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김학민의 음식이야기

醉月 2010. 11. 8. 09:00

성 쌓다 죽은 불쌍한 소들아!

유명한 수원갈비의 연원은 정조대왕… 수원성곽 건설 위해 동원된 소들로 우시장 생겨

 

» 사진/ 팔미옥의 상차림. 암소고기 여덟 가지, 김치, 파무침 등 상차림 또한 20년이 한결같다.
정확히 연결되는 기록은 없지만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요즈음 유명한 수원갈비 등 수원의 쇠고기 문화는 정조대왕과 닿아 있다. 조선 중기의 영명한 군주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을 늘 애처로워해 양주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천장한 뒤, 융릉으로 격상시킨다. 정조는 이에 그치지 않고 융릉의 배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성곽을 쌓고 신도시를 건설한다. 오늘날의 수원이다.

화성의 건설은 18세기 말 조선의 경제력으로는 엄청난 사업이었다. 그러나 이 대역사는 정약용·채제공 등 당시 정조를 보필하던 실학파 대신들의 치밀한 설계와 공정관리로 10년을 예상한 공사기간이 3년 반으로 단축되어 완공되었다.


1796년 화성이 완공되었을 때 화성 주변은 돌·목재·흙 등 성곽 건설에 필요한 자재들을 운반하기 위해 조정에서 구입한 소들이 넘쳐났다. 정조는 융릉 건설로 이주해온 농민들과 성곽 건설 노동자로 왔다가 눌러앉은 사람들에게 이 소들을 분양해주고, 그 대가는 3년 뒤에 송아지로 바치도록 했다. ‘3년 거치 후 송아지 상환’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3년이 지난다. 소 한 마리씩을 분양받은 농민들은 이제 송아지 한 마리씩을 준비해야 한다. 때맞춰 분양받은 소가 송아지를 낳은 집도 있겠지만, 수소를 분양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암소라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때에 맞게 송아지가 딸리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후의 사태는 뻔하다. 사람들은 송아지를 구하기 위해 난리였고, 그래서 수원에 갑자기 어마어마한 우시장이 생겨버렸다. 정조는 진작에 수원의 장시를 활성화하기 위해 관모와 인삼 유통의 독점권을 수원 상인들에게 주었다. 이와 함께 어마어마한 우시장이 수원에 개설돼 당시 한수 이남의 상권을 쥐고 있었던 안성 장시는 ‘작살’이 났다.

이후 일제를 거쳐 60,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수원 부근에서는 소를 많이 길렀고, 우시장 또한 1970년대 초까지 소를 매는 말뚝만 3천개가 넘을 정도로 활발했다. 참고로 수원 월드컵경기장이 있는 우만동(牛滿洞)의 옛 이름은 ‘소마니뜰’로, 이 구릉에서 소를 많이 길렀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역사고 다음부터는 상상력이다.

소들이 그렇게 많았다면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성곽 건설 중에 사고로 죽는 소도 있었을 것이고, 이후 폐사하거나 도살·밀도살되는 소도 자연 많았을 것이고, 여기에서 수원갈비 등 수원의 유명한 쇠고기 문화가 비롯되지 않았을까 유추해본다.

수원의 갈빗집들은 흔하다. 그러나 흔하다고 하여 처진다는 뜻은 아니다. 어느 집을 들어가더라도 웬만한 사람은 1인분만 먹어도 배가 부른 맛깔스러운 두툼한 갈비가 나오니, 갈빗집 찾느라 특별히 고민할 필요가 없다.

 

 

조개를 안주로 매향에 취하다

상처입은 땅 매향리에서 느끼는 특별한 정취… 시퍼런 바다를 굽어보며 조개를 구워보라

내후년, 잔설이 가시고 양지바른 묘지 잔디 위 따사한 햇볕 속에서의 낮잠이 꿀맛 같을 초봄, 이곳 매향리엔 청매화 향기가 온 동네를 휘감으리라.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매향리. 옛날옛적 서원과 무장이라는 두 선비가 마을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것저것 좋은 이름들을 생각해보았지만, 결국 모두가 만족스럽지 않아, 서원이 ‘매’(梅)자를 내고 무장이 ‘향’(香)자를 붙여 이곳 이름이 매향리로 정해졌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최근까지 매향리에는 매화나무가 없었다. 매화나무가 없으니 물론 매화향기도 나지 않는다. 지난 반 세기 이래 매향리는 미공군의 사격연습장으로 변해버렸다. 새 초롱처럼 생겼다 하여 농섬이라는 이름이 붙은 매향리 앞바다 작은 섬은 미공군기들이 내려갈기는 기총소사의 표적이 되었다. 매향리 일대는 혹시

                                             켄터키에서 건너온 미군 중대장 아이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인지 ‘쿠니 사격장’으로 바뀌었다.

» 사진/ (김학민)
들리는 이야기로는, 농섬은 먼바다에 외로이 떠 있는 섬이 아니기 때문에 전투기들이 민간인 거주지역을 낮게 날아 직접 사격을 할 수 있어 훈련조건이 아주 좋은 사격장이라고 한다. 지난 3월30일 홍일선 시인 등 200여명의 문화예술인들은 포연에 찌들고 포탄 조각들이 어지러이 나뒹구는 매향리 일대에 2천여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매향리에 갔을 때, 나는 사격장 철조망 사이사이에서 매화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폭격으로 사격으로 갈가리 찢겨 빨간 속살이 드러나 신음하고 있는 매향리 땅을 위해 못난 후손들이 할 수 있는 소박한 위로였으리라.


사격장 철조망을 살짝 빗겨나 왼쪽으로 가면 작은 포구가 있다. 경기만 일대가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갯벌 하나 남아 있지 않고, 아담한 포구들 또한 뭍으로 뭍으로 사라지는 이때 이렇게 예쁜 포구가 남아 있다는 것이 참으로 대견스럽다.

» 사진/ 바다소리 주인 백승선(오른쪽)씨와 부인 김애라씨. 바다가 바로 발앞에 펼쳐져 있다. (김학민)
이 포구에는 조개구이집들이 예닐곱 군데 있다. 선착장과 방파제의 바다 쪽으로 가게들을 이어달아, 물이 찰 때는 시퍼런 바닷물 위에서 조개를 구워먹는 맛이 제법 그럴 듯하다. 나는 매향리에 오면 젊은 부부 백승선(33), 김애라(32)씨가 열심히 일하는 것이 너무 보기 좋아 방파제의 네 번쨋집 ‘바다소리’에 단골로 간다. 바다가 바로 코앞에, 발 아래 있는 그 집의 ‘특석’에 앉아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소라·바지락·명지조개·키조개·대합을 구워 소주 한잔을 기울이는 정취가 끝내준다.

모듬조개 한 소쿠리에 1만5천∼2만원 하며, 부근에서 잡히는 우럭·도다리 등이 kg당 2만5천원이다. 조개 한 소쿠리와 생선 1kg이면 3∼4명의 안줏감으로 충분하지만, 그래도 속이 허전하다면 바지락칼국수 1∼2인분 추가할 일이다.

평균 하루 1번 반 정도 물이 들어와서, 방파제나 심지어 조개구이집 앉은 자리에서도 낚시를 할 수 있다. 웬만하면 망둥어 낚는 손맛을 꽤 쏠쏠하게 본다. 물때는 바다소리 주인 백씨에게 전화로 물어보면 친절히 알려준다(016-323-2282). 서해안 고속도로 발안 나들목으로 나와 우회전, 조암 방향으로 20분쯤 가면 이화리 표지판이 나오고 여기서 15분 정도 더 가면 매향리다. 돌아오는 길에 어부들이 잡아오는 바지락 등 조개를 싸게 살 수 있으며, 월문리 온천단지 부근에서 해수목욕을 해도 좋다.

갈비 빼고 곱창 빼고, 정말 쫀득쫀득 맛있는 고깃집을 하나 소개한다. 수원 남문에서 수원역으로 500m쯤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권선공영주차장 건물이 나오는데, 바로 그 뒤에 팔미옥(031-245-6325)이라는 가내수공업적 안창살집이 있다.

윤기순(69) 할머니 혼자 20년째 주방장이자 종업원인데, 암소고기 여덟 가지, 김치, 파무침, 짠지물김치 등 상차림 또한 20년이 한결같다. 몇년 전 도로 개설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테이블은 서너개뿐인 것이, 아마 윤 할머니 혼자 시장 보고 밑반찬 만들고 서빙하고 치우는 데는 가장 적당한 규모인 것으로 짐작한다.

철저히 한우 암소고기만을 고집하는 팔미옥에는 안창살, 치마살, 차돌, 아롱사태, 제비추리, 토시살, 안심, 안심채끝, 등심채끝, 꽃등심 등의 메뉴가 있지만, 특별히 골라먹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좋은 부위의 고기가 들어오면 윤 할머니가 단골들에게 전화하여 먼저 떨어져버리고, 좋지 않은 고기는 아예 가져오지 않기 때문에 손님들은 그 날 ‘확보된 고기’ 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다.

모든 메뉴가 450g에 3만7천원인데, 두 사람이 먹기에 충분하다. 추가로 2분의 1을 주문해도 된다. 고기를 먹고 난 뒤 돌판에 김치 송송 썰어넣고 볶아먹는 밥도 일품이다.

 

80년대, 보신탕은 울었다

‘보신탕’ 대신 ‘계속합니다’ 간판을 걸어야 했던 블랙코미디… '개벼다귀' 육수의 정수를 보여주는 평양옥

» 사진/ 평양옥의 독창성은 육수에서 찾을 수 있다. 개고기를 찢고 난 뒤 남은 뼈로 우려낸 육수는 고소한 맛이 끝내준다. (김학민)
나지막한 한옥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낙원동의 막다른 골목. 한낮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정오께, 사내 서너명이 골목 안에 들어서서 어느 집 대문을 밀더니 한 사내가 안에다 대고 은밀히 묻는다. “계속합니까?” 대문 안의 대답. “네, 계속합니다.”

1984년 여름이었던가. 오랜만에 그 집을 찾아온 내가 직접 본, 간첩들이 암호를 교환하고 접선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들은 무엇을 계속하느냐고 물었고, 또 무엇을 계속한다고 답하고 있었던가? 그것은 바로 보신탕이었다. 보신탕 한 그릇 먹겠다는데, 이 무슨 해괴한 짓들인가?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모른다. 80년대 어두운 시대의 그 블랙 코미디를.

80년 5월,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항쟁을 총칼로 짓밟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시선을 돌리고 세계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88올림픽 유치에 전력을 기울인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88올림픽 유치에 성공하고, 80년대 초반부터 경기장 건설 등 올림픽 개최를 위해 대대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 대로 모든 게 잘 진행되는 것 같았는데, 엉뚱한 데서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몇몇 서구 국가의 올림픽위원회와 브리지트 바르도 등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이 한국의 보신탕 문화를 들먹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한국이 보신탕을 금지하지 않으면 88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바야흐로 반만년 이상 이어져온 한국의 음식 주권이 위협받는 순간이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이들의 압력에 못 이겨 전국에 보신탕 판매를 금지시켰고, 이 땅의 보신탕 문화는 단절의 위기에 놓였다. 대부분의 보신탕집들은 문을 닫거나 업종을 바꿀 수밖에 없었지만, 일부 몰지각한 서구 여론과 전두환 정권의 탄압(?)을 무릅쓰고 끝까지 음식 주권을 지킨 집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버젓이 ‘보신탕집’ 간판을 내걸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 즈음 새로이 생겨난 이름들이 보양탕·영양탕·사철탕 등이다. 글의 첫머리에서 소개한 낙원동의 보신탕집은 아예 간판을 떼어버리고 조그마한 나무 판자 입간판에 “계속합니다”라고만 써서 세워놓았으니, 어두운 시대 보신탕 수난사의 한 장면이었다.


보신탕의 원래 이름은 개장국으로 추정된다. 놀부에게서 쫓겨난 흥부네 아들 12명은 한창 나이의 왕성한 식욕에 먹을거리가 없어 언제나 먹을 것 타령을 했다. 그래서 <흥부가>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어무니, 개국에 이밥 말아 한 그릇 먹으면 좋겠수.” 또 1920∼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소설들에는 ‘개장국’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런 문헌들을 보면 보신탕은 최소한 일제시대까지는 개국·개장국이라고 불렸다. 한국전쟁 뒤 개고기를 즐겨먹던 이북 사람들이 많이 내려오면서, 또 전후 피폐한 상황에서 개장국이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선호되면서 보신탕으로 이름이 변한 것 같다.

 

 

 

 

아주 독창적인 보신탕집을 한곳 소개한다. 서울 서대문 네거리 부근에 있는 평양옥(02-363-7058) 주인 김미자(44)씨는 경기도 팔당에서 20여년간 보신탕집을 연 친정어머니의 비법을 전수받아 본인 역시 지금까지 20여년간 같은 자리에서 보신탕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 집의 독창성은 육수에서 찾을 수 있다. 어느 날 문득 삶은 개고기를 찢고 난 뒤 버리던 뼈들이 아깝다는 생각에서 24시간 푹 고아보았더니, 뼈는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고, 아주 뽀얀 육수가 나오더란다. 육수와 고기 삶은 물을 각각 반씩 섞어 탕과 전골을 끓이는데 고소한 맛이 끝내준다. 수육 또한 끓는 육수에 적셨다가 먹으면 무척 부드럽고 쫄깃쫄깃하다.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을 비유해 일컬던 ‘개뼈다귀’도 이렇게 잘 이용하면 유용한 것이 된다. 수육·전골·무침 모두 1인분에 2만2천원이고, 탕은 1만5천원이다. 여주인의 손이 넉넉하여 어지간히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1인분이면 족하다.

 

갈래갈래 쫄깃쫄깃한 칡냉면

남원 유생 김원립의 한이 서린 신갈에서 유서깊은 신갈칡냉면을 찾아보라

» 사진/ 신갈칡냉면의 차림상. 양념통 하나 없이 무채한 접시와 가위만 내놓는다. (김학민)
“갈래 갈래?”

“갈래 안 갈래.”

두 사람이 전혀 웃지도 않고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슬쩍 엿들어본들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최소한 70년대 중반까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에 살았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암구호와 같은 이 대화를 풀어보자.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가 교차하고, 경부고속도로 수원 나들목이 있어 수도권 남부의 교통 요충지가 된 신갈(新葛)의 옛 이름은 갈천(葛川)이다. 갈천의 ‘천’은 ‘내 천’이니 갈내, 입말로 하면 ‘갈래’이다. 그러므로 “갈래 갈래?”는 신갈 주변 마을사람 한명이 친구에게 “신갈 가겠느냐?”고 물은 것이고, “갈래 안 갈래”는 “신갈에 가지 안 겠다”는 친구의 대답이다.

신갈의 옛 이름이 갈천이 된 데는 한 역사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얽혀 있다.


남원 유생 김원립(金元立, 1590∼1649)은 1613년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모하자 몇몇 유생들과 함께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광해군의 미움을 사 유배되었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김원립은 전라도 능주부사로 복위되고 곧 병자호란을 맞게 된다. 청나라 군사에 쫓겨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 농성하매, 김원립은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와 과천 부근에서 청나라 군사와 접전해 청군 다수를 주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김원립은 여러 내직을 거쳐 종성부사직을 지내게 되었다. 이때 국경 백성들이 몰래 청나라 땅에 사냥하러 들어갔다가 청군에게 붙잡혔다. 굴욕적인 삼전도 항복 이후 청나라의 눈치를 심하게 보는 그 즈음의 상황에서 조정은 할 수 없이 김원립의 죄를 물어 종성부사직을 물러나게 했다.(<인조실록> 인조25년 10월9일조) 김원립은 이후 실의에 차 용인에 낙향하여 제자를 기르며 노후를 보냈다. 그가 낙향했던 지금의 신갈땅이 그의 아호 ‘갈천’을 따 갈래라 불리게 된 것이다.

참고로 1920년대에 북만주에서 김좌진과 함께 무장독립운동을 총지휘했던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장군(국가보훈처 제정 2002년 4월의 독립운동가)은 김원립의 직계손이며, 70, 80년대 투철한 민주화운동가였고 현재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인 김근태 의원도 김원립의 직계손이자 김혁 장군의 방계손이다.

신갈, 곧 칡개천 마을에 제법 괜찮은 칡냉면집이 하나 있다. 신갈칡냉면(031-282-1942)이다. 원래 칡냉면은 냉면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면발을 직접 눌러 뽑는 것이 아니라, 식품회사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면을 사용하는 것에서 오는 ‘획일화된 맛’에 대한 선입견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신갈칡냉면도 회사 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한가지이지만, 10여년 동안 칡냉면만 만들어오면서 터득한 이 집의 주방장이자 사장인 최인숙(57)씨의 손맛이 이를 완벽하게 극복하고 있다.

적당히 끓는 물에 적당한 시간 삶아 찬물에 헹궈냄으로써 면발은 쫄깃쩔깃 차진 생명력을 갖게 되고, 여기에 이 집의 비법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매콤새콤달콤 육수와 삶은 달걀 반쪽, 새큰하게 익힌 무채를 얹으면 대한민국에서 한다 하는 메밀냉면집은 금방 잊어버린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이 집에는 겨자, 식초, 고추양념통은 하나도 없고, 반찬이라고 덩그러니 무채 한 접시와 음식가위만 탁자 위에 놓여 있다. 내 손에서 나온 그대로가 제일 맛이 있으니, 양념 더 넣을 것 없고, 육수 더 부을 것 없이 그대로 먹으라는 주인 최씨의 자부심이다. 또한 냉면발을 가위로 토막토막 잘라 낚시질하듯 건져먹지 말고, 쫄깃쫄깃 긴 면발을 입으로 끊어가며 탐스럽게 먹으라는 주인 최씨의 조언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제대로 된 집이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이 집도 칡냉면 이외에는 아무 메뉴도 내놓지 않는다. 수육도 없고, 지짐도 없으며, 술도 없다. 오직 칡냉면뿐이다. 주방장인 어머니와 손맞춰 대학졸업반 막내아들(권성철·27) 혼자 분주히 주문받고 홀 서빙한다. 가끔 구시렁거리기도 하지만 궂은일도 마다않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사리(1500원)를 추가로 시킬 수 있지만, 냉면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보통(3500원), 대(4천원), 특대(5천원) 중에서 특대를 시키면 허리띠를 풀어놔야 한다.

 

주방장을 빼낸 사연

87년 민주화운동의 자금 마련을 위해 보신탕집을 차리게했던 ‘화곡보신육’

» 사진/ 화곡보신육의 전북 장수군 음식풍의 풍성한 밑반찬. (김학민)
이탈리아 르포 작가 오리아나 팔라치의 <남자>라는 소설이 있다. 1970년대 그리스 독재정권 아래서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된 작가의 애인이 이 소설의 모델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비밀경찰에 구금되어 지하감방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온갖 악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이를 악착같이 참아내는 이 사내의 투쟁이 눈물겨웠다.

이 사내는 민주화 투쟁이란 기본적으로 “독재자가 좋아하는 것은 따르지 않고, 독재자가 싫어하는 것은 적극 실행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자기의 모든 행동을 이 원칙에 따라서 한다. 그리하여 이 사내는 비밀경찰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시시덕거리며 농담으로 일관한다. 독재자가 원하고 기뻐하는 것은 고문의 고통에서 오는 비명과 신음일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80년대 중반 전두환 정권과 보신탕에 얽힌 이야기는 417호에서 대충 기술했다. 그 당시 나는 친구들과 보신탕이라도 먹으러 갈라치면, 그 가운데 머뭇거리는 친구들에게 위의 <남자> 이야기를 해 분위기를 제압했다. 전두환 독재정권이 보신탕을 금지했는데, 이 금지를 무시하고 먹는다는 것은 일종의 불복종운동 아니냐, 독재자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의 출발이 아니냐, 이렇게 보통사람들도 일상의 삶 속에서 민주화 운동이 가능한 것이다, 어쩌고저쩌고.

민주화 세력과 전두환 정권과의 긴장이 고무줄처럼 팽팽하던 87년, 이렇게 보신탕을 통해서도 민주화 투쟁을 열심히 하던 한 그룹이 아주 ‘기발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당시 재야에서 문화운동을 주도한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사람들이 그들이다. ‘할일은 많고 자금은 없던’ 이들은 어느 날 화곡동의 유명한 보신탕집에 모여 소주 한잔을 걸치게 되었는데, 이야기 끝에 그 집의 하루 매상을 어림해보다가 민주화운동 자금조달을 위해 직접 보신탕집을 열어보자고 합의했다.

당시 민문협의 대표이던 전 YTN 사장 김종철씨는 수배 중이었는데도 그 집을 들락날락하면서 수완좋게 그 집 주방장을 스카우트하여 기술적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당시 놀고 있던 장선우 감독의 동생 부부를 관리사장에 앉혔고, 유인택(영화사 기획시대 대표), 김영철(한겨레 스포츠레저부장)씨 등이 재야 어른들을 손님으로 끌어오는 ‘삐끼’ 역을 맡았다.


87년 ‘여름 특수’를 겨냥해 부랴부랴 6월 초 당산역 부근에 식당을 열었는데, 정국은 바로 6월항쟁 국면으로 들어가게 되어 모두 보신탕집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보증금 등 식당 설립자금을 모으면서 실질적으로 민문협을 이끌어온 김종철씨가 동대문경찰서에 검거되고 말았다. 그해 6월 한달, 나는 오후가 되면 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고, 밤늦게는 당산동에 가서 매상을 확인하고, 다음날 오전이면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 면회를 가 김종철씨에게 민주화운동 상황과 보신탕 매상현황을 보고하는 일을 되풀이했다.

80년대 문화일꾼들 모두 그 집의 개고기 맛에 혹하고, 그 집의 매상에 놀라고, 그래서 민주화운동 자금조달의 비책으로 보신탕집을 열기로 결정하고, 주방장을 빼낸 그 집. 바로 화곡동 본동시장 부근 화곡보신육(02-692-3404)을 10여년 만에 찾았다. 나지막한 단독주택이 아직 그대로였고, 여주인 조선제씨(60)의 수선스러움도 그대로였다. 전북 장수군 음식풍의 밑반찬 또한 옛 그대로 푸짐했다.

이 집의 특징은 개고기에서부터 밑반찬에 이르기까지 푸짐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냥 마구 가져다준다. 그러나 반말지거리 여주인의 설레벌레에 쉽게 넘어가지는 마시라. 꼭 먹을 만큼만 흥정하고 드시도록

 

막국수에 풋풋한 산골 인심

옛날 산간지역 막국수의 구수한 맛을 그대로 간직한 가평군 막국수

» 사진/ 막국수집의 허름한 간판. 조심해서 살펴야 찾을 수 있다(왼쪽). 넉넉한 인심이 가득한 막국수. (김학민)
우리나라에서 농경이 본격화된 삼국시대 이후, 농업은 특히 강수량과 기온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가뭄이 들 때는 겨레 전체가 극심한 기근에 시달려왔다. 그래서 일찍부터 흉년에 주식을 대체할 수 있는 식품들을 조사·개발했으니, 이름하여 구황식품이다. 그 종류는 놀랍게도 초근목피 851종에 이른다.

조선 중기에 간행된 <구황촬요>와 <증보산림경제>에는 우리나라의 농어촌과 산간지역에서 기근시 상용한 구황식품들이 나와 있다. 깊은 산간지역에서 살아가는 화전민의 식량은 밤과 옥수수, 감자, 메밀이 주종을 이루며, 이것이 부족할 때는 고사리, 둥글레, 소나무 껍질, 도토리, 도라지, 칡뿌리, 더덕, 마, 백합, 두릅 등을 섞어 먹었다. 호서지방 농촌지역에서는 메밀 등 잡곡을 심어 주곡의 소비를 줄이고, 채소잎과 뿌리를 말려 저장해 쌀·보리와 섞어 죽이나 밥을 해먹었다. 충청도 지방에서는 기근이 들 때 심지어 황토흙까지 국이나 죽에 새알심처럼 만들어 넣어 먹기도 했으니,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이처럼 모질 수 있을까?

옛 문헌에는 메밀이나 메밀꽃이 구황식품에 들어가 있지만, 기근 단계에서 보면 메밀이라도 먹을 수 있을 때는 어떻게 보면 행복한 시기다. 우리 겨레의 식생활에서 곡기로서의 메밀의 가치는 그리 높게 평가되지 않지만, 산과 들을 헤매어 구한 초근목피로 굶주림의 고통을 삭이는 것에 비하면 아주 훌륭한 먹을거리기 때문이다.

메밀은 거름기가 전혀 없는 산비탈 자갈밭에서도 잘 자란다. 또 웬만한 가뭄에도 싹이 잘 나서 견디며 초가을 흐드러진 꽃을 피우고 알곡을 맺는다. 중부지방에서는 가뭄이 들어 유월 중순까지도 모를 내지 못하면 눈물 반 한숨 반으로 갈라터진 논바닥을 대강 일궈 메밀을 심는다. 가을이 되어 갈무리된 메밀 알곡은 기나긴 흉년의 겨울을 보내는 데 요긴히 쓰인다. 메밀묵을 쑤워먹는 것은 사치이고, 대개 맷돌로 메밀을 둘둘 갈아 체로 친 다음 반죽해 수제비를 만들어 먹는다. 까끌까끌 제대로 갈리지 않은데다 껍질까지 걸러지지 않아 끈기 없는 수제비가 입안에서 빙빙 돌지만, 조금이라도 불평을 할라치면 어른들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처럼 중부지방의 농촌에서는 메밀을 상시적으로 많이 심지 않아 먹을거리로서 메밀 요리법이 단순하지만, 산비탈 자갈밭에 계속 메밀을 심어온 강원도 산간지역에서는 일상적 먹을거리에서 메밀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강원도 산간지역에서는 예부터 집집마다 막국수를 눌러 먹었다. 메밀을 맷돌로 갈아 체로 친 다음 뜨거운 물에 반죽해 국수틀로 눌러 국수를 뽑는다. 막국수의 ‘막’은 껍질째 맷돌로 간 까끌까끌한 메밀가루 때문에 붙은 접두사다. 양을 늘리기 위해 메밀 갈은 것을 일부러 듬성듬성한 체로 쳤다.

제분기로 가루를 내고 전기 국수틀로 국수를 뽑지만, 옛날 막국수 맛과 넉넉한 산골인심을 그대로 간직한 막국수집이 있다.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명지산 입구에 있는 이름 없는 ‘막국수’집(031-582-5568)이다. 주인 아주머니 김해연(64)씨는 15년 전부터 지나가는 길손이나 허기진 등산객들의 요구로 주는 대로 돈을 받고 막국수를 말아주기 시작했다. 단 한 그릇이라도 바로 반죽해 국수를 뽑는데, 간간한 육수에 매칼한 양념을 넣고 말아 시골 열무김치 얹어 먹으면 육수 한 방울까지 모두 마셔도 뒷맛이 담백하다.

한 그릇에 3천원이지만, 주인 아주머니 마음이 좋아 막국수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나 허기진 사람은 반죽하기 전에 더 요구하면 그 값에 듬뿍 말아준다. 막국수 이외에 술·부침개·수육 등 다른 메뉴는 일절 없으며, 아쉽게도 일요일에는 쉰다.

가평읍에서 북면 방향으로 10km 간 뒤 갈림길에서 적목리(명지산)쪽으로 10km쯤 가면 도대2리 마을이 나온다. 조심해서 살펴야 찾을 수 있다. 도로 오른쪽에 ‘막국수’라고 쓴 노란 페인트칠을 한 프로판 가스통이 유일한 간판이다.

 

처가집 가서 장모님 찜닭 먹세

전통 찜닭의 다양한 조리법을 아는가… 예스런 맛을 살린 처가집에서 몸보신하기

오늘날 인류가 사육하고 있는 가축으로서 닭의 조상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야생하고 있었던 들닭이라고 한다. 이 들닭이 기원전 6∼7세기부터 사람들의 손에 의해 사육·개량되기 시작하면서 가축으로 정착된 것이다. 우리의 옛 문헌에도 일찍부터 닭에 관한 기록들이 종종 나온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김알지 탄생설화에 의하면 “신라왕이 어느날 밤에 금성 서쪽 시림 숲 속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호공을 보내어 알아보니, 금빛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그래서 그 궤를 가져와 열어보니 안에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그 아이가 경주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숲의 이름을 계림(鷄林)이라고 하였고, 이것은 한때 신라의 국호로도 쓰였으니 문헌상으로 보아 닭은 최소한 신라 건국 시기인 기원전 1세기 이전부터 이 땅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삼국유사>에는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에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는데, 이것은 닭볏의 피로 찍은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닭의 원산지 인도와 닭의 한반도 유입의 관련성을 상상케 하는 대목이다. 닭은 소나 돼지에 비하여 지방이 적고 맛이 담백하여 소화·흡수가 잘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소·돼지 다음으로 널리 식용되고 있고, 백숙·찜·불고기·회 등 다양한 조리법이 개발되었다.

이 중 찜이라는 조리법은 흔히 찜통이나 시루에 넣고 뜨거운 김으로 익히는 방법으로 알고 있으나, 우리의 전통 찜 조리법은 그렇지 않다. 곧 찜은 국물을 재료가 잠길 만큼 넣고 끓여, 익으면 국물을 자작하게 남기는 조리법이다.

1809년 빙허각 이씨가 가정 살림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여 엮은 책 <규합총서>에 보면 찜은 “국물이 바특하여 제 몸 다 익은 뒤에는 젖을 만하여야 좋다”라고 되어 있다. 곧 찜은 조리기법에서 온 명칭이라기보다는 마무리가 된 모습에서 김으로 쪄냈을 정도의 즙을 가진 요리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조 중기에 서유거가 엮은 <증보산림경제>에는 병아리를 적당히 잘라 파, 소금, 기름으로 볶아 10분쯤 익힌 뒤 후추, 천초, 물, 술을 넣고 익히는 연계찜, 암탉의 배에 도라지, 생강, 파, 천초, 간장, 식초, 기름 등 7미를 넣어 항아리에 담아 중탕으로 찐 칠향계법 등 우리 전통 닭찜 요리법이 나온다. 그냥 맹물에 삶아내는 듯한 요즘의 닭찜에 비해 아주 고아스럽다.

신당동의 아주 오래된 찜닭집을 소개한다. 시어머니 노낭희(84)씨부터 며느리 이병문(61)씨까지 50여년간 이어져온 처가집(02-2235-4589)이다. 시어머니 노씨는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월남하여 한국전쟁 직후부터 같은 동네에서 이 집을 열어왔다. 20여년 전부터는 장모님같이 푸근한 며느리 이씨가 이어 오고 있다. 한국전쟁 뒤 20여년간은 평안도식 돼지고기 편육과 메밀국수가 주메뉴였고, 그 이후 지금까지는 변함없이 찜닭과 메밀국수가 주메뉴다.

이 집의 찜닭 맛은 가슴살까지 포함하여 닭고기의 모든 부위가 상 위에 올려져 시간이 지나가도 푸석푸석하지 않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또 매콤한 양념장에 톡 쏘는 겨자를 풀어 만든 닭고기 찍어먹는 소스가 독특하다. 한여름에도 정갈하게 나오는 포기김치와 함께 후식으로 생각하고 먹는 메밀국수(3500원)의 맛 또한 무척 개운하다. 찜닭 1마리(1만4천원)면 3인이 충분히 먹을 수 있다. 다 해치우지 못한 닭고기는 잘게 찢어 메밀국수에 넣어 먹으면 상 위에는 닭뼈만 남게 된다. 처가집은 구청에 신고한 식당 이름이고, 정작 이 집에는 ‘찜닭’이라고 쓴 조그마한 간판만 붙어 있으므로 주의해서 찾아야 한다.

 

족보 없어 더 맛있는 냉면

하기식의 어두운 기억이 스며 있는 깃대봉집에서 산동네 서민들의 냉면맛을 보라

지난 6월 월드컵의 열기가 방방곡곡을 들뜨게 하고 있을 때, 서울의 거리거리는 태극기의 물결로 넘쳐났다. 그러나 이때의 태극기 물결은 3·1운동의 기록화나 해방의 감격을 담은 1945년 8월15일의 기록 사진과는 사뭇 달랐다. 남녀 공히 태극기를 망토처럼 두르기도 하고, 두건처럼 접어 머리에 쓰기도 하고, 심지어 여자들은 치마처럼 허리 아래에 걸치기도 했다.

그것은 그동안 애국심으로 상징 조작되어 국민에게 군사 독재정권과 국가를 동일시하게 하는 데 이용돼온 태극기의 권위·충성·근엄주의가 그 허울을 벗어젖히고 민족공동체의 구심 부호로써 시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간 순간이었다.

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이른바 10월유신을 단행하고 본격적인 장기 독재정권으로 치달아갈 무렵 하기식이라는 것이 있었다. 중앙청이나 시청 등 주요 공공건물에는 매일 아침 태극기를 게양하고 저녁 6시에는 태극기를 내려야 했다. 이때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함께 흘러나온다. 건물 안에서 일하고 있었던 사람은 하던 작업을 중지하고, 지나가던 행인들은 혹시라도 애국심과 충성심이 의심받지 않도록 가던 길을 멈추고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시청 부근에서의 이 장면이 이 땅의 평범한 장삼이사들의 하기식이라면, 구중궁궐 청와대를 철통같이 지키는 경복궁 안 수방사 30대대에서는 좀더 괴기스러운 하기식이 열린다. 대통령의 신변경호뿐 아니라 심경까지 경호해야 한다면서 조금이라도 박정희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인사들을 철저히 차단해온 경호실장 차지철은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하고 완전무장한 수방사 병사들을 열병시킨 채 하기식을 주도했다.

단 중앙에는 차지철이 굳은 얼굴로 사열을 받고 있었고, 양 옆으로는 총칼의 위력을 과시하고자 차지철이 억지 초청한 언론사 사장, 대학총장, 재계·문화계 인사들이 엉거주춤 서 있었다. 군화끈을 질끈 동여매고 이들을 향해 경례를 붙이는 열병 지휘관 전두환 중령이 이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조금은 짐작이 간다.


하기식은 나라로부터 잔뜩 의무만 요구받았지, 나라가 해준 것이라고는 별로 없는 민중들의 삶에도 악착같이 파고든다. 70년대에 서울에서도 유명한 판자촌 마을 창신동 산동네에도 꼭대기에 국기게양대가 설치되고, 매일같이 하기식이 거행되면서 삶과 노동에 지친 서민들의 애국심과 충성심을 다그쳤다. 창신동 사람들은 그 국기게양대를 그냥 깃대봉이라고 했다. 깃대봉 바로 앞에 그럴싸한 냉면집 깃대봉집(02-762-4407)이 있다.

나는 깃대봉집의 냉면은 평양식이니 함흥식이니 하는 냉면의 그럴듯한 족보와 격식에는 전혀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나름대로 그 내력을 추측해봤다. 60년대 산업화로 농촌이 붕괴되면서 물밀듯이 도시로 쫓겨온 농민들은 도시 빈민을 이루면서 막노동으로, 행상으로 고단한 삶을 이어간다. 또 일부는 그들만의 산동네 공동체에서 구멍가게·연탄집·대폿집·식당들을 열어 ‘산동네 지역경제’를 형성한다.

그이 척박한 산동네 경제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싸고, 풍성하고, 서민들의 입맛에 맞아야 하는데, 깃대봉집의 냉면이 그렇게 시작되었으라는 짐작이다. 조성철(74)씨가 1960년에 이 산동네에 냉면집을 열었고, 지금은 조씨의 5남매가 모두 그 집에서 일하고 있다. 둘째딸 조성미(40)씨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나의 짐작과 바로 일치했다.

메밀보다는 고구마 전분을 많이 쓰기 때문에 면발은 하얗고, 면 위에 무김치가 얹어 나오기 때문에 냉면 김치도 따로 없다. 산동네 서민들의 입맞에 맞춰 주문받을 때 매운 것, 안 매운 것만 묻는다. 입구에서부터 주방 모두가 허술하지만 호호 불어가며 먹는 매운 냉면맛만은 일품이다. 동대문 이화여대병원 오른쪽 성벽길을 따라 300m 올라가면 성벽 사이 암문이 나온다. 이 암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 깃대봉냉면집 깃대가 보인다. 맛 좋고 양 많고 값싸니(보통 3500원, 곱빼기 4천원), 가는 길이 좀 험하더라도 즐겁게 찾을 일이다.

 

콩국수, 고소해 죽겠네

세계 콩의 원산지는 고구려… 누르스름한 우리 콩으로 만든 광정식당 쑥콩국수

한자로는 콩을 두(豆)라고 하는데, 사실 豆자는 원래 식기(食器)를 나타내는 글자였다. 갑골문이나 금문의 豆자 자형은 주로 발이 달린 그릇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자형에서 윗부분은 뚜껑을, 가운뎃부분은 그릇의 몸체를, 아랫부분은 높은 받침대를 나타냈다. 이 모양의 식기는 뒤에 제물을 담는 나무로 만든 그릇을 표현하는 것으로 변용된다.

한자에서 콩의 처음 이름이 숙(菽)이었음이 <시경>에 쓰여 있다. 그런데 숙의 꼬투리가 제물을 담는 나무로 만든 그릇 두(豆)와 비슷해 이후 콩의 이름이 두(豆)로 변한 것이다. 흔히 어리석은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숙맥’(菽麥)은, 콩과 보리는 모양이 다른데 그것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콩의 원산지는 중국의 동북부 곧 만주다. <관자>에 제나라 환공이 만주지방에서 콩을 가져와 중국의 중부·남부지방에 보급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우리나라 함경북도 회령군 오동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콩이 출토된 점 등으로 미루어 콩의 원산지는 만주, 곧 삼국통일 전 옛 고구려 땅임이 확실하다.

일본에는 2천여년 전에 우리나라를 거쳐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에는 17세기 말 독일에 처음으로 콩이 전해졌고, 미국에는 19세기 초에 콩이 처음 알려지고 20세기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재배되었으므로 서양 사람들이 콩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의외로 오래되지 않았다.그러나 현재는 세계 총생산량의 70%를 미국이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는 중국이 생산하고 있어, 콩의 원산지로서 우리나라의 위치는 그저 그렇게 되어버렸다.

콩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 특히 서민들이 단백질 공급원으로 애용해왔다. 어린 풋대콩은 삶아서 먹고, 익은 콩은 콩밥·콩국수·콩자반·콩설기떡·콩엿 등을 만들어 먹는다. 또 콩을 가공해 두부·비지·된장·간장·콩나물·콩기름 등을 만들기도 했다.


조선 중기의 실학파 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 “좋은 곡식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은 다 귀한 자에게로 돌아가 버리고 가난한 백성이 얻어먹고 목숨을 잇는 것은 오직 이 콩뿐이다…. 맷돌에 갈아서 정액만 취해서 두부를 만들면 남은 찌끼도 얼마든지 많은데 끓여서 국을 만들면 구수한 맛이 먹음직하다”고 썼다. 또 19세기 말 경상도 상주지방에서 필사되어 전해내려온 조리서인 <시의전서>에는 “콩을 물에 불려 살짝 데쳐서 가는 체에 밭여 소금으로 간을 맞춘 다음 밀국수를 말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콩의 단백질과 지방질을 그대로 살릴 수 있는 콩국수가 우리 민중들 사이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애용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하철 2·5호선 왕십리역 부근에 있는 광정식당(02-2296-0367)은 100% 국산 콩으로만 15년째 콩국수를 만들어오고 있다. 주인 강봉애(55)씨는 고향인 전남 곡성에서 생산한 콩만을 사용한다. 표백된 듯 새하얀 수입 콩과는 달리 누르면서도 푸르스름한 곡성 콩은 땅콩이나 깨를 함께 넣어 갈지 않더라도 콩 자체만으로 너무 고소하다. 이 집의 또 하나의 특징은, 10여년 전부터 밀가루 국수를 쓰지 않고, 밀가루에 쑥을 찧어넣은 쑥국수를 직접 뽑아 쓴다는 점이다. 향긋한 쑥냄새에 고소한 콩국맛이 산뜻하게 어울린다.

한여름에만 철 메뉴로 콩국수를 내놓는 다른 식당들과는 달리 이 집은 1년 내내 콩국수를 말고 있어, 콩국수 전문식당으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자식들을 자기 몸보다 더 끔찍이 여기는 이 땅의 어머니답게 식당 이름도 두 아들 광기·정기의 이름 첫 자를 따 광정식당이다. 어머니를 닮은 미남 노총각 이광기(34)씨가 어머니의 정성과 기술을 착실히 전수받고 있다(콩국수 4천원).

 

막걸리의 짝을 찾아서

소설가 이정환 선생의 유별난 막걸리 사랑… 톡 쏘는 홍어찜만한 짝이 또 있을까

» 사진/ '홍어가 막걸리를 만났을 때'의 상차림. 냉동 홍어를 냉장고에서 숙성시킨다.
1983년에 54살로 요절한 소설가 이정환 선생은 그야말로 엄청난 굴곡의 일생을 살았다. 전주농업고등학교에 다니던 중 10대의 나이에 한국전쟁이 터져 학도병으로 출전했으나 북한군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야간전투를 벌이다 포로로 잡혔고, 몇 개월 포로생활을 하는 갖은 고생 끝에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이정환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와 지내다가 다시 육군에 입대했으나 군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영해 숨어 지내며 시작(詩作)수업에 전념하다가 헌병대에 붙잡혀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고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가 어찌어찌해 특사로 출옥해 세상의 햇볕을 보게 된다. 76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발표되어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킨 이정환 선생의 장편소설 <샛강>은, 선생이 감옥에서 나온 뒤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나듯 솔가해와 악다구니하며 함께 울고 웃던 난지도 부근 샛강의 버려진 인생들의 이야기로, 70년대 리얼리즘 문학의 큰 성과였다.

76년 겨울이든가, 나는 이정환 선생을 어느 출판기념회에서 처음 만났다. 선생은 난지도 인생답게, 차려진 뷔페 음식과 양주 칵테일에 무척 낯설어하며 손을 대지 못했다. 그리하여 몇몇 분들과 일찍 자리를 작파하고 청진동 뒷골목 막걸릿집으로 가 통음한 기억이 난다.

이를 계기로 이후 이정환 선생과 자주 술자리를 만들어 어울렸는데, 나는 청탁을 불문하지만 이 선생은 막걸리를 좋아해 주로 막걸릿집을 택했다. 그런데 이 선생의 안주 주문이 아주 특이했다. 보통사람이라면 막걸리엔 빈대떡·낙지볶음·두부 등이 그럴싸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선생은 달랐다. “어이, 김형 우리 토마토 썰어 달래서 막걸리 한잔 먹을까?” 또는 “우리 배고픈데 자장면 시켜서 막걸리나 한잔 합시다.” “황도 통조림에 막걸리!” 매사 이런 식이다.

