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스님과 낚시

醉月 2010. 11. 5. 08:49
순간적 깨달음(돈오頓悟)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아니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 또한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시각으로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안다.

스님들이 속세의 시끄럽고 번거로운 곳을 피해 왜 한적한 곳에서 수양하며 마음을 깨치려고 하는지, 또 그들이 산수자연을 대하고도 세상의 이치를 충분히 깨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경험을 먼저 소개한다.

한번은 북경의 서쪽에 있는 ‘빠다추(八大處)’를 올랐다. 그 절은 부처님의 이빨을 모신, 젊은 스님의 수행처로 향산과 더불어 산수가 제법 뛰어난 절이다.

한번은 산을 오르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중국은 여름철에는 갑자기 비가 몇 분 쏟아졌다가 그치곤 하는 경우가 많음). 그래서 산의 중간에 평소 알고 지내던 찻집에 앉아, 차를 마시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아카시아 잎사귀같은(아마도 고대 시문에서 말하는 느릅나무잎사귀일 것 같은데 실제로는 느릅나무 잎사귀를 모름) 것이 누렇게 시들어서 길쭉하고 둥글게 말렸는데, 빗방울에 두두둑하고 튀어 오르는 것이다.

순간 저것이 부처님 이빨이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고,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라는 의문으로 한참을 이생각 저생각하다보니 또한 금덩이로 보이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이빨이 되었든 금덩이가 되었든 흙먼지가 날리는 날씨에 뿌려주는 비가 한없이 고마웠다. 비는 금방 조그만 물줄기를 이루며 흘러가는데, 단비의 소중함을 느끼는 이면에는 이 물로 인해 수해를 입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자연경물이 인간에게 주는 현상이 이럴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뒤 그곳에서 종종 마주치는 스님들을 보면서 한참을 부러워했던 생각이 난다.

스님이 낚시를 한다? 연못에 물고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낚시를 한다? 또 필자가 겪었던 일화가 생각난다. 젊은 시절 절에서 공부할 때다. 낚시를 하고 싶은데, 절에서 무슨 수로 낚시를 한단 말인가? 그래서 연못가운데 있는 정자에 들어가 잠을 잔다고 하면서 낚싯줄을 물속에 담갔다. 그리고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침에 보살님이 부리나케 달려와서 빨리 잉어의 입에서 낚시를 빼고, 스님이 보시지 않도록 다시 연못에 넣으라는 것이다. 그 잉어는 스님이 극히 아끼는 것으로 그 마을에 사는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도 그 잉어만큼은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님과 물고기는 각별하다. 물고기는 자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하여 물고기를 보고 항상 깨어있어라고 가르치고, 절의 풍경에 물고기를 매달아 밑에서 올려다보면 푸른 하늘에 비친 물고기가 마치 한없는 호수를 헤엄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의미는 넓은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아무런 얽매임이나 구속없이 자유로이 마음껏 생각하라고 깨치라는 의미란다. 그런데 그러한 물고기를 낚시로 잡는다? 스님들은 낚시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보자.

<溪叟계수>
溪翁居靜處(계옹거정처), 시냇가 노인은 조용한 곳에 앉았고,
溪鳥入門飛(계조입문비). 시내의 새는 문안으로 날아들고.
早起釣魚去(조기조어거), 아침 일찍 일어나 낚시하러 가서,
夜深乘月歸(야심승월귀). 저녁늦게 달을 보면 돌아오네.
露香菰米熟(노향고미숙), 이슬이 향기로울 때 줄풀밥이 익고,
煙暖荇絲肥(연난행사비). 안개가 따뜻할 때 행채의 어린 줄기가 여무네,
瀟灑塵埃外(소쇄진애외), 소탈하게 속세 밖,
扁舟一草衣(편주일초의). 일엽편주에 띠옷하나.

이 시는 경운(景雲)스님이 쓴 것이다. 경운스님은 당대(唐代) 잠삼(岑參)과 같은 시대의 인물로, 그의 이력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고 다만 ≪전당시≫에 시 3수만이 전한다.

스님이 쓴 <노승(老僧)>,<계수(溪叟)>,<화송(畵松)>을 보면, 스님의 시가 대충 어떠한 마음으로 시를 썼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이 시는 스님의 뜻이 낚시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아침에 일찍 나가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지만, 물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靜處’인 ‘塵埃外’,‘扁舟’를 원해서 나가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줄풀밥이 익고, 행채의 어린 줄기가 여물듯이 깨달음도 쌓여간다. 역시 스님의 깊은 뜻을 중생이 감히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데 또한 마음속에 욕심이나 집착이 조금일라도 남아있는 스님의 시는 그렇지 못하다.

당대 관휴(貫休)(832∼912)라는 스님은 속성이 강(姜), 자가 덕은(德隱), 무주(婺州) 난계(蘭溪)(지금의 절강성)사람이다. 당말에 태어나서 일곱 살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각지를 만유했다. 오대시기에 촉(蜀)으로 들어가 촉왕 왕건(王建)의 예우를 받고 ‘선월대사(禪月大師)’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향년 81세로 입적했는데, 시와 그림에 뛰어났으며, ≪선월집(禪月集)≫이 있다. 이 스님의 시를 잠시 보자.

