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동양화가 말을 걸다_18

醉月 2013. 10. 7. 01:30

비천하였으므로 재능이 필요했다
공자성적도보

▲ ‘공자성적도보’의 직사승전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공자가 세 살 때 죽었다.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에게 숙량흘의 무덤이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았다. 말이 좋아 아들이지 공자는 거의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살았다. 공자가 열일곱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어머니를 아버지와 합장하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무덤을 알지 못했다. 고심하던 공자는 꾀를 내 어머니의 빈소를 곡부 가는 길에 차렸다. 행여 아버지의 무덤을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의 예상대로 추읍 사람 만보(輓父)의 어머니가 숙량흘의 무덤을 알려 주었다. 공자는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방산에 가서 두 분을 합장했다.

삼년상을 마친 공자는 열아홉 살에 견관씨(幵官氏) 집안의 여인과 결혼했다. 스무 살에 아들 리가 태어났다. 노나라 임금 소공(昭公)이 잉어(鯉魚)를 보내 득남을 축하했다. 공자는 군왕이 하사품을 내린 것이 영광스러워 아들의 이름을 ‘리(鯉)’, 자를 백어(伯魚)라고 지었다. 백(伯)은 맏아들에게 붙이는 칭호니 이름도 자도 모두 ‘잉어’를 뜻한다. 공자의 기쁨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백어는 오십 세에,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공자는 아들 리 외에 딸을 하나 더 두었다.

젊은 시절 공자는 가난하고 지위가 낮았다. 스무 살에 계손씨(季孫氏)의 위리(委吏)가 되어 창고를 관리했고, 21살 때는 승전(乘田)이라는 낮은 벼슬을 했다. ‘직사승전(職司乘田·가축을 관리하는 벼슬을 얻다)’은 공자가 승전으로 일할 때를 그린 장면이다. 승전은 소나 양과 같은 가축들을 키우고 관리하는 일을 하는 관리다. 공자는 그림 중앙에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소가, 왼쪽에는 양들이 놀고 있다. 공자는 지금 소와 양을 관리하는 관원에게서 하급관리에게 동물의 상태에 대해 진지하게 듣고 있다. 관원들의 철저한 보살핌과 정성으로 소와 양들은 모두 건강하고 통통하게 살이 쪘다.

화가는 화면에서 단조로움을 피하고 변화를 주려는 듯 여러 각도에서 양을 바라보듯 다양한 자세로 배치했다. 마치 한 마리 양을 빙 돌려가면서 보듯 양의 앞면과 옆면과 뒷면을 그렸다. 소도 마찬가지다. 소의 옆 모습과 앞 모습과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소를 탄 목동의 모습도 모자라 소 옆에서 공기놀이를 하는 아이들까지 그려 넣었다. 공자의 생애를 복원한 작가가 ‘직사승전’에 사실성을 불어넣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위리’나 ‘승전’은 벼슬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매우 낮은 자리였다. 공자가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집안형편이 어려웠음을 말해준다. 공자 스스로도 ‘나는 젊어서 비천하였으므로 다방면의 비루한 일에 능했다’라고 회상한다. 공자는 자신의 능력을 ‘부풀려 보이려 하지 않았다. 점잖은 사람은 천한 일에 재능이 많을 필요가 없는데 공자는 ‘관직에 등용되지 않았으므로 다양한 재능’을 익히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자는 명문가 자제처럼 편안한 관직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다. 그가 창고를 관리할 때 계산이 정확하고 일 처리가 매우 공정했다. ‘위리’는 ‘회계(會計)’를 담당하는 관리를 가리킨다. 승전이라는 낮은 벼슬을 할 때는 가축들은 살찌고 번식하여 그 수가 늘어났다.

비록 가난하게 태어나 천한 일을 해야 했지만 공자는 결코 자신의 처지를 탓하지 않았다. 공자는 ‘부(富)라는 것이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채찍을 들고 길을 트는 자라도 나는 또한 할 것이다’라고 가난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만일 구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따르겠다’고 삶에 대해 단호한 자세를 보여준다. 부와 권력, 명예에 대한 자세가 어떠했는지는 다음의 얘기로도 확인할 수 있다.

“부유함과 귀함은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지만 그것이 정당하게 얻은 것이 아니면 누려서는 안 된다. 가난함과 천함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이지만 그것이 정당하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된다.”