오래돼서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이정환 선생이 즐기는 막걸리와 안주의 부조화와 불협화음은 자주 있었다. 어떤 술에는 어느 안주가 제격이고, 어느 안주가 있으면 어떤 술을 마시면 좋다는 생각은 술꾼이라면 생래적으로 판단하는 것이고, 또 복잡하게 토론하지 않더라도 쉽게 합의하는 것인데, 참으로 이 선생의 선택은 기이했다.


각설하고. 막걸리의 궁합을 볼 것 같으면 아무래도 안주로는 홍어가 어울린다. 암모니아 냄새가 살짝 나도록 발효시켜 얇게 저며 썰어 초고추장이나 소금에 찍어 먹는 전라도식 홍어회, 홍어살을 칼로 채질해 식초에 담가 꼬들꼬들해진 다음 꼭 짜 식초물을 빼고 미나리·초장·마늘·생강 넣어 무쳐 먹는 서울식 홍어회, 홍어애(창자)에 된장 풀고 보리순(부추로 대신할 수 있다)을 넣어 끓인 홍어국, 홍어를 꾸둑꾸둑 말려 미나리·콩나물·버섯 넣고 찐 홍어찜, 홍어회 위에 묵은 김장김치 얹고 또 그 위에 돼지고기 편육을 얹어 먹는 삼합 등 톡 쏘는 홍어 안주는 시금털털한 막걸리와 궁합이 맞는다.

이 모두를 맛볼 수 있는 집이 있다. 인사동 카페 골목 안에 자리한 홍어 전문집 ‘홍어가 막걸리를 만났을 때’(02-736-4439)다. 주인 김용숙(43)씨는 전남 영암이 고향으로, 어렸을 때 고향에서 맛본 홍어맛을 되살려 이 집을 열었다고 한다. 요즘은 산홍어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냉동 홍어를 해동시켜 저온 냉장고에서 3주 동안 숙성·발효시킨다. 항아리나 두엄더미에 넣어 숙성시키는 전통 홍어 처리법에 못지않게 담백하고도 톡 쏘는 맛이 이 집 홍어의 특징이다. 그리고 물 좋은 홍어애를 골라 급랭시켜 얇게 저며 내오는데, 그 맛은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고 고소하다.

이 집 홍어와 만나는 막걸리는 주인 김씨가 집에서 직접 담근 것이다. 나는 이 집 막걸리를 마실 때마다 20여년 전 막걸리와 이상하게 만난 이정환 선생의 안주들을 생각하며 혼자 웃음짓는다.

 

돼지가 연탄을 만날 때

‘연탄전성시대’의 아릿한 기억… 쫄깃한 고기맛이 일품인 ‘연탄삼겹 고추장구이집’

» 사진/ 양념한 고기를 은은한 불에 초벌 구워 기름을 빼고 다시 연탄불에 얹어 굽는다.
우리나라 전통가옥의 바닥을 구성하는 구조체에는 온돌과 마루가 있다.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한옥에는 이 둘이 으레 설치돼 있어, 온돌과 마루는 우리 주거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나 고대 한반도의 남쪽지방에는 온돌이 없었고, 북쪽지방에는 마루가 없었다. 따라서 마루는 남쪽지방에서 발전하여 북쪽지방으로 퍼졌고, 온돌은 추운 북쪽지방에서 발달하여 차츰 남쪽지방으로 보급된 것으로, 조선 중기에 와서야 마루와 온돌이 전 한반도에 걸쳐 보편적으로 한옥에 설치되었다.

온돌은 방바닥을 골고루 덥게 해주며, 습기가 차지 않도록 하여 기거하기에 적합하도록 하며, 화재에도 안전한 이상적인 난방법이다. 그러나 온돌은 실내공기가 건조하기 쉽고, 여름에는 바닥의 습기가 상승하여 눅눅하게 되는 결점이 있다. 온돌을 잘 놓지 못하면 불길이 아궁이 밖으로 나오거나 균열이 생겨 연기가 누출되기도 한다.

또 우리나라 같은 대륙성 기후는 겨울이 춥고 길기 때문에 온돌을 데우기 위해서 장작·솔가지·잡목줄기·낙엽·짚·건초 등 많은 양의 땔감을 소모하게 된다. 부실한 굴뚝과 넓은 부엌 아궁이로 인해 열효율이 떨어져 그 소비량을 가중시켰다. 그리하여 마을 주변의 숲은 땔감 채취로 말미암아 많이 황폐화되고 나무의 질도 퇴화되었다. 이런 상황은 일제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6·25 이후 석탄 가루를 버무려 원통형으로 만든 구공탄이 출현해 보급되면서 점차 수그러들었다.

이후 구공탄은 구멍 수에 따라 9공탄, 19공탄, 22공탄으로 발전되었고, 업소용 32공탄도 따로 나왔는데, 1950, 60년대 도시 주민들의 난방·취사용으로 절대적이었다. 흔히 “박정희 때문에 산에 나무가 많아졌다”고 하지만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시민들이 편의를 추구하며 장작 대신 연탄이나 석유가 난방·취사용 연료로 바뀌면서 나무 채취가 줄어들어 산이 푸르게 된 것이다.

11월 월동준비 때 좀 있는 집은 부엌이나 처마끝에 연탄을 쌓을 수 있는 대로 1천여장 들여놓고 오는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것에 흐뭇해하는 반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산동네 서민들은 100, 200장, 또 그도 안 되는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새끼에 매달린 연탄 한장을 달랑 들고서 추운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한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자 연료로서 연탄도 그 사명을 다하기 시작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다국적 석유회사들을 통해 물밀듯이 들어온 석유는 ‘주유종탄’이니 ‘주탄종유’니 하며 잠시 연탄과 혼재하는 것 같았지만, 곧 연탄을 밀어내버렸다. 이제 연탄은 최소한 대도시에서는 연료로서 자기 사명을 다하고 자취를 감춰 약에 쓰려고 찾아보아도 구경할 수 없다. 간혹 생선구이집, 변두리 소갈비·돼지갈비집에서나 볼 수 있으니, 인공사육, 유전자 조작, 화학조미료투성이인 요즘의 먹을거리에 옛날식 불을 지펴 그냥 향수나 자극하려는 것은 아닌지!

30여년 전 군대에서 휴가올 때마다 막내아들 고기 좀 먹이겠다고 해주신 어머니의 고추장 돼지불고기 맛이 생각나 오며가며 눈여겨보았던 ‘연탄삼겹 고추장구이집’(031-715-9092)에 들렀다. 어머니의 고추장 돼지불고기와는 달리 이 집의 삼겹고추장구이는 껍질까지 합하면 오겹살인데, 양념한 고기를 은은한 불에 초벌 구워 기름을 빼고 손님상에서 연탄불에 석쇠 얹어 다시 굽는다. 이렇게 해야 고기가 새카맣게 타지 않고 노릇노릇 구워지면서 쫄깃쫄깃해진다고 한다.

주인 김재진(56)씨는 서울 강남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다가 2년 전 이곳으로 내려와 연탄삼겹 고추장구이집을 열었다. 점심 때부터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분당·수지에서는 꽤 알려진 집이 되었다. 맛있다고 돼지고기구이로 너무 배를 채우지는 마시라. 연탄불에 자글자글 끓이는 이 집의 청국장맛을 못 보면 후회한다

 

스텐카 라진, 보드카 원샷!

러시아 농민봉기와 70년 반독재투쟁을 기억하며 ‘www.인사동’의 보드카를 들이켜다.

» 사진/ 보드카 한잔에 지그시 눈을 감고 역사를 돌려 350여년 전 열혈남아 스텐카 라진을 떠올린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자여, 예속을 강요받은 자여, 봉기하라! 우리 코사크는 항상 그대들과 함께 하리라.”

1670년 러시아의 농민 지도자 스텐카 라진은 알렉세이 1세의 학정과 봉건 영주들의 수탈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우크라이나 전 지역 농민들에게 위와 같은 ‘매혹의 편지’를 비밀리에 전한다. 드디어 1만여명의 농민군을 규합한 스텐카 라진은 볼가강 유역 차리친을 함락하고, 이를 본거지 삼아 볼가강을 따라 북상해 연안 도시들을 초토화하면서 귀족·영주들의 토지문서를 불태우고 창고에 쌓인 곡식을 굶주린 농민들에게 분배한다.

러시아 전역을 뒤흔든 농민봉기는 황제의 매수에 넘어간 동지의 배반으로 스텐카 라진이 체포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에서 두 팔이 잘리고, 두 다리가 잘리고, 마침내 목이 잘려 처형됨으로써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러시아 농민들은 그의 죽음을 믿지 않고 스텐카 라진이 언젠가 다시 나타나 그들을 이끌고 폭정과 수탈을 쳐부수리라 생각하면서, 그 유명한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진>을 만들어 노래하며 전설을 이어갔다.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진>은 바리톤 솔로로 들어도 좋지만, 역시 압권은 굵직하고 묵직한 러시아 남성 합창단의 합창이다. 러시아 영화사의 전설적 거장 에이젠슈테인의 동명의 영화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합창 <스텐카 라진>은 그야말로 전율을 느끼게 한다.

스텐카 라진의 농민군은 볼가강가 차리친을 점령한다. 그런데 그 성 영주의 딸인 공주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스텐카 라진과 농민군 모두 공주의 아름다움에 빠져 서로가 서로를 질투하고 의심하는 등 한때 군기가 혼란에 빠진다. 다시 볼가강을 건너 탐욕과 압제의 다른 봉건 영주를 공격해야 하는데…. 스텐카 라진과 공주, 그리고 농민군들은 배를 타고 볼가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배가 강 한가운데 이르자 스텐카 라진은 공주를 두 팔에 안고 농민군들 앞에 선다


“나는 공주를 사랑한다. 그리고 압제와 굶주림에 시달려온 여러분인 농민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내 조국 러시아를 더 사랑한다.” 스텐카 라진은 연설을 마치고는 뚜벅뚜벅 뱃전으로 걸어가 공주를 볼가강으로 던진다. 슬로 모션으로 팔랑팔랑 공주가 떨어져내리고, 공주의 몸이 강물 위에 닿는 순간 우렁찬 남성 합창 <스텐카 라진>이 들려오고, 말을 탄 농민군 수만명이 전속력으로 성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넘쳐 넘쳐 흘러가는 볼가강 물 위에

스텐카 라진 배 위에서 노랫소리 들린다.

페르샤의 영화의 꿈 다시 찾은 공주의

웃음 띤 그 입술에 노랫소리 드높다.

돈코사크 물 위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주린다.

다시 못 올 그 옛날의 볼가강은 흐르고

꿈을 깬 스텐카 라진 외롭구나 그 모습.

숨죽여 몰래몰래 선배들로부터 전해내려온 이 노래는 1970년대 박정희 폭압정권에 맞서 싸운 학생운동가들이 즐겨 불렀다. 어쩌다 선배나 친구의 결혼식 뒤풀이에라도 함께 모이면 꼭 한번은 이 곡이 나오게 마련인데, 특히 음정과 박자에 상관없이 과감하고 소신 있게 부르는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유인태(전 국회의원)의 노래가 각광을 받았다.

나는 <스텐카 라진>을 듣고 싶으면 언제나 보드카 전문집 ‘www.인사동’(02-725-5295)엘 간다. 이 집에는 바리톤 솔로의 <스텐카 라진>도 있고, 돈코사크 남성 합창단이 부른 <스텐카 라진>도 있다. 보드카는 와인이나 코냑처럼 격식 찾고 폼 잡고 하는 술이 아니다. 그냥 이 집의 품격 있는 여주인 박영숙씨가 칵테일해주는 대로 마시면서, 지그시 눈을 감고 역사를 돌려 350여년 전 열혈남아 스텐카 라진의 분노와 열정, 사랑과 좌절에 푹 빠져볼 일이다.

 

최대포집 행동요령?

돼지고기 굽는 데도 순서가 있다… 오랜 서민의 벗 최대포집 두배로 즐기기

» 사진/ 최대포집 돼지고기는 소금구이, 양념구이, 껍데기 순으로 시켜야 제 맛을 알 수 있다.
지난해 12월18일이던가. 나는 조간신문 사회면의 마포 최대포집 화재 소식을 실은 상자기사를 읽고 혼자 기뻐했다.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한다? 놀부 심보인가? 그럴 리야 없을 것이고, 내가 기뻐한 것은 40여년 전 마포 텍사스 골목에서 구운 돼지고기 한점과 막걸리 한 사발로 서민들의 지친 삶의 애환을 씻어주었던 한 선술집의 화재 소식이 주요 일간지의 사회면을 장식할 정도로 국민 모두의 관심사가 되었다는 즐거움 때문이다.

30여년 전부터 단골인 나는 불난 최대포집이 궁금하여 그날 바로 현장에 가보았다. 기름때가 케케 들러붙어 있던 소주 상자들, 40여년간 고기를 썰어 송곳같이 닳아버린 식칼 등 최대포집의 ‘정통성’을 증언하는 물품들이 모두 화마에 흐트러져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무슨 수재민 위로라도 하는 것처럼 주인 최씨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고 하고는, 올 1월 중순 최대포집이 다시 문을 열 때까지 지나는 길에 가끔 들러봤다.

몇년 전 최대포집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기뻐했던 일이 있었다. 나의 사촌동생 홍일선 시인은 한동안 영등포 시장에서 전문적으로 식당에 곱창을 공급해주는 ‘백두산 푸줏간’을 운영했는데, 언젠가 내게 최대포집 안주인 이옥기(62)씨에 대해 불평을 했다. 이야기인즉슨 곱창을 배달해가면 이씨가 웬만한 것은 퇴짜를 놓고 아주 물좋은 것만 찾는 탓에 장사해먹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평소 홍 시인으로부터 술잔이나 얻어먹는 처지라 그 자리에서는 끄덕끄덕 동의하는 체했으나, 속으로는 얼마나 기쁘던지….

기찻길 옆 최대포집(02-712-3213)에서 맛있게 돼지고기를 구워먹는 법 및 행동요령을 몇 가지 소개하겠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최대포집에서 만나는 낯익은 장삼이사들은 대개 이와 비슷하게 행동한다.

첫째, 돼지고기는 소금구이, 양념구이, 껍데기 순으로 시킬 것. 일종의 전채, 주요리, 후식 개념이라고나 할까? 하여튼 30여년의 경험으로 보면 이 코스대로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둘째, 시킨 고기를 한꺼번에 굽지 말 것. 한꺼번에 구워놓으면 딱딱해지므로 슬쩍 초벌 구어 석쇠 한쪽에 모아놓고 먹을 만큼 덜어 조금씩 굽는 것이 좋다. 셋째, 대화할 때도 고기에서 눈을 떼지 말 것. 고기가 타면 맛이 없으므로 타지 않도록 줄곧 주목하고 있어야 하며, 저녁 때는 한 테이블에 두세팀이 합석하게 되므로 피아간에 고기가 넘어가지 않도록 경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다. 넷째, 정치 얘기 등은 하지 말 것. 최대포집에는 대개 줄을 이어 손님이 대기하고 있다. 쓸데없는 공론으로 시간을 끌면 주인·손님 모두로부터 눈치를 보이게 되고, 또 한 석쇠 위에 다른 팀의 고기도 올려져 있으므로 침방울이 튀면 안 된다. 다섯째, 벽에 기대어 앉거나 두꺼운 옷, 또는 옷을 여러 겹 끼어입고 가지 말 것. 기름때·연기·냄새가 옷에 잔뜩 배어 지하철 안에서는 승객들이 모두 쳐다보고, 동네에서는 지나가는 개가 킁킁거리며 따라온다.

 

청나라 전투식량, 우리 식탁에

병자호란 때 청군이 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국장, 그 전통의 맛을 찾아서

» 사진/ 시골청국장은 100% 홍천산 콩으로 전통의 맛을 냈다.
청국장은 전쟁 때 단기 숙성으로 단시일 내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만든 장이라 해 전국장(戰國醬)이라고도 하며, 청나라에서 배워 전해온 것이라 해 청국장(淸國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면 청국장은 전쟁 또는 청나라와 관계가 있는 듯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지 100여해 뒤인 1760년, 유중림에 의해 보강된 <증보산림경제>에 처음으로 청국장 만드는 법이 소개된 것으로 판단하더라도 병자호란 시기 청나라 군사들로부터 흘러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현대전도 그렇지만 지난 시기 전쟁은 군수물자, 그 가운데도 특히 군량의 운반과 그에 따른 군사들의 식사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칭기즈칸의 몽골군이 질풍노도와 같이 아시아와 유럽을 휩쓴 것은, 몽골군들이 햇볕에 말린 양고기·쇠고기 육포로 쉽게 식사를 해결할 수 있어 기동력을 충분히 발휘한 데 그 이유가 있었다고도 해석한다.

식사문제로 역사 모두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 민족이 정복전쟁에 쉽게 나설 수 없었던 것은 우리의 식사 습관을 통해서도 분석해볼 수 있다. 조선조의 군사 편제를 보면 전투원이 100명이라면 군량 등 군물(軍物)을 운반하는 군사가 30명에 이른다. 곧 100명의 전투원을 먹이기 위해 솥단지·쌀·장작·된장·간장 등을 짊어진 군사가 30명이 딸려야 하니 공격전의 요체인 전투력과 기동력이 어떻게 발휘될 수 있겠는가.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들은 미군의 C-레이션처럼 발효된 콩을 각자 전대에 넣어 차고 다니며 끼니 대용으로 꺼내 먹음으로써 기동력을 높였다고 한다. 만주지역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것이 19세기 중반 이후고, 또 만주가 콩의 원산지인 것을 떠올린다면 그럴듯한 이야기다.

<증보산림경제>에는 청국장의 일종인 수시장(水 豆+支(합성요망) 醬) 만드는 법도 수록되어 있는데, 청나라 군사들의 발효 콩 전투식량이 사실이라면 수시장이 그것이 아닌가 유추해본다. 즉, 콩을 불그스레하게 볶아서 삶은 다음 띄워 온돌에서 말린다. 그런 뒤 때때로 꺼내어 물에 섞어 삶아 소금을 넣어 먹거나, 실을 낸 콩에 소금을 넣고 절구에 찧어 그릇에 넣었다가 끼니 때마다 숟가락으로 덜어 채소와 함께 끓여 먹는 것이라고 한다.


강원도 홍천에서 인제·속초 방면으로 가다 보면 길 양쪽에 청국장집이 여럿 있다. 모두가 직접 띄워 만든 옛날 청국장이라지만, 나는 그 길을 지나가면 홍천에서 인제 방향으로 17km 정도에 있는 시골청국장집(033-435-9118)에 꼭 들른다. 주인 곽노명(35)씨와 그의 어머니가 100% 홍천산 콩으로 직접 만드는 이 집의 청국장은 어릴 적 아랫목에 이불 덮어놓고 띄워 끓여주신 내 어머니의 청국장 솜씨를 그대로 빼닮았고, 값도 싸기 때문이다(청국장·된장 등 모든 메뉴 5천원).

그러나 어머니가 만든 청국장도 <증보산림경제>의 제조법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여기에 적힌 청국장 만드는 법을 보면 “햇콩 한말을 가려서 삶은 뒤 가마니 등에 쟁이고, 온돌에서 3일간 띄워 실(絲)이 생기면 따로 콩 다섯되를 볶아 껍질을 벗겨 가루 내고 이를 소금물에 섞어 절구에 찧는데, 때때로 맛을 보며 소금을 가감한다. 너무 짜면 다시 꺼내어 오이·동아·무 등을 사이사이에 넣고 주둥이를 봉해 독을 묻어 7일이 지나면 먹어도 된다”고 했으니, 옛 청국장 제조법을 복원하면 어떤 맛이 나올는지….


최대포집을 취재하면서 주인 최씨에게 30여년 전 가게에 나와 뛰어놀던 어린 아들에 대해 물어보니, 지금 30대로 아주 유능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한다. 남의 집 아들이지만 훌륭하게 커준 것을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프로그래머 아들이, 또 그의 아들이, 또또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몇백년 뒤의 최대포집 화재(아니면 다른 좋은) 소식이 TV 9시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했으면 좋겠다고 상상해본다.

 

 

진~한 정통 독일 맥주 한 모금

효모의 맛이 살아 있는 옥토버훼스트 맥주… 매장 안의 제조장치에서 만들어 숙성시킨다

맥주는 4천여 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최초로 만들어, 그리스·로마를 거쳐 중세에는 전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맥주는 10세기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간 보리에 물, 또는 맥아를 넣어 자연 발효하는 단순공법으로 제조되었으나, 10세기 전후 독일에서 홉을 넣으면서 오늘날과 같은 향과 쌉쌀한 맛을 내는 맥주로 일반화되었다.

10세기 즈음 맥주의 생산량은 독일보다 영국이 절대적으로 많았지만, 항시 유럽 대륙을 한수 아래로 내려다보고 자기들만 잘난 체한 영국은 독일에서 시작해 유럽에 널리 보급된 홉 첨가 맥주 제조법을 채택하지 않았다. 이로써 영국은 맥주에 대한 유럽의 보편적 기호에서 고립되고, 이후 영국의 맥주산업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럼으로써 영국은 맥주 대신 위스키를 개발하고, 독일은 맥주 종주국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굳혔다.

그러나 중세까지도 맥주의 표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동네마다 산재한 양조장은 자기 지역에서 생산되는 곡식으로 제멋대로 맥주를 만들었으니, 색·향·맛·질이 천차만별이었고, 어떤 맥주는 맥주라기보다는 우리의 막걸리와 비슷한 것도 있었다. 이에 1516년 빌헬름 4세는 “맥주는 보리·홉·효모·물 이외의 어떤 것도 넣어서는 안 된다” 는 유명한 ‘맥주순수령’(Reinheitsgebot)을 공포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그 효력이 유지되는 가장 오래된 식품 관련 법규다.

이렇게 맛과 향이 표준화된 유럽의 생맥주 체제는 18세기 말 전통 양조장들이 근대적 맥주 공장으로 탈바꿈하면서 장기간의 보관과 장거리 운반이 가능한 병맥주를 탄생시킨다. 그러나 가내수공업적 생맥주 생산에서 병맥주의 대량 생산체제로 바뀌었지만, 지방별·공장별 맛과 향의 특색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독일에서는 아직까지 “맥주는 맥주 공장의 굴뚝 그림자가 미치는 범위 안에서만 마셔라”는 금언이 통용되고 있다.

» 사진/ 마이크로 브루어리 맥주는 매장 안의 제조장치에서 맥주를 생산해 숙성시킨 뒤 신선할 때 잔에 따라주기 때문에 효모가 완전히 살아 있어 깊고 그윽한 맛과 톡쏘는 향을 낸다.
올 7월부터 생맥주·병맥주와는 다른 소규모 맥주 제조장(마이크로 브루어리)에서 제조되는 맥주들이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으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강남역 부근에 있는 옥토버훼스트(www.oktoberfest.co.kr, 02-3481-8881)는 매장에 직접 맥주 제조시설을 설치하고, 정통 독일식 바이스 비어와 둥클레스 비어 등을 생산한다. 뮌헨공대에서 맥주양조공학으로 석사를 받은 방호권(31)씨가 양조 책임을 맡고 있다.


마이크로 브루어리 맥주는 그냥 쉽게 하우스 비어라고도 하는데, 병맥주가 열 또는 비열처리를 통해 효모를 완전히 죽인 맥주고, 생맥주가 여과장치로 효모를 대충 거른 맥주라면, 마이크로 부르어리 맥주는 매장 안의 제조장치에서 맥주를 생산해 숙성한 뒤 신선할 때 잔에 따라주기 때문에 효모가 완전히 살아 있어 깊고 그윽한 맛과 톡 쏘는 향을 낸다. 옥토버훼스트에서 양조되는 바이스 비어는 다른 맥주와는 달리 보리 대신 호밀을 쓰는데, 맥주를 입에 대는 순간은 시큼하지만 마시고 나면 뒷맛이 무척 고소하다. 둥클레스 비어는 볶은 보리를 쓰기 때문에 검은색을 띠는 흑맥주인데 약간 씁쓰레한 맛이 난다.

1807년 유럽의 2등 국가 프로이센은 대나폴레옹전에서 참패한 뒤 엘바강 서부의 모든 영토를 프랑스에 할양하고, 전쟁배상금 지불은 물론 러시아 원정길에 나선 나폴레옹군의 군수물자 공급과 전비 조달까지 전담하는 굴욕을 당한다. 위대한 철학자 피히테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속 강연으로 국민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한 것도 그 즈음인데, 독일 국민은 그 상황에서도 바이에른 황태자 루트비히 1세와 작센 공주 테레지아의 결혼식을 맞아 5일 동안이나 밤낮으로 맥주를 부어라 마셔라 했다.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 오늘날 세계 3대 축제의 하나로, 16일간 700만 관광객이 몰리고 500cc 맥주 1500만잔이 팔리는 유명한 뮌헨의 옥토버페스트(10월축제)다. 맥주 애호가들이여! 뮌헨의 옥토버페스트에는 못 가더라도 강남의 옥토버훼스트에서 정통 독일 맥주 한잔 맛보기를….

 

가을에 찾아오는 '젊은 낙지'

서늘한 바람 불면 갯벌로 올라오는 '꽃낙지'… 목포낙지집에서 여름내 지친 몸을 달래보자.

1960년대말 당구 이외에는 시내에서 특별히 시간을 '죽일' 거리가 없던 시절. 나는 가끔 친구들과 함께 무교동의 스타다스트호텔 골목 뒤쪽에 있는 음악감상질 세시봉에 들락거렸다. 특별히 음악을 잘 알거나 감상에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교 때부터 음악 듣는 것을 좋아했고, 음악을 감상하러 오는 여대생들을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 사진/ 목포낙지집은 무교동식 낙지볶음과는 달리, 살아 있는 싱싱한 낙지에 갖은 양념과 미나리·콩나물 등 채소를 넣어 자글자글 끓이는 전골을 낸다.
어슴푸레 어둠이 깔리면 우리는 세시봉을 나와 당시 광화문에서 종각까지 가는 길의 무교동쪽에 즐비한 낙지집에 들어간다. 주머니 사정을 가늠해 낙지볶음 한 접시를 시켜 아껴 아껴가며 막걸리 몇 주전자를 비우지만, 고추장 국물 안에서 헤엄치던 낙지발들은 금세 사라지고 막걸리 한잔에 빈 젓가락만 고추장 국물을 휘젓는다. 그때 낙지집들에는 농촌에서 올라와 버스 차장으로 풀리기에는 아직 나이가 어린 15살 전후의 여자 아이들이 심부름을 했는데, 이들에게 50원을 쥐어주며 주방에서 고추장 국물 좀 얻어오라고 하면 낙지 건더기가 제법 뻑뻑한 국물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 국물에 공기밥을 비벼 막걸리에 한 숟가락씩 뜨면 이것이 밥안주인데, 우리들은 이솝 우화의 신포도처럼 막걸리에는 밥안주가 최고라고 떠들어댔다.

이처럼 낙지에 대한 나의 '첫 경험'은 부족함과 아쉬움이었다. 이후 20여년이 흐른 뒤 나는 낙지를 만끽할 수 있는 집을 단골로 두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사직동 배화여대 입구에 있는 목포낙지집(02-739-5108)이 그 집인데, 여주인 유영숙(40)씨는 친정어머니로부터 낙지요리법을 전수받았다. 이 집은 냉동낙지를 매운 고추장 양념으로 볶아내는 무교동식 낙지볶음과는 달리, 살아 있는 싱싱한 낙지에 갖은 양념과 미나리·콩나물 등 채소를 넣어 자글자글 끓이는 전골을 낸다.

전남 고흥군 녹동 유씨의 고향마을에서 나오는 낙지를 날마다 새벽에 직접 가져오기 때문에 싱싱한 것은 물론이고 값이 무척 싸다. 유씨는 "전골은 대·중·소 각각 5만, 3만, 2만원으로 일정하지만, 낙지가 많이 잡혀 값이 쌀 떄는 낙지를 듬뿍 얹어주기 때문에 노량진 수산시장보다 싸다"고 말한다. 30년 술꾼 인생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건대 이는 사실이다. 사직동 목포낙지집 외에 홍제동 목포낙지(어머니 오순옥, 02-391-7992), 불광동 목포낙지(둘째딸 유경숙, 02-388-3551), 공덕동 목포낙지(셋째딸 유정숙, 02-713-7604) 등 네 모녀가 따로따로 낙지집을 열고 있는데, 같은 재료, 같은 메뉴, 같은 솜씨로 맛도 비슷비슷하다.

낙지는 초봄에 산란한다. 겨울이 지나면 갯벌 속에 구멍을 뚫고 암수 낙지가 들어가 산란해 수정한다. 수정이 끝나면 수낙지는 필사적으로 구멍을 빠져나오려 하지만 곧 암낙지에게 잡혀 먹히고 만다. 암낙지는 수낙지를 잡아먹고 기운을 차리지만, 그또한 새끼들을 위해 자기 몸을 바친다. 알에서 깬 새끼들은 이곳에서 여름까지 어미의 몸을 뜯어먹고 자란다. 낙지는 몸통·머리·팔로 구성되어 있다. 흔히 낙지 대가리라는 것은 장기가 들어 있는 몸통이고, 머리는 몸통과 팔 사이에 있어 쉽게 분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80년대에 어느 '장군님'을 생각하며 낙지 머리를 질겅질겅 씹은 분들은 실은 낙지 몸통을 씹은 것이다.


"봄 조개, 가을 낙지"라는 속담이 있다. "제때가 되어야 제 구실을 한다."는 뜻풀이처럼, 봄에는 조개가 겨울 내내 움츠러든 입맛을 나게 하고, 가을에는 여름철 무더위에 지친 몸을 추슬러 원기를 돋우는 데 낙지만한 것이 없다는 뜻이리라. 가을철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 때, 새끼낙지들이 갯벌로 올라오는데, 이 가을철 낙지를 꽃낙지라 해 최고로 친다. 꽃낙지가 겨울을 지내고 산란을 준비하는 봄철이 되면 묵은 낙지가 된다. 일이 매우 쉽다는 뜻으로 "묵은 낙지 꿰듯"이라는 속담이 있고, 일을 단번에 해치우지 않고 두고두고 조금씩 할 때 "묵은 낙지 캐듯"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묵은 낙지는 생의 마감을 앞둔 춥고 배고프고 굼뜬 낡은 낙지다.

실학자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살이 희고 맛은 달콤하며, 회와 국 또는 포를 만들기에 좋다. 낙지를 먹으면 사람의 원기를 돕는다"고 한 낙지! 늙은 낙지는 가고 젊은 낙지가 돌아온 가을, 30여년 전 낙지발 하나를 놓고 젓가락을 다투던 벗들이 생각난다.

 

니들이 로마네 꽁띠를 알아?

포도주에 대한 우리의 집착과 오해… 한옥의 정취와 포도주를 함께 즐기는 ‘로마네 꽁띠’

» 사진/ 로마네 꽁띠의 포근한 정취는 가을에 더 빛을 발한다.
“어젯밤에 OO호텔 바에서 친구하고 로마네 꽁띠 두병을 비웠는데, 역시 좋은 술은 다르더군. 아침에도 개운해!”

요즈음 명품 찾고 최고급 찾는 좀 있다는 자들이나 잘난 체하는 자들 사이에서 위와 같은 대화는 그리 낯설지 않다. 로마네 꽁띠는 어떤 포도주인가 한마디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포도주다. 프랑스 동북부에 있는 부르고뉴 지방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면 정도에 해당하는 본로마네에서 수확한 포도로만 양조하는 포도주가 로마네 꽁띠인데, 품질은 최상급이지만 생산량은 1년에 6∼7만병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2000년산 로마네 꽁띠의 경우, 프랑스 현지가격으로 1병에 130만원이나 될 정도니,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조차 평생에 한잔을 마셔보기는커녕 구경도 못 해보고, 심지어 그런 포도주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허다하다.

프랑스에서 포도주는 술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퇴근한 뒤 친구들과 어울려 한잔 걸치는 소주와 같은 술이 아니라 식사와 함께 나오는, 요리를 즐기는데 필수적으로 끼어드는 하나의 음료로 생각하면 된다. 음료로서의 포도주는 식사 전에 입맛을 돋우기 위해 마시는 애피타이저용, 본 요리를 먹을 때 마시는 메인 디시용, 그리고 본 요리를 먹고 난 뒤 소화를 돕고 입 안의 음식 냄새를 없애기 위해 마시는 디저트용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이를 구분하지 않고 뒤죽박죽 바꿔 마시거나, 마른안주 놓고 우리 식으로 아무거나 서너병씩 포도주를 비우는 프랑스인은 한명도 없다.

좀 과장해 우리 한식에 비유하면, 애피타이저용 포도주는 식사 전에 몇 숟가락 떠 새콤한 맛으로 입 안에 침이 고이게 하는 물김치요, 메인 디시용 포도주는 밥이 술술 넘어가게 하는 국이요, 디저트용 포도주는 식사 뒤 입 안을 개운하게 해주는 감주나 수정과인데, 이것들을 뒤죽박죽 바꾸거나 섞어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요리를 시키지 않고 포도주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디저트용 포도주를 한두잔 더 마셨을 수는 있을 것이로되, ‘술’로서 포도주는 절대 마시지 않는다. 그들에게 술은 처음도 끝도 코냑이다. 그리고 코냑은 ‘술’이기 때문에 요리 없이 마신다.

나는 우리의 양주 문화를 생각하면 천민의식·허위의식을 떠올린다. 무조건 비싼 술, 무조건 오래된 술을, 무조건 많이 마시는 것으로 자기의 부와 특권의식을 과시하려는 천박한 음주 문화에 요즈음 포도주도 한몫 거들고 있는 것 같다. 몇년산 포도주 하며 거들먹거린다. 오래된 포도주는 희귀성으로 인해 값은 나갈지 모르나 질과는 관계가 없다. 그 해의 일조량과 양조 기술이 포도주의 질을 결정지으니 수십년 된 것보다 2, 3년 된 포도주가 더 질이 좋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로마네 꽁띠 하며 발음도 잘 안 되는 유명 상표를 외워 비싼 포도주들을 찾는다. 그러나 로마네 꽁띠는 메인 디시용 포도주니, 앞의 비유대로 하면 마른안주 놓고 국 두 대접 훌훌 마시는 격이다.


안국동에 가면 아주 예쁜 와인집 로마네 꽁띠(02-722-4776)가 있는데, 낭만파 산악인 박인식씨가 지난 7월에 문을 열었다. 아담한 한옥을 원형 그대로 살려 수리했다. 마당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하늘을 쳐다보면 마치 한적한 산사나 어느 섬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 서양 포도주의 감미로움과 한옥의 포근함이 잘 어울린다. 로마네 꽁띠에는 로마네 꽁띠가 없다. 그리고 수천년을 거쳐오며 정립된 유럽의 ‘음식 문화 속의 포도주 문화’의 내용과 형식과도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 집만의 포근한 정취는, 이 가을 따뜻한 가슴을 나누려는 사람들에게 그 아쉬움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희생의 소를 탕으로 펴시니…

선농제에 바친 소로 우려낸 뽀얗고 진한 국물… 한양설렁탕집에 들러 설렁탕의 역사를 생각해보라

» 서울에서 30여년간을 꾸준하게 이어온 만큼 한양설렁탕집의 국물은 남다르다. (김학민)
가끔 텔레비전의 인기 사극을 보면 포졸들이나 지방 구실아치, 또는 돈 많은 장사치들이 주막에 묵으면서 술 한동이를 거르고 대뜸 너비아니 안주를 시켜 호탕하게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으로 옛날에도 주막에 가면 요즘처럼 각종 고기안주가 즐비해 하룻밤 과객들의 전대를 풀게 하는 것 같지만, 너비아니 등 쇠고기에 관한 한 이 장면은 우리나라 소 식용의 역사와 당시 육류의 유통·보존 조건을 살펴보면 상당히 부풀려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소는 식용 이전에 농경에 긴요한 동력이었고, 이전에는 제사의 희생용 동물이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면, 부여에서 소는 육축의 하나로 관직명에 이름이 들어갈 정도로 중요했다. 그러나 <신당서> 변진조를 보면, 변한·진한에서는 소를 사육했으나 단지 장례용으로만 이용했고, 백제에서는 우마를 타는 것을 알지 못해 순전히 순장용으로 쓰일 뿐이었다고 한다.

이후 농경의 발달에 따라 소가 밭갈이에 이용되면서 중요성이 커졌으나, 삼국시대 고구려를 통해 이 땅에 불교가 전파되면서 소의 식용은 아주 제약되었다. 불교의 오계 가운데 첫 번째가 살생의 금단이었으므로 당시 대다수 백성이 불교도인 상황에서 소의 육용은 극히 일부에서만 이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라의 법흥왕과 성덕왕은 살생을 철저히 금지했고, 백제의 법왕은 가축의 도살은 물론 사냥용 매와 새매를 기르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물고기를 잡는 어로도구조차 불태워버렸다.

1123년 고려에 온 송나라 사절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고려에서는 일부 상류계급만 육류를 먹을 뿐 일반 백성들은 살생을 꺼렸으므로 가축의 도살법이 매우 서툴렀다고 적혀 있다. 조선에 들어와 숭유배불정책으로 금살생의 굴레가 풀리고 식육을 권장했으나, 유교의 인의사상과 영농상의 중요성으로 소의 육용은 크게 보급되지 않았다.

설렁탕은 제사 때 희생으로 쓴 소를 삶아 그 참여자들이 일종의 음복으로 먹은 음식이었다. 인류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신농씨와 후직씨를 주신으로 제사지내는 것이 선농제인데, 신라·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태조 이래 역대 임금은 경칩 뒤 첫 해일(돼지일)에 소를 잡아 풍년을 기원하며 이 제사를 지냈다. 역대 왕은 선농제를 지내고 나서 제단인 선농단 남쪽의 밭을 친히 갊으로써 백성들에게 농사일의 중요성을 알렸던 것이다.


그리고 제사 때 제수로 쓴 소의 머리·다리·뼈·내장 등을 모두 넣고 오랜 시간 백숙으로 푹 고았는데, 이 국물이 뽀얗고 짙다 하여 설농탕(雪濃湯)이라 불렀다고 한다. 왕의 친경이 끝나고 나면 가마솥에 쌀과 기장으로 밥을 해 설렁탕에 말아 제사에 참여한 왕과 문무백관, 60세 이상의 노인들이 함께 나눠 먹었으니, 설렁탕은 곧 국가의 제사음식인 것이다. 선농제에 참여한 신하가 “살찐 희생의 소를 탕으로 해서 널리 펴시니 / 사물이 성하게 일고/ 만복이 고루 펼치나이다”라고 왕에게 바친 시도 있다.

 
설렁탕은 대표적인 서울 음식이다. 그러므로 서울에는 아주 오래된 설렁탕집들이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마포의 한양설렁탕집(02-712-9526)도 한번 소개할 만하다. 같은 자리에서 아버지가 20여년간 설렁탕집을 운영해오다 연로해 둘째아들 백성현(39)씨에게 물려줬는데, 백씨가 운영한 지도 벌써 9년째니, 상전이 벽해되는 서울 하늘 아래서 30여년간을 꾸준하게 이어온 식당도 그리 흔치는 않다.

한양설렁탕집의 사골과 머리뼈로 푹 곤 국물은 참으로 고소하기 짝이 없는데, 뚝배기에 밥 담아 토렴(밥을 데우기 위해 국물을 여러 번 붓고 쏟고 하는 것)하고, 국수 한 사리, 편육 몇점 넣어 국물 부어내면 소주 몇잔과 함께 썰렁한 이 가을 움츠러든 몸이 활짝 펴진다. 같은 재료, 같은 솜씨로 같은 맛을 내는 수원 인계동의 마포설렁탕집(031-235-4455)은 성현씨의 형 현규(42)씨가 운영하고 있다.

 

돼지를 아십니까, 정말로?

서민들의 소박한 염원이 담긴 다산성의 상징… 솔밭집 ‘도드람 삼겹살’의 절묘한 맛

» 사진/ 돌판 위에서 포기김치와 함께 굽는 솔밭집의 도드람 삼겹살.
일상의 삶 속에서 자주 마주치는 특별한 글과 그림이 있다. 대중목욕탕의 사우나 선전 설명문이나 이발소의 그림들이 그것들인데, 나는 그것들을 볼 때마다 참 신기하다는 느낌이 든다. 전국의 대중목욕탕과 이발관 주인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 모여 결의라도 한 듯 비슷한 분위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지방 소도시거나 서울과 같은 대도시거나, 또는 허름한 동네 목욕탕이거나 휘황찬란한 특급 호텔의 사우나거나 탕이나 사우나 독에 들어가 뜨거움을 참으며 가만히 그 집의 ‘만병통치’ 사우나 효능을 설명하는 아크릴판을 읽어보면, 어느 도시 어느 등급의 목욕탕에서도 맞춤법은 물론 문장이 제대로 된 설명문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또 전국의 어느 이발관에 들어가보더라도 그곳에는 대개 딴 데서 본 ‘이발소 그림’들이 걸려 있다.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계곡에 물레방아가 돌고 있고, 상단 여백에는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써넣은 그림이거나, 어미 돼지와 어미 돼지의 젖을 빠는 7∼8마리의 새끼 돼지가 있고, 그 여백에는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푸슈킨의 시구를 적은 그림이 이발소들의 단골 소장품인 것이다.

이렇게 이발소 그림들이 통시적으로, 또 전국적으로 비슷한 소재를 보여주는 것은 한편으로는 문화예술에 대한 이발소 주인들의 ‘민중적 취향’이라는 면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돼지 그림의 경우 돼지의 왕성한 식성과 다산에서 유추되는 풍요와 번영, 재산과 부의 증식에 대한 서민들의 소박한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돼지는 생후 8∼10개월부터 시작하여 10여년간 임신이 가능하다. 임신기간 114일이 지나 새끼를 낸 뒤 한달께 젖을 떼일 쯤 되면 다시 발정을 하므로 한해에 두번 이상 번식시킬 수 있다. 또 자궁각이 길어 한 배에 6∼12마리까지 새끼를 밸 수 있으므로 한 마리의 암퇘지와 그 새끼들이 각각 별탈 없이 10여년간 계속 번식한다면 그 수는 문자 그대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돼지의 이러한 다산성 때문에 돼지꿈·돼지저금통 등 돼지와 관련된 상징들은 모두 좋은 것으로 풀이되지만, 사람들은 막상 돼지 자체에 대해서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첫째가 돼지는 더러운 곳을 좋아한다는 오해인데, 절대 그렇지 않다. 돼지는 땀샘이 발달하지 않아 체내의 모든 수분을 오줌으로 배출하지만, 후각이 발달하여 배설하는 곳을 따로 만들어주면 냄새를 맡고 그곳에서만 배설하며 누울 곳은 깨끗하게 유지한다.

