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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정사 적광전 앞 뜰. 눈을 덮고 선 소나무가 법신의 광휘인 듯하다. 낮과 밤. 시간의 두 기둥입니다. 우리는 이 두 기둥이 만들어내는 공간에서 삶을 이어갑니다.
‘주리면 먹고 졸리면 잔다.’ 출세간의 사람들이 사는 법입니다. 세간 살림 꼴로 바꾸면 이렇게 되겠지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쉰다.’ 세간이든 출세간이든 사람이 산다는 것은 이렇게 단순합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일이 왜 이리 ‘꿈’같은지요. 저녁 공양을 마치고나자 도량 가득 법고 소리가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그 소리를 따라 산그늘은 깊어지고 침묵은 단단해집니다. 가끔씩 들리던 까마귀 소리도 종적을 감춘 지 오래입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는 저 법고의 텅 빈 심장 속으로 들어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월정산의 상징인 전나무 숲길. 나이 몇백을 헤아리는 우람한 나무들이 800 미터쯤 되는 길가에 늘어서 있다.
산사의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법고 소리를 따라 어둠이 밀려오는 때입니다. 동지와 설 사이인 이맘때가 제격이지요. 더욱이 월정사는 언제 봐도 꽉 찬 달 같은 형국의 둥두렷한 오대산 자락이 감싸고 있어서 밤 풍경은 더욱 그윽합니다.
절집에서는 일거수일투족이 절로 정갈해집니다. 신발을 벗으면서도 몸을 바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섬돌의 정갈한 네모가 신발을 제멋대로 벗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집에서든 바깥에서든 신발 하나 제대로 벗어 두지 못하는 우리네 일상의 매무새가 얼마나 구겨져 있는지를 여실히 알게 합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쉰다’는 이 단순한 삶의 원리가 ‘꿈같은 일’로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겠지요.
따뜻한 온돌 위에 두 다리를 뻗고 시간을 헤아려 봅니다. 오후 7시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느낌은 한밤중 같습니다. 덤으로 하룻밤을 더 얻은 기분입니다. 졸음이 봄볕처럼 다가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나른한 기쁨입니다. 한소끔 단잠을 자고나자 머리가 말개집니다. 사위는 고요 그 자체입니다. 다시 일상을 떠올려 봅니다. 한밤중에도 끊이지 않는 자동차 소리, 냉장고 윙윙대는 소리가 귀에 생생합니다.▲ 연꽃잎 모양의 등.
잡것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밤의 정체가 궁금하여 방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맙소사,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없이 전혀 다른 세상이 태어나 있습니다. 눈입니다.
살금살금 적광전 앞뜰로 나갔습니다. 낮과 밤 혹은 빛과 어둠의 경계가 무너진 대적광(大寂光)의 세계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광명의 부처’로 일컬어지는 비로자나불의 세계가 결코 관념의 세계가 아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봅니다. 다시 방안으로 들어서자 옷에 묻어온 한기가 청신한 겨울 냄새로 코끝에 서립니다. 문득 한 생각이 일어납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단 하루도 온전한 밤을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이 그것입니다. 낮에 하는 일은 두고라도, 밤에 쉬어야 하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며 허겁지겁 사는 현실이 통탄스러웠습니다.▲ 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것이 통례이나 석굴암 본존불의 형태를 따른 석가모니불상을 모시고 있다.
제대로 살려면, 제대로 쉬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런 강박도 없이 그냥 쉬는 공부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결코 요가센터나 피트니스클럽, 스키장, 온천… 같은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겠지요.
산사의 아침은 눈을 치우는 일로 시작됐습니다. 그냥 두면 될 일이지 무슨 법석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할 일이 또 있는 법. 눈을 내린 하늘의 뜻과 눈을 치우는 사람의 뜻이 다른 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눈을 치우는 일도 법석(法席)이겠지요. 월정사 대중들이 가르마처럼 곱게 내놓은 길을 따라 다시 적광전 앞에 섭니다. 뒤로 눈을 이고 선 금강송의 자태가 비로자나부처님의 광배(光背)처럼 빛납니다. 적광전 앞의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은 구름을 어깨 위에 올린 양 하늘 깊숙이 솟아 있습니다. 그런데 석탑 앞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의 빈 자리가 어제와 달리 더 크게 느껴집니다. 아쉽게도 석탑 앞의 보살상은 현재 월정사성보박물관(보장각)에 모셔져 있습니다. 영구 보존을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이겠지요. 하지만 단순히 문화재로서가 아니라 신앙적 측면의 현재성을 고려하면 제자리에 있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굳이 탓을 하자면 산성비로 상징되는 고약한 환경에 손가락질을 해야 할 텐데, 결국 그 손가락 끝은 우리 모두를 향하겠지요. 만시지탄입니다.▲ 월정사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 얼굴의 웃음꽃이 선한 마음의 고갱이를 보여주는 듯하다.
사실 이번 여행은 그 보살상의 선한 웃음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한국의 얼굴 중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월정사 보살상을 들 것입니다. 그 얼굴을 떠올리면 나는 인간의 본성은 본디 선하다는 쪽으로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 얼굴에 어린 웃음은 세계인이 경탄해마지 않는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이나 서산 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과도 다릅니다. 월정사 보살상의 얼굴에는 온 마음 온몸으로 자신을 누군가에 바치는 진심이 어려 있습니다. 그 얼굴에 핀 웃음꽃에서 나는 자타(自他) 혹은 주객(主客)이 무너진 마음자리의 향기를 느낍니다. -
▲ 금강문. 판문 벽화가 익살스럽다.
능가산 내소사
‘쓸 데 없는’ 떠돌기. 본시 여행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떠돌이의 삶을 타고난 집시나 유목민도 쓸 데 없이 떠돌지는 않습니다. 떠돎은 그들의 생존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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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에 싸인 능가산 기슭의 내소사 중정. 산지가람이지만 평지가람처럼 탁 트인 느낌을 준다. 보물 제 291호인 대웅보전은 조선 중기의 사원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 정교한 비례와 구조미의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떠도는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한 여행은 분명 근대의 산물입니다. 순수한 여행은 수확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무목적이 합목적입니다. 물론 명확한 목표를 겨냥한 여행이 없는 건 아닙니다. 취재 여행이나 답사 여행, 혹은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한 여행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여행에는 ‘순수한 바람기’가 없습니다. 여행의 진정한 매력은 그냥 바람처럼 떠도는 데 있습니다.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학창시절 수학여행에서 과연 ‘수학(修學)’에 얼마만큼의 관심이 있었는지를.
여름의 정점입니다. 유희본능에 충실한, 괜히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공중제비를 돌고는 대양에 종주먹질을 해대는 돌고래처럼, 산과 들 그리고 바다로 휘젓고 다니기 좋은 계절입니다. 이런 여행지로 서해 변산 만한 곳도 드물 것 같습니다. 이른바 산해절승(山海絶勝), 산과 바다가 두루 빼어난 곳이니까요.
내소사의 전나무 숲길이 아무리 좋기로 곧장 그곳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발길 닿는 곳마다 판소리 사설처럼 펼쳐지는 풍광들이 들려주는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건, 가마 타고 조는 한심한 양반놀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누천년 파도가 깎아 만든 해식단애와 갯벌, 그리고 구름을 휘감은 첩첩 산봉우리가 연이어 펼쳐지는데 어찌 앞만 보고 달릴 것입니까. 만약 요즘 같은 장마철에 변산으로 가다가 바닷가 바위벼랑 어디선가 한 소나기를 만난다면, 그것은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이전 신화의 한 장면을 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내소사 가는 길은 게으를수록 좋습니다.▲ 천왕문의 사천왕상. 가람의 수호신이다. 험상궂은 인상이 오히려 해학적이다. 벌 줄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벌할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본분사여서 그런 것일까?
