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우, 절집 숲에서 놀다 ⑪]
비울수록 크게 채워주는 감홍난자(紅爛紫)의 선계(仙界)
색동 단풍 숲을 걷는 이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선운사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짧은 숲길은 절집을 찾는 누구에게나 가슴 가득 뭉클한 감동을 안겨줄 만큼 아름다웠다. 어느 화가인들, 또 어느 사진작가인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이런 풍광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으랴.
자연이 자아내는 순간의 감동을 경험하고자 많은 사람이 선운사를 찾았고, 그 현장에 함께할 수 있음에 나는 행복했다. 이런 아름다운 풍광을 만나면 누구나 그 감동의 순간을 몇 마디 수다스러운 언설로 그냥 흘려보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것도 본능적으로 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색동 숲을 걷는 이들의 얼굴에는 온화하고 환한 빛이 가득했다. 참배객도, 등산객도, 사진작가도 색동 단풍 숲을 걷는 순간만은 모두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 얼굴에서도 경직된 표정을 찾을 수 없다. 모두 입 꼬리가 귀에 걸린 형상이다.
색동 단풍 숲은 선운사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도솔천변에 조성된 단풍나무 숲을 말한다. 도솔천변의 아기단풍 숲은 언제 어떤 이유로 조성됐는지 분명하지 않다. 몇 백 년 묵은 굵은 단풍나무가 있는가 하면, 비교적 어린 단풍나무들도 함께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 버드나무나 다른 종류의 활엽수도 가끔 눈에 띄지만 주종은 단풍나무다. 종무소의 설명에 따르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도솔천 제방이 생긴 것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통해서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도솔천 주변의 노거수 단풍나무들은 제방이 만들어지기 전, 천변(川邊)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띠 숲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나이가 비교적 어린 아기단풍나무들은 제방 유실을 방지하고자 제방 축조 때 함께 심은 나무나 그 후 저절로 난 나무로 추정할 수 있다.
선운사를 찾은 순례자들은 색동 단풍 숲에 감동하지만, 개개인이 느끼는 감동의 깊이와 폭은 제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일상의 욕심과 습관과 생각을 한순간도 놓지 못하는 이들은 숲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순간적으로 찾아든 그 감동도 곧 잊고 만다.
비워야 채워지는 진리
최근에 빈번하게 절집 숲을 찾아 나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절집 숲의 풍광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가슴에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는가 하면, 어느 절집 숲의 감동은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기억의 강약은 절집을 찾던 당시의 내 마음 상태를 미루어볼 수 있는 바로미터라 할 수 있다. 많이 비워낸 뒤 찾은 절집 숲에서는 많이 채워 넣을 수 있었고, 복잡한 일상을 그대로 마음에 쟁여둔 채 찾은 절집 숲에선 불러내기 어려울 지경으로 당시의 기억은 스러져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늦게나마 깨달은 사실은 절집을 찾는 시간만이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탐욕도, 성냄도, 어리석음조차 놓아버리면 그에 반비례해서 감성의 그릇은 그만큼 더 커지고, 채워 넣을 감동도 더 커진다는 것이다. 비워야 채워 넣을 수 있다는 그 평범한 진리는 자연을 담는 마음의 그릇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셈이다.
세상사라는 것은 살벌한 생존경쟁의 현장이고, 그로 인해 우리는 수시로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하버드 대학의 에드워드 윌슨 교수는 상처 받은 영혼을 치유하거나 극복하는 데는 자연의 아름다움도 한몫을 한다면서 이를 ‘바이오필리아(Biophilia·자연사랑) 이론’으로 설명한다. 바이오필리아 이론은 ‘참된 인간성은 건강한 자연과 함께할 때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절집 숲이 문명병에 찌든 우리를 살리는 묘약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 자연이 주는 감동을 오랫동안 쌓아두고자 함도 그 감동을 필요할 때마다 끄집어내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고, 마음의 풍요를 간직하고자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 선운사 단풍 숲만이 마음에 풍요를 안겨주고 상처 받은 영혼을 치유할까. 이 땅의 수많은 절집이 절기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천년 세월 동안 표출해왔지만, 그 아름다움을 오랫동안 누릴 수 있는 이는 오직 절집을 찾는 이들만일지도 모른다.