또 돼지는 왕성한 식욕으로 인해 우둔하고 욕심이 많은 동물로 여긴다. 그것도 틀린 이야기다. 돼지는 여러 마리를 같이 길러도 다른 동물과는 달리 먹이를 갖고 다투지 않는다. 또 우리의 선조들은 어미돼지와 새끼돼지들을 한 우리에 넣어 기르지 않았는데, 그것은 어미돼지가 새끼돼지에게 먹이를 양보하여 살이 찌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즈음 대규모 돼지 농장들은 사료 개발과 과학적 관리로 돼지고기의 품질을 높이고 있다. 과거 우리 선조들도 살을 찌게 하고 육질을 좋게 하기 위해 특수 사료들을 먹였다. 옛 자료를 보면 ①느릅나무잎과 스무나무잎 ②해조류와 마치라는 풀 ③삼씨와 소금 ④오동나무꽃 빻은 것 ⑤상수리 열매 등을 각각 넣어 쌀겨나 보릿겨죽을 쑤어 먹였다고 한다.

솔밭집(031-264-0715, 주인 김청자)은 10여년 전부터 수지·분당 지역에서 설렁탕과 해장국이 맛있기로 유명한 집이다. 나는 이 집의 설렁탕·해장국보다는 ‘도드람 삼겹살’을 더 좋아한다. 돌로 된 고기판을 가스레인지 위에 비스듬히 올려놓고 달군 뒤 잘 익은 포기김치와 길쭉하게 썬 삼겹살을 척 펼쳐놓으면 자연스레 김치국물이 고기에 배면서 맛있게 익는다.

그 쫄깃쫄깃한 맛에 돼지고기가 별로인 사람들도 쉽게 1인분 이상을 해치울 수 있다. 그렇다고 고기만으로 배를 채우지는 마시라. 대충 먹고 난 뒤 바로 그 돌판 위에서 남은 고기랑 김치, 파절이 등을 잘게 썰어 기름이 자르르하게 비빈 볶음밥을 맛보지 못한다면 어렵사리 솔밭집에 찾아와 순서 기다리며 자리잡은 본전을 반밖에 뽑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군의 죽음, 조기의 죽음

임경업 장군의 한이 서린 조기가 사라지고 있다… ‘3김’이 함께 나주식당을 찾은 사연

» 사진/ 조기 서너 마리에 홍어·조개를 듬뿍 넣고 끓인 조기매운탕은 간밤에 2, 3차로 망가진 술꾼들의 속을 시원하게 풀어준다.
영·정조 시대 언어학자 황윤석이 지은 어원연구서 <화음방언자의해>에 의하면 “조기는 중국의 종어(魚)인데, 종어가 빠르게 발음되다 보니 조기가 되었다”고 한다. 또 같은 시기에 이의봉이 편찬한 <고금석림>은 일종의 사전인데, “조기는 머리에 돌이 들어 있어 석수어(石首魚)라고도 한다. 석수어의 속명이 조기(助氣)인데, 이는 사람의 기를 돕는 것이기에 붙여졌다. 또 조기를 천지어(天知魚)라고도 했는데, 이는 조기를 말려 굴비를 만들 때 늘 지붕 위에서 말리니, 접동새나 고양이가 감히 이를 취하여 먹을 수가 없으므로 붙은 이름이다”라고 설명돼 있다.

조기는 농어목 민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수종의 총칭으로, 참조기·보구치·수조기·부세·흑조기 등이 이에 속한다. 참조기는 몸이 길고 꼬리 부분이 가는데, 4월 중순부터 6월 하순까지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잡히는 조기가 이것이다. 보구치는 참조기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꼬리지느러미 끝이 참빗 모양으로 생긴 것이 다르다. 수조기는 몸이 길고 납작하며 황적색을 띤다. 부세는 작은 민어와 비슷하며 적황색을 띠고, 흑조기는 부세와 비슷하며 입속이 흑색이다.

정조시대 실학자 정약전이 지은 <자산어보>를 보면, “추수어(水魚), 곧 조기 큰 놈은 1척 남짓하다. 모양은 면어(민어) 비슷하나 몸이 작으며, 맛도 면어와 비슷하나 더욱 담백하고, 용도도 면어와 같다. 알은 젓을 담그는 데 좋다. 흥양 바깥섬에서는 춘분 뒤에 그물로 잡고, 칠산해에서는 한식 뒤에 그물로 잡고, 해주 전양에서는 소만 뒤에 그물로 잡는다. 흑산 바다에서는 6∼7월 밤에 낚기 시작하는데, 낮에는 물이 맑아 낚시를 물지 않기 때문이다. 산란이 이미 끝났으므로 맛이 봄 것보다 못해 어포로 만들어도 오래 가지 못한다. 가을이 되면 조금 낫다. 때를 따라 물을 쫓아오므로 추수어라 한다”고 적혀 있다. 오늘날의 어류학자들이 현대적 장비를 갖추고 오랫동안 조사·연구한 내용을, 200여년 전 한 선비는 귀양 간 흑산도에서 예리한 관찰만으로 조기를 세세히 파악했으니 참으로 경탄할 일이다.

우리나라 서해안의 조기 어업은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임경업 장군과 민중사적으로 연결돼 있었다. 임경업은 조선 인조 때 무관으로, 일생을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분투한 사람이다. 병자호란 뒤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청나라가 조선에 파병을 요구하자 군사를 이끌고 황해를 건너 중국땅으로 갔는데, 명나라와 내통해 핑계를 대고 조금도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이후 임경업은 김자점 등 부청파에 의해,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쓴 채 모진 고문 끝에 죽고 말았다.

“임 장군이 황해를 건널 때 군사들이 찬이 없다고 하니 어디에서 가시나무를 가져다가 물에 넣으니 조기가 무수히 걸려서 반찬을 했다”는 등 조기와 관련된 임경업 설화와, 나라를 위해 충성하다가 역적의 흉계로 억울하게 죽은 영웅신화가 민중들에게 각인되어 서해안 일대에서는 임경업당을 세우고 조기잡이 나가기 전에 임경업신에게 반드시 제를 올려 풍어와 안전을 기원했다. 요즈음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환경 파괴와 어족의 남획으로 서해안의 조기 씨가 말라버렸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충성하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민중 영웅에 대한 숭앙정신까지도 미신으로 치부돼 말라버린 상태다.


광주시 전남도청 부근의 나주식당(062-223-7388)은 맛의 고향 광주에서도 알아주는 조기매운탕 집이다. 주인 박순애(73)씨는 25년 전부터 한자리에서 식당을 열어왔는데, 아직도 정정하게 새벽 4시에 문을 열고 해장 손님들을 받는다. 조기 서너 마리에 홍어·조개를 듬뿍 넣고 끓인 조기매운탕은 간밤에 2, 3차로 망가진 술꾼들의 속을 시원하게 풀어준다.

1980년대 말이든가, 광주에서 ‘3김’이 함께 이 집을 찾은 적이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나와 김종철(전 연합뉴스 사장)씨, 그리고 김태홍(현 국회의원)씨를 분위기도 비슷하고 식탐이 많은 것도 비슷하다고 해 3김이라 불렀다. 당시 나는 이 집에서 처음 맛보는 토하젓에 밥 비벼 먹으랴, 조기매운탕에 소주 한잔 걸치랴, 나머지 ‘2김’을 견제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빈대떡 신사를 추억하다

상상력으로 재구성해본 빈대떡 신사의 일대기… 아리랑빈대떡집의 쫄깃한 맛의 비결

» 사진/ '아리랑빈대떡'은 찹쌀가루를 적당히 넣는다. 이것이 이 집의 부드럽고 쫄깃쫄깃한 빈대떡 맛의 비결이다.
“"돈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한복남이 작사·작곡하고 직접 노래까지 부른 <빈대떡 신사>의 한 구절이다. 어쩌다 노래방에서 화면에 나오는 가사를 보며 이 노래를 부를라치면 나는 부질없이 이 ‘신사’의 일생을 혼자 추적해본다.

이 신사는 구한말 또는 일제 초기 어느 시골 부잣집의 외아들이었을 것이다. 부모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지만, 여느 부잣집 도련님들과는 달리 품성은 착했던 것 같다. 일찍이 경성에 유학 와 배재고보를 다니며 서양의 기독교 문화와 일본의 새 문물을 접했고, 고보 재학 중 부모의 강권으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튼튼한 시골처녀와 결혼을 했으나, 신혼의 즐거움보다는 친구들과 휘황찬란한 경성의 밤거리가 더 눈에 어른거렸을 것이다. 고보를 졸업할 즈음 아버지가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자 그는 졸지에 큰 식솔을 거느리는 부잣집 호주가 된다. 처음 한해는 소작인들을 채근하며 농사일을 좀 건사해봤지만, 가끔 경성을 다녀올 때마다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드디어 전답 일부를 팔아 친구와 함께 광산업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광산은 제대로 되지 않아 시골땅을 계속 야금야금 팔 수밖에 없었고, 교제한답시고 총독부 관리들과 주야장창 기생집을 드나들다 보니 점차 사업은 뒷전이었다. 그렇게 몇해가 지나다 보니 광산 채굴권은 어느새 동업자 친구의 손에 가 있었고, 신사에게 남은 것은 만리재 넘어 세칸짜리 오두막과 지게미와 쌀겨를 같이 먹는 아내, 그리고 올망졸망한 5남매가 전부였다.

어느 날 딱히 용무는 없지만 아내와 아이들 얼굴 맞대고 하루종일 있기도 뭐해 모처럼 문안엘 행차했다. 무심코 종로 뒷거리를 걷다 보니 전에 자주 드나들던 기생집이 눈에 들어온다. 한숨을 푹 쉬고 그냥 지나치려는데, 문득 한 생각이 떠오른다. “내가 이 집에서 교제술로 날린 논이 몇 마지기인데, 그것을 생각하면 이년들이 술 한상은 주겠지.” 헛기침을 흥 하고 들어가니 기생들은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지 호들갑을 떨며 버선발로 뛰어나온다. 요리 한상 시키고 정종 몇 주전자 비운 뒤 거나한 기분에 “술값은 외상!” 하니 지금까지 입속의 혀처럼 아양떨던 기생들의 눈초리가 달라진다. 사업을 들어먹었다지만 부잣집 망해도 3년은 간다는데, 이 신사는 불알 두쪽뿐인 것이다. 요릿값은 받을 길이 없고, 기생들은 처량히 대문 밖으로 쫓겨나는 이 신사의 뒤에다 대고 화풀이를 해댄다.


“에이, 재수 없어!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기생집은 왜 와”

그날 저녁, 만리재 넘어 집으로 돌아온 신사는 기생들의 악다구니대로 빈대떡을 부쳐 먹었을까 조선시대의 전통 빈대떡이라면 이 신사는 빈대떡 한장 부쳐 먹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빈대떡은 녹두를 맷돌에 갈아 전병처럼 부쳐 만들지만, 1670년 안동장씨가 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조리서인 <규곤시의방>이나, 1809년 빙허각 이씨가 지은 가정살림에 관한 책 <규합총서>를 보면, 빈대떡은 녹두를 가루내어 되직하게 반죽해 빈철의 기름이 뜨거워지면 조금씩 떠놓고 그 위에 꿀로 반죽한 소를 얹어놓고, 다시 그 위에 녹두반죽을 덮고 지져 만들며, 특별히 위에 잣을 박고 대추를 사면에 놓아 꽃전모양으로 호화롭게 만든다고 했으니, 궁핍한 신사가 이를 어찌 흉내내겠는가.

고속도로 경부선 수원 나들목 부근 신갈 오거리에 가면 아주 맛있는 빈대떡집이 하나 있다. 강호석(51)·임순애(47) 부부가 금슬좋게 20여년간 한자리에서 빈대떡만 전문적으로 만들어왔다. 자신감을 표현하듯 상호에 아예 ‘빈대떡’을 넣어 ‘아리랑빈대떡집’(031-282-9815)이다. 빈대떡은 100% 녹두만 넣으면 맛이 없다. 녹두가 너무 많으면 껄끄러워 입에서 뱅뱅 돌고, 또 식으면 쉽게 굳는다. 그리해서 찹쌀가루를 적당히 넣는데, 이것이 이 집의 부드럽고 쫄깃쫄깃한 빈대떡 맛의 비결이다. 고기를 넣은 녹두고기전, 김치를 넣은 녹두김치전이 각각 한장에 4천원인데, 두명이 막걸리 한되, 소주 한병 마시는 데 전혀 부족하지 않다.

 

철모의 쓰임새를 아십니까?

병사들이 전립에 음식을 끓여먹으면서 탄생한 전골… 곰국시가에서 찾은 전통 전골의 담백함

» 사진/곰국시가의 전골요리. 이 집 주인 장은용씨는 전문 요리사 출신은 아니지만 순전히 눈썰미와 맛에 대한 탁월한 감각으로 전골요리들을 개발했다.
키 179cm에 몸무게 45kg으로 군대 안 간 사람은 모른다. 철모의 이용법을. 철모는 그 안에 덧쓰는 파이버와 함께 전투시 총탄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주 정면으로 총탄을 맞으면 철모와 파이버조차 뚫려 죽게 되지만, 웬만한 각도로는 총탄이 모두 튕겨나가고, 혹 빗맞아 철모를 뚫더라도 철모와 파이버 사이의 공간에서 총탄이 빙글 돌아 머리를 보호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철모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정밀하게 역학적으로 곡선이 설계되었다고 하는데, 특히 2차대전 때 나치 독일군의 철모는 총탄은 물론 포탄의 파편까지도 튕겨 흘려버릴 수 있도록 강하고 정밀하게 만들어졌다. 2차대전을 소재로 한 전쟁영화의 상투적 장면과는 달리 나치 독일군은 상당히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자신 있게 머리를 들고 연합군을 향해 사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철모의 본령은 전투시 머리 보호인데,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 전방 소총부대가 야전훈련이라도 나가게 되면 그 쓰임새가 여러모로 변한다. 철모는 행군에 지친 병사들의 ‘5분간 휴식’ 때 의자가 되기도 하고, 목마른 전우들을 위해 샘물을 떠오는 물대접이 되기도 하고, 분대원들의 밥과 국을 받아오는 밥그릇이 되기도 하고, 얼굴이나 발을 씻는 고참의 세숫대야가 되기도 하고, 소대장 몰래 받아다 마시는 막걸리 양푼이 되기도 한다. 또 군부대 근처 농가에서는 부대에서 흘러나온 철모에 적당히 나무막대를 꿰어 변소를 푸는 바가지로 이용하기도 한다.

옛날의 철모는 전립투이다. 전립투는 전쟁 때 쓰는 모자라 하여 전립(戰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털실로 뜬 모자라 하여 전립(氈笠)이라고도 한다. 상고시대 전립은 오늘날의 철모처럼 쇠로 만들었던 모양인데, 전시에 진중에서는 기구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병사들은 자기가 쓴 전립을 벗어 각각 음식을 끓여 먹었다고 한다. 이것이 민간에도 전해져 여염집에서 냄비를 전립 모양으로 만들어 고기와 채소를 넣어 끓여 먹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전골이라는 조리법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전통 전골 요리법은 오늘날과 같이 음식 재료들을 모두 넣고 그냥 끓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 유득공이 지은 세시풍속기인 <경도잡지>를 보면 “냄비 가운데 전립투라는 것이 있는데 그 모양이 벙거지와 같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채소는 그 가운데 움푹하게 들어간 부분에다 넣어서 데치고 변두리 평평한 곳에서 고기를 굽는데, 술안주나 반찬에 모두 좋다”라고 나와 있다. 곧 재료를 몽땅 넣고 한번에 끓이는 것이 아니라, 모자전 같은 데서 고기를 구우면 자연히 고기 국물이 채소 국물에 흘러들어가 맛을 내는 조리 구조가 곧 전통 전골인 것이다.


또 구한말의 조리서인 <시의전서>를 보면 “연한 안심을 얇게 골채쪽처럼 저미거나 채쳐서 갖은 양념을 하여 화기(火器)에 담고, 그 위에 잣가루를 뿌려 먹는데, 죽순, 낙지, 굴을 쓰기도 한다. 전골 나물은 무, 콩나물, 숙주, 미나리, 파, 고비, 표고, 느타리, 석이, 도라지를 쓰고, 소반에 전골틀과 나물접시를 놓고, 탕기에 장국을 타서 담고, 접시에 달걀 2, 3개를 담고, 기름을 종지에 넣고, 풍로에 숯을 피워 전골틀이나 냄비에 지진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앞의 <경도잡지>의 구이 전골과 오늘날의 냄비 전골을 적당히 섞은 것이다.

지하철 4호선 상계역 부근의 곰국시가(02-937-0087)는 아주 맛있는 전골 전문집이다. 버섯만두전골·수육전골·모듬전골을 만들어 내는데, 이 집 주인 장은용(39)씨는 전문 요리사 출신은 아니지만 순전히 눈썰미와 맛에 대한 탁월한 감각으로 전골 요리들을 개발했다. 어차피 세상이 변함에 따라 입맛도 변하고, 재료도 옛날과 같지 않으니 전통 조리법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일이나, 양송이·표고·느타리·팽이버섯·떡·만두와 갖은 야채를 넣고 끓인 이 집의 모듬전골은 그나마 우리 전통 전골의 담백한 맛을 전해 주는 것 같다. 어느 전골이든 2만원 짜리를 시키면 3∼4명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독재자의 밀가루는 달콤했다

우리밀 칼국수 한 그릇 앞에 두고 대선 전략으로 수입밀가루 뿌린 박정희와 JP를 생각하다

» 사진/ 우리밀 칼국수는 고소하고 쫄깃한 면발이 일품이다.
1961년 5월16일, 육군소장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켜 4·19 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권을 몰아냈다. 박정희는 당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쿠데타 세력의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는 허수아비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박정희와 그의 조카사위인 육사 8기생 김종필(JP) 등이 주도했다. 이들은 민생을 도탄에서 구하고, 북한의 남침 야욕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혁명’을 했다고 했지만, 이후의 전개과정을 보면 정권욕에 빠진 정치군인들이 민주정부를 전복한 반란행위일 뿐이었다.

하여튼 군대를 틀어쥔 박정희는 자기들끼리 서로 치고받는 수차의 반혁명 사건을 겪으며 권력을 공고히 해갔는데, 여기에는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이 땅에 공작정치를 실행하고 공안사건을 조작하게 한 JP가 큰 역할을 했다. 쿠데타의 성공으로 졸지에 권력맛을 본 박정희는 군으로 원대복귀하겠다고 하다가는 갑자기 4년간 군정을 연장하겠다고 하는 등 갖은 술책을 부렸지만, 나라 안팎의 압력으로 결국 민정이양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것이 1963년 10월15일 박정희와 윤보선이 맞붙은 제5대 대통령 선거인데, 이 선거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결판이 났다. 총 1100여만표 가운데 박정희는 유효투표의 46.65%인 470만2642표를, 윤보선은 45.1%인 454만6614표를 얻어 두 사람의 표 차이는 15만6028표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북한의 상황과 같지는 않지만, 60년대 초 남한 역시 식량난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해마다 음력설이 지나고 나면 동네마다 양식이 떨어진 집이 숱하여 초여름 보리가 나기까지 2~3개월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허기진 뱃속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1963년 여름에는 태풍 ‘셜리’가 호남평야를 덮쳐 수십만의 수재민들이 발생했고, 이로써 그해 가을 쌀농사는 대흉년이었다.

이런 흉흉한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하는 초보 정치인 박정희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때 박정희와 JP 등이 꾀를 낸 것이 수재민 구호였다. 이들은 일본·미국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밀가루와 원맥을 도입해 수재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었고, 나머지는 민간업자에게 헐값으로 불하해 막대한 정치자금을 확보했다. 이것이 설탕·시멘트의 매점매석과 함께 이른바 ‘삼분폭리’라 이름붙은 박정희 정권 초기 최대의 부정부패사건이다.


이렇게 도시 서민층과 농촌을 밀가루로 범벅해놓았으니, 그 상황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임기 내내 야당으로부터 ‘밀가루 대통령’이라고 공격받았다. 박정희의 당선은 이후 20여년간 이 땅 민중들의 자유를 말살하고 민생을 탄압하는 암흑의 역사를 예고하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넘쳐나는 공짜 밀가루에 치여 삼국시대 이후 이 땅에 뿌리박아온 우리밀을 멸종시켰다.

이로부터 40여년이 지났다. 방방곡곡에 밀가루를 뿌려 독재자 대통령 박정희를 탄생시키고 우리밀을 사라지게 한 약관의 JP도 이제는 몸도 마음도 늙은 것 같다. 요즈음은 자기 힘으로는 안 되는지 어쩔 수 없이 정치철새를 앞세워 남의 밥상에 잿가루를 뿌리려고 한다.

10여년 전부터 어렵사리 우리밀 살리기 운동이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농촌 전체가 피폐해지는 이 판국에 저가 물량공세의 미국산 밀가루에 우리밀이 버티기가 쉽지는 않으니, 우리밀을 심고 보급하려는 뜻있는 분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서 우리밀 칼국수집(02-574-1421)을 열고 있는 정무균(56)씨는 우리밀 보급의 열렬한 전도사다. 정씨는 1995년부터 칼국수집을 해왔는데, 몇년 전 우연히 <한겨레>에서 수입 밀 속에 잔류농약·방부제 등 해로운 첨가물들이 많이 있다는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아 수소문 끝에 무공해 우리밀을 구해 지금껏 칼국수를 만들어왔다. 이 집의 우리밀 칼국수는 고소하고 쫄깃쫄깃한 면발에 자연산 다시마, 재첩, 새우, 북어, 버섯, 멸치와 각종 채소 등 20여 가지가 들어가는 국물이 무척 시원하다(칼국수 4500원, 만두 5천원).

 

‘아사도’의 나라는 왜 망했을까

‘조리스’에서 맛본 아르헨티나 갈비구이 아사도… 피폐한 국가의 황금시대를 떠올리다

» 사진/ 아사도는 쇠고기의 나라 아르헨티나 국민이 쇠고기를 물리지 않고 먹기 위해 개발한 음식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읽은 <엄마 찾아 삼만리>란 동화가 생각난다. 마르코란 이탈리아 소년이 아르헨티나로 식모살이 하러 간 엄마를 찾아 혼자 몸으로 길을 떠나 여행길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성장하고, 고난과 절망을 뛰어넘은 여정 끝에 결국 엄마를 다시 만나 그 품에 안긴다는 줄거리다. 어린 나이에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몇년 만에 엄마와 만나는 마르코의 해피엔딩에 감동받아 이 동화를 여러 번 읽은 기억이 난다. 그때의 감동 한편으로는 이탈리아가 유럽 어디쯤의 잘사는 나라인데, 그 나라 국민이 식모살이 하러 간 아르헨티나라는 나라는 얼마나 더 잘사는 곳일까 무척 궁금해했다.

사실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 남미 최고의 잘사는 나라, 나아가 미국과 어깨를 견줄 만한 세계 5대 부국에 꼽혔다. 넓디 넓은 땅에서 경작한 곡물과 초원에서 키운 가축을 제1차 대전으로 황폐화한 유럽에 싣고만 가면 엄청난 돈이 쏟아져들어왔기 때문에 그 부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내가 멀리 갔다고 슬퍼하지 마라. 네가 있음으로 내가 있다. 내 모든 사랑과 슬픔은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작은 목표를 이루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레콜레타 공동묘지에 있는 에바 페론, 곧 에비타의 묘비에 새겨진 유언이다. 1946년 야심만만한 군인 후안 페론과 결혼한 뒤 퍼스트 레이디가 된 에비타를 가난한 사람들은 성녀라고 했고, 부유한 사람들은 정치적 목적으로 빈민을 이용한 악녀로 여긴다.

페론과 에비타는 쏟아져들어오는 돈을 노동자와 빈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뿌리는 데 열중했다. 이로써 페론 부부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작은 목표를 이루었는지 모르지만, 국가의 부를 미래를 위해 투자하지 않아 아르헨티나가 산업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완전히 소진시켜버렸으니, 오늘날 3600만 아르헨티나 국민 가운데 1천만명 이상이 ‘거지를 닮아가는’ 현실의 근원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1989~99년에 집권한 메넴 대통령은 이러한 근원을 이어받아 아르헨티나를 극도로 피폐화시켰다. 노동시장의 유연화, 국영기업 해외매각 등 어설픈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메넴의 정책은 국영항공, 국영통신업체, 은행, TV채널, 라디오방송, 일정구간의 도로, 석유채굴권을 외국에 팔아넘기는 것도 모자라 주민등록증 발급사업, 심지어 국세청의 업무까지 외국기업에 매각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는 외채 1400억달러라는 참담한 현실을 낳았다. 국민총생산이 1200억달러임에도 국영기업을 판 돈 1600억달러를 고스란히 1천명의 부자들이 외국으로 빼돌렸다.

현재 아르헨티나는 인구의 절반이 빈곤층이다. 하루에 평균 50여명의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죽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아르헨티나 전역에는 인구의 3배나 되는 1억여 마리의 소들이 초원을 누비고 있다. 대규모 목장은 자기들 소가 정확히 몇 마리인지 모른다. 대개 3~5년에 한번 항공촬영을 해서 샘플 지역의 소를 센 뒤 목장 면적과 비례해 어림짐작할 뿐이다. 이렇다 보니 아르헨티나에서는 한편의 굶주림 속에서도 쇠고기 소비촉진에 열을 올린다.

쇠고기를 물리지 않고 많이 먹게 하기 위해 개발한 음식이 아사도인데, 지하철 4호선 성신여자대학교 부근에 있는 아르헨티나 음식점 ‘조리스’(02ㅡ928ㅡ1838)는 아르헨티나의 전통 갈비구이 아사도와 우리나라의 순대와 비슷한 조리스로 유명하다. 주인 허민씨는 사업차 아르헨티나를 드나들다 아사도와 조리스 맛에 반해 사업을 정리하고 아예 아르헨티나 음식점 주인으로 변신했다. 어긋어긋 썬 갈비를 굵은 소금으로 간을 해서 1~2시간 기름을 쭉 빠지게 구워 허씨가 직접 개발한 청양고추 소스에 찍어먹는 아사도 맛은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광교산에서 부르는 막걸리 찬가

물 마시지 말고 광교산을 오르라, 내려오자마자 ‘24시 해장국’ 막걸리를 들이켜라

» 사진/ 산에서 내려와 마시는 막걸리 첫잔은 꿀맛이다. 결국 몇잔을 마셨는지 모를 지경까지 '꿀맛 예찬'은 계속된다.
나는 등산을 좋아한다. 그러나 특별히 청소년 시절부터 등산이 취미인 것은 아니었고, 1970년대 중반 유신독재 시절 대학에서 제적된 뒤 반백수건달 생활을 하면서 자연히 남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등산을 시작했다. 지금껏 물리지 않고 유일한 취미로 남아 있으니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기특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땀흘려 산에 올라 정상에 앉아 호연지기를 맛보는 등산 ‘본령의 맛’ 외에 다른 무엇이 나를 등산에 매혹되게 했으니, 하나는 좋은 선후배·친구들과의 어울림이며, 다른 하나는 하산 뒤 뒤풀이에 대한 기대다. 전문 산악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한심하고 어설픈 ‘유흥 등산객’의 모습이겠으나, 어쩌랴, 나는 이게 더 좋은 것을.

내가 등산을 함께하는 팀은 시인 신경림 선생, 소설가 현기영 선생 등이 멤버인 20여년 된 무명산악회, 그리고 고교동창 이우섭이 대장으로 장기집권하고 있는 배재산악회가 있다. 몇년 전 경기 용인 수지로 이사온 뒤로는 홍일선·용환신·윤한택 시인, 음악가 조재식, 사진작가 박희주씨 등 수원·용인 부근에 사는 문화예술인들과 주로 광교산 등산을 즐긴다.

무명산악회는 나의 스승인 고 성내운 선생(전 광주대 총장)이 회장으로 계셨고 회원들도 나보다 연상의 어른들이라 나는 담배 심부름, 술 심부름 하는 처지에서 발언권이 아주 미약했다. 배재산악회는 모두 동창들이라 특별히 내 말만이 먹혀들지 않았는데, 광교산을 등반하는 우공이산 산악회는 회원들이 대부분 나보다 어려 여기서는 제법 대장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광교산은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는 수원의 주산으로, 왕건이 견휜을 격파하고 개성으로 돌아가는 도중 광교산 자락에 머물렀는데, 산에서 광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왕건이 예사롭게 여기지 않고 이 산에 70여개의 절을 세워 고려 왕조의 무궁 안녕을 기원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휴일이면 수많은 수원시민·용인시민들이 광교산을 등산하는데, 완만하지만 잘 자란 수목 사이로 예쁘게 난 오솔길을 등산하는 맛이란 참으로 상쾌하다. 또 광교산이 있는 수지라는 지명에 걸맞게 좋은 약수터들이 널려 있어 등산객들의 갈증을 풀어준다.

나는 우공이산 산악회 회원들과 등산할 때는 약간 독재를 한다. 따뜻한 봄이건 서늘한 가을이건, 찌는 듯한 한여름이건 차가운 겨울이건 가능하면 산에서는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한다. 에베레스트산 등정에 대비한 극기훈련이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러면 사하라 사막 횡단에 대비한 체력다지기 훈련이라도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산 뒤의 뒤풀이를 만끽하기 위해서다. 우리들은 산에서 내려온 다음 대개 수원 장안문 부근에 있는 한 허름한 막걸릿집으로 가는데, 이 집의 막걸리 맛이 끝내준다.


이제 눈치 빠른 독자들은 알아차리겠지만, 산에서 갈증을 참고 참게 해 물 한 모금 못 마시게 한 것은 이 집에서의 막걸리 첫잔의 꿀맛을 보게 하려는 나의 ‘애정’ 때문이다. 우리들은 언제나 첫잔의 꿀맛에 감탄하지만, 결국 몇잔을 마셨는지 셀 수 없을 지경까지 ‘꿀맛 예찬’은 계속된다.

이 집은 막일꾼·고물장수 등 수원시내 ‘민중’들이 즐겨찾는다. 상호조차 장삼이사식으로 그냥 ‘24시 해장국’(031-254-8064)이다. 주인 아주머니 김재옥(40)씨는 부근에서 비슷한 왕대폿집을 운영하는 오빠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아 몇년 전에 이 집을 열었다. 일취월장 청출어람이라고 이제는 오빠네 집보다 손님이 더 많고 안주도 더 맛깔스럽다.

안주 차림도 여러 가지 있지만, 한번 들르걸랑 복잡하지 않게 주인 아주머니께 그냥 불쑥 말하라. 그리하면 마이더스의 솜씨가 술꾼, 당신을 행복하게 하리라.

“아주머니, 막걸리 한되 하고, 있는 거 중에서 아무거나 해주세요!”

 

갈비도 세상도 평등해야 한다

‘서서갈비집’에서 평등을 떠올리는 이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서서 먹는 쫄깃한 갈비맛

1980년 5월17일 밤, 신혼의 단꿈에 잠들어 있던 나는 느닷없이 권총을 빼들고 들이닥친 전두환 계엄사령부 요원들에 의해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다. 그날 밤은 강남경찰서 유치장에서 아무 조사도 없이 하룻밤을 보냈는데,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도 나는 지난 재야시절의 반유신 투쟁이나 최근의 공개적인 계엄철폐 시위에 대해 조사나 하고 곧 보내주겠지, 쉽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튿날 오후 지금의 경찰청 자리에 있는 옛 전매청 건물 합동수사본부에 인계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합수부 5반에 들어서자마자 수사관들과 당시 합수부에 파견되어 있던 청와대 33헌병대 군인들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하고 다짜고짜 무수히 구타하였다.

이렇게 매일매일 구타와 고문, 그리고 나의 ‘여죄’를 쥐어짜가며 며칠을 보냈다. 어느 날 ‘정’이라는 수사관이 우리집에 가 압수수색을 하였다며 ‘불온한’ 책 몇권을 가지고 왔다. 그들이 압수해온 책 중에는 존 로크의 <시민정부론>, 막스 베버의 <사회과학방법론>,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이 있었다.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나를 얽어넣으려 했던 합수부 수사관들은 은연중 <시민정부론>에서 내란음모의 체계적 근거를, <사회과학방법론>에서 사회주의의 이념을,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사회에 대한 불편함과 불온성을 연결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코미디와 같은 일이지만, 1980년 ‘광기의 국가폭력시대’에 계몽주의 사상가 존 로크, 자본주의의 윤리를 갈파한 막스 베버, 자유주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저작들을 정권욕에 광분한 군인들에게 차분하게 설명하려 한들 돌아오는 것은 매타작뿐이었다.

볼테르가 루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류에게 트집을 건 당신의 새로운 저술”이라고 한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는, 당시 유럽의 절대군주 치하에서 시달리던 인민의 참상에 대한 의문을 토로하고,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의 자연적·신체적 불평등을 자연법주의로 포장, 용인, 지속시키려는 시대 조류에 맞서 인류 역사와 문화 형성의 잠재력으로서 인간의 사회화, 진취성, 이성의 발달을 들어 ‘인간평등’의 사상을 피력하였다.

인간의 평등은 법적 평등과 조건의 평등으로 나눌 수 있다. 법적 평등은 시민적·정치적 평등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법 앞에서의 평등과 인간 사이의 자연적 평등 관념에 기초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특권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조건의 평등은 사회적 평등이라 할 수 있는데, 사회적 욕구의 증대에 따르는 권리상의 평등 개념이 아니라, 생존의 수단과 조건이 평등해야 함을 설파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의 평등을 형식적이고 환상적인 개념으로 간주했다. 개인은 여러 가지 점에서 같은 점이 없기 때문에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공통의 본성과 존엄성은 ‘평등’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차이’와 ‘평등’은 화해가 가능하지만 ‘특권’은 ‘평등’과 대립한다.


신촌로터리에서 서강대교 가는 길, 기차 굴다리 근처에 ‘서서갈비집’(주인 이대현)이 있다. 이 부근에서만 50여년 동안 계속 영업해온 곳으로, 서울 시내 술꾼 중 아는 사람은 다 알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소개할 필요가 없는 집이다. 나는 이 집에 올 때마다 ‘평등’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첫째, 이 집은 상호 그대로 모든 사람이 ‘서서’ 먹어야 한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돈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 심지어 주인도 의자가 없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서서 먹어야 한다. 둘째, 품질의 ‘평등’이다. 질의 상중하도 없고, 양의 상중하도 없다. 그냥 1인분에 7천원인 갈비를 자기 양대로 시키면 된다. 반찬도 누구에게나 마늘·풋고추·고추장·양념장뿐이다.셋째, 반칙 곧 힘있는 자들의 ‘특권’이 허용되지 않는다. 손님이 밀릴 때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밖에서 차례대로 기다려야 하며, 운이 좋아야 드럼통 하나에 다른 팀과 함께 ‘서서’(합석이 아니니)먹어야 한다.

웬만큼 갈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2인분이면 족한데, 특히 이 집의 양념장 맛이 특이하다. 고깃점을 양념장에 담가 먹어도 맛있고, 양념장을 그냥 한 모금씩 마셔도 개운하다. 이 집 역시 <한겨레21> 428호에 실린 마포 최대포집의 ‘행동수칙’ 비슷하게 행동해야 한다. ‘서서갈비’에는 의자가 없으니 최대포집보다 더 빠듯하다. 그리하여 비록 소주잔 기울이며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만, 이 집에 오면 ‘평등’과 ‘특권’을 한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하멜이 청어를 봤더라면…

네덜란드 ‘국민식품’ 청어는 조선에도 지천… 둥지식당 과메기를 맛보며 하멜의 고난을 생각하다

» 사진/ 경북 구룡포에서 부쳐온 둥지식당 꽁치 과메기를 초장에 푹 찍어 물미역·파·양파·깻잎·쑥갓과 함께 김에 싸서 먹으면 비릿하면서도 쫀득쫀득한 맛이 소주병깨나 비우게 한다.
1653년 8월15일, 노란 머리칼에 붉은 수염을 가진 9척 장신 사내들이 어둠 속에서 초췌한 몰골로 제주도 산방산 앞바다에 상륙했다. 이들의 돌연한 출현은 수천년간 외부와의 접촉 없이 평화롭게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아온 제주도민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이들은 올해로 하멜 표류 350년 되는 네덜란드인 하멜과 그 일행 35명이다.

그해 1월10일 네덜란드를 떠난 포겔 스트루이스호는 6월1일 자바섬의 바다비아에 도착했다. 선원들은 그곳에서 며칠 동안 휴식한 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명령에 따라 스페로호크호로 대만의 안평으로 출발해 6월14일에 도착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네덜란드의 대만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는 레세르를 데려다주는 일이었다. 임무가 끝나자 다시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7월30일 나가사키를 향해 출항했으나 대만해협에서 엄청난 풍랑을 만나 난파되어 제주 앞바다까지 흘러온 것이다.

하멜 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어 2년 동안 억류생활을 하다가 1656년 3월 전라도로 옮겨졌다. 그 동안 14명이 죽고, 1663년 생존자 22명은 다시 여수·남원·순천으로 분산, 수용되었다. 이들은 잡역에 종사하면서 길고 긴 고난의 억류생활을 계속했다. 어느 때는 당시 조선의 피폐한 농촌으로 구걸에 나서기까지 했으니 이들의 삶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멜 일행이 억류생활을 한 곳은 전라도 여수 좌수영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다행히 작은 배 한척을 마련해 먹을거리를 구하느라 부근 섬들을 내왕하면서 조수·풍향 등을 잘 알게 되었다. 탈출 직전까지 일행 가운데 생존자는 16명이었으나 탈출비밀이 탄로날까 두려워 전원이 탈출하지 못하고 8명만이 1666년 9월4일 야음을 틈타 출항에 성공해 일본의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1668년 7월 암스테르담으로 귀환했다.

네덜란드로 돌아온 하멜은 조선에 억류된 13년간의 봉급을 동인도회사에 요구하기 위한 근거자료로 <하멜표류기>를 쓰게 되었다. 이 책의 제2부 ‘조선왕국기’에는 조선의 지리·풍토·산물·정치·군사·풍속·종교·교육·상업 등이 실려 있어 저자의 집필 목적과는 상관없이 서양사회에 한국을 최초로 알린 문헌이 되었다.


몇해 전 나는 텔레비전에서 하멜이 군역·감금·태형·유형·구걸 등의 모진 풍상을 겪으며 전라도 지방에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만나고, 또 조선의 풍물과 풍속을 관찰하는 내용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아주 흥미있게 보았다. 고향의 가족 품에 다시 돌아가겠다는 끈질긴 소망만이 모진 삶을 지탱해주었지만, 나는 하멜이 혹시 당시 경상도·전라도 해안에서 흔히 잡힌 청어를 보고는 그 고통의 나날 속에서도 잠깐이나마 기쁨을 맛보지나 않았을까 상상해보았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치즈와 함께 청어를 거의 국민식품으로 생각한다. 한번의 칼질로 대가리와 내장을 긁어낸 뒤 소금을 뿌려 저장해놓고 꼬리를 잡고 통째로 입에 넣는가 하면 샌드위치처럼 빵 사이에 끼워먹기도 한다.

최근에는 남획으로 씨가 말라 청어가 잡히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는 지천이었다. 일찍부터 청어는 소금을 뿌려 말린 관목(貫目)이라는 건제품과 연기에 그슬리는 연관목(烟貫目)이라는 훈제품이 있었다. 모두가 네덜란드식 청어저장법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

과메기는 동짓달 추운 겨울에 잡힌 꽁치를 두름으로 엮어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걸어두고 얼고 녹게 하면서 꾸들꾸들할 정도로 말려서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겨울철 특미인데, 조선시대의 청어 관목에서 유래한 것이다. 곧 ‘관목’이 ‘과메기’가 된 것이라 볼 수 있고, 옛날에는 재료도 꽁치가 아니라 청어였다.

강남 삼정호텔 뒤에 가면 아주 맛있는 과메기집 둥지식당(02-558-5336)이 있다. 이 집에는 여러 메뉴가 있지만 과메기맛이 특별하다. 주인 이진순(50)씨 남편의 고향인 경북 구룡포에서 날마다 부쳐온 꽁치 과메기를 초장에 푹 찍어 물미역·파·양파·깻잎·쑥갓과 함께 김에 싸서 먹으면 비릿하면서도 쫀득쫀득한 맛이 소주병깨나 비우게 한다(1접시 1만3천원).

신년 초에 몇몇 친구들과 둥지식당에 들렀다. 안주와 술을 시키고는 묵은 신문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한국과 네덜란드 양국이 하멜 표류 3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2003년에 대대적으로 벌인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입안에는 잠시 뒤에 맛볼 과메기 한점에 소주 한잔을 기다리며 군침이 괴었지만, 머릿속에서는 340년 전 남쪽바다 어느 어촌에서 청어 관목을 발견하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을지 모를 거지꼴을 한 서양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인이 왕, 그래도 좋아!

다면평가로는 빵점인 김치찌개집 ‘장호왕곱창’이 단면평가로 백점인 사연

» 사진/ 주차장 없음, 예약 안 됨, 환경 열악, 메뉴 선택권 없음…. 그러나 시원하면서도 새콤매콤한 장호왕곱창의 김치찌개 맛과 주인의 넉넉한 인심은 모든 것을 감수하게 한다.
한 인물을 놓고 동료·부하·상관 등이 평가한 것을 종합해 인사에 반영하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식 다면평가제가 요즈음 화제가 되고 있다. 몇해 전 나도 어느 기관의 간부로 일하면서 부하직원들의 업무수행 고가를 매겨본 적이 있는데, 평가항목의 애매모호함과 각자가 담당한 업무내용의 이질성으로 인해 점수화해 평가를 내리기가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상관 혼자 주관적으로 판단해 부하의 운명을 결정하는 종래의 평가제보다 다면평가제는 더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다. 그러나 나는 다면평가보다는 단면평가를 더 좋아한다. 그렇다면 나는 다면평가제를 반대하는 개혁 저항세력인가 노 당선자의 생각과 말, 행동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수구언론들이라면 쾌재를 부를 일이지만 좋아하지 마시라. 내가 평가하고자 하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음식점이다.

