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이 토끼 뒤를 좇아, 벼랑을 잘라 낸 길
경치도 좋아 명승 31호로 지정… 모든 옛길 역사 담은 국가 문화재
인간이 걸으며 쓰는 역사가 길이다. 수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반도에는 수많은 길이 있었고 또한 수많은 길이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연이, 역사가, 문화가 얼마나 될까? 옛길을 걸으며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옛길을 찾아서’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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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로 폭이 50㎝ 내외밖에 안 되는 태극처럼 휜 토끼비리길을 등산객들이 지나고 있다.
우리의 옛길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묻힐 뻔했던 문화와 역사와 사람이 우리 앞으로 뚜벅뚜벅 살아서 돌아오고 있다. 이젠 역사를 되돌아볼 여유를 찾았는가 여겨진다.
그 대표적인 길이 문경의 토끼비리다. 한때 360㎞에 이르는 동래에서 서울까지의 영남대로 중에 가장 험한 길로 유명했던 토끼비리는 <영남대로>를 쓴 고려대 최영준 명예교수에 의해 1980년대 재발견되기까지 역사의 뒤안길에 내버려져 있었다. 최 교수는 토끼비리를 발견하고 “이 길에 한국의 모든 옛길 역사가 녹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길이는 길지 않지만 길이 보여줄 수 있는 역사, 축대공법, 사연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길은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31호로 지정될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문경새재와는 15㎞ 거리에 있는 문경의 토끼비리는 이름도 사연만큼이나 많다. 토끼길이라고 해서 토천(兎遷)이라 불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전투를 벌이며 남하하다 이곳에 이르렀다. 절벽과 낭떠러지에 길이 막혀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었다. 그때 마침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는 걸 보고 쫓아가보니 길을 낼 만한 곳이 보였다. 토끼가 지나간 길을 따라 벼랑을 잘라 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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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끼비리 마지막 구간인 천도. 겨우 두 사람이 다닐 정도이며, 옛 사람들의 손으로 깎았다고 보기엔 너무 잘 닦여져 있다.
토끼가 지나간 길, 즉 토끼길이며 그것을 한자로 토천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비리’는 ‘벼루’의 문경 방언으로서 강이나 바닷가의 위험한 낭떠러지를 말하며, 벼랑의 개념과 비슷하게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절벽과도 같은 산허리를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길이 토끼비리다.
이 길은 관갑천잔도, 곶갑천잔도, 토잔 등으로도 불렸다. 잔도(棧道)는 험한 벼랑에 나무를 선반처럼 내매어 만든 나무사다리길을 말하며, 천도는 하천변의 절벽을 파내고 만든 벼랑길을 뜻한다. 용어로 볼 때 강가의 벼랑을 이루는 절벽을 깎아낸 길과 나무 등을 이용해서 만든 길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말 조선 초 명문장가였던 권근의 기문(記文)에도 관갑천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관갑(串岬)이 가장 험하여 벼랑에 의지해서 사다리길을 만들었고, 관갑천(串岬遷)은 용연(龍淵)의 동쪽 언덕이며 토천이라고도 한다. 경상도는 남쪽에서 가장 크며, 서울에서 경상도로 가려면 반드시 큰 재를 넘는다. 그 재를 넘어서 약 100리 길은 모두 큰 산 사이를 가야 한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곶갑(관갑·串岬)에 이르러 비로소 커진다. 이 곶갑(관갑)이 가장 험한 곳이어서 낭떠러지를 따라 사다리로 길을 열어서 사람과 말들이 겨우 통행한다. 위에는 험한 절벽이 둘러 있고, 아래는 깊은 시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떨고 무서워한다.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그 내를 건넌다. 그것이 견탄(犬灘)이다. 견탄은 호계현의 북쪽에 있는데, 나라에서 제일가는 요충이요, 경상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
여기에서 관갑은 경사가 급하고 험한 산허리를 뜻하며, 관갑천은 산허리에 난 길을 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연은 관갑 바로 밑에 흐르는 영강을 가리킨다. 토잔은 토끼비리와 잔도의 합성어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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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반들반들해진 토끼비리 천도길을 한 등산객이 오르고 있다. (우)돌을 덧대어 길을 만든 토끼비리. 일종의 잔도 형식을 띠고 있다.
영남대로상에 주요 천도는 충주 남쪽의 달천 좌안, 문경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 아래의 용추 부근, 밀양의 작천, 양산의 황산천 등에 있었으나 지금은 문경의 토끼비리와 밀양의 작천잔도 등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사라지고 없다.
관갑천잔도는 영강 수면으로부터 10~20m 위의 석회암 절벽을 깎아서 만들었다. 총연장 2㎞를 조금 넘는 이 잔도는 세 가지 공법을 이용해 건설했다. 1구간은 급한 암벽을 깎아내어 그 토석을 다져 평탄하게 만들었으며, 토석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약 3m 높이의 축대를 쌓았다.
2구간은 벼랑이 가장 가파른 곳으로, 석회암과 역암을 절단한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잔도의 폭이 급히 좁아지는 지점에는 축대를 쌓아 길폭을 넓히거나 길 가장자리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나무로 만든 난간을 설치해 길을 넓혔음을 입증하는 흔적들이 많이 발견된다.
3구간은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고갯마루를 이루는 부분으로 석회암맥이 돌출한 부분으로 인공으로 암석 안부를 만들었다. 이 안부는 영남대로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고 권근의 기문에 기록돼 있다.
인근에 신라시대 축성한 고모산성도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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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 반들반들해진 토끼비리길. 길 폭은 불과 50㎝도 채 안 된다.
- 그러나 인간이 바꾸었을까? 홍수와 같은 자연의 순리로 변했을까? 현재 그 길이는 절반으로 줄어 있다. 암벽을 깎아 만든 천도와 절벽에 나무사다리길을 놓은 잔도길은 그나마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사고 방지를 위해 문경시청과 옛길박물관에서 탐방로 형태의 나무데크를 덧대어두었다. 운치와 사고 위험을 동시에 줄여놓은 셈이었다. 옛길인 전통 도로와 근대 도로의 부조화인지, 조화 내지 화해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토끼비리로 접근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문경새재에서 영남대로를 따라 계속 내려와 성황당이 있는 돌고개마을, 일명 석현마을 고갯길에서 출발할 수 있고, 고모산성 바로 아래 3번 국도변에 있는 진남휴게소에서도 원점회귀할 수 있다.
첫날은 옛길박물관 안태현 학예연구사와 함께 성황당에서 출발했다. 돌고개마을 입구에 있는 성황당은 마을 수호신이자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 가던 선비와 보부상이 토끼비리를 넘어와 쉬어가던 쉼터 역할도 했다. 문경시청에서 주막 2채를 지어 옛날 분위기를 재현했다.
- 어느 곳에 가든 성황당에 얽힌 사연은 있기 마련이다. 돌고개마을의 성황당도 예외가 아니다. 안태현 학예사가 전설을 전한다.(박스 참조)
- 성황당 바로 앞 돌고개 고갯길을 꿀떡고개 혹은 꼴딱고개라고도 한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이 이 꿀떡고개에서 반드시 꿀떡을 먹어야만 과거에 급제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꿀떡같이 과거에 착 달라붙으라는 의미다. 꼴딱고개는 험한 토끼비리를 넘어오면서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꼴딱고개라 했다고 한다. 코재나 깔딱고개와 비슷한 개념이다.
성황당을 지나면 바로 눈앞에 석현성이 펼쳐진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축성한 성이다. 바로 옆 고모산성 남문과 연결돼 있다. 임진왜란 때 문경새재 3개의 성이 바로 뚫리는 비극을 교훈 삼아 외적을 사전에 막기 위해 성을 쌓았다고 한다. 일자형 성이며, 중앙 성문엔 진남문(鎭南門)이라 쓰여 있다. ‘남쪽을 진압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축성 이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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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석현성 중앙문인 진남문 위에서 등산객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래)문경시청 문화재 담당 엄원식씨가 고모산성 서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석현성 왼쪽을 따라 토끼비리길로 접어들었다. 잠시 숲속 길이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오솔길이 나왔다. 길 폭은 매우 좁았다. 나무가 무성할 땐 길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바위를 깎아 만든 천도가 이어졌다. 바닥이 반들반들한 바위는 세월이 흘러도 그 옛날 사람들이 다닌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잔도는 붕괴 위험이 있어 나무데크로 교체했다. 안태현 학예사는 “길 폭은 옛날엔 두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2~3m로 추정되나 지금은 1m도 채 되지 않아 정비하고 있다”고 했다. 정비가 끝나고 나면 노새를 끌고 이 길을 가볼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재미있을 것 같지만 현재의 길 같은 모습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천도와 잔도를 지나니 거의 60~70도의 각도에 깎아 만든 아슬아슬한 길이 나왔다. 아래는 기록에 나온 대로 20~30m의 낭떠러지였다. 내려다보면 아찔했다.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왜 이렇게 험한 낭떠러지에 길을 닦았을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옛날 길을 간 사람은 무심코 이 길을 지났을까.
영남대로는 360㎞, 고속도로보다 90㎞ 짧아
여기저기 책을 뒤져봤다. <영남대로>와 <삼남대로> <관동대로> 등의 책을 쓴 옛길 전문가 신정일씨가 그 답을 줬다. “옛길을 보면 선조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동래에서 한양까지 가장 빠른 길을 닦은 게 영남대로이고 옛길”이라고 말했다. 지금 경부고속도로는 450㎞ 정도 되지만 영남대로는 직접 걸어본 결과 대략 360㎞가 된다고 했다. 거의 90㎞ 차다. 자연을 파괴하면서 닦은 길과 자연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걷는 길의 차이다. 새삼 선조들의 지혜가 느껴졌다.
이 험한 길에서 결국 사고가 날 뻔했다. 김영훈 사진부장이 태극 모양의 좁은 길로 사람들이 앞으로 걷는 모습을 뒷걸음질로 가며 찍다 3m 아래도 미끄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순간에도 카메라를 높이 쳐들며 프로 정신을 발휘했다. 다행히 팔뚝만 조금 다치고 무사했다. 물론 옷은 다 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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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고개마을 성황당과 당산나무, 돌탑 옆으로 영남대로 길이 있고, 바로 그 앞에 주막을 만들어 과거를 재현하고 있다.
태극 모양의 잔도를 지나니 조그만 묘가 나왔다. 묘 바로 옆으로 토끼비리 마지막 구간인 천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저히 사람 손으로 다듬었으리라고 믿어지지 않는, 두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이 바위 위에 나 있었다. ‘야, 이런 길이 있었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왼쪽으로는 오정산 정상 2.5㎞라는 이정표가 있었다. 오늘은 이 정도 둘러보기로 하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 석현성에서 고모산성 방향으로 한 바퀴 돌았다.
이날 동행한 옛길박물관 안태현 학예연구사는 민속학 박사과정 수료자로 우리 민족의 신화와 설화, 민속에 관한 전문가다. 다음날 만날 문경시청 문화예술과 문화재담당 엄원식씨는 산성 관련 박사과정을 수료했다고 한다. 문경에 있는 설화와 민속, 산성에 관한 모든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쨋날인 6월 6일. 진남휴게소에서 오전 9시 문경시청 엄원식씨와 다른 직원 한 명을 만나 동행키로 했다. 이날은 진남휴게소를 기점으로 진남팔경 중 으뜸이라는 진남교반의 비석을 보고 고모산성→석현성→토끼비리→영강→진남역→진남휴게소→신현리 고분군→진남휴게소로 회귀하기로 했다.
진남교반은 길 박물관이고 경북팔경 중 제1경
▲ 1933년에 경북팔경 중 제1경으로 선정된 기념으로 1938년에 세운 비석.
- 진남휴게소 바로 위쪽 숲속을 헤치고 조금 지나자 숲속에 묻혀 있던 비석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전면은 ‘慶北八景之一(경북팔경지일, 경북팔경 중 제일)’이라 새겨져 있었다. 뒷면은 ‘소화(昭和) 8년 10월에 대구일보사 주최로 경북 주민대상 명승지 투표를 한 결과, 진남교반이 으뜸으로 1경을 차지했다’고 전하고 있다.
비석은 소화 13년 가을에 마성면장이 세운 것으로 돼 있다. 소화 1년은 1926년이다. 따라서 1933년에 진남교반이 경북팔경 중 1경으로 꼽혔으며, 그로부터 5년 뒤인 1938년에 1경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운 것이다. 교반이라는 말은 다리 주변을 뜻하며, 진남교반은 진남교 다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말한다.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문경새재가 제2경이다. 진남교반이 그만큼 더 아름다웠다는 얘기다.
아직 이 길은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았다. 문경시청에서도 고모산성과 토끼비리길을 연계해 관광코스로 개발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남휴게소 주변 땅을 매입하지 못해 제대로 정비를 못하고 있다 한다.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신라시대 축성한 고모산성(姑母山城) 으로 올라갔다. 고모산성은 일명 할매산성, 할미산성이라고도 한다. 고모산성은 2000년부터 시작된 유교문화권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정비가 시작됐다.
서문에 다다랐다. 성의 높이만 10m 이상이었다. 높이가 10m 이상 되려면 하단부의 폭도 그 정도는 충분히 될 것 같았다. 서문은 아직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곧 허물어질 것 같은 모습이다. 바로 그 옆으로 새로 축성한 성벽이 웅장한 위용을 뽐내는 듯했다. 성벽 위로 올라서자 발아래 진남교반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맞은편으로는 병풍바위, 발아래는 절벽을 휘돌아가는 영강 물줄기, 탄광철도, 신작로, 2차선 국도, 4차선 국도, 고속도로가 이어지고, 병풍바위 위로는 영남대로 옛길이다. 한마디로 여기는‘길박물관’이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전통과 근대의 만남이라고나 할까.
조금 나쁘게 보자면 길들의 전쟁이었다. 근대 도로는 자연의 길, 인간의 길, 역사의 길을 배려하지 않는다. 오직 통로의 논리만 관철시키려 할 뿐 전통 도로가 지녀온 도리, 즉 길의 이치를 압살시킨다. 산이 막히면 터널을 뚫고, 물이 막히면 콘크리트 교량을 놓는다. 근대 도로는 마치 일사불란한 명령체계의 권력구조와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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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끼비리 마지막 구간을 지나 정상부에서 진남교반을 내려다보면 길의 역사가 보인다. 위로부터 차례로 새로운 3번 국도, 구 3번 국도, 왕복 1차선 교량, 탄광철도 등이 나란히 서 있다.
만남은 상생할 수 있지만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남길 수 있다. 새로 닦은 4차선 3번 국도는 병풍바위를 관통하며 작살냈고, 중부내륙고속도로는 오정산을 관통했다. 전통과 근대의 부조화의 단면이다. 그 옆으로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었던 탄광철로와 왕복 2차선이 채 안 되는 구 도로가 영강을 건너 마주 달리고 있었다. 바로 인근엔 3번 국도 구 도로인 왕복 2차선도 엉켜 있었다. 문경이 교통의 요충지임을 실감케 하는 장면이다.
남문으로 내려와 다시 석현성으로 갔다. 어제 갔던 토끼비리 그 길이다. 한 번 더 가보자.
마지막 천도구간을 지나 호젓한 오솔길이 이어졌다. 영남대로는 영강을 따라 계속 가지만 진남휴게소로 돌아가기 위해 방향을 북쪽으로 틀었다. 영강을 따라 거슬러 조금 올라가다 대교를 지나 진남역으로 갔다. 진남역에선 철로바이크를 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슬슬 시장기가 느껴졌다. 문득 시계를 보니 어느덧 12시를 넘고 있었다. 식당에 예약을 해놓고 잠시 문경 신현리 고분군에 다녀오기로 했다. 신현리 고분군은 2000년부터 시작된 유교문화권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고모산성과 신라시대 고분을 집중 발굴했다. 금동제 귀걸이, 화살촉, 낫 등 신라시대 유물이 대거 출토됐다. 유물은 곧 대구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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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고모산성 서문에서 나온 짱돌들. 유사시 던지는 무기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래)고모산성 성벽 위에서 등산객들이 진남교반을 바라보고 있다.
고분군에서 내려오는 길에 다시 길에 대한 상념이 떠올랐다. 인간에게 걷는다는 것은 확실히 단순한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듯했다. <나는 걷는다>를 쓴 베르나르 모리비에르는 “홀로 걸으며 생각을 하는 동안 근본적인 것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걷는다”고 했다. 걷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이요, 곧 철학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루소도 “산보를 즐기는 동안에는 그날 중 가장 자유롭고 안전한 ‘나’라는 자아 속으로 되돌아가 나만을 위하여 즐길 수 있고, 빈틈없이 인간의 진실과 자연이 소망하는 그대로의 존재로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했다.
불세출의 시인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을 생각하며 3시간 남짓 되는 토끼비리 순환길을 끝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 나의 길 새로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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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끼비리를 읊은 싯귀들
꼬불꼬불 양 창자 같은 길이여
꾸불꾸불 오솔길 기이키도 하여라
봉우리마다 그 경치도 빼어나서
내 가는 길을 막아 더디게 하네
조선시대 사가(四佳) 서거정이 쓴 ‘관갑잔도’란 제목의 한시.
잔도가 구름 밖에 얽혀 있으니
계곡 산천이 이렇게도 기이하구나
굼뜬 말은 빠른 걸음 자랑하다가
여기에 와서는 천천히 걸어가네
조선시대 김종직이 쓴 ‘관갑의 잔도’란 제목의 한시.
토천이 험하단 말 들은 지 오래거늘
이제 보니 그 생각이 어떠하였나
어둑한 계곡은 구름을 뚫고 들어섰고
위태로운 벼랑은 새와 함께 넘는다네
마치 이곳은 촉나라 검각(劒閣)인 듯
홀연히 위(魏)나라 산하라 탄식을 하네
깊은 연못 주의하는 두려움에
반 발자국도 헛디딜 수 없었다네
조선시대 서암 신정하가 쓴 ‘토천이 험하단…’ 제목의 한시.
전설
선비 원망하며 자결한 처녀, 구렁이가 되어…
옛날 과거길에 오른 어느 선비가 이곳 초가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그 집에는 부녀가 살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그 선비의 인품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자기 딸을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선비는 며칠을 머물다가 과거길을 떠나며 급제한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처녀는 매일 치성을 올리며 기다렸으나 선비는 끝내 오지 않았다. 선비는 당당히 급제했으나 그 약속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수년을 보냈다. 아버지마저 죽고 선비를 기다리다 지친 처녀는 선비를 원망하며 자결한 후 큰 구렁이로 변했다.
그 후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이 구렁이에게 자주 피해를 입는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다. 선비는 그제야 구렁이가 그 처녀의 원귀임을 알고,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올렸다. 천둥번개와 함께 구렁이가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사라진 뒤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처녀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이곳에 성황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길잡이
토끼비리를 찾아가려면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탔을 땐 문경새재IC에서 나와 점촌 방향으로 3번 국도로 가야 한다. 3번 국도로 가다 10분도 채 안 돼 왼쪽에 진남교반 시작지점인 진남휴게소가 나온다. 이곳에 주차하고 고모산성과 석현성, 토끼비리 등을 둘러볼 수 있고, 진남휴게소에서 유턴하여 성황당까지 가서 그곳에 주차하고 출발할 수 있다. 성황당은 3번 국도로 가다 환경관리사업소 폐수처리장에서 마을길로 접어들어 길을 따라 잠시 올라가면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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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길을 찾아서] ⑵ 하늘재
-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阿達羅尼師今 三年 夏四月 開鷄立嶺路(아달라이사금 3년 하4월 개계립령로)’라고 적힌 글이 나온다. ‘신라 아달라이사금 3년(156년) 4월에 계립령로를 열었다는 의미다. 길에 대한 첫 기록이고 기록상 최고(最古)의 옛길이다. 이어 2년 뒤인 서기 158년에 죽령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충북 충주와 경북 문경의 경계에 있는 최고의 길 계립령, 곧 하늘재는 삼국시대의 정치·군사적 요충지였고, 불교문화 전승로와 민초들의 생활통로 역할을 했다. 이 길을 통해 수많은 역사가 만들어졌고, 삶의 애환이 빚어졌다.
신라는 이 길이 육상과 해상 모두에 절실히 필요했다. 계립령을 넘어 송계계곡을 지나면 지금은 충주호가 된 남한강에 이른다. 남한강은 서해를 통해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수운의 요로였다.
계립령은 북으로 진출하기 위한 육상 진출로로서도 중요한 길목이었다. 신라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길인 셈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신라가 가만히 그 길을 차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안고 있으며 논란거리도 제공하고 있는 길이 바로 계립령이다.
먼저 최초의 기록에 대한 의문이다. 길이 열렸다는 서기 156년이면 신라는 한반도 남부지방의 삼한, 삼한 중에서도 진한의 변방에 불과한 부족국가였다. 김부식(1075~1151년)이 쓴 삼국사기보다 900여 년 앞선 시대에 살았던 중국의 진수(233~297년)가 편찬한 <삼국지>의 ‘위지 동이전’에도 한반도 남부는 신라보다 삼한에 대한 설명이 더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렇듯, 지금의 경주와 울산에 근거지를 둔 진한의 변방에 불과했던 신라가 2세기 중반에 중부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는 기록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신라의 후손이라 그렇게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충주 가금면에 있는 중원 고구려비(국보 제205호)를 처음 발견한 예성문화연구회의 이상기(52) 박사는 “신라가 그때 그 길을 열었다고 보기엔 시대적·상황적으로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다”며 “당시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분명 활발한 교류가 있었을 것이고, 하늘재도 그 중 하나일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한반도 유일한 고구려비인 중원고구려비가 4~5세기경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면 고구려가 당시까지 중부지방에서 계속 영토 확장에 나섰다는 뜻이며, 그렇다면 ‘156년 신라의 계립령 개통’기록은 설득력이 조금 떨어진다. 이 박사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나중 삼국을 통일한 신라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다보니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국내 기행문학의 대가인 소설가 박태순씨는 “시기는 좀 유동적이고 탄력이 있어 보이지만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육상과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옛길박물관의 안태현 학예사도 “시기적으로 좀 맞지 않아 보인다”며 “하지만 이미 누군가 사용하고 있었고, 정치·군사적으로 주요 교두보였던 이 고개를 놓고 삼국이 치열한 전투와 신경전을 벌였던 것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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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2008년 12월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제49호로 지정된 하늘재를 탐방객이 주변을 감상하며 걷고 있다. 2 탐방객이 하늘재 표지석을 위로 두고 하늘재길로 내려오고 있다. 표지석 바로 옆으로 대원사 가는 길이다. 3 문경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경계이자 하늘재가 시작되는 지점에 공단 관리사무소가 있다. 4 자연탐방로는 공단에서 나무데크를 깔고 곳곳에 숲해설 안내판을 설치하는 등 탐방객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신라가 156년 개통한 사실은 다소 유동적
계립령 개통시기의 유동성과 맞물려 정확한 위치에 대한 논란도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계립령은 조령이니…’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계립령과 조령을 동일한 길로 보고 있다. 또 중원군의 <미륵리 석굴실측조사보고서>에서는 중원 미륵리에서 문경 관음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하늘재와 미륵리에서 대사리로 가는 고개인 지릅재까지 합쳐 계립령으로 적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조에 ‘계립령은 속칭 겨릅산(麻骨山)이라고 하는데, 방언으로 서로 비슷하다. 문경현의 북쪽 28리에 있으며, 신라의 옛길이다’이라고 돼 있다. 또 같은 책 연풍조에는 ‘계립령은 마골재라고 하며 현 북쪽 43리에 있다. 고구려의 온달왕이 계립현·죽령 서쪽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 라고 말한 땅이 바로 이곳이다’라고 적혀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계립령(谿立岺)이라 표기한 곳도 위에 언급한 지금의 하늘재와 일치한다.
