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전명윤의 아시아 문화 기행

醉月 2009. 10. 15. 08:31

인도 파테푸르 시크리, '짧은 영화' 아름다운 폐허로…

◇광활하게 펼쳐진 성곽구역의 모습.옛 무굴 제국의 수도이자 타지마할로 유명한 아그라(Agra)에서 불과 30㎞, 느리기로 유명한 인도 버스로도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 1571년부터 1585년까지 단 14년 동안 무굴 제국의 수도로서 영화를 누린 파테푸르 시크리(Fatehpur Sikri)는 그렇게 먼지 풀풀 날리는 도로와 함께 다가왔다.
 
 
 

 
◇로열 콤플렉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판치 마할.
겨우 14년? 얼핏 봐도 무척이나 공들여 조성했을 법한 이 도시의 짧은 역사는 많은 이들을 의아하게 한다.

때는 무굴 제국의 전성기를 연 악바르 황제 시절. 엄청난 정복사업으로 무굴을 제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그에게도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제위에 오른 지 13년이 지날 때까지 아들이 없다는 것. 남성 위주의 황실에 이보다 더한 고민은 없었다.

황제는 사람을 풀어 영검하다는 예언자를 수소문한다. 다행히 성자는 수도인 아그라에서 멀지 않은 곳, 바로 오늘날의 파테푸르 시크리에 은거하고 있었다. 성자의 이름은 바로 샤이크 살림 치스티(Shaikh Salim Chisti).

이슬람교의 한 분파인 수피의 성자였던 그는 이미 수많은 기적으로 민중의 신망을 받고 있었다. 제국의 황제는 성자를 만나러 몸소 황량한 들판으로 나간다. 동굴 속에서 은거하던 성자는 황제를 보자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 셋을 펴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악바르는 힌두 왕국의 공주 출신인 아내 조다 바이(Jodha Bhai)에게서 아들을 얻는다. 황제는 뛸 듯이 기뻐하다 못해 무모한 계획을 세운다. 성자 샤이크 살림 치스티가 있는 벌판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해 버린 것이다.

성미 급한 황제는 자신의 궁성 일부가 완성되자 공사 현장으로 거처를 옮겨버린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도시의 수명은 겨우 14년에 불과했다. 완공도 하기 전에 수도는 다시 아그라로 옮겨져 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물 부족이었다. 최소 50만명 이상이 살 도시에 우물이라고는 고작 20여곳뿐이었다고 한다. 
◇파테푸르 시크리의 시장 풍경.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인도에는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황제들이 있었다. 가장 악명 높은 사람 중 하나는 기아스 우드 딘 투글라크(Gyas ud din Tughlaq). 그는 델리 시내에 자신을 욕하는 방이 붙었단 이유로 수도 이전을 결정해 무려 10만명의 국민을 강제로 끌고 1100㎞나 떨어진 남부 도시로 이동한다. 이 속좁은 황제 또한 새 도시에서 머문 기간은 겨우 8년 남짓. 애꿎은 국민들은 다시 1100㎞를 돌아 델리로 돌아가야 했고, 40만명으로 출발한 수도 이전 원정대 중 살아남은 사람은 10만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파테푸르 시크리는 이후 철저하게 잊혀졌다. 아니 인도인들은 일부러 방치했다. 오늘날 외국인들은 인도인의 즉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파테푸르 시크리를 꼽는다. 도시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작은 마을에 지금은 500호 안팎의 집들이 성곽 아래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해발 40m 작은 언덕 위의 마을은 영검한 성자 샤이크 살림 치스티의 무덤이 있는 모스크 자미 마스지드(Jami Masjid), 황제의 궁성이 모여 있는 로열 콤플렉스(Royal Complex), 그리고 방치된 성곽구역(Ruins City) 등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순백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성자의 무덤에는 수많은 여인네들이 끊임없이 몰려와 기도를 드린다. 우리네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다. 아들만 가문을 이을 수 있는 인도 사회에서 아들이 없는 여인네들은 온 정성을 다해 성자에게 아들을 점지해 줄 것을 기원하고 있다. 종교에 관대한 인도 사회의 특성상, 이슬람 모스크에 힌두교를 믿는 여인들의 기원 행렬이 더 많다는 것이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이다.

자미 마스지드 동문을 통해 나가 직진하면 로열 콤플렉스.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성곽 구역이 나온다. 파테푸르 시크리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는 로열 콤플렉스는 ‘돈값’을 한다. 모든 궁전 건물들이 깔끔하게 보수되어 있어 불과 몇 년 전까지 궁전으로 쓰이던 곳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400명에 달했다는 악바르 황제의 수많은 부인 중 첫째아들을 낳은 조다 바이의 궁전이 가장 큰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샤이크 살림 치스티의 무덤.
로열 콤플렉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은 황제의 후실과 시녀들만 머물렀다는 판치 마할(Panch Mahal)이다. 칸막이가 쳐진 작은 방이 무려 350개에 달했다고 한다. 악바르 황제가 시녀들을 말로 삼아 인도식 장기 놀이를 즐겼다는 파치시 정원(Pachisi Courtyard)도 기묘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파테푸르 시크리 최고의 구역을 꼽으라면 누구나 방치된 성곽구역을 선택한다. 로열 콤플렉스가 복원을 통해 원형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성곽구역은 웅장하게 부서진 남성적 잔영이 흩뿌려져 있다. 많은 유적들이 범하는 오류는 아쉽게나마 원래의 모습을 복원하려는 것이다. 선진국이라면 첨단 기술을 총 동원해 원형에 가깝게 만들 수 있으나, 그게 아니라면 처참한 콘트리트 덩어리이거나 시멘트 흉물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성곽구역 최고의 미덕은 돌과 돌 사이 그리고 그 틈에서 피어나는 들꽃과 잡초들의 끈질긴 생명력이 폐허도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반파된 성벽의 끝자락 무너져 내린 망루의 기단 위에서 굽어보는, 끝간 데 없이 펼쳐진 인도 북부의 평원과 농촌 마을의 풍경. 이보다 더 완벽한 그림이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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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에서 인도의 수도 델리까지는 비행기에 따라 8시간30분∼16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델리에서 파테푸르 시크리로 가는 직행 교통편은 없다. 타지마할로 유명한 아그라까지 간 뒤 다시 파테푸르 시크리로 이동해야 한다. 델리∼아그라는 기차에 따라 2∼4시간, 아그라∼파테푸르 시크리는 버스로 1시간이 소요된다.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시장통이 이어지고, 언덕을 바라보면 자미 마스지드의 정문인 블란드 다와자(Buland Dawaza)의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미 마스지드→로열 콤플렉스→성곽구역의 순서로 둘러보면 된다. 로열 콤플렉스의 입장료는 5달러. 파테푸르 시크리에는 딱 네 곳의 숙소가 있다.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에 거점을 두고 당일치기로 방문하는 것이 좋다.

중국 자오싱, 순박한 그 사람들이 그립다

◇자오싱 마을 고루에서 펼쳐지는 동네 아낙들의 춤사위.“맑은 날이 3일 이상 이어지지 않고, 땅에는 3리의 평지가 없으며, 그곳 사람들은 3전의 은자도 없다.”(天無三日晴, 地無三里平, 人無三分銀)

구이저우(貴州)성. 한국어로 귀주라고 읽히는 이곳은 맑은 날도, 평지도, 돈도 없는 탓에 뭐든지 귀해서 지명마저 변해 버린 곳이다. 비교적 대도시 간 연결은 쉬운 중국이지만, 구이저우의 도시만큼은 달랐다. 현재 내가 있는 곳에서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 성도인 구이양(貴陽)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에어컨은커녕 승차감도 보장할 수 없는 봉고차만 한 작은 버스를 타고 비포장길을 20시간 이상 내달려야 했다.

몇 년이나 굴렸을까. 이리 박고 저리 쥐어 터졌음이 분명한 찌그러진 차체에 올랐다. 8월의 숨막힐 듯한 더위만큼이나 힘든 것은 덜컹거리는 차체였다. 비포장, 그것도 곳곳에 웅덩이가 파인 도로에서 버스는 요동을 쳤고, 내 몸은 그에 따라 이리저리 기우뚱거리며 때로는 점프해 나지막한 천장에 머리를 박곤 했다.

차가 출발하고 4시간쯤 지나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차림새가 깔끔해서 홍콩이나 싱가포르의 관광객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던 뒷자리의 아가씨가 말을 걸었다. 30분 후면 자오싱(肇興)에 도착하는데, 그곳에서 내일부터 축제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줬다. 자오싱이라는 마을은 한족이 아닌 ‘둥족’이라는 소수민족이 사는 작은 마을이라는 말도 덧붙여 줬다.

자오싱 사람들은 오래된 마을과 독특한 소수민족 문화를 매개로 광시(廣西)의 양숴(陽朔), 윈난(雲南)의 다리(大理)나 리장(麗江)처럼 자신들의 마을을 관광지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건 볕도, 땅도, 돈도 없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축제는 객지생활을 몇 년 한 탓에 그나마 깬 축에 끼는 몇몇 마을 젊은이들이 어떻게든 마을을 알리고 싶어 마련한 행사였다. 나는 졸지에 그 마을의 축제를 참관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유일한 외국인이 되었다.

다음날 10시, 마을 초입이 축제 장소였다. 하지만 축제는 시작되지 않았다. 저 멀리 구이양에서 참석하기로 한 높은 분들이 도착하지 않은 탓이다. 12시나 되었을 무렵 드디어 유지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미리 전화라도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갑작스러운 그들의 등장에 사람들은 마치 호떡집에 불이라도 난 듯 이리저리 허둥댄다. 이런 상황 자체를 즐기는 나는 킥킥거리지만, 제대로 형식을 갖춰 자신을 환영해 주길 바랐던 높으신 분들은 영 표정이 좋지 않다.
◇손님을 환영하는 노래를 부르는 자오싱의 처자들.
축제는 자오싱의 관광업이 성장해 두루두루 잘살았으면 한다는 내용을 30분으로 장황하게 늘린 높으신 분의 축사로 시작되었다. 중학생쯤 될 법한 여자 아이들이 종종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다 나에게 들켰다. 내가 먼저 씨익 웃어주면 같이 웃는데, 딱 그맘때 조회시간에 끌려가 장난 거는 기분이다.

지루한 축사가 끝나자 축제는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전통 복장을 하고 나온 여학생들은 북을 치기 시작했고, 또 다른 전통 복장의 아가씨들은 춤을 췄다. 급조된 축제라 프로그램이 있을 리 만무했다. 모든 마을 사람이 거리로 나온 듯했고, 마을광장격인 고루(鼓樓) 앞에서는 장정들이 노동요를 부르며 땅을 밟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이 동시에 벌어지니, 아무리 작은 마을의 볼거리 없는 축제라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다.

본의 아니게 마을 유일의 외국인이 된 나는 모든 장소에 끌려 다니며 이 축제야말로 진정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는 말을 입에 침을 바르며 반복해야 했다.

사실 이방인인 나로서는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이 엉성함이 좋았고, 공산당 매스게임같이 절도 있는 무언가에 가치를 둘 것 같은 경찰국장의 내내 굳은 얼굴에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외지 관람객 10명, 축제 인원 4000명인 이 기묘한 축제는 저녁 나절 트럭에 초대형 천막을 싣고 와 무대를 펼친 유랑극단의 공연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들은 ‘소림사 무술단’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논과 목조 가옥이 어우러진 자오싱 마을의 풍경.
며칠 동안 고작 10명을 위해 축제의 볼거리이기를 자처했던 순박한 사람들이 이제야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쉬고 있다. 내 눈에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무술쇼를 그들은 침을 삼키고, 주먹을 꽉 쥔 채 지켜보고 있다. 두근두근 달음질치는 그들의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릴 지경이다.

문명이 싫어 자신의 나라를 떠난 여행자는 저들의 원래 모습을 사랑하고, 저들은 여행자들처럼 안락하게 여행 다닐 수 있는 형편을 원한다. 서로 다른 목적이 만들어낸 접점은 언제나 비극으로 끝난다. 그들이 변치 않길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지독한 이기심이라는 걸 이성적으로는 알지만, 그래도 아쉽다. 그래서 순박한 사람들은 만나면 오히려 슬프다.

