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민성이의 그림은 생명이 되고, 우주가 되고…
김광화 농부 flowingsky@naver.com
3 아기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오는 모습. 이런 그림들이 그림책으로 나와, 세계인이 함께 보면 얼마나 좋을까.
2005년 4월부터 ‘신동아’에 ‘몸 공부, 마음 이야기’를 쓰기 시작해 모두 17회를 썼다. 내 몸과 마음이 달라지면서 겪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길게도 풀어놓았다. 그러다보니 내 가슴에 담아두었던 말을 웬만큼 풀어낼 수 있었다. 이는 나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는 힘이 닿는 한 이웃 이야기를 담고 싶다. 그동안은 나 자신을 바로 세우기에 바빠, 이웃을 제대로 돌아볼 틈이 없었다. 이제 귀농해 삶도 자리가 잡혔는지, 뿌리를 깊이 내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필요하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라 어울려 살아간다고들 한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부쩍 실감이 난다. 그동안 독불장군처럼 세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 잘난 맛에 살아온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는 걸 보면서 부모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자주 느낀다. 아이들은 부모를 넘어 이웃과 이 세상에서 많은 자양분을 얻으려고 한다.
마운틴고릴라의 봄
숲이 아름다운 건 나무마다 자기 빛깔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도 아름다운 사회로 가자면 사람마다 자기 고유한 빛깔이 드러나야 할 것 같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아름다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나 자칫 좁은 울타리에서 사람 관계에 치이고 상처를 받다보면 사람마다 가진 고유한 지혜를 놓치기 쉽다. 이는 한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에너지 낭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람마다 가진 고유한 에너지를 살리자면 ‘사람 공부’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를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살려보고 싶은 뜻에서 ‘자기 빛깔로 아름다운 사람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첫 번째 이야기를 민성이네로 시작한다.
이웃 아이 민성(10)이가 그림전을 연단다. 그 소식에 우리 아이가 전시회를 여는 것처럼 설렌다. 나는 민성이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곁에서 이따금 보기는 했지만 그동안 모은 그림으로 전시회를 연다니 선뜻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집 가까이 어딘가에서 전시회를 조그맣게 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저 멀리 밀양에 있는 갤러리 ‘리사’에서 연다 한다. 밀양이 조금 멀기는 하지만 우리 식구를 끌고 그림을 보러갔다.
전시장에서 민성이네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아빠 공영석(47), 엄마 서원정(37), 민성, 그리고 동생 태현(2)이가 손님맞이에 분주하다. 이야기는 천천히 나누기로 하고 그림을 둘러본다. 3년 여 동안 그린 100여 점의 그림이 벽면을 가득 채웠다. 들꽃그림에서 줄거리가 있는 그림까지. 아이가 그린 그림이니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 역시 그림을 즐겁게 본다.
연작 그림 가운데 ‘마운틴고릴라의 봄’이라는 그림이 있다. 민성이 엄마는 둘째 태현이를 집에서 낳았다. 산파도 부르지 않고 남편과 민성이의 도움을 받으며. 민성이네는 태어날 아이 맞을 준비를 차근차근 했고, 민성이는 그런 엄마 아빠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림을 그려 나갔다. 태현이가 지금 두 살이니 민성이가 여덟 살부터 아홉 살 때까지 그린 그림이다. 그림마다 제목을 달지 않았지만 아래 글로서 그림 전체를 안내하고 있다.
〈 마운틴고릴라의 봄 〉 엄마가 동생 태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동생이 태어날 때까지 함께 경험하고 이야기 나눈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동생을 기다리며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동안 그림은 한두 장씩 늘어났고, 어느새 방안의 벽면은 태현이 이야기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하여 삼월의 마지막 날, 태현이와 우리는 만날 수 있었습니다. 태현이가 태어난 다음날 아침, 집 앞에 심어둔 산수유 꽃이 활짝 핀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따스한 봄볕이 노오란 산수유 꽃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
마운틴고릴라의 연작 그림이 벽에 걸려 있다. 마운틴고릴라는 자연의 야성을 되찾으려는 인간을 표현한 것이다. 산의 정기를 받아 스스로 아이를 낳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는 뜻에서. 엄마가 동생을 가진 걸 가족뿐만이 아니라 둘레에 새와 나무와 개와 토끼 그 모두가 기뻐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고, 숲 속을 고요히 산책하는 엄마 그림이 있다. 엄마가 밥을 맛나게 먹는 모습은 밥상 전체가 엄마 배가 된 광경으로 그리고 있다. 아기옷 빨래를 아빠와 민성이 둘이서 다정하게 빨랫줄에 너는 모습도 있다.
여러 그림 가운데 내게 가장 인상이 깊은 것은 민성이가 뱃속 아기랑 입맞춤하는 장면. 아기는 어두운 곳에 웅크린 게 아니라 엄마 뱃속에서 편안하고 자유롭게 자라는 모습이다. 뱃속에서도 세상 밖에 소리를 다 들을 수 있고, 민성이가 입맞춤하자니까 동생도 기꺼이 입을 맞춘다. 동생이 태어나기도 전에 동생과 즐겁게 소통하는 민성이가 부럽기도 하다.
사실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도 좋지만 집에서 아이를 낳은 엄마 얘기도 궁금하다. 두려움은 없었을까. 어떤 준비를 했을까. 출산 자체는 아무래도 엄마가 중심이지만 아버지는 어떤 일을 했을까. 임신에서 출산까지 이들이 겪은 소중한 체험을 듣고 싶다. 영석씨가 먼저 말문을 연다.
“저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경험을 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사람이 성장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현대인은 이를 전문가에게 맡겨버림으로써 스스로 성장할 기회를 놓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곧이어 원정씨가 말을 받는다.
“저는 두려움이 없었어요. 긴장도 안 했고. 통증만 있었지, 안 죽을 줄 알았고(웃음), 자신이 있었어요.”
“두 사람 이야기 들어보니 영석씨가 두려움이 더 컸네요.”
“그렇지요. 원정씨는 자기 몸을 자기가 알잖아요. 나는 모르고. 실제 상황이 왔을 때는 두려움이 없어지는 건데. 보통 오기 전에 온갖 걸 다 상상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 과정을 의식적으로 경험한 거지요.”
이야기가 무르익어가면서 영석씨와 원정씨는 서로 생각을 자연스럽게 주고받는다. 두 사람 이야기에 차이가 있다면 뼈대를 잡아주는 건 주로 영석씨고, 이야기에 살을 붙이는 건 원정씨다. 이야기를 하다 서로 필요하다 싶은 부분은 스스럼없이 끼어들어 내용을 채운다. 그러니까 이번 인터뷰는 사실 부부 가운데 누가 한 말인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아기 낳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어디서 왔을까. 역시 영석씨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희망이 있는 고통
“나는 학습된 거라 생각해요. 자연 속에서 살던 원주민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다고 생각해요. 늘 죽음에 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웃음).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요. 우리는 문명 자체가 그런 위기에서 다 보호해주잖아요. 겹겹이 안전장치를 마련해주었잖아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실제 그런 상황을 맞게 되면 어찌할 바를 모른다고 봐요.”
원정씨가 말을 이어받았다.
“분명한 것은 긴장하면 통증은 몇 배로 커진다는 거예요. 민성이 낳을 때는 20대였는데 그때는 몸이 정말 좋았어요. 임신한 몸으로도 산에 가서 도토리를 엄청 주어오고. 얼마든지 애를 쉽게 놓을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태현이 낳을 때는 그 사이 8년이 지났으니 몸이 그때와 달랐어요. 그런데 통증은 그때보다 훨씬 덜했어요. 민성이 때는 병원에서 자연분만을 했는데 분위기가 영 아니었어요. 긴장이 많이 되었어요. 이번에는 집에서 낳으니까 내 몸을 잘 관찰할 수 있었고, 통증이 오고 나가고를 계속 관찰했어요. 그런데 그게 통증만은 아닌 거라는 걸 알았지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한 원정씨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출산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고통은 일반적인 고통과 차이가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이건 시간이 지나면 끝나는 아픔, 얼마 있으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아픔이지요. 견딜 수 있는 힘도 거기서 나온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통증 뒤에는 아이가 나온다는 기쁨이 있잖아요. 설렘, 기다림, 희망 그런 것들이 섞여 있기에 아픔만 있는 고통은 아니라는 거지요. 그리고 순간순간 아픔이 밀려오는구나, 사라지는구나 느끼게 돼요. 바스락거리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반응할 정도로 온몸의 신경이 예민해지는 거지요.”
그러자 영석씨가 이렇게 얘기했다.
“아, 맞아요! 아기를 받을 때 내 모든 감각도 열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엄청난 집중력이 생기고 예민해지는 거지요. 마치 시간이 정지된 느낌을 주는. 모든 감각이 한 곳으로 집중되기 때문에 시간, 공간이 다 없어지는 거지요. 달리 말하면 저절로 명상 상태가 된다고 할까. 아기 낳기는 비파사나(Vipassan·직관명상법)도 되고 뭐든 다 된다고 생각해요. 아바타(avatar)도 되고. 신념이 경험을 만든다고 할까. 처음부터 자연분만을 계획하고 준비한다면 마음이 건강한 쪽으로 나아가고 몸도 저절로 건강해지리라 봐요. 우리 경험을 세상 사람과 나누고 싶어요. 특히 남자들이 이런 걸 알면 좋겠다 싶어요.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이런 걸 알고 어른이 되면 아이 낳는 마음가짐이 다르겠지요.”
“그런 점에서 민성이네 경험은 소중하다고 보는데, 말이 나온 김에 그 경험을 좀더 들려주신다면?”
“그건 뿅 가는 거야!”
“남자는 아기 낳는 게 자기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기에 간접 경험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지만 아기 낳기 전부터 공부하고 또 임신기간이 10개월이나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아기 낳기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관찰하고 부부가 서로 대화를 나눈다면 간접 경험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믿어요. 저는 부부가 이처럼 한몸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거든요. 더 나아가서 온 가족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거지요.”
이때 원정씨가 토를 단다.
“당신 이야기, 너무 거창하다(웃음). ‘하나’ 어쩌고 하는 말이.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말로 하려니까 자랑하는 것 같아 쑥스럽기도 하고(웃음).”
“원정씨가 남자들을 잘 모르는 거라 봐요. 나는 영석씨한테 별로 부러운 게 없는데 이 부분은 두 번 세 번 들어도 부러워요(웃음). 나는 그런 경험이 없기에. 이 집뿐만 아니라 이웃들이 집에서 아기 낳고 또 남편이 아기를 받는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 설레기도 하거든요. 탯줄을 남자가 끊었다는 건 한마디로 ‘뿅’ 가는 거야(웃음). 집집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금씩 다르잖아요. 원정씨는 지구 중력을 빌려, 보다 자연스럽게 아이를 낳았다 했는데 이런 경험이 잘 드러나고 또 모아져서 그 지평이 넓어지면 좋겠어요.”
“출산이라는 게 사실 성스러운 일이라는 거를 사람들한테 이야기해보고 싶데요. 이번 전시회에서 보니까 아기를 낳은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먼저 관심을 보여요. 오는 엄마마다 아이들에게 신나게 그림 이야기를 하데요. 사람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첫 단추가 애 낳는 거잖아요. 여기서 잘하면 그 다음 단계의 교육도 자연스럽게 되리라고 봐요.”
전시회가 끝나고 다시 날을 잡아, 경남 산청에 사는 민성이네를 찾았다. 민성이네 집은 영석씨가 3년 걸려 손수 지었다. 따끈따끈한 구들방 아랫목에 둘러앉아 전시회 뒷이야기, 농사 이야기, 겨울 준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아이들 교육 이야기로 모아졌다.
민성이는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초등학교를 열흘 정도 다닌 게 전부다. 민성이가 어떻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까. 물론 부모 영향이 크다. 공영석, 서원정씨는 미술을 전공한 부부다. 이들이 부산을 떠나온 지는 10여 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에요. 그림 자체를 교육의 방법으로 여기는 거지요. 그림을 통해서 아이랑 이야기도 나누고, 자연을 알게 하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거지요.”
이들 부부는 민성이 그림에서 자신들이 갖지 못한 생명력을 느꼈다 한다. 그렇다면 생명력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한 달 전기료 1200원
“자기가 가진 고유한 자연 에너지라고 봐요. ‘잘 그려야겠다’는, 그런 마음이 없는 상태로 그리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묻어나는 거 아닐까 싶네요. ‘생명력’이라고 하면 말로 하기 이전에 느끼는 게 있잖아요. 우리는 생명력을 표현하려고 하는 데도 잘 안 되는데 아이는 그걸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 같아요.”
자신이 가진 고유한 생명력이 드러날 때 그 힘은 둘레에 다른 사람에게도 큰 힘이 될 것이다. 생명력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보니 어느새 날이 저문다. 영석씨는 군불도 지펴야 하고, 원정씨는 밥상을 차리려고 일어선다. 잠자리를 따뜻이 하고, 밥을 먹는 것이야말로 생명력의 가장 기본일 테다.
민성이네는 자급자족 농사를 지으며, 하루 두 끼를 먹는다. 아침 겸 점심은 10시쯤. 저녁은 오후 다섯 시쯤인데 저녁으로 민성이네가 손수 농사지은 쌀밥에다가 시금치무침, 배추쌈, 콩장, 감자전이 나왔다. 안주인의 정갈한 솜씨로 작은 상에 안온하게 차려진 밥상, 잘 먹었다.
작은아이 태현이는 내게 관심이 많다. 나 또한 이 아이에게 관심이 있다. 그래서인지 태현이는 자기가 가지고 놀던 놀잇감을 하나 둘 내게 가져다준다. 장난감 자동차, 필통, 연필….
아이가 내게 건네준 것 가운데 전기요금 고지서도 있다. 언뜻 보니 눈에 확 띄는 게 있다. 지난달 전기요금이 2200원이다. 그 전달은 1200원. 우리 집은 텔레비전이 없는데도 전기요금이 1만원가량이다. 이쯤이면 민성이네 생활 씀씀이를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삶은 여유롭고 생동감이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아이들 교육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 같다. 민성이는 그림뿐 아니라 글쓰기에도 적극적이다. 보통 아이들은 글을 숙제로 마지못해 쓰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민성이가 글을 쓰는 이유가 궁금하다. 아니, 쓰고 싶은 이유라고 해야겠다. 민성이가 곁에서 듣고 있다가 나선다.
“처음에는 어른들이 글을 썼는데 나중에는 옆 마을에 사는 누나도 같이 하데요. 어른들이 그 누나 보고 잘 썼다 하니까, (저는) 화가 날 정도예요(웃음).”
이곳에선 이웃 몇 가정이 모여 한 달에 두어 번 문예모임을 한다. 재미있는 건 어른 아이 모두 함께한다는 점이다. 누구든 글을 쓰고, 또 이를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한다고 한다.
“민성이가 샘이 많아요. 그 누나는 민성이보다 나이도 많고 글도 잘 쓰니까 마을 문예 모임에서 관심이 집중되잖아요. 저절로 아이한테 자극이 되나봐요. 처음에는 어른들한테 자극을 받아 아이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아이들 글을 보면서 어른들이 자극을 받아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금방 실력이 느는 것 같아요.”
“아빠 없으면 글이 안 되겠네”
다음 글은 민성이가 문예 모임에서 발표한 ‘아빠 이야기’라는 글이다.
〈 아빠 이야기 〉 나는 우리 가족 중에서 제일 늦게 양치를 하는 아이였다. 그날 밤, 태현이를 재우기 위해 엄마 아빠가 먼저 양치를 하고 방에 들어갔다. 아빠가 들어가면서 나에게 말했다. “불 다 끄고 들어오인나(들어오너라).” 나는 양치를 다 하고 들어갔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뛰어 들어갔다. 그때 아빠가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뛰면 구들 꺼진다! 한번만 더 그래봐라!” 갑작스럽게 아빠가 화를 내서 평상시 습관대로 아빠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며 울었다. 다시 돌아누워 아빠의 얼굴을 보며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로 말했다. “아빠, 고마워. 글 쓸 소재를 제공해줘서.” 이렇게 해서 아빠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며칠 전 아침에 갓과 배추를 막장에 찍어 먹었다. 내가 말했다. “이거 갓이야, 배추야?” 아빠가 고함을 지르며 말했다. “니 산골에 살면서 어떻게 갓과 배추를 구별 못하노! 니 지인짜 문제네. 배추는 두껍고 갓은 얇다 아이가.” 근데 며칠 전 엄마가 갓을 씻으려고 차곡차곡 포개어 물에 담궈놨는데 저녁밥을 하려고 하니 갓이 안 보여 아빠에게 “혹시 당신 수돗가에 있는 갓 못 봤어요?”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아빠가 화를 벌컥 냈다. “그기(그게) 갓이었나? 나는 배추껍데긴 줄 알고 버렸다. 담가놨으면 말을 해야지, 와 말을 안 했노? 당신 잘못이다.” 오늘 아침 나는 아빠에게 이 글을 보여 주었다. 아빠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빠 없으면 글이 안 되겠네.” |
짧은 글 한 편이 많은 걸 보여준다. 내가 평소에 알던 영석씨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사실 웬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그 가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시시콜콜 알기는 어렵다. 게다가 개인의 치부(恥部)를 드러내는 거라면 숨기고 싶을 게다. 그런데도 영석씨는 아이가 쓴 글을 모아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보여준 것이다. 나 자신도 글을 자주 쓰는 편이지만 아이가 이 정도 글을 쓴다는 건 놀랍다. 글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다는데 표현과 기교를 떠나 솔직하면서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적절하게 대화를 끌어와 현장감도 있다. 아이가 글을 쓰게 된 과정이 궁금했다.
성장의 출발
“사실 처음에는 글쓰기 자체가 어려웠어요. 민성이는 글쓰기를 자주 안 했으니 말하기와 글쓰기에 차이가 커요. 사고의 속도와 글 쓰는 속도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글을 쓰면서는 사고가 잘 이어지지 않는 거지요. 그래서 일단 민성이가 이야기를 먼저 하고 내가 이를 받아 적는 식으로 했지요. 이렇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니까 그게 오히려 좋은 점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다가 문예모임을 통해 글이 활자화되니까 아이들이 많이 달라지데요. 이제는 서로 먼저 발표하려 해요(웃음).”
원정씨도 이야기를 보탠다.
“전에는 이런 표현을 하면 아빠가 화를 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민성이에게 있었어요. 지금은 당당해져서 그런 게 없어요. 글쓰기가 그런 효과를 낼지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린아이가 지적하니까 어른이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내가 남편 잘못을 지적하면 ‘내만 그러나? 당신은 안 그러나?’(웃음) 결국 묵은 이야기까지 나와서 부부 싸움이 되기 쉬운데(웃음). 이렇게 아이가 명료하게 지적하니까 반성을 안할 수 없지요.”
영석씨 또한 원정씨 이야기에 공감하며 한술 더 뜬다.
“아이가 내 잘못을 지적했지만 사실 뿌듯하지요(웃음). 이 이야기는 내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요(웃음). 그런 걸 계기로 아이도 잘되고 나도 잘되는 점이 있구나. 아이는 글을 써서 좋고 나는 나쁜 점을 고쳐서 좋고. 그 과정에서 아이도 나도 성장하니까. 원정씨가 내게 지적을 해서 고쳤다면 억울한 생각도 들고(웃음). 나중에 복수를 벼르잖아요, 괜히 반찬 투정을 한다든가(웃음).”
보통 교육을 이야기하면서 경쟁, 시험, 성적, 학벌 이런 걸로 재단하기 쉽다. 그러다보면 성장이라는 본래 뜻을 놓치곤 한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점점 더 표정을 잃는다든가 부모와 소통이 어려워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거대 흐름에서 한발 물러나, 교육에 있어 아이의 성장에 무게를 둔다면 큰 뜻이 있지 않을까. 불필요한 에너지를 줄이면서도 충만함과 기쁨으로 나갈 수도 있으리라. 그 과정에서 어른도 성장할 수 있다면 자식 키우는 맛을 단단히 누리는 셈이다. 무엇이 성장을 가로막을까. 또 성장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자급자족하는 예술
“성장의 출발은 자기 단점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않나 싶네요. 얘가 그런 글을 쓰니까.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그 글을 발표하니까. 효과가 당장 나타나는 거지요. 보통 조언을 한다면, 자기와 처지가 비슷하거나 아니면 경험이 많은 사람이 하잖아요? 아이들이 조언해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지요. 민성이 역시 내게 조언한다고 한 거는 아니라고 봐요. 내가 그렇게 해석한다는 거지요.
사실 사람마다 고쳐야 할 점이 많이 있잖아요. 저는 화를 잘 내요. 큰일에는 화를 잘 안 내는데 오히려 사소한 일에 화를 잘 내요. 잔소리도 많이 하는데, 이 두 가지가 나중에 나한테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웃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는 가족 사이 에너지 소비이지요. 에너지가 자꾸 그런 쪽으로 새니까. 문제지요. 그보다는 창조 쪽으로 나아가야하는데….
내 잘못을 아이가 지적해주니까, 전체 가족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거지요. 가족 전체가 성장하지 않으면 개인이 성장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 봐요. 반대로 내가 성장하지 않으면 가족의 성장은 있을 수 없고요. 아이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성장해야 하는 거지요.”
이는 사회 전체에도 해당하지 않을까. 사회가 성장해야 개인도 성장할 수 있고, 개인이 성장할 때 사회도 조금씩이나마 성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사회적 정쟁은 사회적 에너지 낭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어른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민성이는 혼자서 여러 가지를 한다. 그림도 그리고 뜨개질도 한다. 그러다가 자기 이야기가 나오면 슬며시 끼어들기도 한다. 또 책을 읽기도 하고 가끔은 태현이랑 놀기도 한다. 태현이도 저대로 놀다가 엄마에게 달려가 젖을 빤다. 나를 포함해 다섯 사람이 남남이 아닌 식구처럼 한방에 둘러앉아 각자 하고 싶은 걸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젖을 먹고 난 태현이는 또 저대로 논다. 가끔 민성이가 그림 그리는 데 참견도 하고, 내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기도 한다. 한마디로 평화롭다고 해야 할까. 고요하면서 그 어떤 생명력이 넘치는 그런 분위기다.
밤이 늦으니 아이들 눈꺼풀이 조금씩 처진다.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어른들도 이야기를 접고 함께 잠을 잔다. 이튿날은 만남을 정리하는 뜻에서 음악 교육을 포함한 예술 전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 가족의 표현을 빌리면 예술의 자급자족이란다.
“자기 먹을 거를 자기가 농사를 짓듯이 예술 작품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술 작품을 소비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산하는 사람, 달리 말하면 창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특정 분야의 예술가가 되라는 건 아닙니다. 모든 분야를 두루 표현할 줄 아는 전인적인 사람이 되는 게 우리 바람이지요. 이는 예술 이외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삶에서 느끼는 감동이랄까, 그런 게 있다면 하나만 얘기해주세요. 되도록 그림을 그리듯 생생하다면 더 좋은데.”
신성함… 충만함…
“해가 떠오를 때 우리 뒷산 소나무에 먼저 햇살이 닿아요. 천천히 햇살이 아래로 내려오잖아요. 그걸 보면서 생각해요. ‘조금 후에는 내 몸에 햇살이 받겠지.’ 내 몸에 햇살이 조명처럼 천천히 내려오면서 따뜻한 게 몸으로 느껴진단 말이에요. 내 몸이 그렇듯 저 나무나 새들도 그런 느낌을 가지지 않을까. 해가 뜰 때 햇볕을 비춤으로써 사물 하나하나를 생각하게 만들더라고요. 해라는 존재가 사물 하나하나를 다시 느끼게 해준다는 거지요. 그때 우주의 신성함 속에 내가 들어가는 것 같거든요.”
‘우주의 신성함’이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또 다른 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민성이네 집에 이틀을 머물며 나눈 이야기만 해도 매우 많았다. 교육, 성장, 예술, 자급자족, 전인. 사실 그마다 바다가 펼쳐지듯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또한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어떤 충만함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몸을 비추는 햇살조차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요즘 세상은 아이 키우기가 점점 어렵다 한다. 그러다보니 저출산이 사회문제가 되지 않았는가. 출산이 설렘이 되고 축복이 될 수 있으며, 아이 키우는 과정 자체가 그 부모 성장에 밑거름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한 가정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런 힘을 서로 주고받는 날은 정녕 꿈일까.
기면서 맛본 생명체험, ‘사랑밭’을 충만케 하다
‘도시농업’이란 게 있다. 도시와 농업. 사실 이 둘은 선뜻 연결되지 않는다. 농업은 시골에서 이루어지고, 도시는 농산물을 소비하는 곳이라는 생각에 익숙하다. 그런데 도시에서도 ‘농업’을 한다. 그렇다면 이는 주말농장과 어떻게 다르고,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도시농업을 소개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안철환(45). 그는 도시농업의 개척자이자 전도사라 해도 좋을 듯싶다. 도시농업을 사회운동 차원에서 널리 퍼뜨리고 있는 도시농업운동가다. 경기도 안산에서 ‘바람들이 농장’을 운영하며, 전국귀농운동본부 산하의 도시농업위원으로도 활동한다. 몇 년 사이, 그가 도시농업 관련 책을 낸 것만 해도 여러 권이다.
재미로, 보람으로
철환씨는 붙임성이 참 좋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날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몇 해 전, 그가 산골 우리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밭에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마루에 웬 사람이 앉아 있다가 일어선다. 자기 소개를 하더니 다짜고짜 나보고 ‘형님’이라고 한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참 별나다 싶었다. 나는 누구에게 형님 소리를 잘 하지 못한다. 오래도록 몸고생 마음고생을 함께 해 서로 허물이 없어져야 ‘형’ 소리가 나온다. 그런데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환하게 웃으며 나를 형님이라고 하는데야 싫어할 수가 없다. 그러고는 시골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묻다가 뜬금없이,
“형님, 시골 내려온 뒤 부부 관계는 어때요?”
참 당돌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사적인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해 어이가 없었다. 시골은 도시와 달라 부부가 늘 붙어 일하는 구조이기에 귀농한 뒤 부부 관계가 어찌 달라지는지 궁금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런 내밀한 이야기를 하자면 친해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의 스스럼없는 행동은 자주 만나야 친해지는 게 아니라 솔직함으로 다가가면 누구나 쉽게 친해질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었다.
그 후 그를 일년에 한두 번 만났다. 그런데 그의 일과 삶에서 변화가 두드러진다. 사람이 새롭게 달라지는 모습을 본다는 건 참 즐거운 일이다. 그는 여러모로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그는 장애인이다. 소아마비 2급 장애인으로 목발을 짚고 다닌다. 놀랍게도 그 몸으로 농사도 400평가량을 손수 짓는다. 그러면서 도시농업운동과 관련하여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전국을 누비고 다닌다.
그와 만나면 만날수록 할 이야기가 많아진다. 도시농업은 아무래도 규모가 클 수 없다. 작게는 5평, 크다고 해야 1000평을 넘기가 어렵다. 대신에 농업과 관련된 모든 일이 가능한 게 도시농업이다.
우리 식구 또한 기업화한 농사보다는 작은 규모로 자급자족 농사를 짓는다. 되도록 무경운 농법(땅을 갈지 않고 짓는 농사법)을 지향한다. 그래서인지 내게 도시농업은 여러모로 친근하다. 도시농업이 발달하면 시골 농사꾼이 도시에 가서도 자기 전문성을 살리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다. 반대로 도시농부들은 도시 전문성을 살리면서 시골에 자리잡기가 한결 쉬울 것 같다. 도시농업이 발전하면 도시와 농촌을 연결하는 일상적인 고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가능성을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다.
상품은 퇴비 한 포대
그동안 철환씨가 우리 집에 자주 왔지만 이번에는 내가 그를 만나러 바람들이 농장을 찾았다. 그가 관리하는 밭은 1400여 평. 이곳에 회원들을 상대로 도시농부학교를 열었다. 회원은 100여 명. 회사원, 공무원, 교사, 의사, 시민단체 활동가 등 다들 도시에서 전문성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안산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오고, 성남에서도 온단다.
농장을 찾은 날은 추수감사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추수감사제란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고 벌이는 잔치다. 농장까지 가는 길에 도시와 농촌이 번갈아 있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물어물어 찾아간 농장은 겨울이라 그런지 을씨년스러웠다. 거두고 남은 배춧잎이 널려있고, 군데군데 대파만 싱싱하게 서 있다. 농장 입구에 몇 사람이 두부를 만들기 위해 불을 지피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사람들이 모여든다. 어느 정도 모이자 간단히 식을 거행한다. 한 해 동안 열심히 농사지은 사람에게 상을 주는 시상식이다. 상품이 인상적이다. 으뜸상은 텃밭 가꾸기에 대한 책 한 권과 퇴비 한 포대. 그밖의 상으로 김을 매는 호미를 줬다.
식이 끝나고는 음식을 해 먹고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 잔치 음식은 두부다. 이 곳에서 손수 농사지은 콩으로 두부를 만들어 먹는다. 어쩌면 음식을 마련하는 과정 자체가 의식이고 잔치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회원 한 사람이 농사지은 콩이래야 얼마나 되겠나. 기껏 한두 됫박. 그런데 십시일반이라고 한 사람이 콩 한 그릇씩만 내어놓아도 얼마나 푸짐하겠나. 이 날 보니 회원마다 집에서 콩을 갈아왔다. 이를 모아 베보자기에 넣고 짜 찌꺼기를 거른 다음 가마솥에다가 끓인다. 장작불을 지펴가며. 한쪽에서는 콩물을 짜고 남은 비지로 비지찌개를 끓였다. 뜨끈한 찌개를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 각자 싸온 도시락을 먹었다.
끓인 콩물에 간수를 넣으면 순두부가 된다. 순서에 따라 순두부가 되자, 또 순두부를 한 공기 먹었다. 그러고는 두부를 만들기 위해 틀에다 순두부를 붓고 베보자기를 씌운 다음 돌을 얹는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두부가 나온다. 정말 볼품이 없다. 얇고 모양도 들쭉날쭉. 그래도 자신들이 농사지은 콩으로 손수 만든 거라 잘 먹는다. 어떤 분은 두유를 만들었다며 또 한 그릇을 가져왔다.
이제 다 먹었나? 아니다. 이번에는 두부를 얇게 썰어 프라이팬에 부쳐왔다. 들기름을 썼는데 기름을 짠 들깨 역시 이 곳 농장에서 농사지은 거란다. 두부부침, 정말 고소하고 맛있다. 이러다가 과식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콩으로 할 수 있는 요리를 한꺼번에 골고루 해서 먹는 도시농부들. 추운 날씨인데도 번거롭게 두부 만들기를 하는 이유는 그 과정 자체가 재미있어서란다. 톱으로 나무 자르기도 재미요, 장작 패기도 재미다. 군불 지피기도 재미로 한다. 큰 가마솥에 두부가 끓는데 얼추 세 시간이나 걸린다. 그 과정에서 콩물이 눋지 않게 저어주는 고생(?) 역시 두부를 손수 만들어 먹는 보람에 견주면 그리 큰 게 아닌 모양이다. 바람 불고 추워 서글픈 마음이 들 법도 하건만 회원들은 아주 즐겁게 돌아가며 저어준다. 굳이 할 일을 나누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것 같다.
생태도시 아바나
아침 11시부터 두부를 만들기 시작해, 만들어 먹고 나니 오후 4시쯤이다. 음식 만들고 먹는 재미에 추위를 잊은 것 같다. 그러고는 풍물도 치고, 떡과 막걸리도 나누어 마시면서 잔치를 즐긴다. 부모를 따라 온 아이들까지 풍물을 치며 흥을 돋운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다시 철환씨를 만나기로 했다. 그가 장애인이라 아무래도 장소를 정하는 게 쉽지가 않다. 먼저 서울 남부터미널 근처에서 보기로 약속했다. 시간이 되어 그가 운전하는 차가 오자, 일단 차에 탔다.
“어디로 갈까요?”
“나는 아무데고 좋으니 철환씨 좋은 곳으로.”
차를 유턴하더니 ‘만남의 광장’으로 간다. 이곳은 주차하기도 좋고,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되니 좋은가보다. 차에서 내려 몇 걸음만 걸으면 된다. 분위기가 산만하기는 하지만 이야기 나누기에는 무리가 없다.
▼ 도시농업이란 발상이 참 신선한데 어디서 그런 영감을 얻게 되었나요.
“귀농학교 출신 가운데 실제 귀농하는 사람은 20%가 채 안 돼요. 귀농하기 전에 실습할 곳도 마땅치 않고. 그러던 차에 책을 하나 내게 되었지요.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이라고. 그 책이 도시농업의 이론적인 배경이에요. 책을 쓰면서 도시농업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아바나의 도시농업은 생계형이에요. 미국이 취한 경제봉쇄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런데 쿠바와 우리는 다르잖아요. 그럼 우리는 뭐냐? 아직 이거다 싶은 한국식 도시농업에 대해 합의는 못 봤어요. 나는 생태운동으로 보고 싶어요. 운동으로 보는 거지요. 요번에 일본에도 가보고 또 유럽을 다녀온 사람들 얘기도 들어보니 선진국은 레저형이에요. 운동성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도시에 해결할 문제가 참 많잖아요? 먹을거리는 물론 환경, 쓰레기, 실업…. 생태도시로 거듭나는 데 도시농업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리라 믿어요.”
▼ 철환씨가 안산도시 텃밭학교를 연 지 5년째인데, 그동안 달라진 게 있다면 어떤 거죠?
“초기에는 귀농하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5월이나 6월만 되면 다 떠나버려요. 농사 맛을 조금 보니까 열 평, 스무 평 가지고는 성에 안 차는 거라. 그러다보니 가을쯤에는 농장이 텅 비는 거예요(웃음). 이제는 귀농하려는 사람들보다는 도시에서 텃밭을 가꿔보려는 분들이 중심이 됐어요.
십시일농(十市一農)
보통사람들이 느끼기에 귀농이라고 하면, 이건 아주 ‘센 사람’들이 하는 거잖아요? 반면에 농사를 잘 모르는 경우 귀농한 사람은 ‘도시의 패배자’라는 선입관을 갖고 있기도 해요. 그렇지만 우리 회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지요. 그러니까 도시농업은 귀농의 징검다리가 아니라 조금 독자적으로 가야 한다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 ‘생태운동으로서의 도시농업’이란 말이 조금 막연하게 들릴 수도 있어요. 구체적으로 들려준다면?
“다섯 가지 테마를 제안하고 싶어요. 첫째가 내 밥상 자급하기. 물론 100%는 아니에요. 농사를 지어봄으로써 밥상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차츰 밥상 자급도를 높이는 거지요. 우선 가을 김장부터 자급하는 게 목표고. 둘째는 생태적인 시민운동이에요. 내 쓰레기 퇴비화운동. 말하자면 일종의 순환운동이지요. 셋째는 이웃과 더불어 하는 공동체 운동이에요. 보통 주말농장에 가보면 팻말 있고 줄 띄우고, 요건 누구네 밭. 조거는 누구네 밭…. 이런 식으로 금을 긋는데. 나는 이게 마음에 안 들어요. 우리는 그런 구분을 안 하거든요. 그러다 보면 가끔 어떤 회원은 남의 밭을 자기 밭이라고 우겨요. 특히 열심히 안 하는 사람들이 그래요.
열심히 나온 사람일수록 이웃을 잘 알게 되죠. 옆 밭 사람이 바빠서 못 오면 대신 일해주기도 해요. 곡식이 자라면 제때 솎아줘야 하는데 바쁜 이웃을 위해 대신 솎아주는 거야. 그럼, 미처 오지 못한 사람은 남이 솎아줘 좋고, 솎은 사람은 자기가 솎은 걸 가져가서 먹어 좋고.
이렇게 텃밭을 일구다보면 쓰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데…. 쓰레기가 얼마나 문제인지를 알게 되죠, 서로 배려하는 법도 배우게 되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운동이 저절로 되는 것 같아요. 추수감사제도 그렇고 주말에는 원두막에 둘러앉아 술도 한잔씩 나누면서 소통을 하는데, 저는 이를 ‘텃밭 공동체’라고 해요.
넷째는 도농(都農) 공동체 운동을 해보자, 구체적으로는 십시일농(十市一農)이지요. 도시에 사는 열 가구가 농촌 한 가정이랑 결연하는 겁니다. 도시 농부들이 짓지 못하는 농산물은 농촌에서 사 먹고, 시골 농가는 도시 농부에게 씨앗도 나눠주고 퇴비도 주고 다양한 농사체험도 할 수 있게 하자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도시 사람 모두 농부가 되자는 겁니다. 이건 먼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모두 언젠가는 흙에 뿌리내리고 살자는 거죠. 조금 거창한 이야기이지만 도시농업이 발전한다는 건 도시를 생태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 농업을 살릴 길이 되지 않을까요?”
‘근본으로 돌아오는구나’
▼ 꿈이 아주 크네요. 도시농업이 확산될수록 도시 생태가 살아나는 부분은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 농촌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잖아요. 소득도 불안정하지만 수입 농산물 때문에 농사의 근본마저 흔들리는 상황이죠. 그런 마당에 도시 사람들조차 밥상을 자급하겠다면 누가 우리 농산물을 사줄까요.
“가끔 그런 우려를 듣기는 해요. 하지만 이 문제로 우리 회원들과 얘기를 해보면 오히려 그 반대거든요. 텃밭을 가꾸면서 외식이 줄고, 국산 농산물과 유기농산물 소비가 늘었다고들 해요. 실제 농사 지어 먹어보면 다른 걸 다 떠나 맛이 다르잖아요. 사실 텃밭으로 자급해봤자, 그 비중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의 주식은 사 먹어야 할 텐데. 텃밭농사로 농부들의 피와 땀을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 농산물을 더 많이 소비하지 않을까요?”
▼ 철환씨는 도시농업과 관련해서 강의도 자주 다니고 지방도 다니곤 하는데 도시농업이 전국적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큰 그림을 보여줄 수 있나요.
“제일 주목할 만한 데가 YWCA예요. 어떤 점에서는 우리(전국귀농운동본부)가 하는 도시농업운동보다 YWCA가 더 활발해요. 이곳은 나름대로 시스템이 있고 조직력도 있어요. 소비자 환경운동을 주력 사업으로 하는데, 이 가운데도 소비자 텃밭운동이 주된 거예요. 음식물 쓰레기 제로 운동과 연결해서, 집에서는 지렁이화분, 밭에서는 텃밭, 이렇게 음식물 쓰레기를 다 거름으로 만드는 사업을 하고 있어요.
그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단체가 생태유아공동체죠. 어린이집 있잖아요? 우리 애들 급식을 유기농산물로 만들어 먹이자고 시작한 건데 지금은 커졌어요. 수도권에도 있고, 부산에도 있고 광주에도 있나 그래요. 이 운동에 참여한 어린이집이 수도권에만 200여 곳이에요. 그러면서 추진력이 붙는 거예요. 급식만 유기농으로 할 게 아니라 스스로 텃밭을 만들어 자급해보자. 어린이집마다 마당이 있고 텃밭이 있으니까. 도봉동에 있는 어린이집에 가보니까 상추는 완전히 자급해서 먹어요. 그게 모델이 되어 주변으로 번지는 거예요.
지방에선 부산 귀농학교가 잘해요. 거기는 팜(farm)이야. 가든(garden)이 아니고. 뒷간도 있고, 닭장도 있고, 논도 있어요. 회원들의 자발성이 대단해요. 원두막도 벽만 치면 거의 한옥 수준이에요(웃음).
