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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의 과거와 미래

醉月 2009. 10. 28. 12:56

전염병의 과거와 미래

항생제·백신에 견디는 내성병원체 속출… 아예 죽지 않는 수퍼박테리아도 출현
페스트·호흡기질환 등 전염병이 세계사 바꿔
미래엔 우주미생물과 온난화로 인한 열대성질병도 위협

 

전염병을 일으키는 병원체와 숙주(동물·사람) 사이의 작용은 크게 유행성-풍토성-공생 세 단계로 이뤄진다. 전염병이 유행하는 유행성 단계 이후엔 일정 수준의 감염률을 유지하는 풍토병으로 남거나, 서로 이익을 주는 공생 단계로 접어든다. 이때 전염병이 전세계적인 유행으로 번지면 ‘범유행’이라 부르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예가 많다.

가장 잘 알려진 예는 흑사병(페스트)이다. 흑사병의 1차 범유행은 540년 이집트 남부에서 시작됐다. 이 병은 그 후 6년 내 유럽 전역으로 번졌고, 소규모의 국소적인 발병을 일으키다가 14세기 유럽에서 2차 범유행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2500만명 추정)이 사망했으며, 사망자가 속출하자 노동력이 감소해 사회·정치적인 변동까지 일어나 중세시대가 르네상스 시대로 이행되는 전환점이 됐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몰살시킨 호흡기 질환도 대표적이다. 15세기 각종 질병에 면역을 가진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면서 전파된 두창, 홍역, 유행성 이하선염 등은 원주민 대부분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이 전염병의 유행으로 비교적 손쉽게 이뤄졌다는 분석도 많다. 또 19세기 초 유럽을 정복한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는 러시아 원정을 떠나면서 발진 티푸스와 이질로 고생하다 전쟁 전사자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낳았다. 전염병의 유행은 나폴레옹의 절대권력이 쇠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 (좌) 중세유럽을 떨게 만든 흑사병. 사진은 흑사병으로 고통받는 유럽인들이 등장한 잉그마르 베르그만의 영화 ‘일곱 번째 봉인’ (우) 가축의 집단사육으로 인수공통전염병이 늘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점차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류는 전염병의 원인을 밝혀내기 시작했다. 1854년 영국인 의사 존 스노(John Snow)는 콜레라의 유행이 음용수 오염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1880년대 루이스 파스퇴르(Louis Pasteur)와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도 탄저균과 콜레라균을 발견하면서 특정 세균이 특정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지만 의외로 인류 역사상 가장 무서운 전염병 범유행은 20세기 초에 발생했다.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유행했던 ‘스페인 인플루엔자(스페인 독감)’는 인류 역사상 같은 기간 그 어떤 질병보다도 많은 사람, 특히 청년층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1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약 4000만명이 사망했으며, 치사율은 무려 2.5%였다.

우리나라도 상황은 비슷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1918년 11월부터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인플루엔자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이 신문은 1918년 11월 13일 ‘진주 경내는 도당관으로부터 막벌이꾼까지 감기 걸린 사람 투성이요, 화장장에서는 주야로 분주’, 11월 28일 ‘충청남도 서산 지역은 심한 곳은 한 촌이 모두 병에 걸려… 사람이 없는 참혹한 광경’이라 기사화했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도 ‘1918년 11월 유행성 독감이 급속히 퍼지면서 조선인 742만2113명이 발병했고, 13만9128명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이를 근거로 추산할 경우 우리나라의 1918년 당시 인플루엔자 치사율은 무려 1.9%에 이른다.

진화 과정을 더듬어 보면, 치명적인 전염병은 대개 이전엔 접촉한 적 없는 동물과 새롭게 접촉하거나 병원체 자체적으로 변이를 일으켜 발생한다. 특히 동물-사람 간에 감염되는 병을 가리켜 ‘인수공통전염병(Zoonosis)’이라 한다. 1918~1919년 범유행을 일으킨 ‘스페인 인플루엔자’뿐 아니라 에이즈·광우병·사스·신종 인플루엔자 등 중요한 질병도 모두 인수공통전염병이다.

