에게 달려들어
전리품들을 노획하면
노획하는 대로 가져라!
도망 잘 하는 사냥감을
죽이면
죽이는 대로 가져라!”

징기즈칸의 4맹견이라 불리는 무장들에 대해선 이렇게 묘사하고 있기까지 하다.

“전투의 날
사람의 고기를 먹는다.
교전의 날
사람의 고기를 양식으로 하는 자들이다.”

1차 코라즘제국 침략전쟁을 끝내고 서하마저 정복한 뒤 몽고군의 다음 목표는 중국의 중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1232년 3월 몽고군이 중원에서 가장 큰 도시 개봉(開封)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원래 송나라의 수도인 이 도시는 여진족의 금나라에 함락돼 금의 수도가 돼 있었다. 개봉에는 한인을 비롯해 여진인, 거란인 등 147만명이 살고 있었다. 몽고군의 대장은 징기즈칸의 4맹견 가운데 한명인 수부데이였다.

» 몽고군의 잔혹한 전투 장면. 중국 중원의 백성들이 그들에게 살을 발라 죽이는 참극을 당하지 않은 것은 야율초재의 덕택이었다.

개봉 백성들은 처절하게 저항했으나…

몽고군은 코라즘제국에서 노획한 이슬람권의 가장 우수한 무기까지 총동원했다. 발석차로 거대한 돌을 성 안에 퍼붓는가 하면, 화통 등이 날아갔다. 불화살이 3층으로 된 개봉성의 4개 방어누각으로 날아갔다. 몽고군은 연자방아 맷돌 덩어리는 물론 대들보 덩어리까지 발사했다.

그러나 방어군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의 총공격을 결사적으로 막아냈다. 금의 황제 애종이 성 밖으로 탈출하고, 전염병이 창궐해 무더기로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함락되지 않았다. 마침내 모든 보급품이 바닥나고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서 금나라의 서면원수였던 최립이 쿠데타를 일으켜 성문을 열고 몽고군에 항복했다. 개봉 백성들은 그렇게 14개월 동안 몽고군에게 처절하게 저항했던 것이다.

이제 이 백성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군사령관 최립의 반란에 이은 항복 형식으로 종결됐지만, 그 백성들은 몽고군에 끝까지 격렬하게 저항한 것이다. 코라즘제국과 서하를 휩쓸었던 대학살의 악몽이 중원에서 가장 문명이 발달한 이 도시에서도 되풀이되는 것인가?

» 야율초재가 남긴 글씨.
이미 몽고 공격군 대장인 수부데이는 대칸 오고타이에게 도성을 진언해놓고 있었다. 그는 항복을 권하러 개봉에 갔던 몽고의 국신사 일행 30명 가운데 29명이 무참히 살해됐다는 보고를 듣자 땅바닥에 칼을 꽂으며 ‘개봉성 전멸’을 다짐한 바 있다. 그렇게 개봉 백성 140만명의 목숨이 대학살의 처참한 운명 앞에 가물거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오고타이 칸의 막사로 찾아가고 있었다. 거란인 출신인 그는 개봉의 도성을 완화해달라고 칸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몇년씩이나 전쟁을 벌이는 노고도 모두 땅과 백성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땅을 얻어도 백성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재물이나 공예품은 풍족함을 얻는 근원이지만,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유라시아대륙 인민의 생사에 관한 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상 최강의 권력자 몽고의 칸에게 호소하는 그는 재상직인 중서령을 맡고 있는 아율초재(耶律楚材)였다. 전쟁으로 일어선 나라 몽고에서, 군국주의가 한창 맹위를 떨치는 전쟁판에서 초원의 법도에 따른 야만적인 살육을 막으려는 한 인간의 치열한 노력이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르츠사하리, 이번에는 절대 그럴 수 없다.”

오고타이 칸은 잘라 말했다. 우르츠사하리는 몽고말로 ‘긴 수염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징기스칸이 야율초재를 아껴 붙여준 이름이다. 국신사 일행을 죽인 것은 몽고군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태였다. 천산산맥 서쪽의 모든 유라시아 땅을 피와 공포로 물들인 코라즘 침략전쟁은 바로 징기즈칸의 국서를 가진 대상단을 코라즘 오트랄 성주가 살해하면서 벌어지지 않았는가? 수부데이에게는 이미 개봉 함락 뒤 ‘최후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맡기겠다는 약속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개봉 공방전이 예상보다 훨씬 더 길어지는 영향으로 오고타이 칸과 그 동생 툴루이가 잇따라 병에 걸리는 사태까지 벌어졌기에 몽고 지도부에서는 모두들 도성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야만으로부터 문명을 지키다

“풍성한 것을 만드는 기술자들과, 재화를 늘려주는 부자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 모조리 죽여버리면 얻는 바가 없습니다.”

