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신봉 기슭
마침내 지리산에 오른다. 누구나 오르는 산이지만 지리산에 대한 그리움은 산처럼 깊고도 넓었다. 아니 지리산을 향한 꿈이 높았다.
그 꿈을 향해 붓길을 이어온 뒤안길은 언제나 지리산을 품은 마음으로 점철되었다. 마치 어느 생엔가 살다 떠나온 고향 산이었을까. 이 알 수 없는 애모의 정이 깊어갈수록 산은 높았고, 나는 한없이 낮아져야만 했으니….
산은 말이 없는데 반백의 나이를 넘겨 세월의 무상을 느끼며 오르는 초겨울의 산길, 하늘 아래 지리산 종주 능선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삼신봉으로 오른다. 길머리는 도인촌으로 불리는 청학동(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뒷산이다.
여행은 돌아오기 위함이고, 산은 내려가기 위해 오른다는 역설을 되새기며 오르는 길. 남빛 하늘 아래 스산한 계곡, 마른 낙엽들이 마냥 뒤척이고 있다. 사계절의 운행 속에 빛이 바래가는 낙엽의 형해(形骸)! 저들은 필시 새 봄의 잉태에 헌신하리니.
그들 떠나고 있네 이승의 마지막 잔치 끝내고
우수수 찬비 휘날리는 하늘 가로질러
하나의 풍경에서 다른 풍경에로
어깨 부딪치며
자욱하게 떠나고 있네…<‘낙엽에게’-이유경>
초겨울 늦단풍의 조락을 가슴에 묻고 자욱한 능선을 발아래 두고 등이 젖을 무렵 드디어 삼신봉(三神峰·1284m) 정상에 올랐다. 일기예보와는 달리 산신께서 도와주시는가. 청명한 하늘 아래 펼쳐지는 지리산 능선의 대파노라마! 노고단-반야봉-토끼봉-명선봉-벽소령-덕평봉-칠선봉-영신봉-세석평전-촛대봉-연하봉-장터목-제석봉-천왕봉이 우뚝하고 써리봉으로 흘러내리는 능선이 한눈에 펼쳐진다.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대미로‘흘러온 백두산’ 또는 ‘머물러버린 백두산’(박태순)으로 불리거니와 어머니산이라 함은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문장에서 실감난다.
‘꽃봉오리 같은 산봉우리들과 꽃받침 같은 골짜기들이 백두산으로부터 면면히 흘러내려와 솟구쳤다.’
예로부터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은 단순한 산행이 아니라, 자신과 사회와 국토에 대한 종합적 성찰의 기회를 갖는 여행이었다(최석기). 따라서 내 붓길 또한 여여하여 지리산의 시절 인연에 화답해보리라 서원하며 화첩을 펼쳤다.
거센 바람 속에 시원의 역사와 숨결이 우주를 감싸듯, 웅혼한 기상이 몰려와 가슴 벅차다. 신령한 기운에 전율한다. 이 기나긴 여정이 부디 산신의 가호 속에 뭇 인연들과의 행복한 조우로 이어지기를 나는 발원했다.
산을 내려와 청학동 도인촌의 천제당(天祭堂)에 이르니 서형탁(徐亨卓) 훈장님이 맞아준다.
“요즈음 어른들은 인사할 줄도 몰라요.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는 부모는 인사하지 않고 애들에게만 시키니. 부모가 먼저 하면 어련히 따라서 잘할까.”
짧은 말씀이나 오늘의 세태와 전통의 간극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다.
청학동(靑鶴洞)은 신선이 학을 타고 노닐던 지상선경(地上仙境)이라 하여 중국의 무릉도원 같은 명승지로 이상향(理想鄕)을 구현하려는 곳이다. 1950년대부터 유불선합일(儒彿仙合一) 사상인 갱정유도(更定儒道)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터 잡은 곳이다. 창시자 강대성(姜大成·1890~1954)에 의해 하동에서 수행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이 둥지를 틀었다고 한다.
고려 때 이인로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청학동이 정녕 이곳이었을까?
두류산은 아득하고 저녁구름 낮게 깔려/ 천만 봉우리와 골짜기 회계산(會稽山)과 같네./ 지팡이를 짚고서 청학동을 찾아가니/ 숲 속에선 부질없이 원숭이 울음소리뿐/ 누대에선 삼신산이 아득히 멀리 있고/ 이끼 낀 바위에는 네 글자가 희미하네/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 어디 멘가/ 꽃잎 떠오는 개울에서 길을 잃고 헤매네
<청학동 변증설>
다담을 마치고 뜰을 나서자 훈장이 계신 서당은 예전(450년 전) 진주암 터였단다. 앞이 탁 트이고 산맥이 출렁이며 달려 나가는 것이 감나무 사이로 시원하다. 명당의 반열에 들 만하다.
훈장의 안내로 천제당(天祭堂)으로 가 도인촌 김덕준(金德遵) 촌장을 뵈었다. 천제당은 봄, 가을 천제를 올리고 도조(道祖) 강대성의 탄강일을 봉행하는 곳이다. 촌장께서는 길손에게 한 마디라도 더 들려주려고 끊임없이 책장을 넘기며 말씀하시니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겠는데, 문제는 새겨듣기 어려움이다. 이것이 시대와 세태의 간극인가. 아니면 길손의 우매함인가. 좀 더 쉽게 풀어서 오늘의 삶과 접속할 수 있는 지혜와 방편이 필요할 것 같다. 청학동의 존속 가치와 희망을 위해서 말이다. 웃으며 길손을 전송해주시던 촌장님의 쓸쓸한 그림자가 자꾸만 마음에 남는다.
현재 청학동은 10여 개의 서당이 운영되며 20가구에 5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산골 묵계초등학교가 그나마 폐교되지 않는 까닭은 전교생 100 여 명 중 이곳 아이들이 반 정도는 되어서다. 부디 더 줄어들지 않고 서당을 보고 전학오는 아이들이 많기를.
겨울 화개골의 불(佛)·선(禪)·악(樂)·차(茶)에 취해
개인적으로 겨울산을 좋아하는 성벽이라 산하를 떠돌며 그린 겨울화첩이 많은 편이다. 특히 겨울 산사(山寺)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 신발끈을 맨 추억이 그림일기로 남아 있다.
삶의 본질을 추구하듯 세속의 일을 떨쳐버리고 나를 바라보는 일에 겨울 산이 거울이 되어 주었다. 특히 눈이라도 분분히 내리는 날엔 어김없이 배낭을 꾸려 떠나곤 했으니. 이른바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이지 말고’였다.
화개면의 화개천을 오르며 뒤돌아보는 풍광은 푸른 차밭을 빼고는 잿빛과 적갈색이다. 실개천이 계곡을 적시는 은빛 여정.
모암마을 계곡은 벚나무 가로수 사이로 활등처럼 휘어 돌아간다. 물은 잔돌 사이로 유유자적하다. 박목월은 ‘비유의 물’에서 ‘채우면 넘쳐 흐르고 차면 기우는 물의 진로, 눈(目)이 없는 투명한 물의 머리는 온통 눈(目)’이라고 했다. 이 눈을 보지 못하고 자연의 흐름을 어찌 해보겠다고 강사업(?)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경제인이지 결코 문화인은 아니다. 예 와서 보라. 저 굽이치는 계곡의 흐름과 이를 받쳐주는 산과 자연석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인간의 정서는 누대로 자연을 통해 순화되고 정화될 수 있어야 함을.
2년 전(2008년) 5대 강의 화첩순례(‘강에서 띄우는 그림편지’ 내일신문) 때 느낀 바, 산천을 가로막은 고가도로는 경관은 전혀 아랑곳없었고 통행차량도 극히 드물었다. 이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 행정이요, 지역사업인가를 하소연하고 싶었다. 풍경은 시대의 정서를 환기시키는 바로미터이기에. 해서 이렇듯 아름다운 계곡을 보면 자꾸 되돌아보게 되는가 보다.
