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허시명의 우리술 이야기

醉月 2010. 11. 2. 08:43

허시명씨는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장과 막걸리학교 교장을 맡고 있다. 여행의 주제로 술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술 평론가’라는 직함도 얻었다. 2009년 국세청주류품질인증 심사위원, 농림부 전통주품평회 심사위원을 지냈다. <허시명의 주당천리> <비주, 숨겨진 우리 술을 찾아서> <풍경이 있는 우리 술 기행>을 펴냈다.


 

허시명의 우리술 이야기_주막을 돌려다오!

요즘 관광지 곳곳에 관광주막이 생겨나고 있다. 예천 삼강나루에서는 삼강주막이 재단장되어 손님을 맞고 있다. 막걸리 바람이 불면서, 군데군데 옛 주막을 복원하여 사람을 끌어모으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세 강이 모이는 나루터에 자리잡은 삼강주막. 해체 복원되기 전의 모습이다.
우리 술 문화의 큰 특징 하나는 주막 문화다. 주막에서 술을 직접 빚어 음식과 함께 술을 팔았다. 조선시대에는 상업성을 띤 양조장이 따로 없었다. 사람이 많이 모인 장터나, 날이 저물면 험한 산을 넘을 수 없는 고개 밑이나, 배를 기다려야 하는 나루터나, 광부들이나 보부상들을 위해 광산촌이나 옹기점 주변에 주막이 들어서 있었다.

보물 제527호로 지정된 김홍도의 ‘주막’ 풍속화를 보면, 초가지붕의 주막 마루에 앉아 주모가 술국자로 술항아리에서 술을 뜨고 있다. 술잔은 밥사발처럼 크다. 손님은 마당 돌에 앉아 그릇을 기울여 국물까지 떠먹고 있다. 주방이 개방되어 있고, 주모가 술상을 들고 나르지 않아도 되는 구조다. 간송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신윤복의 ‘주사거배(酒肆擧盃)’를 보면 주막은 반가의 안채처럼 격조가 있으면서 열린 주방 구조를 지니고 있다. 가마솥이 걸린 아궁이가 마루와 이어져 있고, 주모는 앉아서 술을 내주는 구조다.

술과 음식을 함께 팔던 주막이 사라져버린 것은 일제시대의 주세 제도 때문이다. 1909년에 만들어진 주세법은 주조 실태를 파악하는 데 주력한 법이었다. 1916년에 새로운 주세령이 내려지면서 주세법은 통제 위주로 변했다. 구체적으로 최저 생산량을 규정하여 이에 미달하는 제조장을 폐지하거나 통합시켰다. 주류 제조장의 술과 자가(自家)용 술을 분리하여 자가용 술 제조를 위축시키고, 술 제조장에서 음료로 소비하는 형태를 제한함으로써, 주막의 몰락을 촉진했다. 특히 남부지방의 주막들은 대부분 탁주나 약주를 제조하는 겸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타격이 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지적은 <조선주조사> 제4장 제2절 주류 판매점 분포 현황에 나와 있다. “1916년경의 조선주 제조장 12만은 거의 전부가 주막이었으나 점차 그 수가 감소되면서 1919년에는 7만여, 1925년에는 3만여, 1930년에는 5000 이하의 소수로 되었으므로 주류의 수급상 일반 음식점 외에 제조장 전속의 주류 배급소를 각지에 설치하여야 하는 절박한 필요성에 따라 한 군에 10 내지 20, 전 조선 5000~6000의 특정 판매소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 무렵 조선의 관습은 가정에서 반주를 하는 것보다 주막에서 마시고 먹는 것이, 즉 가정 밖에서 요리와 함께 술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술 전문 배급소가 생기고, 술이 상품으로 거래되면서 가정에서도 술을 구입하고, 주막에서도 술을 구입하여 판매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 시대 마지막 주막이라고 일컬어졌던 삼강나루의 삼강주막 주모도 말년에는 막걸리도 아니고 소주와 맥주를 사다가 팔았다. 술을 빚지 않는 주모는 얼마나 싱거우며, 자기 술이 없는 주막은 또 얼마나 적막한가.

1920년에 급격히 몰락해버린 주막문화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일본의 경우 양조장에서 음식점을 함께 경영하면서, 술에 어울리는 음식과 술을 이용한 음식을 내놓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국내의 소규모 맥주 제조장에서는 맥주를 직접 빚어서 맥주를 판매하고 있다. 현대판 주막이 맥주에서는 실현되었는데, 막걸리에서는 허용되지 않고 있다. 지방 양조장이 특성화되기 위해서는 시음장과 음식점과 견학장이 연계되어야 한다. 주막문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장치들이 도입되어야 한다.

막걸리 열풍 올해도 이어질까
지난해 국내에서는 가슴 저미는 크나큰 뉴스가 많았지만, 1년내내 막걸리에 대한 다양한 행사와 뉴스가 끊이지 않았다. 연말에는 막걸리가 삼성경제연구소로부터 2009년 최고의 히트상품으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세계를 휩쓴 신종플루 대응상품과 피겨스케이팅 세계랭킹 1위 김연아 선수를 2위와 3위로 밀어내고 거둔 성적이었다. 막걸리는 총매출이 2000억원대에 불과하고, 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술이라는 점에서 최고 히트상품이 된 것은 좀 이례적인 일이었다.

2009년 햅쌀막걸리 행사에 나온 다양한 막걸리들.
그래서 나는 막걸리 돌풍의 진원지를 찾는 작업을 해보았다. 2009년 막걸리 돌풍의 진원지로 모두 16가지 요소를 제시하고, 막걸리학교 카페에서 이에 대해 가장 영향력이 컸던 세 가지를 순서대로 꼽아보게 했다. 제시한 16가지는 ①전주 막걸리 골목의 10년 명성 ②요리주점 막걸리집들의 창업붐 ③엔고 현상에 따른 일본관광객들의 증가 ④일본에서의 막걸리 인기 ⑤불경기의 유일한 위안자 ⑥막걸리 품질 향상 ⑦와인에서 시작된 저도주·웰빙주 바람 ⑧갈증해소 스포츠음료로서의 가치 재발견 ⑨다이어트와 미용에 유익한 막걸리의 건강코드 부각 ⑩언론사의 취재 열기 ⑪농림수산식품부의 전폭적인 지원 ⑫햅쌀막걸리의 출현 ⑬막걸리의 호텔과 백화점 입점 ⑭칵테일 막걸리의 화려한 변신 ⑮막걸리학교의 탄생 16달콤하고 맛있는 막걸리의 등장이었다.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니 ‘2009년 막걸리 돌풍’이 일어난 데는 언론사의 취재 열기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평이 많았다. 그것은 막걸리의 품질향상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또 막걸리 해외수출 물량의 90%를 차지하는 일본에서의 막걸리 인기도 한몫을 했다. 여기에 막걸리에 효모가 살아있고 유산균이 많이 들어있다는 건강코드, 와인에서 시작된 저도주 웰빙주 바람이 속도를 더해서 가능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지난해 막걸리 돌풍에는 아주 많은 동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2010년 막걸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수많은 곳에서 막걸리를 얘기하다보니 막걸리가 대세처럼 되어 있지만, 복분자주와 와인 바람이 그렇듯이 세간의 큰 관심을 받다가 더 큰 바람에 의해서 잠잠해질 수밖에 없는 게 히트상품의 운명이다. 유행이 트렌드가 되고, 트렌드가 문화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막걸리는 과연 그 세월을 의연하게 건너갈 수 있을까? 흔히 히트상품의 조건으로 소비자들이 원하는 요구(needs)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효과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해야 한다고들 얘기한다. 막걸리가 ‘국민 막걸리’처럼 되다보니, 사실 생산자나 유통업자가 전략을 수립하기 어려울 정도로 판이 커졌다. 하지만 트렌드와 문화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돌아봐야 할 게 우리 술 문화다.

우리 술문화는 ‘윽박지름’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국가는 양조장을 윽박질러 통제하고, 양조장은 1~2가지 대표작만 내놓고 소비자들더러 입맛을 맞추라고 윽박지르고, 유통업자는 때로 양조업자나 음식점을 윽박질러 마진율 높은 술만 취급하려든다. 또 술꾼들은 폭탄주를 돌려 서로를 윽박지른다. 술은 오랜 기다림 속에 만들어진 발효식품이고, 소비자의 까다로운 입맛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기호식품이라는 점에서 ‘윽박지름’을 통해서는 그 묘미와 매력을 발견할 수가 없다.

2009년의 막걸리 바람이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돌풍으로 변해갔듯이, 술의 문화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다양성이 확보될 때 풍성해지고 양조장과 양조장의 제품들이 차별화될 때에 건강해진다. 술이 다양해지면 소비자들이 음식점이나 주점에 앉아서 술을 섞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이제 갓 성년이 되어 술집 출입이 가능해진 아들 녀석이, “아빠, 술집에 가니 일본술은 선택할 게 많은데, 왜 막걸리는 선택할 게 없어요?”라고 묻는 말에 “어, 그래?”가 아니라 “그렇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막걸리 돌풍도 새로운 술 문화로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평양 명주 감홍로의 맥
유명한 술을 하나 꼽으라면 무엇을 꼽을까? 술을 논하다보니, 어떤 술이 제일 좋더냐고 사람들이 자꾸 내게 물어온다. 변덕스럽게 내 마음과 혀는 계절따라 달라지고 연년마다 달라진다. 술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아무리 좋은 술이라도 마시고 나면 사라지고 마니 어떤 것 하나를 꼬집어 말하기가 난처하다. 엊그제도 자꾸 내게 물어오는 이가 있어서, 대뜸 감홍로라고 말하고 말았다.

이기숙씨(오른쪽)와 남편 이민형씨가 경기 파주의 감홍로 제조장에서 감홍로에 들어가는 조누룩을 만들고 있다.
감홍로를 가장 잘 알고 있던 이는 아마도 평양 기생들이었을 것이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평양 3대 명물로 냉면, 골동반, 감홍로를 꼽았다. 모두가 평양기생이 차려낸 음식상에 올랐던 품목들이다. 감홍로가 평양을 대표하는 소주였다면, 조선을 대표했던 소주라고 확대해석해도 그릇되지 않을 것이다. 소주로 가장 명성이 높았던 곳이 북쪽이고, 평안도였기 때문이다.

새해 들어 내가 맛본 감홍로는 2년 숙성된 제품이었다. 우리술에는 숙성 개념이 희박하다. 오래 숙성되었다고 자랑하는 술을 좀처럼 찾기 어렵다. 그런데 2년 숙성이라니, 그 정도라도 내게는 반가운 정보였다. 감홍로를 빚은 이기숙씨(54)에게 물어보니, 일본 수출 물량으로 두어해 전 빚어둔 술이라고 했다. 술은 황금빛을 띠는데, 약재 향이 또렷하지만 삼키고 나면 깔끔하게 사라져버렸다. 도수가 40도인데도 코끝을 튕기는 듯한 사나운 맛이 없고 부드러웠다. 숙성의 힘 때문에 얻은 부드러움이었다.

감홍로는 어떤 술인가? 옛 문헌 속에 그 명성은 자자했다. 최남선은 조선 3대 명주(이강고, 죽력고, 감홍로)로 꼽았고, 이규경은 조선 4대 명주(평양 감홍로, 한산 소국주, 홍천 백주, 여산 호산춘)로 들었고, 홍석모는 <동국세시기>에서 평안도 지방에서 알아주는 술로 감홍로와 벽향주가 있다고 했다.

감홍로를 빚는 이기숙씨는 아버지 이경찬씨(1993년 작고)로부터 감홍로를 배웠다. 이경찬씨는 문배주로 1986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된 인물이다. 혼인이 늦었던 이기숙씨는 아버지가 문화재 지정을 받기 위해 시험술을 만들어낼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술을 빚었다. 아버지는 문배술과 감홍로 중에서 어느 것을 문화재로 신청할까 고심하다 약재가 들어가지 않은 술을 선택했다고 한다.

감홍로는 좁쌀누룩과 멥쌀 고두밥으로 빚어 두 번에 걸쳐 증류한 뒤에 8가지 약재를 넣어 침출시켜 완성한다. 장에 좋다는 용안육, 정기를 북돋아준다는 정향, 비타민이 풍부한 진피, 풍을 막아준다는 방풍, 그리고 향긋한 계피, 활달한 생강, 달콤한 감초, 붉은 지초가 들어간다. 이기숙씨는 인간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먹을거리로 술과 마약이 있는데, 마약은 만들 수 없으니 술을 만든다는 얘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모든 술에는 독이 있으니, 술을 빚으려면 독기운이 적은 술을 빚어야 하는데 그게 감홍로라 했다.

감홍로는 넓게는 홍주의 범주에 들어있다. 홍주는 술 색이 붉어서 이름에 ‘홍’자가 들어간 술을 일컫는다. 소주류로 진도홍주, 감홍로, 관서감홍로, 내국홍로방이 있고 발효주로 천태홍주방, 건창홍주방, 홍국주가 있다. 붉은색을 내는 데는 지초(또는 자초)라는 약재를 쓰거나, 붉은 누룩인 홍국을 쓴다. 홍국을 써서 만든 전통술은 사라져버렸고, 지초를 사용한 술들만 진도홍주와 감홍로가 남아있는 실정이다.

이기숙씨에게 술을 빚는 데 무엇이 가장 어렵냐고 물어보니,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라고 했다. 술을 먹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상표에 적힌 재료나 도수나 성분에 대해서 제대로 살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술 속에 어떤 역사가 있고,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왜 이 가격으로 책정되었는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평양 최고의 술이자 조선 최고 증류주로서 위용을 자랑하던 감홍로조차 전통의 단절로 속절없이 무명의 설움을 겪어야 하니,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포천막걸리 원정대
마흔 명이 버스 한 대에 몸을 싣고 경기 포천으로 술기행을 떠났다. 2010년 1월에 떠난 막걸리학교 2차 막걸리원정대였다. 포천에는 막걸리 양조장이 9개가 있고, 그중에서 7개가 전국과 해외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막걸리와 함께 기억되는 지명으로 포천만한 곳이 없다. 이 때문에 포천은 막걸리의 고장이라고 불릴 만하다.

포천으로 술기행을 떠난 사람들이 발효통에서 술이 끓는 모습을 들여다보며 신기해하고 있다.
첫 번째 방문지는 포천 군내면 직두리에 있는 (주)포천막걸리였다. 2층식 벽돌건물로 1층에 발효실과 물류창고가 있고, 2층에 누룩방이 있는 구조다. 우리를 맞이한 것은 양조장 식당 난로 위의 막걸리였다. 따뜻하게 데워진 막걸리는 겨울철 양조장 일꾼들의 간식이라고 했다. 꽁꽁 언 날씨에 난로 온기만으로도 반가운데 따뜻한 술이라니, 식당 안은 금세 웃음꽃이 만발했다. 술은 일본 정종만 데워 마시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문인 기대승이 쓴 ‘깨진 냄비에 술 데워 혼자 마시고/ 소나무 밑에 혼자 누우니 옳고 그른 일이 따로 없구나’라는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술 데워 마시는 풍습은 우리에게도 있었다. 주전자(酒煎子)가 본디 술을 달여 마시는 도구이기도 하다. 공장장이 손수 진하고 쌉싸래한 술덧(거르지 않은 술)을 맛보여 준 것도 감동적이었다.

두 번째 방문지는 포천이동막걸리 양조장이었다. 오늘의 포천막걸리 명성을 이끈 곳으로, 포천이동막걸리를 찾지 않는다면 포천 술기행은 아무런 힘이 없다. 하유천씨(1916~2001)가 1956년께에 터를 잡고 시작한 이래 군부대 마케팅, 백운계곡 관광객 마케팅, 살균탁주 전국 유통, 일본 수출로 이어지는 막걸리 현대사의 큰 획을 그어간 양조장이다. 다른 양조장이 내다버린 술항아리를 수집하여 술을 빚었다. 지금도 200개가 넘는, 전국에서 최다 술항아리 보유 양조장이며 일본으로 막걸리를 가장 많이 수출하는 양조장이다. 발효실에 들어서자 술항아리 속에서 술이 요란하게 끓고 있었다. 술이 익으면서 생기는 탄산가스 때문에 발효실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지만, 항아리를 보고 술냄새를 맡아보는 것만으로도 막걸리기행의 만족도는 최고조에 달했다.