마치 아프리카 지도를 가로로 뉘어놓은 듯한 변산반도는 크게 내변산과 외변산으로 나뉩니다. 채석강과 격포 해수욕장, 적벽강, 고사포 해수욕장, 변산 해수욕장 같은 북서쪽 바닷가쪽이 외변산입니다. 그리고 옥녀봉에서 신선봉, 관음봉, 의상봉으로 이어지는 산지가 내변산입니다. 따라서 변산이라는 이름은 반도 전체를 일컫기도 하고, 호남정맥의 가지줄기인 변산의 산군 전체를 이르기도 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변산반도는 딱히 어느 한 산을 지목하여 ‘변산(邊山)’이라는 이름을 달아주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꼬집어 변산을 지칭하자면 예로부터 최고봉인 내변산 북쪽의 의상봉(508m)보다는 내소사 뒷봉우리인 관음봉(425.5m)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흔히 내소사는 ‘능가산 내소사’로 불리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변산을 일러 ‘능가산으로도 불리고, 영주산으로도 불린다’고 한 기록을 그 근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다.
변산에 관한 옛 기록은 여럿입니다만 이중환이 택리지에 쓴 내용만을 옮겨 보겠습니다.▲ 무설당의 방 안에서 설선당을 바라본 모습. 인간과 자연의 소통을 중재하는 우리 전통 건축의 미덕을 함축한 장면이다.
“노령에서 (산줄기) 한 가지가 북쪽으로 부안에 와서 서해 가운데로 쑥 들어갔다. 서쪽·남쪽·북쪽은 모두 큰 바다이고, 산 안에는 많은 봉우리와 구렁이 있는데, 이것이 변산이다. 높은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산꼭대기, 평평한 땅이나 비스듬한 벼랑을 막론하고 모두 큰 소나무가 하늘에 솟아나서 해를 가렸다. … 주민이 산에 오르면 나무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기와 소금 굽는 것을 업으로 하여,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값을 쳐 사지 않아도 풍족하다.”
이제 내소사로 들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내소사는 633년(백제 무왕 34년)에 혜구 두타 스님이 소래사(蘇來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소래사(蘇來寺)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조선 중기 이후에 개명이 됐다는 얘기인데, 당나라의 소정방이 신라를 도와 백제를 칠 때 이 절에 시주를 하여 내소사로 개명됐다고 전하는 얘기는 거의 믿을 만한 구석이 없습니다. 더욱이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이곳에 그 같은 전설이 전한다는 것은 괴이쩍기조차 합니다.
소래사에서 내소사로 바뀐 내력은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단순히 글자 순서를 바꾼 것 이상의 심오함이 내포돼 있습니다. 절이라는 공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를 한번 헤아려 보겠습니다.
개명에 관해서는 대웅보전 중건과 관련된 전설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대웅보전은 호랑이가 화현한 대호선사가 중건했다고 하고, 파랑새로 화현한 관세음보살이 단청을 했다고 합니다.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간단히 줄여보면 이렇습니다.
대웅전을 짓기로 한 목수는 3년을 하루같이 집을 짓지는 않고 법당을 장엄할 나무토막만 다듬었습니다. 이를 한심하게 여긴 동자승 하나, 심술스런 호기심으로 슬쩍 한 토막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드디어 그 일을 마친 목수가 나무토막을 헤아려 본즉 하나가 비었습니다. 목수는 장탄식을 했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한심스러웠던 목수는 일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이를 보고 동자승이 감추었던 토막을 내놓았지만, 끝내 목수는 그것을 부정한 것이라 하여 쓰지 않고 집을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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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래루 앞에서 사천왕문 쪽으로 바라본 모습. 천년을 넘은 느티나무가 633년에 창건된 절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무성한 잎 위로 죽은 가지를 달고 있는 모습은, 생사가 본디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것 같다.
건물이 완공된 후 단청을 할 때였습니다. 화공은 백일 동안 아무도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동자승의 인내심은 99일이 한계였습니다. 몰래 창구멍을 뚫고 본즉, 파랑새가 붓을 들고 단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파랑새는 마지막 붓질을 멈추고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내소사 대웅보전 내부공포 한 칸은 비어있고, 단청 한 군데는 바탕색만 칠해져 있습니다. 인공의 한계에 대한 섬세한 고백, 혹은 자연에 다가서는 고수의 태도를 알게 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에 관한 아주 매력적인 시 한 편이 있습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산문시인데, 조금 길긴 하지만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천연스런 우리말의 최고 경지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소사 대웅보전 단청은 사람의 힘으로도 새의 힘으로도 호랑이의 힘으로도 칠하다가 칠하다가 아무래도 힘이 모자라 다 못하고 그대로 남겨 놓은 것이다.
내벽 서쪽 맨 위쯤 앉아 참선하고 있는 선사, 선사 옆 아무것도 칠하지 못하고 너무나 휑하니 비어둔 미완성의 공백을 가 보아라. 그것이 바로 그것이다.▲ 내소사의 상징인 전나무 숲길. 600미터에 이르는 이 숲길은 사실상의 내소사 일주문이다.
이 대웅보전을 지어놓고 마지막으로 단청사를 찾고 있을 때, 어떤 해어스럼제 성명도 모르는 한 나그네가 서(西)로부터 와서 이 단청을 맡아 겉을 다 칠하고 보전 안으로 들어갔는데, 문고리를 안으로 단단히 걸어 잠그며 말했었다.
“내가 다 칠해 끝내고 나올 때까지 누구도 절대로 들여다보지 마라.”
그런데 일에 폐는 속(俗)에서나 절간에서나 언제나 방정맞은 사람이 끼치는 것이라, 어느 방정맞은 중 하나가 그만 못 참아 어느 때 슬그머니 다가가서 뚫어진 창구멍 사이로 그 속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나그네는 안 보이고 이쁜 새 한 마리가 천정(天井)을 파닥거리고 날아다니며 부리에 문 붓으로 제 몸에서 나는 물감을 묻혀 곱게 곱게 단청해 나가고 있었는데, 들여다보는 사람 기척에“아앙!”소리치며 떨어져 내려 마루바닥에 납작 사지를 뻗고 늘어지는 걸 보니, 그건 커어다란 한 마리 불호랑이였다.
“대호(大虎) 스님! 대호 스님! 어서 일어나시겨라우!”
중들은 이곳 사투리로 그 호랑이를 동문(同門) 대우를 해서 불러댔지만 영 그만이어서, 할 수 없이 그럼 내생(來生)에나 소생(蘇生)하라고 이 절 이름을 내소사(來蘇寺)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단청하다가 미처 다 못한 그 빈 공백을 향해 벌써 여러 백년의 아침과 저녁마다 절하고 또 절하고 내려오고만 있는 것이다.
―내소사 대웅전 단청(전문)
그렇습니다. ‘와서(來)’, 나를 ‘다시 하는(蘇)’ 절이 바로 내소사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오늘이고 미래는 다가올 오늘입니다. 나날이 나를 새롭게 하는 것이 영원을 사는 길임을 일깨우는 절이 바로 내소사입니다.▲ 대웅보전 전면의 투각한 꽃 문살. 한땀 한땀 수를 놓은 듯이 정교하다.