초재는 이마의 땀을 씻으며 간언하고 간언했다. 대칸은 충신의 호소로 고민에 빠졌다. 오고타이는 이튿날 개봉 백성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발표한다.

“죄는 금나라 황족의 성인 완안씨를 가진 자들에게만 묻고 나머지는 목숨을 구해준다.” 중원 백성 140만명이 목숨을 구하는 일대 기적은 이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다.

대만 출신으로 일본에서 활약하는 역사소설가 진순신은 <중국걸물전>에서 야율초재가 살육으로 점철된 초원의 법도를 ‘야만’이자 ‘문명의 파괴’로 보고 그 야만으로부터 문명을 지키려 했다고 평가한다. 확실히 그런 관점은 설득력이 있다. 초재는 이전에 사마르칸트 함락 때도 징기즈칸에게 “이제는 도성을 그만해야 합니다”라고 진언했다. 또한 징기즈칸의 4준마 가운데 한명인 무칼리가 “금나라 모든 땅으로부터 백성을 내쫓고 그 전답을 모두 초원으로 만든다”며 시도한 무모하고 파괴적인 정책에 대해서도 반대해 끝내 중단시켰다. 그는 그 뒤에도 긴급과거를 실시해 속전금이 없어 노예로 전락한 중원의 지식인 수천명을 구제하기도 했으며, 몽고에 학교도 세웠다. 나아가 과도한 징세를 목숨을 걸고 막는 등 군국주의적 무단 통치를 절차에 따른 법치로 바꾸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다. “제국은 말을 타고 건설할 수는 있지만, 말을 탄 채 통치할 수는 없다”는 믿음을 실천한 것이다.

야율초재가 죽은 뒤 몽고제국의 재상을 15년 동안 지낸 그의 집에선 거문고와 완함 같은 악기 10여개, 고금 서화 몇점, 서적 수십권 정도가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역사가들은 나중에 그에 대해 <신원사>에 이렇게 적었다. “중원의 백성들이 오랑캐에게 살을 발라 죽이는 참극을 당하지 않은 것은 모두 그의 덕택이었다.”

2003년 이라크는 21세기형 첨단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두 번째 공격을 받았다. 제1차 걸프전쟁 때처럼 미국의 언론은 이라크의 공화국 수비대가 엄청난 화력을 가진 것처럼 위기의식을 조장했다. 그러나 이라크군은 800년 전 코라즘제국의 도시들보다 훨씬 맥없이 미제 첨단무기의 제물이 돼버렸을 뿐이다. 이라크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열화우라늄탄이 떨어졌는지, 그 방사능 오염은 앞으로 어떤 비극을 가져올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어찌 열화우라늄탄뿐이겠는가.

유일 강대국 미국의 무력만이 판치는 이 비극의 시대, 과연 미국에는 야율초재와 같은 ‘생명의 수호자’ ‘문명의 수호자’는 없는 것일까.


1200년대 몽고군 vs 2004년 미군

1200년대 당시 몽고군과 2004년 현재 미군은 우선 세계 최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의 몽고군과 현재의 미군은 각각 거의 유일하게 전지구적 차원에서 작전을 벌이는 게 가능한 군대다. 몽고군은 일본으로부터 폴란드까지 거의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작전권으로 놓고 있었다. 2004년 현재 대륙간탄도탄 같은 발사체 무기를 뺀 상태에서 전지구적 차원의 작전이 가능한 군대는 미군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군이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러스 해협에 대한 미국-서유럽 연합군의 봉쇄를 뚫고 지중해로 진출하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남반구 대양에서 효율적으로 작전 수행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나아가 중국군의 해상작전 능력도 현재로선 러시아군보다 훨씬 제한적이다.

둘째, 두 군대 모두 가장 기동성이 뛰어나고 우수한 무기체계를 갖추고 있다. 몽고군의 기동성은 일반 병사들까지도 말을 1~4마리 갖춘 채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이동해 상대편 군대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태에서 기습하는 특유의 전격작전에서도 증명된다. 몽고군은 분유가루와 쿠미즈라는 말젖술, 수수가루 그리고 보르츠라는 육포를 말안장 밑에 넣은 채 이동하면서 그대로 말 위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삼국지> 같은 데 나오는 것처럼 취사를 위해 행군을 멈추는 일이 없이 보통 10일을 그런 스피드로 이동할 수 있었다. “1221년 징기즈칸 군대는 이틀 동안에 130마일을 이동했다. 1241년에는 수부데이 군대가 엄청나게 눈이 쌓인 대초원에서 사흘 만에 180마일을 이동했다.”
» 당시의 몽고군과 현재의 미군은 거의 유일하게 전지구적 차원에서 작전을 벌이는 게 가능한 군대다.(GAMMA)

