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나고 나면 이제 본격적인 휴가 시즌입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전투 같은 휴가’는 올해도 어김없겠지요. 이달 말부터 다음달 초까지 피서객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도로는 차들로 붐비고, 피서지는 인파들로 넘쳐날 것입니다. 너나 없이 피서지로 내달리는 휴가 시즌에 ‘전투 모드’는 불가피합니다. 일찌감치 행선지를 결정하고 숙소 선점에 성공했다고 해도 전투는 계속됩니다. 도로 위에서는 다른 차들을 이겨야 하고, 남들에 앞서 자리를 재빨리 확보해야 하며, 자리를 노리는 다른 피서객들을 밀어내기 위해 한시도 사주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가야 할 식당도 한 점 후회가 남지 않도록 준비해야 하고, 봐야 할 것은 단 하나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여름 휴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답이 있으니 ‘되도록 멀리 떠나는 것’입니다. 경험으로 미뤄 보면 거리가 멀수록,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일수록 느긋하고 편안한 휴가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편리하게 접근하되 불편한 휴가를 즐기느냐, 불편한 접근성을 감수하고 여유있는 휴가를 즐기느냐. 경험으로 보자면 후자가 훨씬 더 만족스러웠습니다. 예약이 좀 늦었더라도, 어쩔 수 없이 피크 시즌에 움직일 수밖에 없더라도 일단 휴가지에 당도하면 느긋한 휴식을 즐길 수 있으니 말입니다. 휴가 시즌을 앞두고 굳이 가닿기 불편한 남도의 섬을 찾아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 불편한 접근성이 만든 고즈넉한 바다 풍경 전남 신안군은 섬으로만 이뤄져 있다. 흔히 ‘1004개의 섬’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그냥 수사(修辭)일 뿐, 신안군에 속한 섬은 정확히 829개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땅에 있는 섬의 26%에 해당하는 숫자다. 신안의 섬이 가진 첫 번째 매력이라면 ‘지리적 격리성’이다. 목포까지 먼 길을 가서 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니 그 수고로움이 다른 여행의 몇 곱절이다. 거리도 거리지만, 뱃삯도 만만찮다. 바람이 불거나 안개가 짙으면 그나마 여객선 운항도 중단된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섬 안에서 아예 발이 묶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건 매력이 아니라 ‘단점’으로 꼽아야 할 일 아니냐는 반문이 나올 법하다. 하지만 적어도 휴가철만큼은 그렇지 않다. 불편한 접근성이 섬으로 드는 피서객들의 숫자를 적절하게 통제한다. 사실 신안의 섬은 이런 통제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웬만한 인파로는 다 채우지 못하는 끝 간 데 없는 광활한 해변을 섬마다 품고 있으니 말이다. 여객선마다 꽉꽉 채워 관광객을 들이고, 이들이 모두 해변으로 몰려가 해수욕을 즐긴다 해도 해변에서는 고작 몇 개의 점처럼 느껴질 뿐이다. 이러니 신안의 섬에서는 피서철에도 ‘북새통’이란 게 아예 없다. 해변은 고즈넉하고, 백사장은 적적하다. 흥청망청 떠들썩한 피서지 분위기를 원하는 이들이라면 아예 발을 디밀지 않는 게 좋겠다. 대신 평안하고 여유로운 휴식을 원한다면 섬으로의 휴가는 더할 나위 없다. 신안을 대표하는 섬이라면 단연 흑산도와 홍도다. 근래 관광지로 부각되고 있는 증도도 빼놓을 수 없다. 불편한 접근성에도 불구하고 흑산도와 홍도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관광객들이 넘쳐난다. 증도에도 연륙교가 놓이고 리조트가 개발되면서 여름 휴가철에는 숙소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이런 섬들은 관광지로는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대신 고즈넉함이란 미덕을 잃었다. 그러나 신안에는 이들 섬 말고도 826개의 섬이 더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다른 섬들의 풍광이나 정취도 못지않다. 아니 해변의 너른 백사장이나 고즈넉한 분위기로 보자면 오히려 휴가 목적지로는 한 수 위라고도 할 수 있겠다. 흑산도와 홍도, 그리고 증도의 뒤를 이어 명소로 부각될 만한 전남 신안의 서남해안 섬들을 꼽아 보자면 하의도와 신도, 도초도, 비금도를 들 수 있다. 그 섬을 하나하나 디디면서 독자들에게 올여름 휴가의 초청장을 띄운다. # 치열했던 농민운동 자취 남아 있는 하의도 신안의 하의도라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먼저 떠올리는 게 당연하겠다. 하의도는 김 전 대통령이 나고 자란 섬이다. 지금은 절반 이하로 줄었지만 한때 1100여 가구가 살아 하의도에서 가장 컸다는 대리(大里)마을. 그 앞쪽의 마을을 전광(前廣), 뒤쪽을 후광(後廣)이라 불렀는데, 김 전 대통령은 후광마을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 목포로 유학을 가면서 고향을 떠났지만, 김 전 대통령은 고향 마을의 이름인 ‘후광(後廣)’을 평생 자신의 호로 삼았다.