세 번째 방문지는 일동면에 있는 상신주가였다. 진로재팬과 손잡고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으로 일본에 수출한다는 축하 현수막이 공장건물에 걸려 있었다. 공장장과 사장이 나와 우리 일행을 반겼다. 공장 내부 바닥이 물기 없이 깨끗하고, 누룩방의 나무벽도 나무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 청결함에 모두 “보여줄 만하네!”라며 탄성을 질렀다. 술밥을 찌는 큰 솥, 밀가루 누룩을 만드는 방, 술이 익고 있는 발효실, 압착 여과실, 유리방 속에 들어 있는 병입시설기 그리고 술상자가 가득 쌓인 창고까지 살펴보고 나니 술의 일대기를 본 것 같았다.

네 번째 일정은 운악산 밑에 있는 배상면주가였다. 산사원갤러리라는 전시공간과 야외 전시장까지 갖추고 있는, 문화공간을 잘 꾸며 놓은 비범한 양조장이다. 술빚기 체험장과 시음장이 있고, 술지게미로 만든 안주들도 있었다. 술을 빚어 돈을 벌기도 어렵지만 번 돈으로 문화공간을 만들기는 더욱 어렵다. 또한 만든 공간이 아름답다고 짜임새 있다고 칭찬받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인데, 이 모두를 성취해낸 곳이다. 연구소장의 술에 대한 설명과 양조장에서 갓 만들어낸 생주를 맛보면서, 술도 마음으로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몇몇은 깨달았을 것이다.

네 군데를 하루 일정으로 돌아다니는 것에 부족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전에 연락하고 교섭하지 않았다면 술독조차 구경할 수 없었던 양조장도 있었고, 구경하더라도 술빚는 장인과 말 한 번 섞어보기 어려운 곳도 있었다. 이제 포천양조장 아홉 군데가 포천막걸리협동조합을 만들어 포천막걸리의 정체성을 세우는 작업을 한다니 양조장들이 관광객과 만나는 구상도 하게 될 것이라 기대된다. 여행은 찾아가고 싶은 곳이라야 되고, 찾아가면 반기는 사람이 있어야 즐겁고 흥겹다. “좀 보여주세요!” “술을 어떻게 만들어요?” 굳이 묻지 않더라도 편하게 보여주고 설명해주고 맛볼 수 있다면 포천은 명실상부하게 막걸리의 메카로 거듭날 것이다.

단절된 ‘조선 청주’를 살려내자
술은 문화가 끌고 가고, 기술은 그 뒤를 받쳐줄 뿐이다. 알코올 20도에 1000원을 간신히 웃도는 희석식 소주는 값싼 노동력의 피로를 덜어주기 위한 동반자로서 득세했다. 1960~70년대 경제개발시대의 저곡가 저임금 정책과 소주를 함께 바라보지 않으면, 한국 소주의 성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맑은 술 청주는 어떠한가? 청주는 일제가 한반도를 장악하면서, 일본 청주가 한국 청주 시장을 이끄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지금도 한국 주세법의 청주는 국(麴·일본식 누룩)으로 빚는 일본청주를 지칭한다. 그 와중에 조선 청주는 길을 잃었다. 조선 청주는 일본 청주에 자리를 내주면서 약주라는 이름으로 피신했다.

그렇게 한 세기가 흐르고 나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우리 술의 영역에서 맑은 술 청주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고, 약재가 들어간 약주만이 청주의 영역을 대신하고 있다. 일제가 패망하여 한반도에서 철수할 무렵 한반도에 남아있던 일본 청주 회사의 수는, 1942년 조선총독부에 등록된 청주 제조장이 119개였던 것으로 보아, 100개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청주 제조장의 내력을 이어받은 회사가 현재 딱 한 군데, 1945년에 조선양조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백화양조-두산백화-두산주류-롯데주류로 변신해 온 군산 공장이다.

일본식 청주를 제조하기 위해 밑술에 해당하는 주모를 만드는 모습.
일본 청주의 계보를 이은 청주회사가 한국에 딱 한 군데 남아있게 된 것을 누구도 안타까워하지 않고 주목하지 않는 것은, 그 문화가 우리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불고 있는 일본 청주 바람도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2006년 일본 무비자 여행으로 조성된 것이다. .

다시 조선 청주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 술 문화는 탁주, 청주(약주), 소주 그리고 청주와 소주를 혼합한 과하주의 문화로 구분할 수 있다. 과하주 문화는 사멸된 지 오래이고, 청주는 약주로 기울어 있다. 문화재나 민속주로 지정된 명주 중에서 약재가 들어가지 않고 쌀과 누룩만으로 빚은 청주는 경주 교동법주와 해남 진양주 정도를 꼽을 수 있다. 다른 민속주들은 솔잎이 됐든, 진달래가 됐든 약재나 꽃이 들어간다. 나의 견해는 조선 청주를 버리고 약주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맑은 술 청주의 세계가 우리에게서 고갈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새로운 청주의 싹이 보인다. 명절 제사용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제주(祭酒) 시장이 그것이다. 그동안 백화수복과 경주법주가 독과점하던 제주 시장에 차례주와 차례술들이 등장해 ‘진정한 전통주가 무엇이냐’는 새로운 문화 논쟁 속에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다. 500억원 규모로 추정되는 제주 시장의 쟁탈전을 타고 맑은 술 청주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발달했던 우리네는 본디 제주를 직접 빚어서 올렸다. 제사를 지낼 때 올리는 메(밥)를 보면, 새로 지어 가장 먼저 떠서 올린다. 귀한 것을 조상에게 먼저 올리려는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잘 빚어진 술은 지게미가 밑으로 차분히 가라앉고 위로 맑은 액체가 뜬다. 그 맑은 술이 청주다.

청주는 차례술이나 제주로 한정될 술이 아니다. 쌀 술, 청주는 세계시장에서 한국과 일본이 주도권을 다퉈야 할 영토다. 쌀 문화권에 살면서, 쌀을 주식으로 삼고 쌀로 술을 빚어 마시는 우리 문화가 엄존하기 때문이다.

섣달 그믐 초백주, 설날 아침 도소주
3년 동안 훔친 국록(國祿) 이미 부끄러운데/ 새벽 시간 묻다 보니 어느새 세모(歲暮)가 닥쳤어라/ 주사위 노는 애들 모습 그래도 어여쁘다만/ 초백주(椒柏酒) 마신들 장부의 근심 풀어지랴/ 타 들어간 등화(燈火) 보며 분분한 세태 생각하고/ 어김없는 물시계 소리 곤곤한 천기가 느껴지네/ 말 안장 또 올려놓고 대궐 조회 서두나니/ 얇은 솜옷 파고드는 새벽 찬 바람.

조선시대 4대 문장가로 꼽히는 택당 이식(1584~1647)의 ‘섣달 그믐날 밤에 우연히 쓰다’라는 시다. 섣달 그믐밤에 초백주를 마시고, 설날 아침인데도 대궐로 출근하는 모습이 보인다. 얼마나 유행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섣달 그믐에 초백주를 마시고, 설날 아침에 도소주를 마신 풍습이 우리네에겐 있었다.

서울약령시 한의약박물관에서 설을 맞아 도소주를 빚었다. 접시에 놓인 것은 도소주를 빚을 때 쓰는 약재인 길경, 육계, 방풍, 산초, 백출, 호장근 등이다.
초백주는 그리 복잡한 술은 아니다. 서유구가 쓴 <임원십육지>에 나온 제법으로는 섣달 그믐날 후추 7알과 동쪽으로 뻗은 잣잎 7개를 따서 술에 넣으면 된다. 이 술을 마시면 괴질이나 전염성이 강한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흔히 술 빚을 때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가지로 술을 저으라는 처방이 있듯이, 동쪽으로 뻗은 잣잎을 넣으라는 것은 삿된 것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를 지닌다.

설날 아침에 마시는 도소주는 훨씬 복잡하게 만들고, 의미 부여도 많이 되어 있다. 도소주(屠蘇酒)의 한자를 해체하면 재미있는 뜻이 나온다. 도소주(屠蘇酒)는 돌아가신(尸) 분(者)을 위하여, 나물( )과 생선(魚)과 밥(禾)을 차려두고 모여 앉아 마시는 술(酒)이라는 뜻이다. 곧 설날 차례상에 올려놓았다가 마시는 술이다.

<동의보감>에서는 도소주 마시는 것을 도소음이라 하며, 그 제법과 마시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백출 1.8냥, 대황·길경·천초·계심 각 1.5냥, 호장근 1.2냥, 천오 6돈을 썰어 빨간 주머니에 넣고 12월 그믐에 우물 속에 담갔다가 정월 초하루 새벽에 꺼낸다. 이것을 청주 2병에 넣고 몇 번 끓어오르게 달이고 동쪽을 보면서 마신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한 잔씩 마시고, 찌꺼기는 다시 우물에 담가 두고 그 물을 마신다고 했다.

약재를 넣은 술을 몇 번 끓어오르게 달인 뒤에 마셨다는 것은 알코올을 많이 날려보내고 순하게 해서 마셨다는 얘기다. 설날에 남녀노소 모두가 마시기 위한 배려로 여겨진다. 도소주를 나이 어린 사람부터 마시게 했던 이유는, 어린 사람은 나이 먹는 일이 축하할 일이지만 늙은 사람은 세월을 잃었으므로 벌을 주는 의미라고 한다.

설날 아침부터 술을 격식을 갖춰 마셨던 이유는 무엇일까? 고작 한 잔씩 마시는 술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눈엔, 술에 의미를 두었다기보다는 술을 빌려서 의미 있는 날을 만들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섣달 그믐을 그냥 넘길 수 없고, 설날을 싱겁게 보내지 않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날에 선물을 주듯이, 특별한 날에 술을 짝지어 놓았던 것이다. 그게 이른바 우리 세시풍속과 함께 했던 절기주들, 대보름날의 귀밝이술과 삼짇날의 두견주, 청명일의 청명주, 단오의 창포주, 추석의 신도주, 중양절의 국화주들의 위상이었다.

조선시대 선조 때 14년 동안이나 영의정을 지낸 박순(1523~89)이 쓴 ‘음도소주(飮屠蘇酒)’라는 시가 있다. 그는 도소주를 마시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산초와 잣잎으로 술을 빚으니 그 향기 그윽하네/ 도소주는 옛날부터 이 세상에 이름이 나있었구나/ 한 잔을 마시고 세상을 잊으려 하건만/ 떠도는 인생 머무를 계책 없으니 수심만 더하네.
 
차례상에 차 올릴까, 술 올릴까
“차례상에 차 대신 술을 올려도 됩니까?” 최근 내가 받은 질문이다. 뜻 그대로라면 차례는 차(茶)로 예(禮)를 갖추는 것이니, 술 대신 차가 올라가는 게 온당할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차가 술로 바뀌었을까?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에는 차로 차례를 지냈다면, 성리학과 유교가 주도하는 조선시대에는 제주(祭酒)가 차례상에 오른 것은 아닐까. 추정해볼 수는 있지만 확언하기는 어렵다.

술 대신 차나 물을 올려놓고 예를 갖추는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뒤란 장독대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가족의 안녕을 빌던 어머니의 모습, 불가에서 관음보살의 상징이자 공양 도구로 사용되는 맑은 물을 담는 정병(淨甁)의 존재에서 물을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 경덕왕이 충담스님에게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자 “소승이 3월 삼짇날(重三)과 9월9일(重九)에는 남산 삼화령에 있는 미륵세존님께 차를 달여 올립니다. 지금도 차를 올리고 막 돌아오는 길입니다”라고 답하는 대목에서 차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제사에서 차나 물이 술을 대신할 수 있을까? 옛것을 찾아가는 흥미로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죽은 자와 산 자의 영혼을 이어줬던 술의 상징적인 의미를 차나 물이 얼마만큼 충족시켜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충북 제천의 오티별신제에서 제관들이 산신에게 올릴 제주를 준비하고 있다.
잘 살펴보면, 제사상에서 움직이는 것은 향불의 향과 술잔의 술이다. 옛사람들은 향은 하늘로 올라가 혼(魂)을 불러오고, 술은 땅으로 스며들어 백(魄)을 불러온다고 믿었다. 성묘 가서 술을 무덤 주변에 뿌리는 행위는 백을 불러오기 위한 것이다. 땅이 없는 실내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땅을 상징하는 모사(茅沙) 그릇을 준비하고 그 옆 퇴주잔에 술을 따른다. 종묘 제례를 행할 때, 술잔을 받고 따르는 위치의 마루 바닥에는 땅과 연결되는 관지구(灌地口)라는 구멍이 뚫려 있어, 그곳에 술을 세 번에 나누어 붓는다. 그 술 냄새를 맡고 지하의 백이나 신이 올라오시라는 의식이다.

또 하나, 술로는 물과 차와 달리 음복이라는 의식을 행할 수 있다. 제주로 올리고 난 술을 나눠 마시면 복이 들어온다고 하여 이를 음복주 또는 복주라고도 부른다. 혼령이 맛본 것을 제사에 참여한 사람도 마심으로써 서로 일체화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런데 제사상에 물이나 차의 성격을 지닌 것이 전혀 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봄 가을로 지내는 성균관의 석전제에서는 술과 함께 물이 오른다. 이 물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명수(明水)와 현주(玄酒)가 있다. 명수는 그늘진 곳에서 뜨는 것으로 달(月)빛 아래의 물에서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주는 물을 칭하는데, 물에서는 검은 빛이 돈다 하여 검을 현자가 붙었다. 옛적에 술이 없어 물을 가지고 의례를 행했는데 왕이 그 옛것을 소중하게 여겨 물을 현주라 높여 불렀다고 한다. 현주가 물이면서 술의 흉내를 내고 있다면, 설날 도소주는 술이면서 차의 흉내를 내고 있다. 도소주는 맑은 술을 빚어 방풍, 창출, 산초, 계심, 호장근, 백출 따위의 약재를 넣고 우려낸 뒤에 몇 번 끓였다가 내놓는다. 술을 끓여서 내놓는다는 것은 알코올 성분을 증발시킨 뒤에 마신다는 것을 뜻한다. 몇 차례 끓이는 것만으로 도소주의 알코올을 모두 날려보낼 수는 없지만 (실제 끓여 마셔보니 싱겁고 약재 기운이 강하긴 했지만 어질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도소주는 술과 차의 절충지대라 여겨진다.

근래 차례상에 술 대신 차를 사용하자는 의견이 있다. 술과 물과 차 중에서 어느 것을 의례에 사용할 것인가 하는 고민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문제는 술과 물과 차 중에서 어느 것에 우리 마음을 실을 수 있고, 영혼을 담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당신은 물과 차와 술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가? 그 소중함을 올리는 게 의례의 출발일 것이다.

한국 술이 ‘명품 술’ 되려면
명품 술이 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경기 안성에 있는 ‘정헌배 인삼주가’를 찾아가는 동안 내게 떠나지 않던 의문이다. 정헌배 인삼주가는 2008년 10월 문을 연 양조장이다. 이제 막 술을 빚기 시작한 신생 회사다. 안성시청과 안성터미널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어, 서울 양재동에서 출발하니 1시간 만에 양조장에 도착했다. 양조장은 지하 저장고, 1층 발효실, 2층 연구실과 홍보실로 이뤄져 있었다. 양조장을 찾아간 우리 일행(버스 한 대를 빌려 떠난 막걸리학교 3차 막걸리 원정길이었다)은 2층 홍보실로 올라갔다.

정헌배 인삼주가에 설치된 구리 증류기의 모습. 알코올 40%의 인삼증류주가 이 기계를 통해 탄생한다.
우리 일행은 그곳에서 정헌배 인삼주가의 정헌배씨로부터 1시간 반 동안이나 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씨는 1977년 영남대를 다닐 때부터 술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프랑스 파리9대학으로 유학가서 세계 주류시장 마케팅에 대해 연구하게 됐다. 돌아와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를 하면서, 한국 술의 제도적인 문제점을 개선하는 노력을 했다. 한국 술이 명품 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다 인삼주에 주목했다. 그는 안성에 인삼주 마을을 만들기 위한 20만㎡가 넘는 땅을 마련해 장뇌삼을 재배하고 있다. 그리고 9ℓ분량의 알코올 40% 인삼증류주 봉(鳳)과 인삼약주 비(飛), 인삼탁주 진이(眞伊)를 만들고 있다. ‘진이’는 한 병에 2만5000원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탁주다.