미륵리에 있는 김동기 문화해설가도 “지릅재와 하늘재를 포함한 고갯길을 범칭해서 계립령이라고 한다”라고 설명했다. 반면 안태현 학예사는 “아직까지 통일된 개념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해설가들이 본 책 자체가 잘못됐을 가능성과 이를 독자들이 의문을 가지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을 때 생기는 오류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예성문화연구회 이상기 박사도 “계립령은 하늘재를 말하며, 계립령과 조령을 동일시하는 견해는 넓게는 경상도와 충청도를 넘나드는 고갯길이 불과 4~5㎞밖에 떨어지지 않아 부주의해서 그렇게 본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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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 정돈된 하늘재 흙길을 따라 걸으며 탐방객이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 / 하늘재 중간지점엔 자연탐방로가 있다. 탐방로 가는 다리 위에서 탐방객이 계곡을 쳐다보고 있다.
시대마다 명칭도 달라…길 운명과 맥 같이 해 계립령은 시대에 따라 중요도도 달라졌고, 이름도 다양했다. 즉 명칭에 따라 그 길의 운명도 달라졌던 것이다. 그만큼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다. 계립령은 신라에서는 계립령이라고 불렸지만 고구려에서는 계립현, 마목현으로 불렸다. 또 지름재, 지릅재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저름재의 음을 딴 것이 계립령이고 뜻을 딴 것이 마목(痲木, 麻骨)현이었다.
저름은 지릅의 방언으로 삼베를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삼베는 한자로 표기하면 마(麻)가 된다. 당시 이두문자가 유행하던 상황을 감안하면 다양한 이름이 나올 법도 하다. 결국 삼국시대에는 계립령, 계립현, 마목현, 마골현(산), 지릅재 등으로 불렸고, 이는 방언과 한자의 음과 뜻을 차용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선 대원령으로 불렸다. 충주 미륵리사지에서 ‘대원사주지’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됐다. 미륵리절 이름이 고려시대엔 대원사라고 불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갯길도 미륵리의 절 이름을 본떠 대원령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미륵리사지 바로 옆에는 대원사에서 관리했을 법한 주막과 미륵대원터가 발견돼 그 흔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고려시대까지 주요한 통로 역할을 했음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 들어선 조령이 개통되면서 대원령은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게 된다. 조령이 관로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계립령은 민초들의 길인 한휜령, 하늘재로 변했다. 삼국시대 정치·군사·교통 교두보로서의 길이 관의 길로, 민중의 길로 변해간 역사의 길이 바로 계립령인 것이다. 하나의 고개가 이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졌던 예도 드물 것이다.
영남대로 이전의 길, 기록상 한반도 최고의 길인 하늘재 계립령길을 따라 걸었다. 충주 미륵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섰다.
첫발을 내딛는 순간 ‘미륵이 무슨 말인가?’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불교 용어로 미륵은 미래, 내세불이다. 그럼 문경 관음리의 관음은? 현세불이다. 하늘재는 미래와 현세를 넘나드는 고갯길이란 말일까.
미륵리는 미래의 동네란 의미, 즉 내세다. 지금은 볼품없고 초라한 관광지에 불과하지만 한때는 내세의 동네에 비견될 만큼 영화를 누렸음 직하다. 그 흔적은 500m쯤 올라가면 미륵리사지터에서 찾을 수 있다. 미륵사지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우뚝 선 불상이 보인다. 보물 제96호인 미륵석불입상이다. 높이가 무려 10.6m에 달한다. 석불은 부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양 엷은 미소를 띠며 북쪽을 향하고 있다. 한국에서 북쪽을 바라보는 유일한 석불입상이다. ‘유일’하면 분명 뭔가 사연을 품고 있음이 틀림없다.
망국의 한을 품은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누이 덕주공주와 함께 금강산으로 가다 미륵리에 멈춰 내세를 기약했다. 그 내세는 신라를 다시 일으키는 것이었다. 마의태자는 10년 동안 미륵석불입상을 세우고 세월을 기다렸다.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건립하고 미륵리의 석불입상과 마주보게 마애불(보물 406호)을 암벽에 새겼다. 마주보는 미륵석불입상과 마애불에 망국의 한을 담아 남매는 내세를 기약했다.
유일한 북향 미륵리석불입상도 볼거리
그러나 끝내 그 내세는 오지 않았다. 마의태자는 눈물을 머금은 채 금강산으로 떠났고, 덕주공주는 자신이 세운 덕주사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마애불과 석불입상은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마주보며 신라 망국의 한을 담은 남매의 전설을 내세에 전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고려 초에 세워진 석불입상은 북방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아 한반도 중앙에서 북쪽으로 향하게 했다는 전설도 있다.
김영기 문화해설가도 “한반도 최고의 옛길인 만큼 많은 전설을 간직하기 마련”이라며 “사실 여부를 떠나 망국의 한과 북방통일은 별개의 관계인 듯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일맥상통하는 면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미륵사지터(사적 제317호)엔 미륵리석불입상과 보물 제95호인 미륵리5층석탑, 도 유형문화재 제19호인 미륵리석등이 일렬로 배치된 것도 이채롭다. 이 외에도 3층석탑, 시 향토유적 제9호인 미륵리석두, 온달장군이 힘자랑하기 위해 가지고 놀았다는 직경 1m 정도 크기의 공기돌 바위 등 그 옛날 역사를 말해주는 문화재가 하늘재 주변에 널려 있다.
온달장군에 대한 기록도 삼국사기에 나온다. 온달장군이 신라와의 전투에 출전하면서 ‘계립령과 죽령 북쪽은 원래 고구려 땅이니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각오를 밝힌 기록이다. 이곳에서 온달은 장렬히 전사했다. 그때가 서기 590년이다. 6세기 후반엔 완전히 신라의 영토가 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세, 즉 미륵리에서 출발한 계립령 하늘재길는 1시간쯤 지나면 재 너머 문경 관음리에 도착한다. 어찌된 일인가? 이렇게 차이 날 수 있단 말인가. 하늘재를 경계로 마치 내세와 현세, 미래와 현재를 구분하듯 충주 미륵리 방면은 과거 옛길 그대로의 모습이고, 문경 관음리 쪽은 아스팔트 포장길이다. 전형적인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다. 어찌 이렇게 절묘하게 구분했을까?
실은 하늘재 이북 미륵리 지역은 월악산국립공원 지역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문경시가 이 길을 개통하기 위해 관계부처에 민원을 넣었으나 결국 보존론이 우세해 문경까지만 도로포장을 한 것이다.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미륵리 방향 하늘재는 2008년 12월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제49호로 지정됐다. 아쉽지만 어디에도 그런 사실을 알려주는 표지판은 아직 없다. 지자체의 무심함과 명승관리의 소홀이 빚은 합작품이다.
하늘재 길을 따라 안태현 학예연구사와 하루, 국립공원 월악산 사무소 직원들과 하루 하여 이틀을 꼬박 왕복했다. 셋째 날엔 혼자서 여기저기 살피며 돌았다. 3일 동안 6번 왔다 갔다 하며 지나간 역사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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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미륵리사지터에 있는 도 유형문화재 제269호인 충주미륵리사지 귀부. 2 미륵리사지터에 있는 보물 제96호인 미륵석불입상. 한국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향하고 있는 불상이다. 3 미륵석불입상 앞에 있는 미륵석등과 5층석탑 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김영기 문화해설가. 4 고려 초 주막과 휴식터로 사용했던 미륵대원터.
백두대간 중간 지점…등산객들 많이 만나
하늘재를 경계로 서쪽으로는 탄항산, 동쪽으로 포암산이 백두대간를 잇고 있다. 이곳은 신체로 보자면 백두대간의 배꼽부분이다. 백두대간 종주하는 등산객들이 필히 거쳐야 하는 능선길이다. 마침 설악산에서부터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등산객 성병춘(41)씨를 만났다. 오늘(7월 8일)이 20일째라고 했다. 겉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눈빛만큼은 초롱초롱 살아 있었다. 산에서 야성을 찾아서일까?
“어떻게 백두대간 종주를 하게 됐나요.”
“백두대간 종주하는 사람은 다 사연이 있기 마련이죠.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주하면서 만난 사람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으며, 그 사람과 잠시 얘기를 나눠보면 갖가지 아픈 사연을 다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어떤 계기가 있어 종주하고 있습니다.”
“무슨 계기죠?”
“특별히 얘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
느낌에 굉장히 아픈 사연 같았다. 괜히 더 물으면 언짢을 것 같아 그 정도로 끝냈다.
“무사히 종주 잘 하라”는 말을 하고 돌아서는 순간, 무언가 꼭 맞아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현세와 미래를 넘나드는 하늘재가 간직하고 있는 그 수많은 사연만큼이나 오고간 사람들의 수많은 사연,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하늘재를 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픈 사연을 품고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치 한 편의 드라마가 주마등 같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하늘재길을 뒤로 하고 다시 내세의 길에서 꿈을 깨고 미륵리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현세와 미래를 갔다 온 듯한, 꿈 같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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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 걷기 전문가 신정일씨
“평생 옛길·강길 따라 5만 리 걸었죠”
초등 학력으로 책 40권 내…한국에 몇 안 되는 인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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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씨는 영남대로 360㎞, 관동대로 392㎞, 삼남대로 390㎞, 5대 강을 따라 걸은 거리만 총 2만㎞에 달하는 걷기 전문가다. 왜, 언제부터 그렇게 걷기 시작했는지 궁금했다.
“어릴 때부터 원체 가난하게 자라 걷는 게 일이었죠. 학교도 걸어 다녔고, 엄마 시장에서 장사하는 곳까지 걸어서 따라다녔습니다. 배고파 얻어먹기 위해서 갔죠. 초등학교 졸업 이후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그 때부터 본격 걷기가 시작됐다고 봐야죠.”
그는 정규학교 과정은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이다. 누구에게도 떳떳이 얘기한다. 숨길 것도 없고, 감춘다고 숨겨질 사실도 아니기 때문이다. 공민학교 다닌 적도 있지만 정규과정은 아니다. 검정고시로 대학 입학자격은 얻었지만 별 의미가 없어 그만뒀다.
그에게 첫 인생의 전기(轉機)를 만들어준 사람을 1975년 군에서 만났다. 초등 졸업의 학력이 전부인 그가 서울대 다니다 입대한 동기와 같이 생활했다. 살아온 환경, 배움의 깊이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죽이 맞아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 친구가 그에게 “깊이가 있으니 계속 공부를 하고 책을 많이 보라”고 권했다. 그를 처음으로 인정해주며 스스럼없이 대했던 친구였다. 그리고 헤어졌다. 비록 그 이후로 만나진 못했지만 그 친구는 평생 그의 가슴에 인생의 친구로 남아 있다.
군에서 제대하면서 그동안 모아뒀던 몇만 원을, 차비만 빼고 전부 문고판 책을 사는 데 썼다. 아무리 배를 곯아도 책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1993년엔 김지하씨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와 동학에 대한 얘기를 2시간 정도 나눈 뒤 김지하씨와 그 뒤로 아주 가깝게 지내게 됐다고 한다. 그로서는 자신감을 갖는 한편 세상에 대한 콤플렉스를 날려 버리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의 인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고마운 사람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인생에 영향을 또 다른 한 사람은 그의 부인이다. 그의 부인은 교사다. 초등 졸업 학력을 가진 백수에게 시집오기 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혼한다고 하니 처가에서 집사람 대학 졸업도 하기 전에 머리를 빡빡 밀어 보냈더군요. 여하튼 곡절 끝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는 그간 쌓았던 지식과 체험을 1990년대 초반부터 책으로 풀어갔다. 지금까지 약 40권 된다.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대한민국에서 살기 좋은 33곳> <다시 쓰는 택리지> 등 걸어 다니면서 보고 느낀 모든 것을 담아냈다. 2006년 즈음부터 책 쓰는 것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인디라이터(Indie Writer·독립저술가)중 한 명이 되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진지한 모습이 더없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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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 트레킹 가이드
자연탐방로 포함 총 4.5㎞…주변엔 마애불 있는 덕주사·송계계곡 볼 수 있어
하늘재에 가려면 보통 충주 미륵리주차장에 차를 두고 가는 게 일반적이다. 문경 방면은 하늘재까지 포장도로로 잘 닦여져 있으나 주차장 시설이나 주변 편의시설이 전혀 없어 불편하다.
미륵리 주차장에 차를 두고 500m쯤 포장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미륵리사지터가 나온다. 이곳엔 문화해설가들이 3명 근무한다. 대개 2명이 상주한다. 해설을 부탁하면 언제든 흔쾌히 응한다.
미륵리사지와 미륵대원터를 살펴본 후 50m쯤 올라가면 본격 국가문화재 명승 제49호인 하늘재길이 열린다. 갈림길인데 오른쪽으로는 대원사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멀지 않으므로 잠시 들렀다 가는 것도 괜찮다. 가는 길엔 미륵리3층석탑과 미륵석두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 다 문화재다.
하늘재 길로 들어서면 바로 옆으로 송계계곡의 발원지라고 해도 괜찮을 시냇물 이상의 물이 흐른다. 가는 길은 주로 흙길이다. 가끔 박석포장길도 나온다. 조그만 돌로 길을 만들고 돌 주변 공간은 흙으로 메운 길이다. 박석에 콘크리트로 포장한 길도 있다. 매력 없는 그 길 때문에 갑자기 삭막해진다. 다행히 삭막한 길은 짧다. 바로 호젓한 숲길이 펼쳐진다.
갈림길목에서 500m쯤 가면 숲속으로 들어가는 자연탐방로가 왼쪽으로 나 있다. 자연과 역사와 유적을 동시에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갔던 길로 내려오지 않도록 한 배려인 듯했다.
하늘재길 주변으로는 완전히 우거진 숲이다. 여름이면 숲이 우거져 시원하고, 가을이면 일본잎갈나무, 일명 낙옆송 때문에 굉장히 운치 있는 길이 된다고 동행한 공단직원들이 귀띔했다. 겨울엔 눈 쌓인 길을 헤치며 가는 맛도 일품이란다. 봄이야 어느 산이든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일 것이다.
하늘재 정상 기준 1㎞ 남겨둔 지점에 안내판이 있다. 하늘재 정상 1㎞(남쪽) 전, 왼편으로 자연탐방로(동쪽) 이정표다. 내려올 때 자연탐방로로 가면 지겹지 않을 것 같았다.
천천히 숲과 역사를 만끽하며 걸으면 약 1시간 걸린다. 거리상으로 약 2.5㎞다. 드디어 하늘재 정상이다. 정상 왼편(동쪽)으로는 포암산 방향, 오른쪽(서쪽)으로는 탄항산이다. 백두대간 종주 코스다.
정상에서 도저히 걷기 싫을 경우엔 택시를 부를 수 있다. 수안보까지 3만 원이고, 미륵리로 다시 돌아가는 비용은 5만 원이다(한진택시 043-845-6484).
걸어서 1㎞ 내려가서는 이번엔 자연탐방로로 가보자. 숲속에서 자연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상세한 안내판이 곳곳에 붙어 있다. 자연탐방로를 따라 내려가면 애초 출발한 대원사 올라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하늘재의 시작이자 끝이다. 자연탐방로를 포함하면 총 4.5㎞ 가까이 되는 길이다. 오전 한나절 둘러보고 인근 송계계곡으로 가면 된다.
송계계곡엔 마의태자의 누이 덕주공주가 창건했다는 덕주사와 미륵석불입상과 마주보고 있는 마애불을 볼 수 있다. 송계계곡에서 덕주사를 거쳐 마애불까지 1시간 남짓 가면 도착한다. 왕복 2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송계계곡은 여름철 계곡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피서와 역사를 동시에 즐기는 곳이다.
>>미륵리 찾아가려면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나들목~충주방면 19번 국도~충주호방면 36번 국도~597지방도의 순으로 간다. 송계계곡과 덕주사 이정표가 중간 중간에 보인다. 수안보 방면으로는 597번 지방도를 타서 수안보온천을 거쳐 계속 가면 된다. 월악산 탐방안내소를 조금 지나면 지릅재 안내판이 나오고 10여 분 가면 미륵리 주차장에 도착한다.
>>숙박(지역번호 043)
미륵사지 주변엔 식당과 민박을 겸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미륵가든(848-6612), 월악가든 민박(846-0310) 등이 있고, 바로 위 민박촌엔 양돼지민박(845-6484)을 포함해 몇 군데가 전문 민박을 한다. 1박에 보통 3만 원이고 10명 이상이 묵는 큰 방은 15만 원 내외. 송어 전문점으로 미륵리송어양식장(845-8890, 847-2257)과 월악송어양식장(848-4791, 842-9332)이 있다.
송계계곡엔 식당을 겸한 민박으로 송계가든(651-2003), 월송가든(651-6478), 수이네식당(651-5207), 닷돈재휴게소(651-9416), 물레방아(651-7115) 등이, 펜션·민박으로 월악산펜션(653-5434), 푸른향기펜션(651-1930), 징검다리펜션(651-0934), 월악민박(651-2785) 등이 있다. 펜션 1박 비용은 성수기 기준 10평에 15만 원, 비수기와 평일엔 8~10만 원 정도 한다.
>>별미
충주엔 꿩샤브샤브가 지역 별미로 유명하다. 미륵사지와 송계계곡 주변엔 꿩 전문 음식점이 없고 수안보 인근에 몇 군데 있다. 충주시에서 추천한 꿩 전문 음식점은 감나무집(848-0609), 대장군식당(846-1757), 삿갓촌식당(846-2529)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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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길을 찾아서] ⑶ 관동대로 삼척 고포~용화
바다와 산 함께 즐기는 절경
관동별곡에 나온 바로 그곳
황희 정승 유적 등 볼거리도 많아…10월 24일 첫 트레킹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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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성공의 발자취 산모퉁이에 남아 있고 / 울릉도 우산도는 눈 아래 펼쳐진다네 / 동해바다 아침 해 떠오르는 모습 보고자 하니 / 그대는 나와 같이 소공대에 꼭 오르자꾸나’
조선 중기의 문신 이정암(1541~1600년)이 삼척 소공대비(召公臺碑)에 올라 황희 정승을 기리며 울릉도를 바라보면서 지은 시다. 동해와 접한 영동지방은 예로부터 관동지역으로 불리며 아름다운 경치로 많은 시인들의 감흥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조선 선조 때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과 고려 말 안축의 <관동별곡>이 끝없이 펼쳐진 동해, 해돋이 풍경, 바다와 호수 및 빼어난 산의 경관 등을 읊은 대표적인 가사다.
이 아름다운 경관을 걸으면서 즐기는 관동대로 길이 되살아나고 있다. 관동대로는 울진 평해에서 출발, 동해를 따라 올라와 대관령을 넘어 동대문까지 920리(약 370㎞)에 이르는 옛길을 말한다. 영남대로와 삼남대로는 몇몇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진 반면 관동대로는 아직 제대로 조사가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의 걷는 길 조성계획에 따라 지난 6월 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동해트레일을 역사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했다.
이를 계기로 삼척의 웰컴투삼척추진협의회에서 관동대로 옛길 복원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연말까지 고포~용화리마을 입구까지의 25㎞ 구간 완전개통을 목표로 현재 리본 달기와 이정표 만들기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들과 함께 현재 작업이 진행 중인 코스를 미리 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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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웰컴투삼척 회원들이 멀리로는 동해의 수평선, 바로 밑으로는 밤섬이 내려다보이는 관동대로 길을 걸어가고 있다. (아래) 사기촌마을 입구에 있는 수백 년은 족히 넘었을 법한 노송을 회원들이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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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발은 삼척시 원덕읍 고포마을이다. 고포는 미역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이곳에서 나는 돌각미역은 특이한 향기와 달콤한 맛으로 한국 최상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때 그 맛이 궁중에까지 알려져 진상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고포마을 중간을 가로지르는 복개천을 두고 양쪽이 행정구역상 강원도와 경상북도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한 마을 두 개 도(道)’이다. 복개천을 마주보고 있는 앞집에 전화를 하면 시외전화료를 물어야 한다. 주민 지원금도 다르다. 경북이 강원보다 조금 더 풍부하게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왜 이런 희한한 일이 생겼을까? 울진은 원래 삼척에 속했지만 개념 없이 행정구역을 분할하면서 생긴 일이라고 웰컴투삼척 회원들이 말했다. 고포마을은 관동대로 옛길에 포함되지 않지만 역사적 의미와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있어 출발지점을 고포로 잡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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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천1리 들판은 말 그대로 황금들녘으로 변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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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령재 고갯길이 삼척 관동대로 시발지
마을 옆 군부대를 지나 옛날 고갯길로 올라섰다. 가파른 길이다. 고개를 넘어서자 구 7번 국도가 나왔다. 지금은 차도 별로 다니지 않는 길이다. 휴게소도 있지만 문을 닫은 지 이미 오래된 것 같다. 그 옆으로 웰컴투삼척 리본이 여기저기 매달린 숲길이 나 있다. 제초기로 정비한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다.
여기서부터 삼척의 관동대로 옛길이 시작된다. 갈령재(치) 고갯길이다. 숲으로 들어서니 벌써 향긋한 숲내음이 풍겨온다. 손님을 반기는 듯 까치 울음소리도 들린다. 상쾌한 기분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원덕기지국 탑이 나왔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만든 것이지만 조망을 해치는 결정적 대형 구조물이다.
