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한 곡의 노래가 여행지의 낭만적인 정취를 환기하거나 여행에 대한 욕망에 활활 불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룹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여수 밤바다’가 젊은이들에게 여수의 밤 바닷가를 강력한 팬터지로 받아들이게 했듯이 말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여수 밤바다’가 있다면 중년 이상의 세대에게 이에 버금가는, 아니 가사로 보자면 훨씬 더 빼어난 노래가 한 곡 있습니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로 시작하는 가수 최성원의 ‘ 제주도 푸른 밤’이 그것입니다. 제주의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노라면 저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감미로운 선율도 선율이지만, 노래에 등장하는 ‘푸른 밤’의 상징적 색채감은 그야말로 압권이지요. 하지만 제주에서 그 푸른 밤을 볼 수 있는 곳을 여간해서는 찾기 어렵습니다. 사실 제주에서는 해가 지고 나면 그다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푸른 밤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해가 저물 무렵부터 깊은 밤까지 해안도로부터 계곡까지 제주의 이곳저곳을 뒤졌습니다. 거기서 만난 제주의 밤은 진짜로 노래처럼 ‘푸른 색’이었습니다. 제주의 푸른 밤을 만날 수 있는 곳들로 안내합니다. 아 참, 노래를 읊조리다 보니 가사에 이런 대목이 있더군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리 싫어요. 신문에, TV에, 월급봉투에….” 두고 가야 할 것으로 신문을 꼽았지만, 그렇다고 신문을 두고 가지는 마시기를…. 이제부터 제주의 푸른 밤을 즐기는 방법을 찬찬히 알려드릴 테니 말입니다.
# 제주도 푸른 밤을 해안도로에서 만나다 제주 바다는 수심에 따라 혹은 시선의 방향에 따라 코발트빛에서 에메랄드색까지 다채로운 채도를 보여준다. 이런 바다를 바짝 끼고 도는 해안도로야말로 제주 여행의 필수코스다. 그렇다면 밤의 해안도로는 어떨까. 칙칙한 무채색의 검은 바다를 상상했다면 그거야말로 오산이다. 제주에서 가장 빛나는 ‘푸른 밤’은 가로등 불빛 아래 문득 마주한 해안도로에서 목격할 수 있다. 해안도로로 접어들자 가로등 불빛이 뿌연 안개 사이로 조명처럼 뿌려졌고, 그 빛을 받은 해안가의 초지가 초록빛으로 빛났다. 그 끝에 연인이 앉아 있는 벤치 하나. 그 너머로 환하게 밤바다에 떠있는 한치잡이 배의 집어등 불빛이 가득했다. 해가 막 지고 난 바다 위로 가로등과 집어등의 불빛은 짙푸르게 빛났다. 가로등과 집어등에서 시작된 불빛은 마치 스펀지에 잉크가 스미듯 대기를 점차 푸른 빛으로 바꾸었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제주도 푸른 밤’이란 바로 이 순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모든 제주의 해안도로가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푸른 밤을 맞이하기에 딱 적당한 곳이 바로 용담에서 이호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다. 제주공항에서 10분 남짓. 공항과 바다를 끼고 놓인 이 도로는 제주도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해안도로다. 이후에 제주 곳곳에 해안도로가 놓였지만 용두암을 지나는 이 도로는 여전히 제주 최고의 해안드라이브 코스로 손꼽힌다. 용담 - 이호를 잇는 해안도로가 ‘밤의 명소’로 꼽히는 것은 도로를 따라 휘황하게 늘어선 횟집들과 카페촌 덕분이다. 낮이라면 소란스러웠을 공간이지만, 밤에는 이런 번잡스러움이 되려 운치 넘치는 풍경이 된다. 용담 - 이호 간 해안도로 드라이브는 꼭 용담 쪽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쪽이 바다를 더 바짝 끼고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쪽 이호해변에서 출발하면 건너편 차선 너머로 바다를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해안도로의 종착지는 이호해변이 된다. 이호해변에는 멀리 밀려나간 방파제 위로 목마 형상을 한 두 개의 등대가 서있다. 