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가을을 걷다_강길·들길·옛길

醉月 2010. 11. 9. 08:48

길에게 가을을 묻다

 

불타오르는 단풍 사이로 ‘가을의 길’을 걸었다. 산, 바다, 강, 들판, 마을…. 그 사이로 난 ‘가을의 길’에는 이야기보따리가 주렁주렁 걸렸다. 바람의 시인 미당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와 녹두장군 전봉준의 마지막 외침이 들려오는 그 길들. 섬진강에 반사된 가을 석양은 붉디붉은 애기단풍에 불을 지른다.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와 보은염(報恩鹽)의 설화가 담긴 소금길, 새 세상을 꿈꾼 정여립과 강증산의 얼이 어린 미륵길, 게들과 조개들의 속삭임이 가득한 바닷길….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가는 걸음을 멈추지 못하는 까닭이 꼭 비경(秘境)을 보고 사연을 듣기 위해서만은 아닐 터. 길은 그 자체가 사색의 공간이자 대화의 장이다. 혼자 길을 걸으며 인생을 되돌아보지 않는 이 없고 3인이 함께 걸으면 그중 반드시 배울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길의 한자어인 ‘道’는 지역의 경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나 ‘깊이 깨친 이치’를 뜻하기도 한다. 수천km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많은 사람이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주간동아’는 지난봄 서울의 숲길(736호)을 걸은 데 이어, 여름엔 강원의 숲길(745호)을 걸었다. 이젠 가을의 길이다. 산과 바다, 강, 들판, 마을이 어우러진 주옥같은 길이 우리를 기다린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그 길 위에서 인생이 영글어간다.

미당 키운 거센 갯바람 이제는 돌아와 국화향 배달

고창 질마재길

미당 서정주 묘소에서 바라본 진마마을과 소요산.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라던 미당(未堂)은 죽어서도 바람과 함께 누워 있었다. 곰소만 갯벌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 베개 삼고, 그가 나고 자란 진마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돋은볕마을(안현마을) 뒷산에 부인 방옥숙 여사와 나란히 자리했다.

곰소만의 바람은 묘지 주변 3억 송이 국화의 군무(群舞)를 연출한다. 국화밭에 누운 미당은 국화의 ‘프레스토(Presto)’ 군무가 지겨우면 시린 하늘 양떼구름의 ‘아다지오(Adagio)’ 연주를 들을 터. 소요산(444m) 품에 숨은 진마마을 질마재는 미당을 그리워하며 오늘도 그곳에 우뚝 서 있다.

질마재는 미당 서정주 시인(1915∼2000)의 고향마을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질마’는 소나 말의 안장을 뜻하는 ‘길마’의 사투리, 결국 질마재는 양쪽 언덕 사이에 걸려 있는 안장 같은 고개를 말한다. 질마재는 진마마을과 바깥세상을 잇는다. 옛적 해변 모래땅에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은 고기를 잡고 소금을 채취해 생활을 영위했다. 해산물과 소금 봇짐을 지고 정읍이나 장성 장터로 향하던 촌부들은 질마재길에서 새끼 배불릴 생각에 서릿바람도 고마웠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선운산IC를 빠져나와 22번 국도를 달리면 풍천장어를 파는 식당이 수십 개 몰려 있는 연기마을 입구가 나온다. 입구에서 좌회전하면 선운산관광안내소, 우회전하면 연기교를 지나 소요산 길 초입이다. 연기교 밑으로 서해 바닷물과 민물이 몸을 섞는 인천강이 유유히 흐른다. 풍천(風川)이다. 바닷물이 밀려들 때 바다의 거센 바람까지 몰고 온다고 붙은 이름. 예부터 이곳에서 잡히는 민물뱀장어를 으뜸으로 친다. 요즘도 가끔 몇 마리씩 잡히기도 하지만 그 수는 미미하다고 한다. 괜하게 소요산을 가로지르는 질마재에 오르려면 풍천장어에 된장찌개 한 그릇은 해야 할 것 같다. 연기마을 입구 강나루식당에 차를 대니 고슬고슬 익는 장어에 먼 여행길 피로도 사라진다. 맘씨 좋은 주인은 길손에게 식당 주차장을 기꺼이 내주며 잘 다녀오라 배웅을 해준다.

 

질마재 가는 길에 만난 백구

등산화 신발 끈을 동여매니 식당에서 키우는 하얀 진돗개가 다가와 꼬리를 친다. 질마재길 초입에서 만난 인연. 무뚝뚝 쳐다보는 눈망울이 선하다. 이마를 쓰다듬으면 천천히 꼬리를 흔든다. 자리를 털고 길을 나서자 백구(이름은 ‘나루’였다. 2년생 진돗개)도 총총걸음으로 따라 나선다. 아니, 질마재길을 잘 알고 있다는 듯 10여m 앞서 길잡이를 자처한다.

백구를 따라 터덜터덜 길을 나선다. 마을을 지나자 저 멀리 연기저수지의 회색 제방이 떡하니 자리한다. 제방에 올라 저수지 둘레길을 따라 걸으니, 소요산은 하늘빛을 담은 저수지에 실시간으로 노랗고 빨간 단풍을 그린다. 둘레길 오른쪽은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칡덩굴이 10m 장송을 휘감는다. 질마재를 타고 내려온 곰소만 바람에 올라탄 수십 마리의 고추잠자리는 손에 잡힐 듯 낮은 비행을 하고, 어디선가 나타난 소요산 매 한 마리는 낯선 등산객이 궁금한 듯 저 높이서 우리를 쳐다본다. 하기야, 매가 높게 살아가는 방법을 낮은 땅의 인간이 어떻게 알겠는가.

산림경영숲 쉼터에 잠시 걸터앉으니 향긋한 풀냄새가 코를 찌른다. 바람도 잠시 쉬는 듯 산들바람이 된다. 다시 나선 길 양쪽에는 열매를 맺어가는 동백나무가 등산객을 반긴다. 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등산 재킷을 벗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저 멀리 소요산에 기대앉은 소요사가 나타난다.

저수지 둘레길을 지나면 발바닥에서 사각사각 햇사과 깎는 소리가 들린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모래다. 모래를 밟고 산에 오르는 ‘발맛’도 새롭다. 갑자기 “푸다닥” 하며 꿩 한 마리가 머리 위를 지난다. 저수지의 가을 정취에 빠져 있던 꿩의 망중한을 백구가 방해했나 보다. 입맛을 다시는 백구는 멋쩍은 듯 다시 길잡이에 나선다.

 

질마재를 내려와 미당 서정주 시인의 생가로 향하는 도로변에는 수많은 국화가 곰소만 바람에 흔들린다.

 

 

연기저수지 돌 땐 사각사각 모랫길

다시 콘크리트길을 따라 걸으니 소요사 입구와 질마재 갈림길이 나타난다. 길은 필요에 따라 생기고 필요에 따라 사라진다고 했던가. 언뜻 봐도 포장된 왼쪽 길은 소요사 가는 길, 질마재 가는 길은 오솔길이다. 갈림길에서 ‘질마재 정상까지 1.0km’라는 이정표를 보고 있자니 백구가 달려와 주변을 맴돈다. 백구는 얼른 질마재 정상으로 안내하고 싶다는 듯 오솔길로 뛰어간다. 밤송이가 지천인 오솔길은 2명이 지나기도 벅차다. 드문드문 ‘고인돌 질마재 따라 100리길, 문화생태탐방로’라고 적힌 리본이 초행의 등산객을 안심시킨다.

소요산 오솔길은 땅바닥에 새겨진 오래된 기억이었다. 그곳을 드나들었던 무수한 보행자들이 땅 위에 남긴 잎맥은 곧 길이 됐다. 걷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는다. 타박타박 자신의 발자국과 손자국을 남겼다. 내리막길 옆 느티나무 허리는 사람 손을 타 매끄럽다. 어린 미당의 놀이터였던 소요산. 그도 동무들과 무수히 이 오솔길을 지났으리라.

 

“아직도 호랑이 냄새나는 산/ 그 소요산 밑에 낮 뻐꾹새와 밤 두견이 소리가 넉넉하게 잘 들리는 마을/ 대숲도 많은 마을/ 과히 좁지 않은 바다(중략)”(서정주 ‘고향의 죽마고우 황동이에게’ 중에서)

 

버스에서 졸다가 목적지 정류장에서 갑자기 눈 떴을 때 느끼는 가슴 철렁함과 안도감. 질마재 정상도 그렇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정상에는 장승 30여 기가 눈을 부라리고 있고, 부지런히 질마재를 오르던 마을 사람들의 묘지 10여 기가 곰소만과 저 멀리 변산반도를 내려다보고 있다.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고창·부안 갯벌과 우리나라 8대 절경 중 하나인 부안 변산반도가 잠시 쉬어 가라는 듯 눈길을 사로잡는다. 쉬지 않는 바람에 걸터앉으니, 그 옛날 이 길을 오가던 촌부들의 콧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해 저물녘 내륙 장터에서 바꾼 곡식자루를 메고 질마재에 올라선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짭조름한 바닷냄새가 올라오고, 발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딱지 같은 초가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그 속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예쁠 것도 없는 아내와 코흘리개 아이들’ 생각에 붉게 물들어 출렁이는 곰소만 바닷물만큼 가슴 뛰었으리라.

 

“세상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 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 앳되고도 싱싱히는 나를 부르는/ 질마재. 질마재. 고향 질마재.// 소나무에 바람소리 바로 그대로/ 한숨 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을./ 지붕 우에 바가지꽃 그 하얀 웃음/ 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서정주 ‘질마재의 노래’ 중에서)

 

미당 시문학관 2.2km 이정표를 보며 발을 옮기려다 다시 곰소만을 바라본다. 바다 너머 변산반도의 발아래 왼쪽엔 모항, 가운데엔 곰소항이 웅크리고 있다. 미당의 진마마을과 곰소 사이는 곰소만 바다가 누워 있다.

 

 

3억 송이 국화꽃과 국화 벽화로 눈길 끄는 돋은볕마을

 

질마재길 길잡이를 자처한 백구. 백구는 기자가 길을 가다 멈추면 얼른 오라는 듯 기자를 쳐다보며 산행을 재촉했다.

 

질마재길을 따라 30여 분 걸으니 산기슭 양옥집 사이에 누런 초가 두 채가 눈에 들어온다. 1970년경부터 사람이 살지 않은 채 방치된 미당 생가는 2001년 8월 옛 모습으로 복원됐다. 미당 생가에는 그가 걸터앉아 ‘두 다리를 까닥인’ 툇마루와 10여 개 항아리가 놓인 장독대, 우물이 고즈넉한 석양에 비쳐 반짝인다.

미당은 이곳에서 아홉 살 때까지 살았다. 다섯 살부터는 고독에 맛을 들였다. 온종일 집에 혼자 있는 날엔, 뒤꼍에서 늑대가 들이닥치지 않을까, 누가 어머니를 업어가지 않았을까, 별의별 생각을 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생가에서 나와 미당교를 건너면 ‘서정주 시 문학관’이 반긴다. 옛 선운초등학교를 개조해 만든 시 문학관은 생전에 그가 사용하던 모자와 파이프, 육필원고 등이 전시돼 있다. 문학관 전망대에 오르면 저 멀리 바다까지 닿은 선운리 마을과 태평하게 누운 변산반도가 눈에 들어온다. 그를 길러낸 질마재의 바람은 여전히 시원하다.