길 양옆으로는 야생화와 산들국화가 만발해 있다. 조금 지나자 조망이 확 트였다. 동해가 발아래 펼쳐졌다.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산과 바다에서 동시에 가져다주는 바람이다.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풍경은 장관이다. 다른 옛길에서 볼 수 없는 경관이다. 바로 관동대로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동쪽으로는 바다, 서쪽으로는 백두대간 줄기가 첩첩으로 둘러쳐져 있다. 걸어갈수록 길이 희미해졌다. 사라진 길의 흔적을 찾아 다시 살리고 있다. 그 대표적인 흔적이 돌담과 국시뎅이 돌탑이다.
국시뎅이는 옛날 사람들이 길을 다니면서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마을 입구나 언저리에 쌓아 두었던 돌무더기를 말한다. 새로운 길이 닦여도 국시뎅이와 같은 흔적을 완전히 없앨 수 없는 법이다. 국시뎅이 바로 옆으로 잡초를 제거하니 길이 자취를 드러냈다.
다시 능선으로 접어들었다. 동해의 끝없는 수평선이 이어졌고, 바로 밑으로는 호산항과 해수욕장이 있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어디서 다시 볼 수 있겠는가. 한참을 바라봤다. 바다와 수평선, 그리고 하천과 섬을.
능선을 내려 마을에 도착하기 직전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일을 하고 계셨다.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가까이 다가서자 “에구, 놀래라! 왜 기척도 안 하고 내려와요?” 라며 말을 건넸다.
“옛길 따라 걷고 있는 중입니다. 할머니는 뭐 하세요?”
“일하고 있어요. 지난 여름부터 사람들이 길을 내느라 막 작업하고 그러던데. 조심하세요. 여기는 너구리도 나오고 그래요.”
월천1리 마을로 접어들었다. 월천은 예전부터 이름이 달내(月川)였다. 달이 뜨면 내에 비춰 잘 보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그래서인지 마을엔 더더욱 적막이 감돈다. 요즘 시골마을 풍경이다. 사람 소리를 듣기 힘들다. 마을 앞으로 가곡천이 흐르고 있고, 그 위로 월천교 다리가 호산리를 연결하고 있다. 월천교를 뒤로 둔 마을회관 양옆으로 300년과 500년 된 노송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나무 둘레가 5m 가까이 되는 500년 노송은 보호수로 지정돼 삼척시의 관리를 받고 있었다.
새로운 7번 국도, 낭만가도 겸 아시안하이웨이라고 명명된 도로가 구 7번 국도 옆으로 쭉 뻗어 월천리를 통과하고 있다. 구 7번 국도는 이젠 옛길, 아니 사라지는 길이 됐다.
들판은 벼가 익어가는 황금들녘 이름 그대로다. 월천교 너머로 밤섬이 무덤덤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때 동해 밤섬 일출도 사진작가들의 포인트로 각광받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아시안하이웨이로 조망 자체가 방해받고 있다. 월천교 밑 가곡천엔 옛날 다리를 놓았던 나무 기둥 흔적이 남아 있다. 흔적은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는 역사가 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한낮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월천교 밑의 그 나무 기둥은 초기 가곡천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전망 좋은 곳에 소공대비 자리 잡아
산길을 내려온 관동대로는 이제부터 구 7번 국도를 따라가다 호산마을로 접어들어 둑길로 줄곧 간다. 다시 잠시 7번 국도로 합류해서 주유소를 지나 미향가든에서 왼쪽으로 꺾어 길곡마을로 가야 한다. 아스팔트로 포장한 지 얼마 안 된 듯했다. 미향가든 맞은편엔 소공대비 가는 길이란 이정표가 크게 붙어 있다.
약 3㎞쯤 지나 길곡마을 중간 지점 오른쪽에 민가 1채만 달랑 나온다. 그 집 10m쯤 옆으로 다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포장된 길로 계속 올라가도 소공대비로 가는 길이 있으나, 그 길은 소공대비까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포장된 도로여서 훨씬 지겹다. 웰컴투삼척에서 걷기 좋은 호젓한 산길을 찾아 이 길을 관동대로로 하기로 했다. 실제로 어느 길이 옛날 관동대로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산길로 접어들자 노송들이 저 멀리서 반기는 듯했다. 두 가지가 승리의 V자 모양을 한 소나무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산과 바다에서 합창하듯 부는 바람이다. 느낌도 다르다. 단순히 시원한 느낌이 아니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산에서 맞으니 상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마음마저 시원해졌다. 산길은 임도 비슷한 능선길로 계속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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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 가장 전망 좋은 곳에 황희 정승의 선정을 기려 세운 소공대비. (우) 국시뎅이는 옛길의 흔적을 찾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윤광희·지경옥 회원이 국시뎅이에 돌을 얹고 있다.
이곳엔 키 큰 나무들이 없다. 자란 지 몇 년 안 된 고만고만한 나무들이 대부분이다. 모두 2002년 삼척 일대를 휩쓴 화마 때문이다. 당시 삼척 일대 산은 완전 초토화됐다고 한다. 산불은 주민이 쓰레기를 태우다 옮아간 불을 진화하지 못해 발생했다고 한다. 결국 그 산불도 부주의가 부른 인재(人災)였다. 가는 길 군데군데 타다 만 나무더미를 아직 쌓아두고 있다. 안타까운 모습이다.
마침내 소공대비에 도착했다. 소공(召公)은 중국 주나라 시대 태평성대를 구가한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을 가리킨다. 후세엔 그 의미가 확대되어 왕을 도와 국가를 튼튼히 하고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한 인물을 일반적으로 소공이라 칭한다. 한마디로 정치를 잘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황희(黃喜) 정승을 꼽는다. 황희 정승은 90세까지 생존하며 고려 말부터 조선왕조 문종 시대까지 무려 60여 년 동안 6명의 임금을 섬기면서 우리 역사에서 이름난 재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런데 그 황희 정승을 기리는 비석이 왜 이곳에 있을까? 1423년 전국적으로 기근이 심하게 들어 백성들이 곳곳에서 굶어죽는 상황에서 강원도 관찰사로 파견된 황희는 가는 곳마다 정부 보관미를 풀고 사재를 털어 백성을 구제했다. 특히 삼척 지방에 기근이 심했는데, 황희 관찰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삼척에는 아사자가 한 명도 없었다. 이에 삼척 지방 사람들은 관찰사가 다니며 쉬었던 산 중턱에다 돌로 탑을 쌓고, 그 이름을 역사상 가장 정치를 잘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소공이라 취해 소공대라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붕괴된 소공대를 1515년 강원도 관찰사가 재건하고, 1578년 삼척부사가 중건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소공대비는 우리나라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선정비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위의 사실은 이 길이 옛날 사람들이 다닌 옛길임을 분명하게 입증하고 있다. 소공대비는 황희 관찰사가 영동지방을 굽어 보살피라는 듯 사방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7호로 관리하고 있다.
짐승의 길은 자연 속에 스며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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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공대비로 가는 임도를 따라 가고 있다.
- 황희의 선정을 상상하며, 지금 그런 정치인이 나올 수 없을까 생각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임도는 계속된다. 임도 갈림길이다. 왼쪽은 백두대간으로 연결되는 길이라고 했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조금 내려가니 구리터분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멧돼지 사육장이라고 했다. 멧돼지 사료가 여기저기 널렸고, 사체도 버려져 있었다. 웰컴투삼척 회원들은 이 구간을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사유지라 뭐라 할 수도 없고, 단지 협조만 요청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멧돼지를 지키는 사나운 개들이 계속 짖어댔다. 빨리 지나쳤다.
다시 능선에 접어드니 눈앞에 마을이 나타났다. 사기촌마을이다. 마을까지 내려가는 능선길 양옆으로는 밤나무와 참나무들이 몇 그루 있었다. 밤과 도토리들이 길에 그대로 널려 있었다. 줍기만 하면 됐다. 나무를 툭 건드리니 밤송이가 우수수 떨어졌다. 걷는 재미에 먹는 재미까지 더했다. 다들 주머니에 한가득 담고 마을까지 내려왔다.
수백 년 됐음직한 노송 당산나무가 사기촌마을을 지키는 듯 능선 끝 마을 입구에 떡 하니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고, 바로 앞엔 서낭당이 있었다. 당산나무 가지 사이엔 산초나무와 개옻나무가 기생했다. 나무에서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이곳에도 사람은 없고 개 짖는 소리만 들렸다. 이 마을은 원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릇 만드는 동네였고, 작은 석불을 모신 절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웰컴투삼척추진협의회 김억연 사무국장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석불이 있었으나 그 이후 누군가 가져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을을 연결하는 다리를 가로질러 임원천 발원지를 향해 올라갔다. 왼쪽으로 로즈벨리펜션이 그림 같이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옆으로 ‘검봉산자연휴양림 1㎞’라는 이정표가 왼쪽으로 길을 가리켰다. 관동대로는 곧장 계속 가야 한다. 하얀 별장들이 한 채씩 나왔다. 워낙 오염되지 않은 계곡이라 사람들이 탐낼 만한 장소 같았다.
포장된 콘크리트길을 따라 곧장 올라가다 끝 지점에서 10m쯤 못 미쳐 오른쪽으로 빠지는 조그만 길이 보였다. 이젠 이번에 개통할 마지막 구간이다. 질퍽한 습지로 된 외길이다. 습지 옆으로 조그만 도랑 같은 개울에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렁찬 소리가 아닌 아기자기하며 귀에 쏙 들어오는 작은 소리였다. 질펀한 습지로 걸으며 아기자기한 물소리를 듣는 색다른 맛이다.
- 개울 바로 옆엔 버드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버드나무는 물을 좋아하는가 보다. 강가에도 버드나무, 습지에도 버드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옆으로 흐르는 개울은 탁족하기에도 그럴듯했다. 잠시 더위를 식히며 탁족과 더불어 버드나무 숲을 즐겼다. 수십 년 전 까지만 해도 이곳은 논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자 농사 지을 사람이 없어 그냥 내버려둔 게 습지가 되고, 버드나무 군락지가 됐다고 한다. 무한한 자연의 생명력을 보는 느낌이다.
버드나무 군락지 끝 지점엔 콘크리트로 포장된 임도가 나왔다. 길과 길의 부딪힘이다. 콘크리트길은 버드나무 군락지를 앞에 두고 단절돼 있다. 산길은 콘크리트길로 끝이 났고 곧 사라질 위기다. 몇 안 되는 주민이 버드나무 군락지로 임도를 내 달라고 민원을 올렸다고 한다. 사람도 길을 만들고 짐승도 길을 만들지만 유독 인간이 만든 길은 너무 쉽게 파괴와 단절을 만든다. 짐승의 길은 자연 속에 스며들어 있다. 자연 속에 스며든 길은 언제든 다시 활용이 가능하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임도를 따라 불과 몇 미터 지나지 않아 아칠목재 고개 오른쪽으로 국시뎅이 돌탑이 어렴풋이 보였다. 원래 있던 길을 처참히 없애버린 현장이다. 인간이 만든 새 길은 기존 길을 파괴하는 속성을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길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속성이다.
이곳이 연말까지 새 단장할 삼척 관동대로의 마지막이다. 다소 지겹지만 콘크리트길로 닦여진 길을 따라 용화해수욕장까지 가면 된다. 그 지겨운 길을 걸으면서 인간이 지닌 파괴의 속성이 길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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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고포 찾아가는 길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를 타고 가다 동해고속도로 강릉분기점에서 우측 방향으로 동해, 삼척으로 갈아탄다. 동해IC에서 7번 국도로 빠져 나와 울진, 영덕 쪽으로 내려와 호산교차로에서 416번 지방도로 나가면 된다. 고포, 월천 해수욕장에 대형 주차장이 있다. 고포나 용화에 주차하고 택시를 부르면 최소 3만 원은 줘야 한다. 25㎞ 정도 되는 1구간을 하루에 완주하기는 조금 무리가 따르므로 적당한 중간지점에서 빠져나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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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투삼척추진협의회
“평해~동대문까지의 관동대로, 우리가 연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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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동대로 옛길 추진위원장인 박대용씨는 시인이기도 하다.
- “관동대로를 완성시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각오입니다. 다른 시도에서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우리가 동대문까지 연결시키겠습니다.”
웰컴투삼척추진협의회 회원들이 관동대로를 완성시키기 위해 불철주야로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 핵심 멤버는 웰컴투삼척협 감사이자 관동대로 옛길 추진위원장인 박대용(48)씨, 웰컴투삼척 윤광희(52) 부회장, 김억연(42) 사무국장 등이다. 이들은 지난 6월 말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동해트레일이 문화역사생태탐방로로 지정되고, 그 사업 주체로 웰컴투삼척협의회가 선정되자 바로 작업에 나섰다. 한여름 땡볕에 제초기를 들고 길의 희미한 흔적을 찾아 풀을 헤치며 길을 찾았다. 제초기와 전기톱을 들고 길을 찾을 때 전기톱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몰라 톱날이 부러져 톱 값을 물어주기도 했고, 제초기가 말벌집을 건드려 말벌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젠 대충 코스가 완성됐다. 그러나 아직 할일이 태산같이 많다. 리본을 달아야 하고, 이정표는 어떤 내용을 담아 어떤 모양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스토리텔링도 완성된 게 별로 없다. 하지만 의욕이 넘치고 있다. 지리산길이나 기존의 정리된 길을 답사해서 아이디어도 얻었다. 동네 어르신들을 만나 기록도 차츰 모으고 있다.
핵심 멤버 세 사람은 제각각 재주를 가지고 있다. 박대용 추진위원장은 1993년 문학세계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다. 시집도 발간한 이력을 갖고 있다. 제일 연장자인 윤광희 부회장은 조각과 인테리어에 일가견이 있다. 성(性) 민속공원으로 유명한 해신당공원을 직접 조성하기도 했다. 김억연 사무국장은 제일 어리지만 삼척의 터줏대감이다. 3년 가까이 객지 생활을 했지만 나머지는 줄곧 삼척에서 생활했다. 삼척 인구 7만여 명 중 그가 아는 사람이 약 5만 명 가까이 된다고 하니 ‘삼척의 대표적 마당발’이다. 식당이건 술집이건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이들은 그나마 다른 대로와는 달리 찾으면 찾을수록 길이 형체를 드러내고 있어 다행이란다. 조금은 단절되고 사라졌지만 영남대로나 삼남대로에 비하면 훨씬 양호한 상태라고 했다.
“빨리 조성하기보다는 걷고 싶은 좋은 길로 만들기 위해 완성도를 높일 생각입니다. 그 일환으로 10월 24일 관동대로 걷기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할 것입니다. 참가자들의 다양한 반응을 들어 보고, 그 방향에 맞춰 최종적으로 옛길을 복원할 계획입니다.”
일단 염두에 두고 있는 세부계획은 각 구간마다 주제를 정할 생각이다. 과연 연말까지 어떤 형태의 삼척 관동대로가 탄생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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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길을 찾아서] ⑷ 고창 ‘고인돌과 질마재 따라 100리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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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동백·복분자·꽃무릇·고인돌…
고창의 명물 두루 꿰는 43.7km 낭만 길
강둑 길, 호반 지나 국가지정 명승 선운산 계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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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엔 유명인사와 명소, 맛집 등이 너무 많다. 가장 아름다운 시어를 썼다는 미당 서정주 선생은 그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서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할 정도로 서해에서 질마재로 넘어오는 코끝 찡한 바람이 부는 고창을 사랑했다. 지난 2000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인돌 고분군이 있는 곳도 고창이다. 또 지난 9월 말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선운산도 여기 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서 특유의 맛을 내는 풍천 장어로도 유명하다. 그 외에도 판소리 신재효 선생의 생가, 고창읍성, 인촌 김성수 선생과 LG 창업주의 묘지, 복분자 등 고창의 명물들은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자랑거리들이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길이 있다. 방법으로서의 길이 아니라 실제의 길이다. 단절된 옛길을 ‘고인돌과 질마재 따라 100리 길’로 연결시켰다. 전체 길이가 무려 43.7㎞에 달한다. 길이 긴 만큼 유적과 볼거리, 먹을거리도 가득하다. 제1 코스는 고인돌박물관~생태습지~원평마을로 8.8㎞에 이르는 ‘세계문화유산 고인돌길’이다. 2코스는 원평마을~연기마을의 7.7㎞ 구간 ‘인천강 풍천장어와 복분자길’이다. 3코스는 연기마을~검당소금전시관으로 14.5㎞ 거리의 ‘시와 차와 국화꽃이 있는 질마재길’이다. 4코스는 검당소금전시관~선운산관광안내소 12.7㎞ 거리의 ‘천오백년 화염(火鹽)의 역사가 살아있는 선운산 보은길’이다. 전부 수백 년 이상 된 옛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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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고인돌박물관 인근에 있는 고인돌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인돌”이라고 칭송 받았고, 교과서에도 실렸다. 2 매산마을에 있는 고인돌 고분군. 3 선운사 보은길로 가는 길에 있는 참당암 녹차밭. 안개가 서린 듯한 밭과 햇빛에 반짝이는 찻잎이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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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길로 먼저 돌아도 상관없다. 각 길마다 고유의 특색을 지닌 길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고창읍에서 가장 가까운 고인돌박물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고인돌박물관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어 누구나 쉽게 방문할 수 있도록 했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로서 수천 년 전 청동기시대의 사람 무덤이다. 고창 죽림리 일대는 ‘고인돌 떼무덤’일 정도다. 죽림리 매산마을에 있는 크고 작은 바윗덩이는 전부 고인돌이다. 고창군에 분포돼 있는 고인돌의 정확한 수는 현재 대략 85곳에 2000기 이상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바둑판형인 남방식, 탁자형인 북방식 등 그 형태도 다양하다. 고인돌마다 각각의 번호를 붙여 관리하고 있다.
인근 지동마을 외딴 집에 있는 고인돌은 전형적인 북방식 지석묘로 미국의 고인돌 전문가가 와서 감탄하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인돌”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 가 보니 교과서에서 본 아름답고 제단 같은 그 고인돌이었다. 매산마을의 고인돌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라 하루 종일 살펴봐도 다 못 볼 것 같았다. 갈 길이 멀어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오베이골로 넘어가는 매산재를 넘었다. 재 넘어 운곡마을 사람들이 닥나무를 재배해서 고창읍에 내다 팔기 위해 한지를 지고 넘나들었다는 고개다. 매산재를 서낭재, 쥐겁재라고 부르기도 했다. 서낭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있었다고 불렀을 법하지만 쥐겁재는 또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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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나무가 우거진 고인돌길을 김동식 문화관광해설사가 설명하며 걷고 있다. 2 옛날 운곡마을 사람들이 한지를 팔러 다니던 길에 운곡저수지가 들어서 한지는 사라지고 길만 남아 있다. 3 운곡 용계마을 사람들이 수몰 이후 실향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운곡저수지 옆에 망향정을 세웠다. 4 가로·세로 5m 크기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고인돌을 김동식 해설사가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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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박물관이 1구간 출발지점
동행한 김동식(60) 문화관광해설가는 “지금 고인돌박물관이 있는 자리가 과거엔 더 넓은 평야라 아마 쥐들이 많았을 것 같다. 사람들이 고개를 넘으면 그 소리에 쥐들이 겁을 내 소란스럽게 울어 그렇게 부르지 않았나 여겨진다”고 했다. 김동식 해설가는 30년간 교직생활을 하다 지난해 교장으로 퇴직한 분이다. 8년간의 교장 생활을 명퇴하고 문화해설가와 숲해설 겸 등산안내인을 하고 있으니 오히려 교직생활할 때보다 더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보람 있는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한다.
“오베이골은 오방곡의 전라도 사투리로, 다섯 방향으로 고개를 넘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베이재(운곡~아산), 백운재(운곡~부안 사창), 행정재(운곡~고창 송암), 쥐겁재(운곡~고창고인돌), 해암골(운곡~신림 해암)로 빠져나가는 오거리 역할을 한 골짜기지요. 지금은 지난 1981년 운곡댐이 생긴 이래 사람들 통행이 뜸해졌어요.”
옛날 오베이골 사람들이 한지를 팔러 장에 다닌 길로 걷고 있다. 작은 돌길로 만든 걷기 좋은 길이다. 조금 더 가니 흙길이다. 맨발로 걸으면 더 좋겠다. 외국인들이 조깅하러 자주 찾는다고 했다. 1구간 8.8㎞를 왕복하더라도 4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갑자기 눈앞에 그림 같은 연못이 펼쳐졌다. 생태습지연못이다. 운곡댐이 생긴 이래 30여 년간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아 물이 고여 좋은 습지가 형성됐다. 환경부에서 생태조사를 나와 습지보존지구로 지정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수양버들과 연꽃·습지식물이 붉나무·얼음나무·참나무와 적절히 조화를 이뤄 향긋한 숲 냄새가 코를 찌른다. 숲 향기를 가장 많이 내는 나무가 비목이라 한다. 비목 잎을 잘라 비벼서 코에 갖다댔다. ‘아하, 이 향기였구나!’ 숲속에 나는 그 냄새보다 더 진하다. 비목이 눈에 자주 띄었다.
수많은 실향민을 만든 운곡댐에 이르렀다. 운곡, 용계리 158세대가 운곡댐으로 인해 고향을 떠났다. 운곡마을은 원래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예로부터 심산유곡이라 마을 주변이 봉우리로 둘러싸여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덮여 운곡이라 불렸다고 한다. 청정 골짜기에 수질이 좋아 영광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용수로 쓰기 위해 운곡댐을 만들었다.
수백 명의 실향민을 만든 운곡댐은 두루미 등 새들의 낙원으로 변해 있었다. 실향민들은 가슴 아프겠지만 175만㎡(53만 평)의 면적을 자연에 양보했다고 하면 어떨까.
적적한 운곡마을엔 수백 년 된 보호수가 1세대만 남은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보호수에서 250m 동쪽으로 올라가면 동양에서 제일 큰 고인돌이 나온다. 가로·세로 약 5m 크기에 무게는 300t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이곳 주변에서는 수백 년 전부터 닥나무를 재배해 7개의 한지공장에서 생산한 한지를 쥐겁재를 통해 내다 팔았으나 수몰 이후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졌다. 흔적만이라도 남겨 유산으로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운곡서원과 운곡샘을 지나 망향정에 다다랐다. 운곡, 용계리 주민 수백 명이 실향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지난 1987년 지은 정자와 비석이 있다. 여기서부터 734번 군도로 잠시 연결된다. 운곡저수지 끝 지점에 있는 원평마을이 1코스 마지막이다.