오지 개발로 인한 새로운 동물과의 접촉, 초식동물인 소에 대한 동물성 사료 사육, 동물과의 직접적인 접촉 확대, 대규모 축산산업으로 인한 밀집된 사육 등이 주범으로 지적된다. 특히 가축의 집단 사육은 병원체의 변이 가능성을 더욱 높여 폭발적인 유행을 일으킬 수 있고,  이러한 변이는 인간에게도 영향을 주게 된다.

앞으론 기존 미생물에 새로운 변이가 일어나거나 인간이 이전엔 접하지 못했던 병원체에 노출될 가능성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현대 인류의 발전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항생제는 계속 발달하고 있지만, 오남용으로 인한 내성 병원체가 속출하면서 강력한 항생제에도 죽지 않는 ‘수퍼 박테리아’가 출현했다. 가축의 사료에 들어가는 항생제도 인수공통전염병에 내성을 일으켜 감염을 촉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지구 이외의 행성이나 우주에서 들여온 새로운 미생물의 출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구 온난화는 기후 변화를 초래해 생태계 변화를 일으킬 것이고, 이로 인해 과거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질병도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서식하는 모기 종류가 변하면서 열대성 질병이 유행할 수 있다. 또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미생물이 활성화될 수도 있다.

만성질환도 예외가 아니다. 자궁경부암-인체 유두종바이러스(Human papilloma virus), 간암-만성 B형 또는 C형 간염바이러스, 위암-헬리코박터 파일로리(Helicobacter pylori)의 관계와 같이 병원체가 암을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앞으로 암의 주된 원인으로 병원체의 역할이 계속 밝혀질 것이고, 미생물은 암의 치료와 예방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인간의 평균 수명 증가와 치료 기술 발달로 병·의원을 중심으로 ‘기회 감염(면역성이 떨어질 때 질환을 일으키는 감염균)’이 함께 늘어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병원체는 항생제 내성인 경우가 많아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생물 테러(Bioterrorism)’의 수단으로도 병원체가 사용될 수 있다. 실제 1346년 타타르군(중국 소수민족 군대)은 페스트로 사망한 병사의 시신을 적진의 성 안으로 던져 넣었고, 1767년 영국군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두창으로 오염된 담요를 제공한 역사적 사례가 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미국을 ‘백색 공포’로 몰아넣었던 ‘탄저균 편지 테러’도 이 같은 예다. 

 

원인

국가교류·해외여행 증가, 지구온난화 심화… 전염병에 이제 국경은 없다
콜레라·말라리아 등 '수입 전염병' 증가
기온 상승으로 '재출현 전염병'인 세균성이질도 확산

우리가 얘기하는 ‘감염질환’은 보통 바이러스나 세균, 곰팡이, 기생충 등의 미생물에 의해 발생한다. 여기엔 단순한 감기부터 발병 후 수시간 내 사망할 수 있는 중증 패혈증까지 매우 다양한 질환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전염병’은 감염질환을 일으키는 병원체가 특정 매개체(동식물·인간)를 통해 제3의 대상에게 전파돼 병을 일으키는 질환을 말한다. 과거 전염병은 전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사망 원인 중 하나였지만, 20세기 이후 감염질환에 의한 사망률은 급격히 감소했고 심장질환이나 종양 등 이른바 ‘만성질환’에 의한 사망이 크게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전염병 감염 사망률이 감소한 주요 원인으로 △수질 환경 등 공중위생의 개선 △백신의 사용 △항생제의 개발 등 크게 세 가지를 꼽는다. 특히 1927년 개발된 최초의 항생제 ‘페니실린’ 이후 지난 80여년 동안 과학자들은 다양한 항생제를 개발했다. 항생제는 포도상구균·연쇄상구균·임질·매독·결핵 등 과거엔 치료가 불가능했던 질환들을 치료 가능한 질환으로 만들었고, 수많은 인류의 생명을 구했다. 또 항진균제·항바이러스제·항원충제의 개발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전염병을 ‘정복 가능한 질병’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 잦아진 해외 여행도 전염병 확신의 주된 원인이다. 신종플루 발열검사 중인 인천공항 입국심사장.