사실 내소사에 대해서는 너무 널리 알려져 있어서 앵무새 같은 설명 따위는 괜한 수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유명한 전나무 숲길이나 대웅보전(보물 제291호), 고려동종(보물 제277호)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관음봉과 세봉 사이의 산 중턱에 자리한 청련암으로 걸어오를 것을 권합니다.
간간이 오솔길을 가로질러 흐르는 계류가 피워 올리는 물안개를 벗 삼아 느긋이 올라도 30분이면 족합니다. 그곳에서 서해로 몸을 돌려 세우고, 곰소만의 그림 같은 풍광에 잠겨 보십시오. 필시 마음 속 한 귀퉁이에서 ‘물처럼 바람처럼 살고프다’며 꼬드기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못 이긴 척 속아 넘어갈 일입니다. 그것이 내소사에서 할 일입니다.
운달산 김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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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앞마당. 보제루를 마주보며 양편에 해운당과 설선당을 둔 ㅁ자 형이다.
여름 한철, 우리는 맹렬히 자유로웠습니다. 옷자락을 조금 풀어헤쳐도 크게 허물이 될 게 없었습니다. 설사 그것이 방종이라 할지라도 유쾌한 일탈이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산수간(山水間)에 두었기 때문이겠지요.
다시 일상입니다. 아침마다 같은 번호의 버스, 같은 노선의 지하철에 몸을 싣고 쳇바퀴 돌듯 하루하루를 살아내야겠지요. 이런 동굴 같은 일상을 무덤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여름 한철 마음속에 푸른 빛다발을 비축하는지도 모릅니다. 여행은 인간들의 광합성입니다.
일상의 건강에서 삶의 궁극을 찾은 이들이 있습니다. 조주(趙州?778-897) 스님이 남전(南泉?748-795)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도입니까(如何是道)?”
“평상심이 바로 도다(平常心是道).”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가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러한 선(禪)의 전복성은 ‘번뇌가 곧 보리(菩提, 지혜)’라는 혁명적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일상에 대한 가없는 긍정입니다.▲ 사역 뒤편 가장자리 계곡 옆에 선 약사여래불. 조각수법이 소박하여 천연스럽다.
하루하루의 삶을 벗어나 찾아야할 도는 없다는 선사들의 통찰은 비루한 일상 그대로를 보석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선사들에게 깨침은 ‘세수하다 코 만지기’입니다. 구름을 타고 찾아야할 도 같은 건 없다는 말이겠지요. 어쩌면 선사들이야말로 일상성에 주목한 최초의 인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잘 쉬는 것도 하나의 경쟁력’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쉬는 일 자체가 일종의 스트레스가 될 소지도 다분해졌습니다. 이제 곧 매스컴에서는 바캉스 증후군 운운하면서 뻔한 소리를 심각한 표정으로 하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동원하겠지요. 괜히 덩달아 심각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처방전을 들고 있으니까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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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룡사를 감싸고 흐르는 자연의 광휘, 금강소나무로 절정
운달산 김룡사를 찾았습니다. 귓속에 맴도는 파도소리나 주머니 속에 남은 모래알을 털어내는 데 산사의 침묵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소득은 기대한 것의 몇 갑절이었습니다. 그것은 세 번의 놀람으로 다가왔습니다.
첫번째 놀람은 절을 둘러싼 자연의 눈부심 때문이었습니다. 자동차가 무시로 드나드는 활짝 열린 곳에 아직도 때 묻지 않은 계곡과 원시림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경이였습니다. 백두대간이 대미산(1,115m)에서 남쪽으로 한 가지를 뻗어 일으켜 세운 운달산(1,097.2m)은 팔처럼 계곡을 풀어 김룡사를 안고 있습니다.▲ 운달산의 수림과 운무와 하나를 이룬 전각들.
그 중 서남쪽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이 바로 운달계곡인데 현지에서는 냉골로 불립니다. 얼음처럼 서늘한 계곡이라는 말이겠지요. 태고부터 도끼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원시림이 머금었다 흘려보내는 풍부한 물이 사철 계곡을 적시고 있습니다. 계곡은 흐르는 물 위로 또 한 겹 물결처럼 안개를 피워 올리고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차를 버리고 안개 위에 몸을 실어 올리면 울울창창한 전나무 숲길이 길잡이를 해줍니다. 이 땅에 아름다운 전나무 숲길이 한둘은 아니지만 이곳은 특별합니다. 계곡을 끼고 그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휘어 돌기도 하고, 사이사이에 단풍나무와 층층나무 같은 활엽수들을 끼고 있어 진한 원시성을 느끼게 합니다. 쉴 새 없이 바위를 간질이는 물과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몸을 내맡기고 있는 바위, 그 억겁의 포옹에 넋을 다 주고 말 즈음 홀연히 산문이 나타납니다. 김룡사 일주문인 홍하문(紅霞門)입니다. ‘붉은 노을’이라는 문 이름이 녹음 속에서 이채롭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머리 속으로 아둔한 상상력이지만 단풍 든 숲길을 불러내 봅니다.▲ 배롱나무(나무 백일홍) 꽃불을 켠 응진전.
홍하문 아래에 걸린 ‘雲達山金龍寺(운달산김룡사)’ 편액은 구한말의 독립운동가로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이었던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의 글씨라고 합니다(대한불교진흥원 편 <한국사찰의 주련과 편액> 하권 참조). 홍하문 오른쪽에는 민예품처럼 투박한 조각수법의 귀부가 눈길을 끄는 비석이 보이는데, 이는 절에 전답을 희사한 계성당(桂城堂)의 송덕비라고 합니다. 일주문 안의 비는 김룡사에서 출가한 근세의 걸출한 학승이자 초대 동국대 총장이었던 퇴경당 권상로 대종사의 사적비입니다.
▲ 보제루 옆 모퉁이 계단. 대웅전으로 오르는 길이다.
다시 숲길을 걸어올라 오른쪽으로 살포시 돌아 오르면 김룡사의 전각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눈길을 붙잡는 것은 마치 금강역사인양 가람을 감싸고 있는 금강 소나무의 모습입니다. 김룡사를 감싸고 흐르는 자연의 광휘는 그것으로 절정을 이룹니다. 운달계곡과 전나무숲, 그리고 소나무는 김룡사의 살아있는 탱화입니다(참고로 수령 50~90년에 이르는 이 전나무들은 경북산림환경연구소에서 관리하는 채종림이이기도 하다).
조금 속물스럽긴 합니다만 두번째 놀람은 왜 이런 절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전국 31본산의 하나로 50개 말사를 관장하던 큰 절이었습니다. 이런 절이 왜 한갓진 산속 절로만 치부되고 있는 것일까요. 상당히 주관적인 얘기일지 모겠지만, 근래의 과도한 문화재 집착이 이런 현상을 가져온 게 아닌가 합니다.
‘만약 무엇이든 마음에 걸어 두는 일 없다면, 늘 호시절일진저’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사찰의 격을 말할 때 국보급 문화재의 보유 유무를 그 척도로 삼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 기준일 수는 없습니다. 결코 절은 박물관이 아닙니다. 당연히 불교 신자들에게는 제1의 의미가 신앙 공간일 테지만, 아닌 사람들에게는 ‘잘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닦음’이 아닐까요. 문화(재) 학습장으로서 기능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후순위로 밀려도 좋을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얻은 한가한 마음. 이보다 좋은 수신(修身)이 또 있을까요. 첨단 문명사회일수록 자연과 인간의 매개공간으로서 절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절이 자연의 품에 안김으로써 우리는 삶 깊숙한 곳에 자연을 담을 수 있습니다.