그리고 환경단체들도 차츰 관심을 가져요. 환경운동에서 어떤 한계에 봉착한 게 아닌가 싶어요. 좀더 생활 속에 뿌리내리는 운동을 모색한다고 할까. 전주나 대전에 가보면 그런 게 느껴져요. 이제 근본으로 돌아오는구나 싶어요. 환경운동의 핵심은 흙이 아닌가요? 그런데 이제까지는 농업이니 흙이니 하면 저만큼 밀려났지요. 흙을 살리는 게 환경운동의 중심 테마가 되지 않을까. 도시농업이 환경운동으로서도 큰 뜻이 있지 않을까 싶은 거지요. 전국귀농운동본부 산하에도 여러 군데 도시 텃밭이 있지요. 본부 홈페이지(www.refarm.org)에 들어가면 안산농장뿐 아니라 군포, 벽제 등 여러 곳이 있고 지역마다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비교적 활발한 편이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조직활동 이전에 개인의 자발적인 요구일 거예요. 40대, 50대 사람들이 이 다음에 나이 들면 시골로 내려가고 싶다는 여론 조사 결과도 있잖아요? 그런 게 다 도시농업의 요구라고 할까, 잠재력이라고 봐요. 그 힘이 있기에 도시농업이 활발해질 수밖에 없다고 보거든요. 근데 문제는 상업적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는 거예요.”
‘원예치료’의 가능성
▼ 상업적이라도 흙을 살린다면 뜻이 있지 않을까요.
“넓게 보면 좋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어요. 어떤 곳은 베란다 작물 화분을 세트로 해서 7만원인가 하는 상품으로 내놓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비싸. 그리고 잘 키워야 하는데, 그러자면 공부도 하고 잘 돌봐야 하잖아요. 그런 건 제대로 안 하고, 무턱대고 비료 주고 제초제를 친다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죠.”
▼ 마음만 있지 바쁜 도시인에게는 주말마다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도 주말에 다른 일 제쳐두고 먼 길 달려오는 이유가 뭘까요? ‘재미’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듯한데.
“한마디로 생명체험이 아닐까요? 작물을 통해 생명 체험하기는 참 좋은 것 같아요. 지난 가을에 배추에 진딧물이 많이 끼었잖아요. 열심히 가꾼 배추엔 진딧물이 적었거든. 제대로 돌보지 못한 사람들은 거의 수확이 없는 거야. 이런 결과가 바로바로 눈에 보이니까. 이 과정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지요. 또 원예치료가 될 수도 있죠. 작물의 생육기간이 짧잖아요. 그래서인지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것 같아요.”
▼ 그 이야기를 들으니 한 사람이 떠오르네요. 언젠가 귀농을 준비하는 중학교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분은 학교에서 ‘조직폭력배’ 아이들을 지도한다고 애를 썼나봐. 그런데 잘 안 되었대요. 그러다가 고추 몇십 포기를 그 아이들과 키우기 시작했는데 두 달 만에 아이들이 스스로 조직을 해체했다고 하더라고. 그 선생님이 하는 말. ‘내가 10여 년 공들여도 바뀌지 않던 아이들이 고추 몇 포기로 바뀌었다’….
“원예치료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싶어요. 그런데 원예치료가 좀더 잘되려면 생각을 바꿔야 된다고 봐요. 요즘은 대안학교들도 텃밭 가꾸기를 하잖아요? 지난 여름에 텃밭을 가꾸는 교사들 연수를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교사들이 거의 노예야(웃음). 텃밭농사를 1000평가량 하는데 방학 때면 완전히 밭에 매이는 거예요. 이때는 풀이 왕성하게 자라는데, 아이들은 다 집으로 돌아갔으니…. 밭이 너무 크면 아이들도 고생하지만 선생님이 너무 고생해요. 욕심 내지 말고 규모를 알맞게 하면 훨씬 다양한 내용을 채울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줬어요.
‘경작본능’
텃밭 만들기에 학교 다음으로 좋은 곳은 병원이 아닌가 싶어요. 병원에는 웬만하면 마당이 다 있잖아요. 원예치료를 곡식치료로 바꾸어나가는 거지요. 곡식에도 예쁜 꽃이 얼마나 많아요. 홍화도 예쁘고, 더덕은 꽃도 예쁘지만 덩굴 올라가는 게 참 예쁘잖아요.”
정상적인 사람도 힘들어하는 농사를 철환씨는 목발 짚고 어찌 할까. 그가 던지는 답은 간단하다.
“기면서 하지요.”
그는 목발을 짚지 않으면 쓰러지기에 아예 땅을 기면서 농사일을 한다. 창피함만 이겨내면 할 일이 많은 게 땅이 아닐까 싶다. 사실 땅을 자세히 보면 대부분 생명이 고물고물 기어 다닌다. 지렁이도 땅강아지도 개미도 다 기어 다닌다. 어쩌면 땅에서는 기어 다니는 게 더 생명활동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그가 하는 표현을 빌리면 이게 ‘경작본능’이라 한다.
“지금도 우리 어머니는 텃밭 농사를 짓고 계세요. 형님들도 주말농사를 하거나 농사와 관련한 일을 하고 있고. 가족들이 모여 농사를 짓자고 의기투합한 일이 전혀 없는데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나는 이를 농경민족의 경작본능이라 생각해요. 먹이를 보면 달려드는 맹수의 본능처럼 흙만 보이면 뭔가 심어 키워 먹으려는 생존본능 말이지요.”
▼ 농장을 회원제로 운영하다보면 어려운 점도 있을 텐데요.
“아무래도 사람관계지요. 여러 사람과 함께 하다보면 꼭 앞서 가는 사람이 있잖아요. 일을 조직하면 앞서 가는 사람이 있고, 뒤에 가는 사람이 있는데 뒤에 가는 사람은 소외되거든요. 우리 밭에서 가장 오래된 회원이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 스타일이 말도 별로 없고 남과도 잘 사귀지 않고. 겉으로 보면 ‘가족주의’예요. 그런데 혼자만 하던 그분이 광명에다가 텃밭을 마련했대요. 거기서 사람들과 어울려 도시농업을 해보겠다고. 그 말 들으니 참 좋더라고요. 사람들 변하는 과정이 참 재미있어요. 우선 눈빛이 달라져요. 처음 농장에 오는 분들은 도시 특유의 경계의 눈빛이 있어요. 나를 보는 눈부터 ‘저 자식, 몸이 저래가지고 뭘 할 거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눈빛이 달라지는 거야. 도시 텃밭농사는 ‘사람농사’ 부분이 많은 거지요. 그만큼 섣부르게 조직하면 잘못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 요즘 농촌은 고령화, 기계화하면서 공동체 문화가 점차 사라지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텃밭 공동체란 말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텃밭을 함께 일구며 어울리는 공동체지요. 그러나 텃밭 공동체는 정거장 공동체가 아닐까 싶어요. 여기서는 집단이 주는 강제 규율 같은 건 없어요. 지향하는 바는 있지만 이념의 도그마 같은 건 없으니까, 자유롭지요. 그저 오는 것도 자유, 나가는 것도 자유예요. 공동으로 일할 때도 참여하지 않는 사람한테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으려 해요. 그렇지만 잠시 쉬면서 막걸리 한잔 할 때는 기를 쓰고 같이 먹자고 해요.”
▼ 엄밀히 말하면 막걸리 공동체네.
“하하하….”
사랑방 대신 ‘사랑밭’
그는 구김살이 없다. 남들이 보는 눈과는 달리 본인 스스로 장애인이라는 생각을 별달리 갖지 않는다. 호탕한 웃음과 여유. 사람 좋아하고 자신을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목발을 짚고 전국을 누비고 다닌다.
부부 관계도 좋다. 추수감사제날 오후 늦게 잔치에 온 부인 김영채(43)씨는 그와 떨어지지 않는다. 영채씨는 고등학교 교사로 극히 평범한 ‘보통사람’이다.
“나를 장애인으로 보지 않는 사람이 둘 있어요, 아내와 우리 어머니신데 어머님은 ‘저 자식은 뭐든 할 거야’ 하는 믿음이 강해요. 아내랑은 10년 동안 연애했어요. 아내 집안에서 반대를 하니 그냥 살까 하는데 한 선배가 충고를 하더라고요. 정면으로 나가라. 그래서 작전을 바꿨지요. 장인어른은 도시빈민운동을 하시는데, 그곳에서 나 같은 장애인을 많이 만나거든요. 그런 장애인은 열심히 도와야 한다고 하면서 내 사위는 장애인이면 안 된다는 것은 위선이다 생각하시고 서슴없이 저를 받아들이셨지요. 장모님을 설득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장모님과 아주 친해요.”
▼ 철환씨도 꽤나 바쁘게 살던데,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둡니까. 권력이나 명예, 돈 같은 거 말고 자아실현이라든가 뭐 그런 쪽으로.
“나도 사람이니까 돈 좋아하고 권력도 있으면 좋고 명예도 나쁘지 않잖아요? 내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걸 유독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떤 때는 그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거든요. ‘우리는 하나다’ 뭐 그런 말도 있지만. 어릴 때부터 내 꿈이 사랑방을 갖는 거였어요. 그런데 내가 너무 그런 쪽으로 나가면 아내가 구심력으로 작용해요.
자아실현에 관한 거라면…. 산다는 느낌, 보람, 성취감 이런 거잖아요. 책도 몇 권 내보고, 강의도 나가보지만 그런 일들은 소외감이 뒤따라요. 내가 출판사에 있어 보니까, 책을 내는 희열은 잠깐이고 그 다음부터는 걱정이 돼요. 이게 잘 팔릴까 하는 걱정 말이에요. 강의도 그래요. 사람들이 열심히 들어주고 ‘좋다’ 그러면 좋지만 반대도 있잖아요. 뒷소리 들으면 100% 좋은 건 아니에요.
그런데 밭에서 만나는 사람 관계에서는 성취감이 있잖아요. 주는 기쁨이라고 할까. 공동체란 다른 말로 하면 ‘주는 기쁨’이 되겠네. 주는 데 무슨 소외가 있겠어요. 권력엔 늘 소외가 뒤따르잖아요. 작은 집단 안에서도 암암리에 암투가 있는데 정치는 어떨까 싶기도 하더라고.
그리고 내가 즐기는 일은 아무래도 ‘남 이야기 들어주기’다 싶어요. ‘나를 따르라’고 하기보다 같이 고민하고 들어주고. 나도 젊을 때는 ‘나를 따르라’고 외치곤 했는데 그런 욕구가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지 싶어요.
‘마음의 빈틈’
그런 점에서 밭을 선택하길 잘했다 싶어요. 우리 회원들이 정말 밭을 좋아해요. 그 사람들 이야기가 나는 주인 행세를 안 해서 좋대. 내가 여기서 주인 행세를 하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밭에서 다양성을 보게 되고, 밭이 주는 즐거움과 정이 있다는 게 참 좋아요. 어디 가서도 밭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고, 참 좋아. 나쁜 놈 생각하면 인상이 굳어지잖아요. 추수감사제 이후에도 또 다 같이 모여보자고 하는데 그런 말 들으면 참 좋잖아요. 어릴 때 사랑방 꿈이 실현되고 있는 거지요. 집으로 사람들을 부르면 아내가 불편해하는데 밭에서는 그게 된단 말이에요. 사랑방이 ‘사랑밭’이 된 셈이네요.”
철환씨는 척수성 소아마비다. 뇌성과 달리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게 아니라 전염성 질병이다. 누구는 전염되고 누구는 전염되지 않는다. 병균 자체보다 사람 자신의 면역력과 그를 둘러싼 환경에 따라 좌우되나 보다. 사람 좋아하고, 구김살 없는 그에게 어찌하여 소아마비 균이 들어왔을까.
“이렇게 물어준 사람은 형이 처음이에요”라며 그는 한바탕 호탕하게 웃는다. 지난날을 떠올리는지 한참 만에 입을 뗀다. 가난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돌 무렵 소아마비 균이 철환씨 몸으로 들어왔다. 치료비가 100만원인데 그때 집 한 채가 300만원쯤 했다. 너무 가난해서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았다. 소아마비가 된 아이는 자라면서 엄청 많이 넘어졌다. 열 살 때쯤인가, 한번은 목발 짚고 층계를 오르다 굴렀다. 다른 때와 달리 그때는 몸부림치지 않고 몸 굴러가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었단다.
“내 몸에 균이 들어온 이유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 몸으로 들어오려는 균을 막지 않고 그냥 내버려둔 것 같아. 생명이 흔들리는 느낌이라고 할까. 마음이 흔들리는 느낌. 마음에 빈틈이 생겼을 때에 소아마비 균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내가 계단에서 굴렀을 때 기를 쓰고 일어나고자 했다면 균이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
질병의 뿌리를 거슬러올라가 밝히는 건 쉽지 않다. 어쩌면 무의식의 세계까지 더듬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는 지식도 부족하고,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다. 우리는 헤어지기 위해 다시 차를 타고 남부터미널로 향했다. 차 안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장애인이다 보니 학교 다니면서 받은 아픔이 컸다.
“내가 겪은 학교는 공동체 법칙보다 정글의 법칙이 더 지배하는 곳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중학교 때부터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공부했어요. 학교 선생들이 부잣집 아이들한테 대하는 태도는 충격이었어요. 어릴 때를 돌아보면 세들어 살던 집 주인 아주머니가 참 좋았어요. 자기 아들처럼 나를 돌봐주고 먹을 거 있으면 나누어주고. 지금도 그집 아들에게 ‘야, 철환이 어찌 지내나?’ 하고 묻는대요. 세들어 살았지만 한 가족처럼 지냈어요. 학교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몇몇 선생과 친구들이 마음에 상처를 주잖아요. 이건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화한 거라고 봐요”
삶의 기적
우리는 신호등의 빨간 불이 파란 불로 바뀌는 게 아쉬울 정도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와 헤어져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도시농업에 대해 알수록 그 발전 가능성이 크다는 걸 느낀다. 이제는 도시도 외형이나 편리함 못지않게 질적 성장이나 참살이를 고민하고 있다. 도시는 사람이 많은 만큼 그에 걸맞게 다양한 형태의 농업이 가능하리란 생각도 든다. 꼭 생태운동만이 아닐 것이다.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생계형이나 운동형이 될 수도 있고, 여유 있는 사람들에게는 레저형이 될 수도 있겠다.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에게는 치유형이 되고, 아이들 생태 교육을 원하는 부모들에게는 교육형도 될 수 있지 않나. 생각을 발전시키면 도시 농부들을 교육하는 일도 있을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그런 교육을 담당할 교사들을 지도하는 교육도 가능하다.
철환씨를 보면 자신은 생태운동으로 한다지만 꼭 그것만이 아니다. 도시농업으로 김치를 담그니 생계형이요, 글 쓰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치유형이라 하겠다. 도시농부들을 교육하고 책을 펴내는 일들은 교육형이 되지 않겠나. 이것말고도 갖다 붙이면 말이 되는 것들이 도시농업이다. 땅은 좁지만 그곳에서 펼쳐지는 일들은 무궁무진하리라.
이는 땅이 사람에게 선사하는 ‘삶의 기적’이 아닐까. 도시 아파트 한 귀퉁이에서 피어난 민들레 꽃 한 송이에서 위로를 받기도 하고, 시를 쓰는 마음을 되찾기도 한다. 도시가 아무리 발달해도 그 도시를 끌어안고 지탱하는 근본은 땅일 수밖에 없다.
생명을 보살피고 키우고 싶은 꿈은 누구에게나 있는 욕망이다. 이 꿈을 현실로 바꾸는 일. 그게 일자리가 되고 밥벌이도 되며, 자신이 소망하는 사회운동도 되는 삶. 그 소망들이 도시에 뿌리내릴 때 도시는 생명력이 넘치는 또 다른 문명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더 나아가 도시와 농촌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허물어질, 그런 날을 기대해본다.
‘촌놈’ 얼굴에 깃들인 신비한 웃음… 나도 좀 나눠 갖고 싶다
현대인은 시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몹시 바쁘든가 때로는 할 일이 없어 무료하기도 하다. 실업도 문제지만 바쁜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좀 엉뚱한 질문이지만, 우리는 시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까.
임락경(林洛京·63)씨는 하루 두 시간만 일하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를 만나 삶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보고 느낀 건 미소였다.
미소(微笑)는 한자니까 우리말로 ‘웃음’이 더 어울리지 싶다. 임락경과 첫 만남에서 본 웃음은 ‘촌놈의 웃음’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를 처음 본 건 10여 년 전. 정농회(正農會) 연수회 때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 살아남기 위해 농사를 연구하고 고민하던 때였다. 모두 다 떠나려고 하는 농촌에서 뿌리를 내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니 정농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두루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간 연수회 첫날, 자기소개 시간. 참석한 사람들이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신을 소개하고 농사 경험을 나누는 자리였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장면이 하나 있다. 키도 작고 얼굴도 자그마한 사람이 눈을 껌벅이며 마이크를 잡았다.
“두 시간이면 한 사람이 자기 먹을 거 마련할 수 있어요. 나머지는 봉사하는 삶을 살 수 있어요.”
거침 없이, 망설임 없이
당시 100여 명이나 되는 참석자의 인사말 중 이것이 가장 인상 깊었다. 두 시간만 일하면 자기 한 몸 사는 데 문제가 없다니…. 소개가 끝나자 그에게 다가갔다.
“뭘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러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명함을 한 장 건넨다.
‘촌놈 임락경’
헉, 자기 호를 ‘촌놈’이라고 하다니. 명함을 받고 그를 다시 보니 그는 영락없는 촌놈이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다 헙수룩한 옷차림. 그냥 시골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그러나 그가 던진 한마디는 두고두고 내게 빛이 되었다. 첫 만남이 인상적이다보니 그를 알면 알수록 신비했다. 막힘이 없고, 거침이 없다. 형식과 허울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까발리고, 가난하고 몸이 불편한 이웃에게는 연민과 사랑을 가득 보냈다.
그는 자기 말 그대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강원도 화천에서 농사를 지으며 장애인들과 어울려 살아간다. 그의 식구들이 어울려 사는 집을 일러 ‘시골집’이라 한다. 시골집에는 20명이 살고 있다. 장애인들과 함께 산다고 누구에게 손을 벌리지도 않고 대부분 농사지어 자급한다. 그가 하는 일은 조금 더 많은데, 정농회 회장에 대학 교수이기도 하다. 학벌이라고는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그가 상지대(총장 김성훈) 초빙교수로 유기농업을 가르친다.
“웃기고도 돈 안 받아”
사실 이런 화려한 직책보다 그가 더 열성을 가지고 하는 일이 있다. 사람들 건강을 지켜내는 일이다. 이름하여 ‘임락경의 건강교실’. 두 달에 한 번꼴로 연다. 취재를 위해 그가 여는 건강교실에 참여했다. 강의를 들으며 짬짬이 인터뷰했다. 그는 어떤 질문에도 망설임이 없고 거침이 없다. 말투부터 그렇다. 나를 친동생 대하듯 말을 낮춘다.
▼ 촌놈이라는 호는 낯선데, 그렇게 지은 이유라도 있나요.
“촌놈이니까 촌놈이지, 뭐. 어릴 때부터 촌놈이라는 걸 밝히고 살고 싶었어. 촌놈은 촌놈이지. 명함을 줘보면 그 사람을 알겠더라고. 똑같은 농림부 장관에게 명함을 준 적이 있는데 한 사람은 그것 때문에 무척 친해졌고. 또 한 사람은 ‘왜 하필 촌놈이냐?’고 해. 아니, 자기가 촌놈 때문에 장관 되었으면서 왜 촌놈을 무시하느냐고.”
▼ 두 시간만 일하면 자기 한 몸 사는 데 지장이 없다고 했는데 그 근거를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세요.
“예전에는 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지금 보니 가족까지 가능해. 그러니까 논 두 마지기만 농사짓는다고 생각해보라고. 그 정도면 쌀 여섯 가마니 나오잖아? 일이란 게 모내기할 때만 하루 이틀 걸리지. 나머지는 두 시간이면 충분하지. 김매는 데 아침에 두 시간씩, 사흘이면 다 맬 걸. 그렇게 김매기 서너 번하고. 그 다음은 타작할 때 며칠. 1년을 평균해서 보면 두 시간도 안 걸려. 모내기와 타작할 때를 제외하면 물꼬 좀 봐주고, 논두렁에 풀이나 깎아주면 되잖아. 농사지어보면 알지 않아?”
▼ 장애인을 돌보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까, 같이 사는 거지. 그게 뭐 이유가 있어?”
▼ 그렇게 하기가 쉬운 건 아니잖아요.
“능력껏 하는 거지. 능력이 없으면 못하는 거고.”
말투가 워낙 거침이 없고 답변이 간단하니 그에 대해 따로 자료를 찾아야 했다. 그가 이렇게 살아가는 데는 이현필(1913∼64) 선생의 영향이 컸다. 이현필은 광주 무등산 일대에서 폐병환자와 고아들을 돌보며 살아 ‘맨발의 성자’라고 불렸다.
▼ 장애인과 함께 지낸 지 오래됐죠? 그동안 겪으면서 생각한 것도 많을 텐데….
“탤런트는 바보 흉내내면서 웃겨. 모자란 사람을 흉내내면서 웃기더라고. 그런데 장애인은 흉내 안 내고 웃기더라고. 그러니 날마다 웃어. 탤런트는 웃기면서 돈 버는데, 이 사람들은 웃기고도 돈 안 받아(웃음).”
‘제멋대로 강연’
▼ 그렇게 본다면 장애란 기준도 달라져야 하지 않나요? 장애의 기준을 뭐라고 생각합니까.
“자기가 자기 먹을 거 벌어먹지 못하는 사람은 다 장애인이지.”
이것 또한 대답이 간단하다. 질문을 다시 던져야 또 다른 말이 나온다.
▼ 좀 구체적으로 말해주세요.
“손발 멀쩡해가지고, 도 닦는다고 일도 안 하고, 기도 한다고 앉아 있는 것도 장애지. 장애는 자기 생활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거지. 노력해도 먹고살지 못하면 다 장애지.”
▼ 열심히 일해도 먹고살기 힘들어하면 그것도 장애겠네요.
“장애지.”
▼ 공동체를 추구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저도 공동체 생활을 두 해 정도 해본 적이 있는데 생각처럼 잘 안 되던데요.
“우리나라는 공동체가 안 되게 돼 있어. 왜냐하면 병원비하고 학비하고 노후생활비를 공동체에서 해결하지 못해. 보통 부자가 아니고는 안 돼. 생각을 해봐. ‘자녀 셋 있는 사람과 자녀가 없는 사람이 같이 공동체를 한다. 일을 똑같이 하고 같이 산다.’ 그럼, 자녀 셋 있는 사람은 자녀를 대학까지 보내야 하니까 여기 공동체 전체 생활비에서 삼분의 이는 그 사람 혼자 써버린단 말이지. 그것까지 서로 이해하고 함께 산다고 쳐. 그럼 돈을 다 써버리고 노후에 돈이 없단 말이야. 그럼 몸은 못 움직이고, 돈은 없고. 그럼, 어떡할 거냐? 그런 염려 때문에 공동체가 깨져. 선진국 가운데 공동체가 잘되는 곳은 병원비, 학비, 노후생활비를 정부에서 맡아줘. 그런 곳은 그냥 공동체만 하면 돼.”
▼ 그럼, 시골집 공동체는 어떻게 운영하는 겁니까.
“나는 공동체란 말을 한 번도 쓴 적이 없어. 다른 사람이 괜히 공동체라고 하니까 그렇지.”
▼ 그럼 뭐라고 합니까.
“뭘 뭐라고 해. 그냥 사는 거지.”
▼ 여럿이 어울려 살다보면 식구 관계에서 어려움도 많지 않나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매일 어려운데…. 원체 워낙 어렵게 살아왔으니까, 점점 쉬워지는 거지. 처음에야 먹을 것도 없고 집도 없어 힘들었던 거지. 지금이야 등 따습고 배부르지.”
3박4일 동안 진행된 건강교실. 참석자는 20여 명. 대체의학을 연구하는 학자, 학교 선생, 그리고 암 환자도 있다. 아토피성 피부염을 앓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의 강의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워낙 이야기가 경험적이고 파격적이다보니 어떤 부분에서는 조금 불편하기까지 하다. 좋게 말해 파격이지 ‘제멋대로’란 말이 더 어울리지 싶다. 첫날부터 까놓고 말한다. “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학술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검증할 만한 근거도 없다.”
“몸은 쓰레기통이 아니다”
그러나 강의가 진행되면서 말 한 마디 한 마디보다 그 말이 나오는 삶의 토대를 이해하면 형편이 달라진다. 우선 환자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환하다. 연민과 사랑이 넘친다. 그리고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편안한 자세를 취하게 한다. 벽에 기대거나 눕고 싶으면 누워서도 듣는다. 또 그마저 힘들어 쉬고 싶으면 숙소에서 쉬라고 한다.
나는 강의보다 전체 분위기나 참석한 사람들의 고민에 더 관심이 많다. 여러 사람 앞에서 강의하다보면 긴장하기 쉽고 그러면 목이 마른다. 그런데 그는 그렇지 않나보다. 어떤 주제든 강의를 하는 동안에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다. 긴장은 고사하고 강의하다보면 군침이 돈단다. 그만큼 강의에 확신이 있고, 강의 자체를 기쁘게 한다.
강의 마지막 날 평가회를 할 때 보니 암 환자들 소감이 절실했다. 뒤늦게나마 깨우친 환자들이 한 줄기 희망을 간직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은 기쁨의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아토피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아이 부모는 ‘여기 온 뒤로 아이 증상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아이가 밤에 잠을 잘 잤다’고 했다.
3박4일에 걸쳐 건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촌놈’이 강조한 이야기 중에서 몇 가지만 추려본다. 어찌 보면 상식에 가까운데 그래서 그게 진리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먼저 음식을 달리 대해야 한다. 음식이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몸이 건강하려면 몸에 들어가는 음식이 깨끗해야 한다. 우리 몸이 신성한 것임을 늘 마음에 두어야 한다. 습관으로 마시는 음료수나 심심해서 먹는 과자 또는 밥해 먹기 귀찮아서 먹는 라면 같은 경우는 몸을 쓰레기통으로 여기는 거와 다름이 없다.
흰쌀밥 대신에 현미잡곡밥을 먹자. 땀 흘리며 일하자. 음식 좀 적게 먹자. 제철음식을 먹자. 이를 구체적인 질병과도 관련을 지어 설명한다. 이를테면 당뇨병이라면 무엇이든 즐기는 음식을 한 가지만 끊어보고, 싫어하는 음식을 먹어보란다.
흥부 놀부 이야기에도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놀부는 흰쌀밥에 고기 먹고 땀 흘리지 않아서 성욕도 없고 아들딸도 없지만, 흥부는 잡곡밥에 채소 먹고 땀 흘리니 아들딸이 16명이나 되지 않으냐. 지금은 못 먹어서 생기는 병은 드물다. 오히려 너무 많이 먹고 아무렇게나 먹어서 병이 생긴단다.
그가 살아온 역사는 질병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1960년대는 결핵환자가 많아 광주 무등산 동광원에서 그들과 함께 지냈다. 1970년대는 반민주와 독재라는 ‘사회적 질병’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했다. 1980년대에는 뇌성마비, 정신박약, 관절염 환자가 시골집에 많이 모여 살았고, 1990년대에는 암 환자가, 최근에는 환경 문제로 아토피성 피부염 환자가 늘어난단다.
장애인에게 임상실험?
‘촌놈’은 이런 경험과 생각들을 묶어 ‘돌파리 잔소리’란 책을 펴냈다. 여기서 돌파리는 돌팔이가 아니고 突破理다. 그러니까 이치를 부딪쳐 깨친다거나 그런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언제부터 건강에 확신을 가졌을까.
“누가 물 찾아달라고 해서 가보니까, 집터가 안 좋더라고. 물은 없으면 길어다 먹으면 되지만 집터가 잘못되면 이건 안 되더라고. 그 다음에는 집터를 봐주러 다니다보니 또 다른 환자가 있어. 집터 때문에 병이 생긴 게 아니더라고. 보니까 음식 때문이었어.”
▼ 대체의학 등은 어떻게 공부했습니까.
“나는 공부한 일 없어. 경험이지. 장애인들과 오래 살다보니까 평소에 임상실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거야. 식구들이 많다보니까, 무슨 병이 있으면 뭘 안 먹여보고, 뭘 먹여보면 금방 나타나잖아.”
▼ 임상실험이면 위험하잖아요?
“아니, 음식 좀 먹여보는 게 뭐 위험해! 음식이야, 잘 들으면 약이고 안 들으면 본전이지.”
▼ 강의 때 ‘병이 나서 치료하기보다 병이 나지를 말자’고 하던데, 그게 쉬운 경지가 아니잖아요? 시골집 식구들 경험은 어떤가요.
“여기 가까운 군부대에서 우리 집에 상비약을 갖다준 적이 있어. 우리 식구가 많다고 많이 가져왔지. 해열제, 진통제 이런 걸 잔뜩 갖다줬지. 그러고 나서 아마 7, 8년 됐을 거야. 그동안 한 알도 안 없어졌어. 약병 뚜껑도 안 따고 그대로 있어.”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묵은 게 내려가는 듯 시원하다. 질문할 거리는 잔뜩 있었지만, 워낙 답이 간결하니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이럴 때는 입으로 묻기보다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건강교실이 끝나고 그를 따라 시골집에 갔다. 건강교실에 참석했던 암 환자 한 사람도 동행했다. 생명의 불꽃을 다시 태우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느껴진다. 시골집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화악산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돌과 나무와 흙으로 지은 이층집.
도착하니 간식시간이라고 식당으로 바로 들어갔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고구마를 먹고 있다. 말로만 듣던 몽고증(다운증후군) 환자가 여럿이다.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 겉모습이 조금은 특이하다. 그들은 나를 별로 경계하는 눈빛이 아니다. 걷지도 못하는 중증장애인 한 사람은 벽면에 기대앉아 뭔가를 먹고 있다. 그리고 할머니 몇 분도 눈에 들어온다. 아이도 셋.
행복이란…
내 맞은편에 앉은 석준(39)씨가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대신한다. 간식을 다 먹고 나니 내 둘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서로 사진 찍어달라고 보챈다. 사실 이렇게 취재를 하다보면 사진 촬영이 어려울 때가 많다. 자연스러운 사진이 좋은데 카메라만 들이대면 얼굴이 굳어진다거나 어떤 이들은 사진 찍기를 몹시 꺼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내 카메라가 호강하는 셈이다.
간식을 먹고 있는데 석준씨가 돼지 밥 주러 가는 데 같이 가자 한다. 나로서는 무척 반가운 소리. 석준씨를 따라가니 닭 100여 마리가 있는 닭장 옆에 돼지우리가 있다. 그가 맡은 일은 돼지 다섯 마리 돌보기. 돼지 먹이를 삽으로 퍼주면서, “꿀꿀꿀, 자 먹어라” 한다.
먹이를 주는 모습이 꼭 자기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것 같다.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많은 걸 말해주는 듯하다.
“여기 생활이 좋은가봐요?”
“좋지요. 편해요. 여기서는 누가 뭐라 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이리로 오게 되었어요?”
“정신병이 있었어요. 정신분열. 회사 다니면서 일이 잘 안 되니까 마음이 초조하고. 그러다가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고. 회사 그만두고 세차장에서도 일하고, 노가다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몇 해 전에 이곳으로 왔어요.”
돼지를 돌보는 석준씨 사진을 여러 장 찍었는데 모두 잔잔한 웃음이 흐른다. 그 웃음은 대상에 몰입할 때, 대상과 하나 될 때나 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살아가다가 어떤 대상이 벅찰 때, 그게 일이든 사람이든 누구나 정신이 분열되는 느낌을 갖는다. 반면에 그 대상에 몰입할 때는 행복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 석준씨는 무척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그는 내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농장 구석구석을 구경시켜준다. 내게 말 한 마디를 건넬 때마다 행복한 웃음이 흐른다. 자랑스러움이랄까 뿌듯함이 느껴진다. 시골집에서는 누구나 자기 능력만큼 일한다. 석준씨가 돼지를 돌보고 한 달에 받는 돈은 5만원. 행복이란 돈보다 일에 있음을 석준씨는 그 누구보다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곳에는 석준씨말고도 장애인이나 정신박약아가 여럿 있다. 가족이 버리고 또 나라조차 거두지 못한 사람들. 몽고증인 봉수(37), 원석(36)씨. 이들은 나이는 서른이 넘었지만 정신연령은 보통 서너 살 수준의 아이란다. 그리고 정현(11)이 엄마는 아이 둘을 데리고 여기로 들어왔다. 인천에 살 때 남편과 이혼하고 삶에 지쳐 한 달만 쉬었다가 가겠다고 왔다가 눌러 살고 있다. 여기서 지내자 아이들이 인천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여기가 좋다고 함께 살자고 했단다. 정현이 동생 정환(9)이는 어른을 두려워해 좀체 입을 열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묻자, 입가에 웃음을 머금더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밥주걱이 칼자루
할머니부터 아이들까지 20여 명이 모여 사는 ‘시골집’. 시골집 식구들이 농사짓는 규모는 대략 밭농사 5000∼6000평. 여기서 30여 가지 곡식을 무공해로 기른다. 닭, 돼지, 오리도 길러 가끔 고기를 먹는다.
시골집 식구들이 돈벌이로 주력하는 건 된장과 간장이다. 자신들이 손수 농사지은 콩으로 담근 된장과 간장을 판다(문의 033▼ 441▼ 4298). 시골집에는 메주를 쑤는 큰 가마솥이 여럿이고 된장, 간장을 담아두는 큰 장독 역시 100여 개가 더 된다. 장독 가까이 가자, 메주 냄새가 온몸으로 전해진다.
곧이어 저녁을 먹고, 이층 거실에서 식구 여럿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몇 사람은 TV 연속극을 본다. 식구가 많으니 내가 묻고 싶은 것들이 샘솟듯 다시 솟아난다. 우선 가족부터 그렇다. ‘촌놈’은 자기 자식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입양하여 키운 아이는 여럿이다. 시골집 안살림을 맡고 있는 이애리(48)씨와의 결혼도 그렇다. 아이들을 입양하기 위해 법적인 부부가 되었다. 가족에 대해 궁금하다고 말을 던지니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 날아온다.
“기존 법에다가 자꾸 맞추려고 하지 마. 그거 참 갑갑하더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못 알아듣더라고. ‘여기는 이런 법이 있구나.’ 가족이 없고 부모 형제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데 와서 있는 거에 맞추지 말라고. 나는 우리 식구에게 그래. ‘우리는 부모 없어도 슬프지 말자, 가족 없어도 외롭지 말자.’ 그러니 우리 삶을 가족이라는 틀에다 맞추려고 하지 말라고. 안 맞아.”
▼ 할머니는 몇 분 계시는데 할아버지는 안 보이네요.
“예전에는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들은 못 견디더라고. 할머니들은 아무리 몸이 약해도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건사하는데 할아버지들은 다 해줘야 해. 할머니들은 청소하고, 아이들 깨우고 다 해. 할아버지들은 목욕을 안 해. 아, 더운 물 데워놓아도 안 해. 옷을 갈아입으라고 해도 성질내며 안 갈아입어. 그러니 어떻게 견디냐고? 너무 깔끔하게 하는 것도 문제지만 남한테 냄새나게 하지는 말아달라 이거지. 자기 몸 병나는 거는 자기 아프니까 이해해. 문제는 남에게 피해가 가니까. 그 옆에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뺀질이’ 봉수의 진심
▼ 식구가 많다보면 별별 사연이 많았을 텐데, 애리씨가 이야기를 좀 해주실래요?
“많지요. 공동생활에서는 밥주걱이 칼자루잖아요?(웃음) 한번은 몽고증이 있는 아이인데 말을 잘 안 듣는 거예요. 그래서 ‘말 안 들으면 밥 안 준다’고 했더니 파출소 가서 신고를 한 거야(웃음). 연락 받고 파출소에 가보니까 거기서 커피 얻어먹고 앉아 있더라고(웃음).
또 한번은 메주를 쑤고 있는데 집으로 경찰 백차가 슥 들어오는 거야. (경찰이) 두 명이나 왔더라고요. 무슨 일로 왔느냐니까, 도난 신고가 들어왔다는 거예요. 누가 그랬냐니까, 세상에! ‘석준이 돈을 봉수가 가져갔다’고 석준이가 신고한 거예요. 얼마나 없어졌냐니까. 500원도 가져가고, 300원도 가져갔다는 거예요(웃음). 경찰들도 너무 황당해가지고…그래도 경찰은 신고를 받으면 무조건 현장에 와봐야 하는 가봐요. 와서 보고는 신고한 사람이 약간 정신분열이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 돌아간 적이 있어요.”
▼ 여럿이 어울려 살다보면 그렇게 서로 오해하는 일도 종종 있지 않나요.
“장애인들은 오히려 문제가 안 돼요. 오히려 걔네들이 나름대로 윤활유 노릇을 해요. 사람들의 관계를 부드럽게 해준다든지. 어떤 틈이랄까 여유를 만들어주더라고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잖아요? 말하기 좀 창피한 일이 하나 있는데, 한번은 농사일이 한창 바쁠 때였어요. 농사철에는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밥숟갈 들기도 힘들잖아요? 모든 게 귀찮고. 방청소는 우리가 쓸고, 닦는 거는 애들이 하는데. 봉수가 ‘뺀질이’예요. 자기 몸 보호하는 데는 잔머리를 끝내주게 굴리거든요. 근데 내가 밥을 먹고 마당으로 나오니 봉수가 다리를 탁 꼬고 앉아 이빨을 쑤시는데 얄밉게 보이는 거예요.
‘야 너 방 안 닦고 앉아 있어?’ 그랬더니 닦았다고 막 눈을 부라리는 거예요. 그냥 거기서 끝냈어야 하는데. (이 녀석 말이 거짓인 걸 확인하러) 방으로 들어갔는데, 정말 닦은 거예요. 그러고는 다시 봉수 앞을 지나가야 하는데 정말 쪽팔리는 거예요. 정말 뭐라고 말도 못하고, 그 때는 아무 경황이 없는 거야.
그 다음날 아침에 식당에 밥하러 나왔는데 이 녀석이 그 시간에 빗자루 들고 복도를 어슬렁어슬렁하는 거예요. 거기를 지나가는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봉수가 경쾌하게 ‘잘 잤냐’고 인사하는데, 창피하더라고요. 정말 나 같은 사람이 하나만 더 있으면 공동체 안 돼요(웃음). 잔머리 굴리는 사람이 많아지는 건 안 좋은 징조라 봐요(웃음).”
“아! 새끼손가락 건전지?”
다시 임락경씨에게 물었다.
▼ 집도 손수 지었다면서요.
“새들은 손이 없어 입하고 발만 가지고 집을 짓잖아. 그런데 사람은 손이 있는데 왜 남에게 시켜서 짓나? 동물은 다 자기가 집을 짓지. 물론 뻐꾸기같이 다른 새 둥지에 알을 낳는 놈들도 가끔 있기는 하지만.
황토집이 좋다고 저 멀리 해남에서 가져다 지을 필요는 없어요. 지역에서 맞는 걸로 자재를 조달해야 하는데, 강원도엔 돌이 많기에 처음에는 돌로 계속 짓다가 나중에 나무로 짓게 되었어. 계기는 우리 집에 사람이 하나 왔는데 여기 오기 전에 욕창이 생겨 썩어 죽어가는 사람이었어. 그 사람 냄새가 멀리까지 났었다고. 그런데 나무 밥상을 들여다놓으니까 그 냄새가 안 나더라고. 그 뒤로도 나무를 가까이 하니까 좋더라고. 장애인 찌든 냄새가 안 나. 나무가 정화를 시키더라고.”
▼ 애리씨는 집을 지으면서 나름대로 느낀 거 없어요?
“보통 여자들이 하는 일은 굉장히 소모적이지, 그치요?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그렇잖아요. 빨래하고 밥해대고 설거지하고. 남자들이 왜 그런 역할을 만들었는지 알겠더라고. 남자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일을 하고. 그런 일은 하나만 해놓으면 번듯하게 백년 가고 천년 가고. 저건 누가 지었다고 자랑하고. 남자들이 나빠요(웃음).”