‘인도로부터 직접 불교 전래’ 암시하는 칠불사 창건 설화
발길은 계곡을 거슬러 신흥리의 푸조나무에 이른다. 600여 년을 헤아린다는 나무는 최치원 선생이 꽂은 지팡이가 뿌리를 내렸다는 전설이 강물처럼 흐르고.
화개천을 오르다 신흥교에서 칠불사(七佛寺) 길을 택하니 목통골이요, 범왕마을 길목이다. 산길에는 소위 겨울단풍이라 불리는 ‘이나무’가 가끔 눈에 띄는데 붉은 열매를 지녀서 단풍나무처럼 보인다. 그 밖에 고로쇠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 참나무, 밤나무, 돌배나무, 박달나무, 노각나무, 산벚나무, 소나무 등이 산재했다.
- 원범왕마을의 이상규(李詳圭·77) 선생을 뵈니 5남1녀를 둔 효령대군 18대 손이다. 마을 내력을 묻자 임진왜란 때 피란 온 사람들에 의해 자리 잡았고, 현재는 20가구에 40여 명이라고 한다. 여순반란 사건 때 마을의 피해가 컸고 칠불사 복원에 마을 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고 한다. 얼마나 교통이 그리운 오지였는지, 버스가 들어온 날(1982.3.6)을 이 선생은 정확하게 일러준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들어온 사연은 평생 잊히지 않는 법이다.
생업은 주로 고사리와 고로쇠액 체취, 그리고 민박으로 꾸려 간다는 범왕마을. 마을 전경을 그리기 위해 건너 산길에서 보는 경관은 대 숲과 소나무 숲 속에서 정겹다. 언덕엔 온통 고사리 채취의 흔적이고 남빛 하늘이 산마을을 품어준다. 비탈진 다랑이논과 솔밭에 잠든 혼백(산소)이 마을을 내려보고 있다.
산길을 따라 마침내 겨울 산사 그림의 대상지로 정한 칠불사에 이르렀다. 의외로 주차장이 크고 넓다. 입구엔 초의선사(草衣禪師) 다신탑비(茶神塔碑)가 우뚝하다. 일주문을 지나자 연못이 드러나고 사적비, 부도탑이 대 숲 앞에 선연하다. 새로 쌓은 돌담장이 아름다운데 초의선다원이 새 봄 개원을 앞두고 있다. 대웅전 불전에 합장하고 종무소를 찾으니 제월(霽月) 통광(通光) 스님이 맞아주신다.
‘환화공신즉법신(幻化空身卽法身·허깨비 같은 공한 몸이 곧 법신)이로다’< 깨달음의 노래 증도가(證道歌) 언기주(彦琪註)> 중에서(중국 현각 스님 665~713). 통광 스님이 현토역주한 증도가를 미리 읽고 찾아간 터에 길손의 인연을 반기며 스님은 차를 권한다. 스님은 첫인상에 불손(佛孫)의 골기가 뚜렷하고 길고 흰 눈썹이 휘날리니 옛 선사의 기품이 물씬 어린다.
- 지리산 반야봉(般若峰) 동남쪽 해발 800m 고지에 자리 잡은 칠불사(七佛寺)는 삼국시대 초기 김해 지방을 중심으로 낙동강 유역에 있었던 가락국의 태조요, 김해 김씨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일곱 왕자가 와서 수도를 한 후 모두 성불했다고 해서 칠불사로 불린다. 수로왕은 인도 갠지스강 유역에 있었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아들여 10남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왕위를 계승했고, 차남, 삼남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씨(許氏)의 시조가 되었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출가해 허황옥의 오빠인 인도 스님 장유보옥(長遊寶玉) 선사를 따라 이곳 지리산 반야봉 아래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더욱 정진, 수로왕 62년(서기 103년)에 모두 성불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일곱 부처가 탄생한 곳이라 하여 칠불사라 불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고구려(372년)보다 270여 년 앞선 불교 전래로 가야국은 바다를 통해 인도로부터 직접 불교가 수용되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칠불사의 창건 설화다.
하동-화개장터, 섬진강, 악양 평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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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에/ 아랫말 하동사람 윗말 구례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구경 한번 와 보세요/ 보기엔 그냥 시골장터지만/ 있어야 할 건 다 있구요/ 없을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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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조영남이 짓고 노래한 ‘화개장터’는 인구에 회자되어 국내의 대표적인 장터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십수 년 전 타 보았던 줄나루 나룻배의 낭만도 사라지고 대신 원색의 아치형 다리가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오늘의 화개장터. 세상 풍경은 변해도 어김없이 봄이 오고 꽃망울이 터졌다.
섬진강 수문이 문을 열었던 때부터 영호남 사람이 모여든 장터는 1726년 전후로 전성기를 맞아 객주의 오고감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신교통과 유통구조의 발달로 쇠퇴했으니 지금은 당시의 장터 흔적은 사라지고 화개천 너머에 상설시장으로 복원된 것이다.
추억 속의 화개장터 분위기는 김동리의 소설 <역마>(1948) 속 풍속에서 살펴진다.
‘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火田民)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갯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아장수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주머니끈, 족집게, 골백분 들이 또한 구랫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의 해물 장수들이 김, 미역, 청각, 명태, 자반조기, 자반고등어들이 올라오곤 하여 산협(山峽) 치고는 꽤 성한 장이 서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일지라도 인근 고을 사람들에게 그곳이 언제나 그리운 것은, 장터 위에서 화갯골로 뻗쳐 앉은 주막마다 유달리 맑고 시원한 막걸리와 펄펄 살아 뛰는 물고기의 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주막 앞에 늘어선 능수버들 가지 사이사이로 사철 흘러나오는 그 한(恨) 많고 멋들어진 춘향가, 판소리, 육자배기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가끔 전라도 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남사당, 여사당, 협률(協律) 창극 광대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으레 재주와 신명을 떨치고야 경상도로 넘어 간다는 한갓 관습과 전례(傳例)가 <화개장터>의 이름을 더욱 높이고 그립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1931년 신작로 개설시 십리벚꽃길 벚나무 심어
예전엔 우마차와 머릿수건, 그리고 상투 튼 길손들이 와글거렸을 장터엔 원색의 옷차림과 자동차의 물결이 줄을 잇는다. 어쨌든 오늘의 장터를 그리기 위해 여러 동선을 배회하다 섬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차밭 산에 올라 화첩을 펼쳤다. 십리벚꽃길로 이어지는 화개천이 섬진강으로 합류하는 곳. 그 터전에서 장터의 전경이 조망된다.
그런데 눈앞에 거대한 팽나무가 유구한 역사의 바람을 안고 있다. 격랑의 세월에도 용케 살아남은 팽나무를 앞세워 세월의 이미지를 띠고 장터의 분위기와 맞지 않은 아치형 다리(남도 화합교)를 가려 보았다. 전통과 현실을 잇는 발상이 진정한 역사의식이라고 볼 때 장터의 환경을 살리는 안목이 절실하다. 이 아쉬움은 산 아래 우체국 옆에 방치되다시피한 ‘탑리 3층석탑’에서도 발견된다. 졸저 <그리운 이웃은 마을에 산다>(학고재; 2007년)에서 이미 그 사연을 밝힌 바 있다.
‘사흘째 대숲바람과 차꽃 향기에 취한 나그네는 산마을을 내려와 삼층석탑이 있다는 원탑마을에 이른다. 우체국과 담벼락 사이에 솟은 탑은 이 땅의 문화유산 중 가장 홀대받고 있는 예가 될 것 같다. 흩어진 탑재를 모아 석탑을 세웠다는 애달픈 사연에다 사방 건물에 막혀 있는 모습이라니…. 마땅한 곳으로 탑을 옮기든지 주변건물을 철거하든지 해야 하지 않을까. 이곳 지명이 어엿하게 탑리(塔里)로 남아 있는 한. 마침 우체국에 들르니 곧 이전 계획이 있다고 한다. 부디 이번 기회에 ‘탑’과 ‘탑리’의 시절 인연이 상생하기를….’
