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계획 50년, 숨겨진 이야기들
세종시 논란이 거세지면서 ‘도시계획’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도시계획은 말 그대로 도시의 생김새와 기능을 백지상에서 계획하는 작업이다. 프랑스 파리는 나폴레옹 개선문을 중심으로 한 방사선축을 계획의 핵심으로 잡았고, 중국 베이징은 자금성을 중심으로 한 대칭순환축을 설계의 근간으로 삼았다. 미국 워싱턴, 호주 캔버라 등 각국의 주요 도시들 상당수가 정교한 도시계획 속에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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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초공사가 한창인 세종시. / photo 조선일보 DB
하지만 우리나라의 도시계획 역사는 일천한 편이다. 일제강점기와 개발독재, 민주화시기를 거치며 도시계획은 도시계획가들의 머리가 아닌 권력가의 의중에 따라 심한 부침을 겪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세종시 역시 “장기적 계획보다는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태어났다”는 것이 대다수 도시계획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마침 지난 10월 7일 도시계획 전문가들의 모임인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에서 창립 50주년을 맞이해 ‘이야기로 듣는 국토·도시계획 반백년’이란 기념책자를 출간했다. 국내 전문가 12인이 구술 인터뷰 형식으로 도시계획 관련 뒷 얘기들을 풀어낸 책이다. 이 책에는 6·25전쟁 이후 판자촌과 무허가주택이 난립한 서울, 그리고 구로공단, 울산공단과 같은 산업단지의 탄생, 경주보문단지의 조성, 강남과 잠실 같은 초기 ‘뉴타운’의 탄생에 얽힌 비화(秘話)들이 대거 수록됐다. 특히 세종시 논란의 출발점이랄 수 있는 박정희 정부 시절의 신행정수도 건설계획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담고 있어 관심을 끈다. ‘이야기로 듣는 국토·도시계획 반백년’에 수록된 주요 에피소드를 간추려 소개한다.
6·25전쟁과 무허가건축
이승만 “도시계획 중단하더라도 집을 짓게 하라”, 전쟁 직후 무허가건축 허용, ‘가건축제도’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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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서울 청계천변 1970년대 판자촌 2.서울 모래내 1970년대 판자촌 3.서울 중랑천변 1970년대 판자촌
1945년 광복 직후에는 도시계획이란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 일제 때 일본에서 토목과 건축을 전공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도시계획’이란 용어 정도가 어렴풋이 알려졌을 뿐이다. 우리나라 도시계획의 1세대로 불리는 박병주 홍익대 교수는 “일본 유학 시절 만주의 도시계획이라든가, 동남아 군사기지 토지조성사례 등 자료를 봤던 것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물론 극도로 혼란한 정국이어서 도시계획이란 말 자체가 ‘배부른 자들의 소리’였다. 6·25 직후인 1954년에는 도시계획에 대한 시민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전란을 피해 간신히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자기 땅에 새로 집을 지으려고 해도 땅 자체가 도시계획에 묶여 신축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3년간의 6·25전쟁 동안에 서울 5만5000동을 포함해 전체 주택의 33% 이상이 전란으로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당시 서울시민들은 집을 못 짓게 막는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에 몰려들어 욕설을 퍼붓고 소란을 피웠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박병주 교수는 “당시는 난민을 위한 최소한의 주택 마련이 급선무였던 시기였기에 미래를 향한 도시계획은 지나친 사치라고 여기고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은 “도시계획을 중단하더라도 집을 짓게 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런 명령은 무허가건축을 사실상 양성화해주는 ‘가(假)건축제도’를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 가건축제도는 “3년 이내 도시계획을 실시할 땅은 유가증권을 발행해 보상하고, 3년 이후 도시계획을 실시할 땅은 임시로 간이건축물을 허용하되 사업실시 때는 무상철거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일종의 무허가건축과 도시계획 사이의 타협이다. 가건축제도의 도입은 서울시내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 무허가건물이 우후죽순 들어서는 단초가 됐다. 엉망인 건물이 마구 생기면서 덩달아 도로도 꼬불꼬불해졌다. 우리나라 도시계획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후일 건설부 장관을 지내기도 한 고(故) 주원(1988년 작고)씨는 회고록을 통해 “가건축제도는 고식적인 미봉책으로 발등의 불을 끄는 데는 유효했다”면서도 “그 많은 무허가건물과 그것을 합리화하는 고식적 행정의 연속으로 이어져 도시계획에 있어 ‘암적 존재’가 됐다”고 술회했다.