무기도 당시로선 가장 경쟁력이 뛰어났다. 주무기는 약 166파운드의 장력에 유효사거리 200~300야드에 이르는 활이다. 이 활은 <로빈후드>에 나오는 영국의 장궁보다 사정거리나 파괴력에서 크게 앞선다. 게다가 상대보다 훨씬 먼 사정거리를 가진 이 무기를 말을 탄 채 발사해 훨씬 정확하게 표적에 맞힐 수 있었다. 근거리 파괴용인 큰 활과 장거리 저격용인 작은 활 두 가지를 가지고 다녔고, 30개 정도의 화살이 든 전통을 2~3개씩 보유했다. 당시 유럽의 기사단이 철갑통 모양으로 된 갑옷과 긴 창 등 1인당 70kg에 이르는 무겁고 둔한 장비를 채용한 데 비해 몽고군은 가볍고 기능성이 뛰어난 장비로 무장했다. 갑옷은 가로 약 2cm, 세로 약 10cm 크기의 가벼운 금속판에 8개의 구멍을 뚫은 뒤 가죽끈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엮었다. 금속판도 신체의 앞쪽에만 달아 무게를 줄였다. 몽고군은 초기에 성을 공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나, 나중에 금나라·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충원한 공성전문가를 활용해 충차·발석차 등의 신무기체계를 강화했다. 나중에 더욱 발달한 이슬람권 공성무기까지 보강해 파괴력이 훨씬 높아졌다.

미군의 기동성은 “지구 어느 곳에든 번갯불 같은 속도로 군대를 배치할 수 있다”는 표현 하나로도 충분할 정도다. 2001년 미군은 세계 어느 곳에서 분쟁이 발생해도 1)1개 여단은 96시간(4일) 안에 2)1개 사단은 120시간(5일) 안에 배치할 수 있었다. 무기체계의 급격한 발전은 군사예산 하나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2003년 미국의 군사예산은 3827억달러로 미국 다음으로 군사비가 많은 9개 나라의 군사예산을 합친 것보다 많다. 이 가운데 첨단무기의 개발에 투입하는 연구개발비는 568억달러로 중국의 연간 군사비 총액보다도 많다.

 

세계의 화폐를 지배하는 여성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화폐에 등장하는 여성은 단연 영국의 퀸 엘리자베스 2세이다. 영국령을 포함해 전 세계 15개 나라의 32종류의 지폐에 그 초상을 새겨놓고 있다. 여왕 중의 여왕, 왕 중의 왕인 셈이다. 젊었을 때 모습부터 할머니인 현재의 모습까지, 왕관을 쓴 모습에서 그냥 맨머리 모습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영국에는 그와 함께 19세기의 사회개혁가인 엘리자베스 프라이가 교도소에서 수감자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이 화폐 뒷면에 들어가 있기도 하다.

여성 화폐인물은 대부분 과학자, 예술가, 노벨상 수상자, 교육가, 사회사업가 등이다.

프랑스 최고액 화페인 500프랑에는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 부부가 나란히 실려 있다. 1902년 라듐 분리에 따른 공적으로 부부가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으로 받았다. 남편이 마차사고로 죽은 뒤 마리는 혼자 자녀를 키우며 연구를 계속해 순수 금속 상태의 라듐을 분리하는 데 성공해 1911년 두 번째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딸 이레네도 1935년 인공방사능을 발견해 역시 남편과 함께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독일에는 사실적 화법으로 곤충 등의 일생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공헌을 한 18세기 초의 과학화가 마리아 쉴러 메리안이 500마르크 화폐에 등장한다. 100마르크 화폐에는 ?灼?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이 들어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100달러 화폐에는 20세기 초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한 넬리 멜바가 등장한다. 이탈리아 1천리라 화폐에는 아동교육가 몬테소리가, 칠레 5천페소 화폐에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먼저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 등장한다.

일본에선 과거 메이지 시대에 여성이 딱 한번 화폐에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기에 활동하다가 단 25살로 요절한 여류작가 히구치 이치요를 집어넣은 5천엔 화폐가 올해 발행될 예정이다. 인도네시아 화폐에는 과거 네덜란드를 상대로 독립투쟁을 벌인 여걸 디엔이, 그리스 화폐에는 신화 속의 여신 아테나가 출연하고 있다.

 

[선덕여왕]을 만나고 싶다

삼국시대 난세를 치유한 한민족 최초의 여왕… 남성이 100% 점령한 화폐인물의 여성 후보 1위

21세기, 우리 민족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변수들은 참으로 많다. 전쟁인가 평화인가?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는 가능한가? 선진국 진입 가능성은? 통일은 과연 이루어질 것인가? 이루어진다면 그 시나리오는 어떻게 될까? 한민족의 장기 생존은 가능한가?