그런데 이 같은 길손의 아쉬운 감상도 이내 코끝을 스치는 봄내음과 눈부신 십리벚꽃의 탄성 앞에서는 모든 상념이 무색해 지고 만다. 이 환상적인 ‘화개 십리벚꽃길’의 벚나무들은 1931년 신작로 개설시 주민들이 직접 심었다고 한다. 벚꽃과 차나무가 함께 버무려진 이 길은 천지의 기운으로 새 봄과 함께 온 세상을 희고 푸르고 장엄하게 하고 있다.
한편 이 봄빛의 찬란함 속에는 동족상잔의 피가 뿌려져 있음을 간과할 수가 없다.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전투 때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이곳 화개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사살된 일(1953. 9. 18) 등이 역사의 비애로 남아 있음에랴.
그 역사와 세월이 흘러간 길목을 따라 섬진강을 달린다. 2년 전(2008년) 섬진강을 따라 섬진교 아래 ‘하동송림’에 들어 화첩을 펼쳤던 기억이 새록하다. 송림 사이로 재첩을 잡던 정다운 정경이 떠오르기도 하고.
추억 속의 강을 거슬러 오르고자 하는데 지역인들의 협조로 섬진강 둔치의 섬진강 항공 2인승 경비행기에 오를 수 있는 행운이 따랐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의 무대인 악양면 평사리를 화폭에 담으려는 간절함에 하늘이 돕는 것일까. 덕분에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로 흐르는 섬진강의 굽이치는 유장한 흐름과 모래톱, 그리고 평사리의 너른 벌판과 주산인 형제산 너머 아스라한 천왕봉까지 조망할 수 있는 오늘의 기적! 예전 섬진강을 그리려고 무모하게 주변 산을 오르내렸던 기억이 생생하니 더욱 고마운 일이다. 섬진강은 국내에서 모래톱이 가장 많아 수질이 맑게 여과되는 강으로 하구로 갈수록 맑아지는 현상을 보여준다.
구례-지리산 만인보, 산수유 축제, 노고단, 화엄사 반야봉·천왕봉 더불어
화엄도량의 연화장 세계까지 화면 속으로
지리산 하늘 아래 떠도는 발길은 이제 구례로 향한다. 화신(花信)이 가장 먼저 온다는 남녘 땅. 구례의 산수유 축제는 언론에서 다투어 취재해 봄소식을 전하는 전령이다.
그래서 축제 기간에 맞추어 봄기운을 만끽하고자 구례터미널에 내리자 졸작(지리산 천왕봉)이 ‘지리산 만인보’ 포스터로 활용되어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나의 지리산 사랑이 이렇게라도 쓰일 수 있다니 참으로 고맙고 또 반갑다.
“지리산과 걷기를 통해 나와 우리, 사회와 국가를 성찰하고자 합니다. 지리산 둘레길 850리를 걸으며 우리네 사는 모습을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지리산 만인보’는 2010년 2월 27일 시작하여 2011년 2월 27일 마무리하며 매월 둘째, 넷째 주 토요일에 걷습니다. 지리산 만인보는 지리산을 바라보며 논길, 마을길, 산길, 강길을 걷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사는 존재라는 생각으로 걷습니다.”
이 만인의 걷기운동 산파역을 맡은 윤주옥님은 서울에서 구례로 귀농하여 지역의 문화운동과 환경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 그녀와 뜻을 같이하는 지인들이 모여 진행 중인 걷기 행사의 취지는 순수하고 아름답다.
“우리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문제 해결의 첫걸음임을 믿고 ‘지리산 만인보’를 시작합니다.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만큼 나의 삶이 더욱 빛난다는 생각으로, 생태계를 보존하고 생명의 순환 질서를 지키는 일에 책임을 다하겠다는 생각으로,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사는 영원한 공동체 존재라는 생각으로 ‘지리산 만인보’를 시작합니다. 모든 생명을 모시고 섬기는 마음을 얻기 위하여, 진정한 나의 변화, 올바른 사회변화를 위하여, 스스로를 정화하고 사회를 치유하기 위하여 ‘지리산 만인보’를 시작합니다.”
어쩌면 이 일은 조선 선비들이 자신의 심성(心性)과 본분(本分)을 돌아보고 역사를 회고하며 현실을 살피는 마음으로 지리산을 오르던 일과 같은 맥락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지리산 만인보의 여정이 순조롭기를 바라는 기원 속에 나의 붓길도 함께할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이원규 시인의 ‘지리산 둘레길’을 두런두런 읊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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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푸른 눈빛으로 그대에게 갑니다.
함부로 가면 오히려 병이 더 깊어질 것만 같아
생의 마지막 사랑마저 자꾸 더 얕아질 것만 같아
빠르고 높고 넓고 편한 길을 버리고 일부러 숲길 고갯길
강길 들길 옛길을 에둘러
아주 천천히 걷고 또 걸어서 그대에게 갑니다
온 마을 온 천지가 노랑 산수유꽃 물결
오늘은 자연 ‘구례 산수유꽃축제(3월 18~21일)’가 열리는 산동면으로 향한다. 거리에는 축제 현수막이 나부끼고 노오란 꽃물결이 강물처럼 이어진다. 어제 내린 춘설이 쪽빛 하늘 아래에서 은빛으로 빛나니 참으로 오묘한 풍광이다. 마치 섬진강을 타고 올라온 꽃구름이 지리산자락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것만 같다.
구례의 산수유는 약 1000년 전 중국 산동성에 사는 처녀가 구례 산동면으로 시집올 때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실제로 국내의 최초 산수유 시목으로 여겨지는 산수유나무가 산동면 계천리에 지정, 보호돼 있다. 구례의 산수유는 전국 생산량의 73%, 수확면적으로는 84%에 달해 전국에서 최대 군락지로 알려져 있으며 칼륨·칼슘·아연 같은 무기성분이 풍부해 최고의 품질로 평가 받고 있다.
축제 행사장을 지나 사포·상관·하위·상위·월계·반곡·대평마을과 길 건너 남원 방향의 현천·달천, 그리고 산수유 시목지가 있는 계척마을까지 둘러보니 온통 천지가 노랑 물결이다. 그 중에서 나는 상위마을 전망대에 올라 지리산 자락이 유장하게 펼쳐지는 산마을 전경, 그리고 계곡과 바위가 어우러진 반곡마을의 풍광을 화첩에 담았다.
땅거미가 짙어지자 발길은 이끌린 듯 화엄사로 향한다. 11년 전의 봄(1999년 4월), 이곳 산사에 머물며 화엄의 세계에 빠져 나그네 삶이 축복일 수 있었던 그날이 그리워진 까닭이다. 그랬다. 지친 나의 영혼이 산사의 기운 속에 정화되고 안식을 느꼈던 시간에 감사했다. 그리고 또다시 시절인연이 도래했으니.
깊고 푸른 밤, 계곡 물소리 하늘로 치솟고 은하수가 소낙비처럼 쏟아지니 잠들 수 없다. 최근에 열반하신 법정스님은 지병인 폐암의 잔기침으로 자주 새벽에 깨어날 수 있어 텅 빈 우주의 침묵과 마주했다고 했다. 그래서 숲을 스치는 바람소릴 들을 수 있어 도리어 병이 고맙다고 하였으니. 이 길손은 무엇으로 깨어 있어야 할지, 그 어떤 앓음으로 자신을 성찰해야 하는지, 도량석 목탁 소리의 여운이 깊고도 길게만 느껴진다.
이튿날 아침은 앞산인 노고단부터 오르기로 했다. 가람의 지세와 옛사람의 안목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마침 동안거를 마친 두 스님(우범, 도안)과 산행하는 행운이 따랐다.
피아골 계곡·조동마을·남산마을·연곡사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오랜 마음속 벗처럼/ 부르지
않아도 항상/ 푸른 대답을 보내오고/ 그리움이 깊을 대로
깊어/ 산 빛 너울이 아프다./
...
