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파테푸르 시크리, '짧은 영화' 아름다운 폐허로…
겨우 14년? 얼핏 봐도 무척이나 공들여 조성했을 법한 이 도시의 짧은 역사는 많은 이들을 의아하게 한다.
때는 무굴 제국의 전성기를 연 악바르 황제 시절. 엄청난 정복사업으로 무굴을 제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그에게도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제위에 오른 지 13년이 지날 때까지 아들이 없다는 것. 남성 위주의 황실에 이보다 더한 고민은 없었다.
황제는 사람을 풀어 영검하다는 예언자를 수소문한다. 다행히 성자는 수도인 아그라에서 멀지 않은 곳, 바로 오늘날의 파테푸르 시크리에 은거하고 있었다. 성자의 이름은 바로 샤이크 살림 치스티(Shaikh Salim Chisti).
이슬람교의 한 분파인 수피의 성자였던 그는 이미 수많은 기적으로 민중의 신망을 받고 있었다. 제국의 황제는 성자를 만나러 몸소 황량한 들판으로 나간다. 동굴 속에서 은거하던 성자는 황제를 보자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 셋을 펴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악바르는 힌두 왕국의 공주 출신인 아내 조다 바이(Jodha Bhai)에게서 아들을 얻는다. 황제는 뛸 듯이 기뻐하다 못해 무모한 계획을 세운다. 성자 샤이크 살림 치스티가 있는 벌판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해 버린 것이다.
성미 급한 황제는 자신의 궁성 일부가 완성되자 공사 현장으로 거처를 옮겨버린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도시의 수명은 겨우 14년에 불과했다. 완공도 하기 전에 수도는 다시 아그라로 옮겨져 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물 부족이었다. 최소 50만명 이상이 살 도시에 우물이라고는 고작 20여곳뿐이었다고 한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인도에는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황제들이 있었다. 가장 악명 높은 사람 중 하나는 기아스 우드 딘 투글라크(Gyas ud din Tughlaq). 그는 델리 시내에 자신을 욕하는 방이 붙었단 이유로 수도 이전을 결정해 무려 10만명의 국민을 강제로 끌고 1100㎞나 떨어진 남부 도시로 이동한다. 이 속좁은 황제 또한 새 도시에서 머문 기간은 겨우 8년 남짓. 애꿎은 국민들은 다시 1100㎞를 돌아 델리로 돌아가야 했고, 40만명으로 출발한 수도 이전 원정대 중 살아남은 사람은 10만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파테푸르 시크리는 이후 철저하게 잊혀졌다. 아니 인도인들은 일부러 방치했다. 오늘날 외국인들은 인도인의 즉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파테푸르 시크리를 꼽는다. 도시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작은 마을에 지금은 500호 안팎의 집들이 성곽 아래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해발 40m 작은 언덕 위의 마을은 영검한 성자 샤이크 살림 치스티의 무덤이 있는 모스크 자미 마스지드(Jami Masjid), 황제의 궁성이 모여 있는 로열 콤플렉스(Royal Complex), 그리고 방치된 성곽구역(Ruins City) 등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순백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성자의 무덤에는 수많은 여인네들이 끊임없이 몰려와 기도를 드린다. 우리네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다. 아들만 가문을 이을 수 있는 인도 사회에서 아들이 없는 여인네들은 온 정성을 다해 성자에게 아들을 점지해 줄 것을 기원하고 있다. 종교에 관대한 인도 사회의 특성상, 이슬람 모스크에 힌두교를 믿는 여인들의 기원 행렬이 더 많다는 것이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이다.