정씨에게 이런 내력을 들으면서 명품 술의 조건이 하나둘 떠올랐다. 우선 명품 술에는 이름이 있어야 한다. 이게 무슨 소릴까, 이름 없는 술이 있을까 하겠지만, 우리 막걸리의 현실을 보면 이름 없는 술이 많다. 그냥 지명을 따서 여주막걸리, 지평막걸리, 포천막걸리 하는 식으로 즉 여주댁, 지평댁, 포천댁 하는 식으로 택호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지명을 술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 지역에 두 개 이상의 양조장이 들어서게 되면 소비자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지명과 함께 별도의 이름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는 그 이름에 걸맞게 일관된 맛을 지녀야 한다. 이름 없이 막걸리라고 해서 팔게 되면 그 맛의 정체성은 시류에 따라 흘러가버리고 만다. 명품 술이라면 그 술 이름을 들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고유한 맛과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그 맛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고객들을 불러올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막걸리는 많은 경우가 유통업자들의 주문에 휘둘리거나, 새로운 고객층을 찾기 위한 유행상품 찾기에 골몰한다. 고객을 찾아가는 것은 친절한 행위이고 당장 매출은 올릴 수 있지만, 명품 술이 갈 길은 아니다.

세 번째는 재료와 제법이 분명해야 한다. 우리는 집앞 가게에서 파는 1100원짜리 소주를 명품 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희석식 소주병 어디에도 재료에 대한 표시가 없다. 정헌배 인삼주가의 인삼주 ‘봉’에는 원료 인삼을 재배한 농부와 원료 쌀을 재배한 농부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인삼은 6년근이고 쌀은 삼광미라는 품종까지 적혀 있다. 물론 안성 인삼이고 안성 쌀이다. 여기서 외국산 캘리포니아 쌀로 만든 술이 맛있냐, 경기 안성쌀로 만든 술이 맛있냐는 논의는 무의미하다. 명품 술을 만든다는 장인에게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은 “당신이 기르거나 계약하고 보살핀 쌀을 쓰느냐, 아니면 당신이 어느날 갑자기 구매한 쌀을 쓰느냐”는 것이다.

정씨는 술은 99%가 무위 자연의 산물이고 1%가 인공의 산물이라고 했다. 와인을 생산하는 업자들은 와인의 품질을 결정하는 90%의 요인이 그해 생산하는 포도의 품질이라고 말한다. 그 때문에 와인 평론가들은 어느 해 수확한 포도로 만든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빈티지(제조연도)를 중요하게 여긴다.

한국 술이 명품 술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인이 한국 땅에서 직접 재배하고 관리한 재료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민족주의자나 애국주의자의 발언이 아니다. 명품 술이라고 부르는 그 술을 “도대체 당신이 만들었느냐, 당신이 만들지 않았느냐”는 문제다.
 
앉은뱅이 술, 소곡주가 익는 마을
대한민국에서 술이 가장 맛있는 계절은 설과 대보름이 들어 있는 정월이다. 왜냐하면 한국을 대표하는 발효주에 붙은 애칭 백일주, 그 백일주가 무르익어 뚜껑을 여는 시기가 이즈음이기 때문이다. 백일주는 술을 빚어서 발효시키고 숙성시키는 기간이 100일이 걸려 생겨난 칭호다. 막걸리가 5박6일에 익는 속성주인 것에 견주면 대단히 긴 시간이다. 대표적인 백일주로 한산 소곡주, 면천 두견주, 경주 교동법주, 계룡 백일주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술들의 제조 기간은 추수가 끝나고 나서 빚기 시작하여 설 무렵에 떠내기 때문에 100일 정도 걸린다.

한산 소곡주 체험장을 찾은 탐방객들이 소곡주의 제조 과정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중 하나인 한산 소곡주를 찾아 길을 떠났다. 한산은 충남 서천군 한산면을 가리킨다. 한산모시로 유명하고, 목은 이색과 월남 이상재의 고향이다. 한산면의 진산은 건지산인데, 건지산 둘레로 한산의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그 평야에서 나는 쌀로 빚은 술이 한산 소곡주다. 누룩을 적게 써서 빚는다 하여 소곡주라고 불린다.

소곡주는 조선시대 문헌에서 삼해주, 과하주와 더불어 가장 많이 거론되는 명주다. 17세기 중엽 경북 영양에 살던 안동 장씨가 지은 <음식디미방>에 등장하는 걸 보면 경상도에서도 빚었는데, 어떤 경유인지 현재는 한산에서만 전해오고 있다. 실학자 이규경(1788~1856)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한산 소곡주를 조선의 명주로 꼽기도 했다.

한산면은 ‘대한민국 술기행 1번지’라는 칭호를 붙일 만하다. 박목월의 시 구절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을 흥얼거릴 만한 보배로운 동네다. 술 체험 마을로 동자북 마을이 선정되어 소곡주 관광화에 나섰고, 한산모시관 건너편에 자리잡은 한산 소곡주 제조장에는 소곡주 체험장이 마련되어 있다. 한산 소곡주의 매력은 한산면 주민들이 대부분 소곡주를 빚을 줄 안다는 것이다. 한 고을 사람들이 특정한 술의 제법을 두루 알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홍주로 유명한 진도 정도가 있을까, 달리 술 빚는 마을을 나라 안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한산면에서도 술맛 좋기로 유명한 동네가 여럿 있는데, 건지산 기슭인 호암리는 1979년 소곡주로 충남무형문화재에 지정된 김영신씨가 살던 동네다. 지금은 그의 며느리 우희열씨가 지현리로 나와 양조장을 차려 술을 빚고 있다. 한산면 단상리는 우물물이 좋아 소곡주 맛이 좋다고 소문난 동네다. 지난주 대보름 전날 단상리 마을 입구에서 한 주민을 만나 소문난 그 우물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우물이 여러 군데인데, 우리집 앞에도 있고…”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말인즉 우리집 앞 우물물이 좋고, 우리집 술이 맛있다는 얘기다.

마을 이름이 특별하여 찾아간 여사리에도 소곡주가 있었다. 박 여사, 김 여사가 사는 마을이라 여사립니까? 물었더니, 나 여(予)에 선비 사(士)를 쓰는 동네라고 했다. 여사들이 사는 동네가 아니라 ‘내가 선비여’ 하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다. 동네 초입에서 술 잘 빚는 이를 만날 수 있었다. 멥쌀로 백설기를 쪄서 밑술을 10일가량 익힌 뒤에, 고두밥으로 덧술을 하여 빚는다고 했다. 누룩은 쌀의 40%를 넣고 물은 쌀의 70% 정도를 넣는다고 했다. 소곡주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누룩을 많이 넣는 편이었고, 물은 아주 적게 넣는 편이었다.

모두 여덟 군데 마을에서 소곡주 여덟 병을 구해다 놓고 술을 비교하며 맛보았다. 그 술을 구할 때는 저마다 최고의 술이라고 여겨졌는데, 비교하며 맛보니 우열이 가려졌다. 노릇한 술도 있고, 갈변되기 시작하는 술도 있었다. 술맛은 대체로 입술이 끈적거릴 정도로 달고 묵직했다. 누룩내가 짙게 풍기는 술이 있고, 신맛이 강하게 도는 술도 있었다. 대체로 술맛이 달아 입안에 오래 머물 겨를도 없이 쉽게 넘어갔다. 이 단맛에 끌려 술을 야금야금 마시다가, 앉은뱅이가 되고 만다는 술이 소곡주다.

술 익는 마을 한산은 프랑스의 코냐크 지방에 견줄 만한 동네다. 동네마다 술이 있으니, 이 술을 좋은 자산으로 여겨 명품화시킨다면, 한산은 대한민국 최고 가는 술기행 1번지가 될 것이다.

꽃향기 묵힌 백화주, 누구랑 마실꼬?
귀한 술을 보면 오래된 친구가 생각나고 아름다운 풍경이 떠오른다. 술은 어두운 항아리 속에서 익지만, 그 향은 천리를 간다. 이미 내 위장은 비닐봉지처럼 얇아졌으니, 술을 탐닉하는 지인들에게 묻는다. 배고픈 아이들이 피자와 치킨을 시켜놓고 기다리는 시간만큼이나, 간절하게 술을 기다리는 거죠? 내가 혀를 내두를 만치 술을 좋아하는 지인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며, 술에 취했다 깼다 밤새도록 마셔도 뒤탈이 없고 후회도 없다고 뻐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할 대상이 없는 것처럼, 내 마음을 빼앗아갈 술이 없다는 게 불만이다.

100가지 꽃을 넣고 빚은 백화주. 단꿀 향과 약재 맛이 난다.
연초에 나는 좋은 술 하나를 구했다. 김제 학성강당에서 한 가마니 술을 빚어 어렵사리 떠낸 술이다. 술의 재료를 네 번에 나눠 넣기에 ‘네겹술’인데, 마지막엔 꽃이 흠뻑 들어간다. 그 꽃은 이른 봄 매화부터 늦가을 국화까지 모두 동참했다. 김제의 들판과 호남의 산야에서 나는 꽃들이 심청이 인당수 투신하듯 그렇게 몸 바쳐 빚어진 술이 백화주다.

술이란, 그 투명한 액체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는 그 내력을 알 수 없다. 어디서 왔으며 무엇으로부터 왔고, 누구의 손을 거쳐 지금의 향과 맛에 이르렀는지 종잡을 수 없다. 그래서 학성강당 김종회씨에게 “왜 술을 빚었습니까?” 물어보았다. “집안에서 13대째 전해오는 것이라 그 맥을 끊을 수가 없어서요. 그리고 이제는 내 집에 술이 있다는 것이 많이 알려져 술 익을 때면 줄을 서는 사람이 많아서요. 이제는 술로 덕을 베푸는 것보다는 섭섭함을 사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술 항아리는 작은데, 술 맛보기 위해 줄을 서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 또한 백화주가 익을 무렵이면 학성강당에 줄 서는 사람 중의 하나다. 우연히 지난 연말에 김씨를 만날 기회가 있어서, 나는 흥정에 들어갔다. 이번엔 백화주 몇 병 주실랍니까? 한 병이면 내 집에서 마시고, 두 병이면 내가 좋아하는 손깍지베개와 우줄우줄 친구와 마시고요, 세 병이면 달라집니다. 공론의 장으로 나서겠습니다. 그렇게 흥정한 끝에 나는 술 세 병을 얻기로 했다. 술을 그냥 택배로 보내라고 했더니 -은근히 1.8ℓ짜리 대용량 페트병에 담겨오기를 기대하면서-귀한 술을 어찌 택배로 보낼 수 있느냐며 전주에서 서당을 운영하는 훈장 제자를 통해 서울까지 배달해왔다. 물론 귀한 병에 담겨져 있었지만, 용량은 아쉽게도 페트병을 따라가지 못했다.

백화주는 1670년 무렵 영양 사는 안동 장씨가 작성한 <음식디미방>에 나오고, 1815년쯤 한양 사는 빙허각 이씨가 작성한 <규합총서>에도 등장한다. 문헌에만 등장하고 어디서도 전승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가, 내가 백화주를 만난 것은 2003년 일이다. 처음 학성강당의 백화주를 관찰했을 때는 문헌을 재현한 것은 아닌지 유심히 살폈는데, 빚는 과정을 살펴보니 가양주로서의 전승계보가 뚜렷하고, 독창적 개성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짜 백 가지 꽃으로 술을 빚는지 궁금하여 여름에 꽃 말리는 것도 보고, 가을에 학성강당 꽃자루를 열어보기도 했다. 그때 꽃자루 속에 담긴 꽃의 종류는 103가지였다. 고두밥을 지어 누룩과 버무려 술을 빚은 뒤에, 술을 떠낼 무렵이 되어야 그 꽃을 넣으니 꽃향기가 단단히 뭉쳐 있는 술이다. 그 맛은 한 잔이면 술이고, 두 잔이면 약이 되고, 세 잔이면 다시 술로 돌아온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백화주를 묵혀둘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살균하지 않은 술이라 시간이 갈수록 술맛은 시어질 것이고, 색깔은 갈변할 것이다. 이제 백화주가 시들기 전에 꺼내놓아야 한다. 누와 함께 이 술을 마실꼬? 고민하다, 내가 자주 드나드는 인터넷 카페에 공지문을 띄웠다. “꽃피는 봄이 왔습니다. 지리산녘에는 산수유 매화가 피어나고, 그 향기 북상하고 있는 줄 압니다. 몸을 먼저 움직여 봄을 맞이해야 함에도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 종종거릴 뿐입니다. 저처럼 서울을 떠나지 못한 분들과 함께 꽃기운을 가득 담은 백화주 맛을 보려고 합니다. 모월 모일 모시에 어디서 봅시다.” 이렇게 공지문을 올려놓고 나는 지금 백화주를 알아줄 새 벗들을 기다리고 있다.

막걸리도 ‘이름’이 필요하다
100년 전 왕조시대를 강제로 접고, 식민지 굴종을 겪고, 전쟁의 참화를 입고, 개발독재의 질주와 수직적인 군인 통치의 얼차려를 받으면서 한국 술은 원기 회복제이자 세월 망각제로 자리매김됐다. 한국의 술상에서는 1000원대의 소주와 막걸리와 맥주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생산자는 1원짜리 이문을 남기기 위해 자존심도 버리고 꽁꽁 숨어 술을 빚었다. 1000원짜리 술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앞으로 내밀지 않는다. 그 술들은 대량 생산되고 대량 유통되고 대량 소비되는 공산품이지, 차별화된 예술품이 아니다.

대량 소비되는 술은 재빨리 마셔 없애야 되는 천하고 헐한 것이었다. 막걸리와 소주와 맥주는 가격경쟁을 하고, 품질경쟁은 하지 않았다. 누가 더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지 논하지 않았다. 소비자는 어떤 재료로 술을 빚는지 모르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막걸리가 가장 싸구려 재질의 용기에 담긴 것도 그 익명의 문화를 담다보니 벌어진 일이다. 술을 귀하게 다루는 것이 넋나간 일이 되고, 귀한 술을 찾는 것이 허영이 되었다. 술의 문화를 논하는 것은 뜬 구름 잡는 얘기가 되고, 오로지 술에 대한 교육은 인기 없는 금주교육밖에 남지 않았다.

막걸리도 차별화가 필요하다. 새 병에 담기고, 새로운 이름을 얻어가는 막걸리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런 와중에 막걸리 열풍이 불고, 막걸리가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언론의 속성은 스타를 만들고 나면, 스타의 스캔들을 캐기 바쁘다.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어 막걸리를 한껏 띄워 올리더니, 이제 다시 막걸리라는 풍선을 터뜨리는 놀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막걸리의 문제는 무엇일까? 말통 유통을 논하고, 아스파탐 감미료를 논하고, 동동주를 논한다. 문제점 지적은 일방적이다. 총체적 이해는 뒷전이다. 동동주의 유연성에 귀기울이기보다, 동동주의 불법성만 따진다. 동동주, 막걸리. 이들은 법적 용어가 아니다. 주민등록이 되어 있지 않은 이름이다. 이들 이름은 법으로부터 자유로워, 불법의 개연성을 너무나 풍부하게 지니고 있다.

1000원짜리 싸구려 막걸리는 허점투성이다. 물가에 놓인 아이가 아니라,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아이다. 어떻게 하면 두 발을 땅에 디디고 씩씩하게 걷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생산자의 몫만이 아니다. 소비자와 생산자의 줄다리기가 이뤄져야 한다. 그 긴장을 조성하기 위한 비판이라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소비자와 생산자의 새로운 일전이 바야흐로 시작될 필요가 있다. 이 전쟁에서 막걸리는 살아남을 것인가? 어제의 히트상품이 오늘의 스테디셀러로 살아남을 것인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막걸리들은 어서 빨리 이름을 얻어야 한다. 포천막걸리, 여주막걸리, 상주막걸리는 막걸리 이름이 아니다. 지역 독점이 보장되던 시절 유효했던 이름이다. 장사가 잘 돼 한 동네에 또 다른 양조장이 생기면 소비자는 혼란에 빠진다. 포천막걸리가 그런 형국이다. 그러다보니 포천막걸리끼리 과도하게 경쟁한다.

장수막걸리, 불로막걸리, 부자막걸리, 궁막걸리 하는 식으로 자기만의 이미지를 담은 이름이 있어야 한다. 변하지 않는 이름이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맛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막걸리를 마실 때마다 맛 등이 다르다면 평할 수 없다.

검은콩막걸리, 더덕막걸리, 좁쌀막걸리 식의 이름도 이름이 아니다. 또 다른 검은콩막걸리가 등장하면 앞선 검은콩막걸리와 차별화가 되지 않고, 검정콩이 한 개 들어간 것과 열 개 들어간 것이 구별되지 않는다. 하나의 이름을 알리기까지는 시간도 돈도 많이 들겠지만, 그 길을 가야 한다.