음식점 평가항목으로는 먼저 맛이 첫째일 것이고, 다음으로 청결도·교통·주차시설·인테리어·인심·친절도·값·양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모두 고려해 평가하면 이것이 음식점 다면평가제일 것인데, 내가 <한겨레21>의 음식이야기에서 소개하는 집들은 맛과 인심 이외에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으니, 나는 음식점 단면평가제를 고수하는 것이다.

어쩌다 서소문 네거리 부근에 있는 김치찌개집 ‘장호왕곱창’에를 들르다 보면 어떤 때는 참 ‘그렇다’는 느낌이 든다. 여기서 그렇다는 것은 이 집의 환경 모두 그러하지만, 어렵게 짬을 내 찾아가 기다리다 가까스로 김치찌개를 시켜 허겁지겁 먹고 나오는 전 과정이 좀 ‘그렇다’는 것이니, 다음 이야기를 잘 읽어보시라.

‘장호왕곱창’집은 문이 두개 있다. 하나는 줄 서서 기다리다가 입장하는 문이고, 다른 하나는 밥을 먹고 난 뒤 퇴장하는 문이다. 실내가 너무나 비좁아 영하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문 밖에 서서 종업원의 ‘입장 허락’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서소문 부근의 회사 사람들은 꾀를 내어 11시30분쯤 한 사람이 먼저 와서 찌개를 시켜놓고 자리를 확보한 뒤 끓을 때쯤 휴대전화로 일행들을 불러들인다.


줄만 잘 선다고 모두 김치찌개를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시40분 이후에는 줄을 섰더라도 손님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도 이 규칙에 걸려 입장을 거절당했는데, 패가망신을 각오하고 주인에게 청탁을 넣어보았지만 괜히 속만 보이고 말았다. 전에는 이렇게 아주 엄격했는데, 요즘은 좀 완화돼 1시40분까지 줄을 선 사람은 모두 입장시킨다.

선택의 다양성 그건 딴 데 가서 알아보시라. 그냥 주는 대로 1인분에 5천원짜리 김치찌개 한 가지고, 손님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산’이냐 ‘참이슬’이냐의 ‘소주 선택권’과 라면 사리를 넣어먹을 수 있는 ‘자유’뿐이다. 손님들이 빨리 먹고 가기를 재촉하지는 않지만, 밥이 몇 숟갈 남지 않고 찌개국물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면 다음 손님을 입장시켜 뒤에서 기다리게 하니 무언의 압력에 마지막 몇 숟갈은 그야말로 허겁지겁이다.

‘공급자가 왕’인 장호왕곱창집. 주차장 없음, 예약 안 됨, 환경 열악, 메뉴 선택권 없음 등, 다면평가제라면 이 집이 어디 좋은 음식점이라고 감히 명함을 내밀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개운하고 시원하면서도 새콤매콤한 이 집의 김치찌개 맛과 주인 김재하(60)씨의 넉넉한 인심은 나로 하여금 하늘이 두쪽 나더라도 음식점 단면평가제를 고집하게 한다.

 

양갱 속엔 양이 없다

과자 이름이 왜 ‘양고기 국’이 됐을까…‘램랜드’에서 맛보는 양고기의 맛

» 사진/ 양고기는 쇠고기와 닭고기의 중간 정도의 맛이 나는데 세간의 소문처럼 특별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끝난 지 몇해 되지 않은 1950년대 후반은 그야말로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1940년대에 태어나 60년대에 대학을 다닌 우리 50대들, 이른바 ‘564세대’는 그즈음에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도시와 농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서민의 자식들은 일상적인 물자 부족과 식량난 속에서 헐벗고 굶주리기는 대개 엇비슷했다.

춘삼월 버들가지에 물이 오르고, 새 학년 새 선생님을 맞이하고는 5월 보리꽃이 필 무렵 봄소풍을 간다. 초등학교 봄·가을 소풍 12번 가운데 근 10번을 간 원천저수지건만, 소풍가기 전날 밤은 설레는 가슴으로 언제나 잠을 못 이루었다. 소풍가는 날 아침, 어머니는 작은 광 모퉁이 항아리에서 흰쌀을 한 사발 퍼내어 고들고들 밥을 해서는 깨소금·소금 뿌려 참기름에 비빈 다음 시금치 길게 놓고 김밥을 싼다. 그러고는 삶은 달걀 두개와 지난 장날 사오셨는지 깊이 감춰둔 밥풀과자 몇개, 늘어붙어 종이까지 함께 씹어야 하는 캐러멜 1갑, ‘요오깡’ 1개를 김밥과 함께 보자기에 싸주신다.

어린 나이에 원천저수지까지 가는 길 4km는 길고도 멀다. 친구들 몰래 과자 한개, 캐러멜 한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이번에는 오래도록 녹여 먹어야지’ 하고 결심하지만 곧 우둑우둑 씹어버린다. 마지막 ‘요오깡’만이 남아 있지만 돌아올 때 생각 못하고 포장을 뜯어 살며시 입에 베어 문다. 아!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아드는 달콤한 ‘요오깡’의 맛! ‘요오깡’은 한자어 양갱(羊羹)의 일본어 발음이다. 곧 일본에서 팥앙금으로 만든 과자가 양갱인데, 양갱은 ‘양고기(羊)를 넣어 끓인 국(羹)’이라는 뜻이니 참으로 과자 이름이 수상쩍다.

고대 중국 귀족의 집에서는 선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서 조상의 영혼을 위로하고 자손의 번영을 빌기 위해 자주 성대한 제사를 올렸는데, 그때에는 동물을 희생으로 바쳤다. 그 동물은 제사의 중요도에 따라 달랐는데 가장 중요한 제사에는 소를 썼다. 그러나 소는 크고 농경의 역축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일상적 제사에서는 양을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신이나 조상에게 바치는 희생으로서의 양은 잘생기고 큰 것이 바람직했다. 신이나 조상들이 큰 것을 더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제사 뒤 음복물도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될 수 있는 한 큰 양을 골라 희생으로 바쳤다. 여기에서 양(羊)과 크다(大)는 글자가 합쳐져 훌륭한 것, 아름다운 것이라는 뜻의 미(美)자가 나왔다. 양은 제사드리는 희생물이면서 맛도 좋고 털과 가죽도 귀중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한자에서 羊을 부수로 하는 글자들은 대개 제사와 관련된 용어나 맛있는 음식, 상서로움, 경건함을 상징하는 뜻이 있다.


양갱은 고대 중국에서는 대단한 음식이었다. 국을 뜻하는 갱(羹)이라는 글자를 파자해보더라도 “양(羊)을 불(火)에 올려놓으니 아주 훌륭하다(美)”니 최초의 국 자체가 이미 양고기로 만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전국책> 중산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전국시대에 지금의 허베이성에 있는 중산국(中山國) 왕이 신하를 모아놓고 연회를 베풀었다. 그때 사마자기(司馬子期)라는 신하도 연회에 참가했는데, 연회석상에 나온 양갱 분량이 적어 그에게는 돌아가지 않았다. 이 일로 화가 난 사마자기는 그 길로 남방의 대국인 초나라로 달려가 초왕에게 중산국을 정벌하도록 호소하였다. 이렇게 해서 중산국은 초나라에게 멸망당했다.

이처럼 양갱은 고대 중국에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리고 중국 내 회족들은 양의 피를 이용해 수프를 만들어 즐기면서 이것을 또한 양갱이라고 했다. 16세기에 일본인들이 팥앙금으로 달콤한 과자를 만들었는데, 색깔이 수프와 비슷하고 양고기 국처럼 그 과자의 맛 또한 최고라고 해 과자 이름을 양갱, 곧 요오깡이라고 했다. 그러나 붕어빵 속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양갱 속에는 양이 들어 있지 않다.

올해는 양의 해. 우리 입맛에는 좀 낯설지만 1991년 양의 해에 문을 열어 2003년 양의 해까지 12년째 양고기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음식점이 있다. 마포에서 서강가는 길로 버스 두 정류장째 있는 ‘램랜드’(02-704-0223)가 그 집인데, 수입육 무역회사에 다니던 양띠 임현순(47)씨가 어느 날 우연히 회사 회식자리에서 양고기를 맛보고는 반해서 차린 전문점이다. 양고기는 쇠고기와 닭고기의 중간 정도의 맛을 보이는데 세간의 소문처럼 특별한 냄새가 나지는 않는다. 제대로 양고기 맛을 보려면 살점이 넉넉한 삼각갈비(1인분 1만6천원)를 시키면 좋다. 양고기찜(3만2천원), 전골(3만원)도 있고, 중국 고대의 양갱과 같은지 모르지만 양고기곰탕(5천원)도 한끼 식사로 포만감을 준다.

 

엽기 기생생물, 그래도 맛있다…

다른 물고기의 몸 빨아먹는 꼼장어의 생리… 산 꼼장어로 만든 소금구이를 먹어봤는가

» 사진/ ‘산 곰장어’집은 살아 있는 곰장어를 충무에서 공수해와 계속 물을 갈아대며 수족관에서 키워 손님들에게 내놓는다. (김학민)
생명체들은 서로 먹고 먹히는 복잡한 먹이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20세기 초 미국의 생태학자 V.E. 셸퍼드가 이러한 관계를 그림으로 나타냈는데, 이것을 먹이사슬이라고 한다. 그런데 먹이사슬은 단순한 한 줄의 연결관계가 아니라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또 가지들끼리 연결돼서 복잡한 그물모양의 관계를 이루고 있으므로 ‘먹이그물’이라고도 한다.

바다 물고기들의 먹이사슬은 비교적 간단하다. 바닷물 속에 녹아 있는 유기물질을 영양소로 흡수하는 식물성·동물성 플랑크톤으로부터 시작해 그 플랑크톤을 먹이로 삼는 작은 물고기들, 그리고 작은 물고기를 집어삼킴으로써 생명을 이어가는 큰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힘이 세거나 덩치가 큰 물고기가 약하고 작은 물고기를 먹이로 삼는 ‘정글의 법칙’이 먹이사슬의 줄기를 이룬다.

그런데 먹이사슬의 자연법칙에 변칙이 일어난다. 공생과 기생 형태로 나타나는 생물체들의 생존방식이다. 공생은 전혀 다른 종류의 생물이 한곳에 살면서 서로 이익을 주고받으며 공동의 삶을 누리는 행태인데, 쌍방이 다 이익을 얻고 있는 상리(相利)공생이 있고, 한쪽만이 이익을 얻는 편리(片利)공생이 있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 소라게의 껍데기에 착생하고 있는 말미잘의 경우가 그 예들이다.

기생은 한 종류는 공존의 의해 이익을 보나 다른 편에서는 이에 의해 해를 입는 생존형태를 말한다. 이때 공존에 의해 해를 보는 쪽을 숙주라 하고, 이익을 얻는 쪽을 기생생물이라 한다. 그리고 기생물이 숙주의 체내에 있을 때는 내부 기생생물이라 하고, 숙주의 체외에 있을 때는 외부 기생생물이라고 한다. 숙주의 체내에 있건 체외에 있건 기생생물은 자신들이 필요한 양분을 섭취 합성할 능력이 없어 이를 직접 숙주로부터 얻는다.


또 이들은 기생생활의 결과 감각, 운동 및 기타 기관들이 없어졌거나 퇴화되었으나 생명유지, 생식의 잠재력은 매우 발달했다. 곧 숙주에 기생하기에 편리한 빨판, 갈고리 등과 같은 기관들이 튼튼하게 발달된 것이다. 이들 기생생물체는 숙주들이 먹은 먹이를 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적응되었기 때문에 이들에 의하여 숙주가 죽는 경우는 적다.

이러한 생물학적 정의를 적용해 보면 곰장어(먹장어)는 기생생물이라기보다는 ‘엽기생물’에 가깝다. 곰장어는 지구상의 물고기 가운데 가장 진화가 덜 된 어종이다. 눈은 피부 속에 숨어 있어 이른바 안점으로만 희미하게 존재하며, 지느러미는 단지 피부가 두껍게 된 형태를 띤다. 이빨 비슷한 빗 모양의 치설이 나 있지만 턱이 없어 깨물지 못하고, 육질로 잘 발달된 혀가 있다. 곰장어는 이러한 혀의 흡착력으로 다른 물고기의 몸에 붙어 그 살을 빨아먹거나, 몸 속에 파고들어가 내장부터 빨아먹어 결국 살갗과 뼈만을 남겨놓으니 엽기 물고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하등생물’을 ‘고등동물’인 인간이 좋아한다. 먹이사슬의 질서에서 변칙적으로 튀어나와 물고기들의 몸체를 빨아먹는 곰장어도 세치 혀의 쾌락을 앞세운 인간의 먹이그물망엔 꼼짝없이 잡혀 먹이사슬의 종말을 보는 것이다.

곰장어 가죽으로는 고급 지갑·벨트 등을 만들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많은 양의 냉동 곰장어들을 캐나다·칠레 등지에서 수입한다. 제품용 곰장어들은 가죽만 쓰고 나머지는 폐기되는데, 얼마 전에 매스컴에 보도된 바와 같이 이 폐기물이 시중 포장마차로 흘러나와 몇 사람이 구속되는 등 난리를 폈다. 제품용 수입품은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나라 남해안에서 잡혀 냉동되어 서울로 반입되는 것들도 짙은 양념으로 냄새를 없애야 하기 때문에 양념구이밖에 쓰지 못한다. 그러므로 얕은 맛을 내는 소금구이를 하려면 산 곰장어를 써야 하는데, 산 곰장어를 쓰는 집은 곰장어구이의 원조격인 부산에도 별로 없다.

옛 강남구청 건너편에 가면 산 곰장어만을 구워 파는 전문점이 있다. 20여년간 가전제품상을 하다가 음식점을 열고 싶어 직접 요리를 배우고 나중에는 요리강의까지 하게 된 김정선(54)씨가 연 ‘산 곰장어’(02-549-9279)집이다. 이 집은 산 곰장어를 충무에서 공수해와 계속 물을 갈아대며 수족관에서 키워 손님들에게 내놓는다. 소금구이·양념구이 모두 가능한데 앞에서 말한 대로 얕은 맛의 소금구이가 이 집이 내세우는 메뉴다(소 2만원, 중 2만9천원, 대 3만8천원).

 

권력보다 굴비가 좋았으니…

이자겸의 비참한 말로를 달래준 영광굴비… ‘영광굴비백반집’에 서울 미식가들이 몰리는 이유

» 사진/ ‘영광굴비백반집’(02-3474-9178)은 주인 부부가 모두 법성포 출신으로, 법성포에 사는 형과 지인들에게서 질은 좋지만 값이 눅은 굴비들을 공급받고 있다. (김학민)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보좌관이 써준 원고의 罹災民(이재민)을 ‘나재’'으로 읽은 의원도 의원에 당선되기까지는 ‘논두렁 정기’라도 받았을 것이라고 이야기되는 판에, 그 옛날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하고 나라를 세워 왕위에 오른 인간들에 대한 신화만들기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권력자에 대한 ‘신화만들기’는 오늘날은 봉건시대처럼 허무맹랑한 내용을 담지는 않지만 태어나 자라나면서부터 뭔가 특이한 점이 있었고, 탁월한 지도력과 영명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역할도 봉건시대처럼 권력자의 하수인 그룹이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가 맡는다. 신문은 1980년 전두환의 등장 즈음 <조선일보>의 행태에서 보듯 칭송과 미화를 넘어 아예 신문사 소유주와 기자, 군사독재자 서로가 교언으로 육화된 ‘어천가’ 활자기사를 남김으로써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방송매체는 좀 달랐다. ‘땡전 뉴스’라고 해 저녁 9시 시보가 ‘땡’하자마자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해 10여분간 독재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일방적으로 미화하는 뉴스 보도가 날마다 있었지만, 일방성과 치졸함 때문에 국민의 뇌리에 오래 남아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TV매체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작위적으로 보이는 역사 드라마들이 권력교체기에 등장한다. 전두환이 전면에 등장할 때의 <개국>, 노태우가 전두환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을 때의 <조선왕조 오백년>, 김영삼 문민정부 시대의 <용의 눈물>, 김대중 정권 출범시의 <태조 왕건> 등이 그런 드라마들이다. 이 드라마들은 대개 어지러운 세상에서 고뇌에 찬 애국애족적 결단을 한 뒤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국민을 잘살게 했다는 역사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어, 새로 등장한 권력자의 이미지를 조작하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 2월25일, 노무현 당선자가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한다. 옛일이 생각나 혹시 ‘어천가’적 대하역사물이라도 없나 하고 TV프로그램난을 뒤져보니 고려 중기 무신정권을 소재로 한 KBS의 <무인시대>만이 눈에 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武)자 이외에는 노무현 정권과 <무인시대>의 ‘어천가’적 연계성이 떠오르지 않으니, 이제 방송도 드라마 부분에서만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 같다.

1170년 무신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의 사람으로 이자겸이라는 자가 있다. 고려는 후삼국통일 이후 각 지방 호족의 딸들을 왕비·후궁으로 맞아들임으로써 정권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는데, 점차 인주지방의 호족 경원이씨 집안이 이를 독점함으로써 외척이 왕권을 능가할 정도로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이자겸도 경원이씨로, 그의 누이 장경공주는 고려 12대왕 순종의 비며, 둘째딸은 16대왕 예종의 비다. 예종이 재위 17년 만에 죽자 그의 아들이자 이자겸의 외손자인 인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는데, 이로써 이자겸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이자겸은 다른 성씨에서 왕비가 나오는 것을 막으려 셋째딸, 넷째딸을 연이어 인종의 비로 납비하니 이 집의 촌수 계산하기가 어지럽다.

그러나 욕심이 과하면 죄를 낳고, 죄가 과하면 죽음을 낳느니, 이자겸은 하늘을 찌를 듯한 권세도 모자라 주군이자, 외손자이자, 셋째사위이자 넷째사위인 인종을 독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다가 발각돼 전라도 영광땅 법성포로 유배돼 비참하게 생을 마치게 된다. 이자겸은 개경에서 “남의 토전을 강탈하고, 복예들을 풀어놓아 마차와 말을 약탈해 자기의 물건을 날랐으며”(<고려사> 이자겸전), 그의 집에는 “썩어가는 고기가 항상 수만근이나 되었을”(고려사) 정도로 부귀와 영화를 누렸지만, 유배시절 법성포에서 굴비를 처음 맛보고는 개경생활을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그가 법성포의 소금에 절인 조기를 인종에게 진상하면서, 왕에 대한 충정과 자신의 옳은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에서 이름을 ‘굴비’(屈非)라고 했다는데 그리 근거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곱창,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

‘경제’가 보잘것없던 <시와 경제> 동인들의 안주… ‘장터곱창’에서 그 맛을 떠올리다

오늘도 영등포시장엔 휘황한 불빛과
바닥에 널려진 질척함 그리고
악다구니만 요란해
핏줄 솟구친 사내들이 씨근덕거렸고
국수를 마는 아낙네들 더 거친 숨결
네온사인 아우성 너무 요란한 속에서도
숨가쁘게
아무도 그 날을 잊지 못했다.
(김정환의 시 <영등포>에서)

» 사진/ ‘장터곱창’은 여주인 전정숙씨가 가락동과 마장동에서 신선한 한우 곱창만을 공급받아 손님들에게 내놓기 때문에 달콤하면서 졸깃한 곱창 맛에 명성이 자자하다.
1980년 5월의 그날을 잊지 못한 젊은 시인 채광석·정규화·홍일선·황지우·김정환·김사인들은 82년 초 <시와 경제> 동인을 결성했다.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피로 제압하고 등장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전 국민을 압제와 공포로 몰아넣던 그 즈음, 이들이 음풍농월의 시 놀음을 집어치우고, 민중의 구체적 삶에 다가가자는 취지에서 동인 이름에 ‘경제’를 넣은 것은 당연히 문단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들의 문학적 지향과는 달리 동인 각자의 ‘경제’는 참으로 보잘것없었다. 대부분 감옥에서 갓 나와 변변한 직업을 못 가진 백수인 것은 물론, 사는 곳도 대개는 중심부에서 밀려 경기 광명 철산리, 서울 구로 가리봉동, 경기 부천 역곡 부근의 셋집을 전전하는 주변부 인생들이었다. 이 가운데 영등포 시장에서 곱창을 팔던 홍일선 시인의 ‘경제’가 그런 대로 좀 나았으니, 곧 그는 <시와 경제>의 ‘경제’부문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영등포시장 중앙통을 따라 200여m 내려가면 홍 시인의 곱창 전문 백두산 정육점이 나오고, 정육점 뒤에는 나지막한 두칸짜리 그의 살림집이 있었다. 오후 7시, 시장의 악다구니도 조용해지고 시장 사람들이 손을 털며 뒷정리를 할 즈음, ‘경제’가 보잘것없는 <시와 경제> 동인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잠시 뒤 홍 시인의 살림집에서는 푸짐한 곱창구이와 넉넉한 소주 인심으로 그해 오월 이후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잊게 했다.

홍 시인의 집에서 벌어지는 곱창 모임에는 <시와 경제> 동인들 외에도 시인 이시영·김용택·이산하, 소설가 현기영·송영 선생도 가끔 참석했고, <시와 경제> 3집에 시 ‘시다의 꿈’을 발표한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도 채광석의 손에 끌려 몇번 왔다. 나도 민족문학·민중문화에의 열정을 토로하는 이 자리에 자주 참석하는 멤버였지만, 식탐·술탐이 많은 탓에 염불보다는 잿밥이라고, 어떻게 생긴 곱창이 맛있고, 또 어떻게 곱창을 구워야 맛있는지 궁리하며 연신 소주잔을 기울이는 데만 바빴다. 그 탓에 결국 박노해처럼 시인은 못 되었지만, 요즈음 <한겨레21> 덕에 이렇게 음식칼럼이라도 긁적이고 있으니 절반은 성공이라고나 할까.

얼마 전 세표 하남거사 문학진 선생을 만나러 경기 하남에 들렀다가 문공의 손에 이끌려 어느 곱창집에 갔는데, 곱창 맛이 20여년 전 홍 시인 집에서 구워먹은 맛 그대로여서 아주 화기애애하게 소주를 여러 병 비웠다. 사실 곱창구이는 특별한 조리법이 필요 없다. 무조건 곱창이 좋아야 한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곱이 꽉 차 있고 밖으로 흘러내리지 않는 신선한 것이어야 곱창 맛이 좋다. 수입 곱창은 오랫동안 언 것을 녹여 구우므로 질기다.

문공과 함께 찾은 하남시청 앞 ‘장터곱창’(031-793-0582)은 여주인 전정숙(50)씨가 서울 가락동·마장동에서 신선한 한우 곱창만을 공급받아 손님들에게 내놓기 때문에 달콤하면서 졸깃한 곱창 맛에 하남 부근에서는 명성이 자자하다. 8년 전 식구와 자양동 어느 곱창 전문집에 갔다가 그 맛에 반해 직접 식당을 차려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생곱창구이 1인분 1만원, 곱창전골 중 1만5천원, 대 2만원).

 

개울가 친구들은 어디로 갔나

펄떡이는 민물고기를 잡으며 하루를 보내던 어린시절… ‘두지리 매운탕집’에서 추억을 찾다

» 사진/ 두지리 매운탕집 주인 이윤상씨는 이곳 토박이로 20여년 전부터 물고기를 직접 잡아 ‘자기식대로’ 매운탕을 끓여왔다.
잉어·붕어·버들붕어·살치·송사리·왜몰개·불거지·넙치·모래무지·미꾸라지·빠가사리·쏘가리·메기·가물치·뱀장어·보리새우·논새우·우렁·다슬기…. 어린 시절 신갈천에서 정답게 만나던 나의 친구들이다. 이제 우리는 가물가물해지는 옛 추억과 함께 이 친구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아름다운 신갈 저수지 벌판. 그곳에서 숨쉬며 헤엄치던 물고기들, 들꽃과 풀들, 벌레들. 그리고 저수지 저 멀리 땅과 맞닿아 있는 파아란 하늘을 모두 잃었다. 지금 우리가 신갈천에서 볼 수 있는 물고기는 없다. 물고기들이 모두 도망갔다. 아니 우리가 쫓아낸 것이다.

긴긴 해 마땅한 놀이가 없을 때 우리들은 신갈천으로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헤엄도 치고, 개울로 흘러드는 도랑 물길을 막아 보싸움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싫증이 날 때쯤에는 물고기를 잡는다. 보통 고기를 잡는 데는 반두라는 그물이 주로 쓰인다. 대나무나 막대기로 양 끝을 고정시키고 그물 아래 납덩이 추들을 가지런히 달아놓는다. 그물을 훑을 때 추가 땅에 닿아 고기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물이 둥둥 뜨기 일쑤여서 개울 바닥에 엎드려 있는 붕어, 특히 메기나 가물치는 잡기가 수월치 않다. 간혹 운이 좋아 가물치가 잡히는데, 이놈은 성미가 유별나 그물에 들어올 때 벌써 티가 난다. 건져올리면 어찌나 펄떡거리는지 개울가로 던져놓고 몇대 쥐어박아야 잠잠해진다.

메기를 잡을 때는 주로 개울을 막아 물을 완전히 퍼낸다. 바닥이 드러나면 놈들은 진흙뻘에 숨으려 애쓰는데, 이때 손으로 뻘을 휘저으며 잡는다.미끈미끈해서 두 손으로 잡아야 한다. 어지간히 커서 육고기가 귀하던 시절, 녀석은 훌륭한 단백질원이었다. 메기뿐인가. 논배미마다 뱀장어들이 나와 놀다가 사람들의 기척이 있으면 대가리를 논바닥으로 박고 재빠르게 모습을 감춘다. 붕어는 개울이나 논에 흔히 사는 놈들인데, 몸매가 유달리 아름답다. 손바닥만한 붕어가 걸려들 때 그 맛이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고기를 잡을 때 좋아하면서도 겁나는 놈이 빠가사리나 쏘가리다. 이놈들은 지느러미 가시가 제법 날카로워 한번 쏘이면 얼얼한 것이 한참 간다. 놈을 만질 때는 꽤나 조심스럽다. 간혹 더듬질을 하다가 녀석에 쏘일 수 있는데, 그것이야 그날의 운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반두질을 계속 하다 보면 피라미·송사리·불거지·모래무지·미꾸라지뿐 아니라 우렁까지 걸려든다. 고기가 두어 대접 잡히면 나무 등걸을 모아 불을 지펴 천렵국을 끓인다. 엄마 몰래 집에서 퍼온 고추장·된장, 남의 밭에서 몰래 따온 애호박·풋고추·대파가 양념의 모두지만 새파래진 입술로 후후 불어가며 떠먹는 ‘자연의 맛’은 정말로 꿀맛이었다. 천렵은 고대 수렵사회와 어렵사회의 습속이 오늘까지 남아 풍습화된 것이다. 환경오염으로 삼천리 강산이 몸살을 앓는 요즈음, 경치 좋고 물 맑은 냇가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맛을 즐기는 ‘채집경제적 천렵국’은 가당치도 않고, 양식 물고기와 인공 조미료 잔뜩 넣어 끓이는 ‘자본주의적 매운탕’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연초 친구들과 함께 감악산에 등산을 갔다가 임진강가 ‘두지리 매운탕집’(031-959-4508)에 들렀는데, 이 집 매운탕을 맛보는 순간 40여년 전 신갈천 자갈밭에서 끓여먹던 자연의 맛이 느껴졌다. 짜지도 맵지도 비리지도 않으면서 시원하고 달콤한 국물맛에, 입 짧은 서울내기인 탓에 민물매운탕은 생전 한번도 먹지 않았다는 친구 박학선씨 안사람 정희재씨도 거뜬히 밥 한 공기를 비웠다. 주인 이윤상(60)씨는 이곳 토박이로 20여년 전부터 물고기를 직접 잡아 ‘자기식대로’ 매운탕을 끓여왔는데, 그것이 ‘자연의 맛’에 가까운 것 같다. 메기매운탕 1인분에 1만원, 빠가사리 매운탕 1만5천원, 참게 1마리에 5천원이다. 따로따로 시키는 것보다는 순열조합을 잘하면 맛도 좋고 돈도 절약된다. 4명에 3인분이 적당하다.

 

‘김학민 식별법’ 의 실패

경험과 과학으로 만들어낸 맛집 고르는 법… ‘산골나그네’ 갈치맛에 산산이 무너지다

» 사진/ ‘산골나그네’의 상차림. 제주에서 매일매일 직송해오는 두툼한 갈치조림에 더덕, 고춧잎, 무말랭이, 콩잎 장아찌 등 10여 가지 반찬을 곁들인다.
어찌어찌하여 홀로 낯선 지방에 가게 되었을 때, 그리고 마침 끼니때가 되어 식당을 찾아봐야 할 경우 누구나 잠깐은 고민에 빠진다. 기왕이면 좋은 식당을 찾아 맛있는 음식이나 그 지역 특산 음식을 먹고는 싶은데, 영 자신이 없다. 좋은 식당 고르는 비결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나의 경우 아래와 같은 요령으로 식당을 찾으니, 독자들께서는 참고하기 바란다.

우선 지역 특산 음식을 맛보고자 하나 전혀 정보가 없을 때는 택시기사에게 물어보면 대개 특산 음식, 좋은 식당을 안내해준다. 그러나 택시기사에게 묻기도 귀찮고, 그냥 한끼 짭짤하게 입맛에 맞는 식사를 하고자 할 때는 ‘소거법’으로 스스로 식당을 찾아나선다.

첫째,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 부근의 식당은 피한다. 오랜 경험으로 볼 때, 터미널이나 역 부근 식당들은 손님들을 뜨내기로만 보는지, 밥이나 반찬 모두 부실하다. 그러나 읍 규모의 작은 동네에는 대개 기차역 부근에 식당이 몰려 있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둘째, 메뉴가 지나치게 많은 식당은 피한다. 요즘과 같이 ‘전문성’이 각광받는 시대에 메뉴가 너절하게 많은 것은 아무것도 잘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셋째, 메뉴 사이의 ‘인척관계’가 부적절한 식당은 피한다. 이것도 ‘전문성’의 문제다. 돈가스와 회덮밥을 함께 내놓는 식당, 설렁탕과 자장면이 같이 메뉴에 올라 있는 식당이라면 입으로 맛보지 않아도 뻔하다.


넷째, 식당 이름을 살핀다. 옥호에 전주·군산·광주·목포·순천 등 호남지역 도시 이름이 들어 있는 식당을 찾으면 의외로 성공적일 수 있다. 운전사들이 많이 가는 식당도 큰 실패가 없다. 또 먹고자 하는 음식과 식당 이름이 어울리는 곳이 좋다. 보신탕집 이름이 ‘나는 오늘도 춤을 추고 싶다’라면, 설렁탕집 이름이 ‘달마가 인사동에 온 까닭은’이라면, 일식집 이름이 ‘평화 만들기’라면 그 집에 들어갈 마음이 생기겠는가 곧 식당 이름이 전문으로 취급하는 음식과 미학적(味學的)으로 일치돼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좋은 식당 고르는 몇 가지 기준을 머리 속에 넣고 마지막으로 ‘술꾼 반세기’의 동물적 감각을 발휘해보면 아무리 낯선 곳에서라도 제법 먹을 만한 식당이 걸려든다.

나는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대개 사무실이 이웃해 있는 친구 유재영 시인과 점심을 함께 하는데, 유 시인 또한 음식맛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 그러나 유 시인은 나처럼 ‘과학적 추리’로 맛있는 집을 찾기보다는 문단의 폭넓은 교유관계로 이미 ‘개발된’ 맛있는 집을 잘 알고 있어 나의 음식 이야기 소재 찾기에 도움을 준다.

어느 날 유 시인과 함께 무작정 점심 먹을 집을 찾아 걸어가다가 식당 이름이 ‘산골나그네’(02-717-8833, 715-9644)인 갈치조림 전문집을 발견했다. 갈치조림 전문인데 식당 이름은 ‘산골나그네’라 나의 ‘과학적 추리’로는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유 시인이 들어가자고 우겨대고, 다른 식당 찾기도 피곤하여 그냥 들어갔다. 나는 그 집에 들어가 갈치조림을 시키고는 나의 추리에 의한 좋은 식당 찾기의 ‘과학성’을 유 시인에게 침을 튀겨가며 설명하였는데, 아뿔싸 곧 갈치조림과 반찬들이 나온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쯤되면 막 굽자는 거냐?

‘막’자가 특별했던 하루… 드럼통 막창구이집에서 얼근하게 취해 막차 타고 돌아오다

» 사진/ 드럼통 막창구이집은 빈터에 판자로 얼기설기 지은 막건물에 있다. 아무리 먹어도 전혀 물리지 않는 쫄깃쫄깃한 막창구이맛이 특별하다.
지난 3월9일, 모처럼 일요일이라 점심을 먹고 식곤증에 소파에 누워 막 낮잠을 자려는 참에 아내가 마구 흔들어 깨웠다. 2시부터 검찰의 막내둥이격인 평검사들과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인사 문제를 놓고 TV 생중계하에 공개토론을 벌인다는 것이었다. 어제 토요일 오후 등산 끝에 친구들과 마신 막걸리가 과했는지, 나는 오전까지 잠에 빠져들어 그 희대의 진풍경이 벌어지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전격적인 제안으로 이루어진 이 토론회는, 항상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되면 정면 승부를 걸어온 노무현식 담판 정치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었지만, 우리나라의 최고 엘리트 공무원이자 항시 국가의 안보와 사회의 안녕질서를 담당해왔다고 자부하는 검사들의 인문학적 소양과 세계관의 단면을 드러내기도 한 장면이었다. 토론의 막이 오르자 노 대통령과 강금실 법무부 장관은 검찰개혁을 위해, 그리고 검찰 인사제도 마련의 시간적 제약 때문에 서열 파괴의 이번 인사가 불가피함을 역설했고, 검사들은 막으로 가려진 밀실인사를 비판하면서 검찰총장에게로의 인사권 이양, 또는 현재의 검찰인사위원회에서 인사문제를 처리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검사들은 세계 유례가 없는 검찰총장에의 인사권 이양 외에, 검찰인사위원회에 대한 구체적 대안 제시는 없었고, 막무가내로 자기들의 조직 이기주의적 주장만을 펴고 있으니, 숨을 죽이고 구경하던 국민은 남녀노소 막론하고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자기들의 부서 최고책임자인 법무장관은 막대기로 여겨 말을 막고, 오직 대통령만을 상대로 자기들이 얼마나 일을 많이 하고 있으며, 얼마나 나라를 위해 고생하고 있는가 열변을 토하였지만, 이에 고개를 끄덕거릴 국민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자기들은 가족도 잊고 밤 12시까지 일을 한다고 하지만, 밤 12시까지 일할 수 있는 직장조차 구하지 못하여 막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실직자, 목숨을 걸고 막장에서 석탄을 캐는 탄광 노동자들, 남대문시장 허드레 막벌이꾼 등의 막살 수밖에 없는 삶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토론이 막바지에 이르자 검사들은 주제의 본질을 제쳐두고 한낱 해프닝에 불과한 이른바 대통령 형의 인사개입 문제를 들고 나와 노무현 대통령이 “이쯤 되면 막 하자는 이야기냐 이제부터는 일문일답으로 가자”고 하기에 이르는 민망스러운 장면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정치권의 SK 수사 압력, 부산 동부지청 전화 문제 등은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막가파식 정치공세를 떠올리게 하여 참으로 보기가 막막했다. 그러나 토론의 막잡이식 말꼬리 잡기가 막판까지 이어지지는 않고 서로 간에 검찰개혁의 필요성과 공정한 인사를 위한 제도 마련에 암묵적으로 합의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니, 검사들이 국민에게 ‘검사스러움’을 넘어 막말을 일삼는 막돼먹은 집단으로 비친다면 우리 사회를 위해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이 있겠는가.

토론의 마지막까지 다 보고 나서 저녁에는 막국수나 삶아 새콤한 김장김치에 비벼달라고 할까 생각하다가, 좀 한가한 김에 아내를 꼬셔 며칠 전 독자 김진숙씨가 제보해온 막창구이집을 취재하러 나섰다. 지하철 8호선 문정역에서 내려 좀 헤매다가 바로 그 ‘드럼통 막창구이집’(02-409-2599)을 찾았는데, 빈터에 판자로 얼기설기 지은 막건물이었다. 주인 김언순(50)씨는 3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 사업에 실패하고 나서 이 집을 차렸는데, 타고난 눈썰미와 맛감각으로 아무리 먹어도 전혀 물리지 않는 쫄깃쫄깃한 막창구이를 개발해냈다. 내키지 않는 외출, 찾기까지의 헤맴, 어수선한 식당 모습에 구시렁거리던 아내도 막상 막창구이 맛에는 대만족하여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밤들이 막창구이와 막가는 세상을 안주로 얼근하도록 마시고 마을버스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제주에서 매일매일 직송해오는 두툼한 갈치조림의 매콤한 맛에 더덕, 고춧잎, 무말랭이, 콩잎 장아찌 등 10여 가지 반찬이 더하니, 밥공기가 순식간에 바닥을 보인다. 그날 나는 갈치조림과 짭짤한 밑반찬으로 고슬고슬한 흰 쌀밥을 허겁지겁 입 속에 떠넣으면서도, 나의 좋은 식당 찾는 법의 허점을 다그치는 유 시인에게 “예외 없는 원칙은 없다”로 응수하며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손님 팀별로 작은 솥에 밥을 따로 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리므로 예약을 하고 가는 것이 좋다.

 

부시는 순대를 좋아할까

피에 굶주렸다면 이라크를 괴롭히지 말고 풍성식당의 세계 최고 순대를 맛보시라

» 사진/ 여주인 최옥준씨는 30년 넘게 푸줏간을 운영하면서 바로 옆에 순대전문점 풍성식당을 열었는데, 동네 할머니들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직접 만든다.
부시의 이라크 공격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이라크가 9·11 테러의 배후 조종·지원 국가고, 또 대량살상무기를 은닉하고 있어 인류 평화에 위협이 된다는 공격 이유를 댔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지구인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뒤 양질의 이라크산 석유를 헐값으로 미국이 독점하고, 또 전쟁을 통해 재고 첨단무기를 소진시켜 미국 군산복합체의 배를 불려주려는 부시 정부의 속뜻을 알아차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결국 있지도 않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구실로 이라크 국민을 ‘대량살상’하고 있으니 부시는 피에 굶주린 사람인가.

지금은 사라져버린 언어지만, 만주어 ‘셍지’(senggi)는 피를 뜻한다. ‘셍지’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짐승의 피를 가리키는 말인 ‘선지’가 되었다. 또 들볶여 귀찮다는 뜻인 ‘성가시다’의 옛 표기는 ‘셩가다’인데, 원래의 뜻은 ‘파리하다’다. 그리고 이 말은 만주어 ‘셍지 각시’(senggi-kaksi)에서 나왔는데, 바로 ‘셍지’는 피를, ‘각시’는 게우다·뱉다를 뜻한다. 곧 ‘성가시다’는 피를 게워 파리한 상태를 말하는데, 나중에 들볶여 귀찮다는 뜻으로 변했다.

순대는 만주어로 순대를 가리키는 ‘셍지 두하’(senggi-duha)에서 나왔다. ‘순’은 피를 뜻하는 ‘셍지’에서 나왔고 ‘대’는 창자를 뜻하는 ‘두하’가 변형된 것이다. ‘대’가 창자를 뜻하는 것은 ‘대’가 변형된 배때기의 ‘때’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곧 순대는 동물의 창자에 피를 담아 만든 먹을거리인데, 기원은 몽골인들의 음식문화에서 보인다. 몽골인들은 가축에서 얻는 고기와 짜낸 젖과 젖으로 만든 유제품을 주식으로 한다. 영화나 문학작품들에서는 초원에서 마구 가축을 도살해 고기를 구워먹는 장면이 흔하게 나오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몽골인들에게 가축은 가족의 생명을 이어주는 전 재산이기 때문에 도살은 꼭 필요한 때만 한다. 대신 수시로 젖을 짜서 술·유제품을 만들어 식량으로 확보하고, 젖을 짤 수 없는 겨울에는 고기가 주식이 된다. 그러므로 가축을 도살하면 고기뿐 아니라 내장·뼈·피·가죽까지 알뜰하게 이용한다.

몽골의 순대로 게데스가 있다. 양의 피에 메밀가루와 야생 마늘·부추를 넣고 소금을 섞어 간을 해 창자에 담아 솥에서 끓인다. 이것이 농경사회인 남만주 일대와 한반도로 내려오면서 재료와 기호가 변형된 우리 순대가 되었다. 게데스는 내용물로는 순대면서 순대란 이름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옛 조리서들인 <음식디미방>(1670년께)에서는 개의 창자를 이용한 순대를 개장(犬腸)이라 했고, <주방문>(1760년께)에서는 쇠창자에 선지를 넣어 삶은 선지순대 만드는 법을 황육 삶는 법이라 했다. 또 쇠창자에 고기를 다져 온갖 양념과 기름장을 간 맞추고 섞어 가득히 넣고 쪄낸 순대를 <증보산림경제>(1766년), <규합총서>(1815년) 등에서는 우장증(牛腸蒸)이라고 했다. 이처럼 순대식 조리법은 있되 음식 이름으로는 존재하지 않다 <시의전서>(1800년대 말)에 와서야 비로소 순대라는 용어가 등장했으니, 병자호란 이후에 정착한 것이 아닌가 싶다.

10여년 전 일이다. 어느 날 영화감독 장선우와 ‘탑골’에서 술을 마시다 밤 12시가 넘어 의기가 투합해 탑골 여주인 한복희씨와 함께 여주 신륵사 원경 스님을 찾아갔다. 원경 스님은 새벽 두세시에 들이닥친 우리 일행에 잠시 얼떨떨하다 남한강 모래밭으로 함께 나가 총총한 별을 바라보며 이야기로 날밤을 샜다. 이튿날 원경 스님은 “누가 먹어보았는데 맛있다고 하더라”며 입안이 깔깔한 우리를 데리고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시골 장터의 허름한 순대국밥집을 찾아갔는데, 이 집이 오늘날까지 내가 ‘세계 최고’로 치는 경기 용인시 백암면 백암리 소재 풍성식당(031-332-4604)이다. 이 집 여주인 최옥준(69)씨는 30년 넘게 푸줏간을 운영하면서 바로 옆에 순대전문점 풍성식당을 열었는데, 여기서 파는 순대는 동네 할머니들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직접 만든다(순대국 4천원, 순대접시 6천원).

 

꽃게의 ‘수영’은 위험하다?

