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쌓다 죽은 불쌍한 소들아!
유명한 수원갈비의 연원은 정조대왕… 수원성곽 건설 위해 동원된 소들로 우시장 생겨
화성의 건설은 18세기 말 조선의 경제력으로는 엄청난 사업이었다. 그러나 이 대역사는 정약용·채제공 등 당시 정조를 보필하던 실학파 대신들의 치밀한 설계와 공정관리로 10년을 예상한 공사기간이 3년 반으로 단축되어 완공되었다.
1796년 화성이 완공되었을 때 화성 주변은 돌·목재·흙 등 성곽 건설에 필요한 자재들을 운반하기 위해 조정에서 구입한 소들이 넘쳐났다. 정조는 융릉 건설로 이주해온 농민들과 성곽 건설 노동자로 왔다가 눌러앉은 사람들에게 이 소들을 분양해주고, 그 대가는 3년 뒤에 송아지로 바치도록 했다. ‘3년 거치 후 송아지 상환’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3년이 지난다. 소 한 마리씩을 분양받은 농민들은 이제 송아지 한 마리씩을 준비해야 한다. 때맞춰 분양받은 소가 송아지를 낳은 집도 있겠지만, 수소를 분양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암소라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때에 맞게 송아지가 딸리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후의 사태는 뻔하다. 사람들은 송아지를 구하기 위해 난리였고, 그래서 수원에 갑자기 어마어마한 우시장이 생겨버렸다. 정조는 진작에 수원의 장시를 활성화하기 위해 관모와 인삼 유통의 독점권을 수원 상인들에게 주었다. 이와 함께 어마어마한 우시장이 수원에 개설돼 당시 한수 이남의 상권을 쥐고 있었던 안성 장시는 ‘작살’이 났다.
이후 일제를 거쳐 60,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수원 부근에서는 소를 많이 길렀고, 우시장 또한 1970년대 초까지 소를 매는 말뚝만 3천개가 넘을 정도로 활발했다. 참고로 수원 월드컵경기장이 있는 우만동(牛滿洞)의 옛 이름은 ‘소마니뜰’로, 이 구릉에서 소를 많이 길렀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역사고 다음부터는 상상력이다.
소들이 그렇게 많았다면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성곽 건설 중에 사고로 죽는 소도 있었을 것이고, 이후 폐사하거나 도살·밀도살되는 소도 자연 많았을 것이고, 여기에서 수원갈비 등 수원의 유명한 쇠고기 문화가 비롯되지 않았을까 유추해본다.
수원의 갈빗집들은 흔하다. 그러나 흔하다고 하여 처진다는 뜻은 아니다. 어느 집을 들어가더라도 웬만한 사람은 1인분만 먹어도 배가 부른 맛깔스러운 두툼한 갈비가 나오니, 갈빗집 찾느라 특별히 고민할 필요가 없다.
조개를 안주로 매향에 취하다
상처입은 땅 매향리에서 느끼는 특별한 정취… 시퍼런 바다를 굽어보며 조개를 구워보라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매향리. 옛날옛적 서원과 무장이라는 두 선비가 마을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것저것 좋은 이름들을 생각해보았지만, 결국 모두가 만족스럽지 않아, 서원이 ‘매’(梅)자를 내고 무장이 ‘향’(香)자를 붙여 이곳 이름이 매향리로 정해졌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최근까지 매향리에는 매화나무가 없었다. 매화나무가 없으니 물론 매화향기도 나지 않는다. 지난 반 세기 이래 매향리는 미공군의 사격연습장으로 변해버렸다. 새 초롱처럼 생겼다 하여 농섬이라는 이름이 붙은 매향리 앞바다 작은 섬은 미공군기들이 내려갈기는 기총소사의 표적이 되었다. 매향리 일대는 혹시
켄터키에서 건너온 미군 중대장 아이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인지 ‘쿠니 사격장’으로 바뀌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매향리에 갔을 때, 나는 사격장 철조망 사이사이에서 매화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폭격으로 사격으로 갈가리 찢겨 빨간 속살이 드러나 신음하고 있는 매향리 땅을 위해 못난 후손들이 할 수 있는 소박한 위로였으리라.
사격장 철조망을 살짝 빗겨나 왼쪽으로 가면 작은 포구가 있다. 경기만 일대가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갯벌 하나 남아 있지 않고, 아담한 포구들 또한 뭍으로 뭍으로 사라지는 이때 이렇게 예쁜 포구가 남아 있다는 것이 참으로 대견스럽다.
평균 하루 1번 반 정도 물이 들어와서, 방파제나 심지어 조개구이집 앉은 자리에서도 낚시를 할 수 있다. 웬만하면 망둥어 낚는 손맛을 꽤 쏠쏠하게 본다. 물때는 바다소리 주인 백씨에게 전화로 물어보면 친절히 알려준다(016-323-2282). 서해안 고속도로 발안 나들목으로 나와 우회전, 조암 방향으로 20분쯤 가면 이화리 표지판이 나오고 여기서 15분 정도 더 가면 매향리다. 돌아오는 길에 어부들이 잡아오는 바지락 등 조개를 싸게 살 수 있으며, 월문리 온천단지 부근에서 해수목욕을 해도 좋다.
윤기순(69) 할머니 혼자 20년째 주방장이자 종업원인데, 암소고기 여덟 가지, 김치, 파무침, 짠지물김치 등 상차림 또한 20년이 한결같다. 몇년 전 도로 개설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테이블은 서너개뿐인 것이, 아마 윤 할머니 혼자 시장 보고 밑반찬 만들고 서빙하고 치우는 데는 가장 적당한 규모인 것으로 짐작한다.
철저히 한우 암소고기만을 고집하는 팔미옥에는 안창살, 치마살, 차돌, 아롱사태, 제비추리, 토시살, 안심, 안심채끝, 등심채끝, 꽃등심 등의 메뉴가 있지만, 특별히 골라먹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좋은 부위의 고기가 들어오면 윤 할머니가 단골들에게 전화하여 먼저 떨어져버리고, 좋지 않은 고기는 아예 가져오지 않기 때문에 손님들은 그 날 ‘확보된 고기’ 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다.
모든 메뉴가 450g에 3만7천원인데, 두 사람이 먹기에 충분하다. 추가로 2분의 1을 주문해도 된다. 고기를 먹고 난 뒤 돌판에 김치 송송 썰어넣고 볶아먹는 밥도 일품이다.
80년대, 보신탕은 울었다
‘보신탕’ 대신 ‘계속합니다’ 간판을 걸어야 했던 블랙코미디… '개벼다귀' 육수의 정수를 보여주는 평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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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여름이었던가. 오랜만에 그 집을 찾아온 내가 직접 본, 간첩들이 암호를 교환하고 접선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들은 무엇을 계속하느냐고 물었고, 또 무엇을 계속한다고 답하고 있었던가? 그것은 바로 보신탕이었다. 보신탕 한 그릇 먹겠다는데, 이 무슨 해괴한 짓들인가?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모른다. 80년대 어두운 시대의 그 블랙 코미디를.
80년 5월,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항쟁을 총칼로 짓밟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시선을 돌리고 세계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88올림픽 유치에 전력을 기울인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88올림픽 유치에 성공하고, 80년대 초반부터 경기장 건설 등 올림픽 개최를 위해 대대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 대로 모든 게 잘 진행되는 것 같았는데, 엉뚱한 데서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몇몇 서구 국가의 올림픽위원회와 브리지트 바르도 등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이 한국의 보신탕 문화를 들먹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한국이 보신탕을 금지하지 않으면 88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바야흐로 반만년 이상 이어져온 한국의 음식 주권이 위협받는 순간이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이들의 압력에 못 이겨 전국에 보신탕 판매를 금지시켰고, 이 땅의 보신탕 문화는 단절의 위기에 놓였다. 대부분의 보신탕집들은 문을 닫거나 업종을 바꿀 수밖에 없었지만, 일부 몰지각한 서구 여론과 전두환 정권의 탄압(?)을 무릅쓰고 끝까지 음식 주권을 지킨 집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버젓이 ‘보신탕집’ 간판을 내걸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 즈음 새로이 생겨난 이름들이 보양탕·영양탕·사철탕 등이다. 글의 첫머리에서 소개한 낙원동의 보신탕집은 아예 간판을 떼어버리고 조그마한 나무 판자 입간판에 “계속합니다”라고만 써서 세워놓았으니, 어두운 시대 보신탕 수난사의 한 장면이었다.
보신탕의 원래 이름은 개장국으로 추정된다. 놀부에게서 쫓겨난 흥부네 아들 12명은 한창 나이의 왕성한 식욕에 먹을거리가 없어 언제나 먹을 것 타령을 했다. 그래서 <흥부가>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어무니, 개국에 이밥 말아 한 그릇 먹으면 좋겠수.” 또 1920∼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소설들에는 ‘개장국’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런 문헌들을 보면 보신탕은 최소한 일제시대까지는 개국·개장국이라고 불렸다. 한국전쟁 뒤 개고기를 즐겨먹던 이북 사람들이 많이 내려오면서, 또 전후 피폐한 상황에서 개장국이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선호되면서 보신탕으로 이름이 변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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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의 독창성은 육수에서 찾을 수 있다. 어느 날 문득 삶은 개고기를 찢고 난 뒤 버리던 뼈들이 아깝다는 생각에서 24시간 푹 고아보았더니, 뼈는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고, 아주 뽀얀 육수가 나오더란다. 육수와 고기 삶은 물을 각각 반씩 섞어 탕과 전골을 끓이는데 고소한 맛이 끝내준다. 수육 또한 끓는 육수에 적셨다가 먹으면 무척 부드럽고 쫄깃쫄깃하다.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을 비유해 일컬던 ‘개뼈다귀’도 이렇게 잘 이용하면 유용한 것이 된다. 수육·전골·무침 모두 1인분에 2만2천원이고, 탕은 1만5천원이다. 여주인의 손이 넉넉하여 어지간히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1인분이면 족하다.
갈래갈래 쫄깃쫄깃한 칡냉면
남원 유생 김원립의 한이 서린 신갈에서 유서깊은 신갈칡냉면을 찾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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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래 안 갈래.”
두 사람이 전혀 웃지도 않고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슬쩍 엿들어본들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최소한 70년대 중반까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에 살았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암구호와 같은 이 대화를 풀어보자.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가 교차하고, 경부고속도로 수원 나들목이 있어 수도권 남부의 교통 요충지가 된 신갈(新葛)의 옛 이름은 갈천(葛川)이다. 갈천의 ‘천’은 ‘내 천’이니 갈내, 입말로 하면 ‘갈래’이다. 그러므로 “갈래 갈래?”는 신갈 주변 마을사람 한명이 친구에게 “신갈 가겠느냐?”고 물은 것이고, “갈래 안 갈래”는 “신갈에 가지 안 겠다”는 친구의 대답이다.
신갈의 옛 이름이 갈천이 된 데는 한 역사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얽혀 있다.
남원 유생 김원립(金元立, 1590∼1649)은 1613년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모하자 몇몇 유생들과 함께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광해군의 미움을 사 유배되었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김원립은 전라도 능주부사로 복위되고 곧 병자호란을 맞게 된다. 청나라 군사에 쫓겨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 농성하매, 김원립은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와 과천 부근에서 청나라 군사와 접전해 청군 다수를 주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김원립은 여러 내직을 거쳐 종성부사직을 지내게 되었다. 이때 국경 백성들이 몰래 청나라 땅에 사냥하러 들어갔다가 청군에게 붙잡혔다. 굴욕적인 삼전도 항복 이후 청나라의 눈치를 심하게 보는 그 즈음의 상황에서 조정은 할 수 없이 김원립의 죄를 물어 종성부사직을 물러나게 했다.(<인조실록> 인조25년 10월9일조) 김원립은 이후 실의에 차 용인에 낙향하여 제자를 기르며 노후를 보냈다. 그가 낙향했던 지금의 신갈땅이 그의 아호 ‘갈천’을 따 갈래라 불리게 된 것이다.
참고로 1920년대에 북만주에서 김좌진과 함께 무장독립운동을 총지휘했던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장군(국가보훈처 제정 2002년 4월의 독립운동가)은 김원립의 직계손이며, 70, 80년대 투철한 민주화운동가였고 현재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인 김근태 의원도 김원립의 직계손이자 김혁 장군의 방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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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끓는 물에 적당한 시간 삶아 찬물에 헹궈냄으로써 면발은 쫄깃쩔깃 차진 생명력을 갖게 되고, 여기에 이 집의 비법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매콤새콤달콤 육수와 삶은 달걀 반쪽, 새큰하게 익힌 무채를 얹으면 대한민국에서 한다 하는 메밀냉면집은 금방 잊어버린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이 집에는 겨자, 식초, 고추양념통은 하나도 없고, 반찬이라고 덩그러니 무채 한 접시와 음식가위만 탁자 위에 놓여 있다. 내 손에서 나온 그대로가 제일 맛이 있으니, 양념 더 넣을 것 없고, 육수 더 부을 것 없이 그대로 먹으라는 주인 최씨의 자부심이다. 또한 냉면발을 가위로 토막토막 잘라 낚시질하듯 건져먹지 말고, 쫄깃쫄깃 긴 면발을 입으로 끊어가며 탐스럽게 먹으라는 주인 최씨의 조언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제대로 된 집이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이 집도 칡냉면 이외에는 아무 메뉴도 내놓지 않는다. 수육도 없고, 지짐도 없으며, 술도 없다. 오직 칡냉면뿐이다. 주방장인 어머니와 손맞춰 대학졸업반 막내아들(권성철·27) 혼자 분주히 주문받고 홀 서빙한다. 가끔 구시렁거리기도 하지만 궂은일도 마다않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사리(1500원)를 추가로 시킬 수 있지만, 냉면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보통(3500원), 대(4천원), 특대(5천원) 중에서 특대를 시키면 허리띠를 풀어놔야 한다.
주방장을 빼낸 사연
87년 민주화운동의 자금 마련을 위해 보신탕집을 차리게했던 ‘화곡보신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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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내는 민주화 투쟁이란 기본적으로 “독재자가 좋아하는 것은 따르지 않고, 독재자가 싫어하는 것은 적극 실행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자기의 모든 행동을 이 원칙에 따라서 한다. 그리하여 이 사내는 비밀경찰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시시덕거리며 농담으로 일관한다. 독재자가 원하고 기뻐하는 것은 고문의 고통에서 오는 비명과 신음일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80년대 중반 전두환 정권과 보신탕에 얽힌 이야기는 417호에서 대충 기술했다. 그 당시 나는 친구들과 보신탕이라도 먹으러 갈라치면, 그 가운데 머뭇거리는 친구들에게 위의 <남자> 이야기를 해 분위기를 제압했다. 전두환 독재정권이 보신탕을 금지했는데, 이 금지를 무시하고 먹는다는 것은 일종의 불복종운동 아니냐, 독재자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의 출발이 아니냐, 이렇게 보통사람들도 일상의 삶 속에서 민주화 운동이 가능한 것이다, 어쩌고저쩌고.
민주화 세력과 전두환 정권과의 긴장이 고무줄처럼 팽팽하던 87년, 이렇게 보신탕을 통해서도 민주화 투쟁을 열심히 하던 한 그룹이 아주 ‘기발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당시 재야에서 문화운동을 주도한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사람들이 그들이다. ‘할일은 많고 자금은 없던’ 이들은 어느 날 화곡동의 유명한 보신탕집에 모여 소주 한잔을 걸치게 되었는데, 이야기 끝에 그 집의 하루 매상을 어림해보다가 민주화운동 자금조달을 위해 직접 보신탕집을 열어보자고 합의했다.
당시 민문협의 대표이던 전 YTN 사장 김종철씨는 수배 중이었는데도 그 집을 들락날락하면서 수완좋게 그 집 주방장을 스카우트하여 기술적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당시 놀고 있던 장선우 감독의 동생 부부를 관리사장에 앉혔고, 유인택(영화사 기획시대 대표), 김영철(한겨레 스포츠레저부장)씨 등이 재야 어른들을 손님으로 끌어오는 ‘삐끼’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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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문화일꾼들 모두 그 집의 개고기 맛에 혹하고, 그 집의 매상에 놀라고, 그래서 민주화운동 자금조달의 비책으로 보신탕집을 열기로 결정하고, 주방장을 빼낸 그 집. 바로 화곡동 본동시장 부근 화곡보신육(02-692-3404)을 10여년 만에 찾았다. 나지막한 단독주택이 아직 그대로였고, 여주인 조선제씨(60)의 수선스러움도 그대로였다. 전북 장수군 음식풍의 밑반찬 또한 옛 그대로 푸짐했다.
이 집의 특징은 개고기에서부터 밑반찬에 이르기까지 푸짐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냥 마구 가져다준다. 그러나 반말지거리 여주인의 설레벌레에 쉽게 넘어가지는 마시라. 꼭 먹을 만큼만 흥정하고 드시도록
막국수에 풋풋한 산골 인심
옛날 산간지역 막국수의 구수한 맛을 그대로 간직한 가평군 막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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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간행된 <구황촬요>와 <증보산림경제>에는 우리나라의 농어촌과 산간지역에서 기근시 상용한 구황식품들이 나와 있다. 깊은 산간지역에서 살아가는 화전민의 식량은 밤과 옥수수, 감자, 메밀이 주종을 이루며, 이것이 부족할 때는 고사리, 둥글레, 소나무 껍질, 도토리, 도라지, 칡뿌리, 더덕, 마, 백합, 두릅 등을 섞어 먹었다. 호서지방 농촌지역에서는 메밀 등 잡곡을 심어 주곡의 소비를 줄이고, 채소잎과 뿌리를 말려 저장해 쌀·보리와 섞어 죽이나 밥을 해먹었다. 충청도 지방에서는 기근이 들 때 심지어 황토흙까지 국이나 죽에 새알심처럼 만들어 넣어 먹기도 했으니,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이처럼 모질 수 있을까?
옛 문헌에는 메밀이나 메밀꽃이 구황식품에 들어가 있지만, 기근 단계에서 보면 메밀이라도 먹을 수 있을 때는 어떻게 보면 행복한 시기다. 우리 겨레의 식생활에서 곡기로서의 메밀의 가치는 그리 높게 평가되지 않지만, 산과 들을 헤매어 구한 초근목피로 굶주림의 고통을 삭이는 것에 비하면 아주 훌륭한 먹을거리기 때문이다.
메밀은 거름기가 전혀 없는 산비탈 자갈밭에서도 잘 자란다. 또 웬만한 가뭄에도 싹이 잘 나서 견디며 초가을 흐드러진 꽃을 피우고 알곡을 맺는다. 중부지방에서는 가뭄이 들어 유월 중순까지도 모를 내지 못하면 눈물 반 한숨 반으로 갈라터진 논바닥을 대강 일궈 메밀을 심는다. 가을이 되어 갈무리된 메밀 알곡은 기나긴 흉년의 겨울을 보내는 데 요긴히 쓰인다. 메밀묵을 쑤워먹는 것은 사치이고, 대개 맷돌로 메밀을 둘둘 갈아 체로 친 다음 반죽해 수제비를 만들어 먹는다. 까끌까끌 제대로 갈리지 않은데다 껍질까지 걸러지지 않아 끈기 없는 수제비가 입안에서 빙빙 돌지만, 조금이라도 불평을 할라치면 어른들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처럼 중부지방의 농촌에서는 메밀을 상시적으로 많이 심지 않아 먹을거리로서 메밀 요리법이 단순하지만, 산비탈 자갈밭에 계속 메밀을 심어온 강원도 산간지역에서는 일상적 먹을거리에서 메밀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강원도 산간지역에서는 예부터 집집마다 막국수를 눌러 먹었다. 메밀을 맷돌로 갈아 체로 친 다음 뜨거운 물에 반죽해 국수틀로 눌러 국수를 뽑는다. 막국수의 ‘막’은 껍질째 맷돌로 간 까끌까끌한 메밀가루 때문에 붙은 접두사다. 양을 늘리기 위해 메밀 갈은 것을 일부러 듬성듬성한 체로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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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릇에 3천원이지만, 주인 아주머니 마음이 좋아 막국수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나 허기진 사람은 반죽하기 전에 더 요구하면 그 값에 듬뿍 말아준다. 막국수 이외에 술·부침개·수육 등 다른 메뉴는 일절 없으며, 아쉽게도 일요일에는 쉰다.