진마마을을 등지고 황금벌판이 된 서해안을 바라보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또 나타나는 황금국화벌판. 마을 담벼락과 지붕을 국화 그림으로 단장한 돋은볕마을(안현마을)은 3억 송이의 국화를 품고 있다. 2007년 미당의 대표 시 ‘국화 옆에서’를 소재로 마을 전체가 거대한 ‘국화 벽화’로 변했다. 마을 뒷산에는 서정주 시인이 국화 옆에 누워 있다.

 

“回甲 되니 고향에 가 살고 싶지만/ 고향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 고향 마을 건너뵈는 나룻가에 와/ 해 어스럼 서성이다 되돌아가네”(서정주 ‘망향가’ 중에서)

 

3억 송이 국화를 발아래 두고, 연간 10만 명이 다녀간다는 돋은볕마을과 그의 시로 전국적 명소가 된 질마재를 바라보니, ‘고향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시인의 겸손함에 가슴이 헛헛해진다. 가만히 서 있으려면, 몸을 웅크리고 다리에 힘을 줘야 하는 곰소만의 거센 바람은 여전히 미당의 진한 국화향을 퍼뜨리고 있다.

 

 

Basic info.
4시간, 총 11km.

 

☞ 교통편
승용차
호남고속도로 : 정읍IC →고창
88고속도로 : 고창담양 간 고속도로 →남고창IC 혹은 고창IC →고창
서해안고속도로 : 선운산IC·고창IC →고창

대중교통 | 서울~고창(07:20~19:00) 1일 16회, 40분 간격 운행, 3시간 30분 소요, 강남고속버스터미널 호남선

기차 | 용산~정읍(05:20~23:00 1일 27회, 30분~1시간 간격 운행)

문의 | 고창문화원 063-564-2340

 

선운사길 가본 적이 있나요 보은염 사연 그곳 말이에요

고창 선운사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최영미,‘선운사에서’ 중에서)

야속하다. 가을이 이만큼 왔다고 생각한 순간 벌써 뒷모습이다. 안타까워하는 시간도 아까운 10월 마지막 주, 화려한 꽃무릇이 사그라진 전북 고창 선운사길에서 가을의 뒷모습을 좇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문화생태 탐방로 ‘고인돌·질마재 따라 100리길’의 4코스와 겹치는 선운사길은 보은길 또는 소금길이라고 불리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숨어 있다.

백제 위덕왕 24년(578) 검단선사가 선운사를 창건하던 당시, 검단선사는 선운산 주변에 들끓던 산적과 해적에게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 도적질을 그만두게 했다. 양민이 된 그들은 고마운 마음을 담아 해마다 봄, 가을 두 차례 검단선사에게 보은염(報恩鹽)을 보냈는데 그때 소금을 운반했던 길이 바로 이 길이라는 이야기다. 이 길은 크게 보자면 선운사 골짜기를 가로질러 도솔암, 용문굴, 소리재, 참당암을 지나고 선운산 능선을 넘어 심원면 하전마을 바닷가로 내려선다.

 

 

국내 최대 폭죽처럼 터지는 꽃무릇 군락지

길은 고창 아산면 삼인리 선운사 앞 연기교에서 시작한다. 연기교에서 선운사 방향으로 20분가량 걸어가면 선운산관광안내소에 닿는다. 차로 이동하면 이곳에 주차하고 걷기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안내소에서 이정표를 따라 선운사 쪽으로 걷다 보면 개울 건너편 절벽을 뒤덮은 천연기념물 제367호 송악을 발견할 수 있다. 줄기를 부챗살처럼 펴서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송악은 그 자체로도 웅장하다.

선운사 터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본래는 이곳이 커다란 연못이어서 검단선사가 절을 세우고자 못에 돌을 채우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마을엔 눈병이 돌았다는 것. 그런데 눈병 걸린 사람들이 이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씻은 듯이 나아 이를 신기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와 못에 던지는 바람에 그 큰 못을 메워 마침내 선운사를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선운사 마당 위로 하얀 구름이 실타래처럼 펼쳐졌다. 마당에 곧게 뻗어 선 감나무가 고고했다.

선운사에서 도솔암으로 향하는 등산로와 계곡 주변은 국내 최대의 꽃무릇 군락지다. 붉은 줄기가 묶인 모양의 꽃은 화려한 폭죽을 연상케 한다. 꽃무릇은 매년 9월 중순 붉은 꽃을 피운다. 꽃이 진 후에는 진녹색의 잎이 나와 이듬해 5월 사라진다. 잎이 진 뒤 꽃이 피고, 꽃이 진 뒤 잎이 나서 잎과 꽃이 영원히 만나지 못해 서로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상사화(相思花)라 불린다. 이미 꽃은 지고 푸른 잎사귀만 가득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길을 재촉했다.

 

 

참새 혀처럼 작은 작설차밭을 가로질러

간단한 다과를 파는 도솔제쉼터에 다다르면 선운산 등반이 시작된다. 쉼터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길을 따라갔다. 경사가 거의 없이 잘 다듬어진 흙길에 중간중간 벤치도 있어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다.

15분 정도 걸으면 갈라진 삼거리를 만난다. 왼쪽으로 가면 도솔암(1.2km), 오른쪽으로 가면 참당암(0.7km)이다. 보물 제1200호 도솔암 마애불을 보기 위해서는 도솔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길목에서는 추정 나이 600세가 넘은 커다란 반송(盤松)과 진흥왕의 수도처였다는 진흥굴을 볼 수 있다.

차향 가득한 도솔암찻집을 지나면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나타난다. 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부처인 도솔산 마애불은 고려 초에 유행한 거불 형식을 보여준다. 빼쭉한 눈매와 편편한 볼, 도톰한 코와 입술이 친근하다. 선명한 두 손과 얼굴 생김에 800년이라는 세월이 새삼스럽다.

왔던 길을 되돌아 삼거리에서 이번에는 참당암으로 향한다. 길을 걷다 보면 소리재(1.0km), 포갠바위(0.7km)를 알려주는 이정표를 만나는데, 참당암으로 가려면 포갠바위 쪽으로 가야 한다. 참당암은 선운사에 속한 암자 가운데 하나로 죄를 뉘우치고 참회한다는 뜻. 스님들이 공부하고 생활하는 곳이라 소란을 떨어서는 안 된다. 이곳엔 다음 이정표가 없으니 주의해야 한다. 대웅전을 등진 채 직진하다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야 한다. 높은 감나무와 차밭이 펼쳐진 곳을 찾으면 쉽다.

고창의 3대 명물은 무엇일까? 장어, 복분자, 나머지 하나는 떠올리기 힘들 것이다. 답은 작설차(雀舌茶), 즉 참새의 혀만큼 작은 찻잎으로 끓이는 차다. 작설차는 ‘동의보감’에서도 “맛이 달고 쓰며 독은 없다. 기를 내리게 하고 소화를 돕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며 효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10월 말은 작설차를 따기에 이미 늦은 계절. 상품성이 없는 키 큰 찻잎 나무만 관리가 안 된 채 널브러져 있다.

 

1 연천마을에서 바라본 전경. 산 너머 바다 향기가 느껴진다. 2 선문사 옆 오솔길. 어린 아이도 걷기 좋다.

 

서해를 왼팔에 끼고 걷는 하산길

강아지풀 가득한 들판을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선운산 등정이 시작된다. 길은 한 곳으로만 뻗어 있기 때문에 헤맬 걱정은 없다. 능선 따라 천천히 선운산을 올랐다. 산길이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다. 적당히 땀을 흘리며 30분가량 걸었을까. 산비탈 따라 기울어 자란 소나무에 부딪힌 바람이 쏴아 시원한 소리를 냈다. 수리봉을 지나 삼거리에서 오른쪽 마이재 방향 길로 틀어 조금만 더 올라가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봉우리가 나타났다. 붉은 태양이 바위 위로 쏟아졌다. 가을 옷으로 갈아입는 이웃 산들, 산 아래 고요한 마을, 저 멀리 푸른 바다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하산길, 눈앞에 펼쳐진 서해와 벗하니 힘든 줄 몰랐다. 마이재에서 심원(2.5km) 표지를 따라 아랫길로 갔다. 시원한 바람 가득 느끼며 30분가량 내려오니 흙길은 끝나고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펼쳐졌다. 속이 꽉 찬 양배추들이 수확만 기다리는 밭, 아담한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골마을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내려온 방향에서 오른쪽 길로 걸어가니 심원면 연천마을에 다다랐다.

다시 길을 따라 한참 걸으면 커다란 소나무와 ‘검단소금전시관’(3.0km)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만난다. 표지판대로 다시 포장도로를 걸으면 길이 끝나는 지점에 2차선 찻길이 나오는데, 이 길 왼쪽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1일 10회가량 선운사행 시내버스가 있으므로, 이곳에서 길을 마치고 버스를 타기도 한다. 하지만 바다가 아쉬운 이들은 찻길을 건너 오른쪽으로 걸어야 한다.

왼쪽에 바다를 두고 걸으면 월산리 사등마을에 닿는다. 최초의 판소리 여류 명창 진채선(1842~?)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판소리 이론을 정립한 신재효 선생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대원군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은 진채선. 하지만 생가에는 자취도 없이 초라한 팻말 하나만 덜렁 걸려 있다.

바다 쪽으로 더 가면 길의 끝, 검단소금전시관에 닿는다. 마을의 이름인 사등(沙登)도 ‘바닷모래가 쌓여 등성이를 이룬다’는 뜻일 정도로 이곳은 자염(煮鹽)으로 유명하다. 자염이란 남해안이나 서해안의 갯벌 흙에서 바닷물을 걸러 가마솥에 넣고 졸여 만든 우리나라 전통 소금을 가리킨다. 현재 전시관 건물 옆에 소금 굽는 벌막을 복원, 화염 만드는 법을 재현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검단소금전시관 전망대에 올랐다. 황금빛 노을이 내려앉는 가을바다를 한참 넋 놓고 바라보며 겨우내 꺼내볼 가을의 조각을 차곡차곡 가슴에 담았다.

 

 

Tip.
4시간 30분, 총 12.7km.

☞ 교통
승용차 |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IC에서 15km, 고창IC에서 18km, 선운산 도립공원

대중교통 |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고창 고속버스 1일 16회 운행

문의 | 고창문화원 063-564-2340, 010-8869-3701, 010-5650-6145

 

 

 

 

비운 후 채우는 기쁨 파도와 바람이 알려주는구나!

부안 변산마실길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 소리를 듣고, 낙엽을 밟으면서 숲길을 걷는다. 이처럼 오감을 열고 걸을 수 있는 길이 바로 마실길이다.

 

“여행이 뭐라고 생각해?”

며칠 전 술자리를 함께 한 친구가 문뜩 이렇게 묻더니 말을 이었다.

