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바야흐로 가을의 한복판입니다. 강원 산간에서 붉고 노란 기운으로 물들기 시작한 단풍의 물결이 성큼성큼 아래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단풍잎을 내려놓은 나무들은 곧 깊은 겨울의 침묵으로 돌아가겠지요. 연둣빛 신록에서 짙푸른 녹음으로, 다시 분분히 날리는 낙엽으로 시간은 저물어갑니다. 하지만 차가운 대기 속에서도 당당하게 서 있는 이 거목 앞에서는 가을날 저무는 시간쯤이야 한낱 티끌에 불과합니다. 강원 정선의 두위봉. 그 산의 9분 능선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가 있습니다. 청정한 초록의 기운을 뿜으며 서 있는 주목의 수령이 자그마치 1400년입니다. ‘믿거나 말거나’식의 전설이 아니라 산림청 임업연구원이 생장추로 나이테를 측정해서 나온 나이가 그렇답니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의 최고(最古)’ 나무인 셈이지요. 능선의 비탈에 뿌리박고 서 있는 이 거목의 앞뒤로는 수령 1200년과 1100년 된 잘생긴 주목 두 그루가 호위하듯 서 있습니다. 세 그루의 나무가 살아온 시간을 다 합치면 3700년입니다. 두위봉 주목의 나이가 밝혀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이 지난 2002년. 당시를 기준으로 1400살을 셈해 나무가 건너온 시간을 역사 연표와 비교해보면 가히 놀랄 만합니다. 주목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 건 삼국시대였습니다. 그 무렵에 백제 무왕이 즉위했고, 수나라의 침입과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있었습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건국했을 때 나무는 이미 300살이 넘는 거목이었습니다. 그 나무가 1000살을 채웠던 해에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을 썼습니다. 그리고 올해로 이 주목은 1400여 번째의 가을을 또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목이 건너온 1000년이 넘는 시간은 둥글게 다 닳았으니, 가을을 맞고 또 보내는 자세도 담담(淡淡)할 따름입니다. 차가워진 가을바람 속에서 붉고 노랗게 물드는 활엽수를 배경으로 성성한 초록의 잎을 단 채 끄떡없이 서 있을 따름입니다. 늙은 고목 앞에서는 단풍 화려한 가을도, 한 해의 끝으로 가는 시간도 다 무심할 따름입니다. 오랜 시간을 건너온 두위봉의 주목이 담담하게 가을을 맞고 있다면, 두위봉 맞은편의 민둥산 억새는 산정을 휘젓는 가을바람에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설레듯 가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을볕에 환하게 물결치는 민둥산의 억새 사이로 가르마처럼 난 길은, 가을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에 다름 아닙니다. 두위봉과 민둥산. 마주하고 있으되 전혀 다른 모습으로 가을을 맞이하고, 또 보내고 있는 이 두 곳의 산을 다녀왔습니다. 거기서 침묵으로 당당한 주목과 가을바람에 쉴 새 없이 설레는 억새를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 크고 무거운 산…정선의 두위봉 강원 정선은 말 그대로 첩첩(疊疊)이 산이다. 해발 1000m를 훌쩍 넘는 산들이 온통 지붕을 이루고 있다. 해발 1466m라는 만만찮은 높이의 두위봉(斗圍峯)도 정선 땅을 받치는 지붕 중의 하나다. 두위봉의 본래 이름은 ‘두리봉’. 산의 생김새가 두루뭉술하고 덕스럽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동네 촌로들은 여전히 두리봉이라 부른다. 