가평읍에서 북면 방향으로 10km 간 뒤 갈림길에서 적목리(명지산)쪽으로 10km쯤 가면 도대2리 마을이 나온다. 조심해서 살펴야 찾을 수 있다. 도로 오른쪽에 ‘막국수’라고 쓴 노란 페인트칠을 한 프로판 가스통이 유일한 간판이다.
처가집 가서 장모님 찜닭 먹세
전통 찜닭의 다양한 조리법을 아는가… 예스런 맛을 살린 처가집에서 몸보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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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김알지 탄생설화에 의하면 “신라왕이 어느날 밤에 금성 서쪽 시림 숲 속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호공을 보내어 알아보니, 금빛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그래서 그 궤를 가져와 열어보니 안에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그 아이가 경주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숲의 이름을 계림(鷄林)이라고 하였고, 이것은 한때 신라의 국호로도 쓰였으니 문헌상으로 보아 닭은 최소한 신라 건국 시기인 기원전 1세기 이전부터 이 땅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삼국유사>에는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에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는데, 이것은 닭볏의 피로 찍은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닭의 원산지 인도와 닭의 한반도 유입의 관련성을 상상케 하는 대목이다. 닭은 소나 돼지에 비하여 지방이 적고 맛이 담백하여 소화·흡수가 잘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소·돼지 다음으로 널리 식용되고 있고, 백숙·찜·불고기·회 등 다양한 조리법이 개발되었다.
이 중 찜이라는 조리법은 흔히 찜통이나 시루에 넣고 뜨거운 김으로 익히는 방법으로 알고 있으나, 우리의 전통 찜 조리법은 그렇지 않다. 곧 찜은 국물을 재료가 잠길 만큼 넣고 끓여, 익으면 국물을 자작하게 남기는 조리법이다.
1809년 빙허각 이씨가 가정 살림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여 엮은 책 <규합총서>에 보면 찜은 “국물이 바특하여 제 몸 다 익은 뒤에는 젖을 만하여야 좋다”라고 되어 있다. 곧 찜은 조리기법에서 온 명칭이라기보다는 마무리가 된 모습에서 김으로 쪄냈을 정도의 즙을 가진 요리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조 중기에 서유거가 엮은 <증보산림경제>에는 병아리를 적당히 잘라 파, 소금, 기름으로 볶아 10분쯤 익힌 뒤 후추, 천초, 물, 술을 넣고 익히는 연계찜, 암탉의 배에 도라지, 생강, 파, 천초, 간장, 식초, 기름 등 7미를 넣어 항아리에 담아 중탕으로 찐 칠향계법 등 우리 전통 닭찜 요리법이 나온다. 그냥 맹물에 삶아내는 듯한 요즘의 닭찜에 비해 아주 고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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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의 찜닭 맛은 가슴살까지 포함하여 닭고기의 모든 부위가 상 위에 올려져 시간이 지나가도 푸석푸석하지 않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또 매콤한 양념장에 톡 쏘는 겨자를 풀어 만든 닭고기 찍어먹는 소스가 독특하다. 한여름에도 정갈하게 나오는 포기김치와 함께 후식으로 생각하고 먹는 메밀국수(3500원)의 맛 또한 무척 개운하다. 찜닭 1마리(1만4천원)면 3인이 충분히 먹을 수 있다. 다 해치우지 못한 닭고기는 잘게 찢어 메밀국수에 넣어 먹으면 상 위에는 닭뼈만 남게 된다. 처가집은 구청에 신고한 식당 이름이고, 정작 이 집에는 ‘찜닭’이라고 쓴 조그마한 간판만 붙어 있으므로 주의해서 찾아야 한다.
족보 없어 더 맛있는 냉면
하기식의 어두운 기억이 스며 있는 깃대봉집에서 산동네 서민들의 냉면맛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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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동안 애국심으로 상징 조작되어 국민에게 군사 독재정권과 국가를 동일시하게 하는 데 이용돼온 태극기의 권위·충성·근엄주의가 그 허울을 벗어젖히고 민족공동체의 구심 부호로써 시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간 순간이었다.
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이른바 10월유신을 단행하고 본격적인 장기 독재정권으로 치달아갈 무렵 하기식이라는 것이 있었다. 중앙청이나 시청 등 주요 공공건물에는 매일 아침 태극기를 게양하고 저녁 6시에는 태극기를 내려야 했다. 이때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함께 흘러나온다. 건물 안에서 일하고 있었던 사람은 하던 작업을 중지하고, 지나가던 행인들은 혹시라도 애국심과 충성심이 의심받지 않도록 가던 길을 멈추고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시청 부근에서의 이 장면이 이 땅의 평범한 장삼이사들의 하기식이라면, 구중궁궐 청와대를 철통같이 지키는 경복궁 안 수방사 30대대에서는 좀더 괴기스러운 하기식이 열린다. 대통령의 신변경호뿐 아니라 심경까지 경호해야 한다면서 조금이라도 박정희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인사들을 철저히 차단해온 경호실장 차지철은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하고 완전무장한 수방사 병사들을 열병시킨 채 하기식을 주도했다.
단 중앙에는 차지철이 굳은 얼굴로 사열을 받고 있었고, 양 옆으로는 총칼의 위력을 과시하고자 차지철이 억지 초청한 언론사 사장, 대학총장, 재계·문화계 인사들이 엉거주춤 서 있었다. 군화끈을 질끈 동여매고 이들을 향해 경례를 붙이는 열병 지휘관 전두환 중령이 이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조금은 짐작이 간다.
하기식은 나라로부터 잔뜩 의무만 요구받았지, 나라가 해준 것이라고는 별로 없는 민중들의 삶에도 악착같이 파고든다. 70년대에 서울에서도 유명한 판자촌 마을 창신동 산동네에도 꼭대기에 국기게양대가 설치되고, 매일같이 하기식이 거행되면서 삶과 노동에 지친 서민들의 애국심과 충성심을 다그쳤다. 창신동 사람들은 그 국기게양대를 그냥 깃대봉이라고 했다. 깃대봉 바로 앞에 그럴싸한 냉면집 깃대봉집(02-762-4407)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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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 척박한 산동네 경제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싸고, 풍성하고, 서민들의 입맛에 맞아야 하는데, 깃대봉집의 냉면이 그렇게 시작되었으라는 짐작이다. 조성철(74)씨가 1960년에 이 산동네에 냉면집을 열었고, 지금은 조씨의 5남매가 모두 그 집에서 일하고 있다. 둘째딸 조성미(40)씨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나의 짐작과 바로 일치했다.
메밀보다는 고구마 전분을 많이 쓰기 때문에 면발은 하얗고, 면 위에 무김치가 얹어 나오기 때문에 냉면 김치도 따로 없다. 산동네 서민들의 입맞에 맞춰 주문받을 때 매운 것, 안 매운 것만 묻는다. 입구에서부터 주방 모두가 허술하지만 호호 불어가며 먹는 매운 냉면맛만은 일품이다. 동대문 이화여대병원 오른쪽 성벽길을 따라 300m 올라가면 성벽 사이 암문이 나온다. 이 암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 깃대봉냉면집 깃대가 보인다. 맛 좋고 양 많고 값싸니(보통 3500원, 곱빼기 4천원), 가는 길이 좀 험하더라도 즐겁게 찾을 일이다.
콩국수, 고소해 죽겠네
세계 콩의 원산지는 고구려… 누르스름한 우리 콩으로 만든 광정식당 쑥콩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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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에서 콩의 처음 이름이 숙(菽)이었음이 <시경>에 쓰여 있다. 그런데 숙의 꼬투리가 제물을 담는 나무로 만든 그릇 두(豆)와 비슷해 이후 콩의 이름이 두(豆)로 변한 것이다. 흔히 어리석은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숙맥’(菽麥)은, 콩과 보리는 모양이 다른데 그것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콩의 원산지는 중국의 동북부 곧 만주다. <관자>에 제나라 환공이 만주지방에서 콩을 가져와 중국의 중부·남부지방에 보급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우리나라 함경북도 회령군 오동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콩이 출토된 점 등으로 미루어 콩의 원산지는 만주, 곧 삼국통일 전 옛 고구려 땅임이 확실하다.
일본에는 2천여년 전에 우리나라를 거쳐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에는 17세기 말 독일에 처음으로 콩이 전해졌고, 미국에는 19세기 초에 콩이 처음 알려지고 20세기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재배되었으므로 서양 사람들이 콩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의외로 오래되지 않았다.그러나 현재는 세계 총생산량의 70%를 미국이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는 중국이 생산하고 있어, 콩의 원산지로서 우리나라의 위치는 그저 그렇게 되어버렸다.
콩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 특히 서민들이 단백질 공급원으로 애용해왔다. 어린 풋대콩은 삶아서 먹고, 익은 콩은 콩밥·콩국수·콩자반·콩설기떡·콩엿 등을 만들어 먹는다. 또 콩을 가공해 두부·비지·된장·간장·콩나물·콩기름 등을 만들기도 했다.
조선 중기의 실학파 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 “좋은 곡식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은 다 귀한 자에게로 돌아가 버리고 가난한 백성이 얻어먹고 목숨을 잇는 것은 오직 이 콩뿐이다…. 맷돌에 갈아서 정액만 취해서 두부를 만들면 남은 찌끼도 얼마든지 많은데 끓여서 국을 만들면 구수한 맛이 먹음직하다”고 썼다. 또 19세기 말 경상도 상주지방에서 필사되어 전해내려온 조리서인 <시의전서>에는 “콩을 물에 불려 살짝 데쳐서 가는 체에 밭여 소금으로 간을 맞춘 다음 밀국수를 말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콩의 단백질과 지방질을 그대로 살릴 수 있는 콩국수가 우리 민중들 사이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애용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하철 2·5호선 왕십리역 부근에 있는 광정식당(02-2296-0367)은 100% 국산 콩으로만 15년째 콩국수를 만들어오고 있다. 주인 강봉애(55)씨는 고향인 전남 곡성에서 생산한 콩만을 사용한다. 표백된 듯 새하얀 수입 콩과는 달리 누르면서도 푸르스름한 곡성 콩은 땅콩이나 깨를 함께 넣어 갈지 않더라도 콩 자체만으로 너무 고소하다. 이 집의 또 하나의 특징은, 10여년 전부터 밀가루 국수를 쓰지 않고, 밀가루에 쑥을 찧어넣은 쑥국수를 직접 뽑아 쓴다는 점이다. 향긋한 쑥냄새에 고소한 콩국맛이 산뜻하게 어울린다.
한여름에만 철 메뉴로 콩국수를 내놓는 다른 식당들과는 달리 이 집은 1년 내내 콩국수를 말고 있어, 콩국수 전문식당으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자식들을 자기 몸보다 더 끔찍이 여기는 이 땅의 어머니답게 식당 이름도 두 아들 광기·정기의 이름 첫 자를 따 광정식당이다. 어머니를 닮은 미남 노총각 이광기(34)씨가 어머니의 정성과 기술을 착실히 전수받고 있다(콩국수 4천원).
막걸리의 짝을 찾아서
소설가 이정환 선생의 유별난 막걸리 사랑… 톡 쏘는 홍어찜만한 짝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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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정환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와 지내다가 다시 육군에 입대했으나 군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영해 숨어 지내며 시작(詩作)수업에 전념하다가 헌병대에 붙잡혀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고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가 어찌어찌해 특사로 출옥해 세상의 햇볕을 보게 된다. 76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발표되어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킨 이정환 선생의 장편소설 <샛강>은, 선생이 감옥에서 나온 뒤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나듯 솔가해와 악다구니하며 함께 울고 웃던 난지도 부근 샛강의 버려진 인생들의 이야기로, 70년대 리얼리즘 문학의 큰 성과였다.
76년 겨울이든가, 나는 이정환 선생을 어느 출판기념회에서 처음 만났다. 선생은 난지도 인생답게, 차려진 뷔페 음식과 양주 칵테일에 무척 낯설어하며 손을 대지 못했다. 그리하여 몇몇 분들과 일찍 자리를 작파하고 청진동 뒷골목 막걸릿집으로 가 통음한 기억이 난다.
이를 계기로 이후 이정환 선생과 자주 술자리를 만들어 어울렸는데, 나는 청탁을 불문하지만 이 선생은 막걸리를 좋아해 주로 막걸릿집을 택했다. 그런데 이 선생의 안주 주문이 아주 특이했다. 보통사람이라면 막걸리엔 빈대떡·낙지볶음·두부 등이 그럴싸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선생은 달랐다. “어이, 김형 우리 토마토 썰어 달래서 막걸리 한잔 먹을까?” 또는 “우리 배고픈데 자장면 시켜서 막걸리나 한잔 합시다.” “황도 통조림에 막걸리!” 매사 이런 식이다.
오래돼서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이정환 선생이 즐기는 막걸리와 안주의 부조화와 불협화음은 자주 있었다. 어떤 술에는 어느 안주가 제격이고, 어느 안주가 있으면 어떤 술을 마시면 좋다는 생각은 술꾼이라면 생래적으로 판단하는 것이고, 또 복잡하게 토론하지 않더라도 쉽게 합의하는 것인데, 참으로 이 선생의 선택은 기이했다.
각설하고. 막걸리의 궁합을 볼 것 같으면 아무래도 안주로는 홍어가 어울린다. 암모니아 냄새가 살짝 나도록 발효시켜 얇게 저며 썰어 초고추장이나 소금에 찍어 먹는 전라도식 홍어회, 홍어살을 칼로 채질해 식초에 담가 꼬들꼬들해진 다음 꼭 짜 식초물을 빼고 미나리·초장·마늘·생강 넣어 무쳐 먹는 서울식 홍어회, 홍어애(창자)에 된장 풀고 보리순(부추로 대신할 수 있다)을 넣어 끓인 홍어국, 홍어를 꾸둑꾸둑 말려 미나리·콩나물·버섯 넣고 찐 홍어찜, 홍어회 위에 묵은 김장김치 얹고 또 그 위에 돼지고기 편육을 얹어 먹는 삼합 등 톡 쏘는 홍어 안주는 시금털털한 막걸리와 궁합이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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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 홍어와 만나는 막걸리는 주인 김씨가 집에서 직접 담근 것이다. 나는 이 집 막걸리를 마실 때마다 20여년 전 막걸리와 이상하게 만난 이정환 선생의 안주들을 생각하며 혼자 웃음짓는다.
돼지가 연탄을 만날 때
‘연탄전성시대’의 아릿한 기억… 쫄깃한 고기맛이 일품인 ‘연탄삼겹 고추장구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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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은 방바닥을 골고루 덥게 해주며, 습기가 차지 않도록 하여 기거하기에 적합하도록 하며, 화재에도 안전한 이상적인 난방법이다. 그러나 온돌은 실내공기가 건조하기 쉽고, 여름에는 바닥의 습기가 상승하여 눅눅하게 되는 결점이 있다. 온돌을 잘 놓지 못하면 불길이 아궁이 밖으로 나오거나 균열이 생겨 연기가 누출되기도 한다.
또 우리나라 같은 대륙성 기후는 겨울이 춥고 길기 때문에 온돌을 데우기 위해서 장작·솔가지·잡목줄기·낙엽·짚·건초 등 많은 양의 땔감을 소모하게 된다. 부실한 굴뚝과 넓은 부엌 아궁이로 인해 열효율이 떨어져 그 소비량을 가중시켰다. 그리하여 마을 주변의 숲은 땔감 채취로 말미암아 많이 황폐화되고 나무의 질도 퇴화되었다. 이런 상황은 일제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6·25 이후 석탄 가루를 버무려 원통형으로 만든 구공탄이 출현해 보급되면서 점차 수그러들었다.
이후 구공탄은 구멍 수에 따라 9공탄, 19공탄, 22공탄으로 발전되었고, 업소용 32공탄도 따로 나왔는데, 1950, 60년대 도시 주민들의 난방·취사용으로 절대적이었다. 흔히 “박정희 때문에 산에 나무가 많아졌다”고 하지만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시민들이 편의를 추구하며 장작 대신 연탄이나 석유가 난방·취사용 연료로 바뀌면서 나무 채취가 줄어들어 산이 푸르게 된 것이다.
11월 월동준비 때 좀 있는 집은 부엌이나 처마끝에 연탄을 쌓을 수 있는 대로 1천여장 들여놓고 오는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것에 흐뭇해하는 반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산동네 서민들은 100, 200장, 또 그도 안 되는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새끼에 매달린 연탄 한장을 달랑 들고서 추운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한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자 연료로서 연탄도 그 사명을 다하기 시작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다국적 석유회사들을 통해 물밀듯이 들어온 석유는 ‘주유종탄’이니 ‘주탄종유’니 하며 잠시 연탄과 혼재하는 것 같았지만, 곧 연탄을 밀어내버렸다. 이제 연탄은 최소한 대도시에서는 연료로서 자기 사명을 다하고 자취를 감춰 약에 쓰려고 찾아보아도 구경할 수 없다. 간혹 생선구이집, 변두리 소갈비·돼지갈비집에서나 볼 수 있으니, 인공사육, 유전자 조작, 화학조미료투성이인 요즘의 먹을거리에 옛날식 불을 지펴 그냥 향수나 자극하려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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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김재진(56)씨는 서울 강남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다가 2년 전 이곳으로 내려와 연탄삼겹 고추장구이집을 열었다. 점심 때부터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분당·수지에서는 꽤 알려진 집이 되었다. 맛있다고 돼지고기구이로 너무 배를 채우지는 마시라. 연탄불에 자글자글 끓이는 이 집의 청국장맛을 못 보면 후회한다
스텐카 라진, 보드카 원샷!
러시아 농민봉기와 70년 반독재투쟁을 기억하며 ‘www.인사동’의 보드카를 들이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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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0년 러시아의 농민 지도자 스텐카 라진은 알렉세이 1세의 학정과 봉건 영주들의 수탈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우크라이나 전 지역 농민들에게 위와 같은 ‘매혹의 편지’를 비밀리에 전한다. 드디어 1만여명의 농민군을 규합한 스텐카 라진은 볼가강 유역 차리친을 함락하고, 이를 본거지 삼아 볼가강을 따라 북상해 연안 도시들을 초토화하면서 귀족·영주들의 토지문서를 불태우고 창고에 쌓인 곡식을 굶주린 농민들에게 분배한다.
