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동양화가 말을 걸다_19

醉月 2013. 10. 14. 01:30

‘클래식 매니아’ 공자, 음악을 통해 예를 배우다
방악장홍

▲ 작자 미상, ‘방악장홍’, 1904년, 목판에 채색, 27.6×37.8㎝, 장서각
공자를 공부하면서 가장 놀란 것은 그가 음악을 사랑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고지식한 남자가 음악을? 점잖게 무게만 잡고 앉아 감정 표현은 전혀 하지 않을 줄 알았던 공자가 음악을 사랑했다니. 새로운 발견이었다. 사랑도 적당히 취미로 집적거리는 사랑이 아니었다. 지독한 사랑이었다. 그는 자주 노래를 불렀다. 틈만 나면 악기를 연주했다. 다른 음악가의 연주를 듣고 나면 적절한 의견을 실어 음악을 평가했다. 전문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논어’에는 공자가 음악에 대해 언급한 이야기가 열아홉 차례 나온다. ‘공부자성적도’에도 공자가 거문고를 타거나 경쇠를 치는 등 음악과 관련된 그림이 아홉 번 등장한다. 그의 생애에서 음악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유학의 대부인 그가 음악을 사랑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한 취미였을까. 아님 다른 의미가 담겨 있을까.

‘방악장홍(訪樂萇弘·장홍에게 음악에 관해 자문을 구하다)’은 ‘공부자성적도’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공자는 주(周)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禮)를 묻고 난 후 장홍(萇弘·?~기원전 492)을 찾아간다. 장홍은 주나라의 대부(大夫)였다. 공자가 특별히 시간을 내 찾아가 음악에 대한 자문을 구한 것을 보면 그 분야의 전문가로 이름이 알려졌던 것 같다. ‘방악장홍’은 장홍과 만난 공자가 평소 자신이 궁금했던 내용을 장홍에게 묻는 장면을 그렸다. 병풍이 특정인물 뒤에 배치되지 않고 두 사람의 중앙에 놓인 것을 보면 두 사람이 대등한 관계로 만난 것 같다. 대등하게 배치된 만큼 어느 쪽이 장홍이고 어느 쪽이 공자인지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만난 정황을 참조하여 추측할 뿐이다. 공자가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러 온 만큼 예를 갖춰야 할 것이다. 예를 갖춘 사람은 두 손을 맞잡고 공손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양손을 드러낸 채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왼쪽이 장홍이고 오른쪽이 공자일 것이다. 오른쪽 인물이 앉은 키가 큰 것으로 봐서 ‘키다리’ 공자임이 분명하다. 공자 뒤에는 거문고를 든 제자와 두 명의 제자가 서 있고 장홍 뒤에는 생황, 편종, 거문고를 든 제자들이 서 있다. 공자는 장홍에게 무엇을 물었을까.

공자가 장홍을 찾아간 것은 34세 때였지만 음악을 위해 처음 스승을 찾아간 것은 29세 때였다. 그는 사양자(師襄子·노나라에서 음악을 관장하던 관리)에게 가서 거문고를 배웠다. 공자가 사양자를 만나 거문고를 배운 태도를 보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예술가의 전형적 모습이 드러난다. 공자는 거문고를 배우면서 열흘이 넘도록 한 곡만 연습했다. 그 모습을 본 사양자가 그만하면 됐다고 해도 공자는 운율을 익힐 때까지 계속 연습했다. 운율을 알고 나서는 음악에 담긴 의미를 알 때까지 연습하고, 음악을 만든 사람됨을 알 때까지 연습했다.