술은 누가 만드는지 알 필요가 없는, 오로지 성능만 좋으면 되는 휴대전화가 아니다. 모두가 명품이 될 필요는 없지만, 명품 술도 생겨나야 한다. 서민을 위한 값싼 술이라 하더라도 이름은 있어야 한다. 자신의 술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내미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막걸리도 이제 여주댁, 상주댁하는 택호 말고도, 제 이름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

‘문화’가 빠진 ‘문경의 술’
오미자는 다섯 가지 맛을 내는 붉은 열매다. 빛깔이 곱고 맛이 다채로워 술과도 잘 어울린다. 2007년 국세청과 농림부 품평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던 남원의 ‘황진이’라는 술도 오미자를 이용해 붉은 빛을 낸 술이었다. 오미자가 술에 많이 들어가게 된 데는 오미자 재배지의 확산도 한몫을 했다. 근년에 들어 오미자를 많이 생산한 곳으로 경북 문경시 동로면이 꼽힌다. 이곳에서 전국 오미자 생산량의 절반 정도가 난다.

문경 오미자의 위력은 지난 주말 관광 서포터스 일행으로 문경새재를 방문했을 때도 느낄 수 있었다. 관광 서포터스란 국내외에 한국관광지를 적극 홍보할 자원봉사자들로 민간 홍보대사들이다. 이날 참석자의 절반 정도가 외국인들이었다. 문경새재 초입에 오미자차와 오미자술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었다. 일행은 오미자차 한 잔으로 새재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문경 산채비빔밥에 반주로 나온 오미자 과일주 한 잔.
점심으로 산채비빔밥을 먹으면서는 반주로 오미자 과일주를 맛보았고, 식후에는 오미자차를 마셨다. 색깔이 투명한 선홍빛이라 참 고와서, 눈으로 먼저 취하는 술이다. 저녁에는 문경시 관광 활성화를 위한 간담회가 있었는데, 간담회가 끝나고 저녁 회식 시간에도 오미자 과일주와 오미자 막걸리를 맛보았다. 술은 접대하기 좋은 음식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 술을 단순하게 접대용의 하나로만 사용하는 것은 1차원적이다. 술에는 함께 실어낼 문화가 많이 있다. 그리고 문경은 그런 자산을 많이 갖고 있는 곳이다. 오미자술만 혼자 나와서 손님들을 맞고 있는 것이 아까웠다.

내가 그려보는 문경술의 위상은 이렇다. 문경새재는 과거 길에 오르던 경상도 선비들이 넘던, 행운을 가져다주는 길이었다. 또한 한양에서 부임하던 관리의 인수인계식이 열리던 곳이다. 전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주막 또한 문경새재에 있다. 문경새재에 주막은 복원되었지만, 주막은 비어 있다. 형태도 옛것이 아니다. 주방이 너무 빈약하게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주막에서는 특별한 행사 때에 공연과 차 시음회가 열리는데, 그것만으로는 아쉬움이 크다. 술과 음식을 함께 맛보았던 주막 문화를 재현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국립공원의 산중이라 곤란하다면, 다른 대안을 찾아볼 수도 있다. 테이크아웃 커피처럼, 도수 낮은 한 컵 막걸리로 대신할 수도 있지 않을까.

더구나 문경은 막걸리와 어울리는 막사발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5월이면 문경 찻사발축제가 성대하게 열린다. 차 문화보다도 술 문화가 화려했던, 그래서 차보다도 막걸리가 더 많이 담겼을 문경 막사발이 찻사발로 해석되고 있는 것도 나로서는 불만이 많다. 술 문화는 좋은 술에서 시작하지만, 멋진 잔과 술병을 통과해야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막걸리에 어울리게, 술잔을 해석해내는 작업이 필요한데 아직 문경에서는 그 작업이 보이지 않는다. 문경도자기 전시관에 전시된 와인잔을 닮은 백자 마상배는 훌륭한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는데도, 그런 상품조차 보이지 않는다.

우리 일행은 2일째에 문경도자기전시관에서 찻사발에 문양을 그리는 체험을 했고, 다실에서 차 시음도 했다. 차 시음을 할 때 내가 매료된 것은 찻잔의 받침대였다. 문경도자기의 찻잔을 본디 술잔이라고 여기는 나는 도자기로 된 찻잔 받침대를 보며, 술잔에도 받침대가 있으면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술을 마실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에게 받침대와 함께 술잔을 내놓으면, 마치 주인이 손바닥에 술잔을 올려 권하는 느낌이 든다.

저녁 식탁에, 출시된 지 몇 년 안된 오미자 과일주와 오미자 막걸리만 나온 것도 아쉬웠다. 문경에는 조선 초기 재상인 황희 선생의 후손이 빚는 문경 호산춘이라는 걸출한 술이 있기 때문이다. 새콤한 맛이 도는 오미자술은 식전주로 마시고, 달고 묵직한 문경 호산춘은 식후주로 마시면 한국 음식문화의 깊이를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문경 구경을 잘했는데, 서포터스의 활동이 발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라 오미자처럼 새콤한 말을 했다.

다시 풍류를 담으려면
조선시대 관리들의 술 마시는 대표적인 관행으로 봄에 교서관에서는 복숭아꽃 나무 아래에서 마시는 ‘홍도음’이 있고, 초여름에 예문관에서는 장미꽃 향을 맡으며 마시는 ‘장미음’이 있고, 한여름 성균관에서는 푸른 소나무 그늘에서 마셨던 ‘벽송음’이라는 술자리가 있었다. 이들은 술안주로 오르는 물고기는 용, 닭은 봉이라고 부르고, 탁주는 현자, 청주는 성인이라고 부르면서 즐겼다. 호들갑스럽긴 하지만 현대와 완연하게 다른 술문화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옛 사람과 오늘 사람의 술 마시는 취향을 비교해 가장 큰 차이는 오늘 사람들에게서는 자연과 시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시와 자연을 잃으면서, 풍류마저 잃고 말았다. 오늘 사람은 술마시는 것도 자연의 속도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기계의 속도를 따라가듯이 속도전을 벌이며 취할 때까지 마셔댄다. 옛 사람들은 술자리에서 시를 짓고, 거문고를 다뤘다. 골방에 혼자 앉아서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회라는 모임을 통해서 시를 주고받았다.

음주가 풍류가 되려면, 어디서 어떻게 마시느냐가 중요하다. 평범한 술집을 벗어나 남산 한옥마을에서 맛보는 술은 각별한 느낌을 준다.
중국의 주성(酒聖) 이태백에 필적할 고려시대 인물로 삼혹호(三惑好·시와 술과 거문고를 좋아했다는 뜻) 이규보(1168~1241)가 있다. 이규보는 “술이 없으면 시도 지어지잖고/ 시가 없으면 술도 마시고 싶잖아/ 시와 술을 내 모두 즐기니/ 서로 어울리고 서로 있어야 하네”라고 했다. 시와 자연과 술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잘 나와 있다. “하늘이 내게 술 못 마시게 할 양이면/ 아예 꽃과 버들 피어나게 하질 말아야지/ 꽃 버들이 아리따운 이때 어이 안 마시리/ 봄은 나를 저버릴망정 나는 그리 못하리/ 잔 잡고 봄 즐기니 봄 또한 좋아라.”

성종의 형으로 은둔하며 지냈던 월산대군도 술을 즐길 줄 알았던 인물이다. 한양의 북쪽 고양에 살았고 그곳에 묻힌 월산대군은 한강 하류에 나가 낚시를 하면서,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저어 오노매라”고 했다. 그는 돌아와 무심한 달빛 아래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창밖에 국화를 심고 국화 밑에 술을 빚어 놓니/ 술 익자 국화 피자 벗님 오자 달이 솟네/ 아희야 거문고 청처라 밤새도록 놀아보리라”고 노래했다.

옛 사람들이 자연과 술을 벗하며 남긴 시는 많다. 그중에서도 시조의 대가로 평가받는 이정보의 시조 한 편이 절창이다.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 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하네/ 언제면 꽃 아래 벗 데리고 완월장취 하려나.” 술과 짝했던 것은 꽃이고 달이고 벗이었다.

그렇다면 옛 사람의 풍류를 우리에게 끌어들이는 방법은 없을까? 이는 어떻게 하면 우리 술 문화 속으로 자연을 끌어들일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창문만 열면 자연이었지만 이제는 창문만 열면 아파트요, 찻길이라 자연을 찾으려면 멀리 이동해야 한다. 이동하려면 차가 필요하고, 차를 몰면 술을 못 마시는 상황이 벌어진다. 또 현대의 술은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맞춤 술이 아니라, 대량 생산되고 대량 소비되는 술이 대부분이다. 굳이 공간 이동을 할 필요도 없어진다. 송강 정철이 고양에 살면서 파주에 사는 성권롱을 찾아갔던 것도 술 핑계를 대고서였다. “재 너머 성권롱 집의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은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 타고/ 아해야, 네 권롱 계시냐 정좌수 왔다 하여라.”

풍류를 찾으려면 개성을 찾아야 하고, 개성을 찾으려면 좀 색다른 술들이 있어야 한다. 색다른 술을 갖추는 방법의 하나는 어제와 다른 술을 찾아 마시는 노력일 테고, 다른 하나는 직접 술을 빚어서 마시는 방법이다. 자기만의 술이 있으면 술을 좋아하는 벗이나 이웃을 초대하여 함께 나누고 싶어진다. 자연히 어디에서, 어떻게 마실 것인가도 고민하게 된다. 그저 아무 음식점이나 술집에 들어가서, 그 술집에 마련된 술을 소비할 뿐인 지금의 음주문화로서는 개성있는 풍류문화를 찾을 길이 없다.

막걸리 맛을 아시나요
서울 이태원의 한 막걸리 주점에서 외국인 두 명을 만났다. 이들은 3박4일 일정으로 전국 막걸리 기행을 떠나기에 앞서 막걸리 맛을 어떻게 볼 것인가 궁금해서 막걸리학교 교장인 나를 찾은 것이었다. 모 방송사의 프로그램 제작차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 기행을 떠난다고 했다.

서울 이태원의 한 막걸리 주점에서 만난 외국인들. 술 기행을 앞두고 기대에 부푼 표정이다.
이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지역마다 막걸리에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약간 망설였다. 전국에 800개가량 막걸리 양조장이 있고 각기 다른 맛의 막걸리를 생산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지역마다 차이가 난다고 말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예컨대 막걸리로 소문을 얻은 동네로 포천과 전주와 부산 산성마을이 있다. 포천 양조장들은 아주 다양한 막걸리를 만들고 있지만, 포천막걸리의 정체성을 논할 만큼 그들만의 고유성을 확보하고 있지는 않다. 전주는 안주 값이 저렴하고 푸짐해서 소문난 막걸리 동네이지, 술맛이 좋아서 소문난 동네는 아니다. 부산 산성마을은 전통누룩으로 만든 막걸리의 맥을 이어오고 있어서 개성은 있지만, 양조장이 하나뿐이라 지역성을 논하기는 곤란하다. 이래저래 지역에 따라 맛을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내가 권한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생막걸리와 살균막걸리를 구분해보고, 다른 하나는 쌀막걸리와 밀막걸리를 구분해보라는 것이었다. 막걸리를 즐기는 한국인이라도 이 기본적인 맛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조금 설명하면 이렇다. 막걸리는 살균 여부에 따라 생막걸리와 살균막걸리로 나뉜다. 양조장 주변 동네로 유통되는 술들은 대부분 생막걸리이고, 수출용이나 먼 지방으로 나가는 술들은 살균막걸리다. 효모와 유산균이 살아 있는 생막걸리는 발효가 지속되어 탄산가스가 생성된다. 생막걸리를 맛보면 입 속에서 ‘토독’ 튀는 느낌을 받는데, 이는 탄산가스의 질감 때문이다.

생막걸리를 섭씨 65도의 뜨거운 물에 30분 정도 넣어두면 살균막걸리를 얻을 수 있다. 살균이 된다는 것은 효모와 유산균이나 기타 균류가 활동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살균한 막걸리는 효모의 활동이 없기 때문에 탄산가스가 생성되지 않는다. 막걸리에 탄산가스의 느낌이 없으면, 술맛이 싱겁거나 단조롭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대신 살균막걸리는 살균 열처리 때문에 술맛과 향이 생막걸리보다 더 진하게 느껴질 수 있다.

막걸리를 재료에 따라 구분하면, 쌀막걸리와 밀가루막걸리로 나눌 수 있다. 대도시 양조장들은 쌀을, 시골 양조장들은 밀가루를 더 많이 사용한다. 밀가루막걸리는 1960년대 중반 양곡정책으로 탄생한 술이다. 곡물을 아끼기 위해 멥쌀, 찹쌀, 좁쌀, 보리쌀 따위로 술을 빚지 못하게 하면서 밀가루막걸리가 생겨났다. 쌀을 원료로 다시 술을 빚을 수 있게 된 것은 90년 이후의 일이다. 고로 6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는 밀가루막걸리가 대세였다. 그 시절에 청년기를 보낸 이들은 밀가루막걸리를 막걸리의 정통 맛으로 기억하고 있다. 밀가루막걸리는 원료가 가루이기 때문에 묵직하고 텁텁한 느낌이 든다. 술의 빛깔도 비지색이나 아이보리색을 띤다. 반면 쌀막걸리는 쌀 고두밥을 발효시키기에 밀가루 술보다 술이 맑고 희며 우윳빛이 돈다. 맛도 쌀막걸리는 밀가루막걸리보다 경쾌하고 부드럽다.

이런 설명을 해준 뒤에, 두 외국인과 10여가지 막걸리를 맛보았다. 그 중에서 어느 것이 맛있고, 어느 것이 맛없느냐 물었더니 그들은 강원 정선에서 빚은 옥수수막걸리가 가장 맛있고, 전북 정읍에서 빚은 막걸리의 맛이 가장 떨어진다고 했다. 아주 순진하고 초보적인 맛의 평가였다. 옥수수막걸리는 구수하고 단맛이 많이 돌고, 정읍 막걸리는 감미료가 들어가지 않아 쌉싸름한 맛이 돌기 때문에 내린 평가였다. 이를 두고 나는 두 외국인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원두커피가 있는데 하나는 설탕과 커피크림을 넣어서 달고 부드러운 맛이 돌고, 다른 하나는 원두커피 그대로라서 쓴맛이 돕니다. 당신들은 단맛이 도는 것을 맛있다고 하고, 쓴맛이 도는 것을 맛없다고 말합니다. 커피 맛을 제대로 알게 되면 쓴맛을 즐기게 되지요. 막걸리도 쓴맛이 도는 것을 즐기게 될 때 제대로 맛을 아는 것입니다.”

면천두견주, 그리고 스토리텔링
명주가 되기 위해서는 술맛만 좋아서는 안 된다. 그 술에 얽힌 사연이 있어야 하고, 그 사연을 증거할 공간이 있어야 하고, 그 술과 공간에 감동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요즘 얘기하는 관광 스토리텔링의 3요소, 즉 사연(스토리)·공간(관광지)·사람(관광객)이 갖춰져야 진정한 명주가 될 수 있다. 이 땅에 그런 술이 몇 가지나 될까? 우선 그 하나를 소개한다.

충남 당진군 면천면에서 지난 10~11일 열린 ‘면천 진달래 민속축제’에서 참가자들이 두견주 빚기 체험을 하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선정된 3대 술 중 하나이자, 이 땅에서 전해오는 술 중 그 유래가 가장 오래된 술로 면천두견주가 있다. 면천은 충남 당진군 면천면으로, 간척사업이 이뤄지기 전에는 바다로 접근하기 좋은 서해안의 요충지였다. 당진군 소재지보다 훨씬 유명하고 번성했는데, 지금은 무너진 읍성과 아담한 향교만이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두견주는 두견화에서 생겨났다. 두견화는 진달래의 다른 이름이니, 두견주는 진달래술을 뜻한다. 진달래는 참꽃이라 하여 먹을 수 있으며, 만성 기관지염에 좋고 혈액 순환에 좋다고 알려져 있어 솔잎과 더불어 우리 술에 곧잘 사용되는 재료다.