2코스는 고창의 대표적 먹거리인 인천강 풍천장어와 복분자길이다. 서해로 흘러가는 인천강을 따라 걷는 길이다. 고창의 수많은 역사를 담고 흐르는 인천강은 고창의 대표적인 참게, 가물치 등 민물어종이 풍부하여 왜가리, 백로, 두루미, 청둥오리 등 다양한 철새들이 날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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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페교가 된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서 미당 시문학관으로 만들었다. 2 미당 서정주 선생의 생가. 3 선운사 뒤편에 있는 500년 이상 된 동백나무 숲. 4 코스모스 우거진 인천강 강둑길을 김동식 해설사가 걷고 있다. 이 주변이 명당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풍천장어와 복분자길로도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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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분자길인 인천강 옆에 있는 병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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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강의 대표적인 어종인 풍천장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역에서 잡히는 장어를 가리키는 말이다. 풍천이란 고유지명은 안동 지방에 있다. 일부 풍수가들은 동출서류한 인천강이 선운산을 앞에 두고 다시 서출동류로 역류해 서해 북쪽 바다로 흘러드는 명당수인 인천강에서만 잡히는 장어를 풍천장어라고 주장한다.
이 길을 따라가면 복분자 공장들도 몇 곳 눈에 띈다. 고창에서 생산되는 복분자 관련 상품이 전국 시장의 30~40%를 점유하고 있다고 했다. 복분자 공장을 지나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산초등학교가 나온다. 폐교 직전인지 ‘폐교 반대’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일부에서는 수련관이나 펜션 등으로 활용하기 위해 찬성한다고 한다. 자리는 좋아 보였다.
아산초등학교 뒤를 지나 인천강 강둑길로 따라가다 보면 풍수가들이 금반옥호(金盤玉壺)와 선인취와(仙人醉臥)라고 주장하는 명당을 만나게 된다. 신선이 말을 타고 내려와 금반옥호의 술상을 차려 놓고 예쁜 옥녀와 술을 마시다 취해 술병을 엎어놓고 누워 있는 형국이란다. 명당인지 아닌지 비전문가는 봐도 잘 모르지만 풍수가들이 그렇다고 전하니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다. 실제 이 부근에 인촌 김성수 선생과 LG 창업주의 묘지가 있다.
강둑길을 지나 산과 접해 있는 인천강 옆 나무 데크 길로 접어들었다. 게가 눈에 언뜻언뜻 보였다. 산길인지 강길인지, 바닷길인지 분간이 안 됐다. 영락없이 ‘게가 산으로 가는’ 형국이다. 산에서 게를 보는 드문 지역이다. 이곳 마을 이름도 연기마을이다. 연기처럼 사라지고 신출귀몰하는 대사가 있어 이름 붙여졌다고 전한다. ‘신출귀몰한 연기마을의 산에서 게를 보는’ 묘한 분위기다. 연기마을이 2코스 끝이고 3코스 시작 지점이다.
2코스에서 바로 선운산 방향으로 넘어갈 수 있지만 3코스인 질마재를 빠트릴 수 없다. 바로 미당 서정주의 생가와 시문학관이 있는 곳이고, 가을에 수만 송이의 국화꽃이 만발하는 그 질마재 아닌가.
질마재는 고개 모양이 ‘길마(수레를 끌 때 말이나 소 등에 안장같이 얹는 도구. 질마는 구개음화가 안 된 상태)’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질마재는 수천 년 동안 이 지역 사람들이 정읍이나 장성으로 소금을 팔러 나갈 때 이용하던 길이다. 동시에 미당이 서울로 길을 떠날 때 넘었던 고갯길이다.
소요산 소요사를 지나쳐 질마재에 올라섰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휙 하니 불어왔다. 저 멀리 변산반도를 마주보며 바닷가에 넓게 형성된 갯벌이 보였다. 바다와 접한 고창은 전형적 만(灣)의 형태다. 그 바닷바람으로 시적 영감을 얻은 미당은 주옥같은 시를 많이 남겼다.
시문학관에 들러 그의 작품을 죽 둘러봤다. 문학관 계단 올라가는 벽엔 특이한 그림이 걸려 있다. 세계의 산 그림들이다. 웬 산 그림인지 궁금했는데, 미당은 말기에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해 세계의 유명 산 이름과 높이를 줄줄 외웠다고 한다.
주변에 있는 국화는 9월 말, 10월 초라 아직 계절이 이른지 꽃봉오리조차 보여주질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발길을 돌렸다.
동행한 김동식 해설가는 “고창은 겨울과 초봄엔 선운사 동백, 여름 해수욕장과 복분자, 초가을 꽃무릇(상사화), 늦가을 국화와 단풍, 계절에 상관없는 고인돌 등 사계절 내내 즐기고 볼거리가 풍성한 지역”이라고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거기에 풍천장어까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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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용이 바위를 뚫고 지나갔다는 선운산에 있는 용바위. 2 지난 9월 22일 국가문화재명승으로 지정된 선운산. 3 선운사 일주문과 대웅전 사이에 있는 꽃무릇 군락지. 길 옆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고 있다. 4 질마재 길 옆에 있는 돌무더기에 돌을 얹고 있는 김동식 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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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염 부처님께 공양하러 가던 길
민물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좌치나루터에 도착했다. 백로, 두루미, 왜가리 등이 날갯짓을 했다. 아름답고 우아한 풍경이다. 그러나 나루터에 있어야 할 뱃사공은 없고 나룻배 한 척만 덩그러니 있다. 한때 고창 서부와 영광 법성포 사람들이 넘나들던 교통의 요충지였으나 22번 국도가 확포장되면서 승용차가 늘고, 급기야 1995년 영선교가 건설되면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1980년대까지 주변에 주막이 있었으며 미당, 인촌 등과 시인묵객들이 자주 애용했다고 한다. 시대에 밀려난 처량한 모습이다. 이것도 우리의 사라지는 옛길이다. 정취 있게 되살아난 좌치나루터를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마지막 코스인 1500년 화염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선운산 길이다. 1400여 년 전 검단선사가 선운사를 창건할 즈음 선운산 계곡에 많은 도적이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고 한다. 검단선사가 이들을 제압하고 불로 소금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에 도적들은 양민으로 개과천선한 뒤 마을을 형성해 부유한 생활을 영위했고, 이들이 검단선사의 은혜를 못 잊어 매년 보은염을 부처님께 공양했다. 그 보은염을 부처님께 공양하러 가던 길이 지금 걷는 이 길이다.
선운산 들머리인 연천마을에 있는 느티나무는 고창에서 가장 크고 오래됐다. 나무 밑동만 하더라도 성인 10명이 둘러쌀 정도의 둘레다. 이곳부터 산길로 이어진다. 곧이어 참당암 녹차밭이 나왔다. 희미한 안개가 서린 듯한 녹차밭과 반짝이는 찻잎이 잘 어울려 운치를 자아냈다. 연화봉, 소리봉, 낙조대를 거쳐 병풍바위에 이르렀다. 저 아래 도솔암과 바위 틈에 있는 듯한 도솔천 내원궁, 도솔암 마애불, 도솔계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난 9월 말 국가문화재명승으로 지정된 선운산이다. 맞은편 거대한 암벽엔 마애석불이 바라보고 있다. 20m는 족히 될 듯싶었다. 주위엔 울창한 숲이다. 단풍 시즌이 되면 정말 온 산을 뻘겋게 물들일 것 같았다. 도솔암을 거쳐 선운사로 내려왔다. 선운사 뒤쪽 500년 이상 된 동백나무는 천연기념물이다. 꽃은 없어도 그 규모가 장관이다. 꽃이 없을 때도 이 정도인데, 만발했을 때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꼭 다시 한 번 찾을 것을 유혹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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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창읍성 위로 주민들이 걷고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길이다.
선운사에는 세 가지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동백나무와 관광단지로 조금 내려가면 나오는 장사송, 그리고 관광단지 바로 옆에 있는 송악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그에 버금가는 나무가 또 있다. 바로 꽃무릇, 일명 상사화다. 잎과 꽃이 절대로 같이 피지 않아 서로 생각만 한다고 해서 상사화라 붙여졌다.
선운사에서 관광단지로 내려가는 길은 은행나무와 왕벚꽃나무, 꽃무릇이 지천에 늘렸다. 다양한 수종에 이름 모를 야생화도 더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숲길이 또 있을까 싶다.
걷는 행위는 목적이 아닌 그 과정 자체에 몰입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기예찬>에서 “정신적인 시련은 걷기라는 육체적 시련을 통해 치료할 수 있다”고 극찬했다. 그는 “걷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다 손에 잡을 수 있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불구불한 길을,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길을 다듬어간다”고 했다.
고창의 구불구불한 옛길은 시대를 거듭나 고인돌을 말하고, 복분자를 말하고, 질마재를 말하고, 선운산을 말하며 고창의 내면을 다듬어 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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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문화관광해설사 김동식씨
“문헌 참고하고 전문가·마을 노인 의견 수렴해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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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모든 것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아직 완성된 길은 아니고요. 군데군데 도로로 연결되는 길은 자전거를 무료로 빌려 운영하는 방법과 아예 산길이나 인도로 새로운 길을 내는 방법 등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고창 문화관광해설사 겸 숲해설가, 등산안내인 자격을 갖고 있는 김동식(60·사진)씨는 지난 1년간 고창의 옛길을 다시 복원하기 위해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정확한 옛길을 만들기 위해 문헌을 참고하고 전문가와 마을 노인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또 실제 사람이 다닐 만한지 직접 수차례 왕복하는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고창의 모든 문화와 역사를 담을 수 있었다.
“고창은 정말 풍부하고 자부심이 대단한 고장입니다. 풍천장어, 복분자, 참게, 꽃게 등 민물과 바닷물이 접해 먹을거리가 다양하고, 일제강점기 때 곡창을 수탈하지 못하도록 길을 내지 못하게 막았던 지역입니다. 그래서 일본으로 방출될 곡식을 지켜냈던 것이죠. 거기에 인심까지 후합니다.”
후덕한 인상의 김동식씨는 대학 산악부 출신에 전직 교장이었다. 김씨는 대학 졸업 후 가진 첫 직장이 농약회사였다. 대학교 때 획득한 농촌지도사 지도직으로 취직한 농약회사에서 연구직으로 근무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영업직으로 발령이 났다. 술을 전혀 못하는 체질상 영업직은 한마디로 ‘고문’이었다. 1년 만에 사표를 내고 나와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대도시 전주에서 근무하다 자원하여 1978년 고향 고창 영신고로 자리를 옮겼다.
영신고로 부임하자마자 등산부를 만들었다. 시골 학교에서 공부에 마음을 두지 못한 학생들을 모아 산으로 데리고 가 호연지기를 키울 의도였다. 수학여행도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교장에게 건의해 등산 위주로 계획을 세웠다. 여러 모로 반응이 좋았다. 산에 갔다 온 학생들은 피곤해서 그냥 자느라 문제가 생길 틈이 없었다. 이때 키운 대표적인 학생이 최오순이라고 자랑했다. 지현옥 등과 함께 에베레스트를 초등한 한국의 대표적 여성 산악인 중의 한 명이다.
김 해설사는 대학시절 산악회장을 맡기 직전 선배가 “회장직을 목에 걸지 말고 발목에 차라”고 한 교훈이 아직까지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30여 년의 교직생활 동안 매로 다스린 학생은 단 둘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일을 솔선수범하며 학생들에게는 친구 같은 교사로 다가서니 매를 들 일이 없었다. 고창에서만 14년간 교사, 8년간 교감, 8년간 교장직을 맡았다. 지금도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김 교장 선생님’ ‘김 교장’ 등으로 부른다.
“문화관광해설사를 제2의 천직으로 여기며 고창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할 겁니다. 고창의 역사는 알면 알수록 재미가 쏠쏠한 그런 지역입니다. 와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질마재 100리 길 탐방 가이드
완주는 최소 2박3일 잡아야…원하는 구간만 끊어서 할 수도
‘고인돌과 질마재 100리 길’은 총 4구간, 43.7㎞로 이뤄져 종주하기엔 조금 무리일 수 있다. 며칠 묶으며 구간을 나눠서 갈 수 있지만 여유가 없으면 중간에 가고 싶은 구간만 끊어서 가도 상관없다. 완주하려면 최소 2박3일은 잡아야 한다.
고창읍에서 승용차로 1구간 출발지점인 고인돌박물관까지는 불과 10분 남짓 걸린다. 고인돌박물관에는 대형 주차장이 있어 차를 두기에도 편리하다.
고인돌박물관에 차를 두고 출발해 선운사 입구나 미당 시문학관까지 갔으면 택시를 부를 수밖에 없다. 콜택시 비용은 선운사에서 2만 원, 시문학관에서 2만5,000원 정도. 문의 063-564-3822, 080-564-6200.
그 외에 고창 옛길이나 관광 관련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김동식 문화관광해설사(010-5650-6145)나 고창문화원(063-564-2340), 고창군 문화관광과(063-560-2456), 고창 군내버스터미널(063-564-3943), 고창 직행버스터미널(063-563-3388)로 문의.
>>교통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IC에서 고인돌박물관까지는 20분도 채 안 걸린다. 이정표가 워낙 눈에 띄게 표시돼 있어 내비게이션 없이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호남고속도로를 탔을 경우엔 정읍IC에서 빠져 22번 국도를 직진하면 된다. 22번 국도는 선운산도립공원까지 이어지며, 고인돌박물관 바로 옆을 지난다.
서울~고창=고속버스 40분 간격으로 하루 16회 운행. 3시간30분 소요.
고창터미널~고인돌박물관=군내버스 수시 운행. 700원. 택시 7,000원.
>>숙박
선운사 관광단지와 고창읍내에는 숙박 장소가 많다. 고창읍내에 군 지정업소로 아리랑모텔(063-561-5595), 가든장여관(063-564-1100) 등이 있고, 선운사에는 선운산관광호텔(063-561-3377), 유스호스텔(063-561-3333) 등이 있다. 2구간 끝 지점 근처에는 동원모텔(063-561-3372, 010-3977-3818)이 있어 옛길 순례 중 이용할 만하다.
>>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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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구간이 끝나는 지점에 강나루 풍천장어식당(063-561-5592)이 있다. 문화관광해설사 김동식씨의 옛 제자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가격은 1만6,000~1만8,000원 선. 셀프는 1만2,000원 선. 셀프는 고기를 받아와 본인이 직접 구워야 한다. 구울 때도 숯불이나 옥수수 등을 다양하게 사용한다. 또 다른 별미인 꽃게정식과 참게탕이 있다. 수궁회관(063-564-5035)의 꽃게정식은 맛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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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을 찾아서] 다산유배길
야생녹차, 동백림, 철새도래지… 자연이 주는 무한 감동의 연속
‘뿌리의 길’ 거쳐 다산초당~백련사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선에 꼽혀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로 꼽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200년이란 세월을 거슬러 현대에 그 사상과 학문이 다시 태어나고 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인 실용학문과 그의 방대한 사상, 엄청난 저술 등이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다닌 길도 그의 사상을 담아 길 위에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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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백나무 숲 속에서 윤영선씨와 강진 문화관광해설사 3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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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저술과 사상, 그 자체만으로도 당연히 재조명되어야 하지만 그가 저술할 당시 유배 중이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다. 만약 그가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그 방대한 저술을 남길 수 있었을까 하는 점에서는 오히려 역설적이다. 강진에서의 18년 유배생활 동안 그는 500여 권의 책을 남겼다. 정치, 경제, 철학, 지리 등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정조의 총애를 받고 잘 나가던 관리였던 다산이 정조의 승하 직후인 순조 1년(1801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 때 서학과의 관련 혐의로 경상도를 거쳐 강진으로 유배됐다. 정조대왕을 받들어 수원성을 설계, 축성하고 천주교 관련자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극심한 당파로 그의 공로는 모두 사라지고, 반대파들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그의 형 정약종은 참수형을 당하고, 큰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그는 강진으로 유배를 떠났다. 누나의 남편인 우리나라 최초의 신자 이승훈도 참수형에 처해졌다.
돌아올 기약도 없이 떠난 그의 첫 유배지가 강진 읍내 주막이다. 당시 유배자에게는 지역만 정해주고 따로 거처는 마련해주지 않았다. 반기는 이 하나 없는 강진의 주막에서 다산은 상심의 세월을 술로 지새웠다.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가다듬고 그의 거처를 ‘네 가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지키라’는 뜻의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붙이고, 1802년 가을쯤부터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서당을 개설했다. 다산의 첫 제자 황상을 시작으로 강진읍 6제자와 다산초당 18제자 등이 이후 속속 그의 문하에 들어와 수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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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길에 야생녹차밭이 푸른 빛깔을 뽐내고 있다. (아래)강진읍에서 만덕산으로 올라가기 전 주택가 끝자락에 있는 탱자나무 울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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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죽 뻗은 두충나무 사이로 길 연결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으로 1801년 11월 22일~1805년 10월 8일의 약 4년을 주막에서 보낸 다산은 후학을 가르치는 유배 온 실학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당시 백련사 주지 혜장법사를 만나게 된다. 혜장은 다산의 깊은 학문에 반하여 ‘정대부’라 부르며 존경하게 되었고, 다산은 그의 도움으로 강진읍 뒷산에 위치한 보은산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1806년 8월 30일까지 1년 가까이 혜장법사와 학문적 교류를 돈독히 다졌다.
강진읍에 거주한 제자 이학래는 그의 스승이 산중에서 혼자 쓸쓸히 지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의 집으로 오실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다산은 1806년 9월 1일 제자 집으로 옮겨 후학을 가르치는 데 더욱 매진하게 된다. 이학래의 집에는 1807년 12월 30일까지 기거했다.
이듬해 제자들과 그의 학문적 깊이를 높이 산 지인, 특히 윤씨들이 탐진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귤동마을 만덕산 자락에 다산초당을 마련했다. 그의 형 정약전이 유배 간 흑산도도 맑은 날이면 보이는 곳이었다. 다산은 여기서 유배생활이 끝날 때까지 10여 년간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수많은 저서를 이때 쏟아냈다. 불행과 절망의 늪에서도 절대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던 다산의 인생관이 있었기에 오늘의 ‘위대한 사상가’ 다산이 존재한 것이다.
오늘의 다산은 ‘다산유배길’로 다시 태어났다. 그가 다니던 길, 즉 강진 다산수련원에서 다산초당~보은산 보은산방까지 다산의 사상을 녹여내는 길이 재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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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강진 문화관광해설사 박선덕씨가 울퉁불퉁한 동백나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2.보은산방 가는 만덕산 등산로에서 만난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고 있다. 3.백련사 내려가는 길은 12월 초순에도 활짝 핀 동백꽃이 떨어져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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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은 다산수련원이다. 강진군에서 다산의 실용주의 사상과 실사구시 정신을 널리 알리고, 배우고, 닦을 목적으로 지난 2005년 개관했다. 2007년 9월부터 광주YMCA에서 위탁운영하고 있다. 다산수련원은 널찍한 주차장에 다산유물관까지 갖추고 있어 출발지점으로 안성맞춤이다.
다산수련원 바로 옆에서는 10년 전 조성한 두충나무 숲 사이로 나 있는 길이 다산수련원과 다산초당 가는 길로 연결된다. 껍질을 벗겨 한약재로 쓰는 나무가 바로 두충나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산이 밀려들어와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그냥 방치한 게 숲을 이루게 됐다고 한다. 마치 버드나무 같이 죽죽 뻗은 나무들이 아름답게 늘어서 있다. 이 숲으로 다산 유배길은 처음부터 탐방객을 매료시켰다.
길은 다산초당으로 가는 만덕산 등산로와 연결됐다. 숲이 우거져 있고, 나무 뿌리들이 땅 위에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길이다. 정호승 시인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대나무밭에서나 보던 땅 위로 솟은 뿌리들을 소나무 숲에서도 볼 수 있는 길이다. 기묘한 모습이다.
다산초당에는 다산의 정취가 묻은 3개의 길이 있다. 그 하나가 지금 걷고 있는 ‘뿌리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다산초당의 동암을 지나 천일각 왼편으로 나 있는 ‘백련사 가는 길’, 다른 하나가 다산의 제자 윤종진의 묘 앞에 나 있는 ‘오솔길’이다. 오솔길과 뿌리의 길은 바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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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장스님과 산책하며 학문적 교감 나눈 듯
뿌리의 길을 지나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산초당이 모습을 보였다. 한국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10년 동안 지냈던 집이다. 강진에서 4번이나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마지막으로 묵었던 곳이다. 제자들과 학문의 깊이를 더했고, 학문적으로도 집대성한 곳이기도 하다.
원래 다산초당은 다산의 외가인 귤동마을 윤취서에 의해 건립된 해남 윤씨의 산정(山亭)이었다. 그러다 다산이 기거하면서 만덕산 기슭에 자생하는 녹차들을 보고‘다산(茶山)’이란 호를 붙였다. 다산은 원래 이곳의 고유지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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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다산초당에 윤영선씨와 강진 문화관광해설사 박선덕씨, 위동연씨, 윤동옥씨(왼쪽부터) 등이 앉아 있다. (아래)백련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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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엔 본채인 다산초당과 다산 선생이 거처했던 동암, 제자들이 유숙했던 서암으로 구성돼 있다. 다산초당에는 다산이 남긴 흔적 가운데 4개를 꼽은 다산4경이 있다. 그 1경이 ‘丁石(정석)’이다. 초당 뒤꼍 커다란 바위에 다산이 직접 새긴 글이다. 자신의 성(姓)에 돌 석(石)자 한 자만을 새겨 군더더기 없는 깔끔하고 강인한 그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는 듯했다. 2경은 다산이 직접 수맥을 잡아 팠다는 ‘약천(藥泉)’이라는 샘이다.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 이 샘물은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다산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샘은 있지만 먹을 수 없을 정도다.
3경은 차를 끓일 때 사용했다는 마당에 있는 평평한 돌인 ‘다조(茶竈)’. 차를 끊이는 일종의 부뚜막이었다. 4경이 초당 옆에 있는 연못인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바닷가에 있는 반들반들한 돌을 주워 봉우리를 쌓아 석가산이라 했고, 그 주변 연못엔 잉어를 키웠다. 다산은 자라는 잉어를 보고 날씨를 예측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반들반들한 돌은 없어지고 그냥 볼품없는 돌만 남아 세월의 흔적을 대변하고 있었다.
바로 옆엔 천일각이란 정자가 있다. 다산이 그의 형 정약전이 유배 간 흑산도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없었던 정자였지만 다산의 당시 심정을 회상하며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건립했다.
이제부터 백련사 가는 길이다. 다산유배길에서 만날 수 있는 세 가지 길 중에서 다산의 체취를 가장 짙게 느낄 수 있다.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던 통로였다. 1㎞가 채 안 되는 거리에 야생 녹차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숲을 만날 수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길이기도 하다.