낮에 보면 등대모양이 좀 촌스럽다 싶기도 하지만, 밤이면 희한하게도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사실 이호해변을 제주의 다른 해변보다 월등하다고 할 수는 없다. 모래가 좀 거칠고 돌들도 간혹 차이는 까닭이다. 제주의 내로라하는 다른 해수욕장을 두고 이곳에서 낮시간에 해수욕을 즐기겠다면 말릴 법도 하겠다. 하지만 밤이라면 사정은 다르다. 낮 동안 달구어진 모래를 맨발로 밟으면 발바닥으로 금세 온기가 전해진다. 온통 푸르른 어둠이 내리고 등대불만 반짝거리는 해변에서 사각사각 모래를 밟으며 산책을 하노라면 그제서야 제주에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 용의 연못에 들어 조각배 속의 신선을 기다리다 제주시에는 ‘용의 연못’이 있다. 이름하여 ‘용연(龍淵)’이다. 제주를 찾은 관광객들은 대부분 알려진 명소들이 집중돼 있는 제주 남쪽 서귀포 일대나 동쪽 일출봉, 서쪽 차귀도 쪽으로 몰려간다. 그래서 정작 공항이 있는 제주시의 명소는 이른바 ‘등잔 밑’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여행자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곳 중에서 대표적인 곳이 바로 용연이다. 용연은 백록담에서 흘러내린 한천의 하류이자 민물과 바다와 만나는 계곡이다. 주위에는 7~8m 높이의 병풍바위가 협곡을 이루고 있고, 그 협곡 사이에서 민물과 바다가 합쳐지는데 물이 더 없이 맑다. 용의 이름을 가졌으니 거기에 전설 하나쯤 없을 리 없다. 오래전에 가뭄이 들어 고을 사또가 기우제를 올리면서 짚으로 용의 꼬리모양을 만들어 물에 넣었단다. 순간 비가 억수같이 퍼부으면서 짚이 용이 돼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해서 용연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용연은 예부터 제주의 최고 명소였다. 제주를 다스리던 목사(牧事)들은 너나없이 용연에 배를 띄우고 풍류를 즐겼다.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가 부임해 제주도내 고을을 순시할 때의 장면을 그린 조선시대 화첩 ‘탐라순력도’에도 어김없이 용연의 경관이 등장한다. 협곡의 바위에는 옛 사람들이 새긴 탄성 어린 글귀들이 있다. 신선이 노닐었다 해서 ‘선유담(仙遊潭)’이란 글귀도 있고, 협곡의 바위가 비췻빛 병풍과 같다고 해서 ‘취병담(翠屛潭)’이란 글귀도 새겨져 있다. 맨눈으로는 쉽게 확인할 수 없지만, 용연의 풍경을 읊은 빼어난 시들도 곳곳에 새겨져 있다. 그 중 한 편을 읽어본다. “이리저리 굽이진 절벽은 / 신선과 무릉도원으로 통하는 곳인 듯 / 홀연히 바라보니 조각배 떠오네/어쩌면 신선을 만날 수도 있으리.” 옛 사람들은 뜻밖에도 용연의 가장 빼어난 정취를 낮이 아닌 밤에 찾았다.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목사나 판관들은 해마다 음력 7월16일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용연을 찾았다고 했다. 휘영청 밝은 보름 밤에 불을 켠 배를 물 위에 띄우고 뱃놀이를 즐기기 위함이었다. 이런 밤뱃놀이의 풍경은 예로부터 ‘영주(제주의 옛이름) 12경’ 중 하나로 꼽혔다. 지금도 용연에 조명시설을 갖추고 밤마다 불을 밝히는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다. 용연의 바위벼랑 한쪽에 육각정자에도, 협곡 저 깊은 안쪽에도 조명을 설치해 놓았다. 해가 저물고 사위가 어둑해지면 불을 켜는데, 비록 등불을 켠 배는 없지만, 협곡 사이에 출렁다리를 걸쳐 놓고 발광다이오드(LED)를 설치한 다리에 불을 밝힌다. 거기에 자리를 펴고 오래도록 머물면서 보아야 할 정도의 경치라고까지는 말할 수는 없지만, 출렁다리에서 조명이 켜진 협곡의 못을 바라보며 여름밤 못 위에 배를 띄우고 풍류를 즐겼을 옛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운치 있다. # 밤이면 불을 밝히는 폭포를 찾아가는 길 제주 남쪽의 서귀포 쪽에도 야간 명소는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천지연폭포다. 제주를 대표하는 폭포니 만큼 제주에 가보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아는 곳이지만, 밤의 정취가 빼어나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폭포의 밤 정취가 낮보다 낫다고 ‘단언’까지야 못하겠지만, 낮에는 낮대로의 매력이 있고, 폭포에 조명이 켜지는 밤에는 그 나름의 또 다른 정취가 있다. 폭포의 조명은 해질 무렵 켜져서 오후 11시까지 밝히는데, 오후 10시20분까지는 매표를 마쳐야 입장할 수 있다.