자미 마스지드 동문을 통해 나가 직진하면 로열 콤플렉스.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성곽 구역이 나온다. 파테푸르 시크리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는 로열 콤플렉스는 ‘돈값’을 한다. 모든 궁전 건물들이 깔끔하게 보수되어 있어 불과 몇 년 전까지 궁전으로 쓰이던 곳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400명에 달했다는 악바르 황제의 수많은 부인 중 첫째아들을 낳은 조다 바이의 궁전이 가장 큰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로열 콤플렉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은 황제의 후실과 시녀들만 머물렀다는 판치 마할(Panch Mahal)이다. 칸막이가 쳐진 작은 방이 무려 350개에 달했다고 한다. 악바르 황제가 시녀들을 말로 삼아 인도식 장기 놀이를 즐겼다는 파치시 정원(Pachisi Courtyard)도 기묘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파테푸르 시크리 최고의 구역을 꼽으라면 누구나 방치된 성곽구역을 선택한다. 로열 콤플렉스가 복원을 통해 원형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성곽구역은 웅장하게 부서진 남성적 잔영이 흩뿌려져 있다. 많은 유적들이 범하는 오류는 아쉽게나마 원래의 모습을 복원하려는 것이다. 선진국이라면 첨단 기술을 총 동원해 원형에 가깝게 만들 수 있으나, 그게 아니라면 처참한 콘트리트 덩어리이거나 시멘트 흉물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성곽구역 최고의 미덕은 돌과 돌 사이 그리고 그 틈에서 피어나는 들꽃과 잡초들의 끈질긴 생명력이 폐허도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반파된 성벽의 끝자락 무너져 내린 망루의 기단 위에서 굽어보는, 끝간 데 없이 펼쳐진 인도 북부의 평원과 농촌 마을의 풍경. 이보다 더 완벽한 그림이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여행정보
인천공항에서 인도의 수도 델리까지는 비행기에 따라 8시간30분∼16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델리에서 파테푸르 시크리로 가는 직행 교통편은 없다. 타지마할로 유명한 아그라까지 간 뒤 다시 파테푸르 시크리로 이동해야 한다. 델리∼아그라는 기차에 따라 2∼4시간, 아그라∼파테푸르 시크리는 버스로 1시간이 소요된다.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시장통이 이어지고, 언덕을 바라보면 자미 마스지드의 정문인 블란드 다와자(Buland Dawaza)의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미 마스지드→로열 콤플렉스→성곽구역의 순서로 둘러보면 된다. 로열 콤플렉스의 입장료는 5달러. 파테푸르 시크리에는 딱 네 곳의 숙소가 있다.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에 거점을 두고 당일치기로 방문하는 것이 좋다.
인천공항에서 인도의 수도 델리까지는 비행기에 따라 8시간30분∼16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델리에서 파테푸르 시크리로 가는 직행 교통편은 없다. 타지마할로 유명한 아그라까지 간 뒤 다시 파테푸르 시크리로 이동해야 한다. 델리∼아그라는 기차에 따라 2∼4시간, 아그라∼파테푸르 시크리는 버스로 1시간이 소요된다.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시장통이 이어지고, 언덕을 바라보면 자미 마스지드의 정문인 블란드 다와자(Buland Dawaza)의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미 마스지드→로열 콤플렉스→성곽구역의 순서로 둘러보면 된다. 로열 콤플렉스의 입장료는 5달러. 파테푸르 시크리에는 딱 네 곳의 숙소가 있다.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에 거점을 두고 당일치기로 방문하는 것이 좋다.
중국 자오싱, 순박한 그 사람들이 그립다
구이저우(貴州)성. 한국어로 귀주라고 읽히는 이곳은 맑은 날도, 평지도, 돈도 없는 탓에 뭐든지 귀해서 지명마저 변해 버린 곳이다. 비교적 대도시 간 연결은 쉬운 중국이지만, 구이저우의 도시만큼은 달랐다. 현재 내가 있는 곳에서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 성도인 구이양(貴陽)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에어컨은커녕 승차감도 보장할 수 없는 봉고차만 한 작은 버스를 타고 비포장길을 20시간 이상 내달려야 했다.
몇 년이나 굴렸을까. 이리 박고 저리 쥐어 터졌음이 분명한 찌그러진 차체에 올랐다. 8월의 숨막힐 듯한 더위만큼이나 힘든 것은 덜컹거리는 차체였다. 비포장, 그것도 곳곳에 웅덩이가 파인 도로에서 버스는 요동을 쳤고, 내 몸은 그에 따라 이리저리 기우뚱거리며 때로는 점프해 나지막한 천장에 머리를 박곤 했다.
차가 출발하고 4시간쯤 지나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차림새가 깔끔해서 홍콩이나 싱가포르의 관광객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던 뒷자리의 아가씨가 말을 걸었다. 30분 후면 자오싱(肇興)에 도착하는데, 그곳에서 내일부터 축제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줬다. 자오싱이라는 마을은 한족이 아닌 ‘둥족’이라는 소수민족이 사는 작은 마을이라는 말도 덧붙여 줬다.