▼ 집을 보니 나무랑 기와로 지어 건축비가 만만치 않게 들었겠어요?
“만만치? ‘만만하게’ 들었어(웃음). 식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식구들이 했지. 미장이라든가 보일러 까는 것도 대부분 식구들이 했지. 그리고 내가 집짓기 좋은 나이였어. 나이가 있으니까 경험도, 인연도 잘 맞은 거지. 집 바닥에 까는 숯도, 지붕에 올리는 흙도 다 인연이 되어 쉽게 구했지. 기와도 그래. 내가 아는 분이 인간문화재 기능 보유자인데. 그때 그분 나이가 칠십이었어. 덕수궁 수리 끝나고 ‘이제 나, 손 놔버린다. 나이 칠십 넘어서 일하냐?’고 손놓아버렸는데. 내가 ‘형님, 마지막으로 우리 집 한번 해주어야지요?’ 그랬더니 두말 않고 ‘어? 해 줘야지.’
덕수궁 일 끝나고 바로 이리로 왔거든. 얼마나 일을 잘하나 몰라. 처마 곡선 잡는데 줄도 안 띄우고 눈짐작으로 하는데 일이 얼마나 빠른지. 기와도 무슨 기와로 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그분이 좋은 기와를 소개해주어 원가로 사고. 기와를 다 이고 나서 ‘얼마 드릴까요?’했더니 ‘에이, 마지막으로 한번 해준건데 뭐. 그냥 술값이나 좀 줘.’ 나이 칠십 된 분이 돈 보고 오겠어? 형님이라고 불렀으니까. 와준 거지.”
집짓기에 대해선 누구나 할 이야기가 많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인 양 영웅담에 가깝다. 촌놈은 학력이라고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그런데도 그이를 천재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모르는 게 없고, 못하는 게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농사는 기본에다가 풍수, 수맥, 발효식품, 집짓기, 강의, 글쓰기, 노래…. 그를 가까이 보는 애리씨는 이를 어찌 보는지 궁금하다.
“자기 필요에 따라 배우면 누구나 천재가 되지 않을까요? 여기 이웃집 할머니는 구멍가게 해가지고 자식들 다 공부시키고 출가시켰거든요. 그런데 그 할머니는 글을 몰라요. 숫자도 모르고. 자기 이름도 못 쓰는데, 보고 듣는 건 다 외워요. 외상값, 물건들 다 기억해요. 그리고 1.5볼트 건전지를 사려고 물어보면 ‘볼트’라는 말이 할머니한테는 생소하잖아요? 그런데 할머니는 ‘아! 새끼손가락 건전지?’ 그러는 거예요. 얼마나 아름답고 예쁜 말이에요? 공부도 자기에게 필요한 걸 찾아서 독학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 싶어요.”
학교 이야기가 나오니 ‘촌놈’이 다시 이야기를 받는다.
“학교를 왜 안 갔느냐 하면, 노래부터가 실망이야. ‘학교 종이 땡땡 친다 어서 모여라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고 하잖아? (노래를 배우고 나서) 학교를 갔는데 선생님이 안 기다리더라고. 거기서 실망했어(웃음). 학교 노래가 잘못된 게 한두 군데가 아니지. 그런 걸 노래라고 짓고 또 부르게 하고. 살아가는 데 절실히 필요한 것을 배워야지, 필요 없는 걸 넣었다가 다시 뺄 필요는 없는 거잖아.”
학교 안 간 ‘대단한’ 이유
▼ 세상일을 두루 잘하니까 여기저기에서 와달라는 사람이 많잖아요? 농사도 지으며 그렇게 다니자면 쉽지 않을 텐데.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계속 솟아납니까.
“와달라고 다 갈 수는 없고, 충전해가면서 가는 거지. 그런데 중요한 건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하면 기가 금방 빠진다는 거야. 하고 싶은 일을 하면 기가 안 빠져. 내 것만 소모하니까 금방 죽지. 정농회 같은 데나 건강교실 같은 데는 달라. 사람들이 초롱초롱 듣고 있으니 내 기가 살아나는 거지.”
▼ 요즘은 귀농하려는 사람이 많잖아요. 조언을 해주신다면.
“멍청하게 다 때려치우지 말고, 우선 반쪽만 귀농하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물론 부부가 같이 오면 가장 좋지. 그게 쉽지 않으니까 한 사람은 돈벌이가 되는 직장을 가지는 게 좋아. 같이 시골로 오더라도 한 사람은 시골 학교 선생이나 면서기 또는 공공근로 하고 또 한 사람은 농사를 지어 유기농으로 먹고. 그렇게 몇 년 해보다가 농업이 생산수단이 되고 자신 있을 때 하라는 거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연속극이 끝나고 TV에서 저녁 9시 뉴스가 시작되자 모두들 자려고 총총히 일어선다.
그 다음날 시골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려고 짐을 쌌다. 그리고 인사를 하려고 하자, 시골집 안살림을 맡고 있는 애리씨가 뭔가를 내민다.
“이게 뭐예요?”
“도시락이에요. 먼 길 가다가 드시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 올라온다. 우리 어머니가 생각이 난다. 소풍 갈 때 싸주시던 도시락 생각. 도시락을 가방에 넣으려고 하자,
“가방을 눕히면 혹시 국물이 샐지 모르겠네요. 반찬 가운데 무절임이 있어요.”
잊을 수 없는 된장주먹밥
가방을 둘러메고 도시락을 손에 들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고속도로 음성휴게소에서 도시락을 열었다. 주먹밥 네 덩이. 예쁘게 삼각형으로 모양을 냈다. 잡곡밥에 깨소금도 살살 뿌렸다. 반찬은 검은콩장과 무를 얇게 썰어 식초에 절인 무초절이. 목이 메지 않으라고 무초절이를 넣었나보다. 먹어보니 담백하니 좋다.
천천히 한 입 베어 무니 시골집 식구들이 떠오른다. 락경, 애리, 주리, 정환, 정현, 우행, 석준, 봉수, 원석…. 목이 멘다. 무초절이를 하나 씹으니 음식이 내려간다. 또 한 입 베어 물고 씹는데 어, 느낌이 이상하다. 짭짤하면서도 구수하다. 보니 된장이다. 날된장을 구슬처럼 작게 하여 주먹밥 한가운데 넣어둔 것이다. 된장과 주먹밥이 만나 이루는 맛이란!
한 시간쯤 천천히 먹어야 하는데 시간이 모자르다. 15분 휴식 동안에 이 귀한 음식을 다 먹는 거는 아무래도 무리다. 그러다가 언뜻 떠오른 생각. 주먹밥 하나를 집에 가져가는 거다. 아내도 보여주고 맛도 보여주고 싶다. 된장주먹밥, 내가 사는 동안 잊을 수 없는 음식이다. 차를 네 번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고긴 여행에도 피로하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내 영혼이 더 맑아지는 걸 느낀다.
사람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걸 보여준다고 한다.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자신이 만난 사람, 해온 일들이 얼굴에 나타난다. 임락경 얼굴에는 촌놈과 장애인 그리고 환자들을 보듬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또한 내가 모르는 훨씬 더 많은 모습이 어우러져 있지 싶다. 나도 촌놈이 가진 그 신비로운 웃음을 조금이나마 나누어 갖고 싶다.
“산골 홀로 지키며 나는 ‘파랑마녀’가 된다”
해마다 겨울을 나면서 나는 정신세계의 변화를 자주 겪었다. 겨울엔 시간이 많이 남아 책을 본다거나 사색을 하면서 나를 치유하거나 정신을 살찌웠다. 그런데 이번 겨울은 조금 달랐다. ‘그놈’의 인터넷 덕분에.
우리집에 인터넷 전용회선이 들어온 지 1년이 조금 지났다. 그전에는 전화 모뎀으로 간신히 메일이나 주고받았는데, 인터넷이 되니 세상이 참 빠르다는 걸 실감한다. 이제는 우리도 공간을 뛰어넘어 쉽게 여기저기 ‘인터넷 마을’을 다닐 수 있다. 그렇게 마을을 가다가 정이 든 이웃 가운데 한 집이 ‘잣나무 옆집’이다.
지혜롭고 자유롭고
잣나무 옆집은 블로그(blog.daum.net/momo64) 이름이다. 이곳에는 장창호(張昌鎬·49), 차정원(車貞媛·44) 부부와 명지(16), 희지(9)가 산다. 명지네 식구가 도시를 떠나 시골로 옮긴 것은 2000년. 충북 단양으로 내려왔다가 2003년에 지금 사는 경북 봉화로 다시 옮겼다.
누구나 그렇듯 삶의 터전을 옮기고 땅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은 쉽지 않다. 시행착오, 시련, 아픔을 겪는다. 명지네 식구도 갖가지 어려움을 겪은 듯하다. 이 집 블로그를 1년 가까이 지켜보니 이 집 식구 중 가장 마음고생이 심했던 이가 정원씨 같다.
지난 겨울부터 정원씨가 블로그에 올린 글들이 내 가슴에 와 닿았다. 그의 글 속에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한발 더 앞으로 내딛고자 하는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그가 주로 쓴 키워드는 ‘치유와 내면의 성장’이었다.
치유(healing). 참 어려운 주제다. 그 정의를 내리는 것부터 쉽지 않다. 그냥 내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랄까. 사람마다 치유과정은 조금씩 다를 듯하다. 그런 설렘으로 명지네 식구를 만나고자 봉화로 갔다.
정원씨 닉네임은 ‘파랑마녀’다. 닉네임엔 자신의 꿈이 담겨 있다. ‘마녀’란 마법을 부리는 여성. 이름 그대로라면 현실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고, 환상의 세계를 넘나들겠지. 그동안 파랑마녀와 인터넷으로 자주 소통했기에 만나서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이는 어떠한 이유로 마녀를 꿈꾸는 걸까.
“예전에 ‘녹색평론’이라는 잡지에서 마녀사냥을 다룬 글을 본 적이 있어요. 흔히 마녀라면 무섭고 가까이 할 수 없는, 음울하고 부정적인 존재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고대 유럽에는 강력한 모성을 가진 여성들, 자연을 이해하고 사람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능력을 가진 여성들이 있었대요. 그런데 이들이 초기 기독교 세력에게 적대시되면서 제물이 됐대요. 저도 지혜롭고 자유로운 마녀가 되고 싶거든요. 그리고 파랑은 제가 좋아하는 영화 ‘블루’에서 따온 거예요. 영화에서 상징하는 자유의 색이면서 외로움과 우울함에 시달리는 제 내면을 표현하는 색깔이기도 하고요.”
관념적인 얘기만 할 거야!
치유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하자고 하니 그이가 조금 망설이며 남편과 함께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그이 남편은 마을 작목반(농산물 생산과 유통을 위해 꾸려진 협동체) 공동퇴비 작업으로 무척 바쁘다. 이른 아침에 집을 나가 늦은 밤에 돌아온다. 이 집에서 사흘을 머물렀는데 날마다 늦었다. 낮에 일이 끝나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술도 한 잔하며 어울리다보니 늦는 것이다. 셋이서 함께하면 더 좋았겠지만 나도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그이가 남편과 함께 이야기하자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했다. 하나는 혼자 이야기를 해서 자칫 부부 사이에 오해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인터뷰를 계기로 부부 사이에 대화를 더 깊게 해보자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생각을 정리해보면 그이는 지금 남편과 소통에 무게를 두고 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은 이 집 부부와 함께하기가 쉽지 않으니 우선 한 사람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부부가 시간이 되는 만큼 함께하기로 했다. 그이는 치유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제 내면은 치유할 게 참 많아요. 산골에서 친구도 없이 살자니 누가 치유해주는 것도 아니고…. 아는 사람이 우울증으로 치료 상담을 받았는데 몇 달을 했대요. 나야 그럴 형편도 못 되고, 의사와 상담을 한다고 해서 치료효과가 얼마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고요.
이곳 봉화로 옮기고 2005년 한 해 동안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어요. 원래 네 가정이 ‘계획 공동체’를 하려고 봉화에 땅을 사고 이사를 했는데, 우리 가족만 오고 다른 가족은 오지 않았어요. 공동체 생활에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은 인정하지 않았어요. 단지 상황과 조건이 조금 달라졌을 뿐 여전히 공동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더군요. 제가 볼 때는 분명한 실패인데 말이죠.
봉화에 온 애초의 목적이 사라지자, 저는 계속 여기서 살 이유를 찾기 어려웠어요. 농사를 짓고 싶어 안달이 난 것도 아니고, 그냥 남편이 공동체를 원하니 따라왔거든요. 더구나 당시 5학년이던 큰애가 이곳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평소 학교교육에 대해 비판적인 남편은 아이가 학교 그만두는 걸 찬성했어요. 저는 불안해서 아이를 설득했지만 아이가 꼼짝도 안 했어요.
정말 고민스러웠어요. 남편은 항상 바쁘고 아이 교육이 모두 내 몫이 되니 더 그랬지요. 남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냥 놔두래요. ‘생명은 저절로 자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식의 관념적인 이야기나 하고.
남편은 ‘걱정할 게 하나 없다,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된다’고 해요. 기가 막혔어요. 저 나름대로 이런저런 학습을 시도하다가, 야단을 치다가, 속상해서 울다가….
얘들 교육도 그렇지만, 농사로 먹고 사는 문제도 그렇고, 일하는 스타일이 달라서도 부딪치고 자주 싸웠어요. 어느 날은 밭에서 일하다 말고 하루 종일 싸우기도 하고, 차 타고 가다가도 또 싸우고, 다툼은 시시때때로 터지는 거지요. 그러다가 탁! 우울증이 오더라고요.
봉화로 이사 와서도 남편은 단양에서 하던 영농조합일 때문에 1년 동안 일주일의 반은 집을 떠나 있었어요. 산속의 창고 집에서 남편 없이 아이들하고 지내야 했는데 무섭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여기를 떠나려고 했죠. 교사 경험이 있으니까 대안초등학교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런 내 생각을 남편에게 이야기하니, 남편은 아주 관계가 끝나는 것처럼 이야기하더라고요. 남편은 여기서 뿌리내리고 살아야 한다는 데에 아주 강한 믿음을 갖고 있어요. 내가 여기를 나가면 자기는 사라질 거래요. 자기 혼자서는 여기서 살 이유가 없대요.
다시 가만히 생각하니, 남편 없이 7년 동안 혼자 살아온 것도 부족해서 내가 또 혼자 살려고 나가야 하나 싶더라고요.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구속, 그리고 연좌제
그이 이야기는 언뜻 남편에 대한 원망과 푸념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개인의 절망과 상처에는 그 사회와 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이가 남편 없이 혼자 살아야 했던 데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결혼하고 2년이 흘러(1992년) 큰애를 낳고 나흘째 되는 날, 남편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12년형을 선고받고 1999년 2월 가석방될 때까지 6년하고도 6개월이라는 긴 세월을 그이는 혼자 아이를 기르며 살아야 했다.
그이는 김영삼 정권의 운동권 복학 조치 때(1993년) 서울교대에 복학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아이를 업고 남편을 면회 가고, 사건 관련자들과 석방운동도 하고, 민주화가족운동협의회 회원으로 집회와 시위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그렇게 2년 만에 교대를 졸업하고 교원임용시험에 합격해서 발령을 기다렸는데 또 다른 족쇄가 그이의 발목을 잡았다. 시대착오적인 연좌제였다. 남편이 지은 죄 때문에 교사 발령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이는 다시 연좌제에 맞서 법정 싸움까지 해야 했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역사의 질곡이 아닌가. 그이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내게 30대란 강렬한 고통과 어둠 그리고 핍박받는 자의 절규가 있는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처들이 제대로 아물지 않는 한 그이 하소연은 어쩌면 좀더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이는 1998년 9월 연좌제가 부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을 받아내자, 바로 성남 분당의 학교로 교사 발령을 받는다. 그러고는 다음해 2월 남편이 가석방됐고, 아빠 없이도 쑥쑥 커버린 큰딸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그이는 식구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석방된 남편은 시골로 가서 자기가 손수 집도 짓고, 농사도 지으면서 살기를 원했다. 남편은 징역살이 하는 동안 교도소 안이지만 작은 텃밭을 얻어 운동시간 틈틈이 농사짓는 법을 익혔다. 오랜 징역으로 고생한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남편은 석방되고 바로 다음해 충북 단양에 땅을 사서 이사했다.
시골로 온 남편은 옥중 생활에 대한 한풀이를 하듯 억척스럽게 일했다. 집도 짓고, 영농조합도 만들고, 농사도 후배 한 사람과 함께 5000평이나 지었다. 그 와중에 이웃이 남편에게 집짓기를 도와달라고 하자 거절을 못하고 맡아서 했다. 게다가 그이가 둘째를 낳고도 교사생활을 계속 하니 남편이 어린 둘째를 돌보아야 했다. 남편은 철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일을 자꾸 벌여 나가는 남편이 점점 힘들게 여겨졌다. 그러다보니 교사 생활도 쉽지 않았다. 자신이 맡은 반 아이들은 적었지만 담임업무 외에 여러 잡무로 몸이 약한 그이는 건강이 더 나빠졌다.
‘나는 왜 이것도 못할까…’
그러다가 이 집 식구들은 또 한 번 터를 옮긴다. 남편이 여러 사람과 어울려 살아보자고 ‘계획 공동체’를 제안한다.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해 다시 남편 뜻을 따랐다. 농사로 자급하자는 남편 뜻에 따라 이번에는 교사마저 그만두고 봉화로 터전을 옮겼다.
무슨 일이든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면 웬만한 어려움은 삶의 자극제가 된다. 반면에 자신이 흔쾌히 선택하지 않았다면 똑같은 일이라도 어려움은 더 크게 느껴진다. 그이 남편은 오랜 감옥생활에서 얻은 확신으로 땅에 뿌리내리는 데 거침이 없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무한히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아내가 조금이라도 힘들어하면 아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보다 자신의 철학을 설득하려고 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저절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명분을 앞세워 가족을 끌어가려 했던 내 모습이 이들 가족과 겹쳐진다. 시골에 내려와 정착하는 과정에서 아내 고민을 들어주기보다 내 식으로 가정을 끌고 가려고 했다.
이렇게 마녀와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도록 나누다보니 이런 갈등을 빚는 집이 한두 집이 아니라는 데 공감했다. 그러니까 남편들은 사회에서 꽤나 근사하고 고상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 아내들이 겪는 아픔이나 희생은 묻혀 있기 쉽다는 점이다. 밝은 빛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라고 할까. 남편이 사회활동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는 가정일수록 아내가 겪는 아픔은 크다.
그러나 가정 안에 드리운 그림자는 누가 대신 걷어주지 못한다. 스스로 걷어내는 수밖에. 마녀도 우울증에서 벗어나고자 자기만의 길을 모색한다. 당시 그이가 선택한 길은 인터넷 글쓰기였다.
“처음에는 혼자 글을 쓰다가 우리집에도 인터넷이 들어오면서 블로그에 쓰기 시작했어요. 솔직히 제 글이 두서가 없어요. 일관성도 없이 그냥 떠오르는 대로 적어 나갔거든요. 그런데도 글을 써서 올리면 댓글이 달리고, 그 댓글에 다시 제가 댓글을 달면서 제 글을 자꾸 읽게 돼요. 읽고 또 읽으니까, 제 글이 거울같이 저를 비춰줘요. 제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오만함, 인정 욕구, 열등감, 남을 쉽게 비판하고 무시하는 마음, 자신을 마구 질책하는 마음이 보였어요. ‘나는 잘못 살고 있다. 못났다. 나는 왜 이것도 못할까.’ 자신의 안 좋은 면, 못난 면에 집착하고, 자신을 긍정하고 칭찬하고 북돋워주는 마음은 약하더라고요.
그렇게 몇 해 글을 쓰다보니 내가 잘 하는 게 조금씩 보였어요. 나는 사람을 관찰하고 사람에게서 연관성을 찾고, 거기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내고 북돋우고 이런 걸 무척 좋아한다, 이게 내게 맞구나 싶더라고요. 그러면서 서서히 열등감에서 벗어났어요. 우울증도 극복하고요. 물론 다른 사람이 쓴 건강한 글도 내게 큰 힘이 되었지요.”
“싫은 게 아니라 힘들었던 거야!”
사람이 글을 쓰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자신을 당당히 펼치기 위해서 쓰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서도 쓴다. 그러나 치유라는 관점에서 볼 때 글쓰기는 남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한 길이 된다. 억울하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이를 토해내지 않으면 그야말로 병이 된다. 말할 상대조차 마땅치 않을 때 글은 몹시 소중한 상대가 된다. 혼자 쓰고, 혼자 보는 일기도 도움이 되지만 인터넷 글쓰기는 또 다른 힘을 갖는다.
불특정한 여러 사람을 인터넷에서 상대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를 주장하는 글이 아닌 절실한 자기 고백일 때는 다르다. 인터넷에서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면 어디선가 잡아주는 손길이 있다. 마녀는 그렇게 가슴에 응어리진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자기를 정화하고 또 힘을 얻는다.
마녀는 이제 남편과 관계도 서서히 바꾸어간다. 남편이 가고 싶어하는 길을 막지는 않지만 예전처럼 남편에게 그냥 휘둘리지 않는다.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따질 건 따지며 자신을 찾아간다. 예전에 묻어두었던 남편에 대한 앙금마저 털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한다.
마지막 날 저녁에는 이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늦었지만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지난 세월에 앙금까지 풀어내다보니 가끔 감정이 격해지기도 했다. 이들이 나눈 대화 한 토막.
“당신이 현장 귀농학교 꾸린다고 할 때 나랑 의논했어? 제대로 안 했잖아. 나는 힘들었지. 당신이 일 벌이면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치고. 그렇다고 그 사람들 박대할 수도 없고, 서로 눈치 보고 그런 상황이었잖아.”
“그런 게 싫었다고?”
“싫은 게 아니라 힘들었다고.”
“여기 올 때 우리가 합의하지 않았나? 농사로 먹고 살아야 된다는 거.”
“나는 이런 걸 합의한 게 아니야. 공동체로 네 집이 같이 와서 아이들도 같이 키우고 공동체를 잘 운영하기를 기대하면서 왔지.”
“그동안 조건이 바뀐 거 아니야.”
“자꾸 옛날이야기를 해서 그런데, 나는 농사짓고 싶어 안달이 난 것도 아니었잖아. 자기는 이미 공동체를 하겠다고 사람을 모으고 땅은 사 놨지, 아이는 어리지, 그런 상태에서 한 선택이었는데…. 교사를 할 때도 자기가 나를 배려하면서 도와줬다면 계속 할 수도 있는 거잖아? 교사로서의 내 삶도 나한테는 소중한 경험이고 성장의 과정이었다고. 내 일과 자기 일이 겹치면 항상 자기 일이 우선 아니었어?”
‘내면의 성장’
그렇게 지난 일을 풀어내다가 이따금 침묵이 흐른다. 꼭 말만이 대화는 아닐 것이다. 침묵은 또 다른 대화인지도 모른다. 마음속 대화, 아니면 자기와의 대화가 된다. 그러나 침묵이 이어지니 괜스레 내가 미안하다. 분위기를 바꾸고자 그이 남편을 바라보며,
“내가 와서 이 집에다가 분란거리를 준 거 아니에요?(웃음)”
“아니, 아니에요. 새로운 생각을 정리할 거리가 생긴 거지요.”
이 부부를 며칠간 지켜보니 일상적인 관계는 아주 부드럽고 이야기도 조곤조곤 나누는 편이다. 지금 이 순간은 치유와 소통이라는 주제로 무겁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가라앉은 앙금’이 위로 떠오른 것에 불과하다. 뒤집어보자면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나눌 수 있다는 자체가 부부 사이 신뢰가 상당하지 않으면 쉽지 않다. 내친 김에 몇 가지 더 찔러본다.
“아내 혼자 아이를 키워온 과정에 대해 남편으로서 인정하고 고마워하는 마음도 있을 텐데요?”
“고마워하지요. 굉장히 고마워해요.”
“그걸 두 사람이 있을 때 말로 한 적은 없나요?”
“나는 그런 걸 드러내는 게 참 쑥스러워요.(웃음)”
“그게 왜 쑥스러울까요?”
“글쎄, 그게 왜 그런지 잘 모르겠네.”
그러자 마녀가 곁에서 이야기를 이어받는다.
“처음 해보니까.(웃음) 저 사람은 다정다감한 느낌이 들어도 그게 표현이 잘 안 되나봐요. 자랄 때부터 그래서인지.”
마녀네 식구들 삶에 큰 변화는 아무래도 새집으로의 이사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창고를 개조한 집에서 살면서 남편은 농사 틈틈이 손수 집을 지었다. 밝고 넓고 따스한 새 집을. 그리고 지난 여름 낡은 창고 집을 떠나 새집으로 이사했다. 이전보다 공간도 넓어지고 생활도 편리해졌다.
아직 집이 완성된 건 아니지만 집안 살림살이와 손님맞이에는 큰 불편함이 없다. 나도 손님으로 가서 내 집처럼 지내다 왔다. 새집으로 이사하고 나니 그이는 밭에서 일을 해도 이웃을 만나도 곧잘 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새집을 손수 지은 남편에 대한 그이의 신뢰감도 부쩍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삶의 안정감과 여유는 시간이 지나면서 한결 내면을 살찌우는 것 같다. 치유와 함께 그이가 정리한 생각은 ‘내면의 성장’이다. 그이 말처럼 내면이 성장할 수만 있다면 밖의 유혹에 그리 흔들릴 것 같지 않다.
집중 혹은 분산
내면이 성장하는 비결이 뭘까. 마녀가 들려주는 마법은 ‘혼자 있는 시간’이다. 도시에서 오는 손님들은 여기 식구들에게 외롭지 않으냐고 곧잘 묻는다. 실제 외롭다. 그러나 외롭기에 자신을 더 잘 들여다보고, 자기 둘레 사람과 사물을 더 찬찬히 애정과 연민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기는 게 아닐까 싶다. 자기 힘으로 더는 어찌할 수 없다면, 한발 물러난다. 그러면 흐름을 읽어내는 힘이 생긴다. 또 혼자 있는 시간은 자신과 더 자주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다가온 깨달음을 마녀는 사람들에게 잔잔히 들려준다.
많은 사람이 분주한 세상에서 놓여나 조용히 혼자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음을. 그렇게 복잡한 공부가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음을. 바쁘고 생각할 시간조차 없이 열심히 사는 생활이 자기 자신과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을. 너무 많은 사람과 항상 함께 있어서 서로를 간섭하여 피곤하게 하는 것은 힘든 일임을. 무언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자신을 잃는 일임을. 그 가치에 수단이 되어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기에. 단순한 생활과 소박한 식사, 그리고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있는 많은 시간, 가족과 이웃의 서로 다른 다양함이 주는 신기함과 생소함에 호기심을 잃지 않으면서 산다면 세상이 좀 더 재미있고 평화롭게 느껴지지 않을까. |
살아남아야 했던 절박한 시절에는 혼자 있는 게 두려웠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이 지나고, 혼자 있는 시간은 자신을 돌아보고 또 들여다볼 여유를 준다. 사실 현대 사회는 복잡하지만 누구나 혼자 있는 시간은 많다. 복잡한 지하철 속에서도 실제는 혼자다. 중요한 건 그 혼자 시간에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느냐 아니면 자신이 분산되느냐일 것이다. 나를 느끼기보다 남을 느끼기가 더 쉽다면 자기 존재는 점점 희미해지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산골에서 혼자 있는 시간은 유혹보다는 자기 존재감을 더 또렷이 확인할 수밖에 없다.
밭에서 김매는 일, 봄이 되면 산에서 산나물하기, 가을이면 버섯 따기. 또한 집에서 하는 군불 지피기도 그렇다. 아궁이 속에 장작을 밀어 넣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노라면 저절로 명상 상태에 빠져들곤 한다. ‘군불 명상’이라고 할까.
과거 상처를 끄집어내어 핥고 어루만지고 보듬어간다. 지금 안고 있는 문제도 곰곰이 마음속으로 되씹으면서 안으로 소화한다. 이럴 때 불은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다.
되살아난 교육자의 꿈
한 개인의 치유과정은 사회 치유와도 맞물려 있을 것이다. 막히지 않고 흐르는 게 치유라고 본다면 막힘이 있을 때는 고이거나 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큰딸과의 관계도 그 사이 부쩍 달라졌다.
당장 눈에 보이는 지식 교육은 한발 처지더라도 아이가 부쩍 건강해지고 몸과 마음이 자라니 마녀도 덩달아 힘이 솟는다. 그리고 진정한 교육이 뭔지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성찰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안감과 걱정을 버리고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한다.
“아이랑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 아이를 풍부하게 이해하게 돼요. 아이가 좋아하는 영화나 만화도 같이 보며 수다를 떨고, 차츰 아이랑 관계도 편안하게 바뀌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아이는 나랑 다르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요. 아이가 성장하는 걸 가까이서 지켜보니 부모 된 기쁨이랄까, 그런 것도 느끼게 돼요. 좋은 부모가 되는 요체는 자기 삶을 열심히 행복하게 사는 데 있다고 봐요. 그러다보면 아이가 곁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마움을 느끼곤 해요”
그이 남편도 이제는 밖으로 나가는 일을 줄이고 농사일에 집중하려고 한다. 또 마을에 귀농하는 가족이 많아지면서 애초에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고자 했던 그의 생각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이가 오랫동안 외롭게 내면의 치유에 집중한 그 힘이 조금씩 이웃에게 스며든다.
내가 마녀를 만나러 봉화에 간 날은 마침 학교 안 다니는 청소년들이 마을에서 ‘토론 캠프’를 시작하는 날이었다. 토론 캠프는 청소년이 스스로 기획하고 진행했다. 캠프에 참여한 청소년은 이 집 딸 명지까지 모두 열두 명이었다.
마녀는 아이들과 함께 시장을 봐오고, 토론을 위한 기초 강의도 하고, 아이들이 영화를 볼 수 있게 자기네 집 거실도 내주었다. 또 마을회관을 아이들이 토론장과 숙소로 쓸 수 있게 이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주기도 했다.
농사에서 김매는 일과 달리 이런 일이라면 마녀는 신바람이 나게 한다. 캠프 첫날 아이들 앞에서 강의하는 두 시간 내내 그이는 행복해 보였다. 공교육 교사일 때 자주 고민했던 참교육자의 꿈이 학교를 나온 아이들과 만나니 고스란히 다시 살아나면서 마음이 설렌다고 한다. 아이들을 가르쳐본 사람은 안다. 가슴으로 아이를 만나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제 마녀는 마을에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나 둘 찾아 꾸려간다. 마을 도서관을 제안해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가고, 남편이 맡은 마을 작목반 총무 일도 거든다. 농촌 마을의 소득증대를 위한 정부 지원 사업인 ‘녹색 체험 마을’을 유치하고자 마을 집집을 다니고, 관계기관을 오고가며 더 넓은 세상 속으로 나아가려 한다. 이런 일은 그이가 이전처럼 남편에게 휘둘리거나 뒤를 따라가는 게 아니다. 자기 스스로 주도하면서 필요에 따라 남편과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 된다. 이렇게 함께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부부간 이해와 애정도 더 돈독해지리라고 그이는 믿는다.
쑥스러운 포옹이지만…
봄이 되면서 새싹이 움트듯 마을에 또 다른 변화가 있다. 도시 살던 두 가정이 새로이 이 마을로 이사왔다. 파랑마녀의 둘째딸 희지와 새로 이사 온 가족의 두 아이가 함께 어울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래저래 활기가 넘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로 가는 길이 아무리 사통팔달 발달해도 그 길을 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뜻이 없다.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길이 있게 마련이다. 단지 어느 길을 어떻게 가느냐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닐까. 절망으로 빠져드는 길이 있고, 절망에서조차 자기 치유를 거치면서 자신감과 자기 존중감을 높이는 길도 있다.
이야기를 마치고 집을 나와 마녀랑 헤어지려는데 요즘 유행하는 프리허그(free hugs·자유롭게 안아주기) 운동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두 팔을 벌려 마녀와 처음 해본 쑥스러운 포옹. 치유와 내면의 성장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기를 마녀와 함께 빌어본다.
“이곳은 동심과 호기심에 가득 찬 어른들이 사는 마을”
싱그러운 봄이다. 풀도 나무도 곡식도 마음껏 봄을 누린다. 아이들은 어떨까. 이번 호에는 내가 사는 마을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아이들 자라는 건 정말이지 잠깐이다. 우리 아이 자라는 것도 빠르지만 이웃 아이 자라는 건 더 금방이라 느껴진다. 아이들 자라는 걸 지켜보는 건 행복하다. 아이들은 어른에게 활력을 주지만 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이따금 이 아이들 성장에 내가 도움이 될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하지만 무언가를 주거나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아이들을 이해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싶다.
‘내 자식’보다 ‘우리 아이’
우리 마을은 새로 생겼다. 오래전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1996년부터 한두 가정씩 모여들어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다. 그 사이 다시 떠난 이웃도 있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웃도 있다.
우리 마을은 산골치고 젊은이가 많고 덩달아 아이도 제법 있다. 아이만 손으로 꼽아보니 아홉이다. 다섯 살부터 열세 살까지. 남자아이가 여섯, 여자아이가 셋이다. 이 아이들은 나이나 성별을 크게 따지지 않고 어울리는 편이다. 아이들이 고만고만해서 이웃집을 자주 오고 가며 어울려 자란다. 여기 아이들은 어떤 점에서는 ‘내 자식’보다 ‘우리 아이’라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도시에서 태어나 부모 따라 이곳으로 온 아이도 있지만 대부분 이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다. 지금은 아홉 살이 된 채연이도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마을 여러 사람의 격려와 도움을 받으며 우리 이웃이 됐다. 그 기억을 조금 더듬어본다.
채연이에게는 두 살 많은 오빠 현빈이가 있다. 현빈이도 처음에는 집에서 낳으려고 출산 준비를 했다가 양수가 일찍 터지는 바람에 병원에서 유도 분만으로 태어났다. 현빈 엄마는 첫아이 경험을 밑천 삼아 둘째아이 채연이는 집에서 낳기로 했다.
이렇게 결정한 데는 본인의 준비도 철저했지만 가까이에 든든한 이웃이 여럿 있다는 게 큰 힘이 되었다. 그이들 이름이 윤희, 근희, 현희라 자칭 ‘희자매’다. 윤희씨는 도시 살 때부터 아이를 받아본 약사 출신이라 산모는 그이를 의지할 수 있었다. 채연이를 낳던 날 진통이 시작되자 희자매를 집으로 불렀다.
채연이가 우리 곁에 온 시각은 새벽 세시쯤. 은은한 달빛이 창문으로 들어와 전깃불 없이도 사람 움직임은 다 알 수 있는 그런 어둠. 갓 태어날 아기 눈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전깃불을 밝히지 않았다.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는 시간. 침묵과 이따금 들리는 산모의 신음 소리.
산파를 해주던 윤희씨는 산모랑 함께 호흡했다. 산모가 진통을 느끼면 같이 숨을 길게 내쉬고, 진통이 물러간 사이는 숨을 길게 들이쉬고. 근희씨는 큰아이 현빈이가 엄마 신음 소리에 놀랄까봐 돌봐주었다. 현희씨는 무사히 아이가 나오게끔 곁에서 기도했다.
“생일에 아저씨 가도 되니?”
남편은 방을 따뜻이 하려고 아궁이에 군불 지피고 물을 데웠다. 드디어 마지막 진통이 오고 산모가 한껏 힘을 주자, 아기가 빙그르르 돌면서 ‘쑥’ 빠져나왔단다. 그리고 태반이 나오고. 기다림 끝에 탯줄에서 일어나는 호흡이 자연스럽게 멈추자, 남편이 탯줄을 끊었다. 이렇게 채연이가 태어나고 이웃들이 산후 수습을 다하고 나자, 겨울 아침 햇살이 유난히 밝고 따뜻했단다. 이날 채연이가 우리 곁에 온 이야기는 마을 역사에서 두고두고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이 됐다.
한마을에서 사람끼리 어울리다보면 이러저러한 일로 때로는 부딪치기도 하지만 아이를 낳는 뜻 깊은 일에는 모두가 마음을 모은다. 채연이가 그렇게 우리 곁에 온 이후에 여러 아이가 집에서 태어났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에도 이웃이 함께 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아이들은 이웃집을 가도 마치 제 집처럼 지내곤 한다. 엄마에 따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아이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밥때가 되면 자기 식구처럼 함께 먹는다. 어느 때는 아이 생일이 동네잔치가 된다.
얼마 전에는 정수 생일이었다. 정수는 아홉 살, 남자 아이다. 산골 동네라 아이들 생일이라면 자연스럽게 마을에 소문이 돈다. 나도 정수 생일에 은근슬쩍 끼고 싶었다. 정수가 우리 집에 온 김에,
“정수야, 네 생일에 아저씨도 가도 되니?”
정수는 빤히 쳐다보면서 대답에 망설임이 없다.
“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밖에서 들어온 우리 큰아이도 정수를 보더니 같은 걸 묻는다. 아이야 다 좋다 그런다. 그렇지만 정수 어머니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울 것 같아 정수에게 엄마 의견을 물어보라 했다.
정수 생일날 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정수네서 전화가 왔다. 얼른 오라고. 아내는 이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땅콩을 한 솥 삶아놓았단다. 생일 부조 삼아 그걸 한 봉지 들고 정수네로 올라갔다. 정수네 거실이 사람으로 그득하다. 아이만 아홉에 어른도 일곱이나 된다. 아이들은 저네들끼리 선물을 주고받았고 음식도 거의 다 먹어간다. 정수네서 떡과 김밥을 했고, 채연이네서 케이크를 구워왔다.
음식을 배불리 먹은 아이들은 논다고 밖으로 우르르 나가고 어른들은 남은 음식을 먹으며 오랜만에 수다를 떨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어울려 노는 게 좋다. 밖에서 한참을 놀고 들어온 아이들은 남은 음식을 마저 다 먹는다. 메뚜기떼가 따로 없다. 어른들 생일은 소리 없이 지나가기 일쑤인데 아이들 생일은 이렇게 떠들썩하다. 우리가 어릴 때는 생일인지도 모르고 지나치곤 했는데 세월이 많이 변했다. 요즘 아이들이 부럽다.
집중과 확신, 그리고 당당함
이곳 아이들은 어찌 놀까. 내 어린 시절 놀이에는 성별이 뚜렷했다. 남자아이들 놀이와 여자아이들 놀이가 달랐다. 남자들은 기마전, 말뚝박기, 땅따먹기…. 여자들은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소꿉놀이…. 행여나 남자아이가 무얼 모르고 공기놀이를 하고 있다면 놀림을 받았다. 남자애는 여자애들 근처에 가지 않았고, 여자애는 남자애들을 무서워했다.
그러나 여기 아이들은 성 구별이 거의 없다. 온갖 놀이를 함께 한다. 계곡을 누비며 가재를 잡고, 마당에서 편을 나누어 축구를 한다. 드라마 ‘주몽’을 볼 때는 활쏘기 놀이에 푹 빠졌다. 활 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멋있다. 직접 쏘아보는 맛은 더 좋다. 쏜 화살이 과녁에 꽂힐 때는 온몸이 짜릿하다.
활을 만들자면 탄력이 좋은 대나무가 필요하다. 현빈이네 집 뒤에는 대숲이 있다. 현빈이는 자연스럽게 대나무를 이용한 다양한 놀이기구를 만든다. 낚싯대를 만들어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창을 만들어 전쟁놀이도 즐긴다.