» 일러스트레이션 | 장광석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

세상이 어떻게 되건 앞으로 ‘여성’이라는 변수는 그 중요성에서 결코 앞자리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 땅에 여성의 시대가 새로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는 이미 충분히 많다. 앞으로 몇년 안에 여성이 정치권력의 정점-대통령-에 도전하는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평가되고 있을 정도다. 이런 도도한 역사의 진전에 따라 사실상 우리 역사에서 여성이 결코 진출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영역이 여성에게 문호를 열 가능성도 크다. 바로 화폐의 세계다. 현재 세종대왕(1만원권), 율곡 이이(5천원권), 퇴계 이황(1천원권), 충무공 이순신(500원 주화) 등 남성이 100% ‘점령’하고 있는 화폐인물의 세계에 여성이 진출할 가능성은 100%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한민족이 좋으나 싫으나 매일 만나게 될 첫 여성은 누구일까? 경제생활의 중심부에 진입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부와 풍요를 가져다줄지도 모를 첫 화폐 여성인물은 과연 누가 될까? 그 첫 번째 후보는 역시 선덕여왕이라고 할 수 있다.

선덕여왕은 신라 제27대 왕이다(선덕왕이 맞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선덕여왕으로 하는 걸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그에게는 대략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평가가 따라다닌다. ‘한민족 최초의 여왕’이라는 것과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는 것이다. 최초의 여왕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만한 상식이다. 그러나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는 누구나 100% 찬성하는 평가라고는 하기 어려운, 반대의견도 조금 있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여왕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세력이 당시 신라 안팎에 실질적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 흐름은 신라 당시는 물론 신라의 이야기를 역사에 기록한 고려 시대, 심지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 분황사 석탑(왼쪽)과 첨성대(오른쪽). 선덕여왕은 재위 기간에 크나큰 불사를 잇따라 일으키는 등 종교를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정립하는 한편 과학기술 발전에도 크게 공헌했다.(한겨레 김종태 기자)
먼저 선덕여왕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보자.

“왕의 이름은 덕만(德曼)으로 진평왕의 장녀다. 성품이 어질며 사리에 밝고 민첩하였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돌아가자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웠다. 진평왕 때 당나라로부터 얻어온 모란꽃 그림과 그 꽃의 종자를 보고 ‘이 꽃은 비록 아름다우나 반드시 향기가 없겠나이다’고 왕에게 말했다. 왕이 그 이유를 묻자 ‘꽃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나이다’라고 할 정도로 명석했다.

임금으로 오른 첫해(서기 632년) 겨울에 홀아비, 홀어미, 고아, 자식 없는 노인과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을 구제해 민심을 안정시켰다. 12월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쳤다. 이듬해에는 죄수들에게 대사면을 내리고, 모든 주군에 1년 동안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그해 8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범했다. 재위 4년째에 당나라로부터 주국낙랑공 신라왕(柱國樂浪公 新羅王)에 책봉됐다. 재위 5년 5월에 청개구리가 떼를 지어 궁성 서쪽에 있는 옥문지라는 연못에 모여든 것을 보고 ‘서남쪽 변경 옥문곡이라는 곳에 백제군이 침입해 매복하고 있는 것 같다’고 예측해 실제 백제군 500명을 찾아내 섬멸한 적이 있다.

재위 7년 11월에 고구려 군사가 북쪽 변경 칠중성에 쳐들어온 것을 물리쳤다. 재위 9년 당나라에 청원해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을 국학(당나라의 최고 학부)에 입학시켰다. 재위 11년에는 백제 의자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 서쪽 지방 40여성을 빼앗겼다. 다시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가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므로 사신을 당태종에게 보내 위급한 사실을 알렸다. 그 해 8월에 백제 장군 윤충의 공격으로 접경지대의 요충인 대야성이 함락되고 김춘추의 사위로 성주인 김품석 등이 전사했다. 이에 김춘추를 고구려로 보내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했으나 이것이 이뤄지지 않자 이듬해 다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고구려연합에 대항할 ‘대국의 군사를 청원한다’며 구원병을 청했다. 이를 받아 당태종은 이듬해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면 내년에는 반드시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칠 것’이라고 협박했으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듣지 않았다. 그해 9월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백제 정벌에 나서 7개 성을 점령했다. 재위 14년 정월에 김유신이 백제 정벌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제군이 다시 쳐들어오는 등 잇따라 3번씩이나 백제의 침략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했다. 그해 3월에 황룡사탑을 건립했다. 5월에 당태종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자 선덕여왕은 군사 3만명을 내어 당나라를 원조했다. 이 기회를 타서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서쪽의 변방 7성을 공격해 빼앗아갔다. 재위 16년인 서기 647년 정월에 비담 염종 등이 ‘여왕이 정사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했다. 그달 8일 왕이 돌아가시므로 시호를 선덕이라 했다.”

