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허 스님 우리 조상들은 차로 마음을 가다듬고, 인생과 자연을 생각하며, 나아가 우주를 만나는 매개체로 삼았다. 또한 차로 손님을 접대하고 조상의 혼백을 맞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전통차 문화는 커피와 주스 등 서양음료에 밀려 자취를 잃어가고 있다. 한국 전통차는 완전 야생으로 자생하는 차나무 잎을 일일이 손으로 비비고 덖어 만든 것이다. 일본 차나 중국 차와는 만드는 방법이나 향, 색깔, 맛, 효능이 전혀 다르다. 앞으로 1년간 「불광」의 지면을 통해 한국 전통차의 참모습을 밝혀볼 요량이다. 이를 계기로 한국차의 정체성이 확고히 새겨지고, 우리의 품격 높은 차문화가 새로운 활력으로 두루 퍼져나가길 기대해본다. 한국의 고대 차 불교와 함께 일상에 깊이 스며든 차 문화
금둔사 삼층석탑 1층 몸돌에 새겨진 불상을 향하여 차를 공양하는 공양상.
한국과 중국의 차는 달랐다
‘차’라는 말은 한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쓰였던 한민족의 언어였으며,‘茶’는 중국문자인 한자이다. 한자가 유입된 때는 고조선 말엽쯤이라 하기도 하고 삼국시대라 하기도 한다. 한자가 들어오기 전, 문자는 따로 있지는 않았으나 생활에 필수적인 물 이외에 차라는 고급 음료를 만들어 마셔왔던 것이다. ‘차’라는 말로 먼저 불리다가 ‘茶’라는 문자가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자 ‘차’와 ‘茶’를 같이 사용하여 왔다. 그러나 ‘차’와 ‘茶’는 이름만 같이 사용한 것일 뿐 그 실질은 매우 달랐다. 중국의 차는 그 기원이 BC 2737년이다. 염제 신농씨炎帝神農氏가 모든 식물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정할 때, ‘茶’라는 특수한 식물을 선별하여 음용하게 하였다는 기록이『식경食經』에 쓰여 있다. 한국은 BC 2333년에 단군이 유라시아 대륙의 한반도를 중심으로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워 한민족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백제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부 인도, 중국 남부와 문화 교류를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 무렵 중국의 차 종자가 한국에 처음 유입되었다.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 백제에 불교를 전래한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중국의 양자강 부근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지금의 전라남도 서부 영광땅 불갑사와 나주의 불회사 부근에 심은 것이 시원始原이다. 이로부터 한반도 남부의 양호한 자연 조건 속에서 중국의 차나무가 연륜이 누적하며 토착화되어 완전한 한국 차나무의 주종이 된 것이다. 중국 차 종자가 주종차가 되어 한반도에서 토착화되기 전에, 한민족이 차라는 이름으로 마셨던 차는 과연 어떤 것인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문화란 인간이 기존의 삶에서 일정한 목적과 생활이상 실현을 이룩하고자 하는 정신적, 물질적 소득을 말한다. 문화의 기본은 생존의 필수조건인 의식주로부터 출발한다. 문화는 순수한 예지의 창달로 독자적으로 발생하기도 하지만, 외래문화가 유입되어 그 지역의 조건과 정서에 영합하면 외래란 형태가 변질되어 그 민족의 창의력을 바탕으로 민족화하기도 한다. 편의상 한국의 차문화 시대를 중국 차 종자가 들어오기 전의 고대 차, 중국 차 종자가 유입되어 토착화된 주종차 시대, 서구문물이 범람하여 주종차가 약화되는 현대생활 차로 구별해 기술하고자 한다. 1. 지허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순천 금전산 금둔사 일주문.
2. 순천 선암사 칠전선원 달마전 석정.
3. 순천 선암사 야생차밭.