절은 인간화한 자연의 진경입니다. 그것의 한 부분을 김룡사 가람에서 봅니다. 보제루 석축 앞의 상사화가 곱게 피어 있습니다. 잎이 다 시들고 난 뒤 꽃을 피워 이별초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애끊는 사랑의 상징인 꽃입니다. 하지만 이 꽃이 절마당으로 들어오면 ‘피안화(彼岸花)’가 됩니다. 우리 모두도 언젠가는 저 꽃처럼 홀로 자연으로 돌아가겠지요. -
▲ 가람을 수호하는 금강역사 같은 소나무가 후광으로 빛나는 운달산 김룡사. 명부전 옆 둔덕에서 바라본 모습.
봉명루(종각)에서 감로당쪽으로 오르는 길가의 개미취 보랏빛 꽃은 지상으로 내려앉은 별빛인양 합니다. 그 빛을 밝고 오르면 대웅전 뒤쪽으로 금륜전(산신각.독성각)과 극락전, 응진전 앞에서 배롱나무(나무 백일홍)가 꽃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의 그림자는 그 꽃 그림자 속에서 피안(彼岸)에 이릅니다.
세번째 놀람은 근세 고승들의 수행처였다는 사실입니다. 조계종 종정을 지내셨던 성철, 서암, 서옹 스님이 바로 그분들입니다. 자연의 가장 내밀한 곳으로 다가간 그분들로 하여 김룡사는 더욱 그윽해집니다.▲ 응진전 앞 배롱나무 꽃 진 자리. 피안으로 가는 징검다리인 양이다.
풍수가들의 말에 따르면 김룡사의 가람은 누운 소(臥牛)의 형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소의 눈에 해당하는 부분이 동쪽 계곡 너머 명부전이랍니다. 앞서 말한 스님들 모두 그곳에 머물렀다 합니다. 눈 밝은 스님들이어서 소의 눈을 찾은 것인지, 소의 눈이 스님들의 눈을 밝혔는지는 모르겠으되, 자연에 대한 눈뜸 없이 깨달음을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김룡사의 초창은 588년(신라 진평왕 10)의 일입니다.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역사는 알 길이 없고, 1625년(조선 인조 3년)에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운달 스님이 창건할 당시의 이름은 운봉사였다고 하는데, 냉골의 차가운 기운이 구름을 피워 올리는 정경을 떠올리기 어렵지 않습니다.
현재의 이름으로 바뀐 때는, 절에 전하는 괘불의 화기(畵記)에 1703년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이후로 보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김씨 성을 가진 이가 냉골에 숨어 살며 신녀(神女)를 만나 용(龍)라는 아들을 낳고부터 가운이 성했다고 해서 동리 이름이 김룡으로 바뀌었고 절이름도 그리 됐다고 합니다. 운달계곡 상류의 금선대와 용소폭포의 첫 글자를 따서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하지만 김룡사 존재 의미는 믿기 힘든 전설에 기댈 바가 아닙니다. 눈부신 대자연이 후광처럼 빛나는 절이기 때문입니다.▲ 절집의 장맛은 찾아오는 객들을 대하는 주인의 마음을 반영한다. 김룡사의 장맛은 깊고 달다.
남전 스님의 ‘평상시도(平常是道)’를 우리에게 전해 준 무문 스님은 그 때의 심회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노래에 김룡사를 나서는 내 마음을 실어봅니다.
‘봄에는 온갖 꽃, 가을에는 달.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겨울에는 눈. 만약 무엇이든 마음에 걸어 두는 일 없다면, 늘 호시절일진저(春有百花秋有月, 夏有.風冬有雪, 若無閑事?心頭, 便是人間好時節).”
영축산 통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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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축산 통도사. 부처님의 사리가 있어 이곳은 ‘적멸’의 ‘보궁’이다. 또한 이곳에는 모든 승려들이 만법을 통달하여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서원을 하는 금강계단이 있다. 그리하여 통도사는 ‘불보사찰’이자 ‘불지종찰’이다.
좋은 시(詩)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해시키려 들지도 않습니다. 읽는 이의 마음속으로 그냥 다가갈 뿐입니다. 누구나 가끔 ‘아, 참 좋다’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 없는 풍경을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풍경에 대한 감응방식은 좋은 시를 만났을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왕 시 얘기가 나왔으니 한 편 보고 가겠습니다.
까닭 없이 천기를 누설하면서▲ 國之大刹(나라의 큰절)’이자 ‘佛之宗刹(불교의 종가)’이라는 해강 김규진이 쓴 주련을 걸고 있는 통도사 일주문. ‘靈鷲山通道寺(영취산 통도사)라 쓴 편액은 흥선 대원군이 쓴 것이다.
떨어지는 저 빗소리 다정하기도….
앉고 누워 무심히 듣는 소리가
귀를 써서 듣는 것과는 아예 다르네.
無端漏洩天機 滴滴聲聲可愛
坐臥聞似不聞 不與根塵作對
진각국사(眞覺國師·1178-1234)의 ‘밤비’라는 시를 이원섭 시인이 옮긴 것입니다. 어설프게 끼어들 여지가 없는 시입니다만, ‘앉고 누워 무심히 듣는 소리가 / 귀를 써서 듣는 것과는 아예 다르네’라는 대목에서는 한 마디 거들고픈 치기를 누르고 싶지 않습니다. 떠버리들이 흔히 말하기 좋아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니 우주와 합일이니 하는 경지를, 거창한 단어 하나 쓰지 않고도 우리 앞에 그대로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봐라, 너희들도 순간순간 우주와 한 몸을 이루며 살고 있지 않느냐’ 하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도인과 범부의 차이는 이런 것이겠지요. 누구나 경험하는 ‘분별이 무너진 자리’를 무심히 지켜나가며 사는가, 끝없이 부딪치며 갈등하고 아등바등하는가, 바로 거기에 있겠지요.
통도사(通道寺) 가는 길은 무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도(道)로 통하는 길이니까요.
‘國之大刹(국지대찰)’, ‘佛之宗刹(불지종찰)’
통도사는 참 큰 절입니다. 십수 년 전 처음으로 통도사에 갔을 때의 첫 느낌도 그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거기에 더하여 참 ‘깊은’ 절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깊이는 영축산(1,081m)의 우람한 골기와 진입부의 춤추는 노송에서 비롯됩니다. 그 길을 걸어보지 않고는 통도사의 참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자동차를 고집하면 그 길을 놓치기 쉽습니다.▲ 부처님의 계율을 설해 출가 수행자를 득도(得度)시키는 주불전인 금강계단(보물 제144호) 내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므로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경부고속도로 통도사 나들목에서 양산시 하북면으로 접어들어 다닥다닥 붙은 건물 사이 복잡하고 좁은 도로를 벗어나면 곧바로 영축산문이 열립니다. 영축산이 저잣거리로 거의 다 내려온 형국입니다. 세속과 아주 ‘가깝게 먼’ 절이 통도사입니다.