생가 주변과 안채 방안에는 김 전 대통령의 성적표부터 젊은 시절의 사진, 선거 벽보 등이 전시돼 있는데, 자그마한 추모관 한쪽에는 이명박 대통령 내외가 김 전 대통령의 영전에 분향하는 사진도 걸려 있다. 하의도에 들렀다면 김 전 대통령의 생가와 함께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하의도 농민운동기념관이다. 기념관에는 하의도 주민들이 무려 370여 년 동안의 길고 긴 투쟁 끝에 갖은 고초를 무릅쓰고 제 땅을 탈환했던 기록이 전시돼 있다. 조선시대부터 시작돼 근현대로 이어지는 하의도 농민운동은 지주의 횡포에 끈질기게 맞서 끝내 제 땅을 되찾고만 최초의 농민운동이었다. 하의도의 토지분쟁의 첫 불씨는 162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조 임금은 선조의 딸 정명공주에게 하의도의 땅 25만9000여㎡(1등급지기준·7만8000여 평)를 하사했다. 그러나 하의도의 땅이 더 개간되자 정명공주의 가문인 홍씨 일가는 당초 받은 땅의 6배가 넘는 164만9600여㎡(49만9000여 평)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작료를 받아 챙겼다. 분쟁은 시작됐다. 격분한 하의도 주민들은 한양에 올라가 신문고를 두드리기도 했고, 전라감사를 찾아가 하소연도 해봤지만 허사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땅은 황실의 재산으로 편입됐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광복 이후에는 적산토지로 분류됐다. 소작료 지불을 거부하며 투쟁하던 농민들은 폭도로 몰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주민들의 토지소유권을 인정받았으나 6·25전쟁 발발로 헛일이 되고 말았다. 결국 1956년 정부가 일본인 소유로 돼 있던 땅을 평당 200원에 주민들에게 유상분배하면서 370여 년 동안의 길고 긴 싸움은 끝마무리됐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농민들이 겪은 수난과 고초의 기록이 기념관에 고스란히 전시돼 있다. 하의도에는 오붓하게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모래구미 해변이 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바다가 내 만으로 밀려 들어와 만들어진 모래 해변은 포근하기 이를 데 없다. 해안에는 여남은 개의 몽골 텐트를 쳐놓았는데, 이곳의 하루 숙박료는 3만 원. 하루 종일 대여하는 데는 2만 원을 받는다. 샤워실이나 화장실 등 편의시설을 이용하는 데는 따로 돈을 받지 않는다. 모래구미 해변을 거쳐 가는 서쪽 해안도로도 일품이다. 해안도로의 명소라면 단연 얼굴바위다. 모래구미를 지나 어은리 쪽에 자그마한 무인도인 대섬이 떠있는데, 섬 끝 바위의 형상이 영락없이 사람의 얼굴 모습이라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 숨어들면 아무도 못 찾을 곳… 신도 하의도 본섬의 서쪽에 T자형의 자그마한 섬 신도가 있다. 섬이 작아 행정구역상 별도의 리(里) 이름조차 없다. 신도는 신안군 하의면 능산리에 속하는데 능산1구에는 능산도와 장재도가, 능산2구는 대야도가 속하고, 능산3구가 신도다. 섬의 가구수는 17가구. 주민이라야 스무 명을 조금 넘긴다. 배가 닿은 포구 근처에 집들이 모여 있는데 정박을 위해 다가가는 배 안에서 섬의 모든 집들을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다. 섬이 좁고 땅이 거칠어 농사가 잘 안 되는 데다, 연안의 고기잡이도 별 볼일이 없어 주민들은 자연산 미역이나 톳을 따서 그럭저럭 생계를 잇는다. 그럼에도 대부분 노인인 섬주민들이 외지인을 맞는 얼굴이 이리도 환하고 밝을 수 없다.
신도는 섬이 작은 데다 이렇다 할 볼 것도 없으니 다른 계절에는 외지인의 그림자도 볼 수 없지만, 여름 한철에는 피서객들이 제법 찾아온다. 국토해양부가 서해안과 동해안, 남해안에서 각각 5곳씩 가장 수질이 좋은 해수욕장 15곳을 뽑았는데 신도 해변이 그중 하나다. 수질이 아니더라도 울창한 조릿대 숲을 지나 찾아가는 해변은 그윽한 운치가 물씬 풍긴다. 한쪽에 떠있는 목섬에 노둣길이 놓여 있고, 그 안쪽은 온통 고운 모래 해변이다. 고운 모래가 단단한 백사장을 이룬 해수욕장의 고즈넉한 맛이 그만이다. 이 작고 외딴 섬에 피서객들이 얼마나 찾아올까. 포구에서 만난 한 노인은‘지난해 피서객이 많을 때는 100명이 넘은 날이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곁에 있던 다른 노인이 그 말을 받아 대번에 타박을 했다. ‘아무려면 그렇게나 많이 왔을까.’ 노인은 외지인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자랑을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스무 명 남짓이 사는 섬마을 주민에게 100명이란 숫자가 상상 가능한 최대의 숫자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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