하지만 세계보건기구(WHO)가 매년 펴내고 있는 ‘World Health Report’에 따르면, 전염병 감염질환은 아직까지 전세계적으로 심혈관 질환 다음을 차지하는 주요 사망 원인이다. 여전히 해마다 1400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있는 인류 보건의 주요 문제 중 하나다. 특히 1980~1990년대 에이즈(AIDS)의 유행, 다제내성 결핵(결핵의 기본적 치료제에 내성을 보이는 결핵)의 유행, 신종 전염병(Emerging infectious diseases)과 재출현 전염병(Re-emerging infectious diseases) 등 감염질환에 의한 사망이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전염병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도 점차 바뀌고 있다. 우리나라도 1980~1990년대 초반까지는 전염병이 심각하게 발생하지 않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각종 전염병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해 큰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왜 전염병이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일까. 가장 먼저 세계화에 따른 국가 간 무역 확대, 해외여행의 증가, 인적·국가 간 교류 확대,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 변화 등으로 전염병의 ‘국경’이 사라지고 오히려 더 널리 확산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60~1970년대 많은 희생자 수를 기록했던 전염병 발생 빈도 수는 위생환경 개선, 정부 주도의 필수예방 접종 도입 등에 힘입어 1980년대 이후 현저한 감소세를 보였다. 통계청 자료만 봐도 인구의 10만명당 사망원인은 암이 162명, 당뇨병 32명, 심혈관계 질환 160명 등으로 만성질환이 가장 높고, 감염 및 기생충 질환은 17명, 호흡기계 감염 11명으로 감염질환은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나고 있다.

▲ 조류인플루엔자(AI) 유행 당시 양계농가. photo 조선일보 DB

하지만 공식 통계에 나타난 감염질환 사망률은 주로 질병관리본부에 등록된 ‘법정전염병’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따라서 법정전염병을 제외한 각종 기타 감염질환의 실제 유병률과 발생률, 인구 10만명당 사망자 발생 건수 등은 전혀 조사된 바가 없다. 더구나 암 환자나 당뇨병 환자 등 만성질환자들의 ‘직접 사인’도 실제론 감염질환인 경우가 많아, 전문가들은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드러난 것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과거 우리나라는 한반도라는 지형학적 특성, 단일민족이라는 인구학적 특성 때문에 감염질환의 종류가 상당히 제한적이었고 발병 양상도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세계화 움직임이 가속화되면서 지역·국가 간 인적 교류가 활발해졌고, 수출입 교역의 증대로 언제든 전세계 각 지역으로부터 그 지역 풍토병이 유입될 가능성이 커졌다. 실제 우리나라에선 콜레라·말라리아·에이즈·뎅기열 등 ‘수입 전염병’ 환자들이 꾸준히 발견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새로 출현하는 ‘신종 전염병’과 다시 출현하는 ‘재출현 전염병’이다. 신종 전염병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2000년대 초 중국과 동남아를 중심으로 대유행했던 일명 사스, 즉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과 조류인플루엔자(AI·Avian Influenza), 최근 매해 발생하고 있는 대유행 독감 등이다. 이 같은 ‘신종 전염병’은 지난 1981년 에이즈가 새롭게 출현한 이후 약 20개 넘게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선 ‘신종 전염병’ 이외에도 ‘재출현 전염병’의 증가가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세균성 이질인데, 지난 1998년 첫 보고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환자 발생도 증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세균성 이질 확산의 주된 이유로 기온 상승으로 인한 세균 생존 조건의 최적화를 들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많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봄 유행했던 A형간염 역시 대표적인 재출현 전염병이다. 우리나라 10~30대 연령층에서 A형간염의 항체 양성률이 19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탓이다. 이들 젊은 연령층이 A형간염 감수성이 높은 집단(질병에 잘 걸리는 집단)이고, 이들이 가장 활발하고 다양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집단이라는 점에서 산발적이고 집단적인 발병 위험에 노출돼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곤충매개 전염병인 말라리아도 대표적인 재출현 감염질환 중 하나다. 최근 증가세가 다소 둔화되고 있지만, 일부 지역에선 풍토병으로 토착화되는 징후까지 보이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말라리아 발생 건수는 북한의 말라리아 발생 빈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 앞으로 북한과의 질병 관련 정보 교환 등 공동 방역 대책 수립이 필요하다. 이 밖에도 유행성 이하선염·수두·수족구병 등이 면역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젊은 연령층과 노인층을 중심으로 많이 발생하고 있다. 