채연이는 오빠 현빈이와 어울리면서 뭐든 따라 한다. 현빈이가 사냥놀이를 즐기니 덩달아 활쏘기도 좋아한다. 현빈이네 마당에 과녁이 있고 그 곁에 활과 화살통이 있다. 활도 어른 것과 아이 것 해서 서너 가지나 된다. 아이들이 우르르 모이고 누군가 활을 들면 서로 쏘아보고자 한다. 그러나 활을 쏘자면 차례가 꼭 필요하다. 누군가 활을 쏠 때는 과녁 가까이에 있어서는 안 된다. 줄을 서서 차례차례. 너 한번 나 한번 쟤 한번….
활통을 보니 어른 활도 있다. 겉보기는 헙수룩하고 투박하다. 하지만 활시위를 당겨보니 만만치 않다. 오른팔과 왼팔에 똑같이 팽팽하게 힘이 들어가야 한다. 현빈이는 그동안 여러 번 해보아서인지 곧잘 과녁을 맞힌다. 채연이 솜씨도 제법이다. 시위를 당기는 모습에 그 어떤 흔들림도 없다. 집중과 확신 그리고 당당함. 화살과 시위 그리고 과녁을 향하는 눈빛. 자랑스럽다. 활쏘기로 꼭 상을 타야만 자랑스러운 게 아닐 테다. 집중하는 모습 그 자체가 아름답다.
그런데 마을 아이들 놀이에 제동을 걸 일이 생겼다. 그러니까 1년 전만 해도 마을에서 학교를 안 다니는 아이들이 우리 집만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현빈이와 채연이마저 학교를 안 다니게 됐다. 아이들이 학교를 원하지 않았고, 부모가 이를 받아들였다.
현빈이와 채연이는 집에서 마음껏 놀며 자란다. 이제는 우리집 작은아이까지 함께 어울려 논다. 아이들 가운데서도 현빈이가 가장 왕성한 힘을 가진 것 같다. 현빈이는 들과 산, 계곡을 곧잘 누비고 다닌다.
그러다보니 아이들 노는 게 정도를 넘는 듯했다. 산골이라 자연에서 놀 거리도 많은데다 인터넷이 연결돼 놀이문화가 더 다양하다. 어디서 배우는지 도시 아이들 놀이도 곧잘 한다. 각종 보드게임은 물론 나는 이해도 잘 안 가는 유희왕 카드게임도 종종 한다. 아무리 놀아도 아쉬운 게 놀이다. 결국 두 집 어른들끼리 상의를 했다. 아이들 하는 대로 마냥 놀게 둘 수만은 없다고. 어울려 놀되 배울 건 배우게 하자고. 그렇다고 어른들이 다 가르치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선 어른들이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부터 몇 가지라도 아이들과 함께 해보자 했다.
수다 떨기 교육?
현빈이 아버지 박창호(朴昌鎬·38)씨는 기타 치며 노래하는 걸 좋아한다. 아이들과 일주일에 한 번 노래모임을 맡기로 했다. 어머니 박경미(朴京美·38)씨는 자신의 전공인 읽기와 쓰기를 일주일에 한 번 맡았다. 그리고 내 아내가 자연 관찰, 나는 수영과 수다 떨기를 자청했다. 그러나 나와 아내는 딱히 날짜를 정하지 않고 형편껏 하고 있다.
이렇게 두 집 아이들이 함께 공부한 지 어느덧 석 달쯤 돼간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글쓰기든 노래공부든 몸을 배배 꼬며 하기 싫어했지만 이제는 제법 자리가 잡혀간다. 적어도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신기할 정도로 집중한다. 다음은 채연이가 얼마 전 글쓰기 시간에 쓴 글 한 편. 제목은 ‘도둑잡기’다.
어제 나는 아이들과 도둑잡기를 했다. 나랑 정수가 도둑이고, 오빠랑 정인이가 경찰이었다. 그래서 내가 끈에 묶여 있을 때 정수가 와서 끈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도망치는데 하필 내가 대나무 숲으로 도망쳐서 잡혔다. 이번에는 둘이 잡혀서 오랫동안 묶여 있었다. 그 때 정수가 끈을 풀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오빠가 마침 나무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에 정인이 보고 잡으라 했다.
그런데 정인이는 들은 척 만 척했다. 그래서 할 수 없어 오빠가 나무에서 내려와 우리를 쫓았다. 그러자 정인이도 쫓았다. 그리고 나랑 정수는 정수네 집으로 갔다. 그런데 나는 잡히고 정수는 계속 도망갔다. 정수는 아궁이까지 갔다. 거기에 시계가 있어서 정수가 시계를 보고 이랬다. “야, 차정인, 갈 시간이다, 어서 오라.”
어른이 아이를 앞장서 끌어간다는 건 대단한 에너지라 생각한다. 현빈이 부모는 아주 열심이다. 정해진 모임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시간을 낸다. 젊다는 것도 이유일 수 있겠다. 이 부부는 우리 부부보다 한참 젊다. 노래모임만은 어른, 아이 함께한다. 현빈 아버지가 노래 가사를 준비해오고 기타로 반주를 하며 노래모임을 끌어간다.
처음에는 현빈이가 노래모임을 싫어했다. 뭐든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잘 하지 않는 아이. 함께 노래하자고 둘러앉으면 몸을 배배 꼬며 싫다는 내색을 하곤 했다. 그러나 동기 부여에 시간이 걸리지, 하기로 마음먹으면 누구보다 열심히 한다. 아이들은 배우고자 하면 정말 잘 배우고 빨리 익힌다.
그런데 이 노래모임은 시간이 갈수록 함께하는 사람이 늘어간다. 현빈이네와 우리 집 식구를 다 더하면 여덟이다. 이렇게 두 집이 하고 있는데 얼마 전부터 현빈이네 가까이 사는 정수도 함께 하고 싶어한다. 정수는 학교에 다닌다. 그래서 정수를 배려한다고 모임 시간을 늦추었다. 학교가 끝난 오후 세 시로. 정수에게는 동생 정인(7)이가 있다. 정수가 노래모임에 오니 정인이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정인이는 노래를 함께 하기도 하고 저대로 놀기도 한다. 이렇게 모임을 하다보니 어느새 열 사람이다.
지면 쪼그려 뛰기!
아이가 점점 많아지니 산만하기도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적당한 경쟁의식 같은 게 생기고 상승 에너지랄까 그런 게 느껴진다. 한번은 ‘개구쟁이’라는 노래를 배우고 나서 “누가 혼자 부를 사람?” 그러자 “저요” 하며 채연이가 먼저 나선다. 그리고 다음은? “제가 할래요” 하며 현빈이가 부른다.
그 다음은 아이들이 남자 대 여자로 편을 나누자고 한다. 굳이 경쟁을 가르치지 않아도 어디선가 경쟁의식을 배워오나 보다. 그러면서 시합을 해서 진 편이 ‘쪼그려 뛰기’를 하자고 한다. 몇 번 할까를 놓고 한참을 토론(?)했다. 현빈이는 50번. 헉! 나는 겁이 난다. 그렇게 했다가는 나중에 종아리에 알이 박히는 거 아닐까. 아무래도 남자들이 질 텐데. 현빈이를 달래고 설득해 30번 뛰기로 하고 시합을 했다.
노래 분위기가 점점 과열된다. 결과는? 심판을 맡은 현빈 아버지가 “똑같다”고 하자 아이들이 아우성이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확실히 말해요. 누가 이겼어요?”
그러자 내가 나섰다.
“솔직히 내가 봐도 남자들이 졌어. 여자들은 한 군데 틀렸는데 남자들은 세 곳 쯤 틀렸잖아!”
그랬더니 남자 녀석들이 군말 없이 어깨동무를 하고는 쪼그려 뛰기를 한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쪼그려 뛰기 열 번이 넘어가니 여자인 채연이도 줄 끝에 끼어,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뛴다. 승부는 승부대로 재미있지만 그렇게 쪼그리고 뛰는 것도 재미있나 보다. 가만 있자, 나도 진 편인데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 스무 번이 넘어갈 때쯤 나도 아이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뛰었다. 아이들 덕에 나도 나이를 잊고 노래가 주는 신명과 활력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
또 다른 덤도 있다. 우리 집 아이들에게 음악교육이 부족하다 싶었는데 이렇게 하다보니 많은 부분이 해결되는 듯하다. 요즘 우리 아이들은 생활 속에서 곧잘 노래를 흥얼거린다. 또 박자와 리듬에 귀가 열리는지, 설날 받은 세뱃돈으로 디지털 피아노를 사고, 피아노 책을 다른 이들에게 물려받아 스스로 배우고 있다. 어느덧 우리 삶 속에 음악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가!
이렇게 이웃이랑 함께하니 한 주가 금방 지나가고 금방 돌아온다. 재미있는 건 이웃끼리 가까워질수록 할 이야기도 더 많아지고 서로에게 자극이 된다는 점이다. 가끔은 일상을 뛰어넘는 대화라고 할까, 근본을 돌아보는 자리도 서로에게 필요하지 싶다. 모임이 끝난 자리에서 이 집 부부의 교육철학에 대해 좀더 알고 싶었다. 그러자 창호씨가 쑥스럽다는 듯 말을 꺼낸다.
‘이거다 하는 방향’
“교육철학이요? 너무 거창한데(웃음). 그냥 제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어쨌든 아이는 부모 뜻으로만 움직여지는 게 아니잖아요. 또 부모의 영향이 크겠지만 아무래도 부모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완벽한 부모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부모 이외 환경이라면 친구 관계나 이웃 관계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학교를 안 다니겠다고 했을 때 제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아이들이 자연으로부터 받는 영향이 크리라는 믿음 때문이지요. 자연이 부모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지 않을까. 그 점이 가장 크지요.”
완벽한 부모가 없다는 데는 나도 동의한다. 그런데 그 부족분을 ‘자연이 보충해준다’는 이야기를 듣고보니 부모 노릇에 대해 조금은 부담이 덜어진다. 그 이야기를 좀더 듣고 싶다.
“아이들은 일단 보고 배우는 거잖아요? 학교 다닌다면 학교를 보고 많이 배우겠지요. 자연에서 보고 배운다면 아이들 심성에 좋은 영향이 미치지 않을까요? 이는 아이들 교육뿐만이 아니라 저 자신을 봐도 그래요. 자연에 살다보면 저 자신의 왜곡된 심성이 어느 정도 극복되지 않을까 기대하게 돼요. 그렇지만 아이들 교육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건 고민해보지 않았어요. 단지 어떻게 하면 저 자신이 지금보다 더 나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를 깊이 생각하지요.”
지금보다 더 나은 부모? 누구나 그렇게 되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수록 더 많이 와 닿는 말이다. 잠시 말을 그치고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생각에 빠져든다. 그렇게 말없이 뜸을 들이자 곁에 있던 경미씨가 말을 받는다.
“아직 확고하게 정리되지 않은 거지만 ‘이거다 하는 방향’으로 가는 건 맞다고 봐요. 저도 이곳에서 10여 년 사는 동안 이리저리 휘둘리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제 생각이 정리되는 만큼 아이들 교육도 정리가 되는 것 같아요.
요리하는 아이들
아이들이 집에 있다보니 일단 자기 먹을 거 챙기게 되고, 자기 놀이를 스스로 찾게 되고,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고, 자기 주변을 살피게 된다는 거지요. 그러면서 정신이 훨씬 일찍 깨어나는 것 같아요. 한마디로 자기 주도성이 높아진다고 할까요. 요즘 현빈이나 채연이를 보면 요리를 서로 하고싶어 해요. 열두 살 아이가 벌써 밥 할 줄 알고 찌개 끓일 줄 아는 거예요. 제가 집에 없어도 아이들이 스스로 하니까. 그런 걸 보면서 이 방향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애들을 학교에 보낼 땐 애들 뒷바라지하기 위해 자꾸 돈 벌 궁리를 하게 되는데, 아이들이 집에 있으니 돈에만 내 마음을 쏟지 않고 어떻게 배울까를 같이 고민하게 되더군요. 그러면서 내 학창시절에 아쉬웠던 부분을 떠올려보지요. 제대로 배우고 싶었고, 정말 참지식을 얻고 싶었는데 그걸 놓쳤거든요. 그 과정에서 좌절감도 컸고 상실감도 컸는데 요새 그걸 느껴요. 아이들과 집에서 같이 지낸다는 건 내가 새롭게 배울 기회를 얻는다는 거지요. 수학도 같이 하고, 노래도, 글쓰기도 같이 하고, 나중에는 영어도 같이 할 거고.”
말문이 터지니 경미씨 입에서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술술 흘러나온다. 요즘 대학까지 마치고도 홀로서기를 못하는 젊은이가 많은 걸 보면서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려운 점도 있겠지.
“아직 경험이 부족하니 어려움도 있지요. 창호씨는 자연과 주고받는 교감에 비중을 두지만 저로서는 사회와 소통에 무게를 두는 편이거든요. 아이들이 노는 것도 좋지만 공부든 일이든 좀더 체계 있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아이들과 함께 해 나가다 어떤 벽에 부딪힐 때 어떻게 방향을 잡아가야 하나 고민될 때가 가끔 있어요. 우리만의 틀을 잡아가야 하는 게 숙제라고 봐야겠지요.”
아이들에게도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려운 게 없단다. 요리조리 찔러보지만 끄떡도 없다. 묻는 걸 바꾸었다.
“현빈이는 심심할 때 어떻게 하니?”
“저는 밖으로 나가서 막 돌아다녀요. 그러다보면 하고 싶은 게 생겨요.”
“채연이는?”
“저는 가만히 있어요. 그럼 하고 싶은 게 떠올라요.”
간단하면서도 명쾌하다. 두 아이 이야기를 듣고보니 묘한 그림이 떠오른다. 현빈이는 남자로서 동굴 밖으로 사냥을 나가는 모습, 채연이는 동굴을 지키며 이것저것 살림을 사는 모습. 그러니까 심심함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먹는 걸 좋아한다. 몸을 많이 움직이는데다 과자 같은 걸 사먹을 기회가 많지 않다. 가게까지 너무 먼 것도 이유. 어쩌다 한번 면에 있는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이라도 먹을 때 보면 알뜰히도 먹는다. 몸을 많이 움직이는 현빈이는 자장면 한 그릇으로 모자라자 면을 더 시켜 곱빼기를 먹는다.
이렇게 먹성이 좋으니 둘레 있는 먹을거리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나보다. 계곡에서 가재나 다슬기를 잡아오기도 한다. 아이들이 요리에 관심을 갖는 게 아주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 욕구를 내치지 않고 그 부모가 잘 이끌어 주니 우리 식구도 현빈이가 한 요리를 먹을 기회가 있었다.
매화꽃이 활짝 피던 날, 모임이 끝나고 현빈이네서 밥을 먹고 가란다. 현빈 엄마는 마당에서 쪽파를 뽑고, 아이들은 머위 잎을 뜯어온다. 현빈 아버지도 달걀을 풀고 있다. 준비되는 대로 전을 부치고 밥을 하는 등 시끌벅적하다.
다시 아이들끼리 잠깐 놀더니 현빈이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아참, 나 된장찌개 끓여야 돼.”
“네 된장찌개 맛있다!”
조금 지나자 밥상이 차려진다. 아이들이 뜯어온 머위 잎 먼저. 그리고 부침개를 접시에 담고, 깍두기를 상에 놓는다. 밥을 사람 수에 맞게 푸고, 된장찌개는 드문드문 놓는다.
현빈이가 끓인 된장찌개, 탑탑하니 맛있다. 무얼 넣고 끓였나 보니 감자도 있고, 표고버섯도 있다. 그리고 다시마와 쪽파도 넣었다. 봄비에 막 돋아난 표고버섯이라 맛이 아주 좋다. 찌개 간도 잘 맞는다. 그냥 칭찬이 아니라 함께 먹은 사람들의 공통된 평가였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어떻게 간을 잘 맞추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아이는 어른과 달리 요리를 한 가지 하면 거기에 집중하니까 그렇다는 거다.
“현빈아, 된장찌개 맛있다. 요리를 얼마나 배웠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요리는 된장찌개말고는 김치찌개와 달걀국 정도예요. 그리고 밥 하기.”
아이들은 자라면서 엄마가 하는 요리를 따라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를 말리는 엄마가 적지 않다. 다친다고 하거나, 그냥 공부나 하라면서. 아니면 부엌을 어지럽히고 일거리만 더 만든다고 성가시게 생각한다. 그러나 현빈 엄마는 아이들이 요리에 관심을 갖는 게 무척 대견하고 예쁘다고 했다. 이웃인 우리가 봐도 예쁘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아이들이 싱그럽게 자라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가장 기본이 되는 먹고, 자고, 싸기를 저 알아서 할 때 그렇다. 배우기도 마찬가지. 자신이 배우고 싶은 걸 배울 때는 눈에서 빛이 난다. 일도 그런 것 같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일과 놀이는 구별이 안 된다. 부모가 하는 일을 지켜보다가 자신이 할 수 있다 싶으면 달려들어 해본다. 채연이는 빨래를 곧잘 갠다. 현빈이는 부모랑 같이 감자를 심기도 했다. 아이들은 이렇게 잠깐씩 집안일을 하면서 한식구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아이들은 이웃집 일도 놀이 삼아 곧잘 한다. 현빈이와 채연이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편이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우리 집 일도 함께 한다. 산에서 불쏘시개를 해오기도 하고, 나락(벼) 베고 타작할 때면 자기 집 일인 것처럼 단단히 한몫했다.
지난해 모내기 때는 아이들이 흥분한듯이 우리 집 일을 한 적이 있다. 그 일이란 ‘모춤 던지기’였다. 우리는 모를 손으로 심는다. 그러자면 먼저 못자리에서 모를 뽑아야 한다. 이 모를 한 움큼씩 묶는 걸 모춤이라고 한다. 다 된 모춤을 이제 본 논에 골고루 던져 넣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모춤 던지기는 어찌 보면 투호놀이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볼링 같기도 하다. 이 놀이는 보통 재미있는 게 아니다. 반대로 모춤을 묶어내는 일은 더디다.
아이들끼리 서로 던지겠다고 난리다. 못자리에서 모를 뽑아 묶고 있으면 아이들이 가져가려고 기다린다. 모춤이 하나가 되자 그냥 들고 뛴다. 좁은 논두렁을 넘어지지도 않고 기우뚱 균형을 잡으며. 이렇게 놀이 삼아 일을 하고 나면 밥이 얼마나 맛있겠나. 논두렁에 둘러앉아 참을 먹다보면 그야말로 우리는 식구가 된다. 내 아이, 네 아이 없이 우리 아이가 된다.
“건강한 게 돈 버는 거래요”
어른들이 너무 바쁠 땐 아이들끼리 서로 치이기도 한다. 아이들은 한두 살 차이만 나도 몸집에 차이가 크다. 이곳 아이들은 어떤 때는 네댓살 나이 차이에도 서로 어울려 놀 때가 있다. 그러다보면 이따금 작은아이들 울음소리가 들린다. 형이나 오빠들 리듬을 따르다보면 넘어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한다. 그럴 때는 마음이 아프다.
큰아이들에게 어린아이들을 친동생처럼 대하라고 말을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식구 사이에도 위아래 형제나 남매 사이에 가끔 다툼이 생기니까. 어른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아이들이 어리더라도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어른이란 잣대를 접고 아이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종종 느낀다. 작은 아픔조차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와 내가 서로 깊이 연결돼 있다는 걸 발견하곤 한다.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내려오는 동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시골로 온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럼, 이런 질문을 가끔 받는다. 부모는 자신이 좋아 선택했지만 아이는 어떠냐고. 그럴 때는 아이에게 그 질문을 직접 던져보는 게 좋지 않을까.
“현빈이는 도시에 가서 자라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거 없어?”
“음, 전 그냥 이렇게 살고 싶어요.”
“그래? 좀 자세히 말해볼래?”
“도시 나가면 매연도 많고, 몸에 좋지도 않고, 스트레스도 받고. 돌아다녀봐야 병밖에 안 걸리고. 지금처럼 지내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그러자 곁에 있던 채연이 왈.
“아빠가 그러는데요. 건강한 게 돈 버는 거래요(웃음).”
다른 아이들에게도 물어보고 싶다. 자신이 사는 곳과 배울 곳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이 아이들이 10년쯤 뒤면 어른이 된다. 그때 모습은 어떨까. 그리고 이 마을은? 이 아이들이 어른이 돼 다시 아이를 낳고 키운다면?
문득 살아 있는 동화를 한 편 쓰고 싶은 마음이 인다. 어린 시절 자연의 삶을 점점 잃어버리는 세상. 아이다운 마음과 호기심을 가진 어른도 드물어지는 게 아닐까. 언젠가는 이 아이들이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까?
거침없이 마음을 열자, 아버지 자리 찾고 웃음도 찾고
‘사람 공부’ 연재가 어느새 여섯 번째다. 이번엔 좀 재미있는 체험을 소개하고 싶다. 사실 나는 그간 사람 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누구 이야기를 잘 듣지 못했다. 듣기보다 눈으로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서 그렇다. 그러니 사는 모습을 보느라고 이삼일씩 이웃집에 머무르곤 한다. 이웃이 해준 말은 나중에 다시 듣기 위해 녹음을 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눈으로 본 거 외에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 녹음한 내용을 풀면서 그 사람을 다시 이해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대방 이야기가 조금씩 귀에 들리는 거다. 아니 ‘들린다’기보다 ‘귀담아 듣는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글쓰기가 한결 쉬웠다. 녹음한 걸 풀어 참고 삼아 한 번만 더 들으면 됐다.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게 무언지를 어렴풋이 느꼈다. 글자 그대로 말을 흘려버리지 않고 귀에 담아두는 거다. 사람 공부를 하면서 나 스스로 사람이 되고 있다고나 할까.
이번에 만난 주인공은 저 멀리 강원도 인제에 사는 양손이네 가족이다. 이 가족과 만나기 전 나는 ‘가족’이라는 주제를 염두에 두었다. 요즘은 가족 사이 소통이 무엇보다 절실한 시대가 아닐까. 점점 바쁘고 전문화한 삶을 살아가는 요즘, 가족끼리 얼굴조차 보기가 어렵다. 심지어 명절에도 온 가족이 함께하지 못하는 집도 적지 않다. 가족은 세상과 소통이 어려울 때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이고,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기도 한다. 가족 간에 소통이 잘된다면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도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다.
‘원푸리와 초록손이’
양손이네 식구들은 별명을 짓고 부르는 걸 좋아한다. 양손이는 열네 살 남자아이다. 왼손잡이인데 왼손만이 아니라 오른손도 함께 쓰면 좋겠다고 양손이라고 지었단다. 이름은 김정환. 양손이 누나는 김자원, 열여섯 살 여자아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워낙 좋아해 책벌레라고 별명을 지었다. 요즘은 책뿐만 아니라 사람도 좋아해 여기저기 캠프랑 여행을 자주 다녀 부모로부터 사람벌레란 말도 가끔 듣는다.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는 이 아이들의 부모는 원푸리 김영수(金永洙·49)씨와 초록손이 고현희(高賢姬·45)씨다. 아이들 별명보다 어른 별명이 더 재미있고, 사연도 많다.
원푸리. 글자보다 입말을 해보면 묘한 느낌을 받는다. 원푸리는 원풀이로 들린다. 소원을 풀리라. 본인에게 물으니 처음 만든 별명이 ‘자유를 원한다’는 뜻의 Want Free였단다. 문장 발음이 자연스럽게 원푸리가 된다. 원푸리는 중견 기업에서 컨설팅 업무를 담당하며 고속승진을 하던 어느 날 삶의 방향을 바꿨다. 자신의 별명대로 자유롭게 살아보려고.
초록손이는 생명을 살리는 손이다. 초록손이는 서울 살 때 학원을 경영했다. 그런대로 학원을 잘 꾸렸지만 원장 생활 10년에 몸과 마음이 극심하게 지쳤다. 일주일에 한 번 가족들 얼굴조차 제대로 보기 어려운 삶. 살아가는 에너지가 거의 바닥날 무렵 도시를 떠났다. 이제 더 이상 돈만 밝히는 미다스(Midas)의 손이 아닌 초록손이가 되려고.
이들 가족이 도시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자 인제 점봉산 자락에 둥지를 튼 지 6년째. 이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원푸리 소원대로 자유롭게 살고 있을까. 가족을 품고자 하는 초록손이의 꿈은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나? 아이들은?
이들 가족을 만난 첫날 저녁,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고 말머리를 꺼내니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가족간에 서로 바라는 점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가 오고간다. 때로는 조금 시끄러울 정도다.
“아버지는 더 부드러워져야죠”
“누나도 나한테 좀 잘해봐.”
“너는 어떻고. 누나한테 잘하면 안 되나?”
부모라고 무게 잡거나, 부모라고 아이들이 봐주는 법이 없다.
“어머니는 현실로 좀 돌아오세요. 아버지는 좀 딱딱해. 더 부드러워져야죠.”
네 식구 모두 개성이 강해 상대방 이야기에 그냥 물러서는 법이 없다. 그나마 아이들이 핵심을 잡아 이야기를 간단히 풀어간다면 어른들은 이야기가 길다. 그렇게 이들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 밤 12시가 넘는다. 말잔치라 해도 좋을 듯하다.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자기 방문을 걸어 잠그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양손이네는 잠잘 때나 옷 갈아입을 때 빼고는 방문이 거의 열린 상태다. 그런 만큼 가족끼리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스스럼이 없다. 하지만 양손이는 낯선 사람은 조금 가리는 편이다. 나 역시 양손이 눈치가 조금 보인다.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첫날 저녁에는 인터뷰에 집중하기보다는 같이 수다를 떨었다. 양손이와 책벌레는 집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지낸다. 이따금 가는 캠프나 여행이 아니면 네 식구가 거의 함께 지낸다.
양손이네서 이틀 밤을 지내면서 본 이들 가족의 단면을 쓰자면 이렇다. 원푸리는 동이 틀 무렵 밖으로 일을 나간다. 조금 지나자 초록손이가 아이들을 깨운다. 먼저 일어난 책벌레가 잠옷차림으로 거실에 있는 디지털 피아노 앞에 앉는다. 터키행진곡이 거실 가득 울린다. “딴딴따~안~! 딴딴따~안~! 딴딴”
양손이는 졸음이 덜 깬 눈으로 거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떠오른 햇살에 해바라기를 한다. 누나 피아노곡에 맞추듯 의자를 흔들흔들 흔들며. 초록손이는 아침을 준비한다. 조금 지나자 원푸리가 집안으로 들어온다. 간단히 씻고는 책벌레가 치는 피아노를 보더니 참견을 한다. 아침을 함께 먹으면서도 수다가 그치지 않는다.
이들 가족이 지금과 같은 분위기를 갖기까지는 가족끼리 많이 다투기도 했고 노력도 많이 했다. 어찌 보면 이들 가족은 소통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에 놓여 있다. 도시와 달리 가족이 늘 얼굴을 맞대고 있기에.
가족이 같이 지낸다고 사이가 더 좋아진다는 법은 없다. 이 가족도 처음에는 눈물겨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초록손이는 자장면 한 그릇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돈이 없어 서러운 게 아니었다. 누가 자장면을 먹지 말라고 하지도 않았다. 자기 스스로 생태적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둥, 채식주의가 좋다는 둥 온갖 ‘고상한 철학’으로 자신을 포장하다보니 그게 또 다른 억압이 됐다.
틱 현상을 앓던 아들이…
‘자발적 가난’도 마찬가지. 돈을 많이 벌기보다 되도록 덜 쓰고 살자던 다짐으로 먹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계속 자신을 몰아갔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었다고 바로 몸이 따라주는 건 아니다. 수십년 몸에 밴 습관을 하루아침에 버리기는 어려운 법이다. 도시 살 때는 학원 원장으로 꽤나 능력 있던 사람인데 어느 순간 자장면 한 그릇이 눈에 아른거리며 자기 설움에 북받쳐 울었다.
늘 가족이 붙어 지내다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식으로든 민감할 수밖에 없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울면 같이 슬프고, 한 사람이 웃으면 같이 웃게 된다. 양손이도 초록손이 가슴을 곧잘 태우곤 했다.
양손이는 예민한 성격. 몸이 약하고 자주 짜증을 냈다. 학교를 그만둘 무렵 그 증세가 심각했다. 아이는 온갖 짜증에 고개를 까닥까닥하는 틱(Tic) 현상까지 생겼다. 시골로 내려가,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보자던 꿈은 현실이 됐지만 집안은 늘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가족이 서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됐다. 우선 서로를 돌아보아야 했다. 양손이가 시골로 내려온 건 초등학교 1학년 때. 동네 골목대장을 할 만큼 친구들과 잘 어울리던 아이였지만 시골로 내려오자 양손이는 완전히 ‘도시촌놈’이었다. 아이들에게 곧잘 놀림감이 됐다. 그렇다고 부모가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부모부터 시골에 자리잡는 과정이 시행착오 투성이니 아이들을 찬찬히 돌볼 여유가 없었다.
‘엉킨 실타래는 풀리고’
양손이는 초등학교도 다 마치지 않고 학교를 그만뒀다. 양손이보다 1년 먼저 책벌레가 학교를 그만뒀다. 책벌레는 양손이와 달리 학교에서도 모범생이었고, 집에서도 잘 지냈다. 양손이는 집에서 지냈지만 틱 현상과 짜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이 한꺼번에 분출되면서 더 심해지는 듯했다.
“그 무렵 우리 양손이가 자신감이 없었어요. 그것 때문에 저는 참 마음이 아팠어요. 몸이 약하니까, 기분이 붕 떴다가 가라앉았다가 하거든요. 정말 건강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공부를 아주 힘들어하고 시간을 무기력하게 보내는 거예요. 나중에는 아이가 밤낮을 바꾸고 싶어하더라고요. 그런 생활을 한 보름쯤 했나. 그러니까 몸이 더 나빠져요. 짜증도 더 내고. 마냥 자유롭게 내버려둘 수만은 없겠더라고요. 여러 가지 시도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부부 싸움도 많이 했어요.”
이렇게 혼돈으로 빠져들자 초록손이는 급기야 양손이를 위해 100일 기도를 시작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원푸리 역시 아이를 달래기도 하고 혼도 내보았지만 앞이 안 보였다. 1년 가까이 공부를 손놓고 있는 아이를 보다 못한 원푸리가 양손이에게 새로운 제안을 한다.
“공부를 안 하려면 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 농사일을 할래? 집짓기를 할래?”
그러자 양손이는 선선히 집짓기를 해 보겠단다. 여기서 집짓기는 한 세 평쯤 되는 아주 작은 구들집이다. 아이가 일을 하면 얼마나 할까. 그런데 막상 제 아버지랑 일을 같이 하자 아이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초록손이는 아이가 일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는 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하루에 여섯 시간씩이나 일을 했어요. 어떨 때는 추운데도 아이가 손을 호호 불어가며 일을 하니까 내 마음이 많이 아팠는데, 아이는 어떻게든 견디더라고요. 그렇지만 집이 완성돼가면서 달라지는 게 너무 많은 거예요. 우선 밤에 잠을 푹 자요. 차츰 얼굴도 밝아지고. 나중에는 희한하게도 아버지와 친해지더라고요. 양손이는 서울 살 때부터 제 아버지를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집짓기를 같이 하면서는 부자 사이가 부쩍 좋아지는 거예요. 공정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는 데 얼마나 보기 좋던지.
그러면서 뭔가 양손이에게 엉킨 실타래가 풀어지는 느낌이 오는 거예요. 건강도 많이 좋아지고, 정서도 안정되고, 얼굴도 환해지고. 잘 웃고, 질문도 적극적으로 하고, 키도 쑥쑥 크고. ‘내가 전에는 이걸 못 들었는데 오늘은 들었다’며 자랑스럽게 말을 하고. 일하면서 자기 힘에 대한 자부심을 계속 느끼더라고요. 그렇게 두 달 정도 집을 지어갔는데 그동안 아이가 확 크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일하면서 만족감을 얻고 자기가 성장하는 느낌을 받으니 너무 고마웠죠.”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
이렇게 자신감을 얻은 양손이는 다른 일에도 부쩍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이제는 공부도 하고 싶다며 미뤄둔 초등학교 책을 꺼내 한달음에 다 해버린다. 자신이 공부를 싫어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당시 양손이가 쓴 일기 제목이 한동안 ‘공부’였을 정도로 아이는 공부를 다시 느낀다. 그때 일기 한 토막.
공부 습관이 확실하게 붙은 거 같다. 일요일 지나고 월요일 되니까 바로 공부 시작해서 지금 공부가 다 끝났다. 이제 스타크래프트하는 것만 남았는데 기뻐서 죽을 지경이다. ㅋㅋ 이렇게 내가 공부를 열심히 했던 적이 첨이라 기쁘고 신기할 정도다. |
양손이는 올해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친다. 공부에 자신감이 붙자 내친 김에 “내년 4월에 고입 검시 보고, 바로 8월에 고졸 검시 볼까?” 그런다. 이제는 누구도 양손이가 공부를 싫어하던 아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공부든 일이든 오래 하기가 어렵다. 하고 싶은 것들은 과정도 좋고, 그 성과도 오래간다. 똑같은 공부인데도 해야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걸로 바뀌니 그 에너지는 가히 폭발적이라 할 만했다. 학교를 넘어서니 학년도 교과서도 다 넘어서게 된다. 한 가지 자신감은 또 다른 자신감을 불러오나보다.
아버지와 함께 집을 지어본 양손이와 책벌레는 이제 가족의 생계가 달린 오미자밭 만들기에 온 힘을 쏟는다. 그리고 짬짬이 가족이 모두 달라붙어 농구장과 농구대도 만들었다. 더 건강해지고 싶다는 열정이 솟아나면서 거의 쓰레기장이 되다시피 내버려둔 밭 한 귀퉁이를 정리해서 농구장을 일구어낸다. 이 밭은 쓰레기도 쓰레기지만 땅 자체가 흙 반, 돌 반이다. 자갈만 있는 게 아니라 바위도 있어 이를 캐내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농구대와 농구공을 마련하는 데 드는 돈은 거의 양손이가 냈다. 그러고도 양손이는 농구장 만드는 데 가족이 힘을 보태준 데 감사하다며 가족들에게 한턱냈다. 어찌 보면 농구장 만드는 일은 부모나 지역사회가 아이들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손이가 주인이 되니 같은 일이 이렇게 달라지는 거다.
해야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로 바뀌는 경험은 아이들만 한 것이 아니다. 이 집 부부도 조금씩 그 맛을 느끼고 있다. 이 집 소득구조는 농사보다는 민박집 수입에 더 많이 의존하는 구조다. 처음에는 불안정한 소득구조를 안정시키고 농산물을 직거래하기 위해 민박집을 시작했다. 집을 지어야 했고, 손님을 맞아야 했다.
“나는 민박집 아줌마!”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이 집은 민박집 운영 방식이 좀 독특하다. 규모가 작아 방이 고작 세 칸뿐이고, 시설도 그 일대 다른 집과 견주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런데도 계절을 크게 타지 않고 주말이면 손님이 꾸준히 찾아온다.
그 비법이 뭘까. 내가 보기에는 세상과의 소통이다. 가족끼리 소통하는 만큼 세상과도 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이 집은 잘 보여준다. 이 집이 세상과 소통하는 일차적인 문은 인터넷 홈페이지 ‘풀꽃처럼’(www.pulkkot.com)이다. 양손이네 가족은 여기에다가 각자 글을 올린다. 시골에 자리잡으면서 겪은 여러 가지 일과 느낌을 고스란히 홈페이지에 올린다.
손님들은 대부분 직접 오기 전에 인터넷 홈페이지를 방문해 이 집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온다. 그러니까 단순히 쉬러 오는 게 아니라 이 집 식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온다. 막상 만나면 서먹하지 않고 예전에 익힌 알던 사이처럼 온갖 이야기를 다 나누게 된다. ‘풀꽃처럼’의 키워드는 생태, 대안교육, 홈스쿨링, 가족 소통이다. 그러다보니 단순한 민박집을 넘어 삶을 깊이 있게 돌아보고 또 충전해준다.
민박집 아줌마가 자랑스럽다는 초록손이. 처음에는 손님맞이가 낯설고 서투르고, 손님들이 묵고 간 방과 욕실을 쓸고 닦는 일을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니란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가 살아도 민박집을 하고 싶단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이제는 하고 싶은 일로 바뀐 거다. 그이는 심지어 내게도 민박집을 해보라고 권한다. 어차피 시골에 살면 손님을 많이 치르는데 그걸 살리면 좋지 않냐는 거다.
이렇게 이야기를 주거니받거니 하다가 아이들이 먼저 잠이 들고 어른들은 좀더 수다를 떨다가 잤다. 그렇게 보통 때보다 늦게 잠이 들었지만 잘 자고 이튿 날은 일찍 깼다. 새벽부터 가랑가랑 비가 온다. 앞산에 안개구름이 산허리를 천천히 감싸며 흐른다. 오늘은 밭에서 일하기는 어렵겠다. 초록손이가 집 가까이에 있는 강선리라는 계곡으로 같이 산책을 가잔다. 이 일대는 정말이지 산과 계곡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곳곳에 민박집이 보인다. 새로이 짓고 있는 집도 제법 눈에 띈다.
강선리 계곡으로 들어서자 물소리가 엄청나다. 길 따라 온갖 풀꽃이 피어 있다. 원푸리가 사진을 찍으면서 이름을 알려준다. 얼레지, 노루귀, 바람꽃…. 이름도 예쁘고 꽃도 예쁘다. 서어나무도 알려준다. 이 나무는 영어 별명이 ‘muscle tree’, 근육나무란다. 줄기가 짙은 잿빛에 보디빌더의 근육 모양이 터질 듯 울퉁불퉁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느껴진다.
계곡을 따라 하염없이 올라가는데도 곳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단다. 겨울이면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철수하는 사람들과 겨우내 계곡을 지키는 사람들로. 이 계곡에서 친분이 있는 사람 집에 들러 차 한잔 얻어 마시자 했지만 주인은 집을 비우고 없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원푸리는 오미자 버팀대를 세울 자재를 사왔고, 비가 잠깐 멈춘 사이 선물로 보낼 오미자 효소를 거른다.
사춘기를 기쁘게
저녁에 다시 가족이 모였다. 해야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로 바뀔 때 일어나는 기적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책벌레는 영어를 좋아해, 학교 그만두고 줄곧 영어 비디오를 보더니 넉 달 만엔가 귀가 열리기 시작했다. 점점 영어가 재미있으니 나중에는 영어책을 번역도 해보고, 영어 일기도 한동안 썼다.
성격이 예민하던 양손이는 다정다감하고 섬세한 성격으로 변한다. 양손이는 요즘 코밑수염이 거뭇거뭇해지고 있다. 보통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짜증을 낸다거나 이유 없는 반항을 한다는데 양손이는 그 반대다. 다정다감하고 여유 있고 유머 감각도 뛰어나 이 집을 곧잘 웃음바다로 만든다. 킹 메이커가 아니라 ‘스마일 메이커’다. 몸과 마음이 부쩍 자라는 걸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먼저 느끼고 이를 기쁘게 받아들인다. 게다가 양손이는 어두운 과거를 갖고 있기에 더 빛이 나는지도 모르겠다. 양손이 자신은 “반항하는 사춘기가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사춘기를 짜증이 아닌 기쁨으로 받아들이기는 책벌레도 마찬가지. 초경을 하는 날 기뻐서 소리를 치며 엄마에게 알리기도 했고, 이제까지 생리통이란 걸 겪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자신이 본 책에는 사춘기 증상에 대해 온갖 부정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왜 자신에겐 그런 증상이 없느냐면서 오히려 걱정할 정도다.