헤엄칠 줄 아는 꽃게 속성 때문에 서해교전 벌어져… 담백하고 고소한 돌머리산낙지집 게장

» 사진/ 돌머리산낙지집의 여주인 윤지영씨는 전주 대갓집 딸인 친정어머니의 타고난 미각과 솜씨를 이어받았다.
정약전은 조선조의 위대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친형이다. 1801년 천주교들을 박해하는 신유사옥이 일어나자 정약전도 이에 연루되어 흑산도로 유배된다. 다산과 마찬가지로 실학자였던 정약전은 유배지에서도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틈틈이 저술활동을 하며 울적한 심사를 달랬다. 정약전의 저술의 하나인 <자산어보>는 그가 유배된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지로 조사·채집하는 동시에 이를 어류·패류 등으로 분류하여 각 종류의 명칭·분포·형태·습성 및 이용에 관한 것까지를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 명저다.

<자산어보>는 꽃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해(속칭 살궤·꽃게)는 뒷다리 끝이 넓어서 부채 같다. 두 눈 위에 한치 남짓한 송곳 모양의 것이 있어서 이런 이름이 주어졌다. 대체로 게는 모두 잘 달리나 헤엄을 치지 못하는데, 이 게만은 부채 같은 다리로 물 속에서 헤엄을 칠 수 있다. 이것이 물에서 헤엄치면 큰 바람이 불 징조다. 맛이 달콤하고 좋다. 흑산도에서는 희귀하다. …때때로 낚시에 걸리며 칠산바다에서는 그물로도 잡는다.”

갯벌에서 ‘달리기만’ 하는 대부분의 게들과 달리 바다 속에서 ‘헤엄을 치는’ 꽃게의 이러한 습성이 1999년, 2002년 남과 북 사이에 작은 전쟁을 치르게 한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썰물을 따라 헤엄쳐 나오는 꽃게를 잡기 위해 북한 어선들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을 수밖에 없었고, 이를 보호하려는 북한 경비정과 저지하려는 남한 경비정 사이의 팽팽한 대치가 결국 교전으로 이어져 수십명의 고귀한 젊은이들이 죽어갔던 것이다.

클라우제비츠가 그의 저서 <전쟁론>에서 밝혔듯,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해 수행되는 정치(정책)의 또 다른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럴듯한 명분과 미사여구로 침략을 설명하려 하지만 결국 모든 전쟁, 모든 침략에는 정치적 목적에 따른 인간의 탐욕이 개재되어 있다. 흔히 전쟁의 특성상 집단적 폭력행위에만 주목하는데, 그러면 이러한 숨겨진 전쟁의 정치적 목적을 간과하게 된다. 왜 미국은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는가 말할 나위 없이 석유의 강점이 목적이며, 이는 탐욕의 소산이다.


4월이면 서해안 꽃게 철이 시작된다. 산란을 앞두고 살이 꽉 찬 꽃게로 만든 꽃게찜·꽃게탕·게장의 달콤하면서도 담백한 풍미를 생각하면 금세 입 안에 침이 고인다. 그러나 꽃게로 인해, 아니 꽃게를 자기 혼자만 많이 잡아야 한다는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또다시 서해교전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미국과 이라크가 석유 때문에 큰 전쟁을 한다고 해서 남한과 북한이 꽃게로 작은 전쟁을 벌여서야 되겠는가. 말이 되는지 모르지만, 남북이 평화롭게 공동으로 조업하고, 북쪽이 잡은 꽃게를 남쪽이 사주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 될 것이다.

몇달 전부터 미국에서 오래 살다 돌아온 김상민군이 영등포시장 안에 기가 막히게 맛있는 게장집이 있으니 한번 가보라고 했다. 나는 버터에 길들여졌을 것 같은 그의 입맛을 그리 믿지 못하여 그때마다 “네가 게장 맛을 알아” 하고 시큰둥하게 일축하였으나, 며칠 전 김군이 다시 그 게장집을 이야기하기에 헛걸음하는 셈치고 짬을 내어 가보았다.

‘돌머리산낙지집’(02-2637-0092, 0577)이 그 집인데, <한겨레21> 제450호에서 소개한 갈치조림전문집 ‘산골나그네’에서와 마찬가지로 ‘김학민식 선택법’이 또 한번 실패를 맛보는 순간이었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으면서 담백하고 고소한 이 집의 간장 게장은 그야말로 밥도둑이었다. 이 집의 여주인 윤지영씨(49)는 전주 대갓집 딸인 친정어머니의 타고난 미각과 솜씨를 이어받아 낙지·게장 분야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한다. 강남구 신사동의 소문난 게장을 사와 손님 상에 자기 집 게장과 똑같이 올려놓고 당당히 평가받을 정도로 자신만만하다.]

 

잔인한 4월, 껍데기를 씹으며…

돼지 껍데기가 음식으로 자리잡기까지… 무대포집에서 신동엽 시인과 부시를 떠올리다

한자의 가죽 피(皮)자는 털이 그대로 붙어 있는 동물의 가죽을 나타내는 글자다. 짐승의 가죽은 부드럽고 질기며, 또 그 털이 화려한 빛깔을 지니고 있고 보온성이 높으므로 의복의 훌륭한 재료가 된다. 그러므로 皮자의 상형문자는 의복이나 신발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짐승의 가죽을 손으로 벗겨내는 모양에서 만들어졌다. 또 皮자는 초근목피(草根木皮)에서처럼 의미가 확대되어 식물의 표피인 ‘껍질’의 뜻을 지니기도 하고, 피상적(皮相的)에서처럼 사물의 표면인 ‘겉’을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사람의 피부, 짐승이나 물고기의 껍질같이 변화된 뜻을 만들어냈다.

짐승의 가죽을 뜻하는 한자로는 가죽 혁(革)자도 있다. 革자 역시 동물의 가죽 모양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옛 자형은 의복이나 신발 등 생활에 필요한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햇볕에 말리고 있는 짐승의 가죽 모양으로 머리와 몸체, 그리고 꼬리의 형상을 그린 것이다. 곧 革자는 평평하게 가지런히 펼쳐진 모양으로 짐승의 가죽이 이미 가공돼 처리되었음을 보여주는 글자다.

» 사진/ 돼지 껍데기를 갈비 양념에 12시간 이상 재어 양념이 충분히 스며들게 한 다음 타지 않게 노릇노릇 구워내는 것이 무대포집 돼지 껍데기 맛의 비결이다.
皮자는 ‘털이 그대로 달려 있는 짐승의 가죽’을 뜻하는 반면 革자는 ‘털을 제거하고 무두질(다듬질)로 가공한 짐승의 가죽’을 뜻하므로, 革은 皮에서 많이 발전돼 ‘고쳐진’ 것이다. 여기에서 革자는 의미가 확장돼 혁명(革命)이나 개혁(改革)에서처럼 ‘고치다’의 뜻으로도 쓰이게 된 것이다.

살코기는 물론 대가리, 뼈, 꼬리, 갖가지 내장을 따로이 분류해 각각의 독특한 음식 재료로 개발하였던 우리 민족도 짐승의 가죽만 따로 벗겨내어 음식으로 만들지는 않은 것 같다. 쇠가죽처럼 크고 질긴 좋은 가죽은 음식으로 먹어치우기보다는 신발이나 안장 등으로의 쓰임새가 더 중요하기도 했을 터이고, 또 다른 가축들은 단백질원이 워낙 귀한 때인지라 양을 늘리기 위해 웬만하면 가죽을 벗겨내지 않고 살코기와 함께 조리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옛 조리서들에 가축의 가죽이나 껍질을 따로이 조리하는 방법이 소개된 것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단지 <임원십육지>의 저자 서유구의 형수 빙허각 이씨가 1815년께 지은 <규합총서>에 돼지 껍질을 고아서 묵처럼 엉기게 한 저피수정회법(猪皮水晶膾法)이 유일하게 설명되어 있을 뿐이다. 저피수정회는 쇠족을 장시간 고아 묵처럼 만든 족편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데, 양념장에 찍어 먹는 데서 ‘회’ 라는 이름이 붙었다.


70년대 중반까지 서울역에서 염천교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지하도 모퉁이에 미국 등지에서 수입해온 공업용 쇠가죽에 붙어 있는 고기를 긁어모아 적당히 양념을 넣고 연탄불에 볶아내는 노점들이 줄을 이어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수구레인데, 아무리 춥고 배고팠던 시절이라지만 화학처리된 쇠가죽에서 긁어낸 고기를 사람에게 먹게 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음식의 재료로서 짐승이나 어류의 껍데기(껍질)는 생각보다 맛이 있다. 개고기의 경우도 마니아들은 껍데기가 붙어 있는 배바지살을 최고로 치며, 콜레스테롤이 높다지만 닭도 살보다 껍질이 더 고소하다. 복어나 도미의 껍질도 양념장에 따로이 무치면 쫀득쫀득한 감칠맛이 그럴듯하다. 돼지 껍데기는 원래 마포 최대포집 등에서 돼지갈비를 시킨 손님들에게 서비스로 주던 것인데, 이제는 노랗게 구운 졸깃졸깃한 돼지 껍데기 맛에 반해 찾는 이가 많게 되자 독립된 메뉴로 자리를 잡았고, 돼지 껍데기 전문점도 여럿 생겨났다. 홍익대와 서교호텔 사이 이른바 먹자골목에 가면 돼지 껍데기 전문 ‘무대포집’(02-334-7400)이 있다.돼지고기 관련 메뉴로 6년을 버텨온 집주인 김백신(36)씨는 두툼한 돼지 껍데기를 갈비 양념에 12시간 이상 재어 양념이 충분히 스며들게 한 다음, 타지 않게 노릇노릇 구워내는 것이 돼지 껍데기 맛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1969년 40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민족시인 신동엽은 이 땅에 똬리 틀고 있는 외세와 권력자들의 압제와 착취, 위선과 기만을 향해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다. 수많은 이라크 민간인들이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목숨을 잃는 잔인한 4월, 껍데기집에 가보라. 그리고 소주 한잔에 졸깃졸깃 고소한 돼지 껍데기를 씹으며 조지 부시의 소름 끼치는 짓거리를 생각해보라.

 

그때 나는 ‘묵사발’이었다

우리 농경문화의 특이한 산물… 민청학련 관련자들과 솔밭묵집을 찾아 고난을 떠올리다

곡식을 주식으로 하는 농경문화권의 여러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는 특히 곡물의 활용이 다채롭다. 이는 ‘백곡’이라 할 만큼 우리 땅에서는 수십 가지 곡물이 생산되고, 이에 따라 갖가지 곡물들에 대한 먹을거리로서의 다양한 활용이 있을 수밖에 없는 데서 온 결과다. 예를 들면 쌀은 우리 식생활의 기본인 밥으로 조리되면서도 그 활용이 확장돼 죽·떡·술·엿·지짐·과자·식혜·튀밥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된다.

곡물로 만든 음식 중에 특이한 것으로는 묵이 있다. 묵은 같은 농경문화권인 중국·일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음식이다. 일본에 팥앙금을 굳혀 만든 ‘요깡’이라는 것이 있지만 음식이라기보다는 과자류에 가깝고, 또 ‘가마보고’라고 하여 우리말로 어묵이라 부르는 것이 있지만 생선의 살을 으깨어 뭉쳐 쪄낸 것이므로 우리의 묵과는 전혀 다르다.

묵은 메밀·녹두·도토리 등을 물에 불려 매에 갈거나 말려 가루를 내어, 그 앙금을 풀 쑤듯 쑤어 굳힌 음식이다. 대개 원료의 이름을 붙여 메밀묵, 녹두묵, 도토리묵, 녹말묵, 제물묵이라고 부른다. 녹말묵은 물에 불린 녹두를 갈아서 가라앉힌 앙금을 말린 가루인 녹말로 쑨 묵으로 약간 푸른색을 띠어 청포묵이라 하고, 제물묵은 물에 불린 녹두를 갈아 전대에 담아 짜서 나온 물로 쑤어 굳힌 묵을 말하는데, 청포묵(녹말묵)·제물묵을 합쳐 녹두묵이라 총칭한다.

도토리는 흉년의 구황식물로 중요하였다. 흉년이 들면 도토리 가루를 내어 떡이나 밥에 섞어 먹기도 했으나 ‘개밥에 도토리’라는 말처럼 곡식과 섞어 조리할 때 그리 어울리지 못하여 대개는 묵을 만들어 주식 대용으로 하였다. 도토리묵을 만들려면 도토리를 까서 말린 다음 절구에 빻아 물을 붓고 4~5일 동안 떫은 맛이 어느 정도 빠질 때까지 놓아둔다. 그런 다음 윗물을 따라내고 가라앉은 앙금을 걷어내서 끓이면 엉기게 되는데, 이를 식히면 도토리묵이 완성된다.

1855년, 조선시대 한방의 처방을 집대성하여 <방약합편>을 썼던 황필수는 1870년 우리나라의 음식명, 요리명을 방물학적으로 고증한 <명물기략>을 펴냈다. 이 책에서 황필수는 “녹두가루를 쑤어서 얻은 것을 삭(索: 얽힐 삭, 새끼 삭)이라 하는데, 항간에서는 삭을 가리켜 묵(社에서 士자 뺀 실사 변+墨: 두겹노 묵, 말고삐 묵)이라고도 한다. 곧 묵이란 억지로 뜻을 붙인 것이다”라고 했다. 또 1855년 김병규의 필사본으로 남아 있는, 만물의 명칭을 한자로 쓰고 이에 대해 한자 또는 한글로 풀이한 어휘집 <사류박해>에는 묵을 두부의 일종으로 보아 ‘녹두부’(綠豆腐)라 하였다. 이로써 보면 민간에서 ‘묵’이라고 불리던 음식명을 한자 이름으로 적으려다 보니 묵(위의 한자 복사)이 된 것 같다.


» 사진/ 솔밭묵집 주인 전순자씨는 채묵·묵무침·사라묵·묵전 등 담백하고 맛깔스러운 묵요리와 함께 보리밥을 자신 있게 내놓는다.
대전 유성구 구즉동에는 묵마을이 있다. 20여년 전 ‘할머니묵집’이 처음 문을 연 뒤 잇따라 한두 집 생기다 보니 이제는 마을 30여호가 모두 묵집인 묵마을이 되었다 한다. 전부터 여러 사람들이 한번 가보기를 권하였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가, 지난 4월4일 1974년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하였던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이 대전에서 모이는 길에 묵마을을 찾을 수 있었다.

20대의 젊은 나이로 감옥에 들어가 청춘을 소진시켜버린 옛 동지들은 굴절의 한국 현대사를 살아오면서 겪어온 자신들의 역정을 구구절절 풀어내기에 날밤을 꼬박 새웠다. 이튿날 피곤한 몸을 추스려 배재대학교 정하용 교수의 안내로 계룡산 등산을 하고는 일행 모두 구즉동 묵마을 초입의 ‘솔밭묵집’(042-935-5686)을 찾았다. 세 시간의 산행 끝이라 몸은 피곤하였지만, 가늘게 채 썬 도토리묵에 푹 익은 김치 썰어넣고 갖은 양념에 김 바숴넣은 뒤 자작하게 국물을 부어 만든 채묵 한 사발씩을 앞에 놓고 동지들은 중앙정보부에서 묵사발이 되도록 얻어맞은 29년 전의 그 사건을 회고하기에 바빴다.

이 집의 주인 전순자(61)씨는 할머니묵집에 이어 17년 동안 직접 묵을 만들어왔는데, 채묵·묵무침·사라묵·묵전 등 담백하고 맛깔스러운 묵 요리와 함께 자신 있게 보리밥을 내놓는다. 보리밥은 각자에게 따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양푼에 함께 비벼 먹는다. 보리밥의 양이 많아 3명이면 2인분만 시켜도 되지만, 넉넉한 충청도 인심에 전혀 눈치를 주지 않는다.

 

‘자빠져서’ 먹는 로마 귀족들

냅킨을 탄생시킨 로마의 식사문화… ‘딴또딴또’ 스파게티에서 사라진 제국의 냄새를 맡다

<클레오파트라>나 <벤허>와 같이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보면 호화롭게 치장한 커다란 홀에서 로마의 귀족들이 만찬을 즐기는 장면들이 자주 나온다. 이 홀은 그리스 시대부터 전통이 이어져온 트리클리니아라는 로마인들의 특별식당이다. 로마인들은 이 식당에 서너개의 1인용 또는 2인용 침대들을 U자 형으로 배치하고 한가운데에 식탁을 차렸다. 로마 귀족들은 침대 위에 누워 한쪽 손은 상체를 괴고, 다른 한쪽 손으로만 음식을 먹었다. 영화 장면에서는 식탁 위에는 산해진미가 즐비해 있고, 천하절색의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는 가운데 귀족들은 노예들의 시중을 들어가며 음식을 집어먹는다. 무척 사치스럽고 편안해보이는 만찬 광경이지만, 옆으로 ‘자빠져서’ 먹는 로마 귀족들의 식사법은 음식문화사에 특별한 족적을 남겼다.

» 사진/ ‘딴또딴또’의 이탈리아 음식들은 대학생이나 젊은 샐러리맨들이 주고객인지라 양이 많고 값도 그리 비싸지 않다.
로마는 최전성기 유럽 대륙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북아프리카·중동의 여러 민족까지 자기들 말발굽 아래 놓이게 할 만큼 강성했는지라 음식에서도 천하의 산해진미가 모두 로마로 흘러들어왔다. 로마는 기원전 200년께부터 겨자씨·해바라기씨·참깨·건포도 등을 넣어 빵을 구워먹었으며, 각종 가축의 고기와 바다생선은 물론 심지어는 다람쥐와 비슷하게 생긴 쥐까지 요리해 먹었다. 또 지빠귓과 조류인 나이팅게일의 혀만 모아서 음식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침대에 ‘자빠져서’ 먹는 로마 귀족들의 식사법은 요리재료는 다양했지만, 조리에서는 일정한 한계를 넘을 수 없었다. 먼저 ‘자빠져서’ 한 손으로만 음식을 집어먹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음식을 손가락으로 집어먹기 좋게 하기 위해 미리 작게 썰어놓든지 또는 적당한 크기로 뭉쳐놓아야 했다. 또 이러한 자세는 즙이 많은 음식이나 수프 등과 같은 국물음식을 먹기 힘들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중세가 될 때까지 수프류가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또 물기를 적게 해 음식을 만든다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포도주처럼 음식이 아예 물이거나 어쩔 수 없이 즙을 이용해 조리할 수밖에 없는 음식들도 있다. 이러한 음식들을 ‘자빠져서’ 먹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노예들이 시중을 들고 있고 아무리 조심한다지만 침대에 음식 부스러기를 흘리고, 입 가장자리에 음식을 묻히거나 국물이 목줄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일이 다반사일 것이다. 이 때문에 로마인들은 인류 최초로 냅킨을 사용한 사람들이 되었다. 냅킨은 만찬에 초대받았을 때 각자 가지고 왔고, 로마인들은 때로는 맛있는 음식을 냅킨으로 싸서 집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현대 이탈리아의 대표적 음식으로 잘 알려진 것이 스파게티와 피자다. 국수는 기원전 3000년께 중국에서 가장 먼저 만들었다. <동방견문록>으로 유명한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머물면서 국수를 맛보고는 13세기 말 이탈리아로 가져와 오늘날 이탈리아의 스파게티와 파스타의 기원이 되었다. 이탈리아 남부는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로 밀농사짓기에 좋은 기후조건이 아니었다. 밀가루의 생산량이 넉넉지 않아 음식의 양을 늘리기 위해 국수에 지중해에서 흔하게 잡히는 어패류와 토마토 소스 등을 넣어 소박하면서도 영양가 있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이것이 스파게티가 된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론 연구로 국가연구박사 학위를 받은 정치학자 김종법씨는 포도주를 코드로 해 이탈리아 역사와 문화를 해석한 <이탈리아 포도주 이야기>를 펴냈는데, 유럽에서는 포도주가 술이 아니라 음식의 하나로 취급되는 만큼 이탈리아 음식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다. 김종법씨 권유로 양과 질, 그리고 가격이 아주 만족스럽다는 이탈리아 요리 전문점 ‘딴또딴또’(02-336-6992)에 가보았다. 이 집의 주인이자 주방장인 정윤철(39)씨는 고려대학교를 나와 한다 하는 대기업에 근무하다 이탈리아 요리사의 주방보조로 요리를 배운 뒤 ‘딴또딴또’를 개업하고 직접 조리까지 맡고 있다. 이 집의 이탈리아 음식들은 대학생이나 젊은 샐러리맨들이 주고객인지라 양이 많고 값도 그리 비싸지 않다.갑오징어·모시조개·새우·홍합·양송이·마늘·닭고기 등을 재료로 한 다양한 스파게티 가운데 하나를 고르고 달콤떨떠름한 이탈리아 포도주 한잔이면 1만원 전후를 투자해서 제법 본토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외자유치 1호는 만두가게?

고려가요에 등장하는 ‘엉큼한’ 몽골인… 꿩만두의 담백한 맛을 아시는가

지금은 외국자본이 국내에 들어와 증권에 투자하거나, 한국 기업과 합작을 하거나, 방위산업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기업을 직접 경영하거나 하는 것이 당연한 현상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197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외국자본의 직접투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또한 자본형성이 안 되어 외국자본을 도입하려는 국내의 재벌기업들도 매판자본이라 하여 규탄 대상이 되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제금융자본의 유치는 물론 외국자본의 직접투자를 적극 환영하고 있는 작금의 우리 경제상황에서 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겠지만, 당시 산업기반이 극도로 취약한 상태에서 무방비적으로 외자가 도입되었을 때 우리 경제의 대외종속 문제, 그리고 국제금리와 국내금리 차가 10% 이상 되어 외자도입 자체가 특혜와 부패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외국자본과 그 도입이 경계 대상이 되었다.

» 사진/ 간장 종지만한 ‘천정꿩만두’의 꿩만두는 아주 담백하고 부드러운데, 식은 뒤에 먹어도 전혀 그 맛이 변하지 않는다.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직접투자는 1279년 고려 충렬왕 때 개성에서 만두가게를 열었던 몽골 사람인 것 같다. 고려·조선시대의 속요를 정리해 편찬한 <악장가사>에 실려 있는 충렬왕 때 고려가요 <쌍화점>의 첫 장은 다음과 같다.

샹화점(雙花店)에 샹화 사라 가고신댄

회회(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싸미 이 점(店)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삿기광대 네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더러 다리러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에 나도 자라 가리라

워워(偉偉)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데가티 더마거초니 업다

여기에서 샹화(雙花)는 만두고, 회회아비는 몽골인을 뜻한다. 조선시대까지 만두를 상화(霜花, 床花)라고 불렀는데, 완성된 만두 모양이 한 송이 꽃과 비슷하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이 가사를 풀이하자면, “어떤 여인이 만두가게에 만두를 사러 갔는데, 만두가게 주인인 몽골인이 자기 손목을 잡더라. 이 소문이 밖에 나돌면 가게의 꼬마 심부름꾼 네가 퍼뜨린 것으로 알겠다. 소문이 나면 다른 여인들도 자러 그 자리에 가겠다 할 게 아니냐. 거기 잔 곳은 참으로 아늑하고 무성한 곳이다”라는 뜻이다.

만두는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중국 또는 몽골에서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충혜왕조에 왕궁의 주방에 들어가서 만두를 훔쳐먹는 자를 처벌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위 <쌍화점>의 가사처럼 개경에 만두가게가 존재하였던 사실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이미 만두가 전래되어 왕이나 서민 모두 즐겨 먹은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에서는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 고기나 채소로 만든 소를 넣고 찐 것을 만두라 하고, 밀가루로 만든 얇은 껍질에 소를 싸서 끓이거나 기름에 튀기거나 찐 것은 교자라 부른다. 우리나라의 만두는 터키·몽골의 만두와 함께 교자에 가깝다. 우리 민족의 이동경로에 있는 우랄알타이계의 터키·몽골·한국의 만두가 모두 비슷하고 중국만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만두의 한반도 전래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상상력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경기도 김포시 통진면에 가면 만두 전문점 ‘천정꿩만두’(031-989-9999)가 있다. 이 집의 주인 이승훈(36)씨의 어머니 김치희씨가 15년 전에 꿩탕·오리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을 열었는데, 어느 날 꿩만두를 빚어 주위 분들께 드렸더니 반응이 너무 좋아 이제는 소문이 자자한 꿩만두집으로 바뀌어버렸다. 꿩의 살코기는 다져 두부·양파·숙주나물 등과 함께 소를 만들고, 뼈는 가마솥에 고아 만두전골·꿩탕의 육수로 쓴다. 간장 종지만한 이 집의 꿩만두는 아주 담백하고 부드러운데, 식은 뒤에 먹어도 전혀 그 맛이 변하지 않는다.

 

제갈공명의 만두는 허구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배울라치면, 국어 선생님은 이 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서정적 운율이나 시각적 이미지를 통한 시 감상,시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에 들어 있는 시어들의 상징이나 은유들에 대해서만 설명하기에 바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청포 입은 손님’은 괴로움을 겪고 있는 어두운 역사의 우리 민족이고, ‘은쟁반’, ‘모시수건’은 미래의 화해로운 삶에 대한 순결한 소망이라는 시어 해석을 주워듣고 또 이를 달달 외우기에 바빴으니, 그 큰 이유는 이 시가 그런 형태로 대학입시에 많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이 탓인지 지금도 나에게는 서늘하게 가슴을 적시는 시적 <청포도>보다는 발기발기 끊어 분석한 산문적 <청포도>만이 머리에 남아 있다.

» 사진/ 중국 산동성이 원적지인 ‘일룡’ 주인 유금장씨는 부인과 함께 매일매일 물만두를 직접 빚는데,돼지고기와 부추,생강 다진 것을 얇은 만두피에 곱게 싸는 손놀림은 신의 경지다.
이문열의 <삼국지>는 나관중 원작의 <삼국지연의>를 번역(?)하며 부분부분마다 친절하게 자신의 평가와 해석, 그리고 고증을 덧붙여 펴낸 책이다. 이 책은 이문열의 명성과 필력으로 한때 공전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나는 이 책에 대해 그리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것은 <삼국지> 부분부분에 대한 평가와 해석 속에 삼투되어 있는 이문열의 세계관과 이념적 지향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기도 하고, 진수(陳壽)의 <삼국지> 등 중국의 ‘역사서’들을 통해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를 고증하려 한 그 무리함 때문이기도 하다.


유비가 죽고 촉나라 정권을 안정시킨 뒤 제갈공명은 남만을 공격한다. 긴 싸움 끝에 남만의 맹주 맹획을 제압한 뒤 공명이 군사를 수습해 촉나라로 돌아오려고 노수라는 강까지 왔는데,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심한 바람이 미칠 듯이 불어닥쳤다. 맹획에게 물은 즉, 노수에는 원귀가 가득하여 사람 49명의 머리로 제사드리면 가라앉는다고 한다. 그러나 공명은 이미 전란이 끝난 현재 한 사람이라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해서 사람의 머리 대신 만두를 만들어 원귀들의 노여움을 진정시켰다 한다.

이 얘기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제91회에 보이는데, 여기에는 “이렇게 주방 일꾼을 불러 소와 말을 잡으라고 명령하고 밀가루를 반죽해 사람의 머리를 본뜬 것 속에 소와 양의 고기를 인육 대신 다져넣고는 ‘만두’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쓰여 있는 바, 후인들은 이 사실을 들어 흔히 만두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이문열 또한 그의 <삼국지> 제9권에서 “이른바 만두가 만들어진 것은 제갈공명의 노수대제가 그 처음인 것이다”라고 이 구절을 빌어 만두의 기원에 대한 속설을 친절하게 평석, 고증하고 있지만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제갈공명의 남만 정벌에 대해 “장무 3년(AD 223) 봄 제갈량이 무리를 이끌고 남쪽(운남) 정벌에 나서 그해 가을에 그 땅을 평정하다”라고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고, 배송지(裵松之)의 진수 <삼국지> 주석에도 노수대제 내용이 일체 없으니, 그것은 소설가 나관중이 14세기 말 중국의 교자(餃子) 제조법을 자기 소설에 허구로 써넣은 것일 뿐이다.

우리는 만두 비슷한 것을 통칭해 만두라고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만두와 교자는 엄격히 구분된다. 만두는 보통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 적당한 크기로 잘라 소를 넣지 않고 쪄낸 것을 말하고, 교자는 밀가루 반죽을 밀어 얇은 껍질을 만든 뒤 거기에 고기와 채소 다진 소를 넣어 기름에 튀기거나 물에 삶아낸 것을 일컫는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 변호사회관 옆에 가면 중국인 유금장(53)씨가 21년째 한 자리에서 운영해온 맛있는 물만두(水餃子)집 ‘일룡’(02-735-3433)이 있다. 중국 산동성이 원적지인 주인 유씨는 부인과 함께 매일매일 물만두를 직접 빚는데(요즈음은 물만두가 대개 공장에서 나온다),돼지고기와 부추, 생강 다진 것을 후추, 참기름으로 버무려 얇은 만두피에 곱게 싸는 손놀림은 신의 경지와 비슷하다. 씹기도 전에 목으로 넘어가는 부드러운 물만두 한 접시에 3500원이다. 그밖에 송화단도 낱개로 1천원이며, 오향장육(1만6천원), 오향장족(1만9천원) 한 접시면 날궂이하는 날 고량주 두세 병 비우기에 충분하다.

 

‘객주’의 식솔들은 행복했다

영남 제일의 장국밥을 자랑했던 구포 덕천객주… ‘덕천고가’에서 그 비법을 잇는다

전통사회에서 오일장을 중심으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를 매개하였던 전문적 상인인 보상과 부상을 총칭하여 보부상이라 불렀다. 보상은 주로 기술적으로 정밀한 세공품이나 값이 비싼 사치품 등의 잡화를 취급하였는데, 상품을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하였다. 그리고 부상은 조잡하고 유치한 일용품 등 가내수공업품을 위주로 했는데, 상품을 지게에 얹어 짊어지고 다녔다. 보부상은 상품 유통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직접 소비자들과 상대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행상’이다.

» 사진/ ‘덕천고가’의 장국밥에는 돼지 사골뼈를 뼈가 물러질 정도로 곤 ‘곰국’과 그 곰국에다 조선된장을 풀고 끓인 ‘장국’ 두 가지가 있다.
객주는 생산자나 상인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아주거나 매매를 거간하며, 그에 부수되는 여러 기능을 담당하는 초기 자본가 계급에 속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좌상’으로, 김주영의 소설 <객주>에 나오는 신석주,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 나오는 송도 배대인 등이 그들이다. 객주의 원형은 물품의 위탁 매매를 주업으로 하는 물상객주(物商客主)다. 그런데 물상객주는 생산자와 상인의 물품을 위탁받아 매매하는 업무 외에 위탁자들을 위한 숙박, 금융, 도매, 창고, 운송 등 일종의 부업도 함으로써 오늘날의 재벌기업 또는 종합상사와 같은 역할을 했다.

부산의 구포는 조선시대 낙동강 수운과 동래를 잇는 포구로 각종 물산이 집산되는 곳이다. 조선시대부터 3일, 8일에 열리는 5일장이 있어서 김해, 양산 일대의 보부상, 생산자, 소비자들이 모여 큰 정기 시장을 형성하였다. 이런 지리적 조건으로 구포에는 자연스럽게 거상 물상객주들이 여럿 존재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일제의 침략이 거세지면서 전근대적 산업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조선의 경제는 속속 국가자본을 앞세운 일본 자본가들의 영향력 아래에 떨어지고 만다. 이에 지주계급과 초기 자본가 계급인 물상객주들이 나름대로 자구책을 구하게 되는데, 이의 한 형태가 1908년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한 근대적 민족계 지방금융회사인 구포저축주식회사였다.

구포저축주식회사는 구포의 지주 출신 윤상은과 쌀의 대일 수출로 거상이 된 물상객주 장우석 등 70여명이 합자하여 설립한 회사로, 예금과 대금업, 어음할인업 등 그 업무가 근대 은행과 별 차이가 없었다. 구포저축주식회사는 탄탄한 자본력으로 경영도 충실하였고 영업실적도 매우 양호해 사세가 크게 일어났으나, 1909년 국권피탈 뒤 조선의 경제를 완전히 장악하고 민족자본의 형성을 철저히 압박하려는 일제의 정략에 의해 일본 상공인들을 주주로 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제의 <조선회사령>에 의해 1912년 해체돼 구포은행으로 새로이 발족하게 됨으로써 한국 최초의 민족계 지방금융회사는 좌절되고 만다.

이때에 활동한 구포의 물상객주 중에 지금의 부산시 북구 덕천동 부근에 살았던 김기한이라는 거상이 있었다. 김기한의 덕천객주에는 김해, 양산 일대의 보부상들, 거간꾼, 목도꾼, 뱃사람 등 수십명의 식솔들이 들락거렸다. 따라서 이들을 삼시 세끼 먹이는 것도 수월치가 않았는데, 이들을 먹이기 위해 끓이던 국밥이 낙동강 칠백리 물길을 통해 영남 제일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구포 덕천동에는 덕천객주 김기한가의 장국 비법을 이어받은 장국밥집 ‘덕천고가’(051-337-3939)가 있다.


이 집의 장국밥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돼지 사골뼈를 토막 내어 가마솥에 넣고 뼈가 물러질 정도로 하룻밤 하루 낮을 고아 뻑뻑하게 골수가 빠져나온 진땡(眞湯)이라 부르는 ‘곰국’이고, 다른 하나는 그 진땡에다 조선된장을 풀고 우거지, 부추, 고추, 마늘, 파 등을 넣어 끓인 ‘장국’이다. 진땡은 꼭 낙동강 하구 명지에서 나오는 천일염으로만 간을 하고, 장국의 된장은 김해 주동에서 생산되는 콩으로 만든 토장만을 쓰는데,그 어느 것이든 입에 착착 들러붙는다. 시끌벅적, 풍요의 물산집산지 구포의 영화도 사라지고 이제는 대도시 부산의 그저그런 변두리의 하나로 되어버렸지만, 주방에서 맛을 책임지는 김기한가의 며느리 권명군, 그리고 그 전통을 이어가려는 그의 남동생 권경업을 통해 100여년 전 구포 물상객주가의 넉넉한 장국 인심을 느낄 수 있다.

‘혼령’이 드시던 달콤한 술

고대부터 굿이나 제사에 사용한 계명주… ‘강변멧돼지가든’에서 무형문화제의 맛을 보라

술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마셨던 음료로, 주로 신이나 조상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술 주(酒)자의 옛 글자는 酉로, 배가 불룩 나오고 입이 좁은 용기의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입이 좁은 것은 술이 증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고대부터 제사 지낼 때 올려지는 제물은 가장 크고 좋은 것, 온전한 것, 햇것을 정성들여 마련하는데, 술 또한 특별한 것을 썼다. 예주(醴酒)가 바로 그것인데, 곡물을 당화시킨 것에 공기 속의 효모균이 들어가서 알코올 발효를 하게 되면, 알코올 농도는 낮으면서 달콤한 맛이 남아 있는 술이 된다. 고대 사람들은 이러한 양조법으로 술을 전날 빚어 놓으면 이튿날 새벽 닭이 울 때에는 이미 술이 익어 제사에 사용될 수 있으므로 부정에 전혀 노출되지 않을 수 있고, 또 적당히 알코올 기가 있으면서 달콤한 이 맛을 신이나 조상의 혼령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상당기간 동안 예주는 제사용 술로 정착했다.

» 사진/ ‘강변멧돼지가든’에서 계명주와 곁들여 강원도산 사육 멧돼지 고기를 먹으며 고구려의 기상을 느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다.
그러나 제사용 술도 결국에는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음복하기 때문에 ‘추정된’ 신의 입맛이 아니라 ‘자극을 찾는’ 인간의 입맛에 맞춰 빚게 되었다. 이로써 알코올 농도가 낮고 단맛이 나는 예주류는 술의 영역에서 탈락하고, 이제는 맥아로 만든 감주가 옛 풍속에 따라 이름만 酒자를 차용하여 조상에 올리는 제물의 하나로 쓰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 예주의 하나로 계명주가 있다. 서유거의 <임원십육지>에는 “찹쌀죽에 누룩과 주모(酒母, 술밑)와 엿기름을 섞어 저녁에 빚어놓으면 다음날 새벽닭이 울 때까지는 다 익는다”라고 되어 있다. 술을 빨리 익히기 위해 엿기름을 넣지만, 이것은 속성으로 술을 빚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을 대동굿이나 제사에 쓸 부정을 타지 않은 술을 준비하기 위한 데서 발달된 양조법이다. 계명주는 엿탁주라고도 불렸던 평안남도 지방의 특산 토주이다. 계명주는, 그 양조법은 전래하고 있으되 오랜 세월 동안 옛이름을 잃어버렸던 것인데, 허준의 <동의보감>에 원나라 시대 고서인 <거가필용>을 인용하여 제조방법을 소개하고 그 이름을 계명주라 한 데서 엿탁주와의 표리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거가필용>은 중국·몽골·여진의 요리서적으로, 여기에 소개된 계명주가 어느 나라 것인지는 구분이 어려우나 <거가필용>보다 200여년 전 중국인이 고려를 여행하면서 기행문 형태로 저술한 <고려도경>에 “고려의 잔치 술은 맛이 달고 빛깔이 짙으며 사람이 마시면 취하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이 술맛이 엿탁주와 같다는 점에서 계명주가 곧 엿탁주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로써 계명주의 기원을 최소한 고려 이전 고구려까지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면 금남리 축령산 아래에 가면 고구려 술 계명주의 양조장이 있다. 1952년 1월, 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면 승가리 결성 장씨가의 10대 종손 며느리인 박재형씨는 조상의 제사 날짜를 적은 <기일록>과 가재도구 몇점을 이고 지고 국군을 따라 남하한다. 이후 박씨는 수원, 남양주 등지를 옮겨다니면서도 조상의 제삿날에는 꼭 계명주를 손수 빚어올렸는데, 그 양조비법이 며느리 최옥근(61)씨에까지 이어져내려와 1987년 계명주는 경기도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받았다. 박씨는 80년 87살을 일기로 작고하고, 아들 장기항(66)씨와 며느리가 계명주 양조법과 설비를 현대화해 시중에 판매하고 있는데, 아직은 널리 알려지지 않아 쉽게 구할 수 없으므로 술맛을 보려면 직접 양조장에 들르는 것이 좋다.


축령산은 고려말 이성계가 사냥을 왔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는데, 어느 사람이 “이 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다. 산신제를 지내야 한다”고 하여 산 위에 올라 제를 지낸 뒤 멧돼지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어, 제를 올린 산이라 하여 축령산이라 했다고 한다. 600여년 전 이성계가 ‘야생’ 멧돼지 고기를 구워먹었을 축령산 아래 바로 그 자리에 양조장과 함께 ‘부설기관’으로 ‘강변멧돼지가든’(031-592-0460)을 열고 있으니, 아쉬우나마 계명주와 곁들여 강원도산 ‘사육’ 멧돼지고기로 고구려의 기상을 느껴보시라.

 

지리산 포수가 가져온 선물

생존에서 유희로 진화돼 온 사냥의 역사… 지리산을 뛰어다니는 멧돼지의 싱싱한 맛

인간과 육식의 관계에 대한 연구서인 멜링거의 저서 <고기>에 의하면, 아득한 옛날 인류는 동물의 ‘사냥꾼’이 아니라 동물의 ‘사냥감’이었다고 한다. 인류와 동물과의 이러한 관계는 오랜 진화과정을 거쳐 인간이 사냥 도구와 기술들을 갖추면서 역전되기 시작했지만, 상당한 시기까지 야생동물을 포획하여 고기를 얻는 일은 여전히 생명을 담보로 하는 힘든 싸움일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건 이 위험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동물을 제압할 수 있는 강한 힘이 필요했고, 인간은 강한 동물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사진/ ‘활바우가든’에서는 멧돼지 불고기에 지리산 1천m 이상 고지에서만 난다는 게발딱지나물, 산뽕나무나물로 야생의 맛을 만끽할 수 있다.
흔히 수렵·채취사회에서 목축사회로, 목축사회에서 농경사회로 3단계를 거쳐 인류가 발전하여왔다고 하나 수렵·채취사회가 가장 원시적인 사회형태라고 볼 수는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수렵만이 존재하였던가가 의문이며, 수렵을 생업으로 하는 사회라 할지라도 반드시 목축이나 농경도 동시에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곧 여자는 먹을거리 재료의 채취 또는 간단한 식물의 재배를 담당하고, 남자가 수렵을 하면서 동물을 추적해 이동해가는 형태가 원시적 사회였을 것으로 인류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렵·채취사회의 생활형태는 잦은 이동의 불편함, 그리고 항시 먹을거리 확보에 불안해 할 수밖에 없어 인류는 생포한 수렵물 중 일부를 순화, 개량시켜 사람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가축으로 만들게 된다. 가축은 넓은 의미로는 소·말 등의 포유류, 닭·거위 등의 조류, 잉어·붕어 등의 어류, 누에·꿀벌 등의 곤충류도 포함되지만, 보통 포유류, 조류만을 가리킨다. 또 조류에 속하는 동물은 가금이라 하여 제외하고 농업경영과 밀접한 포유류만을 가축이라 하기도 한다.

가축의 등장과 함께 인류는 수렵·채취사회에서 급격하게 목축사회, 농경사회로 이행하게 된다. 정착생활은 농업생산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킴으로써 먹을거리 취득으로서의 수렵은 그 경제적 효용을 상당 부분 잃게 된다. 이로써 집단적 생존수단으로서의 ‘수렵’은 인류중 지극히 일부 종족에게서만 이루어지게 되고, 문명사회에서는 왕이나 귀족층의 개별적 오락인 ‘사냥’으로 잔존하게 된다. 그리스의 귀족들도 사냥을 매우 즐겼으며,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자인 키루스 2세(BC 600∼529)는 4개 도시의 세금을 사냥 비용에 써버릴 정도였다. 고대 이집트의 귀족들은 활, 창, 그물 등의 사냥도구 외에 사자를 길들여서 사냥을 했으며, 로마의 귀족들도 사냥을 즐겼다. 이렇게 중세까지 사냥은 왕후, 장상들의 특권이었는데,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봉건왕조들이 몰락함에 따라 사냥권과 사냥터가 일반에 개방되어 사냥은 귀족들의 전유물에서 해방되었다.