그대/ 눈부신 억새꽃 바람결로 스미고/ 깊은 숲 그늘 돌
틈/ 철쭉으로 피어나/ 우리들 일상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다하도록/ 스스로가 다하도록 내려 올 수 없어/
산이 되었던 그대.
박두규(‘지리산 1- 서시’ 중)
산벚꽃 떨어지고 철쭉이 피기 시작하는 피아골 계곡의 늦은 봄. 지리산의 기운은 오랜 마음속 벗이 되어 스스로 산색에 물든 나그네를 이끈다.
산에 홀로 드는 일은 ‘비움’과 또 다른 ‘그리움’의 길이요, 삶의 여정이다. 높고 깊은 산속에서 들꽃을 보는 순간, 우주가 열리는 미동의 손짓이려니. 하여 존재의 근원과 생명에 대한 외경이 샘물처럼 솟고 산들바람은 언제나 길손의 등을 밀어 주었다.
화첩을 펴 들고 타박타박 오르는 피아골 계곡의 늦봄. 가을 단풍이 화려함으로 계곡을 물들인다면 봄 풍광은 신록의 신선함으로 사색의 시간을 선물한다. 단풍이 관광과 행락을 위한 것이라면 봄빛은 대지의 기운 속에 생명을 예찬하는 싱그러운 바람의 편지다. 계곡의 기암절벽엔 수달래가 피었고 연이어 철쭉이 고개를 내민다. 견고한 만년바위와 소나무 아래 수줍은 홍조는 마냥 그리움의 느낌표다.
기촌에서 중기 마을로 오르는 길. 예전에 자주 보았던 다랑논이 이젠 차밭과 과실수로 바뀐 것이 큰 변화다. 생활 경제가 자연 삶의 현장을 바꾸게 마련이므로.
저기 저 마을에다가 나만 아는 한 여자를 감추어두고…
- 이 중기 마을이 품고 있는 조동(助洞)은 시집 <그 여자의 집>(김용택)에 나오는 곳이다. 시인은 ‘쓰잘데기없는 내 생각’으로 속내를 내비쳐 뭇 길손들을 어지럽힌다.
지리산 피아골 가는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피아골 골짜기에서 흘러오는 도랑물 건너 왼쪽에 아주 작은 대숲마을이 하나 산 중턱에 있습니다 혹 그 마을을 눈여겨보신 적이 있는지요 그 마을을 보고 있노라면 오만가지 생각 중에, 정말 오만가지 생각들 중에 아, 저기 저 마을에다가 이 세상에서 나만 아는 한 여자를 감추어 두고 살았으면 ‘거 을매나 좋을꼬’ 하는 생각이 바람 없는 날 저녁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혹 댁도 그런 생각을 해 보셨는지요 어디까지나 이것은 ‘혹’이지만 말입니다 나도 이따금 저 마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런 쓸쓸하고도 달콤한, 그러나 쓰잘데기없는 생각을 나 혼자 할 때가 있답니다 아내가 이 글을 보면 틀림없이 느긋한 얼굴로 “그래요 그러면 잘해 보세요”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 외길 중간쯤에는 감나무 한그루가 있는데요 그 감나무 밑에는 용케도 커다란 바윗덩이가 하나 있어 그 바윗덩이 옆에 작은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까지 발걸음을 잘 맞추었겠거니, 거기에다가 사람들은 숨을 쉬었겠거니 하는 생각이 내 생각입니다 경제도 어려운데 이런 생각이 그 얼마나 쓰잘데기없는 생각인지요.
이 그림 같은 마을은 물난리(1999년)로 계곡이 크게 변했고 마을 위쪽에 콘크리트 다리(2006년)를 놓아야 했지만 여전히 봄 풍광은 그윽하다. 해서 예전의 계곡 길을 건너 밤나무가 총총한 다랑논의 비탈 외길을 오르며 길손도 감나무 아래 너럭바위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었다.
‘아침이 빠른 마을’로 불리고 싶어 하는 조동은 녹차, 밤, 매실, 고로쇠 채취로 주민들이 생업을 이어간다. 한때 아침 구름이 머물다 간다는 ‘조운재’라는 간판의 녹차연구소와 무릎 하나 겨우 용납한다는 작은 정자 ‘용슬정’이 있다는 산마을. 지금은 하얀 돌배나무꽃만이 쑥대 속에 홀로 환하다. 봄볕에 졸고 있는 마을은 연초록 물결 속에 찬연하다.
계곡을 거슬러가니 원기 마을의 매화단지와 거대한 느티나무에 눈길이 간다. 신촌, 죽리를 거쳐 남산마을에 이르자 오랜 지인의 소개로 길손을 맞이해 주는 분이 있다. 2006년에 이곳으로 귀촌한 이석호(66·전 국방대학원 교수) 선생은 교수 친구와 함께 이곳을 점지해 농사 지으며 살고 있다. 두 채의 집과 700평씩의 농토를 개간, 각종 채소와 사과·감·자두·석류·살구·매화·산수유 등의 과수를 가꾸면서. 스스로 이름 지은 곰소집은 ‘곰과 소처럼 우직하고 느리게 살자’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집 안은 한 점의 먼지도 없이 청결하고 모든 가구가 잘 정돈되어 주인의 성품을 짐작케 한다.
“제가 육사 출신이라 사물 정리와 청소 하나는 잘합니다”
벽면에 걸린 작은 그림들은 해외공관 시절에 수집한 것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특히 러시아 그림이 재직 때의 인연으로 묻어 온 것이다. 곧 서울의 아내와 합류, 전원생활을 함께 꾸려갈 것이라는 이 선생과 잔을 나누며 하룻밤을 묵는데 창엔 빗소리가 요란하다.
이처럼 우아정밀하고 이상적인 균형감 가진 부도는 없을 것
- 이튿날 아침은 다행히 비가 그쳐 물안개 피어오르는 남산마을 전경을 그리는 행운이 따랐다. 노고단 준령이 남쪽으로 뻗어 질마재를 거쳐 왕시루봉에 이른 곳 아래 마을이 둥지를 틀었다. 내서천을 바라보고 선 마을은 경사가 심한 다랑논으로 삶의 터전이 형성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밀양 박씨가 터를 잡은 이후 전주 이씨들이 입주하였고, 마을 형세가 서울 남산과 비슷하여 남산마을이라 부른다는 마을은 현재 30여 가구다.
과거 여순사건과 6·25동란 때 반란군의 은신처를 없앤다고 하여 마을이 불탔으며 인민재판을 받아야 했던 아픔의 역사도 들어 있다. 하지만 흐르지 않는 세월과 변하지 않는 삶이 어디 있으랴. 다만 ‘지금이 꽃자리’여야 함을. 왕시루봉 아래 물안개로 피어오르고 치달리는 계곡 물소리에 싸인 오늘의 풍광은 선경(仙境)에 다름 아니다.
이제 연곡사(燕谷寺)로 향하니 평도마을이다. 그런데 계곡 위로 드러난 평도 분교는 여태 벚꽃나무 울타리로 하여 눈부시다 못해 동화 속 그림 같다. 결코 풍경과 내용이 같지 않은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아득히 고여 오는 추억의 뜰 안. 유년의 기억과 둥지가 저와 같았음을 어쩌랴. 풍경이 주는 이율배반 속에 과거와 오늘, 본질과 현상이 녹아 있음을 인식하며 마침내 연곡사에 이르렀다.
<구례 연곡사 지표 보고서> (전남대학교 박물관, 1993년)를 품에 안고 다시 찾은 절은 어느 곳보다 발길이 잦았던 곳이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가장 아쉬움이 많은 곳으로 천하의 명품 부도를 제대로 눈여겨보지 못했었다. 늘 일행 틈에 바쁜 답사 일정으로 지나쳐야만 했으니. 해서 이번엔 부도 사생과 함께 사찰 전경, 그리고 탁본을 위해 한지와 탁본 도구를 챙겨서 왔다. 이에 나의 뜻을 헤아려준 종지(宗智) 주지스님은 예전(1995년 2월 12일)에 인사를 나눈 분으로 자료에 또렷이 메모가 되어 있지 않은가. 이 또한 시절인연임에야.