당태종과 김부식의 업신여김

역사적으로 선덕여왕의 재위기간은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에 따라 고구려-백제의 ‘여-제 동맹’이 강화되던 시기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다.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는 ‘나-당 동맹’으로 이에 맞섰다. 한반도를 무대로 다국간 무력전과 외교전이 한층 더 치열해지고 있던 격동의 시기였다. 특이하게도 선덕여왕은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국가를 통치하면서도 통도사·월정사·분황사·오세암·보문사 등 오늘날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크나큰 불사를 잇따라 지었다. 덕만이라는 이름은 바로 석가모니 시절 불교를 깊이 믿었던 석가모니 가족 공주의 이름이다. 삼국이 통일을 향해 치닫는 격동의 시대, 전쟁의 시대에 선덕여왕은 종교를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정립시키는 과감한 정치적 결단을 내린 것이다. 사실상 이 결단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역사적인 군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고구려나 백제에는 없었던 이 에너지로 결국 신라는 삼국통일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여왕이 맞닥뜨려야 하던 도전은 강력했다. 우선 재위 15년 동안 모두 11차례나 크고 작은 전쟁을 치러야 했다(재위 16년에 일어난 비담 등의 반란까지 치면 12차례이다). 총 11차례의 전쟁 가운데 신라가 먼저 공격한 것은 재위 13년 김유신을 시켜 백제를 쳐 7개 성을 빼앗은 것과, 재위 14년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 때 당나라쪽에 군사 3만명을 원병으로 보낸 것 2차례뿐이다. 재위 11년과 14년에는 각각 백제로부터 3차례나 공격받았다.

» 각국 화폐에 등장한 세계의 여성들. 위부터 영국, 노르웨이, 체코, 일본 화폐의 모습.
이런 상황에서 당태종은 여성 군주인 선덕여왕을 깎아내리는 공개적인 언사까지 서슴지 않았다. 재위 12년인 서기 643년 당에 간 신라 사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아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는 터이므로… 해마다 편안한 날이 없을 것인즉, 나의 친척 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임금으로 삼되, 자연 홀로 갈 수 없으므로 마땅히 군사를 파견해 그를 호위하게 하고 그대 나라가 안정되는 것을 기다리자.”

나아가 <삼국사기>의 김부식은 ‘신라본기 선덕왕’에서 이런 평까지 하고 있다. “하늘로서 말한다면 양은 강하고 음은 유약하고, 사람으로서 말한다면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이 원문이 그 유명한 ‘남존여비’이다). 하물며 어찌 늙은 할머니를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다스리게 하는가? 신라가 여자를 왕위에 있게 한 것은 진실로 난세의 일이며,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탁월한 외교전과 인재의 중용

당태종의 망발스러운 여성 비하 발언은 그의 후궁이었다가 아들인 고종의 황후가 된 측천무후의 ‘일격’ 앞에 그대로 무너진다. 무후는 고종에 이어 아들을 차례로 황제에 앉혔다가 서기 690년 스스로 황제에 오르고 나라 이름까지 주나라로 바꾸었다. 당태종이 그런 망언을 한 지 정확히 47년 뒤에 벌어진 일이다. 김부식의 평가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것은 쉽사리 드러난다. 선덕여왕을 왕위에 있게 한 것은 확실히 ‘난세’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김부식이 말하는 난세, 곧 ‘나라를 엉망으로 운영하는 판국’에서 여왕을 뽑은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지럽기에 영명한 군주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선덕여왕을 뽑았는데 결과가 그대로 이뤄졌다고 해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신라가 이룩한 삼국통일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판적인 견해가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선덕여왕은 진흥왕 때 이뤄진 신라의 비약적인 발전에 대한 고구려와 백제의 반격을 탁월한 외교전으로 맞서고, 불교를 통한 국민통합과 김춘추, 김유신 같은 유능한 인재의 중용으로 국력의 내실을 채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아가 시대 상황과 직책의 특수성 때문에 이 땅의 어떤 여성보다도 더 국제주의에 적극적이었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역시 여성 화폐인물 첫 번째 후보로 강력한 인물이다.

 

“세계화폐, 남성 382명 여성 39명”

세계화폐에 여성은 얼마나 등장하고 있을까?
일본의 저술가이자 문학자인 나카노 교코는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약 1천 종류의 지폐를 분석했다. 저명인물은 모두 421명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남성은 382명, 여성은 39명이라고 그는 밝혔다. 남성이 거의 90%를 차지하는 것이다. 저명인물이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가상 존재, 동상, 건조물, 풍경, 민족의상, 그리고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다중집단 등이 나머지 약 600종류를 장식하고 있다.