두리봉은 정선의 민요 ‘정선아리랑’ 가사에도 등장한다. 가락을 얹어 읊어보는 정선아리랑 한 대목. ‘두리봉 겉이두야 두텁던 정이 풀잎에 이슬 겉이두 다 떨어지네’. 두리봉처럼 두텁던 정이 풀잎의 이슬처럼 다 떨어지고 말았다는 뜻이다. 두터운 정을 말하면서 왜 하필 두위봉을 비유로 들었을까. 그건 두위봉에 올라보면 금세 안다. 두위봉은 무겁고 육중하다. 기기묘묘한 경치도 없고, 날렵하게 치솟은 암봉도 없다. 그저 크고 덤덤한 육산일 뿐이다. 누군가 산을 걸고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한다면, 그 산은 기암괴석의 화려한 산보다는 마땅히 이처럼 둔하고 무거운 산이 적당하리라. 뜨거운 화려함이야 언젠가 풀잎의 이슬처럼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터. 모름지기 사랑도 덤덤하고 묵직해야 달궈진 아궁이처럼 슬슬 지펴지고 쉬 꺼지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사실 두위봉은 긴 능선과 넓은 품을 가졌다는 것 빼놓고는 이렇다 할 게 없는 산이다. 산을 오르는 등산로는 무작정 길기만 한데다 우거진 숲으로 조망마저 신통치 못해 등산객들로부터 눈길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1년 중 딱 한 번 눈길을 받을 때가 있으니, 그때가 6월 중순쯤이다. 남녘의 봄꽃 잔치가 마지막 철쭉을 끝으로 끝나고 난 뒤 두위봉 정상에는 비로소 환하게 산철쭉이 핀다. 그때를 겨눠 겨울을 지나 늦은 봄까지 텅 비다시피했던 두위봉에 등산객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하지만 늦은 봄 무렵에 급작스레 내습하는 한기와 불순한 일기 탓에 두위봉의 철쭉은 쉬 지고 말아 운이 좋아야만 만개한 철쭉을 보는 행운이 주어진다. 이태 전에는 철쭉이 채 피기도 전에 꽃송이째 다 얼어 떨어져버리는 통에 숨 헐떡이며 긴 등산로를 오른 이들을 허탈하게 하기도 했다. # 가장 오래 산 나무를 보러 가는 길 두위봉은 그러나 한때 화사하게 불붙었다가 떨어지는 철쭉보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산 나무를 보러 올라가야 하는 산이다. 두위봉의 9분 능선쯤에 1400개의 나이테를 가진 주목이 살고 있다. 하나의 생명이 뿌리를 내려 1400년을 살아왔다는 게 짐작이나 되시는지. 삼국시대에 싹을 틔운 이 나무가 여태 살아서 1400번의 가을을 보내고 있다는 게 도대체 믿기시는지. 두위봉의 주목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국내 최고령 나무는 용문사의 은행나무였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고 금강산으로 가면서 꽂아두고 간 지팡이가 자랐다는 전설이 깃든 나무다. 은행나무의 수령은 1100년으로 추정됐다. 나무의 수령은 과학적으로 조사한 것이 아니라 구전으로 내려오는 마의태자의 전설을 믿고 역산해 추산한 것이었다. 왜 은행나무의 나이를 과학적으로 조사하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에 산림청 관계자의 대답. “나무에 구멍을 뚫어 생장추로 측정을 하면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있지만, 나무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게 과연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딴은 그렇다. 거목은 ‘보호’가 순서지, 고작 나이를 알아 호기심을 채우겠다고 무턱대고 구멍부터 뚫을 일은 아니다. 두위봉 주목은 그러나 생장추 측정을 통해 과학적으로 나이가 밝혀졌다. 더디 자라기로 첫손 꼽히는 주목이 이처럼 어른 세 명이 맞잡아야 할 만한 크기의 밑동을 가진 거목으로 자란 예가 없었던 데다, 워낙 깊은 산중에 있어 용문사 은행나무처럼 수령을 추산할 전설 하나 없으니 나무에 구멍을 뚫을 수밖에…. 그렇게 비탈에 나란히 서 있던 주목 세 그루의 나이를 측정한 결과는 놀라웠다. 아래쪽 나무부터 순서대로 1100년, 1400년, 1200년의 수령이 확인된 것이었다. 우리 땅에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로 오래된 나무가 한자리에서 확인된 셈이었다. 둔하고 무거운 두위봉의 무심한 품 안에서 1000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온 세 그루의 주목. 두위봉에 간다는 건 바로 그 나무를 보러가는 길이다.