면천두견주에 전해오는 사연은 이렇다.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이 큰 병을 얻어서 몸져눕게 되었다. 아무리 좋다는 명약을 써도 병세에 차도가 없었다. 복지겸에게는 아리따운 딸 영랑이 있었는데, 영랑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마을 뒷산인 면천 아미산에 올라 매일같이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100일 기도를 드리던 마지막날 밤, 영랑의 꿈에 산신이 나타나, “아미산 진달래꽃을 따서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물로 빚어 아버지께 드리고, 안샘 곁에 두 그루 은행나무를 심고 정성껏 기도하면 아버지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랑은 꿈에 들은 산신령의 말대로 술을 빚어 아버지께 드리고, 나무를 심고 기도드렸더니 아버지의 병이 씻은 듯 나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면천에서 두견주를 빚게 되었고, 두견주 술맛을 제대로 내려면 안샘물로 빚어야 한다는 말도 함께 전해왔다고 한다.

단순하게 전설만 존재한다면 믿거나 말거나 할 텐데, 영랑의 손길이 닿았던 우물과 나무가 있으니 믿음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 믿음 때문에 면천면에서는 봄날에 진달래축제를 벌인다. 올해로 10회째를 맞이한 면천 진달래축제장을 지난 주말에 찾아갔다. 축제장에서 면천두견주 기능보유자들의 지도로 찹쌀 고두밥에 누룩과 두견주 밑술과 진달래꽃을 넣어 면천두견주 빚기 체험을 했다. 면천두견주의 맛이 혀에 오래 남고 마음에 새겨지도록 느리게 맛보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성안의 좋은 터에 자리잡은 안샘도 보고, 면천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영랑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도 둘러보았다. 동행한 지인이 “왜 하필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었을까요”라고 물었다. 여럿이 함께한 자리여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흥미롭게 발전해갔다. 스토리텔링 작업이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다. 수다스러운 얘기는 이렇게 이어졌다.

“글쎄요, 산신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두 그루를 심은 것은 은행나무가 암수로 구분되니까 그렇다. 그래야 열매를 맺으니까.” “그러네!” “그런데 왜 은행나무일까.” “산신령이 술만 권할 수 없어서, 안주까지 권해준 것이죠. 은행 꼬치구이 해먹으라고!” “아하, 재밌다.” “은행은 신장에 좋은데, 아마도 복지겸이 신장결석이나 신장병에 걸렸나 봐!” “은행은 하루에 5개 이상 먹으면 안 되는데, 그게 얼마나 안주가 돼서.” “그러니까 은행 한 알에 두견주 한 잔 해서, 두견주 5잔 이상 먹지 말라는 경고지! 두견주 석 잔에 5리를 못 간다잖아. 독해서.”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다, 면천두견주에는 은행 안주가 제격이다, 하고 실제 영랑 은행나무 열매와 두견주를 함께 파는 거야.” “어서 빨리 두견주보존회 사람들에게 알려줍시다. 올 가을부터는 영랑 은행과 면천두견주를 세트로 판매하라고!”

그렇다면 올해 말 송년회장에서는 이런 술 홍보도 이뤄질 수 있겠다. “대한민국 3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술, 면천두견주를 1000년 전 복지겸의 딸 영랑이 심은 은행나무에서 수확한 은행 안주와 함께 드십시오. 요즘 유행하는 진달래! 구호를 외치면서요. 진달래! 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

막걸리는 부드러운 술이다
막걸리의 정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지난해 열렸던 한 전통주 품평회에서 막걸리를 영문으로 소리나는 대로 ‘Makgeolli’라고 적고, 그 뜻으로 ‘조잡한 독주(Coarse Liquor)’라고 덧붙여둔 것을 본 적이 있다. 여기서 Coarse는 조잡함을 뜻하는 와인 용어다. 미숙하여, 정교하지 못하고 세련되지 않은 와인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막걸리를 향해 당당하게 조잡하다는 표현을 쓰다니! 나는 이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

제주로 올려진 막걸리이다. 막걸리를 따져보면 우리 민족과 우리 음식을 재해석할 수 있어 흥미롭다.
막걸리가 막 걸러냈다고 해서 생겨난 표현이지만, 지금은 막 걸러내지 않은 막걸리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 막걸리들은 지게미의 입자가 아주 미세하여 쌀 음료나 우유처럼 부드러우면서 불투명하다. 입에 깔끄러운 맛이 남지 않고, 거칠고 조잡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부드럽고 달보드레하다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도 동아시아 3국의 술을 비교해보면 막걸리를 함부로 조잡하다고 표현해서는 곤란하다.

중국은 독한 마오타이의 나라다. 마오타이는 알코올 50%를 우습게 넘고, 백주 또한 알코올 60%를 넘나들다가 요즘은 저도주 바람이 불어 알코올 38% 언저리를 맴돈다. 기름지고 튀긴 음식이 많아 독주를 즐긴다고 하지만, 막걸리보다 6배나 강한 무시무시한 도수다. 일본은 니혼슈라고 불리는 사케를 국가대표 술이라고 말한다. 청주인 사케는 알코올 도수가 14~18%에 이른다. 발효주를 물 타서 마시지 않고, 발효된 그대로를 즐기는 편이다.

알코올 6%짜리 저도주인 막걸리 유형의 술을 중국이나 일본은 즐기지 않는다. 막걸리, 즉 탁주를 중국은 싱겁게 여겨 찾아보기 어렵고, 일본은 청주와 알코올 도수가 동일해 흐린 청주로 여긴다. 중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는 주세법에 아예 탁주라는 술을 만들어두지 않았다. 즉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알코올 도수가 가장 낮은 술을 즐기는 나라가 한국이다.

왜 한국은 순한 술을 즐겼을까? 그 이유의 하나를 찾자면,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한국이 가장 침략 전쟁을 감행하지 않은 나라라는 점이다. 끊임없이 변방 민족과 난타전을 벌이면서 몸집을 불려왔던 중국의 술, 사무라이 나라로 서구식 제국주의를 재빨리 받아들여 침략 전쟁에 몰입했던 일본의 술들이 한국 술보다 독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술은 전쟁의 필수품이다. 우리가 “위하여”라고 외치는 구호는 다름 아닌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반도에 소주가 들어온 것은 고려시대 몽골 침략 때였다. 일본 청주에 주정(높은 도수로 정제된 에틸알코올)을 탄 것도 1930년대 침략 전쟁에 몰입할 때였다. 막걸리는 도수가 낮아 전쟁 때 가지고 다니기 번거롭다. 기껏해야 농사 지을 때 필요한 술이고 땀 흘리고 나서 필요한 술이다. 그 순한 막걸리 속에 우리 민족의 순한 심성도 담겨 있다.

독일의 맥주, 프랑스의 와인과 견주어도 막걸리의 순하다는 표현은 희석되지 않는다. 맥주는 보리로 만들고, 와인은 포도로 만들고, 막걸리는 쌀과 밀로 만든다. 쌀 음료는 보리 음료보다 부드럽고, 포도 음료보다 맛이 엷다. 영국의 위스키와 러시아의 보드카는 독주이니, 그 부드럽고 순함을 막걸리와 견줄 수는 없다. 이렇게 비교하다보면 세상에서 가장 엷고 부드러운 술이 한국 막걸리라는 결론에 접근하게 된다.

막걸리의 세계 경쟁력은 바로 이 지점, 몸에 타격을 덜 주는 알코올 6%의 순한 저도주이자 부드러운 쌀 발효 음료라는 데서부터 키워갈 필요가 있다. 생화와 생우유의 냉장유통을 따라가다보면, 오래도록 멀리 이동할 수 있는 독주만이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막걸리는 그 출발은 거칠었지만, 더 이상 거친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는 술이다. 둥근 체나 삼베 자루에 여과해서 거칠었다면, 이제는 발효된 곡물 입자를 아주 섬세하게 여과하고 미세하게 분쇄할 수 있다. 이제 막걸리는 거칠고 조잡한 독주가 아니라 부드러운 술로 해석되어야 한다.
 
‘인심은 덤’ 통영 다찌집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을 줄인 말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통영 앞바다에서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것을 기념하여 충무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통영시가 되었다. 한국의 나폴리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해협을 끼고 있어서, 바닷가 산언덕에 층층이 올라붙은 집들이며, 물살을 가르며 오가는 배들의 모습이 아름다운 항구다. 이 서정적인 풍경이 유치환, 박경리, 김춘수, 윤이상과 같은 걸출한 예술인들을 배출하였다.

통영 다찌집의 상차림. 술병이 얼음을 가득 채운 통에 담겨 나온다.
바닷가라 물산이 풍부하다. 소문난 음식으로 통영복국, 통영굴요리 그리고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들어선 충무김밥이 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해하는 것은 통영 다찌집이다. 마산 통술집, 전주 막걸리집과 같은 계통의 술문화를 갖춘 곳이다. 미륵도를 잇는 충무교를 지나 미수동의 한 횟집 거리에서 다찌집에 들어갔다. 다찌가 무슨 뜻입니까? 다찌집을 시작한 지 5년이 된 주인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다 있지”의 준말이라고 했다. 통영 앞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이 한 상 가득 다 나오기 때문에 다 있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하나의 견해’라고 덧붙였다.

다찌는 일본말의 느낌이 농후하다. 친구를 뜻하는 도모다찌라는 일본어에서 다찌(達)는 여럿을 뜻하는 복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음식이 많다는 의미로 쓰인 것일까? 싶은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좀 더 설득력 있는 것은 일본의 다찌바(立場·서서 먹는 곳)에서 유래했다는 견해다. 일본어로 서서 먹는 것을 다찌구이라고 하고, 서서 먹는 초밥을 다찌노스시라고 부른다. 참치집에서 다찌는 주방장이 서 있는 곳 앞쪽의 손님이 앉는 곳을 지칭한다. 이로 보아, 다찌는 긴 탁자가 있는 스탠드바나 선 채 술을 마시는 선술집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술문화가 술처럼 흘러다니면서, 새로운 용어도 만들어내고, 비슷하지만 다른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다찌집에서는 어떻게 술을 마시는 것일까. 우선 서서 마시지는 않는다. 통영에서는 다찌집이 실비집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실비집은 안주를 마련한 실제 비용만을 받는 술집을 뜻한다. 실비집이나 선술집은 어려웠던 시절에 하루 일과를 마친 노동자나 서민들이 찾던 저렴한 술집이다. 다찌집에서는 술만 시킬 수 있다. 다찌집마다 약간 차이가 있지만 소주건 맥주건 한 병에 1만원 한다. 안주의 선택권은 손님에게 없다. 손님은 주인이 내주는 대로 안주를 먹어야 한다. 주인이 내놓는 안주는 그날 가까운 포구에서 산 싱싱한 해산물로 구성된다. 그러다보니 안주는 날마다 다를 수 있고, 계절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다찌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등장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술 1~2병 시켜놓고 안주가 얼마나 나오는지, 안주만 즐기거나 안주가 적다 많다 이야기하는 손님들이 나타났다. 특히 소문만 듣고 찾아오는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주인과 손님 간의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다찌집에 기본상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이유다. 3~4인 기준으로 5만원, 7만원, 10만원짜리가 생겼다. 5만원 상에는 소주와 맥주를 섞어 5병의 술과 안주가 나오고, 10만원 상에는 10병의 술과 안주가 나온다. 그리고 추가로 술 1병을 시킬 때마다 안주 1가지가 따라 나온다. 오늘 무슨 안주가 나올까? 그날 주인아주머니의 기분이 좋으면 안주가 더 나올 수 있고, 몸이 아프고 힘들면 적게 나올 수도 있다. 손님은 이 모든 것을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예전 주막의 주모와 손님의 관계가 다찌집에는 있다. 그래서 다찌집에는 불문율이 많다. 남은 술을 가져가서는 안된다. 기분이 좋아서 주인이 안주를 다른 날보다 더 내주면, 손님은 시킨 술값보다 값을 더 치르고 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술을 안 좋아하는 사람은 다찌집에 가서는 안된다. 술을 팔아야 매상이 오르기 때문에, 손님들이 맨송맨송 일어나면 다찌집이 망하고, 조금 비틀거리면서 일어서면 흥한다. 다찌집은 옆 손님이 소란스럽더라도 이를 나무라서는 안된다. 통영 다찌집은 선창에서 일을 마치고 온 어부들의 뒤풀이 장소였기 때문이다. 고래고래 소리 지를 수 있고, 언성이 높아질 수도 있고, 주인이 북장단을 칠 수도 있다. 그런 분위기를 이해하는 사람이라야 다찌집을 출입할 자격이 있다. 다찌집은 술만 파는 곳이 아니라 인심까지 파는 곳이다.

하산 후 옥수수 막걸리 찾는 까닭
관악산에 올랐다. 등산로 입구에서 어김없이 막걸리를 보았다. 등산하고 난 뒤에 막걸리를 찾는 이유는 막걸리가 갈증해소 알코올 음료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등산객들은 산행 전에 마시면 시동주, 산정에서 마시면 정상주, 산을 내려와서 마시면 하산주, 등산구간을 완주하고 나서 마시면 완등주라 부르며 막걸리를 즐긴다.

관악산 입구의 길목에 적힌 음식 안내판
산에서 술을 마시는 방법도 다양하다. 막걸리를 미리 냉장고에 얼려두었다가 가는데, 너무 얼리면 술통이 터지거나 산에 올라도 얼음이 그대로 있어 녹여 먹느라 곤욕을 치른다. 그래서 냉장고에 4시간 동안 얼렸다가 2시간 산행 후에 마시면, 알맞게 시원해진 막걸리를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이때 산행 시간과 막걸리 냉동시간은 비례하여 늘어난다.

그런데 산 밑에서 마시는 막걸리에 이상한 공통점이 있다. 옥수수 막걸리가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는 점이다. 왜 산에서는 옥수수 막걸리를 많이 마시는 것일까? 그게 궁금해서 안양 수리산 입구에서 옥수수 막걸리를 파는 음식점 주인에게 물어보았더니, “원래 이곳에서는 옥수수 막걸리가 대세예요”라고 말하더니 더 이상 설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로는 납득되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추정해본 것이 강원도에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등 명산이 많다 보니, 사람들이 그 산에 다니면서 강원도 옥수수 막걸리에 익숙해진 것이 아닐까였다. 산에 오면 산에서 나는 작물인 옥수수로 빚은 술을 즐기려는 취향까지 겹쳐서 벌어진 일이 아닐까였다. 하지만 이 또한 설득력이 없었다. 산 밑의 옥수수 막걸리들이 옥수수를 주재료로 해서 빚은 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옥수수 막걸리는 옥수수를 갈아서 엿기름과 물과 함께 가마솥에 넣어 당화시킨 뒤에 만든다. 옥수수 알갱이가 단단하여 누룩만으로는 분해가 잘 안되기 때문에 엿물 내리듯이 뜨거운 불로 삭히고, 이를 식힌 뒤에 누룩을 섞어 발효시킨다. 이런 방식으로 옥수수 막걸리를 만드는 곳은 드물기 때문에, 이 술맛에 익숙해진 사람도 드물다.

굳이 옥수수 막걸리의 등장 시기를 규명하자면, 미국산 옥수수 가루 수입과 관련이 있다. 막걸리의 재료로 옥수수 가루가 가세한 것은 1972년 1월부터인데, 이때 국가에서 옥수수 가루를 막걸리 원료의 5% 이상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 막걸리 원료로 옥수수 가루를 74년 6월부터는 30% 이상, 75년 1월부터는 40% 이상 , 75년 11월부터는 30%, 77년 1월부터는 20%를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양곡정책 차원에서 정부에서 막걸리 원료를 엄격히 통제했던 이 무렵에, 양조장들은 옥수수 가루를 배정받아 술을 빚었다.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옥수수 막걸리가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즉 양조장 막걸리의 3대 주재료인 쌀, 밀가루, 옥수수 가루의 한 축인 옥수수 막걸리가 산 밑에서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 또한 옥수수와 산의 인연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산 밑에서 맹주로 군림하는 옥수수 막걸리를 맛보면서 궁리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산행을 마치고 산 밑에서 마시는 막걸리는 그다지 달지 않게 느껴지는데, 집에 가져오면 무척 달고 구수하다는 점이었다. 특히 단맛이 강하고 색깔도 진한 옥수수 막걸리가 있어 맛을 가늠해보니, 캐러멜(설탕을 갈색이 되게 졸인 것)을 넣은 것 같았다.