선운사 절집을 찾는 순례자들의 화색이 밝고 행복한 모습을 본 적은 또 있다. 철옹성 모양으로 아기단풍나무의 잎이 견고한 녹색으로 가득했던 지난 8월, 금강문을 들어서는 방문객들의 반응을 문 앞에서 한동안 지켜봤다. 금강문을 들어서면 눈앞에 바로 선홍색 꽃이 만개한 배롱나무가 갑자기 나타나기 때문이다.
왜 절집마다 오래된 배롱나무를 키우고 있는지 평소 품은 의문은 참배객들의 “아…!” 하는 외마디 탄성으로 모두 풀렸다. 장대비가 그친 뒤라 숲길의 공기는 물먹은 듯 습했고, 그래서 체감온도는 더욱 높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녹색뿐이던 숲길을 지나온 순례자들이 금강문을 들어서자마자 만난 것은 무더기로 활짝 핀 선홍빛 배롱나무 꽃이었다. 녹색의 세상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선홍색의 파격을 만나는 감흥은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아…!”라는 탄성만이 그 순간의 감동을 강렬하게 나타낼 뿐이었다. 금강문 앞에서 순례자들의 감흥을 지켜보는 것은 또 다른 배움이었다.
선운사 경내에는 300년 묵은 배롱나무가 네 그루 있다. 금강문을 들어서면 왼편 만세루 앞에, 명부전 옆 수각 곁에, 그리고 대웅보전 앞 축대 양 곁에 자라고 있다. 종무소의 이성수 총무과장은 꽃이 귀한 여름철에 부처님께 꽃 공양을 하고자 옛날부터 절집에서 아껴온 나무라고 한다.
선운사는 검단선사(黔丹禪師)가 577년(백제 위덕왕 24년)에 창건했다. ‘선운사사적기(禪雲寺寺蹟記)’는 창건 당시에는 89개의 암자와 189채의 건물, 그리고 수도를 위한 24개소의 굴이 있는 대가람이었다고 전한다. 고려말 효정선사(孝正禪師)가 폐사로 있던 절을 중수(1354년, 공민왕 3년)했고, 조선 성종의 숙부 덕원군의 후원으로 1472년(조선 성종 3년)부터 10여 년간 대대적으로 중창했지만 정유재란으로 본당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다. 오늘날의 대웅전·만세루(萬歲樓)·영산전(靈山殿)·명부전 등은 무장(茂長)현감 송석조(宋碩祚)가 일관(一寬)·원준(元俊) 스님과 함께 1613년(광해군 5년)부터 3년에 걸쳐 건립한 전각들이다. 주요 문화재로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 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과 대웅전(보물 제290호) 등이 있고, 생명문화재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184호), 장사송(천연기념물 354호), 송악(천연기념물 367호) 등 3점의 자연유산을 보유한 절집으로 유명하다.
선운사 단풍 숲의 감상법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 곳에 머무르면서 주변을 완상(玩賞)하는 방법과 두 발로 숲길을 거닐면서 단풍 세상 속에 직접 풍덩 빠져드는 방법이 그것이다. 한 곳에 머물면서 단풍 숲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좋은 장소는 금강문 앞을 흐르는 도솔천 주변의 들머리 단풍 숲이고, 거닐면서 단풍 숲에 빠져들기 좋은 곳은 선운사에서 도솔암에 이르는 숲길이다.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머물면서 정적(靜的)인 풍광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려면 먼저 좋은 자리를 찾아야 한다. 금강문 앞의 단풍 숲을 감상하기 좋은 곳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삼각대에 사진기를 고정시켜 놓고 적당한 광선을 기다리는 사진작가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찾는 것이다. 해마다 개최되는 선운사의 단풍사진 촬영대회에 천 수백 명의 사진작가가 참가하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들의 사진기가 향하는 곳은 색동 단풍 숲이 자아내는 최고의 풍광일 수밖에 없다.