언젠가 이들의 바람이 성사될 무렵에는 저런 얼굴, 저런 표정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저들이 그토록 바라는 양숴가 그랬고, 다리와 리장이 그랬다. 그러고 보니 이 별 볼 일 없는 축제가 은근히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남는 것 같다. 자오싱은 지금쯤 어떻게 변해 있을까? 너덜너덜한 천막을 지고 다니던 소림사 무술단은 지금도 어디선가 벽돌을 깨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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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저우성으로 직접 연결되는 항공편은 없다. 자오싱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은 구이린 공항으로, 매주 2편의 항공기가 인천공항과 연결된다. 구이린∼구이양 간은 국내선 항공을, 구이양∼카이리∼이싱∼자오싱 구간은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자오싱에는 2008년 현재 8곳의 숙소가 있다. 모두 전통 목조가옥으로, 운치 또한 일품이다. 숙소에서 식당을 겸하고 있는데, 둥족의 전통 요리는 물론 볶음밥 같은 간편식도 맛볼 수 있다. 마을을 둘러보는 데는 길게 잡아도 2시간이면 충분하다.

인도 마날리 '꽃과 설산의 아찔한 유혹'

◇마날리의 봄. 현란한 붉은색이 인상적이다.3월 하순이면 한국은 꽃샘추위가 한참 기승을 부리지만, 인도는 이때부터 펄펄 끓기 시작하며, 길고 긴 그해의 폭염을 알린다. 3월 초부터 매일 섭씨 1도씩 올라가는 한낮의 기온은 이미 40도에 육박하며 체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오랜 여행자를 쉬이 지치게 만들었다.

만약 한국에 머물고 있다면 그저 에어컨 바람이나 쐬며 무더위를 견디겠지만, 이곳은 남한의 33배나 되는 거대한 대륙 인도다. 평원 지대가 최고 48도까지 치솟으며 무더위 신기록을 경신할 때, 북부의 산간지방은 25도 안팎의 시원한 날씨를 자랑한다. 바로 히말라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흔히 히말라야라고 하면 네팔을 떠올리는데, 네팔은 단지 세계 최고봉이 많이 모여있을 뿐, 히말라야 산맥 전체로 본다면 인도 쪽에 더 넓게 분포되어 있다.

히말라야(Himalaya).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눈(Hima)의 거처(Alaya)’라는 뜻을 가진 세계의 지붕. 바로 그 히말라야의 초입인 히마찰 프라데시(Himachal Pradesh)주의 마날리라는 마을로 여행을 떠나고 있다.

찰(Chal)은 산스크리트로 언덕이라는 뜻이다. 즉 눈의 언덕쯤으로 해석되는데, 고대 인도인들이 보기에 3000m쯤은 언덕에 불과했다.

험준한 산지인 탓에 이렇다 할 공항도 없는 이곳. 절벽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놓인 2차선 차도 구간에서의 8시간을 포함해 총 16시간이나 버스로 달려야 한다. 전날 오후 6시 델리를 떠난 버스는 다음날 오전 10시나 돼야 마날리에 도착한다. 지겨울 법한 이 여행의 백미는 아침이었다. 불편한 좌석 탓에 밤새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지쳐갈 때쯤 여명이 밝아오고 버스 커튼 사이로 비치는 아침 햇살과 함께 거대한 설산이 여행자들의 눈에 들어온다.

넓게 펼쳐진 계곡, 벚꽃과 살구꽃이 펼치는 점묘화 같은 아름다움. 무엇보다 영롱한 아침 햇살을 반사시키며 마음을 홀리는 설산까지. 밤새 겪었던 처절했던 고통은 단 한순간, 하나의 풍경 속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다.
◇마날리 곳곳에는 우리네 불탑과 비슷한 작은 힌두사원들이 모셔져 있다.
인도의 마을, 계곡 하나하나에 힌두교 신화가 없는 곳이 없지만, 마날리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신화 속 무대이기도 하다. 아주 오랜 옛날. 인도의 평원에 살던 마누라는 사람이 있었단다. 그는 어느 날 말하는 물고기를 잡게 된다. 물고기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죽이지 말라고 마누에게 빌었다. 마누는 결국 물고기를 키우다, 더 이상 키울 수 없을 정도로 물고기가 커지자 강에 놓아준다. 물고기는 마누를 떠나며, 곧 세상에 홍수가 닥칠 예정이니 커다란 배를 만들어 동물의 새끼와 식물의 종자를 보존하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배가 완성될 즈음 진짜 홍수가 발생한다. 마누의 배는 약 40일간 망망대해를 방황하다 지금 말하는 이 땅. 마날리 산 중턱에 정박한다. 성서에 나오는 대홍수 이야기와 비슷한 이 신화는 한때 수많은 비교종교학 학자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트렸다고 한다.

마날리라는 말은 마누의 집이라는 의미다.

그저 인도의 산간 마을로 일부 열정적인 순례자들의 땅이었던 마날리가 휴양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40여년 전이다. 베트남전에 대한 대규모 반전 운동, 프랑스의 68혁명, 일본의 안보투쟁 등 1960년대 말을 뜨겁게 달궜던 변혁의 기운이 사그라지며 사랑과 미소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히피들이 등장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히피들은 전 세계, 특히 아시아 일대를 유랑하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했고, 여행지로서의 인도가 발견되었다.

히피들은 인도 전역을 유랑하며 말 그대로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풍광 좋은 관광지를 개발해 냈다. 북부의 마날리, 남부의 고아 해변, 그리고 서부의 푸슈카르까지….

마날리의 자유분방함은 4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히피들이 들어와 하룻밤 유숙을 하거나 농가의 방을 빌려 지내던 오래된 집들은 이제는 게스트 하우스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전원풍으로 한국의 펜션을 방불케 하는 좋은 곳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전형적인 농가의 모습을 갖춘 채, 1층은 외양간으로 2층에만 객실을 들인 곳도 있다. 여름이면 외양간 특유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 나무를 얼기설기 조립해 만든 삐거덕거리는 오래된 느낌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머문다. 
◇설산을 감싸안은 마날리 마을의 풍경.
마을 초입을 가득 메운 거대한 삼나무 숲은 북구 노르웨이의 신화 속 풍경을 연상시키지만, 시바신을 모시는 사원의 사제들은 향을 피워올리며 이곳이 인도임을 강조한다.

인도인들에게 마날리는 사과 특산지다. 이곳에서는 푸석거리는, 목이 멜 정도로 물기가 없는 인도사과를 맛볼 수 있다. 사실 마날리에서 사과는, 맛보다는 풍경이다. 가을철 나무마다 점점이 박혀 있는 붉은색의 묘한 유혹은 여행자로 하여금 길을 떠나게끔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푸른 하늘, 완벽한 설산, 거인과도 같은 삼나무 숲에서 듣는 힌두교의 웅장한 대홍수 전설. 이 가을. 장마가 끝난 인도의 하늘은 어디나 청명하기 그지없다. 마날리의 숲길을 걸으며 사과 한입 베어 먹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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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날리로 들어가는 관문 도시는 델리다. 인도 국내선 항공을 타면 마날리에서 3시간 떨어진 쿨루(Kullu)라는 마을까지 들어갈 수 있다. 이곳에서 지프를 대절해 마날리로 갈 수 있다. 문제는 이 비행기가 60인승가량의 초소형 기종이라 사람들이 탑승을 꺼린다는 사실. 이 때문에 많은 여행자들은 델리에서 버스를 이용한다. 무려 16시간의 긴 여정. 2006년부터 냉난방이 되는 볼보(Volvo)버스가 투입돼 그나마 편리해졌다. 마날리의 특산품은 송어와 사과주스다. 송어는 빙하가 녹은 비아스 강에서 손으로 잡는데. 최근에는 수요가 급증하며 양식 송어가 점점 자연산을 대체하고 있다. 1983년 아시아 농업 특산품 전람회에서 동메달을 땄다는 사과주스는 이 일대의 자랑거리. 한국에서 사 먹는 것과 같은 노르스름한 투명의 느낌이 아니라, 집에서 갈았을 때 나타나는 탁한 느낌이다. 한 병에 700원가량인데 묘한 중독성이 있어 자꾸 찾게 된다.

베이징 만리장성 금산령∼사마대 구간 트레킹, 자박자박 밟으며 오른다… 모진 풍파 견딘 이천년 세월 속으로

◇금산령 계단을 오르내릴땐 낙석을 조심해야 한다.새벽 5시. 연례행사보다도 드문 일이다. 이 꼭두새벽에 눈을 뜬 것은. 창문 밖 세상을 보니 아직 세상은 잠들어 있다. 이곳은 베이징. 그것도 시끄럽기로 유명한 베이징역 앞의 작은 숙소다.

오늘은 벼르고 별렸으나 이미 세 차례나 바람을 맞은 당일치기 짧은 여행을 떠나려 한다. 만리장성 트레킹. 베이징을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만리장성 구경을 이제야 가느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베이징 근교의 만리장성은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팔달령을 비롯해 금산령, 모전욕, 거용관, 사마대 등 많은 코스가 있다. 팔달령이야 남녀노소 누구나 찾을 수 있고 심지어 자동차까지 달릴 수 있는 넓이를 자랑하지만, 그 외의 코스는 그리 만만한 동네가 아니다. 휘황찬란한 대로변에서 안쪽으로 한 블록만 들어가면 급격히 1960년대 분위기로 바뀌어 버리는 중국에서 외국인이 찾지 않는 구간을 돈을 들여 보수했을 리가 만무하다.

심지어 아직까지 대중 교통수단 조차 정비되지 않아서, 히치하이킹을 하거나 현지 마을 사람들이 타는 ‘빵차’라는 일종의 합승택시를 이용해야만 한다. 서너 번은 말해야 알아 듣게 만드는 ‘나홀로 중국어’를 구사하는 나에게 현지인, 그것도 시골 사람들과 흥정을 할 일이 생긴다는 것은 결코 편안한 일은 아니다.

금산령 장성. 만리장성의 시작인 산해관에서 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까지 모두 둘러본 터라,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숙제하는 마음으로 왔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상상 이상이다.

아침 햇살 때문에 더 그랬을까? 황토 고원의 대지를 휘감으며 전진하는 장성의 매혹적인 곡선은 감동적이었다. 갑자기 시간을 뛰어넘어 고대에 도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 그리고 이내 혼자라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잠시 잠깐 상상이 현실을 압도했는데, 나는 진짜로 병사들의 함성과 불타는 금산령 장성을 보았다.
◇금산령 구간 만리장성의 장엄한 모습.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오늘 일정을 취소하고 하루종일 이곳에 앉아 있다 하산할까 하는 충동도 일었다. 하지만 그 놈의 역마살. 여행이 직업이 된 이유는 한곳에 진득하게 앉아 있는 재주가 없어서다. 그냥 묵묵히 걷다보면 더 나은 곳이 나온다는 막연한 기대는 언제나 나에게 길을 재촉한다.

길은 험했다. 아니 험한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직립보행한다는 사실을 잊게 해 줄 만큼 계단은 가팔랐고, 어떤 곳은 발을 디딜 만한 곳도 없어 ‘네발 보행’을 해야만 했다. 외국인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바로 이런 거친 길 때문이다. 이것이 장성의 실제 모습이었을 것이다. 현대 중국의 아버지인 마오쩌둥이 남아로 태어나 장성에 한번 오르지 못한다면 대장부가 아니라고 했다는데, 사실 장성은 우리가 보는 것처럼 멋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이렇게 길게 쌓은 성은 방어 용도였고, 이는 장성 너머에 강력한 세력이 존재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중국 역사에서 장성이 중요했던 왕조는 늘 약소국이었다. 전국 시대를 통일했지만 기반도 다지기 전에 멸망해 버린 진(秦)이나, 왜구 하나 변변히 막지 못해 해안지대 모든 주민을 소개한 명(明)이 그랬다.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은 모두 유실되어 버렸고, 우리가 밟고 있는 모든 장성 구간은 명나라 때 만들어졌다. 명의 뒤를 이은 청나라는 장성 바깥까지 판도를 넓혔던 나라니 장성이 중요하지 않았을 터. 때문에 장성의 적은 바깥의 적군이 아니라 비바람과 세월의 때였다. 아니 그들은 장성을 천천히 갉아 먹었으니 진정한 장성의 적은 만리장성 안쪽에 사는 사람들이었을 게다.

