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언제 가도 좋지만, 최고의 계절은 단연 가을이다. 트집을 잡자면 봄은 대기가 탁하고 바람이 거세서 춥고, 여름은 뜨겁고 습하다. 겨울은 종잡을 수 없는 날씨와 잦은 폭설이 자주 발목을 잡는다. 그렇다면 제주의 가을은? 청명한 하늘과 뭉게구름, 환히 열린 시계(視界)와 아직 ‘푸르름’을 잃지 않은 숲이 가을 제주에 있다. #제주를 보는 새로운 방법…야간 오름 트레킹 제주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여행목적지’다. 제주를 특별하게 하는 건 바다와 산, 그리고 오름으로 이뤄진 이국적이고 다채로운 풍경이지만, 그것만으로 제주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제주가 매혹적인 건 이런 빼어난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는 다양한 방법으로 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여행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가고 있다. 제주의 옛길을 이어붙여 만든 올레길은 전국적인 걷기 열풍을 이끌었고, 급기야 지자체마다 도보여행길을 놓는 것으로 이어졌다. 제주 호텔에서 시작한 글램핑(럭셔리캠핑) 바비큐도 전국 곳곳의 호텔과 리조트로 빠르게 전파됐다. 제주에서 시작된 새로운 시도들이 트렌드가 돼 여행문화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올레길과 글램핑에 이어 올가을 제주를 여행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여행 방법이 등장했다. 제주의 오름을 밤에 오르는 이른바 ‘문라이트 트레킹’이다. 글램핑 바비큐를 최초로 선보인 제주 신라호텔이 이번에도 앞장섰다. 제주 신라호텔은 트레킹과 캠핑을 결합한 ‘트램핑’ 패키지 상품을 기획하면서 올가을부터 제주의 푸른 밤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는 ‘문라이트 트레킹’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제주 신라호텔의 야간 트레킹은 처음에는 한라산 중산간의 서귀포자연휴양림에서 시작했다. 레저 전담직원(GAO)과 동행해 짙은 어둠 속에서 제주의 중산간 숲길을 걷는 야간 트레킹은 모험이었다. 과연 고객들의 호응이 있을까. 호텔 측은 반신반의했지만, 고객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헤드랜턴 하나에 의지한 채 반딧불이가 날아다니고 청아한 풀벌레 소리가 그득한 숲길을 걸으며 손님들은 탄성을 질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숲길을 걷는 경험도 색달랐고 예민해진 귀는 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중산간의 바람 소리며 나뭇잎 스치는 소리, 풀벌레 소리를 감별해냈다. 게다가 가로등이 없는 중산간에서 한밤중에 올려다보는 밤하늘의 별은 맑고 선명했다. 서귀포자연휴양림의 문라이트 트레킹 성공에 힘입어 제주 신라호텔은 10월부터 투숙객을 대상으로 오름 야간 트레킹을 시도한다. 이름하여 ‘문라이트 오름 트레킹’이다. 이를 위해 호텔 레저전담 직원들은 서귀포와 중문에서 가까운 군산오름으로 오르는 코스를 개발했다. 군산오름은 제주 남쪽의 전망대 격인 오름. 낮에도 빼어난 전망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밤이면 한치잡이배의 집어등 불빛으로 화려한 제주의 푸른 밤바다와 서귀포 시내, 산방산 일대의 야경을 두루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문라이트 오름 트레킹 코스를 따라서 푸른 어둠이 내릴 무렵에 군산오름을 올라봤다. # 밤에 오른 군산오름…불빛과 별빛의 축포 중문과 대정 사이에 솟은 군산오름은 제주의 다른 오름들과는 달리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능선이 완만한데다 오름 전체가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군산이란 이름도 군인이 쳐놓은 막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이름대로 오름의 능선은 뚜렷하지 않고 펑퍼짐하다. 관광객들이 자주 지나치는 길목에 있음에도 눈길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이런 생김새 때문이다. 관광객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제주 사람들조차 근처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거개가 군산오름을 모를 정도다. 군산오름은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쯤인 고려 목종 때 화산폭발로 솟아난 오름이다. 오름의 높이는 335m. 육지의 산에 비하면 야산의 높이 정도지만, 제주 동쪽의 용눈이오름이나 손지오름 같은 제주 동쪽의 이름난 오름들보다 100m가량 더 높다. 군산오름은 동쪽에서도, 서쪽에도 오를 수 있다. 동쪽의 오름길을 택하면 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20분 남짓을 걸어 올라야 하는데, 반대편 서쪽에는 차에서 내려 5분 정도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고도를 높여가며 경치를 보는 재미를 느끼자면 동쪽 길을, 힘든 게 싫다면 서쪽길을 택하는 편이 낫다. 다만 서쪽 길을 택할 때 주의할 것이 차로 오르는 구간의 도로 폭이 좁다는 점. 교행이 불가능한 길이라 운전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 제주에 머무는 이틀 동안 밤마다 서로 다른 길을 따라 군산오름에 올라봤다. 한 번은 해가 지고 난 뒤 푸른 어둠 속에서 올랐고, 또 한 번은 해질 무렵에 올라서 낙조를 감상하고 늦도록 별을 보다가 내려왔다. 첫날은 구름 한 점 없는 밤이었고, 둘째날은 구름이 낙조에 벌겋게 물들던 날이었다. 