대학 도시계획과의 탄생
도시계획에 대한 몰인식 팽배, 겨우 설립허가 받아, 대학 측 “예산 없다”… 외부 도움으로 강의실 마련
근대적 의미의 도시계획 및 국토계획의 개념은 독일 히틀러가 ‘아우토반(무제한 고속도로)’을 건설할 때 처음 탄생했다. 일제도 1932년 만주국을 세우고 만주에 신도시를 개발할 때 히틀러의 국토계획 개념을 도입했다. 광복 직후 우리의 국토계획·도시계획 개념도 일본에서 유학한 토목가, 건축가들에 의해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도시계획’이란 개념 자체도 토목과 건축의 하위 개념 정도로 치부됐다. 우리나라 도시계획 1세대들도 대부분 도시계획이 아닌 토목·건축을 전공한 이들이다. 심지어 “불도저 2대 사서 높은 데는 깎고, 낮은 데는 메우면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박 교수는 “당시는 조야의 많은 사람이 기술적 전문성에 대해 몰인식했던 때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1960~1970년대 정부의 급속한 산업화 정책에 따른 ‘이촌향도’ 추세가 심화되면서 도시계획과 전문 학과 신설 필요성은 점점 높아졌다.
‘도시계획학과’란 독립 학과를 개설하는 데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시 문교부(현 교과부)에서는 도시계획과 신설안을 접하고 “도시계획으로 학위를 주는 데가 어디 있느냐”며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교육법시행령 속에도 ‘도시계획’ 분야가 없어 학과 신설 전에 교육법시행령을 바꾸는 작업부터 해야만 했다. 강사도 부족해 한국에 온 외국인 평화봉사단원 가운데 도시계획을 전공한 사람을 뽑아 썼다. 천신만고 끝에 문교부로부터 설립허가를 받았지만 돈이 문제였다. 서울대 대학본부에서 “책정된 예산이 없어 한 푼도 줄 수 없으니 당신네들이 알아서 하라”는 태도로 나왔기 때문이다. 겨우 서울대 문리과 대학에서 무도장(武道場)으로 사용하던 2층 건물을 얻긴 했으나, 강의에 필요한 기자재를 구할 수 없었다. 결국 당시 한국종합기술공사 대표로 있던 고(故) 김수근씨의 도움으로 강의실을 열고 칠판과 블라인드 커튼, 전화기와 같은 기자재를 구할 수 있었다. 건축가 김수근씨는 ‘서울올림픽 주경기장’ ‘자유센터’ ‘타워호텔’ 등의 건물을 설계한 건축계 거목이다. 도시계획학과는 1970년에야 1회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었다.
그린벨트의 등장
산지 절개 고민하던 박 대통령 말 한마디로 시작, 그린벨트 단속 안해 처벌된 공무원만 3000명
김대중 정부 때부터 대폭 해제되기 시작한 그린벨트는 박정희 정부의 야심작이었다. 박정희 정부의 도시계획은 도시를 녹지로 둘러싸는 ‘그린벨트’ 4자로 요약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린벨트는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의 구두 지시로 탄생했다. 박 전 대통령은 1970년 경부고속도로의 개통과 산업단지 건설에 따른 산지 절개 등을 지켜보면서 환경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린벨트란 개념은 법적 근거가 없어 당시 국회의원과 기자들도 잘 몰랐다고 전해진다. 박 전 대통령이 그린벨트를 최초로 결정하는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김의원 경원대 명예교수는 “박 전 대통령이 ‘여기 그린벨트라는 것 있지, 쫙 쳐’라고 했다”고 회고한다. 권력자의 의중에 따라 우리나라 지도가 바뀐 것이다. 김의원 명예교수는 국토개발연구원장 등을 역임하고 후일 경원대 총장을 지낸 도시계획 분야의 원로다. 김 명예교수는 “그린벨트라는 개념은 도시계획의 학술용어인데 박 전 대통령이 어찌 알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린벨트 자체가 박 전 대통령 구두 지시로 탄생한 만큼 초창기에는 그린벨트 단속이 상당히 엄했다고 한다. 김 명예교수는 “당시 청와대 사정특보실 특수반의 주 업무가 그린벨트 단속이었다”며 “그린벨트 단속으로 인해 처벌당한 공무원 수도 3000명에 달했을 것”이라고 했다. 청와대 특수반이 직접 그린벨트 위에 들어선 임시 송아지 축사를 철거한 일도 있었다. 심지어 그린벨트 인근 군부대 고정식 초소의 설치까지도 일일이 군 출신인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고 전해진다. 김 명예교수는 “당시 국방장관이 ‘각하, 군 관계 그린벨트는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라고 하자, 박 대통령은 ‘안돼, 군인들이 법 지키나, 건설부 통해서 와’라고 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당시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도시계획을 챙기던 인물”이라고 회고한다.