인간은 이 지구상에 400~500만 년 전에 등장하여 자연에서 생존을 시작하면서 진화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과정에서 문화는 끊임없이 형성되었다. 한반도에서 한민족이 주거를 시작한 것은 전기 구석기 시대로 약 250~200만 년 전이라 한다. 여기서부터 한반도의 문화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건전한 국가 사회를 이룩한 것은 BC 2333년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할 때이니, 한민족은 이 지구상에 몇 안 되는 고대문명을 구가한 것이다. 한민족은 일찍이 흰 옷을 입어 통칭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했다. 농경지를 일구어 쌀과 보리를 생산하였고, 생활의 필수적인 물 이외에 고급 음료로 차를 개발하였으며, 구들을 놓아 집을 짓고 살았다. 그 시대에 한민족이 애용한 차는 식용이 가능한 조목의 열매, 뿌리, 줄기와 잎들을 끓이거나 발효하여 물에 타 마시는 것이었다. 그 중 구전에 의하여 지금까지 전해진 차는 백산차白山茶와 오가피차五加皮茶, 오미자차五味子茶등이 있다. 백산차白山茶는 한반도의 북부에서 마시던 차로, 백두산 언저리에 자생하는 진달래과의 늘 푸른 관목으로 박하향과 솔잎향이 나는 잎을 따서 달여 마셨다 한다. 하지만 지금은 한반도가 분단되어 확인할 수가 없다. 오가피五加皮나 오미자五味子는 한반도의 남부 산기슭에 자생하는 약용식물이다. 오가피는 줄기를, 오미자는 열매를 물에 다려 마시며 각각 오가피차, 오미자차라 하였다. 그 외에도 더 있었겠으나 자세히 언급한 사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차 문화의 일대 혁명
문화가 발달한 한민족은 좀 더 향상된 음료를 구가하기 위하여 한반도에 자생하는 식물을 산발적으로 개발해나갔다. 삼국시대 중엽에 이르러 중국으로부터 불교와 함께 차茶라는 이름을 가진 주종식물이 들어와 차 문화에 일대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국왕이 스스로 선봉에 서서 경쟁적으로 대사찰을 건립하고 각종 불사를 일으켰다. 또한 불교의 계율을 부분적으로나마 온 국민이 지키도록 국법을 만들기도 하였다. 특히 신라에서는 삼국통일의 초석이 된 화랑도를 만들어 세속 5계를 지키며 무술을 연마하게 할 뿐 아니라, 요산요수하며 차생활로 정신세계를 창달케 하였다. 그런가 하면 경덕왕은 지나가는 충담이란 승려를 불러 차를 얻어 마시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노래인 ‘안민가安民歌’를 즉석에서 지어 올리게 하였다. 비록 당나라의 전적인 지원을 받아 삼국을 통일한 한계가 있지만, 한민족간 전쟁을 그치게 하는 데 공헌한 신라는 왕궁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불교와 차를 흠앙하게 되었다.
통일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교류가 빈번해졌다. 육조혜능 손제자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선풍이 중국 천하를 진동하게 할 때, 신라의 많은 승려들이 찾아가 그 문하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후 신라에 돌아와 선다일여禪茶一如의 가풍을 이어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창시하였다. 승려들은 귀국과 함께 차 씨를 가져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산하사찰까지 번성하게 하였고, 사신 대렴이 차 씨를 가져오자 왕은 이를 지리산 남쪽에 심게 하였다.
그 후 고려 건국 때부터 고려 말까지 불교는 국교가 되었다. 고승高僧을 초빙하여 국사와 왕사를 제도화하고 나라의 크고 작은 행사에 다례茶禮가 행해졌다. 또한 모든 민간의 명절과 제사에 다례 또는 차례가 최우선시 되었다. 또한 일상까지 깊이 스며들어 개인끼리 만날 때나 초대할 때도 “차 한 잔 하자.”는 말이 통용되었다. 이 풍속은 조선시대까지 천년을 지속하였다. 김홍도, <초원시명도>
지허 스님
1941년 전남 보성 벌교 출생. 1954년 전남 선암사에서 만우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59년 선암사 강원에서 사교과와 대교과를 수료하고 해인사, 통도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선암사 주지, 태고종 중앙선원장, 제7~11대 태고종 중앙종회의원 등 태고종단의 주요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현재 금둔사 조실로서, 야생차밭을 가꾸며 한국 전통차의 맥을 고집스럽게 이어오고 있다.'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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