자오싱 사람들은 오래된 마을과 독특한 소수민족 문화를 매개로 광시(廣西)의 양숴(陽朔), 윈난(雲南)의 다리(大理)나 리장(麗江)처럼 자신들의 마을을 관광지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건 볕도, 땅도, 돈도 없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축제는 객지생활을 몇 년 한 탓에 그나마 깬 축에 끼는 몇몇 마을 젊은이들이 어떻게든 마을을 알리고 싶어 마련한 행사였다. 나는 졸지에 그 마을의 축제를 참관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유일한 외국인이 되었다.
다음날 10시, 마을 초입이 축제 장소였다. 하지만 축제는 시작되지 않았다. 저 멀리 구이양에서 참석하기로 한 높은 분들이 도착하지 않은 탓이다. 12시나 되었을 무렵 드디어 유지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미리 전화라도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갑작스러운 그들의 등장에 사람들은 마치 호떡집에 불이라도 난 듯 이리저리 허둥댄다. 이런 상황 자체를 즐기는 나는 킥킥거리지만, 제대로 형식을 갖춰 자신을 환영해 주길 바랐던 높으신 분들은 영 표정이 좋지 않다.
축제는 자오싱의 관광업이 성장해 두루두루 잘살았으면 한다는 내용을 30분으로 장황하게 늘린 높으신 분의 축사로 시작되었다. 중학생쯤 될 법한 여자 아이들이 종종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다 나에게 들켰다. 내가 먼저 씨익 웃어주면 같이 웃는데, 딱 그맘때 조회시간에 끌려가 장난 거는 기분이다.
지루한 축사가 끝나자 축제는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전통 복장을 하고 나온 여학생들은 북을 치기 시작했고, 또 다른 전통 복장의 아가씨들은 춤을 췄다. 급조된 축제라 프로그램이 있을 리 만무했다. 모든 마을 사람이 거리로 나온 듯했고, 마을광장격인 고루(鼓樓) 앞에서는 장정들이 노동요를 부르며 땅을 밟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이 동시에 벌어지니, 아무리 작은 마을의 볼거리 없는 축제라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다.
본의 아니게 마을 유일의 외국인이 된 나는 모든 장소에 끌려 다니며 이 축제야말로 진정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는 말을 입에 침을 바르며 반복해야 했다.
사실 이방인인 나로서는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이 엉성함이 좋았고, 공산당 매스게임같이 절도 있는 무언가에 가치를 둘 것 같은 경찰국장의 내내 굳은 얼굴에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외지 관람객 10명, 축제 인원 4000명인 이 기묘한 축제는 저녁 나절 트럭에 초대형 천막을 싣고 와 무대를 펼친 유랑극단의 공연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들은 ‘소림사 무술단’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며칠 동안 고작 10명을 위해 축제의 볼거리이기를 자처했던 순박한 사람들이 이제야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쉬고 있다. 내 눈에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무술쇼를 그들은 침을 삼키고, 주먹을 꽉 쥔 채 지켜보고 있다. 두근두근 달음질치는 그들의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릴 지경이다.
문명이 싫어 자신의 나라를 떠난 여행자는 저들의 원래 모습을 사랑하고, 저들은 여행자들처럼 안락하게 여행 다닐 수 있는 형편을 원한다. 서로 다른 목적이 만들어낸 접점은 언제나 비극으로 끝난다. 그들이 변치 않길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지독한 이기심이라는 걸 이성적으로는 알지만, 그래도 아쉽다. 그래서 순박한 사람들은 만나면 오히려 슬프다.
언젠가 이들의 바람이 성사될 무렵에는 저런 얼굴, 저런 표정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저들이 그토록 바라는 양숴가 그랬고, 다리와 리장이 그랬다. 그러고 보니 이 별 볼 일 없는 축제가 은근히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남는 것 같다. 자오싱은 지금쯤 어떻게 변해 있을까? 너덜너덜한 천막을 지고 다니던 소림사 무술단은 지금도 어디선가 벽돌을 깨고 있을까?