이 아름다운 길을 두 사람이 오가면서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동백과 야생녹차,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오가는 길 위의 아름다운 자연에 흠뻑 젖어 두 선인은 분명 선문답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으리라. 그리고 다산 스스로 학문의 깊이를 더했을 그런 산책로였을 것이다. 묘하게도 백련사는 백련결사로 유명한 고려시대 불교 개혁운동의 본산이었던 곳이며, 혜장스님은 그 백련사의 주지였다.
야생녹차밭을 지나 대나무숲, 사스래나무 등이 등산로 옆을 지키고 있었다. 이 길은 녹차와 대나무 등으로 인해 사철 내내 푸를 것 같았다. 야생녹차는 이미 관목으로 자리 잡은 숲의 터줏대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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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다산초당에 걸려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영정. 2.다산유배길이 시작되는 다산수련원 바로 옆에는 죽죽 뻗은 두충나무 사이로 길이 나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3.시인 정호승이 다산초당 가는 길에 땅 위로 뿌리가 솟은 모양을 보고 ‘뿌리의 길’이라고 이름 붙인 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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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즈려 밟는 백련사 가는 길
드디어 1962년 12월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림에 도착했다. 3㏊ 이상에 달하는 동백림의 수목들은 300~500년 이상 된 것들로, 일일이 번호를 붙여 관리하고 있었다. 일설에는 꽃이 핀 채로 100일, 꽃이 떨어진 채 100일이라고 해서 동백이라 했다고도 전한다. 실제로 100일이 안 될지는 몰라도 핀 꽃이나 떨어진 꽃이 상당히 오래가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원래 늦겨울이나 이른 봄에 꽃을 피우지만 요즘은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초겨울에도 동백꽃을 쉽게 볼 수 있다.
12월 초 백련사의 동백나무들이 잔뜩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을 피우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柏), 추백(秋柏), 동백(冬柏)으로 나누기도 한다.
1500여 그루에 이르는 동백나무는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미끈하게 잘생긴 동백부터 울퉁불퉁한 동백까지 동백나무의 모든 부분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나무는 다섯 개의 가지가 영락없이 손바닥 같았다. 동백손바닥나무라 이름 붙였다. 큰 줄기에 울퉁불퉁한 동백은 상처 난 부위를 스스로 아물게 하기 위해 내뿜은 수액이 오랜 세월 굳어져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기묘한 모양이 나름대로 멋을 내고 있었다. 주변에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등도 함께 자라고 있어 운치를 더했다.
백련사 내려가는 길도 가로수가 동백이다. 낙화한 꽃들로 길은 완전 꽃길로 변했다. 마치 소월의 ‘진달래’와 마찬가지로 동백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는’ 길이었다. 언제 이런 길을 다시 밟아볼 수 있겠나. 감동의 연속이었다.
또 다른 감동을 만나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다산이 다산초당에 오기 전 8년 동안 지냈던 세 장소를 찾아가기 위해 강진읍으로 간다. 옛날엔 다산초당에서 만덕산을 거쳐 보은산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강진읍 주막으로,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갔겠지만 1900년대 일제가 탐진강 갯벌을 매립한 이후 강둑길이 생기고 신작로가 개통되며 산이 잘려 나갔다. 매립된 땅은 농토로 변했고 둑을 막아 강물의 범람을 막았다. 그 강둑길로 걸었다.
탐진강 하류는 밀물 때는 남해 바닷물이 둑 상단에까지 찰 정도로 들어오지만 썰물 때는 수만 ㏊의 개펄이 형성돼 철새들의 낙원으로 변한다. 천연기념물 제201호인 고니와 청둥오리, 재두루미들이 저마다 무리지어 날갯짓을 하며 눈길을 끌었다. 정작 눈길을 주면 놀라서 날아갔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니 그림보다 더 한가롭고 고즈넉하며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 갯벌이 강진읍 주민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백합과 대합, 꼬막, 키조개, 망둥어, 바지락, 갯지렁이 등 각종 어패류들의 서식지다. 이들이 무한 서식하고 있으니 철새들이 매년 풍부한 먹잇감을 찾아 이곳에서 겨울을 나는 것이다.
강둑길은 2㎞ 가량 된다. 찬바람이 온몸을 움츠리게 했지만 겨울의 정취는 맘껏 느낄 수 있었다. 둑길 끝자락에는 대규모 갈대밭이 산들거려 겨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조금 전까지 만끽했던 다산과 백련사와 동백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탐진강의 갯벌과 겨울 철새, 그리고 강둑길과 갈대, 찬바람이 주는 색다른 감동이 다가왔다. 자연이 주는 무한 감동의 장면들이다.
이젠 강진읍이다. 주택으로 인해 아직 정비되지 않은 길도 있었지만 다산수련원 윤영선 위원 등이 50m 단위로 화살표나 다산유배길 이정표를 꼬박꼬박 붙여 안내하고 있었다.
강진읍에서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곳이 다산이 1년 남짓 기거했던 제자 이학래의 집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표시도 못하고 있다. 읍내의 한 폐가터에 제자 이학래의 집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동행한 윤영선 운영위원이 전했다. 다소 무미건조한 읍내길이지만 다산의 흔적을 찾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되새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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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과 갈대 어우러지는 강둑길로 약 2㎞
새로 단장한 초가집이 객들을 맞았다. 사의재 주막집이다. 과거 같으면 영락없는 주막으로 보였다. 이곳이 바로 다산이 유배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다. 오갈 데 없는 다산을 받아들여 한국 최고의 사상가로 거듭나게 한 주모의 집이기도 하다. 주모는 다산에게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 주모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멸문지화 당하고 귀양 온 관리를 모두 후환이 두려워 문전박대하는 현실에서 무얼 보고 그를 받아들였는지 궁금했다. 한편의 영화 소재다. 아마 몇 년 후에 고증을 거쳐 ‘다산을 키운 주모’나 ‘다산의 주모’를 주제로 한 영화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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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와서 처음으로 묶었던 주막. 그 뒤채엔 사의재가 있다. 2.영랑생가 바로 위에 있는 옛 양반 자제들이 공부하던 서당인 금서당. 3.고성사 3층 석탑과 대웅전. 바로 그 오른쪽에 다산이 1년 가까이 기거했던 보은산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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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 뒤채엔 ‘사의재’란 간판이 걸려 있다. 유배 초기 술로서 시름을 달래다가 주모의 닥달로 곧바로 마음을 다잡고 자신의 거처를 사의재라 하고 학문 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한 곳이다.
사의(四宜)는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를 말한다. 어쩌면 상심과 시련을 겪은 사람만이 알고 쓸 수 있는 그런 교훈이다. 다산 역시 얼마나 상심이 컸겠는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사의재였다. 다산은 나중에 “내가 강진에 귀양 오기를 잘했다. 여기 오지 않았다면 어찌 사회 모순과 병리를 다 볼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강진의 다산유배지 네 곳 중에 세 곳을 거쳤다. 이젠 보은산 고성사 보은산방만 남았다. 백련사 주지로 있던 혜장스님이 다산을 보은산방으로 초청한 곳이다. 강진읍 뒷산인 보은산 등산로로 올랐다. 평일인데도 강진 주민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산이다.
보은산 등산로를 따라 가다가 정상 우두령 가는 길과 고성사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당연히 고성사 가는 방향이다. 발길을 조금 옮기니 남녀공용 샤워장이 나왔다. 남자들이야 시도 때도 없이 이용하겠지만 더운 여름날 오전엔 일정시간을 정해 여자들만 이용한다고 했다. 물론 망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무척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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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탐진강 개펄에서 큰 고니들이 뒤뚱뒤뚱 걸으며 먹이를 구하고 있다. 2.썰물이 되자 탐진강의 드넓은 개펄이 모습을 드러내 저 멀리 장흥 방향 산 능선들과 잘 어울렸다. 3.강진 문화관광해설사 3명이 남포다리에 앉아 탐진강과 그 옆에 산들거리는 갈대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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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읍은 풍수적으로 황소가 누워 있는 ‘와우(臥牛)’ 형국이라고 한다. 강진엔 실제로 소와 관련된 얘기가 많다. 보은산 정상인 우두령이 소의 머리에 해당된다. 소의 목에는 방울이 걸려 울리는데, 이를 어찌 해결할 것인가 고민하다 보은산 중턱에 고성사를 지었다고 한다. 고성사에서 울리는 범종이 소의 목에 있는 워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풍수는 이렇게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실제로 많다.
고성사는 원래 조그만 암자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중건을 거듭해서 대웅전을 포함해 구색을 다 갖췄다. 대웅전과 칠성각 건너 보은산방이 있다. 지금은 스님들의 요사(寮舍)로 사용한다. 다산이 1년 가까이 묶으며 학문의 깊이를 다지면서, 한편으로는 혜장법사와 학문적 교류도 활발히 했던 그곳이다. 여기서도 다산의 체취가 진하게 다가왔다. 마치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조선시대 강진으로 유배 간 사람은 정약용을 포함해 총 90여 명이었다. 강진에서 생가를 복원하고 그의 뜻을 기리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다산 정약용뿐이다. 그의 위대한 사상은 이미 상당히 연구되고 있지만 그의 불굴의 정신도 또한 새롭게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하산길로 내려왔다.
뿐만 아니라 한 명의 위대한 사상가를 사심 없이 돌본 고마운 주모와 그녀의 딸, 강진 6제자와 초당 18제자가 머릿속에 맴돈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다산이 있지 않을까. 다산은 지금도 그들과 함께 다산유배길에서 숨 쉬고 있다. 그 숨소리를 들어보려면 다산유배길로 가보라. 그의 불굴의 정신과 실학사상에 대한 집념의 맥박이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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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유배길 탐방가이드
다산수련원을 출발점으로 잡는 게 편리
다산의 위대한 학문은 책을 통해서 많이 접할 수 있지만 그의 삶의 체취가 묻어나는 경험을 하기란 쉽지 않다. 강진의 다산유배길은 걷는 길이면서도 단순한 걷기 차원이 아닌 다산의 위대한 사상과 불굴의 정신을 체험하는 좋은 길이다.
현재 가장 편리하고 좋은 방법은 다산수련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다산수련원엔 대형 무료주차장이 있어 주차하기도 편리하고 주변 숙소와 식당도 몇 군데 있다. 한옥으로 지은 주변 숙소에서 우아한 밤을 지낼 수 있다.
다산수련원에서 출발해 다산초당과 백련사, 동백숲을 거쳐 철새도래지~제자 이학래 집터~사의재~영랑생가~보은산~고성사 보은산방은 약 17㎞다. 다산수련원에서 아침에 출발하면 점심은 강진읍에서 해결하고, 사의재와 영랑생가를 둘러볼 수 있지만 당일로 돌아보기엔 조금 긴 거리다.
굳이 당일에 돌아보기를 원한다면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는 걷고 철새도래지와 강진읍은 차로 지나치면서 돌아보고 바로 사의재로 가는 방법도 있다. 그럴 경우 2~3시간은 단축할 수 있다.
강진읍에서 다산수련원까지는 택시를 타더라도 1만 원 정액제로 받는다. 강진은 택시요금 정액제를 실시하고 있다. 실제로 미터기로 달려보니 1만1,000원 정도 나왔다. 시간은 10분 남짓. 강진읍에서 군내버스로 다산수련원까지는 하루 11회 운행하며, 요금은 1,000원이다. 소요시간은 20분 가량.
개인택시조합 061-434-6161, 신진택시 061-433-9100, 광신택시 061-434-3141.
- ▶ 찾아가려면
수도권에서는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광주에서 제2순환도로로 갈아타서 무안광주고속도로로 간다. 함평, 나주 방면으로 빠져 나와 2번 국도를 타고 내려온다. 강진읍 남포IC에서 18번 국도로 빠진다. 잠시 18번 국도를 탄 후 해안도로를 따라 10여 분 내려가면 다산수련원과 다산유물전시관 간판이 나온다. 서해안고속도로로 갈 경우 목포까지 달린 다음, 2번 국도를 통해 곧장 가서 18번 국도로 갈아타서 영암을 거쳐 강진에 도착할 수 있다.
고속버스는 서울에서 강진까지 하루 6회 운행하며 철도는 없다.
▶ 숙박시설
가장 좋은 출발지점인 다산수련원(061-430-3786)에서도 숙박할 수 있다. 비용도 2인 기준 1만8,000원으로 저렴하나 평일엔 이용객이 적을 경우 운영하지 않는 단점이 있다. 다산수련원 측도 평일에 문의가 오면 바로 옆에 있는 민박으로 안내한다. 들꽃민박 061-432-9080, 알뜰수퍼민박 061-434-8487, 다향소축 061-432-0360, 다산촌명가 061-433-5555
▶ 별미
강진의 별미는 넓은 개펄에서 잡히는 망둥어 요리를 빼놓을 수 없다. 망둥어는 민물과 바닷물이 접하는 어느 지역에서나 잡히지만 강진읍에 있는 동해회관(061-433-1180)의 주인은 개펄에서 40여 년째 손수 망둥어를 잡는 솜씨로 유명하다. 이미 방송에도 여러 번 소개된 바 있다. 망둥어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자, 일사천리로 20여 분간 거침이 없었다. 짱뚱어라고도 하며, 탕과 구이(사진) 전부 맛볼 수 있다. 그 외 전복나라 061-433-8155, 바지락회와 한정식 전문인 부성회관 061-434-3816.
다산유배길 조성 윤영선씨
“수렵기간 산길 찾느라 헤매다 멧돼지로 오인할까 조마조마”
“다산의 체취가 발견되는 길이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철새도래지와 연결시키기 위해 도로나 강둑길로 난 구간도 있으나 편안한 흙길이나 산길을 계속 찾을 것입니다.”
다산유배길의 실무 책임을 맡고 있는 윤영선(44)씨의 말이다. 지난해 6월 ‘다산유배길’이 문화부 시범사업으로 선정되자 지역신문 기자와 강진문화원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던 윤씨가 길 조성 최적임자로 낙점됐다. 윤씨는 평소 ‘탐진강 원류를 찾아서’ ‘강진의 문화유적’과 같은 애향과 관련된 기획 위주로 기사를 자주 써 관련자들의 눈에 바로 떠올랐던 것이다.
윤씨는 실제로 길 조성작업을 하면서도 강진에 대한 기사를 쓴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강진의 역사를 미리 공부했던 것이 길을 찾으면서 ‘아, 이 길이 바로 그 길이겠구나’하는 순간을 자주 느꼈습니다. 길 조성이 훨씬 부드럽고 수월하게 됐던 셈이죠. 이 일을 하다 보니 더욱 고향에 애정을 갖게 된 계기도 됐습니다.”
윤씨는 그래도 3명의 자문위원으로부터 조언을 톡톡히 받고 있다. 윤동옥 다산동호회장, 전갑홍 영암 기(氣)건강센터장, 최성일 도보문화연구소장 등 3명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을 통해 다산을 배우고, 도보문화를 배우고, 월출산의 기를 배우며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윤씨는 길을 찾으면서 위험한 고비도 몇 차례 넘기기도 했다. 수렵기간이 허용된 시기에 산에서 길을 찾느라 헤매고 있을 때 사냥꾼이 멧돼지로 오인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또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산 위에 우뚝 솟은 송전탑으로 방향감각을 잡아 마구잡이로 내려오기도 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됐지만 아직 완성된 길도 아니고 전체 구간이 완성되려면 한참 멀었다고 했다. 다산유배길만이 아니고 제대로 된 삼남대로를 연결시키는 게 그의 목표다.
“길은 역사를 말해주는 바로미터입니다. 다산유배길은 강진만의 역사를 말하지만 삼남대로는 호남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대변합니다. 강진의 작은 역사도 차근차근 쌓아가면 그게 바로 호남의 역사고, 우리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진한 애향심이 묻어 있는 그의 말이다.
- [옛길을 찾아서] 진도 삼별초의 길 - '또 하나의 고려' 건국한 삼별초 용장산성 길에서 다시 태어나다
군청선 역사공원 조성 계획…월 탐방객 수천 명에 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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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궐터가 층층이 있는 용장산성과 그 뒤로 능선을 따라 성곽이 둘러싸고 있다. 바로 아래로는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다.
‘진도, 또 하나의 고려(高麗)’라는 다큐멘터리를 몇 년 전 한 방송사에서 방영한 적이 있다. 고려가 몽고에 항복하자 이에 굴복하지 않고 따로 국가를 만들어 몽고에 항거해 장렬히 전사하며 우리 민족 최초의 자주적 저항운동을 벌인 삼별초의 활약을 조명한 내용이었다. 삼별초라고 하면 강화도에서 40년 가까이 저항한 사실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진도에서 웬 또 하나의 고려일까’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굵고 짧게’ 활약한 그들의 흔적을 용장산성의 길, 즉 삼별초의 길을 따라 살펴보면서 장렬하게 산화한 삼별초의 삶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자.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산물이다. 고려 조정을 장악한 최충헌과 그의 아들 최우가 무인정권 세력을 공고히 다지고 반대파들을 색출하기 위해 수도의 치안 유지란 명분으로 창설한 군사조직이자 특수부대가 바로 삼별초였다. 처음엔 야별초란 이름으로 야간순찰과 같은 공적인 임무를 동시에 수행했다.
야별초가 지방에도 파견되면서 점차 그 수가 늘어나 좌·우별초로 나뉘었다. 여기에 몽고군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도망 온 자들로 신의군이 구성되면서 이들과 합쳐 삼별초라 불리게 됐다. 삼별초의 출신 성분부터 몽고에 저항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무인정권의 각별한 배려 속에 삼별초 조직은 더욱 커졌고, 무인정권에 대한 충성심도 남달랐다.
삼별초는 무인정권 3대에 걸쳐 전성기를 누렸다. 삼별초를 창설한 최충헌과 그의 아들 최우, 또 그의 아들 최항. 이렇게 3대 동안 무인정권의 권력유지를 위한 하수인 노릇을 톡톡히 했다. 3대째 최항으로 인해 이후 삼별초가 진도에 근거지를 마련하는 결정적 단초가 마련된다.
고려 원종 11년(1270) 6월 1일,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대몽항쟁을 포기하고 항복을 선언하는 순간 삼별초는 반(反)개경정부·반몽고 노선을 표방하고 거사에 나섰다. 어쩌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저항이었는지 모른다. 나라는 몽고에 넘어갔고, 그들을 보호해줄 무인정권도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종결은 결국 그들의 주요 임무가 사라지는 것이고, 강화에서 항몽전쟁을 주도한 그들은 항복 후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내년부터 용장산성 궁궐 순차적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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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궁궐터에서 용장산성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조금 가파르지만 계단으로 잘 닦아 놓았다. 중간 평야지대에 용장산성 홍보관이 있다. 2 용장산성 성곽 위로 억새 군락지가 있다.
결국 그들은 삼별초 해산 조치에 맞서 왕족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새 정부를 세웠다. 배중손·노영희 등이 삼별초 군대와 재물을 1000여 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게 1270년 6월 3일의 일이다. 두 달 남짓 걸려 진도에 도착한 시점이 8월 19일. 진도는 그들의 새로운 거점이 되었다. <고려사> ‘반역 배중손전’에 삼별초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하고 있다.
“배중손이 야별초 지유(脂諭) 노영희 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고는, 사람을 시켜 나라 안에 외치기를 ‘몽고 군사가 크게 이르러 주민을 마구 죽여대니, 무릇 나라에 힘이 되고자 하는 이는 모두 격구장으로 모이라’고 했다. 잠깐 동안 나라 사람들이 크게 모여들었는데, 혹은 달아나거나 사방으로 흩어졌고, 다투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배중손은 고려 정부에서 보자면 반역지였다. 몽고에 항복하기를 거역하고 정부에 저항한 잔당 세력인 셈이다. 그러나 배중손의 입장에서 보자면 삼별초의 살길은 저항뿐이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야 우리 민족 자주와 자존이라는 명분으로 외세에 저항하다 목숨을 버리는 길이 가장 실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고려 조정의 반역 배중손 장군은 그렇게 진도에 새로운 세력을 구축했다.
삼별초가 진도를 새로운 거점으로 선택한 몇 가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선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만큼 제주도와 같이 본토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 되었다.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위치에 거점을 정해 지속적으로 세력을 과시해야만 했다. 동시에 적의 침입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운 지리적 위치에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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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장산성 정상에서 연륙교인 진도대교가 있는 명량해협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그 앞바다 위에 흰 종이처럼 떠 있는 게 조력발전소다.
본토와 진도 사이의 명량해협, 즉 울돌목은 조류의 유속이 시속 11㎞로 동양에서 가장 빠른 곳으로 꼽힌다. 오죽했으면 물 흐르는 소리가 노루가 우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노루목이라고도 불렸을까. 이순신 장군이 배 13척으로 조류의 흐름을 이용해 왜군의 배 수십 척을 무찌른 ‘3대 대첩’ 중 하나가 그곳이다. 해전에 약한 몽고군이 이곳을 통해 침입하지 못할 것이란 심리적 전술도 작용했다.
둘째, 진도는 <동국여지승람>에서 옥주(沃州)로 기록할 정도로 비옥한 농토와 넓은 평야가 있어 섬인데도 농업이 활발했다. 해산물도 풍부했다. 이는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서 장기간 항전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성곽 700m 복원하면서 등산로도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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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용장산성 터에 쌓여 있는 12세기 전후의 기와 조각들. (우)용장산성 주춧돌도 간혹 눈에 띈다.
셋째, 연안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에서 거둔 조곡의 수송선이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조곡선을 탈취하면서 삼별초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는 동시에 개경 정부의 재정을 압박하는 이중효과를 거둘 수 있는 지역이었다.
마지막으로 진도는 원래 무인정권의 기반이기도 했다. 최씨 무인정권의 3대 집정인 최충헌의 손자이자 최우의 아들인 최항이 승려로 출가해서 주지로 있던 절이 진도에 있었다. 최항은 승려가 되어 만전이란 법명으로,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위세를 믿고 권세를 누리며 횡포를 자행했다. 주민들의 원성이 너무 자자해서 조정에서 만전이 있는 절을 해체하라고 명할 정도였다. 절 이름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으나 아마 용장사일 가능성이 높고, 그 용장사의 규모가 방대해서 삼별초군이 진도로 내려갔을 때 그 절을 진지로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고서는 삼별초가 진도에 있었던 불과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그렇게 큰 용장산성을 축성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별초는 결과적으로 무인정권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런 군대였다.