“여행은 바닥까지 완벽히 비우는 것이라고 봐. 충전지도 확실히 방전돼야 충실하게 채울 수 있듯, 여행을 통해 불필요하게 부유하는 찌꺼기를 싹 없애야 그 힘으로 다시 일상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무려 18km에 이르는 전북 부안군 변산마실길을 7시간여 걷는 내내, 기자의 머릿속에 머문 생각 역시 ‘비움’이다. 바닷가 모래 위에 작은 흙무더기 자수를 놓은 게들과 대화하고, 거친 파도와 벗하며, 바스락바스락 숲 속 낙엽까지 밟을 수 있는 이 길은 각종 장르가 잘 어우러져 속이 꽉 찬 ‘웰 메이드’ 영화 같다. 그런데 ‘비움’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새만금전시관에서 격포항까지 들쭉날쭉한 해안선 따라 이어지는 변산마실길은 2009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됐다. ‘마실’은 ‘마을’의 방언으로, 마실길은 마을로 나가는 길을 뜻한다. 그 이름처럼 길 중간 중간 사망마을, 유동마을, 죽막마을 등 오래전부터 이곳에 터를 잡은 촌락을 만날 수 있다. 가을바람이 본격적으로 차지기 시작한 10월 25일 이 길에 첫발을 디뎠다.

서울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3시간여 시원하게 달리면 부안IC가 나온다. 30번 국도를 따라 30분쯤 가면 변산마실길(이하 마실길)의 시작인 새만금전시관이다. 오전 10시쯤 이곳에 다다랐다. 전시관 앞에는 마실길 임시안내소가 있는데, 이곳에서 물때 시간 및 마실길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마실길은 3단계 코스로 구성된다. 1단계는 새만금방조제에서 송포에 이르는 5.3km 길, 2단계는 송포에서 성천에 이르는 5.7km 길, 3단계는 성천에서 격포항에 이르는 6.5km 길이다. 코스별로 펼쳐지는 풍경이 완전히 다르다는 게 마실길의 매력이다.

 

 

들쭉날쭉 해안선 따라 이어지는 길

오전 10시 30분쯤 마실길 이정표를 따라 1단계 코스(이하 1코스)로 들어섰다. 1코스는 바닷길과 숲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바닷길은 썰물 때만 걷는 게 가능하다. 다행히 이날 오전에 물이 많이 빠져 바닷길로 걸을 수 있었다. 새만금방조제를 뒤로한 채 고운 모래가 펼쳐진 바닷길에 들어서자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게들이 팔딱팔딱 난리를 치며 반겼다. 처음엔 푹신푹신한 느낌이 좋아 발을 꾹꾹 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그랬더니 동행한 안내인 김상용 씨가 “바닥을 찬찬히 살펴보라”고 했다. 동글동글 작은 흙무더기가 바닷길 전체를 수놓고 있었다. 이를 창조해낸 게들이 작은 구멍으로 쏙 빠져나왔다가 다른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게가 하도 많아 옮기는 걸음에 밟히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게들이 미리 도망칠 수 있도록 발을 내딛기 전 바닥을 툭툭 치라”는 김씨의 조언에 따라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바닷길엔 백합, 조개 등이 지천이었다. 조개 캐는 사람도 여기저기 보였다. 갯바위엔 천연 굴과 어린 소라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칼로 살짝 떼어내 초고추장에 찍어 소주와 함께 먹으면 제맛이란다. 거기서 만난 동네 주민들은 “방조제가 생기기 전 더 많은 갯벌 생물이 살았지만, 지금 많이 죽어버렸다”며 아쉬워했다.

저 멀리 파도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1시간 30분쯤 걷자 1코스가 끝났다. 작은 포구인 송포항 인근의 한 음식점에서 오징어와 조개 그리고 양배추가 듬뿍 들어간 해물짬뽕국밥을 먹었다. 국물이 무척 시원했다. 보통 서울 등 외지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사람들이 10~11시에 마실길 초입에 도착해 1시간여 동안 1코스를 걷고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한다고 했다.

“‘해풍 맞은 대파’라고 들어봤어요?”

1코스와 2코스 사이에는 작은 텃밭이 이어졌다. 배추와 대파, 쪽파, 마늘, 호박 등이 빼곡히 심어져 있는데, “거세면서 짭조름한 해풍과 강한 햇살을 듬뿍 받아 다른 지역 채소보다 훨씬 맛나다”고 김씨가 자랑했다. 그러더니 무화과 열매를 하나 따서 기자에게 건네면서 “어제 비가 내려 먼지가 싹 쓸려갔으니 그냥 먹어도 좋다”고 했다. 한입 베어 물자, 살짝 떫은 듯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가득 찼다.

 

1 숲길로 걷는 2코스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아 1코스보다 걷기 힘들다. 하지만 땅이 폭신폭신해 발과 다리에 큰 무리를 주지 않는다.

 

이정표를 따라 2코스에 접어들었다. 1코스가 바닷길이라면 2코스는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숲길이다. 물론 물때를 잘 맞추면 바닷길로도 걸을 수 있지만, 언덕배기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 개인적으로는 숲길을 추천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아 1코스보다 걷기 힘든 편이다. 원래 2코스는 서해를 지키던 군인들 길이었다. 지금도 녹슨 철조망이 쭉 둘러쳐 있고,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엔 낡은 해안 초소가 예전 그대로 있다. 이곳에서 경비를 서던 젊은 군인들은 저 멀리 망망대해와 부서지는 하얀 파도를 보며 무엇을 떠올렸을까. 나라를 지킨다는 애국심이었을까. 아니면 고향에 두고 온 ‘순이’의 뽀얀 살결이었을까. 거센 바람과 파도, 바스락바스락 낙엽 소리가 묘한 앙상블을 이뤄 귓가를 계속 울렸다.

송포항을 지나 사망마을에 이르렀다. 기자가 “무슨 마을 이름이 ‘사망’이냐”고 묻자 김씨는 “‘선비 사’자를 쓴다. 이 마을 사람은 다 선비처럼 점잖다”며 허허 웃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1시간여 걷다 보니 방풍림으로 유명한 고사포해수욕장이 나타났다. 하늘 높이 쭉쭉 뻗은 소나무 숲길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바람이 무척 시원해 여름철이면 이곳에서 야영을 즐기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천천히 이야기도 나누고 사진도 찍으며 걷다 보니 2시간가량이 훌쩍 지났고, 어느새 2코스 종착점인 성천이었다.

 

 

볼거리 많은 3코스, 걷기에는 부적절

3단계 코스는 하섬과 적벽강, 수성당, 채석강 등 볼거리가 많다. 혹자는 ‘마실길의 백미’라 칭하기도 한다. 입구부터 20여 분 걸으니 하섬전망대에 다다랐다. 저 멀리 하섬이 보였다. 사리(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커지는 시기) 때 모세의 기적처럼 하섬전망대에서 하섬에 이르는 2km 바닷길이 열려 유명한 곳이다. 안타깝게도 기자가 갔을 때는 밀물이었고 이미 거대한 물길이 갯벌을 삼켜버린 뒤였다. 그 엄청난 바닷물을 싹 빠져나가게 하는 자연의 힘이 참 경이로웠다. 홍해를 갈랐다는 모세도 실은 물때를 잘 아는 바다 사나이 아니었을까.

수사자가 앉아 있는 형상인 적벽강 해안절벽과 바다에 나가기 전 서해를 다스리는 여해신 개양(수성)할미에게 제를 올렸다는 수성당, 태고부터의 세월이 두꺼운 장서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는 채석강을 차례로 지났다. 온몸을 날려 보낼 듯 거센 바닷바람을 맞으며 찾아간 이곳들은 유명세만큼이나 절경이었다. 하지만 ‘길’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3코스는 이전 두 코스보다 훨씬 못하다. 그저 경관이 좋은 유명 관광지를 억지로 이어놓은 듯하다. 국도를 따라 아스팔트 바닥을 걸어야 하는 구간이 많아 체력이 약하거나 체중이 좀 많이 나가는 이,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 이는 자동차로 이동하는 게 낫지 싶다.

마실길 중간 중간 이정표가 지금까지 얼마나 걸었고, 앞으로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 알려준다. 채석강을 지나 16km쯤 걸었을까. 발바닥과 뒤꿈치가 알싸하게 아파왔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하지만 그 뻐근함 속에서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입 안 생채기를 혓바닥으로 계속 건드릴 때 느껴지는 감각이랄까.

3코스 종착점인 격포항을 1km 앞둔 지점에 이르니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바다 속으로 서서히 들어가는 해가 마치 홍시 같았다. 동행한 사진기자는 석양을 찍기 위해 그 자리에 멈췄지만, 기자는 계속 앞으로 걸었다. 종착점을 ‘찍고’ 와야겠다는 ‘오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힘이 불끈 솟았다. 10분여를 갔을까. 3코스 종착점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아침부터 시작한 마실길 걷기는 이렇게 해가 질 때 끝이 났다. 기쁘고 뿌듯했다.

기자와 마실길을 동행했던 안내인 김상용 씨는 “오감을 열어놓고 걸으라”고 조언했다. 바다와 갯벌, 숲 풍경, 바람과 파도, 갈매기 소리, 그리고 짜고 달고 신 냄새가 어우러지는 마실길을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라는 것. 특히 마라톤 완주하듯 쉬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걷는 이들을 보면 무척 안타깝다고 했다.

 

2 부드러운 바닷길을 걷다 보면 바닷바람에 짭조름한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3 하섬으로 가는 2km 바닷길을 걸으려면 물때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사진은 사리 때 바닷길이 열린 모습.

 

“오감을 열어놓고 걸으라”

“사실 1코스만 걸어도 되거든요. 썰물 때 바닷길로 걷고, 밀물 때 숲길로 걸어 돌아오는 거죠. 그리고 다음 날 2 또는 3코스를 걸으면 되잖아요. 요즘엔 도로가 잘 뚫려 당일치기로 왔다가 길만 정신없이 걷고 돌아가버리는 사람이 많아요. 이곳에 온 사람들이 천천히 여유를 가지면서 걷기도 하고 쉬기도 하며 식사도 하고 마을에 들러 민박도 하면 지역 경제에 도움도 되고 좋을 텐데, 그저 ‘완주’에만 의미를 두고 걸으니 아쉬울 뿐이죠.”

현재 새만금전시관에서 격포항까지 개발된 마실길은 변산반도 남쪽 해안을 따라 부안자연생태공원까지 확장될 예정이다. 그러면 2012년 총거리 66km의 변산마실길이 완성된다.

“여행은 누군가 또는 무언가와 함께 하는 게 아닐까.”

“여행이 뭐라고 생각해?”라는 친구의 질문에 대한 기자의 답이었다. 18km를 7시간여 동안 줄곧 걷다 보니 확실히 방전된 충전지처럼 완벽히 비워졌다. 그리고 ‘누군가’와 ‘무언가’로 충실히 채웠다. 지금도 입술을 훔칠 때마다 거센 바닷바람의 ‘짠내’가 느껴진다.

 

 

 

Basic info.