 

현황

'신종·변종·재출현' 新병원체의 공습… 전염병이 진화한다
작년 전염병 환자 7만941명, 5년 새 2배나 급증
사람·동물 함께 걸리는 '인수공통감염'이 80%

“우리는 곧 전염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주요 전염병들은 머지 않은 장래에 사라질 것이다.”

1963년 영국의 저명한 의사이자 인류학자였던 아이단 콕번(Aidan Cockburn)이 그의 저서 ‘전염병의 진화와 박멸’에서 한 말이다. 당시 이 주장은 새로울 것도 없었다. 1927년 플레밍의 페니실린 개발 후 본격화된 항생제의 사용, 각 병원체에 걸맞은 백신의 개발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곧 전염병 정복 시대가 올 것”이라 믿었다. 특히 사회적 보건·위생의식이 함께 발달하면서 수천 년간 인류를 고통스럽게 했던 전염병은 뒷길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는 ‘순진한 착각’이었다. 195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주요 전염병만 20여개에 달할 정도로 ‘신종 전염병’이 득세를 했고 치사율이 상당 수준에 이르는 심각한 신종 전염병도 있었다. 1990년대엔 식품을 매개로 한 전염병이 큰 폭으로 늘었고, 말라리아·결핵과 같은 ‘후진국형’ 질병은 오히려 증가 추세를 보였다. 곤충을 매개로 하는 전염병도 확산됐고, 동물로부터 감염되는 ‘인수공통전염병’은 감염학계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왜 아직도 전염병인가. 21세기 첨단과학의 시대에 전염병이 아직도 맹위를 떨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간조선은 최근 ‘신종 인플루엔자’ 사태를 계기로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현대 전염병의 양상은 어떤지 들여다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최근 우리 사회를 ‘위생 과민증’으로 몰아넣은 신종플루의 공포를 단순한 ‘플루포비아(fluphobia·인플루엔자 과대공포증)’로 치부할 수 있을지, 전염병에 대한 우리의 대응 현실은 어떤지 ‘현대 전염병의 진실’을 살펴봤다.

7만941명. 지난해 질병관리본부가 집계한 ‘법정전염병’ 환자 발생 보고 건수다. 5년 전인 2003년 3만7661명보다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전국적으로 홍역이 대유행했던 2001년(6만6388명)보다도 많은 수치다. 몇 년 전까진 발생 건수가 전무했지만 최근 들어 감염 환자 수가 급격히 늘고 있는 전염병도 있다.

전문가들은 21세기를 ‘만성질환의 시대’라 불렀다. 의학계에선 “인류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전염병의 시대’는 가고, 암이나 당뇨병 등 만성질환이 주된 관심사로 떠오르는 시대가 올 것”이라 말했다. 실제 통계청이 집계한 만성질환으로 사망한 환자 수는 전염병으로 사망한 환자 수를 압도한다.

하지만 전염병은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다. 2000년대 초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조류 인플루엔자(AI) 파동에 이어 올해는 신종 인플루엔자(신종플루) 공포가 한반도를 덮쳤다. WHO(세계보건기구)도 지난 6월 신종플루 유행 경보를 전지구적인 ‘판데믹(대유행)’ 단계(6단계)로 상향 조정했다. 수십 년 전 스페인 독감과 아시아 독감, 홍콩 독감은 수백만~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 (좌) 올해 유행한 신종플루 바이러스 (우) 2003~2004년 유행했던 사스 바이러스

신종플루 전세계 감염자 34만명… 계절독감 본격화될 겨울 초비상

전염병이 진화하고 있다. 지구상에서 영원히 퇴출된 줄 알았던 전염병이 이전보다 더 빠르고 은밀하게 인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병원체를 전달하는 매개 통로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고, 지역·국가 간 교류 확대로 전염병 바이러스는 보다 신속하게 퍼지고 있다. 바이러스끼리 조합돼 만들어내는 변형 바이러스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고, 바이러스에 내성을 가진 ‘수퍼 박테리아’도 출현했다.