먼저 ‘부도의 꽃’으로 불리는 동부도(국보 제53호)와 북부도(국보 제54호) 앞에서 화첩을 펼치자 실로 감개무량하다. 통일신라 말의 양식과 특징을 보여주는 부도가 천년도 더 지난 오늘 나의 숨결과 마주하다니. 어느새 정을 든 옛 장인의 거친 숨소리와 오롯한 신념의 눈길이 비늘로 떨어진다.
대저 어느 세상에 이처럼 우아정밀하고 이상적인 비례와 균형, 다채로운 내용을 지닌 부도가 또 있을까? 향로는 오탁악세(五濁惡世)를 정화하고 가릉빈가(迦陵頻伽: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를 비롯, 수많은 새와 비천상은 열락과 천상의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 오염에 물들지 않는다는 연지의 연꽃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향기를 머금고 적멸의 세계로 인도한다. 또한 사방 사천왕과 신장들은 수호신이 되어 돌을 박차고 나올 듯 그 위용이 천의로 나부낀다. 무엇보다 지붕의 내림마루와 막새 표현은 당대 건축 구조의 증언이자 정교함의 극치다. 한편 풍탁을 걸었던 구멍은 아련한 풍경소리로 세월을 뚫고 은은하게 들려오나니….
산마루 푸른빛도 어지간히 짙었건만…
- 진종일 사생과 탁본으로 부도 앞을 서성이는데 꽃비가 내린다. 산벚꽃이 부도 위에 나풀나풀 떨어진다. 어제와 오늘의 만남이요, 또 다른 이별의 순간이다.
하루를 절에서 묵고 다시 가람의 전경을 위해 밑그림을 챙기니 소요대사(逍遙大師) 부도(보물제154호)와 현각선사 탑비(玄覺禪師塔碑)(보물 제152호)다. 특히 현각선사탑비 중 귀부(龜趺)는 그 위용이 힘차며 귀가 뿔처럼 솟은 것도 특이하다.
인근의 작은 부도들을 그리고 내려오니 동백나무 아래 세워진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高光洵 殉節碑)의 뜰은 온통 핏빛 동백으로 처연하다. 마치 이곳에서 순국(1907년 9월 11일)한 의병장의 절개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 주변 돌무더기 탑에 떨어진 꽃 또한 만인의 기원과 애환의 붉은 그림자로 애잔하다.
삼층석탑(보물제151호)의 축대 위 너럭바위엔 산벚꽃이 하염없이 지는데 바위 틈새에 민들레가 피었다. 꽃이 지고 다시 피는 천지간(天地間)의 순환. 어쩌면 이것이 자연의 이치요, ‘본지풍광(本地風光)’이 아닐런지.
피아골계곡의 연곡사는 가을단풍 때 수많은 인파로 북적인다고 한다. 그러나 산세의 위치와 가람배치 및 당우의 표현은 봄이 제격이다. 가람이 단풍 속에 파묻히지 않고 산 능선과 계곡이 서로 받쳐주며 연곡사의 주요 유물을 배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준다. 이른바 주변 경관이 너무 화려하면 눈길이 문화유산을 소홀히 할 수도 있는 까닭에.
지리산 반야봉 법왕대 아래 둥지를 튼 연곡사는 연기조사(신라 진흥왕 544년) 때 창건된 역사로 알려진다. 이후 고려 초 현각선사의 중창, 도선국사, 진감국사 등이 주석한 수행터전이다. 선종의 발달로 인해 9~10세기경에 성행한 ‘부도의 꽃’이 활짝 핀 곳이다. 한편 임진왜란 때는 전국 승군 총본산으로 서산·사명대사께서 승군을 훈련·총지휘한 선불교와 호국불교의 산실인 곳이다.
이 유서 깊은 터전에서 길손은 오늘의 인연을 허락해 주신 선현들의 영혼과 알 수 없는 가피에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해와 달이 바뀐 또 어느 날 문득 연곡사를 다시 찾아 올 것만 같다. 그 날도 오늘처럼 산벚꽃 지는 날이었으면….
산마루 푸른빛도 어지간히 짙었건만/ 계곡의 산벚나무 하나 /아직껏 낡은 꽃잎을 매달고 있다 /... 이 세월의 퇴적(堆積)을 피해 갈 수는 없는 것인가./ 부질없는 생각과 함께 / 낡은 꽃잎 한 장이 또 진다./…
박두규 ‘산벚꽃’ 중
구례 야생화단지, 천은사, 매천사, 운조루, 수락폭포
- ‘타인능해(他人能解)’운조루 쌀독 그 뜻 높고 푸르러
- 지리산의 자연 생태는 한반도의 보고(寶庫)이다. 전국의 야생화 4,596종 중 지리산 지역에 분포하는 것만 1,526종이라니 거의 1/3이 자생하는 셈이다.
한때 야생화를 찾아 수년간 식물전문가와 사진작가들 틈에 끼어 산천을 누볐었다. 꽃은 졌으되 그 영혼의 향기는 화첩 갈피마다 피어난다. 원예작물이 아닌 야생화는 지역 풍토와 환경에 적응한 자생식물로 국토의 얼굴이요, 빛이다. 비바람, 눈보라를 감내하며 피어나는 생명은 곤고한 삶의 상징에 다름 아니다.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 중에서)
야생화와 자생수목 400여 종을 심고 가꾸는 구례 자연생태체험학습장을 찾았다. 야생화원에는 초여름 꽃이 한창이다. 사계절 쉼 없이 피고 지는 빛과 향기에 취한 나는 어느새 화첩에 손길이 간다.
별동의 ‘야생화 압화전시관’에서는 국내외의 공모전을 통한 300여 점의 압화가 전시 중인데 국제적인 행사다. 벌써 9회(대한민국 압화대전)에 이른 경험 아래 말린 야생화의 형태와 빛깔이 실로 신비하고 경이롭다. 압화의 다양한 소재와 이미지 변신은 생활미술을 넘어 순수조형 미술로서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가히 압화미술의 본산이라 할 만하다.
한편 인근의 ‘잠자리 생태관’을 찾자 온통 잠자리 천국이다. 구례 지역에만 96종이 서식한다는데 멸종위기의 꼬마잠자리를 비롯 수많은 잠자리가 채집되어 있다.
우렁 등을 먹는 잠자리 유충은 13~15번 탈피를 거쳐서야 성충이 된다니 날갯짓 한번 하기의 어려움이 ‘흔들리며 피는 꽃’ 못지않다. 마침 꼬마 잠자리가 골풀 사이로 날고 있는데 암컷은 배부분에 띠가 있고, 수컷은 오랜지 빛인데 점차 빨갛게 변한다고 한다. 참 앙증스런 희귀곤충이라 자꾸만 눈길이 간다.
- “함평이 나비라면 구례는 잠자리 나라”라는 담당 관계자의 말이 자부심으로 느껴진다. 또한 ‘구례야생화연구소’에서는 야생화 유전자원 보유와 함께 차, 향수, 비누, 된장 등의 식품개발을 통해 경제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이른바 지리산의 자연생태와 생명자원을 새로운 문화사업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발길은 노고단 길목, 천은사(泉隱寺)로 향한다. 구례의 3대 사찰로 꼽히는 천은사는 고찰의 내력과 함께 조선시대 명필 현판들로 유명하다.