☞ 교통편
경부고속도로 →천안논산고속도로 →서천공주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 →부안IC →30번 국도 →새만금전시관

 

☞ 코스
1단계 코스 | 새만금방조제 →합구마을 →대항리패총 →변산해수욕장 →송포, 5.3km, 1시간~1시간 30분

2단계 코스 | 송포 →사망마을 →노리목 →고사포해수욕장 →성천, 5.7km, 1시간 30분~2시간

3단계 코스 | 성천 →하섬전망대 →변산해안도로 →격포자연관찰로 →적벽강 →수성당 →격포해수욕장 →채석강 →격포항, 6.5km, 2시간 30분~3시간

 

Tip.

1. 마실길을 걸을 때 반드시 물때를 알아야 한다. 부안군청 환경녹지과(063-580-4382)나 변산마실길 임시안내소(016-654-7660)에 문의하면 알 수 있다. 국립해양조사원 홈페이지(www.khoa.go.kr)에서 ‘바다갈라짐 정보’를 검색하거나, 부안군청 문화관광 홈페이지(www.buan.go.kr/02tour)에서 ‘관광정보’ 산하 ‘조석 및 바다갈라짐 정보’를 찾아봐도 된다.

2. 길 중간 중간에 ‘마실길’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대형 현수막이나 나뭇가지에 빨간 리본을 걸어 안내하기도 하니, 길을 찾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다만 길이 자주 마을을 통과해 시골집 옆을 따라가더라도 잘못 들어선 게 아니므로 당황하지 말자.

3. 1코스 시발점인 새만금전시관에 차를 세워놓고 걷기 시작한다. 3코스 종착점인 격포항에 ‘콜택시’를 불러 새만금전시관으로 돌아가면 된다. 둘 다 유명 관광지라 콜택시를 부르기 쉽다. 비용은 1만3000~1만5000원. 물론 격포항 인근 격포터미널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새만금전시관으로 돌아가도 된다.

도란도란 들려왔다, 다른 세상 꿈꾸던 목소리들
모악산 마실길

 

내장산, 설악산, 오대산 등 유명한 산이 등산객으로 몸살을 앓는 계절이다. 검붉은 단풍 빛깔이 각양각색의 등산 점퍼 색깔에 눌려버릴 정도다. 모악산 마실길 구간 중 귀신사에서 출발해 싸리재를 넘어 동곡약방으로 내려오는 길의 단풍은 유명산에 미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호젓한 것으로는 최고다. 그윽한 숲길의 정취를 독차지한다는 설렘이 충분히 매력적이다. 10월 26일 싸리재를 넘어가며 단 한 사람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 산이 다 내 것 같은 기분, 이런 호사를 어디서 누릴까. 11월 중순이면 마실길이 완성돼 방문객이 크게 늘 것이다. 그 전에 숲의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부지런히 짐을 싸자.

 

 

음기 누르려고 남근석을 등에 진 석수 세워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귀신사(歸信寺)에 도착했다. 절 입구 계단을 오르는데 초등학생 3명이 달려와 기자를 반겼다. 전주에 사는데 할머니 49재를 지내러 왔단다. 아이들은 수첩을 들고 메모하며 걷는 기자를 신기해하면서 따라붙더니 쉴 새 없이 수다를 늘어놓았다. 고찰의 고즈넉함을 놓치기 싫었지만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어느새 귀가 솔깃했다.

귀신사 입구에 묶여 있는 누렁이의 이름은 불가에서 깨달음을 뜻하는 ‘보리’다. 개집이 2개인 이유를 물으니 다른 개 ‘해탈’이는 언젠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축구를 잘해 인기가 많은 개였단다. 아이들은 “해탈이가 없어져 보리가 심심하다”며 개와 놀아줬다. 여자아이는 절 뒤편 탑전을 오르는 기자를 따라와 “돌이 삐걱거려 넘어질 수 있다”며 일일이 삐걱거리는 돌을 알려줬다. 부처만큼 마음이 곱다.

계단 중간쯤에 수백 살 먹은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당당히 서 있다. 그 옆에는 석수상이 있다. 안내판에는 사자상이라 쓰였지만 사자인지 개인지 확실치 않다. 석수 위에는 남근석이 서 있다. 한 스님을 붙잡고 연유를 물었더니 “모악산 일대에 음기가 강해 누르기 위해서 세웠다” “백제왕의 개인 사찰이라 남근석을 세웠다”는 두 설을 들려주었지만 어느 것이 정설인지 알 수 없다. 귀신사 한가운데 있는 대적광전의 단청은 나무 색깔 그대로다. 스님은 “이는 고색(古色) 단청이다. 오래된 사찰에 어울리게 표시나지 않게 색을 입혔다”고 설명했다.

귀신사를 바라보고 왼쪽 포장길을 따라 오르면 마실길이 시작된다. 마실길은 이웃동네, 이웃집으로 놀러 가는 길이다. 전북은 걷는 길 사업을 시작하며 ‘마실길’이란 통합브랜드를 출범했다. 모악산 마실길은 김제시, 전주시, 완주군 등 3개 시·군이 함께 조성 중이며 총거리는 약 56km다. 오늘 걸을 구간은 귀신사~싸리재~동곡마을~금평저수지~원평장터 코스로 약 10km다. 김제시는 이 코스 외에 청도리~싸리재~서강사~서릿골~금평저수지~금산사~배재를 잇는 길도 조성하고 있다. 마실길 조성을 담당한 김제시 환경과 김희종 씨와 모악산 토박이 김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최고원 상임이사가 길동무가 돼주었다.

 

 

마실길 정상에 오르니 전북 땅이 한눈에

 

귀신사 대적광전. 연유를 모르는 방문객들은 고색단청을 보고 “살림살이가 힘들어 색을 못 입혔나요”라고 묻기도 한다.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청도리삼층석탑이 있다. 귀신사가 9개의 암자를 거느리며 번성했던 시절에는 이곳까지 사찰의 터였다고 한다. 귀신사의 내력을 설명하던 최고원 이사가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귀신사는 한때 개 구(狗) 자를 따 구신사였다는 것. 한 어머니가 큰아들 집에서 힘들게 일만 하다 죽은 뒤 개로 환생해 큰아들 집에 살았는데 귀여움받아 한을 풀기를 기대한 것과는 반대로 음식을 훔쳐 먹다 큰아들에게 모진 매를 맞았다고 한다. 억울한 어머니는 큰아들과 작은아들 꿈에 번갈아 나타나 하소연을 했고 뒤늦게 불효를 반성한 두 아들은 그때부터 개를 비단에 싸서 업고 안고 전국 팔도를 유람시키고, 맛난 음식을 대접했으며 개가 죽은 뒤에는 지관까지 불러 묏자리를 썼는데 그곳이 귀신사 자리란다. “바로 개 명당이다”란 말에 웃음이 터졌다.

삼층석탑을 지나면 왼쪽으로 고압전선이 지나는 철탑과 그 아래 축사가 눈에 들어온다. 보기 싫어 고개를 돌리려는데 한 편의 이야기가 눈길을 잡았다. 철탑 아래 주변이 ‘여드레 약수터’ 자리란다. 앉은뱅이였던 한 사내가 이곳 약수가 몸에 좋다는 소문을 듣고 8일 동안 두 팔로 기어올라가 마침내 약수를 마시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전설이 있다. 이제는 약수터의 흔적조차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여기서 길이 세 갈래로 나뉘는데 경사진 맨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야 한다. 길이 임도(林道)라 차 한 대가 지날 정도밖에 안 되지만 오가는 차량이 없어 걷기에는 아쉬움이 없다. 이 코스는 산악자전거 동호회 회원들이 종종 찾는다. 경사진 길을 30~40분 오르면 또 한 번 갈림길을 마주하는데 바로 싸리재다. 전봇대에 표지판이 걸렸는데,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선암1길은 금구면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곧장 오르는 청도6길은 구성산 자락을 따라 오른다. 김제시는 마실길 개장 전에 이곳에 마실길 코스 안내도를 설치할 예정이다.

싸리나무가 많아서 싸리재인 이곳에도 사연은 많다. 동학 농민들은 일본군과 관군을 피해 도망 다니며 불을 지펴도 연기가 나지 않는 싸리나무, 청미래덩굴 뿌리로 밥을 지었다. 먼 길을 이동해야 하니 무거운 가마솥 대신 쇠가죽으로 밥을 했다. 쇠가죽을 네 방향으로 팽팽히 잡아당겨 나무에 걸고, 불린 쌀을 올려 짓는 방식이다.

귀신사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남짓. 뾰족하게 솟은 구성산 정상이 눈에 들어오더니 어느새 마실길 정상에 올랐다. 오르막을 오르며 틈틈이 바라보던 익산, 전주 시내가 정상에 서니 한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탁 트였다. 맑은 날에는 부안, 변산반도 바다까지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히기 좋다.

땀이 적당히 마르자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동곡마을까지 내리막이 이어져 발걸음에 탄력이 붙었다. 멀리 금평저수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나무에 가려 사라지고 정상에서 불던 바람은 오간 데 없이 새소리만 저 멀리서 들려왔다. 조용한 숲길을 만끽하며 내려가는데 갑자기 길가에서 푸다닥 하더니 꿩 한 마리가 산 속으로 숨어버렸다. 순간 귀신사를 지나 걸어오며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꿩도 사람을 모처럼 만나 더 놀랐나 보다. 김희종 씨는 “사전답사를 위해 여러 번 이 길을 찾았을 때도 사람을 만나기 힘들었다. 숨어 있던 길을 발굴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숨은 트레킹 코스를 개발해 도보관광객을 모으기 위함이다.

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굽잇길을 한참 따라 내려오니 오른쪽에 전봇대를 눕혀 다리로 만들어놓았다. 전봇대를 건너 오르면 구성산 정상이 나온다. 전봇대 아래는 계단을 만들어놓았는데 도보관광객이 계곡에 내려가 간단한 세면을 하도록 돕는다. 아직 이 길의 이름은 없지만 나무가 병풍처럼 이어지니 병풍길로 불러도 좋겠다. 사방댐을 지나면 다리가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병풍길이 끝난다. 다리 아래 흐르는 계곡물에 송사리가 떼 지어 노는 게 보일 정도로 물이 맑다. 김제는 여름철 물놀이에 적당하게 한창 정비공사를 하고 있다.

 

 

동곡(구릿골)마을에 들어서자 농사일을 하는 주민이 보였다. 왼쪽이 원불교 원심원 방향이고 오른쪽이 동곡약방 자리로 가는 길이다. 마실길은 동곡약방으로 이어진다. 예부터 구리 등 광물이 많아 구릿골이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고, 그릇을 만들어 그릇골이었는데 구릿골로 잘못 전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실길 주변에는 ‘금’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은데, 한때 이곳에서 사금 채취가 활발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이곳의 금덩어리를 모두 수탈했다.

동곡약방은 증산교 창시자 강증산(1871~1909) 선생이 1908년 마을에 살던 김준상의 아내의 발가락 종창을 고쳐주고 보답으로 방 한 칸을 얻은 뒤 연 약방이다. 강증산이 이곳을 광제국이라 부르며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죽은 자도 살리는 기적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원래 초가였던 동곡약방은 사라지고 오색단청으로 장식된 기와집이 앉아 있다. 귀신사의 고색단청과 비교돼 바로 보자니 눈만 피곤했다.