러시아 전역을 뒤흔든 농민봉기는 황제의 매수에 넘어간 동지의 배반으로 스텐카 라진이 체포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에서 두 팔이 잘리고, 두 다리가 잘리고, 마침내 목이 잘려 처형됨으로써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러시아 농민들은 그의 죽음을 믿지 않고 스텐카 라진이 언젠가 다시 나타나 그들을 이끌고 폭정과 수탈을 쳐부수리라 생각하면서, 그 유명한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진>을 만들어 노래하며 전설을 이어갔다.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진>은 바리톤 솔로로 들어도 좋지만, 역시 압권은 굵직하고 묵직한 러시아 남성 합창단의 합창이다. 러시아 영화사의 전설적 거장 에이젠슈테인의 동명의 영화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합창 <스텐카 라진>은 그야말로 전율을 느끼게 한다.
스텐카 라진의 농민군은 볼가강가 차리친을 점령한다. 그런데 그 성 영주의 딸인 공주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스텐카 라진과 농민군 모두 공주의 아름다움에 빠져 서로가 서로를 질투하고 의심하는 등 한때 군기가 혼란에 빠진다. 다시 볼가강을 건너 탐욕과 압제의 다른 봉건 영주를 공격해야 하는데…. 스텐카 라진과 공주, 그리고 농민군들은 배를 타고 볼가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배가 강 한가운데 이르자 스텐카 라진은 공주를 두 팔에 안고 농민군들 앞에 선다
“나는 공주를 사랑한다. 그리고 압제와 굶주림에 시달려온 여러분인 농민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내 조국 러시아를 더 사랑한다.” 스텐카 라진은 연설을 마치고는 뚜벅뚜벅 뱃전으로 걸어가 공주를 볼가강으로 던진다. 슬로 모션으로 팔랑팔랑 공주가 떨어져내리고, 공주의 몸이 강물 위에 닿는 순간 우렁찬 남성 합창 <스텐카 라진>이 들려오고, 말을 탄 농민군 수만명이 전속력으로 성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넘쳐 넘쳐 흘러가는 볼가강 물 위에
스텐카 라진 배 위에서 노랫소리 들린다.
페르샤의 영화의 꿈 다시 찾은 공주의
웃음 띤 그 입술에 노랫소리 드높다.
돈코사크 물 위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주린다.
다시 못 올 그 옛날의 볼가강은 흐르고
꿈을 깬 스텐카 라진 외롭구나 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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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텐카 라진>을 듣고 싶으면 언제나 보드카 전문집 ‘www.인사동’(02-725-5295)엘 간다. 이 집에는 바리톤 솔로의 <스텐카 라진>도 있고, 돈코사크 남성 합창단이 부른 <스텐카 라진>도 있다. 보드카는 와인이나 코냑처럼 격식 찾고 폼 잡고 하는 술이 아니다. 그냥 이 집의 품격 있는 여주인 박영숙씨가 칵테일해주는 대로 마시면서, 지그시 눈을 감고 역사를 돌려 350여년 전 열혈남아 스텐카 라진의 분노와 열정, 사랑과 좌절에 푹 빠져볼 일이다.
최대포집 행동요령?
돼지고기 굽는 데도 순서가 있다… 오랜 서민의 벗 최대포집 두배로 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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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전부터 단골인 나는 불난 최대포집이 궁금하여 그날 바로 현장에 가보았다. 기름때가 케케 들러붙어 있던 소주 상자들, 40여년간 고기를 썰어 송곳같이 닳아버린 식칼 등 최대포집의 ‘정통성’을 증언하는 물품들이 모두 화마에 흐트러져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무슨 수재민 위로라도 하는 것처럼 주인 최씨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고 하고는, 올 1월 중순 최대포집이 다시 문을 열 때까지 지나는 길에 가끔 들러봤다.
몇년 전 최대포집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기뻐했던 일이 있었다. 나의 사촌동생 홍일선 시인은 한동안 영등포 시장에서 전문적으로 식당에 곱창을 공급해주는 ‘백두산 푸줏간’을 운영했는데, 언젠가 내게 최대포집 안주인 이옥기(62)씨에 대해 불평을 했다. 이야기인즉슨 곱창을 배달해가면 이씨가 웬만한 것은 퇴짜를 놓고 아주 물좋은 것만 찾는 탓에 장사해먹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평소 홍 시인으로부터 술잔이나 얻어먹는 처지라 그 자리에서는 끄덕끄덕 동의하는 체했으나, 속으로는 얼마나 기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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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돼지고기는 소금구이, 양념구이, 껍데기 순으로 시킬 것. 일종의 전채, 주요리, 후식 개념이라고나 할까? 하여튼 30여년의 경험으로 보면 이 코스대로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둘째, 시킨 고기를 한꺼번에 굽지 말 것. 한꺼번에 구워놓으면 딱딱해지므로 슬쩍 초벌 구어 석쇠 한쪽에 모아놓고 먹을 만큼 덜어 조금씩 굽는 것이 좋다. 셋째, 대화할 때도 고기에서 눈을 떼지 말 것. 고기가 타면 맛이 없으므로 타지 않도록 줄곧 주목하고 있어야 하며, 저녁 때는 한 테이블에 두세팀이 합석하게 되므로 피아간에 고기가 넘어가지 않도록 경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다. 넷째, 정치 얘기 등은 하지 말 것. 최대포집에는 대개 줄을 이어 손님이 대기하고 있다. 쓸데없는 공론으로 시간을 끌면 주인·손님 모두로부터 눈치를 보이게 되고, 또 한 석쇠 위에 다른 팀의 고기도 올려져 있으므로 침방울이 튀면 안 된다. 다섯째, 벽에 기대어 앉거나 두꺼운 옷, 또는 옷을 여러 겹 끼어입고 가지 말 것. 기름때·연기·냄새가 옷에 잔뜩 배어 지하철 안에서는 승객들이 모두 쳐다보고, 동네에서는 지나가는 개가 킁킁거리며 따라온다.
청나라 전투식량, 우리 식탁에
병자호란 때 청군이 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국장, 그 전통의 맛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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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전도 그렇지만 지난 시기 전쟁은 군수물자, 그 가운데도 특히 군량의 운반과 그에 따른 군사들의 식사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칭기즈칸의 몽골군이 질풍노도와 같이 아시아와 유럽을 휩쓴 것은, 몽골군들이 햇볕에 말린 양고기·쇠고기 육포로 쉽게 식사를 해결할 수 있어 기동력을 충분히 발휘한 데 그 이유가 있었다고도 해석한다.
식사문제로 역사 모두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 민족이 정복전쟁에 쉽게 나설 수 없었던 것은 우리의 식사 습관을 통해서도 분석해볼 수 있다. 조선조의 군사 편제를 보면 전투원이 100명이라면 군량 등 군물(軍物)을 운반하는 군사가 30명에 이른다. 곧 100명의 전투원을 먹이기 위해 솥단지·쌀·장작·된장·간장 등을 짊어진 군사가 30명이 딸려야 하니 공격전의 요체인 전투력과 기동력이 어떻게 발휘될 수 있겠는가.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들은 미군의 C-레이션처럼 발효된 콩을 각자 전대에 넣어 차고 다니며 끼니 대용으로 꺼내 먹음으로써 기동력을 높였다고 한다. 만주지역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것이 19세기 중반 이후고, 또 만주가 콩의 원산지인 것을 떠올린다면 그럴듯한 이야기다.
<증보산림경제>에는 청국장의 일종인 수시장(水 豆+支(합성요망) 醬) 만드는 법도 수록되어 있는데, 청나라 군사들의 발효 콩 전투식량이 사실이라면 수시장이 그것이 아닌가 유추해본다. 즉, 콩을 불그스레하게 볶아서 삶은 다음 띄워 온돌에서 말린다. 그런 뒤 때때로 꺼내어 물에 섞어 삶아 소금을 넣어 먹거나, 실을 낸 콩에 소금을 넣고 절구에 찧어 그릇에 넣었다가 끼니 때마다 숟가락으로 덜어 채소와 함께 끓여 먹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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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포집을 취재하면서 주인 최씨에게 30여년 전 가게에 나와 뛰어놀던 어린 아들에 대해 물어보니, 지금 30대로 아주 유능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한다. 남의 집 아들이지만 훌륭하게 커준 것을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프로그래머 아들이, 또 그의 아들이, 또또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몇백년 뒤의 최대포집 화재(아니면 다른 좋은) 소식이 TV 9시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했으면 좋겠다고 상상해본다.
진~한 정통 독일 맥주 한 모금
효모의 맛이 살아 있는 옥토버훼스트 맥주… 매장 안의 제조장치에서 만들어 숙성시킨다
맥주는 4천여 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최초로 만들어, 그리스·로마를 거쳐 중세에는 전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맥주는 10세기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간 보리에 물, 또는 맥아를 넣어 자연 발효하는 단순공법으로 제조되었으나, 10세기 전후 독일에서 홉을 넣으면서 오늘날과 같은 향과 쌉쌀한 맛을 내는 맥주로 일반화되었다.
10세기 즈음 맥주의 생산량은 독일보다 영국이 절대적으로 많았지만, 항시 유럽 대륙을 한수 아래로 내려다보고 자기들만 잘난 체한 영국은 독일에서 시작해 유럽에 널리 보급된 홉 첨가 맥주 제조법을 채택하지 않았다. 이로써 영국은 맥주에 대한 유럽의 보편적 기호에서 고립되고, 이후 영국의 맥주산업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럼으로써 영국은 맥주 대신 위스키를 개발하고, 독일은 맥주 종주국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굳혔다.
그러나 중세까지도 맥주의 표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동네마다 산재한 양조장은 자기 지역에서 생산되는 곡식으로 제멋대로 맥주를 만들었으니, 색·향·맛·질이 천차만별이었고, 어떤 맥주는 맥주라기보다는 우리의 막걸리와 비슷한 것도 있었다. 이에 1516년 빌헬름 4세는 “맥주는 보리·홉·효모·물 이외의 어떤 것도 넣어서는 안 된다” 는 유명한 ‘맥주순수령’(Reinheitsgebot)을 공포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그 효력이 유지되는 가장 오래된 식품 관련 법규다.
이렇게 맛과 향이 표준화된 유럽의 생맥주 체제는 18세기 말 전통 양조장들이 근대적 맥주 공장으로 탈바꿈하면서 장기간의 보관과 장거리 운반이 가능한 병맥주를 탄생시킨다. 그러나 가내수공업적 생맥주 생산에서 병맥주의 대량 생산체제로 바뀌었지만, 지방별·공장별 맛과 향의 특색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독일에서는 아직까지 “맥주는 맥주 공장의 굴뚝 그림자가 미치는 범위 안에서만 마셔라”는 금언이 통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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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 브루어리 맥주는 그냥 쉽게 하우스 비어라고도 하는데, 병맥주가 열 또는 비열처리를 통해 효모를 완전히 죽인 맥주고, 생맥주가 여과장치로 효모를 대충 거른 맥주라면, 마이크로 부르어리 맥주는 매장 안의 제조장치에서 맥주를 생산해 숙성한 뒤 신선할 때 잔에 따라주기 때문에 효모가 완전히 살아 있어 깊고 그윽한 맛과 톡 쏘는 향을 낸다. 옥토버훼스트에서 양조되는 바이스 비어는 다른 맥주와는 달리 보리 대신 호밀을 쓰는데, 맥주를 입에 대는 순간은 시큼하지만 마시고 나면 뒷맛이 무척 고소하다. 둥클레스 비어는 볶은 보리를 쓰기 때문에 검은색을 띠는 흑맥주인데 약간 씁쓰레한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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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유래한 것이 오늘날 세계 3대 축제의 하나로, 16일간 700만 관광객이 몰리고 500cc 맥주 1500만잔이 팔리는 유명한 뮌헨의 옥토버페스트(10월축제)다. 맥주 애호가들이여! 뮌헨의 옥토버페스트에는 못 가더라도 강남의 옥토버훼스트에서 정통 독일 맥주 한잔 맛보기를….
가을에 찾아오는 '젊은 낙지'
서늘한 바람 불면 갯벌로 올라오는 '꽃낙지'… 목포낙지집에서 여름내 지친 몸을 달래보자.
1960년대말 당구 이외에는 시내에서 특별히 시간을 '죽일' 거리가 없던 시절. 나는 가끔 친구들과 함께 무교동의 스타다스트호텔 골목 뒤쪽에 있는 음악감상질 세시봉에 들락거렸다. 특별히 음악을 잘 알거나 감상에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교 때부터 음악 듣는 것을 좋아했고, 음악을 감상하러 오는 여대생들을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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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낙지에 대한 나의 '첫 경험'은 부족함과 아쉬움이었다. 이후 20여년이 흐른 뒤 나는 낙지를 만끽할 수 있는 집을 단골로 두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사직동 배화여대 입구에 있는 목포낙지집(02-739-5108)이 그 집인데, 여주인 유영숙(40)씨는 친정어머니로부터 낙지요리법을 전수받았다. 이 집은 냉동낙지를 매운 고추장 양념으로 볶아내는 무교동식 낙지볶음과는 달리, 살아 있는 싱싱한 낙지에 갖은 양념과 미나리·콩나물 등 채소를 넣어 자글자글 끓이는 전골을 낸다.
전남 고흥군 녹동 유씨의 고향마을에서 나오는 낙지를 날마다 새벽에 직접 가져오기 때문에 싱싱한 것은 물론이고 값이 무척 싸다. 유씨는 "전골은 대·중·소 각각 5만, 3만, 2만원으로 일정하지만, 낙지가 많이 잡혀 값이 쌀 떄는 낙지를 듬뿍 얹어주기 때문에 노량진 수산시장보다 싸다"고 말한다. 30년 술꾼 인생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건대 이는 사실이다. 사직동 목포낙지집 외에 홍제동 목포낙지(어머니 오순옥, 02-391-7992), 불광동 목포낙지(둘째딸 유경숙, 02-388-3551), 공덕동 목포낙지(셋째딸 유정숙, 02-713-7604) 등 네 모녀가 따로따로 낙지집을 열고 있는데, 같은 재료, 같은 메뉴, 같은 솜씨로 맛도 비슷비슷하다.
낙지는 초봄에 산란한다. 겨울이 지나면 갯벌 속에 구멍을 뚫고 암수 낙지가 들어가 산란해 수정한다. 수정이 끝나면 수낙지는 필사적으로 구멍을 빠져나오려 하지만 곧 암낙지에게 잡혀 먹히고 만다. 암낙지는 수낙지를 잡아먹고 기운을 차리지만, 그또한 새끼들을 위해 자기 몸을 바친다. 알에서 깬 새끼들은 이곳에서 여름까지 어미의 몸을 뜯어먹고 자란다. 낙지는 몸통·머리·팔로 구성되어 있다. 흔히 낙지 대가리라는 것은 장기가 들어 있는 몸통이고, 머리는 몸통과 팔 사이에 있어 쉽게 분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80년대에 어느 '장군님'을 생각하며 낙지 머리를 질겅질겅 씹은 분들은 실은 낙지 몸통을 씹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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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살이 희고 맛은 달콤하며, 회와 국 또는 포를 만들기에 좋다. 낙지를 먹으면 사람의 원기를 돕는다"고 한 낙지! 늙은 낙지는 가고 젊은 낙지가 돌아온 가을, 30여년 전 낙지발 하나를 놓고 젓가락을 다투던 벗들이 생각난다.
니들이 로마네 꽁띠를 알아?
포도주에 대한 우리의 집착과 오해… 한옥의 정취와 포도주를 함께 즐기는 ‘로마네 꽁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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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명품 찾고 최고급 찾는 좀 있다는 자들이나 잘난 체하는 자들 사이에서 위와 같은 대화는 그리 낯설지 않다. 로마네 꽁띠는 어떤 포도주인가 한마디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포도주다. 프랑스 동북부에 있는 부르고뉴 지방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면 정도에 해당하는 본로마네에서 수확한 포도로만 양조하는 포도주가 로마네 꽁띠인데, 품질은 최상급이지만 생산량은 1년에 6∼7만병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2000년산 로마네 꽁띠의 경우, 프랑스 현지가격으로 1병에 130만원이나 될 정도니,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조차 평생에 한잔을 마셔보기는커녕 구경도 못 해보고, 심지어 그런 포도주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허다하다.
프랑스에서 포도주는 술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퇴근한 뒤 친구들과 어울려 한잔 걸치는 소주와 같은 술이 아니라 식사와 함께 나오는, 요리를 즐기는데 필수적으로 끼어드는 하나의 음료로 생각하면 된다. 음료로서의 포도주는 식사 전에 입맛을 돋우기 위해 마시는 애피타이저용, 본 요리를 먹을 때 마시는 메인 디시용, 그리고 본 요리를 먹고 난 뒤 소화를 돕고 입 안의 음식 냄새를 없애기 위해 마시는 디저트용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이를 구분하지 않고 뒤죽박죽 바꿔 마시거나, 마른안주 놓고 우리 식으로 아무거나 서너병씩 포도주를 비우는 프랑스인은 한명도 없다.
좀 과장해 우리 한식에 비유하면, 애피타이저용 포도주는 식사 전에 몇 숟가락 떠 새콤한 맛으로 입 안에 침이 고이게 하는 물김치요, 메인 디시용 포도주는 밥이 술술 넘어가게 하는 국이요, 디저트용 포도주는 식사 뒤 입 안을 개운하게 해주는 감주나 수정과인데, 이것들을 뒤죽박죽 바꾸거나 섞어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요리를 시키지 않고 포도주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디저트용 포도주를 한두잔 더 마셨을 수는 있을 것이로되, ‘술’로서 포도주는 절대 마시지 않는다. 그들에게 술은 처음도 끝도 코냑이다. 그리고 코냑은 ‘술’이기 때문에 요리 없이 마신다.
나는 우리의 양주 문화를 생각하면 천민의식·허위의식을 떠올린다. 무조건 비싼 술, 무조건 오래된 술을, 무조건 많이 마시는 것으로 자기의 부와 특권의식을 과시하려는 천박한 음주 문화에 요즈음 포도주도 한몫 거들고 있는 것 같다. 몇년산 포도주 하며 거들먹거린다. 오래된 포도주는 희귀성으로 인해 값은 나갈지 모르나 질과는 관계가 없다. 그 해의 일조량과 양조 기술이 포도주의 질을 결정지으니 수십년 된 것보다 2, 3년 된 포도주가 더 질이 좋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로마네 꽁띠 하며 발음도 잘 안 되는 유명 상표를 외워 비싼 포도주들을 찾는다. 그러나 로마네 꽁띠는 메인 디시용 포도주니, 앞의 비유대로 하면 마른안주 놓고 국 두 대접 훌훌 마시는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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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의 소를 탕으로 펴시니…
선농제에 바친 소로 우려낸 뽀얗고 진한 국물… 한양설렁탕집에 들러 설렁탕의 역사를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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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소는 식용 이전에 농경에 긴요한 동력이었고, 이전에는 제사의 희생용 동물이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면, 부여에서 소는 육축의 하나로 관직명에 이름이 들어갈 정도로 중요했다. 그러나 <신당서> 변진조를 보면, 변한·진한에서는 소를 사육했으나 단지 장례용으로만 이용했고, 백제에서는 우마를 타는 것을 알지 못해 순전히 순장용으로 쓰일 뿐이었다고 한다.
이후 농경의 발달에 따라 소가 밭갈이에 이용되면서 중요성이 커졌으나, 삼국시대 고구려를 통해 이 땅에 불교가 전파되면서 소의 식용은 아주 제약되었다. 불교의 오계 가운데 첫 번째가 살생의 금단이었으므로 당시 대다수 백성이 불교도인 상황에서 소의 육용은 극히 일부에서만 이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라의 법흥왕과 성덕왕은 살생을 철저히 금지했고, 백제의 법왕은 가축의 도살은 물론 사냥용 매와 새매를 기르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물고기를 잡는 어로도구조차 불태워버렸다.