# 1400살 늙은 나무가 보여주는 당당한 위용 두위봉은 정상까지 가장 짧은 코스를 택하면 2시간 20분쯤 걸린다. 하지만 도사곡휴양림을 들머리 삼아 주목군락지가 있는 쪽으로 오르는 5.5㎞짜리 코스를 택한다면 정상까지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주목 군락지는 휴양림에서 시작한 등산로가 능선과 만나는 지점쯤에 있다. 여기까지는 2시간이면 닿는다. 멀기도 하고, 바닥에 돌이 깔려 있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지만, 경사는 부드럽다. 완만한 기울기의 길에서는 웬만해서는 숨이 가빠지는 구간이 거의 없다. 동행이 있다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오를 수 있는 산길이다. 게다가 이즈음에는 산허리쯤에서부터 물소리와 함께 붉고 노랗게 물든 단풍이 줄곧 따라오니 제법 운치도 있다. 바닥의 풀들은 아직 초록을 잃지 않고 있는데, 나뭇가지에는 단풍이 물들어가니 붉은색과 초록색이 황홀하게 어울린다. 능선에 다가설수록 단풍은 파스텔톤으로 번져나간다. 발밑으로는 떡갈나무며, 굴참나무 이파리들이 떨어져 바스락거린다. 오름길에는 계곡 사이로 물이 솟는 샘터가 몇 곳 있어 다리쉼을 하기에 좋다. 이윽고 능선의 코앞에서 갑지기 좁은 시야가 터지면서 주목군락지를 만난다. 가장 먼저 마중 나오는 건 당당하게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올린 1100살짜리 주목이다. 세 그루 아름드리 주목 중 가장 어린 나무인데, 체구는 가장 당당하다. 두 아름이 훨씬 넘는 굵기의 붉은 둥치부터가 감탄을 자아낸다. 초록의 이파리도 맑고 생생하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나이테 속의 옹이로 간직하고 있을 늙은 나무가 조금도 기력이 쇠하지 않고 어찌 이렇게 우람할 수 있을까. 그 뒤편에 국내 최고령나무로 공식 기록된 1400년 수령의 나무가 서 있다. 뿌리를 딱 붙여서 경쟁하듯 자라는 전나무 탓인지 크기며 수령은 오히려 아래쪽의 300년 어린 나무에 좀 못 미치는 듯하다. 아름드리 전나무도 다른 곳에서 자리를 잡았다면 다들 우러러볼 만하지만 어쩌다 주목들 사이에서 자라는 바람에 애송이 취급을 받는 셈이니 위신이 영 말이 아니다. 최고령 주목 뒤편에도 1200년 된 주목이 한 그루 더 있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니 주위에 주목이 세 그루만이 아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초록의 잎을 성성하게 달고 있는 주목들이다. 하지만 족히 수백 년은 됐음직한 주목도 여기서 1000년이 훨씬 넘은 주목들 사이의 전나무와 비슷한 신세다. 주목군락지에서 정상까지는 다시 2시간 30분을 더 가야 한다. 내친 김에 정상을 밟고 내려와도 좋겠고, 주목만 보고 돌아나온대도 아쉬울 일은 별로 없다. 꼭 정상을 밟겠다면 아예 자미원역이나 방제리 쪽에서 짧은 코스를 타고 정상으로 올랐다가 주목군락지가 있는 도사곡휴양림 쪽으로 내려오는 것이 좋겠다. 자미원이나 방제리 쪽에서 옛 광산 자취를 지나 두위봉 정상까지는 2시간 남짓이 걸린다. 도사곡휴양림 쪽으로 내려오는 시간을 4시간 정도 잡아야 하니 산행시간은 도합 5∼6시간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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