오늘날은 야생동물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사냥은 규제와 경원의 대상이 되었지만, 생태계의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한편으로는 일정한 조건 아래 허용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멧돼지 사냥이 그렇다. 원래 한반도에는 호랑이, 곰 등 맹수류도 상당히 서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연의 파괴와 남획으로 한 세기 들어 이들은 거의 멸종되고 말았고, 멧돼지가 이를 대신하여 우리 산야의 우두머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천적이 사라진 멧돼지가 마구 번식함으로써 농작물 피해를 줄이고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 매년 일정 지역을 순환하며 사냥이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전북 남원시 인월면 지리산 아래 포수 이정기(54)씨는 이렇게 정식으로 허가된 멧돼지 사냥 전문가이다. 20살부터 사냥꾼을 따라다니며 30여년간 사냥에 종사해왔는데, 야생동물 불법 포획에는 손사래를 친다. 멧돼지는 후각이 발달해 겨울철 1m 이상 깊이에서 동면하고 있는 뱀도 주둥이로 파내어 잡아먹으며, 한약재로 쓰이는 소나무뿌리의 혹인 백복령, 천마 등도 용케 찾아 캐먹는다고 한다. 이정기씨가 사냥해 오는 야생 멧돼지는 급속 냉장시켜 그의 부인 문양월(49)씨가 운영하는 ‘활바우가든’(063-636-2092)에서 1년 열두달 구워 손님들에게 내놓는다. 멧돼지 불고기에 지리산 1천m 이상 고지에서만 난다는 게발딱지나물, 산뽕나무나물로 야생의 맛을 만끽할 수 있다.

 

푸짐한 상차림은 참혹한 비극

호남지방 선정비와 진수성찬은 민중 수탈의 산물… 담양 ‘남도전통한정식집’의 다양한 맛

호남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예전의 읍자리 부근에 유난히 비석이 많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가만히 다가가 풍진에 희미해진 글자를 한자 한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확인해보면 대개는 ‘전 현감 ○○ 영세불망비’니 ‘전 부사 ×× 송덕비’니 하는 것들이다. 10여년 전 광주에서 나주를 지나 목포를 가게 되었는데, 광주에서 목포 가는 구도로를 따라 예의 그 선정비와 송덕비가 촘촘히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서 나는 이 ‘선정비’들이 봉건시대에 호남 민중들이 얼마나 가렴주구를 당해왔는가를 확인해주는 반증이라고 생각했다.

» 사진/ 장과 젓갈을 모두 직접 담그는 ‘남도전통한정식집’의 40여 가지에 이르는 진수성찬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돌을 세운다는 것은 공덕을 표하기 위한 것이므로, 중국에서도 선정비는 임금이 죽고 나서 장사지내고 신하들이 임금의 덕과 공을 찬양하기 위해 세우는 것에 한정하였다. 곧, 신하나 민간에서는 원칙적으로 선정비, 송덕비를 세우지 못했던 것인데, 후한 때 사람 오장(吳章)이 군수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 사람들이 그의 묘 앞에 비를 세움으로써 민간에서도 이때부터 이를 모방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충렬왕 때 승평부(昇平府) 부사로 있었던 최석(崔碩)이 승진하여 개경으로 돌아갈 때 당시의 관례에 따라 가재도구를 싣고 가느라 말 일곱 마리를 끌고 갔다. 그러나 최석은 가지고 간 말을 그냥 자기 소유로 했던 전임자들과는 달리 개경으로 오는 도중에 낳은 새끼 1마리까지 합해 말 8마리를 승평부로 다시 돌려 보냈다. 이에 승평부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워 ‘팔마비’라 이름하였는데, 여기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송덕비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선정비는 조선시대로 오면서 급작스럽게 많아졌는데, 명종 때는 이미 한 고을에 4~5개의 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로 오면 고을마다 선정비, 송덕비가 지천으로 깔려, 개혁 군주 정조는 세운 지 30년 이내의 비석은 모두 뽑아버리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백성들은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신음하며 초근목피로 근근히 목숨을 유지해가고 있고, 가혹한 가렴주구로 요원의 불길처럼 민란이 일어났던 바로 조선 후기에 ‘선정비’가 그토록 많이 세워졌다니 참으로 시대의 블랙 코미디일 것이다.

나는 수십 가지의 산해진미로 한상을 그득 채우는 호남지방의 상차림 역시 봉건시대 민중 수탈의 유물이자 그 반증이라고 추정한다. 즐길거리가 다양하지 못한 봉건시대에 관리들이나 지방 호족들이 위락으로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먹고 마시는 일이었을 것이다. 호남지방은 산이 깊으면서도 들이 넓고, 또 바다가 연해 있어 물산이 풍부하고 다양했다. 이러한 조건들과 봉건 지배층의 맛을 찾는 욕구가 맞아떨어지면서 백성들은 이를 채집, 조달하는 부역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흉년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백성들이 목구멍으로 억지로 넘겼던 구황식품들 또한 ‘특미’로 개발되어 호남의 상차림을 풍부하게 하는 데 한몫을 했던 것이다.


며칠 전, 구례에서 있었던 어느 모임에 참석하는 길에 최형식 담양군수의 초청으로 담양의 ‘남도전통 한정식집’(061-382-3111)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17년 전 윤혜경(67)씨가 이 집의 문을 열었는데, 이제는 윤씨의 딸 김난이(43)씨가 어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아 운영해오고 있다. 우리 음식의 깊은 맛은 장과 젓갈에서 나온다. 이 집은 된장, 간장, 고추장 모두를 집에서 직접 담그고 있고, 진석화젓, 전어창자젓, 멍게젓, 토하젓, 돔배젓 등 7가지에 달하는 젓갈도 원료를 사와 윤씨가 직접 담그고 있다. 지글지글 떡갈비, 4년 묵은 김장김치, 3년 된 갓김치를 비롯해 40여 가지에 이르는 진수성찬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니, 이 집에 오면 침착하게 행동하시라. 여주인 윤씨가 손수 빚은 잘 익은 청주 몇 잔에 안주 삼아 반찬들을 골고루 맛보기 전에는 절대 밥숟갈을 뜨지 말 것!

 

콩나물해장국- “박정희 같은 놈이 잘도 처먹네”

인목대비의 한이 서린 모주와 전주 콩나물 해장국… ‘다래콩나물국밥’이 자랑하는 ‘남부시장식’국밥

화가 장욱진 선생은 기이한 일생을 살면서 특출한 그림을 남긴 우리 시대의 거장이다. 선생은 일생을 술을 벗삼아 해와 달, 까치와 참새를 주로 그렸는데, 술과 관련된 선생의 일화는 끝이 없다. 1970년 정초 며칠을 술을 들며 명륜동 집에서 불경을 공부하던 부인의 모습을 본 뒤, 갑자기 구상이 떠올라 덕소 화실로 돌아와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한 채로 냉방에서 부인의 초상화 <진진묘>를 그린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 사진/ ‘다래콩나물국밥’은 전주 토박이 홍순천씨가 연중무휴 24시간 영업하고 있는 ‘남부시장식’ 해장국집으로, 시원한 콩나물국에 모주 한잔이면 간밤의 숙취가 말끔히 가신다.
전주는 콩나물 해장국으로 유명하다. 서울지방의 해장국은 소의 뼈를 푹 고아 끓인 국물에 된장을 삼삼하게 풀어넣고 콩나물·무·배추·파 등을 넣어 끓이다가 선지를 넣고 다시 한번 푹 끓인 선지국으로서 일종의 토장국인데 비하여, 전주의 해장국은 멸치·다시마·무 등을 우려낸 국물에 끓인 콩나물 맑은 장국이든가, 아니면 펄펄 끓는 뚝배기 콩나물국에 날계란을 풀어넣고 새우젓으로 간을 맞춘 것이다.

그런데 이 전주식 콩나물 해장국에는 모주 한잔이 곁들여져야 제격이다. 모주(母酒)란 청주를 뜨고 나서 막걸리를 거르고 난 술 지게미에 다시 물을 부어 만든 찌끼 술이니, 실은 술이라 할 것도 없는 맹물을 조금 면한 ‘술물’이다. 요즈음에는 양조장 막걸리에 계피와 흑설탕을 넣어 끓인 것을 전주에서는 모주라 하지만, 바로 이러한 알코올 도수가 낮은 모주를 해장술로 한잔 마심으로써 지난 저녁의 알딸딸한 명정 상태를 유지하면서 서서히 술을 깨고 속을 확 풀어주는 것을 술꾼들은 즐긴다. 그렇기 때문에 전주 한옥생활체험관의 관장으로 있는 풍류가객 이동엽(55) 선생은 전주에서 마시는 해장술은 모주(母酒)가 아니라 새벽 어두컴컴한 때 마시는 술이라 하여 모주(暮酒)라고 주장하는데, 듣고 보니 그도 그럴듯하다.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은 <조선문화총화>에서 모주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대동야승>에 의하면, 선조의 왕비였던 인목대비가 광해군 때에 피위되자, 인목대비의 어머니요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부인인 노씨가 제주도에 귀양가게 되었는데, 귀양 간 사람에게 배급해주는 양식만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동네에서 술지게미를 얻어서 싸구려 술을 만들어 팔아 생활했다고 한다. 이 술을 처음에는 대비의 어머니가 만든 술, 곧 대비모주(大妃母酒)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대비’ 두자를 빼버리고 그냥 ‘모주’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주 콩나물 해장국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욕쟁이 할머니 버전이 전해온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창 위세를 부리던 70년대 어느 날 전주에서 하루를 묵었다 한다. 이튿날 새벽 지난밤의 술로 헝크러진 속을 풀려고 경호원을 시켜 전주에서 유명하다는 콩나물 해장국집에 전화를 걸어 해장국을 배달해달랬다 한다. 그러나 배달 대신 “술 처먹었으면 직접 와서 뜨끈뜨근한 해장국을 먹어야지, 어떤 시러배놈이 배달해달라는 거야!” 욕만 한 사발 먹어버렸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박정희가 직접 와서 해장국을 시켜 훌훌 맛있게 먹는데, 그것을 보고는 욕쟁이 할머니 왈 “박정희같이 생긴 놈이 잘도 처먹는다. 이젠 속 풀렸지?”라고 했다나.


‘박정희가 욕 한 사발과 같이 먹었다’는 해장국은 뚝배기에 콩나물국을 팔팔 끓이고 여기에 날계란을 풀어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는 ‘삼백집식’이고, 멸치·다시마·무 등으로 국물을 낸 뒤 여기에 삶은 콩나물을 넣고 데워 내는 것이 ‘남부시장식’이다. 전주시 경원동 동문 사거리 부근에 있는 ‘다래콩나물국밥’(063-288-6962)은 전주 토박이 홍순천(51)씨가 연중무휴 24시간 영업하고 있는 ‘남부시장식’ 해장국집으로, 이 집의 시원한 콩나물국에 모주 한잔이면 간밤의 숙취가 말끔히 가신다. 콩나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연하고 고소한 삶은 콩나물을 추가로 주므로 뻑뻑하게 장국에 넣어 먹어도 좋다. (콩나물국밥 3500원, 무밥·콩나물밥 5천원)

 

쩝~ 그 취조실의 개고기

중정에 끌려간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 ‘광교할매집’을 문화재로 지정하라

첫 경험이 중요하다. 어느 때 어디서 누구하고 어떤 기분으로 첫 경험을 겪었는지 말이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입이 짧은 사람들은 육회, 간천엽, 순대국, 보신탕 등 약간은 ‘엽기스러운’ 음식들을 어떤 상황에서 처음으로 대하였는지에 따라 그 음식에 대한 고정관념이 머리에 박혀버리기 때문에, 그런 음식들은 꼭 전문집에서, 제철에, 편안한 사람들과, 기분 좋게 먹어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다. 물론 입에 끌리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지만, 문화의 다양성 속에서 그러한 음식들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관용의 입맛’을 보일 수 있다면 더 다채로운 사회생활이 전개되지 않겠는가 생각해본다.

» 사진/ 광교할매집은 뭉근 불에 24시간 푹 끓인 탕이 담백한 해장국맛과 비슷하여 ‘첫 경험자’도 별다른 느낌 없이 접할 수 있다.
농촌에서는 현충일을 전후해 모내기가 끝나면 첫 번째 김을 맬 때까지 약간 숨을 돌리게 된다. 3월 못자리 짜는 일에서부터 오이, 수박 심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부엌 부지깽이도 한몫 거들어야 할 정도로 숨막히게 농사일이 밀어닥치는 시기가 6월 초까지의 석달인데, 한여름 무더위 아래서의 농사일에 대비해 농부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며 원기를 보충한다. 어릴 적 나의 외갓집은 머슴을 두명이나 부릴 정도로 농사를 크게 지었다. 해마다 6월 중순쯤이면 외갓집에서는 농사일에 지친 일꾼들을 먹이기 위해 개를 잡아 동네 잔치를 벌였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외갓집엘 갔는데, 어머니와 외숙모는 된장국이 설설 끓는 가마솥에서 개고기를 꺼내 냉수에 손 담가가며 갈래갈래 찢어 큰 양푼에 갖은 양념으로 무쳐놓고, 일꾼들이 내미는 개장국 대접에 한 움큼씩 고기를 넣어주셨다. 이렇게 노동에 지친 농부들의 달콤한 휴식 속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마을 잔치에서, 대여섯살이던 내가 개고기를 첫 경험 했으니, 어찌 내가 이 음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자연스러운 첫 경험이 아니라 모종의 ‘원통함’ 때문에 첫 경험을 하고야 만 사람이 있다. 지금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있는 나의 친구 유인태씨가 그다. 1974년 4월, 이철·유인태 등 수많은 전국의 청년 학생들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반유신운동을 압살하기 위해 4월 초부터 시작된 고문과 구타, 협박과 날조의 이 허망한 놀음은 6월에 이르러 막바지에 왔는데, 이때쯤에는 사건은 그들의 ‘기획안’대로 대개 마무리되어 중앙정보부 각 취조실은 제법 파장 분위기가 연출됐다.

그때 서울대 이현배 선배와 유인태의 취조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한다. 6월 어느 날 저녁 이현배 취조실의 중정 요원들과 유인태 취조실의 요원들이 밤참으로 개고기와 소주를 시켜 먹었다. 그러나 아무리 피의자라 해도 한 방에 있는 사람을 놓고 자기들끼리만 먹기가 뭐했던지, 유인태에게 “너 개고기 먹니?” 물었다. 당시 유인태는 개고기를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 곧이곧대로 못 먹는다고 대답했단다. 유인태 담당 요원이 이현배 담당 요원에게 하는 말. “얘는 못 먹는대. 그 새끼는 먹는대?” “음, 먹는대.” 이리하여 두 방의 요원들이 한곳에 모여 개고기 파티를 여는데, 피의자끼리는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법. “유인태! 벽 보고 꿇어앉아 있어!” 이리하여 이현배는 중정 요원들과 쩝쩝거리며 개고기에 소주 한잔을 걸치고 있는데, 유인태는 그들이 마지막 고기 한점을 다 먹어치울 때까지 벽을 향해 꿇어앉아서 침만 삼켰단다. 그날 이후 유인태는 개고기를 배우지 못한 것을 철천지 한으로 여기고 옥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개고기를 먹기 시작해 이제는 마니아가 되었다고 언젠가 나에게 그 ‘통한의 역사’를 밝히며, 국가정보원은 개혁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침을 튀겼다.

서울 광교의 삼일빌딩 건너편에 가면 ‘광교할매집’(02-776-4603)이라는 40년 된 보신탕집이 있다. 골목안 조그만 한옥에 오무라니 방들이 이어 있는 폼이 보신탕집의 전형 같은 곳이다.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같이 온 친구들에게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할 집이라고 극구 주장했는데, 아깝다! 청계천 개발로 조만간 헐릴 예정이란다. 이 집은 뭉근 불에 24시간 푹 끓인 탕이 아주 좋은데, 씹는 맛이 없어 별로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담백한 해장국맛과 비슷해 ‘첫 경험자’도 별다른 느낌 없이 접할 수 있다.

 

밀가루의 원수는 메밀가루?

밀이 귀해 메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은 시절… 서울 입맛에 도전하는 대구 ‘국시’

“국수와 국시는 어떻게 다른가?”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좀 썰렁한 ‘난센스 퀴즈’인데, 그 답은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고 국시는 밀가리로 만든다”이다. 그러나 ‘센스 퀴즈’로 생각하고 그 답을 정확히 구하자면, 국수는 메밀가루, 밀가루, 또는 감자가루 등을 반죽하여 얇게 밀어서 가늘게 썰든가, 국수틀 구멍으로 내리 눌러서 흘러 빠지게 한 식품, 또는 그것을 삶아 국물에 말거나 혹은 비벼먹는 음식을 일컫는다. 그리고 국시는 국수의 경상도·함경도 사투리다.

» 사진/ ‘가람국시’의 상차림. 쫄깃쫄깃한 면발에 국물맛이 담백한 칼국수. 잔치국수와 콩국수도 고소하고 시원하다.
밀은 벼과에 속하는 작물로 한자로는 소맥(小麥)이라 한다. 밀은 농업의 기원과 더불어 재배된 가장 오래된 작물의 하나로 1만년 전부터 오늘의 아프가니스탄과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재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밀은 기원전 3세기께 중국에 들어와 쌀과 더불어 주곡으로 자리잡았는데, 중국인들은 이때부터 밀가루를 내어 여러 가지 식품으로 이용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국수를 뜻하는 것을 통틀어 면(麵)이라 하지만, 중국에서는 밀에서 1차 가공한 밀가루를 면이라 하였고, 면 곧 밀가루를 2차 가공하여 만든 식품을 통틀어 병(餠)이라 하였다. 그리고 밀가루 이외의 다른 곡식 가루로 만든 것을 이(餌·먹이)라 하여 병과 구분하였으니, 우리나라의 떡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왜 면을 국수라고 하였을까? 밀은 중국을 통해 삼국시대에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 재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고려에는 밀이 적어 화북지방에서 수입하고 있으며, 밀가루의 값이 매우 비싸서 잔치 때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 즈음까지는 밀의 생산량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밀가루보다는 비교적 흔한 메밀가루로 국수를 만들었다.

삼국·통일신라시대까지의 문헌에는 국수를 가리키는 면이 보이지 않다가 중국의 송나라와 밀접하게 교류했던 고려시대부터 면 이야기가 나온다. 앞의 <고려도경>에 “음식에는 10여 가지가 있어 그 중 면 음식을 으뜸으로 삼았다”는 구절이 보이고, 고려 말기의 중국어 회화교본인 <노걸대>에 “우리 고려 사람은 습면(濕麵)을 먹는 습관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19세기 초 서유구가 지은 <옹희잡지>에는 “우리나라 풍속으로 건한 것을 병(餠)이라 하고 습한 것을 가리켜 면(麵)이라 한다. 건한 것은 시루에 찌는 것이고 습한 것은 끓는 물에 삶거나 물에 넣은 것이다”라고 되어 있어, 습면과 면 모두 국수를 가리키는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우리의 옛 문헌에서는 국수를 (菊에서 머리 뗄 것)水,(앞의 국에서 손수변 붙일 것)水,또는 麴讐라고 표기하였는데, 저자와 연대 미상으로 우리말의 어원을 해석한 <동언고략>에서는 국수는 한자 麴讐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밀가루(麵)로 국수(麵)를 만든다. 밀가루(麵)로 밀기울(麴)도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국수(麵)는 주로 메밀가루로 만든다. 그런데 메밀가루는 술을 내는 맛이 없다. 그러므로 밀기울(麴)로서는 메밀가루가 원수(讐)이니 메밀가루 국수는 밀기울의 원수, 곧 국수(麴讐)라 한 것이다.”


비유하여 해석하자면, 우리나라에서 국수의 원료를 놓고 밀가루와 메밀가루가 투쟁하였는데, 밀가루가 워낙 부족해 국수의 원료로 메밀가루가 대종을 이루자 밀가루의 아들뻘인 밀기울이 자기 아버지 밀가루를 밀어낸 메밀가루를 원수로 여긴 데서 ‘국수’(麴讐)라는 말이 나왔다는 설명이다. 억지에 가까운 발상의 기발함은 재미가 있지만 속설 이상의 근거는 없다. 하여튼 요즈음 우리밀은 모두 사라졌지만 미국산 수입 밀가루가 온 나라를 떡() 치고 있으니, 밀기울이여 노여움을 푸시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건설회관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밀가리’로 ‘국시’를 만드는 ‘가람국시’(02-541-8822)가 있다. 이 집의 여주인 채양자(51)씨는 대구에서 10여년간 유명한 한정식집 ‘가람’을 운영해왔는데, 1년 전 강남으로 진출해 손칼국수·잔치국수·콩국수 등을 전문으로 서울 입맛에 도전하고 있다. 꼬들꼬들하면서도 쫄깃쫄깃한 면발에 국물맛이 담백한 칼국수, 그리고 채씨가 서울시내의 한다 하는 콩국수집을 모두 찾아다니며 비교·검토·연구해 계절음식으로 자신 있게 내놓은 콩국수도 무척 고소하고 시원하다.

 

제7의 맛, 손맛

5미·발효미·손맛까지 다양한 맛의 세계… 손으로 찢은 족발이 일품인 ‘동광식당’

‘김학민의 음식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지 이번호로 꼭 1년이 된다. 처음에는 독자들의 반응이 별로 없었으나 요즈음은 제법 많은 의견이 메일로 들어온다. 다양한 의견에 성의껏 답변을 드리고 있지만 이 자리를 빌려 독자들께 ‘면피’ 삼아 몇 마디 양해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 ‘김학민의 음식이야기’는 특정한 식당을 소개하거나 특별한 음식을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하는 곳의 정보를 제공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보다는 특정한 식당이나 음식의 역사·문화적 배경, 그리고 이에 사회·경제적으로 얽힌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루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잘하는 식당, 맛있는 음식에 대한 정보를 기대하는 분들에게는 가끔 좀 허전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는 맛의 보편성 문제다. 맛은 어떠한 물질을 입에 넣었을 때 느끼는 감각이다. 넓은 의미의 맛은 감각적·감상적 관념을 표현하는 언어였으나 감상적인 정서는 ‘멋’으로 분화되고, ‘맛’은 감각적 경험, 특히 식품의 감각을 표현하는 말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음식의 맛은 여러 가지가 복합된 것이므로 과학적으로 정확히 그 기준치를 세우기가 쉽지 않다. 또 식습관, 풍습, 편견, 정서 및 생리적 상태에 따라 맛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맛에 대한 느낌은 개인차가 크다. 곧 맛은 일부는 감각적이지만, 다른 일부는 주관적인 것이다.

음식의 맛은 몇 가지 기본 맛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단맛·신맛·짠맛·쓴맛으로 이를 4원미라 하는데, 이 네 가지 맛은 각기 특성 있는 맛을 가지면서 서로 복합되어 여러 가지 다른 맛을 만들어낸다. 동양에서는 이 네 가지 맛에 매운맛을 더하여 5미를 기본 맛이라 한다. 단맛은 인간을 비롯한 동물, 곤충이 가장 강하게 원초적 욕구와 집착을 갖는 맛이다. 신맛은 향기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본래의 맛과 어울려 식품의 맛을 좋게 하고 식욕을 증진시킨다. 쓴맛은 심하면 불쾌감을 느끼게 하지만 적당히 희석되면 입맛을 돋우고, 다른 맛에 혼합되어 독특한 풍미를 형성한다. 인간이 가장 집착하는 것은 단맛이지만, 짠맛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맛이다. 그리고 매운맛은 순수한 미각이라기보다는 생리적인 통각이라 할 수 있다. 즉, 미각신경을 강하게 자극함으로써 느끼는 기계적 현상이다.

이 다섯 가지 맛 이외에도 떫은 맛, 구수한 맛, 아린 맛 등 음식의 복합적인 맛에 크게 영향을 주는 맛이 더 있다. 또 “잊혀지지 않고 늘 마음에 감돌다”라는 뜻의 ‘감치다’ 에서 온 감칠맛도 있다. 감칠맛은 특정한 맛이 아니라 4원미나 5미가 향기 등과 잘 조화된 맛으로, 여러 가지 정미성분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복잡하고 미묘하면서 구수한 짠맛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맛은 5미 이외에 발효미를 더 보태서 논해야 한다. 장·술·김치·젓갈 등과 같이 단순한 재료의 맛 이외에 발효와 분해 과정에서 생긴 다양하고 독특한 풍미가 지방과 각 가정의 개성을 나타낸다.


맛에 대해 대강 읊어보았는데, 하나 빠진 게 있다. 무엇일까? 손맛이다. 얼마 전 TV에서 “손에 체온이 있어서 음식 재료들을 손으로 버무릴 때마다 체온이 전해져 음식이 더 맛있어진다”며 손맛을 그럴듯하게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았는데, 아무래도 견강부회의 느낌이다. 그보다는 한톨의 곡식이라도 버리지 않았던 우리 민족의 음식물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전통에서 온 ‘정성’ 으로 풀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우리라.

» 사진/ ‘동광식당’은 다른 지방의 족발집들과 달리 ‘칼맛’이 아니라 ‘손맛’을 보여준다. 토속 된장으로 끓이는 칼국수 국물은 정말로 ‘감칠맛’이 난다.

얼마 전 강원도 동해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양성평등교육을 하러 가는 아내를 ‘수행한’ 길에 친구 김영준군이 소개해준 정선읍 ‘동광식당’(033-563-3100)에 들렀다. 송계월(59)씨가 20여년 전부터 운영해온 이 집은 엄나무·칡뿌리·황기·오갈피를 넣어 삶은 돼지족발이 유명한데, 다른 지방의 족발집들과는 달리 ‘칼맛’ 이 아니라 ‘손맛’을 보여준다. 곧 채반에 수북이 쌓아놓은 식어서 굳어진 족발을 칼로 썩썩 썰어주는 것이 아니라 솥에서 바로 꺼내 굳기 전에 먹기 좋게 손으로 찢어 내오기 때문에 육질이 아주 부드럽다. 또 이 집의 칼국수는 면발이 굵고 길어 후루룩 면발을 빨아들일 때 콧등을 친다 하여 콧등치기국수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토속된장으로 끓이는 그 국물은 정말로 ‘감칠맛’이 난다.

‘웬수 단골’ 조태일과 그의 ‘애인’

낙짓집 ‘대교나루터’가 카페 ‘대교’로, 다시 보신탕집 ‘대교’로 변신하기까지

시인 조태일(1941~2002)씨는 6척 거구에 검고 완강한 얼굴을 가진 무골형 인물이다. 아담한 체구에 파리한 얼굴, 이른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고도 감동하고, 비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면서 눈물짓는 감수성을 시인의 전형으로 떠올린다면 조 시인은 시와는 영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오죽하면 조 시인조차 자기의 시 <석탄·국토 15>에서 “이 조가야, 그 거창한 체구엔/ 노동을 하는 게 썩 어울리는데/ 시를 쓴다니 허허허 우습다, 조가야”라고 읊었겠는가. 그러나 조 시인은 그 우람한 체구와는 달리 목소리도 다정다감하고 마음씨가 비단결처럼 곱고 여리다. 그의 시도 초기의 모더니즘 경향에서부터 서정시, 그리고 유신 독재시절의 저항시에 이르기까지 섬세한 감수성과 고졸한 품격이 유감 없이 보인다.

» 사진/ 보신탕집 ‘대교’는 수육, 탕, 무침도 좋지만 사시사철 정갈하게 나오는 새콤한 열무김치가 애호가들의 발길을 끊이지 않게 한다.

두주불사에 어눌한 가운데 위트가 번쩍이는 그의 말솜씨 때문인지 조 시인의 주위에는 항시 문인들이 북적거렸다. 또 조 시인은 군사독재 시절 ‘불온한’ 사회과학 원고들을 도맡아 조판해 주었던 ‘창제인쇄공사’를 운영하고 있어서 그의 사무실에는 의식화 서적을 출간하려는 소위 ‘빵잽이’ 출신 출판인들이 득실거렸다. 1970년대까지 창제인쇄공사는 서울 중구 오장동에 있었는데, 집세가 너무 비싸고 또 주요 거래처인 창작과비평사, 한길사 등이 마포에 있었기 때문에 1981년 초에 공덕동 5거리 서울대동창회관 앞으로 이사를 왔다.

창제인쇄공사에서 공덕시장쪽으로 가면 지금은 없어진 ‘쇼도 보고 영화도 보는 재재재개봉관’ 경보극장이 있었고, 그 옆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면 ‘대교나루터’란 낙짓집이 있었다. 대교나루터의 여주인 오금일씨는 목포 출신으로 항시 모나리자 같은 은은한 미소를 짓는 20대 후반의 예쁜 모습이었는데, 그녀의 미모와 상냥함은 살아 꿈틀거리는 낙지를 가차 없이 식칼로 저며대는 그 엽기스러움을 덮고도 남았다. 조 시인은 그녀를 항시 자기 애인이라 부르며 문단·출판계 후배들을 대교나루터로 끌고 갔는데, 들어가는 시간은 달랐지만 나오는 시간은 밤 12시 항상 일정했다.

그러나 조 시인을 고정 축으로 해서 경제학자 박현채, 소설가 이호철·황석영·송기원, 시인 이시영·정희성·김정환, 평론가 채광석·김사인, 해직기자 김종철, 학생운동 출신 나병식·최민화 등이 교체 멤버로 그 좁은 식당을 차지하고 주야장창 박정희, 전두환 욕이나 하고 있었으니, 으스스한 그 시절에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겠는가? 그리고 조 시인을 비롯해서 나이살이나 먹은 축들은 다투어 오금일씨를 자기 애인이라 하며 틈만 나면 손을 잡으려고 하니, 다른 손님들이 보기에 얼마나 눈꼴이 시었을까? 초보 식당주인에 이런 ‘웬수 단골’들 때문인지 낙짓집은 1년도 못가 문을 닫고, 82년 가을 오금일씨는 식당을 수리해 카페 ‘대교’를 열었다. 그러나 카페 대교도 매일 저녁 마른안주에 병맥주 몇병 놓고 한없이 침방울을 튕기는 조 시인과 그의 일행이 독과점하니 장사가 제대로 되겠는가.


83년, 나는 오금일씨에게 카페를 집어치우고 보신탕집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보신탕집 ‘대교’(02-716-7868)의 초기 2, 3년은 손님이 별로 없어 컨설팅한 죄로 나는 약속만 있으면 ‘대교’를 찾아 보신탕을 신물나도록 먹었다. 이때 대교에 자주 오던 손님으로 김원기 의원이 있었다. 88년, 여소야대 13대 국회 제1야당 평민당의 원내총무로 화려하게 복귀한 김원기 의원은 타고난 인화감과 합리성으로 4당체제를 잘 이끌었는데, 밀고 당기는 지리한 총무회담이 끝나면 의원들과 함께 자주 대교집을 찾았다. 청문회 생중계로 TV에서 자주 보아온 유명 정치인들이 대교를 들락거리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집이 얼마나 맛있기에 저 사람들이 자주 올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지사. 일종의 스타 마케팅의 성공사례로 군사독재 시절의 민주투사 스타들은 손님을 쫓아냈지만, 민주화 시대의 정치 스타는 손님을 불러들였으니, 스타도 스타 나름이다. 수육, 탕, 무침도 좋지만 사시사철 정갈하게 나오는 새콤한 열무김치가 애호가들의 발길을 끊이지 않게 한다.

 

공자 사모님 힘드셨겠네

한·중·일에서 발전한 회의 모양… 한국에서 가장 많이 회를 준다는 ‘삼다도회집’

공자님의 사모님은 식사 때만 되면 꽤나 스트레스를 받으셨을 것 같다.인간사회의 윤리·도덕·규범 등에 대해 완벽하리만큼 철저하게 내용과 형식, 그리고 실천을 주장한 공자님은 식사에 관해서도 꽤 ‘잔소리꾼’이었던 듯 형식에 딱 짜인 음식밖에 입에 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논어> ‘향당’편에 아래와 같이 전해져오니, 공자님의 상차림에 대한 ‘사모님의 고충’이 미루어 짐작된다.

» 사진/ 삼다도회집은 생선회도 좋지만 밑반찬에 따라 나오는 성게알 미역국은 몇번이고 앙코르를 하게 만든다.
“밥은 정미된 흰 쌀밥을 싫어하지 않으시고, 회(膾)는 가늘게 썰은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다. 밥이 쉬어서 냄새가 나거나 맛이 변한 것과, 또한 생선이 상해 냄새가 나고 뭉그러진 것은 먹지 않으셨다. 알맞게 익지 않은 것도 먹지 않으시며, 때가 아니면 먹지 않으셨다. 바르게 잘라지지 않았으면 먹지 않으셨고, 간이 맞지 않는 것도 먹지 않으셨다. 고기가 많아도 주식보다 많이 먹지 않으셨다. 술은 양을 제한하지 않았으나 취해서 난잡하게 되는 일이 없으셨다. 시중에서 산 술이나 육포는 먹지 않으셨다. …나라의 제사를 도와주고 제물로 받아온 고기는 밤을 넘기지 않으셨다. 자기 집 제사에 썼던 고기는 사흘을 넘기지 않으셨고, 사흘이 넘은 것은 먹지 않으셨다….”

공자님이 ‘싫어하지 않으셨다’는 회는 고기육(肉=月)변이 들어간 膾이니,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생선회가 아니라 쇠고기회 곧 육회다. <예기> ‘내칙’에도 “고기의 날것을 잘게 썰은 것을 회라고 한다”라고 했으니, 회는 육회이며 그 조리법은 고기를 가늘게 채 써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에는 옛날부터 회라는 음식이 있었고, 이를 즐겨 먹었음이 확실한데, 지금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동물이나 생선의 날것을 먹는 일이 거의 없다. 중국의 역사소설가 진순신은, 11세기 송나라 시대 대시인 매요신의 시 ‘회를 차려놓고 좌객을 대접한다’에 ‘회’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이때까지는 회라는 음식이 중국에 건재하였으나 그 즈음에 창궐했던 대역병으로 말미암아 곧 사라진 것으로 추정한다.


회는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진 삼국시대 초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국시대 중기부터 고려 말까지 불교가 흥성한 시기에는 살생을 꺼렸으므로 전반적인 육식의 퇴조와 함께 사라졌다가 고려 말 육식을 되찾았을 때부터 다시 먹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사조에 따라 공자가 회를 좋아하였으므로 아무 저항감 없이 육류와 어패류 회를 먹었다.

<어우야담>에 “임진왜란 때 중국 군사 10만명이 오랫동안 우리나라에 주둔하였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회를 잘 먹는 것을 보고 중국 군사들이 더럽다고 모두 침을 뱉었다. 그것을 보고 우리나라 한 선비가 말하기를 ‘<논어>에 보면, 회는 가늘게 썰은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다고 하면서, 그 주에도 짐승과 물고기의 날것을 썰어 회를 만들었다. 일찍이 공자께서도 좋아한 것인데 어찌 그대들의 말이 그렇게 지나친가’라고 논박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처럼 회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되 중국에서는 사라져버렸고, 우리나라에 와서는 육회·생선회 외에 강회·두릅회·송이회 등 그 조리 대상이 다양하게 확장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그들의 입맛에 맞게 육회는 받아들이지 않고 ‘사시미’라는 이름으로 생선회를 크게 꽃피워 이제는 세계적 음식으로 발전시켰으니, 동양 삼국에서 회의 발전형태가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생선회를 제일 많이 주는 집이라는 어느 친구의 소개로 강원도 강릉 경포대 옆 사천항 삼다도회집(033-644-0234)을 찾았다. 제주도 출신으로 사천항 앞바다에서 해녀 일을 하는 이 집의 여주인 정순화씨가 직접 채취한 성게·해삼 등을 식당에 공급하고, 아들 최병관(30)씨가 주방 일을 하고, 올케 최필수씨가 서빙하는 가족경영 때문에 회를 많이 주는 것이 가능한 것 같다. 삼다도회집은 생선회도 좋지만 밑반찬에 따라 나오는 성게알 미역국이 몇번이고 앙코르를 하게 만든다.

 

회접시에 휘날리던 깃발

회가 일본에서 사시미로 불리게 된 사연… 강구미주구리막회집의 투박하고 고소한 맛

일본인은 장수하는 민족이다. 특정한 장수촌이 있다거나 세계 최고령의 노인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본 국민의 평균수명이 세계의 어느 나라들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이다. 일본 후생노동성 발표에 의하면, 2002년 현재 일본 여성의 평균수명은 85.23살로 세계 1위이고, 남성의 평균수명은 78.32살로 홍콩에 이어 두 번째라 한다. 유아기나 젊은날에 질병이나 사고 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나이까지 넣어 계산하는 것이 평균수명이고 보면, 보통 일본 노인들의 경우 ‘살았다면’ 90살 정도는 산다고 예측할 수 있다.

» 사진/ 강구미주구리막회집의 상차림. 투박스럽지만 뼈째 씹히는 고소한 막회 맛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근래 들어 일본인들의 평균수명이 매년 0.2~0.3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암·뇌혈관 질환 등 고령자들에게 많이 발생하는 병에 대한 진단·치료 기술이 발달해 사망률이 낮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육식을 좋아하지 않고 밥, 된장국, 채소절임, 생선으로 구성되는 그들의 소박한 식단이 장수를 뒷받침해주는 요인이라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그 중에서 생선에 대한 일본인들의 선호는 유별나다. 일본 사람들이 식용으로 하는 생선은 600여종이 넘는데, 가장 맛이 좋고 싱싱한 것은 회로 먹고, 두 번째 가는 것은 구워 먹고, 세 번째로 그도저도 아닌 것은 졸여 먹는다. 회로서 가장 높게 평가받는 것은 도미로, 일본에는 도미에 대한 책도 여러 권 있다. 도미 다음으로 회로 즐기는 것으로는 넙치, 다랑어 등이 있다. 그외 대부분의 생선은 굽거나 졸여서 먹는데, 그 중에서 연어는 염장하고 청어는 햇볕에 말려 조리하며, 정어리는 구이를 한다.

지난호에서 이야기했듯이, 생선회는 일본에서 꽃피워 이제는 ‘사시미’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 원형은 육고기 날것을 채로 썰어 먹는 중국 고대의 회(膾)에 닿아 있다. 회는 당나라의 문명과 함께 나라(奈良) 시대 이전에 일본에 유입되었는데, 육류를 싫어하고 생선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입맛에 따라 변용되어 생선회, 곧 사시미로 발전하였다. 우리나라는 중국·일본의 회 문화를 모두 받아들여 육고기이든 물고기이든 날것으로 먹는 것은 모두 회라고 하였고, 더 나아가 데치거나 날것으로 초장에 찍어 먹는 일체의 채소류 음식도 회라 한다. 그러면 생선회에 왜 ‘사시미’(刺身)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일본의 중세 막부정권 시절, 오사카성의 영주인 어느 쇼군에게 멀리서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쇼군은 요리사에게 식사를 준비시켰는데, 요리사는 주인의 귀한 손님을 위해 지지고 볶고 최대한 실력을 발휘하여 진수성찬을 마련했다. 산해진미로 가득찬 상에는 10여 가지 귀한 생선으로 뜬 회도 올라왔다. 쇼군과 손님은 모두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생선회를 맛있게 먹었는데, 손님이 쇼군에게 물었다. “이 생선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주인으로서 손님에게 대접한 음식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없었으니 쇼군이 무척 당황하였다. 이 상황을 눈치채고 요리사가 들어와 각각의 생선들의 이름과 회 뜨는 법 등을 자세히 설명하니 손님이 칭찬하여 쇼군의 체면이 살았다. 그리하여 요리사는 이후에도 쇼군이 생선 이름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맛을 즐길 수 있도록 묘안을 냈는데, 그것은 종이로 작은 깃발을 만들어 생선 이름을 쓰고 그 깃발을 생선회 접시에 꽂는 것이었다. 곧 ‘사시’는 ‘刺’이니 ‘찌르다, 꽂다’는 뜻이고 ‘미’는 ‘身’이니 ‘몸, 물고기·짐승의 살’이라는 뜻이므로, 생선의 살에 작은 깃발을 꽂았다 하여 생선회가 ‘사시미’(刺身)로 불리게 되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삼성역 근처에 가면 ‘강구미주구리막회집’(02-568-9430)이 있다. 막회란 울진·영덕 등의 동해안 포구에서 어부들이 갓 잡은 자연산 잡어들을 채썰어 초장에 버무려 먹던 음식인데, 그때그때 물 좋은 물가자미(미주구리)·청어·전어·한치·학꽁치·고동 등을 채썰고, 무채·무순·실파·부추·배·양파 등을 적당히 섞어 버무리는 것으로 모양과 맛을 발전시킨 것이 강구미주구리 막회다. 파르스름한 접시에 하얀 무채, 가지런한 생선회에 꽂은 형형색색의 작은 종이 깃발이 상징하는 일본적 미학의 ‘사시미’에 비하면 투박스럽지만 뼈째 씹히는 고소한 막회 맛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이름 모를 잡초’는 없다!

민중의 구황식품이자 밑반찬 돼준 들풀들… ‘예촌’에서 들풀 샤브샤브의 향기를 맛보라

“…산을 향해 가는 들길엔 이름 모를 잡초들이 여름을 과시라도 하는 듯 우거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서는 이름 없는 들꽃들이 나를 반기듯이 살포시 미소짓는다. …산에 오르니 우거진 숲 속에서 이름 없는 산새들이 쉴 새 없이 지저귀는 것이 마치 불협화음의 교향악을 듣는 것 같다.…”

나에게는 유명무명 문인들의 작품집 증정본이나 출간을 의뢰하는 원고들이 자주 우편으로 부쳐오는데, 우리 문단의 꽤 유명한 시인이 보내온 수필집에서 본 대목이다. 자기가 밟고 있는 이 땅, 그리고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에 대해 무한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문학적 미학으로 표현해야 할 시인이 풀포기 하나, 산새 한 마리 이름조차 모르고 두루뭉수리 ‘이름 모를’ ‘이름 없는’이라 횡설수설하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자기가 모르면 이름이 없는가? 잡초는 없다! 두루뭉수리 ‘이름 없는’ 풀 한 포기가 아니라 풀 하나하나에 모두 이름이 있다. 그리고 풀마다 각기 특성과 기능이 있어 ‘이름 모를’ 이 풀 한 포기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면 약초로도, 먹거리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대충 인간에게 유용한 ‘이름 모를’ 들풀들의 ‘이름’을 찾아보자.

» 사진/ ‘예촌’ 주인 박태순씨는 김제 들판에 널린 ‘이름 있는’ 들나물들을 손수 채취해와 토속 된장으로 샤브샤브를 만드는데, 그 향기가 기가 막히다.