만리장성은 지역에 따라 건설한 자재가 달랐다. 베이징 일대는 벽돌이지만, 서쪽 실크로드 쪽은 짚을 섞은 흙벽돌이고, 그냥 흙반죽을 올려버린 곳도 있다. 장성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던 시절에 장성 안쪽에서 살던 사람들은 벽돌을 파내 자기 집을 짓고, 짚이 섞인 흙벽돌을 부셔 비료로 사용했다. 요즘 들어서는 장성의 골동품적 가치 때문에 벽돌을 빼가는 사람이 점점 늘어난다고 하니, 군데군데 길이 끊어지고, 때로는 깜깜 절벽과 조우하는 일은 금산령 장성이 별나서가 아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완벽한 돌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만나는 지점에 돈대(墩臺)라는 건물을 세워 그나마 지친 다리를 쉬게 했고, 이 돈대 20여개를 지나면 완만한 내리막이 되며 금산령 장성은 끝이 나고, 사마대 구간으로 접어든다. 금산령이 둥글게 반원을 그리며 이어지는 코스라면, 사마대는 보다 더 직선적이다.

지난 4∼5년간, 그나마 여행자들의 관심을 받아온 탓인지 금산령보다는 훨씬 정돈된 길을 자랑하고 있었다. 심지어 로프를 타고 장성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드는 플라잉 폭스(Flying Fox)라는 탈거리를 비롯해, 자그마한 유원지를 꾸며 유람선도 운영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들며 이곳 또한 불편했던 소박함이 영악한 편리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금산령에서 느꼈던 감흥이 싸늘하게 식어간다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개발이 진행 중이라는 말은 언제나 김을 빠지게 한다.

내가 본 곳을 남도 보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여행이 너무 쉬워지면 감동이 옅어지기 때문이다. 죽어라 내달려 하루에 하나만 보는 것은 비효율이지만, 하루에 열댓 군데씩 찍고 와서 어디가 어딘지조차 모르는 불경을 저지르지는 않게 한다. 이런 편안함이 싫어서 오지를 찾는 여행자는 더 떠돌게 된다. 다시 갔을 때, 왜 그때의 향기는 사라져 버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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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방법이 복잡하다. 베이징 동직문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청더(承德)행 버스를 타고 금산령 장성 입구(金山嶺口)에서 세워 달라고 말해야 한다. 버스에서 내리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요즘은 경운기들이 금산령 입구에 서 있기도 한다. 만약 경운기들이 없다면 히치하이킹을 해야 한다. 금산령 장성 입구에서 금산령 장성까지는 6㎞나 떨어져 있다. 금산령∼사마대 구간은 도보로 약 6∼8시간가량 소요된다. 때문에 아침 일찍 나서지 않으면 오도가도 못하는 참사가 벌어진다. 다행히 사마대 장성 쪽에 유스 호스텔이 있어 비상시에 이용할 수 있다. 이 구간에 식당은 전혀 없다. 초콜릿 같은 고열량 음식과 충분한 식수는 필수품. 길이 미끄러우니 등산화도 준비해야 한다. 1년에 1∼2명씩 추락사 하는 곳이니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허난성 숭산 소림사, 소림고수 기대했던 무림지존… 값싼 상혼과 관광객들만 붐벼

◇중국 숭산 오유봉 능선에 세워진 달마좌상.강호(江湖). 무협지에나 등장하는 이 단어는 여행을 할수록 실감나는 단어 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중국여행은 어떤 면에서 진짜 무협지 세계와도 같다. 횡단보도를 무시한 채, 파란불이건 빨간불이건 액셀러레이터밖에 밟을 줄 모르는 중국의 운전사들은 무협지속 표창처럼 도로를 날아다닌다. 맞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여행자는 어느새 경공술의 고수가 되어, 허공답보의 비술로 도로를 건너다닌다.

진정 중국이 무림이라고 느꼈던 결정적인 계기는, 사고현장에서였다. 자전거는 건널목에 있었고, 차는 여전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결과는 박살 난 자전거와 피 흘리며 도로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자전거 주인. 루쉰의 소설 약(藥)에 나오는 사형장의 풍경과도 같이, 모든 행인에게 이 광경은 그저 구경거리였다. 심지어 낄낄거리는 사람마저 있었고, 5분쯤 쓰러져 있던 그는 이마에 흐르는 피를 스윽 닦고는 박살 난 자전거를 질질 끌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당시 중국 여행 초보였던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아… 정말 이곳에서는 스스로, 잘, 살아남아야 하는구나.’

갑자기 이른 아침 공원 곳곳에서 태극권을 연마하는 중국인들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술을 갈고 닦는 사람으로 보였다. 앞서 말한 경공술은 기본, 줄을 결코 서지 않기 위해 보법(步法)을 익혀 새치기를 하고, 코딱지를 파 탄지신통(彈指神通)을 펼쳤고, 합마공(蛤魔功)으로 배를 부풀려 목구멍에 기를 모은 후 가래를 마구 뱉어냈다. 

소림사나 가 볼까? 중국이 무림, 달인의 세계였음을 깨닫는 순간 나는 불현듯 소림사가 가고 싶어졌다.

깊은 산속, 심산유곡에 있을 것 같았던 무림의 지존은 의외로 가까이 있었다. 당나라 시절 낙양성으로 이름을 날리던 고도 뤄양(落陽)에서 60㎞밖에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숭산 소림사의 시작은 495년이지만, 소림사가 알려진 결정적인 계기는 527년 한 인도인의 방문 때문이다. 남인도 깐치뿌람(Kanchipuram) 출신인 그의 중국행은 당시 중국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당시의 황제는 불교 교단에 엄청난 시주를 행하던 사람이었다. 황제는 불교의 본고장에서 온 그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공덕이 얼마나 되냐고 물었다. 그는 단호했다. 없습니다(無)! 이 일로 인도인은 황제를 피해 소림사까지 흘러들어와 9년간 벽을 보고 수행한다. 그 인도인의 이름이 바로 달마. 선불교의 초조(初祖)이자, 소림무술의 창시자다. 하지만 소림사의 역사는 선불교의 향기보다는 피 냄새가 더 진동했다. 특히 당나라 성립기, 후일 당 태종이 되는 이세민의 사병 구실을 해내며 절 자체가 개국공신의 반열에 오른다. 임금에게 가지도 말라던 부다의 가르침은, 황실을 호위하고 민중을 탄압하는 종교권력이 되어버린 셈이다. 무협지를 보다 보면 소위 명문 정파라고 불리는 조직, 이를테면 소림사나 무당파가 나중에 알고 보니 진짜 악당이라는 설정이 자주 나오는데, 일정 부분 역사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소림사 공식 쿠키라는 이름으로 팔리는 과자.
어쨌건 소림사는 오늘날까지도 거대했다. 평일이었지만 관광 버스는 단체 여행객들을 끊임없이 토해냈다. 사원 입구부터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은 소림사 무술 쇼를 공연하는 소림사 직영의 극장이었다. 의외로 순진했던 나는 큰 기대를 하고 쇼를 봤지만 역시나 쇼 곱하기 쇼는 쇼일 뿐, 할리우드 특수효과에 눈높이가 맞춰진 탓인지 솔직히 시시했다. 소림사의 핵심구역인 대웅전과 108나한당, 고승들의 사리탑이 장엄하게 펼쳐진 탑림까지 봤지만, 첫사랑만큼 설레게 하는 소림사는 다가오지 않았다.

하긴… 이렇게 시끄러운데 고수들이 수행을 할 수나 있겠어?

인파에 밀려 9년 면벽을 한 달마의 그림자가 스며있다는 면벽영석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무술 수행 탓에 바닥이 움푹 꺼졌다는 천불전의 바닥도 스치듯 지나쳤을 뿐이다. 자의 반 타의 반, 소림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입설정으로 향했다. 어느 겨울날, 9년 면벽을 하던 달마에게 누군가 찾아온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장수였다. 적군만 만나면 쳐부술 수 있었던 명장은 마음 한구석의 불안함만큼은 무찌르지 못했다. 그는 황제의 면전에서 바른말을 하고 은거한다는 인도 승려라면 그의 불안함을 해결해 주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달마를 찾아온 것이다.

달마는 너를 불안하게 하는 그 마음을 꺼내라 했고, 장수는 그 마음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없습니다(無)! 고개를 돌린 달마. 후일 선불교의 이조(二朝)가 되는 혜가의 깨달음. 입설정은 바로 그 사건이 벌어졌던 곳이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단체 관광객들은 산 아래 소림사만 덜렁 본 채, 부리나케 다른 곳으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찾는 이 없는 이 쓸쓸한 작은 정자에서 두 번의 ‘없을 무’(無)라는 말로 선불교가 탄생했다. 모두가 잊어버린 사실. 산 아래 관광객도, 인파에 떠밀려와 새삼스레 선불교의 탄생지를 생각해내는 나조차도….

달마는 수행만 하다 보면 몸이 약해질 것을 막기 위해 무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렇게 따진다면 소림사에서 무술은 수행을 위한 방편이었다. 재미있게도 사람들은 언제나 목적보다는 방편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방편에 집착하다 타락하고, 변해가고, 원래 생각했던 목적을 잊어버린다. 누구도 ‘소림사=무술’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소림사는 그를 있게 했던 달마, 그리고 선불교와 결별하고 있었다. 입설정에서 때 아닌 화두를 잡고 생각을 따라가는 사이, 어느새 1600년 전의 그날 밤처럼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그해의 첫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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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이 허난(河南)성의 성도인 정저우(鄭州)까지 매주 4회 운항한다. 정저우에서 소림사가 있는 덩펑(登封)까지 버스가 연결된다. 덩펑 버스 터미널에서 하차하면 소림사까지 연결하는 마을 버스들이 줄을 지어 대기하고 있다. 대부분의 여행자가 정저우나 뤄양에서 소림사까지 당일치기로 다녀온다. 하지만 입설정 등 소림사 외관을 보려면 1박을 해야 한다. 덩펑시에 약 8곳, 소림사에 2곳의 숙소가 있다. 상대적으로 편안한 숙소를 찾는다면 소림사에서 운영하는 숙소에 머무는 것이 좋다. 소림사와 당나라의 수도였던 뤄양, 그리고 북송의 수도였던 카이펑(開封)까지 연계해서 관광할 수 있다.

인도 성지순례체험, 맨발의 성지순례 행렬…몸으로 푸는 고행의 유희

◇부다가 사망한 땅 쿠시나가르에 있는 열반당. 한떨기 꽃이 부다를 기리고 있다.오늘날이야 여행이 달콤한 휴식이자 재충전의 기회로서 활용된다지만 100년 전으로만 돌아가도 여행은 사실 고행의 연속이었다.

개중에는 일확천금을 얻기 위해 아시아로 향하던 무역선도 있었고, 국가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대선단을 꾸린 중국의 함대도 있었다. 어떤 여행은 정복을 위한 사전시찰 목적으로 이뤄지기도 했으니, 어쩌면 당시 여행의 가장 큰 계기는 욕망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욕망의 정반대편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적 열정이 여행을 부추기는 경우도 있었다. 이른바 성지순례라는 이름의 여행이 그것이다.

신들의 땅, 아니 신들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성지순례는 고행의 연속이었고, 어떤 면에서 성지순례는 일정 부분의 고통이 수반되어야 의미가 있다고 믿어졌다. 인도로 갔던 중국의 현장이나 신라출신 승려인 혜초의 여행길에 가장 가까운 친구는 죽음이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성지로 향하는 사람들.
그들은 앞선 여행자들의 죽음의 흔적인 해골을 이정표 삼아 사막을 횡단했고, 사막의 모래바람 소리를 길을 가다 죽은 사람들의 울음소리로 묘사했다. 세월이 흘러 도로가 뚫리고 기차가 다녀 여행 다니기가 편해졌지만, 여전히 성지순례는 고행이어야 한다는 명제에 충실한 채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심지어 성지로 연결하는 도로 건설 그 자체를 반대했다. 고행이 없는 성지순례는 그저 여행일 뿐 어떠한 종교적 감흥조차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꽤 많은 인도인들은 ‘맨발의 청춘’이 되어 인도의 산야를 느릿느릿 걸어 성지에 도착한다. 현대문명의 이기를 결코 포기할 마음이 없는 나는 성지를 향해 끝없이 이어진 맨발의 행렬을 보고 꽤나 충격을 받았다. 
◇티베트 불교 성지에는 언제나 오색의 깃발이 휘날린다.
당시 나는 그저 불편함만을 온 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직각으로 세워진 인도 버스의자의 딱딱함, 느려터진 버스, 끊임없이 올라타는 인도인들과 그들의 몸에서 나는 낯선 채취로 인해 그저 힘이 들기만 한 길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순례행렬 속으로 뛰어들었다. 묻지 않고는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압 까하세 까하헤?(당신은 어디서 왔나?)

메 오리샤 쎄 아야훙.(나는 인도 동부 오리샤에서 왔다.)

압 오리샤쎄 끼뜨나 마이네 메 야하 아예헤? 압 칼리 페달세 아예헤?(오리샤에서 대체 몇 달이 걸린 거야? 정말 그 길을 걸어서만 온 건가?)