동곡약방을 나와 정면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우뚝 솟은 제비산이 보인다. 제비산은 ‘황제의 아내’를 뜻하는 산으로 음기가 강하다. 제비산 자락에는 정여립(1546~ 1589)이 살던 집터가 있다. 기축옥사의 주인공인 정여립은 조선 선조 22년 전라도에서 군사를 모아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능지처참당했다. 조정은 그의 집터도 역모의 땅이라 하여 숯불로 태우고 다시는 집을 못 짓게 했다. 제비산 중턱 치마바위는 정여립이 천일기도 끝에 날아가는 화살을 따라가 잡는다는 용마를 얻었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기축옥사를 두고 진짜 모반을 했다, 안 했다 설이 오가지만 궁금한 것은 정여립의 사상이다. 그는 모두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대동사상으로 양반, 상놈 구분 없는 대동계를 조직하고, ‘천하는 따로 주인이 없다’는 천하공물설과 ‘누구를 섬기더라도 임금이다’는 하사비군론 등을 전파한 열린 사상가였다.

 

‘한반도의 자궁’금평저수지 물은 호남평야를 적신다.

 

후천세상 메시아가 온다는 오리알터

백제의 한 맺힌 저항의 역사가 이어져온 모악산 일대에는 현실세계를 벗어나 깨달음을 얻고 꿈을 펼치려는 사람이 과거부터 줄을 이었다. 어머니의 산으로 들어와 매듭을 지으려 한 것이다. 강증산도 동곡마을에 들어와 여자와 상놈이 대접받는 후천개벽 세상을 꿈꾸며, 서로 맺힌 한을 풀어주고 도우며 살아가라는 해원상생(解寃相生)을 설파했다. 속된 말로 모악산은 ‘기도발이 잘 받기’로 소문났다.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을 따라 내려왔더니 금평저수지가 바다처럼 넓게 느껴졌다. 나무로 만든 데크를 따라 걸으면 물 위를 걷는 기분으로 저수지를 만끽할 수 있다. 금평저수지의 또 다른 이름은 오리알터. 오리알은 올(來) 의미이므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할 메시아가 온다는 터다. 정여립도, 강증산도, 전봉준도 이 근방 사람이다. 금평저수지 물은 만경강, 동진강을 따라 내려가 호남평야를 적시는 젖줄이 된다. 1980년대 초 김지하 시인은 생명운동 기행을 이곳에서 시작하며 금평저수지를 ‘한반도의 자궁’이라 불렀다.

금평저수지를 지나 금산면 방향 도로를 따라 약 2km 걸어나가면 원평장터가 나온다. 한적한 시골장터 모양새지만 이곳은 전봉준이 유년시절을 보내고 마지막 전투를 치른 유서 깊은 곳이다. 최고원 이사장은 “사람들은 흔히 동학혁명군과 전봉준을 생각하면 고창, 정읍부터 떠올리지만 이곳은 1894년 11월 공주 점령이 좌절된 뒤 전봉준이 농민군을 재집결해 아침부터 밤까지 구미란 전투를 벌였던 역사적인 장소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우리 기억에서 멀어졌다. 구미란 뒷산에는 무명 농민군의 묘지 10여 기가 있었으나 봉분의 흔적마저 사라졌고, 전투를 증언해줄 안내판 하나 없다.

 

 

이곳에서 서릿골이나 금산사로 돌아나갈 수 있다. 모악산 마실길은 조성공사가 끝나지 않아 미흡한 점이 많지만, 홀로 걷는 운치를 맛보고 다른 세상을 꿈꾸었던 개혁사상가들의 정신을 곱씹어보기엔 부족함이 없다. 마실길을 운영 관리하는 (사)마실길은 매달 음력 보름 달 밝은 밤에 ‘모악산 마실길 달빛 즈려밟기’ 행사를 열 계획이다. 전주 삼천교에서 완주군 추동마을과 학전마을을 돌아 12km 정도를 걷는다. 마실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줄 이야기꾼도 양성할 예정이니 기대가 크다. 그러나 한적한 숲길을 걷고 싶다면 지금이 딱이다.

 

Basic info.

☞ 교통편
승용차 | 서울 →경부고속도로 →천안논산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금산사나들목 →금산사 방면 712번 국도 →청도리 →귀신사

대중교통 |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전주고속버스터미널 →79번 금산사행 버스(약 30분 소요) 또는 서울 →김제고속버스터미널 →청도리행 완행버스 이용(완행버스는 하루 2번밖에 운행하지 않아 전주터미널을 이용하는 게 편하다)

녹두장군 恨과 피울음 올가을에도 검붉게 물들었나
내장산 전봉준길

내장산국립공원 초입에서 내장사에 이르는 길은 ‘단풍터널’로 불릴 만큼 가을단풍이 아름답다.

 

매혹적인 자태로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 고려청자는 도공들의 땀과 눈물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한(恨)의 결정체다.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슬픔, 그것이 고려청자가 내뿜는 비장미가 아닐까. 내장산은 고려청자와 같은 산이다. 내장산의 검붉은 단풍은 눈을 멀게 할 만큼 고혹적이지만 산은 좌절한 혁명가의 피울음을 품고 있다.

소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와 노령산맥의 자락을 타고 호남평야에서 우뚝 솟은 내장산(內藏山)은 호남 지방의 5대 명산(지리산·월출산·천원산·방장산) 중 하나이며, 분홍빛 가을단풍이 아름다워 조선 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10월 26일 찾아간 내장산은 짙푸른 옷을 벗고 가을 옷으로 갈아입는 중이었다. 이곳의 단풍은 10월 말에서 11월 중순 절정을 이룬다. 단풍잎이 얇고 작아서 ‘애기단풍’이란 애칭을 얻었다.

 

 

분홍빛으로 타오르는 애기단풍

오전 9시 단단히 옷깃을 여미고 내장산국립공원 입구에 들어섰다. “아직 단풍이 들려면 1~2주 기다려야 한다”는 주민들의 말마따나 본격적인 단풍 구경이 시작되기 전이어서 산은 호젓했다.

이 일대는 내장산국립공원으로 묶여 있지만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내장사를 에워싸고 있는 내장산과 백양사를 품은 백암산, 그리고 입암산성이 자리한 입암산이다. 이 세 구역 어느 쪽에서 출발해도 무방하다. 일반적으로 산꾼들은 내장사에서 출발해 까치봉(717m)~순창새재~상왕봉(741m)~백양사로 이어지는 ‘내장사~백양사’ 코스를 선호한다. 단풍이 만개한 날에 이 코스를 따라 걸으면 정상 곳곳에서 하늘을 뒤덮은 단풍바다를 볼 수 있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예닐곱 시간은 족히 걸린다. 초보자에겐 무리다.

일주문에서 백련암, 원적암, 내장사에 이르는 길 또한 아름답다. 일명 ‘단풍터널’이라고도 하는 이 구간은 단풍이 절정을 이루면서 자연스레 아치 형태의 터널이 만들어진다. 이곳을 왕래하는 단풍열차가 있다.

입구에서부터 20여 분 걸어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때쯤이면 갈림길이 나온다. 길 그대로 10여 분 더 올라가면 바로 내장사 입구지만 왼쪽으로 빠져 케이블카를 타는 것도 묘미다. 케이블카 이동거리는 700여m에 불과하지만 내장산의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많은 사람이 찾는다. 그러나 케이블카를 선택했을 경우 다시 내장사로 돌아가는 데 40여 분이 소요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내장사는 1300여 년 전 백제 제30대 무왕 37년(636)에 영은사란 이름으로 창건됐다.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진신사리탑이 인상적이지만 절의 규모는 소박하다. 진입로 양편에는 108그루의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108번뇌를 상징한다. 내장사를 나오면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이대로만 걷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내 난관에 부딪혔다. 까치봉을 향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초입에서 먼저 온 일행도 표지판을 보며 망설였다. 산세가 가파른 탓이다. 까치봉은 내장산 서쪽 중심부에 솟아 있는 2개의 바위봉우리로, 그 형상이 까치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내장산은 기암괴석이 많은 산세가 금강산과 비슷하다고 해서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린다. 계곡의 구불구불한 길들이 흡사 양의 창자 같다고 해 ‘내장(內藏)’이란 이름이 붙었을 정도로 심산유곡이다. 이름만큼이나 산을 오르기가 만만치 않았다. 구불구불한 길이 1.26km에 달한다. 평지라면 한달음에 달려가겠건만 산길은 쉽지 않다. 이쯤이면 정상일 것 같은데 올라가보면 또다시 새로운 길이 펼쳐진다.

오아시스를 찾듯 50여 분을 올라간 끝에야 까치봉에 다다랐다. 까치봉은 상왕봉에 이어 내장산의 제2봉으로 백암산을 연결하는 주봉이다. 내장산의 9봉우리가 까치봉을 중심으로 동쪽을 향해 이어지면서 말굽형을 이루고 있다. 비록 정상에서 까치는 찾을 수 없었지만 산등성이가 파도치듯 밀려오는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사람들은 단풍이 아름답게 든 내장산을 최고로 치지만, 아름다움은 시각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냄새로도, 맛으로도, 소리로도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단풍을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면 잠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눈을 감아보자. 그리고 귀를 쫑긋 세워보자. 그동안 칼날같이 살을 에어내며 휘몰아쳐 성가시기만 했던 바람이 어느새 친구처럼 다가온다.

“으으으… 솨… 솨.”

먼저 바람이 귓가에 다가와 속삭였다. “날씨도 추운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잘 도착했다는 소식을 서울에 전해주겠다”더니 이내 멀어졌다. 비단 바람만이 아니다. 나무들이 우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바람이 나무에 부딪혀 사방으로 퍼져나갈 때 새로운 언어가 만들어진다. 우는 소리라고 했지만 웃음소리일지도 모른다. 아니, 시시껄렁한 잡담소리라고 해도 좋다. 순간 영화 ‘와호장룡’의 한 장면이 오버랩됐다. 바람 가르는 소리와 나뭇잎 하나하나의 떨림을 담아냈던 대나무숲 결투 장면이 고스란히 이곳에서 재현됐다.

 

호수에 비친 내장산 단풍.

 

좌절로 끝난 역사의 아픔

내장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순창새재에서 출발해 백암산 상왕봉을 거쳐 사자봉에 이르는 2시간 남짓 길은 역사의 아픔이 담겨 있다. 이 길에는 민초들의 나라를 꿈꾸며 혁명을 일으켰지만 끝내 좌절로 끝난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의 한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동학농민군은 1894년 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봉기했다. 1차 봉기에서 ‘제폭구민, 보국안민(조선 조정의 학정에 대항해 백성을 구하며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을 내세웠던 이들은 불과 여섯 달 뒤에 일어난 2차 봉기에선 ‘척양척왜(외세를 몰아내자)’를 외쳤다.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이틀 전인 1894년 7월 23일, 무장한 일본군이 고종이 거처하던 경북궁을 습격한 일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불이 붙은 2차 봉기는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커지자 일본군과의 한판 대결이 불가피했다. 2차 봉기 당시 농민군은 약 60만 명으로, 일본군 2000여 명과 조선관군 2800명을 압도했다. 그럼에도 농민군은 연전연패했다. 처음부터 싸움이 되지 않았다. 당시 일본군은 무라타 소총과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했다. 사정거리가 500보를 넘는 데다 손잡이를 통해 탄알을 넣기 때문에 여타 총에 비해 단시간 안에 더 많이 쏠 수 있었다.