고들빼기, 씀바귀, 냉이, 소루장이, 물쑥, 달래, 쑥, 무릇, 제비꽃, 순채, 벼룩나물, 미나리아재비, 꿩의다리, 속속이풀, 꽃다지, 가락지나물, 양지꽃, 딱지꽃, 개소시랑개비, 짚신나물, 갈퀴나물, 깨풀, 벌완두, 며느리밑씻개, 마디풀, 명아주, 자리공, 벼룩이자리, 점나도나물, 쇠별꽃, 선밀나물, 사상자, 파드득나물, 까치수염, 메꽃, 꽃마리, 광대나물, 구기자, 까마종이, 주름잎, 질경이, 솔나물, 마타리, 뚝갈, 떡쑥, 담배풀, 옹굿나물, 망초, 뽀리뱅이, 방가지똥, 민들레, 조뱅이, 뻐꾹채, 지칭개, 비름, 말, 소귀나물, 칠면초, 나문재….

이 ‘이름’들은 우리가 그냥 지나쳐버리는, 이름을 부를 가치조차 없는 잡초들로 여기는 것들이지만, 그 옛날 흉년이 들면 쌀 한줌에 듬뿍 죽 끓여 민중들의 생명을 잇게 한 귀중한 구황식품이었으며, 평시에는 세끼 밥상에 올라 입맛을 돋우는 서민들의 밑반찬이었다. 고정옥의 <조선민요연구>에는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채보한 들나물을 소재로 한 민요가 있다.


칩다꺾어 고사리

나립꺾어 고사리

어영꾸부정 활나물

한푼두푼 돈나물

미끈매끈 기름나물

돌돌말어 고비나물

칭칭감어 감둘레

잡아뜯어 꽃다지

쏙쏙뽑아 나생이

어영저영 말맹이

이개저개 지치개

진미백승 잣나물

만병통치 삽추나물

 

향기만만 시금치

사시장춘 대나물

 

지난 6월 문화기획가 이두엽, 연극인 김혜련씨와 함께 전주 풍남제에 갔다가 전주술박물관 관장의 안내로 김제의 아주 기막힌 식당에 들릴 기회가 있었다. ‘예촌’(063-546-5586)이 그곳이다. 주인 박태순(43)씨는 돌미나리, 민들레, 취나물, 쑥부쟁이, 두릅, 갓꽃, 달래, 칡순, 죽순 등의 들나물로 샤브샤브를 개발했다. 소, 염소, 토끼가 먹을 수 있는 들풀은 사람도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는 김제 들판에 널린 ‘이름 있는’ 들나물들을 손수 채취해와 토속 된장으로 샤브샤브를 만드는데, 그 향기가 기가 막히다. 된장비빔밥, 청국장, 무우밥, 콩나물밥, 국수 등은 바로 시켜먹을 수 있지만, 들풀 샤브샤브는 꼭 예약을 해야 가능하다.

 

밥이 하늘이다

사람에게 밥 한 그릇처럼 가깝고도 먼 것은 없어… ‘밥집 모시는 사람들’의 ‘진짜 밥맛’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갈라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먹는 것


1975년 3월, 국내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시인 김지하는 민청학련사건에서 인혁당 관련자들이 겪은 혹독한 고문 사례를 폭로한 ‘죄’로 중앙정보부에 다시 구속된다. 중앙정보부는 김지하를 영원히 제거할 목적으로 ‘가톨릭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로 조작하는 한편, 김지하의 마지막 진술서를 ‘나는 공산주의자다’란 제목으로 5개국어로 번역하여 전 세계에 배포함으로써 국제적으로도 완전 매장하려 획책한다.

그러나 그해 5월, 김지하는 자기에게 들씌워진 터무니없는 공산주의자 모략에 저항하기 위해 몰래 감옥에서 집필한 원고지 100여장에 가까운 그 유명한 ‘양심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박정희 독재정권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리고 이 ‘양심선언’은 사르트르, 보부아르, 촘스키, 몰트만, 카를 라너, 하버마스, 오에 겐자부로 등 세계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지지 서명하고 5개국어로 번역된 뒤, 그해 8월15일 일본·미국·유럽 세곳에서 일제히 전 세계 매스컴을 통해 발표되었으니, 이로써 수억원을 들인 중앙정보부의 공작은 폭삭 망하고 말았다.

‘양심선언’에는 김지하가 민청학련사건 당시 옥중에서 구상한 장시 <장일담>의 시작 노트에 얽힌 대목이 들어 있다. 백정과 창녀의 아들인 장일담은 도둑질을 하며 감옥을 들락거리다가 어느 날 득도, 혁명을 꿈꾸며 해동극락교를 선포한다. 그는 무리와 함께 마귀가 있는 서울을 향하여 ‘극락이란 밥을 나눠먹는 것’이며 ‘밥이 하늘이다’라고 선포하고 진군하지만, 이는 실패하고 배신자의 밀고로 잡혀 죽는다. 그는 한마디 변명도 없이 반공법·국가보안법·내란죄 등의 죄명을 쓰고 목이 잘리는데, 장일담은 이때 바로 위와 같은 ‘밥이 하늘이다’라는 노래를 부른다.

» 사진/ ‘밥집 모시는 사람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시고, 손님을 식구처럼 모시고, 유기농 채소를 참생명이 스며 있는 먹을거리로 모신다.
사람에게 밥 한 그릇처럼 가깝고도 먼 것은 없다. 한민족에게, 전 인류에게 밥 한 그릇처럼 숱한 시비가 얽힌 것도 없으며, 밥 한 그릇의 그늘처럼 숱한 거짓말을 감추고 있는 것도 없다. 놀부에게 밥 한 그릇은 너무 흔해 빠졌다는 뜻에 가깝다. 그러나 밥 한 그릇의 고마움을 안다는 뜻에서 본다면 놀부는 밥 한 그릇에 대하여 멀며, 흥부는 가깝다, 놀부는 밥 속에 틀어박혀 살면서도 밥의 뜻을 모르지만, 흥부는 밥과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밥의 뜻을 안다. 밥은 도대체 어디서 생긴 것인가 밥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밥은 우주의 젖이다. 젖은 사람 몸의 곡식이요, 곡식은 천지의 젖이다. 사람은 우주의 논과 밭에서 자라난 밥을 얻어먹는 것이지, 요술쟁이처럼 곡식을 날조해내서 먹지 않는다. 밥 한 그릇은 하늘과 땅 사이에 맺힌 열매이며, 농부들이 땀으로 빚은 젖이다. 그러므로 밥 한 그릇을 마주 대하면 하늘과 땅의 놀라운 자연적 창조에 감사함과 아울러 농부들의 정성어린 노고에 보답해야 하는 것이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 밑에 가면 경치도 좋고 인심도 좋고 음식맛도 좋은 ‘밥집 모시는 사람들’(031-774-8910)이 있다. 동학의 시천(侍天), 양천(養天), 체천(體天)에서 따온 ‘모시는[侍]’인데, 명함에 ‘밥대장 지광철’ ‘밥주인 남용미’라고 되어 있는 부부 모두 천도교 신자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파괴하지 않고 모시고, 손님을 자기 식구처럼 정성들여 모시고, 유기농 채소를 참생명이 스며 있는 먹을거리로 ‘모시는 사람들’에 가거들랑 너무 밥맛에만 취하지 말라. 한번쯤은 어려운 우리 이웃들,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과 어떻게 밥을 나눠먹을 것인가 고민해보시라.

 

정약용의 개고기 사랑

유배 중 형 정약전에게 보낸 개고기 요리법… ‘능안골’에서 실학파의 ‘입맛’을 떠올리다

조선을 개창한 이성계 쿠데타 세력의 ‘이데올로그’는 단연 정도전이었다. 그는 사회생활을 소홀히 함으로써 봉건 윤리를 지키지 않고, 이로써 국가마저 위태롭게 하였다고 보아 불교를 철저히 배척하고, 신흥조선의 통치원리로 “옛 사람의 덕을 밝히고 국민을 새롭게 할 실학”으로서 성리학을 채택했다. 고려왕조의 문란과 배원친명의 춘추대의적 의리관에서 쿠데타 합리화의 근거를 찾으려 했던 이데올로그들이 조선조의 기틀을 확립하기 위해 선정·덕치·예치의 성리학을 내세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성리학은 조선조가 완전히 기틀을 잡은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말까지 1세기간 성리학 특유의 의리의 실천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실천’은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예(禮)의 절대시, 명분론적 사고의 팽배, 기성질서에의 맹종·맹신으로 흐르면서 민중들의 삶과는 무관하게 지배층의 공리공담으로 치달았으니, 어지러운 당쟁, 참혹한 사화, 피폐한 민중생활이 그 극한에 닿아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 사회의 이러한 질곡을 혁파하고, 실사구시와 이용후생, 기술의 존중과 민중 경제생활의 향상을 지향하며 대두된 사상체계가 바로 실학이다. 이 ‘진짜 실학’은 정약용·정약전 형제, 이익, 유형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에 의하여 사회정책, 자연과학, 국학, 훈고학, 농학을 학문의 대상으로 하면서 실생활에서 상공업을 장려하고 각종 산업기술의 혁신을 강조하였다. 또 이들은 당시 봉건질서하에서 철저히 하층민이나 부녀자의 역할이었던 식품 가공이나 조리 등에 대해서도 상당한 연구결과들을 남겼는데, 박제가의 <북학의>, 이익의 <성호사설>에 그 내용들이 들어있다. 이러한 기풍은 18세기 초 서유구 일문에 이어져, <고사십이집> <해동농서> <규합총서> <옹희잡지> <임원십육지> 등의 조리·농서들을 찬술케 했으니, 우리 전통 음식의 전승에도 실학파는 큰 공헌을 한 것이다.

» 사진/ ‘능안골’은 대추·은행·인삼까지 곁들여 내놓는 수육이 일품이다. 주인 차문영씨는 경기도 토박이로 같은 자리에서 10여년째 이 식당을 열고 있다.

실학파 중 가장 우뚝한 분이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경집·문집 합하여 500권 이상의 저서를 집필함으로써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정인보)로 평가받는다. 다산은 18년이라는 극한적인 유배생활에서 끝없는 절망과 참혹한 고통과 싸우면서도 아들과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둘째형 정약전에게 올바른 삶의 방향과 학문적 이슈, 인간적 고뇌의 편지를 주고받는다. 다산이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 하나가 흥미롭다. 이 편지를 보면 다산은 무척이나 개고기를 좋아하였을 뿐 아니라 개잡는 법, 개 요리법에도 정통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요리법을 박제가에게서 들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박제가는 다산보다 한수 위의 ‘꾼’이었던 것 같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짐승의 고기는 전혀 먹지 못한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어찌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도라고 하겠습니까? 섬 안에 들개가 천 마리, 백 마리뿐이 아닐 텐데, 제가 거기에 있었다면 5일에 한 마리씩 삶는 것을 결코 빠뜨리지 않겠습니다. …5일마다 한 마리를 삶으면 하루 이틀쯤이야 생선요리를 먹는다 해도 어찌 기운을 잃는 데까지야 이르겠습니까? 1년 366일에 52마리의 개를 삶으면 충분히 고기를 계속 먹을 수가 있습니다. …들깨 한말을 이 편에 부쳐드리니 볶아서 가루로 만드십시오. …또 삶는 법을 말씀드리면, 우선 티끌이 묻지 않도록 달아매서 껍질을 벗기고 창자나 밥통은 씻어도 그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 속에 넣어서 바로 맑은 물로 삶습니다. 그러고는 일단 꺼내놓고 식초, 장, 기름, 파로 양념을 하여 더러는 다시 볶기도 하고 더러는 다시 삶는데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박초정(박제가)의 개고기 요리법입니다.”

경부고속도로 기흥나들목 근처에 있는 보신탕집 ‘능안골’(031-286-7080)은 대추·은행·인삼까지 곁들여 내놓는 수육이 일품이다. 주인 차문영(52)씨는 경기도 토박이로 같은 자리에서 10여년째 이 식당을 열고 있는데, 경기도 토박이인 나의 입맛에 딱 맞아 혹 대부분이 경기도 출신이었던 실학파들이 요리해 먹은 개고기도 이 맛이 아니었나 추측해본다.

 

[홍합밥] 울릉도를 사랑한 ‘영웅’

무능한 조정을 대신해 울릉도 지킨 안용복… 절경을 바라보며 ‘보배식당’의 홍합밥을 먹어보라

낡은 소재를 재탕삼탕 우려먹는 TV 사극을 보노라면 한여름의 무더위가 더욱 무덥게 느껴질 정도로 짜증이 난다. 왕이 근무처에서 정무를 보는 허구한 날, 대신들이 패거리를 지어 권력투쟁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근정전에서 몇백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에서는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왕비와 후궁들이 찧고 빻는 암투로 밤을 지새운다. 왜 TV나 영화에서는 이런 소재들만을 다룰까? 우리 역사에는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해내기 위해 활약한 민중 영웅들의 이야기가 없는 것일까?

숙종 시대에 살았던 안용복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동래 출신의 어부로 일찍이 수군에 들어가 복무하던 중 부산의 왜관에 자주 출입하여 일본말을 잘하였다. 안용복은 1693년 동래 어민 40여명과 함께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고기를 잡으러 침입한 일본 어민들을 힐난하다가 일본으로 끌려갔다. 안용복은 에도 막부에게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당당히 주장하고, 조선과 에도 막부 사이에서 대마도주가 쌀의 말과 베의 척을 속이는 등 농락이 심한 것을 밝혔다. 에도 막부는 안용복에게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써주었으나, 나가사키에서 대마도주에게 그 서계를 빼앗기고 귀국했다. 대마도주는 울릉도를 차지할 목적으로 서계를 위조하여 같은해 9월 사신을 동래에 보내어 안용복의 소환을 요구하는 동시에, 예조에 조선의 어민이 일본 영토인 울릉도에서 고기 잡는 것을 금지시켜달라고 요청하였다. 울릉도는 조선 초부터 왜구의 거점이 된다 하여 섬 전체를 비워두는 공도정책을 펴왔는데, 당시 조정은 무사주의 외교정책을 펴 비워둔 땅으로 인해 왜인과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며 일본에게도 조선의 공도정책에 협조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의 답서를 보냈다. 1696년 봄, 안용복은 다시 10여명의 어부들과 울릉도에 출어하여 마침 고기잡이 중인 일본 어선을 발견하고 독도까지 추격해 침범 사실을 문책하였다. 또 안용복은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 자칭하고 일본의 호키주에 가서 태수에게 일본 어민의 침범 사실을 항의해,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아, 이 늠름한 민중 영웅이여! 그러나 제 나라도 지키지 못해 땅을 비워둔 무능한 조정은 안용복이 나라의 허락 없이 국제분쟁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서울에 압송하여 사형까지 논의했으나 영의정 남구만의 만류로 귀양을 보냈다. 안용복의 활약으로 이듬해인 1697년, 대마도주는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했고 에도 막부는 울릉도를 조선 땅으로 확인한다는 통지를 조선에 보냈으나, 안용복은 끝까지 ‘죄’가 풀리지 않은 채 귀양지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1953년, 3대에 걸쳐 울릉도에서 살아온 홍순칠은 6·25전쟁의 혼란을 틈타 독도에 침입, 영토 표식을 하고 가는 일본으로부터 독도를 사수하고자 울릉도민 33명으로 ‘독도사수특수의용대’를 조직하였다. 이 의용대는 3교대로 독도에 주둔하면서 1954년 경찰이 정식으로 수비를 맡게 될 때까지 독도를 지켜냈으니, 오늘날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에서 우리나라가 우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분들의 공헌이다. 이 모두는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이야기다. 지난해에 타계한 서지학자 이종학 선생은 독도가 우리나라 영토임을 밝히는 울릉도, 독도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는 데 평생을 바친 분이다. 이 자료들은 현재 도동에 소재한 독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한번쯤 들린다면 독도에 대해 아는 사람은 더 잘 알게 되고, 모르던 사람은 알게 된다.

» 사진/ 보배식당의 홍합밥. 청정해역에서 나는 자연산 홍합을 잘게 썰어 밥을 지은 뒤 양념장에 썩썩 비벼 명이나물을 척 얹어먹는 맛은 참으로 일품이다.
8월 초 몇몇 친구들과 함께 울릉도로 휴가를 다녀왔다. 울릉도는 푸른 바다와 울창한 숲, 깊은 계곡, 기암절벽의 절경이지만, 먹을거리 또한 산해진미다. 성인봉 깊은 숲속에서 나는 명이나물, 삼나물 등의 산채, 청정해역에서 잡히는 각종 해산물, 약초로 키운 쇠고기 등 무엇을 먼저 맛보아야 할지 음식이야기 필자로서 고민이 많았다. 울릉도 지킴이 김경창씨와 함께 간 보배식당(054-791-2683·주인 이병주)은 홍합밥이 전문이다. 청정해역에서 나는 자연산 홍합을 잘게 썰어 밥을 지은 뒤 양념장에 썩썩 비벼 명이나물을 척 얹어먹는 맛은 참으로 일품이다. 홍합밥의 택배도 가능하다고 한다.

 

[쌈밥] 쌈 싸먹는 법도 가지가지

우리 고유의 음식 쌈밥은 어떻게 태어났나… ‘미소쌈밥’에서 떠올린 전통의 제조법

한국 음식의 상징적인 것으로는 탕,찌개,김치 그리고 쌈을 들 수 있다.그 중에서도 쌈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들 중에서 우리만이 즐기는 독특한 음식문화다.일본에 배춧잎이나 그 비슷한 야채로 들깨장아찌나 매실짱아찌를 넣고서 밥을 꼭꼭 말아 김초밥처럼 썰어 먹는 ‘메아리스시’란 것이 있지만 우리의 쌈과는 전혀 다르다.우리 민족은 채소 가운데 잎이 넓은 것은 모두 날것으로나 데쳐서 즐겨 쌈을 먹는다.쌈은 무엇을 ‘싼다’는 의미이므로,서민들은 쌈에 싸는 것을 ‘복’으로 상징화해 더욱 쌈을 즐겼는데,<동국세시기>에는 “정월 대보름날 나물잎에 밥을 싸서 먹으니 이것을 ‘복쌈’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 사진/ <시의전서>에 기록된 것과 같이 밥과 함께 생선조림을 싸먹는 쌈밥집 ‘미소쌈밥’의 상차림. 여수항에 그날그날 들어오는 싱싱한 고등어나 멸치를 매콤달콤새콤하게 졸여낸 생선조림을 밥 위에 얹어 싸먹는다.
쌈으로 쓰는 나물은 예부터 상추를 으뜸으로 꼽았으나 곰취·소루쟁이잎 등 산채는 물론이요,깻잎·호박잎·배춧잎·미나리·쑥갓·콩잎 등 농작물의 이파리,말·다시마 등 해초,그리고 밀전병도 얄팍하게 부쳐 쌈으로 썼다.요즈음에는 근대·당귀·신선초·겨자 등 식용이 가능한 식물의 이파리는 모두 쌈으로 쓰며,로즈·로맹·토스카노 등 외국에서 유입된 채소들도 훌륭하게 쌈 재료로 쓰고 있으니,우리 민족의 창조성에 바탕한 쌈의 발전이 무궁무진하다.

상추는 날로 먹을 수 있는 야채, 곧 생채(生菜)에서 나온 말이다.생채가 상치가 되고,상치가 상추로 되어 표준말로 굳어졌지만,원래 상추는 상치의 서울 사투리일 뿐이다.상추는 유럽과 서아시아 등지에 자생하는데 그 지역이 원산지로 추측되고 있다.기원전 4500년경의 이집트 벽화에 상추가 그려진 것으로 보아 그 재배가 오래 전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지며,우리나라에도 중국을 거쳐 오래 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그러나 중국의 고서인 <천록지여>에 ‘고려의 상추는 질이 매우 좋아서 고려 사신이 가져온 상추 씨앗은 천금을 주어야만 얻을 수 있다고 해서 천금채(千金菜)라 한다’고 했으니,중국에서 들어온 상추가 품종이 개량되어 다시 중국으로 역수출된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상추쌈은 상당히 일찍부터 먹어온 듯,고려시대에 원나라로 끌려간 고려 출신 궁녀들이 원나라 왕궁의 뜰에 상추를 심어 밥을 싸서 먹으며 강제로 끌려온 머나먼 이국 땅에서 목숨을 이어가는 슬픔을 달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바,원나라 시인 양윤부가 이를 눈여겨보아 다음과 같이 시로 읊기도 했다.


해당화는 꽃이 붉어 좋고

살구는 빛이 누래서 보기 좋구나

더 좋은 것은 고려의 상추로서

마고의 향기보다 그윽하구려

우리의 옛 기록에는 쌈을 먹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어우야담>에는 “손바닥에 상춧잎을 놓고 숟가락으로 오려 밥을 떠 들고 붉은 장으로 적시고 익게 구운 고기를 잎에 합하여.…입시울을 벌리니 종루 파루 친 후에 남대문이 열리듯 하니…”라고 약간 ‘상스럽게 쌈 싸먹는 광경’을 그리고 있으며,영·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는 <사소절>에서 “상추,취,김 따위로 쌈을 쌀 적에는 손바닥에 직접 놓고 싸지 말라.…그리고 입에 넣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싸서 볼이 불거져 보기 싫게 하지 말라”고 하여 ‘점잖게 쌈 싸먹는 법’을 권하고 있다.그리고 조선 말기의 조리서인 <시의전서>에는 ‘표준으로 상추쌈 먹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상추를 정히 씻어 다른 물에 담고 기름을 쳐서 개어 담고,고추장에 황육을 다져놓고 웅어나 다른 생선을 넣어 파를 갸름하게 썰고 기름 쳐서 실파와 쑥갓을 항상 곁들여 담으라.”

전남 여수에 가면 <시의전서>에 기록된 것과 같이 밥과 함께 생선조림을 싸먹는 쌈밥집 ‘미소쌈밥’(016-652-49000)이 있다.주인 김영신씨(53)가 이 쌈밥을 9년 전에 개발하여 식당을 열었는데, 여수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여수항에 그날그날 들어오는 싱싱한 고등어나 멸치(징어리)에 우거지와 고구마순을 깔고 국물이 자잘하게 되도록 매콤달콤새콤하게 졸여낸 생선조림을 밥 위에 얹어 각종 싱싱한 야채로 싸먹는 그 감칠맛이라니,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같은 재료, 같은 맛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분점을 열어 서울에서도 여수 ‘미소쌈밥’을 맛볼 수 있다(02-553-5556).

 

김치의 이름을 찾아…

고려 · 조선시대 거치며 변천 거듭, 피로를 ‘죽여주는 동치미 국수’집

무나 배추 따위를 양념하지 않고 통으로 소금에 절여서 묵혀두고 먹는 김치를 흔히 ‘짠지’라고 하는데, 황해도·함경남도 지방에서는 보통의 김치 자체를 짠지라고도 부른다. 또 경기도 지방에서는 무를 절이지 않고 소금물에 짜지 않고 삼삼하게 담근 김치를 ‘싱건지’라고 부른다. 오이를 짠지 비슷하게 담근 것은 ‘오이지’다. 이 밖에 부추도 고춧가루와 젓갈로 버무려 김치를 담그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이 부추김치를 ‘솔지’ 또는 ‘정구지’라고 한다. 장아찌는 무, 배추, 오이 등을 썰어 말린 뒤에 간장에 절인 반찬을 말하는데, 우리의 옛 조리서에는 ‘장지’라고 되어 있다.

» 사진/ 얼음을 동동 띄운 새콤한 김치 국물에 쫄깃한 면발의 국수를 말아먹으면 가슴속까지 시원해 무더위, 피로, 스트레스쯤은 이 한 그릇으로 ‘죽여준다’.
이 짠지, 싱건지, 오이지, 솔지, 정구지, 장지 등에 붙은 ‘지’란 무엇일까? ‘지’는 16세기에 김치의 옛말인 ‘딤채’가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렀던 김치의 이름이다. 12~13세기에 걸쳐 살았던 고려시대의 시인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김치 담그는 것은 ‘염지’(鹽漬)라고 했는데, ‘漬’는 적실 지, 물에 담글 지로 풀이되므로 곧 ‘지’가 김치임을 추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 말기가 되면서 ‘지’는 슬며시 사라지고 갑자기 ‘저’(菹)가 김치를 뜻하는 말로 떠오른다. ‘저’는 <시경>의 “오이를 깎아 저를 담자”는 시구에 처음 나오는 말인데, <설문해자>나 <석명>에 ‘저는 신맛의 채소’ 또는 ‘초에 절인 오이가 바로 저’라고 되어 있으니, 우리의 김치와는 다른 오늘날의 피클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지’가 ‘저’로 되었을까?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신라의 문물과 국가정신을 이어받아 불교를 사회안정의 수단과 봉건제의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였다. 불교는 고려 왕실의 전폭적 후원으로 몽골이 침입하기까지 명실 공히 국교로서 전 고려사회를 지배했으나, 고려 중기 주자학의 유입으로 점차 유교 세력에 눌리게 되었다. 그러나 유교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예에서 보듯이, 철저히 복고주의·사대주의·모화사상으로 흘러서 사회 전반에 걸쳐 우리 것을 버리고 중국 것만 숭상했으니, <시경>에 나왔다 하여 김치를 중국에서도 6세기 이후에는 거의 쓰지 않았던 글자인 ‘저’로 불렀다.

‘딤채’라는 말은 조선 초기에 보인다. 1518년 <벽온방>에 “무딤채국을 집안 사람이 다 먹어라”라는 구절이 나오며, 1525년 <훈몽자회>에는 저(菹)를 ‘딤채 조’라 하였다. 그러면 ‘딤채’는 무엇일까? 이때의 김치는 고춧가루와 젓갈을 쓰는 오늘날의 김치와는 달리, 소금을 뿌린 채소에다 마늘 같은 몇 가지 향신료만을 섞어서 절임으로써 채소의 수분이 빠져나오고, 채소 자체는 소금물에 침지(沈漬)되는 형태이거나, 동치미처럼 소금의 양이 많으면 마침내 가라앉는 형태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김치는 가라앉은 채소 곧 ‘침채’(沈菜)로 불리고, 침채가 ‘팀채’로, 다시 이것이 ‘딤채’로 변하고, 딤채가 구개음화하여 ‘김채’가 되었으며, 이것이 변해 오늘날의 ‘김치’가 되었으니, 김치가 중국으로부터 ‘김치 주권’을 회복하여 자기 이름을 갖기까지의 길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진다. <여씨춘추>에 의하면 “주나라 문왕이 저를 즐겨 먹었다 하므로, 이 말을 들은 공자께서 주 문왕을 존경하는 나머지 모든 행위를 그를 따르기 위하여 콧등을 찌푸려가면서 저를 먹어서, 3년 뒤에는 이 맛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2500년 전, 시어빠진 피클을 김치랍시고 상을 찌푸려가며 드시는 공자님의 모습과, 지난 봄 ‘사스’에는 김치가 특효라는 소문에 새콤매콤한 우리나라 김치를 허겁지겁 구해 먹어대는 공자님 후손들의 모습을 오버랩하며 상상해 보는 맛이 참으로 고소하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새콤매콤한 배추 물김치로 국수를 말아내는 ‘죽여주는 동치미 국수’(주인 이순명·031-576-4070)집이 있다. 얼음을 동동 띄운 새콤한 김치 국물에 쫄깃한 면발의 국수가 말아나오고, 여기에 다진 청양고추를 곁들여 먹으면 가슴속까지 시원해 무더위, 피로, 스트레스쯤은 이 한 그릇으로 ‘죽여준다’.

 

[용호봉황탕] 용 · 호랑이 · 봉황의 섞어찌개?

용호봉황탕과 중국의 헤아릴 수 없는 음식들… ‘동해반점’은 진짜배기 산둥요리의 맛

용호봉황탕(龍虎鳳凰湯)이라? 중국을 여행하다가 광둥성 어느 도시의 식당에 들어갔는데, 메뉴에 용호봉황탕이라는 음식이 올라 있다면 도대체 무슨 재료로 어떻게 조리한 음식인지 알 수 있을까? 우리 식으로 생각하면 용과 호랑이, 봉황의 섞어찌개인 것 같은데, 호랑이 고기는 그렇다 치고 신화에나 나오는 용과 봉황의 고기는 또 무어란 말인가? 중국음식의 이름은 대개 재료, 조리법, 첨가 조미료나 향신료, 재료의 모양이나 배합 형태 등을 조합해 붙여진다. 조리법으로서 탕(湯)은 ‘찌개와 같이 국물은 적고 건더기가 많이 들어간 국’이고, 차오(炒)는 ‘중간 불로 기름에 볶는 것’, 사오(燒)는 ‘기름에 볶은 뒤 삶는 것’ 등이다. 또 조미료로서 더우장(豆醬)은 된장, 추(醋)는 식초, 라자오(辣椒)는 고추를 말하며, 요리의 재료로서 룽(龍)은 뱀고기, 후(虎)는 너구리고기, 펑(鳳)은 닭고기, 톈지(田鷄)는 개구리고기를 일컫는다.

» 사진/ 동해반점의 양장피. 주인 장수산씨는 산둥성 출신으로 38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이 집을 지켜왔다.
이제 용호봉황탕의 정체가 드러난다. 이 음식은 지난 봄 ‘사스 파동’ 이전까지 광둥성 일대에서 남성들의 정력보양식으로 이름을 날린, 얼굴 모습이 너구리를 닮은 사향고양이 고기에 뱀을 토막 쳐 넣어 만든 탕을 말한다. 이 음식에 닭고기가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봉황’을 넣은 것은 아마 정력보양음식으로서의 신비감을 더하려는 속셈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음식의 주재료인 사향고양이 고기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주방장에게 옮겨가 전 세계에 공포의 ‘사스 파동’을 일으켰으니, 보양은커녕 인류 멸망에 이르지 않은 게 다행이다. 흔히 중국인들은 네발 달린 것 중에서는 책상,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 중에서는 잠수함, 하늘을 나는 것 중에서는 비행기를 빼놓고는 모든 것을 요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원숭이 골, 곰 발바닥, 상어 지느러미, 제비집, 뱀, 개구리, 쥐고기부터 누에번데기, 매미, 귀뚜라미, 물방개, 개미, 모기눈알, 벼멸구, 나방, 굼벵이 등에 이르기까지 음식물의 재료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엽기적인 것들을 모두 요리하고 있으니, 그렇게 이야기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중국음식이 이토록 다양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중국은 광활하다. 광대한 국토인 만큼 기후도 열대에서 한대까지 다양하며, 티베트 같은 고원지대에서 끝없는 평야와 사막, 수많은 강과 호수, 바다에 연한 긴 해안선을 갖고 있으므로 다양한 먹을거리가 생산된다. 둘째, 중국은 5천년 이상의 역사문명을 유지해오면서 음식문화를 축적해왔고, 또 중국 각지에서 각기 토착문화를 유지해오는 55개 소수민족들 또한 자기들의 음식문화를 독창적으로 발전시켜왔다. 셋째, 중국은 유사 이래 중앙집중적 국가체제를 지향해왔는데, 이에 모든 산물이 제왕들이 있는 수도로 집중되고 동시에 역대 제왕들의 호화로운 미식성과 불로장수에 대한 염원이 ‘최고의 요리’를 발전시켜온 것이다. 넷째, 중국은 인구는 많은데 전쟁, 한재, 수재 등의 재해가 자주 있어 서민들은 곡식, 육류, 채소는 물론 야생동물, 곤충까지도 구황식품으로 장기 저장, 비축해왔다. 이 과정에서 특수요리나 그 조리법이 다채롭게 개발되었으니, 오리알 등 조류의 알을 썩혀서 저장하는 삐딴류가 그 예이다.

중국요리와 프랑스요리가 쌍벽을 이룬다 하지만, 둘의 단순비교는 무리이다. 중국의 넓이가 유럽에 상당하고, 또 수십개의 소수민족으로 나뉘어져 있는 만큼 프랑스요리는 중국으로 치면 한 지방의 요리인 셈이다. 곧 프랑스요리가 북경요리라면 이태리·독일 요리격인 산둥요리, 광둥요리, 사천요리 등이 있다. 우리나라 중국집들은 우리 입맛에 맞는 북경·산둥 요리, 사천요리를 주로 한다. 북경·산둥 요리는 면류·육류·해산물 요리가 많고, 조미료를 듬뿍 넣어 맛이 강하다. 그리고 사천요리는 매운맛이 많이 난다.

고교 친구 김기창군이 자기 단골인 서울 대림동 ‘동해반점’(02-832-4430)을 침이 마르도록 추천하기에 며칠 전에 다녀왔다. 주인 장수산(張守山)씨는 산둥성 출신으로 38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이 집을 지켜왔다고 한다. 50여 가지에 이르는 이 집의 중국요리는, 맛은 어느 특급호텔에도 뒤지지 않고 양은 서너명이 먹기에 충분하지만 모두 3만원을 넘지 않으니, ‘띵호아(挺好)!’다.

 

[짜장면] 한번 짜장은 영원한 짜장!

계란 빠뜨린 짜장면에 응징을 가하는 운동본부… 대창반점의 감칠맛에 ‘이적행위’를 저지르다

초등학교 시절 경기도 용인의 신갈지역에는 음식점이 딱 하나 있었다. 푸슬푸슬하게 담은 보리밥 도시락을 콩자반 반찬으로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후딱 비우고, 오후 내내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뛰어놀다가 뉘엿뉘엿 지는 해와 함께 허기가 져 집으로 돌아갈라치면, 오거리 못 미쳐 그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가 어린 나의 회를 더욱 동하게 만들었다. 얼기설기 들여다보이는 주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밀가루 반죽을 치고늘여 국수를 뽑고, 자루 달린 무쇠 냄비를 연탄불 위에 놓고 연방 짜장을 볶는데, 아 그 고소한 냄새라니! 그러나 춥고 배고팠던 그 시절, 어린 나에게까지 돌아올 ‘화폐경제’가 있을 리는 없고, 주먹을 불끈 쥐고 집으로 내달리는 나의 등에 텅빈 도시락 소리만 요란하다. 지금 돈으로 치면 3천원쯤 될까?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학교 대표로 용인군교육청에서 실시하는 학력경시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장롱 속에 꼬깃꼬깃 묻어둔 지폐 몇장을 꼭 쥐어주시면서 시험 끝나면 짜장면이나 한 그릇 사먹으라 하셨다. 국어, 산수, 사회…. 나는 경시대회 답안지를 채우는 내내 시험 끝나고 사먹을 그 짜장면의 고소한 냄새가 떠올라 군침을 삼키느라 바빴다.

» 사진/ 대창반점의 짜장면은 돼지고기와 감자만을 넣어 볶은 짜장에 쫀득한 국수를 비벼 먹는 감칠맛이 일품이다.

짜장면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면서 인천에 청국지계가 만들어지고, 이때 물밀 듯이 들어온 중국인들이 부두 노동자들을 상대로 팔았던 싸구려 음식이다. 곧 중국 산둥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밀가루장을 볶아 국수 위에 얹어 비벼 먹게 한 것이 짜장면인데, 그래서 한자로 쓰면 불에 튀길 작(炸), 간장 장(醬), 밀가루 면(麵)하여 ‘작장면’(炸醬麵)이다. 그런데 ‘작’(炸)은 혀를 입 안으로 깊이 말아올리면서 ‘짜’에 가깝게 발음되기 때문에 현재의 표준말인 ‘자장면’보다는 ‘짜장면’이 더 맞다. 안도현은 어른을 위한 동화 <짜장면>에서, 자기는 어떤 글을 쓰더라도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표기하지 않겠다고 한다. ‘자장면’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것일 뿐, ‘짜장면’의 추억이 가득한 아이들에게 맞춤법이라고 하여 ‘자장면’이라 할 수는 없을 뿐더러 어느 중국집도 ‘짜장면’일 뿐이라고 말한다. 회원이 14명인 다음카페의 ‘짜장면되찾기국민운동본부’(jjajjajjajang)도 “짜장면을 잃어버린 것을 허탈해하며, 자장면에게 빼앗긴 짜장면이란 우리 고유의 서민 명칭을 수구학자들에게서 되찾아 다시 회복하기를 바라는” 목표를 갖고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중국 산둥인들의 요리법과 우리의 기호가 습합하여 독창적인 ‘한국적 짜장면’을 만들어냈으니, 새하얀 대접에 쫄깃한 국수 사리를 가지런히 넣고, 그 위에 초콜릿색의 짜장을 부은 다음, 정갈하게 썰은 오이채, 파르스름한 완두콩 몇알, 노오란 옥수수 알갱이 약간, 그리고 삶은 달걀 반쪽을 살포시 얹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한국적 짜장면’이 사라져가고 있다며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있다. 다음카페의 ‘자장면계란회복전국민운동본부’(jajanggohost)의 회원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옛날과는 달리 짜장면에 계란 반쪽을 올려주지 않는 집이 대부분인 데 분개하여, 각 회원이 파악한 계란 올려주는 중국집을 소개하고, 계란을 올려주지 않는 중국집에 대해서는 불매운동을 펼친다. 이들은 또 계란을 올려주지 않는 중국집에 대한 ‘테러’ 활동도 권장한다. 엉뚱한 집으로 짜장면 배달시키기 등등.

짜장면을 취재하러 짜장면의 태생지 인천의 차이나타운엘 갔다. 짜장면을 좋아하는 인천 아이 박용훈, 이우재와 함께 미식가 윤영수씨의 안내를 받아 ‘대창반점’(032-772-0937)의 짜장면 맛을 보았는데, 산둥 출신 주인 유순화씨의 50년 내공이 느껴진다. 돼지고기와 감자만을 넣어 볶은 짜장에 쫀득한 국수를 비벼 먹는 그 감칠맛에 ‘자장면계란회복전국민운동본부’ 회원인 나는 회원으로서의 임무 수행은커녕 이렇게 그 집을 소개하는 글까지 쓰고 있으니, ‘운동본부’ 회원들이여, 나의 ‘이적행위’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라..

[보리밥] 이것이 어디서 온 곡식인고?

보리 맥(麥)자에는 왜 올 래(來)자가 들어 있을까… ‘송풍정’에서 맛본 푸슬푸슬한 보리밥

<논어> ‘미자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끼니때가 되어 공자에게 드릴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도중에서 일행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급히 일행을 뒤쫓아가다가 자로는 긴 작대를 메고 옆에 바구니를 차고 가는 노인을 만나 “우리 선생님을 보지 못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런즉, 노인은 “손발도 움직이지 않고 오곡의 구별도 모르는 자가 무슨 선생님이란 말인가”라고 중얼대며 그대로 작대기를 밭에 놓고 열심히 풀만 뜯기 시작했다. 이 노인은 실은 은자로, 공자가 노동을 하지 않고 하늘의 가르침이니, 땅의 이치니, 인간의 근본이니 하며 찧고 빻지만, 인간의 목숨을 이어주는 밭에 심어 있는 곡물이 조인지 피인지 구별조차 못하는 공자를 비웃은 것이다.

» 사진/ 굶주림의 기억조차 맛스러움을 더해준다. 옛날 맛, 옛날 인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송풍정의 상차림.
여기에서 처음으로 ‘오곡’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오곡은 다섯 가지 중요한 곡식을 뜻하기도 하지만 ‘오곡백과’라는 말과 같이 모든 곡물을 지칭하기도 한다. 또 오곡도 그 종류가 문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예를 들면 <맹자>의 “오곡이 익어서 사람들이 자란다”라는 구절의 주석에는 “오곡은 벼, 기장, 보리, 콩, 피를 말한다”고 되어 있다. 또 <주례>의 의술에 관한 기술에 “오미, 오곡 오약을 가지고 그 병을 치료한다”고 되어 있는데, 그 주석에는 “오곡은 삼, 기장, 피, 보리, 콩이다”라고 풀이하고 있어 벼를 빼고 삼을 오곡에 포함하고 있다. 오곡에 삼이 들어간 것은, 삼의 줄기에서 섬유를 채취할 수 있으므로 그것으로 실을 잣고 베를 짜서 의복의 소재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삼이 먹을거리는 아니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작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또 당시 벼는 양쯔강 이남에서만 재배되는 작물이었고, 화중·화북·만주지방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것은 근세의 일이다. 곧 그 즈음에 밀을 대량으로 심기 시작하여 중국인의 주식에서 밀가루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자 벼가 오곡에서 탈락한 것이다.

오곡 중에서 보리는 ‘맥’(麥)이라고 쓰는데, 갑골문이나 청동기의 명문에는 ‘래’(來)라는 자형이 보리를 의미하였다. 곧 보리는 최초에는 ‘來’라고 씌었고, 후세에 ‘來’ 아래에 ‘(뒤쳐올 치)’를 보태 ‘麥’으로 되었는데, ‘뒤쳐올 치’는 인간의 발을 본뜬 상형문자로, 여기서 발의 모양을 더해 쓴 것은 보리의 웃자라는 것을 막고 뿌리가 잘 펴지도록 늦가을에 ‘보리밟기’를 행하기 때문이다. 왜 ‘오다’라는 의미의 ‘來’가 보리를 지칭하게 되었을까? 중국 신화에 의하면, 보리는 하늘에서 인간계에 내려진 멋진 곡물이라 한다. 곧 천상의 세계에서 ‘온’(來) 것이므로 ‘오다’(來)라는 말로 그 곡물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경>의 시 <사문>(思文)에 “나에게 래모(來牟·보리모종)를 보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주석에 의하면 주나라의 무왕이 포악한 은나라의 주왕을 쳐부수고 주나라를 세워 이상적 세상을 실현했을 때, 하늘이 무왕의 공적을 치하해 내린 가곡(嘉穀)이 보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來’는 은나라 시절의 갑골문자에 이미 들어 있으므로, 주나라의 건국과 함께 “보리가 하늘에서 왔다”는 것은 허구이고, 다만 보리가 지중해 동부 연안이 원산지여서 서쪽에서 보리가 전해져 왔으므로 ‘먼 곳에서 온 곡물’이라는 의미로 ‘래’(來)가 되었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10여년 전 광주대학교 총장이셨던 고 성내운 선생님과 무등산을 등산하다가 토끼등 초엽 커다란 당산나무 아래서 등산객들이 보리비빔밥을 시퍼런 열무잎에 쌈싸 먹는 것을 보고 끼어들었다. 갖은 나물에 푸슬푸슬하게 지은 보리밥을 고추장에 썩썩 비벼 먹으니, 그 옛날 굶주림의 기억조차 맛스러움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며칠 전 무명산악회의 무등산 등산길에 일행을 졸라 당산나무 집 송풍정(062-227-1859)을 찾았다. 22년 전 전국 최초로 보리밥집을 열었던 박형민씨는 몇년 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박승운씨가 대를 잇고 있는데, 한 그릇에 300원 하던 것이 5천원으로 오른 것 이외에는 아직도 옛날 맛, 옛날 인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무척 반가웠다.