공자는 쉴 때 거문고를 연주했다. 고민이 있을 때는 격한 감정을 담아 경쇠를 연주했다. 그에게 교육을 받은 제자들도 곧잘 악기를 연주했다. 제자 자유는 무성 땅의 재상으로 있을 때 거문고를 연주했다. 스승의 연주를 듣고 귀가 트인 제자 민자건은 공자가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스승의 마음이 가라앉아 있음을 알아챌 정도였다. 성질 급한 제자 자로는 공자를 따라 거문고를 연주하다 소리가 좋지 않다고 스승에게 핀잔을 들었다. 공자가 제자를 혼낼 때도 음악이 등장한다. 제자 유비가 공자를 만나러 왔을 때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던 공자는 유비가 방을 나서기가 무섭게 거문고를 연주하며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제자 유비가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공자는 악기만 연주한 것이 아니다. 노래도 자주 불렀다.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되돌아가는 도중에 깊은 산골짜기에 핀 난초를 봤을 때였다. 공자는 수레를 멈추게 한 후 거문고를 꺼내 연주하면서 ‘의난조(猗蘭操)’라는 곡을 짓고 노래했다. 잡풀 사이에 섞여 자라는 난초가 마치 무지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자신의 모습 같다는 내용의 곡이었다. 제후들이 맹약을 했던 단위에서도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 ‘산천은 의구하데 인걸은 간 데 없는’ 인생무상을 노래한 시였다.

그러니까 공자가 장홍을 찾아가 자문을 구한 것은 단순히 거문고를 잘 타는 방법이 아니었다. 예에 대한 자문이었다. 그 매개체가 음악이었을 뿐이다. 공자가 장홍을 만나고 떠난 뒤의 후일담을 들어보면 그 사실이 자명해진다. 공자가 떠난 뒤 장홍은 유문공(劉文公)을 만나 공자를 극찬한다. “공자는 성인의 풍채를 가졌으며, 선왕의 도를 전하고, 겸허하게 예를 몸소 실천하며, 넓은 식견과 이상을 가지고 성인의 도를 실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문공은 “일개 평민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성인의 도를 세상에 펼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장홍이 다시 말하기를 “요순(堯舜)임금,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도(道)는 사라져 버리고 예악은 붕괴된 이때, 공자가 기강을 다시 올바르게 세우리라 생각됩니다”라고 했다.

장홍과 유문공의 대화는 흘러흘러 공자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공자의 대답이 참하다.

“내가 어떻게 그런 칭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다만 예와 악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요순임금과 문무왕은 성왕(聖王)의 상징이다. 그들이 다스렸던 시대는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의 대명사다. 일개 평민인 공자가 이미 사라져버린 영광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칭찬인데 흥분하지도 않는다. 겸손이 대단하다.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겸손이 아니다.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고 있는 자의 확신에 찬 겸손이다. 이 부분에서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던 공자의 이야기가 겹친다. 공자는 예와 악을 알고 좋아하고 즐긴 사람이었다. 즐긴 정도가 어느 정도였느냐면 ‘제나라에서 소(韶)를 듣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할’ 정도였다.

공자가 음악을 사랑하는 것은 단지 음률만이 아니었다. 그는 음악을 통해 예를 실천하고자 했다. 예악(禮樂)이란 말처럼 음악은 예와 분리할 수 없는 동전의 앞뒷면이었다. 공자는 ‘시(詩)에서 감흥을 일으키고 예(禮)에서 근간을 세우고 악(樂)에서 성정을 완성한다’고 믿었다. 공자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시는 필수과목이었다. 공자 당시의 고전음악은 주로 시와 관련된 음악이었다. 시 교육과 음악 교육은 분리되지 않았다. 시에 대한 학습이 예로, 음악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자가 음악을 사랑한 것은 단순히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예를 완성하는 방법론의 실천이었다. 음악을 통해 예를 가르쳐주던 악사 중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많았다. 공자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했는지 다음의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악사 면(冕)이 뵈러 와 계단에 이르자 공자께서는 “계단입니다”라고 하시고, 자리에 이르자 “자리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셨으며, 모두 앉자 공자께서 “아무개는 여기에 있고, 아무개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알려주셨다. 악사 면이 나가자 자장이 물었다. “이것이 악사와 이야기하는 방법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이것이 본래 악사를 도와주는 방법이다.”’