이렇게 부정적인 사춘기를 겪지 않는 데는 건강은 물론 스트레스나 가족 사이의 소통도 큰 몫을 하리라. 이 가족이 지금처럼 소통을 해가는 데는 많은 노력이 있었다. 함께 일하고 함께 밥 먹는 것은 물론 좀더 ‘의도적인 노력’도 있었다. 성격유형을 검사하는 프로그램인 MBTI도 함께 해보고, 영화를 본다거나 인문학 토론도 곧잘 했다. 원불교에서 하는 법회도 일주일에 한 번씩 참여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는 소중한 계기로 삼았다. 이 집 가족은 한동안 한자 공부도 함께 한 적이 있는데 책벌레가 들려준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한자로 ‘온(툘)’ 자가 있잖아요, 그럼 이게 왜 성낼 온 자인가. 우리 네 사람이 한자를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얼렁뚱땅 떠오르는 대로 막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툘자를 뜯어보면 마음 심, 가둘 수, 그릇 명이 합쳐진 글자잖아요? 가둘 수(囚)는 다시 감옥처럼 갇힌 틀(口)안에 사람(人)이 갇혀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감옥 밖에 밥그릇(皿)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감옥에 갇힌 건만 해도 답답한데 밥그릇마저 손이 안 닿는 곳에 있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거다(웃음). 이렇게 하니 재미도 있고, 식구끼리 서로 잘 알게 되고, 잘 잊어먹지도 않는 것 같아요.”
“책임을 다할지어다”
이렇게 가족 사이 소통이 활발하자 이는 또 다른 구심점으로 나아간다. 양손이네 가족이 시골로 간다고 했을 때 양손이 외가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반대다. 자주 들러 일도 도와주고 삶의 고민을 함께 풀어주신다. 그게 여의치 않을 때는 홈페이지를 통해서 수시로 의견을 나누고, 때로는 자식들이 못마땅하면 호통을 치기도 한다. 그 일부를 옮겨본다.
이 집 원푸리와 초록손이는 도대체가 책임감이 결여된 애비/어미들이여 시방. ㅉㅉㅉ. 양손이가 여러 날을 배가 아팠다는 데 병원 한번 안 데리고 가고. 미식가인 양손이가 밥을 못 먹어. 현기증이 나고 배가 하루 종일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이 아픈 아들을 병원은커녕 유기농이라는 미명을 붙여 낙엽 모으는 작업장으로 끌고 다니면서 혹사를 시켜도 되는 겨! 시방. 아무쪼록 이 글을 접하는 즉시 모름지기 애비/어미로서 책임을 다할지어다. |
그러자 놀란 가족들이 줄줄이 댓글을 달고, 외할아버지는 오해를 푼다.
양손이 : 할아버지, 오해를 푸세요. 어머니 아버지가 무지 걱정 했고, 죽도 쒀 주구, 손발 따주고 배 주물러 주구 다 했어요. 원푸리 : 열심히 만져 보고, 들여다보고 했사옵니다~. 시간 지나면 나을 것 같아서 (안타깝지만) 내버려두었사옵니다~. 방치한 것 아니오니 노여움 푸시옵소서~. (덧붙임) 양손이가 아프다고 한 뒤로 낙엽작업엔 책벌레만 데리고 다닙니다요~. 초록손이 : 아부지, 오늘 아주 잘 먹고 있어요. 그동안 못 먹은 거 먹는다고 해서 말리는 중^^. 아부지 손자 잘 돌보고 있으니, 걱정 마서요. 할배 : 양손아! 그랬니? 아버지/어머니가 걱정 해 주었구나. 이곳 이 외할배뿐만 아니라 외할머니도 너의 식사하는 습관에 몹시 못마땅해 하신단다. 모든 음식을 오래오래 꼭꼭 씹어서 먹을 것을 다시 한번 강력히 충고하니 철저히 지켜서 부모님께 걱정 끼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거라. 양손이 홧팅이다! |
이렇게 할아버지가 거침없이 쓴소리를 할 수 있는 바탕에는 양손이가 배 아프다는 일기를 홈페이지에 올렸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부모 처지라면 솔직히 숨기고 싶거나 가리고 싶은 부분이다. 자식이 아프다는 걸 만천하에 알리고 싶은 부모가 있을까. 그래도 이 집 아이들은 기쁜 일, 슬픈 일 가리지 않고 거의 날마다 일기를 쓰고 이를 세상에 고스란히 공개한다. 나와 함께 지내던 날도 컴퓨터 앞에 앉더니 잠깐 사이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일기를 올린다.
“기계 안 팔면 남편 죽어요!”
소통의 핵심 고리는 아무래도 자신을 열어두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을 열어두는 만큼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많게 마련이다. 민박집을 들르는 손님들과도 그런 것 같다. 댓글 하나 달지 않는 ‘유령회원’들이라도 이 집 구석구석, 마음 속속들이 다 알게 되니 어느 순간은 자신을 열고 나누고 싶은 마음이 인다.
이 집 손님들은 그냥 지나가는 손님이 아니다. 이러저러한 인연을 맺고 삶을 나누고 싶어 한다. 그러다가 가끔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가장 인상 깊은 손님을 이야기해달라니까 부부가 한 사람씩 들려준다. 먼저 초록손이.
“한번은 무당처럼 신기(神氣)가 있는 사람이 왔는데 그분이 나를 보고는 아줌마 인상이 참 좋다고, 이 집은 지금 아줌마 덕으로 산대요. 그러면서 우리 농장을 둘러보더니 대뜸 ‘저 포클레인 파세요. 안 그러면 남편 죽어요’ 그러는 거예요. 당시 남편은 농장 일군다고 기력이 아주 쇠약해져 있을 때였거든요. 자기 에너지가 다 빠져 있을 때는 기계가 사람을 잡는대요. 그 말 듣고보니 정신이 번쩍 들잖아요. 그 다음날 당장 기계를 팔았어요. 그 손님이 얼마나 고맙던지.
나중에 알고보니 그분은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일을 한대요. 1년에 한 번 휴가차 마음 훌훌 터는 기분으로 한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다가 우리 집으로 들어온 거래요. 그분은 말씀도 아주 희한하게 하세요. 자기는 아무 곳이나 들르지 않는데 이 집을 지나가면서는 왠지 끌려서 왔다고 하니까. 이렇게 특별한 손님들을 가끔 보다보니 어떨 때는 오시는 손님이 이번에는 또 무슨 메시지를 주려고 하시나 하고 기대도 하거든요(웃음).”
원푸리가 들려주는 또 다른 손님은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하고 나자 곧 마당에 심어둔 과수에 대해 조언을 시작했단다.
“초보치고는 전정을 잘 하셨네요. 하지만 제대로 배운 적은 없구만요.”
“네!”
“자르는 거는 이만큼 남겨놓는 게 아니고 바싹 잘라야 하고, 꽃눈이 잘 형성되려면….”
원푸리는 아직 농사가 서투르니 기회다 싶어 집 둘레 과수들을 돌아다니며 손님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러고는 저녁에 같이 약주를 한잔하며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이분은 금융권에서 일하는 분으로 연봉도 1억원이라니 놀랄 수밖에. 자라면서 부모님과 함께 과수원을 돌보며 어렵게 대학을 마쳤다고 했다. 그런데 이 손님은 술이 한잔 들어가고,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앞에 있자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집 밖의 거울
“이렇게 민박집을 하다보니 저도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사람 공부가 나름대로 됐나봐요. 저분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구나. 들어주자.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분 모습에서 제가 배우는 바가 많거든요. 그러다보니 어떨 때는 누가 누구에게 돈을 주어야 하는지 헷갈리기도 한다니까요(웃음).”
이 집 식구들과 함께 한 이박 삼일. 네 사람 다 개성이 뚜렷해 한 사람씩 따로 글을 써도 좋을 만큼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아버지 자리와 웃음을 되찾은 원푸리는 말이 아닌 몸으로 살아가는 삶에 무게 중심을 둔다. 도시 살 때 학원 운영한다고 밥 한 끼 제대로 한 적이 없는 초록손이는 농사일이 바쁜 철에는 밥 세 끼에 참 두 끼, 여기에다가 이따금 치르는 손님 밥상까지 손수 차린다. 때로는 손목이 결릴 만큼 안 쓰던 손을 원 없이 쓰고 있다.
이 집을 떠나오면서 내 귓전에 가장 또렷이 남은 말은 양손이가 부모에게 한 말이다. 가족이 함께 ‘부부 싸움’에 대해 즉석 토론을 벌이던 때였다. 부모가 서로 자기 주장이 옳다고 고집하자, 양손이가 더 이상 못 봐주겠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부부 싸움을 하려면 집 밖에 나가서 싸워요. 그리고 집 안에 들어올 때는 얼굴을 펴고 들어오세요(웃음).”
‘부부 싸움을 하려면 집 밖에 나가 싸우라’는 말은 우리 집 작은아이도 가끔 우리 부부에게 하던 말이다. 그런데 양손이는 그 다음을 주문한다. ‘들어올 때는 얼굴을 펴고 들어오라’고. 이 말은 그야말로 내 귀에 담아졌나 보다.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한 결코 잊고 싶지 않은 말이다. 아침에 문을 나설 때 우리는 거울을 본다. 옷차림에 잘못은 없는지, 머리는 단정한지, 얼굴 표정은 밝은지. 그리고 집 밖에서 남을 만나면 상대가 조금 싫어도 싫다는 표정을 잘 짓지 않고 되도록이면 좋은 얼굴을 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가족들에게 이렇게 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집을 나설 때 마음으로 다시 집으로 들어올 수는 없을까. 밖에서 만나는 남보다 가족이 더 소중하면 소중했지 적어도 덜 소중하지는 않다.
그렇게 집 안에 거울이 있다면 집 밖에도 거울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부담을 가지고 싶지는 않다. 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해보고 싶다. 집을 나섰다가 다시 돌아와 가족을 만나기 전에 치르고 싶은 의식이라고나 할까. 후줄근한 옷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얼굴은 굳어 있거나 찡그려서는 안 되겠다. 몸 전체를 볼 수 있는 큰 거울은 아니더라도 얼굴만이라도 볼 수 있는 작은 거울 하나, 벽에 걸어두고 싶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난 사람, 내가 한 일들을 돌아보는 그런 거울. 일기장 같은 거울을. 양손아, 내게 영감을 주어 고맙다.
“틀이 한번 탁 깨지면 기회는 빅뱅처럼 확 터지죠”
사람마다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고 흥미롭다. 한곳에 뿌리내리고 사는 삶이 있는 반면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삶도 있다. 한마을에서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지만 꿈꾸는 삶은 서로 다른 경우가 많다.
올 농사철에는 평소 안 하던 짓을 해보았다. 뜬금없이 제주도로 2박3일 여행을 다녀온 거다. 아내가 발단이었다. 제주에 있는 보물섬 공동육아 협동조합에서 아내한테 강의를 부탁했기 때문. 공동육아는 학부모와 교사가 협동조합을 만들어 아이들을 함께 길러가는 교육공동체다. 장소는 대부분 아이들이 자연에서 뛰놀게 하기 위해 마당이 있는 집과 가까이에 산이 있는 곳으로 정한다. 아이들 끼니와 참도 우리 농산물로, 그것도 제철식품으로 해 먹이려 한다. 아내는 자신과 여러 모로 잘 맞는 곳이니 가고 싶어 했고, 먼 길 가는 데 나랑 함께 가길 바랐다.
나 역시 제주도 하면 만나고 싶은 사람이 몇 있다. 먼저 떠오른 사람이 우리 마을에 살다가 저 멀리 제주도로 이사 간 젊은 부부. 그리고 세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우리처럼 집에서 키우는 경이네. 제주도는 우리가 1983년에 신혼여행을 갔던 곳이다. 25년 만에 다시 한번 가보자는 아내의 청을 어찌 뿌리칠 수 있겠는가.
바람 같은 ‘박장 부부’
산골에서 제주도로 가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둘이 머리를 맞대고 궁리 끝에 아내는 강의를 하고 나는 인터뷰를 하며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은 오랜만에 아내와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이런저런 의논을 하다 보니 작은애가 따라가고 싶어 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제주도가 궁금하고, 비행기도 타보고, 경이네도 만나고 싶었나보다.
나는 가끔 땅에 매여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선택한 일이지만 곡식에 매이고, 풀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논농사가 시작되고 나면 논에 물이 잘 드는지, 논두렁에 물이 새는 곳은 없는지 아침저녁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불안하다. 어떤 논 주인은 며칠이고 돌아보지 않아도 벼가 잘 자라는 게 신기할 정도다. 가끔은 내가 땅과 곡식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곤 한다.
한번쯤 나를 돌아보고 싶다.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삶이란 무얼까. 나도 훌쩍 떠나는 게 가능할까. 논두렁에 앉아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노라면 저 비행기에서 보는 나는 어떨까. 이래저래 가슴이 설렌다.
여행을 가려니 우선 시간을 벌어야 한다. 한창 모내기 준비를 해야 하는 때. 예전에는 내가 손수 경운기로 논을 갈고, 써레질을 하고, 논을 반반하게 고르는 일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장님네 트랙터 힘을 빌렸다. 경운기로 하면 이틀쯤 걸릴 일을 트랙터로 하니까 반나절도 채 안 돼 모내기 준비가 끝났다. 이참에 제주도를 다녀와 모내기를 하면 되리라.
2003년에 우리 마을에 새 식구가 들어왔다. 이사 오기 전부터 마을에 소문이 돌았는데, 그건 이들이 젊은 신혼부부였기 때문이다. 아직 산골 추위가 가시기 전인 어느 날, 젊은 부부가 이사 왔다고 떡을 돌리며 인사를 왔다. 박범준(朴範埈·35)과 장길연(張吉燕·33) 부부.
별명은 ‘벙글’과 ‘바스락’이란다. 벙글이라면 기분 좋게 웃는 모양이 떠오른다. 벙글은 학창시절 별명이었는데 나중에야 알고 보니 영어 단어 bungle(어처구니없는 실수)의 뜻도 자신과 썩 잘 맞는다고 했다. 바스락은 작게 꼼지락거리며 움직일 때 나는 소리가 좋아, 이를 별명으로 했단다. 이들은 자신들 성을 따, ‘박장 부부’라 불리는 걸 좋아한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인사를 건네고 보니 박장 부부는 최고의 엘리트였다. 벙글은 서울대를, 바스락은 카이스트를 나왔다. 이들은 산골 생활에 차츰 적응해갔다. 봄이라지만 어느 순간 눈으로 뒤덮이기도 하는 산골. 뒷간을 써야 하고, 비만 오면 비포장 길이 움푹 패고, 여름 장마에 온 세상이 풀천지가 되는 걸 겪어야 했으리라.
이들 부부가 살던 집은 우리 마을에서도 가장 외딴 집으로 집주인이 손수 지은 집이다. 웃바람은 세고, 목욕실조차 따로 없었지만, 자연과 함께하려던 이에게는 맞춤한 집이었을 테다. 이 집과 거기 딸린 전답을 박장 부부는 1년에 단돈 50만원을 주고 빌렸다.
우리 마을에 사는 동안 벙글은 텃밭 농사를 조금 짓고 컴퓨터 교육이라든지 번역, 그리고 글쓰기를 주로 했고, 바스락은 자신의 건강을 돌보며 마을에서 가까운 ‘푸른꿈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천연염색을 가르쳤다. 그러니 우리 식구와는 자주 만날 일이 없었다. 2년 동안 한마을에 살면서 내가 이들 부부를 만난 기억이라고는 두세 번 정도. 퇴비 만드는 법을 알고 싶다며 부부가 우리 집을 찾아온 것과 우리 식구가 이 부부에게 홈페이지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만난 정도다.
그러던 어느 날 박장 부부는 ‘인간극장’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 부부가 일류대를 나온 데다 젊고, 인상도 맑고, 말도 똑 부러지게 잘하니 방송에서 탐을 낼 만도 했다. 주제도 ‘느리게 사는 행복’으로 도시를 갓 떠난 사람이 겪는 여러 에피소드를 다루었단다. 지금도 그렇지만 웰빙이니 로하스니 하는 건 이제는 스쳐가는 바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 흐름을 형성할 정도가 아닌가.
아무튼 이 방송은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왔다. 그 여세를 몰아 그동안 산골 생활을 하면서 써둔 글을 모아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라는 책을 냈다. 방송과 책을 보고 사람들이 마을로 얼마나 많이 찾아오는지. 한동안은 마을 전체가 도시에서 오는 손님들로 복잡할 정도였다. 박장 부부와는 제법 떨어져 사는 우리마저 이 집을 찾는 손님들로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으니. 박장 부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불편을 드린 걸 사과하는 뜻으로 이웃집을 돌며 다시 인사를 해야 했다.
상황이 그러하니 정작 본인들은 찾아오는 손님들로 말 못할 고생을 했다. 찾아오겠다고 연락이라도 하고 오는 사람은 아주 점잖고 예의바른 경우. 이른 아침에도 불쑥 마당으로 들어서고, 늦은 밤에도 문을 두드린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안방까지 들어와 기념사진을 함께 찍자고도 한단다.
예기치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이 오다 보니 오해도 많았고 비난도 적지 않게 받았다. 방송과 다르다든가 멀리서 찾아간 손님에게 그렇게 대할 수 있느냐든가. 선물을 일방적으로 보내놓고 나중에는 돌려받겠다고 해프닝을 벌인 사람도 있었다.
고등어와 보리밥
방송을 타기로 한 건 자신들의 선택이지만 방송에 나오는 장면은 그들의 손을 벗어났으니. 방송을 타면서 연예인에 버금가게 유명세를 탔지만 사생활을 보호할 만한 장치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집은 울도 담도 없는 집이다. 방송을 본 사람들은 자기 머릿속으로 그린 그림을 가지고 사람을 만난다. 상대방을 자신이 잘 안다고 여겨 거리감이 없다고 느낀다.
박장 부부는 더는 이곳에서 살기가 어려울 정도가 됐다. 사람에 치이고 지쳐, 집을 떠나 친지네 집을 전전했다. 그러더니 지난해 봄, 이사를 간다고 우리 식구한테 불쑥 인사를 하고는 바람처럼 떠났다. 남쪽 광양 어딘가로 간다는 거다.
그러더니 올봄에 다시 제주도로 옮겼단다. 이곳에서 하는 일도 예전과 달랐다. ‘바람도서관’이란 이름의 작은 도서관을 열고, 손님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 ‘바람 스테이’도 준비했단다. 정말 바람 같은 친구들이고, 자유로운 젊은이다. 우리 마을에 살다가 떠나간 이웃이 여럿이지만 새삼 박장 부부가 보고 싶다.
군산공항을 출발,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제주공항은 엄청 크고 복잡하다. 수시로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시골에는 어쩌다 다니는 버스조차 텅텅 비기 일쑤인데 마치 이곳에 사람이 다 모인 듯한 착각마저 든다. 어디서 이 많은 사람이 왔을까. 내가 이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요즘은 여행이 흔한 세상이다. 볼거리 중심의 관광여행도 많지만 각종 테마 여행도 활발하다.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는 외국 여행은 물론 자신의 내면을 찾아 떠나는 여행도 많다. 내가 떠나는 여행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람 여행’이다. 사람을 만나고, 그 삶을 이해하고, 삶의 영감을 나누고자 하는 여행. 이번에는 그 여행기를 적어 볼까 한다.
제주공항에 도착, 어리둥절 둘러보면서 공항을 빠져나오는 데 누군가 손을 흔들며 반긴다. 공동육아 학부모이며 교육이사인 이영숙씨다. 내가 공항에서 마중을 다 받아보다니 기분이 황홀했다. 그리고는 우리 식구에게 점심을 대접한다고 한 식당으로 안내를 했다. 그곳에서 공동육아 학부모이며 이사장님 한 분과 역시 학부모이자 선생님이신 또 한 분이랑 자리를 함께했다. 메뉴는 고등어와 보리밥. 제주도는 논이 거의 없어 보리농사를 많이 짓는단다. 농사 이야기가 나오니 내 입맛도 더 살아나는 듯 맛있다.
점심을 먹고 아내랑 헤어져 박장 부부가 사는 바람도서관을 찾았다. 그곳은 제주공항에서 택시로 20여 분 거리. 북쪽으로는 멀리 바다가, 남쪽으로는 한라산 정상이 보이는 중산간 ‘전원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삶 같은 여행’
주인이랑 반갑게 인사하고 집을 둘러본다. 게스트 하우스로 쓰는 별채(27평)가 있고 살림채 겸 도서관으로 쓰는 본채(33평)가 있다. 본채는 무주에서 살던 집과 견줄 수 없이 크고 세련된 집이다. 이곳 별채는 군데군데 굵은 통나무를 써가며 지은 전원주택으로 널찍한 방에는 에어컨과 신식 욕실이 딸려 있다.
잔디가 깔린 마당에는 우리가 사는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나무들이 아름답게 자라고 있다. 청단풍, 비자나무, 동백나무. 주먹만큼 크고 노란 열매가 달린 나무도 있다. 하귤이란다. 제주도는 귤 종류가 많단다. 여름에 많이 먹는 청견이라는 귤도 있다. 우리가 보통 먹는 귤은 씨가 없지만 청견은 씨앗이 있단다. 벙글은 집 안팎을 정리하고 나무를 새로이 옮겨 심는 일을 하며 바쁘게 움직인다.
바스락을 따라 본채로 들어서니 아파트 모델하우스에 들어선 듯하다. 실내 장식이며 가구들이 세련돼 보인다. 이 집 부부가 예전에 우리 이웃에 살던 사람인가 싶을 정도다. 내가 낯설어하자, 바스락이 쑥스럽게 웃으며 “원래 있는 것들을 그대로 쓰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한다.
이들 부부를 만나기 전에 생각한 키워드는 ‘바람 같은 삶’이었다. 이들은 ‘여행 같은 삶’ 또는 ‘삶 같은 여행’을 꿈꾼다.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고 싶다지만 현실에서는 걸림이 적지 않다. 이들 부부는 이 집을 마련하기 위해 빚을 안고 있는데다가 제주도로 자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집 둘레 정리가 덜 된 상태다. 도서관을 하려면 책 정리도 마저 해야 하고 홈페이지(www.baramdo.com)도 더 새롭게 단장해야 한단다.
바람 같은 삶은 꿈일까, 현실일까. 바람이 되자면 우리가 얼마나 작아져야 하는가. 한없이 작아지는 과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선택이란 말이 자주 나왔다. 바람처럼 살 수 있는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사람이 바람이 될 수 있는 건 바로 선택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선택은 누가 강제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르는 거다. 그렇다면 그 선택이 자유로운 쪽으로 나아가기 위한 또 다른 선택은 뭘까.
바스락이 던진 답은 ‘선택의 빅뱅’이다. 빅뱅(Big bang)이란 원래 ‘우주를 탄생시킨 대폭발’을 뜻하는 물리학 용어다. ‘선택의 빅뱅’은 한 번의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걸 그렇게 말한 거다. 우리가 일상에서 뭔가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놓치게 된다. 책을 볼까, 아니면 그 시간에 영화를 볼까 하는 선택이라면 두 가지 다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선택의 빅뱅은 다르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틀이 한번 탁 깨지면서 갑자기 빅뱅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선택의 폭이 열 개만 보였던 게 갑자기 수백 개로 확 늘어난다고나 할까. 선택의 폭이 넓어지니까 예전에는 불안하게만 봤던 것들도 불안하지 않고 다시 예측 가능하면서 안정감 있게 다가오더라고요.”
하룻밤에 10만원
돈 문제도 그렇다. 박장 부부는 이제 몸을 움직여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면서 삶에 대한 자신감이 부쩍 커졌다.
“돈에 대한 고민은 있지만 돈에 매인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해요. 저는 아직은 젊다고 할 수 있지요. 사기를 친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면 뭔가를 열심히 하면 먹고는 산다고 보거든요. 저는 이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운전을 하거나 건축현장에서 날품을 팔거나.”
이 집 부부는 결혼하기 전에 각자 나름대로 빅뱅을 경험한다. 벙글은 직장생활을 하다가 사람관계가 나빠지는 걸 무척 힘들어했다. 직장 밖에서 만났다면 더없이 좋을 사람인데도 좁은 테두리에서 부대끼다 보니 서로 헐뜯고 상처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몽골 여행을 하면서 빅뱅을 결심한다. 드넓은 초원에서 바람처럼 살아가는 유목민의 모습. 게르라고 하는 유목민 특유의 집을 보면서 영감을 얻었다.
바스락의 빅뱅은 좀더 극적이다. 정해진 길을 따라 누구보다 잘 달리던 사람. 초등학교를 또래 아이들보다 1년 일찍 들어갔고, 어렵다는 과학고등학교를 2년 만에 마치고 카이스트에 입학. 누가 봐도 훌륭한 과학자가 돼 나라의 큰 일꾼이 될 사람으로 기대를 모은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서서히 이 길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아니라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대학원 공부가 끝날 즈음 방황하기 시작한다.
“뭔가 이대로 내가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해버리면 너무나 후회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고민했지요. 졸업을 하느냐 마느냐를. 직장도 이미 서류 면접 다 하고, 합격한 상태였거든요. 졸업하고 가기만 하면 되는데, 가기가 싫은 거예요. 엄청난 혼란이었지요.”
그렇다고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닌 막막한 상황. 남들이 보면 너무도 이해가 안 되는 짓이지만 졸업을 미루고 다양한 경험을 시도한다. 바스락에게는 대학원 졸업을 미룬 것이 빅뱅이었다고 한다.
“휴학하고 여러 사람을 만났어요. 졸업을 미루기로 결정하기까지는 엄청난 두려움에 떨었는데, 그렇게 다녀보니까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한 번의 경험이 살아가다가 두려움이 있는 선택을 할 때면 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처음 할 때는 너무 힘들었는데 그 다음 선택을 할 때는 조금 고민을 덜 하고 점점 누적돼 이제는 별로 고민하지 않는 정도까지 온 셈이지요(웃음).”
빅뱅이란 말은 의식의 확장을 가져온다. 박장 부부와 의식의 대폭발을 함께 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밤 12시를 넘는다. 쉬이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그래도 자야지. 이 집의 하룻밤 숙박료는 10만원이다. 박장 부부와 처음 약속을 잡을 때는 예전에 알던 이웃이라 돈 받는 걸 어려워했다. 별채에 있는 펜션말고 본채에 작은 방이 있는데 거기가 불편하지 않다면 자도 좋다는 의견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하는 얼마만의 여행인가. 이 참에 나도 하룻밤에 10만원짜리 잠을 한번 자보자. 솔직히 우리 같은 촌놈이 제주도 여행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 혼자 왔다고 쳐도 왕복 비행기 삯 10여만원에, 공항까지 오고가는 차 기름값에, 공항 주차비를 합치니 여비만도 20만원이다. 여기에다가 펜션 하루 숙박비 10만원과 제주도에서 움직이는 택시비, 끼니 값을 셈하니 1박2일에 드는 값이 얼추 40만원에 달한다. 움직이는 족족 돈이요, 자는 것조차 돈이다 보니 갑자기 돈이 낯설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나로서는 일이 아닌 단순한 여행이라면 엄두가 나질 않는다.
방은 비교적 잘 정리돼 있고 방구석에 책 몇 권을 비치한 게 눈에 띈다. 표지를 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화’. 이들 부부가 꾸리고자 하는 삶과 이 책들이 잘 맞는구나 싶다. 책 내용은 보지 않았지만 뭔가 떠오른 이미지가 있다. 요즘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조차 누리기 힘든 세상이다. 휴일이라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누가 쉬지 말라고 해서 못 쉬는 게 아니다. 나 역시 따로 휴일을 가져본 지가 참으로 오래됐다. 뭔가를 해야 오히려 마음이 편한 쪽으로 바뀐 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 새소리에 잠이 깼다. “호로로~ 호홋케” 휘파람을 부는 듯한 휘파람새다. 동쪽 창 너머로 붉은 해가 서서히 올라온다. 집을 나와 둘레를 돌아다녀본다. 전원마을답게 집들이 아담하고 잘 지어져 한결 여유 있는 느낌이다. 집 뒤로 멀리 한라산이 보이고, 갈대가 바람에 흔들린다. 조금 지나자 이곳 마을 분들이 길가에 풀을 벤다고 우르르 나와 일을 한다. 벙글도 낫을 들고 풀을 벤다. 벙글은 그동안 산골 생활을 해서 그런지 풀 베는 솜씨가 제법이다.
바스락은 아침 준비를 한다. 손님에게 간단한 아침을 제공한단다. 그래도 우리식구는 멀리서 찾아온 이웃이라고 단호박수프와 제주도 보리빵을 정성스럽게 마련해주었다. 덕분에 촌놈이 서양식을 먹어보는 호강을 누린다.
식탁에 앉아 남은 이야기를 마저 나누었다. 바스락은 손으로는 요리를 하면서도 입으로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새가 자연스럽다. 선택의 빅뱅은 우주 팽창과도 같이 무한대로 뻗어간다. 그이는 결혼 문제에 대해서도 그랬다. 예전에는 결혼을 복잡하게 생각했고, 그렇게 따질수록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쪽이었다. 어떤 점에서 세상은 공평하다 싶다. 바스락은 보통 사람이 어려워하는 공부는 쉽게 잘했지만 많은 사람이 쉽게 하는 결혼에 대해서는 아주 어려워했다.
개에게 위로를 받고…
그러던 바스락이 결혼을 받아들이는 계기는 뜻밖에도 사랑이 아니었다. 바스락과 연애를 하던 어느 날 벙글이 청혼을 해오자 결혼을 외면하던 바스락이,
“결혼을 왜 하는 거지요?”
벙글의 답이 걸작이었다.
“자유!”
자유를 위해 결혼을 하다니. 보통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가정에 매인다고 여긴다. 바스락도 그런 점에 대한 염려가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에 바스락은 결혼을 통해 자유를 잃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얻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실제 박장 부부는 결혼을 통해 묶이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이전보다 한결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된다.
아기에 대한 생각도 그랬다. 결혼 당시만 해도 바스락은 아기를 가질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기가 생기면 갖기로 했단다. 이렇게 생각이 바뀐 걸 바스락 자신은 혁명이라고 말했다. 보통 혁명이라면 사회를 근본에서 변혁하는 거지만 개인 삶에서 혁명이란 부자연스럽기만 하던 삶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데 있나보다. 이름 하여 자기혁명이다. 결혼도 아기도 자연스러운 것인데 혁명적으로 ‘선택’한 셈이다.
바스락이 아기를 거부했던 데는 인연에 대한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 자식이란 부모 뜻대로 되지 않는, 인연 중에서도 가장 질긴 인연. 여러 인연 중에서도 자식과의 인연은 가장 힘든 것으로만 느꼈고, 가능하다면 일부러 만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딱딱한 껍데기를 벗겨내는 데는 치유가 필요하다. 이렇게 사람 공부를 하다 보면 사람마다 치유과정이 참 다르다는 걸 느낀다. 이 집 부부에게는 개가 큰 몫을 차지했다. 이 집은 풍산개 두 마리를 자식처럼 키웠다. 그래서인지 개에 대한 애정이 좀 유별나다.
“사람 같으면 미안한 짓을 하고 나서도 미안하다는 말을 잘 못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게 쑥스럽기도 하고, 하려고 해도 쉽지 않잖아요? 그러다 보면 감정이 속에서 꼬이기도 하고 쌓이기도 하는데. 동물한테는 그러지 않는 거예요. 감정 표현을 쉽게 해요. 내가 개한테 뭔가 미안한 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쉽게 ‘미안해’ 하면서 쓰다듬게 된단 말이지요. 그럼 개는 막 꼬리를 흔들며 기쁘게 받아줘요. 만일 똑같은 상황에서 같은 말을 사람한테 했다고 해봐요. ‘야, 너 뭐야? 별 미친 놈 다 있네’(웃음) 그런 소리 듣기 십상이잖아요. 사람한테 치유 에너지를 받자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딱 맞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 데 우리로서는 개가 그걸 쉽게 해준 셈이에요. 개와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다 보니까 사람에 대해서도 차츰 애정을 표현하는 데 조금씩 익숙해지는 것 같아요.”
곶자왈 용암동굴
이 집 부부는 개한테 배우는 것도 많지만 위로도 자주 받는다고 했다. 우리는 부부싸움을 하면 아이들이 곧잘 말리는데, 이 집은 개가 그 몫을 담당한단다.
“개를 키워보니 꼭 구속만이 아니라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걸 경험하겠더라고요. 사랑을 주고 또 되돌려 받는 과정을 겪으면서 사람에게도 그런 본성이 있다는 걸 느끼겠더라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기를 갖는 것에 용기가 생기데요.”
박장 부부 삶에서 아기는 또 다른 바람이 돼줄까. 나는 바스락과 맞장구를 치며 우리 경험을 들려주었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책을 낸 것도 다 아이들 덕이다. 아이들이 우리 부부에게 글을 쓸 수 있게 했고, 우리가 쓴 글을 아이들이 다시 읽고 일일이 가다듬어주어 책을 낸 것이다. 지금처럼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는 것도 다 아이들 덕이 아닌가. 올해 모내기조차 학교 다니지 않는 아이 친구들이 우르르 와주어 쉽게 끝이 났으니. 바스락이 휴학을 통해 ‘혼자’ 빅뱅을 경험했다면 우리 식구는 아이들이 학교를 벗어남으로써 식구가 ‘함께’ 빅뱅을 경험한 셈이다.
바스락과 이야기를 마칠 무렵, 경이네가 차를 끌고 우리 있는 곳으로 왔다. 경이 아버지 허윤석(許允碩·43), 어머니 최복인(崔福仁·37)씨는 제주도 토박이다. 한 사람은 바닷가, 또 한 사람은 한라산 중턱에서 나고, 둘 다 제주도에서 대학을 다녔다. 제주 역사와 삶에 대한 애정이 무척 깊은 분들이다. 아이가 셋인데 모두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경이는 열 살 여자아이다. 오빠 성학(15), 언니 란(12)이랑 한식구다.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우고 성장해가는 가족. 우리 식구랑 만남도 그냥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우리는 경이네한테 제주도를 느끼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외지인이 다니는 관광코스가 아닌 제주도 사람이 보여주고 싶은 제주도의 속살을. 경이네는 일상을 접고 이틀 동안이나 우리 식구를 안내했다.
소년의 슬픔, 두려움
제주도 하면 곶자왈과 오름을 보아야 한단다. 우리는 곶자왈 지역으로 유명한 선흘을 먼저 들렀다. 곶자왈, 화산활동으로 빚어진 용암지대로 돌과 굴이 많아 겉보기는 볼품도 없고 농사짓기도 어려운 땅. 하지만 그 역사를 알고 보면 달라진다. 제주도 하면 빠질 수 없는 역사가 4·3항쟁이다. 그때 제주도 사람들이 몸을 피해 숨을 수 있었던 굴이 바로 이곳 곶자왈에 있는 용암동굴이라 했다.
여기서 잠깐 경이네 블로그에 올라 있는 ‘나의 4·3과 아버지의 4·3’이란 글 일부를 인용해본다.
“꽁꽁 얼었던 동태가 쑤욱 풀리는 것처럼 온몸의 힘이 빠진다. 우리 시아버지가 4·3을 떠올리며 하시는 말씀이다. 4·3만 생각하면 온몸의 힘이 그렇게 빠지고, 4·3때 목숨을 잃었다 살아나 이미 귀신이 된 몸이라고. 아버지에게 4·3은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걱정 없이 살던 14세 소년이 어느 날 갑자기 부모 형제를 잃고 가장이 되는 사건이었고, 밥을 먹다가도 경찰이 온다는 소리에 수저 하나를 들고 어두운 벽장 속으로 숨어 있어야 하는 사건이었고, 소년이 주검을 묻어야 하고, 한꺼번에 총살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고, 소년이 ‘나는 이 숲에서 죽게 될까 아니면 저 길가에서 죽게 될까’ 담담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일이었고, 소년이 한꺼번에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을 대신하여 큰 양푼이에 수저를 여러 개 꽂아놓고 제사를 지내야 하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그때 모두 11분의 가족을 잃으셨다고 한다. (중략) 나는 4·3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4·3은 가슴 속의 응어리다. 내가 그 가슴 속 응어리의 아주 일부분이라도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때 4·3을 조금 안다고 해도 될까?” |
말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4·3. 우리는 말없이 역사의 숨결을 주고받고는 선흘을 지나 ‘오름’을 보러 갔다. 제주도는 화산섬이다. 화산이 분출하면서 작은 화산구가 수백 개가 생겼는데, 그걸 제주도 말로 오름이라 한단다. 경이네랑 함께 간 오름은 용눈이 오름. 이 오름은 자그마한 산으로 나무 없이 풀로 뒤덮여 색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편안하고 포근한 땅. 어찌 보면 쓸모없는 땅이라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움과 위로를 주는 땅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살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자연을 두 눈 가득 담고 김영갑 갤러리로 갔다. 경이 어머니는 “너무 흔하면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잘 모르나 봐요. 김영갑 선생님은 제주도 사람들이 제주도의 오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고 있던 시절, 오름에 반해 제주도에 머물며 사진을 찍다 돌아가시도록 우리는 몰랐으니까요”하며 사진을 보고 또 본다.
오후에는 경이네가 사는 제주 서쪽 바닷가를 갔다. 보말을 잡아 죽을 끓여먹자고. 제주도 하면 바다를 빼놓을 수 있겠는가. 아내는 창 밖에 바다만 보여도 바다다! 하고 감탄을 하는데, 우리가 그 바다에서 뭔가를 얻어먹을 수 있다니. 제주도에서는 고둥을 ‘보말’이라고 한다. 경이 아버지는 바닷물에 들어가 큰 보말을 줍고, 성게도 잡고, 미역도 뜯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바위에 붙은 보말을 주워서 경이네 집으로 돌아왔다. 보말죽을 끓여 점심으로 먹었다. 바닷바람을 쐬고 돌아와 뜨뜻하게 끓인 죽 한 대접. 가장 제주도다운 음식을 먹은 기분이었다.
집착을 벗어나는 여행
다음날 역시 강행군. 쪽빛 바다와 깨끗한 모래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협재 해수욕장에 잠시 들러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나서 금능석물원을 갔다. 돌조각을 모아놓은 곳인데 작품들이 고상하고 어려운 게 아니라 제주도 삶을 보여주는 것들이라 무척 친숙하게 느껴진다. 똥 싸는 모습이 많다. 사람이 똥을 싸면 돼지가 똥을 받아먹기 위해 반갑게 고개를 쳐드는 모습이라든가, 똥 싸는 엉덩이 모양의 익살스러운 돌의자도 놓여 있다.
가는 곳마다 볼 게 많았지만 석물원이 넓다 보니 간간이 쉬어가며 보아야 했다. 그러다가 석물원 한 귀퉁이에서 돌을 깎고 있는 한 할아버지를 보았다. 그늘도 없이 뜨거운 뙤약볕 아래 정으로 돌을 깨고 입으로 후 불어 돌가루를 날리신다. 일에 몰입하는 모습. 인사를 건네니 환하게 웃으시며 어디서 왔냐며 우리를 맞아주신다. 몇 가지 질문을 하니 일손을 놓고 편안하게 말씀을 들려주신다. 이분이 바로 이 석물원을 세우신 장공익(張公益·76) 할아버지란다.
“수십 년 돌을 깎다 보니 재고가 쌓이더라고요. 그게 볼거리가 된다고 해서 그걸 이렇게 늘어놓고 석물원을 열기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저절로 열매를 맺은 거란다. 할아버지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한결같아 보인다. 선 자리에서 거의 평생을 한 가지 일을 해오신 할아버지. 앞으로도 만들고 싶은 작품이 너무나 많다고 웃으신다. 작품 하나하나도 좋았지만 그 어떤 작품과 견줄 수 없이 할아버지 얼굴과 손, 그리고 삶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제주도에서 보낸 2박3일.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체력이 달려 힘들기도 했지만 아주 색다른 경험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여행이 뭘까를 다시 곱씹어보았다. 아주 옛날 사람들에게는 여행이 목숨을 거는 게 아니었을까. 더 나은 삶을 선택하기보다는 배고픔이나 추위 또는 맹수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
이제 그런 여행은 거의 사라졌다. 삶을 더 여유롭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여행을 한다. 현대인에게 두려움이 있다면 그 대부분은 그 어떤 집착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다. 사람 여행으로 떠났지만 땅과 역사와 이웃을 다시 보게 된 여행.