1123년 고려에 온 송나라 사절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고려에서는 일부 상류계급만 육류를 먹을 뿐 일반 백성들은 살생을 꺼렸으므로 가축의 도살법이 매우 서툴렀다고 적혀 있다. 조선에 들어와 숭유배불정책으로 금살생의 굴레가 풀리고 식육을 권장했으나, 유교의 인의사상과 영농상의 중요성으로 소의 육용은 크게 보급되지 않았다.
설렁탕은 제사 때 희생으로 쓴 소를 삶아 그 참여자들이 일종의 음복으로 먹은 음식이었다. 인류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신농씨와 후직씨를 주신으로 제사지내는 것이 선농제인데, 신라·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태조 이래 역대 임금은 경칩 뒤 첫 해일(돼지일)에 소를 잡아 풍년을 기원하며 이 제사를 지냈다. 역대 왕은 선농제를 지내고 나서 제단인 선농단 남쪽의 밭을 친히 갊으로써 백성들에게 농사일의 중요성을 알렸던 것이다.
그리고 제사 때 제수로 쓴 소의 머리·다리·뼈·내장 등을 모두 넣고 오랜 시간 백숙으로 푹 고았는데, 이 국물이 뽀얗고 짙다 하여 설농탕(雪濃湯)이라 불렀다고 한다. 왕의 친경이 끝나고 나면 가마솥에 쌀과 기장으로 밥을 해 설렁탕에 말아 제사에 참여한 왕과 문무백관, 60세 이상의 노인들이 함께 나눠 먹었으니, 설렁탕은 곧 국가의 제사음식인 것이다. 선농제에 참여한 신하가 “살찐 희생의 소를 탕으로 해서 널리 펴시니 / 사물이 성하게 일고/ 만복이 고루 펼치나이다”라고 왕에게 바친 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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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설렁탕집의 사골과 머리뼈로 푹 곤 국물은 참으로 고소하기 짝이 없는데, 뚝배기에 밥 담아 토렴(밥을 데우기 위해 국물을 여러 번 붓고 쏟고 하는 것)하고, 국수 한 사리, 편육 몇점 넣어 국물 부어내면 소주 몇잔과 함께 썰렁한 이 가을 움츠러든 몸이 활짝 펴진다. 같은 재료, 같은 솜씨로 같은 맛을 내는 수원 인계동의 마포설렁탕집(031-235-4455)은 성현씨의 형 현규(42)씨가 운영하고 있다.
돼지를 아십니까, 정말로? 서민들의 소박한 염원이 담긴 다산성의 상징… 솔밭집 ‘도드람 삼겹살’의 절묘한 맛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지방 소도시거나 서울과 같은 대도시거나, 또는 허름한 동네 목욕탕이거나 휘황찬란한 특급 호텔의 사우나거나 탕이나 사우나 독에 들어가 뜨거움을 참으며 가만히 그 집의 ‘만병통치’ 사우나 효능을 설명하는 아크릴판을 읽어보면, 어느 도시 어느 등급의 목욕탕에서도 맞춤법은 물론 문장이 제대로 된 설명문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또 전국의 어느 이발관에 들어가보더라도 그곳에는 대개 딴 데서 본 ‘이발소 그림’들이 걸려 있다.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계곡에 물레방아가 돌고 있고, 상단 여백에는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써넣은 그림이거나, 어미 돼지와 어미 돼지의 젖을 빠는 7∼8마리의 새끼 돼지가 있고, 그 여백에는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푸슈킨의 시구를 적은 그림이 이발소들의 단골 소장품인 것이다. 이렇게 이발소 그림들이 통시적으로, 또 전국적으로 비슷한 소재를 보여주는 것은 한편으로는 문화예술에 대한 이발소 주인들의 ‘민중적 취향’이라는 면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돼지 그림의 경우 돼지의 왕성한 식성과 다산에서 유추되는 풍요와 번영, 재산과 부의 증식에 대한 서민들의 소박한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돼지는 생후 8∼10개월부터 시작하여 10여년간 임신이 가능하다. 임신기간 114일이 지나 새끼를 낸 뒤 한달께 젖을 떼일 쯤 되면 다시 발정을 하므로 한해에 두번 이상 번식시킬 수 있다. 또 자궁각이 길어 한 배에 6∼12마리까지 새끼를 밸 수 있으므로 한 마리의 암퇘지와 그 새끼들이 각각 별탈 없이 10여년간 계속 번식한다면 그 수는 문자 그대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또 돼지는 왕성한 식욕으로 인해 우둔하고 욕심이 많은 동물로 여긴다. 그것도 틀린 이야기다. 돼지는 여러 마리를 같이 길러도 다른 동물과는 달리 먹이를 갖고 다투지 않는다. 또 우리의 선조들은 어미돼지와 새끼돼지들을 한 우리에 넣어 기르지 않았는데, 그것은 어미돼지가 새끼돼지에게 먹이를 양보하여 살이 찌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솔밭집(031-264-0715, 주인 김청자)은 10여년 전부터 수지·분당 지역에서 설렁탕과 해장국이 맛있기로 유명한 집이다. 나는 이 집의 설렁탕·해장국보다는 ‘도드람 삼겹살’을 더 좋아한다. 돌로 된 고기판을 가스레인지 위에 비스듬히 올려놓고 달군 뒤 잘 익은 포기김치와 길쭉하게 썬 삼겹살을 척 펼쳐놓으면 자연스레 김치국물이 고기에 배면서 맛있게 익는다. 그 쫄깃쫄깃한 맛에 돼지고기가 별로인 사람들도 쉽게 1인분 이상을 해치울 수 있다. 그렇다고 고기만으로 배를 채우지는 마시라. 대충 먹고 난 뒤 바로 그 돌판 위에서 남은 고기랑 김치, 파절이 등을 잘게 썰어 기름이 자르르하게 비빈 볶음밥을 맛보지 못한다면 어렵사리 솔밭집에 찾아와 순서 기다리며 자리잡은 본전을 반밖에 뽑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군의 죽음, 조기의 죽음 임경업 장군의 한이 서린 조기가 사라지고 있다… ‘3김’이 함께 나주식당을 찾은 사연
조기는 농어목 민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수종의 총칭으로, 참조기·보구치·수조기·부세·흑조기 등이 이에 속한다. 참조기는 몸이 길고 꼬리 부분이 가는데, 4월 중순부터 6월 하순까지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잡히는 조기가 이것이다. 보구치는 참조기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꼬리지느러미 끝이 참빗 모양으로 생긴 것이 다르다. 수조기는 몸이 길고 납작하며 황적색을 띤다. 부세는 작은 민어와 비슷하며 적황색을 띠고, 흑조기는 부세와 비슷하며 입속이 흑색이다. 정조시대 실학자 정약전이 지은 <자산어보>를 보면, “추수어(水魚), 곧 조기 큰 놈은 1척 남짓하다. 모양은 면어(민어) 비슷하나 몸이 작으며, 맛도 면어와 비슷하나 더욱 담백하고, 용도도 면어와 같다. 알은 젓을 담그는 데 좋다. 흥양 바깥섬에서는 춘분 뒤에 그물로 잡고, 칠산해에서는 한식 뒤에 그물로 잡고, 해주 전양에서는 소만 뒤에 그물로 잡는다. 흑산 바다에서는 6∼7월 밤에 낚기 시작하는데, 낮에는 물이 맑아 낚시를 물지 않기 때문이다. 산란이 이미 끝났으므로 맛이 봄 것보다 못해 어포로 만들어도 오래 가지 못한다. 가을이 되면 조금 낫다. 때를 따라 물을 쫓아오므로 추수어라 한다”고 적혀 있다. 오늘날의 어류학자들이 현대적 장비를 갖추고 오랫동안 조사·연구한 내용을, 200여년 전 한 선비는 귀양 간 흑산도에서 예리한 관찰만으로 조기를 세세히 파악했으니 참으로 경탄할 일이다. 우리나라 서해안의 조기 어업은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임경업 장군과 민중사적으로 연결돼 있었다. 임경업은 조선 인조 때 무관으로, 일생을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분투한 사람이다. 병자호란 뒤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청나라가 조선에 파병을 요구하자 군사를 이끌고 황해를 건너 중국땅으로 갔는데, 명나라와 내통해 핑계를 대고 조금도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이후 임경업은 김자점 등 부청파에 의해,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쓴 채 모진 고문 끝에 죽고 말았다. “임 장군이 황해를 건널 때 군사들이 찬이 없다고 하니 어디에서 가시나무를 가져다가 물에 넣으니 조기가 무수히 걸려서 반찬을 했다”는 등 조기와 관련된 임경업 설화와, 나라를 위해 충성하다가 역적의 흉계로 억울하게 죽은 영웅신화가 민중들에게 각인되어 서해안 일대에서는 임경업당을 세우고 조기잡이 나가기 전에 임경업신에게 반드시 제를 올려 풍어와 안전을 기원했다. 요즈음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환경 파괴와 어족의 남획으로 서해안의 조기 씨가 말라버렸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충성하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민중 영웅에 대한 숭앙정신까지도 미신으로 치부돼 말라버린 상태다.
1980년대 말이든가, 광주에서 ‘3김’이 함께 이 집을 찾은 적이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나와 김종철(전 연합뉴스 사장)씨, 그리고 김태홍(현 국회의원)씨를 분위기도 비슷하고 식탐이 많은 것도 비슷하다고 해 3김이라 불렀다. 당시 나는 이 집에서 처음 맛보는 토하젓에 밥 비벼 먹으랴, 조기매운탕에 소주 한잔 걸치랴, 나머지 ‘2김’을 견제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빈대떡 신사를 추억하다 상상력으로 재구성해본 빈대떡 신사의 일대기… 아리랑빈대떡집의 쫄깃한 맛의 비결
한복남이 작사·작곡하고 직접 노래까지 부른 <빈대떡 신사>의 한 구절이다. 어쩌다 노래방에서 화면에 나오는 가사를 보며 이 노래를 부를라치면 나는 부질없이 이 ‘신사’의 일생을 혼자 추적해본다. 이 신사는 구한말 또는 일제 초기 어느 시골 부잣집의 외아들이었을 것이다. 부모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지만, 여느 부잣집 도련님들과는 달리 품성은 착했던 것 같다. 일찍이 경성에 유학 와 배재고보를 다니며 서양의 기독교 문화와 일본의 새 문물을 접했고, 고보 재학 중 부모의 강권으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튼튼한 시골처녀와 결혼을 했으나, 신혼의 즐거움보다는 친구들과 휘황찬란한 경성의 밤거리가 더 눈에 어른거렸을 것이다. 고보를 졸업할 즈음 아버지가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자 그는 졸지에 큰 식솔을 거느리는 부잣집 호주가 된다. 처음 한해는 소작인들을 채근하며 농사일을 좀 건사해봤지만, 가끔 경성을 다녀올 때마다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드디어 전답 일부를 팔아 친구와 함께 광산업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광산은 제대로 되지 않아 시골땅을 계속 야금야금 팔 수밖에 없었고, 교제한답시고 총독부 관리들과 주야장창 기생집을 드나들다 보니 점차 사업은 뒷전이었다. 그렇게 몇해가 지나다 보니 광산 채굴권은 어느새 동업자 친구의 손에 가 있었고, 신사에게 남은 것은 만리재 넘어 세칸짜리 오두막과 지게미와 쌀겨를 같이 먹는 아내, 그리고 올망졸망한 5남매가 전부였다. 어느 날 딱히 용무는 없지만 아내와 아이들 얼굴 맞대고 하루종일 있기도 뭐해 모처럼 문안엘 행차했다. 무심코 종로 뒷거리를 걷다 보니 전에 자주 드나들던 기생집이 눈에 들어온다. 한숨을 푹 쉬고 그냥 지나치려는데, 문득 한 생각이 떠오른다. “내가 이 집에서 교제술로 날린 논이 몇 마지기인데, 그것을 생각하면 이년들이 술 한상은 주겠지.” 헛기침을 흥 하고 들어가니 기생들은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지 호들갑을 떨며 버선발로 뛰어나온다. 요리 한상 시키고 정종 몇 주전자 비운 뒤 거나한 기분에 “술값은 외상!” 하니 지금까지 입속의 혀처럼 아양떨던 기생들의 눈초리가 달라진다. 사업을 들어먹었다지만 부잣집 망해도 3년은 간다는데, 이 신사는 불알 두쪽뿐인 것이다. 요릿값은 받을 길이 없고, 기생들은 처량히 대문 밖으로 쫓겨나는 이 신사의 뒤에다 대고 화풀이를 해댄다.
그날 저녁, 만리재 넘어 집으로 돌아온 신사는 기생들의 악다구니대로 빈대떡을 부쳐 먹었을까 조선시대의 전통 빈대떡이라면 이 신사는 빈대떡 한장 부쳐 먹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빈대떡은 녹두를 맷돌에 갈아 전병처럼 부쳐 만들지만, 1670년 안동장씨가 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조리서인 <규곤시의방>이나, 1809년 빙허각 이씨가 지은 가정살림에 관한 책 <규합총서>를 보면, 빈대떡은 녹두를 가루내어 되직하게 반죽해 빈철의 기름이 뜨거워지면 조금씩 떠놓고 그 위에 꿀로 반죽한 소를 얹어놓고, 다시 그 위에 녹두반죽을 덮고 지져 만들며, 특별히 위에 잣을 박고 대추를 사면에 놓아 꽃전모양으로 호화롭게 만든다고 했으니, 궁핍한 신사가 이를 어찌 흉내내겠는가. 고속도로 경부선 수원 나들목 부근 신갈 오거리에 가면 아주 맛있는 빈대떡집이 하나 있다. 강호석(51)·임순애(47) 부부가 금슬좋게 20여년간 한자리에서 빈대떡만 전문적으로 만들어왔다. 자신감을 표현하듯 상호에 아예 ‘빈대떡’을 넣어 ‘아리랑빈대떡집’(031-282-9815)이다. 빈대떡은 100% 녹두만 넣으면 맛이 없다. 녹두가 너무 많으면 껄끄러워 입에서 뱅뱅 돌고, 또 식으면 쉽게 굳는다. 그리해서 찹쌀가루를 적당히 넣는데, 이것이 이 집의 부드럽고 쫄깃쫄깃한 빈대떡 맛의 비결이다. 고기를 넣은 녹두고기전, 김치를 넣은 녹두김치전이 각각 한장에 4천원인데, 두명이 막걸리 한되, 소주 한병 마시는 데 전혀 부족하지 않다.
철모의 쓰임새를 아십니까? 병사들이 전립에 음식을 끓여먹으면서 탄생한 전골… 곰국시가에서 찾은 전통 전골의 담백함
이처럼 철모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정밀하게 역학적으로 곡선이 설계되었다고 하는데, 특히 2차대전 때 나치 독일군의 철모는 총탄은 물론 포탄의 파편까지도 튕겨 흘려버릴 수 있도록 강하고 정밀하게 만들어졌다. 2차대전을 소재로 한 전쟁영화의 상투적 장면과는 달리 나치 독일군은 상당히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자신 있게 머리를 들고 연합군을 향해 사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철모의 본령은 전투시 머리 보호인데,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 전방 소총부대가 야전훈련이라도 나가게 되면 그 쓰임새가 여러모로 변한다. 철모는 행군에 지친 병사들의 ‘5분간 휴식’ 때 의자가 되기도 하고, 목마른 전우들을 위해 샘물을 떠오는 물대접이 되기도 하고, 분대원들의 밥과 국을 받아오는 밥그릇이 되기도 하고, 얼굴이나 발을 씻는 고참의 세숫대야가 되기도 하고, 소대장 몰래 받아다 마시는 막걸리 양푼이 되기도 한다. 또 군부대 근처 농가에서는 부대에서 흘러나온 철모에 적당히 나무막대를 꿰어 변소를 푸는 바가지로 이용하기도 한다. 옛날의 철모는 전립투이다. 전립투는 전쟁 때 쓰는 모자라 하여 전립(戰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털실로 뜬 모자라 하여 전립(氈笠)이라고도 한다. 상고시대 전립은 오늘날의 철모처럼 쇠로 만들었던 모양인데, 전시에 진중에서는 기구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병사들은 자기가 쓴 전립을 벗어 각각 음식을 끓여 먹었다고 한다. 이것이 민간에도 전해져 여염집에서 냄비를 전립 모양으로 만들어 고기와 채소를 넣어 끓여 먹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전골이라는 조리법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전통 전골 요리법은 오늘날과 같이 음식 재료들을 모두 넣고 그냥 끓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 유득공이 지은 세시풍속기인 <경도잡지>를 보면 “냄비 가운데 전립투라는 것이 있는데 그 모양이 벙거지와 같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채소는 그 가운데 움푹하게 들어간 부분에다 넣어서 데치고 변두리 평평한 곳에서 고기를 굽는데, 술안주나 반찬에 모두 좋다”라고 나와 있다. 곧 재료를 몽땅 넣고 한번에 끓이는 것이 아니라, 모자전 같은 데서 고기를 구우면 자연히 고기 국물이 채소 국물에 흘러들어가 맛을 내는 조리 구조가 곧 전통 전골인 것이다.
지하철 4호선 상계역 부근의 곰국시가(02-937-0087)는 아주 맛있는 전골 전문집이다. 버섯만두전골·수육전골·모듬전골을 만들어 내는데, 이 집 주인 장은용(39)씨는 전문 요리사 출신은 아니지만 순전히 눈썰미와 맛에 대한 탁월한 감각으로 전골 요리들을 개발했다. 어차피 세상이 변함에 따라 입맛도 변하고, 재료도 옛날과 같지 않으니 전통 조리법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일이나, 양송이·표고·느타리·팽이버섯·떡·만두와 갖은 야채를 넣고 끓인 이 집의 모듬전골은 그나마 우리 전통 전골의 담백한 맛을 전해 주는 것 같다. 어느 전골이든 2만원 짜리를 시키면 3∼4명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독재자의 밀가루는 달콤했다 우리밀 칼국수 한 그릇 앞에 두고 대선 전략으로 수입밀가루 뿌린 박정희와 JP를 생각하다
하여튼 군대를 틀어쥔 박정희는 자기들끼리 서로 치고받는 수차의 반혁명 사건을 겪으며 권력을 공고히 해갔는데, 여기에는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이 땅에 공작정치를 실행하고 공안사건을 조작하게 한 JP가 큰 역할을 했다. 쿠데타의 성공으로 졸지에 권력맛을 본 박정희는 군으로 원대복귀하겠다고 하다가는 갑자기 4년간 군정을 연장하겠다고 하는 등 갖은 술책을 부렸지만, 나라 안팎의 압력으로 결국 민정이양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것이 1963년 10월15일 박정희와 윤보선이 맞붙은 제5대 대통령 선거인데, 이 선거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결판이 났다. 총 1100여만표 가운데 박정희는 유효투표의 46.65%인 470만2642표를, 윤보선은 45.1%인 454만6614표를 얻어 두 사람의 표 차이는 15만6028표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북한의 상황과 같지는 않지만, 60년대 초 남한 역시 식량난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해마다 음력설이 지나고 나면 동네마다 양식이 떨어진 집이 숱하여 초여름 보리가 나기까지 2~3개월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허기진 뱃속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1963년 여름에는 태풍 ‘셜리’가 호남평야를 덮쳐 수십만의 수재민들이 발생했고, 이로써 그해 가을 쌀농사는 대흉년이었다. 이런 흉흉한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하는 초보 정치인 박정희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때 박정희와 JP 등이 꾀를 낸 것이 수재민 구호였다. 이들은 일본·미국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밀가루와 원맥을 도입해 수재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었고, 나머지는 민간업자에게 헐값으로 불하해 막대한 정치자금을 확보했다. 이것이 설탕·시멘트의 매점매석과 함께 이른바 ‘삼분폭리’라 이름붙은 박정희 정권 초기 최대의 부정부패사건이다.