도스티, 메 야하 뿌라 짜르바르 아야차. 짜르 마이네 락따헤. 메 야하 빤치딘 러훙가. 피르 우스께 밧, 메 와뻐스 자훙가.(친구, 나는 이 길을 벌써 네 번이나 걸어서 왔다. 여기까지 4개월이 걸렸고, 나는 이곳에서 5일간 신과 만날 거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거야.)

그의 언어가 날아와 내 입을 막았다. 나는 한동안 할 말을 잃었고 그러지 않아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종교인들의 축제 속에서 더더욱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남아 그들의 열기 속에서 겉돌기만 했다. 그들과 나의 감정선 속에는 막 같은 것이 있어 둘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성지순례를 해본 적이 없다. 성지를 가본 적은 있지만 그것은 결코 순례의 형식을 띠지 못했다. 나는 지금껏 일로서 성지를 방문했고, 일이기에 객관적으로 그저 관찰했을 뿐 결코 사람의 마음속으로 뛰어들지는 못했었다.

그간 평탄했던 여행은 운이 좋았던 것일까, 성지순례라는 목적을 두는 순간 여행은 꼬이기 시작했다. 성지로 들어가기 위한 첫 기착지 파트나(Patna)에서 나는 뜬금없는 친이슬람 시위대를 만났다. 9·11직후였던 당시 인도는 뭔가 미국에서 벌어진 비극을 고소해하는 느낌이 완연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인도의 이슬람교인들은 공공연히 친 오사마 빈 라덴 시위를 벌였고, 나는 그 시위행렬을 보고야 말았다.

직업의식이 발동하는 순간, 나는 캠코더를 들고 시위행렬을 찍었고, 낫과 몽둥이를 든 시위대는 외국인인 나에게 관심을 표현하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나는 시위대에 에워싸였다. 이 상황에서 이들을 힘으로 밀고 포위망을 뚫겠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내 선택은 단순했다.

오사마 빈 라덴 진다밧!!(오사마 빈 라덴이여. 영원하라!!)

나는 그들의 구호를 따라하며 잠시 시위대의 일부가 되었고, 시위대의 대장으로 보이는 이와 인사까지 하고서야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성지순례의 첫 도시에서 나는 종교 간 충돌이라는 또 다른 의미의 종교적 열정을 목격해 버린 셈이다. 한숨 돌렸을 때쯤, 내 머릿속에는 앞으로 벌어질 이 여행이 꽤나 다이나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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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 성지순례를 목적으로 인도를 방문한다면 그 이유는 딱 한 가지, 불교 성지를 찾기 위해서다. 부다가 태어난 곳, 깨달은 곳, 첫 설법을 한 곳, 입적한 곳을 4대성지라고 하고, 여기에 주요 행적지 4곳을 더한 8대성지가 불교성지 순례의 핵심지역이다. 10세기 이후 불교가 인도에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 탓에 불교 성지라는 곳들은 척박하기 짝이 없고 치안도 불안한 지역이 많아 개별 여행은 여행경험이 많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인도관광청과 철도청이 연합해 만든 공기업 인도철도관광공사(www.irctc.co.kr)에서 시행하는 ‘대열반 열차’(Maha Parinirvan) 투어 프로그램은 불교 성지 순례를 위한 괜찮은 대안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일정 내내 인도 경찰차량이 호위하고 대부분의 일정이 기차여행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최소한의 안전성과 안락함이 보장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딤섬에 담긴 홍콩의 성장사

아침과 저녁 사이의 끼니를 뜻하는 점심(點心)은 원래 불교 용어였다고 한다. 오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던 ‘오후 불식’이라는 초기 불교의 규율 때문에 승려들은 오후가 되기 전 약간의 요기를 했다. 지금 먹으면 내일 아침까지 먹지 못할 터다. 약간의 요기. 양에 차지 않는 양이었나 보다. 위장이 아닌 고작 마음에 점 하나를 찍는다는 점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말이다.

홍콩에 갔다면 반드시 한 번 이상은 맛봐야 하는, 만두의 일종인 딤섬(點心)이 우리 식으로 읽었을 때 점심으로 발음된다는 사실을 안 것은 사실 겨우 십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홍콩인들은 딤섬 그 자체보다는 딤섬과 함께 마시는 차에 방점을 두는 탓에 차를 마신다는 뜻의 ‘얌차’(飮茶)라고 말한다. 딤섬이라고 한정 짓는 단어는 차에 관심이 없는, 그저 예쁘장한 만두 먹기에만 관심이 있는 외국인이 쓰는 용어다.
◇딤섬의 초기형태는 한국의 찐빵(가운데)과 비슷했다. 금붕어 모양의 딤섬(왼쪽)과 샥스핀과 금가루를 얹은 호화 딤섬.

패스트푸드. 이 단어에서 딤섬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팍스 아메리카나로 대표되는 그 무지막지한 힘 덕분에 모든 사람들은 패스트푸드 하면 햄버거나 프랜차이즈 피자만을 떠올린다. 금방 만들 수 있고,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요리. 아마 이게 패스트푸드의 정의일 것이다. 얇은 나무로 만든 일회용 ‘도시락’에 넣어 다니며 언제든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초밥이나, 미리 빚어놓은 뒤 찜통에 살짝 쪄내기만 하면 되는 딤섬도 분명 패스트푸드의 범주에 들어간다.

샌드위치 백작이 도박에 열중하기 위해 샌드위치를 만들고 그게 버거로 발전했듯, 딤섬은 개화기 분주했던 부두가 노동자를 위한 음식이었다. 밀가루 속에 소를 넣고 찌기만 하면 끝이다. 굳이 젓가락을 쓰지 않아도 되고, 끼니를 해결하다 갑자기 일이 생기면 왕창 입에 털어넣고 일터로 가면 그만이었다. 패스트푸드가 가진 효율성을 다 가졌던 딤섬은 부둣가를 평정하고 이내 서민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침 빈속을 뜨끈한 차로 달래던 서민들은 찜통에서 대량 생산이 가능한 딤섬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거우부리 바오쯔 난샹 샤오룽바오 같은 딤섬도 청나라 말기의 개화기 시절 처음 생겨났다. 거우부리 바오쯔가 탄생한 톈진은 베이징 동쪽의 항구도시이고, 샤오룽바오가 탄생한 상하이 역시 항구도시다. 지금이야 특급호텔 일류 레스토랑에서도 딤섬을 취급하지만, 딤섬으로 명성을 날리던 전통 레스토랑은 대부분 주택가에 자리 잡은 허름한 식당이다. 손때가 몇십 년 이상 쌓여 나무색인지 손때인지 알 수 없는 그 반들거리는 오래된 탁자의 광택에서 나는 안도할 때가 있다.

‘아! 이제야 홍콩에 왔구나.’

홍콩에는 지금도 역사를 자랑하는 딤섬 레스토랑이 있다. 중부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옌샹루(燕香樓)나 루위다실(陸羽茶室) 같은 곳이 그렇다. 둘 다 80년가량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전통이라는 이름이 붙은 모든 존재는 버림받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 이런 오래된 식당을 지탱시켜주는 고객은 예전부터 쭉 이 집의 딤섬을 먹어왔던 홍콩 토박이 노인들이다.

아니 젊은이들은 이런 오래된 집에서 일하는 것조차 기피하는지, 홀에서 접대하는 웨이터들도 수십년은 같은 일을 했음직 한 영감님들이다. 간혹 일부 여행안내서가 이런 집을 소개하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호기심에 방문했다가도 진저리를 내며 나오곤 한다.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킨 예쁘장하고 입에 맞는 딤섬만 먹다가 연꽃향이 풀풀 나는 전통식은 견디기도 힘들다. 무엇보다 영어라고는 전혀 통하지도 않는 투박한 영감님의 거친 서비스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뱃사람의 일용 양식이었던 딤섬은 1970년대 홍콩의 경제 부흥기를 거치며 변해간다. 우리 기준으로는 정규직이 아니고, 게다가 비정규직의 계약 경신이 달마다 이어지는 살벌한 정글 자본주의 세상에서 홍콩 사람들은 늘 바빴다. 가뜩이나 좁아터진 땅덩어리에 효율적으로 사람을 넣다 보니 고층빌딩이 발달했다. 건널목의 파란불을 기다리며 길을 건너느니 차라리 구름다리 위로 뛰어다니는 문화가 발달했다. 급기야 공중회랑이라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딤섬은 빨라야만 살아남는 홍콩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홍콩 경제만큼이나 고도성장을 했다. 무엇보다 경제가 나아지자 사람들은 딤섬을 개량하는 데 골몰했다. 겨우 돼지고기나 간장에 졸인 소고기 따위가 들어가던 딤섬 소에 새우와 같은 고급 재료가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딤섬의 고객은 거친 뱃사람에서 코스모폴리턴이 되었다. 그것도 입을 작게끔 보이기 위해 오물거리면 음식을 먹어야 미덕인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고급화되는 딤섬. 찐빵처럼 큼지막한 딤섬은 시대의 조류에 따라 사라져갔고, 여성 취향의 예쁘장한 딤섬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대통 속에 3∼4개씩 담겨 나오는 앙증맞은 모양새의 오늘날의 딤섬이 드디어 탄생한 것이다.

요즘도 딤섬은 변하고 있다. 일 때문에 해마다 홍콩을 방문하는 나는 최근 딤섬의 경향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이제 딤섬은 부자들의 사치품으로 발돋움하려는 듯 전복, 샥스핀, 제비집, 심지어 금가루를 포함하는 종류도 생겨났다. 한국 돈 2000원에 한 통씩 먹던 딤섬 가격이 요즘은 단 한 개에 1만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다. 먹는 것이 일인 나는 죽을 맛이다.

모양새는 어떠한가? 몇 년 전 금붕어 모양의 새우 딤섬이 세간의 인기를 끌더니 요즘은 고슴도치, 눈사람, 토끼 심지어 핼러윈 축제를 앞두고는 호박 귀신 모양의 딤섬도 등장해 언론의 관심을 끌곤 한다. 딤섬은 이제 홍콩 요리를 대표하는 장르가 되었고, 경우에 따라 레스토랑의 질을 좌우하기 시작했다.

올해도 홍콩에 도착했다. 올해는 어떤 딤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홍콩의 딤섬 레스토랑 중 올해는 또 어떤 식당의 놀라운 아이디어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까? 홍콩은 딤섬이라는 단 하나의 먹을거리로도 흥미진진해지는 곳이다.

〉〉여행정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을 비롯해 캐세이 퍼시픽, 타이항공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많은 항공사가 인천공항과 홍콩을 연결하고 있다. 홍콩의 거의 모든 중국요리 레스토랑에서 딤섬을 취급하는데, 요즘에는 아예 딤섬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식당도 생겨나고 있다. 꽤 많은 식당이 밥때와 밥때가 아닌 시간의 딤섬요금을 차등 적용하는데 물론 밥때가 더 비싸다.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딤섬은 반투명한 피에 새우살이 가득 든 하카우(蝦餃·샤자오)다. 하카우만으로 배를 채우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중국 뤄양, 漢 왕조 500년 흔적은 없었다

◇민중의 신, 관우를 찾는 참배객들로 북적이는 관림.낙양성십리허에….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몇몇인가?

철 지난 유행가 가사를 읊어대는 취미 따위는 결코 없지만, 창밖으로 뤄양(洛陽) 30㎞라는 입간판을 보자마자 저절로 이 구절이 입 밖을 맴돌고 있다. 뭔가 이곳은 뤄양이라는 중국식 발음이 어색하다.

◇한 멸망 후 북위 시절의 유물인 룽먼석굴의 부처.
낙양. 그래 이곳만큼은 뤄양이 아닌 낙양이라 부르고 싶다. 우리네 옛 시조와 철 지난 유행가 가사에도 등장할 만큼 낙양은 얼마나 익숙하고, 또 고색창연한가. 지금은 빛바랜 유행가에 불과하지만, 아직까지 애송되는 것은 한때라도 그 노래가 세상을 휘어잡았다는 뜻일 게다. 낙양으로 들어가는 초입부터 도시는 누렇게 빛이 바래 있었다.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제국의 옛 수도는 이제 그저 그런 중급 규모의 공업도시로 전락해 간간이 찾아오는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걸까. 낙양의 첫인상은 그랬다. 너무 평범해서 언급할 말을 찾기 위해 깊이 생각해야 할 정도로. 중국인들이 말하는 그네 민족의 최전성기인 한당성세(漢唐盛世) 중 한나라 때 낙양은 제국의 수도였다. 이 시기 한 무제의 침입으로 고조선이 멸망했다. 또 서역이 개척돼 실크로드가 뚫렸으며, 그 길을 따라 불교가 들어왔다.