벌써 잎이 무성해진 벚나무길의 도열을 받으며 산문(방장산 천은사)을 지나 돌아보자 ‘남방제일선원’이라고 씌어 있다. 이어 일주문에 이르니 세로 편액인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지리산 천은사(智異山泉隱寺)’ 글씨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원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행서(行書)로서 천은사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신라 때 창건(828년 흥덕왕 3년)된 이 절은 고려 충렬왕 때 ‘남방제일선원’으로 지정되었고 조선에 와서 감로사가 천은사로 바뀌었다(1679년 숙종 5년). 당시 단유대사(袒裕大師)가 절을 중수할 무렵 샘가에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두려움에 잡아 죽였는데 그 후로는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는 뜻의 천은사가 되었다. 이후 잦은 화재와 불상사가 일어나자 사람들이 절을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이라 여겼다. 이에 절을 찾은 이광사는 마치 물이 흘러내릴 듯한 필체로 글씨를 남기며 이 글씨를 일주문 현판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했다. 절에서는 의아해 하면서도 현판을 내걸었고 이후로는 화재가 나지 않았다고 전해온다.
일주문 현판은 설화를 떠나 운필은 기운생동하고 유연하다. 졸필로 임서(臨書)해 보니 한숨도 내쉬지 못하고 단박에 써내려 가야만 했다. 이르기를 마치 ‘붓을 던진다’고 한 명필의 필세는 이런 경우를 두고 이른 것 같다.
대개 사람들은 절 입구의 천은저수지와 수홍루(무지개다리)에 눈길이 가지만 일주문 옆 동산(부도밭 주변)의 장대한 금강송 숲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산림금표로 지정된 무성한 금강송의 위용은 천은사의 특별한 유산이다.
주지(영관) 스님과 다담을 나누고 여장을 푼 후 저물기 전까지 인근의 암자를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노고단 길목의 상선암, 수도암, 도계암, 삼일암을 화첩에 담고 다시 큰절로 돌아와 입구의 감로암과 차밭의 견성암을 찾았다. 찻잎을 따는 아낙네들의 웃음소리가 초여름 훈풍 속에 젖어 떠돈다.
구례 섬진강과 생태, 문수사, 다무락마을, 석주관성, 용지동계곡
적벽(赤壁)이 소동파를 만나 비로소 세상에 이름 떨쳤듯
지리산을 감싸고 도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느끼는 염려는 최소한 시대의 양심이요, 작가의 책무다. 어쩔 것인가. 저 유장한 강물과 습지가 어느 날 생물을 품지 못하고, 장엄하고 황홀한 노을이 단지 환영(幻影)에 그친다면 나는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
‘섬진강 생태환경, 우리의 미래입니다’로 슬로건을 내세운 양천리의 섬진강 어류 생태관은 물고기 천국이다. 섬진강 권역에 서식하는 어류는 총 5목 15과 52종으로 한국 고유종이 21종, 멸종 위기 야생동식물 Ⅱ급 2종이 분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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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하천의 상류, 중류, 하류 물고기로 구별해 꾸민 전시관은 실로 생명의 신비요, 민물고기 세상이다. 임실납자루, 쉬리, 줄몰개, 몰개, 모래주사, 누치, 황어, 눈동자개, 섬진강자가사리, 연어, 쏘가리, 꾹저구… 멸종위기종인 거북을 닮은 남생이가 눈길을 끌고 특별히 야외수달 전시장이 마련되었다. 실로 물고기의 다종은 꽃의 다양성처럼 이채롭고 경이롭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음(此有故彼有)이요,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此生故 彼 生 )’는 연기법(緣起法)이 떠오른다.
전시장이 아닌 생태 현장의 수달을 보기 위해 금내리의 섬진강 수달 서식지 ‘수달관찰대’를 찾자 정태연씨가 맞아준다. 정씨는 ‘지리산 문화 강좌’ 때 만난 인연이다. 수달은 스스로 집을 만들기 못하기 때문에 인공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하천이나 생태계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는 대형 포유동물로 환경이 오염되면 자연 사라진다. 수달을 위한 생태, 경관 보전지역으로 구례군 문척면, 간전면, 토지면 일대가 지정되었다. 이 주변에 삵, 수리부엉이, 큰고니, 흰꼬리수리, 구렁이, 까치살모사, 남생이, 왕잠자리 등이 함께 서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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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지리산 반달가슴곰을 만나러 간다. 국립공원 사무소 앞, 화엄사 입구의 멸종 위기종 복원센터 ‘반달가슴곰 생태학습장’엔 8마리의 반달가슴곰이 있었다. 관계자에 의하면 2001년 9월 새끼 반달곰 19마리를 지리산에 방사했는데 3마리가 죽고 현재 16마리가 산에서 활동 중이라고 한다.
더도 말고 한 닷새만 시름없이 졸다 갔으면
설악산, 월악산이 산양을 멸종 위기종으로 복원하듯 지리산은 반달가슴곰이 상징이다. 특징으로는 가슴에 V자형 흰털이 있으며 생후 4년이 지나야 번식이 가능하고 야생에서는 약 20년을 산다고 한다. 겨울잠을 자는 동안은 아무 영양도 섭취하지 않는다고 하니 쉼 없이 욕망을 내뿜는 인간들은 곰에서 절제력을 배워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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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멸종 위기종 복원’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서식지 파괴행위, 그릇된 보신문화, 무분별한 밀렵이 근절되어야 한다. 이럴 때만이 진정 지리산과 반달가슴곰이 행복하게 공생할 수 있을 것이다. 철창 우리의 곰과 눈빛이 마주치니 어느 생엔가 스쳤던 인연이 아니었다 싶다. 찰나의 만남도 실은 무수한 인연의 강물로 흘러왔음을.
한여름 녹음 속에 문수계곡을 끼고 해발 800m까지 오르니 문수사(文殊寺)다. 절은 노고단 아래 화엄사와 연곡사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한눈에 들어오는 삼층목탑 대웅전은 화순 쌍봉사의 목탑을 모델로 했다. 국내에서 높이에 비해 가장 작은 공간의 대웅전이 아닐까 싶다. 현재의 가람은 모두 주지 고봉(高峰) 스님이 1984년부터 불사한 것이지만 실로 역사는 깊다. 연곡사,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에 의해 진흥왕 8년(5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용호정과 운흥정, 상사마을 쌍산재, 서시천, 사성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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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도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풍류(風流)에 도(道)의 의미를 부여한 최치원은 일찍이 란낭비서(鸞郎碑序)에서 풍류도(風流道)를 언급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는데 이를 풍류도라 한다…”
이 현묘한 도는 삼교(유·불·선)를 아우르고 정신문화의 실천과 예술활동으로 심화된다. 이를테면 화랑정신, 득음의 경지 등 절차탁마를 거치는 자기 수련을 기초로 한다. 그 다음 회광반조(回光返照),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추는 일. 세상에 은혜를 되돌리는 헌신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진정한 도정(道程)이요, 풍류의 삶이라 할 수 있으리. 오세영 시인이 이르듯 “시는 시인이 쓰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의 제법이 쓰는 것이다” 라고 하면 구례의 판소리는 물소리, 산소리의 회광반조요, 풍류를 낳은 것이라 하겠다.
지리산 준봉들과 섬진강 줄기가 휘감은 구례는 판소리 명창들에게 득음을 위한 천혜의 환경을 제공해 왔다.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등 천년사찰과 수락폭포가 그것이다. 화랑의 계통적, 정신적 후예로 일컬어지는 판소리 광대들의 독공 또한 귀의처가 일맥상통하기에.
섬진강을 경계로 동쪽 구례가 동편제요, 서쪽 남원이 서편제를 낳기에 이른다. 이른바 동편제는 장중하고, 서편제는 구슬픈 가락이 특징이다. 이것은 자연환경에 따른 현상으로 구례의 ‘산소리’, 남원의 ‘마당소리’로 불리는 까닭이다.
동편제 판소리 전수관으로 가는 길. 용방면 신지리의 가로수는 온통 목백일홍으로 찬연하다. 꽃은 빛으로 노래한다. 구례 출신 동편제 명창 송만갑(宋萬甲 1865-1939)이 접부채를 쳐든 동편제 판소리 전수관 동상 앞에서 그의 생애를 돌아본다.
“소리하는 사람은 주단포목상과 같아서 비단을 달라는 이에게는 비단을 주고, 무명을 달라는 이에게는 무명을 골라서 줄 수 있어야 한다. 소리 듣는 사람의 취향과 수준도 모르고 자기 소리만 해대는 사람을 어찌 뛰어난 창자라 하겠는가.”