공자는 자신의 빈곤한 환경을 원망하는 대신 그 안에서 자족하고자 했다. 공자는 ‘거친 밥을 먹고 차가운 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그것을 베개로 삼으면 즐거움도 그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공자는 ‘의롭지 못하면서 잘살고 귀하게 되는 것은 나에게 뜬구름 같은 것이다’는 자세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런 자세가 있었기에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공(司空·공사나 땅을 관장하는 관직)이 되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지와 선택이다. 똑같은 어려움을 당해도 누구는 그 환경을 경험 삼아 도약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누구는 그 환경을 탓하며 원망하고 주저앉아 버린다. 공자는 청년 시절의 삶이 매우 험난해 ‘사회 밑바닥 사람들이 하는 일을 많이 했다’. 그러나 그는 군자로 살겠다는 자신의 길에 대한 투철한 확신이 서 있었다.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추구하지 않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으며, 일을 처리함에 신속하고 말하는 데는 신중하며, 도가 있는 곳에 나아가 스스로를 바로잡는’ 사람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야말로 진정한 군자였다. 공자는 ‘선비가 도에 뜻을 두면서 허름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한다면 그와는 더불어 논의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선언한다. 이것이 바로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공자가 고귀한 영혼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가정형편이 가난했던 만큼 공자는 유명한 스승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공자성적도’에는 공자가 일곱 살 때 제(齊)나라의 재상이었던 안평중(晏平仲·?~기원전 500)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는 항목이 들어있지만 이것은 어떤 책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그는 독학하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고 부지런히 그것을 추구한 사람이다’는 말이 그런 공자의 학문 자세를 보여준다.

공자는 남들과 비교해서 결코 나을 것이 없는 형편이었다. 공자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공자는 자신의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이 부족한 점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즉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능력 없음을 걱정하라’는 주문이다. 삶에 대한 공자의 절대 긍정은 학연과 지연과 인맥의 강고한 벽 앞에서 주저앉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태도 때문인지 공자는 30세에 예를 아는 것으로 이름을 날려 제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노자를 찾아가 예를 묻다
문례노담

▲ 작자 미상, ‘문례노담’ 1742년, 종이에 연한 색, 33×54㎝, 성균관대학교박물관
공자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다. 노자(老子)를 찾아간 것도 그런 자세 때문이었다. 공자는 34세 때 노자를 찾아가서 예(禮)에 대해 물었다. 제자인 남궁경숙(南宮敬叔)과 함께였다. 남궁경숙은 대부 맹희자(孟僖子)의 유언을 받든 맹의자(孟懿子)와 더불어 공자에게 가서 예를 배운 제자다. 남궁경숙은 노나라 군주를 찾아가 “공자와 함께 주(周)나라에 가겠다”고 청했다. 노나라 군주는 그에게 수레 한 대와 말 두 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갖추어 주고 주나라에 가서 예를 물어보게 했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간 것은 노자가 한때 주하사(柱下史·주나라 때 장서실을 맡아보던 관리)였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이상국가의 모델로 생각했던 공자는 노자가 주나라의 예절과 법도를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를 물었다는 일화는 ‘사기열전’ ‘사기세가’ ‘공자가어’ 등에 언급되어 있다. ‘문례노담(問禮老聃)’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판본의 ‘공자성적도’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만큼 공자의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성균관대박물관에 소장된 ‘공자성적도’는 1742년에 제작된 작품인데 역시 그 안에도 ‘문례노담’이 담겨 있다.

그림 속 왼쪽 난간 아래 공자 일행이 타고 온 수레가 있다. 수레를 끌고 온 동물은 기록과는 달리 말 두 마리가 아니라 소 한 마리다. 공자가 탄 수레는 항상 소가 끄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말이 모는 모습은 한 점도 그려지지 않는다. ‘공자성적도’의 여러 장면에는 공자를 만나러 온 사람 곁에 말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공자는 한 번도 말을 끌어본 적이 없다. ‘수레를 끌던 말 가운데 한 필을 보내 장례 비용에 보태도록 했다’는 ‘탈참관인(脫驂館人)’을 그릴 때도 말 대신 소가 등장한다. 소는 노자에 어울리는 동물이다. 노자가 청우(靑牛)를 타고 함곡관(函谷關)을 지나갔다는 내용 때문에 노자는 항상 청우를 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공자와 관련된 어떤 자료에도 공자가 말 대신 소를 선호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데 항상 공자 곁에 우차(牛車)가 그려진 것을 보면 ‘공자성적도’의 제작자가 공자의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를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우차를 선택한 것 같다.