흔히 절은 산과 짝하여 그 이름이 불려집니다. 영축산 통도사, 가야산 해인사, 태백산 부석사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산과 절이 일치하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부석사 같은 경우는 봉황산 기슭에 있지만 그 일대를 대표하는 산인 태백산을 절이름 앞에 내 겁니다. 하지만 영축산은 먼 발치에서부터 혼연히 하나 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영축산문이라는 편액을 단 매표소 앞에서 고개를 들면 지붕선 위로 하늘을 받치고 선 듯한 영축산의 스카이라인이 적멸의 기운을 내뿜고 있습니다. 범부의 눈으로도 과연 부처의 진신이 깃들만한 곳이라는 걸 느끼게 합니다. 매표소를 지나서 무풍교를 건너는 찻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난 숲길로 들어서면 통도사는 맨가슴으로 객을 맞아줍니다. 아니, 이 길에서부터는 주객의 경계가 지워집니다. 1km 남짓한, 드물게 아름다운 소나무 숲길입니다. 이른바 통도팔경의 하나인 무풍한송(舞風寒松)이라는 시적인 이름에 값하는 노송들이 바람의 춤사위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안양암에서 바라본 통도사 전경. 국지대찰(國之大刹)의 면모는 이렇다. 꼿꼿이 우람한 나무, 용틀임하는 나무, 곧 땅으로 드러누울 듯 휜 소나무들이 천연스레 어우러져 있습니다. 바람의 무애무(無碍舞)입니다. 원효 스님이 서라벌 저잣거리를 누비며 추었다는 무애무도 이런 모습이었을 테지요. 그 모습을 보며 한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람이 한 백 년을 살고 나면 어느 정도의 깊이를 보여 줄 수 있을까? ‘벽에 똥칠’만 안 해도…, 하는 결론에 닿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영축산문 초입의 소나무 숲길. 이곳의 소나무가 바로 통도팔경의 하나인 ‘무풍한송(舞風寒松)’이다.
소나무 숲을 다 지나면 계곡 옆으로 활짝 시야가 열리면서 ‘靈鷲叢林(영축총림)’이라는 편액을 단 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른쪽 기슭으로는 역대 고승들의 부도가 또 하나의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잘 살다간 이들의 빛나는 뒷모습입니다. 절 입구의 부도전은 낯설지 않습니다. 내소사와 월정사, 선암사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규모면에서 통도사는 압도적입니다. 이보다 더 간곡한 생사불이(生死不二)의 가르침은 없을 듯합니다.
드디어 일주문입니다. ‘靈鷲山通道寺(영축산통도사)’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흥선 대원군의 글씨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기둥에는 해강 김규진이 쓴 ‘國之大刹(국지대찰)’, ‘佛之宗刹(불지종찰)’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나라의 큰 절이자 한국 불교의 종가라는 의미이겠습니다.
도를 구하는 이, 도통한 이가 가야 할 길
통도사가 불지종찰(佛之宗刹)인 건 그곳이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도사는 불보(佛寶) 사찰로 불리고 법보(法寶) 사찰 해인사, 승보(僧寶) 사찰 송광사와 함께 삼보(三寶) 사찰로 일컬어집니다. 하지만 통도사가 정녕 한국 불교의 종가인 건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있기 때문입니다. 금강계단의 역사적·현재적 의미를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는 통도사의 창건주이기도 한 신라의 대국통 자장율사를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와 관련한 삼국유사의 기사를 보겠습니다.▲ 646년(신라 선덕여왕 15) 자장율사가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받은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한 탑.
“조정에서 의논했다. ‘불교가 동방에 들어와서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그것을 지키고 받드는 규범이 없으니 통괄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다.’
이 의논을 위에 아뢰니 자장율사를 대국통으로 삼아 승니(僧尼)의 모든 규범을 승통(僧統)에게 위임하여 주관하게 했다…중략…자장율사는 이러한 좋은 기회를 만나 불법을 널리 퍼트렸다…중략…이 때에 나라 안에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든 이가 열 집에 여덟아홉이나 되었으며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기를 청하는 이가 해마다 달마다 불어났다. 이에 통도사를 세우고 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을 받아들였다.”(삼국유사 의해편 자장정율 조)
646년(선덕여왕 15)의 일입니다. 자장 스님에 의해 통도사가 세워짐으로써 신라 불교, 넓게는 오늘의 한국 불교가 체계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서, 또한 승려를 배출하는 사찰로서 현재까지도 창건 당시의 의미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절입니다.
지계(持戒), 즉 계를 받아 지닌다는 것은 부처님 곁으로 다가가 승가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결코 단순한 통과의례는 아닙니다. 비구는 250가지, 비구니는 348가지나 받아 지녀야 합니다.
자장 스님이 출가하여 고골관(枯骨觀:육신의 무상을 관찰하는 것. 송장의 살이 다 없어져 백골만 앙상한 모습을 관하는 수행법)을 닦고 있을 때 조정에서 재상의 자리에 오르라고 한 일이 있습니다,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할 정도로 단호했습니다. 하지만 자장 스님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내 차라리 하루 동안 계를 지키다가 죽더라도, 백 년 동안을 계율을 어기고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답이었습니다. 왕은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지계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절 이름을 통도사라 한 까닭은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합니다. 첫째, 승려가 되려면 누구든 이곳 금강계단을 통하여 계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만법을 통달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통도사가 자리 잡은 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사실 이 셋은 하나입니다. 도(道)를 구하는 이가, 도통한 이가 가야 할 길은 이 셋을 아우르기 때문입니다.▲ 금강계단 옆의 구룡지(九龍池). 자장율사가 절을 세울 때 아홉 마리 용을 내 보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절터를 지키겠다는 서원을 하므로 그 한 마리 용을 살게 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통도사는 분명 큰 절입니다. 전각이 68동이나 됩니다. 금강계단 중심의 공간이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규모를 더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겠지요. 하지만 통도사의 진정한 존재의미는 가람의 규모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귀중한 문화재가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부처님의 진신이 상주하는 적멸의 땅, 지계의 정신이 소나무처럼 살아서 바람의 춤을 추는 곳, 통도사는 그런 절입니다.
선운산 선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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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암 바위 벼랑 부처(보물 제1200호). 전체 높이 1,550센티미터, 신체높이 1,223센티미터, 무릎 폭 850센티미터. 배꼽 부위의 감실(바위를 파서 만든 공간)에 비결(秘訣)이 들어 있는데, 이 비결이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지는 등 재미있는 전설을 간직한 불상이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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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운사 가람의 얼굴 격인 만세루(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53호). 가람 배치의 전형적 양식인 주불전 앞 누각이지만, 이름만 그러할 뿐 실제로는 단층 건물이다. 사찰 조영 양식과 현실적 필요의 절충으로 보인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선운사 동구’입니다. 아직 가을이 다 익지도 않았는데 무슨 동백꽃 타령이냐고 하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선운사는 단풍도 채 들지 않았습니다. 절정의 녹음이 가시긴 했지만 아직도 나뭇잎들은 푸르렀습니다. 그렇지만 맹렬히 햇빛을 탐하지도 않더군요. 그 모습, 보기에 좋았습니다.