송만갑의 육성은 시대와 소통하고 대중과 호흡을 함께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그러나 당시엔 “고제의 고아한 점을 말살하는 장타령 아니면 염불” 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변화와 일탈의 예술성을 우려했지만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실천한 그에게 오늘날 동편제의 새로운 지평을 연 명창으로 기리고 있음에랴.
- 구례향제줄풍류가 말해 주는 것
송만갑이 있기 전 구례는 송광록, 송우룡 등 송씨 가문의 명창과 이후 유성준, 박봉래, 박봉술 들이 배출된 판소리의 고장이다. 송만갑이 배출한 제자 중에는 이화중선, 강도근, 박초월 등 기라성 같은 명창이 줄을 이었으니 그의 품은 높고 깊었다. 그가 떠난 뒤 제자들의 노력으로 판소리 다섯마당(홍보가, 춘향가, 심청가, 수중가, 적벽가)이 무형문화재로 지정(1964년)된다. 한 풍류객의 자취가 마침내 시절인연으로 무르익은 것이다.
다음으로 구례읍사무소 앞(봉동리)의 향제줄풍류전수관을 찾아간다. 400년 묵은 팽나무 앞 전수관에서 맞아주는 이철호 회장(73세, 단소 예능 보유자). 그는 건장한 체력으로 활쏘기, 사격에도 조예가 깊고 젊은 날에는 권투선수 생활도 했다 하니 풍류 예인이다.
줄풍류는 거문고, 가야금, 대금, 피리, 해금, 장구가 기본이 되고 단소와 앙금이 곁들기도 하는 작은 실내악 규모의 관현편성을 일컫는다. 향제줄풍류의 본령인 영산회상은 선비들이 즐겨온 정악의 대표곡이다. 세종 때 재창출되었지만 일찍이 신라 화랑들이 즐긴 곡이라 한다. 이를 전승, 보급하기 위해 그 원형을 잘 보존해 온 구례와 이리 지역의 줄풍류를 1985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한 것이다.
구례향제줄풍류는 전용선, 김무규, 이철호의 선친들이 벌였던 풍류 활동으로 시작되어 예능보유자 거문고의 김정애, 단소의 이철호 등이 맥을 이어왔고 현재 전수자들이 뒤를 잇고 있다. 이회장 슬하의 삼남매 모두 거문고, 가야금, 단소를 전수받고 있다니 가히 풍류가족이다.
구례의 풍류는 더하여 ‘잔수농악’을 빠트릴 수 없다. 구례읍 신촌마을의 옛 지명인 잔수(潺水)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구례를 대표하는 농악이다. 현재 ‘구례잔수농악 보존회’로 구성되어 있다. 기존의 호남 좌우도 굿으로 구분되고 공연으로 정형화된 농악이 아닌 마을농악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한다. 즉 무대가 아닌 생활 속에 살아숨쉬는 농악, 신명나는 풍물놀이 또한 풍류의 뿌리에 닿아 있다.
이젠 몸이 아닌 인문정신의 풍류를 만나 보기로 한다. 별채의 공간과 비경, 구례의 산과 물이 어우러진 정자를 찾아가는 것이다. 길손이 찾은 곳은 용호정(龍湖亭; 토지면 용두리). 우두성(禹斗晟) 구례문화원장의 안내로 오르는 솔숲길이 참 아늑하다. 정자 앞에는 오산 아래 섬진강이 굽이쳐 흐르고 시야가 활짝 트였다. 얼마 전 지리산 둘레길로 지정되었기에 곧 정비할 계획인데 불탄 소나무 아래 동산에는 토종 야생화를 식재할 계획이라고 한다.
정자는 1910년 경술국치 후 항일을 도모코자 1917년 뜻있는 73인이 거출해 건립했고 그 후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그 정신은 면면하여 매년 ‘용호정 시계’가 끊이지 않고 시회를 열어오고 있다. 우원장의 제안으로 작년(2009년)부터는 한글시회도 개최했다니 반가운 일이다. 현판은 해강(海崗) 김규진(金圭鎭 1868-1933)과 묘원(卯園) 허규(許奎)가 썼는데 우국지사 매천(梅泉) 황현(黃玹)과 교류가 깊었던 허규의 목판시가 당시의 풍류를 전한다.백척(百尺)이나 높은 언덕에 누대(樓臺)를 세웠으니/ 비단결 같은 강물은 마을을 안고 돌아오네/ 모래밭 아득한데 사람은 어디를 갔는가/ 푸른 풀밭 끝이 없어 나는 새는 자유롭구려/ 천만년 비장된 땅이 누구 눈에 띄었을까/ 정자가 완성되는 날 이 정자에서 기분좋게 회포를 풀어/ (용호정)
우원장은 정자 뒷산 왕시루봉에 달이 뜨면 섬진강에도 달이 뜬다고 한다. 풍류와 낭만 속에 덩달아 나그네 마음도 달뜨면 세상은 온통 월인천강(月印千江)이 될지니!
남원 뱀사골 계곡, 지리산 천년송, 와운마을, 정령치고개
지상의 소나무는 하늘로 뻗어가고/ 하늘의 소나무는 지상으로 뻗어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그윽한 향기 인다 신묘한 소리난다/…
박희진( ‘지상의 소나무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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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산내면 와운(臥雲)마을, 지리산 천년송 아래에서 가을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애송하는 소나무 시를 읊조리자 알 수 없는 기운이 샘솟는다.
정녕 송운(松韻)은 하늘로 솟구치고 천기(天氣)는 소나무를 타고 내려오는 듯하다. 지리산의 기상이 천년송으로 하여금 살아 오르고 정기로 가득하나니.
천년송과의 인연은 각별했다. 수년 전 솔바람 모임(소나무를 사랑하고 지키는 시민모임) 식구들과 찾았고, 지난여름엔 지리산 만인보 식구들과도 함께 했는데 또 발길이 닿았으니.
어느 해 솔씨가 떨어져 천년의 나무로 자랐을까. 길손이 나기 전에도 푸르렀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분명히 천년의 기상을 이어갈 소나무를 보듬어 보며 오늘의 인연에 두 손 모둔다.
와운마을 산 능선의 두 그루 소나무 중 큰 소나무가 할머니요, 작은 것은 할아버지 소나무로 불린다. 이 지리산 천년송은 마을의 당산목으로 추앙받으며 정월 초사흘에 당산제를 지내다가 현재는 초열흘날로 바뀌었다. 마을의 부녀자들이 아이를 가지면 이 소나무 아래서 온갖 고뇌를 가라앉히고 태아에게 솔바람 소리를 듣게 하는 태교의 성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저물녘까지 소나무 주변을 서성이며 사생하다가 마을에서 묵는 밤. 태초의 달빛과 천년송이 밀어를 나누고 있으니 이를 엿보느라 길손도 잠을 설쳤다.
천년송을 품은 와운마을( 臥雲里)은 전라북도 백두대간 줄기 끄트머리에 머물며, 해발 800m로 고산 준령 아래다. 구름도 쉬어 간다는 뜻이며 일명 눈골, 누운골로도 불린다. 1595년경 영광정씨(靈光丁氏)와 김녕김씨(金寧金氏)가 국난을 피해 피난처로 삼은 곳이라 전해 온다.
마을 유래를 들려주는 이장 정판석(丁判錫·56), 김옥연(金玉蓮·53) 부부는 7대째 살고 있는데 와운산장을 꾸리며 딸 넷을 두었다. 현재 17가구에 45명이 거주하는 마을은 민박과 약초, 고로쇠물 채취 등으로 생활한다. 1951년 6·25전쟁 공비 소탕 때 온 주민이 피란했다가 1954년 수복과 함께 다시 귀환해 오늘에 이르렀다. 뱀사골 계곡의 탐방객 덕분에 오지마을이 식당과 민박으로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천년송과 함께 ‘자연생태우수마을’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할 것 같다.