최근 전세계를 긴장시킨 전염병은 ‘신종 인플루엔자(H1N1)’다. WHO는 “현재(9월 27일 기준) 신종플루 감염자는 34만3298명이고 사망자는 4108명”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여기에 따르면 신종플루의 공식 치명률(감염자 가운데 사망자 비율)은 1.2%다.
우리나라에선 현재(9월 23일 기준)까지 약 1만5200건의 양성 사례가 보고됐다. 이 중 신종플루로 사망한 경우는 총 11건으로, 치명률은 0.07% 정도다. 일반 계절 독감의 치사율 0.05~0.1%와 비슷한 수준이다. 질병관리본부는 1만5000여명의 양성 환자 대부분이 완치 단계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지나친 낙관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계절독감이 본격화되는 겨울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간 조합이 활발해져 변종 신종플루가 등장할 가능성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또 WHO는 신종플루의 전파력(1차 환자가 발생시키는 2차 환자 수)이 1.6으로, 계절독감 1.2~1.3보다 높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반 전염병과 달리 변종 가능한 조합이 엄청나게 다양한 것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한 경계를 늦춰선 안 되는 이유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크게 A, B, C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고, 이는 또 H와 N이란 단백질 구성으로 나뉜다. 바이러스끼리 언제 어떤 형태로 조합될지 모를 뿐 아니라, 조합될 경우 변종 가능한 개수도 천문학적이라 미리 대비를 하는 것도 어렵다. 백신이 개발되더라도 수요가 워낙 폭발적이어서 물량을 확보하는 것 자체가 ‘전쟁’이다.

결핵 등 5대 전염병이 96%… “내성 커지고 확산 속도 빨라져”

전문가들은 “전염병과의 전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만성질환 대비 ‘치명률’은 낮지만, 감염양상 자체가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 질병관리본부가 매년 집계하고 있는 ‘법정전염병’ 환자 발생 보고 건수는 매년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결핵처럼 매해 평균 3만4000건씩 꾸준히 보고되는 경우도 있지만, 유행성 이하선염이나 쓰쓰가무시증, A형간염 등 최근 5년 새 20~30%씩 급격히 늘고 있는 전염병도 있다. 수족구병과 세균성 이질 환자도 지속적으로 늘고 있어 질병관리본부가 집중 모니터링에 들어간 상태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5대 전염병’ 중 가장 감염환자가 많은 전염병은 결핵(3만4157명)이다. 그 뒤를 수두(2만2849명), 쓰쓰가무시증(6057명), 유행성 이하선염(4542명), 말라리아(1052명)가 잇고 있다. 5대 전염병이 전체 전염병 발생 건수의 96%를 차지할 만큼 절대적인 비율을 차지한다. 특히 ‘후진국병’으로 불리는 결핵과 말라리아가 5대 전염병에 포함된 것은 본격적인 ‘재출현 전염병’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란 분석이다.

최근 전문가들이 현대 전염병 양상을 ‘신종 전염병’과 ‘재출현 전염병’이란 양대 축으로 설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종 전염병’은 신종플루나 사스같이 새롭게 등장한 전염병을 말하며, ‘재출현 전염병’은 결핵이나 A형간염같이 없어졌다 다시 출현한 전염병을 가리킨다.

전문가들은 이 전염병들이 대체로 ‘인수공통감염증’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성백린 연세대 생명공학과 교수는 “현재 사람에게 전염되는 감염균과 바이러스의 80% 이상이 동물로부터 유래된 것”이라며 “이번 신종플루가 초기에 ‘돼지 독감(swine flu)’으로 불렸던 것도, 이 바이러스가 1998년 북미에서 발생한 돼지독감 바이러스와 1992년 아시아·유럽에서 유행한 돼지 바이러스 유전자가 조합돼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천병철 고려대 의대 교수는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전염병은 이전의 전염병보다 훨씬 빠르게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고, 일부 치료제에 내성까지 가지고 있어 현대 의학기술로도 쉽게 통제하기가 힘들다”며 “전염병 문제는 해결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더 커져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신종과 재출현 전염병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신종 전염병(EID·Emerging infectious disease)’은 “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병원체에 의해 발생해 보건문제를 일으키는 질병”이다. 쉽게 말해 인류가 처음 경험하는 전염병으로, 해당 병원체에 대한 면역이 없어 전파력과 병독성이 크기 때문에 대유행 시 영향력도 매우 크다. 레지오넬라증·에볼라출혈열·에이즈·사스·신종 인플루엔자 등이 대표적인 신종 전염병이다.