공연한 가정이긴 합니다만, 만약 시인이 동백꽃이 한창일 때 선운사를 찾았더라면 어떤 시편을 남겼을까요. 아니, 물음을 바꾸겠습니다. 선운사 옆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인이 동백꽃 핀 선운사를 한두 번 가본 게 아닐 텐데, 왜 그에 관한 시는 남기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시인은 온 산자락에 동백꽃 물이 들고 있을 때 선운사를 찾아놓고도, 차마 그곳으로 가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서 ‘살아간다는 일의 처연한 꽃다움’을 먼저 봤기 때문에. 아니면 피지 않은지 뻔히 알면서도 막걸리 생각에 꽃 핑계를 댄 것인지도 모르지요. 워낙 시인이라는 사람들은 ‘딴청 부리기’의 명수들이니까요. 어쨌든 시인은 동백꽃을 보지 못했고, 덕분에 우리는 명편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시인과 꽃의 엇갈림이 우리에게 안긴 시는 행운의 선물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독(毒)이 되기도 했습니다. 동백꽃이 선운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색안경이 돼 버렸으니까요. 거기에 가수 송창식씨의 노래까지 더해지면서 선운사는 가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동백꽃 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미지로 선점돼 버린 사물일수록 실체에 다가서기가 힘든 법입니다. 그래서 옛 선사(禪師)는 온갖 이미지로 겹겹이 둘러싸인 오늘의 우리를 위해 이런 말을 남겼나 봅니다.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 금강경오가해에 나오는 야보 도천(冶父 道川, 중국 송, 1127~1130) 스님의 이 말은, 성철 스님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지요.▲ 만세루 내부. 대부분의 부재가 휘고 뒤틀린 것들이다. 사찰 건축의 자연주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검박한 아름다움의 최고 높이를 보여준다.
또 어쩌면 서정주 시인은 문자의 한계를 절감한 나머지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으로 에둘러 동백을 노래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동백꽃에 선점된 선운사의 이미지가 시인의 탓은 아닙니다. 그것을 덧씌워 보는 우리들의 타성이 문제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자명해집니다. 우리 각자가 나름의 목소리로 육자배기를 부르는 것입니다.
선운사를 품에 안은 선운산(도솔산이라고도 불리나, 전북 도립공원으로서 불리는 이름이 선운산이므로 널리 쓰이는 쪽을 따름)은 내장산 어름에서 부안의 곰소만쪽으로 뻗어나간 호남정맥의 가지줄기 끝에 맺힌 산입니다. 지도를 펴고 보면 파도 소리가 귀에 닿을 듯한 곳입니다. 그러나 막상 절로 들어가 보면 첩첩 산 가운데입니다. 정상의 해발고도가 336m에 불과하지만 평지가 거의 해수면에 가까우므로 수직적 상승감은 숫자가 주는 선입견을 보기 좋게 허물어 버립니다.
주의 산세와 담백담대한 전각들 잘 어울려
일주문에서부터 구릉 같은 산자락은 서서히 키를 높여 천마봉으로 오르고, 숲길은 아름드리 단풍나무와 느티나무로 깊어집니다. 길 옆으로 잔잔히 흐르는 계곡물 위로 또 하나의 숲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 숲 그림자로 하여 계곡도 깊어집니다.
500m쯤 계류를 거슬러 오르면 다리 하나가 눈에 띄고 오른쪽으로 누각 형식의 문이 보입니다. 사천왕문입니다. 곧장 들면 긴 네모꼴의 무뚝뚝한 건물이 시야를 가로막습니다. 기둥 사이 판문이 닫혀 있어 그 너머를 보여주는 데도 인색합니다. 만세루(萬歲樓,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입니다. 그런데 이 건물은 누(樓)라는 이름과 달리 단층 건물입니다. 왼쪽으로든 오른쪽으로든 돌아들면 천왕문에서부터 일직선 축으로 만세루와 이어지는 대웅보전(보물 제290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왜 누각도 아니면서 누각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지 어렴풋이 의문이 풀립니다. 북쪽으로 산을 등에 두고 동서로 길게 배치된 사역은, 이 건물이 아니었다면 대웅보전을 정점으로 정리되지 않고 휑뎅그렁해 보일 정도였을 것입니다. -
▲ 대웅보전과 영산전(왼쪽).
현재 선운사의 가람배치는 간단합니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서쪽 옆으로 영산전, 영산전 뒤로는 팔상전과 산신각이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영산전 옆 수직 방향으로는 명부전과 향운전(요사)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대웅보전 동쪽 옆으로는 관음전이 있고, 동쪽 끝에는 담장을 두른 별원 형식으로 최근에 신축한 유물전시관과 3동의 요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가람 배치는 1990년 이전 모습과 아주 다릅니다. 특히 대웅보전과 영산전 사이에 수평축을 벗어나 약간 삐딱하게 서 있던 요사채가 사라지고, 대웅보전 서쪽에 관음전이 새로 들어서면서 밋밋하게 펼쳐진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김봉렬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주목할 만합니다.
▲ 선운사 대웅보전(보물 제290호). 대웅보전 앞의 6층석탑(전북 유형문화재 제 29호)은 본디 9층이었으나 현재 6층만 남았다.
“선운사 마당은 동서로 길쭉하다. 자칫하면 휑하고 멍청한 마당이 되기 쉬웠으나, 약간 돌아앉은 (대웅보전과 영산전 사이의) 노전채가 긴 마당을 둘로 쪼개어 한 부분은 대웅전에, 다른 한 부분은 영산전에 속하도록 구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언젠가 노전채를 철거하고 말아 선운사 마당은 염려대로 비례가 맞지 않는 멍청이가 되어버렸다.”
건축 전문가의 시각과 조계종 제24교구 본사로서 필요에 따른 가람 정비가 필요한 입장이 일치할 수만은 없겠지요. 그런데 건축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이것과는 다른 두 가지 사실이 더 크게 들어왔습니다.
첫째는 요사를 제외한 모든 전각이 맛배지붕이라는 점입니다. 두루뭉술한 주위의 산세와 전각들의 담백하고도 담대한 맛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만세루의 자연미입니다.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의 적지 않은 규모인데, 기둥들은 제각각이고 심지어 위아래가 현저히 다른 굵기의 나무를 잇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정도의 자연미는 우리나라 사찰 어디에서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부를 자세히 보면 그 검박함과 대담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에 갈아 끼운 대들보 하나를 제외하고는 종보와 서까래에 이르기까지 곧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 같이 땔감으로나 쓰면 좋을 법한 것들입니다. 특히 가운데 칸(어칸)의 대들보 위에 놓인 종보는 두 갈래로 갈라진 것을 사용하고 그 끝에 용머리를 끼웠습니다. 당시 억불의 시대 상황과 목재 수급의 어려움에 따른 결과로만 해석하기에는, 그 익살과 해학의 품격이 구름을 올라탄 듯 자재롭습니다. 한없는 겸손이라고 표현해도, 하늘을 찌를 듯한 자신감이라고 표현해도 이 건물에 대해서는 결례가 될 것 같습니다.
영산전 뒤에서부터 산기슭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동백 숲(천연기념물 제184호)에 대해서는 어설픈 언급을 삼가겠습니다. 다만, 자연림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그 숲(5천여 평 3천여 그루)이 사실은 500여 년 전 가람을 중창하면서 인공으로 조성했고, 그 까닭도 산불에 대비한 것이었다는 것만 보탭니다. 사중에 전해오는 얘기라면서 문화재 해설사 강복남씨가 귀띔을 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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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마봉 앞에서 본 도솔암 내원공. 이로 하여 선운산은 미륵부처가 상주한다는 도솔천이 된다.
선운사에서 도솔암에 이르는 보행자 탐방로도 우리의 산과 절이 우리에게 안겨 준 커다란 축복입니다. 도솔암 위 낙조대와 천마봉까지 욕심을 내도 4km 남짓으로 왕복 2시간 반이면 족합니다. 가는 길에 장사송(천년기념물 제354호)과 진흥굴도 둘러볼 수 있어 지루하지도 않습니다. 꽃 진 자리에서 돋아나기 시작하는 길가의 꽃무릇 새싹들도 정답게 길동무를 해 줍니다.