반면 농민군이 가지고 있던 화승총은 심지에 불을 붙여 타들어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사정거리도 100여 보에 그쳐 토벌군이 100여 보 밖에서 사격하면 농민군은 그저 바라만 볼 뿐 응사할 수 없었다. 이마저도 부족해 대부분의 농민군은 죽창으로 무장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그것은 전투가 아니라 차라리 학살에 가까웠다.

1894년 9월 전봉준은 우금치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남쪽으로 몸을 피했다. 흩어진 농민군 1만 명을 모아 전주 모악산 아래 김제 원평에서 다시 한 번 맞붙었다. 결과는 우금치 때와 다르지 않았다. 임산부는 일본군의 총칼에 잔인하게 살해당했고 아들과 함께 있던 한 농민군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안고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수백 명의 시체가 산 위에 널렸다. 인근 마을은 모두 전소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둔산 근방 마을 주민이 전부 모여 골짜기를 파서 양지바른 곳에 시체를 묻었다. 산 전체가 임자 없는 동학군의 무덤이 된 그곳엔 소나무 숲만 무성하다.

 

(왼쪽)내장산의 제2봉으로 백암산을 연결하는 주봉인 까치봉. (오른쪽)내장산에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이루지 못한 꿈이 담겨 있다. 정읍역에 세워진 동학혁명농민군의상.

 

이루지 못한 녹두장군의 꿈을 따라

재기가 불가능할 상황에 이르자 전봉준은 농민군을 해산하고 내장산국립공원 안에 있는 입암산성으로 몸을 숨겼다. 그의 목엔 ‘군수직과 현상금 1000냥’이 걸렸다. 한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던 그는 입암산성을 나와 순창새재~백암산 상왕봉~사자봉을 거쳐 백류암에 스며들었다. 이후 옛 부하였던 전북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의 김경천 집을 찾아갔다가 그의 밀고로 붙잡혀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 정상에 오르는 20여 분만 제외하면 상왕봉을 오르기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지만, 유독 걷는 내내 바람과 나무의 울부짖음이 요란했다. 녹두장군의 한을 애도하는 것일까. 좌절한 혁명가에 대한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숙연해졌다.

상왕봉을 지나 30여 분을 가다 보면 백양사로 향하는 내리막길에 접어든다. 크고 작은 돌을 조심조심 밟고 내려오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산길을 내려와 도로에 도착해도 백양사까지 들어가는 데 족히 30~40분은 걸어야 한다. 이때 주위를 둘러보면 비자나무와 굴거리나무 등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들이 시선을 잡아끈다. 계속되는 걷기에 지칠 때쯤, 1400여 년 전 창건된 백제시대의 고찰이 눈앞에 들어선다.

전남 장성군 북하면에 자리한 백양사는 내장사에 비해 화려하다. 이곳 역시 가을단풍 아름답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 일주문 밖 주차장에서 쌍계루까지 이어지는 단풍길은 황홀하다. 쌍계루는 백양사의 가장 오래된 건물로, 그 이름은 두 개의 계곡이 누각 앞에서 합해져 하나의 줄기를 이루는 데서 유래했다. 징검다리를 오가는 것이 마냥 즐거운 아이들, 특별한 사랑의 추억을 만들려는 연인들로 이곳은 늘 인기 만점이다. 특히 호수 위에 비친 단풍이 어우러진 백암산 모습은 백미로 꼽힌다.

내장산은 가을단풍을 최고로 치지만 사시사철 볼거리로 가득하다. 봄에는 흐드러지게 핀 철쭉과 벚꽃이 사람들을 유혹하며, 여름철엔 물 좋은 계곡이 최고의 피서지다. 눈꽃이 핀 설경을 보려고 겨울에만 찾는 사람도 적지 않다. 곧 내장산의 가을단풍이 장관을 이룬다. 가을단풍 이면으로 숨겨진 역사의 아픔까지 읽어낼 수 있다면,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의 깊이가 더욱 깊을 것이다.

 

 

Basic info.

☞ 교통편
승용차 | 서울을 기점으로 경부고속도로 →천안분기점에서 천안논산고속도로 진입, 광주·전주·공주 방면으로 우측 방향 →북공주분기점에서 광주·당진대전고속도로·공주분기점(당진, 서천) 방면으로 직진 →광주·익산 방면으로 직진 →논산분기점에서 호남고속도로 진입(순천 방향) →익산분기점에서 전주·삼례 방면으로 직진 →입암, 장성·정읍체육공원 방면으로 우회전(서부로) →죽림교삼거리 좌회전(천변로) →내장사거리 우측 방향(벚꽃로) →내장산국립공원 도착. 문의 내장산국립공원 사무소(063-538-7875). 전라북도 정읍시 내장동 59-10.

대중교통 | 열차를 타고 정읍역에 내리거나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또는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정읍행 버스를 타고 내려간 뒤 내장산행 버스 이용.

 

☞ 코스
내장산국립공원 입구 →내장사 →까치봉 →순창새재 →상왕봉 →백양사, 15~16km.

 

활활 타는 단풍 밟으며 넉넉한 어머니에게 갑니다

지리산 둘레길

지리산 산청 둘레길의 경호강과 덕천강을 따라 다랑논 벼들이 노랗게 익었다. 사진은 경호강 풍현 들머리.

 

지리산 엄지발가락에 노란 물이 들었다. 새끼발가락엔 살짝 빨간 물이 배었다. 산자락 다랑이가 호박색으로 익었다. 산동네 지붕마다 붉은 고추가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마당 귀퉁이엔 접시꽃(촉규·蜀葵)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맨드라미꽃 닭 볏도 농부 얼굴처럼 검붉다. 봉숭아, 채송화, 작약, 달리아, 코스모스, 깨꽃….

늙은 호박이 탱자나무 울타리마다 가부좌를 틀고 있다. 돌담 너머 감과 대추가 주렁주렁 다발로 매달렸다. 호두나무를 흔들면 후드득 머리 위로 호두가 떨어진다. 밤송이가 벌어져 밤톨이 땅에 수북이 쌓였다. 활짝 벌어진 석류알이 검붉다. 돌덩이처럼 생긴 돌배가 물렁하다 못해 짓물렀다. 머루와 다래가 익고, 어름이 대롱거리고, 개암을 깨물면 입 안 가득 깨소금 냄새…. 지리산 둘레길은 요즘 ‘밥 안 먹어도 배부른’ 길이다. 맑은 햇살이 온갖 열매를 데쳐, 감칠맛 나게 맛이 들었다. 선선한 바람은 곡식들을 버무려 노랗고 빨갛게 여물게 했다.

 

 

모두 850여 리 약 340km 내년쯤 둘레 잇기

지리산 둘레는 모두 850여 리(약 340km). 3개 도(전남, 경남, 전북)와 5개 시·군(구례, 하동, 산청, 함양, 남원) 그리고 16개 읍·면 100여 개 마을을 거친다. 숲길(43.8%), 농로(20.8%), 고샅길(19.9%), 임도(14%), 도로(1.4%), 논둑길, 밭둑길, 고갯길, 강변길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 약 170시간(시속 2km) 걸린다. 하루 16km씩 걸으면 약 21.2일이 걸리는 셈이다. 때론 낮은 곳(구례 토지 50m)을 걷기도 하고, 때론 산꼭대기(하동 악양 형제봉 1100m)도 올라야 한다.

하지만 아직 둘레길이 모두 이어진 것은 아니다. 2008년 5월 전북 남원 산내면 매동마을~경남 함양 휴천면 세동마을 코스가 첫선을 보였고, 2008년 11월 남원 인월 지리산길 안내센터~매동마을 길이 트였다. 2011년쯤 돼야 둘레 잇기가 모두 마무리될 예정. 그때야 비로소 아무 곳에서나 출발해 휘휘 지리산 자락 한 바퀴를 돌 수 있다.

현재 지리산 둘레길이 열린 구간은 총 70.1km. 남원 주천~운봉 14.3km, 운봉~인월 9.4km, 인월~금계 19.3km, 금계~동강 15.2km, 동강~수철 11.9km다. 남원과 함양 구간은 모두 이어졌지만 하동 구례 지방은 한창 길을 트고 있다. 나머지 산청 구간(수철~갈티재 47.1km)은 11월 중에 열린다. 산청 구간은 이미 개통된 함양 동강~산청 수철마을(11.9km)에서 이어진다. 아직 길 안내판이나 화장실, 주차장, 숙박시설 등이 미흡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둘러보는 데 큰 불편은 없다. 11월 중순이면 단풍 숲길이 활활 불타오른다.

지리산은 크다. 무겁다. 배춧속처럼 꽉 찼다. 황소처럼 웅크리고 앉아 천년만년 묵언정진 중이다. 세상을 모두 담고도 요지부동 흔들리지 않는다. 지리산은 한국인의 어머니 산이다. 한 해 두세 번은 가봐야 마음이 넉넉해진다. 지리산은 잘 보이지 않는다. 산에 들어서는 순간 어느새 사라진다.

지리산의 뷰 포인트(view point)는 어디일까. 지리산은 워낙 커서 산 밖이나 곁가지 낮은 산 혹은 둘레길에서 봐야 전체가 보인다. 산꾼들은 전남 광양 백운산(1215m)에서 겨울에 보는 지리산을 우선 꼽는다. 반야봉~삼도봉~명선봉~형제봉~칠선봉~영신봉~촛대봉~연하봉~제석봉~천왕봉의 용처럼 꿈틀대는 주능선이 한눈에 펼쳐진다. 울끈불끈 지리산의 근육질 몸매가 장관이다. 백운산은 흔히 ‘지리산 전망대’라 부른다. 지리산 남부 능선의 경남 하동 청학동 삼신봉(1284m)에서 북쪽으로 올려다보는 천왕봉(1915m) 주능선도 황홀하다. 이곳에서 보는 천왕봉~노고단 주능선은 사철 어느 때 봐도 색다른 맛을 주지만 4월에 선이 가장 뚜렷하다.

지리산을 45년 동안 1000번 넘게 찾은 정지섬 씨는 이 두 곳 외에 다른 곳도 덧붙여 추천한다. 첫째 경남 산청 웅석봉(1099m)에서 바라보는 천왕봉, 둘째 지리산 황금능선(구곡산~써리봉 20여km의 동남부 능선)의 경남 산청 국사봉(1037m)에서 바라보는 천왕봉, 셋째 경남 함양 엄천강 건너 법화산(990m)에서 보는 제석봉 천왕봉 중봉, 넷째 10월 전북 남원 여원재 부근의 도솔암 마당에서 보는 천왕봉 위로 두둥실 떠오르는 달. 정씨는 “영남에 자리 잡은 천왕봉은 어디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보는 맛이 달라지고, 호남 땅에 있는 반야봉은 어디서 봐도 모습이 비슷하고 정겹다. 반야봉은 중년 여인의 펑퍼짐한 엉덩이나 어머니의 젖가슴같이 푸근하다”고 말한다.