이로부터 40여년이 지났다. 방방곡곡에 밀가루를 뿌려 독재자 대통령 박정희를 탄생시키고 우리밀을 사라지게 한 약관의 JP도 이제는 몸도 마음도 늙은 것 같다. 요즈음은 자기 힘으로는 안 되는지 어쩔 수 없이 정치철새를 앞세워 남의 밥상에 잿가루를 뿌리려고 한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서 우리밀 칼국수집(02-574-1421)을 열고 있는 정무균(56)씨는 우리밀 보급의 열렬한 전도사다. 정씨는 1995년부터 칼국수집을 해왔는데, 몇년 전 우연히 <한겨레>에서 수입 밀 속에 잔류농약·방부제 등 해로운 첨가물들이 많이 있다는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아 수소문 끝에 무공해 우리밀을 구해 지금껏 칼국수를 만들어왔다. 이 집의 우리밀 칼국수는 고소하고 쫄깃쫄깃한 면발에 자연산 다시마, 재첩, 새우, 북어, 버섯, 멸치와 각종 채소 등 20여 가지가 들어가는 국물이 무척 시원하다(칼국수 4500원, 만두 5천원).
‘조리스’에서 맛본 아르헨티나 갈비구이 아사도… 피폐한 국가의 황금시대를 떠올리다
사실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 남미 최고의 잘사는 나라, 나아가 미국과 어깨를 견줄 만한 세계 5대 부국에 꼽혔다. 넓디 넓은 땅에서 경작한 곡물과 초원에서 키운 가축을 제1차 대전으로 황폐화한 유럽에 싣고만 가면 엄청난 돈이 쏟아져들어왔기 때문에 그 부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내가 멀리 갔다고 슬퍼하지 마라. 네가 있음으로 내가 있다. 내 모든 사랑과 슬픔은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작은 목표를 이루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레콜레타 공동묘지에 있는 에바 페론, 곧 에비타의 묘비에 새겨진 유언이다. 1946년 야심만만한 군인 후안 페론과 결혼한 뒤 퍼스트 레이디가 된 에비타를 가난한 사람들은 성녀라고 했고, 부유한 사람들은 정치적 목적으로 빈민을 이용한 악녀로 여긴다. 페론과 에비타는 쏟아져들어오는 돈을 노동자와 빈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뿌리는 데 열중했다. 이로써 페론 부부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작은 목표를 이루었는지 모르지만, 국가의 부를 미래를 위해 투자하지 않아 아르헨티나가 산업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완전히 소진시켜버렸으니, 오늘날 3600만 아르헨티나 국민 가운데 1천만명 이상이 ‘거지를 닮아가는’ 현실의 근원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쇠고기를 물리지 않고 많이 먹게 하기 위해 개발한 음식이 아사도인데, 지하철 4호선 성신여자대학교 부근에 있는 아르헨티나 음식점 ‘조리스’(02ㅡ928ㅡ1838)는 아르헨티나의 전통 갈비구이 아사도와 우리나라의 순대와 비슷한 조리스로 유명하다. 주인 허민씨는 사업차 아르헨티나를 드나들다 아사도와 조리스 맛에 반해 사업을 정리하고 아예 아르헨티나 음식점 주인으로 변신했다. 어긋어긋 썬 갈비를 굵은 소금으로 간을 해서 1~2시간 기름을 쭉 빠지게 구워 허씨가 직접 개발한 청양고추 소스에 찍어먹는 아사도 맛은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광교산에서 부르는 막걸리 찬가 물 마시지 말고 광교산을 오르라, 내려오자마자 ‘24시 해장국’ 막걸리를 들이켜라
내가 등산을 함께하는 팀은 시인 신경림 선생, 소설가 현기영 선생 등이 멤버인 20여년 된 무명산악회, 그리고 고교동창 이우섭이 대장으로 장기집권하고 있는 배재산악회가 있다. 몇년 전 경기 용인 수지로 이사온 뒤로는 홍일선·용환신·윤한택 시인, 음악가 조재식, 사진작가 박희주씨 등 수원·용인 부근에 사는 문화예술인들과 주로 광교산 등산을 즐긴다. 무명산악회는 나의 스승인 고 성내운 선생(전 광주대 총장)이 회장으로 계셨고 회원들도 나보다 연상의 어른들이라 나는 담배 심부름, 술 심부름 하는 처지에서 발언권이 아주 미약했다. 배재산악회는 모두 동창들이라 특별히 내 말만이 먹혀들지 않았는데, 광교산을 등반하는 우공이산 산악회는 회원들이 대부분 나보다 어려 여기서는 제법 대장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광교산은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는 수원의 주산으로, 왕건이 견휜을 격파하고 개성으로 돌아가는 도중 광교산 자락에 머물렀는데, 산에서 광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왕건이 예사롭게 여기지 않고 이 산에 70여개의 절을 세워 고려 왕조의 무궁 안녕을 기원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휴일이면 수많은 수원시민·용인시민들이 광교산을 등산하는데, 완만하지만 잘 자란 수목 사이로 예쁘게 난 오솔길을 등산하는 맛이란 참으로 상쾌하다. 또 광교산이 있는 수지라는 지명에 걸맞게 좋은 약수터들이 널려 있어 등산객들의 갈증을 풀어준다. 나는 우공이산 산악회 회원들과 등산할 때는 약간 독재를 한다. 따뜻한 봄이건 서늘한 가을이건, 찌는 듯한 한여름이건 차가운 겨울이건 가능하면 산에서는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한다. 에베레스트산 등정에 대비한 극기훈련이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러면 사하라 사막 횡단에 대비한 체력다지기 훈련이라도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산 뒤의 뒤풀이를 만끽하기 위해서다. 우리들은 산에서 내려온 다음 대개 수원 장안문 부근에 있는 한 허름한 막걸릿집으로 가는데, 이 집의 막걸리 맛이 끝내준다.
이 집은 막일꾼·고물장수 등 수원시내 ‘민중’들이 즐겨찾는다. 상호조차 장삼이사식으로 그냥 ‘24시 해장국’(031-254-8064)이다. 주인 아주머니 김재옥(40)씨는 부근에서 비슷한 왕대폿집을 운영하는 오빠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아 몇년 전에 이 집을 열었다. 일취월장 청출어람이라고 이제는 오빠네 집보다 손님이 더 많고 안주도 더 맛깔스럽다. 안주 차림도 여러 가지 있지만, 한번 들르걸랑 복잡하지 않게 주인 아주머니께 그냥 불쑥 말하라. 그리하면 마이더스의 솜씨가 술꾼, 당신을 행복하게 하리라. “아주머니, 막걸리 한되 하고, 있는 거 중에서 아무거나 해주세요!”
갈비도 세상도 평등해야 한다 ‘서서갈비집’에서 평등을 떠올리는 이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서서 먹는 쫄깃한 갈비맛
이렇게 매일매일 구타와 고문, 그리고 나의 ‘여죄’를 쥐어짜가며 며칠을 보냈다. 어느 날 ‘정’이라는 수사관이 우리집에 가 압수수색을 하였다며 ‘불온한’ 책 몇권을 가지고 왔다. 그들이 압수해온 책 중에는 존 로크의 <시민정부론>, 막스 베버의 <사회과학방법론>,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이 있었다.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나를 얽어넣으려 했던 합수부 수사관들은 은연중 <시민정부론>에서 내란음모의 체계적 근거를, <사회과학방법론>에서 사회주의의 이념을,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사회에 대한 불편함과 불온성을 연결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코미디와 같은 일이지만, 1980년 ‘광기의 국가폭력시대’에 계몽주의 사상가 존 로크, 자본주의의 윤리를 갈파한 막스 베버, 자유주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저작들을 정권욕에 광분한 군인들에게 차분하게 설명하려 한들 돌아오는 것은 매타작뿐이었다. 볼테르가 루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류에게 트집을 건 당신의 새로운 저술”이라고 한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는, 당시 유럽의 절대군주 치하에서 시달리던 인민의 참상에 대한 의문을 토로하고,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의 자연적·신체적 불평등을 자연법주의로 포장, 용인, 지속시키려는 시대 조류에 맞서 인류 역사와 문화 형성의 잠재력으로서 인간의 사회화, 진취성, 이성의 발달을 들어 ‘인간평등’의 사상을 피력하였다. 인간의 평등은 법적 평등과 조건의 평등으로 나눌 수 있다. 법적 평등은 시민적·정치적 평등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법 앞에서의 평등과 인간 사이의 자연적 평등 관념에 기초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특권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조건의 평등은 사회적 평등이라 할 수 있는데, 사회적 욕구의 증대에 따르는 권리상의 평등 개념이 아니라, 생존의 수단과 조건이 평등해야 함을 설파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의 평등을 형식적이고 환상적인 개념으로 간주했다. 개인은 여러 가지 점에서 같은 점이 없기 때문에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공통의 본성과 존엄성은 ‘평등’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차이’와 ‘평등’은 화해가 가능하지만 ‘특권’은 ‘평등’과 대립한다.
웬만큼 갈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2인분이면 족한데, 특히 이 집의 양념장 맛이 특이하다. 고깃점을 양념장에 담가 먹어도 맛있고, 양념장을 그냥 한 모금씩 마셔도 개운하다. 이 집 역시 <한겨레21> 428호에 실린 마포 최대포집의 ‘행동수칙’ 비슷하게 행동해야 한다. ‘서서갈비’에는 의자가 없으니 최대포집보다 더 빠듯하다. 그리하여 비록 소주잔 기울이며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만, 이 집에 오면 ‘평등’과 ‘특권’을 한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하멜이 청어를 봤더라면… 네덜란드 ‘국민식품’ 청어는 조선에도 지천… 둥지식당 과메기를 맛보며 하멜의 고난을 생각하다
그해 1월10일 네덜란드를 떠난 포겔 스트루이스호는 6월1일 자바섬의 바다비아에 도착했다. 선원들은 그곳에서 며칠 동안 휴식한 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명령에 따라 스페로호크호로 대만의 안평으로 출발해 6월14일에 도착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네덜란드의 대만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는 레세르를 데려다주는 일이었다. 임무가 끝나자 다시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7월30일 나가사키를 향해 출항했으나 대만해협에서 엄청난 풍랑을 만나 난파되어 제주 앞바다까지 흘러온 것이다. 하멜 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어 2년 동안 억류생활을 하다가 1656년 3월 전라도로 옮겨졌다. 그 동안 14명이 죽고, 1663년 생존자 22명은 다시 여수·남원·순천으로 분산, 수용되었다. 이들은 잡역에 종사하면서 길고 긴 고난의 억류생활을 계속했다. 어느 때는 당시 조선의 피폐한 농촌으로 구걸에 나서기까지 했으니 이들의 삶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멜 일행이 억류생활을 한 곳은 전라도 여수 좌수영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다행히 작은 배 한척을 마련해 먹을거리를 구하느라 부근 섬들을 내왕하면서 조수·풍향 등을 잘 알게 되었다. 탈출 직전까지 일행 가운데 생존자는 16명이었으나 탈출비밀이 탄로날까 두려워 전원이 탈출하지 못하고 8명만이 1666년 9월4일 야음을 틈타 출항에 성공해 일본의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1668년 7월 암스테르담으로 귀환했다. 네덜란드로 돌아온 하멜은 조선에 억류된 13년간의 봉급을 동인도회사에 요구하기 위한 근거자료로 <하멜표류기>를 쓰게 되었다. 이 책의 제2부 ‘조선왕국기’에는 조선의 지리·풍토·산물·정치·군사·풍속·종교·교육·상업 등이 실려 있어 저자의 집필 목적과는 상관없이 서양사회에 한국을 최초로 알린 문헌이 되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치즈와 함께 청어를 거의 국민식품으로 생각한다. 한번의 칼질로 대가리와 내장을 긁어낸 뒤 소금을 뿌려 저장해놓고 꼬리를 잡고 통째로 입에 넣는가 하면 샌드위치처럼 빵 사이에 끼워먹기도 한다. 최근에는 남획으로 씨가 말라 청어가 잡히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는 지천이었다. 일찍부터 청어는 소금을 뿌려 말린 관목(貫目)이라는 건제품과 연기에 그슬리는 연관목(烟貫目)이라는 훈제품이 있었다. 모두가 네덜란드식 청어저장법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 과메기는 동짓달 추운 겨울에 잡힌 꽁치를 두름으로 엮어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걸어두고 얼고 녹게 하면서 꾸들꾸들할 정도로 말려서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겨울철 특미인데, 조선시대의 청어 관목에서 유래한 것이다. 곧 ‘관목’이 ‘과메기’가 된 것이라 볼 수 있고, 옛날에는 재료도 꽁치가 아니라 청어였다. 강남 삼정호텔 뒤에 가면 아주 맛있는 과메기집 둥지식당(02-558-5336)이 있다. 이 집에는 여러 메뉴가 있지만 과메기맛이 특별하다. 주인 이진순(50)씨 남편의 고향인 경북 구룡포에서 날마다 부쳐온 꽁치 과메기를 초장에 푹 찍어 물미역·파·양파·깻잎·쑥갓과 함께 김에 싸서 먹으면 비릿하면서도 쫀득쫀득한 맛이 소주병깨나 비우게 한다(1접시 1만3천원). 신년 초에 몇몇 친구들과 둥지식당에 들렀다. 안주와 술을 시키고는 묵은 신문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한국과 네덜란드 양국이 하멜 표류 3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2003년에 대대적으로 벌인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입안에는 잠시 뒤에 맛볼 과메기 한점에 소주 한잔을 기다리며 군침이 괴었지만, 머릿속에서는 340년 전 남쪽바다 어느 어촌에서 청어 관목을 발견하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을지 모를 거지꼴을 한 서양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인이 왕, 그래도 좋아! 다면평가로는 빵점인 김치찌개집 ‘장호왕곱창’이 단면평가로 백점인 사연
상관 혼자 주관적으로 판단해 부하의 운명을 결정하는 종래의 평가제보다 다면평가제는 더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다. 그러나 나는 다면평가보다는 단면평가를 더 좋아한다. 그렇다면 나는 다면평가제를 반대하는 개혁 저항세력인가 노 당선자의 생각과 말, 행동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수구언론들이라면 쾌재를 부를 일이지만 좋아하지 마시라. 내가 평가하고자 하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음식점이다. 음식점 평가항목으로는 먼저 맛이 첫째일 것이고, 다음으로 청결도·교통·주차시설·인테리어·인심·친절도·값·양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모두 고려해 평가하면 이것이 음식점 다면평가제일 것인데, 내가 <한겨레21>의 음식이야기에서 소개하는 집들은 맛과 인심 이외에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으니, 나는 음식점 단면평가제를 고수하는 것이다. 어쩌다 서소문 네거리 부근에 있는 김치찌개집 ‘장호왕곱창’에를 들르다 보면 어떤 때는 참 ‘그렇다’는 느낌이 든다. 여기서 그렇다는 것은 이 집의 환경 모두 그러하지만, 어렵게 짬을 내 찾아가 기다리다 가까스로 김치찌개를 시켜 허겁지겁 먹고 나오는 전 과정이 좀 ‘그렇다’는 것이니, 다음 이야기를 잘 읽어보시라.
선택의 다양성 그건 딴 데 가서 알아보시라. 그냥 주는 대로 1인분에 5천원짜리 김치찌개 한 가지고, 손님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산’이냐 ‘참이슬’이냐의 ‘소주 선택권’과 라면 사리를 넣어먹을 수 있는 ‘자유’뿐이다. 손님들이 빨리 먹고 가기를 재촉하지는 않지만, 밥이 몇 숟갈 남지 않고 찌개국물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면 다음 손님을 입장시켜 뒤에서 기다리게 하니 무언의 압력에 마지막 몇 숟갈은 그야말로 허겁지겁이다. ‘공급자가 왕’인 장호왕곱창집. 주차장 없음, 예약 안 됨, 환경 열악, 메뉴 선택권 없음 등, 다면평가제라면 이 집이 어디 좋은 음식점이라고 감히 명함을 내밀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개운하고 시원하면서도 새콤매콤한 이 집의 김치찌개 맛과 주인 김재하(60)씨의 넉넉한 인심은 나로 하여금 하늘이 두쪽 나더라도 음식점 단면평가제를 고집하게 한다.
양갱 속엔 양이 없다 과자 이름이 왜 ‘양고기 국’이 됐을까…‘램랜드’에서 맛보는 양고기의 맛
춘삼월 버들가지에 물이 오르고, 새 학년 새 선생님을 맞이하고는 5월 보리꽃이 필 무렵 봄소풍을 간다. 초등학교 봄·가을 소풍 12번 가운데 근 10번을 간 원천저수지건만, 소풍가기 전날 밤은 설레는 가슴으로 언제나 잠을 못 이루었다. 소풍가는 날 아침, 어머니는 작은 광 모퉁이 항아리에서 흰쌀을 한 사발 퍼내어 고들고들 밥을 해서는 깨소금·소금 뿌려 참기름에 비빈 다음 시금치 길게 놓고 김밥을 싼다. 그러고는 삶은 달걀 두개와 지난 장날 사오셨는지 깊이 감춰둔 밥풀과자 몇개, 늘어붙어 종이까지 함께 씹어야 하는 캐러멜 1갑, ‘요오깡’ 1개를 김밥과 함께 보자기에 싸주신다. 어린 나이에 원천저수지까지 가는 길 4km는 길고도 멀다. 친구들 몰래 과자 한개, 캐러멜 한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이번에는 오래도록 녹여 먹어야지’ 하고 결심하지만 곧 우둑우둑 씹어버린다. 마지막 ‘요오깡’만이 남아 있지만 돌아올 때 생각 못하고 포장을 뜯어 살며시 입에 베어 문다. 아!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아드는 달콤한 ‘요오깡’의 맛! ‘요오깡’은 한자어 양갱(羊羹)의 일본어 발음이다. 곧 일본에서 팥앙금으로 만든 과자가 양갱인데, 양갱은 ‘양고기(羊)를 넣어 끓인 국(羹)’이라는 뜻이니 참으로 과자 이름이 수상쩍다. 고대 중국 귀족의 집에서는 선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서 조상의 영혼을 위로하고 자손의 번영을 빌기 위해 자주 성대한 제사를 올렸는데, 그때에는 동물을 희생으로 바쳤다. 그 동물은 제사의 중요도에 따라 달랐는데 가장 중요한 제사에는 소를 썼다. 그러나 소는 크고 농경의 역축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일상적 제사에서는 양을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신이나 조상에게 바치는 희생으로서의 양은 잘생기고 큰 것이 바람직했다. 신이나 조상들이 큰 것을 더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제사 뒤 음복물도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될 수 있는 한 큰 양을 골라 희생으로 바쳤다. 여기에서 양(羊)과 크다(大)는 글자가 합쳐져 훌륭한 것, 아름다운 것이라는 뜻의 미(美)자가 나왔다. 양은 제사드리는 희생물이면서 맛도 좋고 털과 가죽도 귀중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한자에서 羊을 부수로 하는 글자들은 대개 제사와 관련된 용어나 맛있는 음식, 상서로움, 경건함을 상징하는 뜻이 있다.