영광은 그 빛이 화려한 만큼 동전의 양면과 같이 비극적 몰락을 수반한다. 화려했던 제국의 수도는 제국이 막바지로 치닫던 189년 전란에 휩싸이며, 제국이 쌓아온 모든 부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한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크고 작은 왕조가 낙양을 꽤나 좋아했는지, 낙양은 왕조의 수도로서의 명맥을 이어간다. 하지만 한 제국 시절만큼의 화려했던 영화는 돌아오지 않았다. 낙양을 여행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낙양을 가장 빛나게 했던 한나라 시기의 유물이 드물었다는 점이다.

중국 삼대석굴의 하나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빛나는 룽먼석굴이 낙양의 유적을 대표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는 엄연히 한나라 멸망 후인 북위 시절의 유물이다. 장한가(長恨歌)로 유명한 백거이의 옛집 또한 당나라 이후의 유적들이다.

◇중국 최초로 불교가 전해진 백마사.중국 3대 고대 소설 중 초한지와 삼국지연의 각각 한나라 성립과 멸망을 소재로 하고 있을 정도로, 한나라는 중국 그 자체로 손꼽히는 왕조 중 하나였다. 또한 중국의 주류 민족 이름을 한족이라 칭하고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막상 제국의 수도에서 한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고도에서 어떤 비장감이나 비애를 느끼곤 한다. 모든 고도는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개중에는 폼페이처럼 극적인 곳이 있는가 하면, 인도의 파테푸르 시크리처럼 버려진 곳도 있다. 어떤 형식의 최후건, 그 존재들은 오늘날 하다못해 폐허라는 이름으로라도 남아 있다. 낙양은 한 왕조 500년의 시간을 꿀꺽 삼키기라도 한 듯 어떤 흔적도 보여주지 않았다.

◇얼마 전 조성된 석조기둥. 용이 새겨진 기둥 위에 권력의 상징인 정이 올라가 있다.철저한 단절. 다시 한 번 흘러간 유행가의 가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노래를 지은 사람은 오늘날의 낙양을 와보기라도 한 것일까. 책으로 접하던 낙양을 둘러싼 수많은 무용담들이 머릿속을 스쳐갔지만, 막상 이곳에서는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정말 동탁이 모든 걸 다 태워버렸기 때문일까.

그때였다. 룽먼석굴에서 낙양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고 오던 길. 관림(關林)이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수풀 림(林). 숲을 뜻하는 이 글자는 중국에서 숲 이외에 성인의 무덤을 높여 부르는 말, 더 정확히는 무덤을 뜻하는 말 중 최상급에만 쓰는 말이다. 관림은 바로 관우의 무덤이었던 것이다. 기억이 재빠르게 머릿속을 재정렬하기 시작했다. 형주 성을 지키던 관우가 육손의 계략에 말려 손권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목만 조조에게 보내진다. 조조는 나무로 관우의 몸을 만들어 성대히 제사지내준다. 그 무덤이 바로 이곳에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로 정리됐다.

참고로 무덤에 수풀 림(林)을 사용하는 곳은 중국에도 두 곳뿐. 바로 공자의 무덤인 공림(孔林)과 낙양의 관림뿐이다. 두 림의 차이점을 굳이 따진다면, 역대 황실의 절대적인 비호를 받으며 어용화된 곳이 공림이라면, 관림은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로 수풀 림 글자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관우는 죽고 나서 신이 되었다. 민중은 그의 의기와 충절에 열광했다.

고대 중국의 기본 덕목 중 하나인 의기와 충절에 민중은 열광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그때도 지금처럼 의리니 충절이니 하는 말이 입에서만 맴도는 단어였을 뿐이었다는 뜻이다. 민중은 언제나 위정자가 말하는 덕목에 부합하는 인물이 나타나길 기다렸는지 모른다. 얼마나 폭정에 지쳤으면 그랬을까.

관우를 말한 것은 저잣거리의 장삼이사, 온갖 잡놈, 심지어 협객 흉내를 내는 도적들이었다. 현학적이지 않은 관우는 어쩌면, 민중의 공자였을지도 모른다. 민중은 의리와 충절의 화신이 돈도 주길 바랐던지, 어느새 관우는 재복(財福)의 신으로도 둔갑해 있었다. 붉은 얼굴에 긴 수염을 자랑하는 관우는 자신의 무덤 앞에 청룡도를 들고 화난 얼굴로 앉아 있었고, 사람들은 연신 그들의 복을 기원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무리 따져 봐도 관우와 돈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개 무장인 그를 공자의 반열까지 올려놓은 민중의 극성맞음이 만들어놓은 직책(?)이니, 중국 밖에서 온 내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울창한 숲 사이를 거닐다 보니, 결국 이곳이 내가 찾아 헤매던 한나라의 끝자락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머릿속에 낙양이라는 도시가 다시 그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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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이 허난(河南)성의 성도인 정저우(鄭州)까지 매주 4회 운항한다. 정저우에서 뤄양까지는 버스가 연결된다. 1시간30분가량 소요되는데 운행편수가 많아 이용하는 데 무리가 없다. 또한 뤄양의 시내버스는 관광지와 잘 연계되어 있어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낙양 최고의 먹을거리로 손꼽히는 것 중 첫 번째는 수이시(水度)인데, 일종의 낙양식 연회석으로 당나라 황실요리에 기초한다. 매콤한 맛의 탕이 주요리이기 때문에, 우리 입맛에 잘 맞는 편이다. 어지간한 대형 식당은 모두 수이시를 취급한다.
 
 

 

 

성채 꼭대기의 펄럭이는 깃발… 그 소리없는 아우성, 터키 카르스와 아니 유적지

◇비극의 역사를 간직한 카르스 성채카르스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책에서였다. 터키를 여행하며 장기 여행자를 여러 명 만났지만 누구도 카르스에 가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데, 어느 여행기에선가 카르스가 동부 터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것이었다. 글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른 사람이 안 가본 데를 가봐야겠다는 호기심 어린 치기가 발동했는지 어느새 카르스행 버스를 타고 있었다.

터키 북동부 끝자락에 있는 카르스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버스는 산과 구릉을 몇 개나 넘었고 고도가 높아졌는지 귀에는 이명이 울렸다. 봄이었지만 차창 밖으로는 눈발이 날리다 카르스에 도착할 무렵 해가 났다.

너무 큰 기대를 품고 와서일까? 버스에서 내린 카르스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우중충한 건물이 군데군데 서 있는 도심지의 도로는 돌로 포장되어 울퉁불퉁했고, 차들은 사정없이 경적을 꽥꽥 울려댔다. 무언가 정돈되지 못한 어수선함에 눈살을 찌푸리며 숙소를 잡는데 방 수준에 비해 요금도 높았다. 이래저래 실망한 탓에 ‘그래도 기왕 왔으니 하루만 있다 얼른 가야지’를 수십 번 되뇌며 짐을 풀었다.

카르스는 볼거리도 드물었다. 기껏해야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한 채 있고 그 뒤로 성채가 있을 뿐이었다. 시내 구경을 겸해 천천히 성채까지 걸어갔다. 시가지 구조가 특이했다. 다른 도시와 달리 도로가 바둑판 모양으로 나 있었고, 군데군데 오래된 러시아풍의 건물이 눈에 띄었다. 골목을 지나치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20세기 초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남하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와 오스만제국 사이에 동부 아나톨리아 고원을 따라 전선이 형성되었다. 당시 카르스를 비롯한 터키의 동부지방에는 많은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성채에서 본 카르스 전경강제이주 과정 100만명 목숨 잃어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오스만제국의 수뇌부는 아르메니아인의 민족주의와 친러시아적인 성향이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동부 아나톨리아의 모든 아르메니아인 주민에게 남쪽의 시리아, 이라크로 강제 이주 결정을 내리게 되고, 이동과정에서 추위와 배고픔으로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벌어지고 만다.

작가의 양심이었는지 정치적 의도가 깔린 발언이었는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2005년에 터키정부는 사과와 배상에 나서야 한다고 말해 큰 파문을 일으킨다.

러시아군이 주둔했었다는 성채에 올랐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아서 그랬는지 성채는 의외로 볼 만했다. 성벽은 잘 남아 있는 데다 산 위에 자리하고 있어 성벽에서 바라보는 시가지와 주변 전망이 단연 압권이었다. 드넓은 동부 아나톨리아 고원에 부는 세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이곳에 처음 정착했다던 코카서스 출신의 터키인을 이곳으로 부른 것은 어쩌면 이 바람이 아니었을까? 바람과 고원이 빚어내는 황량함 속에 카르스는 비극의 역사를 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바람을 맞으며 한참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귀에는 또다시 이명이 울렸고 눈앞이 자꾸 흐려졌다. 아, 이제야 알겠다. 왜 카르스를 방문해야 하는지를. 오르한 파묵이 왜 이 변방의 작은 도시를 역사의 수면 위로 끄집어내려 했는지를.

◇아니 유적의 정문다음날 터키와 아르메니아 국경에 있는 아니유적 탐방에 나섰다. 아니는 중앙아시아와 아나톨리아 고원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세워진 아르메니아인의 중세도시 유적이다. 13세기까지 거대 상업도시로 명성을 날렸으나 몽고의 침입과 지진으로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완전히 버려지고 말았다.

아니를 방문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국경에 위치한 탓에 전에는 허가증을 받고 사진촬영도 안 되는 등 상당히 까다로웠으나 다행히 내가 갔을 때는 그런 절차는 없어졌다. 하지만 돌무쉬(대중교통수단으로 사용되는 소형승합차)가 다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전세내야 했다.

숙소 주인에게 문의했더니 아니 투어를 하는 여행업자를 소개해 주었다. 숙소 앞에 도착한 택시에는 이미 두 명의 여행자가 타고 있었다. 다른 숙소에서 미리 신청해서 같이 투어를 하게 된 것이다. 앞자리에는 독일 여행자가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놀랍게도 한국인이었다. 고대 유적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이라고 소개한 그 친구와 우리는 의외의 장소에서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듯이 서로 반가웠다. 한국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만나는 동포여행자는 얼마나 반가운지!

◇아니 유적의 아르메니아 정교회여기저기 허물어진 과거의 흔적

택시는 약 40분을 달려 이방인들을 중세 유적의 성벽 앞에 내려놓았다. 성문을 통과하니 드넓은 평야가 펼쳐졌다. 평원 여기저기에 허물어진 과거의 흔적이 6월의 햇살을 받으며 서 있었다. 아, 어쩌면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될 수 있으며 또 이렇게 철저히 버려질 수 있을까. 평원 한쪽으로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건너편은 아르메니아 땅이었다. 강 건너 아르메니아군 초소가 보였다.

빼앗긴 조상의 유적을 매일 바라보아야 하는 후손들의 자괴감과 슬픔이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아니를 돌아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햇살은 따사로웠고 때마침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폐허 속의 들꽃은 또 얼마나 처연했는지. 우리는 그렇게 꽃향기에 취해 옛 왕국의 꿈의 흔적을 더듬는 이방인의 특권 아닌 특권을 누렸다.

누군가 동부 터키를 간다면 카르스는 필수 방문지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 볼거리가 많은 것도, 그렇다고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터키를 사랑한다면, 동부지방의 산자락에 마음을 빼앗겼다면, 어느 봄날 아나톨리아 고원의 햇살이 말을 걸어온다면 바람을 타고 카르스로 가보라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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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으로 터키 북동쪽 끝에 치우쳐 있어 방문하기가 쉽지 않다. 이스탄불에서 바로 가는 기차와 버스도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흑해의 대도시 트라브존이나 동부의 관문 에르주룸을 거쳐 가는 게 일반적이다. 숙소 사정이 좋지 않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먹을거리는 가격도 저렴하고 풍부하다. 고기와 야채, 곡물을 갈아 만든 매콤한 ‘치으 쾨프테’는 다른 음식과 곁들여 먹는 별미이며, 청정한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생산되는 꿀과 다양한 치즈는 카르스의 특산품이다. 치즈 마니아라면 행복한 비명을 참을 길 없을 것이다.