“법화산 포인트는 11월쯤 가야 안성맞춤이다. 고만고만한 높이의 세 봉우리가 목 주름살까지 다 보인다. 목울대가 울컥거리는 착각이 들 정도다. 늦가을 황룡이 꿈틀거리는 황금능선 국사봉에서 보는 천왕봉은‘한국판 큰 바위 얼굴’ 같다. 장쾌하고 헌걸차다. 눈 오는 날 백운산에서 보는 지리산은 눈이 시리고 가슴이 아리다. 능선과 능선 사이,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에 묻힌 수많은 인간의 삶과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산꾼들이 말하는 지리산 감상 지점은 보통 사람이 오르기엔 너무 높다. 그렇다. 굳이 힘들여 그곳까지 갈 필요도 없다. 둘레길에서 보는 지리산 봉우리들도 아름답다. 둘레길도 최고 높이가 해발 700m 안팎이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는 연봉은 더욱 아슴아슴 신비롭다. 산청에서 보는 웅석봉·제석봉·천왕봉, 남원에서 보는 반야봉·삼도봉·토끼봉, 구례에서 보는 왕시루봉·노고단, 함양에서 보는 천왕봉·중봉, 하동 평사리 악양들에서 올려다보는 형제봉 등 지리산 자락도 볼만하다.

 

 

새로 열리는 산청 수철~갈티재 구간

 

남명 조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경남 산청의 덕천서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다.

 

지리산 둘레길 남원 인월~운봉~주천 구간은 우묵배미 분지를 가로지르는 코스다. 운봉고원은 해발 450~580m에 자리 잡은, 움푹 들어간 하늘함지박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타원형의 큰 배와 같다. 나갈 곳은 여원치(450m), 팔랑치(1010m), 부운치(1115m), 정령치(1172m) 등 큰 고개와 가장마을 쪽에서 인월로 흐르는 시냇물 람천뿐이다.

남원 매동마을~함양 금계마을 길은 ‘외가 가는 길’이다. 산비탈 계단식 논인 다랑이가 하늘에 걸려 있다. 이곳 사람들은 “다랭이 논”이라 말한다. 느릿느릿 나무늘보처럼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숲길, 논둑, 밭둑길, 농로가 대부분이다.

함양 의중~동강 길은 숲길이다. 함양과 산청을 잇는 동강~수철 길도 마찬가지. 억새와 시누대(해장죽)숲이 훌쩍 크다. 우렁우렁한 늙은 소나무 숲을 지나고 폭포를 만난다.

11월에 열리는 산청 수철~갈티재 구간은 어떨까. 35%가 강(경호강, 덕천강) 따라 걷는 길이고 65%가 숲길이다. 강길은 붉은 감나무밭을 지난다. 숲길은 계곡머리를 휘돌아 지나간다. 제법 가파르다.

산청(山淸)은 ‘산 그리메’ 고을이다. 산 그림자 동네다. 우뚝 솟은 지리산 천왕봉(1915m) 아래에 산청이 있다. 천왕봉은 주소가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다. 꼭대기의 ‘智異山 天王峰(지리산 천왕봉)’이라고 새겨진 돌 뒤쪽 6m지점까지가 산청 땅이다. 그 다음부터는 함양이다. 한마디로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천왕봉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오를 수 있는 곳이 산청이다. 진주에서도 한달음이면 된다. 산이 맑다. 공기도 달다. 강물은 눈이 시리다.

수철마을은 산청읍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다. 택시 요금도 1만 원 이하. 수철마을이란 이름은 옛날에 무쇠로 솥과 농기구를 만드는 철점이 있어서 ‘수철동’ ‘무쇠점’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 마을 매점도 있다. 매점 할머니는 “사람덜이 많이 오니께 참 좋아예! 찐밤, 찐고메(고구마), 찐옥쑤시(옥수수) 좀 사다가 가믄서 먹으라예”라며 활짝 웃는다.

수철마을에서 대장마을까지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다. 동네는 고즈넉하다. 담장에선 호박고지가 몸을 비비 틀며 마르고, 고샅길 시멘트 바닥에선 벼가 고슬고슬 살갗을 태우고 있다. 아담한 들판이 노랗게 익었다. 해내들, 구매들, 너른들, 번답들, 마정지들…. 들 이름이 정겹다. 농부들은 아침 일찍부터 부산하다. 부부가 탈곡기로 벼를 턴다.

대장마을에서 성심원까지 7.90km는 경호강을 따라 가는 길이다. 지루하다. 그늘이 없다. 중간에 내리마을(안뜰)이 있다. 그 뒷산이 웅석봉(1099m)이다. 웅석봉은 ‘곰이 떨어진 산’이라 하여 곰석산이라고도 부른다. 대동여지도에는 ‘유산(楡山)’으로 표시돼 있다.

길은 성심원을 지나 아침재부터 가팔라진다. 아침재는 임도 시멘트 고갯길이다. 무릎에 묵직한 충격이 온다. 하얀 구절초와 연보라 쑥부쟁이 꽃이 지천이다. 아침재~어천마을~운리까지는 호젓한 숲길이다. 운리(雲里)는 탑동, 본동, 원정마을 3개 동네를 통틀어 말한다. 백운계곡은 조선의 유학자 남명 조식의 산책 코스였다. 그는 산천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머리를 식히려면 이곳을 찾아 거닐었다. 그의 글씨 ‘白雲洞(백운동)’ ‘龍門洞天(용문동천)’ ‘嶺南第一泉石(영남제일천석)’ 등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조식은 이 계곡에서 시도 지었다. ‘푸르른 산에 올라보니 온 세상이 쪽빛과 같은데/사람의 욕심은 그칠 줄 몰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세상사를 탐한다.’

마근담(摩根潭)계곡은 ‘마의 뿌리처럼 곧은 골짜기’다. 물이 맑다. 나뭇잎이 살짝 붉어졌다. 사리(絲里)는 실골이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늙은 누에가 실을 토하는 형상(老蠶吐絲)’이라서 실골이다. 실골은 감나무 마을이다. 그래서 길도 감 터널길이다. 붉은 감이 주렁주렁 가득하다. 주저리주저리 매달린 가지가 찢어질 듯하다. ‘감 따드립니다. 높이 12m’ 광고판을 붙인 고가사다리차가 눈길을 끈다.

덕산감은 고종시(高宗枾)다. 고종 황제에게 진상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주장도 있다. 고욤나무와 접목했기 때문에 고종시라고 한다는 설이다. 고종시는 보통 감보다 잘고 씨가 없으며 맛이 달다. 감은 제사상을 차릴 때 ‘조율이시(棗栗梨枾)’로 맨 나중에 놓는다. 대추는 씨가 하나라서 왕을 상징하고, 밤은 한 송이에 세 톨까지 나오니 삼정승을 뜻한다고 하던가. 배는 씨가 6개이므로 육판서를, 감은 씨앗이 8개라 팔도관찰사를 상징하고. 그렇다면 씨가 없는 고종시는 뭘 뜻할까. 마침 고종은 왕보다 높은 황제였다.

 

 

금관가야 구형왕 돌무덤처럼 우직한 사람들

 

지리산 둘레길 이정표.

 

산청은 가락국 땅이었다.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 재위 521~532)의 능(陵)이 왕산에 있다. ‘전(傳)구형왕릉’이 바로 그것이다. 확실치는 않지만 구형왕릉으로 ‘전(傳)’해 내려온다는 것이다. 구형왕은 가락국 10대 왕이자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다. 그는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이곳 왕산에 수정궁을 짓고 살다가 5년 만에 죽었다. 그는 죽을 때 ‘나라를 보존하지 못한 죄인이니 돌로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구형왕릉은 비탈땅에 만든 미니 피라미드식의 특이한 돌무덤이다. 산청 사람들은 그곳엔 이끼가 끼지 않고 칡덩굴도 덩굴손을 뻗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새도 앉지 않고 낙엽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산청 사람들은 우직하다. 소박하다. 구형왕 돌무덤의 돌처럼 울퉁불퉁하지만 변치 않는다. 성철 스님(1912~ 1993)은 산청 단성면 묵곡 출신이다. 그는 스물다섯에 지리산 대원사로 출가했다. 그의 생가 터엔 겁외사(劫外寺)가 있다. ‘시간 밖의 절’이다. 산청도 시간 밖에 있다. 단속사처럼 ‘속세와의 인연을 끊은 땅’이다. 산천재처럼 ‘하늘이 산 가운데 있는 곳’이다. 마침 산천재 입구 화살나무 잎이 붉디붉게 물들었다.

지리산 자락 마을엔 곳곳에 부처가 살고 있다. 칠순 넘은 노인들이 늙은 느티나무처럼 살고 있다. 자식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고 누렁이와 백구만 남았다. 할머니들은 노고단 산신할미처럼 길손들에게 자꾸만 뭘 주지 못해 애가 탄다. 느티나무 나뭇잎은 무려 10만여 장. 할머니들의 사랑은 그보다 더 무성하다.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다.

 

산청수철~갈티재 구간

 

Basic info.

☞ 산청수철마을~갈티재 구간별 거리
수철마을~<1.3㎞>~지막마을~<2.9㎞>~대장마을~<2.4㎞>~산청고교~<0.5㎞>~내리교~<1.2㎞>~내리한밭~<1.5㎞>~바람재~<2.3㎞>~풍현(성심원)~<2.0㎞>~어천마을~<2.7㎞>~헬기장~<6.0㎞>~점촌마을~<1.2㎞>~탑동마을~<1.4㎞>~원정마을~<5.7㎞>~백운계곡~<3.0㎞>~마근담계곡~<3.9㎞>~사리(고마정)~<1.8㎞>~사리(천평표)~<3.2㎞>~중태마을~<1.9㎞>~유점마을~<2.2㎞>~갈티재

 

☞ 교통
승용차 | 서울 →경부고속도로 →대전통영고속도로 →산청나들목

고속버스 | 서울 →진주(진주에서 산청행 버스)

시외버스 | 서울남부터미널(3시간 소요)

※ 산청에서 수철마을까지 버스로 10분 소요. 산청군내버스(055-973-5191), 산청버스터미널(055-972-1616)

 

☞ 먹을거리
송림산장식당(055-973-6742) | 십전대보오리백숙 / 약초와 버섯골(055-973-4479) | 약초유기한우 샤브샤브, 약초버섯매운탕 / 강변식당(055-973-2346) | 메기찜, 자라탕 전문 / 수풀 林(055-972-4066) | 해물콩나물밥 보쌈, 낙지전복탕

 

곶감 | 산청곶감작목회(055-973-0085)

숙박 | 수철마을 강수성 이장(010-8611-1322)

문의 | 산청군 산림녹지과(055-970-6900), (사)숲길(055-884-0850)

그리움이 내려앉은 곳 강물도 흐르고 사연도 흐르고
임실 섬진강길

공룡 발자국처럼 팬 자국 가득한 장구목. 섬진강 제일의 절경으로 꼽힌다.