자줏빛과 붉은빛의 대향연
그러나 사진작가들이 모여 있는 장소는 대체로 혼잡하고, 공간도 협소하기 때문에 자신만의 감상 장소를 찾고자 하면 걸음품이 필요하다. 들머리 단풍 숲은 도솔천 주변 어느 곳에서든 감상할 수 있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진입로에서 도솔교 쪽으로 바라보는 풍광이 더 아름답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오는 도솔천의 남북축과는 달리, 동서축으로 감상하고자 할 때는 절집 쪽에서 도솔천을 바라보는 것보다는 오히려 도솔천 건너편에서 절집을 바라보는 풍광도 나쁘지 않으니 권하고 싶다.
걸음품을 아끼지 않는 이들은 도솔천변을 따라 거닐면서 개울 주변을 바라보거나 또는 개울을 건너는 징검다리 위에서 개울물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흐르는 개울물을 따라 형형색색의 붉은 물감이 번져 흘러내려오는 신비로움을 체험하면, 자줏빛(紫)과 붉은색(紅) 단풍이 안겨주는 흥겨움(?)을 문드러지게(爛) 느낄 수 있다. 바로 감홍난자(紅爛紫) 아니던가. 아마 선계(仙界)란 이런 곳을 일컫는 말이리라.
흐르는 개울물이 있음으로 해서 주변의 풍광이 얼마나 더 아름답게 빛나는지 알 수 있다면, 당신의 자연 감응 수준은 이미 독특한 경지에 들어선 것임에 틀림없다. 도솔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색동 단풍 숲이 안겨준 무아지경을 잠시라도 느낄 수 있으면 행복이란 물질적 풍요에 있지 않고 마음의 충족으로도 만끽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도솔천 주변 어느 곳이든 붉게 타는 색동 단풍 숲을 즐기려는 사람이 많음은 어쩔 수 없다. 이런 번잡함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절집 경내로 들어와 감상하는 것이다. 천왕문에서 화장실 쪽으로 조금 내려온 위치의 안쪽 담장에서 도솔천 쪽으로 바라보면 조용한 곳을 찾는 여러분만을 위한 특별한 선경(仙境)이 마치 액자 속의 그림처럼 펼쳐질 것이다.
도솔천 주변의 단풍 숲은 단풍철에만 유별난 것이 아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이 모두 아름답다. 잎눈에서 새싹이 벌어질 봄철 역시 별천지다. 잎눈이 외치는 함성까지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다면, 자연과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당신의 능력을 자랑해도 좋은 경지다. 여름의 녹음도 빠트릴 수 없다. 녹색이 주는 풍요로움과 안락함을 느낄 수 있으면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변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뭇잎을 모두 떨어뜨린 나목이 도솔천에 비친 겨울 숲의 모습 역시 유별나다.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안목도 겨울 도솔천 숲에서 기를 수 있다.
‘인간 세상에서 하늘로 가는 기분’
선운사에서 도솔암에 이르는 3.2㎞의 도솔천 계곡은 문화재청이 2009년 9월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54호’로 지정한 곳이다. 명승(名勝)이란 ‘지정문화재의 종류 중 기념물에 해당하는 것’을 말한다. 명승으로 지정되는 기준에는, ‘첫째 이름난 건물이 있는 경승지 또는 원지(苑地), 둘째 화수(花樹)·화초·단풍 또는 새와 짐승 및 어충류(魚蟲類)의 서식지(棲息地), 셋째 이름난 협곡·해협·곶·급류·심연·폭포·호소(湖沼) 등, 넷째 이름난 해안·하안·도서 기타, 다섯째 이름난 풍경을 볼 수 있는 지점, 여섯째 특징이 있는 산악·구릉·고원·평야·하천·화산·온천·냉광천 등’이 있다.