‘논어’ 위령공에 나오는 내용이다. ‘논어’를 통틀어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마음이 답답할 때 경쇠를 두드리던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만큼 감동적이다. 그래서 ‘논어’는 살아있는 공자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미팅 장소다. ‘공부자성적도’는 공자와의 만남의 장소를 실시간으로 전송해 주는 고화질의 미디어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
태산문정

▲ 작자 미상 ‘태산문정’, 곡부문물위원회
공자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73세에 세상을 떠난 공자가 70세까지의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열다섯에 배움(學)에 뜻을 두었고, 서른이 되어서는 자립(而立)했으며, 마흔이 되어서는 미혹되지 않았고(不惑), 쉰이 되어서는 천명(天命)을 알았으며, 예순이 되어서는 귀가 순해졌고(耳順),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不踰矩).”

열다섯에는 철이 없어 몰랐다 해도 서른부터는 어쩐지 공자처럼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부담을 주는 문장이다. 마흔은 어떠한가. 불혹은커녕 천명을 알아야 할 쉰 살까지 날마다 유혹을 느끼며 살고 있지 않은가. 예순이 되고 일흔이 되면 그래도 괜찮게 살았어라고 지난 시간을 긍정할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더 살아봐야겠다. 공자 근처라도 다가갈 수 있을 때까지.

34세 때 노자를 찾아 예를 물었던 공자는 35세에 일자리를 찾아 제(齊)나라로 갔다. 그가 제나라에 가게 된 계기는 자의반 타의반이었다. 노(魯)나라의 군주 소공(昭公)이 제나라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노나라 임금은 주공(周公·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동생)의 자손이었고 공(公)의 작위를 가진 제후였다. 공자가 태어날 무렵에는 귀족 가문인 삼환(三桓·환공의 자손) 세력이 임금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삼환은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 계손씨(季孫氏)를 일컫는데 계손씨가 삼환 세력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공자가 대사구(大司寇)의 벼슬을 하게 됐을 때 가장 먼저 삼환의 성곽을 허문 것도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소공도 군주의 권위를 세울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때 계손씨의 수장인 계평자가 닭싸움을 계기로 소공에게 죄를 지었다. 삼환 가문에 균열이 왔다고 판단한 소공은 군대를 거느리고 계손씨를 공격했으나 패했다. 소공은 제나라로 도망갔고 공자 역시 소공을 따라 제나라로 갔다. 소공이 제나라를 선택한 것은 제나라가 노나라 곁에 있었고 부유한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

공자가 제나라로 가는 길이었다. 태산(泰山)을 지나다 어떤 여인이 슬피 우는 소리를 들었다. 공자가 크게 근심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여 제자인 자로(子路)를 보내 사연을 물었다. 여인이 대답했다. “예전에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는데, 이제 남편과 아들마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습니다.” 자로가 물었다. “아니 그 지경이 되도록 왜 이사하지 않았습니까?” 여인이 대답했다. “그래도 이곳에는 가혹한 정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로가 이 말을 공자에게 전했다. 공자가 탄식하며 말했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구나(荷政猛於虎)!”

이때부터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는 혹독한 정치에 시달리는 백성의 고달픔을 상징하는 고사성어가 됐다. ‘태산문정(泰山問政·태산에서 정치를 묻다)’은 그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 제목을 유명한 ‘가정맹어호’ 대신 ‘태산문정’으로 택한 것은 백성의 고달픔을 살피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있고 가족을 잃은 여인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다. 여인의 머리 위로는 버드나무 한 그루가 위로하듯 그녀를 감싸고 있다. 버드나무는 모든 것을 다 잃은 여인을 가혹한 정치로부터 보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정맹어호’는 당(唐)대 시인 유종원(柳宗元·773~819)에게 큰 자극을 주었던 모양이다. 유종원은 ‘땅꾼이야기(抱蛇者說)’에서 공자의 ‘가정맹어호’를 인용해 세금 거두는 일의 지독함을 비판한다. 내용은 이렇다. 영주 들녘에 검은색 바탕에 흰색 무늬가 있는 기이한 뱀이 살았다. 그 뱀이 초목에 닿기만 해도 모조리 죽었고 사람이 물리면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 뱀을 잡아 포로 만들어 약용으로 먹으면 심한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나라에서는 뱀 잡는 사람을 모집해 일 년에 두 마리를 조세로 대신하게 했다. 장씨라는 사람은 삼대에 걸쳐 그 일에 종사했다. 유종원이 그에게 땅꾼의 사정을 물었다.