저명여성이 등장하는 비율은 대륙별로 큰 차이가 있다. 유럽 24명, 아메리카 7명, 아시아 6명, 그리고 아프리카 0명이다. 남성 대 여성의 비율은 독일이 4 대 4, 오스트레일리아가 4 대 4, 덴마크 3 대 3, 스웨덴 3 대 2, 뉴질랜드 3 대 2, 노르웨이 4 대 1, 아이슬랜드 5 대 1 등이다. 의식적으로 남녀 비율을 같게 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덴마크 등 세 나라인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높으면 여성 화폐인물 비율도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모잠비크, 그리고 유럽의 핀란드처럼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모두 29%를 넘어 세계 10위 안에 들면서도 여성 화폐인물이 하나도 없는 나라도 있다.

미국의 경우 모두 역대 대통령만을 화폐에 등장시키고 있어 여성이 하나도 없다. 중국은 5위안에서 100위안까지 5종류의 지폐를 모두 남성인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의 초상 하나로 통일하고 있다. (소수민족 남녀상은 제외한 경우)인도 역시 5루피에서 1천루피까지 7종류의 화폐에 모두 국부인 마하트마 간디의 초상을 넣고 있다.

 

일본 지폐모델의 불순한 의도

일본은 지금까지 두 차례 여성인물을 지폐모델로 등장시키고 있다. 맨 처음 1881년(메이지 14년) 1엔권에 신공황후의 초상을 집어넣었다. 그 이듬해인 1882년에는 5엔권에, 다시 1883년에는 10엔권에 똑같은 신공황후가 잇따라 등장한다. 당시 일본 순사(경찰관)의 첫 월급이 6엔, 쌀 10kg에 80전 하던 시절이므로 대단한 고액권인 셈이다.

» 신공황후의 초상이 담긴 메이지 시대의 일본 지폐. 이 배경엔 매우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매우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 일본 역사에선 신공황후가 이른바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처음으로 시도한 인물로 평가된다. 기원 3세기의 인물인 그는 <일본서기>에 남장을 한 채 신라 정벌을 성공시킨 것으로 기술돼 있다. ‘신공황후가 병선을 이끌고 신라로 건너가자 겁먹은 신라 왕은 싸우지도 않고 투항해왔다. …소식을 들은 고구려, 백제왕도 찾아와 조공을 약속했다.’ 일본 학자들조차 대다수는 이것을 날조라고 보고 있지만, 상당수 일본인들은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메이지 시대 화폐에 등장한 신공황후의 초상은 일본인 모습이 아니다. 얼굴 모습과 목걸이 등이 영락없는 서양인을 연상시킨다. 당시 이 초상을 디자인한 일본조폐창 기술고문인 에두아르도 키오소네라는 이탈리아 사람이 그나마 일본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그의 목조 조각상(약사사에 국보로 보관돼 있음)조차 전혀 참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004년 발행되는 5천엔권에 히구치 이치요(1872~1896년)가 두 번째 여성인물로 등장한다. 일본 최초의 여성 전업작가인 그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흐린 강> <키재기> <섣달 그믐날> 등 소설을 남기고 24살에 요절한 인물이다. 1887년부터 죽을 때까지 쓴 방대한 양의 일기는 문학사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사실상 그보다 예술사적으로 나은 여성이 적지 않기 때문에 정치권에서 인기 전술의 하나로 히구치를 선정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신사임당- 그를 ‘현모양처’에 가두지 말라

인물화폐 여성후보 2위 신사임당… 남성중심주의 공박한 조선시대의 대표적 여성예술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 기념사업회장’ ‘안중근 의사 숭모회장’ 등 외형상 매우 남성주의적인 직책을 많이 맡았던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이 한 여성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어진 어머니로는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 부인을 비롯해 정몽주의 어머니, 이항복의 어머니 최씨 같은 많은 분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어버이에 효도한 여성을 든다면 신라의 지은을 비롯해 선산의 송씨, 문화의 류씨, 홍원의 현씨 등 고을마다 적지 않다. 학문에 조예가 깊고 시문에 능했던 여성으로는 고구려의 여옥, 신라의 설요, 광해군의 장모 봉원부부인 정씨, 난설헌 허씨, 영향당 한씨, 품일당 전씨, 정일당 강씨, 윤지당 임씨 등 수백을 헤아릴 수 있다. 글씨 잘 쓰는 부인으로는 이제현의 손녀 이씨와 강희안의 딸 강씨, 장홍효의 딸 장씨 같은 이들이, 그림 잘 그리던 화가로는 육오당 정경흠의 누이 정씨와 강희맹의 10대 손자며느리 되는 월성 김씨 같은 이들이…. 그러나 그 모든 여성들은 한두 가지에만 능해 이름을 떨쳤을 뿐이다. 오직 한 사람 그야말로 교육가이자 인격자이면서 효녀, 현부인, 학문가, 시인, 서예가, 화가 등을 한몸에 지닌 종합적인 모범 부인이 바로 사임당 신씨인 것이다.”(신구문화사 발행 <한국의 인간상> 5권)