이제 계곡으로 내려선다. 와운마을에서 요룡대~석실~벌소~뱀사골 입구로 물길 따라 내려가는 것이다. 홍엽이 물들기 시작하는 계곡은 지난 폭우로 거침없이 흐른다. 지난여름(2010. 7. 25) 이 계곡을 오르며 무더위를 씻었던 추억이 새록하다. 당시 ‘지리산 만인보’ 친구들이 대자보에 남긴 감동이 화첩 속으로 들어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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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석실 (58×95cm) 한지에 수묵과 채색 2 지리산 천년송 3 석실 스케치(100×2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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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인간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 지리산 만인보는 기다림, 설레임, 그리움이다
○ 산처럼 의연하게 바람처럼 자유롭게
○ 지리산에서 길을 묻다
○ 이 길 역시 곧 지나가리라
○ 생명 평화의 길, 인간의 길, 문화의 길, 역사의 길 영원히
○ 단순 소박한 삶을 꿈꾸며
○ 불편한 진실 앞에 당당하겠습니다
○ 지리산이 초록의 공명으로 가득하길
○ 예원이는 천천히 갈 테야, 새와 풀과 나무와 바람과 같이 천천히 갈 테야
○ 전체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전체를 위해…
새로운 선지식의 출현을 꿈꾸는 터전, 실상사
우리 산천 곳곳에 ‘꽃처럼 피어난 가람(伽藍) 향기’를 찾아 배낭 메고 길 떠난 지 벌써 스무 해가 넘는다. 그 중에는 하룻밤의 인연으로 밑그림을 구한 절도 있고 수없이 발길이 닿아도 숙제로 남은 절이 있다. 남원 실상사(實相寺 )는 그 중 질긴 미련과 내 능력 부재가 녹아 회한이 서린 곳이다. 지리산의 인연으로 또 다시 찾은 실상사 들머리의 해탈교. 스무 해도 전에 만난 장승은 여전히 웃으며 길손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이번에도 빈손으로 갈 텐가. 이젠 밥값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이 친구야. ”
그랬다. 일행과 함께한 답사는 언제나 시간이 아쉬웠고 사방이 들판에 싸인 가람을 제대로 파악, 사생하기엔 조망점이 너무나 넓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상사는 역사와 현실의식이 각별해 외형에 그치지 않는 가람의 향기를 그리고 싶었기에 실로 망설임이 컸다.
늘 그랬듯이 산사에 머물기 위해 길 떠나기 전 종무소에 문의하니 종무실장(수지행)은 한사코 주지를 지낸 도법(道法) 스님을 뵙고 그림을 그리란다. 작업 기간 중 어떻게든 만남을 주선해 주겠다니 참 고마운 일이다. 사실 스님과는 독자로, 법회로, 그리고 작년(2009년 8월) 이곳의 ‘야단법석(野壇法席)’ 숙식 참가로 이어져 왔다.
황금빛으로 물드는 들판을 가로질러 연못에 이르니 바로 천왕문이다. 보광전에 참배하고 도량을 돌아본 후 객사(정진실)에 배낭을 푸는데 작업에 참고하라고 종무실장이 책을 건네준다. <우리나라 절 불사에 대한 성찰과 방향모색> ‘실상사 절 불사 어떻게 하면 좋을까’. 즉 불사세미나 자료집으로 1998년 한 해 동안 4차례에 걸친 발표, 토론 기록문을 엮은 것이다. 건축 전문가와 사부대중이 함께 고민하고 치열하게 논의한 책을 넘기면서 오늘날 이러한 불사 논의가 있었음에 놀랐고, 현재의 성찰과 미래에 대한 염려는 신뢰를 더해 주었다. 이른바 현실상황이 어려운 상태니 논의만 지속하고 불사(佛事)는 차라리 훗날로 미루자는 것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붓을 든 나는 무엇을 그려야 할 것인가. 모처럼 계획한 실상사 그림을 다시 유보해야 할 것인가? 새벽 예불 후 길손은 천년고찰 달빛 아래 탑돌이로 서성였다. 하지만 이튿날 저녁, 서울서 내려오는 스님 친견이 예정되어 있어 가람을 화첩에 담기로 했다. 역사 속에 부침해 온 현재의 모습과 스님을 뵐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를 떠올리며.
만인의 서원과 기도로 함께 쌓아올린 감회어린 탑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최초가람인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 홍척증각대사(洪陟證覺大師)가 당나라에 유학, 지장선사의 선맥(禪脈)을 이어받고 돌아와 실상산문(實相山門 )을 연 곳이다. 선종((禪宗)은 마음이 곧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으로, 당시 왕실과 귀족의 타락성에 안주했던 교종에 반기를 든 혁명이기도 했다. 그 홍척대사의 제자 수철화상(秀澈和尙)의 자취와 함께 실상사에 부도탑으로 현존한다.
극락전 주변의 증각대사응료탑(證覺大師凝蓼塔, 보물 제38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秀澈和尙楞伽寶月塔, 보물 제33호)을 사생하는데 구례 연곡사의 부도가 떠오른다. 몸돌(碑身)이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귀부(龜趺)와 머리의 이수(? 首)만 남은 증각대사응료탑비, 대숲 속의 능가보월탑비를 화첩에 담는다. 1,200년 전 창건주의 사상과 의지, 그 역사의 숨결이 가을 하늘 조각구름을 타고 잠시 다녀갔다.
가람의 중심인 보광전은 폐사 이후 월송대사(1884년)가 지은 것이다. 절 규모에 비해 너무나 작고 소박하다. 단청도 하지 않아 맨 얼굴을 보여주는 조선후기 건축양식이다. 이에 비해 앞뜰의 삼층쌍탑(보물 제37호)은 창건 당시의 기상으로 우뚝하다. 특히 상륜부가 원형으로 남아 있음이 기적 같다. 이 형식이 불국사 석가탑에 영향을 끼쳤다. 또 석등(보물 제35호)도 장대하다. 그 스케일은 그려본 화엄사 각황전 석등과 섬진강변의 임실 용암리 석등이 연상된다. 특별히 실상사 석등은 불을 밝힐 때 올라서는 계단 모양의 석재가 남아 있어 인상적이다.
다음으로 약사전의 철제약사여래좌상(보물 제41호)을 배관하니 중후한 표정과 천근의 무게가 지리산자락을 좌대로 삼아 품은 듯하다. 이 부처님이 바라보는 곳이 바로 천왕봉임에랴. 칠성각과 명부전 앞의 잘생긴 반송을 이윽히 바라보다 종각으로 향한다. 그 뒤란엔 옛 목탑터의 주춧돌이 장엄했던 규모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눈길은 옛 기와를 모아 쌓은 둥근탑에 머물렀다. 사연인즉, 창건 이래 천년의 기와편들이 인드라망의 세계를 이루며 켜켜이 세월을 껴안고 있다. 만인의 서원과 기도로 함께 쌓아올린 감회어린 탑이다. 한편 자연 친화의 생태뒷간, 그 활용을 중시하는 실상사의 화장실이 중요하다. 실제로 왕겨와 톱밥을 발효시스템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곳에서 쭈그리고 앉아 눈꼽재기창으로 바라보니 넓은 들과 산이 성큼 들어온다.
- 노을이 사라진 후 예정대로 도법스님은 스님의 처소로 길손을 불러주셨다. 화첩을 열어 밑그림을 보여드리자 그대로 하란다. 다만 ‘밖에서 보면 들판절, 안에서 보면 산중절이 실상사’라고 하며 마을과 함께해 온 ‘우리 절 우리 마을’ 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 절은 지리산릉에 둘린, 연꽃이 피어난 형국 중 화심이라고 하시니 자칫 풍수지도가 될 우려로 붓길은 아득하다. 하지만 가람을 중심으로 오늘의 현장을 충실히 그리기로 했다. 이를테면 지금은 바뀐 추사선생적거지(제주도 대정)의 마지막 모습과 기념관을 그려 놓은 일(2002년)도 의미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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