이제 여행은 특별한 게 아니라 삶이란 생각이 든다.
“빛나는 아이들아, 자뻑과 남뻑의 뿌리를 내려라!”
나는 가끔 엉뚱한 욕심이 생긴다. 자식을 더 가지고 싶다는 욕심. 우리 집은 아이가 둘인데 나이 차가 많다. 큰아이는 스무 살, 작은아이는 열세 살이다. 아이들에게 느끼고 배우는 것도 많고, 아이들이 농사일에도 나름대로 한몫을 하니 자식 덕을 톡톡히 본다. 그렇다고 이제 아이를 새로 낳기에는 나이가 많고, 입양을 하자니 선뜻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이런 고민은 아내 역시 비슷하다. 조금만 더 일찍 산골로 왔다면 아이를 더 낳았을 거란다. 큰아이 탱이도 제 아래 동생이 하나쯤 더 있으면 했고, 작은아이 상상이는 누나랑 나이 차가 적었으면 했다. 식구마다 갖고 있는 이런 생각을 밥상머리에서 나누다가 일을 하나 벌이기로 했다.
자식을 여럿 갖자!
이름하여 ‘모내기 캠프’. 일정은 2박3일, 아이 친구들을 모아 모내기를 함께 하는 작은 캠프를 열어보자는 거다. 이왕 캠프라는 이름을 걸 바에는 좀더 그럴 듯한 구실이 필요하겠다. 캠프 기간만이라도 우리 식구가 추구하는 꿈,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반반으로 하는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모내기하는 데 네 시간, 그리고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데 네 시간. 주제는 청소년이라면 관심을 가질 ‘자기 사랑’ ‘연애’, 그리고 ‘평화로운 출산’으로 잡았으며 마지막 날에는 자신을 표현하는 공부로 글쓰기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이렇게 대강 틀을 잡고 아이들을 모았더니 이틀 만에 인원이 찼다. 마감을 했는데도 한사코 오겠다는 아이들로 예상을 넘어 아홉 명이 함께했다. 사실 더 받고 싶어도 방은 비좁고, 뒷간도 불편했다.
‘평화로운 출산’이라는 주제는 여기 이웃인 박경미(38)씨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그이는 흔쾌히 동의했고, 이 기회에 모내기 캠프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고 싶단다. 이 다음에 산골자연학교를 꾸리는 데 경험이 된다고 하면서. 엄마가 한다니 이 집 아이인 현빈(11)과 채연(9)이도 함께 하겠단다. 이렇게 하다 보니 캠프 규모가 제법 커졌다. 나는 팔자에도 없는 열한 아이의 아비 노릇을 하게 생겼다.
캠프 첫날. 가까이서 또 멀리서부터 아이들이 하나 둘 우리 집으로 왔다. 대전, 전주를 비롯해 서울, 봉화, 인제. 연령도 골고루, 아홉 살 채연이부터 스무 살 탱이까지. 남녀 성비도 어느 정도 잘 맞다. 여자가 여섯에 남자가 다섯.
먼저 온 아이들은 우선 집둘레를 익히고, 우르르 앵두나무로 가 앵두를 따 먹고, 어울려 농구를 한다. 아이들이 다 오자, 캠프 안내에 이어 식사 조를 짰다. 먼저 캠프에 대한 간단한 일정 소개와 집 안내.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게 뱀 이야기다. 우리로서는 걱정되는 부분. 캠프 때 흥분하면서 보내다 보면 자칫 안전사고 위험이 있다.
“뱀에 물리지 않으려면 어찌 해야 좋을까?”
산골 생활 경험이 많은 현빈에게 먼저 물어보았다.
“정신 차리면 안 물려요.”
아이다운 답이다. 정환(14)이 답은 조금 합리적이다.
“아빠가 그러는데요. 풀이 많아 땅바닥이 안 보이는 곳에는 가지 마래요.”
그러고 보니 시골에 사는 아이가 많아 다들 알 만큼 안다. 나쵸(15)와 명지(16) 이야기는 아주 걸작이다.
“우리는 멧돼지가 땅을 하도 문대서 땅이 다 보여요(웃음).”
“뱀 목덜미를 잡으면 못 물어요(배꼽 잡는 웃음).”
도시에서 온 아이들에게도 물어보았다. 민지(15)는 조금 무섭다고 했다. 지민(15)이는 그렇지 않단다.
“뱀을 많이 봤고요. 제가 뱀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렇구나. 산골에 사는 아이든 도시에서 온 아이든 나름대로 자신을 방어할 힘이 있지 않겠나. 아이들은 자연에 한결 가깝다.
‘자뻑’에서 ‘남뻑’으로
이렇게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니 저절로 교육이 되고 또 안심이 된다. 그리고 우리 집만의 독특한 뒷간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는 모내기 준비에 들어갔다. 손모내기를 하자면 먼저 못자리에 모를 뽑고 한 움큼씩 모춤을 묶어야 한다. 언제나 시작이 중요하다. 논에 들어가보는 그 첫 시작. 논흙은 느낌이 특이하다. 자신이 있다는 아이부터 먼저 논에 들어간다.
“어, 느낌이 이상해. 이런 느낌 처음이야!”
일하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논 체험이다. 발바닥 느낌도, 몸의 중심도 아주 색다를 수밖에. 아이들이 모두 논에 발을 담그자, 아내가 지금부터 할 일이 무언지 설명을 했다. 아이들은 못자리에 둘러서서 모를 뽑고 그걸 묶어 모춤을 만들었다. 묶은 모춤을 넓은 논에 듬성듬성 던져 넣고 일과를 끝냈다.
저녁을 먹고는 자기 소개와 ‘자기 사랑’에 대한 주제 발표와 토론을 했다. 이 부분은 내가 진행을 맡았다. 마루방에 우르르 둘러앉아 눈을 반짝이는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보니 가슴이 다 떨린다.
되도록 아이들 말로 풀어 나갔다. ‘자기 사랑’과 관련해서 아이들이 인터넷에서 자주 쓰는 말이 ‘자뻑’이다. ‘자신에 대해 뻑간다.’ ‘뻑간다’는 ‘자신에게 도취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자뻑은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느끼는 황홀한 기쁨이다.
‘아, 내가 이걸 다 하다니! 음, 나도 할 수 있구나! 역시 나는 훌륭해!’ 그러니까 단순한 자기 자랑과는 조금 다르다. 남과 견주는 자랑이나 남을 무시하는 교만함이 아니다. 자신을 믿고, 자기 성장에 감탄하는 그런 기분. 자뻑은 나르시시즘과도 다르다. 나르시시즘이 병적인 자기 사랑이라면 자뻑은 건강한 자기 사랑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성장하면서 느끼는 기쁨, 자기 존중감, 자기 충만감의 뿌리들.
내 생각과 달리 아이들에게서 자뻑을 끌어내는 게 쉽지 않았다. 아이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학교에서 받았던 경쟁교육과 따돌림의 영향이 컸다. 시험을 치고 나서 열 문제 가운데 아홉 문제를 맞히면 칭찬을 받는 게 아니라 틀린 한 문제로 지적을 받고 심지어 틀린 만큼 매를 맞은 아이도 있단다. 또 또래 사이에서 자뻑을 하다가는 자칫 따돌림을 당하기 십상이라 한다.
그렇게 공감대가 이뤄지면서 한두 명이 자뻑을 시작하니 차츰 분위기가 살아나고 다른 아이들도 조심스럽게 자신감을 내비치며 자뻑을 한다. 빙 둘러가며 아이들이 하는 자뻑을 들으면서 서로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면서 자뻑을 넘어 ‘남뻑’을 해보자 했다. 남뻑은 남에 대해서도 취하는 것이라고 즉석에서 말을 만들었다. 자신에게 취할수록 남에 대해서도 취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혼자만 잘나서는 결코 잘난 게 아니다. 내가 잘나듯 내 식구도, 내 친구도, 내 이웃도 잘나야 진정한 자뻑이 된다고 했다.
아이들은 자뻑보다 남뻑을 더 잘한다. 한 사람을 놓고 그 자리에 둘러앉은 사람 모두가 그 한 사람에게 좋았던 점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분위기가 한결 고조된다. 무엇보다 본인은 본인도 모르던 자기 장점을 알게 된다. 여러 사람에게서 남뻑을 받아보는 건 아마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지 않을까.
우리 집에 있는 동안은 모두가 우리 식구다. 우리 방식대로 하루를 지낸다. 우리는 일하고 나서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 이튿날 일어나 먼저 태극권으로 간단히 몸풀기 운동부터 했다. 그리고 논으로 갔다. 논둑에서 아내가 모내기를 어떻게 하는지를 설명했다. 어제 한번 논에 들어가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아이들은 논에 쉽게 적응했다. 모내기가 처음인 아이들은 서투르기 짝이 없지만 제 딴에는 모두 열심이다. 자기 몸 하나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넘어질 듯 휘청휘청하는 아이도 열심히 해보려 한다.
한 사람이 하는 속도는 느리지만 워낙 여럿이다 보니 그래도 진도가 나간다. 논이 좁고 길어 사람이 우르르 들어서니 사람 반 모 반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게 두 시간 모내기를 하고 아침을 먹었다. 다시 논으로 내려와 모내기를 하고 아이들 집중도가 떨어질 때쯤 끝냈다.
사람 반, 모 반
점심을 먹고, ‘평화로운 출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경미씨네로 갔다. 이 집은 우리 집에서 산길로 1km를 올라가야 한다. 산책 삼아 걷기 좋은 거리다. 나이 어린 친구들은 오르막 산길인데도 먼저 뛰어가 그 집 마당에서 신나게 논다.
어디서 이야기를 나눌까 하다가 경미씨가 채연이를 낳았던 방에서 하기로 했다. 세 평 남짓 작은 방인데도 어른 아이 다 해서 열댓 사람이 앉을 수 있었다. 경미씨는 캠프에 온 아이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먼저 물었다. 부모가 꾼 태몽과 자신이 태어난 과정을 잘 아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어디서 어찌 태어났는지를 모르는 아이도 있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잡히자 경미씨가 집에서 아이 낳은 이야기를 했다. 여자애들은 물론 남자애들도 관심을 가지고 들었다. 저희들도 이 다음에 부모가 될 테니까….
이야기를 끝내고 나오자, 경미씨 남편이 빵을 구워주었다. 아이들이 잘 먹는다. 밥보다 빵에 더 익숙한 음식 문화가 아닌가 싶다.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는 아내가 진행하는 ‘연애 토론’에 참여했다. 여자 아이들이 로망을 표현하는 데서 한결 구체적이고 솔직하다. 남자 아이들도 관심은 있지만 표현은 서툰 편이다. 그러고는 10시에 모두 잠자리에 들기는 했는데 아이들은 쉬이 잠들지 않았다. 삼삼오오 이불 속에서 수다를 떠느라고 더 늦게 잠들었단다. 전국에서 온 아이들이 오랜만에 만났으니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아이들이 고맙다
그 다음날은 마지막 모내기. 늦게 잤음에도 8시 전에는 다들 일어났다. 모내기도 한결 속도가 난다. 예정된 논에 모내기를 쉽게 끝냈다. 아이들은 자신들 실력이 늘어난 거에 대해 모두 뿌듯해한다. 또 한번 자뻑을 경험했다. 나로서는 아이들이 모내기하다가 빠진 곳이나 너무 성기게 심은 곳을 메울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우리 식구끼리 한꺼번에 모내기를 다 하자면 허리가 아프다. 그런데 이렇게 빠진 곳을 듬성듬성 때우는 거는 적당한 운동거리다. 새삼 아이들이 고맙고, 이렇게 아이들을 보내준 부모님들도 고맙다.
논에서 올라와, 마지막 주제인 글쓰기. 먼저 왜 글을 쓰는지, 어떻게 글을 쓰면 좋은지를 내가 설명하고 글쓰기를 했다. 아이 둘은 컴퓨터로 쓰고, 나머지는 밥상 두 개에 둘러앉아 공책에다가 연필로 썼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연필로 글씨 쓰는 소리가 참 좋다. 또각또각, 똑똑똑. 숨소리조차 멎은 듯 열심이다. 하소연하는 아이들도 있다.
“아, 나는 시작이 어려워.”
“나는 쓸 게 너무 많아 무얼 먼저 써야 할지 모르겠어.”
점차 자리가 잡혀가며 속도가 난다. 나 역시 쓸 게 참 많다. 정말 오랜만에 여러 아이와 함께한 2박3일. 일도, 토론도, 사람 사이 관계 맺기도 다 쓸거리다.
글쓰기가 끝나고 발표 시간. 발표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안 해도 좋다니까 채연이는 발표하기가 쑥스럽단다. 또 자신이 발표한 글에 대해 칭찬만 원하는 사람은 칭찬만 하고, 도움말까지 바라는 사람에게는 도움말도 주기로 했다. 그렇게 했더니 대부분 도움말까지 바란다. 아이들은 모두 자기 성장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여기서는 아이들이 쓴 글 중 두 편만 옮겨보겠다. 먼저 민지(15) 글. 민지는 캠프 기간에 말이 별로 없어 조금 마음이 쓰인 아이였는데, 글로는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제목 : 자연과 사는 것 이 세상에는 물건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다. 살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 집에는 잡동사니가 꽤 많다. 말 그대로 쓸모없는 것이다. 세상이 보다 복잡, 다양해지면서 많은 물건이 생겨나고, 그래서 더 낭비를 하게 된다. 탱이 언니 집에 와보니, 잡동사니가 없이 아주 깨끗했다. 물건이 많아 보이지 않아 사는 데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2박3일간 언니 집에 있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책 ‘아무 것도 못 버리는 사람’의 저자가 말한 ‘잡동사니의 냄새’가 나지 않는 듯했고 공기 순환(?)도 잘 되는 거 같았다. 많이 소유하고 배치하는 것이 비록 잠깐 동안의 만족감을 채워주는 것 같지만, 난 이곳에 와서 실질적인 것은 바로 자연의 힘을 빌려, 또는 서로 어우러져 그곳에서 나는 것을 먹고 자연의 소리를 듣고 사는 것이 진짜 사람답게 사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언니네가 새삼 부러워졌다. 전기가 끊어지면 살 수 없는 높은 시멘트 건물이, 우리 삶을 더 삭막하고 딱딱하게 만들어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 같다. |
아이가 우리 집 살림살이를 이렇게 본 건 우리로서는 너무 뜻밖이다. 새삼 우리 삶에 대한 자부심이 생긴다. 민지 발표가 끝나자, 명지는 민지가 이 다음에 정치가가 되면 좋겠단다.
다음은 동영(13)이가 쓴 캠프 후기 글. 동영이는 여기 온 첫날 저녁부터 몸이 가렵다고 내게 하소연을 했다. 캠프 내내 그러더니 다행히 마지막 날에는 가려움도 없어졌다. 자연 결핍에서 오는 일시적인 장애가 아닐까 싶다. 동영이는 글쓰기 시간에 글을 다 못 써, 나중에 집에서 마무리를 했다. 글이 길어 조금 줄였다.
제목 : 시골촌놈? 도시촌놈! 상상이네 집에 다녀온 지 1년 만에 다시 상상이네 모내기를 하러 갔다. 도시촌놈인 나에게는 시골이 잘 적응되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알레르기 때문에 감기 걸리고, 코가 막혀 밤에 잠 잘 때 입 헤~ 벌리고 자고, 숙면을 못하니 피곤하고…(ㅠ.ㅠ). 맨발로 다니는 시골 아이들이 나로서는 신기해 흉내(?)내보려 맨발로 다녀봤는데, 울퉁불퉁한 시골 땅이 도시의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와는 천지차이다. 거기다 풀독까지 올라 온몸이 근질근질, 수난의 연속이었다. 매캐한 도시 공기, 더러운 환경 속에서 살다, 갑자기 깨끗하고 순한 자연에서 생활하니, 내 몸이 적응을 못해서 말을 안 듣는 거다. 논에서 물자라 수컷이 알을 등에 지고 가는 것도 보고, 듬직한(?) 물장군도 보았다. 갈수록 실력이 늘어 마지막 날에는 1시간도 안되어 논 하나를 다 메워 흐뭇했다. 또 모내기를 하며 자연과 한층 더 가까워지고 동화되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모내기 하는 방법도 꽤 복잡했다. 모를 판처럼 직사각형으로 키운 다음, 뿌리째 뽑아 모춤을 만든다. 그걸 논에다 던져놓고, 하나하나 풀러 조금씩 뜯어가며 모를 논에다 박는다. 이때 사람의 사랑으로 모를 정성스럽게 박아야 모가 잘 자란다고 한다. 나는 아저씨의 말씀을 듣고 정성을 다해 심었다. |
희망의 원천
자뻑에 대한 토론도 재미있었다. 자뻑이 없으면 우리 생활은 우울해지고, 늘 기분이 나쁠 것이다. 또 남뻑은 남을 칭찬해주는 것인데, 사람들끼리의 교류에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난 학교 다닐 때 남의 일에 자주 참견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 참견이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이나 일을 지적하는 것이어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잘못된 점보다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하고 칭찬해주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남뻑과 자뻑, 이것은 희망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연애! 난 해보지 않았지만, 멋질 거 같다.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어디 또 있을까? 흠, 난 ‘연애인’ 이라는 말을 창조했다. 멋지고 아름다운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 사전엔 없다. 나도 연애 한번 해보고 싶다. 사랑이란 건 내가 그 사람을 위해 백 번도 더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것이란다. 이러니 어찌 연애가 쉬울 수 있을까? 그러나 남자와 여자 사이에 꼭 연애의 감정만 있으란 법 있나. 우정도 있지. 시골이 이렇게 좋은 줄 알았더냐? 물론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자연과 교감하며, 자연과 함께 하며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것! 시골에 사는 것은 또 하나의 혜택이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시골촌놈이라 부르면 안 되겠다. 시골에 사는 자연인아! 우리 도시촌놈을 불쌍히 여기라! |
눈으로 마음을 읽는 아이
아이가 여럿이다 보니 있는 둥 마는 둥 한 아이가 있고, 유난히 눈에 잘 들어오는 아이도 있다. 이번 캠프에서 내 머릿속에 강하게 남은 또 다른 아이는 다섯 살 하늘이다. 하늘이네는 우리 논에서 가깝다. 논에서 때 아니게 시끌벅적 소리가 나니 오빠 별이(7)와 소리 나는 데로 찾아왔나보다. 둘이서 큰 길을 나두고 논둑 풀숲을 헤치며 곧장 내려왔다.
모내기를 끝내고 점심 먹으러 가자 하늘이도 우리 집으로 따라왔다. 밥을 먹기 전에 남자 녀석들은 농구를 한다고 바람을 일으키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데 하늘이는 그 곁에서 구경을 한다. 나로서는 저러다가 아이가 다치지 않을까 마음이 쓰인다.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해도 눈알을 굴리면서 꿈쩍도 않는다.
밥상이 다 되어 밥 먹을 시간. 하늘이가 어디 있나 보니 어느새 명지 품에 앉아 밥을 먹는다. 정말 놀라운 아이다. 하늘이는 이 마을에서 태어났으니 나는 5년째 이 아이를 지켜보았다. 어쩌다 마을에 큰일이 있거나 하면 하늘이는 아무에게나 잘 간다. 하늘이 어머니 말로는 아이가 낯을 가리지 않는 게 매우 신기하다고 했다. 붙임성이 좋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 캠프 기간에 새로운 걸 알았다. 하늘이는 낯을 안 가리는 게 아니고 눈을 맞출 줄 아는 아이라는 걸.
이건 아주 중요한 능력이지 싶다. 말하자면 생명력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캠프 기간에 우리 집에 있던 사람이 여럿이고, 이 가운데 하늘이가 익히 아는 사람도 제법 많다. 우리 식구는 물론 여기 사는 이웃 언니 오빠들도 다 안다.
언뜻 생각하면 아이는 익숙한 사람 곁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도 하늘이는 그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명지 품에 안겨 밥을 먹었다….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한가. 한참을 두고 생각했다. 몇 가지 생각이 정리된다. 우선 하늘이가 내 품에 안겨 밥을 먹은 적이 두어 번 있다. 제 부모가 곁에 있는데도 그랬다. 그때를 돌아보면 아이는 나랑 눈을 맞추었다. 내가 자기한테 관심이 있다는 걸 눈으로 알아본 거다. 그러니 그 눈빛을 믿고 스스럼없이 내게 다가온 거다.
눈에 넣고 싶을 만큼 예쁜 아이. 한눈에 반한다는 말이 있듯 귀여운 아이다. 그런 내 마음이 전해지자 아예 내 무릎에 앉은 거다. 눈이 맑으니 그 눈으로 상대방 마음을 빨아들인다고 할까. 명지하고도 그랬던 것 같다.
명지는 집에서 동물 키우는 걸 좋아한다. 동물도 새끼라면 끔찍이 좋아한다. 먹여주고 안아주고 어루만져준다. 자기 안의 양육 본성을 동물 키우면서 잘 살리고 있는 아이다. 명지의 양육 본성을 하늘이는 한눈에 알아본 셈이다. 내가 몇 년째 보아온 명지의 장점을 하늘이는 한순간에 자기 힘으로 되살리는 게 아닌가.
하늘이는 명지 품에 안겨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이 반찬 달라, 저 반찬 달라한다. 그런데 그런 요구가 귀찮은 게 아니라 막 주고 싶은 마음을 북돋우게 하는 힘이 있다. 날마다 아이를 돌봐야 하는 부모 처지에는 가끔 성가시기도 하겠지만 오랜만에 어린 동생을 돌보는 명지는 행복한 모습이다. 하늘이를 통해 내가 새삼 배운 거는 눈 맞추기. 눈을 맞춘다는 거는 마음이 서로 흐른다는 거다. 시골에 살면서 이러저러한 손님을 치르지만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드물다. 처음 만났을 때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눈 다음에는 대부분 눈을 바로 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허공을 보면서 이야기한다.
갈등과 충돌
어쩌면 머릿속에 이야기가 너무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상대방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의무가 있거나 너무나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을 때 그런 것 같다. 그러니 눈을 마주치며 상대방에게 말이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지를 느낄 겨를이 없는 셈이다. 말을 나누면서도 이따금이라도 눈을 맞추어간다면 한결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될 텐데. 우리는 그런 능력을 많이도 잃어버렸다. 말을 주고받는 만큼 눈을 맞추면서 살아가기. 그러자면 여유가 필요하다. 머릿속에 꽉 차 있는 많은 생각에서 자유로워져야 하지 않겠나.
아이들이 쓴 캠프 후기를 보면 대부분 좋았다고 하지만 이면에는 약간의 갈등과 충돌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모두 제대로 다 봐줄 수 없었다. 아내는 식사 당번 조가 굴러가게 끼니를 챙기고, 모내기면 모내기, 토론이면 토론에도 참여하고, 집안 정리도 해야 했다. 나도 논에서 아이들이 모내기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뒷배를 보거나 빠진 부분을 메워야 했다.
이렇게 어른들이 전체를 챙기는 사이, 아이들 사이에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으리라. 게다가 아이들은 2박3일 일정이 끝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걸 아쉬워했다. 두 명만 집으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하루 더 머물다 갔다. 이래저래 사람 공부를 많이 하게 된다.
휩쓸리다 보니…
사람이 모여서 어울리다 보면 무리 가운데 빛나는 사람도 있고, 무리를 좌지우지하는 사람도 생긴다.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목소리가 크고 영향력이 강한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그 속에서 약한 사람은 어떤가.
이번에 어린아이부터 큰아이까지 모이니 아무래도 형과 누나들이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어린 아이들이 치였나 보다. 특히 상상이와 동영이 그리고 현빈이가 그랬다. 채연이는 오빠들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슬기롭게 잘 지냈음에도 세 남자 아이 사이에는 감정을 주고받는 정도의 신경전 같은 게 있었단다. 아내는 이를 사내 녀석들의 ‘수평아리 싸움’이라 했다. 수탉은 자기 영역 안에서는 군기를 확실히 잡는다. 수평아리가 자라면서 힘센 수탉이 되자면 힘과 지혜로 맞서 싸워야 한다. 사람도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여자보다 남자가 더 그런 본성을 갖고 있지 않은가.
우리 식구는 캠프 끝나고 한동안 이 문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특히 상상이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경쟁하여 우두머리가 되기보다는 자기다움을 먼저 찾아야 하지 않겠냐고. 현빈이와 경미씨를 만나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영이와는 전화로, 또 인터넷으로 소통을 했다. 결국 아이들 사이에 오해가 풀리고 서로 이해했다. 이 과정은 아이들뿐 아니라 나에게도 소중한 공부가 되었다.
새삼 오래전에 우리 식구가 공동체 생활을 할 때가 떠오른다. 한번은 비가 오는데 ‘일을 하자’와 ‘하지 말자’로 공동체 식구끼리 토론이 붙었다. 그 일이란 마을 빈집을 뜯어오는 일이었기에 비가 오면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도 일을 하자는 쪽의 목소리가 컸고 명분도 그럴싸했기에 그날 모두 비를 맞으며 일을 했다. 그러고 나서 어찌 되었는가? 앞장선 한두 사람 빼고는 모두 몸살이 나서 며칠 동안 일을 못했다. 몸이 약했던 나는 그런 자리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다. 일을 하지 말자고 하면 어쩐지 게으름을 부리는 것 같고 또 당장은 공동체에 도움이 안 되니까, 저절로 목소리가 잦아든다.
그런 경험이 있었음에도 주도적인 분위기에 그냥 휩쓸렸다. 목소리 크고,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들을 보면서 거기에 감탄하고 그런 아이들을 만난 거에 만족하면서. 그러는 사이에 치이는 아이들이 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상상이는 초식동물에 가까운 온순한 성품이다. 하지만 몸이 약하다 보니 잘 지치는 편이다. 자신이 감당하기 벅찬 상태에서는 장점을 제대로 못 살리고 단점이 쉽게 드러나는 게 아닐까 싶다.
아이는 그런 자신을 알아 그동안 규모가 큰 캠프에는 스스로 가지 않았다. 그런데 부모가 앞장서서 캠프를 꾸려 형과 누나들을 불러들였다. 상상이는 평소와 아주 다른 며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우리 부부도 흥분하고 긴장한 며칠이었는데, 상상이는 오죽했겠나. 형과 누나들 사이에 끼이고 싶은 마음에 자기보다 어린 동생을 챙길 여유가 없었고, 때로는 자신이 힘들면 애꿎은 동생들에게 짜증을 내기도 했던 것이다.
약자를 위하여
나 스스로 너무 강한 기운에 휘둘리는 걸 싫어하면서도, 정작 우리 식구 가운데 가장 약한 고리인 상상이를 제대로 배려하지 못한 걸 반성했다. 앞으로 이런 모임을 다시 하게 되면 작은아이 흐름에 맞추어야겠다고.
세상의 주된 흐름은 강하고 빠른 걸 원한다. 그런 세상에서 작고 여리지만 자기 몫만큼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조금씩 익혀가야 하지 않겠나. 어쩌면 내가 ‘사람 공부’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나처럼 약한 사람들 이야기를 이 사회에 전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순응하고 교감하라! 자연과 함께라면 암(癌)도 없다
무덥고 쉽게 지치는 날들이다. 게릴라식 장마와 푹푹 찌는 삼복더위. 이 달은 글을 한번 쉬고 싶다. 그렇다고 농사일이 바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비가 온다고, 햇살이 뜨겁다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게으르게 지내는 편이다.
그러던 중에 아내한테 걸려온 전화 한 통. 처형이 암 수술을 받은 뒤 정기검진을 받았는데,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는 전언이다. 아내도 덩달아 걱정을 한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암이 참 흔한 질병이 되었다. 서울 사는 친구 하나는 신장암으로 투병 중이라 하고, 또 다른 친지 한 분은 위암 수술 후에 요양소를 알아보고 있다. 해마다 10만명이 넘게 암에 걸린다는 말이 새삼 실감난다. 암은 환자 개인에게는 질병으로 드러나는 거지만 일반 사람들 뇌리에는 두려움 덩어리로 자리잡아간다.
‘시굴사랑’과 ‘지원’
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 머릿속을 맴도는 이가 한 분 있다. 오래전에 암 투병을 위해 산골로 내려와 자기 생명을 지키고, 남는 힘으로 다른 암 환자와 그 가족에게 힘을 주는 분. 이 기회에 그분을 만나보자. 나 역시 몸이 안 좋아서 도시를 떠나왔고, 산골에 살면서 많이 건강해졌다. 하지만 나는 아픈 이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나 하나 잘 사는 거에 만족하는 편이다. 건강한 사람을 만나도 사람관계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암 환자를 아무 대가 없이 만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듯하다.
안희상(安熙相·59)씨와 그 아내 정선희(鄭仙姬·54)씨 부부. 부부의 별명은 각각 ‘시굴사랑’과 ‘지원(智元)’이다. 지원은 처음에 ‘삼순이’라는 별명이 좋았는데 ‘내 사랑 김삼순’이라는 방송 드라마가 인기를 끌자, 그렇게 입에 오르는 게 싫어 별명을 바꾸었단다. 지원은 참된 지혜를 추구한다. 시굴사랑은 왜 시골이 아니고 ‘시굴’이냐고 물으니 “아직도 온전히 시골사람답게 살지 못하니까 그렇다”며 허허 웃는다. 시굴사랑은 15년 전, 자신이 다니던 건설회사에서 해외근무 발령을 받고 건강 검진을 하던 중 폐암 선고를 받았다. 그러고는 험난한 수술과 치유과정을 딛고 부인과 함께 산골행을 택했다. 이 부부는 지금 충북 괴산군 박달산 자락 한 모퉁이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소박하게 산골 생활을 하고 있다.
폐암은 암 가운데서도 특히 예후가 좋지 않다. 완치율도 낮고, 수술 이후 재발 위험에 대한 두려움도 무척 크단다. 이 분들은 그런 아픔을 딛고 자연에서 스스로를 치유하며, 농사와 요양 틈틈이 자신들이 겪어온 경험을 환자와 그 가족들과 함께 나누며 살고 있다.
인터뷰를 계획하면서 대장암 수술 이후 치료를 받고 있는 처형을 모시고 함께 가기로 했다. 만나기로 날짜를 잡았는데 그 전날 엄청난 돌풍으로 이 집은 피해가 많았다. 사랑채 지붕이 날아가고 뒷간도 넘어졌으며 밭의 복숭아랑 밤나무는 가지째 부러질 정도다. 풋고추는 우수수 떨어지거나 통째로 넘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경황이 없는데도 환자 가족과 함께 왔다고 따듯이 맞아주신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집을 먼저 둘러본다. 나로서는 두 번째 방문이었다. 몇 해 전에 괴산으로 귀농한 이웃을 만났다가 이 집에 잠깐 들른 적이 있다. 겉보기에는 그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도둑이 집어갈 게 없어요”
이 집은 옛날 ㄷ자 흙집이다. 지은 지 100년이 되어가는 아주 작은 집. 세 칸 집이지만 본채는 여덟 평 정도, 예전에 누에를 치던 잠실 사랑채는 일곱 평, 손님이 가끔 머무는 별채는 다섯 평 남짓. 이렇게 세 집을 모두 합해도 스무 평이 채 안 된다. 무너져가는 집을 수리했지만 기본 골격은 옛날 그대로다. 구들도 그냥 고쳐 살고, 수수깡으로 얽은 벽채도 바람을 막는 정도, 문도 그대로다. 문이 얼마나 작은지 고개만 숙여서는 머리 받기 십상이다. 허리까지 숙여야 들어갈 수 있다. 문을 들락거리면서 딴생각을 했다가는 머리 받기 일쑤다. 가끔 도시에서 오는 손님들이 문틀에 이마를 부딪히면 민망하기도 하단다.
집이 그렇듯 다른 살림살이도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물은 그냥 계곡물을 호스로 당겨 쓴다. 그 흔한 물탱크조차 설치하지 않아 수압이 낮다. 봄 가뭄이 심할 때는 고생스럽지만 본인들은 그리 개의치 않는다. 가뭄 덕에 물을 아끼고 고맙게 여기게 된단다. 마당 우물가에는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이 여럿 놓여 있다. 이게 다 무엇에 쓰는 걸까?
“우물 물이 너무 차잖아요. 아침에 이 통에다 물을 받아두면 한낮에 뜨거운 열기로 물이 데워져요. 그럼, 그 물로 몸을 씻는 거지요.”
그 말에 내 머리가 뻥 뚫리는 듯하다. 우리 역시 작은 집에서 소박하게 산다고 하지만 이 집에 견주면 어림도 없다. 언뜻 보면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살이지만 이 부부는 행복하단다. 시굴사랑이 지나가는 말로 들려준 다음 한 마디는 여러 번 곱씹게 된다.
“도둑이 와도 집어갈 게 없어요.”
살림살이가 없어서 생기는 행복이리라. 비싼 살림살이라면 겉보기에는 만족스럽겠지만 이를 지키자면 도둑 걱정도 만만치 않을 거다. 이 집 마당에 들어서면 첫눈에 강렬하게 다가오는 피사체가 있다. 빨랫줄에 걸린 빨래다. ㄷ자형 집을 가로질러 빨랫줄이 마당 전체를 나누고 있다. 전날 비바람을 동반한 돌풍으로 온갖 빨래를 했는지, 빨래가 그 넓은 줄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바람과 햇살을 온전히 받으며 말라가는 빨래. 보기만 해도 넉넉한 기분이다. 집이 작아서인지 빨래가 더 돋보인다.
집을 둘러보는데 안주인이 점심이 다 되었으니 같이 먹잔다. 식당은 잠실을 고쳐서 만든 사랑채다. 한쪽은 부엌 공간이고 맞은편에 투박하게 생긴 식탁이 놓여 있다. 정갈하고 소박한 제철 밥상이다. 환자가 왔다고 율무를 넣은 현미잡곡밥에 호박전, 풋고추, 쌈장, 가지무침, 된장국, 오이지, 젓갈을 차려냈다. 내게는 가지무침이 아주 인상 깊다. 그냥 가지를 찐 다음 마늘과 간장으로 간을 한 거다.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식사를 하면서 함께 간 대장암 환자에게 지원이 이것저것 물어본다. 지원은 의사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환자를 곁에서 지켜본 경험으로 환자 손님과 쉽게 친해진다. 무거운 이야기인데도 밝게 한다. 환자 얼굴에 연신 웃음이 돈다. 보통 환자들이 의사 앞에 서면 얼마나 작아지는가. 궁금한 건 많지만 의사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또 얼마나 짧은가. 의사 역시 검사 결과로 나온 게 없다면 환자에게 말해줄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반면에 암 환자는 고통보다 먼저 두려움에 부대낀다. 늘 재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여러 가지를 의사에게 묻고 싶지만 현실은 그게 쉽지가 않다. 이 집 부부는 경험자로서 그런 두려움을 자연스럽게 털어놓게 한다.
“암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은 크게 세 가지. 음식, 스트레스, 주거환경이지요. 현대는 독성의 시대라고 봐요. 스트레스도 독성이지만, 우리는 온갖 화학물질로 오염돼가는 자연을 음식으로 접하게 되니까요. 특히 암은 해독이 관건이고, 시간다툼이에요. 우리 발효음식은 탁월한 해독제라고 봐요. 암 환자는 가던 길을 그대로 가면 병을 이길 수 없어요. 복잡한 첨단기계일수록 고장 나면 고치기가 힘들잖아요. 우리 몸은 그 어떤 기계보다 안전장치가 겹겹이 되어 있는데도 고장이 났으니 어찌 해야 할까요? 가던 길을 되돌아보고 자기 몸의 변화에 민감해져야 해요.”
말이 입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온몸에서 나오는 듯하다. 환자랑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하고 나서 함께 밭을 둘러보았다. 작은 규모로 농사를 짓되 다양한 작물을 키우는 자급자족 농사다. 논이 600평, 밭이 1000평 남짓이지만 가꾸는 곡식 종류는 엄청나게 많다.
‘다락골 슈퍼마켓’
밭 초입에서 자라는 고구마를 비롯해 우엉, 토란, 고추 그리고 옥수수가 먼저 눈에 띈다. 들깨는 이제 한창 자라기 시작하고, 참깨는 꼬투리가 다 익어간다. 호박도 너울너울 뻗어간다. 채소거리는 조그마한 면적에서 올망졸망 자라고 있다. 부추, 당근, 토마토, 방울토마토….
계곡 따라 밭 둘레에는 복숭아나무 10여 그루가 있는데 복숭아가 한창 익어가고 있다. 밭 한가운데는 큰 밤나무 하나가 우뚝 자라며 밤송이를 올망졸망 달고 있다. 이번 돌풍에 나뭇가지가 일부 부러지기는 했지만 남아 있는 송이가 탐스럽다. 이런 밤나무 한 그루면 두 식구 먹고도 모자람이 없겠다. 계절마다 뜰 안에서 딸 수 있는 열매나 과일은 훨씬 더 많다. 봄에 앵두를 시작으로 살구, 매실, 오디, 자두를 지나 지금은 산딸기와 복숭아, 그리고 돌복숭아. 가을이 되면 과일은 더 풍성하단다. 감, 밤, 은행….
가을 작물인 무나 배추, 그리고 겨울을 나는 마늘 같은 걸 셈하면 이 집에서 키우는 작물은 언뜻 보아도 가짓수가 50여 종류가 넘는다. 1000평도 안 되는 밭에 이 많은 걸 심고도 밭이 남을 정도란다. 밭에서 나는 것말고 산에서 나는 건 더 많다. 온갖 산나물에 야생 약초까지.
세상 어느 가게에 이만큼 먹을거리 종류가 많을까. 지원은 이 골짜기 이름을 따 ‘다락골 슈퍼마켓’이라 부른다. 밭에 나는 곡식으로 절임을 하거나 장을 담그고, 산에서 나는 온갖 산야초로 효소까지 만드니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가짓수는 엄청 많아진다.
이렇게 다양한 먹을거리를 길러내는 힘은 시굴사랑의 간병과 관련이 있다. 15년 전 남편이 폐암 수술을 받자마자 지원은 도시에서 유기농 식단을 차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식단 재료를 생활협동조합 한 군데서만 구하자니 턱없이 부족한 걸 뼈저리게 느꼈다. 어쩌다 보니 다섯 군데 생협의 회원이 되었다. 돈도 돈이지만 번거롭기 짝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인(道人)에 가까운 유기농 농사꾼을 만나게 되었고, 결국 자신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게 된다. 돈보다 먼저 생명을 돌보고 가꾸는 일을 하자고. 그렇게 농사를 지은 지 어느 덧 10년. 지금은 가짓수도 많아져 1960년대식 자급농사를 되살리고 여기에다 현대화한 식생활의 지혜까지 접목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암 환자를 손님으로 맞이하면서 차츰 맞춤형 식단에 가깝게 먹을거리들을 생산하게 되었다.
자연에 빚지면 부자가 된다!
세상은 대량생산보다 점점 맞춤형 시대로 가는 추세다. 옷도 신발도 집도 개성을 살리고 자신에게 맞는 쪽으로 나아간다. 교육도 맞춤 교육이 인기가 아닌가. 어쩌면 먹을거리도 그 문턱에 들어선 게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농촌 들녘이 경제성을 좇아 특수작물 몇 가지로 획일화해가는 흐름에서 볼 때, 이 집 부부가 추구하는 삶의 빛깔은 한결 돋보인다.
그렇다고 이 집이 모든 걸 다 자급하는 건 아니다. 생선은 다물도와 진도에 사는 친구가 보내준다. 농사가 아직도 서툰 양파 정도는 사 먹어야 하고, 들기름을 많이 쓰는 반면 기름을 짜 먹을 만큼 들깨 농사를 많이 짓지는 못한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자신들이 돌보고 가꾸는 품종도 많아지고, 제철 작물 덕분에 입맛은 더 단순하고 소박해진단다.