선운산(禪雲山)에서 시작되는 도솔천 계곡은 화산작용으로 형성된 암석들이 거대한 수직 암벽을 이루고, 그 아래 물이 졸졸 흐르는 도솔천 주변에는 다양한 종류의 활엽수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하게 자란다. 수직 암벽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계절마다 독특한 풍광을 자아내기에 사람들은 이 숲길을 주저 없이 선운사 일대 경관의 백미로 일컫는다.
따라서 선운사를 찾게 되면 경내에만 머물지 말고, 도솔암에 이르는 명승 숲길을 걸어볼 일이다. 이 숲길을 특히 권하는 이유는 도솔암까지 난 자동차 통행로와 별개로 계곡 옆에 보행자를 위한 넓지도 좁지도 않은 자연 그대로의 산책로가 나 있기 때문이다. 이 숲길의 여정에는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수도했다는 진흥굴, 동학접주 손화중(孫華仲)이 비결(秘訣)을 꺼냈다는 거대한 마애불, 우산처럼 퍼진 수령 600년의 장사송(長沙松)에 얽힌 갖가지 전설의 현장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7~8년 전 나는 천연기념물 소나무 책을 준비하느라 도솔암 계곡 길을 철마다 걷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인적 드문 봄철 저녁과 가을철 새벽녘에 생명의 기운이 그윽한 이 숲길을 혼자 거닐며 느끼던 독특한 아취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오죽하면 소설가 정찬주씨는 선운사에서 도솔암에 이르는 이 명승 숲길을 ‘인간세상에서 하늘로 가는 기분’이라고 썼을까. 그의 언급은 아마도 이 숲길이 불가에서 극락을 상징하는 도솔암의 내원궁까지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선운사에서 도솔암을 거쳐 선운산에 이르는 여정을 노래한 구한말 이홍구(李洪九)의 ‘선운산풍경가(禪雲山風景歌)’에도 명승으로 지정된 도솔천 계곡의 아름다움과 주변 수림의 무성함을 언급하고 있음을 비추어볼 때, 이 숲길은 오래전부터 이 고장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음에 틀림없다. 그런 전통 때문인지 몰라도, 단풍이 시작되기 전 초가을에는 붉은 꽃무릇이 이 숲길을 장식하고, 가을이 깊어지면 단풍나무, 붉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갈참나무들이 멋진 단풍 풍광을 만들어내기에, 명승이란 이름이 그냥 붙여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선운사 소금에 얽힌 사연
지난 10월1일부터 3일까지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승시(僧市)’가 열렸다. 승시란 스님들의 산중 장터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번성했다고 한다. 이번에 새롭게 재현된 승시에는 칠곡 토향암의 도자기 제작 시연, 해남 대흥사 녹차 제다 시연, 경북 의성군 고운사 청국장 담그기 등도 선보였다고 한다. 산중 장터에 나온 품목으로 목탁, 염주, 전통등, 목판화, 연꽃 양초, 장아찌, 차와 함께 선운사의 소금도 포함돼 있다는 신문기사는 절집 숲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는 나의 관심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절집은 농경사회에서 생필품의 생산기지 노릇도 감당했다. 고려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사찰이 생활필수품(기름, 벌꿀, 종이, 소금, 술, 베옷)과 농산물(차, 마늘, 파)과 목공 및 금속품을 생산하고 판매했다. 조선시대 역시 사찰이 생활필수품 생산에 일익을 담당했음을 기록은 밝히고 있다. 종이(전주 송광사), 향탄(香炭·문경 김용사), 송화(통영 안정사), 위패(구례 연곡사) 생산 등에 얽힌 원고를 쓰면서, 소금 생산을 담당했던 절집에 대한 궁금증도 없지 않았다. 이런 나의 지적 호기심에, 승시에 선운사가 소금을 내놓았다는 기사는 그냥 흘려버릴 수 없는 희소식이었다. 선운사 홈페이지는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의 소금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 이름도 ‘검단리’라 했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염전을 일구어 인근의 재력이 확보된 배경 등으로 미루어 보아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의 내용은 선운사의 창건이 신라의 진흥왕이라기보다는 소금 생산으로 부를 축적한 검단선사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주장과 함께, 전통 소금생산 방법을 밝히고 있어서 흥미롭다. 오늘날 소금 하면 염전에서 바닷물을 증발시켜 만든 천일염을 연상하지만, 100여 년 전 우리나라에는 천일염이란 소금이 없었다. 주안에서 처음으로 천일염전이 만들어진 1907년 이전에 이 땅의 모든 소금은 바닷물을 끓여서 만들었다. 바로 자염(煮鹽)이다. ‘선운사 사적기’를 통해서 지금부터 1430여 년 전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 스님이 도적들에게 전수했다는 소금 굽는 방법은 바로 자염 제작법이라 할 수 있다.