≫ 여행정보
구이저우성으로 직접 연결되는 항공편은 없다. 자오싱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은 구이린 공항으로, 매주 2편의 항공기가 인천공항과 연결된다. 구이린∼구이양 간은 국내선 항공을, 구이양∼카이리∼이싱∼자오싱 구간은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자오싱에는 2008년 현재 8곳의 숙소가 있다. 모두 전통 목조가옥으로, 운치 또한 일품이다. 숙소에서 식당을 겸하고 있는데, 둥족의 전통 요리는 물론 볶음밥 같은 간편식도 맛볼 수 있다. 마을을 둘러보는 데는 길게 잡아도 2시간이면 충분하다.
구이저우성으로 직접 연결되는 항공편은 없다. 자오싱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은 구이린 공항으로, 매주 2편의 항공기가 인천공항과 연결된다. 구이린∼구이양 간은 국내선 항공을, 구이양∼카이리∼이싱∼자오싱 구간은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자오싱에는 2008년 현재 8곳의 숙소가 있다. 모두 전통 목조가옥으로, 운치 또한 일품이다. 숙소에서 식당을 겸하고 있는데, 둥족의 전통 요리는 물론 볶음밥 같은 간편식도 맛볼 수 있다. 마을을 둘러보는 데는 길게 잡아도 2시간이면 충분하다.
인도 마날리 '꽃과 설산의 아찔한 유혹'
만약 한국에 머물고 있다면 그저 에어컨 바람이나 쐬며 무더위를 견디겠지만, 이곳은 남한의 33배나 되는 거대한 대륙 인도다. 평원 지대가 최고 48도까지 치솟으며 무더위 신기록을 경신할 때, 북부의 산간지방은 25도 안팎의 시원한 날씨를 자랑한다. 바로 히말라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흔히 히말라야라고 하면 네팔을 떠올리는데, 네팔은 단지 세계 최고봉이 많이 모여있을 뿐, 히말라야 산맥 전체로 본다면 인도 쪽에 더 넓게 분포되어 있다.
히말라야(Himalaya).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눈(Hima)의 거처(Alaya)’라는 뜻을 가진 세계의 지붕. 바로 그 히말라야의 초입인 히마찰 프라데시(Himachal Pradesh)주의 마날리라는 마을로 여행을 떠나고 있다.
찰(Chal)은 산스크리트로 언덕이라는 뜻이다. 즉 눈의 언덕쯤으로 해석되는데, 고대 인도인들이 보기에 3000m쯤은 언덕에 불과했다.
험준한 산지인 탓에 이렇다 할 공항도 없는 이곳. 절벽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놓인 2차선 차도 구간에서의 8시간을 포함해 총 16시간이나 버스로 달려야 한다. 전날 오후 6시 델리를 떠난 버스는 다음날 오전 10시나 돼야 마날리에 도착한다. 지겨울 법한 이 여행의 백미는 아침이었다. 불편한 좌석 탓에 밤새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지쳐갈 때쯤 여명이 밝아오고 버스 커튼 사이로 비치는 아침 햇살과 함께 거대한 설산이 여행자들의 눈에 들어온다.
넓게 펼쳐진 계곡, 벚꽃과 살구꽃이 펼치는 점묘화 같은 아름다움. 무엇보다 영롱한 아침 햇살을 반사시키며 마음을 홀리는 설산까지. 밤새 겪었던 처절했던 고통은 단 한순간, 하나의 풍경 속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다.
인도의 마을, 계곡 하나하나에 힌두교 신화가 없는 곳이 없지만, 마날리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신화 속 무대이기도 하다. 아주 오랜 옛날. 인도의 평원에 살던 마누라는 사람이 있었단다. 그는 어느 날 말하는 물고기를 잡게 된다. 물고기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죽이지 말라고 마누에게 빌었다. 마누는 결국 물고기를 키우다, 더 이상 키울 수 없을 정도로 물고기가 커지자 강에 놓아준다. 물고기는 마누를 떠나며, 곧 세상에 홍수가 닥칠 예정이니 커다란 배를 만들어 동물의 새끼와 식물의 종자를 보존하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배가 완성될 즈음 진짜 홍수가 발생한다. 마누의 배는 약 40일간 망망대해를 방황하다 지금 말하는 이 땅. 마날리 산 중턱에 정박한다. 성서에 나오는 대홍수 이야기와 비슷한 이 신화는 한때 수많은 비교종교학 학자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트렸다고 한다.