언뜻 보면 농사짓는 사람들의 겉모습은 비슷하다. 밭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땀 흘리며 김매는 모습. 하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삶의 내면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더 큰 세계가 있음을 깨닫는다. 또한 그 세계는 사람마다 고유한 빛을 띤다. 어떤 이는 콩 싹이 흙을 뚫고 돋아나는 걸 보면서 감동하고, 또 어떤 이는 벼 꽃 한 송이가 피고 지는 데 경외를 느끼기도 한다. 곡식마다 그 고유한 쓰임새와 생명력이 있듯 사람마다 느끼는 모양새도 다양하게 마련이다.
소비는 만족을 주지만 계속 동일한 만족을 얻자면 더 큰 자극이 필요하다. 하지만 생산은 만족과 달리 기쁨을 준다. 이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면에서 솟아나는 게 아닐까. 수세미외 한 그루를 키우면서도 거기서 누리는 게 얼마나 많은지를 보자. 지원이 꾸리는 인터넷 카페 ‘다락골 구름밭 (cafe.daum.net/ talknature)’에 올라 있는 ‘자연에 빚진 자’라는 제목의 글 한 편을 옮겨본다.
자연에 빚진 자 삼순 아지매는 부자입니다 수세미씨 하나로 페트병으로 두 병이 넘는 수세미 물을 얻어 15명에게 주고도 남아 화장수를 만들고도 아직 한 병이나 원액이 남았으니 당신이 주는 선물로 빚진 자 삼순 아지매는 부자입니다 작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살게 해 주는 당신 자연 |
마치 명상록 같다.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좀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다. 우리가 설거지할 때 쓰는 수세미. 그 수세미는 글자 그대로 식물인 수세미외에서 온 거다. 수세미외가 다 자라면 보통 어른 팔뚝만하게 된다. 그 안을 갈라보면 섬유질이 그물모양으로 오밀조밀하다. 안에 든 씨앗을 빼고 이를 설거지할 때 쓰면 말 그대로 자연 수세미다. 이 섬유질은 공업용으로도 쓰이지만 여기서는 한두 그루를 키우는 가정에 국한한 거다.
천연 화장품 수세미외
이 수세미외를 늦가을 서리 오기 전, 줄기 밑동에서 30~50cm를 잘라 수액을 받는다. 민간요법에서는 이 물을 그대로 마시면 천식 따위에 효과가 크단다. 이 집도 한동안은 기관지에 좋다고 마셨는데 지금은 주로 화장품 원료로 쓴다. 천연 방부성분이 들어 있는 수세미 수액에 몇 가지 재료를 더 넣으면 천연 화장품이 완성된다. 이렇게 만드는 데 드는 원가는 고작 3000원 남짓, 1000cc 정도 양이면 한 사람이 1년을 쓸 수 있단다. 이 화장수는 중년 이후 피부건조증이나 아토피 피부에도 좋다고 한다. 그 자세한 방법은 카페 게시판에 올라 있다.
나눌 게 많은 사람이 기품 있게 마련이다. 돈이 많고 가진 게 많아야 나눌 수 있는 게 아님을 지원은 잘 보여준다. 씨앗 하나로도 이렇게 나눌 게 많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 감동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기품은 여기에 그치는 게 아니다. 수세미외가 덩굴을 타고 지붕 위로 넘실넘실 올라가는 모습과 그 중간에 드문드문 피어나는 노란 꽃 그리고 팔뚝 같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광경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예술 그 이상이다. 씨앗 하나에 이렇게 다양한 삶이 숨어 있는 셈이다. 이를 알아보는 건 주어진 삶을 감사하는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닐까.
밭을 둘러보고 올라오는데 또 다른 손님이 온다. 이 집에서 안 쓰는 가스 오븐을 가져가려고 온 거다. 이 오븐도 이 집이 마련한 게 아니라 도시 사는 지인이 보내온 것. 도시에서는 쓸모없어도 시골에서는 다 쓰임새가 있다.
생명의 텃밭과 자연보약
조금 지나니 또 다른 손님도 왔다. 이 손님은 이 집 식구만큼이나 나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친구는 나보다 먼저 시골로 내려와, 시굴사랑과 가까운 이웃으로 산다. 내가 괴산에 왔다니까 겸사겸사 온 거다. 그러다 보니 좁은 마당이 사람들로 그득하다. 저녁녘에 함께 왔던 내 친지는 돌아가고, 친구랑 함께 술도 한잔하면서 밀린 회포를 풀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가 잔 방은 별채로 그야말로 별채다. 본채에서 떨어진 독립된 집으로 아담하고 조용하고 아늑하다. 얼마 전에도 손님이 머물다 갔는지, 방안에 온기가 있어 더 좋다. 극성스러운 모기를 피해 모기장을 둘러치니 한결 더 아늑하다. 모기장은 산골 작은 방에 안성맞춤처럼 잘 어울린다. 두 사람 정도 자면 딱 좋은 크기. 그래도 이 집에서는 제일 큰 방이란다. 모기장 밖에 앵앵거리는 모기 소리를 자장가로 들으며 저절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찍 잠이 깨니 지원은 벌써 밭에서 일을 한다. 그저께 돌풍으로 쓰러진 고추를 세우고 틈틈이 김도 맨다. 나도 그이 곁에서 일을 거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손으로는 고추를 세우고 발로는 흙을 밟아 고정하며. 두어 시간 일하고 나니 아침 햇살이 올라온다. 안주인은 밭에서 먹을거리를 이것저것 챙긴다. 떨어진 풋고추며 당근, 방울토마토, 부추를 바구니에 담는다. 나도 잘 익은 방울토마토를 따려고 했더니,
“아, 그건 따지 마세요. 환자분한테 보낼 겁니다.”
알고 보니 밭 구석마다 다 사연이 있다. 환자에게 보낸다는 방울토마토는 저절로 자란, 진짜 자연산이다. 보통 방울토마토는 종묘상에서 씨를 사서 심는다. 종자회사에서 파는 씨는 일대잡종이라는 뜻에서 ‘F1’이라 한다. 그런데 이 F1에서 씨를 받은 F2를 심으면 F3에서는 엉뚱한 게 나온다. 당대는 크고 고른 열매가 달리지만 그 자손부터는 예측하기가 어렵다. 농사를 짓다가 이런 내막을 속속들이 알게 되면, 양이 적더라도 내 손으로 씨를 받아 다시 심고 싶어진다. 그러자면 몇 년은 제대로 못 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게 몇 년 고생하면 안정된 씨앗이 된다. 하지만 아무나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돈 주고 사서 쓰는 게 편하니까.
내 경험으로 볼 때, 여러 가지 씨앗을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손수 갈무리한다는 거는 생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자연에서 저절로 자란 방울토마토가 얼마나 귀한가. 그냥 방울토마토가 아니라 이걸 먹고 환자도 생명력을 되살려 치유되기를 바라는 밭주인의 마음 씀씀이가 내게도 전해진다. 음식이 보약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 집에서 키우는 곡식이야말로 약 가운데서도 ‘자연보약’이 아닐까 싶다. 앞뒤 사정이 이러하니 많은 양을 나누기는 어렵다. 자신이 어떻게 농사짓고 있는지, 이 곳에 와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되도록 팔지 않는단다. 돈 이전에 마음을 나누는 게 먼저인 셈이다.
바구니에 담긴 당근도 모양새가 아주 특이하다. 어떤 건 마치 인삼처럼 생겼다. 이런 당근을 시중에 내어놓으면 상품 가치는 고사하고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찬찬히 볼수록 신비롭다. 야성이 느껴진다. 어쩌면 지금 당근처럼 개량하기 전의 당근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당근 씨앗이라도 똑같이 자라는 법은 없다. 땅에 따라, 씨앗에 따라, 재배법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곳은 외부에서 생산된 퇴비는 거의 쓰지 않는다. 밭도 돌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당근이 하나같이 다 다른 모양이다. 미끈하게 쭉 뻗은 당근만 보다가 이곳 당근을 보니 한결 개성이 살아나는 듯해 보기 좋다. 이 당근 역시 환자들이 치료 음식으로 즐겨 먹는 채소 수프에 들어가는 소중한 재료란다. 지원에게 ‘환자’란 말을 이렇게 자주 듣다 보니, 내가 마치 어디 깊은 산속 병원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폐암이 가져다준 ‘흑자 인생’
밭에서 일을 마치고 마당에 들어서니 시굴사랑이 일어나, 마당가에 쓰러진 백일홍을 일으켜 세운다. 안주인이 아침 식사를 마련하는 동안 이번에는 시굴사랑과 둘이서 일을 했다. 지난 돌풍에 쓰러진 표고버섯 나무를 일으켜 세웠다. 다시 넘어지지 않게 받침대를 덧대고,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그러고는 아침을 먹고, 차 한 잔 나누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병원에서 한쪽 폐를 다 잘라내는 대수술을 하고, 산골로 들어온 부부. 서울에 있던 큰 집을 팔아 산골에 근거를 마련하고, 10여 년 아이들 뒷바라지하고 나니 이제는 아주 작은 집으로 바뀌었다. 자신들이 논밭 농사 다 합쳐 버는 돈이라고 해봐야 1년에 고작 400만원 남짓. 부족한 돈은 도시에서 직장 생활하는 두 아들이 조금씩 보태준다.
도시 사는 자식들한테 오고가지 않으면 그나마 돈 쓸 일이 별로 없단다. 자식들이 자라는 동안은 적자 가계부였지만 이제부터는 논밭에 곡식이 그득하니 노년 걱정 없는 흑자 인생이라며 환하게 웃는다. 이 부부의 고민은 돈에 있지 않다. 고민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언제든 시골로 내려와, 자기네처럼 행복을 누렸으면 하는 거다. 또 하나는 나이 들어 산골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거다. 특히 숲 속에서 겨울나기는 쉽지 않다. 산에서 나무 끌어와, 아궁이에 불 지피고, 물을 길어 써야 하는 겨울은 아직도 이 집 부부에게는 시련이란다.
왜 자녀들은 함께 살지 않을까.
“사실 우리 부부가 아이들에게 못 해준 게 너무 많아요. 큰애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남편이 수술받고 오랫동안 치료에 매달리다 보니 아이들과 오래 떨어져 살았어요. 우리 아이들은 자연을 접할 기회가 적었던 거지요. 우리 생각에야 자연에 내려와 함께 살고 싶지만 강요할 수가 없었어요. 잘 자라준 것만도 감사해요.”
그러면서 지원은 한 달에 두세 번씩 먹을거리를 챙겨 자식들에게 간다. 지금 자녀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손수 키운 농산물로 밥상을 차리는 일이다. 돌아오는 길에 음식쓰레기를 다시 거두어 가져온다. 이는 더없이 좋은 거름이 되기 때문이란다.
시굴사랑은 폐 절제수술을 하면서 갈비뼈를 세 대나 잘라야 했다. 몸이 약해서 일을 많이 못하지만 자연의 움직임에 조금씩 자신을 열기 시작한다. 그런 변화 가운데 하나가 동물들과의 교감이다.
“한번은 고양이와 개를 함께 키운 적이 있어요. 고양이가 새끼들을 다 데리고 집을 나갔어요. 새끼를 낳더니 함께 살던 개한테서도 위협을 느꼈나 봐요. 그러고는 얼마 후에 밤에 혼자 산책을 나갔는데, 순간 고양이가 앞에 나타난 거예요. 살며시 다가와 내 다리를 비비며 반기는데 나도 얼마나 반갑던지. 그러고는 둘이서 한참을 같이 걸었는데 고양이가 또다시 사라져요. 거기서부터는 자기 먹이 영역을 벗어난 모양이에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나타나고…. 우리는 산책길에 이렇게 항상 만납니다. 새끼 젖 먹이다가 사냥이 신통치 않으면 그때는 우리 집으로도 와요. 여기가 그놈한테는 ‘친정’인 셈이지요(웃음). 와서는 멸치도 먹고 가고….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저만 잘 살면 사회도 달라져요”
지원은 겉보기에도 여장부답다.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하는 두 집 살림에 일상으로 하는 농사일, 그리고 이따금 집수리도 손수 한다.
도시에서 아파트 생활만 하다가 하루아침에 바뀐 시골생활. 처음에는 부부 사이 갈등도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남편에 대한 원망도 많았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작은 일에 감사하고, 숲 속 생활이 주는 보너스를 만끽하면서 남편에 대한 생각도 차츰 바뀐다.
“한동안 남편을 젊은 이웃과 자꾸 견준 거예요. 이웃은 집도 잘 짓고 농사일도 잘한다면서. 시골에서는 젊음이 자산이잖아요. 대부분 몸으로 부딪치며 해야 할 일들인데다가 처음 해본 일이라 서툴고, 쉽게 지치고. 그러다 보면 내 몸이 힘드니까 남편이 아픈 사람이라는 걸 가끔 잊은 거지요. 지금은 잘 이겨내준 남편이 고맙고, 아팠던 것도 오히려 감사해요. 도시에서만 살던 사람이, 그것도 적응하기 쉽지 않은 나이에 들어와 이 정도로 꾸려왔으니 우리 모두 대단하잖아요?(웃음) 숲 속에 살면서도 불만과 원망이 남아 있다면 모두 욕심이라 봐요. 아직도 우리는 자연 속에서 하나하나 배워갑니다.”
지원에게 15년 간병생활을 한마디로 정리해달라니까 도리질을 친다.
“내가 한 거는 없어요. 남들은 내가 남편을 살렸다고 하지만 환자 본인이 욕심을 버리고 집착을 안 하니까 나은 거지요. ‘되돌아서 간다, 돌이키다’는 말 있잖아요. 자기 발걸음을 누가 돌이키겠어요. 스스로 찾아들어야지.”
지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 틈에 시굴사랑이 밭에서 옥수수를 꺾어와 찜통에 찐다. 이 옥수수 역시 시장에서 보는 것과 달리 작다. 하지만 달고 맛있다.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부탁했다.
“정말 마음이 예쁜 사람들이 귀농했으면 좋겠어요. 자연에 잘 순응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요. 돈 있고, 운동성이 강하고, 농촌을 살려보자고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 말고. 농촌은 그렇게 해서 살아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자 좀체 입을 열지 않던 시굴사랑이 말을 이어받는다.
“농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가서 살아야 할 필연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해요. 이게 선택이라고 생각하면 좀 해보고 안 되면 다시 도시로 가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농촌이 자꾸 피폐해져요. 자꾸 가벼워지고, 남아 있는 사람도 상처받고 방어적으로 바뀌어요.”
그러다가 점차 목소리가 격해진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온 사람의 사자후랄까.
“지역사회에 보탬이 안 되도 좋다고 봐요.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저만 잘 살면 사회도 달라져요. 그게 풀뿌리 민주주의가 아닌가요?”
이 집 부부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 내용이 점점 깊어진다. 암에 대한 두려움조차 까마득히 멀어진다. 암이 생기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를 한마디로 묶는다면 조화로운 삶을 벗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자연과 교감하고 순응하는 삶,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다면 암이 뿌리내릴 틈은 없으리란 믿음이 든다. 자연은 암 환자는 물론 죽은 이까지 받아주는 곳이 아닌가. 그러기에 자연을 온전히 향유하는 건 스스로를 열어두는 사람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희망과 만남의 열매 여는 향유네 포도밭 나는 가끔 귀농과 관련해 사람들 앞에서 강의할 때가 있다. 그 내용은 주로 자녀 교육이지만 강의가 끝나면 이런저런 질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도시 살다가 시골에 살고자 할 때 궁금한 게 어디 한둘이랴. 그 가운데 빠지지 않는 질문 하나, 바로 돈 문제다.
“시골 내려오면서 돈이 얼마 들었나요?”
선뜻 답하기가 어렵다. 얼마 들었는지 가계부를 쓴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내려오고자 하는 사람의 질문 의도를 파악하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돈 문제란 누구에게나 예민한 문제가 아닌가. 그럼, 내가 되묻는다.
“그렇게 물어보시는 분은 얼마를 예상하시나요?”
갑자기 되묻는 말에 당황하며 한다는 말.
“저는 돈 가진 거 별로 없어요.”
자신이 돈이 많다고 흔쾌히 자랑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본인은 말을 그렇게 하지만 돈 문제를 물어보는 사람은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경우다. 자신이 가진 수준에서 이리저리 계획을 세우기 위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면 서로 이야기하기가 편하다. 사실 땅 사고 집 짓고, 자리 잡는 과정에 적지 않게 돈이 든다. 다만 우리 식구는 남보다 한발 먼저 내려왔기에 땅값도, 집 짓는 자재 값도 지금보다 훨씬 싼 덕을 보았다고나 할까.
향유네 포도밭의 탄생
아무리 시골 땅값이 올랐다 해도 도시만큼 오르기는 어려울 거다. 도시에 작으나마 집 한 칸이라도 있는 사람은 농사지을 땅과 집을 마련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본다. 내 집은 고사하고 전세거리조차 변변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분들에 대해서는 나 또한 조심스럽다.
그럴 때 언뜻 떠오르는 이웃이 있어 그 이야기를 대신한다. 시쳇말로 가진 거라고는 뭐 두 쪽밖에 없이 맨몸으로 땅에 뿌리내린 이웃. 경북 상주에서 포도 농사를 짓는 향유네다. 향유는 일곱 살 여자아이. 아버지 박종관(朴鍾寬·37)씨와 어머니 김현(金賢·37)씨가 한가족이다. 이들 부부는 아이 이름을 따 향유아빠, 향유엄마로 불리길 좋아한다. 자신들이 가꾸는 포도 이름도 향유포도요, 술은 향유포도주다.
충북 영동에서 황간 쪽 백화산을 넘어가면 경북 상주다. 향유네는 바로 백화산 그 언저리에 산다. 내가 향유네를 안 지는 제법 시간이 흘렀다. 얼추 8~9년. 그동안 나는 이 집 식구와 한 해 두세 번 만나는 사이가 됐다. 올해는 연수다 교육이다 해서 벌써 세 번이나 만났다. 상주는 내 고향이기도 해서 추석 고향 가는 길에 만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멀리 살아도 이제는 이 집 식구들이 어찌 사는지를 어느 정도 안다.
인터뷰를 하려니 약속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향유네는 워낙 바쁘게 일하는 터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처지가 아니었다. 낮에는 일로 바쁘고 밤에는 고단해 쓰러져 자는 나날들. 게다가 9월은 포도를 따기 시작하는 때다. 포도 농사로만 돈을 만들어내는 향유네는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때로는 잠을 미루면서까지 일을 해야 할 정도. 결국 일을 같이 하면서 이야기하기로 날짜를 잡았다. 마침 내가 향유네를 간 날은 비가 오락가락했다. 좀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향유네 밭에 도착하니 포도가 주렁주렁 익어간다. 포도보다 더 눈에 띄는 건 아무래도 건물이다. 올봄에 지은 창고 두 채가 밭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나는 이 건물이 향유네가 맨손으로 세우다시피한 걸 알기에, 건물 구석구석이 다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시골은 조상 대대로 살아와 땅이 있고 집이 있어도 못 살고 떠나는 곳이다. 그곳에 종관씨는 몇 백만원도 아닌 단돈 20만원을 들고, 대학 졸업식 바로 다음날 시골로 내려간다. 그가 다닌 대학은 농과대도 아니고 신학대였다. 그는 대학 생활 동안 기독교의 폐쇄적인 분위기와 종교적 위선에 숨이 막히고 괴로워했다. 그러다가 정농회(正農會, 대표 임락경)를 알게 되고, 김복관 선생을 비롯한 정농회 어른들과 만나면서 희망을 갖는다. 묵묵히 땅을 일구며 세상을 섬기는 어른들. 종관씨는 그분들에게서 빛을 보았고, 그분들 뒷모습만 보아도 힘이 난다고 했다.
달가운 머슴살이 3년
그러나 바르게 사는 길만 확인했지 손에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이 살 곳을 찾아 전국을 돌다 경북 김천에서 유기재배 포도농사를 짓는 김성순 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분 도움으로 종관씨는 머슴살이를 시작한다. 스물일곱 나이에. 낫 한 번, 호미 한 번 잡아본 적이 없던 사람이 밑바닥부터 시작하겠다고.
머슴. 요즘에는 참 낯선 단어다. 내가 자라던 1960년대엔 동네마다 머슴이 흔했다. 땅이 없어 가난한 집 아들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부잣집에 들어가 그 집의 농사일과 잡일을 해주는 머슴살이였다. 한 해가 끝나면 새경을 받곤 했다. 한창 자랄 때인 사춘기 무렵부터 머슴살이를 하다가 점차 독립한다.
우리 사회가 공업화의 길을 걸으면서 시골에서 머슴이 사라졌다. 종관씨가 머슴살이를 시작한 해가 1998년이니 요즘 세상에 머슴이란 ‘오래된 미래’라고 할까. 머슴이라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지만, 일도 배우면서 최소한의 생활을 꾸릴 수 있으니 종관씨는 달갑게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결혼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김현씨와 결혼해서 같이 농사짓기로 했는데, 식을 올릴 형편이 못 되었다.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 식을 올리기로 하고 같이 살기로 한다. 그러자 농장 주인인 김 선생이 마음을 써주셨다. 결혼은 인륜지대사이니 꼭 식을 올리라고 하면서 마을 빈집도 소개하고, 우선 급하게 결혼자금으로 쓰라고 300만원을 빌려주셨다.
부모 도움을 받을 형편이 못 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큰일들을 한꺼번에 치러냈다. 믿었던 부모님은 때마침 터진 외환위기로 사업이 어려워졌고, 집안의 큰아들인 종관씨는 오히려 부모를 뒷바라지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모든 게 낯설었다. 몸도 마음도 다시 태어나야 하고, 기술도 익혀야 했다. 부부 관계도 시작이니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요,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도 아주 큰일이었다. 부부는 젊음 하나 믿고, 척박한 농촌에 적응해가야 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독립의 길로 나아갔다. 머슴 일을 줄이면서 독립해서 할 수 있는 농사의 규모를 늘려가는 식으로. 두 번째 해는 주중에는 머슴으로 일하고 주말에는 제 농사를 따로 지었다. 남은 쉰다는 주말이지만 이들 부부에게는 1분이 아까웠다. 달 밝은 밤이면 달빛이 아까워서라도 일을 했다. 남의 일을 하는 거와 자신의 일을 하는 거는 다를 수밖에. 월급쟁이와 경영자의 차이라고 할까. 생산, 선별, 가공, 유통, 서비스 등 전 과정을 자신들이 책임지는 거다.
서러운 임차농, 그 막막함이란
그러다가 머슴살이 3년 만에 김 선생에게서 독립한다. 지역도 김천에서 상주로 옮겼다. 하지만 완전히 독립한 것은 아니다. 시간의 독립일 뿐이었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자신들 마음대로 시간을 조절한다는 것일 뿐, 땅은 여전히 남의 땅을 빌려야 했다.
그런 조건에서 꾸준히 농사를 지어 기술을 익히고, 독립된 판로를 개척할 만큼 외연을 넓혔다. 그 사이 향유가 태어났다. 향유엄마는 아기가 태어난 걸 기뻐했지만 향유아빠는 기쁨은 잠깐, 부양해야 할 식구가 늘어난 거에 대한 부담이 더 컸다.
남의 땅에 농사짓는 사람의 마음은 겪어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땅 주인이 환경농업에 대한 이해가 있고 장기 임차가 가능하다면 그나마 아주 좋은 조건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땅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것도 환경농업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당시에는.
땅이란 공산품과 달리 아무거나 선택할 수 없다. 인연이 닿아야 하고, 때가 맞아야 한다. 임대하는 땅은 조건이 더 열악할 수밖에 없다. 땅 주인도 농사를 짓지 못해 버려둔 땅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교통이 안 좋다거나 땅 힘이 약하다거나 흠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땅 주인은 주인대로 욕심을 낸다.
풀약(제초제)을 쳐서 풀을 태우듯이 하며 농사짓던 주인은 향유네 농사 방식이 못 마땅했다. 향유네는 초생재배(草生栽培)를 한다. 풀이 ‘적당히’ 있는 게 좋다는 거다. 풀이 있음으로 땅의 온도가 자연스럽게 조절되고, 풀뿌리는 흙이 쓸려가는 걸 막아주며, 풀이 많이 자라면 베어 거름으로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은 풀이 있다면 그 풀이 거름을 다 빨아먹는다고 여긴다. 주인 눈에 풀이 보이면 곧장 잔소리를 해댄다. ‘풀 키우냐? 풀약 쳐라.’ 그렇다고 향유네는 독약이나 다름없는 제초제를 뿌릴 수는 없었다. 양심이 허락을 하지 않는 거다. 그럼, 주인은 ‘내년에는 밭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농사를 지어보면 알지만, 땅을 살리는 일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한두 해 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비료와 제초제로 땅이 척박해진 곳일수록 더 많은 노력과 애정을 기울여야 한다.
땅 주인에게 사정하다시피 설득하고 나면 다음은 ‘임차료를 올려달라’라는 말이 나온다. 농업이란 내 땅에 농사를 지어도 돈 만들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 아닌가. 임대차 계약을 하고 농사를 시작했지만 적지 않은 부담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그러나 이것보다 더 가슴 아픈 건 앞날의 막막함이다. ‘내년에 이 밭에서 계속 농사지을 수 있을까?’ 장기 계획은 고사하고 한 해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내 의지와 달리 뿌리내리지 못하는 뜨내기 농사꾼이 되면 어쩌나….’ 이따금 벼랑 끝에 몰리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때 아내가 예전에 일하던 보육원에서 러브콜이 왔어요. 교사를 다시 해보지 않겠느냐고. 잠시 흔들렸어요. 여기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고요. 떠나야 하는 이유가 다른 것도 아닌 돈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러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유혹이 왔을 때 사람이 솔직해진다는 걸 깨달았어요. 우리가 여기를 떠나지 않고 부여잡고 있는 게 무언가. 곰곰이 돌아보니 그건 ‘만남’이었다고 봐요. 저희 부부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스승이 있었고, 같은 길을 가는 동지들을 만난 거지요.”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은 여전히 암담했지만 나아가야 할 길은 더욱 분명했다. 그렇게 향유네는 몇 년 사이 땅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러다가 지난해, 시골 내려온 지 9년 만에 드디어 자신들이 농사지을 땅을 장만하기에 이르렀다. 등기권리증을 손에 쥐는 순간 얼마나 기뻤을까. 농사꾼으로서 확실하게 뿌리내릴 준비가 된 거다. 땅 규모도 제법 커 9500㎡(3000평 정도).
몸살과 급물살
돈이 만만치 않게 들었다. 물론 대부분 융자돈이다. 농업기반공사의 FTA 정책자금으로, 3% 이자로 30년 동안 갚기로 약속한 조건이지만 향유네 처지에서는 행운에 가깝다. 해마다 갚아야 할 이자가 그동안 자신들이 소작농을 하면서 냈던 임차료보다 적은 데다, 마음껏 땅을 살릴 수 있으니까.
곡식이나 나무를 옮겨 심으면 한동안 ‘몸살’이라는 걸 한다. 환경이 바뀜에 따라 큰 뿌리는 물론 작은 뿌리가 많이 손상되고, 흙도 물도 심지어 햇살도 낯설다. 그곳에 이미 뿌리내린 또 다른 식물이 있을 때는 더 몸살을 한다. 그렇지만 향유네는 몸살이라면 누구보다 단련된 사람들이다.
“7년생 묘목을 옮겨 심은 적이 있어요. 1~2년생 묘목이랑 아주 달라요. 첫해는 몸살을 하지만 그게 끝나고 나면 죽죽 뻗어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거예요. 내재된 힘이랄까 가속도가 느껴지거든요. 땅을 마련한 요즘, 저희 삶도 급물살을 타는 것 같아요.”
땅을 샀다니까 마을 사람들이 향유네를 바라보는 눈부터 달라진다. 선뜻 마을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마을에 젊은이가 드무니 당장 새마을 지도자라는 감투를 쓰게 된다. 그 자리가 무슨 큰일을 하는 거는 아니지만 마을 어른들이 한동네 사람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리라.
이제는 ‘내 땅’이니 그곳에 농사는 물론 집도 ‘마음놓고’ 지을 수 있다. 돈이 없어도 형편대로 조금씩 지어갈 수 있다. 향유네는 올봄 창고를 먼저 지었다. 시골 내려오자마자 집부터 먼저 짓는 사람도 많지만 향유네는 아무래도 일이 먼저일 수밖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골집이 좁기는 하지만 당장 살아가는 데는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창고를 두 채 손수 지었다. 24평짜리 창고는 두 칸으로 저온저장과 가공을 할 수 있게 지었다. 그리고 또 한 채는 집 지을 동안 식사도 하고 손님도 맞이할 수 있는 살림창고. 향유엄마는 지금 두 집 살림을 한다. 잠은 원래 살던 집에서 자고, 일과 대부분의 살림은 새로 지은 살림창고에서 한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향유아빠는 밭 둘레 풀을 베야 한다며 일어선다. 저녁에는 창고 집 2층 방에서 좀더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힘겨운 ‘이웃 유치 작전’
자신들이 농사지을 땅과 거처가 마련되자 향유아빠의 발걸음은 좀더 빨라진다. 그동안은 자기 가족의 ‘생존’을 위해 허덕였다면 이제는 눈을 돌려 자신을 필요로 하고 또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려 한다. 전국 조직인 정농회에서는 청년위원장을 맡고, 마을에서는 젊은 사람을 이웃으로 맞이하기 위한 ‘이웃 유치 작전’을 벌였다. 아이가 있는 젊은이 서너 가정만 서로 어울릴 수 있다면 좀더 나은 교육 환경이 되리라는 희망으로, 틈틈이 집과 땅을 보려 다녔다. 지역 주민들과도 폭넓게 어울리기 위해 최근에는 ‘백화산을 사랑하는 모임’에도 참석한다.
향유네가 뿌리 뻗는 모습이 새삼 눈에 선하다. 땅 없는 서러움을 느꼈기에 더 빨리 뿌리를 내리는 걸까. 이 집은 이제 고민이 없을 거 같다. 그렇게 말했더니 향유아빠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렇지 않아요. 여전히 농사가 어려워요. 한다고 하지만 농사에는 워낙 변수가 많잖아요. 농사도 그렇지만 요즘 제가 가장 어려운 건 사람관계예요.”
향유아빠가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어려움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실명을 거론하면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울 거 같다. 여기서는 다만 땅에 뿌리내리면서 누구나 이웃과 부딪칠 수 있다는 점만을 살펴보자.
향유아빠의 이웃 유치 작전으로 많은 사람이 향유네를 방문했고, 함께 집과 땅을 둘러보았다. 그 과정에서 아이를 가진 세 가구가 이웃으로 이사를 왔다. 함께 마을 빈집도 수리하고 전기와 상하수도도 새로 설치하면서 이웃과 어울려 살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사람 관계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는 걸 향유네는 실감한다.
그 요점은 상대방이 원하는 만큼만 도와주기가 쉽지 않다는 거다. 적으면 적어서 서운하기도 하겠지만, 더 문제가 되는 건 넘쳐서 나타나는 갈등이란다. 누군가 도시를 떠나 시골에 살려고 하면 그 나름대로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쉽게 말하면 자기 빛깔대로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리고 요즘 세상은 남을 도와주는 데 삶의 보람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다. 누군가에게서 도움을 받기만 한다면 자신의 삶이 더없이 초라하다고 느껴지는 게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선을 넘는 도움은 자칫 간섭으로 비친다.
“그러면서 나의 뒷모습을 본 거지요. 말로는 조건 없이 돕는다고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계산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도와준 만큼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거는 그렇다 치고, 나를 오해할 때는 그 사람이 미워지더라고요. 그러다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에는 ‘나 자신이 이거밖에 안 되는가’ 싶어 괴롭기도 하고. 그러면서 내가 아직 사람이 덜되었구나, 이웃에게 뭔가를 베푼다는 게 또 다른 집착과 묶여 있다는 걸 발견하지요.”
향유네 포도주
이야기가 깊어지자 향유엄마가 자신들이 손수 빚은 포도주를 내놓는다. 향유는 낮에 얼마나 뛰어놀았는지 어느새 곤히 잠들었다. 향유네 포도주는 주정이나 다른 화학 첨가제를 전혀 넣지 않는다. 그것도 유기재배한 포도로 빚은 와인이다. 1년 숙성을 한 다음 시장에 내놓는다. 나는 지난해 향유네 포도주 맛을 보고 완전히 취해버렸다. 알코올에 취한 게 아니라 맛 자체에 취한 거다.
이후 나로서는 향유네 포도주만한 술맛을 보기가 어려웠다. 우리 혀는 신기하게도 맛을 오래 기억하는 거 같다. 한번 좋은 맛을 보면 그 맛을 쉽게 잊지 못하는 특성이라고 할까.
그런데 이번에 맛본 향유네 포도주는 지난해 그 맛이 아니다. 쌉쌀한 맛이 조금 더 돈다. 알코올 도수는 지난해보다 더 높은 거 같지만 지난해만큼 당도가 높지 않다. 이럴 때 맛이 드라이하다고 하는가. 하지만 당도나 알코올 도수 이면에는 훨씬 많은 변수가 있지 않겠나.
흔히 와인을 마실 때 하는 이야기가 있다. 먼저 눈으로 빛깔을 음미하고, 그 다음 코로 냄새를 맡고, 술을 한 모금 입에 넣은 다음 혀로 굴러가며 맛을 본단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맛은 이런 거다. 오감 이전에 삶에서 느끼는 맛이랄까. 향유네가 땅을 옮기면서 생긴 차이이리라. 땅에 따라 곡식이나 과일 맛이 다르다. 똑같은 유기농산물이라도 찬찬히 맛을 보면 천차만별이다. 퇴비를 무엇으로 하는가, 얼마나 땅을 돌보는가, 땅 주인이 어떤 마음으로 농사를 짓는가, 그 해 날씨가 어떤가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꽤나 까다로운 것 같지만 그렇게 맛보는 재미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향유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는 부분은 향유네가 땅을 구하고, 나무를 돌보면서 느꼈던 즐거움이라 여긴다. 쌉쌀함은 땅 마련 과정에서 고생한 부분, 이웃 사이에 관계 맺기에서 오는 어려움, 그리고 가뭄이나 긴 장마 또는 태풍으로 마음 졸이는 맛으로 느끼고 싶다.
돈이 아닌 ‘그 무엇’
향유네는 포도와 포도주를 생협에 대부분 내다주고 일부는 직거래로 판다. 지난해 향유네가 돈으로 거둔 총매출액은 약 3000만원, 이 가운데 경비를 뺀 소득은 2000만원 남짓. 도시 기준에서는 얼마 안되겠지만 자급을 추구하는 시골살림에서는 적지 않은 돈이다. 부부가 그만큼 억척같이 일했으며, 소비자와 관계 맺음에도 그만큼 정성을 들였다는 말이다.
농산물을 돈으로 바꾸는 게 농사꾼의 현실이지만 향유네는 돈을 뛰어넘는 ‘그 무엇’에 대한 기대가 있다. 농사꾼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거지만 농산물을 생산하고 또 넘길 때 오는 느낌이 있다. 마치 정성 들여 키운 자식을 출가시키는 마음이랄까. 한 해 동안 애지중지 키워, 멀리 내 보내는 그런 마음.
향유네가 바라는 ‘그 무엇’을 하나로 말하기는 어렵다. 만남일 수도 있고, 나눔일 수도 있다. 돈과 농산물만 오고가는 것이 아니라 정과 믿음이 쌓여가길 바란다.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워하고 또 감사하는 관계.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지만 차츰 그 방향으로 나아간다.
향유네도 손님을 많이 치른다. 다만 이 집만의 특색이라면 놀러오는 손님이 아니라 일을 함께 하는 손님들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바쁜 9월에는 거의 날마다 손님이다. 이맘때가 향유네에 일이 가장 많은 철이다. 포도를 따고, 터진 알갱이를 떼어내고, 상자에 담고, 나르는 일이 산더미 같다.
“일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참 좋은 거 같아요. 소통이 한결 잘된다고 할까. 몸을 움직이니까, 말도 쉽게 나오고 더 친해지고. 소심한 사람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게 되고. 중간에 이야기가 끊겨도 일하고 있으면 어색하지가 않잖아요? 어떤 때는 차 한 잔 나누며 이야기하다 보면 손님이 먼저 손을 잡아끌기도 해요. 일하면서 이야기하자고(웃음). 사무실에서 머리만 쓰다가 땀 흘리니 기분이 좋은가 봐요.”
향유네는 물물교환도 좋아한다. 그렇다고 이 집 식구들이 단순하게 원시 유통으로 돌아가자는 건 아니다. 각자가 생산한 물건은 그것이 무엇이든 소중하다. 쌀이든 책이든 잡지든 그릇이든 옷이든, 그 모두가 만든 이의 땀이 밴 게 아닌가. 물건을 나눔으로써 얻게 되는 소통과 만남은 그 깊이가 한결 깊을 수밖에 없다. 어떤 손님은 자신들이 쓰는 포도 상자에 디자인을 해주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인터넷 홈페이지(www.hyangyou.net)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나 역시 이번에 향유네 가면서 우리 식구가 농사지은 감자 한 상자를 가져갔고, 돌아오는 길에 포도 한 상자를 받아왔다.
일곱 살 향유의 원시예술
이야기를 나누다가 향유네는 잠을 자러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창고 집 위층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새벽에 억수같이 퍼붓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 지붕이 컬러 강판이라 빗소리가 유난히 더 크게 들린다. 날이 조금씩 밝아오고, 빗방울이 가늘어지자 산책 삼아 우산을 들고 방을 나섰다.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굵어가며 향유네 창고 집을 감싸고 있다.
마당으로 나서는데 한 귀퉁이에 작은 돌멩이가 옹기종기 놓여 있다. 지나다 보니 향유가 놀던 흔적이라는 걸 쉽게 느끼게 된다. 그런데 무슨 놀이를 했을까? 언뜻 보아서는 모르겠다. 그런데도 뭔가가 있는 그런 모습. 무질서한 듯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떤 질서가 느껴진다.
향유한테 물어볼 생각으로 즉석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러고는 사진 상태가 어떤지 알아보려고 LCD창을 켜고, 조금 전에 찍은 사진을 다시 본다. 아, 뭔가 있다. 마당에서 넓게 보았을 때는 희미하던 모습이 작은 LCD창에 집약되어 나타나니 향유가 무얼 했는지를 읽을 수 있다.
글씨놀이를 한 거다. 사람 이름을 쓴 것인데 가운데 두 글자는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박’ ‘종’이다. 아하, 향유아빠 이름을 쓴 거로구나. 그럼 가운데 맨 뒤 글자는 ‘관’이다. 자세를 바꾸어 보니 나머지 글자도 차츰 눈에 들어온다. 글자 한 자 크기가 팔뚝만하다. 맨 위 글자는 박향유, 맨 아래가 김현이다.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어쩌면 무슨 동굴 벽화에 나오는 알 듯 모를 듯 원시 기호를 다시 보는 느낌이랄까.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엉성하고 조악한 기호이지만 당시 상황을 가정하면 많은 해석이 가능하지 않겠나. 그렇기에 그 나름대로 예술적 가치를 가진다고 본다. 그런 기분으로 나 역시 향유 글씨를 어린이가 그린 ‘원시예술’로 보고 나 나름으로 해석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식구 가운데 맨 위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거는 자기 존재감이 뚜렷이 드러난 거라 믿는다. 가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다 보면 아이 심리 일부를 읽을 수 있다. 엄마를 지나치게 크게 그리고 자신은 아주 작게, 그리고 아빠는 아예 그림에서 빠지는 그림을 본 적도 있다. 이런 경우 집안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비중을 아이가 지나치게 크게 느낀다는 걸 말해준다. 그건 엄마에 대한 두려움일 경우가 많다. 억압적이거나 잔소리가 심하다면 아이는 작아질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빠지는 건 이른 아침 집을 나가 늦은 밤에 들어오니 존재 자체가 희미하기 때문일 게다.