‘재출현 전염병(Re-emerging infectious disease)’은 과거 감소세를 보이다 새롭게 증가하고 있는 전염병으로, 결핵·말라리아·홍역·세균성 이질·A형간염 등이 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형태
신종플루, 1918년 4000만명 사망 ‘스페인 독감’과 유전자형 같아

▲ (위) 신종플루 의심환자들을 위해 서울대병원에 설치된 외래진료소. photo 조선일보 DB (아래) 2003년 사스 유행 당시 방독면을 쓴 모나리자 그림을 들고 있는 중국 여성.

인플루엔자는 크게 A, B, C형으로 나뉘며, 이는 HA·HN의 하부구조로 다시 나뉜다. 사람에게 유행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는 주로 A형과 B형이며, 변이를 통해 대유행을 일으키는 것은 A형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형 H와 N은 바이러스 단백질을 가리킨다. H는 9개 종류로 나뉘고, N은 16개 종으로 나뉜다. H는 감염 초기 바이러스가 세포 표면에 딱 달라붙게 하는 단백질이며, N은 새로 만들어진 바이러스를 감염된 세포에서 떨어지게 하는 단백질이다. H와 N은 세포 부착-세포 탈피라는 반복 작용을 통해 바이러스를 증식시킨다.

이번에 발생한 신종플루의 형태는 ‘인플루엔자 A형 H1N1’으로, 1918년 4000만명 이상을 사망하게 한 ‘스페인 독감’의 유전자형과 같다. 약 5년 전 유행했던 ‘조류 인플루엔자(조류독감)’는 H5N1 바이러스이고, 200만명 이상이 사망한 1957년 ‘아시아 독감’은 H2N2,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한 1968년 ‘홍콩독감’은 H3N2 바이러스다.

정부의 대응

위험 숨기지 말고 정확히 알려라… '위기커뮤니케이션'이 관건!
선진국선 국가기반 흔들… '주요 재난'으로 취급
치밀한 대비책 마련… 확산속도 등 질병감시가 대응의 첫 단계
백신개발도 직접 나서야

전염병의 유행은 출현 시기와 영향력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적 특성이 있다. 또 생물 테러와 같은 인위적 상황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전쟁과 같은 인공재해적 특성도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에선 신종 전염병을 국가의 기반을 흔들 수 있는 주요 재난으로 취급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이번 신종 인플루엔자A(H1N1) 대유행 사태에서 선진국과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점은 사전 대비 수준이다. 1997년 홍콩을 중심으로 유행한 조류 인플루엔자 유행 당시, 세계보건기구(WHO)는 각국이 신종 인플루엔자 대유행 대비 계획을 세울 것을 촉구했고, 일본 등 많은 선진국에서 2000년 이전에 이미 사전 계획을 만들었다. WHO는 2004년 인플루엔자 대유행 단계를 크게 세 단계로 설정하면서 각국에 구체적인 대유행 계획 수립을 촉구했고, 필요한 체크리스트와 가이드도 제공했다.

▲ 신종플루 확산 방지 대책을 발표 중인 보건복지가족부. 가운데가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

이후 대부분의 선진 국가들은 전염병 유행에 대비한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중앙정부 차원뿐 아니라 각 지방자치단체, 병원, 학교, 직장별로 계획을 만들고 사회 핵심기능 유지를 위한 훈련을 실시했다. 항바이러스제 확보, 대유행 백신 개발과 사전계약이 제때 이뤄지고 대유행 단계별 구체적 행동지침과 필요한 물품 확보가 제대로 이뤄진 것도 이 덕분이다. 이번 신종플루 사태 때 선진국들은 각 병원에 필요한 외래환자시설을 설치했고, 의료진이 언제든 치료가 가능하도록 곳곳에 N95 마스크를 비치했다.