 

3천년 전부터 향신료 무역항… 동서교류 ‘문화 용광로’ ,인도 케랄라

삶이 그저 사무실과 집의 끊임없는 오감의 연속임을 느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 별개 없음을 깨닫고는 이내 실의에 빠지곤 한다. 여행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주위로부터 받는 가장 큰 오해는 ‘너는 그런 허무함이 없을 것’이라는 일종의 추측이다. 여행이 업인들, 왜 없을까? 그저 범위가 넓어졌을 뿐이다. 직장인이 가기 싫은 거래처를 의무적으로 가야 하듯, 여행인 또한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여행지를 몇 번씩 가야 하는 비루함은 남과 다르지 않다.

◇중국 경극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케랄라의 전통무용 카타칼리.인도 남서부 끝자락에 있는 케랄라는 그런 점에서만 본다면 참 다행인 지역이다. 열 몇 번을 방문해도 가슴 설렘이 남아 있고, 케랄라로 가는 기차에만 올라도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기대가 용솟음친다.

인간의 역사를 바닷가 모래알에 비유할 정도로 가볍게 봤던 인도인들은 그 이유로 역사기록을 후세에 남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케랄라 지방에 대한 역사기록도 없다. 다만 아라비아와 서양인의 기록 덕택에 역사를 가늠할 뿐이다. 하여간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 일대는 약 3000년 전부터 향신료 무역항으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고대 세계에서 항구는 필연적으로 다양한 세계의 문화유산이 만나는 일종의 문화 용광로였다.

◇아시아 최대의 향신료 시장이라는 명성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오늘날까지 머리 터지게 싸워대는 힌두와 이슬람 간의 대결에서 케랄라만큼은 두어 발짝 비켜서 있다. 이유인즉 무역을 통해 자연스레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칼이 아닌 교리가 마음에 들어 자발적으로 개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미덕은 예수교까지 이어지니, 현재 케랄라는 힌두·이슬람·예수교신자의 황금분할로 이어지며 종교적 평화를 누리고 있다.

이런 다양함은 케랄라만의 독특한 볼거리를 만들어냈다. 아름다운 포트 코친항에 늘어서 있는 중국식 어망은 중국 광둥성에서 전래되었다는 일종의 설치형 그물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작 전래되었다는 광둥에는 같은 형태의 그물이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것.

나는 케랄라가 좋다. 첫째는 케랄라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동서문화 교류의 흔적이 좋으며, 둘째는 인도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즐길 수 있는 해물 커리의 풍부함이 좋고, 마지막으로 인도에서 가장 작은 크기의 주임에도 인도문화에 끼친 빛나는 유산을 사랑한다.

동서문화 교류의 흔적은 앞서 전술한 광동식 설치형 그물 외에도, 인도에서 유일하다시피 한 유대인 커뮤니티의 존재에서 그 빛을 발한다. 기원전인 바빌론의 유대 침략시기에 밀려온 사람들이 그 시조라 하니, 커뮤니티의 역사만 2500여년이 넘는 셈. 이스라엘의 건국 이후 거의 대부분이 인도를 떠났지만, 아직도 4가구가 남아 자그마한 유대인 커뮤니티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케랄라의 해물 커리는 인도 해물요리의 거의 모든 것과도 같다.케랄라의 해물 커리는 인도 음식이라면 손사래부터 쳐대는 사람이라 해도 즐길 수 있는 보편적인 맛이 일품이다. 원래 전통 힌두들은 생선에 아예 입을 대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 때문에 인도 요리에서 해물이 자치하는 자리는 한마디로 쥐똥만큼이다.

케랄라의 해물 커리를 가능하게 한 이들은 상대적으로 먹을거리 선택이 자유로운 이슬람의 힘이다. 인도 최대의 어항이자 향신료 무역항이라는 지리적 요건은 그러지 않아도 뜨거운 케랄라의 날씨보다 더 화끈한 이 지역의 해물 커리를 탄생시켰다. 코코넛 우유와 갓 잡아올린 신선한 대하, 여기에 강황과 고추, 생강, 타마린드라는 천연 식초가 맛을 뿜어낸다.

한국인의 입맛에는 새콤 화끈한 맛이랄까? 무엇보다 향 없이 화끈한 맛으로만 승부하니 입에 착착 붙는다. 물론 매운맛에 익숙지 않은 서양인 여행객들과 일본인 관광객은 멀찌감치 서서 그 맛에 감동하는 우리를 이상하게 볼 뿐이다. 

◇이제는 관광객을 위한 퍼포먼스일 뿐이지만 위용만큼은 웅장한 중국식 어망.케랄라의 면적은 남한의 40% 정도인 3만8000㎢에 불과하다. 인도라는 나라가 남한 면적의 33배에 달하는 크기니 인도의 주치고는 가장 작은 축에 끼는 셈이다. 하지만 케랄라가 인도에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지대하기 짝이 없는데, 이 작은 땅에서 인도의 4대 무용 중 하나인 카타칼리가 탄생했고, 인도 유일의 전통무술인 칼라리파야트의 고향도 케랄라다. 새로운 대체의학으로 각광받는 아유르베다 또한 케랄라의 트리슐이라는 도시를 그 원조로 하고 있으니, 문화적으로만 따진다면 고만고만한 주 서너 개를 합친 것보다 더 빼어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카타칼리는 케랄라의 녹음과 향신료, 그리고 혼성된 문화가 창조한 보물이다. 원체 종교적인 탓에 모든 무용이 사원의 신에게만 향하는 인도에서 카타칼리는 유일무이하다시피 대중공연을 염두에 둔 무용이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명나라 시절 인도를 방문한 정화 제독이 카타칼리의 기법을 중국으로 가져갔고, 그것이 중국 경극의 원조역할을 했다고도 하니 그야말로 수백년 전의 문화교류로서는 놀라울 따름이다.

많은 사람에게 인도는 그저 아그라의 타지마할, 바라나시의 화장터뿐인 현실은 안타깝다. 없이 살아 각박해진 나머지 악다구니밖에 남아 있지 않은 북인도에 질렸다면 한 번쯤 풍요의 대명사 케랄라를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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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인도의 케랄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편은 싱가포르항공이다. 인천∼싱가포르∼트리반드룸(케랄라의 주도)으로 연결되는데, 기존의 인도 구간에 10만원 정도만 추가하면 된다. 주 자체가 원체 작은 크기라, 시내 교통은 장거리 버스를 이용하거나 택시를 전세내면 충분하다. 케랄라식 해물 커리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면 케랄라 여행의 보석과도 같은 도시 코친으로 발길을 돌리자. 중국식 어망, 유대인 구역, 카타칼리 관람과 같은 모든 볼거리들이 코친에 모여 있다. 트리반드룸과 코치는 버스나 기차로 5시간 정도면 연결이 가능하다.

中 란저우, 천리마처럼 치닫는 중국… 서부 대개발 전진기지

◇세찬 물결을 일렁이는 중산교와 황허강.‘마답비연(馬踏飛燕)’. 서역의 한혈마가 하늘을 나는 제비를 사뿐히 밟으며 내달리고 있다. 란저우 박물관에 있는 이 작은 청동상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만약 한 무제가 장건을 서역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아니 중국이 당시의 전투 양상을 바꿔놓은 서역의 한혈마를 구하지 않았다면, 이후 2000년간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가능했을까?

말의 시대. 같은 시기 로마가 중장보병을 주력으로 삼아 유럽을 제패했듯, 한나라 군대의 주력도 보병이었다. 당시의 기마란 장군들이나 타는 일종의 의전 도구였을 뿐, 전쟁에 광범위하게 쓰일 만큼 충분한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수적으로 소수였던 흉노가 중국 북부를 제패하고, 나중에는 로마제국의 멸망을 가속시킬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기마병의 힘이었다. 사람의 발에 비해 몇 배나 빠른 기마병은 요즘 기준으로 속도가 빠른 전투기였고, 저돌맹진할 수 있는 힘은 탱크에 가까웠다.

◇칭키즈칸이 지었다는 백탑, 란저우의 대표적인 유물 중 하나다.한나라에 앞서 중국을 통일한 진의 시황제는 당시 제국의 북부를 점령한 흉노의 기마병을 두려워해 아예 담을 쌓아버렸으니 그게 바로 오늘날의 만리장성이다. 그쯤에서 담쌓고 끝났다면 우리의 고조선도, 이후 끊임없던 중국의 한반도 침략도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국은 세계제국으로 발돋움하기를 원했고, 그러기에 말은 더욱 절실했다. 당시 중국인들이 상상하던 말의 모습은 바로 ‘마답비연’에 잘 나타난다. 말이 내달리지 않고 하늘을 나는 듯 보인다. 어찌나 빠른지 날래기로 유명한 새, 제비를 도움닫기에 사용하고 있다. 아마 운 나쁜 제비는 저기압의 날씨에 벌레를 잡아먹으려고 하강했으리라.

중국의 욕망. 당시 중국인의 사고체계에서 최고의 말은 하루에 천 리를 가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달리는 천마여야 했다. 그 집념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서역을 정벌하고 1500년이나 지나서 만들어진 소설 삼국지연의에 여포가 한혈마인 적토마를 타고 천하를 호령한다는 설정이 만들어졌을까?

장건을 통해 외교술로 서역의 한혈마를 얻으려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무제는 재빠르게 군사작전을 승인한다. 흉노를 정벌해 주변국들을 복속시키고 한혈마를 구해오자는 웅장한 프로젝트. 석유전쟁이라는 오명이 붙은 2차 걸프전만큼이나 신속하게 급조한 대의명분에 의한 전쟁이었다.

무제의 인척이었던 곽거병이 이 작전의 총사령을 맡아 서역 전진기지인 란저우로 진입했다. 물 설고 길 선 란저우, 당시 중국인의 세계관에서 여기는 세상 끝이었다. 세상 바깥쪽이라는 세외변경(世外邊境). 두려움에 떨던 병사들은 설상가상으로 식수 부족 사태에 직면했다. 무모할 정도로 길어진 병참선 때문에 5만의 전투병력을 지탱하기 위한 수송부대가 이미 수십만명에 달했다. 전설에 의하면 대군을 잃게 생긴 곽거병이 답답한 마음에 산에다 칼을 꽂자 그곳에서 물이 솟아나왔다고 한다. 그것도 다섯 곳에서. 해서 산 이름은 오천산(五泉山)이다.

◇란저우 시가지 모습, 저 멀리 오천산이 보인다.전설과 달리 실제 오천산에 가보니 이해 못 할 풍경이 펼쳐졌다. 오천산 바로 아래 황허의 상류가 세찬 물보라를 일으키며 흐르고 있었다. 지나친 곽거병의 영웅화일까? 서울처럼 황허가 시내의 남북을 나누는 란저우, 아니 오천산에 물이 부족할 리는 아무리 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란저우 방문은 이번이 3년 만이었다. 3년 전 방문했을 때, 란저우 박물관은 수리 중이었다. 볼품없이 좌우로 길기만 했던 도시는 그새 더 많은 고층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2000년 전 서역 진출의 전진기지였던 란저우는 이제 서부 대개발의 전진기지로 다시금 조명을 받고 있었고, 끊임없이 서쪽으로 물자를 실어 나르는 트럭의 행렬이 도로의 양끝을 메우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중국의 서부 대개발의 역사야말로 2000년 이상이 아닐까? 장건과 곽거병의 노력으로 흉노를 몰아내고 건설했던 실크로드는 단지 한?당 시대에만 유효했을 뿐, 중국의 서역 진출이 물거품이 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역사 속에서 중국은 단지 란저우만을 지키기도 버거웠다. 

당나라 말기에는 오늘날의 티베트인 토번이 이 일대를 점령했고, 그 이후 란저우 서쪽은 중화의 영역이 아니었다. 무제 이후, 대대적인 서역 개발을 추진한 이는 한족이 아니라 여진족인 청나라 황제들이었고, 뜬금없게도 공산주의자인 마오쩌둥이 이를 계승했다.

란저우를 발전기지로 삼는 서부 대개발은 실은 한 무제 이래로 내려온 중국의 꿈. 중국이 분열될 때마다 반독립 지대로 남는 이 일대에 영원한 중국령이라는 쐬기를 박기 위한 작업이다.

온통 공사장, 그러지 않아도 잿빛 실크로드 초입은 언제나 황사가 낀 것처럼 희뿌옇다. 매캐한 공기로 칼칼해진 목을 진정시키기 위해 유명한 란저우 쇠고기탕집으로 향했다. 그저 란저우 토박이이나 즐겨 찾던 이 집도 이제는 매스미디어의 영향으로 베이징 등지에서 온 외지 여행객들이 손님의 반을 차지한다. 하긴 이 집도 체인화되어 대도시로 진출하는 중이니, 여기 손님들은 분점과 본점의 맛 차이를 구별하기 위해 방문한 식객들일 것이다.