잠실지구와 석촌호수의 탄생
매립될 뻔했던 석촌호수 대통령 지시로 구사일생,
잠실은 극도 보안 속 계획수립위해 2주일 속도전
서울의 도시계획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흔적을 지우기는 힘들다. 강남 3구의 하나로 불리는 송파구의 잠실지구도 박 전 대통령의 결단에 따라 2주일 만에 태어났다. 박 전 대통령은 1973년 박병주 홍익대 교수를 불러 전권(全權)을 위임하고 잠실뉴타운 건설계획을 2주 만에 가져올 것을 지시했다. 박 전 대통령은 “잠실은 서울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벌판”이라며 “외국에서 성행하던 뉴타운 개발사례를 동원해서라도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의 명에 따라 잠실지구 계획은 극도의 보안유지 속에 2주일 만에 속도전으로 진행됐다. 당초 계획은 인구 2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신도시였다. 박병주 교수는 “당시 개발계획은 서울시장이 박 대통령께 보고하고 ‘OK’사인이 나야 이를 바탕으로 프로젝트가 발동될 수 있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 초창기 도시계획의 선구자로 나중에 국토개발연구원 이사장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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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매립될 뻔했던 석촌호수 (아래)서울 송파구 잠실아파트촌
송파구의 랜드마크이기도 한 석촌호수는 당초 매립될 뻔했었다. 본래 한강 지류의 일부인 석촌호수는 한강지류 공유수면 매립공사 계획에 따라 파묻기로 예정돼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의 명으로 잠실지구 설계의 전권을 부여받은 박 교수는 “호수에 면하여 중심 시가지를 설계한다”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오늘날 각광받고 있는 수변도시 개념의 원형인 셈이다. 하지만 서울시에서는 “석촌호수 일대는 서울시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로 설정돼 전체 공유수면을 매립하여 토지를 조성하는 것으로 공고됐다”며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의 결단으로 서울시의 이런 입장은 곧바로 뒤집어졌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해당 지역 토지 소유자들의 반발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잠실지구 기본계획을 세운 박 교수는 “개발독재가 허용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며 “요즘도 잠실 롯데월드 앞 석촌호수에 가면 감회에 잠기곤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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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정수도 추진
박정희 대통령 “내가 수도를 옮겨야겠어” 처음 언급, 필 “박정희 계획은 작아, 50만~100만 규모로” -
박정희 정부 당시 논의된 바 있는 신행정수도 건설계획도 도시계획 역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다. 세종시 논란도 사실상 박 전 대통령의 행정수도 건설계획의 연장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의원 경원대 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내가 수도를 옮겨야겠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NC(New Capital) 프로젝트’란 이름 아래 신행정수도 건설계획을 입안하고 있었다. 수도권 집중 완화와 인구분산이 주요 목적이었다. 대전과 청원군 대청댐 일대, 공주, 연기, 논산 등이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됐다. 박 전 대통령이 당초 구상했던 행정수도는 인구 5만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박 전 대통령 때는 안보상의 고려가 행정수도 건설 이유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박 전 대통령은 ‘NC 프로젝트’의 실무진에 “휴전선에서 평양과 동(同)거리이거나 조금 더 먼 곳”과 같은 세부적인 지침을 친필로 메모장에 적어 하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수도 이전에 버금가는 신행정수도를 건설하려 했던 사람은 박 전 대통령이 아닌 김종필씨라는 것이 당시 관계자들의 얘기다. 충남 부여 출신인 김종필씨가 계획한 행정수도는 박 전 대통령이 구상한 5만명보다 10~20배나 더 큰 인구 50만~100만명 규모였다. 오늘날 인구 50만명의 세종시 계획보다 큰 규모다. 서울대 공대 주종원 명예교수는 “김종필씨는 그건(박 전 대통령의 행정수도) 너무 작다고 하면서 인구 50만에서 100만명 정도 되는 대규모 도시를 상상했던 것 같다”며 “내용적으로는 세계 최고의 행정타운을 계획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세종시가 들어서는 공주·연기군 일대의 지세(地勢)에 관한 얘기도 나왔다. 박병주 교수는 “당초 공주 계룡산 일대를 행정수도 후보지로 선정하려 했지만 풍수지리상 안산(案山·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 산)이 약한 관계로 최종 후보지로 논산·연기가 선정됐다”고 말했다. 또 “예비평가에서는 논산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50년
전문가 4500명… 10월 7~8일 창립 50주년 국제세미나 열어-
- ▲ 학회 창립 50주년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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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로 듣는 국토·도시계획 반백년’을 펴낸 ‘대한국토·도시계획 학회(회장:황희연 충북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도시계획 입안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전문가 모임이다. 4500명에 달하는 도시계획 석학과 관련기관 종사자들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는 단체로, 1959년 설립돼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했다. 이 단체에는 국토개발연구원장을 지낸 인사들을 비롯, 건설부·해수부 장관을 지낸 고위 인사도 상당수 참여하고 있다. 지난 10월 7일과 8일 창립 50주년을 맞이해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기념행사를 가졌다. 행사에는 미국 도시계획학회장 브루스 나이트(Bruce Knight)를 비롯 전(前) 일본 도시계획 학회장 아사노 미쓰유키, 타이완 도시계획학회장 청밍펑 등 각국의 도시계획 고위인사들이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는 ‘학회 50년사’ 발간을 비롯해 ‘이야기로 듣는 국토·도시계획 반백년’ ‘도시, 인간과 공간의 커뮤니케이션’ 등 도시계획 관련 새 서적도 선 보였다. 행사를 주최한 황희연 대한국토·도시계획 학회장은 “불과 반세기 동안 우리는 농경과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지식사회로의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며 “국제화·세계화 추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수준 높은 국제학술대회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고 기존의 한국·일본·대만의 세미나를 동아시아 전체 차원으로 확대하도록 노력하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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