학교를 예로 들면, 미국은 실제 각 학교에서 단계별로 취해야 할 조치와 학부모가 알아야 할 메시지, 대유행 대비 진단키트도 사전에 보급했다. 병원의 경우, 환자 증가에 대비한 사전 의료물품 확보, 신종 인플루엔자 환자를 외래와 병실에서 관리하기 위한 지침 등 필요한 하부구조도 미리 갖췄다. 기업은 기업대로 치밀한 비즈니스 지속 계획(BCP)을 만들었다.

신종플루 같은 전염병 확산에 대한 가장 중요한 대응의 첫 단계는 질병 감시다. 신종 전염병의 유행 확산 수준이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인플루엔자 표본감시체계는 대체로 잘 진행되고 있지만, 대유행 단계에서 표본감시 이외에 어떤 항목들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지 미리 설계하고 수행하는 것도 필요하다. 질병 감시는 생물 테러, 기타 신종 전염병과 관련해서도 가장 중시해야 할 활동 중 하나다.

▲ 신종플루 치료제를 비축하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photo 조선일보 DB

백신 연구와 생산은 시장 자율에 맡기기보다는 일정 부분 전략적으로 국가가 관심을 갖고 투자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고위험군을 모두 접종대상에 포함시키면 전체 국민의 약 50% 정도가 접종대상이 된다. 현재 목표로 하는 27%의 접종대상엔 65세 미만 만성질환자가 거의 빠져있다. 또 누구를 먼저 접종하는 것이 좋을지 국내 상황에 적합한 시뮬레이션이 필요하며, 대유행 백신 개발에도 안전성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위기 커뮤니케이션(risk communication)’ 능력의 확보다. 선진국에선 신종 전염병이나 신종 인플루엔자의 대응과 관련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국민들에게 전염병의 위험성에 대해 가장 정확한 정보를 빠르고 숨김없이 알려야 하는 것이다. 신종 인플루엔자 유행 규모나 영향력이 얼마나 될지는 정확하게 모른다해도, 가능한 증거에 기반한 정책적 표준모형은 있어야 하고 기본적인 위험에 대해서도 확실히 알려야 한다.

‘신종 플루의 위험도가 계절 독감 수준’이라거나 ‘계절독감보다 중증도가 낮다’는 식의 메시지를 던져놓고선, 전교생을 상대로 체온 측정을 벌이거나 지자체 축제를 줄줄이 취소하는 등의 풍경은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국민들로선 대체 어느 것이 맞는지 알지 못해 더 불안하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위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이러한 조치가 왜 필요한지도 설명이 제대로 안 되는 것이다.

전염병 대응에 관한 정책은 대유행의 단계적 특성과 잘 맞아떨어져야 효과가 크다. 예를 들어 일선 중·고교의 휴교 결정은 전 국민의 1% 이하 발병 상황에서 유행 절정 시기를 늦추고 환자 발생 크기를 줄이기 위해 적합한 조치다. 이미 지역사회에 광범위한 유행이 이뤄진 심각한 단계에서는 학생들의 보호를 위해서도 큰 의미가 없다. 또 만약 500억원을 들여 지하철 이용객에게 손 소독제를 보급하는 것과, 그 돈으로 중환자실이나 인공호흡기를 확보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어린이를 먼저 예방접종하는 것과 고위험군 성인을 먼저 예방접종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입원자와 사망자를 줄일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은 매우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유행시기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근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객관적 정보는 거의 본 적이 없는 게 현실이다.

역사적으로 신종 인플루엔자의 대유행은 한번 발생하면 전사회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신종플루 파동이 잘 지나가더라도 또 다른 신종 인플루엔자가 나타날 것이고, 사스와 광우병에 버금가는 새로운 전염병도 나타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 얼마나 잘 대비하고 있느냐다. 지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를 막을 기술이 없는 것처럼 신종 전염병의 발생과 유행을 막을 기술도 아직 없다. 하지만 자연재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처럼 신종 전염병이나 생물 테러에 대한 충분한 대비도 가능하다. 신종플루 사태가 수차례 WHO나 의학 전문가들로부터 지적받았던 대비 수준이었음을 감안할 때, 새로운 바이러스나 변형된 바이러스의 출현에 우리 정부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을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