조만간 란저우에 부는 황량한 모래바람은 사라질 테다. 자연이야 별일 없이 황량하겠지만, 인간의 힘으로 만든 초대형 도시는 반들반들한 호텔 로비 같은 바닥을 건물에 선사하겠지. 그때쯤 실크로드라는 이름에서 입 안에 쓸리는 모래의 흔적을 연상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개발은 늘 본래의 모습을 버리는 것이었으니까.

결국, 마답비연은 욕망을 상징했다. 이제 개발이라는 말(馬)은, 실크로드 제비로 상징되는 살던 옛 모습을 밟고 앞으로 내달리고 있다. 끝이 어디일까? 마답비연의 날렵한 조각이 왠지 낯설게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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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저우 쇠고기탕면.인천공항에서 란저우로 직접 취항하는 비행기는 없다. 한때 장안으로 불리던 시안(西安)까지 직항기가 운행하고 있다. 시안에서 란저우까지는 기차로 6시간가량 걸린다. 운 나쁘게 버스를 타면 13시간가량이 소요되니 주의하자.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란저우는 물가가 저렴한 편이다. 외국계의 번듯한 5성호텔의 수는 태부족이지만, 지방도시 특유의 정감 어린 느낌이 안락함을 대신하고 있다. 란저우의 쇠고기탕면(蘭州牛肉麵)은 반드시 먹어야 할 전통 요리 중 하나다. 쇠고기와 무를 넣고 진득하게 우려낸 국물에 수타면을 말아주는데, 한국에서 먹는 쇠고기 무국의 매콤한 버전으로 우리 입맛에도 딱 맞는다.

외국 관광객이 가장 먼저 찾는 베이징 여행 1번지, 한때 거대한 황실광장, 황제의 조례 반포와 국상 때나 출입할 수 있었던 곳

◇톈안먼 성루에서 바라본 톈안먼 광장.십여 년 전쯤 중국 하면 떠올리던 많은 풍경이 이제는 너무 낯설어지고 있다. 이게 중국의 현실이다. 수많은 자전거로 대표되던 출퇴근길의 풍경 또한 그 길의 주인이 자전거에서 자동차로 재빠르게 바뀌고 있다. 도시건 시골이건 새빨간 볼을 자랑하던 촌스러운 아가씨들도 이제는 세련된 명품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는 도회의 커리어우먼으로 바뀐 지 오래다. 요즘 베이징을 걷다 보면, 이곳이 몇 년 전 그곳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변해버렸다. 하긴 중국인들조차 베이징을 두 달쯤 떠났던 토박이가 자기 동네 와서 길을 잃어버린다고 너스레를 떨 정도다.

그럼에도 변치 않는 몇 곳 중 하나는 톈안먼 광장이다. 예나 지금이나 톈안먼 광장과 그 주변은 똑같다. 처음 중국을 방문할 때 그 엄청난 넓이와 위압감에 질려버렸다. 이제는 정들어 버린 도시 베이징에 왔다는 걸 상기시켜주는 추억이 서린 장소로 바뀌어 버렸으니 세월 앞에 변하는 사람 속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현대 중국 이미지의 상징과도 같은 탓에 많은 사람이 톈안먼 광장을 공산주의 중국의 유산으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 이 일대가 처음 조성된 것은 명나라 시대. 당시의 베이징 황궁은 내성과 외성이라는 이중 성벽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톈안먼 광장은 내성의 입구를 들어서면 나오는 거대한 황실 광장이었다. 원래는 지금의 톈안먼 광장 중간쯤에 대청문(大淸門)이라는 문이 하나 더 있었다는데 지금은 헐리고 없다. 결과적으로 과거보다는 두 배쯤 넓어진 셈이다.

한때 황제의 조례 반포와 국상 때나 출입할 수 있던 이곳이 세계에서 온 관광객이 가장 먼저 찾는 베이징 여행의 1번지가 된 것은 역시 사회주의 중국 성립 이후다. 2000년간의 황제 체제에서 짧은 기간의 민주공화정,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다이내믹한 변화를 겪은 중국은, 아니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새 나라가 진정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덕분에 황제의 궁 자금성은 공원으로, 황제의 광장 또한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개방형 공간으로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물론 며칠을 빼고 말이다. 

◇광장에서 자전거 타는 사람을 보는 일은 이제 드물다.몇 번째인지 헤아릴 수도 없는 베이징 방문이긴 했지만, 이날도 나는 베이징 입성 이틀째를 맞아 톈안먼 광장을 향해 나아갔다. 일부러 찾았다기보다는 어차피 지나다 보면 들를 수밖에 없는 곳이라, 그냥 지나치기 아까웠을 뿐이다. 하지만, 이날 따라 광장은 폐쇄되었다. 이유는 톈안먼 광장과 마주보는 우리나라의 국회 격인 인민대회당에서 벌어지는 뭐 일종의 국회 회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국회 회기 중 톈안먼 광장 주변을 접근할 수도 없게끔 둘러싼단 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날은 톈안먼 광장으로 연결되는 창안대로까지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검문이 있었고, 중국인과 외모상 비슷하다는 이유로 서양인이 받는 친절한 방문 금지 양해조차 나는 받을 수가 없었다. 주변 중국인에게 물어보니 오늘이 첫날이고 앞으로 일주일 정도 이런 봉쇄가 된다고 한다. 말을 해준 중국인에게 이 일은 별일이 아니었다. 뭐 늘 그래왔을 테니까.

하지만 열린 공간의 상징인 광장이, 그것도 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단 나라에서 이런 식으로 폐쇄된다는 점에 나는 울화통이 터졌다. 황당한 사람은 나뿐 아니었다. 정보를 접하지 못하고 톈안먼 광장을 찾은 외국인도 어이없긴 마찬가지. 몇몇은 하늘에 주먹질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대부분 1년 중 며칠 휴가를 내 베이징으로 여행 왔음이 틀림없어 보였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을 텐데도 굳이 깃발을 들고 막힌 광장 주변에서 기어이 광장의 볼거리들을 설명하고야 마는 중국인 가이드의 끈기는 차라리 애처롭기까지 했다.

‘협인민(協人民)’, 시민을 돕는다는 이 문구가 원래부터 죽어버린 구호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내가 본 중국에서 이건 단지 슬로건일 뿐이었다. 혁명의 평균 수명은 몇 년이나 될까? 베트남에서, 이란에서 여행하면서 혁명이라는 조금은 매혹적인 단어와 그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했지만, 내가 방문했을 때 그곳의 혁명은 너무 늙어 있었다.

혁명으로 집권한 그들은 자신들의 성공사례를 남들이 모방하는 게 싫었는지 대중이 광장에 모이는 걸 극도로 두려워했다. 사실 광장공포증을 가진 정부는 민주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유럽의 개방된 광장과 달리 중국은, 베트남은, 이란은 모두 폐쇄적인 광장이 있었다. 높고 웅장함만 강조된 무미건조한 기념비 속에 사람들은 주눅 들어 있었고, 그 주위에는 늘 경찰이 눈을 부라리며 서 있었다.

◇톈안먼에 휘날리는 오성홍기.톈안먼 광장에서 중국은 5·4운동을 통해 근대를 탄생시켰고, 홍위병의 행진을 통해 비록 비참하게 실패했지만 세계사적 대실험을 했다. 그리고 1988년 6월 어느 날에는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감히 입 밖에 올리다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톈안먼 광장의 폐쇄, 그리고 한때 혁명가였을 혹은 그들의 후예였을 그들이 특권층이 되어 시민 앞에 군림하는 모습은 사회주의를 슬로건으로 걸고 있는 한 나라가 추구해야 할 최소한의 가치에서도 벗어나 보였다.

중국을 여행하며 과연 이곳이 사회주의 국가인가라는 수많은 물음들은 이날 톈안먼에서 깨져버렸다. 의문을 남길 여지조차 없을 만큼 이들의 혁명 또한 늙어 있었다. 며칠 후, 톈안먼이 다시 개방되었다. 올림픽 이후 눈에 띄게 맑아진 베이징의 푸른 하늘, 그 속에서 아이들은 연을 날리고 있었고, 지방에서 올라온, 죽기 전에 수도 한번 밟아보겠다는 일념으로 꼬부라진 허리에도 씩씩하게 깃발을 따라가는 늙은 여행자들이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다시 열린 광장을 바라본다.

나와 동행했던 중국인 친구 장은 일주일 내내 투덜거리고 분개하던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 나라는 이게 일상이 아닌가 보다. 우리는 일상이라 아무렇지도 않아.”

일상이란 참 슬픈 단어다. 정상이건 비정상이건, 어느새 삶 깊숙이 스며들어, 설사 그게 불편하고 부당하다 하더라도 느낄 수조차 없으니…. 새삼스레 우리의 일상은 무엇일까 궁금해지는 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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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과 베이징 사이는 하루 30편 이상의 항공기가 연결된다. 최근 환율 급등과 위안화 강세라는 이중고 속에 중국은 몇 년 전 생각하듯 그리 싼 나라는 이제 아니다. 하지만 중국 내 국내 여행자들 또한 급증한 탓에 저렴한 숙소는 오히려 예전보다 많이 눈에 띄는 분위기다. 상투적인 여행 패턴만 벗어난다면 중국은 여전히 저렴한 나라다.

최근에는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선진국의 외식 프랜차이즈가 베이징을 대대적으로 공략 중이다. 예전처럼 특유의 향 때문에 숟갈조차 뜨지 못하고 식당을 나서는 비극은 이제는 없다. 올림픽 이전과 이후를 구분해야 할 정도로 베이징은 현재 다이내믹하게 변하고 있다.

물론 본문처럼 뜻하지 않은 관료주의적 행정처리 때문에 일정이 뒤집힐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만만디는 이들이 느려서가 아니라, 그렇게 사고하지 않으면 속 터져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긴 말인지도 모른다.

 

천년 넘게 시인·묵객들에게 영감 준 ‘천하제일 호수’, 경제도시였던 덕분에 왕조가 망한 뒤에도 쇠락 겪지 않고 번영

허장성세(虛張聲勢).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이 말처럼 마음에 와 닿는 말이 없다. 어디를 가나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 자기들의 영토를 천하(天下), 중원(中原)이라 부르며 영토 밖 사람들을 오랑캐라 비하했으면서도, 그렇다면 천하를 수중에 쥐었단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람들은 천하에 집착한다. 마치 손에 쥔 그 단어를 애용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기라도 하는 듯…. 중국을 여행하며 수많은 천하제일에 속아왔던 터이지만, 그럼에도 천하라는 말이 유포하는 묘한 매력은 어쩌질 못하나 보다. 상하이에 잠시 머물 일이 있었는데, 굳이 짬을 내 천하제일의 호수라는 서호를 보기 위해 항저우로 내려가는 길이다. 사실 항저우는 처음도 아닐 뿐만 아니라 한 달쯤 살았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때는 겨울이라, 서호의 운치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사실 서호를 즐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서호 10경 중 여름의 풍경인 곡원풍하.중국에 대한 글을 쓰며 노상 하는 말이지만, 중국의 변화는 정말 놀랍다. 4년 만의 방문인데도 길이 낯설 정도다. 애써 항저우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서호까지 가는 버스노선을 알아왔는데, 그 사이 주요 지역만 압축 연계하는 관광버스가 생겨 두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서호, 중국인들이 말하는 천하제일의 호수. 조선시대 선비들의 영원한 우상이었던 동파 소식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 5월의 서호로 향하는 발걸음은 기대에 부풀었다. 호수 하나를 두고 벌어진 진실과 가상의 이야기는 얼마나 넘쳐나는가?

◇중국인들의 삶의 본보기, 악비.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는 말은 중국인들이 항저우라는 도시에 보내는 가장 애정어린 표현 중 하나다.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에도 항저우는 풍부한 수량과 비옥한 토지로 인해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7세기 이후 수나라에 의해 건설된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는 일찍부터 항저우를 중국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물류의 중심지로 만들어 놨다. 이후, 나약하던 한족 왕조 송(宋)이 그 전의 수도였던 카이펑(開封)을 빼앗기고 항저우로 수도를 옮겼으니 그게 바로 남송정권이다.