첫날 짙은 어둠 속에서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하며 동쪽 길로 올랐다. 오름의 허리까지 차를 타고 가긴 했지만, 단번에 오르기에는 제법 숨이 가쁘다. 오름길은 내내 울창한 숲이었다. 정상의 바위 바로 아래서 비로소 시야가 탁 트였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중문 일대와 서귀포의 야경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왔다. 바다 쪽은 어선이 켠 집어등의 불빛들로 환했다. 제주의 야경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바위를 딛고 정상에 오르자 이번에는 반대쪽 산방산 일대의 야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종 모양의 우람한 산방산 주위로 불 켠 마을들이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처럼 반짝였다. 땅과 바다의 야경보다 더 감격스러웠던 건 하늘에 떠 있던 별이었다. 청명한 가을밤 하늘에는 별자리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정상에 머무는 동안 별자리 사이로 몇 개의 유성이 긴 꼬리를 그으며 떨어졌다. 첫날의 감격을 잊지 못해 다시 군산오름에 오른 이튿날은 하늘이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낙조의 붉은 볕을 받은 구름은 시시각각 다양한 색깔로 물들며 압도적인 풍경을 선사했다. 전날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불붙는 듯한 낙조의 시간이 지나고 천천히 푸른 어둠이 내리는 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예약해놓은 항공편 시각이 촉박했지만 좀처럼 발길을 돌리기가 아쉬웠다. 비행기를 놓친대도 그게 무슨 대수냐 싶을 정도였다. # 오름 사이로 이어지는 길…금백조로 가을 제주가 아름다운 건 팔할쯤이 오름 덕이다. 제주 전역에 386개나 된다는 오름은 가을이면 억새와 강아지풀을 닮은 수크령, 그리고 보랏빛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난다. 야트막한 언덕 같은 구릉에 오른다고 뭐 별 볼 일이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 번 오름에 올라 능선이 그려내는 곡선과 높이가 주는 시야의 장쾌함을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게 될 게 틀림없다. 특히 초록의 기운을 아직 잃지 않은 오름의 능선을 따라 억새와 수크령이 물결치는 가을의 모습은 더없이 매혹적이다. 게다가 오름 정상에 서면 거대한 와이드 스크린처럼 하늘이 펼쳐지는데, 청명한 가을하늘과 뭉게구름을 바라보는 맛도 각별하다. 이래도 심드렁하다면 자신의 무딘 감성과 심미안을 탓할 수밖에…. 가을에 제주를 찾았다면 일렁이는 바다처럼 펼쳐진 제주 동부의 초원을 따라 오름과 오름 사이를 가로지르는 도로 ‘금백조로’의 드라이브를 빼놓을 수 없다. 1112번 도로를 따라 교래사거리와 대천동사거리를 지나서 만나는 작은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택하면 거기가 금백조로의 시작이다. 금백조로는 제주 동쪽의 이름난 오름을 끼고 이어진다. 그 길에서 만나는 오름을 꼽아보자면 숨이 다 가쁠 지경이다. 민오름, 아부오름, 백약이오름, 높은오름, 문석이오름, 동거믄오름, 오리미오름, 손지오름…. 초록의 초지 위로 오름이 그려내는 부드러운 곡선을 감상하면서 달리는 맛이라니…. 금백조로는 수많은 오름을 지나는 길이라고 해서 ‘오름사이로(路)’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 가장 아름다운 가을풍경…용눈이오름과 백약이오름 금백조로 주변의 오름 중에서 대표적인 게 바로 용눈이오름이다. 유명세를 치르는 제주의 대표적인 오름이라 가본 이들도 많겠지만, 그곳에 오른 게 가을이 아니었다면 다시 올라봐야 한다. 작은 알오름 두 개와 분화구 세 개를 가진 용눈이오름의 매력은 ‘관능적인 곡선’이다. 초록의 곡선이 높아지고 낮아지면서 세 개의 봉우리를 만드는데, 이 곡선이 기막힌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능선의 사면마다 피어난 억새와 수크령도 햇볕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며 아름다움에 가세한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오름의 능선은 누런빛으로 변해가는데, 이른 아침햇살이 퍼지기 시작할 무렵에는 금분가루를 칠한 듯 눈부신 황금빛으로 빛난다. 용눈이오름에 오르면 당당한 체구의 다랑쉬오름을 비롯해 손지오름, 동거믄오름 등이 펼쳐지고, 멀리 일출봉의 모습도 뚜렷하다. 이즈음에는 용눈이오름에는 소를 방목하고 있는데, 족히 100여 마리가 넘는 소들이 느릿느릿 오름에 올라 풀을 뜯는 모습이 더없이 목가적이다. 용눈이오름과 함께 인근의 백약이오름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서 나는 약초가 백 가지가 넘는다 해서 ‘백약’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이처럼 둥글고 부드러운 민둥 능선에 무슨 약초가 백 가지나 있었을까 싶지만, 올라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오름의 능선에는 야생화들이 지천이다. 병풀, 제주 피막이풀, 엉겅퀴 등이 뒤섞여 자라고, 초지에는 형형색색의 가을꽃들도 만발했다. 오름길을 따라가는 내내 혹시라도 꽃을 밟을까 싶어 줄곧 발밑을 보게 될 정도다. 오름 능선을 딛고서 제법 규모가 큰 분화구를 따라 이어진 능선을 한 바퀴 돌면 오름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인 금백조로와 함께 제주 동부 일대의 오름군을 샅샅이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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