용장산성은 성 안의 면적이 총 89만㎡(258만 평)이고, 둘레는 총 12.85㎞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곳을 근거로 삼별초는 급속히 세력을 확산해나갔다. 나주, 전주, 장흥, 마산, 김해, 동래, 밀양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11월 3일엔 제주를 함락했다. 가는 곳마다 백성의 호응을 얻으며 쉽게 지지를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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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원된 700m의 용장산성 길을 따라 걷고 있다.
무인정권을 보위하는 무력집단으로 출발했고, 농민봉기를 억압하는 데 앞장섰던 그들이 어떻게 농민과 지방세력들의 지지를 쉽게 이끌어냈는가에 대한 의문점도 남는다. 그들의 성향 자체만으로 볼 때 결코 농민들의 지지를 받을 세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달리 나왔다. 추측컨대 몽고에 대한 반감이 삼별초의 기존 활동에 대한 반감보다 훨씬 더 컸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감과 자주성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학자들의 정확한 규명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삼별초는 왕온을 황제로 옹립하고 몽고, 즉 원에 복속된 고려의 개경 정부보다 더 자주적인 정부임을 표방했다. 이것은 삼별초가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불과 수십 년 전에 일본에서 발견된 <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는 당시 일본 조정에서 작성한 메모에 가까운 외교문서로 ‘고려에서 보내온 의심 나는 몇 가지 사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1268년과 1271년에 고려에서 온 두 개의 외교문서가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전한다. 1268년 개경 정부에서 보낸 문서는 일본도 원나라에 항복해서 예를 갖추고, 그렇지 않을 땐 정벌에 나설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전한다. 반면 1271년의 경우 고려가 강화도를 버리고 진도로 천도했으며, 원나라, 즉 몽고가 일본을 침략하려고 하니 사전에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병력을 진도로 지원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게 바로 ‘진도, 또 하나의 고려’라고 하는 주요 근거가 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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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장산성 정상에서 맑은 하늘이 구름과 잘 어우러져 있다.
- 웅장한 궁궐 흔적도 없고 궁터만 남아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나 삼별초의 그 용장산성에 들어섰다. 웅장한 궁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궁터만 남았고, 저 멀리 산 위로 성곽이 보였다. 바닷바람이 살살 간지럽히며 속삭이는 듯했다.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 육지에서 느끼던 감촉과는 확실히 달랐다. 상쾌하다. 머리 위로는 푸르른 하늘이 온 세상을 덮고 있다. 역시 육지에서 항상 보던 것보다 훨씬 맑고 푸른 세상이다. 기분마저 상쾌해졌다.
진도군에서는 최근 용장산성 홍보관을 건립하고 고려 삼별초의 자주적인 대몽항쟁사를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부서진 성곽을 복원하고, 성곽 주변엔 등산로를 조성했다. 궁궐도 이르면 내년 행궁부터 건립하고 순차적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궁터와 성곽을 역사공원으로 조성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마침 용장산성으로 간부수련회를 온 은평구청 팀과 만났다. 신비의 바닷길 축제 기간 중이라 축제도 보고, 유적지도 탐방하는 그런 수련회라고 했다.
용장산성 입구엔 ‘사적 126호 용장산성’이라고 쓰인 커다란 안내판이 용장산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 용장산성에 오는 관광객과 탐방객이 비수기엔 한 달 평균 1000명, 성수기엔 3000~4000명에 이른다고 했다.
궁터의 흔적을 따라 올라갔다. 궁터는 계단식으로 층층이 궁궐이 있었던 흔적을 대변하고 있다. 용장산성 홍보관에 근무하는 진도군청 직원 서일윤씨는 “예산이 확정되는 대로 궁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예산만 내려오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홍보관에 있는 서씨와 군청 문화관광과에 있는 김민우씨가 용장산성길 답사에 동행했다.
궁터의 흔적은 썰렁했지만 그 역사성으로 인해 첫걸음부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1964년에 ‘사적’으로 지정됐지만 방치해 두다가 2000년대 들어 본격적인 발굴이 이뤄졌다. 부서진 기와 조각과 주춧돌 등이 곳곳에서 나왔다. 전부 12세기 전후 유물로 확인됐다.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한 여몽연합군은 다시는 이런 항쟁이 재발하지 않도록 뿌리 뽑고자 일벌백계 차원에서 삼별초의 근거지가 된 용장산성을 아예 흔적도 없이 완전히 초토화해버렸다. 수백 년 동안 사라졌던 그 흔적이 최근 ‘삼별초의 역사’로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
궁터 끝 지점에서 등산로가 시작됐다. 등산로 주변은 울창한 숲은 아니지만 다양한 수종을 보여줬다. 진도 군목인 후박나무가 궁터 끝 지점에서 방문객을 반갑게 맞았고, 진달래도 활짝 꽃을 피웠다. 군데군데 만개한 야생화도 군락을 이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동백나무와 측백나무도 맵시를 뽐내는 듯했다. 특히 군화(郡花)인 동백나무는 제법 큰 군락을 보여줬다. 자연적으로 자란 동백에 매년 조금씩 식목해서 면적을 넓히고 있다고 했다. 대나무, 팽나무, 오리나무, 참나무 등도 한창 새순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나무들이 건강한 숲을 이룬 모습이었다.
등산로 끝 지점인 동시에 좌우로 둘러싸인 성곽길에 도착했다. 성 위에서 용장산성 입구 격인 벽파진을 멀리서 둘러보니, 용장산성은 정말 천혜의 요새다. 삼면은 성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으로 트인 한 면은 동양 최대의 유속를 자랑하는 울돌목이다. 이만 한 요새도 없을 것 같다. 성곽의 높이도 2m에서 최대 4m까지 된다고 했다. 성벽 밖으로는 급경사다. 도저히 적이 침입하지 못할 정도로 가팔랐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삼별초군은 방심했고, 여몽연합군은 그 방심을 놓치지 않고 허를 찔렀다. 뿐만 아니라 여몽연합군의 많은 병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한마디로 중과부적이었다. 그 옛날 삼별초군의 비명과 아우성이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1271년 5월, 삼별초군 중 상당수 병력이 인근 남해안 일대에 나가 있는 사이 여몽연합군이 다수의 전함을 확보하는 등 대규모 군사를 조직해 기습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몇 차례 진도 함락에 실패한 여몽연합군은 중·좌·우익의 세 부대로 나누어 총공격했다. 공격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삼별초군은 정면의 벽파진을 향해 오는 연합군은 잘 막았으나 측면과 후방을 뚫고 들어오는 연합군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진도 삼별초를 조직한 지 10개월 만이었다. 용장산성은 함락되어 승화후 온왕과 배중손 장군은 죽임을 당하고 군사들도 지리멸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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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용장산성 홍보관 직원 서일윤씨가 원형대로 보존된 성곽의 높이를 가리키고 있다. (우)산성에서 내려와 임도로 접어들어 홍보관으로 돌아오고 있다.
홍보관에서 복원된 성곽 정상까지는 1.5㎞
▲ 1 최충헌의 손자 최항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용장사의 전경. 지금의 절은 최근에 창건됐다. 2 궁녀둠벙. 3 남도석성.
- 당시 <고려사절요>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3군이 진도를 토벌했다. 김방경은 흔도와 함께 중군을 거느리고 벽파정에서부터 들어가며, 희옹 및 홍다구는 좌군을 거느리고 장항에서부터 들어가고, 대장군 김석과 고을마는 우군을 거느리고 동면에서부터 들어가니 전함이 총 100여 척이었다. 적이 벽파정으로 모여 중군을 항거하려 했으나 좌군과 우군이 뚫어 완전히 괴멸했다.”
진도를 잃은 삼별초군은 김통정 장군의 지휘를 받아 제주도로 건너간 뒤 항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미 기세가 꺾인 뒤라 그도 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해 완전히 패망하게 된다. 이 땅의 삼별초 역사의 종언이다.
비명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 성곽 위에 서 있다. 주변을 한 번 죽 둘러봤다. 도저히 올라올 수 없을 것 같은 뒤 성벽을 타고 삼별초의 허를 찌른 여몽연합군의 전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한 번의 방심이 결국 운명을 단축한 것이다.
그 성벽을 지금 걷고 있다. 정상까지 복원된 상태다. 성벽 정상으로 가는 길은 조금 가팔랐지만 억새밭이 하늘거리며 맞았다. 이 억새들은 그때의 역사를 알고 있을까?
마침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성곽 정상으로 가는 길의 억새와 맑은 하늘이 잘 어우러진 한 편의 그림 같았다. 그림 속에서 역사와 자연에 취해 있었다.
정상은 GPS상으로 267m를 가리켰다. 용장산성 홍보관에서 출발한 지 1시간 만에 약 1.5㎞ 거리를 지나왔다. 사방이 확 트여 북쪽으로 연륙교인 진도대교와 울돌목(명량해협)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 잡은 조력발전소가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정상에서 동쪽으로 가는 성곽은 아직 복원이 안 된 상태다. 다시 갔던 길로 돌아와 서쪽으로 복원된 성곽을 따라 걸었다. 복원된 성곽은 총 700m. 성곽 바로 옆으로 조성된 호젓한 등산로가 성곽을 따라 나란히 나 있었다. 등산로 양쪽으로는 키 큰 나무들이 가로수같이 죽죽 뻗어 여름에도 그늘을 만들어줄 것 같다.
삼별초에 대한 평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군사정권 시절엔 ‘삼별초의 난’으로 불리다 지금은 ‘삼별초의 항쟁’으로 조금 순화된 상태다. 무인정권의 하수인으로 복잡한 배경을 간직한 채 출발했지만 우리 민족 최초의 자주적 항거였다는 사실 그 자체는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삼별초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다. ‘반역의 역사’와 ‘자주의 역사’는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일까? 용장산성의 길, 아니 진도 삼별초의 길을 걸으며 문득 생각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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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비의 바닷길.
- 삼별초와 관련된 진도의 유적
왕온의 묘·남도석성·궁녀둠벙·배중손 사당 등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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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화후 온왕의 묘.
진도에는 삼별초와 관련된 유적이 어느 곳보다 많다. 40년 가까이 항쟁했던 강화도보다 1년도 채 머물지 않은 진도에서 훨씬 더 많은 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아마 ‘고려의 또 다른 왕’을 옹립했고, 그와 관련된 흔적들 때문일 것이다.
먼저 왕온의 묘다. ‘진도, 또 하나의 고려’의 주인공이자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옹립된 승화후 온(溫)은 고려 8대 왕 현종의 직계로 알려져 있다. 당시 개경 정부의 왕이었던 원종과는 촌수로 따지면 16촌 정도 된다. 아주 먼 친척 같지만 고려 왕조는 근친혼을 했기 때문에 촌수가 얽히고 설켜 오히려 가까운 관계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형제들이 얽혀 내외종 6촌 정도 된다고 한다.
궁녀둠벙도 있다. 삼별초군이 패망하고 왕온이 죽임을 당하자 삼별초 궁녀들은 여몽연합군에 끌려가느니 왕의 뒤를 따르겠다며 둠벙에 몸을 던졌다. 둠벙은 물웅덩이 또는 저수지를 뜻하는 방언이다. 둠벙은 수심이 깊어 절굿공이를 넣으면 우수영 또는 금갑 앞바다로 나온다는 얘기도 전한다. 지금은 보잘것없는 조그만 연못 같은 저수지이지만 수많은 궁녀가 몸을 던진 호수로 비극적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바로 위에 궁녀둠벙을 내려다볼 수 있는 삼별초 정자가 있다.
용장산성과는 반대 방향에 떨어져 있는 남도석성은 사적 제127호로 지정된 삼별초의 유적이다. 배중손 장군이 삼별초군과 함께 최후를 맞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둘레 610m, 높이 4~6m의 석성으로 거의 원형이 보존돼 있다.
삼별초군을 진두지휘한 배중손 장군의 사당도 있다. <고려사>에서 배중손을 역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그의 출생과 후손에 대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그의 후손 상당수가 참변을 당했거나 숨어 지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에 대한 기록은 없을 것이다. ‘배중손 사당’에도 그의 위패만 모셔져 있을 뿐이다.
그 외에도 용장산성 앞쪽에 있었던 항구인 벽파정과 여몽연합군에 쫓겨 제주도로 피신할 때 거친 항구 금갑진에 있는 금갑산성 등이 삼별초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진도문화원 박주언 이사
진도 삼별초 기획의 주역…진도문화 연구에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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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엔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진도의 삼별초를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다큐멘터리 ‘진도, 또 하나의 고려’와 일본의 외교문서 <고려첩장불심조조>다. 이 두 부분에 모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사람이 박주언(朴柱彦·65)씨다.
박주언씨가 진도의 무형문화를 연구하면서 파악한 삼별초의 역사를 방송사 PD에게 한 번 보라고 건네주어 3부작으로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게 됐다. 그가 없었다면 진도의 삼별초는 역사 속에서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동경대 사료편찬실에서 <고려첩장불심조조>가 발견되자 동경대 교수는 그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당시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나 일본 상황에 대한 논문이었다. 알려진 주요 내용은 당시 일본은 삼별초가 아니었다면 몽고에 점령당했을 수도 있었다며 삼별초를 굉장히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도 박주언씨가 일본에 왔다 갔다 하면서 적극 나서 알렸다. 진도를 알리는 일이 그의 주요한 일이었다.
박씨는 원래 진도 토박이로 일찍부터 진도 문화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이미 1973년부터 월간 <진도> 편집장을 맡아 진도 연구를 시작했고, 이후 <진도사람들>을 창간하고 <예향진도> 편집인으로 일하며 ‘진도문화제’와 ‘진도학회’를 창설하는 등 진도와 관련된 일은 빠지지 않고 맡았다. 현재 진도문화원에 등재된 원장을 포함한 모든 이사 중 가장 오래된 이사이기도 하다.
지금도 향토사학자로 활동하며 자유기고를 하고 있고, 명량대첩제 이사, 진도문협회원, 예술공동체 소리가마 대표를 맡고 있다. 진도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공로를 인정받아 전남향토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진도 삼별초의 길 답사 가이드
진도홍보관에서 성곽까지 올라가는 길 조성 잘돼…원점회귀도 가능
진도홍보관에서 성곽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잘 조성돼 있다. 궁터로 가로질러 갈 수도 있고, 궁터 옆으로도 정돈된 길도 있다. 궁터도 사람들이 워낙 많이 다녀 길이 반질반질하게 다져져 있다. 궁터로 걸어 올라가면 삼별초의 역사가 떠올라 만감이 교차한다.
등산로는 외길이다. 가파른 길은 나무계단으로 올라가기 쉽게 해놓았다. 그 길을 따라 성곽까지는 1㎞ 남짓 된다. 용장산 정상의 복원된 동쪽 성곽까지 갔다 오면 총 1.6㎞ 정도다.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고, 북서쪽으로 700m 복원된 성곽을 따라가도 된다.
조금 더 걷고 싶다면 북서쪽 성곽을 따라 2㎞ 정도 가면 홍보관으로 빠지는 하산길이 있다. 리본이 하산길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 이 길은 잠시 산길과 연결되는데 불과 100m 가까이 내려가면 차가 다닐 수 있는 임도로 연결된다. 그 임도를 따라 계속 가면 홍보관이 바로 나온다. 이 거리는 총 5.9㎞ 정도로 3시간 내외가 걸려 한나절 등산과 유적탐방코스로 적격이다. 오전 9시에 출발하면 12시 전후로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
주변 볼거리
명승 신비의 바닷길 등 문화재 수두룩
진도는 삼별초 유적 외에 단일 지자체로 가장 많은 중요무형·유형문화재와 천연기념물을 갖고 있다.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는 강강술래(제8호, 보름날 달에 풍요를 기원하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집단가무), 남도들노래(제51호, 벼농사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 진도씻김굿(제72호, 죽은 이의 영혼을 천도하기 위해 벌이는 굿), 다시래기(제81호, 상가에서 출상 전날 상주와 그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노래와 재담과 춤으로 노는 가무극적 연희) 등을 진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국가지정 유형문화재로는 보물 제529호 금골산 오층석탑, 사적 제126호 용장산성, 사적 제127호 남도석성, 명승 제9호 진도 신비의 바닷길이 있고, 천연기념물 제53호 진돗개, 천연기념물 제101호 백조 도래지, 천연기념물 제107호 의신면 첨찰산 상록수림, 천연기념물 제111호 상만리 비자나무, 천연기념물 제212호 관매리 후박나무, 천연기념물 제215호 의신면 초하리 무환자나무(집 근처에 이 나무가 있으면 재난을 막을 수 있다는 속설로 명명), 천연기념물 제217호 석교리 백목련 등이 있다. 이외에 지방문화재도 수두룩하다.
서울대 인류학과 전경수 교수는 “우리나라의 양반문화를 보려면 안동으로 가고, 서민문화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진도로 가라”고 말했다. 그만큼 서민문화의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얘기다. 그 많은 문화유적을 제대로 다 보려면 일주일 이상 진도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교통
서울에서 승용차로 서해안고속도로로 가려면 목포IC까지 그대로 달리면 된다. 목포IC에서 나와 영산호 하구둑~영암방조제~금호방조제로 가다 진도대교를 건너 벽파진로로 가다 용장산성길로 우회전해서 가면 된다.
고속버스는 센트럴터미널(호남선)에서 하루 4차례 운행한다. 오전 7시35분에 첫차가 출발하며, 마지막 버스는 오후 4시35분에 있다. 요금은 우등 3만2,000원, 일반 2만1,500원. 소요시간 5시간20분.
진도 시외버스터미털에서 용장산성 홍보관까지 가는 시외버스는 오전 7시에 첫차가 출발하며 08:40, 11:10, 13:20, 16:20, 18:10 등 하루 여섯 차례 운행한다. 홍보관에서 오전 7시30분에 첫차가 나가며 9:10, 14:00, 16:50, 18:40 등 하루 다섯 차례 운행한다. 택시는 1만2,000~1만3,000원. 개인택시 백용국씨 011-636-8797.
맛집
용장산성 주변에는 산성 외에 아무것도 없고 숙식을 하려면 읍내까지 나가야 한다. 진도읍 남동리에 있는 낙지전문점 신원지(061-544-7088, 011-9615-6000)에서는 깔끔한 반찬에 정갈한 남도 음식맛을 그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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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을 찾아서] 퇴계 오솔길 - 청량산 육육봉을 바라보며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그 길!
‘미천장담’ 낙동강길 따라 왕복 10㎞ 내외 걸으며 퇴계 詩도 감상 조선 성리학의 거두 퇴계가 길에서 다시 태어났다. 퇴계가 너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어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말한 낙동강 상류 강길을 따라 청량산으로 가던 길을 안동시에서 ‘퇴계 오솔길’로 단장해 새 코스로 내놓았다.
퇴계 이황(1501~1570)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 성리학의 거봉이다. 그의 학문적 영향은 현재까지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더더욱 그의 인품은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그의 인자한 성품을 대변하는 어릴 적 일화 한 토막. 퇴계가 8살 때 바로 위의 형 해가 손을 다쳐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얼른 달려와 상처 난 형의 손을 붙잡고 소리 내어 울었다. 어머니 박씨가 어여삐 여겨 “정작 손을 다친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고 물었다. 퇴계는 여전히 울먹이며 “형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울지 아니 하나, 피가 이렇게 흐르는데 어찌 아프지 아니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어릴 적부터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성품이 남달랐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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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계 오솔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량산과 하늘다리. 그 밑에 학소대의 기암절벽,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등은 한 편의 산수화를 펼쳐보는 것 같다.
그런 퇴계는 청량산을 유독 사랑했다.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진출했어도 청량산이 있는 고향 안동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해 단양군수·풍기군수·공조판서·예조판서·우찬성·대제학을 지냈지만 마음은 항상 고향에 있었다.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도 그가 고향 근처로 가기를 원해서 얻은 관직이었다.
관직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난 이후엔 명종이 65세인 퇴계를 직접 찾았다. 명종이 보낸 ‘왕의 전교’ 전문이다.
“내가 총명하지 못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모자라 전부터 여러 번 불렀으나 매양 늙고 병들었다 하여 사양하므로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노라. 경은 나의 지극한 심회를 알고 빨리 올라오라.”
퇴계가 거절하자 명종은 다시 ‘왕의 유지’를 보내 불렀다.
“경이 사직하고자 하는 글을 보니 짐의 마음이 쪼개지는 듯하다. 사퇴하려고만 말라. 여러 번 부르는 정성을 저버리지 말고 잘 조리해서 올라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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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낙동강 물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다.
퇴계는 유지를 받고도 나갈 몸이 못됨을 알리고 부디 병든 몸을 놓아 달라고 장계를 올렸다. 그래도 명종은 윤허를 내리지 않고 공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으로 승진시켜 소명을 내렸다. 그것이 퇴계가 세상을 떠나기 4~5년 전인 1565년과 1566년의 일이다.
훗날 기대승(奇大升)은 이런 퇴계를 두고 “중년 이후로는 바깥으로 달리려는 뜻을 끊었다”고 말했으나 제자 조목(趙穆)은 “온당치 못한 표현”이라며 “선생은 애당초 권세나 이익 따위의 분잡하고 화려한 것에 대해 담박했다”고 반박했다.
퇴계는 기본적으로 구도자였고, 그런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도 한때 중앙정치에 몸을 담았으나 45세 때 발생한 을사사화에서 죽임을 당한 둘째 형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귀거래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관직생활 중 공문서 속에서 “몸을 빼어 한때 산어귀를 거니는 무리”일 뿐이라고 자조하기까지 한 부분은 그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진정한 은자여야만 산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권세나 이익 좇지 않고 청량산 좋아한 구도자
그는 혼란한 정치 현실에서 벗어나 존재의 근원을 찾아나선 구도자의 심정으로 관직을 사직했다. 47세에 홍문관으로 조정에 들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관뒀고, 48세 되던 해 외직을 자청해 단양군수로 부임했으며, 그 해 10월엔 풍기군수로 옮겼다. 이듬해 4월 소백산을 다녀온 뒤 <소백산유람록>을 쓰고 이름을 ‘서간병수(栖澗病?)’라고 적었다. 즉 시냇가에 깃들여 사는 병든 늙은이라는 뜻이다. 그 해 12월에는 경상감사에게 세 번이나 사직서를 올려 회보를 기다리지 않은 채 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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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바로 옆으로 갈대가 우거져 더욱 운치를 자아낸다.
퇴계는 산수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 ‘산야기질(山野氣質)’의 소유자였다. 또한 산을 정신적 가치의 상징물로 여겼고, 우러러봐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그에게 산놀이는 인간 욕망을 억제하고 본성의 깊이를 규명하는 공부로 상징됐다.
퇴계는 “유산(遊山)은 독서와 같다”고 했다. 산에 가는 것 자체를 마음 수행, 지식 수행으로 받아들였다. 청량산에 오르면서 그 마음을 잘 표현한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이 있다.