마날리라는 말은 마누의 집이라는 의미다.
그저 인도의 산간 마을로 일부 열정적인 순례자들의 땅이었던 마날리가 휴양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40여년 전이다. 베트남전에 대한 대규모 반전 운동, 프랑스의 68혁명, 일본의 안보투쟁 등 1960년대 말을 뜨겁게 달궜던 변혁의 기운이 사그라지며 사랑과 미소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히피들이 등장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히피들은 전 세계, 특히 아시아 일대를 유랑하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했고, 여행지로서의 인도가 발견되었다.
히피들은 인도 전역을 유랑하며 말 그대로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풍광 좋은 관광지를 개발해 냈다. 북부의 마날리, 남부의 고아 해변, 그리고 서부의 푸슈카르까지….
마날리의 자유분방함은 4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히피들이 들어와 하룻밤 유숙을 하거나 농가의 방을 빌려 지내던 오래된 집들은 이제는 게스트 하우스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전원풍으로 한국의 펜션을 방불케 하는 좋은 곳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전형적인 농가의 모습을 갖춘 채, 1층은 외양간으로 2층에만 객실을 들인 곳도 있다. 여름이면 외양간 특유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 나무를 얼기설기 조립해 만든 삐거덕거리는 오래된 느낌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머문다.
마을 초입을 가득 메운 거대한 삼나무 숲은 북구 노르웨이의 신화 속 풍경을 연상시키지만, 시바신을 모시는 사원의 사제들은 향을 피워올리며 이곳이 인도임을 강조한다.
인도인들에게 마날리는 사과 특산지다. 이곳에서는 푸석거리는, 목이 멜 정도로 물기가 없는 인도사과를 맛볼 수 있다. 사실 마날리에서 사과는, 맛보다는 풍경이다. 가을철 나무마다 점점이 박혀 있는 붉은색의 묘한 유혹은 여행자로 하여금 길을 떠나게끔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푸른 하늘, 완벽한 설산, 거인과도 같은 삼나무 숲에서 듣는 힌두교의 웅장한 대홍수 전설. 이 가을. 장마가 끝난 인도의 하늘은 어디나 청명하기 그지없다. 마날리의 숲길을 걸으며 사과 한입 베어 먹고 싶은 날이다.
≫여행정보
마날리로 들어가는 관문 도시는 델리다. 인도 국내선 항공을 타면 마날리에서 3시간 떨어진 쿨루(Kullu)라는 마을까지 들어갈 수 있다. 이곳에서 지프를 대절해 마날리로 갈 수 있다. 문제는 이 비행기가 60인승가량의 초소형 기종이라 사람들이 탑승을 꺼린다는 사실. 이 때문에 많은 여행자들은 델리에서 버스를 이용한다. 무려 16시간의 긴 여정. 2006년부터 냉난방이 되는 볼보(Volvo)버스가 투입돼 그나마 편리해졌다. 마날리의 특산품은 송어와 사과주스다. 송어는 빙하가 녹은 비아스 강에서 손으로 잡는데. 최근에는 수요가 급증하며 양식 송어가 점점 자연산을 대체하고 있다. 1983년 아시아 농업 특산품 전람회에서 동메달을 땄다는 사과주스는 이 일대의 자랑거리. 한국에서 사 먹는 것과 같은 노르스름한 투명의 느낌이 아니라, 집에서 갈았을 때 나타나는 탁한 느낌이다. 한 병에 700원가량인데 묘한 중독성이 있어 자꾸 찾게 된다.
마날리로 들어가는 관문 도시는 델리다. 인도 국내선 항공을 타면 마날리에서 3시간 떨어진 쿨루(Kullu)라는 마을까지 들어갈 수 있다. 이곳에서 지프를 대절해 마날리로 갈 수 있다. 문제는 이 비행기가 60인승가량의 초소형 기종이라 사람들이 탑승을 꺼린다는 사실. 이 때문에 많은 여행자들은 델리에서 버스를 이용한다. 무려 16시간의 긴 여정. 2006년부터 냉난방이 되는 볼보(Volvo)버스가 투입돼 그나마 편리해졌다. 마날리의 특산품은 송어와 사과주스다. 송어는 빙하가 녹은 비아스 강에서 손으로 잡는데. 최근에는 수요가 급증하며 양식 송어가 점점 자연산을 대체하고 있다. 1983년 아시아 농업 특산품 전람회에서 동메달을 땄다는 사과주스는 이 일대의 자랑거리. 한국에서 사 먹는 것과 같은 노르스름한 투명의 느낌이 아니라, 집에서 갈았을 때 나타나는 탁한 느낌이다. 한 병에 700원가량인데 묘한 중독성이 있어 자꾸 찾게 된다.