몇 차례 산 밑 옥수수 막걸리를 마시고 난 뒤에,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옥수수 막걸리는 다른 막걸리보다 구수하고 달다. 산 밑에서 구수하고 단 막걸리가 끌리는 것은 등산용 간식인 사탕이나 초콜릿을 먹는 이유와 상통한다. 산행으로 혈액 속의 당을 많이 소모했기 때문에, 몸이 당을 부르는 것이다. 당을 보충해 주면 피로도 빨리 풀리고, 근육경련이나 쥐나는 것을 완화할 수 있다. 땀 흘리고 난 뒤에 단맛 강한 옥수수 막걸리를 찾는 것은, 몸이 단맛을 찾기 때문이다.

대나무와 술
주말 아파트 장터에서 죽순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검붉은 죽순 껍질을 벗기면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죽순으로 술을 담그면 좋다고 말했다. “술을 어떻게 담그는데요”라고 묻자, 소주에 그냥 담아놓으면 된다면서 낮은 목소리로 정력에도 좋다고 답했다. 술과 정력, 술과 만병통치약을 연계시키는 얘기를 우리는 곧잘 듣게 된다. 가시오가피나 동충하초가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지고, 복분자도 정력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술과 굳건한 결합을 맺었다.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는 개념이 술에서 더 분명하게 구현된 것이다.

죽순 안주를 곁들인 대통술 상차림. 대통술은 증발하기 때문에 구입하면 곧바로 마시는 게 좋다.
<동의보감>에 죽순은 ‘성질이 차고 맛은 달며 독이 없다. 소갈을 멎게 하고 소변을 잘 나오게 하고 번열(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우면서 나는 신열)을 없애고 기를 보한다’고 했으니, 신장에 좋고 정력에 좋다고 유추해도 무리가 없다. 죽순만이 아니고, 순은 독이 없어서 나물로 무쳐 먹거나 술을 담그기도 한다. 솔잎순으로 빚으면 송순주가 되고, 칡순으로 술을 담그면 칡향이 잘 잡힌다.

대나무와 술이 연관된 것으로, 우선 대나무통에 담겨 나오는 술이 있다. 연전에 중국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배 안에서, 내게 대통술을 펼쳐 보이면서 잘 산 것이냐고 묻는 이가 있었다. 그 대통술은 술이 새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대통의 위아래에 파라핀으로 피막을 한 상태였다.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반품할 수도 없는 처지인데, 잘못 샀다고 말하기가 곤란해서였다. 대통에 술을 담그는 것은 운치 있지만, 오래되면 대통이 건조되면서, 대통 속의 술이 줄어든다. 내가 가지고 있던 대통술이 1년쯤 지나니 한 방울도 없이 사라져버린 적이 있다. 즉 대통 속의 술이 증발되지 않게 하기 위해 대통에 파라핀을 칠한 것인데, 이 방식은 옳지 못하다. 파라핀과 술이 접촉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파라핀이 칠해지지 않은 대통술은 괜찮다.

음식점에서 대통에 담겨 나오는 술을 종종 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대통밥이나 대통삼계탕을 먹는 것은 대통 속에 들어있는 엷은 막과 대통에서 나오는 향과 영양성분을 섭취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대통을 반복해 사용하다보면, 별다른 영양성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청결성을 유지하기도 어렵게 된다. 이 때문에 대통은 한 번만 쓰는 게 바람직하다.

대나무 잎을 넣어서 술을 빚기도 한다. 댓잎이 들어간 술로 중국에는 죽엽청주(竹葉靑酒)가 있고, 전남 담양에는 댓잎술이 있다. 담양 댓잎술은 ‘추성고을’에서 빚는데, 누룩과 고두밥과 댓잎과 다른 약재가 들어간다. 죽엽청주는 알코올 도수가 45%나 되는 증류주이지만, 댓잎술은 알코올 도수 12%의 약주다. 담양 댓잎술은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나는 연초록의 술인데, 댓잎이 발효되는 과정에서 얻어진 효과라고 한다.

대나무 자체를 원료로 한 술로 죽력고가 있다. 대나무에 열을 가하면 대기름이 나오는데 이를 죽력이라고 한다. 죽력은 한약재로도 쓰이는데, 죽창처럼 막힌 것을 뚫는 기능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심장병이나 협심증 등 성인병을 치료하는 데 쓰고, 타박상이나 어혈이 생길 때도 사용한다. 죽력고에서는 약과 술의 경계가 무너진다. 죽력고는 죽력을 마시기 위한 방편이었다. 죽력은 아주 느끼하고 역겨워, 그대로 먹기가 곤란하다. 그래서 소줏고리에 대나무와 솔잎을 쟁여 넣고 거기에 죽력을 뿌린 뒤에 소주를 받아내서 마셨다. 죽력고는 동학혁명을 이끈 전봉준 장군이 찾았던 술로도 유명하다. 전봉준이 일본도에 발뒤꿈치를 다쳐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될 때, 인삼·미음과 함께 죽력고를 찾았다. 치료제로 찾은 것이다. 현재 죽력고는 전봉준이 살았던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정읍시 태인면의 태인양조장에서 송명섭씨가 빚고 있다.

대바구니와 죽공예품이 필수 생활용품이던 시절에 대밭은 큰 재산이었지만, 플라스틱 그릇과 중국산 죽공예품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대밭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대나무술이나 댓잎술의 효능이 줄어든 것은 아니니, 우리 술의 다양성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한 번쯤 맛볼 것을 권한다.

월드컵과 막걸리
월드컵 개막을 한달 앞둔 지난 5월10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한국의 집’에서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다. 2010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을 기원하는 ‘16강 대표 막걸리 선발대회’였다. 농림수산식품부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 국세청, 대한축구협회가 후원하는 국가 차원의 행사였다. 나는 이날 행사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여, 가슴 떨리는 발표 장면을 지켜보았다. 16강 진출팀이 발표될 때마다 대회장은 결승골을 넣은 듯한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그런데 월드컵과 막걸리가 무슨 상관있을까? 이런 물음을 던지기 전에 우리는 월드컵과 맥주가 무슨 상관있을까? 라는 물음에 먼저 답할 필요가 있다. 남아공월드컵의 주류부분 공식후원사는 버드와이저이고, 한국축구대표팀의 주류부분 공식후원사는 하이트맥주다. 공식후원을 하는 맥주는 축구장에서 팔린다. 단 병이나 캔이 흉기가 되지 않도록 종이에 담아 팔도록 되어 있다. 맥주가 저도주이고 갈증해소 음료라는 특징 때문에 스포츠 현장에서 함께 뛰고 있는 것이다.
16강 막걸리에 선발된 막걸리와 막걸리회사 대표들.

맥주와 가장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게 막걸리다. 막걸리를 마신 서양인들은-이들은 쌀에 친숙하지 않기에 일본 청주 외에는 쌀술을 마셔보지 않았다- 막걸리를 쌀와인(Rice wine)보다는 쌀맥주(Rice beer) 개념에 가깝다고 말한다. 탁한 과일주보다 곡물로 된 청량한 보리술을 닮았다고 여긴다.

월드컵과 막걸리가 만나려 하는 것은 막걸리가 스포츠음료로서의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등산 끝에 마시는 하산주로서의 막걸리다. 고급 소주나 값나가는 술들이 진을 치고 있었던 골프장에서도 이제는 캔막걸리를 볼 수 있다. 이미 한 주류회사에서는 막걸리를 스포츠마케팅으로 연계시켜 스포츠 전문 매장을 찾은 고객에서 막걸리를 제공하고, 프로야구경기장에서 맥주와 함께 놓일 수 있게 했다.

흔히 술을 마시고 나면 갈증이 더 나게 되어 있다. 술을 마시고 주무신 아버지의 머리맡에 놓여있던 자리끼도 생각난다. 알코올이 몸속으로 들어가면, 그 독성을 해독하기 위하여 간은 가장 먼저 알코올 분해 작업에 착수한다. 이때 알코올을 분해하기 위해서 우리 몸은 알코올양의 10배에 해당하는 수분이 필요하다. 술을 마시고 갈증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막걸리 애호가들은 기억할 것이다. 소주를 마시고 난 이튿날은 갈증이 심한데, 막걸리를 마시고 나면 갈증이 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주는 알코올 20%이고 물이 80%이기 때문에 술 마신 양만큼 물을 마셔줘야 하지만, 막걸리는 알코올 6%이고 물이 91%이기 때문에 갈증이 일지 않고 오히려 수분이 남아돌게 된다. 막걸리를 갈증해소 알코올 발효음료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게다가 맥주는 헛배를 부르게 하고 화장실을 빠른 속도로 드나들게 만들지만, 막걸리는 허기를 면케 해주는 든든한 음료라는 미덕까지 지니고 있다.

막걸리의 전통 속에는 이미 스포츠음료로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막걸리는 농주여서 일하다가 새참으로 마실 수 있고 마시고 나서 다시 일할 수 있다. 도시로 진출한 막걸리가 넓은 들판 대신에 운동장과 광장을 무대로 삼을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게다가 막걸리의 가장 빛나는 안주는 땀이다. 그래서 막걸리는 축구 경기를 마치고, 열띤 축구 응원을 하고 나서 마실 수 있는 광장의 술이고, 운동장의 술이다.

월드컵 대회에 발맞추어 지역 막걸리 16강을 뽑은 것은, 막걸리도 이제 맥주가 일궈놓은 스포츠마케팅의 운동장 속으로 뛰어들겠다는 선언이다. 그런 점에서 막걸리 회사들은 맥주 도수의 막걸리, 종이팩 막걸리, 테이크아웃 막걸리, 칵테일 막걸리 등의 대안을 제시할 때가 되었다. 그럼 막걸리야, 운동장을 부탁해!

와인과 야합한 매실주
한국 가정에서 술을 많이 빚는 계절을 꼽으라면 6월과 10월이다. 6월에는 매실주와 복분자주를 빚고, 10월에는 포도주를 빚는다. 과수농업이 활발해지면서 벌어진 일인데, 가양주가 금지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추수한 쌀로 11월께에 술을 많이 빚었다.

6월이 다가오니, 6월의 술을 거론해보자. 6월은 밭작물을 수확하고 파종을 끝낸 시기로 이를 자축하는 단오축제가 있다. 단오에는 창포뿌리를 짓찧어 즙을 내어 찹쌀, 누룩과 섞어 빚은 창포주를 마셨다고 한다. 강릉단오, 법성포단오, 자인단오가 명맥을 이어오고 있지만 창포주가 제 위상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거대한 매실주 탱크에 매실이 가득 담겨있다. 매실주는 6월을 대표하는 술이다.
6월을 대표하는 술은 아무래도 매실주다. 매실은 매화의 열매로, 6월 초순에서 중순 무렵에 수확한다. 술을 담그기 좋은 것은 단단하고 덜 익은 청매다. 수확한 청매를 잘 씻어서 상처 없는 것만을 선별한다. 집에서 담글 때는 30% 희석식 소주, 40%짜리 증류식 소주를 사용하는데 술과 매실을 2대 1의 비율로 담근다. 알코올 도수가 높을수록 매실 성분을 빨리 우려내는데, 우려내는 속도가 술맛을 꼭 좋게 하는 것은 아니다. 매실주를 담는 양조장에서는 알코올 도수 95%짜리 주정을 알코올 50~45%로 희석하여 매실을 담가둔다.

매실을 소주 속에 오래 담가둔다고 해서 좋은 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략 100일이 지나면 매실을 빼내야 한다. 매실 씨앗 속에 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고로 과육의 즙이 추출되고 효소의 작용이 활발해지기 시작하면 매실을 꺼내야 한다. 그 적당한 시기가 매실을 소주 안에 넣은 지 100일 무렵이다. 매실이 분리된 매실주는 바로 먹을 수도 있지만, 좀더 부드러운 맛과 향을 즐기려면 밀봉한 상태로 숙성해야 한다. 그래서 3년 숙성 매실주, 5년 숙성 매실주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사이 시중에서 판매되는 매실주들은 소주에 매실을 침출한 순수한 매실주가 아니다. 초록병에 담긴 보해의 매취순, 진로의 매화수, 롯데주류의 설중매, 무학의 매실마을 등의 성분 표시를 보면 매실원액 80%(또는 50%)에 과실주원주 함량 20%라고 적혀있다. 여기에서 과실주원주 20%는 포도로 빚은 와인을 의미한다. 즉 시중에서 팔리는 대부분의 매실주는 순수한 매실 침출주가 아니라 매실포도주인 셈이다. 매실포도주는 와인 20%에 매실침출주 80%를 칵테일해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당연히 매실침출주와 매실포도주의 맛은 차이가 있다. 매실포도주에서는 매실향이 잘 나지 않고-이는 매실향 첨가로 얼마든지 숨길 수 있다-매실에서 침출된 구연산 성분에 의한 새콤하고 깔끔한 맛도 무뎌져 있다. 매실포도주는 맛이 부드럽긴 하지만 밋밋한 편이다.

여기서 매실포도주가 매실침출주보다 나쁘다거나 못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찰밥과 조밥, 복숭아와 사과를 비교하는 것처럼 서로 다름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와인의 원주가 20%나 들어 있어 와인에 접을 붙인 매실포도주를 그냥 매실주라고 팔고 있다는 점이다. 10년 전만 해도 매실포도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매실주는 죄다 주정에다 매실을 침출시킨 순수한 매실침출주였다. 그런데 왜 매실주는 순수함을 지키지 못하고, 와인과 야합하게 되었을까? 모두 돈 때문이고 법 때문이다. 매실침출주보다 매실포도주의 세금이 싸다. 좀더 싼 매실주를 내놓으려다보니 순수 매실주가 매실주 시장에서 밀려난 것이다. 근년에 개정된 주세법 시행령에 의해 과실원액 사용 비율이 20%가 넘으면 과실주로 분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매실포도주는 과실주로 주세율이 30%다. 그런데 매실침출주는 과실주가 아니라 리큐르로 분류되어 주세율이 72%다. 세금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각기 주세율의 30%가 교육세로 추가되고, 제품원가와 주세와 교육세를 합한 비용의 10%가 부가가치세로 책정된다. 이렇게 되다보니 과일주인 매실포도주의 세금은 원가의 50%에 머물고, 리큐르인 매실침출주의 세금은 원가의 100%를 웃돌게 된다. 술맛이 더 좋아서가 아니라 세법과 가격경쟁력 때문에 매실주의 새콤하고 날카로운 맛이 매실주 시장에서 주도권을 잃어버린 것이다. 술은 소비자의 입맛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 법을 따라가고 소비자의 지갑을 따라간다.

향기로운 술, 이강주
우리 술의 약점 하나를 꼽으라면, 향기로운 술이 드물다는 점이다. 위스키나 브랜디의 강렬한 오크향, 오래 묵힌 와인의 그윽한 향, 일본 청주의 과일향 따위와 견줄 만한 향을 우리 술에서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술에서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코 없는 미인을 보는 것과 같다.

배꽃. 배는 전통 소주와 궁합이 잘 맞는 재료다. 이강주에도 들어가지만 다른 소주와도 쉽게 결합해 술맛을 부드럽게 한다.
우리 술에서 향기가 부족해서일까. 우리들은 대부분 술 향을 음미할 겨를 없이 술을 한입에 털어넣기 바쁘다. 잔질한 술을 코끝에서 한참을 맴돌리다가 입술로 가져가는 여유는 기대하기 어렵다. 입속에 들어간 술이라 하더라도 삼키기 아까워, 다시 길게 콧김을 내뿜어서 술 향을 음미하는 운치도 없다. 느긋하게 마실 수 있는 기품 있고 향기로운 술이 있다면, 술을 마시는 속도도 아주 느려질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 조상들이 향기로운 술을 즐기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전통술 중에서 향을 가장 배려한 술을 꼽자면 이강주가 있다. 홍석모가 1849년에 지은 <동국세시기>에는 “평안도 지방에서 쳐주는 술로는 감홍로와 벽향주가 있고, 황해도 지방에서는 이강고, 호남지방에서는 죽력고와 계당주, 충청도 지방에는 노산춘 등을 각각 가장 좋은 술로 여기며 이것 역시 선물용으로 서울로 올라온다”고 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이강고가 이강주다. 고(膏)자는 고아내려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강주는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전승되어 오던 술로 현재는 전주에서 조정형씨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빚고 있다. 또한 한국을 대표하는 4대 소주(안동소주, 진도홍주, 문배주, 이강주)로 꼽히는 술이다.