진흥굴은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수도하였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입니다. 선운사의 초창자가 진흥왕이라는 창건 설화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 백제 땅에 신라왕이 출가했다는 건 믿기 어렵습니다. 현재 절에서 밝히는 바로는 백제 위덕왕 24년(577) 검단 선사와 신라의 국사이자 진흥왕의 스승인 의운 국사가 힘을 모아 창건했다고 합니다.
천마봉에 올라 사방을 둘러봅니다. 서해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눈 아래로는 벼랑에 새긴 도솔암의 미륵부처님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습니다.
엇갈리는 운명, 혹은 허방딛기가 잦아서 상처 많은 인생들에게는, 가을이야말로 잔인한 계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서 동백꽃을 본 미당처럼, 내가 사는 이곳을 미륵의 땅으로 여기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미당의 ‘무등(無等)을 보며’ 첫행)고 호기를 부려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선운사 주변 볼거리 먹을거리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 선운사는 한층 가까워졌다. 최근에는 경상도쪽 여행객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열차를 이용하려면 정읍역에서 하루 4번 있는 선운사행 직행버스를 타면 되고(50분 소요), 버스를 이용하려면 고창에서 선운사행 직행버스를 타면 된다(30분 소요).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서해안 고속도로는 선운사 나들목으로 나오면 되고, 호남고속도로는 정읍 나들목에서 22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보면 선운사 가는 길을 만날 수 있다.
먹을거리
고창 사람들이 꼽는 선운사 3대 미각이 있다. 풍천장어, 복분자술, 녹차가 그것이다. 앞의 둘은 절집 앞에서 민망한 음식이긴 하지만 워낙 오래 전부터 유명하여 하나의 문화 상품이 된 느낌이다. 그나마 녹차가 있어 식탐의 흉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선운사 일대의 모든 식당에서는 풍천장어와 복분자를 판다. 딱히 특정 식당을 소개하는 것이 오히려 허물이 될 것 같다. 일주문 앞 집단시설지구의 식당에서는 산채정식이나 두부 요리 같은 다양한 음식을 메뉴에 올리고 있다.
집단시설지구 초입에 있는 농산물 판매센터에는 요긴한 우리 농산품들이 다양한 포장 단위로 갖춰져 있어 선물을 준비하기에도 좋다.
미당시문학관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사 나들목에서 선운사 가는 길에서 조금 벗어나는 부안면 선운리에 있다. 친일 행적이나 말년에 정치권의 도움으로 문학지를 낸 흠결과는 별개로, 그의 시가 빛낸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폐교된 선운초교 부지에 폐교 당시의 학교 분위기를 최대한 살린 문학관 건물도 소박하면서도 예술적 품격을 지니고 있다. 문학관 옆 미당 상가 사이 민가에서 비닐하우스를 지어 운영하는 간이식당(질마재)에서는 요즘도 이런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로 순박한 아주머니가 파전과 막걸리를 판다.
고인돌 유적지
서해안고속도로 고창 나들목 옆에 있다. 2000년에 강화도와 화순군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적지로 고창읍 죽림리에 있다.
고창읍성
서해안고속도로 고창 나들목에서 고창읍쪽으로 가면 된다. 조선 초기의 석축 읍성으로 사적 제145호다. 성벽의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고, 보수 공사를 통해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재현시켜 놓았다. 또 근처에 게르마늄 온천인 석정온천과 신재효 고택, 판소리 박물관이 있어 한번 걸음에 다양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한다.
진봉산 망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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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를 바라보고 앉은 망해사의 극락전과 낙서전(樂西殿). 즐거움의 궁극, 즉 극락의 세계란 ‘지는 해를 기꺼워’할 줄 아는 데서 비롯됨을 일깨우는 것 같다.
‘김만경’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는지요. 사람 이름은 아닙니다. 한 글자를 더 붙여 ‘김만경뜰’이라고 하면 확실히 감이 올 겁니다. 김제·만경평야를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더군요. 이 고장 말로는 ‘징계 맹경 외애밋들’이라고 한답니다. 김제 만경의 너른 들을 일컫는 말이겠지요.
‘바다를 바라보는 절’ 망해사(望海寺)-.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바다가 보이지 않습니다. 서해안고속도로 서김제 나들목에서 나와 만경읍을 거쳐 진봉면으로 가는 그 길은 들판 가운데로 나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정점, 만경평야를 가로지르는 길입니다. 가을걷이를 끝낸 텅 빈 들녘에는 청보리 싹이 하늘을 담고 있더군요. 쌀 수입 때문에 시름 깊은 농민들에게 그 푸른 싹이 위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차를 세우고 들판을 거닐어 봅니다. 바둑판의 금 같은 수로와 도로를 따라 선 전봇대가 솟대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으로 하여 들판의 수평성은 무한히 확장됩니다. 점점이 흩뿌려진 듯한 집들은 상당히 이국적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땅덩어리가 얼마나 좁았으면, 하고 자조할 일은 아닙니다. 산이 워낙 많은 나라에 사는 탓이겠지요.▲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의 움직임. 세계의 실상은 이처럼 한 순간도 고정됨이 없다. 위대한 발견자, 붓다의 통찰이다.
다시 들판을 달리자 야트막한 구릉 사이로 망해사를 가리키는 화살표가 나타납니다. 초입은 소나무 숲길입니다. 짧지만 운치 그윽한 숲길이 허리를 낮출 즈음, 홀연히 한 바다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곁에 망해사가 바다를 보고 앉아 있습니다. 한참을 달려온 들판의 느낌은 어느 새 다 지워지고, 산과 바다와 절만이 한가롭습니다.
망해사는 작은 절입니다. 전각이라 해 봐야 주불전인 극락전과 낙서전(樂西殿), 종각, 그리고 요사가 전부입니다. 절의 규모나 문화재에 관심을 둔 탐방객이라면 아주 실망할 수도 있는 절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절다운 절입니다. 그 절다움은 낙서전(樂西殿)으로 하여 선명해집니다. ‘해 지는 서쪽을 기꺼워한다’는 이 ‘거대한 소박’ 앞에서 오늘 우리들의 ‘비만한 풍요’는 얼마나 초라한가요.
“낙조는 해가 산 넘은 뒤가 더 아름다워”
▲ 망해사 입구의 부도. 풍화가 심해 주인을 알 길 없다.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떠랴. 모든 형상의 본질은 ‘공(空)’인 것을.
망해사가 등을 기대고 있는 진봉산은 구릉에 가깝습니다. 해발고도라 해봐야 72m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산기슭의 우람한 소나무들이 워낙 훤출하고 울울하여 깊은 산처럼 느껴집니다.
“진봉산요? 이곳에서는 얼마나 대단한 산인데요.”
주지 정국 스님의 말입니다. 스님의 말대로 진봉산은 예로부터 대단한(?) 산이었습니다. 대동여지도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 만경현 조에도 진봉산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절의 소재지인 진봉면의 이름도 이 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망해사는 산과 바다 혹은 땅과 물 사이에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인간이 온전히 자연에 깃들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건대, ‘해 지는 서쪽을 기꺼워할 수밖에 없는(樂西)’ 심미적 환기력으로 충만한 절이 바로 망해사입니다.