전국시대에 지금의 허베이성에 있는 중산국(中山國) 왕이 신하를 모아놓고 연회를 베풀었다. 그때 사마자기(司馬子期)라는 신하도 연회에 참가했는데, 연회석상에 나온 양갱 분량이 적어 그에게는 돌아가지 않았다. 이 일로 화가 난 사마자기는 그 길로 남방의 대국인 초나라로 달려가 초왕에게 중산국을 정벌하도록 호소하였다. 이렇게 해서 중산국은 초나라에게 멸망당했다. 이처럼 양갱은 고대 중국에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리고 중국 내 회족들은 양의 피를 이용해 수프를 만들어 즐기면서 이것을 또한 양갱이라고 했다. 16세기에 일본인들이 팥앙금으로 달콤한 과자를 만들었는데, 색깔이 수프와 비슷하고 양고기 국처럼 그 과자의 맛 또한 최고라고 해 과자 이름을 양갱, 곧 요오깡이라고 했다. 그러나 붕어빵 속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양갱 속에는 양이 들어 있지 않다. 올해는 양의 해. 우리 입맛에는 좀 낯설지만 1991년 양의 해에 문을 열어 2003년 양의 해까지 12년째 양고기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음식점이 있다. 마포에서 서강가는 길로 버스 두 정류장째 있는 ‘램랜드’(02-704-0223)가 그 집인데, 수입육 무역회사에 다니던 양띠 임현순(47)씨가 어느 날 우연히 회사 회식자리에서 양고기를 맛보고는 반해서 차린 전문점이다. 양고기는 쇠고기와 닭고기의 중간 정도의 맛을 보이는데 세간의 소문처럼 특별한 냄새가 나지는 않는다. 제대로 양고기 맛을 보려면 살점이 넉넉한 삼각갈비(1인분 1만6천원)를 시키면 좋다. 양고기찜(3만2천원), 전골(3만원)도 있고, 중국 고대의 양갱과 같은지 모르지만 양고기곰탕(5천원)도 한끼 식사로 포만감을 준다.
엽기 기생생물, 그래도 맛있다… 다른 물고기의 몸 빨아먹는 꼼장어의 생리… 산 꼼장어로 만든 소금구이를 먹어봤는가
바다 물고기들의 먹이사슬은 비교적 간단하다. 바닷물 속에 녹아 있는 유기물질을 영양소로 흡수하는 식물성·동물성 플랑크톤으로부터 시작해 그 플랑크톤을 먹이로 삼는 작은 물고기들, 그리고 작은 물고기를 집어삼킴으로써 생명을 이어가는 큰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힘이 세거나 덩치가 큰 물고기가 약하고 작은 물고기를 먹이로 삼는 ‘정글의 법칙’이 먹이사슬의 줄기를 이룬다. 그런데 먹이사슬의 자연법칙에 변칙이 일어난다. 공생과 기생 형태로 나타나는 생물체들의 생존방식이다. 공생은 전혀 다른 종류의 생물이 한곳에 살면서 서로 이익을 주고받으며 공동의 삶을 누리는 행태인데, 쌍방이 다 이익을 얻고 있는 상리(相利)공생이 있고, 한쪽만이 이익을 얻는 편리(片利)공생이 있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 소라게의 껍데기에 착생하고 있는 말미잘의 경우가 그 예들이다. 기생은 한 종류는 공존의 의해 이익을 보나 다른 편에서는 이에 의해 해를 입는 생존형태를 말한다. 이때 공존에 의해 해를 보는 쪽을 숙주라 하고, 이익을 얻는 쪽을 기생생물이라 한다. 그리고 기생물이 숙주의 체내에 있을 때는 내부 기생생물이라 하고, 숙주의 체외에 있을 때는 외부 기생생물이라고 한다. 숙주의 체내에 있건 체외에 있건 기생생물은 자신들이 필요한 양분을 섭취 합성할 능력이 없어 이를 직접 숙주로부터 얻는다.
이 ‘하등생물’을 ‘고등동물’인 인간이 좋아한다. 먹이사슬의 질서에서 변칙적으로 튀어나와 물고기들의 몸체를 빨아먹는 곰장어도 세치 혀의 쾌락을 앞세운 인간의 먹이그물망엔 꼼짝없이 잡혀 먹이사슬의 종말을 보는 것이다. 곰장어 가죽으로는 고급 지갑·벨트 등을 만들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많은 양의 냉동 곰장어들을 캐나다·칠레 등지에서 수입한다. 제품용 곰장어들은 가죽만 쓰고 나머지는 폐기되는데, 얼마 전에 매스컴에 보도된 바와 같이 이 폐기물이 시중 포장마차로 흘러나와 몇 사람이 구속되는 등 난리를 폈다. 제품용 수입품은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나라 남해안에서 잡혀 냉동되어 서울로 반입되는 것들도 짙은 양념으로 냄새를 없애야 하기 때문에 양념구이밖에 쓰지 못한다. 그러므로 얕은 맛을 내는 소금구이를 하려면 산 곰장어를 써야 하는데, 산 곰장어를 쓰는 집은 곰장어구이의 원조격인 부산에도 별로 없다. 옛 강남구청 건너편에 가면 산 곰장어만을 구워 파는 전문점이 있다. 20여년간 가전제품상을 하다가 음식점을 열고 싶어 직접 요리를 배우고 나중에는 요리강의까지 하게 된 김정선(54)씨가 연 ‘산 곰장어’(02-549-9279)집이다. 이 집은 산 곰장어를 충무에서 공수해와 계속 물을 갈아대며 수족관에서 키워 손님들에게 내놓는다. 소금구이·양념구이 모두 가능한데 앞에서 말한 대로 얕은 맛의 소금구이가 이 집이 내세우는 메뉴다(소 2만원, 중 2만9천원, 대 3만8천원).
권력보다 굴비가 좋았으니… 이자겸의 비참한 말로를 달래준 영광굴비… ‘영광굴비백반집’에 서울 미식가들이 몰리는 이유
권력자에 대한 ‘신화만들기’는 오늘날은 봉건시대처럼 허무맹랑한 내용을 담지는 않지만 태어나 자라나면서부터 뭔가 특이한 점이 있었고, 탁월한 지도력과 영명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역할도 봉건시대처럼 권력자의 하수인 그룹이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가 맡는다. 신문은 1980년 전두환의 등장 즈음 <조선일보>의 행태에서 보듯 칭송과 미화를 넘어 아예 신문사 소유주와 기자, 군사독재자 서로가 교언으로 육화된 ‘어천가’ 활자기사를 남김으로써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방송매체는 좀 달랐다. ‘땡전 뉴스’라고 해 저녁 9시 시보가 ‘땡’하자마자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해 10여분간 독재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일방적으로 미화하는 뉴스 보도가 날마다 있었지만, 일방성과 치졸함 때문에 국민의 뇌리에 오래 남아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TV매체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작위적으로 보이는 역사 드라마들이 권력교체기에 등장한다. 전두환이 전면에 등장할 때의 <개국>, 노태우가 전두환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을 때의 <조선왕조 오백년>, 김영삼 문민정부 시대의 <용의 눈물>, 김대중 정권 출범시의 <태조 왕건> 등이 그런 드라마들이다. 이 드라마들은 대개 어지러운 세상에서 고뇌에 찬 애국애족적 결단을 한 뒤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국민을 잘살게 했다는 역사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어, 새로 등장한 권력자의 이미지를 조작하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 2월25일, 노무현 당선자가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한다. 옛일이 생각나 혹시 ‘어천가’적 대하역사물이라도 없나 하고 TV프로그램난을 뒤져보니 고려 중기 무신정권을 소재로 한 KBS의 <무인시대>만이 눈에 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武)자 이외에는 노무현 정권과 <무인시대>의 ‘어천가’적 연계성이 떠오르지 않으니, 이제 방송도 드라마 부분에서만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욕심이 과하면 죄를 낳고, 죄가 과하면 죽음을 낳느니, 이자겸은 하늘을 찌를 듯한 권세도 모자라 주군이자, 외손자이자, 셋째사위이자 넷째사위인 인종을 독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다가 발각돼 전라도 영광땅 법성포로 유배돼 비참하게 생을 마치게 된다. 이자겸은 개경에서 “남의 토전을 강탈하고, 복예들을 풀어놓아 마차와 말을 약탈해 자기의 물건을 날랐으며”(<고려사> 이자겸전), 그의 집에는 “썩어가는 고기가 항상 수만근이나 되었을”(고려사) 정도로 부귀와 영화를 누렸지만, 유배시절 법성포에서 굴비를 처음 맛보고는 개경생활을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그가 법성포의 소금에 절인 조기를 인종에게 진상하면서, 왕에 대한 충정과 자신의 옳은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에서 이름을 ‘굴비’(屈非)라고 했다는데 그리 근거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곱창,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 ‘경제’가 보잘것없던 <시와 경제> 동인들의 안주… ‘장터곱창’에서 그 맛을 떠올리다
오늘도 영등포시장엔 휘황한 불빛과
그러나 이들의 문학적 지향과는 달리 동인 각자의 ‘경제’는 참으로 보잘것없었다. 대부분 감옥에서 갓 나와 변변한 직업을 못 가진 백수인 것은 물론, 사는 곳도 대개는 중심부에서 밀려 경기 광명 철산리, 서울 구로 가리봉동, 경기 부천 역곡 부근의 셋집을 전전하는 주변부 인생들이었다. 이 가운데 영등포 시장에서 곱창을 팔던 홍일선 시인의 ‘경제’가 그런 대로 좀 나았으니, 곧 그는 <시와 경제>의 ‘경제’부문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세표 하남거사 문학진 선생을 만나러 경기 하남에 들렀다가 문공의 손에 이끌려 어느 곱창집에 갔는데, 곱창 맛이 20여년 전 홍 시인 집에서 구워먹은 맛 그대로여서 아주 화기애애하게 소주를 여러 병 비웠다. 사실 곱창구이는 특별한 조리법이 필요 없다. 무조건 곱창이 좋아야 한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곱이 꽉 차 있고 밖으로 흘러내리지 않는 신선한 것이어야 곱창 맛이 좋다. 수입 곱창은 오랫동안 언 것을 녹여 구우므로 질기다. 문공과 함께 찾은 하남시청 앞 ‘장터곱창’(031-793-0582)은 여주인 전정숙(50)씨가 서울 가락동·마장동에서 신선한 한우 곱창만을 공급받아 손님들에게 내놓기 때문에 달콤하면서 졸깃한 곱창 맛에 하남 부근에서는 명성이 자자하다. 8년 전 식구와 자양동 어느 곱창 전문집에 갔다가 그 맛에 반해 직접 식당을 차려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생곱창구이 1인분 1만원, 곱창전골 중 1만5천원, 대 2만원).
개울가 친구들은 어디로 갔나 펄떡이는 민물고기를 잡으며 하루를 보내던 어린시절… ‘두지리 매운탕집’에서 추억을 찾다
긴긴 해 마땅한 놀이가 없을 때 우리들은 신갈천으로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헤엄도 치고, 개울로 흘러드는 도랑 물길을 막아 보싸움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싫증이 날 때쯤에는 물고기를 잡는다. 보통 고기를 잡는 데는 반두라는 그물이 주로 쓰인다. 대나무나 막대기로 양 끝을 고정시키고 그물 아래 납덩이 추들을 가지런히 달아놓는다. 그물을 훑을 때 추가 땅에 닿아 고기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물이 둥둥 뜨기 일쑤여서 개울 바닥에 엎드려 있는 붕어, 특히 메기나 가물치는 잡기가 수월치 않다. 간혹 운이 좋아 가물치가 잡히는데, 이놈은 성미가 유별나 그물에 들어올 때 벌써 티가 난다. 건져올리면 어찌나 펄떡거리는지 개울가로 던져놓고 몇대 쥐어박아야 잠잠해진다. 메기를 잡을 때는 주로 개울을 막아 물을 완전히 퍼낸다. 바닥이 드러나면 놈들은 진흙뻘에 숨으려 애쓰는데, 이때 손으로 뻘을 휘저으며 잡는다.미끈미끈해서 두 손으로 잡아야 한다. 어지간히 커서 육고기가 귀하던 시절, 녀석은 훌륭한 단백질원이었다. 메기뿐인가. 논배미마다 뱀장어들이 나와 놀다가 사람들의 기척이 있으면 대가리를 논바닥으로 박고 재빠르게 모습을 감춘다. 붕어는 개울이나 논에 흔히 사는 놈들인데, 몸매가 유달리 아름답다. 손바닥만한 붕어가 걸려들 때 그 맛이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고기를 잡을 때 좋아하면서도 겁나는 놈이 빠가사리나 쏘가리다. 이놈들은 지느러미 가시가 제법 날카로워 한번 쏘이면 얼얼한 것이 한참 간다. 놈을 만질 때는 꽤나 조심스럽다. 간혹 더듬질을 하다가 녀석에 쏘일 수 있는데, 그것이야 그날의 운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연초 친구들과 함께 감악산에 등산을 갔다가 임진강가 ‘두지리 매운탕집’(031-959-4508)에 들렀는데, 이 집 매운탕을 맛보는 순간 40여년 전 신갈천 자갈밭에서 끓여먹던 자연의 맛이 느껴졌다. 짜지도 맵지도 비리지도 않으면서 시원하고 달콤한 국물맛에, 입 짧은 서울내기인 탓에 민물매운탕은 생전 한번도 먹지 않았다는 친구 박학선씨 안사람 정희재씨도 거뜬히 밥 한 공기를 비웠다. 주인 이윤상(60)씨는 이곳 토박이로 20여년 전부터 물고기를 직접 잡아 ‘자기식대로’ 매운탕을 끓여왔는데, 그것이 ‘자연의 맛’에 가까운 것 같다. 메기매운탕 1인분에 1만원, 빠가사리 매운탕 1만5천원, 참게 1마리에 5천원이다. 따로따로 시키는 것보다는 순열조합을 잘하면 맛도 좋고 돈도 절약된다. 4명에 3인분이 적당하다.
‘김학민 식별법’ 의 실패 경험과 과학으로 만들어낸 맛집 고르는 법… ‘산골나그네’ 갈치맛에 산산이 무너지다
우선 지역 특산 음식을 맛보고자 하나 전혀 정보가 없을 때는 택시기사에게 물어보면 대개 특산 음식, 좋은 식당을 안내해준다. 그러나 택시기사에게 묻기도 귀찮고, 그냥 한끼 짭짤하게 입맛에 맞는 식사를 하고자 할 때는 ‘소거법’으로 스스로 식당을 찾아나선다. 첫째,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 부근의 식당은 피한다. 오랜 경험으로 볼 때, 터미널이나 역 부근 식당들은 손님들을 뜨내기로만 보는지, 밥이나 반찬 모두 부실하다. 그러나 읍 규모의 작은 동네에는 대개 기차역 부근에 식당이 몰려 있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둘째, 메뉴가 지나치게 많은 식당은 피한다. 요즘과 같이 ‘전문성’이 각광받는 시대에 메뉴가 너절하게 많은 것은 아무것도 잘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셋째, 메뉴 사이의 ‘인척관계’가 부적절한 식당은 피한다. 이것도 ‘전문성’의 문제다. 돈가스와 회덮밥을 함께 내놓는 식당, 설렁탕과 자장면이 같이 메뉴에 올라 있는 식당이라면 입으로 맛보지 않아도 뻔하다.
이러한 좋은 식당 고르는 몇 가지 기준을 머리 속에 넣고 마지막으로 ‘술꾼 반세기’의 동물적 감각을 발휘해보면 아무리 낯선 곳에서라도 제법 먹을 만한 식당이 걸려든다. 나는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대개 사무실이 이웃해 있는 친구 유재영 시인과 점심을 함께 하는데, 유 시인 또한 음식맛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 그러나 유 시인은 나처럼 ‘과학적 추리’로 맛있는 집을 찾기보다는 문단의 폭넓은 교유관계로 이미 ‘개발된’ 맛있는 집을 잘 알고 있어 나의 음식 이야기 소재 찾기에 도움을 준다. 어느 날 유 시인과 함께 무작정 점심 먹을 집을 찾아 걸어가다가 식당 이름이 ‘산골나그네’(02-717-8833, 715-9644)인 갈치조림 전문집을 발견했다. 갈치조림 전문인데 식당 이름은 ‘산골나그네’라 나의 ‘과학적 추리’로는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유 시인이 들어가자고 우겨대고, 다른 식당 찾기도 피곤하여 그냥 들어갔다. 나는 그 집에 들어가 갈치조림을 시키고는 나의 추리에 의한 좋은 식당 찾기의 ‘과학성’을 유 시인에게 침을 튀겨가며 설명하였는데, 아뿔싸 곧 갈치조림과 반찬들이 나온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쯤되면 막 굽자는 거냐? ‘막’자가 특별했던 하루… 드럼통 막창구이집에서 얼근하게 취해 막차 타고 돌아오다
노무현 대통령의 전격적인 제안으로 이루어진 이 토론회는, 항상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되면 정면 승부를 걸어온 노무현식 담판 정치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었지만, 우리나라의 최고 엘리트 공무원이자 항시 국가의 안보와 사회의 안녕질서를 담당해왔다고 자부하는 검사들의 인문학적 소양과 세계관의 단면을 드러내기도 한 장면이었다. 토론의 막이 오르자 노 대통령과 강금실 법무부 장관은 검찰개혁을 위해, 그리고 검찰 인사제도 마련의 시간적 제약 때문에 서열 파괴의 이번 인사가 불가피함을 역설했고, 검사들은 막으로 가려진 밀실인사를 비판하면서 검찰총장에게로의 인사권 이양, 또는 현재의 검찰인사위원회에서 인사문제를 처리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검사들은 세계 유례가 없는 검찰총장에의 인사권 이양 외에, 검찰인사위원회에 대한 구체적 대안 제시는 없었고, 막무가내로 자기들의 조직 이기주의적 주장만을 펴고 있으니, 숨을 죽이고 구경하던 국민은 남녀노소 막론하고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자기들의 부서 최고책임자인 법무장관은 막대기로 여겨 말을 막고, 오직 대통령만을 상대로 자기들이 얼마나 일을 많이 하고 있으며, 얼마나 나라를 위해 고생하고 있는가 열변을 토하였지만, 이에 고개를 끄덕거릴 국민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자기들은 가족도 잊고 밤 12시까지 일을 한다고 하지만, 밤 12시까지 일할 수 있는 직장조차 구하지 못하여 막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실직자, 목숨을 걸고 막장에서 석탄을 캐는 탄광 노동자들, 남대문시장 허드레 막벌이꾼 등의 막살 수밖에 없는 삶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토론의 마지막까지 다 보고 나서 저녁에는 막국수나 삶아 새콤한 김장김치에 비벼달라고 할까 생각하다가, 좀 한가한 김에 아내를 꼬셔 며칠 전 독자 김진숙씨가 제보해온 막창구이집을 취재하러 나섰다. 지하철 8호선 문정역에서 내려 좀 헤매다가 바로 그 ‘드럼통 막창구이집’(02-409-2599)을 찾았는데, 빈터에 판자로 얼기설기 지은 막건물이었다. 주인 김언순(50)씨는 3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 사업에 실패하고 나서 이 집을 차렸는데, 타고난 눈썰미와 맛감각으로 아무리 먹어도 전혀 물리지 않는 쫄깃쫄깃한 막창구이를 개발해냈다. 내키지 않는 외출, 찾기까지의 헤맴, 어수선한 식당 모습에 구시렁거리던 아내도 막상 막창구이 맛에는 대만족하여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밤들이 막창구이와 막가는 세상을 안주로 얼근하도록 마시고 마을버스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제주에서 매일매일 직송해오는 두툼한 갈치조림의 매콤한 맛에 더덕, 고춧잎, 무말랭이, 콩잎 장아찌 등 10여 가지 반찬이 더하니, 밥공기가 순식간에 바닥을 보인다. 그날 나는 갈치조림과 짭짤한 밑반찬으로 고슬고슬한 흰 쌀밥을 허겁지겁 입 속에 떠넣으면서도, 나의 좋은 식당 찾는 법의 허점을 다그치는 유 시인에게 “예외 없는 원칙은 없다”로 응수하며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손님 팀별로 작은 솥에 밥을 따로 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리므로 예약을 하고 가는 것이 좋다.