이강주는 술 이름에서부터 그 재료를 밝히고 있다. 배 리(梨)와 생강 강(薑), 즉 배와 생강이 들어간 술이다. 꼭 이강주가 아니더라도 우리 술에서 배와 생강은 아주 자유롭게 쓰였다. 배는 시원하고 부드럽고 달콤하여 술과 자유로이 섞이는데 배즙, 배 곤 물, 배과육 등의 형태로 술을 부드럽고 경쾌하게 만든다. 생강은 막힌 혈을 뚫어주는 기질이 있어, 소주의 독하고 강렬한 기운과 잘 어울린다. 이 때문에 소주를 내릴 때에 소줏고리의 꼭지에 생강 한 톨을 끼워 넣어, 생강의 은은한 향을 소주 속에 담아내기도 한다.

이강주에는 배와 생강 말고도 울금, 계피, 꿀이 들어간다. 울금과 계피 또한 맛과 향이 강렬한 약재다. 울금은 카레의 원료로 생김새는 생강과 흡사하다. 울금은 습관성이 없는 신경 안정제로 쓰이기도 하는데, 음양의 성질을 모두 지니고 있어 높은 혈압을 내려주고 낮은 혈압을 올려주는 기능을 한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궁궐에서 직접 사람을 파견하여 재배 관리토록 할 만큼 귀하게 여겼던 약재이자 염료였다. 현재 울금 농사는 10여년 전에 진도에서 시작되어 재배 지역을 제법 넓힌 상태다. 이 여파로 전라도 지역에서는 노란 울금 막걸리가 상품화되어 인기를 얻고 있다. 계피는 활달한 향 때문에 수정과에 넣어먹는 약재로 그 향이 익히 알려져 있다.

이강주를 빚으려면 우선 멥쌀과 보리쌀과 누룩과 물을 섞어 발효주를 만든다. 발효된 술을 이즈음에는 신식 증류기로 증류하지만, 예전에는 소줏고리에 넣어 증류하였다. 배와 생강은 즙을 내고, 울금과 계피는 소주에 넣고 끓여서 침출시켜 넣고, 꿀은 그대로 넣는다. 이강주는 아주 옅은 노란색을 띤다. 흰 창호지가 빛바랜 것처럼 고풍스러운 느낌을 준다. 이강주 한 잔을 입에 머금으면 은단이라도 한 알 넣은 듯 화한 기운이 입안에 가득 퍼진다. 배의 시원함과 생강의 싸함, 계피의 활달함이 어우러진 맛이다. 그 상쾌함에 입안에서 뱃속까지 큰 길이 뚫린 듯하다.

향기로운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이강주처럼 향이 좋은 재료를 집결시켜 만드는 것이 그 하나다. 이강주에 보리가 들어가는 것 또한 향을 배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쌀밥보다 보리밥이 향이 강하듯이, 쌀술보다 보리술이 향이 더 강하다. 그러나 향이 좋은 재료를 쓰더라도, 그 향을 제대로 잡기가 어렵다는 데에 술빚기의 어려움이 있다. 향수 재료로 써도 좋을 더덕향은 휘발성이 너무 강해, 술을 빚고 나면 날아가고 없다. 누룩과 효모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좋은 술 향을 이끌어낼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일본 청주는 누룩에서 맛을, 효모에서 향을 이끌어낸다고 말한다. 우리 누룩과 효모는 술을 빚는 속도와 안정성만을 배려한 경우가 많다. 새로운 누룩과 효모를 이용해서 향기 나는 술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들렸으면 좋겠다.

술을 숙성시키는 기간에 따라 술 향은 달라진다. 증류주의 경우는 숙성 기간이 길수록 술 향과 맛이 부드러워진다. 우리 증류주들은 대개가 스스로 지키겠다고 공언하는 숙성기간이 없다. 이강주 또한 숙성기간이 길어진다면 지금보다도 더 부드럽고 향기로운 술이 될 것이다.

서울의 술, 삼해주
지인으로부터 삼해주(三亥酒) 한 병을 선물받았다. 서울 사람은 많지만 서울 토박이를 만나기 어려운 것처럼, 서울에 술이 넘쳐나지만 서울 술인 삼해주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귀한 술인 줄 알기에 기쁜 마음에 건네받았다.

삼해주 기능보유자 권희자씨가 가루 낸 쌀을 둥글게 뭉쳐서 끓는 물에 익혀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 그 삼해주를 마시면서 글을 쓰고 있다. 술을 마시면서 글을 쓰는 것이란, 높은 산에 올라 한 잔 마시는 것만큼이나 흐뭇한 일이다. 옛사람들이 시회(詩會)에서 술을 마시면서 시를 주고 받았던 게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삼해주의 빛깔은 투명한 노란색인데, 사선으로 비껴드는 여린 아침 햇살을 보는 것 같다. 술 위로 누룩내가 둥둥둥 떠있는데, 그 향이 사람을 밀어낼 만큼 역하지 않고, 사람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깊은 술잔에 삼해주를 담아 향을 맡고 있자니, 어둠 속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신비로운 기분에 휩싸인다. 분명 보일 듯 잡힐 듯한데, 눈 앞에서 반짝이다가 고소한 향이 순간 사라진다. 이런 표현이 가능할까 싶지만, 그 향이 ‘귀엽다’. 맛은 순하다. 혀를 간질이는 톡 쏘는 느낌이 있고, 쓴맛이 돌며 약간 신맛도 스치는데, 대체로 술맛이 깔끔하고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선물은 본디 음식을 주고받는 데서 나왔다. 선(膳)은 반찬을 뜻한다. 조선시대 흉년이 들었을 때 임금이 내렸던 조처 중에 감선(減膳)이라는 게 있다. 감선은 반찬을 줄인다는 의미다. 중국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요즘 인기있는 요리 분야가 약선(藥膳)이다. 약선은 몸에 좋은 반찬이라는 뜻이다. 제사를 지내고 제사 음식을 나눠 갖는 것이 대표적인 선물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본디 선물의 주인공은 음식이었다.

그런데 이즈음에 음식을 선물하기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자칫 입맛 까다로운 사람에게 음식을 선물했다간 낭패 보기 쉽다. 선물을 받은 처지에서 “난 요즘 그런 것 안 먹어, 내 입맛에 맞지 않아” 이렇게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도, 입맛에 맞지 않으면 버릴 수도 없고 남 줄 수도 없는 골칫거리가 되고 만다. 그래서 음식을 선물로 주는 사이란 서로의 마음과 입맛을 아는 아주 가까운 사이라야 한다.

그런데 술에서는 달라진다. 술은 음식이지만 선물하기 편하다. 설령 상대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선물할 수 있다. 그 술을 혼자 골방에서 마시지 않기 때문이다. 술은 또 다른 누구에게 건넬 수 있고, 주변에 술 좋아하는 지인들과 나눠마실 수도 있다.

삼해주는 서울 사람들이 즐겨마시고, 선물했던 서울의 술이다. 그렇다면 삼해주를 어디서 구해서 선물할 수 있느냐고? 그러기 어렵다는 게 안타까운 일이다. 서울시에서 지정한 무형문화재 술로 삼해주 약주는 권희자, 삼해주 소주는 이동복, 송절주는 이성자, 향온주는 박현숙씨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상품화되지 못하거나, 준비 단계에 있어서 아직은 맛볼 수가 없다.

삼해주의 역사는 깊다.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가 1168년 쓴 <동국이상국집>에도 등장한다. 조선시대 문헌인 <음식디미방> <산림경제> <동국세시기> 등에도 등장한다. 20세기 초까지 술도가가 밀집해 있던 한강가 마포나루 부근의 공덕동과 아현동에서 많이 빚어지던 술이 삼해주였다. 삼해주는 십이간지의 마지막인 해일(亥日)에 빚는데, 세 번의 해일에 나눠 담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해주 약주는 음력 정월 첫 해일에 담기 시작하여, 음력 2월 첫 해일에 덧술을 하고, 음력 3월 첫 해일에 재덧술을 한다. 술은 다시 한 달쯤 지나야 익으니 음력 4월이 되어야 술을 거르게 된다. 양력으로 5월이 되어야 삼해주 약주의 제 맛을 즐길 수가 있다.

삼해소주는 조금 다르다. 삼해소주는 정월 해일에 담기 시작하는데, 12일 간격으로 해일에 3번에 걸쳐 빚기 때문에 한 달 정도면 발효주를 얻을 수 있고, 이를 증류하여 소주를 얻는다. 삼해소주는 우물가의 버들가지에 새 순이 돋을 무렵 마신다 하여, 버들가지 꽃을 뜻하는 유서주(柳絮酒)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한국 술 중에서 고급 술은 원료를 세 번에 나눠 담그는 특징이 있는데, 삼해주는 그 특징을 잘 간직한 술이다. 서울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서울을 대신할 수 있는 선물로 삼해주가 부활하기를 기대해본다.

쌀복분자주를 기다리며
6월은 복분자 수확철이다. 올해는 냉해가 심해 복분자 작황이 좋지 못하다고 한다. 게다가 복분자의 가장 큰 가공 상품인 복분자주의 매출도 신통치 않아 복분자 수매도 활기를 띠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동의보감>에서는 복분자에 대해 “맛이 달고 시며 독이 없다. 간과 기를 보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검붉게 익은 복분자는 따자마자 물러지기 때문에 빨리 처리해야 한다. 지금이야 냉동창고가 있어 오래 두고 팔 수 있지만 예전에는 그럴 수 없었다. 복분자는 열매가 작고 과즙도 적기 때문에 생과로 먹기가 곤란해 설탕에 재어 ‘엑기스’로 만들든지, 소주를 부어 술로 저장해두었다. 그래도 엑기스보다는 술을 찾는 사람이 많아, 복분자를 많이 재배하는 전북 고창의 농가에서는 내남없이 복분자주를 담아두었다. 현재 시판 중인 복분자주의 원조는 바로 그 고창 농가에 두루 퍼져 있던 소주 복분자주다.

고창 선운사 주변에서 풍천장어와 함께 농가의 복분자주가 인기를 얻자 1995년 무렵부터 복분자주 제조장이 고창 지역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그러다가 차츰 복분자 재배 면적이 넓어지면서 복분자주 시장도 커지고, 급기야는 소주회사인 보해가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어 국순당 명작복분자, 배상면주가 복분자음, 롯데 복분자주 구십구, 진로 동의보감 복분자주도 줄줄이 출시되어 복분자주가 주류의 한 장르로 자리잡게 되었다.

복분자주가 단기간에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술의 이름에 얽힌 스토리텔링 덕분이다. 복분자(覆盆子)는 한자로 엎을 복(覆)에 동이 분(盆)을 쓰는데, 복분자를 먹고 나면 오줌 줄기가 세져 요강을 뒤집어엎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노부부가 복분자를 먹고 늦둥이를 보았고, 병약한 아들이 복분자를 먹고 요강을 뒤집어엎기도 했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넉 잔 이상 복분자주를 마시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복분자주는 비아그라식의 말초적인 술은 아니다. 뿌리가 깊고, 저력이 있다. <동의보감>에서 복분자는 나무딸기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성질이 평하고 맛이 달고 시며 독이 없다. 남자의 경우 신정(腎精)이 고갈된 것과 여자의 경우 자식이 없는 것을 치료한다. 간을 보해서 눈을 밝게 하고, 기를 보하여 몸을 가볍게 하며, 머리가 희어지지 않게 한다”고 약효를 설명하고 있다.

복분자주는 와인에 견줄 수 있는 훌륭한 한국 과일주가 될 수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렇지만 복분자주가 정통 와인을 곧장 따라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복분자는 과즙이 적고, 당도가 낮고, 가격이 비싸서 포도처럼 헐하게 재료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분자주는 쌀과 결합하는 것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막걸리학교에서 인기 있는 강의 중의 하나가 복분자 막걸리 빚기 체험이다. 몸에 좋고, 술맛도 좋고, 술의 실패율도 낮다고 얘기하면 누구든지 솔깃해한다. 이때 복분자 막걸리는 시중의 복분자주와 사뭇 다르다. 막걸리학교에서 빚는 복분자 막걸리는 복분자와 고두밥과 누룩이 함께 들어가서 발효가 이뤄지는 쌀복분자주다.

시중에 팔리고 있는 복분자 막걸리는 막걸리 제조 허가 규정에 따라, 발효된 막걸리에 알코올 1% 이하의 과즙 복분자만 넣을 수 있어 복분자와 막걸리가 잘 어우러지지 못하는 단점을 안고 있다.

이 쌀복분자주는 탁하게 거르면 복분자 막걸리가 되고, 맑게 거르면 와인과 다를 바 없는 쌀복분자주가 -물론 이것도 탁하니 막걸리라 부를 수 있다- 된다. 주세법에 따르면 이 술은 막걸리가 아니라 기타주류에 속한다. 정확한 제 영토가 없는 기타 술이라는 뜻이다. 쌀복분자주는 현재 시중에서 유통되는 소주와 결합한 복분자주보다 맛이 순하고 목넘김이 좋다. 복분자도 더 많이 넣을 수 있어서 복분자의 효능을 제대로 실어낼 수 있다. 이 방식에 근접한 술로 전북 남원에서 제조되고 있는 복분자주 주몽이 있다.

쌀복분자주를 쉽게 상품화시키지 못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소비자들이 싼 술만 찾으려든다고 예단해 양조업자들이 싼 술만 만드는 경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좋은 재료로 몸에 좋은 술을 만들었다고 잘 알리고 믿음을 줄 수 있다면 탁주의 형태든 과일주의 형태든 쌀복분자주는 시장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제주 올레길의 술
제주 올레길을 다시 걸었다. 올레길의 표정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바닷가를 따라 길만 열려 있었는데, 이제는 군데군데 문화공간과 전통음료가 눈에 띄었다. 15번 올레길이 끝나는 고내포구에는 무인카페가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카페에는 음악이 무심하게 흐르고 있었고, 창에는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이 담긴 메모지들이 아우성치듯 붙어 있었다. 안식년을 맞아 제주에 머물고 있는 친구는 6번 올레길에서 쉰다리를 맛보았다고 했다. 쉰다리는 쉰밥에 보리누룩을 섞어 발효시키는 제주의 토속 발효음료다. 쉰다리야말로 올레길에 아주 어울리는 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쉰다리 한 잔에 지친 다리를 쉬자!”는 문구를 내걸어도 좋을 테니 말이다.

제주 시장에서 파는 제주 누룩. 육지 누룩과 달리 자그마한 게 특징이다.
제주는 술이 센 동네다. 물이 좋으니, 술이 좋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주는 술을 관광자원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지나치게 외래의 술에 압도되어 자신들의 술을 내세울 줄 모른다. 쉰다리처럼 올레길과 연계시킬 술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제주를 대표하는 술은 오메기술로, 제주 술의 바탕이 된다. 제주 소주인 고소리나, 제주의 마테우리들이 마셨다는 강술이나, 제주 사람들이 보양음료로 마시는 오합주도 모두 오메기술에서 시작된다. 오메기술은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는 좁쌀 오메기떡을 익힌 뒤에, 중국식 호떡 크기만한 보리누룩을 섞어 빚는다.

앞서 소개한 쉰다리는 제주를 대표하는 여름술이다. 밥이 잘 쉬는 여름철에 쉰밥을 버리기가 아까워 보리누룩과 물을 섞어 발효시켰다. 밥이 많이 쉬면 물에 헹구고 나서 빚기도 했다. 곡식을 아끼기 위한 제주인의 지혜가 쉰다리를 낳은 것이다.

내가 하루 머물렀던 애월읍의 로그캐빈 사장도 그날 저녁 친구들과 제주에서 쉰다리를 마시고 왔다고 말하는 걸 보면, 그래도 제주에서는 가장 쉽게 맛볼 수 있는 술로 여겨진다. 모슬포 장에서 만난 누룩 파는 삼촌(제주에서는 나이든 이웃 어른들을 남녀 가리지 않고 삼촌이라고 부른다)에게선 쉰다리 빚는 법을 들을 수 있었다. 요즘에는 쉰밥으로 빚지 않는데, 여름에 잘 쉬는 보리밥에 밥물하듯이 물을 붓고 제주 누룩을 밥의 절반 정도 넣어 빚는다고 했다. 때로 알뜰한 사람들은 물 부은 밥에 누룩이 풀어지지 않을 만큼만 담아놓았다가 술을 빚는다고 했다. 이때 건져낸 누룩은 말렸다가 다시 사용한다는 것이다.