“글 읽기와 산놀이가 비슷하다 하지마는(讀書人說遊山似 독서인설유산사) / 이제 보니 산놀이가 글 읽기와 같으도다(今見遊山似讀書 금견유산사독서) / 공력이 다할 때는 으레 내려오고(工力盡時元自下 공력진시원자하) / 얕고 깊음 아는 것도 모두 이에 있더구나(淺深得處摠由渠 천심득처총유거) / 열 구름 앉아 보아 기묘함을 알았었고(坐看雲起因知妙 좌간운기인지묘) / 근원지에 이르러선 비롯됨을 깨달았네(行到源頭始覺初 행도원두시각초) / 마루턱 찾을 것을 그대들에 기대하니(絶頂高尋勉公等 절정고심면공등) / 늙어서 전진 못하는 이 몸, 내 깊이 부끄러워라(老衰中輟愧深余 노쇠중철괴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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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부터) 오솔길은 풀밭길로도 연결돼 걷기에 더욱 좋다. / 강변길이 끝나면 호젓한 숲속길이 이어지는 퇴계 오솔길.
사실 산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힘이었다. 루소는 “나는 걸으면서 명상에 잠기며, 나의 마음은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고 했다. 키에르케고르도 “걸으면서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며 산책을 예찬했다. 니체는 “심오한 영감, 그 모든 것을 길 위에서 떠올린다”고 했다. 칸트도 매일 새벽 그의 산책을 보고 주민들이 시계를 맞췄다는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는 헤겔과 야스퍼스, 막스 베버, 괴테가 걸었던 ‘철학자의 길’이 있다. 소크라테스와 당대의 철학자들도 산책을 하면서 의견을 펼쳤기에 ‘소요학파’란 이름까지 얻었다. 이와 같이 걷기는 단순한 다리운동이 아닌 머리와 마음을 일깨워주는 사색의 방법인 것이다.
생후 일곱 달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퇴계는 13세 때 숙부인 송재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집에서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50리 강변길을 떠난다. 그 후 수 차례 이 길을 오가면서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사랑했다
청량산 관련 시만 51편 남겨
1548년 퇴계는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당나라 한유(韓愈)가 형악(오악 중 형산)의 신에게 묵도하자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형산이 홀연 눈앞에 나타났던 것처럼 산이 신령한 기운과 교감하는 경험을 했다. 그는 자연 속에서 드러나는 조화와 자취를 진정으로 즐겼던 듯하고 청량산을 이상향처럼 여겼던 모양이다. 그런 심정을 적절히 읊은 그의 시 ‘등산(登山)’이다.
“그윽한 곳 찾느라고 깊은 골을 넘어가고(尋幽越濬壑 심유월준학) / 멧 숲을 거듭 뚫어 험한 데를 지났노라(歷險穿重嶺 역험천중령) / 다리 힘이 피로함은 논할 것이 없거니와(無論足力煩 무론족역경) / 마음 기약 이룩됨을 기뻐하곤 하였노라(且喜心期永 차희심기영) / 이 메의 솟은 양이 높은 사람 흡사하여(此山余高人 차산여고인) / 한 곳에 홀로 서서 그 생각 간절코녀.(獨立懷介耿 독립회개경).”
걷기는 시각으로 시작해서 청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으로 이어진다. 즉 명상과 달리 걸으면서 몰입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퇴계의 시 ‘등산’에서도 감각이 점점 고조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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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계 오솔길은 꽃과 나무와 야생화와 강이 우거진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퇴계 오솔길’은 아름다움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이의 시각을 충분히 휘어잡는다. 출발지점은 도산면 단천교다. 단천교 바로 옆에 ‘녀던길(옛길)’이란 이정표가 있고,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이 길은 퇴계 선생께서 즐겨 다니시던 오솔길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퇴계 선생의 시적 감흥을 현장을 거닐며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맞은편에는 ‘녀던길’이란 비석도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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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길을 따라 청량산으로 올라간다. 이 길은 순간적으로 감흥은 일어나지만 그리 길게 가지는 않는다. 약 2㎞를 비슷한 길로 계속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2㎞쯤 지나 퇴계의 첫 시비(詩碑)가 나오고 전망대에 이르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야,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청량산 깊은 골이 눈앞에 펼쳐지고 그 사이로 곡예를 그리며 빠져나오는 낙동강 줄기는 정말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펼쳐놓은 듯했다. ‘겸재 정선이 어떻게 이런 멋진 곳에 와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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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선 강둑길은 갈대로 뒤덮였고, 덩그러니 서 있는 커다란 버드나무 한그루가 운치를 더했다. 한 발 한 발 옮기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주변 풍광을 감상하느라 발길을 살필 수 없기 때문이다. 강변의 조약돌은 갖가지 모양으로 눈길을 끌었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갈대로 뒤덮인 모래밭을 지날 때는 살랑거리는 갈대가 귓가를 살살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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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가 숙부에게 논어를 배우러 청량산에 가면서 “그림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까지 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한번 나온 감탄은 그칠 줄 몰랐다. 마침 날씨가 맑아 청량산 선학봉과 자란봉을 연결한 하늘다리까지 조망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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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변길은 사유지 문제로 곤란을 겪자 시에서 건지산으로 우회로를 만들었다.
“낙동강은 청량산을 지나서야 비로소 강의 모습을 갖춘다”라는 말이 있듯이 청량산의 깊은 계곡에서 나오는 물과 합류해서 제법 강의 형태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곳의 강줄기를 ‘미천장담(彌川長潭)’이라고 한다. ‘여러 지천이 모여 이룬 길고 깊은 소’라는 뜻이겠다. 퇴계가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도미천망산(渡彌川望山)’을 남겼다.
“굽이굽이 맑은 여울 건너고 또 건너니 / 우뚝 솟은 높은 산이 비로소 보이네 / 맑은 여울 높은 산이 숨었다가 나타나니 / 끝없이 변한 자태 시심을 돋워주네.”
퇴계만이 아니라 누구나 시적 감흥이 생길 법한 강변길에는 또 의외의 발자국이 나온다. 해변가에나 있을 법한 공룡 발자국 흔적이 이곳에도 뚜렷이 남아 있다. 역사적 사실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정말 공룡 발자국같이 생겼다.
길은 오솔길로 변했다. 풀들이 길을 덮은 호젓한 길이다. 옛날에 사람이 살았을 법한 장소에 정자와 연못이 있어 탐방객들에게 휴식처가 된다. 퇴계 시비가 있어 잠시 쉬어가는 객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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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운동에 있는 시사단. 지방에서 최초로 과거시험을 치른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퇴계 오솔길은 시야가 확 트인 강변을 다시 만나자 외줄처럼 일직선이 된다. 강 옆에 우뚝 솟았지만 상단은 미끈하고 평평한 바위가 있다. 퇴계가 청량산을 오가면서 잠시 쉬었다 간 바위라고 전한다. ‘경암(景巖)’이라 불리며 여기에서도 시 한 수를 선사했다.
“부딪는 물 천년인들 다할 날 있으련만 / 중류에 우뚝 서서 기세를 다투누나 / 인생의 발자취란 허수아비 같은지라 / 어느 누가 이런 곳에 다리 세워 버텨보리.”
길은 계속되고 아름다운 풍광도 연속이다. 경암을 지나니 곧이어 한속담(寒粟潭)이다. S자로 휘도는 낙동강이 흐름을 멈춘 듯 담을 이룬 곳이다. 말을 타다 걷기도, 또는 가마를 타기도 했을 법한 퇴계는 절경에 반해 또 ‘한속담(寒粟潭)’이란 시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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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천장담 낙동강을 따라 퇴계 오솔길을 걸으며 학소대를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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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벌 떠는 여윈 말로 푸른 뫼를 넘어가서 / 깊은 골짝 굽어보니 찬 기운이 으시시 / 한 걸음 두 걸음 갈수록 선경이라 / 기괴한 돌 긴 소나무 시냇가에 널렸구려.”
한속담 바로 옆에 거대한 수직절벽인 학소대(鶴巢臺)를 만난다. 천연기념물인 오학(烏鶴·먹황새)이 서식하여 학소대로 명명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학의 분비물이 바위에 묻어 있는 듯하다.
이어 퇴계 오솔길의 마지막 지점인 농암종택에 도착했다. 농암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판·형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종1품 숭정대부에 이를 정도로 화려한 벼슬을 했지만 이런 이력보다는 무위자연의 삶을 즐기며 강호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른바 한국 ‘강호문학의 창도자’가 바로 농암 이현보다. 그는 퇴계보다 30여 년 빠른 인물로 퇴계가 아버지처럼 모시며 따랐던 것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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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덕한 인품…시와 글에 남아
농암종택은 1975년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수몰을 피해 여기저기 흩어졌다가 2000년대 들어 현재의 위치에 재건됐다. 종택 바로 앞으로 흐르는 강물의 벽이 벽력암이다. 벽력암은 태백에서 떠내려 온 뗏목들이 절벽에 부딪혀 우레 같은 소리를 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선성지(宣城誌)>에는 “벽력암 아래에 있는 깊은 연못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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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 바로 옆에는 그네도 있고, 널찍한 공터도 있다. ‘퇴계 오솔길’은 여기까지다. 이후 청량산 가는 길은 도로로 포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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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청량산에 관한 기록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 끝내자. 퇴계는 1552년 명종 7년에 주세붕의 <청량산 유산록>에 다음과 같은 발문을 붙였다.
“위대하여라, 선생이 이 산에서 얻은 것은! 홍몽한 상태로부터 음양의 기운이 나뉘어 높은 하늘과 깊은 바다의 기운이 형체를 응집한 이래로 몇 천만 겁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하늘이 갈무리한 승경과 땅이 감추어둔 기이한 구역이 바로 선생의 글을 기다려서야 나타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으로서는 커다란 만남이 아니었겠는가. 하물며 이 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모두 불경의 말과 여러 부처의 음란한 이름들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정말로 이 선경의 모욕이요, 우리 유학자의 수치였다. 선생이 일일이 고쳐주시고, 통렬하게 씻어내주셨으니, 그로써 산신령을 위로하고 정채(精彩)를 빛나게 하신 업적이 얼마나 크냐!”
주세붕은 퇴계의 글을 보고 “정말 어린아이나 아낙네가 지을 만한 그런 글이다”라고 깎아내렸다. 하지만 퇴계는 그 점에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주세붕을 선배로서 깎듯이 예우했다. 넉넉한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그 넉넉한 인품이 지금 500여 년을 지나 다시 그 길에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퇴계는 말년에 청량산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다시 ‘산을 바라보며’라는 시를 한 수 읊었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구름 메(산) 없으리오 / 청량산 육육봉이 경개 더욱 맑노매라 / 읍청정 이 정자에서 날마다 바라보니 / 맑은 기운 하도 하여 사람 뼈에 사무치네.”
그는 청량산 바로 앞에 있는 건지산 자락에 묻혔다. 죽어서도 청량산을 바라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시 ‘송별’이 ‘퇴계 오솔길’ 가는 길 중간에 나오는 정자 비석에 새겨져 있다.
“그대 가니 이 봄을 누구와 더불어 노닐고(君去春山雖共遊 군거춘산수공유) / 새 울고 꽃 떨어져 물만 홀로 흐르네(鳥啼花落水空流 조제화락수공류) / 이 아침 물가에서 그대를 보내노니(今朝送別臨流水 금조송별임류수) / 그리워 만나려면 물가로 다시 오리(他日相思來水頭 타일상사래수두)”
퇴계 오솔길에 가면 퇴계와 그의 시,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아름다운 경치 모두를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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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문화 본류로서의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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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문화 상징인 하회탈 있기에 양반문화와 종택 건재 가능
안동은 자타가 공인하는 양반문화의 대표적 도시다. 왜, 언제부터 안동이 양반문화의 대표도시로 자리 잡았을까?
안동은 과거부터 ‘안동도호부’ 등이 있으면서 도시 규모가 컸지만 양반문화의 본류는 아니었다. 특히 고려시대까지는 더더욱 그랬다. 조선시대 들어서 사림의 본거지로 자리 잡으면서 안동이 양반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안동은 사림의 본고장으로 중앙에 진출하지 못한 지방 유림들의 핵심 도시로 부상했다. 조선의 개국공신들은 전부 훈구세력으로서 당시 조선 개국에 반대 입장이었던 사림은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한 채 지방에 머물러 있었다. 그 지방의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안동이었고, 안동은 사림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지방에서 학문을 쌓고 세력을 키운 사림은 과거(科擧)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해 더욱 세력을 넓혀갔다.
그러다 원래 중앙에 있던 훈구세력과 부딪힌 사건이 을사사화·기묘사화 등의 당쟁이었다. 이때 많은 사림이 죽임을 당해 일부는 다시 낙향하기도 했지만 이미 사림은 무시할 수 없는 조선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사림의 본고장이라고 해서 양반도시가 된 것은 아니다. 안동은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없는 많은 종택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사실은 여기에 양반문화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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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계 오솔길 중간쯤 나오는 경암. 퇴계가 청량산을 오가면서 쉬어갔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안동은 양반문화의 고장이라고 하지만 서민문화의 상징인 하회탈로도 유명하다. 안동 서민들은 하회탈을 쓰고 양반문화를 통렬히 비꼬고, 풍자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일종의 ‘하회탈 카타르시스’를 즐겼던 것이다. 양반들도 그냥 허허 웃으며 같이 즐겼다.
양반들이 그런 서민을 박해했다면 더 이상 안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회탈을 통한 서민의 소리를 안동 양반들은 문화의 한 형태로 인정했다. 후덕한 퇴계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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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계 오솔길의 시작지점이자 동시에 끝지점인 농암종택. 안동댐 건설 이후 이곳으로 옮겨 조성했다.
서민은 양반의 그런 아량을 존경하게 되었고, 양반은 서민의 문화를 인정하며 서로 공존했다. 안동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과 현대에 들어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많은 격전을 치르면서 전쟁의 주역이었던 서민은 안동의 양반문화를 인정하고 보호해주려 했다. 그 결과 지금의 안동, 즉 한국 최고의 종택을 보존한 도시가 되었고, 양반문화의 대표적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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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문화해설사 박점석씨
‘원조’ 문화해설사… “안동문화 자부심 가지고 설명하죠”
“안동은 전국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많습니다. 문화해설사도 안동에서 처음 생겼지요. 그런 자리에 자부심을 가지고 안동 문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안동시청 소속 문화해설사 박점석(50)씨는 지난 2000년 문화해설사란 제도가 안동에 처음 생기면서 바로 안동 문화를 알리는 파수꾼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주부로서 생활을 하다 지난 1996년 ‘뭔가를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안동문화생활관을 노크한 게 계기가 됐다.
“안동시에서 운영하는 문화생활관은 전국 어디보다 열기가 뜨거워요. 어느 강좌든지 개강하자마자 바로 수강생이 만원이 될 정도예요. 그것도 안동문화의 힘이 아닐까요.”
박씨는 주부문화생활관에서 자원봉사로 일하다 문화해설사가 생기는 걸 보고 바로 지원했다. 이제는 문화해설사 생활이 만 10년째다.
“안동 문화에 대해 모르는 것도 많이 배워요. 이것저것 살펴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죠. 안동을 찾는 사람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잘 소개하면 그게 제 소임을 다하는 것이죠.”
이제 아들들도 다 커서 대학생이 됐다. 그 전에는 없는 시간을 쪼개서 공부했지만 지금은 남는 시간을 충분히 안동 문화 공부에 할애하고 있다.
“안동에 오시면 꼭 저를 찾으세요. 안동 문화의 모든 것을 전달할 드릴게요.”
퇴계와 관련된 주변 명소퇴계와 관련된 주변 명소로는 ‘퇴계 오솔길’ 바로 직전에 도산서원이 있다. ‘해동주자’라 불리는 퇴계 선생이 서당을 짓고 유생들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았던 곳이다. 퇴계 선생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과 유림에서 선생의 높은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으로 건립했다. 현재 그 장소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퇴계 선생과 제자들이 함께 모여 강론하던 곳인 전교당(典敎堂)은 보물 제210호로 지정됐다. 이곳에 있는 ‘도산서원(陶山書院)’사액현판은 조선시대 명필 한석봉이 직접 쓴 글씨다. 그 외에 선생이 거처하시던 완락재와 암서헌, 제자들이 공부하던 농운정사, 책을 보관하던 광명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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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산서원
도산서원 조금 못 가서 이육사문학관도 있다. 육사는 퇴계 선생의 15대 손이다. 육사는 안동 생가의 들판에서 눈 내린 날 강물을 바라보며 그의 유명한 ‘광야’를 지었다고 한다. 문학관은 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친딸 이옥비 여사가 지키고 있다. 그녀도 일흔을 훌쩍 넘겼다.
이육사문학관에서 안동 쪽으로 조금 가면 퇴계종택이 있다. 현재 퇴계종택은 그의 후손들이 안동댐으로 수몰된 종택들을 이곳으로 옮겨 건립한 건물들이다. 육사문학관과 퇴계종택 중간쯤에 있는 건지산 끝자락에 퇴계 선생의 묘지와 그 한참 아래에 그의 며느리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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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육사문학관
답사 가이드
강변길 사유지 문제로 건지산 등산로 우회로 만들어 안내
‘퇴계 오솔길’은 출발지점을 도산서원 조금 지나서 나오는 단천교와 끝지점인 농암종택 양 방향에서 모두 답사할 수 있다. 당일 코스로 승용차로 단천교에서 출발할 경우 2㎞ 가량 차를 몰고 전망대에 주차하는 게 시간을 활용하기에 좋다.
전망대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한 코스는 바로 강변길로 내려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건지산 등산로로 오르는 길이다. 강변길은 아름다운 길이 연속으로 펼쳐져 한때 안동시에서 ‘퇴계 오솔길’을 만들면서 갈대가 우거진 넓은 공터에 시민공원을 조성할 계획이었지만 소유주가 반대하면서 난관에 부딪혔다. 시에서는 토지를 수용할 계획이었지만 지주가 너무 터무니없는 금액을 불러 협상이 결렬됐다. 그래서 시에서 건지산 등산로를 만들어 산길로 둘러 정자까지 가서, 그곳에서 강변길로 농암종택까지 가는 코스가 만들어진 것이다.
강변길로만 가면 단천교에서 농암종택까지 편도로 약 4.8㎞ 거리다. 단천교에서 전망대까지 거리가 약 2㎞이므로 전망대에 차를 주차하고 가면 3㎞가 채 안 되는 거리다. 그러나 전망대에서 강변길로 농암종택까지 갔다가 올 때 건지산 등산로로 오면 거리가 총 8.4㎞ 정도 된다.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고 둘러보려면 왕복 4시간은 잡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
길은 외길이라 헤맬 우려도 없고 건지산~강변길~농암종택으로 간다면 산길과 들길, 강변길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교통
승용차로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영동고속도로 원주·이천 방향으로 진입한 후 중앙고속도로 안동·남원주로 다시 갈아탄다. 이어 계속 내려가다 서안동IC에서 빠져나와 안동으로 진입해서 도산서원으로 찾아가면 된다.
고속버스는 동서울터미널과 센트럴터미널에서 안동행이 있다. 3시간 걸리며, 요금은 1만5,600원.
안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3번과 67번 시내버스를 타면 농암종택과 도산면 단천교까지 간다. 버스요금은 1,100원이며 소요시간은 40분 남짓.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는 약 3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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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박과 맛집
퇴계 오솔길 주변엔 먹고 잘 곳이 없다. 가는 도중에 열화당(054-855-8332)이 있다. 숙박과 음식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집이다. 하지만 주중에 숙박하려면 예약해야 한다. 주인이 서울에 살기 때문에 수시로 집을 비운다.
출발점이자 끝지점인 농암종택에서도 숙박이 가능하다. 4~5명이 묵을 수 있는 작은 방은 7만 원, 7~8명이 숙식할 수 있는 큰 방은 10만 원선. 농암종택은 그 후손이 직접 운영한다.
차를 가지고 왔으면 안동시내에서 안동의 다양한 음식을 맛본다. 특히 안동찜닭과 안동국시 등은 서문시장에 가면 전문점이 수두룩하다. 안동찜닭은 경북 지정 으뜸 음식점으로 서문시장에 ‘안동찜닭 종손(054-855-9457 또는 010-6564-998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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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안동과 관련한 정보는 안동관광정보센터(054-856-3013), 경북종합관광안내소(054-852-6800), 도산서원관리사무소(054-856-1073) 등에 문의하면 된다.
[옛길을 찾아서 ] 원주 싸리재 - 원주 신림면~석기동까지 6.7㎞, 김삿갓·궁예 등도 지났던 유서 깊은 길 길 위의 싸리나무와 야생화들, 유배 가던 단종 모습 기억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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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겨 유배길에 오른 단종,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단종복위를 꾀하다 사약을 받은 집현전 원로학자 성삼문. 그 성삼문은 죽기 전 단종을 그리는 애절한 시조 ‘단종(端宗)’을 애달프고 구슬프게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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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나와 / 외로운 몸 외짝 그림자 푸른 산중을 헤맨다 / 밤마다 잠을 청하니 잠은 이룰 수 없고 / 해마다 한을 다하고자 하나 한은 끝이 없네 / 자규 소리도 끊긴 새벽 묏부리 달빛만 희고 / 피 뿌린 듯 봄 골짜기 떨어진 꽃만 붉구나 / 하늘은 귀머거리라 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 어찌해서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듣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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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리재 올라가는 길은 옛날에 차가 다녔듯이 널찍한 외길이고 그늘도 드리워져 걷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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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 중의 한 명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 조부모를 다 여의고 왕위에 올랐지만 숙부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끝내 목숨마저 내놓아야 했던 비운의 삶을 살았던 단종, 그의 삶 자체가 세인들의 한없는 동정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비운의 삶을 산 단종의 흔적은 여기저기 유적으로 흩어져 있고, 또 그가 눈물을 머금고 가던 길에도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원주 싸리재는 단종이 귀양 가던 길에 넘었던 고개다. 한양에서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싸리재 길은 말 그대로 고갯길이다. 지금은 산 아래로 터널이 뚫려 산책로로 이용하지만 한때는 영월로 가는 차들이 다녔던 신작로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만든 영월~원주 간의 유일한 통로였고, 그 이전에는 방랑시인 김삿갓과 궁예가 군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지났던 길이었다고 전한다. 산 아래로 터널이 뚫린 덕분에 싸리재는 옛길로 거듭나 운치를 자아내는 분위기 있는 길로 바뀌었다.