그의 대답이 충격적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뱀에 물려 세상을 떠났고 자신도 뱀을 잡은 12년 동안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딱한 사정을 들은 유종원이 뱀 잡는 일 대신 세금 내는 일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때 땅꾼이 대답한 내용이 바로 뱀보다 심한 세금의 혹독함이었다. 뱀 잡는 일이 아무리 고달파도 일 년에 한두 번만 조심하면 되지만 관리들에게 세금 독촉을 받는 이웃들은 일 년 내내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야말로 ‘가정맹어호’의 복사판이었다. 백성의 아픔을 들여다볼 줄 안 유종원은 ‘산이란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로 시작된 ‘강설(江雪)’을 쓴 그 유명한 천재시인이다.

‘가정맹어호’와 같은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은 광해군 때 조선을 찾은 명(明)나라 장수 조도사(趙都司)의 시에서도 확인된다.

향기 맑은 맛있는 술은 천 명의 피요(淸香旨酒千人血)
가늘게 썬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일세(細切珍羞萬姓膏)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燭淚落時民淚落)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도다(歌聲高處怨聲高)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변학도를 풍자해 지은 시는 위의 시를 개시(改詩)한 것이다. 어느 시대에 적용해도 하등 어색하지 않을 만큼 양반들의 횡포와 세금 착취는 백성을 괴롭히는 고질병이었다.

소공을 따라 제나라에 간 공자는 제나라 군주 경공(景公)과 접촉했다.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다른 날 경공이 다시 공자에게 정치를 물으니 공자가 말했다. “정치의 관건은 재물을 절약하는 데 있습니다.”

경공은 기뻐하며 이계(尼谿)라는 밭을 주어 공자를 봉하려고 했다. 재상 안영(晏嬰)이 완강하게 공자의 입궐을 반대했다. ‘번잡스러운 예절만을 따지고 오만하여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백성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이 구실이었다. 결국 경공은 공자를 만나고도 예를 묻지 않았다. 공자를 곁에 두고 싶었던 경공은 공자에게 계씨와 맹씨 중간에 해당하는 대우를 해 주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제나라 대부들이 공자를 해치려고 했고 공자도 그 소식을 들었다. 할 수 없이 경공은 자신이 늙어 공자를 등용할 수 없다는 말로 공자를 내쳤다. 이에 공자는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안영은 왜 공자의 등용을 반대했을까. 당시 제나라는 노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 나라였지만 경제 규모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컸다. 내륙에 위치한 노나라는 농업이 중심이었는데 문화는 발달했으나 가난했다. 반면 산동반도(山東半島)의 긴 해안선을 끼고 있던 제나라는 활발한 상업 활동을 중심으로 풍요와 사치가 넘쳐났다. 특히 소금은 제나라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 줬다. 그런데 공자가 나타나 느닷없이 절약을 들먹였다. 군주 입장에서는 절약을 강조하는 공자를 기용하고 싶었겠지만 중신들에게는 불편하고 성가신 존재였다. 안영의 반대는 곧 제나라 중신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었다.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온 뒤 관직을 얻지 못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35세부터 50세 이전까지 그는 줄곧 집에서 책을 읽고 예를 익히며 사람들을 가르쳤다. 서른에 자립한 공자는 쉰 살에 천명을 알 때까지 전혀 미혹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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