노자는 병풍을 배경으로 탁자 위에 앉아 있고, 공자와 남궁경숙은 그 앞에 앉아 노자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노자는 머리카락이 빠져 머리 윗부분이 훤한 것이 마치 사람의 수명을 주관한다는 수성노인(壽星老人) 같다. 도교의 교주인 노자가 도를 닦아 양생법(養生法)을 터득해 160세 혹은 200여세를 살았다는 기록을 떠올리면 그림 그린 사람이 수성노인을 염두에 두고 그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공자가 평상복을 입고 있는 것에 반해 남궁경숙은 관모를 쓰고 있다. 남궁경숙이 관리의 신분으로 두 사람이 노나라 군주의 후원으로 이곳에 왔음을 알 수 있다. 다른 그림에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에서도 공자는 다른 사람에 비해 신체가 크다. 성인(聖人)과 보통 사람을 구별하기 위함이다. 공자와 남궁경숙은 양 손을 모은 채 앉아 있다. 노자 곁에 선 시종(혹은 제자)과 공자 뒤에 있는 시종(혹은 제자)도 모두 양손을 모으고 서 있다. 양손을 모으는 자세는 공손함의 표현이다. 노자가 연장자이거나 가르침을 주는 어른이라는 뜻이다. 공자 뒤에 서 있는 시종들도 기록과는 달리 한 명이 아니라 네 명이다. 그들을 시종이 아니라 제자라고 추정한 이유다.

가르침을 준 노자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는 병풍에서 확인된다. 중국에서 병풍은 단순한 가리개가 아니다. 권위의 상징이고 정치성의 표현이다. 병풍이 세워지면 그곳은 ‘하나의 불특정한 공간이 두 개의 이웃하는 영역으로 나눠져’ 일시적이나마 ‘특정한 공간’으로 제한된다. 특정 인물 뒤의 병풍은 그 인물이 이 장소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황제 뒤에 대형 병풍을 세워 놓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황제가 병풍을 배경으로 앉아 병풍 밖의 인물을 바라볼 때 지배자와 지배받는 자의 위계관계는 분명해진다. 병풍은 병풍 앞에 앉은 사람의 권위와 우월성을 과시하는 틀이다. ‘문례노담’에서는 노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다.

드디어 공자가 노자에게 예에 대해 물었다. 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말하는 성현들은 이미 뼈가 다 썩어지고 오직 그 말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또 군자는 때를 만나면 관리가 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다북쑥처럼 떠돌이 신세가 되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두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나는 들었소. 그대의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표정과 끝없는 야심을 버리시오. 이러한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소.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은 단지 이것뿐이오.”

가르침을 청하는 손님에게 주인의 독설이 너무 과하다. 이처럼 공자와 노자는 가는 길이 다르다. 색깔이 다르고 지향점이 다르다. 두 사람의 세계관은 예(禮)와 인(仁) 등 몇 가지 근본 개념에서 차이점이 분명하다. 공자에게 예는 인간관계의 알파요 오메가다. 공자는 예를 ‘끊임없이 실천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인성을 회복하는 것’이라 생각한 데 반해, 노자는 예를 거추장스러운 허례와 허식으로 생각했다. 노자는 사람관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예 대신 도(道)를 주장했다. 노자의 도는 정해진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통해 ‘굳이’ 표현해야 하니까 ‘도’라 이름 지었을 뿐 ‘도가 말할 수 있으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가족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근본으로 인(仁)을 중요하게 여겼다. 노자는 인을 차별과 치우침으로 보고 ‘하늘과 땅이 불인(不仁)’하기 때문에 사사로움이 없다고 여겼다. 노자는 자연에 합치된 도가 아닌 인위적인 도를 철저히 배격했다. 이런 독설을 듣고 난 공자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는 돌아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는 잘 난다는 것을 알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친다는 것을 알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을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마치 용과 같은 존재였다.”

사마천은 당시에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유가 학문을 멀리하고, 유가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역시 노자의 학문을 내쳤다’고 기록하면서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과연 이러한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라고 혀를 끌끌 찼다. 사마천의 탄식은 적어도 공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사항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공자가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가는지 알 수 없는’ 노자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그런데도 관점이 다른 노자의 견해를 수용하는 공자의 포용력이 대단하다.

두 성인의 만남은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노자라는 인물 자체가 워낙 알려진 것이 없고 신비스러워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노자가 공자보다 연장자일 것이라는 가정은 대체로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사항이다. ‘문례노담’을 제작한 유가에서는 마치 두 성인의 만남이 당연한 사실이었다는 듯 한자리에 앉혀 놓았다. 도교의 교주와 유가의 시조가 만났다. 거물의 만남에 천지의 축복이 빠질 수 없다. 하늘에 상서로운 구름이 자욱하게 뒤덮고 있다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양화가 말을 걸다_19  (0) 2013.10.14
합천서 만나는 가을  (0) 2013.10.10
楚辭_20  (0) 2013.10.05
가을이 더 좋은 "제주의 푸른밤"  (0) 2013.10.04
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_26  (0) 2013.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