슬픔의 고갯길 ‘싸리재’는 원주시 신림면 치악산 명성수양관에서 시작된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싸리재옛길’이란 간판이 크게 붙어 있다. 옛길식당, 싸리치농원 등도 이정표로 같이 있다. 산굽이를 돌 때마다 싸리나무가 지천으로 널려 싸리치마을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싸리나무는 이제는 사라져 얼마 남아 있지 않다고 원주시 문화관광해설사 양한모씨가 말했다.
한때 차들이 다녔던 길이라 그런지 시원스레 걷기에도 좋다. 몇 년 전 폭우가 쏟아져 움푹 파인 길이 많았으나 마사토와 황토로 복토하며 깔끔하게 정비했다고 양 해설사가 전했다. 길 양옆으로는 계곡과 산이어서 크게 자란 나무들이 적당한 그늘을 드리워 가로수 역할을 대신했다. 한때 싸리재 고갯길은 나무들이 우거져 ‘신(神)들의 숲’으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은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한여름에도 곳곳에 그늘이 있을 정도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싸리나무 많았다고 해서 싸리재
싸리치마을 사람들은 채밀, 싸리비, 땔감 등을 지고 한양과 영월로 넘나들며 소금, 생선 등을 사가지고 돌아왔던 애환 서린 곳이다. 길에서의 애환은 당대는 모르지만 시대가 흐른 뒤에는 누구나 보고 느낄 수 있다. 마치 단종이 지나간 길을 지금의 사람들이 애달픈 눈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문종의 왕비인 현덕왕후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홍휘 왕자를 분만했다. 난산으로 간신히 해산을 하긴 했지만 기력이 쇠진해진 탓에 3일 만에 숨을 거뒀다. 그녀는 죽기 직전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아들 양육을 부탁하며 어미로서의 역할을 못 하고 떠나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하늘나라에서 보살필 것을 기약했다.
홍위는 여덟 살 되던 1448년(세종 30년) 세손에 책봉됐다. 할아버지 세종은 세손 홍위를 무척이나 아꼈다. 홍위는 어릴 때부터 글을 읽고 쓰는 재주가 영특해 세종의 칭찬이 자자했던 것으로 역사서는 전한다. 홍위를 세손으로 책봉한 세종은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신숙주 등의 집현전 소장 학자들을 은밀히 불러 “세손을 잘 보필하라”고 세손의 앞날을 부탁했다. 세종 자신도 병세가 깊어 죽음을 얼마 두지 않은 처지였고, 세자 향 역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판단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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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리재 정상 영마루에는 싸리재 사연을 담은 시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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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을 불러 이런 부탁을 한 이유는 바로 혈기왕성한 자신의 아들들 때문이었다. 특히 둘째 아들 수양은 어릴 때부터 야심이 크고 호기로운 인물이었다. 죽음을 앞둔 연로한 왕은 어린 세손이 그 대군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갈 날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1450년 세종이 죽고 세자 향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단종의 아버지 문종이다. 홍위는 당연히 세손에서 세자로 책봉됐다. 그 때 홍위의 나이 열 살이었다. 왕세자로 책봉된 뒤에도 집현전 학자인 이개와 유성원이 교육을 계속 맡았다.
그러나 문종은 즉위 2년 3개월 만에 병사하고 말았다. 세종 말년 10여 년간 병든 세종을 대신해서 정사 등 궁중의 모든 일을 아버지 세종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모든 정성을 기울여 처리하느라 과로가 누적된 탓에 병이 악화된 것이었다.
이어 왕으로 즉위한 인물이 세종의 손자이며 문종의 아들인 단종 홍위였다. 스무 살 이하의 미성년 어린 왕이 즉위하면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후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일반 관례인데, 당시 궁중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대왕대비는 물론이고 대비도 없었으며, 심지어 왕비조차 없었다. 열두 살 어린 왕 단종은 기댈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처지였다. 어쩌면 불행의 씨앗은 이때부터 잉태되었다.
단종은 즉위 후 왕족 대표 두 사람에게 자신을 보필하도록 부탁했다. 가장 가까운 직계 혈족의 최고 어른이자 아버지 문종의 동생인 수양대군과 수양의 네 번째 동생이자 일찍이 태조의 여덟 번째 아들 방석의 양자로 입적되어 촌수로 따지면 수양의 당숙이 되던 금성대군이었다. 금성대군은 성격이 곧기는 하나 세력은 없었고, 정권욕도 없는 사람이었다. 왕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던 인물은 단연 수양대군뿐이었다. 수양은 원래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독점력이 강한 인물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원주~영월 가던 외길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총서편에는 ‘타고난 자질이 공검하고 예절이 있었으며, 또 충성스럽고 효도하고 우애가 돈독했다. 인(仁)을 좋아하고 의(義)에 힘썼으며, 소인을 멀리 하면서도 미워하지 않았으며, 군자를 가까이 하면서도 편사하지 않았다. 문학과 활쏘기와 말타기가 고금에 뛰어났으며, 역학·산학·음률·의술·점·기예의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묘를 다했다. 그러나 항상 스스로 이를 숨기고 남의 위에 오르려고 하지 않으니, 세종이 이를 기특히 여기고 사랑해 그 대우를 여러 아들들과 달리했으며, 무릇 군국대사에는 반드시 참결하도록 했다’고 적고 있다. 한마디로 능력이 출중한 성군으로 칭송하고 있다.
어린 단종은 정사를 돌볼 수 없어 모든 정치권력은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든 고명대신들, 이른바 황보 인, 김종서 등에게 집중되었다.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자 세종의 아들들, 즉 왕족의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수양·안평·임영·금성·영응 등의 왕숙들이 서서히 왕권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둘째인 수양과 셋째 안평은 서로 세력경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런 왕족 간의 세력다툼은 급기야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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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대 같은 낙엽송나무들이 길가에 크게 솟아 있어 보기에도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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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정치권에 뛰어든 수양은 점점 더 세력을 키웠고, 김종서와 황보 인 등 고명대신들은 수양대군의 세력팽창을 막기 위해 안평대군과 손을 잡았다. 수양대군으로서는 좋은 ‘사냥감’이 생긴 셈이었다. 1453년 10월 드디어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수양의 수하인 한명회, 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를 참살하고, 황보 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없애는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이들의 죄명은 안평대군을 추대해 종사를 위태롭게 한다는 명분이었다. 조정은 일시에 수양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에 올랐으며, 또한 왕을 대신할 서무를 관장하는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1454년 열네 살의 나이에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1456년엔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 출신과 성승·유응부 등이 상왕복위사건을 일으켜 사형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이로 인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된다.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 총서편에는 단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노산군(魯山君)의 휘는 이홍위이고, 문종 공순왕의 외아들인데, 어머니는 권씨다. 세종이 왕세손으로 봉하고, 문종이 영의정 황보 인을 보내어 국저(國儲)로 삼도록 청하였다. 문종이 경복궁 천추전에서 훙(薨)하니, 의정부(議政府)에서 노산군을 받들어 함원전(含元殿)에 들어가 거처하게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왕의 기록 중에 가장 짧고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것도 단종이 아닌 노산군으로 적고 있다.
단종이 눈물을 삼키며 유배지로 가던 그 길을 지금 걷고 있다. 열여섯 살밖에 안 된 어린 단종은 관리 3명과 군졸 50여 명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광나루를 건너 여주→원주 부론→귀래→신림(싸리재)→주천을 거쳐 유배지 청령포에 이르렀다.
싸리재는 단종에게는 눈물의 고갯길이고, 서민에게는 삶의 애환이 깃든 생활의 길이다. 단종은 이 길을 걸으며 숙부인 수양대군을 얼마나 원망했을 것이며, 또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부재를 얼마나 안타까워했을까. 길을 걸으니 마치 단종의 애통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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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은 해발 596m지만 몇 십 년 전까지 차도 다녀
길 중간쯤 다다르자, 뜻밖의 ‘자연휴식년제 출입통제’란 푯말이 나왔다. ‘이게 뭐냐’ 싶어 자세히 읽어 보니 길 옆 계곡에 많은 사람이 출입해서 훼손된 듯 계곡출입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길가엔 야생화가 만발했다. 올라갈수록 싸리나무도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노란색의 자잘한 꽃이 활짝 핀 금마타리, 꽃 모양이 나비를 닮은 땅비싸리, 꽃향기가 좋은 사위질빵, 뿌리나 꽃에서 노루오줌 같은 냄새가 난다고 해서 이름 붙은 노루오줌 등이 처음 온 내방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계곡에선 가끔 사람소리가 들려왔다. 길을 안내한 양한모 해설사는 “이 계곡엔 원체 물이 맑아 1급수에만 사는 버들치와 메기 등도 살고 있다”고 했다. 양 해설사는 홍수로 계곡물이 넘쳐도 고기들이 그대로 살아 남는 비결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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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리재 소나무길 사이로 양한모 문화관광해설사가 길을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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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는 많은 수초들이 살고 있죠. 그 수초와 바위 틈새에 있는 그들만의 공간으로 숨어 들어가 살기 때문에 폭우가 쏟아져도 휩쓸려 내려가는 것을 피할 수 있어요.”
길은 구불구불 굽이졌다. 정상이 얼마 남지 않은 듯 경사도 매우 완만해졌다. 숨결도 조금 잦아들었다. 마침 쉴 때를 아는 듯, 의자가 나왔다. 의자 뒤로는 마치 작은 폭포같이 바위 위로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양 해설사는 “여기가 말 그대로 실금폭포”라고 가리켰다. 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양 해설사는 “마사토로 복토한 길이라 맨발로 걷기 좋은 길”이라고 자랑했다. 훌쩍 자란 낙엽송이 그늘을 드리워 여름에도 걸을 만했다. 마침 새끼 뱀 한 마리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지난밤에 내린 비로 젖은 몸을 말리려 나온 듯했다.
30분 정도 더 걸려 싸리재 정상에 도착했다. GPS고도로는 596m다. 웬만한 산 높이다. 길옆으로는 나무가 많긴 했지만 낭떠러지였다. 이 길로 옛날에, 아니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차가 다녔다니, 믿기질 않았다.
정상 영마루엔 ‘싸리치’ 노래 시비 있어
정상에 비석이 하나 있다. ‘싸리치’라는 제목으로 시가 새겨져 있다. ‘산굽이 돌아돌아 골짜기마다 / 싸리나무가 지천이어 / 싸리치라네 // (중략) // 단종의 애환 구름으로 떠돌고 / 김삿갓의 발길이 / 전설처럼 녹아 있는 / 영마루--- // (후략)’
정상에는 정자가 서 있고 공간이 넓어 주변을 둘러보며 쉬어가기 안성맞춤이다. 분명 영월 유배지로 가던 단종도 여기서 쉬었으리라. 그는 주변을 살피며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영월 유배지에서 단종은 적적함과 침울함을 달래기 위해 관풍매죽루에 올라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시를 한 수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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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리재라는 마을과 고갯길을 이름 붙이게 만든 싸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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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밝은 밤 자규새 울면 / 시름 못 잊어 다락에 기대었네 / 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없을 것을 /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보내 권하노니 / 춘삼월 자규루에는 삼가 부디 오르지 마소
약관도 안 된 단종이 이토록 절절하게 세상을 읊었다. 마치 수십 년의 세월을 겪은 뒤 인생의 비애감을 절실히 느낀 사람 같은 감정이 스며 있다. 단종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으리라. 할아버지 세종의 온화한 얼굴과 아버지 문종의 근엄한 얼굴, 그리고 자신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성삼문·박팽년 등의 피어린 눈물도 생각나고, 숙부 세조의 무서운 얼굴도 주마등같이 스쳐갔을 것이다. 자연을 벗 삼아 시심이나 떠올리며 여기서 그냥 조용히 한세상 보내리라 결심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불행의 끝은 거기가 아니었으니….
상왕복위사건이 무위로 돌아가자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됐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다시 서인(庶人)으로 강봉되고, 한 달 뒤인 10월에 만 17세의 나이로 사사(賜死)되었다. 숙부 세조의 무서운 얼굴은 어린 단종에게는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의 무슨 업 때문에 이토록 참혹함을 겪어야만 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세조의 명을 받고 단종에게 사약을 가지고 온 금부도사 왕방연은 형(刑)을 집행하고(왕방연은 사약을 거부하는 단종에게 차마 강제로 마시게 할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사이 하인 복득이란 자가 활시위로 뒤에서 단종의 목을 졸라 참혹하게 숨을 끊었다는 설도 있다) 싸리재를 넘어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비통한 심정으로 시조 한 수를 남겼다. 누구나 한번쯤 봤을 법한 시조다.
천만리 머나먼 길 / 고운 님 여의옵고 / 이 마음 둘 데 없어 / 냇가에 앉았으니 /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 울어 밤길 예놋다
왕위에 오른 세조는 즉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죽은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가족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세조의 큰아들 덕종이 그녀의 원혼에 시달려 죽자, 세조는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을 저지르기도 했으며, 세조 역시 꿈에서 그녀가 뱉은 침 때문에 피부병에 걸려 고생했다. 그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오대산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동자에 의해 쾌유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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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리재에는 많은 야생화가 자라고 있다. 1. 꽃에서 노루오줌 같은 냄새가 난다고 해서 이름 붙은 노루오줌이다. 2. 노란색의 자잘한 꽃이 활짝 피어 벌들을 유혹하고 있는 금마타리. 3. 꽃모양이 나비를 닮은 땅비싸리꽃에 나비가 한 마리 앉아 있다. 4. 꽃향기가 좋고 가지가 질겨 지게 멜빵을 만드는 데 쓰이는 사위질빵. 5. 국화과에 속하는 벌개미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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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한편으론 세조는 조선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왕권을 강화하고 불교를 융성시킨 왕이었다. 그의 왕권강화와 불교 융성책은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있다. 자신과 같이 다시는 왕위에 도전하지 못하게끔 왕권중심으로 정사를 펼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부족해 죽여 버린 행동은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싸리재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단종과 세조, 숙부와 조카, 조선왕조실록의 평가 등등. 실제로 지금까지도 다양한 평가가 있다. 역사적 사실은 분명 세조는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고, 단종은 그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설은 단종이 사약을 마시지 않고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묘사한다. 어찌된 일일까? 또 있다. 영월과 평창은 서로 인접한 마을인데도, 영월에서는 단종을 감싸고 도는 반면, 평창에서는 세조를 감싸고 돈다. 무속에서는 단종을 산신으로 모시면서 신격화하는 반면, 불교에서는 세조를 감싼다.
역사적 사실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문학적 진실은 또 어떻게,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나. 전설과 무속, 종교는 어디까지 사실에 근거하고 있을까? 단종의 유배길인 싸리재를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길은 역시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원주, ‘걷기의 메카’ 자처하며 걷는 코스만 20여 개 조성…국제걷기대회도 열어
원주엔 많은 축제가 열린다. 9월 1~5일에는 2010 강원감영문화제가 원주 강원감영지 및 중앙로 문화의 거리 일대에서 열린다. 감영은 강원도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청을 말하며, 따라서 감영문화제의 백미는 관찰사가 각 고을을 순찰하던 순력행차가 꼽힌다. 취고수악대를 선두로 해서 기수와 군관, 군졸, 의장, 대고수를 이어 관찰사와 육방관속이 행차하며, 역대 관찰사 후손들이 뒤를 따르는 전체 2,000여 명 규모의 대형 행차와 퍼포먼스로 진행된다.
이어 9월 8~12일에는 원주따뚜 세계 군악 & 마칭밴드 페스티벌이 열린다. 미국·일본 등 9개국 20개 팀 1,500여 명이 참석, 군악대를 통한 음악의 하모니를 뽐낼 예정이다.
또 매년 4월 4일 영월 단종제 전후해서 단종 관련행사를 개최한다. 2002년엔 단종의 유배행렬 답사를 서울에서부터 싸리재를 거쳐 황둔장터까지 진행했다. 이 외에도 치악산 복사꽃축제(4월), 치악산 산나물제(5월), 장미축제(6월), 섬강축제(8월), 치악제(9월), 한지문화제(9~10월) 등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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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장 큰 축제와 행사는 걷기대회와 그에 따른 걷기코스다. 원주시가 개최하는 국제걷기대회는 매년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리며, 세계 각국에서 신청자들이 쇄도한다. 원주시 일원에서 펼쳐지는 국제걷기대회는 5㎞, 10㎞, 20㎞, 30㎞, 50㎞ 등으로 나눠 개인의 취향대로 선택해서 참가하면 된다. 문의는 대한걷기연맹(033-762-2234).
원주시는 ‘걷기의 메카’를 자처하며, 싸리재 옛길 이외, 시에서 조성한 걷기 좋은 코스가 무려 20개에 달한다. 약 5㎞에 달하는 호저 대덕리 순환코스는 섬강 주변에 군락을 이룬 갈대와 전원풍경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한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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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리재 올라가는 중간쯤에 ‘싸리재농원’이 있다. 그 입구에 있는 장승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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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남짓한 신월랑슈퍼~치악산기도원 순환코스는 숲속을 거닐며 삼림욕을 즐길 수 있으며, 원주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11㎞쯤 되는 백운산자연휴양림 순환코스는 대한걷기연맹 공인 제1회 숲길로 아름드리 수목이 융단처럼 펼쳐져 있는 멋진 길이다. 뿐만 아니라 개나리·연분홍 등 꽃길이 조성된 아름다운 제방길을 따라 걷는 남한강대교~흥원창 산책로 코스 등도 아름다운 길로 꼽힌다.
[싸리재 탐방 가이드]
신림면 명성수양관서 출발…넓은 외길이라 ‘알바’ 우려 없어
싸리재는 원주시 신림면에 있는 치악산명성수양관에서 출발하는 게 좋다. 이정표도 찾기 쉽게 잘 정비돼 있다. 명성수련관 옆 삼거리 이정표에서 오른쪽 동북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이 싸리재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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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리재 시비와 정자가 있는 싸리재 정상의 영마루 모습. 오른쪽으로 가면 치악산과 매봉·응봉산이, 왼쪽으로 가면 감악산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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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마을길로 접어들면 왼쪽은 명성수련관의 큰 건물이 보이고 바로 그 옆에 대형 주차장이 있다. 오른쪽에는 옛길식당 등이 보인다. 식당가와 명성수양관을 지나면 양쪽으로는 주로 밭이다. 옥수수와 고추 등을 키우고 있다.
한때 차가 다녔던 큰길이고 외길이라 길을 잃을 우려는 별로 없다. 길 따라 올라가다 처음 나오는 다리가 옛길교다. 옛길교를 지나자마자 펜션 같은 집이 한 채 있다. 싸리재 가는 길은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속 큰 길 따라 올라가야 한다. 이어 농바위골농원이 나오기 전, 통행을 제한하는 문이 나온다. 사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문은 항상 열어놓고 있지만 개인 사유지다. 무심코 그 문으로 들어가면 안 되고 왼쪽 큰 길로 가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싸리재농원이 나온다. 싸리재 여인과 싸리재 장승이 입구에 세워져 있다. 바로 그 옆에 남근상이 우뚝 솟아 있다.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장소다.
1㎞ 남짓 가면 실금 같은 폭포가 바위 벽면을 타고 내리는 곳이 나오고, 그곳에 의자도 있다. 이곳에는 낙엽송나무와 소나무가 크게 자라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장소다.
이곳부터는 정말 외길이다. 한쪽은 산사면이고, 다른 한쪽은 낭떠러지다. 갈라질 등산로도 없다. 약 2㎞쯤 올라가면 싸리재 정상이 나온다. 정자와 시비(詩碑), 그리고 넓은 공간이 있어 영마루라 부른다. 발 아래 땅 속으로 신림터널이 지나고 있다.
길은 네 갈래다. 북(왼)쪽으로는 치악산과 응봉산 혹은 매봉산으로 가고, 남(오른)쪽으로는 감악산으로 가는 등산로다. 저 멀리 매봉산 정상 봉우리도 보인다. 싸리재는 동쪽으로 직진이다.
내려가는 길 오른편에는 장뇌삼 재배지역으로 철조망을 쳐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조금 더 내려가면 ‘싸리재숲속랜드’라는 펜션이 나온다. 이제 거의 다 내려간 셈이다. 싸리재숲속랜드 펜션에서 1㎞쯤 떨어진 거리에 88번 도로가 나온다. 영월로 넘어가는 도로다. 도로와 연결되는 바로 그 지점의 맞은편에 과적차량검문소 사무실이 있다. 여기가 싸리재 끝지점이다.
[주변 볼거리]
과적차량검문소에서 1㎞쯤 도로 옆 인도 따라 내려와서 왼쪽으로 500m쯤 올라가면 우리나라 유일의 고판화박물관이 있다. 내려오는 길은 인도폭이 좁아 조금 불편하다.
고판화박물관엔 국내 판화와 중국, 일본, 티베트, 몽골판화까지 9년에 걸쳐 수집한 판화를 전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삽화판화, 불화판화, 문양판화, 민화판화까지 다양한 판화를 볼 수 있다. 1박2일, 2박3일 전통판화체험학교도 운영하고 있어 언제든지 신청이 가능하다. 문의 033-761-7885 또는 011-360-7885. 고판화박물관에서 주천면 방향으로 700m가량 내려가면 감악산 등산로 출발지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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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재 출발지점인 신림면에서 치악산으로 조금 올라가면 천연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된 성황림이 있다. 50여 종 내외의 나무와 풀로 뒤덮인 숲이 천연자원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치악산국립공원이 바로 옆에 있다.
교통
승용차로는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로 가다 중앙고속도로로 바꿔 타자마자 나오는 남원주IC 다음의 신림IC로 나오면 된다. 신림IC에서 주천 방향으로 2㎞도 채 못 가 신림삼거리에 명성수양관이 나온다.
- 고속버스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원주행 버스가 있다. 20분 내외 간격으로 수시 운행하며, 일반고속 6,800원, 우등고속 1만원. 1시간 30분 정도 소요.
원주고속버스터미널이나 바로 옆에 있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 24번이나 25번 시내버스를 타면 신림면으로 간다. 택시를 타면 보통 2만원 남짓 나온다. 개인택시 문의 018-281-1817 또는 011-378-3979.
맛집
신림삼거리 명성수양관 주변엔 음식점들이 많다. 시골밥상농가토속식당(033-762-8894 또는 011-9796-5759)은 산나물과 올갱이를 맛있게 한다. 싸리재 끝지점에서 고판화박물관이 있는 창촌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도 맛집들이 많다. 가든 풀잎향기 두메식당(033-766-2944 또는 010-8896-6466)은 청국장과 버섯전골 등, 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반찬들을 낸다. 조금 더 내려가 감악산 등산로로 들어가는 분기점에는 한우담소식당(033-765-8701~2)이 있다. 쇠고기를 직접 사서 식당에서 먹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