 

그대가 보고 싶을 때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저무는 강으로 갑니다.

소리 없이 저물어가는

물 가까이 저물며

강물을 따라 걸으면

저물수록 그리움은 차올라

출렁거리며 강 깊은 데로 가

강 깊이 쌓이고

물은 빨리 흐릅니다.

(김용택 ‘땅에서’ 중)

 

시를 읊조려도 아리송하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기자는 강을 모른다. 강가에 가만히 서본 적도, 소리 없이 저무는 강물을 바라본 적도, 차오르는 그리움을 강물에 흘려보낸 적도 없다. 그래서 시구 전부가 알 듯 말 듯하다. 강물 따라 걸으면 시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8년 만의 강추위가 닥친 가을 아침, 작정하고 전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다.

전주를 거쳐 도착한 전북 임실. 이곳 바람은 서울보다 더 매섭다. 찐빵 3개 호호 불며 몸을 덥히고 배를 채운 뒤 다시 진메마을로 가는 차에 오른다.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장산)마을. 길 장(長), 메 산(山)의 ‘긴메’를 주민들이 ‘진메’라 불러 진메마을이 됐다. 오늘 걸을 구간은 진메에서 출발, 천담~구담~장구목을 잇는 왕복 4시간 코스. 섬진강 212km 중에서도 절경으로 꼽히는 길이다.

논밭을 가로질러 15분쯤 달렸을까. 잘생긴 느티나무 두 그루가 진메마을 표지를 대신한다. 나무 뒤를 살피니 납작 엎드린 소박한 가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 시인의 생가다. 김 시인은 진메마을에서 나고 자라, 인근 덕치초등학교에서 반평생 아이들을 가르쳤다. 지난해 정년퇴임한 뒤에도 고향마을을 찾는 발걸음은 여전하다. 소싯적 보따리 둘러매고 오가던 등굣길. 이제는 지겨울 법한데 걸을 때마다 새롭다 한다.

“계세요?”

큰 소리로 불러도, 툇마루에 걸터앉아 쿵쿵 발을 굴러봐도 기척이 없다. 김 시인의 모친은 지금껏 생가에 머물며 오가는 과객을 손수 맞는다. 주인 없는 집 정원을 한 바퀴 빙 둘러본다. 이곳의 문은 주인이 있거나 없거나 늘 열려 있다. 아들이 써내려간 시와 그 시를 낳은 섬진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새벽녘 발걸음이라도 환영이다. 아담하지만 정갈하게 손질된 정원과 반질반질 윤이 나는 장독 더미에서 모친의 됨됨이가 전해진다.

‘관란헌(觀瀾軒)’. 맨 왼쪽에 자리한 방에 낡은 팻말이 비뚜름히 걸렸다. 시인은 퇴계 선생의 시 구절을 따 자신의 서재에 ‘마루에서 물결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문고리를 빼곡 잡아당기니 과연 그 이름 그럼직하다. 앉은뱅이 책상머리에 가부좌 틀고 앉으니 섬진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책 냄새 맡으며 시상을 궁리하고, 시 한 구절 썼다 지우길 반복했을 시인의 젊은 날을 떠올리니 괜히 마음이 설렌다.

 

 

넉넉히 반겨주는 김용택 시인 생가

 

진메마을 초입의 김용택 시인 생가.

 

시인의 집을 나와 길을 걷는다. 강 따라 난 흙길이다. 그저 보드라운 흙길은 아니다. 드문드문 자갈과 바위가 나뒹군다. 왼편으로 난 섬진강은 흐르는 듯 멈춘 듯 물살이 잔잔하다. 강폭이 좁고 수심도 얕다. 나뭇결 사이로 비치는 강물 바라보며 걷기를 20여 분. 돌연 물빛이 짙어진다. 강바닥에 다슬기가 그득하다는 구간이다. 이곳 다슬기는 유난히 색이 푸르고 모양이 예뻐 ‘팥다슬기’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예전의 활기는 잃었지만, 지금도 밤이면 잠수복 차림 ‘할매’들이 다슬기 한 소쿠리 길어 간다.

진메마을에서 천담마을까지는 4km. 느린 걸음으로도 50분이면 충분하다. 왼편은 섬진강, 오른편은 산자락. 반복되는 풍경이지만 시시각각 물빛이 변하는 까닭에 지루할 틈이 없다. 연두, 청록, 보라, 노랑…. 시선과 빛이 빚어내는 각도에 따라 공작 날개처럼 강물도 색을 갈아입는다. 물빛은 푸르다는 등식은 오늘부로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한다.

차분히 흐르는 강물, 낮고 맑은 하늘, 푸릇푸릇한 나뭇잎이 어우러진 멋진 길. 다만 그늘 하나가 아쉽다. 물결이 되쏘아낸 가을 햇살 눈부셔, 풍경을 꼼꼼히 마음에 새기기 힘들다. 하지만 4년 정도 지나면 이 길에서 멋진 그늘을 만끽할 수 있게 된다. 그때쯤이면, 어른 키만 한 이팝나무가 훌쩍 자라 양팔 드리워 그늘을 만들 것이다. 바람이 불어 하얀 이팝 흐드러지게 날리는 진풍경 볼 날이 머지않았다.

걷다 보니 어느새 흙길 대신 시멘트 길이다. 오랜 기간 섬진강 따라 도는 길은 본디 모습을 유지해왔지만 3, 4년 전부터 곳곳에 시멘트 길이 들어섰다. 천담마을 초입, 저 멀리 갈대밭이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갈대 사이사이 강아지풀도 숨어 있다. 툭, 갈대 줄기를 건드려도 꿈쩍하지 않는다. 갈대 꺾어 손에 쥐는 대신 강아지풀에 다가가 뺨을 비빈다. 부들부들한 강아지풀에 몸도 마음도 간질간질, 웃음이 난다.

강물 오른쪽으로 따라 난 길 끝, 천담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한때 시인이 머물던 천담분교는 황폐한 모습이다. 10년 전 마지막 학생이 떠나면서 문을 닫은 분교는 수련원으로 모습을 바꿨다. 분교는 사라졌지만, 장마철 강을 건너지 못해 발 동동 굴리던 아이들의 마음은 시인의 시 ‘천담분교’에 남았다.

천담마을을 지나면 아스팔트 포장길이 펼쳐진다. 이 길 따라 2.5km를 걸으면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구담마을. 지금은 쏘가리 천지지만, 그 옛날 강 구석구석 자라가 활개를 쳐 ‘거북이 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 구담마을은 매화와 설경으로도 유명하다. 매화 수만 그루가 꽃 틔운 봄과 사방이 눈산에 둘러싸인 겨울이면, 전국에서 화가들이 몰려든다.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구담마을 언덕배기에는 초가와 양옥 1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언덕배기 한가운데에는 상서로운 기운의 마당이 자리한다. 느티나무 대여섯 그루가 빙 둘러싼 아담한 마당. 마을 사람들이 정월 대보름이면 당산제를 펼치던 곳이다. 삼신할머니 모셔다 나무에 금줄 치고 풍년과 다복을 빌던 곳.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당산제가 사라진 자리, 이제는 마을 어르신들의 놀이터가 됐다.

“홍시 달디. 먹어먹어.”

키보다 3배는 긴 채로 감을 따던 어르신이 묻지도 않고 홍시를 건넨다. 적당히 떫고 적당히 달다. 감씨와 홍시 껍질 버릴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기자에게 어르신이 한마디 던진다.

“아무 데나 뱉어. 아무 데서나 오줌을 눠도 거름이여.”

 

 

기기묘묘한 장구목 풍경에 눈이 행복

 

장구목에서 내룡마을로 돌아가는 오솔길.

 

구담마을 강 건너편부터는 순창군 동계면이다. 저 멀리 구담과 마주한 내룡(싸리재)마을이 보인다. 내룡으로 넘어가기 위해 강가에 다다른 순간 입이 떡 벌어진다. 튼튼한 너럭바위가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징검다리를 선보인다. 단번에 건너기 아까워, 돌 하나 밟고 뒤 한 번 돌아본다. 남남인 남녀가 이 다리 한번 같이 건너면, 없던 감정도 생길 것 같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소년이 소녀를 엎고 건너는 장면의 단골 촬영지다.

내룡마을부터 장구목까지는 마을길이다. 논밭 사이로 시멘트 길이 길게 이어져 있다. 길 위로 키 낮은 나무와 갈대 그림자가 빼곡하다. 길바닥에는 뭉개져 들러붙은 감, 속이 터진 밤송이, 죽은 벌레가 질서 없이 흩어져 있다. 그림자 꾹꾹 눌러 밟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장구목이다.

장구목이 가까워오니 절로 발꿈치에 힘이 들어간다. 멀리서 봐도 기기묘묘한 풍경에 어서 가까이 가닿고 싶다. 이곳 절경의 일등공신은 움푹움푹 팬 바위. 운동장 4분의 1만 한 크기의 납대대한 바위들은 공룡이 밟고 지나간 것처럼 군데군데 패어 있다. 발자국을 밟아도 보고, 냉큼 그 구멍에 앉아도 본다. 아무래도 신기하고 재미있다. 예전에 소리꾼들이 종종 득음을 하러 찾아들었다는데, 과연 큰 울음 울 만한 곳이다.

모든 바위 모양이 특이하지만, 꼭 봐야 할 바위가 있다. 요강바위다. 무게가 25t에 달하는 이 바위에는 깊이 1.8m의 큰 구멍이 패어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큼 깊다. 이 바위 가운데에 소변을 보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전해온다. 잘생긴 탓에, 1993년 중장비를 동원한 도둑이 바위를 훔쳐간 걸 되찾아온 사연도 있다.

장구목 바로 옆 장구목가든의 문을 두드리니 주인장이 오디(뽕나무 열매) 술 두 잔을 내준다. 술기운에 몸이 뜨뜻해지고 눈앞이 아른거린다. 비틀걸음으로 되돌아오는 섬진강 길은 또 다른 속살을 내어보인다. 겹겹이 섬진강을 휘감아 도는 먼 옛날 빨래 방망이질 소리, 닥나무 뜯는 소리, 물고기 잡는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날이 저물고, 다시 출발점인 진메마을에 선다. 시구는 여전히 아리송하지만 별세상에 다녀온 듯 기분이 붕붕 나른다. 벌써부터 섬진강 설경(雪景)이 기다려진다.

 

 

Basic info.

☞ 교통편
승용차 | 호남고속도로 전주IC로 진입 →전주시내(동부우회도로)를 관통해 17번 국도를 타고 전주에서 남원 방면으로 약 30km →임실군

대중교통 | 서울 남부고속버스터미널-임실 고속버스 1일 14회 운행

문의 | 임실군 문화관광과 063-640-2344

숙박 | 장구목에는 장구목가든 등 민박을 하는 집이 몇 곳 있다. 구담마을은 11월 50여 명 수용 규모의 숙소가 문을 열 예정이다. 임실군 문화관광과로 문의하면 적당한 민박을 소개해주기도 한다. 단체로 방문할 때는 지역 해설사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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