망해사는 시적인 절입니다. 자연이 빚은 절정의 시어(詩語)가 무시로 빛납니다. 그 몇 토막을 정국 스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차를 마시며 툭툭 던지듯 내뱉는 스님의 말투는 시인의 그것이었습니다.
“낙조는 해가 산을 넘고 난 뒤가 더 아름다워요.”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자 낙서전 뒤로 녹차의 뒷맛 같은 노을이 걸려 있습니다.
“해는 가을부터 작아지면서 더 해맑아져요. 겨울요? 회초리로 맞는 것 같은 싸한 바람 맛이 좋죠. 그것을 즐길 줄 모르면 살기 힘든 절이지요.”
스님은 시인 기질 못지않게 선동가 기질도 다분했습니다.
“달은 보름보다 열나흘이 더 좋아요. 약간 모자란 듯하고 말랑말랑한 느낌이 더 좋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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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해사의 상징인 낙서전(樂西殿). 지는 해를 즐기는 집이라는 당호를 단 집이다. 1589년에 진묵 스님이 처음 지은 이후 근년에 손을 보았으나 기본적인 형태는 그대로라고 한다.
우리는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음력 10월13일이어서 스님 말대로 약간 빈 달이 들판을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무작정 차를 몰고 들판을 가로질렀습니다. 광활면을 지나는 들판은 이름 그대로 광활(廣闊)했습니다만, 한자는 廣活이라고 씁니다. 그런데 광활면 일대는 대부분 개펄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인들이 동진강 하구에 방조제를 쌓고 경작지로 만든 수탈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본디는 진봉면에 속해 있다가 해방 뒤 1949년에 광활면으로 분리됐습니다.
김제·만경평야는 해남 대둔산에서 발원한 만경강과, 정읍 상두산에서 발원한 동진강이 남과 북을 감싸듯 흐르며 서해로 흘러드는 사이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강이 만나는 곳이 바로 새만금입니다. 이제 새만금 방조제 공사가 끝나면 망해사 앞 바다는 엄격한 의미에서 바다가 아닙니다. 물이 통하기는 한다지만 역동성이 거의 없는 바다가 되겠지요. 과거 동진강 방조제가 일인들의 수탈 행위였다면, 21세기의 새만금 방조제는 문명의 수탈입니다. 망해사가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후대의 사가들은 문명의 둑으로 막힌 새만금의 바다에서 21세기의 비극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나마 절망적이지 않은 것은 완전히 물을 가두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자연의 끝없는 생명력에 희망을 걸어 봅니다.▲ 망해사 뒤 진봉산 등마루의 숲길. 심포 포구까지 연결되어 있다. 바다를 보며 숲을 거니는 것도 망해사가 안겨주는 큰 즐거움의 하나다.
그런데 이 매력적인 곳에 처음 절을 세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통일신라시대인 754년(경덕왕 13)에 중국에서 온 중도(中道) 스님이 세웠다는 설도 있고, 백제 후기의 도장(道藏) 혹은 통장(通藏) 스님이 세웠다는 설도 있습니다. 현재 절에서는 671년(신라 문무왕 11)에 부설 거사가 세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1589년(조선 선조 22)에 진묵 스님이 낙서전을 지은 이후 1933년과 1977년에 고쳐 지었고, 극락전은 1991년에 중창한 것입니다.
현재 절에서 부설 거사를 초창자로 여기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부설 거사가 도를 이룬 곳은 옆 동네인 부안 변산의 월명암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사에는 전설적인 세 거사가 있습니다. 인도의 유마힐, 중국의 방온, 그리고 한국의 부설 거사가 바로 그들입니다. “중생이 앓고 있으므로 나도 앓는다”는 대승 선언으로 널리 알려진 유마힐. 전재산을 바다에 버리고 대바구니를 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당대의 이름난 선사들을 통쾌하게 꺾어버린 선의 고수 방온. 이들 거사의 행적이 높게 빛난다면 부설 거사의 삶은 인간적으로 아름답습니다.
▲ 망해사에는 인위적인 손길이 거의 없다.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초도 없다. 해와 바닷바람만 먹고 자라는 배추와 무, 갓이 꽃 같다.
벙어리 처녀 입을 연 부설 거사의 법문
불국사로 출가한 부설 거사(당시는 거사가 아니었지만)는 도반 영희(靈熙)·영조(靈照) 스님과 함께 지리산·천관산·능가산 등지서 수행하다가 문수도량을 순례하기 위해 오대산으로 향했습니다. 가던 길에 거사는 지금의 김제 만경의 두릉에서 구무원(仇無寃)이라는 사람의 집에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18살이 되도록 벙어리로 살던 구씨의 딸 묘화(妙花)가 거사의 법문을 듣고 말문이 터졌습니다. 묘화는 함께 살기를 간절히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거사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묘화는 자살 기도로 자신의 입장에 충실했습니다. 거사는 “중생이 앓고 있으므로 나도 앓는다”는 유마의 선언을 실천하기로 했습니다.
거사는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아이를 부인에게 맡기고 수도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결코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속에 처하되 그것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훗날 옛 도반 영희와 영조가 찾아와 도력을 시험했을 때, 대들보에 매단 물병을 깨뜨려 물을 떨어지지 않는 것은 거사의 것밖에 없었습니다. 살활(殺活) 자재의 경지에 든 것입니다. 거사는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기고 좌탈하였습니다.
눈으로 보는 바 없으니 분별할 것이 없고
귀로 듣는 바 없으니 시비 또한 사라지네.
분별 시비는 모두 놓아 버리고
다만 마음 부처 보고 스스로 귀의할지라.
目無所見無分別 耳聽無聲絶是非
分別是非都放下 但看心彿自歸依
망해사는 한가한 절입니다. 그러나 그 한가함을 즐길 뿐 탐하지는 않습니다. 풍경 소리 대신 바람을 몰고 오는 밀물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대산 월정사
월정사 보살상의 얼굴에서 나는 이기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선한 마음의 고갱이를 봅니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오려면 그 보살상이 탑을 우러러는 딱 그만큼 각도로 고개를 젖혀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절묘하게도 보살상의 키가 180cm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절로 그렇게 됩니다. 키가 큰 사람이라면 약간 무릎을 구부려야 하겠지요.
겉모습만으로도 월정사 보살상은 특이합니다. 오른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공양을 드리는 모습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원도 강릉 일대에만 보이는 양식인데,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과 강릉시 내곡동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 제84호)이 대표적입니다.
월정사 보살상은 약왕보살로도 불립니다.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팔만사천의 탑을 세우고 탑마다 보배로 장엄한 다음, 그 앞에서 칠만이천 세 동안 자신의 두 팔을 태우며 공양했다는 법화경의 약왕보살이 바로 이 보살입니다.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는 800여m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과 상원사 적멸보궁만으로도 보배로운 절입니다. 특히 월정사가 깃든 오대산은 늘 5만의 진성(眞聖)이 머물고 있다는 불교의 성지입니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대산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도량인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천과 효명이라는 신라의 두 왕자가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에 올라 예를 드렸는데, 이때 동대(東臺)에는 1만의 관음, 남대에는 1만의 지장, 서대에는 1만의 대세지, 북대에는 석가여래를 앞세운 5백의 아라한, 중대에는 1만의 문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다섯 대에는 암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동대 관음암·서대 수정암·남대 지장암·북대 미륵암·중대 사자암(적멸보궁을 돌보는 암자)이 그것입니다. 어쩌면 오대산의 울창한 수림과 깊은 계곡이 곧 5만 진성(眞聖)의 현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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