선운사에 소나무가 귀한 까닭
소금은 물과 공기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으면 안 될 소중한 생활필수품이다. 얼마나 소중했으면 농경에 필수적인 가축 ‘소’와 귀한 재화 ‘금’을 붙여 이름 지었을까. 오늘날 그 용처가 1만4000여 가지나 된다는 소금은 옛날에도 사람은 물론이고 가축들에게도 필요한 물질이었다. 성인 한 사람에게 필요한 소금의 양은 한 해에 300g에서 7㎏ 안팎이고, 말은 인간의 5배, 소는 인간의 10배나 되는 염분을 섭취한다는 외국의 보고도 있다.
산림학자가 소금 생산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닷물을 끓여서 자염을 생산하는 데는 화력이 좋은 연료가 필요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바닷가에 자라는 소나무를 자염생산에 필요한 임산연료로 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태안문화원에서 최근 재연한 결과에 의하면 자염 1㎏을 생산하는 데 마른 솔가지 2㎏이 든다고 한다. 물론 바닷물은 다른 나무로도 끓일 수 있지만, 송진 성분이 함유된 소나무만큼 화력이 좋지 못해서 소금 생산에 필요한 연료는 단연 소나무를 으뜸으로 쳤다. 오늘날 선운사 일대에 소나무를 쉬 볼 수 없는 이유는 자염 생산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선운사 일대에서 재목감의 소나무를 조달하기 쉽지 않았다는 기록은 선운사의 중창 기록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선운사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성종(1473년)의 숙부 덕원군의 도움으로 중창불사에 필요한 재목을 나주 보을정도(寶乙丁島)에서 확보해 2층의 장륙전과 관음전을 완공했다고 한다. 그 중창불사를 기념하고자 선왕인 예종의 영혼을 추모하는 어실(御室)을 마련하면서 선운사는 원찰이 되어 왕실의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됐다.
정유재란으로 불탄 선운사를 다시 세운 과정도 흥미롭다. 기록은 어실을 구실 삼아 고창 문수산의 재목을 확보해 보전 5칸을 세우고 상하누각과 동서 양실을 갖추게 됐다고 밝혔다. 왕실의 도움으로 확보하게 된 원찰이라는 사격을 활용해 중창에 필요한 재목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확보할 수 있었던 셈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기록 덕분에 오늘날 선운산에 단풍나무나 느티나무처럼 활엽수가 무성한 이유나 만세루가 다양한 굵기의 기둥으로 세워진 까닭은 물론, 예로부터 선운산 주변에는 재목감으로 쓸 소나무가 많지 않았음을 추측할 수 있는 셈이다. 혹 소금 생산에 화력이 좋은 소나무를 너무 많이 벌채했기 때문에 소나무가 고갈된 것은 아닐까.
선운사 인근에 자리 잡은 마을(고창군 심원면 고전리)에는 불을 때서 소금을 만들던 흔적이 1954년까지 전해졌으며, 1946년 고전리 일대에 삼양염업사가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그 후 매년 봄·가을이면 선운사에 소금을 기증하고 있다고 한다. 승시에 내놓은 선운사의 소금은 바로 삼양염업사의 소금이라 할 수 있다.