여러 방면에서 당대 최고의 능력 발휘

사임당은 1504년(연산 10년)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명화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용인 이씨 집안의 선비인 이사온의 딸이었다. 어려서부터 외조부와 어머니에게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고 효성이 지극했다. 7살 때 안견의 그림을 본떠 그리는 등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며, 시문·경전·서예·자수 등에도 탁월했다. 19살 때인 1522년 덕수 이씨 원수와 결혼해 모두 4남3녀를 두었다. 그 가운데 셋째아들이 율곡 이이다.

» 신사임당이 그린 <화훼초충도>. 그는 현모양처와 효녀이기 이전에 기본적으로 뛰어난 예술가였다.
신사임당은 48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애를 살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성 예술가이자 이른바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특히 그림에 뛰어나 채색화·수묵화 등 약 40점의 작품이 전해져온다. 그의 그림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숙종대왕, 소세양, 송시열, 권상하, 오세창, 이석 등 많은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쓴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숙종 때 사람 송상기는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내게 일가 한 분이 있어 일찍이 이런 말을 했다. ‘집에 사임당의 풀벌레 그림 한 폭이 있는데, 여름에 마당 가운데로 내다가 볕을 쬐는데 닭이 와서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했다’는 것이다.” 사임당은 글씨 역시 뛰어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시와 문장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사친’(어머니 그리워)이라는 시를 보자.

思親(사친)

千里家山萬里峰 歸心長在夢魂中 (천리가산만리봉 귀심장재몽혼중
寒松亭畔孤輪月 鏡浦臺前一陣風 한송정반고륜월 경포대전일진풍
沙上白鷗恒聚散 海門漁艇任西東 사상백구항취산 해문어정임서동
何時重踏臨瀛路 更着斑衣膝下縫 하시중답임영로 갱착반의슬하봉)

어머니 그리워

산첩첩 내 고향 천리연마는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락모이락
고깃배들 바다 위로 오고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이처럼 신사임당은 여러 방면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후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왜곡하고 부당하게 평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신사임당이기도 하다.

“내가 죽은 뒤 다시 장가들지 마시오”

가장 큰 편견은 그를 전통적인 가치관에 딱 들어맞는 모범적인 여성으로나 보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현모+양처+효녀’ 콤플렉스다. 그러나 여러 기록 등을 종합하면 신사임당은 기본적으로 예술가였다는 점이 좀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현재까지 전하는 시 세편은 모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들은 사실 정통적인 유교 가치관에선 빗겨난 것이다. 결혼한 딸은 친정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이른바 ‘출가외인’의 도덕률과 분명히 거리가 있다. 율곡이 <선비행장>에 남긴 글을 보면 더 확실한 그림이 떠오른다. “어머니께서는 평소에 늘 강릉 친정을 그리며 깊은 밤 사람들이 조용해지면 반드시 눈물을 지으며 우시는 것이었고, 그래서 어느 때는 밤을 꼬박 새우시기도 했다.” 자기억제를 강요받는 양반집 부인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가적 감수성에 충실한 한 인간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는가. 더구나 강릉 친정은 그를 예술가로 교육하고 그의 예술활동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후원하는 ‘예술적 고향’이었던 것이다. 신사임당 집안의 여인 3대는 이 강릉집을 생명의 근원처럼 사랑했으며 그렇게 ‘예술가’가 되어갔다.

» 강릉 오죽헌은 그가 생명의 근원처럼 사랑한 곳이다.(연합)
예술에서뿐이랴. 사임당은 학문적으로도 조선의 남성중심주의를 해박하고 탁월한 논법을 동원해 깨부수고 있다. <동계만록>(東溪漫錄)을 통해 전해져오는 신사임당과 그 남편의 대화 한 토막을 보자.

“내가 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들지 마시오. 우리가 7남매나 두었으니까 더 구할 것이 없지 않소. 그러니 <예기>의 교훈을 어기지 마시오.”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이오?”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에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나라로 갔기 때문이오. 그러나 공자가 그 부인과 동거하지 않았다 뿐이지 아주 나타나게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소.”