아예 멀찌감치 물러서서 숲 사이로 조명이 밝혀진 천지연폭포를 굽어볼 수 있는 자리도 있다. 잔디와 나무들로 잘 가꿔진 서귀포의 칠십리시공원이 바로 그곳이다. 이름만 듣고는 ‘시(市)공원’으로 생각하기 쉽겠지만, 공원 곳곳에 세워진 시비(詩碑)와 마주치면 ‘시(詩)공원’이란 걸 알 수 있다. 공원입구에는 두 곳의 무료주차장이 있는데, 여기다 차를 세우고 공원 안으로 들어서면 제주도를 노래한 다양한 시와 노래가사들이 돌 비석에 새겨져 있고, 그 주위로 산책코스가 조성돼 있다. 저녁 나절 서귀포 일대의 야경을 바라보며 즐기는 산책코스로 나무랄 데 없는 곳이다. 이 공원 한쪽의 깎아지른 벼랑 쪽에 ‘폭포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 서면 천지연폭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낮에는 한라산의 능선과 폭포가 한눈에 들어오고, 밤에는 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진 폭포의 모습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천지연폭포를 바라보는 자리로는 명당도 이런 명당이 없다. 천지연폭포 앞의 너른 주차장은 밤이 되면 서귀포 시민들이 산책이나 운동을 즐기는 활기찬 광장으로 탈바꿈한다. 주차장에서 서귀포 일대의 야경을 올려다보며 산책을 즐기다 내친 김에 조형미 넘치는 다리 ‘새연교’를 건너 서귀포항 앞의 떠있는 무인도 새섬까지 다녀와도 좋겠다. 새연교는 아예 서귀포 일대의 야경을 랜드마크로 설계된 다리인 만큼 밤이면 형형색색 불빛으로 빛난다. 이 다리를 건너서 새섬으로 들어서면 밤바다에 어둡게 떠있는 문섬과 범섬을 볼 수 있다. 섬을 한 바퀴 도는 데는 20분 남짓. 섬 안의 숲길에는 모기가 많으니 긴팔과 긴 바지는 필수이고, 오후 11시쯤 다리와 새섬의 조명이 꺼지니 주의해야 한다. # 제주의 밤 관광 최강자, 한화 아쿠아플라넷 제주 밤시간대에 관광할 곳이 마땅찮은 제주에 대규모 아쿠아리움이 들어섰다. 한화 호텔&리조트가 지난 14일 개관한 ‘한화 아쿠아플라넷 제주’다. ‘아시아 최대규모’니, 연면적 2만5600㎡에 이르는 따위의 백 번의 설명보다, 한 번만 가서 보면 압도하는 시설의 규모나 수조의 크기에 입이 딱 벌어지고 만다. 기존의 국내 아쿠아리움과는 비교불가. 규모부터 전시시설이나 보유 어류의 숫자에 이르기까지 차원이 아예 다르다. 제주 근해에서 포획한 고래상어 두 마리가 만타가오리와 함께 넉넉하게 헤엄치고 있는 초대형 메인 수조의 크기는 가로 23m에 높이 8.5m다. 아이맥스 영화 스크린의 크기란다. 이 하나의 수조에 서울 63빌딩의 63씨월드 수조에 담긴 물의 6배인 6000t의 물이 담긴다. 메인수조 말고도 펭귄들이 노니는 ‘펭귄 플라넷’, 열대우림을 테마로 꾸민 ‘아쿠아사파리’ 소라와 불가사리는 물론 까치상어까지 만질 수 있는 ‘터치풀’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오션 아레나’에서 펼쳐지는 바다코끼리 공연도 관람객들이 연신 웃음을 터뜨리게 할 정도로 충실하다. 돌고래 공연에다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 공연까지 볼 수 있다. 제주에서 아쿠아플라넷은 절대강자로 군림할만하다. 하지만 빡빡한 일정에 제주를 찾은 관광객들이라면 제주의 빼어난 자연경관과 아쿠아리움을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겠다. 비가 내리는 날이라면 망설임 없이 아쿠아플라넷을 찾으면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시간을 쪼개기가 쉽잖을 듯하다. 그렇다면 밤 시간을 이용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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