베이징 만리장성 금산령∼사마대 구간 트레킹, 자박자박 밟으며 오른다… 모진 풍파 견딘 이천년 세월 속으로
오늘은 벼르고 별렸으나 이미 세 차례나 바람을 맞은 당일치기 짧은 여행을 떠나려 한다. 만리장성 트레킹. 베이징을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만리장성 구경을 이제야 가느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베이징 근교의 만리장성은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팔달령을 비롯해 금산령, 모전욕, 거용관, 사마대 등 많은 코스가 있다. 팔달령이야 남녀노소 누구나 찾을 수 있고 심지어 자동차까지 달릴 수 있는 넓이를 자랑하지만, 그 외의 코스는 그리 만만한 동네가 아니다. 휘황찬란한 대로변에서 안쪽으로 한 블록만 들어가면 급격히 1960년대 분위기로 바뀌어 버리는 중국에서 외국인이 찾지 않는 구간을 돈을 들여 보수했을 리가 만무하다.
심지어 아직까지 대중 교통수단 조차 정비되지 않아서, 히치하이킹을 하거나 현지 마을 사람들이 타는 ‘빵차’라는 일종의 합승택시를 이용해야만 한다. 서너 번은 말해야 알아 듣게 만드는 ‘나홀로 중국어’를 구사하는 나에게 현지인, 그것도 시골 사람들과 흥정을 할 일이 생긴다는 것은 결코 편안한 일은 아니다.
금산령 장성. 만리장성의 시작인 산해관에서 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까지 모두 둘러본 터라,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숙제하는 마음으로 왔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상상 이상이다.
아침 햇살 때문에 더 그랬을까? 황토 고원의 대지를 휘감으며 전진하는 장성의 매혹적인 곡선은 감동적이었다. 갑자기 시간을 뛰어넘어 고대에 도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 그리고 이내 혼자라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잠시 잠깐 상상이 현실을 압도했는데, 나는 진짜로 병사들의 함성과 불타는 금산령 장성을 보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오늘 일정을 취소하고 하루종일 이곳에 앉아 있다 하산할까 하는 충동도 일었다. 하지만 그 놈의 역마살. 여행이 직업이 된 이유는 한곳에 진득하게 앉아 있는 재주가 없어서다. 그냥 묵묵히 걷다보면 더 나은 곳이 나온다는 막연한 기대는 언제나 나에게 길을 재촉한다.
길은 험했다. 아니 험한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직립보행한다는 사실을 잊게 해 줄 만큼 계단은 가팔랐고, 어떤 곳은 발을 디딜 만한 곳도 없어 ‘네발 보행’을 해야만 했다. 외국인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바로 이런 거친 길 때문이다. 이것이 장성의 실제 모습이었을 것이다. 현대 중국의 아버지인 마오쩌둥이 남아로 태어나 장성에 한번 오르지 못한다면 대장부가 아니라고 했다는데, 사실 장성은 우리가 보는 것처럼 멋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이렇게 길게 쌓은 성은 방어 용도였고, 이는 장성 너머에 강력한 세력이 존재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중국 역사에서 장성이 중요했던 왕조는 늘 약소국이었다. 전국 시대를 통일했지만 기반도 다지기 전에 멸망해 버린 진(秦)이나, 왜구 하나 변변히 막지 못해 해안지대 모든 주민을 소개한 명(明)이 그랬다.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은 모두 유실되어 버렸고, 우리가 밟고 있는 모든 장성 구간은 명나라 때 만들어졌다. 명의 뒤를 이은 청나라는 장성 바깥까지 판도를 넓혔던 나라니 장성이 중요하지 않았을 터. 때문에 장성의 적은 바깥의 적군이 아니라 비바람과 세월의 때였다. 아니 그들은 장성을 천천히 갉아 먹었으니 진정한 장성의 적은 만리장성 안쪽에 사는 사람들이었을 게다.