<釣罾潭조증담>
境靜江淸無事時(경정강청무사시), 조용한 경지 강은 맑고 특별한 일이 없을 때,
紅旌畵鷁動漁磯(홍정화익동어기). 붉은 기에 鷁鳥를 그린 배는 낚시터로 향하네.
心期只是行春去(심기지시행춘거), 마음은 오직 봄철 관리의 순행만을 바랄 뿐,
日暮還應待鶴歸(일모환응대학귀). 날이 저물면 학이 돌아오길 기다리네.
風破綺霞山寺出(풍파기하산사출), 바람에 부서진 아름다운 놀이 山寺에서 나오고,
人歌白雪島花飛)인가백설도화비). 사람이 노래할 때 하얀 눈꽃처럼 섬에서는 꽃이 날고
自憐亦在仙舟上(자련역재선주상), 스스로 가련타해도 역시 신경의 배위에 있고,
玉浪翻翻濺草衣(옥랑번번천초의). 옥같은 물결이 계속 일어 띠옷에 튀기네.

이 스님의 시에서도 낚시(釣魚)의 ‘釣’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다만 속세와 거리를 둔 仙境같은 산수자연을 부각시키는 용어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시는 선자화상(선자화상)의 조어게(釣魚偈)나 경운(景雲)스님의 시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첫연은 조용한 경지에 살긴 하지만 낚시터를 향하는 배가 너무 화려하다. 도저히 수양하는 스님이 타는 扁舟가 아니다. 2연에서는 ‘行春’의 의미가 사뭇 복잡하다. 글자 그대로 봄을 즐긴다고 풀이해도 될 듯 하지만, 그의 이력으로 봐서 ‘봄철 관리의 순행’을 의미한다고 해야 조금 더 적절한 듯 하다.

그는 당말 혼란한 시기에 처하여 높은 관리를 찾아다녔는데, 아마도 봄철 관리가 순행을 해야 자신이 덕을 보는 일이 생길 것이다. 스님이 항주(杭州) 영은사(靈隱寺)에 있을 때 시를 가지고 오월왕(吳越王) 전류(錢鏐)를 찾았는데, 시에 “온 방안 꽃향기에 취한 사람은 삼천명, 검을 한번 빼어드니 서리같은 찬기운이 14주에 미치고(滿堂花醉三千客, 一劍霜寒十四州)”란 구절이 있었다.

전류는 칭제하려는 야심을 가졌기에, 그에게 14주를 40주로 바꿔주면 만나주겠다고 하였다. 그는 “주 역시 얻기 어렵고, 시 역시 바꾸기 어렵소. 나는 외로운 구름과 들판의 학이니 어찌 하늘에서 날 수 없겠소?(州亦難添, 詩亦難改. 余孤雲野鶴, 何天不可飛?)”라고 하고서 옷을 털고 돌아갔다.

그러므로 2연 첫째구와는 약간 모순이겠지만 둘째구에서 날이 저물면 학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고 말했던 것이다. 불가에서 ‘학수(鶴樹)’는 곧 부처나 불사를 가리키는 뜻으로, 그는 결국 부처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3연은 깨달음을 배워가는 과정이다. 바람에 부서진 놀도 결국은 산사에서 나오는 것이고, 사람의 노랫소리로 하얀 꽃이 떨어진다해도 결국은 인간과 격리된 섬(島)의 꽃이 날리는 것이다.

그런데 산수자연을 통해서 이렇게 멋진 깨달음을 얻은 스님이 4연에서 왜 ‘스스로 동정하다(自憐)’라고 했을까? 아직도 완전히 깨닫지 못한 것인가? 아무튼 스님은 마지막 구절에서 옥같은 물결이 자신의 띠옷에 튀기듯 하나하나 더욱 깊은 깨달음을 얻어간다. 결국엔 이 시도 제목은 조어시지만 낚시를 통해 깨달음으로 가는 자신의 자화상같은 시라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스님은 경안(敬安)(1851∼1912)으로, 속성이 황(黃), 이름이 독산(讀山), 자가 기선(寄禪), 호남(湖南) 상담(湘潭)사람이다. 아육왕사(阿育王寺)에서 손가락 두 개를 잃었기에 별호가 ‘팔지두타(八指頭陀)’다. 18세때 출가하여 절강성 각지를 유력하였고, 湘으로 돌아온 뒤에는 각 명찰의 주지가 되었다. 신해혁명 때는 중화불교총회회장을 역임했고, ≪팔지두타시집(八指頭陀詩集)≫이 있다.

<題寒江釣雪圖제한강조설도>
垂釣板橋東(수조판교동), 판자로 만든 다리 동쪽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雪壓蓑衣冷(설압사의냉). 눈이 내려 도롱이가 차네.
江寒水不流(강한수불류), 강이 얼어 물이 흐르지 않는데,
魚嚼梅花影(어작매화영). 물고기는 매화 그림자를 물고.

이 시는 제화시(題畵詩)로, 유종원(柳宗元)의 <강설(江雪)>에서 그림의 의미를 취한 것 같은데, 이 시의 2구와 3구는 <강설>의 “외로운 배엔 도랭이 입고 삿립 쓴 노인, 홀로 낚시하는 차디찬 강엔 눈발 날리고...(孤舟簑笠翁, 獨釣寒江雪.)”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유종원의 <강설>이 산수,사람,낚시배가 얼어붙은 것같은 정지된 화면과 지독한 외로움을 느낀다면, 이 시는 추운 겨울 낚시 속에서도 동적이고, 약간은 따뜻한 느낌이다. 판자로 만든 다리도 인적과는 그렇게 멀리 떨어진 것 같지도 않고, 강 표면은 얼었지만 그 밑의 물고기가 매화꽃의 그림자를 보고 입을 빠끔그리는 모습은 인정미까지 느껴진다.

짧은 시 속에 아주 뛰어난 시의와 깨달음의 경지를 담고 있는 듯 하다. 사실 깨달음이 중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기 혼자만의 깨달음으로 끝난다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어느 노래의 가사에 나오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뜻만 깨친다면 인생의 이치나 도를 반쯤 깨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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