그런 각도에서 ‘향유 작품’을 보자면 향유만의 당당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아빠 이름이 엄마보다 먼저이고 그 글씨도 한결 또렷하고 크다. 부모 두 사람을 굳이 견줄 필요는 없지만 여기서는 내 해석을 확장해본다. 시골에서는 식구가 함께하는 부분이 많고, 또 아빠가 차지하는 비중이 클 수밖에 없다. 그동안 향유는 부모가 땅을 일구고 집을 여러 번 옮기며 수리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 과정에서 향유 엄마 몫도 컸겠지만 아빠 모습은 한결 더 크게 보였으리라. 무엇보다 이곳에다가 자신들의 땅을 마련했고, 그 땅에 처음으로 자신들의 창고 집을 지은 거다. 집짓는 과정을 지켜본 향유로서는 아빠라는 존재가 얼마나 크게 보였을까.
이를 잘 보여주는 건 글씨놀이한 바로 곁에 향유가 지은 ‘건물’이 있다. 이것 역시 향유가 놀이 삼아 지은 건물이다. 부모가 창고 집을 짓다가 남은 벽돌을 가지고 집짓기놀이를 한 거다. 레고 블록처럼 쌓아올린 건물.
놀이 삼아 향유 자신도 집을 지어보면서 얼마나 흐뭇했을까. 아빠가 집을 지었듯이 자신도 집을 지을 수 있다는 뿌듯함. 지금 자신이 지은 집은 작지만 자신이 자라 어른이 되면 아빠처럼 큰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지 않았을까.
아이들은 어른들 삶에서 많은 걸 보고 배운다. 말로 하지 않아도, 억지로 가르치지 않아도…. 그리고 그걸 표현하고 싶어 한다. 말이든, 그림이든, 조각이든, 노래든, 몸이든…. 향유 작품 덕분에 즐거운 감상을 했다.
별명을 붙인다면 ‘겸사겸사’
이 집 부부를 보면서 부러운 게 있다. 부부 사이가 참 좋다. 연수든 교육이든 부부가 늘 붙어 다닌다. 향유도 당연히 함께 다닌다. 이런 모습은 보는 것만 해도 기분이 좋다. 보통 시골에 살면 곡식이나 동물에 매인다거나 일이 바빠 부부가 함께 집을 비우고 어디를 가기가 어렵다. 또 사람에 따라서는 약간 가부장적인 문화도 남아 있어 남자들이 주로 모임에 나온다. 향유네는 그런 점에서 아주 자유롭고 당당하다. 이번 여름 연수 때도 그랬다. 향유아빠는 연수회 전체 진행을 보기도 하고, 기타 반주를 하며 분위기를 돋운다. 향유엄마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연수회에 참여해 뒷일을 열심히 한다.
향유엄마는 시골 살림에도 잘 적응한다. 재래식 화장실을 불편해하지 않으며, 냇가에서 빨래하는 걸 즐거움으로 여길 정도다. 게다가 제철 음식과 자연의학에 매력을 느껴 지금 삶을 행복해한다. 여름밤이면 반딧불이 나는 모습을 즐기고, 밭가는 길을 향유랑 걸으며 온갖 호기심에 들뜨곤 한다.
한마디로 향유엄마는 농촌 생활에 별 어려움을 못 느낀다. 그래도 바람은 있다.
“향유아빠는 일에 너무 매달려요. ‘일만 하면 소, 공부만 하면 도깨비’라는 말도 있잖아요?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식구가 함께 도서관에도 가고 하면 좋은데 그렇게 말하면 나랑 향유랑 둘이서만 다녀오래요. 자기는 일해야 한다고. 어쩌다가 나들이를 가더라도 편하게 지내지를 못하고 다른 일이랑 꼭 겹쳐서 볼일을 보려고 해요. 그래서 내가 향유아빠에게 붙인 별명이 ‘겸사겸사’예요(웃음).”
그리고 향유가 커가면서 기쁨도 많지만 고민도 하나둘 생긴다. 마을에 또래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활기가 넘치지만 향유가 학교를 다닌다면 풀어가야 할 숙제들. 그 가운데 하나가 학교 운동장에 나는 풀을 없애는 문제다. 한번은 향유를 데려오려고 병설 유치원에 갔는데 학교 관리인 아저씨가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곁에서 제초제를 치더란다. 환경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제초제가 얼마나 독성이 강한지를 뼈저리게 안다.
새 세계를 여는 만남
그런 독약을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곁에서 뿌리고 있는 거다. 향유엄마는 너무 놀란 나머지 교장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교장선생은 아이들이 학교에 없는 사이에 치겠다고 답변을 했지만 영 찝찝한 게 사실이다. 또 하나는 학교 급식이다. 아이가 학교 급식에 익숙하다보니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잘 안 먹는다는 거다. 이 집 부부는 기회가 되면 학교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학교 급식 문제에도 관여하고 싶단다.경북 상주 백화산 언저리에는 한 농부의 꿈이 담긴 포도밭이 있다. 그 포도밭에선 이 세상 유일무이의 ‘향유네 와인’이 만들어진다. 억척같은 농부의 희망과 회한이 담긴 포도주. 그래서 그 맛은 달콤 쌉쌀하다. 뭐 두 쪽만 찬 채 귀농해 자연에 제대로 뿌리내린 향유네 부부. 예술을 아는 농부 김광화씨, 이번엔 ‘인생의 와인’에 푹 빠졌다. 정직한 삶에 취하고 건강한 만남에 취하고….
종관씨네 부부는 이제 30대 중반. 젊은 부부가 맨손으로 내려와 서로 의지하고 산 지 10년. 신뢰를 쌓으며 이웃과 사회로 뻗어가는 향유네 모습이 아름답다.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힘은 향유네가 성실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삶의 근본을 돌아본다면 거기에는 자연이 있다. 향유네를 보면서 새삼 느끼는 건 자연은 땀 흘린 만큼 정직하게 되돌려준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들 부부는 과일나무로 견주자면 가장 왕성하게 열매 맺고 가지를 뻗을 나이이다. 이들 가족이 가꾸고 거두는 열매란 포도만이 아닐 것이다. 땅에 뿌리내리고 지역으로 뻗어가는 게 뭔지를 나누는 것이고, 돈이 없어 뭘 못한다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작으나마 희망을 주는 게 아닐까 싶다. 그 과정에서 ‘만남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열림’이라는 향유네 철학이 이 땅에 튼튼히 뿌리내리기를 소망한다.
치매 어머니를 ‘존엄’케 하는 자연의 힘, 똥조차 꽃으로 보이는 깨달음의 삶
전북 장수 장계 덕유산 자락에는 치매에 걸린 노모와 함께 사는 농부가 있다. 노동운동가, 민중정치인을 거쳐 이제 농부와 명상가, 대안교육가로 안착한 목암 전희식씨. 어머니가 싸놓은 똥을 보고 ‘똥꽃’이라는 시를 지은 그는 또 다른 진보를 어머니와 생명에서 발견한다. 자연과 ‘일’은 어머니의 마음 병을 기적적으로 치유해 나갔고, 그는 어머니에게 노년의 존엄과 권리를 스스로 찾게 했다. |
나는 낯을 심하게 가리는 편이다. 낯선 사람과 잘 사귀지 못하고, 말 건네기도 쑥스러워해 친구가 많지 않다. 그나마 시골 내려와 살면서 얼굴이 조금씩 두꺼워져 아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는 편이다. 아직도 사람을 사귀려면 가슴부터 두근두근한다. 이번에 그렇게 새로 사귄 이웃이 있다. 전북 장수 장계 덕유산 자락에 사는 전희식(全喜植·50)씨가 그이다. 전씨는 그전부터 지면으로 알고 지내던 사이이고, 그가 사는 장계는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만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내가 전씨를 처음 만난 건 한 달 전쯤인가, 그가 잔치를 열면서 사람들을 초대했을 때다. 마침 내가 잘 아는 이가 거기 참여하려고 가는 길인데 나보고 같이 가자고 했다. 전씨가 여는 잔치는 어머니를 위한 잔치라는데 환갑이니 칠순이니 하는 그런 잔치가 아니란다. 잔치 이름이 ‘어머니의 건강과 존엄을 위한 기도잔치’란다. 잔치라면 즐겁게 어울리고 맛난 음식을 나누는 자리일 텐데 ‘존엄’이라니…. 생각할 거리가 많을 듯해 길을 나섰다.
전씨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곳은 우리 집에서 승용차로 30분 거리. 전씨 집 들머리에는 승용차가 줄줄이 서 있고, 집으로 들어서니 마루와 마당에 사람들이 북적인다. 한창 식이 진행 중이어서 전씨와는 우선 목례만 주고받았다.
노모의 존엄을 위한 잔치
천천히 분위기부터 살폈다. 20여 명의 사람 가운데 아는 사람도 몇 보인다. 아이도 여럿 있고, 전씨 어머니는 방안에서 쉬고 계셨다. 잔치 의식 가운데 대금 연주도 있고, 명상 춤도 춘다. 마당 한 귀퉁이에는 어머니 사진도 전시해놓았다. 조금씩 분위기에 익숙해지자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식이 끝나고 마당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었다. 잔칫집이라지만 음식이 풍성하지는 않았다. 떡메로 쳐서 만든 인절미와 김치, 그리고 과일과 술 몇 병이 전부다. 사람들은 음식보다 이야기를 나누고 영적인 기운을 주고받고자 한다.
이날은 전씨와 얼굴 익히는 정도로 하고 헤어졌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그러곤 우리 마을 이웃들과 어울렸다. 그런데 이야기가 흘러가다 보니 부모 모시는 문제가 생각보다 절실한 걸 알았다. 연세가 칠순 팔순이 된 부모님을 모시는 이웃이 적지 않다. 나 또한 어머니는 칠순,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팔순이 넘는다. 우리 사회가 고령화 사회로 넘어간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안고 있는 고민은 곧 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세상이다. 그런 점에서 전씨가 보여주는 삶의 해법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듯하다.
이후 추석 무렵에 그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장계가 아닌 완주 소양에서. 전씨의 집은 두 곳에 있다. 본디 귀농해 완주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올봄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장계에 따로 집을 마련했다. 소양에는 아내와 자식들이 머무른다. 추석을 지낸다고 식구가 모두 소양 집에 모인 거다.
전씨는 시골에 내려온 뒤 8년 만에 전북 완주 소양에 24평 집을 손수 지었다. 이 집에 와서 직접 보니 아주 잘 지은 집이다. 흙과 나무로 지은 집에 지붕은 흙 기와를 올릴 만큼 돈도 들였다. 담장 또한 튼튼하면서도 예쁘게 쌓았다. 흙과 돌과 나무토막으로 멋을 내고, 빗물에 허물어지지 않게 담장 지붕도 씌웠다.
사람을 사귀자면 살아온 이야기부터 나누는 게 제일인 것 같다.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나 행동 또는 일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시골에 와서 이런 부분에 대한 이해 없이 이웃을 사귀다가 고생한 기억이 적지 않다. 삶의 뿌리에 대한 이해 없이 열매만 따고 나누어 가지려는 욕심은 자기 상처가 되기 쉽다.
전희식씨는 별명이 여럿이다. 농사를 중심에 놓고 지은 이름은 농주(農住 또는 濃酒). 마음공부를 하면서 얻은 법명은 휴강(休康). 나이 드신 어머니를 시골집에 모시고 살면서 새로 얻은 법명은 목암(牧庵)이란다. 그 뜻은 ‘고요한 오두막 하나 지키고 살아라’이다.
이 글에서는 여러 이름 가운데 목암을 쓰고자 한다. 목암은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예전에 민중당 소속으로 인천에서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해 8.6%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시골에 내려와서는 ‘감자를 아궁이 불에 굽다’라는 책을 냈다. 지금도 농사를 지으며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한다. 생명평화결사운동이라든지 귀농운동에도 몸담고 있고, 잡지와 신문 그리고 인터넷 매체에 두루 글을 쓴다.
‘생명의 농사야말로 진보’
대안교육에 대한 경험도 다양하다. 두 아이, 새날(19)이와 새들(17)이가 모두 대안학교를 거치면서 학부모로서 깊은 고민과 성찰을 하게 된다. 또한 부정기적으로 ‘보따리 학교’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을 손수 운영한다. 이 학교는 배우고 싶은 아이들이 보따리만 싸서 오면 함께 삶에 대해 공부하는 한시적인 학교다. 이 뿐만이 아니다. 가까운 마을 할머니들을 위한 한글 교실도 열고, 좀더 멀리 발을 뻗어 장수읍내 이주여성 지원센터에도 1주일에 두 번 강의를 나간다.
그를 더 알아보기 위해 젊은 시절과 귀농 동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목암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당시 삶은 치열했고, 가슴은 뜨거웠다. 그때 만난 인연들 가운데 지금은 꽤나 유명한 사람도 많다. 경기도 지사인 김문수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김근태가 그들이다. 목암은 1992년 총선을 치르고 나서 삶의 변화를 근본에서 다시 모색한다. 사회 변혁 이전에 존재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을.
그러다 1993년 무소유 공동체를 지향하는 야마기시 명상수련에 참여하면서 예전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그 어떤 희열을 맛본다. 그가 정리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많은 변혁운동이 상대를 공격하면서 상처를 받는다. 이는 곧 자기 상처가 되며 이를 다시 투쟁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이제는 이런 방식을 벗어나야 한다. 깊은 명상의 힘을 운동의 힘으로 삼자.’
술 한잔 마시지 않았는데도 오는 충만감과 희열감. ‘이게 뭘까? 어디서 오는 걸까.’ 명상 끝에 그는 삶의 거처를 옮긴다. ‘생명의 농사야말로 진보’라는 결론을 얻고, 1994년에 전북 완주로 내려온다. 농사를 짓고 명상을 꾸준히 하면서 삶의 지평이 달라지는 걸 깊이 체험한다.
“모든 존재물과 조화로운 관계, 더불어 번영해야 하는 거지요. 자신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며, 세상을 살리는 걸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봐요. 울분에 차지 않고, 미워하거나 분노하지 않으며, 자신을 바로 보고, 외부를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자세. 전우주적 존재감을 갖고 살아가려고 해요.”
생명의 농사를 바탕으로 그는 삶의 지평을 하나하나 넓혀간다. 자연의학과 민족생활 의학을 두루 섭렵하고, 대안교육에도 깊숙이 발을 담근다. 최근 6년 동안 그가 학부모로서 관계한 대안학교는 네 곳이나 된다. 지리산에 있는 실상사 작은 학교, 강화도에 있는 마리학교, 담양에 있는 한빛고등학교, 그리고 홍성에 있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다. 그러다 지난해 큰아이 새날이가 고등학교를 1학년만 마치고 그만둔다. 스스로 세상을 학교 삼아 배움의 길로 나아가겠다고.
목암은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고, 이런 방식의 배움을 ‘스스로 세상학교’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이 학교는 마리학교의 장계분교가 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 학교를 어찌 운영할지에 대한 세부 계획을 세웠고, 첫 입학생을 받았다. 이렇게 목암은 새로운 교육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지만 여기서는 부모 모시기로 이야기를 집중할까 한다.
노인에 관한 무지, 폭력
어느덧 우리 사회도 고령화로 접어들면서 부모 모시는 문제가 자식들에게 큰 일로 다가온다. 웬만큼 경제력을 갖추지 않은 한 양로원이나 노인병원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자식들이 직접 모시는 것도 그리 만만한 세상이 아니다. 설사 의무감으로 집에서 자식이 모시더라도 그 주체는 대부분 여성 몫이 된다. 며느리가 시부모를, 아니면 딸이 친정 부모를 모신다. 살림을 모르고는 노인을 보살피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목암은 남성으로서, 장남이 아닌 막내아들로서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신다. 그것도 기쁘게.
그가 이렇게 어머니를 모시는 데는 사연이 조금 길다. 지금 어머니는 연세가 여든여섯, 하반신과 청각에 장애가 있어 현재 장애 3급 판정을 받은 상태다. 서울 사는 큰형님이 20여 년 동안 어머니를 모셨다. 7년 전쯤 눈이 오는 날 외출했다가 넘어져 골반을 크게 다쳐 큰 수술을 하게 되고 이후 어머니는 집안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러더니 3~4년 전부터 치매 증상이 나타났다. 증상이 점점 악화돼, 1년여 전부터는 똥오줌을 가리는 일조차 스스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귀저기를 차고 방안에서만 지냈다. 날마다 방을 치우고 닦고 옷을 갈아입히지만 방안에 악취가 배어 사람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쩌다 자식들이 어머니에게 인사드리러 와서도 막상 마주하면 5분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였단다. 목암은 그런 어머니를 볼 때마다 비참한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삶의 존엄성이 훼손당한다고 본 거다.
“어머니가 지내는 방에 가보면 그 안에 다 있어요. 티브이 있겠다. 개인 옷장, 면경 다 있어. 밥도 다 갖다드리겠다. 거기서 어머니가 나오는 일이 없어요. 방안 온도도 20도로 맞추어져 있어요. 추운지 더운지,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 몰라요. 사계절을 느끼고 살아야 오감도 살잖아요? 게다가 기저귀까지 차고 있으니 배뇨기를 느끼기가 더 어렵단 말이에요. 점점 더 몸이 감각을 잃어버리는 거지요.”
목암은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씩 흥분한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아주 논리 정연했다.
“또 하나는 노인네를 배척하는 문제인데. 국외자로 낙인찍는단 말이에요. 문밖에만 나가려고 하면 ‘가만 계세요’. 다치거나 길 잃어버린다고. 물 좀 마시려고 해도 ‘가만히 계세요’. 잘못하면 그릇 깨뜨리니까. 우리 형님이 잘못하는 게 아니라 다들 그렇게 한다고 봐요.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심지어 가만히 있어도 모든 사물로부터 소외당한단 말이에요. 모든 게 기계화가 되어 있으니 청소 하나 마음대로 못한단 말이지요. 노인네라 청소기도 쓸 줄 모르는데다가 청소기 소리는 또 얼마나 무섭고 낯설어요. 자식은 잘 모신다고 하지만 어머니 처지에서는 수용소나 다름없는 거지요.”
4남 2녀 가운데 아들로서는 막내인 목암은 그런 어머니를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이 모셔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1년 가까이 단단히 준비한다. 노인 관련 책과 치매의 일종인 알츠하이머병에 관한 책을 두루 독파한다. 그가 도움을 많이 받은 책을 들자면 ‘노인이 말하지 않는 것들’ ‘마흔에서 아흔까지’ ‘노인심리학’ ‘노인학개론’들이다.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자, 이번에는 후배가 운영하는 노인병원에 들러 자원봉사를 자청, 온몸으로 노인의 삶을 체험한다. 그는 이곳에서 또 다른 울분을 느낀다.
“간병인이 노인에게 밥을 먹이는데, 노인 한 사람당 밥 한 술 떠넘기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요. 한 사람에게 6초 만에 한 술 먹이면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데 사람마다 밥을 넘기는 속도가 다르잖아요. 어떤 이는 10초가 걸릴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더 오래 씹을 수도 있는 건데. 밥숟갈을 마치 밀어 넣듯이 우겨넣는 겁니다. 이건 간병이 아니라 폭력이라고 봐요. 심지어 노인들을 대하는 말도 거의 다 반말이에요. ‘할머니, 일어나! 밥 먹어야지!’”
어머니의 기저귀를 벗기다
이렇게 공부하고 체험할수록 존엄에 대한 자각은 더 뚜렷해졌다. 누구에게나 존엄하게 살 권리가 있다. 어머니도 그런 권리를 누릴 수 있고. 목암의 눈에 그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노년이 비참한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외로움, 가난, 병, 할 일 없음….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삶이란 여러 가지가 서로 얽혀 있는 거다. 목암이 강조하는 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이 할 때 존엄하다’는 거다. 특히나 노인에게 존엄이란 스스로 돌보는 일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존엄이 아닐까 싶다.
이런 확신에도 목암이 넘어야 할 산은 적지 않았다. 아내의 동의를 받아내는 것과 어머니를 모실 만한 주거환경, 그리고 형제들을 설득하는 문제들이었다. 나로서는 소양 집이 한결 잘 지은 집인데도 장계 집으로 모시고 간 거부터 이해가 안 되었다.
“소양 집을 지을 당시는 어머니 생각을 전혀 못한 거지요. 우리 부부와 아이들이 살기 좋은 집으로 만든 겁니다. 어머니가 지내시기에는 너무 불편해요. 우선 화장실부터 그렇거든요. 몸이 불편한 어머니에게 맞추려면 지금 화장실을 다 뜯어내고 새로 지어야 해요. 그리고 집안에서 마당으로 나가는 동선이 노인이 살기에는 적합하지가 않아요. 미닫이창이 너무 크고, 마루턱도 너무 높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 우리 부부는 살림이나 개인 물건들을 좋게 말해서 자유분방하게 두는 편이에요(웃음).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그런 꼴을 못 봐요. 잔소리를 줄줄이 해대면 어느 며느리가 견디겠어요?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돌보는 일보다 생활을 간섭당하는 일이 더 힘들 거라고 여긴 거지요.”
이런 여러 요인을 생각해서 목암은 소양에서 멀지 않은 장계에 새로 집을 마련했다. 아홉 평(29.7m2) 남짓한 낡고 작은 시골집. 예전부터 사람이 대대로 살던 곳으로 시골 노인네들이 죽을 때까지 살다가 이후 버려진 집이다. 그렇기에 어머니와 살기에는 안성맞춤인 집. 작은 방문만 하나 열면 세상과 바로 연결되는 구조. 마루도 아주 낮다. 마루에 걸터앉으면 아이 발이라도 토방에 닿을 만큼 편안하다. 이 토방에서 마당으로 내려서는 턱은 한 자 남짓하니 앉은걸음으로도 내려올 수 있다. 생각을 깊이 하고 지은 집이라기보다 노인을 모시고 평생을 살아온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설계되고 지은 집인 셈이다.
그렇다고 아내가 선뜻 동의했을까.
“사실 아내 처지에서는 둘 다 어려운 선택이지요. 며느리로서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겠다고 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내가 가족을 제쳐두고 장계로 독립해서 어머니랑 산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렵잖아요. 상식으로 보면 가장이 어머니를 모신다는 핑계로 자기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게 되니까요. 아내가 내린 답은 침묵이었지요. 제 뜻이 워낙 확고하니까, 침묵으로 묵시적 동의를 해주었다고 믿어요. 요즘 아내는 1주일에 두 번, 근처에 있는 무주 푸른꿈 고등학교에서 요가 강의를 하는데, 강의를 마치면 장계 집에 들러요.”
다른 형제들을 설득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장계 집은 외진 산골이라 의료 시설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농사랑 목암이 벌여놓은 일이 많으니 형제들 반대가 심할 수밖에. 목암은 형제 가운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둘째형부터 설득해 나갔다. 시간이 문제지, 진심은 통하게 마련이다.
일상에서 일어난 기적들
목암이 올봄부터 어머니를 모시면서 맨 먼저 한 일은 귀저기를 채우지 않는 거였다. 어머니가 속옷에 싸는 똥과 오줌을 다 받아내고 그 많은 빨래를 다 한다. 그것도 세탁기를 쓰지 않고 손빨래로. 그가 손빨래를 하는 데도 특별한 이유가 있다.
“손으로 빨래를 하면 어머니 몸의 변화를 알 수 있어요. 빨래가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몇 시간마다 오줌을 싸는지, 똥 색깔을 보면서 먹은 음식이랑 건강 상태를 체크할 수도 있고요.”
그러면서 자신이 배운 자연의학 기술로 어머니에게 날마다 쑥뜸을 떠준다. 요리도 빼놓을 수 없는 일. 예전에는 아내가 요리를 하고 자신은 설거지만 하다가 하루 세 끼에다가 두 시간마다 어머니 참까지 마련해야 하는 과정이 녹록한 건 아니었다. 그렇게 모시면서 차츰 기적에 가까운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똥오줌을 조금씩 가리기 시작한 거다. 똥오줌이 마렵다고 몸이 느끼기 시작한 거고, 더 중요한 건 그 순간 참을 수 있을 만큼 방광과 항문 근육에 힘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치매에는 노인성 치매와 혈관성 치매가 있다. 알츠하이머병은 노인성 치매다. 현대의학에서는 노인성 치매는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약물 치료로 신경세포가 파괴되는 걸 늦출 수는 있지만 완전히 멈출 수는 없다고 한다. 쉽게 말해 죽음을 기다리는 병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보기에 목암은 의학에서 새로운 영역의 한 부분을 개척하고 있다. 그가 어머니 치유를 위해 노력과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는 방대하다. 자연환경과 적절하게 접목하고, 일과 놀이와 치유를 다양하게 결합시킨다.
기본 바탕은 아무래도 자연환경이다. 추울 때 추위를 느끼고, 더울 때 더위를 느껴야 몸의 감각이 살아난다는 거다. 그러고도 좀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우박이 떨어지면 어머니 손에 올려 감각을 되살리고자 했다. 밤낮을 구분하는 일도 아주 중요하다. 전등 하나만 끄면 온 세상이 어두운 밤. 그 밤 덕에 시골집으로 내려온 뒤 어머니는 밤에 잘 주무신다.
둘째는 일이다. 노인들이 존엄을 잃어버리는 데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절망감도 큰 이유가 된다. 생산적 노동이이야말로 삶의 이유이자, 성취감과 기쁨을 얻는 뿌리가 된다. 시골은 마음먹기에 따라 일이 끝도 없을 만큼 많다. 어머니가 하는 일이란 사회적 생산의 뜻보다는 놀이이자 자기 앞가림이면 된다. 목암이 어머니와 처음으로 시도한 일은 청국장 만들기. 이 일은 어머니가 수십 년 해오던 거라 잘 아는 일이다. 청국장 하나를 만드는 일에도 다시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콩을 고르고, 씻고, 끓이고. 아랫목에서 띄우고, 으깨고, 간 맞추고…. 어머니가 손수 할 수 있고, 하고 싶어하는 일은 모두 어머니가 하게 두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는 기억을 되살리고, 자기 존재감을 조금씩 확인하게 된다. 목암 역시 자기 확신이 현실로 드러나는 기쁨을 체험한다. 그는 이제 치매는 병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똥꽃’
이렇게 어머니와 새롭게 생활해가던 어느 봄날. 밭에서 감자를 심던 목암은 산에 진달래꽃마저 활짝 피어 있기에 세상을 잊고 그냥 일에 취한 적이 있다. 보통 때 그는 밭에서 일하다가도 2시간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걸 규칙으로 한다. 어머니는 두세 시간에 한 번씩 오줌을 누기도 하거니와 그때쯤 간식도 드려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이날은 일에 취하다 보니 시간 가는 걸 잊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온다. 아뿔싸, 어머니가 그 사이 똥을 싼 거다.
어머니는 당신이 다시 똥을 싼 것에 대한 자괴심으로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고, 어머니가 움직인 길 따라 이불에 똥을 묻힌 흔적이 드문드문 나 있다. 어머니를 씻기고 똥을 치우면서 목암은 시적 감흥이 떠올라 시를 한 편 썼다. 제목은 ‘똥꽃’.
감자 놓던 뒷밭 언덕에
연분홍 진달래 피었더니
방안에는
묵은 된장 같은 똥꽃이 활짝 피었네.
어머니 옮겨 다니신 걸음걸음
검노란 똥 자국들
내 어머니 신산했던 세월
방바닥 여기저기에
이불 두 채에
고스란히 담겼네.
우리 어릴 적 봄날은
보리밭 밀밭 마늘밭
구릿한 수황냄새로 풍겨났지.
어머니 창창하시던 그 시절 그 때처럼
고색창연한 봄날이 방안에 가득 찼네.
진달래꽃
몇 잎 따다
깔아 놓아야지
어머니가 이불에 싼 똥을 꽃으로 볼 수 있다니…. 이 시가 알려지자 어떤 사람은 여기에 곡을 붙여 판소리를 만들었다. 또 어느 독자는 목암에게 큰돈을 선뜻 건네기도 했다. 자신도 치매이신 부모님을 7년째 모시고 살지만 이불에 싼 똥을 보고 한 번도 꽃으로 여긴 적이 없다고 흐느끼며, 이 돈을 꼭 받아달라고….
이 일을 겪으면서 목암은 자기 삶을 좀더 깊이 성찰한다. 더 집중해서 어머니를 돌보아야겠다고. 그렇게 모신 지 석 달 만에 어머니는 똥오줌을 완전히 가리게 된다. 똥오줌을 못 가리다가 다시 가릴 때 오는 기쁨은 어떨까? 아기들이 가리는 것과는 다를 것 같다. 자연스러움이 아닌 치유의 기쁨, 절망에서 다시 솟아나는 기쁨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다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다. 가장 어려운 건 어머니가 망상에 빠지는 것. 망상은 치매 환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자기 삶 속에서 막힌 부분을 해결하고자 하는 그 어떤 동경 같은 것이란다.
목암 어머니에게는 ‘백운역 할아버지’라는 망상이 있다. 이 할아버지는 목암이 예전에 노동운동 관련 수배생활을 할 때 인천 백운역에서 구두를 수선하던 분이다. 당시 어머니는 아들에게 맞는 구두를 하나 사서 신기는 게 소원이었다. 아들 발이 몹시 커, 구두를 아무 곳에서나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망상에서 벗어나는 ‘일’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어머니 소원을 들어주신 거다. 지금 식으로 보자면 맞춤형 구두를 만들어준 셈이다. 어머니가 망상에 젖어들 때면 이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몸부림친다. 어머니는 이 할아버지가 못하는 게 없다고 믿는다. 침도 잘 놓으니 자신을 단박에 건강하게 해줄 거라 믿는다. 그러면서 한사코 그 할아버지에게 데려다달라고 떼를 쓴다. 이렇게 망상에 빠져들면 아들에게도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며 온갖 악담을 퍼붓는다. 이럴 경우 설득이 안 된다.
망상을 이겨내는 일은 쉽지 않다. 목암이 시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관련 전문가나 경험 많은 분들과 상담을 하고, 때로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들기도 하며, 상황극까지 만들어 어머니가 현실을 바로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또한 일상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어머니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늘 준비해두는 거다. 이를테면 바느질 같은 일. 내가 소양 집에 간 날도 그랬다. 목암이 어머니 드시라고 밤을 내어놓았다. 찐 밤이 아닌 생밤을. 어머니는 쪼그린 자세로 과일칼을 가지고 겉껍질을 깐 다음 속껍질은 손톱으로 하나하나 깐다. 그 모습이 마치 호기심 많은 아이 같다. 어머니는 그 일에 몰입한다. 그곳에는 어떤 망상도 들어올 틈이 없다. 부모를 잘 모신다고 자식이 과일을 다 깎아드리는 것과 견주면 큰 차이가 난다
그렇게 밤 두어 개를 노란 알이 드러날 때까지 정성으로 깐 다음 드신다. 어머니가 더는 밤에 흥미를 갖지 않자, 이번에는 목암이 바느질거리를 가져왔다. 뜯어진 개량한복 바지다. 어머니는 눈도 침침하고 귀도 어둡다. 아들이 바늘귀에 실을 꿰어드리자, 어머니는 천천히 바느질을 한다. 곁에서 보니 엄청난 집중이다. 바느질은 집중하지 않으면 자신이 먼저 바늘에 찔린다. 꿰맨 옷도 엉망이 된다. 중간에 실이 떨어지면 다시 목암이 실을 꿰어준다. 그때 어머니가 하시는 말.
“야야, 한꺼번에 바늘 두 개에다 다 끼워놓아라.”
그러자 목암이 놀란다. 어머니 목소리가 조용하다고. 이럴 때 어머니는 귀도 잘 들린다는 거다. 본인이 잘 들리면 말도 낮고, 안 들리면 목소리도 높아진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나대로 정리되는 생각이 있다. 사람이 뭔가에 집중하면 오감이 다 집중된다. 바느질에 집중하자면 우선 눈이 손끝에 집중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귀도 밝아지는 게 아닐까 싶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그 어떤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면 눈도 귀도 코도 활짝 열어두게 되리라. 그렇게 어머니가 여러 시간을 꼼짝도 하지 않고 집중해서 일하니까, 중간에 목암이 운동 좀 해야 한다고 다리를 펴게 한다. 망상은 ‘지금 여기’에 집중하지 못할 때 온다는 걸 새삼 느낀다.
치매 어머니의 수제비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느질만이 아니다. 아주 많다. 최근 7개월 동안 어머니가 한 일만 대충 꼽아본다. 휠체어에 앉아 텃밭에 물을 주기도 했고, 뽕잎을 따서 차도 만들었다. 키질, 콩과 팥 가리기, 가죽 자반 만들기, 아카시아 꽃으로 효소 만들기, 오디 따서 오디술 담그기…. 어머니는 점점 자신이 생기시니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기도 했다. 그러더니 한번은 마당에 목암이 쌓아놓은 나뭇단을 작은 손도끼로 잘게 잘라 불쏘시개를 만들 정도로 나아지셨다.
방안에서 자식이 주던 밥을 먹기만 하고, 똥오줌을 싸시던 어머니가 이렇게 달라지는 거다. 어머니가 달라지는 모습에 확신을 가진 목암은 이번에는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든다. 어머니가 차린 밥상이 먹고 싶다며 어머니를 설득한다. 메뉴는 수제비. 기본 밑 준비는 목암이 다 해두었다. 다시마국물을 마련하고, 애호박을 따오고, 칼도마와 기본 양념은 어머니가 언제든 쓸 수 있게 준비해두었다. 반신반의하는 어머니와 확신의 눈빛으로 다가오는 아들. 둘이서 수다를 떨면서 수제비를 만들기 시작한다. 아들은 어머니 곁에서 자잘한 심부름을 하며 보조해주자 어느 결에 수제비가 다 되었다. 어머니가 거의 20년 만에 손수 차리신 밥상이다. 모자는 그 감격에 겨워 수제비를 두 그릇씩이나 비웠단다. 나로서는 이 이야기를 곁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고 가슴이 뛴다.
“어머니가 똥오줌을 완전히 가리고 나서부터는 부쩍 즐겁고 유쾌한 시간이 늘어났어요. 농담도 곧잘 하세요. 우리 어머니는 예전에도 위트가 있으셨거든요. 그게 차츰 살아나는 거지요. 그뿐 아니에요. 삶의 의지도 부쩍 살아나고 있어요. 이제는 제가 옆에서 부추기지 않아도 스스로 하려고 해요. 아침에 일어나시면 하시는 말이 ‘우리 오늘은 뭐 하꼬? 뭐 해 먹을까?’ 그러시거든요. 하루 계획을 스스로 세워보는 거지요. 얼마나 놀라워요?”
어머니의 치유를 위해 목암이 새롭게 개발한 방식이 하나 있다. 바로 사진 찍기다.
“어머니 사진을 계속 찍어 인화를 해요. 틈날 때마다 사진을 꺼내서 어머니께 보여드리거든요. 알츠하이머 자료를 죽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 병은 옛날 기억은 하지만 최근 기억은 전혀 못 한다고 하거든요. 사진 찍기는 최근 기억을 되살려보고자 제가 나름대로 개발한 거예요. 한 달 전 기억을 소생하는 훈련이지요. 해 보니 정말 소생해요. 처음에는 못 알아보시더니 자주 하니까 일단은 자신을 먼저 알아보고 그 다음은 ‘너네’ 그러며 저를 알아보고. 다른 사람들도 두 번 세 번 본 사람은 언제 왔던 누구네 그런단 말이에요. 이 일을 겪으면서 ‘몸이 갖고 있는 무궁무진한 우주의 힘이 우리 안에 있다’는 걸 다시금 확신했지요.”
목암이 쏟아내는 이야기는 결코 지루하지 않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면서 또 다른 놀라운 일을 경험한다. 어머니에게서 여성성을 발견한 거다.
“어느 분이 제게 도움말을 주었어요. 어머니는 엄마 이전에 여성이라고. 아들이 어머니 모실 때 꼭 마음에 두어야 할 부분이라고 알려주었어요. 수치심을 안 느끼게 해야 하며, 나이가 들어도 자신을 꾸미고 싶어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 듣고 거울을 드렸더니 정말로 어머니는 거울을 보시며 빗질을 하잖아요. 사람들이 우리 집을 방문하면서 선물로 손지갑, 쪽거울, 스카프, 반짇고리들을 가져다주었는데 어머니가 참 좋아하세요.”
자식에게 하는 반만 하자
병든 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일은 의무감에 가까운 효심만으로는 어려울 듯하다. 어머니 모시는 데서 오는 그 어떤 깨달음과 기쁨이 있어야 서로 지치지 않을 것이다. 모시는 게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힘. 목암은 요리를 배우고, 자신에게 다가올 노년에 대한 공부도 저절로 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그는 조금 들뜬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그냥 제 어머니가 아니라 어떤 때는 신령님으로 비치기도 해요. 가르침을 주시고 저를 돌아보게 하니까요.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자면 제가 지쳐서는 안 되거든요. 무리해서 일하고 오면 어머니를 제대로 돌볼 힘이 남아 있지 않아요. 그래서 절대 무리해서 일을 하지 않아요. 자연스럽게 나를 잘 돌보는 게 돼요. 결국 어머니 모심이 나를 모시는 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면 내 노후도 저절로 보장되는 게 아닐까요?(웃음)”
우리나라도 점점 고령화 사회로 넘어감에 따라 노인성 치매도 늘어난다. 치매로 한 가정과 또 사회가 떠안아야 하는 비용이 적지 않다. 누구나 목암처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선 생각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부모님이 치매라면 고민이 한 가정 안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아요. 스스로 만족스럽게 모시지를 못하니까, 말 꺼내는 거 자체를 부담스러워하지요. 스스로 힘겨워하고 그러다 보니 형제간에 갈등도 적지 않고. 이제는 이를 드러내고 공론화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사실 자식 키우는 정성에 반만 하면 부모를 잘 모실 수 있거든요.
또 하나는 노인에 대한 무지가 극에 달했다 봐요. 늙어가는 몸과 마음 그리고 정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는 거지요. 노년의 삶도 전체 삶의 한 부분이잖아요? 아이들이 읽는 동화(童話)는 많지만 노인들이 읽을 만한 노화(老話)는 없거든요.”
그는 시간이 되면 노화(老話)를 직접 쓰고 싶단다. 또 노인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인터넷에는 ‘부모 모시기-자식 키우기 반만이라도(cafe.naver.com/moboo)’라는 카페를 열었다.
‘내적 연못’
그가 어머니를 이렇게 모시면서도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이 곳에서 어머니를 모셔야겠다고 처음 마음먹을 때는 이전 관계들을 다 정리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별 무리 없이 저절로 다시 연결되더라고요. 제가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사람들이 이리로 와요.”
그는 귀농운동과 관련해서 ‘시골 빈집 고쳐 살기 캠프’를 연 적이 있다. 참가자를 모으고 마을 이웃집 가운데 수리가 필요한 집을 골라 고쳐주었다. 여러 사람과 집 가까이서 이런 일들을 해 나가는 걸 어머니가 보면서 어머니 역시 새롭게 사람들을 알게 되고, 나중에는 참가자들과 헤어지는 걸 섭섭해할 정도였단다.
목암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내게 남아 있는 말은 ‘전우주적 존재감’과 ‘내적 연못’ 그리고 ‘떠올림’이었다. 이런 말들은 명상과 관련이 있다. 늘 깨어 있고,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삶. ‘내적 연못’이란 우주에 널려 있는 다양한 기운 가운데 높은 기운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면의 명상 상태를 말한다. 그런 단계로 나아간다면 굳이 말이나 글로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떠올림’만으로도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다. 목암과 자주 만나지 않더라도 이따금 그를 떠올릴 것이다. 우리 모두 ‘내적 연못’을 잘 가꾸어간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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