◇진회는 오늘도 침을 맞고 있다.중국 역사에서 특이한 점의 하나는 항저우가 원래 경제도시였던 탓에 왕조가 망한 뒤에도 큰 쇠락을 겪지 않고 오늘날까지 흘러왔다는 점이다. 시안, 뤄양, 카이펑 등 멸망당한 수도들이 겪었던 파괴의 칼날을 항저우만큼은 피해 왔던 셈이다. 심지어 남송정권을 멸망시키고, 한족들에 대한 극심한 차별정책을 펼쳤던 몽골족의 원(元)은 항저우를 아예 제2의 수도처럼 대했다. 파괴하기는커녕 황제가 직접 관리하는 도시였음은 동방견문록에조차 등장하는 사실이다. 

서호는 이런 영원한 번영의 도시 항저우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동서 3.2㎞, 남북 2.8㎞의 크기를 자랑하는 인공호수인 서호는 1400여년 넘게, 중국의 수많은 시인묵객들에게 창조적인 영감을 불어넣었던 곳으로 더 유명한데, 특히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장한가를 통해 노래한 백거이,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이었던 소동파는 서호를 단순한 호수가 아니라 중국 문화의 집대성으로 만들어버린 주범들이다. 특히 백거이와 소동파는 항저우 일대의 지방관을 역임한 데다 서호의 2대 제방―현재는 다리처럼 쓰이고 있는―인 백제(白堤)와 소제를 쌓아 오늘날의 서호를 만드는 데 이바지한 사람으로도 손꼽힌다.

서호의 볼거리는 호수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서호십경(西湖十京)이라 불리는 10가지의 소경이야말로 서호 구경의 백미로 손꼽힌다. 이 열 가지는 계절별, 시기별 풍경의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에 다 보기 위해서는 1년 내내 서호 주변에 살아야 한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제방 백제에 눈이 내린 후, 다리 가운데부터 녹기 시작할 때 마치 다리가 끊어진 것같이 보인다는 겨울풍경의 대명사 단교잔설(斷橋殘雪) 같은 경우는 지구온난화가 극심한 요즘 같은 때는 평생에 한번 볼까 말까한 풍경이 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새싹이 돋을 무렵 물안개와 함께 어우러진 몽환적인 아침 풍경의 대명사 소제춘효(小堤春曉)나, 해질 무렵 서호 밖 남쪽의 불교사원 정자사에서 치는 종소리의 아련함을 즐기는 남병만종(南屛晩鐘) 같은 정취는 시기만 잘 맞춰 서호를 방문한다면 언제든 접할 수 있는 일상의 모습이기도 하다. 

◇백거이가 조성한 백제.서호에 어찌 풍경만 있을까? 남송의 명장이자 불후의 충신으로 추앙되고 있는 악비 장군의 사당도 서호 입구에 있어 이 일대를 방문한 이들을 잠시 숙연하게 한다.

지나친 문치로 중국 역사상 가장 허약했던 왕조라는 평을 받는 남송은 북방 금나라의 침입으로 그전의 수도였던 카이펑이 함락되었음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언제나 위기 때에는 현실론을 빙자한 비겁함이 세상을 지배한다. 당시의 조야는 화의론의 진회와 주전론의 악비가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만 본다면 악비의 연이은 승전으로 약간의 고토를 회복하던 시기였지만, 재상이던 진회는 악비를 군사적 모험주의자로 봤다. 일정 부분 타당한 이 말은 당시 두 나라 사이의 장군 하나의 재능만으로는 메울 수 없는 국방력의 차이도 실재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회의 수법이 너무나 비열했다. 결국 악비는 39살의 젊은 나이로 누명을 쓴 채 처형된다. 

◇동파 소식의 발자취가 어린 소제의 풍경.억울함과 한, 그리고 당대의 열망이 증폭된 그의 죽음에 민중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악비의 사당 안뜰에는 악비를 죽음으로 몰고 간 당시의 재상 진회의 석상이 오라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다. 이미 900년 전의 일이건만 지금도 사람들은 진회의 석상에 침을 뱉는다. 얼마나 오가는 사람마다 뱉어댔으면 제발 침 좀 그만 뱉으라는 애원의 표지판이 붙어 있겠는가. 진회의 석상을 사진 찍는 도중에도 하루에 담배를 두세 갑쯤 피우는 듯한 가래소리의 주인공이 진회의 얼굴을 향해 침을 날렸다.

당대의 승부와 사후의 평가는 이처럼 다르고, 비명에 간 지도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애틋함을 넘어선 분노는 1000년의 세월을 갈랐다. 침으로 범벅이 된 진회를 바라보며 동양에서 말하는 역사의 무게와,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의 의미가 새삼스레 다가온다.

나에게 서호는 참 특별했다. 단지 호수 하나로 보기는 어려운,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 그걸 부담스럽지 않게 풀어내는 저 잔잔한 물길은 중국의 모든 것을 허장성세로 표현했던 나의 방정맞음을 질타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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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세 편의 비행기가 인천공항과 항저우를 연결한다. 만약 항저우로 가는 항공편이 여의치 않다면 상하이를 거쳐도 된다. 상하이와 항저우는 기차로 겨우 1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중국 동부해안 개발도시 중 가장 모범적 개발 사례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항저우는 대기오염 수치도 중국 평균치를 밑돈다. 엄청난 스모그로 인해 중국 여행을 망쳤던 경험이 있다면 항저우는 상대적으로 안심해도 될 수준이다.

항저우의 명물요리는 유명한 시후추위(西湖醋魚) 같은 요리는 시식목록에서 빼도 무방할 정도로 한국인의 입맛과는 거리가 멀다.

印 국경도시 와가, 견원지간 印·파키스탄 국경폐쇄식 관람객 ‘북적’

◇외국인들은 국경폐쇄식에 흥미를 갖지만 인도와 파키스탄 사람들은 애국의 마음으로 행사를 지켜 본다. 국경 폐쇄식 후 시민들은 기념촬영을 할 수 있다.해외여행 활성화로 여러 나라를 왕래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섬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해보는 경험 중 하나를 우리만 못하고 있다. 그건 바로 육로를 통한 국경 넘기다.

내가 처음 육로로 넘어본 국경은 인도·네팔 국경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기까지 하지만, 그 당시 나는 방금 자대 배치를 받은 신병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출국심사가 끝나고 ‘웰컴 투 네팔(Welcome to Nepal)이라는 문장이 붙은 대형 아치에 금 하나 그려진 것을 보고 어찌나 허탈하던지…. 그저 금 하나 차이로 나라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말과 문화가 바뀌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지금도 신기한 일이지만, 휴전선에 100만이 넘는 군대가 포진한 나라에서 온 나로서는 그 두려움이 당연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귀순용사라는 사람들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왔을 때, 뚫었다는 그 사지(死地)가 고스란히 국경의 이미지로 다가온 탓이다. 우리 세대에게 국경은 무서운 존재였던 것이다.

◇씩씩하게 걸어가는 인도병사들. 국경페쇄식동안 건강한 남성미를 자랑했던 군인들은 어느 순간 과장된 행동을 하기도 한다.우리는 사상의 차이, 엄밀히 말해 광복 이후 점령국의 성향에 따라 국가체계가 갖춰지며 본의 아니게 나뉜 나라다. 이에 비해 인도와 파키스탄, 이들은 종교적 차이를 실감하고 영국과 협상해 스스로 나라를 쪼갠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은 분단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너희도 합쳐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하면 인도인은 인도인대로, 파키스탄인은 파키스탄인대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냥 이대로가 행복해요랄까?

평화적으로 나라가 나뉘었기에 우리와 같은 다양한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들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인구 대비로 힌두교가 우위인 주는 인도연방에 가입했고, 이슬람교가 우위인 지역은 파키스탄에 속했다. 어떤 주는 지배자는 이슬람교를 믿는데 주민의 인구구성이 힌두교라 문제가 된 지역도 있고,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인도의 동쪽과 서쪽 끝에 매달린 벵골과 펀자브주는 인구 대비가 애매하다는 이유로 반으로 쪼개지는 와중에 쌍방 학살이 일어나 50만 가까운 사람이 죽기도 했다. 그뿐인가. 카슈미르 문제는 두 나라를 세 차례나 전쟁의 소용돌이로 밀어넣었고 2002년에는 핵전쟁 직전까지 가며 전 세계를 긴장시켰다.

이런 과거사를 알면서도 인도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으로 가야 하니 내 발길은 두렵기만 했다. 처음 인도를 지나 파키스탄으로 갈 때의 출입국 관리소 질문을 잊지 못한다.

인도 측 출국심사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파키스탄은 위험한 나라야.” 파키스탄 측 입국심사관은 더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했다. “인도를 어떻게 생각하니?”

뜻밖의 질문에 난 잠시 넋이 나가버렸다. 너무나 정치적인 질문을 외국인 배낭여행자에게 한 것이다. “인도는 좀 있어 봤는데, 거짓말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고 더럽고, 너무 여행하기 힘들었어.”

눈치껏 그가 원하는 답변을 했고, 그는 방그레 웃으며 내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주며 특유의 굴리는 발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파키스탄 넘버르 원(Pakisthan Number one)”

이런 이상한 질문공세는 나의 여행 경력을 아는 두 나라 사람에게서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파키스탄 사람은 내가 인도를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해했고, 인도인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때마다 노련하게 정치적인 답변을 했다. 물론 나에게 사기를 치는 인도인에게는 파키스탄으로 꺼지라는 뜻의 ‘짤로 파키스탄!’이라는 욕을 인정사정없이 해주었지만….

세 차례의 전쟁,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이 두 나라에 2002년부터 시작된 전통(?)이 있다. 우리로 치자면 판문점쯤 되는 국경도시 와가(Waga)에서는 매일 오후 4시 특이한 이벤트가 벌어진다. 양측의 국경수비대가 만나 자국의 국기를 하강하는 국경폐쇄식을 일반에 개방한 것이다.

건조하고 살벌했던 국경폐쇄식은 이내 부드러워졌다. 관객이 생기자 군인들이 과장하기 시작했다. 양측의 군인들은 각자의 남성미를 최대한 발산한다. 상대방을 눈알이 빠질 것처럼 노려보고 기싸움을 벌이는가 하면, 더욱 더 절도 있는 동작으로 국기를 내리기 위해 과장된 제식을 시행한다. 심지어 태권도의 발차기를 연상할 정도로. 모든 행위가 연극적이다.

국기를 하강할 때 더욱 더 자국의 국기가 오래 게양되게 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더니 결국은 두 나라가 동시에 똑같은 속도로 내리기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흥미 있는 국경폐쇄식은 곧바로 외국인 관광객들의 관심을 이끌었고, 급기야 양국은 국경폐쇄식이 잘 보이도록 펜스를 설치했다. 브라보!

외국인이야 재미있는 볼거리지만, 애국심에 충만한 인도인과 파키스탄인들은 다르다. 누구는 울고 누구는 흥분한 채 ‘인도여 영원하라’, ‘불멸의 파키스탄’ 같은 구호를 외치기도 한다. 혼란스럽고 우스꽝스러운, 하지만 진지한 인도인 덕분에 대놓고 웃지는 못하는 나는 그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국경폐쇄식 내내 안면근육의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폐쇄식이 끝난 후 자리를 뜨는 인도인들의 얼굴은 환했다. 이 성격을 알 수 없는 매스게임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나 할까. 인도 측 통계로도 펜스가 생긴 이후 서로간에 대한 적대감이 오히려 줄었다고 하니, 인도인들의 기발함은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는 셈이다.

요즈음 휴전선에는 다시금 서로 비방하는 방송이 재개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시민단체에 의해 남한이 북한으로 삐라를 뿌리는 세상이다. 다시금 흉흉함이 몰려오고 있다.

그때마다 느낀다. 우리도 휴전선에서 서로 펜스를 설치하고 이런 국가 응원전 아닌 응원전을 개최하면 어떨까. 꼭 남북한 문제가 아니어도, 각자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이 모여서 스트레스를 풀다 보면 좋은 세상 오리라 믿는 건 그저 여행만 한 덕에 내가 세상을 너무 낭만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일까. 심각함을 엉뚱하게 풀어내는 인도와 파키스탄 사람들의 현명함에 존경을 표한다.
>> 가는 길
인도·파키스탄의 국경이 마주하고 있는 와가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인천에서 델리로 간 후, 델리에서 시크교의 성지인 암리차르까지 기차를 이용해야 한다.(7∼12시간) 암리차르에서 와가로 가는 버스는 암리차르 역 앞에서 출발하는데 약 30분이 소요된다.

주말에는 와가 국경으로 인파들이 몰려서 북새통이지만, 외국인 여행자의 경우 여권만 제시하면 VIP 관람석에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세속주의 국가인 인도는 펜스에 남녀가 함께 앉지만, 이슬람국가인 파키스탄은 펜스도 남성, 여성이 구분되어 있어 두 나라의 문화가 다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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