부시는 순대를 좋아할까 피에 굶주렸다면 이라크를 괴롭히지 말고 풍성식당의 세계 최고 순대를 맛보시라
지금은 사라져버린 언어지만, 만주어 ‘셍지’(senggi)는 피를 뜻한다. ‘셍지’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짐승의 피를 가리키는 말인 ‘선지’가 되었다. 또 들볶여 귀찮다는 뜻인 ‘성가시다’의 옛 표기는 ‘셩가다’인데, 원래의 뜻은 ‘파리하다’다. 그리고 이 말은 만주어 ‘셍지 각시’(senggi-kaksi)에서 나왔는데, 바로 ‘셍지’는 피를, ‘각시’는 게우다·뱉다를 뜻한다. 곧 ‘성가시다’는 피를 게워 파리한 상태를 말하는데, 나중에 들볶여 귀찮다는 뜻으로 변했다. 순대는 만주어로 순대를 가리키는 ‘셍지 두하’(senggi-duha)에서 나왔다. ‘순’은 피를 뜻하는 ‘셍지’에서 나왔고 ‘대’는 창자를 뜻하는 ‘두하’가 변형된 것이다. ‘대’가 창자를 뜻하는 것은 ‘대’가 변형된 배때기의 ‘때’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곧 순대는 동물의 창자에 피를 담아 만든 먹을거리인데, 기원은 몽골인들의 음식문화에서 보인다. 몽골인들은 가축에서 얻는 고기와 짜낸 젖과 젖으로 만든 유제품을 주식으로 한다. 영화나 문학작품들에서는 초원에서 마구 가축을 도살해 고기를 구워먹는 장면이 흔하게 나오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몽골인들에게 가축은 가족의 생명을 이어주는 전 재산이기 때문에 도살은 꼭 필요한 때만 한다. 대신 수시로 젖을 짜서 술·유제품을 만들어 식량으로 확보하고, 젖을 짤 수 없는 겨울에는 고기가 주식이 된다. 그러므로 가축을 도살하면 고기뿐 아니라 내장·뼈·피·가죽까지 알뜰하게 이용한다.
10여년 전 일이다. 어느 날 영화감독 장선우와 ‘탑골’에서 술을 마시다 밤 12시가 넘어 의기가 투합해 탑골 여주인 한복희씨와 함께 여주 신륵사 원경 스님을 찾아갔다. 원경 스님은 새벽 두세시에 들이닥친 우리 일행에 잠시 얼떨떨하다 남한강 모래밭으로 함께 나가 총총한 별을 바라보며 이야기로 날밤을 샜다. 이튿날 원경 스님은 “누가 먹어보았는데 맛있다고 하더라”며 입안이 깔깔한 우리를 데리고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시골 장터의 허름한 순대국밥집을 찾아갔는데, 이 집이 오늘날까지 내가 ‘세계 최고’로 치는 경기 용인시 백암면 백암리 소재 풍성식당(031-332-4604)이다. 이 집 여주인 최옥준(69)씨는 30년 넘게 푸줏간을 운영하면서 바로 옆에 순대전문점 풍성식당을 열었는데, 여기서 파는 순대는 동네 할머니들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직접 만든다(순대국 4천원, 순대접시 6천원).
꽃게의 ‘수영’은 위험하다? 헤엄칠 줄 아는 꽃게 속성 때문에 서해교전 벌어져… 담백하고 고소한 돌머리산낙지집 게장
<자산어보>는 꽃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해(속칭 살궤·꽃게)는 뒷다리 끝이 넓어서 부채 같다. 두 눈 위에 한치 남짓한 송곳 모양의 것이 있어서 이런 이름이 주어졌다. 대체로 게는 모두 잘 달리나 헤엄을 치지 못하는데, 이 게만은 부채 같은 다리로 물 속에서 헤엄을 칠 수 있다. 이것이 물에서 헤엄치면 큰 바람이 불 징조다. 맛이 달콤하고 좋다. 흑산도에서는 희귀하다. …때때로 낚시에 걸리며 칠산바다에서는 그물로도 잡는다.”
클라우제비츠가 그의 저서 <전쟁론>에서 밝혔듯,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해 수행되는 정치(정책)의 또 다른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럴듯한 명분과 미사여구로 침략을 설명하려 하지만 결국 모든 전쟁, 모든 침략에는 정치적 목적에 따른 인간의 탐욕이 개재되어 있다. 흔히 전쟁의 특성상 집단적 폭력행위에만 주목하는데, 그러면 이러한 숨겨진 전쟁의 정치적 목적을 간과하게 된다. 왜 미국은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는가 말할 나위 없이 석유의 강점이 목적이며, 이는 탐욕의 소산이다.
몇달 전부터 미국에서 오래 살다 돌아온 김상민군이 영등포시장 안에 기가 막히게 맛있는 게장집이 있으니 한번 가보라고 했다. 나는 버터에 길들여졌을 것 같은 그의 입맛을 그리 믿지 못하여 그때마다 “네가 게장 맛을 알아” 하고 시큰둥하게 일축하였으나, 며칠 전 김군이 다시 그 게장집을 이야기하기에 헛걸음하는 셈치고 짬을 내어 가보았다. ‘돌머리산낙지집’(02-2637-0092, 0577)이 그 집인데, <한겨레21> 제450호에서 소개한 갈치조림전문집 ‘산골나그네’에서와 마찬가지로 ‘김학민식 선택법’이 또 한번 실패를 맛보는 순간이었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으면서 담백하고 고소한 이 집의 간장 게장은 그야말로 밥도둑이었다. 이 집의 여주인 윤지영씨(49)는 전주 대갓집 딸인 친정어머니의 타고난 미각과 솜씨를 이어받아 낙지·게장 분야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한다. 강남구 신사동의 소문난 게장을 사와 손님 상에 자기 집 게장과 똑같이 올려놓고 당당히 평가받을 정도로 자신만만하다.]
잔인한 4월, 껍데기를 씹으며… 돼지 껍데기가 음식으로 자리잡기까지… 무대포집에서 신동엽 시인과 부시를 떠올리다
한자의 가죽 피(皮)자는 털이 그대로 붙어 있는 동물의 가죽을 나타내는 글자다. 짐승의 가죽은 부드럽고 질기며, 또 그 털이 화려한 빛깔을 지니고 있고 보온성이 높으므로 의복의 훌륭한 재료가 된다. 그러므로 皮자의 상형문자는 의복이나 신발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짐승의 가죽을 손으로 벗겨내는 모양에서 만들어졌다. 또 皮자는 초근목피(草根木皮)에서처럼 의미가 확대되어 식물의 표피인 ‘껍질’의 뜻을 지니기도 하고, 피상적(皮相的)에서처럼 사물의 표면인 ‘겉’을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사람의 피부, 짐승이나 물고기의 껍질같이 변화된 뜻을 만들어냈다. 짐승의 가죽을 뜻하는 한자로는 가죽 혁(革)자도 있다. 革자 역시 동물의 가죽 모양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옛 자형은 의복이나 신발 등 생활에 필요한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햇볕에 말리고 있는 짐승의 가죽 모양으로 머리와 몸체, 그리고 꼬리의 형상을 그린 것이다. 곧 革자는 평평하게 가지런히 펼쳐진 모양으로 짐승의 가죽이 이미 가공돼 처리되었음을 보여주는 글자다.
살코기는 물론 대가리, 뼈, 꼬리, 갖가지 내장을 따로이 분류해 각각의 독특한 음식 재료로 개발하였던 우리 민족도 짐승의 가죽만 따로 벗겨내어 음식으로 만들지는 않은 것 같다. 쇠가죽처럼 크고 질긴 좋은 가죽은 음식으로 먹어치우기보다는 신발이나 안장 등으로의 쓰임새가 더 중요하기도 했을 터이고, 또 다른 가축들은 단백질원이 워낙 귀한 때인지라 양을 늘리기 위해 웬만하면 가죽을 벗겨내지 않고 살코기와 함께 조리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옛 조리서들에 가축의 가죽이나 껍질을 따로이 조리하는 방법이 소개된 것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단지 <임원십육지>의 저자 서유구의 형수 빙허각 이씨가 1815년께 지은 <규합총서>에 돼지 껍질을 고아서 묵처럼 엉기게 한 저피수정회법(猪皮水晶膾法)이 유일하게 설명되어 있을 뿐이다. 저피수정회는 쇠족을 장시간 고아 묵처럼 만든 족편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데, 양념장에 찍어 먹는 데서 ‘회’ 라는 이름이 붙었다.
음식의 재료로서 짐승이나 어류의 껍데기(껍질)는 생각보다 맛이 있다. 개고기의 경우도 마니아들은 껍데기가 붙어 있는 배바지살을 최고로 치며, 콜레스테롤이 높다지만 닭도 살보다 껍질이 더 고소하다. 복어나 도미의 껍질도 양념장에 따로이 무치면 쫀득쫀득한 감칠맛이 그럴듯하다. 돼지 껍데기는 원래 마포 최대포집 등에서 돼지갈비를 시킨 손님들에게 서비스로 주던 것인데, 이제는 노랗게 구운 졸깃졸깃한 돼지 껍데기 맛에 반해 찾는 이가 많게 되자 독립된 메뉴로 자리를 잡았고, 돼지 껍데기 전문점도 여럿 생겨났다. 홍익대와 서교호텔 사이 이른바 먹자골목에 가면 돼지 껍데기 전문 ‘무대포집’(02-334-7400)이 있다.돼지고기 관련 메뉴로 6년을 버텨온 집주인 김백신(36)씨는 두툼한 돼지 껍데기를 갈비 양념에 12시간 이상 재어 양념이 충분히 스며들게 한 다음, 타지 않게 노릇노릇 구워내는 것이 돼지 껍데기 맛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1969년 40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민족시인 신동엽은 이 땅에 똬리 틀고 있는 외세와 권력자들의 압제와 착취, 위선과 기만을 향해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다. 수많은 이라크 민간인들이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목숨을 잃는 잔인한 4월, 껍데기집에 가보라. 그리고 소주 한잔에 졸깃졸깃 고소한 돼지 껍데기를 씹으며 조지 부시의 소름 끼치는 짓거리를 생각해보라.
그때 나는 ‘묵사발’이었다 우리 농경문화의 특이한 산물… 민청학련 관련자들과 솔밭묵집을 찾아 고난을 떠올리다
곡식을 주식으로 하는 농경문화권의 여러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는 특히 곡물의 활용이 다채롭다. 이는 ‘백곡’이라 할 만큼 우리 땅에서는 수십 가지 곡물이 생산되고, 이에 따라 갖가지 곡물들에 대한 먹을거리로서의 다양한 활용이 있을 수밖에 없는 데서 온 결과다. 예를 들면 쌀은 우리 식생활의 기본인 밥으로 조리되면서도 그 활용이 확장돼 죽·떡·술·엿·지짐·과자·식혜·튀밥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된다. 곡물로 만든 음식 중에 특이한 것으로는 묵이 있다. 묵은 같은 농경문화권인 중국·일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음식이다. 일본에 팥앙금을 굳혀 만든 ‘요깡’이라는 것이 있지만 음식이라기보다는 과자류에 가깝고, 또 ‘가마보고’라고 하여 우리말로 어묵이라 부르는 것이 있지만 생선의 살을 으깨어 뭉쳐 쪄낸 것이므로 우리의 묵과는 전혀 다르다. 묵은 메밀·녹두·도토리 등을 물에 불려 매에 갈거나 말려 가루를 내어, 그 앙금을 풀 쑤듯 쑤어 굳힌 음식이다. 대개 원료의 이름을 붙여 메밀묵, 녹두묵, 도토리묵, 녹말묵, 제물묵이라고 부른다. 녹말묵은 물에 불린 녹두를 갈아서 가라앉힌 앙금을 말린 가루인 녹말로 쑨 묵으로 약간 푸른색을 띠어 청포묵이라 하고, 제물묵은 물에 불린 녹두를 갈아 전대에 담아 짜서 나온 물로 쑤어 굳힌 묵을 말하는데, 청포묵(녹말묵)·제물묵을 합쳐 녹두묵이라 총칭한다. 도토리는 흉년의 구황식물로 중요하였다. 흉년이 들면 도토리 가루를 내어 떡이나 밥에 섞어 먹기도 했으나 ‘개밥에 도토리’라는 말처럼 곡식과 섞어 조리할 때 그리 어울리지 못하여 대개는 묵을 만들어 주식 대용으로 하였다. 도토리묵을 만들려면 도토리를 까서 말린 다음 절구에 빻아 물을 붓고 4~5일 동안 떫은 맛이 어느 정도 빠질 때까지 놓아둔다. 그런 다음 윗물을 따라내고 가라앉은 앙금을 걷어내서 끓이면 엉기게 되는데, 이를 식히면 도토리묵이 완성된다. 1855년, 조선시대 한방의 처방을 집대성하여 <방약합편>을 썼던 황필수는 1870년 우리나라의 음식명, 요리명을 방물학적으로 고증한 <명물기략>을 펴냈다. 이 책에서 황필수는 “녹두가루를 쑤어서 얻은 것을 삭(索: 얽힐 삭, 새끼 삭)이라 하는데, 항간에서는 삭을 가리켜 묵(社에서 士자 뺀 실사 변+墨: 두겹노 묵, 말고삐 묵)이라고도 한다. 곧 묵이란 억지로 뜻을 붙인 것이다”라고 했다. 또 1855년 김병규의 필사본으로 남아 있는, 만물의 명칭을 한자로 쓰고 이에 대해 한자 또는 한글로 풀이한 어휘집 <사류박해>에는 묵을 두부의 일종으로 보아 ‘녹두부’(綠豆腐)라 하였다. 이로써 보면 민간에서 ‘묵’이라고 불리던 음식명을 한자 이름으로 적으려다 보니 묵(위의 한자 복사)이 된 것 같다.
20대의 젊은 나이로 감옥에 들어가 청춘을 소진시켜버린 옛 동지들은 굴절의 한국 현대사를 살아오면서 겪어온 자신들의 역정을 구구절절 풀어내기에 날밤을 꼬박 새웠다. 이튿날 피곤한 몸을 추스려 배재대학교 정하용 교수의 안내로 계룡산 등산을 하고는 일행 모두 구즉동 묵마을 초입의 ‘솔밭묵집’(042-935-5686)을 찾았다. 세 시간의 산행 끝이라 몸은 피곤하였지만, 가늘게 채 썬 도토리묵에 푹 익은 김치 썰어넣고 갖은 양념에 김 바숴넣은 뒤 자작하게 국물을 부어 만든 채묵 한 사발씩을 앞에 놓고 동지들은 중앙정보부에서 묵사발이 되도록 얻어맞은 29년 전의 그 사건을 회고하기에 바빴다. 이 집의 주인 전순자(61)씨는 할머니묵집에 이어 17년 동안 직접 묵을 만들어왔는데, 채묵·묵무침·사라묵·묵전 등 담백하고 맛깔스러운 묵 요리와 함께 자신 있게 보리밥을 내놓는다. 보리밥은 각자에게 따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양푼에 함께 비벼 먹는다. 보리밥의 양이 많아 3명이면 2인분만 시켜도 되지만, 넉넉한 충청도 인심에 전혀 눈치를 주지 않는다.
‘자빠져서’ 먹는 로마 귀족들 냅킨을 탄생시킨 로마의 식사문화… ‘딴또딴또’ 스파게티에서 사라진 제국의 냄새를 맡다
<클레오파트라>나 <벤허>와 같이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보면 호화롭게 치장한 커다란 홀에서 로마의 귀족들이 만찬을 즐기는 장면들이 자주 나온다. 이 홀은 그리스 시대부터 전통이 이어져온 트리클리니아라는 로마인들의 특별식당이다. 로마인들은 이 식당에 서너개의 1인용 또는 2인용 침대들을 U자 형으로 배치하고 한가운데에 식탁을 차렸다. 로마 귀족들은 침대 위에 누워 한쪽 손은 상체를 괴고, 다른 한쪽 손으로만 음식을 먹었다. 영화 장면에서는 식탁 위에는 산해진미가 즐비해 있고, 천하절색의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는 가운데 귀족들은 노예들의 시중을 들어가며 음식을 집어먹는다. 무척 사치스럽고 편안해보이는 만찬 광경이지만, 옆으로 ‘자빠져서’ 먹는 로마 귀족들의 식사법은 음식문화사에 특별한 족적을 남겼다.
또 물기를 적게 해 음식을 만든다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포도주처럼 음식이 아예 물이거나 어쩔 수 없이 즙을 이용해 조리할 수밖에 없는 음식들도 있다. 이러한 음식들을 ‘자빠져서’ 먹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노예들이 시중을 들고 있고 아무리 조심한다지만 침대에 음식 부스러기를 흘리고, 입 가장자리에 음식을 묻히거나 국물이 목줄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일이 다반사일 것이다. 이 때문에 로마인들은 인류 최초로 냅킨을 사용한 사람들이 되었다. 냅킨은 만찬에 초대받았을 때 각자 가지고 왔고, 로마인들은 때로는 맛있는 음식을 냅킨으로 싸서 집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현대 이탈리아의 대표적 음식으로 잘 알려진 것이 스파게티와 피자다. 국수는 기원전 3000년께 중국에서 가장 먼저 만들었다. <동방견문록>으로 유명한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머물면서 국수를 맛보고는 13세기 말 이탈리아로 가져와 오늘날 이탈리아의 스파게티와 파스타의 기원이 되었다. 이탈리아 남부는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로 밀농사짓기에 좋은 기후조건이 아니었다. 밀가루의 생산량이 넉넉지 않아 음식의 양을 늘리기 위해 국수에 지중해에서 흔하게 잡히는 어패류와 토마토 소스 등을 넣어 소박하면서도 영양가 있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이것이 스파게티가 된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론 연구로 국가연구박사 학위를 받은 정치학자 김종법씨는 포도주를 코드로 해 이탈리아 역사와 문화를 해석한 <이탈리아 포도주 이야기>를 펴냈는데, 유럽에서는 포도주가 술이 아니라 음식의 하나로 취급되는 만큼 이탈리아 음식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다. 김종법씨 권유로 양과 질, 그리고 가격이 아주 만족스럽다는 이탈리아 요리 전문점 ‘딴또딴또’(02-336-6992)에 가보았다. 이 집의 주인이자 주방장인 정윤철(39)씨는 고려대학교를 나와 한다 하는 대기업에 근무하다 이탈리아 요리사의 주방보조로 요리를 배운 뒤 ‘딴또딴또’를 개업하고 직접 조리까지 맡고 있다. 이 집의 이탈리아 음식들은 대학생이나 젊은 샐러리맨들이 주고객인지라 양이 많고 값도 그리 비싸지 않다.갑오징어·모시조개·새우·홍합·양송이·마늘·닭고기 등을 재료로 한 다양한 스파게티 가운데 하나를 고르고 달콤떨떠름한 이탈리아 포도주 한잔이면 1만원 전후를 투자해서 제법 본토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외자유치 1호는 만두가게? 고려가요에 등장하는 ‘엉큼한’ 몽골인… 꿩만두의 담백한 맛을 아시는가
지금은 외국자본이 국내에 들어와 증권에 투자하거나, 한국 기업과 합작을 하거나, 방위산업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기업을 직접 경영하거나 하는 것이 당연한 현상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197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외국자본의 직접투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또한 자본형성이 안 되어 외국자본을 도입하려는 국내의 재벌기업들도 매판자본이라 하여 규탄 대상이 되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제금융자본의 유치는 물론 외국자본의 직접투자를 적극 환영하고 있는 작금의 우리 경제상황에서 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겠지만, 당시 산업기반이 극도로 취약한 상태에서 무방비적으로 외자가 도입되었을 때 우리 경제의 대외종속 문제, 그리고 국제금리와 국내금리 차가 10% 이상 되어 외자도입 자체가 특혜와 부패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외국자본과 그 도입이 경계 대상이 되었다.