“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증자의 부친이 찐 베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베를 잘못 쪄서 부모 공양하는 도리에 어김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보낸 것이오. 그러나 증자도 한번 혼인한 예의를 존중해서 다시 새장가를 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주자의 집안 예법에는 이같은 일이 없소?”

“주자가 47살 때에 부인 유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아직 장가들지 않아 살림을 할 사람이 없었건마는 주자는 다시 장가들지 않았소.”

이런 일도 있다. 일찍이 남편이 영의정 이기의 문하에 가서 노는 것을 보고 이렇게 권한다.

“저 영의정이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를 탐하니 어찌 오래갈 수가 있겠소. 그가 비록 같은 덕수 이씨 문중이요, 당신에게는 오촌 아저씨가 되지만 옳지 못한 분이니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마시오.” 남편이 이 말대로 그 집과 발걸음을 끊은 결과 나중에 정말 아무 화도 입지 않았다. 또한 공부하러 서울길을 떠났다가 세번이나 되돌아오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남편을 독려해 결국 학문에 매진토록 만든 이도 바로 신사임당이다.

‘자아실현형 교육’으로 자녀를 이끌다

이런 예술적·학문적 능력으로 사임당은 이미 살아 있을 때부터 남성중심주의의 조선사회에서도 특출한 인재로 평가받았다.

‘사임당 신화’ 가운데 하나인 자녀교육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을 모두 희생하면서 자녀를 100% 지원하는 ‘자아상실형 교육’을 펴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결과를 내는 ‘자아실현형 교육’으로 자녀들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어머니상보다 더 좋은 ‘살아 있는 교육‘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 결과 셋째아들 이이는 성리학의 대가로서, 사상가로서, 정치가로서 성장한다. 나아가 일본 등 외부의 침략을 대비하는 ‘10만 양병론’을 주장하는가 하면, 서자 차별을 철폐하는 제도를 도입해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 국가 잠재역량을 극대화하자는 탁월한 개혁론도 발의한다. 특히 사임당의 맏딸 매창과 넷째아들 우가 어머니처럼 예술가로 성장한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는 거문고·글씨·시·그림에 뛰어났으며, 매창은 시문과 그림에서 빼어난 재주를 보여 ‘작은 사임당’으로 불렸다.

꿈도 재능도 많았던 신사임당은 그렇게 모든 일마다 최선을 다하며 자아를 실현해나갔다. 그런 혼신의 정열을 쏟은 결과 큰 성과를 거뒀지만, 기력을 다한 그는 48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야 했다.

“유교사상의 도가니 속에서도… 오늘의 사임당이 된 것을 생각해볼 때 만일 그녀가 자유로운 현대적 분위기 속에서 생활했다면 틀림없이 절세의 대가가 됐을 것이다.”(노산 이은상)

 

세계화폐에 새겨진 ‘운동권 여성들’

세계적으로 류관순과 같은 독립운동가나 혁명가를 화폐에 등장시키고 있는 나라는 적지 않다. 운동권 인물이 화폐에서 터부시되는 것은 아닌 셈이다.

»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의 여걸 튜트 낙 디엔. 1만루피아 화폐에 등장한다.
제국주의에서 독립한 나라가 많은 라틴아메리카에 이런 경향이 강하다. 20세기 초 혁명을 겪은 멕시코에서는 급진적 인물들도 화폐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다. 10페소 지폐에는 멕시코혁명 때 농민군 지도자였던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등장한다. 50페소 지폐에는 19세기 초에 활약한 성직자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인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출연한다. 게릴라 투쟁을 벌인 그는 나중에 왕당파에 붙잡혀 파문당한 뒤 처형됐지만, 화폐인물로 부활했다. 아르헨티나의 5페소와 10페소 화폐에는 민족운동지도자인 호세 데 산 마르틴과 마누엘 벨그라노가 각각 등장한다. 역시 베네주엘라의 화폐에는 독립운동가 3명이 잇따라 등장한다. 1천볼리바르 지폐에는 ‘라틴아메리카 해방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은 시몬 볼리바르가, 5천볼리바르에는 역시 민족운동 지도자인 프란시스코 데 마란다가, 1만볼리바르에는 시몬 볼리바르를 도와 역시 민족해방투쟁을 벌인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가 등장한다. 유럽의 헝가리 500포린트 지폐에는 18세기 초반 민족운동지도자인 페렌치 라코스치가 주인공이며, 아이슬란드 500크로나 화폐에도 19세기 후반 민족운동지도자인 욘 시구르드손이 출연한다.

여성으로서는 18세기 초 인도네시아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튜트 낙 디엔이 인도네시아 1만루피아 화폐에 등장한 것이 거의 유일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금 다른 범주인 여권운동가로서는 뉴질랜드의 케이트 세퍼드가 10뉴질랜드달러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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