제주 올레길에 걸맞은 술로 강술이 있다. 물론 나는 강술의 명성만을 듣고 있을 뿐이다. 강술은 물을 타서 마시는 야외 휴대용 술이다. 강술은 차좁쌀과 보리누룩으로 빚는 오메기술과 흡사한데, 물을 거의 넣지 않고 빚어 발효가 끝나더라도 죽처럼 되직하고,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고 단맛이 돈다. 이렇게 유추하는 것은 경상도 안동에 이와 비슷한 진사가루술이 있기 때문이다. 진사가루술은 오메기떡과 흡사한 구멍떡을 만들어 물을 따로 넣지 않고 빚는다. 진사가루술은 조선시대 과거 보러 가거나 멀리 땔나무 하러 갈 때 휴대하던 술인데, 강술은 목장이나 먼 길 갈 때 휴대하던 술이라고 한다. 강술은 되직하기 때문에 제주 민가에서 흔히 심는 넓은 양하잎에 싸서 가져가기도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제주 올레길에 어울리는 술로는 깅이술이 있다. ‘깅이’는 게를 지칭하는 제주방언이다. 게를 잡아 통째로 짓찧어서 나오는 즙으로 만든 죽이 깅이죽이다. 깅이죽은 요즘도 제주 해녀식당에서 종종 맛볼 수 있는 음식이다. 그러니까 깅이술은 게를 넣어서 빚는 희한한 술이다. 게를 한 되쯤 잡아 찬물에 담가 해감을 한 뒤에, 소주에 넣어 일주일쯤 지난 뒤 마신다. 이때 제주의 전통소주인 고소리술을 사용한다. 게를 너무 많이 넣거나 도수 낮은 술을 쓰면 썩어 술을 망칠 우려가 있다. 제주의 애월읍 유수암리에서 만난 부녀회장은 오래 전에 깅이술을 보았다고 했다. 그이는 깅이술을 마시면 신통하게 아픈 관절이 낫는다고 했다. 그건 또 왜 그럴까 싶어 물어보았더니, 게가 다리가 많고 관절을 유연하게 움직여 이동하기 때문에 그런가보다고 했다. 다분히 주술적인 해석이다. 하지만 다리를 쉴 때 쉰다리를 마신다고 해석하는 것만큼이나 재미있는 해석이다. 그래서 깅이술이 올레길과 어울리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술은 본디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니까.

‘명품쌀’ 막걸리를 아시나요
김포금쌀 막걸리를 아십니까? 임금님표 이천쌀 막걸리를 아십니까? 이제 막걸리의 원료로 지역 명품쌀이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8월부터는 막걸리에도 ‘농수산물의 원산지 표시에 관한 법률’이 적용되어, 막걸리 원료 명칭에 국내산으로 표시하거나 해당 도 또는 시·군·자치구의 명칭을 표시하도록 의무화하였습니다. 술은 음식이기에 그 재료의 원산지를 밝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의무화하기 이전에, 원산지 표시를 마케팅 전략으로 삼아 양조장에서 경쟁적으로 뽐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 아쉽지요.

100% 김포금쌀로 빚어서 유난히 흰빛이 도는 술덧.
우리는 사실 재료를 따져보면서 술을 마시는 문화가 부재합니다. 그냥 어느 음식점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마실 술이 결정되고 맙니다. 소주라 하더라도 서울에서는 참이슬 아니면 처음처럼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술마저도 선택권이 없는데, 재료에까지 눈돌릴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제부터라도 재료를 따져봅시다. 좋은 술의 첫번째 조건은 재료이니까요. 소주부터 볼까요? 2009년 소주의 총소비량은 30억8000만병이었고, 성인 1인당 소주 97.3병을 마셨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소주를 소비하는데 소주를 무엇으로 만드는지 아는 사람은 지극히 드뭅니다. 우리가 본 적도 없는 원료로 만드니 답할 길이 없는 것이죠. 소주는 세상에서 가장 싼 전분, 아열대 지방의 타피오카를 주원료로 삼고 있습니다. 타피오카보다 더 싼 전분-창고에 묵혀둔 오래된 외국산 쌀이나 옥수수 가루-이 주어진다면, 소주는 그 원료와 손을 잡을 것입니다. 이를 두고 주류제조업자들을 탓할 일은 못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싼 술을 제공하기 위한 양조업자들의 고육책과 세상에서 가장 싼 술만 찾으려 하는 소비자들의 심리가 결탁한 결과이니까요. 소주와 맥주와 막걸리는 똑같이 한 병에 1000원대입니다. 저렴한 술을 만들려면, 술병과 재료와 인건비에서 피나는 원가절감을 해야 합니다. 인건비를 절감하기 위해 수제품을 만들기보다는 공장에서 단추 찍어내듯이 대량 생산해야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습니다.

막걸리 바람이 불면서, 소주회사와 식음료유통회사들이 막걸리 시장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지금 막걸리는 기계가 생산하는 공산품이냐, 사람이 빚는 수제품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값싼 술만 찾는다면, 공산품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술맛을 따지고, 건강을 따지고, 우리의 토양과 햇살을 따진다면, 가장 귀한 곡물로 빚은 술을 찾아야 합니다. 가난한 시절에 양곡이 부족할 때에는 감히 할 수 없는 상상이지만, 쌀이 넘쳐나고 지역쌀의 가치를 높여야 하는 시대에는, 먹기도 아까운 좋은 쌀로 막걸리를 빚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막걸리를 우리 쌀로 빚어야 한다는 얘기는, 민족주의자라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쌀의 품질로 보면 캘리포니아쌀이나, 후쿠오카 양조미가 더 좋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쌀을 수입해다가 술을 빚으면 그해 한 해는 술을 잘 빚을 수 있지만, 이듬해 개선하고 발전시킬 수는 없습니다. 술의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쌀의 품종을 개선하고 쌀을 좀 더 정성껏 재배해야 하는데, 외국산 쌀에는 그런 정성을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원료를 지배하지 않고서는 좋은 술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 쌀로 빚어야 우리 막걸리와 우리 술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김포금쌀은 한강하구의 기름진 김포평야에서 나는 추청미와 고시히카리쌀로 구성된 명품쌀입니다. 임금님표 이천쌀, 강화도쌀과 더불어 가장 비싸게 팔리는 쌀입니다. 김포금쌀 100%로 막걸리를 빚는 김포금쌀탁주 대표 권이준씨에게 물어보니, 동네사람들은 술값이 비싸다고 망설이고, 대형유통마트에서는 까다로운 절차를 내세워 술을 받아주길 꺼린다고 합니다. 술값은 기존의 외국산 쌀로 빚은 막걸리보다 600원 정도 비싼 1900원입니다. 임금님표 이천쌀 막걸리는 유통회사 세븐일레븐과 손잡고 1800원에 팔리고 있습니다. 오륙백원 비싸지만 비싸야 할 이유가 분명한 술들입니다.소비자나 생산자나 막걸리의 가격을 견주지 말고, 품질을 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술은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명품쌀로 된 신선하고 감칠맛 나는 막걸리가 지역마다 생겨나기를 희망합니다. 절친한 친구에게, 연로한 부모께 권할 만한 귀한 술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폭탄주의 원조 ‘과하주’
과하주(過夏酒)라는 멋진 술이 있다. 그 뜻을 풀면 여름을 나는 술이라는 뜻이다. 우리 조상들은 여름을 나기 위해 과하주를 준비했고, 과하주로 더위를 식혔다.

과하주의 계보를 잇는 전통술 강하주를 빚고 있는 도화자씨. 과하주는 약주와 소주를 혼합해 만든 격조 있는 폭탄주다.
여름술, 그렇지만 잊혀진 술인 과하주의 처지에서 보자면 지금의 상황이 참 억울하고 비통할 것이다. 과하주는 우리 술의 구성으로 볼 때 탁주, 약주(청주), 소주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대중적인 술이던 시절이 있었다. 1909년 2월8일 주세법이 법률 제3호로 공포될 때 증류주와 구분되는 양성주(釀成酒) 속에 청주, 약주, 백주, 탁주, 과하주, 기타 양조제성한 주류가 포함되어 있었다. 49년 10월 공포된 법령에는 과하주가 양조주(양성주)가 아닌 재제주(再製酒)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57년 2월 대통령령 제1246호에 의해 과하주 항목이 삭제되어 버렸다. 과하주가 법령 밖으로 나동그라지니, 물론 과하주 제조장이 줄어들면서 취해진 조처였겠지만, 과하주는 세인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았다.

이런 내력 때문에 과하주의 계보를 잇고 있는 전통주들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김천 과하주, 전주에서 김남옥씨가 장군주라는 이름으로 빚었던 술, 보성에서 도화자씨가 빚고 있는 강하주, 최남선이 <조선상식문답>에서 맛이 좋았다고 언급한 경성 과하주들이 그런 예다.

알기 쉽게 말하면, 과하주는 약주와 소주를 혼합한 술이다. 발효주와 증류주를 혼합한 술이니, 폭탄주의 원조인 셈이다. 발효주와 증류주를 섞는 문화가 왜 생겨났을까? 폭탄주의 출현과는 전혀 다른 이유를 지니고 있다. 여름이면 술이 쉽게 상한다. 약주는 여름이면 더워서 빚기 어렵고, 보관하기도 어렵다.

지금이야 냉장시설이 있어서 온도 관리가 쉽지만, 60년대만 해도 약주는 더워지면 빚기 어려웠다. 따라서 양조장들이 아예 술을 빚지 않거나, 겨울에 빚어놓은 제품만을 판매할 정도였다. 여름에도 변질되지 않는 술이 필요했는데, 이 술이 과하주였다. 알코올 도수 25%가 넘으면 미생물이 살 수 없기 때문에, 과하주는 소주와 약주를 섞어 소주만큼 도수를 올리고 맛은 약주에서 취했다. 하지만 과하주는 폭탄주처럼 즉석에서 술을 섞지는 않는다.

과하주를 제조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첫번째는 잘 발효된 약주(청주)와 증류한 소주를 섞어 일정 기간 숙성시키는 방법이다. 두번째는 맑은 술을 걸러낸 뒤 술지게미에 소주를 부어 숙성시킨 뒤 걸러내는 방법이다. 세번째는 고두밥과 누룩을 섞어 발효시킬 때 소주를 부어 발효와 숙성을 함께 시키는 방법이다.

경북 문화재로 지정된 김천 과하주는 좀더 독특한 내력을 지니고 있다. 김천시 남산동, 시내를 내려다보는 남산 정상 부근의 주택가에 오래된 우물 과하천(過夏泉)이 있다. 이 우물은 경북 무형문화재 제2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물을 둘러싸고 있는 담벽에는 “金陵酒泉”(금릉주천)이라 새겨진 바위가 있다. 1882년 새겨진 것으로, 이 무렵까지 김천이 금릉이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이곳을 지나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 우물물을 맛보고 중국 금릉의 과하천 물맛과 같다고 칭송한 뒤 과하천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과하천 물로 빚어 유명해진 술이 김천 과하주다. 여름을 나는 술과 다른 유래를 지니고 있지만 김천 과하주는 약주와 소주를 섞어 만든다. 술을 다 빚은 뒤 그냥 걸러낸 술은 약주 과하주라 부르고, 남은 지게미에 소주를 부어 재차 걸러낸 술은 과하주라 부른다. 약주 과하주는 알코올 16%, 소주가 들어간 과하주는 알코올 23%이다.

과하주를 잘 만들려면 약주도 빚고 소주도 내려야 하기 때문에, 과하주 하나를 잘 연마하면 우리 술의 특징을 잘 간파할 수 있다. 잘 익은 과하주는 노르스름한 빛깔을 띠고 은은한 향을 풍겨 약주를 닮았다. 첫맛은 소주처럼 날카로우며 기운차고, 뒷맛은 약주처럼 둥글고 부드럽다. 약주이면서 소주이고, 소주이면서 약주인 과하주야말로 격조 있는 폭탄주인 셈이다.
전주의 술 축제장 순례

전주는 음식으로 유명하지만, 막걸리로도 유명하다. 지난 주말에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음식관광축제(10월21~27일)에 다녀왔다. 경기장 야외잔디밭에 큰 천막을 치고 한식문화관, 국제발효식품관, 국내마케팅관, 옥토버막걸리페스트관을 포함한 다양한 체험공간이 마련되었다. 이벤트와 박람회 성격이 강한 행사로 비즈니스 모델을 찾는 이들에게도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한국관광음식 축제장에서 99명이 함께 양조미로 막걸리를 빚고 있다.
이 중 올해 처음 개설된 공간은 옥토버막걸리페스트관이었다. 막걸리가 인기를 끌면서 생겨난 행사장이다. 그곳에서 우리-막걸리학교 동문 80명-는 ‘양조미로 막걸리빚기 행사’를 진행했다. 김제 지평선 들판에서 갓 수확한 양조미로 고두밥을 쪄서, 전통 밀누룩과 물을 섞어 술을 빚었다. 양조미는 알이 통통하여, 밥알이 깊이 씹히는 느낌이 들었다. 술을 빚고 나니 통통한 쌀알이 물을 흠씬 빨아들여 술통 안에 물기가 없을 정도였다. 막걸리관에서 동시에 99명이 술빚기에 참여했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같은 시각 전주한옥마을의 전주전통술박물관에서는 전주전통주대향연(10월22~23일)이 열리고 있었다. 올해로 두번째 맞는 술 잘 빚는 국선생 선발대회도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전주의 한정식, 비빔밥, 해장국 속에 전주의 술이 목청을 높이는 광경이었다.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리는 행사와 달리, 전주한옥마을의 기와집과 흙담장과 골목에서 열리는 행사는 훨씬 따뜻했다. 축제와 관광이 한몸이 되었으니, 축제가 지나가더라도 축제의 추억은 공간과 함께 남아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한옥마을에서의 술 축제는 훨씬 더 무게감이 있었다.

하루 일정으로 전주를 찾은 우리 일행은 전주 막걸리 명성의 진원지인 막걸리 골목을 여행하기로 했다. 전주 막걸리는 전주시 삼천동, 서신동, 경원동, 평화동, 효자동에 분포해 있는 막걸리집 때문에 얻은 명성이다. 이 막걸리집들은 막걸리 한 주전자(2ℓ 분량)를 시키면 한 상 가득 안주가 따라나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막걸리집이 가장 많이 밀집한 삼천동을 찾아가니, 축제 분위기를 북돋우기 위해 손수레에 술항아리를 싣고 움직이는 ‘막걸리 퍼포먼스단’과 기념 현수막이 보였다. 우리는 소문난 용주점으로 50명 넘게 들어가려고 했으나 보기좋게 퇴짜를 맞았다. 모두 48석인데, 단골들 받아야 하기 때문에 모두를 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0명씩 나뉘어 막걸리집을 찾아들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스마트폰으로도 금세 검색된 ㅅ주점으로 한 팀, 가게아주머니가 추천한 ㄷ주점으로 한 팀, 규모가 작아 손님 대접받을 만한 ㅈ주점으로 한 팀, 그리고 한 팀은 전주 지인이 직접 안내한 ㅊ주점으로 들어갔다.

우리들의 목표는 4인 기준으로 나오는 막걸리 상을 세 주전자 곧 세 상까지 주문하는 것이었다. 한 주전자를 추가할 때마다 나오는 안주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 현란한 안주들을 맛보면서 막걸리를 즐기기 위함이었다. 이름난 ㅅ주점으로 들어간 팀들은 첫번째 상차림에 감탄했으나,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식구 많은 부잣집의 천덕꾸러기 막내 신세가 되어갔다. 마트아주머니가 소개한 ㄷ주점으로 갔던 팀은 첫번째 상에서 생태찌개가 중심 요리로 나왔지만 그 맛이 만족스럽지 못해 근처의 ㅇ주점으로 옮겨야 했다. ㅇ주점에서는 생선구이와 전요리가 더해지면서 그 만족도가 높았다. ㅈ주점은 첫번째 나온 안주가 두번째 상에서도 겹쳐나오면서 기대를 저버렸다.

가장 만족도가 높았던 집은 전주 지인이 소개한 ㅊ주점이었다. 전주 지인이 앞장을 섰던 것이 가장 큰 힘이었다. 단골이 손님을 몰고 온 것이니, 단골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모는 전주 막걸리집을 이용하는 요령도 알려주었다. 전주 막걸리집은 안주가 매력적이니, 처음부터 4인 한 상 차림으로 4만8000원을 내고-이곳은 1주전자에 1만2000원이고, 4차까지 안주가 바뀌는 구조다-안주를 내달라고 하면 주모가 시원하게 내준다고 했다. 더덕과 산낙지에 간장게장 비빔밥까지 나올 무렵에 ㅊ주점에서는 주모와 우리 일행이 목청껏 건배를 하고 있었다. 전주 술축제 순례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은 막걸리로 달아오른 열기로 후끈하여 에어컨을 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