선운사의 자랑거리는 색동 단풍 숲만이 아니다. 색동 단풍 숲보다 더 유명한 것은 천연기념물 184호로 지정된 동백 숲이다. 이 동백 숲은 절 뒤쪽 비스듬한 산 아래에 30m 폭의 가느다란 띠 모양으로 자라고 있으며, 선운사가 창건된 뒤 조성된 인공림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많은 자연유산 보유한 절집
동백나무는 추운 겨울에 꽃이 피고, 바람이나 곤충의 도움 대신에 드물게도 동박새의 도움으로 꽃가루를 받아 종자를 만들며, 아름답게 꽃이 핀 상태에서 송이째 떨어지는 특성이 있다. 이런 특성과는 별개로 주목할 점은 산불에 강한 상록성 동백 숲을 절집 주변에 조성한 옛 스님들의 지혜다. 몇 해 전 동해안의 산불로 낙산사가 전소된 후, 절집마다 산불피해를 막고자 건물 주변의 식생을 깨끗이 정리하고, 새롭게 방화수림대를 앞 다투어 조성한 것과는 달리, 선운사는 적어도 수백 년 전부터 동백 숲으로 절집을 산불로부터 지켜오고 있었던 셈이다. 만세루에서 영산전과 명부전을 향해서 찍은 1922년에 출판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을 보면, 90여 년 전 당시에도 동백 숲이 무성했음을 알 수 있다. 선운사 동백 숲은 바로 절집에서 창안해낸 전통 생태적 지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선운사 동백나무 숲은 이런 과학적 해석과는 달리 멋진 시어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는 세파를 비켜 앉은 선운사의 신성함, 동백꽃의 아름다움, 막걸리집 여자의 목쉰 육자배기 가락이 갖는 세속성을 다함께 버무려놓은 작품이다. 선운사 동백나무 숲을 찾으면 한 번쯤 읊어볼 일이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선운사가 품고 있는 천연기념물은 또 있다. 도솔암 진흥굴 앞의 장사송(천연기념물 354호)과 절 초입에 있는 송악(천연기념물 367호)이 그렇다. 장사송은 줄기가 마치 우산처럼 여러 갈래로 펼쳐진 모습으로 자라는 600년 묵은 아름다운 소나무다. 장사송(長沙松)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의 옛 이름인 장사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별칭으로 진흥송이라고도 하는데, 이 소나무가 진흥굴 앞에 자라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절집 초입의 선운천 절벽에 붙어사는 송악은 주로 서남해안이나 섬지방의 숲 속에서 자라는 상록성 덩굴식물이다. 선운사의 송악은 북방한계선에 가까운 내륙에서 자라고 있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짐작건대 문화재로 지정된 자연유산 수목을 3점이나 보유한 절집은 선운사뿐일 것이다. 선운사가 수백 년 묵은 색동 단풍 숲은 물론이고, 동백 숲, 장사송, 송악과 같은 진귀한 자연유산을 보유할 수 있었던 데는 조선시대 왕실의 원찰로 지정된 선운사의 사격(寺格)도 일조를 했을 것이다.
● 1951년 경남 마산 출생
● 고려대 임학과 졸업
●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 석사, 박사
● 現 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 저서: ‘숲과 한국문화’ ‘나무와 숲이 있었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 ‘숲 보기 읽기 담기’ ‘한국의 명품 소나무’ 외 다수
종무소의 이성수 총무과장에게서 들은 인상적인 이야기는 옛날부터 노스님들로부터 전해 내려왔다는 나무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선운사가 오래전부터 차나무를 재배하거나 경내에 오래된 은행나무들을 키워온 이유는 차와 은행을 팔아 절집의 궁핍한 살림살이에 보태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또 도솔암 골짜기 군데군데에 굵은 갈참나무가 아직도 많이 자라는 것 역시 춘궁기에 도토리를 구황식품으로 확보하고자 특별하게 지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은행나무나 갈참나무에 얽힌 이런 이야기는 경관적 관점에서, 생태적 관점에서 절집의 나무나 숲을 보고 읽고자 한 산림전문가에게 또 다른 깨침이자 준엄한 채찍이었다. 절집의 경관이란 것도 결국의 지난했던 우리네 삶의 흔적을 간직한 또 다른 문화유산임을 절실하게 느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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