만리장성은 지역에 따라 건설한 자재가 달랐다. 베이징 일대는 벽돌이지만, 서쪽 실크로드 쪽은 짚을 섞은 흙벽돌이고, 그냥 흙반죽을 올려버린 곳도 있다. 장성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던 시절에 장성 안쪽에서 살던 사람들은 벽돌을 파내 자기 집을 짓고, 짚이 섞인 흙벽돌을 부셔 비료로 사용했다. 요즘 들어서는 장성의 골동품적 가치 때문에 벽돌을 빼가는 사람이 점점 늘어난다고 하니, 군데군데 길이 끊어지고, 때로는 깜깜 절벽과 조우하는 일은 금산령 장성이 별나서가 아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완벽한 돌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만나는 지점에 돈대(墩臺)라는 건물을 세워 그나마 지친 다리를 쉬게 했고, 이 돈대 20여개를 지나면 완만한 내리막이 되며 금산령 장성은 끝이 나고, 사마대 구간으로 접어든다. 금산령이 둥글게 반원을 그리며 이어지는 코스라면, 사마대는 보다 더 직선적이다.
지난 4∼5년간, 그나마 여행자들의 관심을 받아온 탓인지 금산령보다는 훨씬 정돈된 길을 자랑하고 있었다. 심지어 로프를 타고 장성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드는 플라잉 폭스(Flying Fox)라는 탈거리를 비롯해, 자그마한 유원지를 꾸며 유람선도 운영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들며 이곳 또한 불편했던 소박함이 영악한 편리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금산령에서 느꼈던 감흥이 싸늘하게 식어간다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개발이 진행 중이라는 말은 언제나 김을 빠지게 한다.
내가 본 곳을 남도 보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여행이 너무 쉬워지면 감동이 옅어지기 때문이다. 죽어라 내달려 하루에 하나만 보는 것은 비효율이지만, 하루에 열댓 군데씩 찍고 와서 어디가 어딘지조차 모르는 불경을 저지르지는 않게 한다. 이런 편안함이 싫어서 오지를 찾는 여행자는 더 떠돌게 된다. 다시 갔을 때, 왜 그때의 향기는 사라져 버리는 걸까?
≫여행정보
가는 방법이 복잡하다. 베이징 동직문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청더(承德)행 버스를 타고 금산령 장성 입구(金山嶺口)에서 세워 달라고 말해야 한다. 버스에서 내리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요즘은 경운기들이 금산령 입구에 서 있기도 한다. 만약 경운기들이 없다면 히치하이킹을 해야 한다. 금산령 장성 입구에서 금산령 장성까지는 6㎞나 떨어져 있다. 금산령∼사마대 구간은 도보로 약 6∼8시간가량 소요된다. 때문에 아침 일찍 나서지 않으면 오도가도 못하는 참사가 벌어진다. 다행히 사마대 장성 쪽에 유스 호스텔이 있어 비상시에 이용할 수 있다. 이 구간에 식당은 전혀 없다. 초콜릿 같은 고열량 음식과 충분한 식수는 필수품. 길이 미끄러우니 등산화도 준비해야 한다. 1년에 1∼2명씩 추락사 하는 곳이니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가는 방법이 복잡하다. 베이징 동직문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청더(承德)행 버스를 타고 금산령 장성 입구(金山嶺口)에서 세워 달라고 말해야 한다. 버스에서 내리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요즘은 경운기들이 금산령 입구에 서 있기도 한다. 만약 경운기들이 없다면 히치하이킹을 해야 한다. 금산령 장성 입구에서 금산령 장성까지는 6㎞나 떨어져 있다. 금산령∼사마대 구간은 도보로 약 6∼8시간가량 소요된다. 때문에 아침 일찍 나서지 않으면 오도가도 못하는 참사가 벌어진다. 다행히 사마대 장성 쪽에 유스 호스텔이 있어 비상시에 이용할 수 있다. 이 구간에 식당은 전혀 없다. 초콜릿 같은 고열량 음식과 충분한 식수는 필수품. 길이 미끄러우니 등산화도 준비해야 한다. 1년에 1∼2명씩 추락사 하는 곳이니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