 

[비빔밥] 제삿밥, 하늘을 날다

제물을 골고루 나눠먹다 발전한 비빔밥… 전주비빔밥 원형을 찾아 ‘가족회관’으로

1800년대 말의 조리서 <시의전서>에는 비빔밥을 ‘부밥’(汨董飯)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골’(汨)은 어지러울 골이고 ‘동’(董)은 비빌 동이다. 곧 골동은 여러 가지 물건을 한데 섞는 것을 말하므로, 골동반이란 이미 지어놓은 밥에 여러 가지 찬을 섞어서 한데 비빈 음식이다. 이 책에 나오는 우리 비빔밥은 이렇다. “밥을 정히 짓고, 고기는 재워 볶고, 간납은 부쳐 썬다. 각색 남새를 볶아놓고, 좋은 다시마도 튀각으로 만들어 부숴놓는다. 밥에 모든 재료를 다 섞고 깨소금·기름을 많이 넣어 비벼서 그릇에 담는다. 위에는 잡탕거리처럼 계란을 부쳐서 골패짝만큼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부쳐 얹는다. 장국은 잡탕국으로 해서 쓴다.”

» 사진/ ‘가족회관’은 사골국물로 밥을 짓기 때문에 밥알 하나하나 윤기가 나고 밥맛이 아주 고소하다.
왜 비빔밥일까? 경제생활이 어려웠던 시절, 우리나라에서는 차례가 곁들이기 마련인 설날·추석과 잔칫날, 그리고 조상들의 제삿날, 치성굿·마을굿·당굿 등 굿을 하는 날에는 잘 먹었고, 보통 날에는 그렇지가 못했다. 특히 제사를 마치고 나면 술이나 그 밖의 제물을 참여한 사람들이 골고루 나누어 먹는다. 이를 ‘음복’이라 한다. 그런데 산신제, 당제 등은 동네의 먼곳에서 지내기 때문에 그릇을 제대로 갖추어갈 수 없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는 날 제물은 신과 사람이 골고루 나눠먹어야 하니, 그릇 하나에 이것저것 받아 섞어서 먹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제삿밥을 먹다보니 비빔밥으로 되었을 것이고, 이는 안동지방에 제사가 아닌데도 제사 때처럼 음식을 차려 비벼먹는 ‘헛제삿밥’이란 것이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도 확인된다.

중국, 일본 음식과 비교해 우리나라의 잡탕찌개를 비판한 글을 보았다. 식품 하나하나의 독특한 맛을 살리지 못하고 몽땅 쏟아넣고 끓이니 그게 제대로 된 음식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모르는 소리다. 우리에게 잡탕에 들어가는 재료 하나하나의 별개의 음식이 없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또 육고기 찌개는 각기 지방의 조성이 달라 이 고기 저 고기 섞어 잡탕찌개를 하면 맛이 이상해지지만, 해산물은 이것저것 넣은 잡탕이라야 감칠맛이 난다. 비빔밥도 마찬가지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찬 하나하나를 따로이 먹어도 맛있지만, 이들이 뒤섞여 나오는 오묘한 맛은 또 새로운 것이다. 대한항공의 기내식으로 제공되는 비빔밥이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높고, 몇년 전 공연차 내한한 마이클 잭슨이 우리의 비빔밥 맛에 반해 체류기간 내내 비빔밥으로 끼니를 때웠다지 않은가?


전주 부근을 가는 길에 서너번 비빔밥 전문집엘 들렀다. 그러나 내 생각엔 모두가 전주비빔밥의 ‘원형’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밥을 유기그릇에 푸슬하게 담고, 여기에 쇠고기볶음과 고사리, 도라지, 콩나물, 시금치, 무나물 등 제철 나물을 정갈하게 얹은 다음,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려 고추장에 썩썩 비빈 뒤 나박김치와 무탕국을 곁들이는 것이 전주비빔밥의 참맛이 아닐까? 그러나 너무 뜨거워서 함께 넣는 나물들이 익어버려 그 향을 잃어버린 돌솥비빔밥을 전주비빔밥이라고 내놓는가 하면, 비빔에 들어가는 내용물이 10여가지가 넘고 딸려나오는 반찬도 20여 가지나 넘는 그 허례를 전주비빔밥의 족보에 마구 잇대어 붙인다. 식당들간의 경쟁 때문에서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입맛이 더 큰 자극을 찾아서인지 소박하게 출발했던 비빔밥이 너무 호화롭게 변한 것이다.

지난주 전주산조예술제에 들른 길에 전주 문화예술인들의 추천으로 비빔밥 전문집 ‘가족회관’(063-284-2884)을 찾았다. 김연임(65)씨가 25년 전부터 연 이 집은 사골국물로 밥을 짓기 때문에 밥알 하나하나 윤기가 나고 밥맛이 아주 고소하다. 이 집도 차림표에 돌솥비빔밥이 있지만, 내가 비빔밥의 원형이라고 생각하는 유기비빔밥도 따로 있어서 시식해 보았는데 그런대로 보아줄 만했다.

 

[회] 왜 유명 요리사는 다 남자지?

제사장부터 프랑스 왕실로 이어지는 요리사의 역사… 취미도 직업도 요리뿐인 횟집 ‘율도’ 주인

호텔 음식점이나 중국요리집, 일식집에 가보면 요리사가 대부분 남자다. 그리고 고급 음식점일수록 요리사는 여자보다 남자가 많다. 주방에서 여자들도 일하지만 대개 조리재료 준비, 그릇 씻기 등 남자 주방장의 보조 역할을 할 뿐이다. 또 집안에서도 남편이 요리하는 것은 ‘특별한 취미생활’이고, 아내가 요리하는 것은 ‘당연한 가사노동’이다. 곧 요리가 ‘일’이 될 때는 여성의 차지이고, ‘직업’이 될 때는 남성의 전유물이 되니, 여성들로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그러나 여성들이여, 만물에는 다 그럴 만한 사연과 이치가 있는 것이니, 너무 흥분하지 말고 아래의 글을 읽어보시라.

» 사진/ 도톰하게 써는 ‘율도식’ 생선회, 각종 젓갈무침, 얼큰한 갈치탕, 시원한 생선뼈 미역국 등이 서울 여의도 샐러리맨들을 쉴 새 없이 ‘율도’로 끌어들인다.
수렵과 채집의 원시시대에 음식물을 요리하는 일은 항시 여자가 담당해왔다. 남자들은 맨손으로 또는 보잘것없는 도구를 사용해 들짐승들을 어렵게 사냥하는 데 지쳐버렸기 때문에 그 노획물을 요리하는 것에 더 이상 힘을 쏟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면서 들짐승들을 가축화하고 곡물을 재배하게 되자 먹을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남자들의 노동은 훨씬 줄어들게 된다. 또 그 즈음부터 사람들은 음식물을 신(神)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고 생각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음식물을 준비하는 데 제의(祭儀)적 요소가 가미되고, 따라서 음식 준비도 남자의 의무로 여겨지게 되었다. 곧 제정일치 시대에 부족사회의 우두머리인 남자가 제의 의식을 전적으로 담당함으로써 제상에 올려지는 음식 준비도 남자의 주관하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제의 의식에서 신에게 바쳐진 음식이란 무엇인가 신을 인격화해 가장 좋은 식품, 가장 진귀한 식품, 가장 맛있는 식품을 바쳐 신에게 드시라 하지만 실상 신에게 바쳐진 건 코를 찌를 듯 풍기는 음식 냄새뿐이고,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은 제의를 주관하는 제관과 일반 백성들이다. 먹을거리가 넉넉지 못한 그 시절 음식을 나눠주는 권한 역시 남자인 제관이 가지고 있으니 그 위세가 높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고대 유습은 로마시대를 거쳐 중세까지 이어져왔으니, 서양 중세사회 사람들에게 있어 연회석에서 고기를 잘라 나누어주는 일은 선택된 자의 특권이었고 중요한 기술이었다. 이를테면 무술 경기에서의 승리자는 선물로서 자기가 숭모하는 귀부인의 총애를 받는 외에 승리의 보상으로 연회석에서 고기를 잘라 참석자에게 나눠주는 특권을 부여받기도 했다. 또 귀족 가문에서는 고기를 나누는 역할을 신사 계급의 아들에게 맡겼고, 왕실에서도 음식을 잘라 나누는 일과 조리하는 일 모두를 귀족 계급에게 맡겼는데, 그들은 음식을 나눈 뒤 독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손에 묻은 음식물을 핥아먹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이14세부터 루이16세 시기까지 왕실과 귀족층의 프랑스 요리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으로 귀족층이 몰락하자 이들 저택에서 요리를 하던 ‘유명 요리사들’이 생존을 위해 식당을 개업했으니, 이때부터 본격적인 직업 요리사가 등장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진 것이다.

서울 여의도의 일식집 ‘율도’(02-784-8877)의 사장 이춘형(52)씨만큼 자기 직업에 긍지를 갖는 사람도 없다.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요리사로 일해온 그는 자수성가해 제법 큰 일식집을 경영하고 있지만, 지금도 직접 주방을 지휘해 정성스레 음식을 손님께 내놓는다. 그가 개발한 도톰하게 써는 ‘율도식’ 생선회, 각종 젓갈무침, 얼큰한 갈치탕, 시원한 생선뼈 미역국 등이 여의도 샐러리맨들을 쉴 새 없이 ‘율도’로 끌어들인다. 사람 사귀기를 좋아해 취미도 요리, 직업도 요리인 이춘형씨와 잘 사귀면 2차는 무조건 공짜다!

 

[따로국밥] “니들 따로국밥 묵어봤나?”

서울의 육개장을 변형한 대구의 자존심… 60년 세월 동안 한결같은 ‘국일식당’의 맛

10여년 전 미술사학자 유홍준, 소설가 유시춘, 경상대 교수 김덕현 등 천하의 말쟁이 7~8명이 인사동 어느 한정식 집에서 어울린 적이 있었다. 정치 이야기에서부터 대학 이야기, 문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말쟁이들답게 동서고금 세상만사를 넘나들다가 마지막에는 음식 이야기에 이르렀는데, 자연스레 각자가 자기 고향의 특별한 음식이나 자기가 먹어본 맛있는 음식 이야기를 풀어놓기에 바빴다. 유홍준 교수는 남도 문화유산 답사길에서 맛본 해남 천일식당의 떡갈비 예찬에 열을 냈고, 유시춘씨는 설악산 단풍구경 길에 들린 하진부 부일식당 산채정식의 담백한 맛을 기억해냈다. 이렇게 술꾼은 술꾼대로, 맛꾼은 맛꾼대로 자기가 접해본 ‘진미’를 이야기하는데, 안동이 고향인 김덕현 교수만이 할 말이 없는 듯 입맛을 쩍쩍 다셨다. 이러고저러고 말의 성찬이 한바탕 훑고 지나간 뒤 잠시 화제가 끊어질 즈음 김덕현 교수가 한마디 불쑥 던졌다. “니들 간고등어 먹어봤나?”

» 사진/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국일식당 따로국밥. 국밥에 들어간 쇠고기, 파, 선지, 기름 등을 음미하면서 먹으면 국물맛이 시원하고도 개운하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들 배꼽을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눈치 빠른 독자들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기본적으로 먹을거리가 부족하던 50·6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그것도 안동과 같이 내륙 깊숙한 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그 시절에 어쩌다 맛보던 특미, 진미는 소금에 절이다 못해 소금 자체가 아닌가 싶은 간고등어가 거의 유일했다. 초여름 보리 이삭이 익어갈 무렵 농촌의 어머니들은 지난 장날 꼬깃꼬깃 장롱에 넣어 둔 지전 몇장을 간고등어와 바꾼 뒤, 품앗이 일꾼들의 반찬으로 파, 마늘, 고춧가루 빨갛게 양념하여 바작거리게 졸이거나, 화로에 불씨 담아 석쇠에 누르스름하게 굽는다. 푸슬한 보리밥 한 그릇을 후딱 비우고 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배가 고파오던 그 시절, 물에 말은 밥 한 숟가락에 간고등어 한점 집어 입에 넣으면 그 짭잘한 맛에 밥알이 씹히는지도 모르고 목으로 넘어가니, 안동 사람 김덕현에게 이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있었을까?

안동에 간고등어가 있다면 대구에는 따로국밥이 있다. 대구의 따로국밥은 서울의 육개장이 변한 것이다. 1700년대 말의 백과서 <경도잡지>에 의하면 “개장이란 개고기에 흰파를 넣고 끓인 구장(狗醬)을 말하는데, 국을 끓여 고춧가루를 뿌리고 흰밥을 말아서 먹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개고기를 끓인 개장(狗醬)이 식성에 맞지 않는 사람은 대신 쇠고기를 쓰고, 이를 육개장이라 했다고 한다. ‘육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서는 ‘육’(肉)자가 들어가면 쇠고기를 가리킨다. 대구의 따로국밥은 서울식 육개장처럼 고기를 잘게 찢어서 얹는 것이 아니고, “고기를 썰어서 장에 풀어 물을 많이 붓고 끓이되 썰어 넣은 고기점이 푹 익어 풀리도록 끓인다. 파잎은 썰지 않고 그대로 넣고 기름 치고 후춧가루를 넣는다”는 1869년의 조리서 <규곤요람>에서 소개한 육개장 조리법에 가깝다.

지난 9월 말, 30여년 전 민청학련 사건에서 고문과 조작으로 무고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세상을 떠나신 여정남, 하재완, 송상진, 도예종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러 이철, 여익구 등과 함께 대구를 찾았다. 1974년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투옥된 이래 지금까지 줄곧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임구호, 강기룡, 임규영 등 대구의 친구들과도 오랜만에 만나 밤새 통음하며 회포를 풀었다. 일반적인 경북·대구 정서와는 ‘따로’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그 고장 출신 독재자들과 맞서온 이들의 외로운 투쟁이 눈물겨웠다.

이튿날 쓰린 속도 풀 겸 음식이야기 취재도 할 겸 나만 ‘따로’ 20여년 전 한번 들렸던 ‘국일따로국밥’(053-253-7623)을 찾았다. 그때는 그저 짜고 매웠다는 느낌뿐이었는데, 가만히 국밥에 들어간 쇠고기·파·선지·기름 등을 음미하면서 먹으니 목으로 넘어가는 국물맛이 시원하고도 개운하다. 1946년 고 서동술씨로부터 시작되어 이제 손자 서경덕(40)씨까지 이어오니, 국일식당이 어느새 60년의 역사를 자랑하게 되었다. 대구 시민들이여, 어느 자리에서든 음식 이야기가 나오면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게 말하시라. “니들 국일식당 따로국밥 묵어봤나?”

 

[비지] ‘싼 게 비지떡’이라고?

2천년 전부터 동양에서 재배된 ‘밭고기’ 콩… ‘등나무집’에서 비지에 존경을 표하라

중국의 화북 일대는 기름진 토지와 황하를 비롯한 풍부한 수원으로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동한(東漢)의 역사가 반고가 지은 <백호통의>에 의하면 “농신(農神) 신농씨가 나무를 깎거나 휘어 쟁기와 보습을 만들고, 모든 풀을 먹어보고 평소에 늘 먹어도 해가 되지 않는 풀을 선택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재배하게 함으로써 농경을 번창케 했다”고 한다. 이때 온대지방에서 널리 자라고 있던 강아지풀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 조가 되었고, 야생의 기장과 남방으로부터 전해져온 벼도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하여 농경생활이 꽃피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화북에서 싹튼 농경문화는 만주 우리 민족의 고토에도 파급되기 시작하였는데, 만주의 남부나 한반도는 화북지방보다 더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해 농경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 농경이 유목보다 안정된 식생활을 위해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로써 이들의 식생활은 유목의 육류 단백질·지방에서 농경의 전분 위주로 점차 바뀌게 됐다. 그러나 곡물 전분 위주의 식생활은 단백질과 지방의 결핍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야생동물을 가축화하고, 야생식물의 종자를 파종해보는 가운데 들콩의 작물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콩은 뿌리혹박테리아를 갖고 있어서 특별히 거름을 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재배가 쉬운데다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기 때문에 유목에서 농경으로 옮겨가 육류 섭취가 줄어든 사람들에게 ‘밭에서 나는 고기’로 환영받았다.

» △ ‘등나무집’의 비지찌개. 구수한 국물에 파·마늘 다진 것, 깨소금, 고춧가루를 넣은 양념장을 쳐서 먹는 맛이 일품이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콩을 재배해 식생활의 주요 재료로 쓰기 시작한 것이 2천여 년이 넘는 데 비해, 일찍부터 목축으로 육류 위주의 식생활을 영위해온 서양에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콩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유럽에는 1690년께 독일에 처음 전파되었고, 오늘날 전 세계 콩 생산량의 70%를 차지하는 미국에는 1804년께 처음 알려져 20세기 초에야 널리 재배되기 시작했으니, 단백질과 지방의 섭취원을 둘러싼 동서양의 간극이 이처럼 넓은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도 엄청나게 생산되는 콩의 대부분을 가축의 사료로 먹이고 있으니, ‘밭에서 나는 고기’를 ‘공장에서 나는 고기’로 바꾸고 있는 그들의 육류 집착에 혀가 둘린다.

콩은 콩밥과 같이 음식의 한 재료도 되나 그 자체로 하나의 식품이 되기도 한다. 곧, 삶은 풋콩은 그대로 간식거리, 술안주로 쓰이고, 간장에 졸여 콩자반이 되고, 발효시켜 된장·간장 등 장류를 만들어낸다. 분쇄하면 콩가루요, 용매로서 추출하면 콩기름, 물에 불려 추출하면 두유, 두부, 비지가 나온다. 비지는 두부를 만들고 난 찌꺼기다. 음식 이름을 고증한 <명물기략>에 “비지는 부재(腐滓)가 속전(俗傳)된 것이다. 곧, 두부(腐)의 찌끼(滓)다”라고 그 어원을 밝히고 있다. ‘싼 게 비지떡’이란 말처럼 비지는 말 그대로 한낱 찌꺼기일 뿐, 맛도 없고 그 속에 아무런 영양 성분도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비지는 섬유질이 많고 단백질과 지방도 많이 남아 있으며, 특유한 풍미가 있어 찌개 형태로 조리하면 좋은 음식이 된다.

고려 말에 나옹선사가 월정사 북대암에 머무르고 있을 때, 나옹은 매일 비지로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어느 겨울 월정사로 가는 길가의 소나무가 가지에 얹혀 있던 눈을 비지 위로 떨어뜨렸단다. 나옹이 “이 산에 살면서 부처님 은혜를 입고 있거늘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고 호통을 쳤는데, 그 뒤부터 오대산에서 소나무가 떠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니. 당대의 고승 나옹이 ‘싼 비지’를 부처님께 올렸을 리 있겠는가?


경부고속도로 수원나들목 부근 경기도박물관 앞에 가면 맛있는 비지찌개집 ‘등나무집’(주인 유흥열·031-283-8705)이 있다. 흰콩을 물에 불려 믹서에 갈고 돼지고기와 시큼한 배추김치를 썰어 함께 넣고 미근하게 끓이면 구수한 비지찌개가 된다. 여기에 간을 맞추도록 파·마늘 다진 것, 깨소금, 고춧가루를 넣은 양념장을 쳐서 먹으면 밥 공기깨나 순식간에 비우게 되니, ‘싼 게 비지떡’이라 비웃을 자, 이 집을 가보라!

 

[두부] 임금의 능에는 두부가 있었다

한나라 비운의 지식인 유안이 남긴 발명품… ‘두부마을’에서 인현왕후의 넋을 위로하다

유안(劉安)은 한나라를 창건한 유방의 손자로, 문제(文帝) 때 회남왕에 봉해졌다. 그는 시인 묵객들을 환대하여 각지의 문사(文士)들이 그의 곁에 모여들었고, 그 또한 문제가 뛰어나 전국시대의 대시인 굴원이 지은 ‘이소’를 해석한 ‘이소부’를 지었으며, 중국 각지의 신화 전설과 제가의 학설을 모아 <회남자>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과도한 인문주의 탓이었을까? 유안은 한나라 건국 초 혼란기의 정세 판단에는 어두웠던 듯, 만년에 권력을 집중하려는 중앙정부에 맞서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자살하고 말았다. 이렇듯 유안은 현실 정치인으로서는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지만, 인류를 위해서는 너무나도 크나큰 공헌을 한 것이 있으니, 그가 처음으로 두부를 발명했다는 것이다.

BC 2세기에 유안이 발명했다고 하지만, 두부가 본격적으로 일반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를 거쳐 송나라·원나라 시대인 것 같다. 원나라 시대의 잡극과 산곡(散曲)을 통칭하는 <원곡> 속에 거리의 가게 주인이 “이제 죽 팔기는 그만두고 두부만을 팔기로 했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원나라 시대에 두부가 널리 서민적인 식품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아버지도 두부장수였다고 한다.

» △ 장단이나 철원에서 생산되는 백태만을 이용해 순 옛날식으로 짜는 ‘두부마을’의 두부는 연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우리나라에 두부가 들어와 일반화된 것도 송나라·원나라 즈음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고려 말의 성리학자 이색의 <목은집>에 “나물국 오랫동안 먹어 맛을 못 느껴/ 두부가 새로운 맛을 돋구어주네/ 이 없는 이 먹기 좋고/ 늙는 몸 양생에 더없이 알맞다/…”라는 시 구절이 있고, 고려 말 조선 초에 살았던 권근의 <양촌집>에 “누렇게 익은 콩이 눈같이 하얀 물을 뿜어/ 펄펄 끓는 가마솥 불을 정성들여 거둔다/ 기름에 번지르르한 동이 뚜껑을 열고/ 옥같이 자른 것이 밥상에 가득 쌓인다”라고 두부 만드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의 문물이 중국에서 발하여 우리에게 전해졌지만 우리가 창조적 슬기를 발휘해 이를 더욱 발전시켜 꽃피웠듯이, 두부 또한 우리나라가 중국을 능가한 것 같다. <세종실록>에 “조선에서 온 여인이 각종 식품 제조에 교묘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두부는 정미하여 명나라 황제가 극구 칭찬하였다”는 구절이 나온다. 또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을 보면 “일본의 두부는 임진란 중에 적의 군량 담당관으로 와 있던 오카베 지로효에란 자가 조선에서 그 법을 전해갔다 하기도 하고, 혹 이르되 진주싸움에서 경주성장 박호인이 조오소가베 모토치가에게 붙들려가서 도사땅 고오치에서 두부업을 시작한 것이 근세 일본 두부제조업의 시초라고 하기도 한다”로 되어 있어 일본 두부의 한반도 전래설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두부를 포(泡)라고 불렀다. 정약용의 <아언각비>에 “두부란 숙유(菽乳)다. 두부의 이름은 원래 백아순(白雅馴)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방언이라고 생각해 따로 이름하여 포라 하였다. 여러 임금님의 능원에는 각각 절이 붙어 있어 여기서 두부를 만들어 바치게 하니 이 절을 조포사(造泡寺)라고 하였다…”한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능을 모시면 반드시 그 곁에 두부 만드는 절인 조포사를 두어 제수를 준비하게 하였고, 이로써 양주 ‘봉선사 두부’처럼 소문난 두부에는 절 이름이 붙어 내려오게 된 것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인 명릉을 비롯해 다섯개의 능이 있는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옆에 가면 소문난 두부집 ‘두부마을’(주인 임석현·02-386-4426)이 있다. 장단이나 철원에서 생산되는 백태만을 이용해 순 옛날식으로 짜는 이 집의 두부는 연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화학 조미료와 육류를 일절 쓰지 않는 두부마을 정식의 담백한 맛이 좋으며, 살아 있는 버섯을 배달받아 그때그때 따서 넣는 두부버섯전골도 서넛이 먹기에 푸짐하다. 가을의 정취를 느끼시려 서오릉을 찾는 분들, 비록 조포사에서 만든 두부는 아니지만 ‘두부마을’ 두부에 막걸리 한잔 올려, 장희빈의 저주(?)로 억울하게 돌아가신 인현왕후 마마의 넋을 위로해주시라.

 

[라면] 당신은 왜 꼬불꼬불한가요

한 가닥의 길이 65cm, 총길이 49m인 라면의 모든 것… ‘틈새라면집’에는 젊음의 맛이 있다

윤대녕의 소설 <사슴벌레 여자>의 주인공은 ‘해리성 기억상실’에 걸린 남자다. 그는 기억상실의 상태로 지하철 2호선 시청역과 덕수궁 대한문 근처를 방황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 남자는 우연히 근처 편의점에서 라면 요리사 서하숙을 만나게 된다. 서하숙은 자신의 자취방으로 그 남자를 데려가 그의 기억이 회복될 때까지 남의 기억을 빌려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이 남자는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우연히 직장 동료를 만나 옛 기억을 떠올리고 자신의 가족을 되찾지만, 가족과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서하숙에게 되돌아오고 만다.

» △ 23년 전 서울 명동의 건물과 건물 사이 작은 ‘틈새’에서 맛과 정성 하나로 시작해 이제는 어엿한 식품체인업체로 자리잡은 ‘틈새라면’의 명물 ‘빨계떡’.
서하숙은 신촌 부근의 새로 생긴 라면전문점들을 돌며 조리 강습을 해주고 파출부처럼 일급을 받는 여자다. 그녀의 다섯평 월세방 벽면에는 라면 조리법들이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이 적혀 있다.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조리법을 노트에 옮기고, 그녀가 만들어놓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는다. 그녀는 이 노트 세권으로 라면요리에 대한 책을 낼 꿈을 갖는다. 그러나 서하숙의 라면요리 단행본은 아직 출간되지 않은 것 같다. 단지 그녀가 깨알 같은 글씨로 정리한 노트 세권을 살며시 들여다본 작가 윤대녕이 소설에서 밝힌 그 일부를 옮겨본다.

라면이란 일반적으로 면을 증숙시킨 뒤 기름에 튀긴 유탕면이나 기름에 튀기지 않는 건면에 수프를 합친 것을 말한다. 조리가 간편하고 저렴하다는 특성으로 제2의 쌀이라고 불리는 라면은 1958년 안도우 시로후쿠라는 일본인이 술집에서 튀김요리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던 중 제조법을 생각해냈다. 즉, 밀가루를 국수로 만들어 기름에 튀기면 국수 속의 수분은 증발하고 면이 익으면서 속에 구멍이 생기는데, 이 상태로 건조했다가 풀어지게 한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해 가을 일본의 ‘일청식품’이 국수발에 간단한 양념 국물을 가한 아지스케 면을 ‘끓는 물에 2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달고 시판한 것이 오늘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애용하고 있는 라면의 효시이다.

라면 하나는 약 75가닥의 면발로 구성되었고, 한 가닥의 길이는 대략 65cm, 총 길이는 49m, 열량은 520kcal 내외이고 그 중 탄수화물이 80g, 단백질이 10g, 지방 17g이 함유돼 있다. 면을 꼬불꼬불하게 만드는 방법은 라면을 날라주는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라면이 나오는 속도보다 느리게 해서 가닥이 위로 겹쳐 올라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좁은 공간에 많은 부피의 면발을 담으려면 직선보다는 곡선이 유리하기 때문이요, 둘째 영양가를 높이면서 유통과정의 보존기간을 오래 지속하려면 튀김 공정에서 빠른 시간에 많은 기름을 흡수해 튀겨지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수분 증발을 돕는 공간이 필요하므로 곡선형이 유리하며 꼬불꼬불한 틈으로 뜨거운 물이 스며들어 조리시간을 짧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셋째, 미학적 기준으로 볼 때 유선형이 시각과 미각적 효과를 더욱 높여준다. 또 유통과정의 파손 방지나 취급상의 용이성도 빼놓을 수 없다.

라면은 젊은이의 음식이다. 그들만의 독특한 식성대로 무궁무진하게 퓨전하여 메뉴를 개발할 수 있을 뿐더러, 바삐 움직이는 그들의 행동양식에 맞게 ‘빨리빨리’ 조리되고 ‘빨리빨리’ 먹을 수 있어 좋다. 서울 신촌의 이화여대 정문 부근 ‘틈새라면집’(02-362-1281)은 서너평 전체에 젊음이 꽉 찬다. 생동감이 톡톡 넘치는 여대생 손님뿐 아니라, 주인인 김학범씨 부부 역시 푸근하면서도 젊어서 좋다. 23년 전 명동의 건물과 건물 사이의 작은 ‘틈새’에서 맛과 정성 하나로 라면집을 시작해 이제는 어엿한 식품체인업체로 자리잡은 ‘틈새라면’의 명물인 ‘빨계떡’(빨간 국물에 계란과 떡을 넣은 라면)은 입에서는 맵지만 속에서는 시원한 그 맛으로 까다로운 여대생들의 입맛뿐 아니라 간밤의 숙취로 시달린 꾼들의 속을 확 풀어준다.

 

[복국] 먹고 단결하자는 말씀?

초원복국집 사건을 떠올리며 국과 탕의 기원을 찾다… ‘남도복아구전문점’의 시원한 국물

1992년 12월11일,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20여일 앞두고 부산의 어느 음식점 후미진 방에 부산 지역 ‘유지’ 10여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복국’에 소주 몇잔을 걸친 뒤 저마다 부산 출신 민자당 대통령 후보 김영삼씨의 당선을 위해 경상도가 뭉쳐야 하고, 이를 위해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 대화 내용이 당시 국민당 정주영 후보쪽에 의해 고스란히 녹음돼 언론에 공개됐다. 이것이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 박일룡 부산 경찰청장 등 부산 ‘유지’들이 모여 지역감정을 조장한 이른바 ‘초원복국집’ 사건이다. 덧붙이자면, 대화 내용이 공개되자 여론이 민자당쪽에 불리하게 돌아갈 듯했으나, 오히려 이 사건을 계기로 경상도가 굳게 ‘단결’해 결국 김영삼씨가 김대중씨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부산 출신 ‘지도급’ 인사들은 이후 승승장구 출세하였고, 이를 폭로한 국민당쪽 인사들만 불법 도청 혐의로 줄줄이 쇠고랑을 차게 되었으니, 오늘날 검찰이 새로 태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것도 이런 업보들이 켜켜이 쌓인 탓이리라.

» △ 복요리만을 25년 전문으로 해온 남도복아구전문점의 주인이자 주방장인 이경행씨는 스스로 개발한 육수 맛이 복매운탕을 결정짓는 비법이라고 말한다.
이때 서울 사람들이 조금 낯설게 느껴진 것이 ‘복국’이다. 서울에서는 복매운탕으로 ‘탕’이라 이름붙이는 데 비해 부산에서는 ‘국’이다. 물을 수용체로 하여 조리하는 음식 중에서 찌개, 조림 등은 그 양태가 뚜렷한 데 비하여 국·갱·탕은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이희승 <국어대사전>의 정의를 보면 “갱은 제사에 쓰는 국이고, 탕은 보통의 국을 가리킨다”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국·갱·탕의 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국은 한자로 갱(羹·국), 확(月+確(에서 石뺀 것 합성·곰국), 탕(湯·끓을)이다. B.C 3세기경의 중국 시집 <초사>에는 “갱은 채소가 섞인 고깃국이고, 확은 채소가 섞이지 않은 고깃국”으로 되어 있으나, 6세기 초의 <제민요술>에서는 그 구별이 모호하여 확은 갱 속에 흡수되고 만다. 그리고 탕은 <위지> ‘화타전’에 의하면 ‘약을 달인 것’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당나라 시대에 오면 갱과 탕이 모두 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으며, 원나라 시대 요리서인 <거가필용>을 보면 국은 대부분 갱이고, 탕은 오직 음료용·약용에만 쓰인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임원십육지>에는 “탕이란 향기 나는 약용식물을 뜨거운 물에 달여서 마시는 음료”라 하였으며, <동의보감>에는 “약이성 재료를 뜨거운 물에 달여서 질병 또는 보강제로 사용하는 것”이라 하였다. 또 <사례편람>에서는 “갱이란 본디 고깃국이고 채갱이란 채소국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탕에도 어육을 쓰고 있으니 이제 탕도 국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증보산림경제>에서는 “국물이 많은 국을 탕, 건더기가 많은 국을 갱”이라 정의하였다.

곧 모두 국을 의미하는 갱·확·탕이 고대에는 확실한 차이를 갖고 존재했으나, 중세 이후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탕을 가리켜 국·약·음료로 함께 쓰고 있으니, 이는 아마도 동양의 약식동원(藥食同源) 사상의 발로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결국 상고해보면, 갱과 탕은 국과 병치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국 속에 포함되는데, 오늘날 갱은 독립된 요리라기보다는 제의상 용어로 굳어진 느낌이고, 형용모순 같지만 국과 탕이 병치되어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그 구별은 내용물보다는 조리법, 곧 국은 가마솥과 같은 큰 용기에 대량으로 끓여 한 그릇씩 덜어 내놓는 음식이고, 탕은 음식 재료를 작은 솥이나 냄비에 앉혀 직화로 끓여 용기째 내놓는 국을 일컫는다.

부산이나 마산에 가면 속을 확 풀어주는 복국집이 많다. 나는 어느 요리이든 ‘탕’보다는 ‘국’을 좋아하는데, 최근에는 복국집을 찾을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국’은 아니지만 시원한 맛이 ‘복국’에 못지않은 ‘복매운탕’을 잘하는 집이 집 근처에 있어 자주 찾는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에 있는 ‘남도복아구전문점’(031-262-4774)이다. 복요리만을 25년 전문으로 해온 이 집의 주인이자 주방장인 이경행(45)씨는 까치복·참복·미나리·콩나물은 크게 특장이 없고, 다만 스스로 개발한 육수 맛이 복매운탕을 결정짓는 비법이라고 겸손하게 이야기한다.

 

다시 문제는 먹을거리다

연재를 마치며 풀어놓는 음식문화에 대한 단상…먹을거리에 인류평화의 문제가 놓여 있다

내가 음식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이다.당시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 등 일부 서구인들이 한국인들의 개 식용문화를 트집잡아 서울올림픽 보이콧 운동을 벌이던 때인데, 1980년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그들의 압력에 굴복해 1천년 이상 내려온 우리의 고유 먹을거리 문화 하나를 압살하려 했던 것이다.

남의 음식문화에 감놔라 배놔라?

먹을거리는 문화다. 그리고 역사다. 인류의 보편적 정서와 질서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한 무엇을 어떻게 먹든 그것은 한 인간의 자유다. 또 어떠한 먹을거리를 어떻게 먹게 된 것은 그 민족(또는 개인) 고유의 살아온 환경과 문화 역사의 소산이다.


»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그러므로 어느 민족, 어느 개인이 자기 식의 먹을거리 관습을 다른 민족,다른 개인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자기만의 잣대를 들이대 비판할 일이 아니다.그렇기 때문에 나는 거위의 입을 벌려 강제로 깔대기를 꽂고 사료를 막대기로 밀어넣음으로써 과식으로 부은 거위 간을 최고급 요리로 치는, ‘숲속의 뱀장어’라는 이름으로 은밀하게 뱀고기 요리를 즐긴, 파리 코뮌 당시 식량이 떨어져 개를 잡아먹은 바르도씨의 선조들과 그녀의 프랑스 동포들의 눈에서 ‘들보’를 찾아내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나온 김에 좀더 이야기해보자.서구인들의 애완견 문화와 우리의 가축으로서의 개사육 문화는 그 출발점이 전혀 다르다. 서양은 사회경제적으로 목축 낙농이 발달해왔다. 그들 사회에서 개는 가축을 지키고 약간은 역축으로서의 역할도 한다. 곧 서양에서의 개는 인간의 경제활동에 보조 역할을 해온 조력자이고, 또 목축을 통해 개고기보다 더 좋은 육류 단백질을 생산해왔으므로 처음부터 식용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은 유목사회가 아니고 곡물 생산을 위주로 하는 농경사회이다. 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다. 밭 갈고 논 갈고, 농작물을 운반하는 데 힘없는 개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또 개는 쥐, 바퀴벌레와 함께 잡식동물로 먹이를 놓고 인간과 경쟁관계를 형성한다. 풍년으로 오곡이 남아돌 때는 인간이 먹고 남은 찌끼로도 충분하지만, 연속된 흉년으로 인간이 기아에 허덕일 때 생산활동에 아무 역할도 못하고 식량만 축내는 개를 어찌할 것인가?

또 주거방식을 보더라도 서양은 입식으로 밖에서 그대로 신을 신고 거실, 식당, 심지어 침실까지 들어갈 수 있으니, 개 또한 집안에 들어와 살아도 조금도 어색할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밖에서 돌아오면 신을 벗고 온돌방에 올라와 여러 식구들이 오밀조밀 모여앉아 밥먹고 이야기하고 이불 펴고 자는데, 여기에 우리의 재래종 개가 끼어들어 애완용으로 될 수 있겠는가. 곧 지금의 시각에서 개 식용문화를 왈가왈부하기에 앞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그 민족 특유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의식주’라고 하여 인간의 원초적 문제들을 서열화하였지만, 그건 어느 정도 문명화된 시기의 이야기이고, 먹을거리를 먹어서 생명을 보존하고 짝을 맺어 후손을 퍼뜨리는 일이 인간의 가장 근원적 본능일 것이다. 그리고 이 근원적 본능은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조절되어 질서와 규범 속에서 평화롭게 융화, 발전돼가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 아침마다 신문 사회면을 펴보라. 숱하게 등장하는 범죄기사들의 행간을 뜯어보면 그 이면에는 결국 먹는 문제가 개재되어 있고, 국가간 전쟁, 민족간 분쟁도 영토나 자원의 문제가 대부분을 차지하니, 그 끝을 파보면 결국 먹는 문제가 아닌가?

요즘 우리 사회는 생산력의 발전으로 먹는 문제에 그리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울 강남의 백화점에서는 몇백만원짜리 굴비 선물 세트가 불티나게 팔리는가 하면, 일반 주부들은 재래식 시장에서 콩나물 1천원어치를 놓고 좌판 할머니와 실랑이를 벌인다. 산기슭 빈민동네에서는 녹슨 수도관에서 나오는 수돗물조차 졸졸대어 갈증을 못 푸는가 하면, 강남 고급 아파트촌에서는 페트병 하나에 1만5천원짜리 일제 해저 심층수를 마시지 못하면 팔불출이란다. 변두리 인생들은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킨 뒤 ‘컥’ 하고 기분 좋게 트림하고 나오는가 하면, 흥청망청 인간들은 청담동 고급 카페에서 프랑스 포도주업자들의 영악스런 상술에 속아넘어가 2003년산 보졸레 누보를 홀짝이며 잘난 척한다.곧 계층간에 먹을거리의 분배를 둘러싼 양적 갈등은 줄어들었으되, 먹을거리의 질과 특정 먹을거리의 독점을 둘러싸고는 계층이 분화되고 있는 것이다.

 

양적 갈등 대신 질적 갈등

먹을거리는 나눔이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사람은 물론 개를 옆에 두고도 혼자 먹지 않았는데, 이는 문명국가, 문화인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 식량을 지원하는 것도 같은 소이인데, 반공 이데올로기, 정쟁적 관점으로 이를 문제 삼고 비난하는 일부 인사들의 행태가 한심하다. 역지사지해보라. 이유야 어찌됐든 우리가 굶어죽고 있는데, 북한 사람들이 흥청망청 먹고 마신다면, 그리고 이역만리 떨어진 세계인들조차 인도적 관점에서 북한에 식량 원조를 하는데, 휴전선 넘어 지척의 우리만 눈가리고 있다면 과연 마음이 편할까?

우리의 식탁문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것이 있다. 옛날에는 식사시간에 되도록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빨리 끝내는 것이 예절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가정에서야 각기 다른 분위기와 관심사를 갖고 식사시간을 보내겠지만, 손님을 초대한 자리나 여러 사람이 어울리는 회식은 다양한 화제를 나누는 즐거운 자리여야 한다. 서구인들의 경우 대개 음식이나 술 이야기, 축구와 같은 스포츠, 여행, 그리고 조금 고상하다면 음악·문학·그림 등 예술 이야기로 서너 시간을 채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직장의 일 이야기, 정치 논쟁 등으로 침을 튀기다가 어떤 때는 다툼 끝에 즐거워야 할 자리가 영 썰렁하게 변하기도 한다.

나는 이 때문에 ‘김학민의 음식 이야기’에서 오밀조밀 음식 조리하는 방법이나 어설픈 영양학 강의, 또는 특정 식당에 대한 ‘정실성’ 선전보다는 먹을거리를 낳게 한 사회문화적 배경, 그리고 음식과 식당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소개함으로써 식탁의 화제를 제공해보려 하였다. 그리고 나는 잊혀지고 묻혀진 우리 문화유산들을 발굴해 재미있고 해박하게 소개함으로써 전통 문화유산을 대하는 우리들의 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유홍준 교수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먹을거리 또한 “아는 만큼 맛있다”고 믿는다.

이번호로 ‘김학민의 음식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 천학비재한 탓에 호랑이를 그리려다가 고양이를 그리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의욕은 높았으되 시간과 능력이 따라가지 못했음을 독자 여러분께 고백한다. 된장, 젓갈, 김치, 술 등 우리 민족의 4대 발효식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식물을 먹을거리로 삼는 우리의 나물 이야기, 해장국, 정력식품에 대한 집착, 음주문화, 쌀밥과 곡령숭배, 죽, 라면, 세시음식 등은 우리의 먹을거리 문화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었지만 끝내 다루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육류 단백질 신화를 확대재생산시킴으로써 자본주의적 이익의 극대화를 관철해가는 켄터키 치킨 등 미국 패스트푸드들도 써보려 했으나 기회를 갖지 못했다. 또 우리와 가까운 몇몇 나라들의 음식도 소개해보려 했지만 견문이 짧은 탓에 불가능했다. 손가락, 수저, 포크, 나이프 등 식사 도구의 발전과정을 정리하지 못한 것도 이쉽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음 기회로 미룬다.

 

탐내지 않는 것, 나누는 것!

먹을거리에서 인류 평화를 이야기한다면 너무 거창할까? 아니다. 인류가 모두 굶주리지 않는 것, 저 혼자 배부르자고 남의 먹을거리를 탐내지 않는 것, 혼자만 독식하지 않고 골고루 나눠먹는 것, 그리고 자기의 관습과 다른 먹을거리를, 먹는 것을 존중하는 것 등 인간의 근원적 욕망인 먹고사는 문제, 먹을거리 문제에 대해 인류가 서로 양보하고 관용할 때 평화는 정착되리라 확신하면서 ‘김학민의 음식 이야기’를 마친다. 관심을 갖고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삿갓'의 팔도기행_영평정  (0) 2010.11.12
가을을 걷다_강길·들길·옛길   (0) 2010.11.09
스님과 낚시  (0) 2010.11.05
차길진의 산따라 강따라  (0) 2010.11.04
라오스를 글로 느껴보자   (0) 2010.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