샹화점(雙花店)에 샹화 사라 가고신댄 회회(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삿기광대 네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더러 다리러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에 나도 자라 가리라 워워(偉偉)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데가티 더마거초니 업다
여기에서 샹화(雙花)는 만두고, 회회아비는 몽골인을 뜻한다. 조선시대까지 만두를 상화(霜花, 床花)라고 불렀는데, 완성된 만두 모양이 한 송이 꽃과 비슷하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이 가사를 풀이하자면, “어떤 여인이 만두가게에 만두를 사러 갔는데, 만두가게 주인인 몽골인이 자기 손목을 잡더라. 이 소문이 밖에 나돌면 가게의 꼬마 심부름꾼 네가 퍼뜨린 것으로 알겠다. 소문이 나면 다른 여인들도 자러 그 자리에 가겠다 할 게 아니냐. 거기 잔 곳은 참으로 아늑하고 무성한 곳이다”라는 뜻이다. 만두는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중국 또는 몽골에서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충혜왕조에 왕궁의 주방에 들어가서 만두를 훔쳐먹는 자를 처벌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위 <쌍화점>의 가사처럼 개경에 만두가게가 존재하였던 사실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이미 만두가 전래되어 왕이나 서민 모두 즐겨 먹은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에서는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 고기나 채소로 만든 소를 넣고 찐 것을 만두라 하고, 밀가루로 만든 얇은 껍질에 소를 싸서 끓이거나 기름에 튀기거나 찐 것은 교자라 부른다. 우리나라의 만두는 터키·몽골의 만두와 함께 교자에 가깝다. 우리 민족의 이동경로에 있는 우랄알타이계의 터키·몽골·한국의 만두가 모두 비슷하고 중국만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만두의 한반도 전래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상상력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경기도 김포시 통진면에 가면 만두 전문점 ‘천정꿩만두’(031-989-9999)가 있다. 이 집의 주인 이승훈(36)씨의 어머니 김치희씨가 15년 전에 꿩탕·오리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을 열었는데, 어느 날 꿩만두를 빚어 주위 분들께 드렸더니 반응이 너무 좋아 이제는 소문이 자자한 꿩만두집으로 바뀌어버렸다. 꿩의 살코기는 다져 두부·양파·숙주나물 등과 함께 소를 만들고, 뼈는 가마솥에 고아 만두전골·꿩탕의 육수로 쓴다. 간장 종지만한 이 집의 꿩만두는 아주 담백하고 부드러운데, 식은 뒤에 먹어도 전혀 그 맛이 변하지 않는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배울라치면, 국어 선생님은 이 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서정적 운율이나 시각적 이미지를 통한 시 감상,시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에 들어 있는 시어들의 상징이나 은유들에 대해서만 설명하기에 바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청포 입은 손님’은 괴로움을 겪고 있는 어두운 역사의 우리 민족이고, ‘은쟁반’, ‘모시수건’은 미래의 화해로운 삶에 대한 순결한 소망이라는 시어 해석을 주워듣고 또 이를 달달 외우기에 바빴으니, 그 큰 이유는 이 시가 그런 형태로 대학입시에 많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이 탓인지 지금도 나에게는 서늘하게 가슴을 적시는 시적 <청포도>보다는 발기발기 끊어 분석한 산문적 <청포도>만이 머리에 남아 있다.
이 얘기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제91회에 보이는데, 여기에는 “이렇게 주방 일꾼을 불러 소와 말을 잡으라고 명령하고 밀가루를 반죽해 사람의 머리를 본뜬 것 속에 소와 양의 고기를 인육 대신 다져넣고는 ‘만두’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쓰여 있는 바, 후인들은 이 사실을 들어 흔히 만두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이문열 또한 그의 <삼국지> 제9권에서 “이른바 만두가 만들어진 것은 제갈공명의 노수대제가 그 처음인 것이다”라고 이 구절을 빌어 만두의 기원에 대한 속설을 친절하게 평석, 고증하고 있지만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제갈공명의 남만 정벌에 대해 “장무 3년(AD 223) 봄 제갈량이 무리를 이끌고 남쪽(운남) 정벌에 나서 그해 가을에 그 땅을 평정하다”라고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고, 배송지(裵松之)의 진수 <삼국지> 주석에도 노수대제 내용이 일체 없으니, 그것은 소설가 나관중이 14세기 말 중국의 교자(餃子) 제조법을 자기 소설에 허구로 써넣은 것일 뿐이다. 우리는 만두 비슷한 것을 통칭해 만두라고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만두와 교자는 엄격히 구분된다. 만두는 보통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 적당한 크기로 잘라 소를 넣지 않고 쪄낸 것을 말하고, 교자는 밀가루 반죽을 밀어 얇은 껍질을 만든 뒤 거기에 고기와 채소 다진 소를 넣어 기름에 튀기거나 물에 삶아낸 것을 일컫는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 변호사회관 옆에 가면 중국인 유금장(53)씨가 21년째 한 자리에서 운영해온 맛있는 물만두(水餃子)집 ‘일룡’(02-735-3433)이 있다. 중국 산동성이 원적지인 주인 유씨는 부인과 함께 매일매일 물만두를 직접 빚는데(요즈음은 물만두가 대개 공장에서 나온다),돼지고기와 부추, 생강 다진 것을 후추, 참기름으로 버무려 얇은 만두피에 곱게 싸는 손놀림은 신의 경지와 비슷하다. 씹기도 전에 목으로 넘어가는 부드러운 물만두 한 접시에 3500원이다. 그밖에 송화단도 낱개로 1천원이며, 오향장육(1만6천원), 오향장족(1만9천원) 한 접시면 날궂이하는 날 고량주 두세 병 비우기에 충분하다.
‘객주’의 식솔들은 행복했다 영남 제일의 장국밥을 자랑했던 구포 덕천객주… ‘덕천고가’에서 그 비법을 잇는다
전통사회에서 오일장을 중심으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를 매개하였던 전문적 상인인 보상과 부상을 총칭하여 보부상이라 불렀다. 보상은 주로 기술적으로 정밀한 세공품이나 값이 비싼 사치품 등의 잡화를 취급하였는데, 상품을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하였다. 그리고 부상은 조잡하고 유치한 일용품 등 가내수공업품을 위주로 했는데, 상품을 지게에 얹어 짊어지고 다녔다. 보부상은 상품 유통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직접 소비자들과 상대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행상’이다.
부산의 구포는 조선시대 낙동강 수운과 동래를 잇는 포구로 각종 물산이 집산되는 곳이다. 조선시대부터 3일, 8일에 열리는 5일장이 있어서 김해, 양산 일대의 보부상, 생산자, 소비자들이 모여 큰 정기 시장을 형성하였다. 이런 지리적 조건으로 구포에는 자연스럽게 거상 물상객주들이 여럿 존재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일제의 침략이 거세지면서 전근대적 산업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조선의 경제는 속속 국가자본을 앞세운 일본 자본가들의 영향력 아래에 떨어지고 만다. 이에 지주계급과 초기 자본가 계급인 물상객주들이 나름대로 자구책을 구하게 되는데, 이의 한 형태가 1908년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한 근대적 민족계 지방금융회사인 구포저축주식회사였다. 구포저축주식회사는 구포의 지주 출신 윤상은과 쌀의 대일 수출로 거상이 된 물상객주 장우석 등 70여명이 합자하여 설립한 회사로, 예금과 대금업, 어음할인업 등 그 업무가 근대 은행과 별 차이가 없었다. 구포저축주식회사는 탄탄한 자본력으로 경영도 충실하였고 영업실적도 매우 양호해 사세가 크게 일어났으나, 1909년 국권피탈 뒤 조선의 경제를 완전히 장악하고 민족자본의 형성을 철저히 압박하려는 일제의 정략에 의해 일본 상공인들을 주주로 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제의 <조선회사령>에 의해 1912년 해체돼 구포은행으로 새로이 발족하게 됨으로써 한국 최초의 민족계 지방금융회사는 좌절되고 만다. 이때에 활동한 구포의 물상객주 중에 지금의 부산시 북구 덕천동 부근에 살았던 김기한이라는 거상이 있었다. 김기한의 덕천객주에는 김해, 양산 일대의 보부상들, 거간꾼, 목도꾼, 뱃사람 등 수십명의 식솔들이 들락거렸다. 따라서 이들을 삼시 세끼 먹이는 것도 수월치가 않았는데, 이들을 먹이기 위해 끓이던 국밥이 낙동강 칠백리 물길을 통해 영남 제일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구포 덕천동에는 덕천객주 김기한가의 장국 비법을 이어받은 장국밥집 ‘덕천고가’(051-337-3939)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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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굿이나 제사에 사용한 계명주… ‘강변멧돼지가든’에서 무형문화제의 맛을 보라
술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마셨던 음료로, 주로 신이나 조상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술 주(酒)자의 옛 글자는 酉로, 배가 불룩 나오고 입이 좁은 용기의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입이 좁은 것은 술이 증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고대부터 제사 지낼 때 올려지는 제물은 가장 크고 좋은 것, 온전한 것, 햇것을 정성들여 마련하는데, 술 또한 특별한 것을 썼다. 예주(醴酒)가 바로 그것인데, 곡물을 당화시킨 것에 공기 속의 효모균이 들어가서 알코올 발효를 하게 되면, 알코올 농도는 낮으면서 달콤한 맛이 남아 있는 술이 된다. 고대 사람들은 이러한 양조법으로 술을 전날 빚어 놓으면 이튿날 새벽 닭이 울 때에는 이미 술이 익어 제사에 사용될 수 있으므로 부정에 전혀 노출되지 않을 수 있고, 또 적당히 알코올 기가 있으면서 달콤한 이 맛을 신이나 조상의 혼령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상당기간 동안 예주는 제사용 술로 정착했다.
우리나라 전통 예주의 하나로 계명주가 있다. 서유거의 <임원십육지>에는 “찹쌀죽에 누룩과 주모(酒母, 술밑)와 엿기름을 섞어 저녁에 빚어놓으면 다음날 새벽닭이 울 때까지는 다 익는다”라고 되어 있다. 술을 빨리 익히기 위해 엿기름을 넣지만, 이것은 속성으로 술을 빚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을 대동굿이나 제사에 쓸 부정을 타지 않은 술을 준비하기 위한 데서 발달된 양조법이다. 계명주는 엿탁주라고도 불렸던 평안남도 지방의 특산 토주이다. 계명주는, 그 양조법은 전래하고 있으되 오랜 세월 동안 옛이름을 잃어버렸던 것인데, 허준의 <동의보감>에 원나라 시대 고서인 <거가필용>을 인용하여 제조방법을 소개하고 그 이름을 계명주라 한 데서 엿탁주와의 표리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거가필용>은 중국·몽골·여진의 요리서적으로, 여기에 소개된 계명주가 어느 나라 것인지는 구분이 어려우나 <거가필용>보다 200여년 전 중국인이 고려를 여행하면서 기행문 형태로 저술한 <고려도경>에 “고려의 잔치 술은 맛이 달고 빛깔이 짙으며 사람이 마시면 취하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이 술맛이 엿탁주와 같다는 점에서 계명주가 곧 엿탁주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로써 계명주의 기원을 최소한 고려 이전 고구려까지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면 금남리 축령산 아래에 가면 고구려 술 계명주의 양조장이 있다. 1952년 1월, 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면 승가리 결성 장씨가의 10대 종손 며느리인 박재형씨는 조상의 제사 날짜를 적은 <기일록>과 가재도구 몇점을 이고 지고 국군을 따라 남하한다. 이후 박씨는 수원, 남양주 등지를 옮겨다니면서도 조상의 제삿날에는 꼭 계명주를 손수 빚어올렸는데, 그 양조비법이 며느리 최옥근(61)씨에까지 이어져내려와 1987년 계명주는 경기도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받았다. 박씨는 80년 87살을 일기로 작고하고, 아들 장기항(66)씨와 며느리가 계명주 양조법과 설비를 현대화해 시중에 판매하고 있는데, 아직은 널리 알려지지 않아 쉽게 구할 수 없으므로 술맛을 보려면 직접 양조장에 들르는 것이 좋다.
축령산은 고려말 이성계가 사냥을 왔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는데, 어느 사람이 “이 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다. 산신제를 지내야 한다”고 하여 산 위에 올라 제를 지낸 뒤 멧돼지를 잡았다는 전설이 있어, 제를 올린 산이라 하여 축령산이라 했다고 한다. 600여년 전 이성계가 ‘야생’ 멧돼지 고기를 구워먹었을 축령산 아래 바로 그 자리에 양조장과 함께 ‘부설기관’으로 ‘강변멧돼지가든’(031-592-0460)을 열고 있으니, 아쉬우나마 계명주와 곁들여 강원도산 ‘사육’ 멧돼지고기로 고구려의 기상을 느껴보시라.
지리산 포수가 가져온 선물
생존에서 유희로 진화돼 온 사냥의 역사… 지리산을 뛰어다니는 멧돼지의 싱싱한 맛
인간과 육식의 관계에 대한 연구서인 멜링거의 저서 <고기>에 의하면, 아득한 옛날 인류는 동물의 ‘사냥꾼’이 아니라 동물의 ‘사냥감’이었다고 한다. 인류와 동물과의 이러한 관계는 오랜 진화과정을 거쳐 인간이 사냥 도구와 기술들을 갖추면서 역전되기 시작했지만, 상당한 시기까지 야생동물을 포획하여 고기를 얻는 일은 여전히 생명을 담보로 하는 힘든 싸움일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건 이 위험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동물을 제압할 수 있는 강한 힘이 필요했고, 인간은 강한 동물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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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수렵·채취사회의 생활형태는 잦은 이동의 불편함, 그리고 항시 먹을거리 확보에 불안해 할 수밖에 없어 인류는 생포한 수렵물 중 일부를 순화, 개량시켜 사람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가축으로 만들게 된다. 가축은 넓은 의미로는 소·말 등의 포유류, 닭·거위 등의 조류, 잉어·붕어 등의 어류, 누에·꿀벌 등의 곤충류도 포함되지만, 보통 포유류, 조류만을 가리킨다. 또 조류에 속하는 동물은 가금이라 하여 제외하고 농업경영과 밀접한 포유류만을 가축이라 하기도 한다.
가축의 등장과 함께 인류는 수렵·채취사회에서 급격하게 목축사회, 농경사회로 이행하게 된다. 정착생활은 농업생산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킴으로써 먹을거리 취득으로서의 수렵은 그 경제적 효용을 상당 부분 잃게 된다. 이로써 집단적 생존수단으로서의 ‘수렵’은 인류중 지극히 일부 종족에게서만 이루어지게 되고, 문명사회에서는 왕이나 귀족층의 개별적 오락인 ‘사냥’으로 잔존하게 된다. 그리스의 귀족들도 사냥을 매우 즐겼으며,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자인 키루스 2세(BC 600∼529)는 4개 도시의 세금을 사냥 비용에 써버릴 정도였다. 고대 이집트의 귀족들은 활, 창, 그물 등의 사냥도구 외에 사자를 길들여서 사냥을 했으며, 로마의 귀족들도 사냥을 즐겼다. 이렇게 중세까지 사냥은 왕후, 장상들의 특권이었는데,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봉건왕조들이 몰락함에 따라 사냥권과 사냥터가 일반에 개방되어 사냥은 귀족들의 전유물에서 해방되었다.
오늘날은 야생동물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사냥은 규제와 경원의 대상이 되었지만, 생태계의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한편으로는 일정한 조건 아래 허용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멧돼지 사냥이 그렇다. 원래 한반도에는 호랑이, 곰 등 맹수류도 상당히 서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연의 파괴와 남획으로 한 세기 들어 이들은 거의 멸종되고 말았고, 멧돼지가 이를 대신하여 우리 산야의 우두머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천적이 사라진 멧돼지가 마구 번식함으로써 농작물 피해를 줄이고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 매년 일정 지역을 순환하며 사냥이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전북 남원시 인월면 지리산 아래 포수 이정기(54)씨는 이렇게 정식으로 허가된 멧돼지 사냥 전문가이다. 20살부터 사냥꾼을 따라다니며 30여년간 사냥에 종사해왔는데, 야생동물 불법 포획에는 손사래를 친다. 멧돼지는 후각이 발달해 겨울철 1m 이상 깊이에서 동면하고 있는 뱀도 주둥이로 파내어 잡아먹으며, 한약재로 쓰이는 소나무뿌리의 혹인 백복령, 천마 등도 용케 찾아 캐먹는다고 한다. 이정기씨가 사냥해 오는 야생 멧돼지는 급속 냉장시켜 그의 부인 문양월(49)씨가 운영하는 ‘활바우가든’(063-636-2092)에서 1년 열두달 구워 손님들에게 내놓는다. 멧돼지 불고기에 지리산 1천m 이상 고지에서만 난다는 게발딱지나물, 산뽕나무나물로 야생의 맛을 만끽할 수 있다.
푸짐한 상차림은 참혹한 비극 호남지방 선정비와 진수성찬은 민중 수탈의 산물… 담양 ‘남도전통한정식집’의 다양한 맛
호남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예전의 읍자리 부근에 유난히 비석이 많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가만히 다가가 풍진에 희미해진 글자를 한자 한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확인해보면 대개는 ‘전 현감 ○○ 영세불망비’니 ‘전 부사 ×× 송덕비’니 하는 것들이다. 10여년 전 광주에서 나주를 지나 목포를 가게 되었는데, 광주에서 목포 가는 구도로를 따라 예의 그 선정비와 송덕비가 촘촘히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서 나는 이 ‘선정비’들이 봉건시대에 호남 민중들이 얼마나 가렴주구를 당해왔는가를 확인해주는 반증이라고 생각했다.
고려 충렬왕 때 승평부(昇平府) 부사로 있었던 최석(崔碩)이 승진하여 개경으로 돌아갈 때 당시의 관례에 따라 가재도구를 싣고 가느라 말 일곱 마리를 끌고 갔다. 그러나 최석은 가지고 간 말을 그냥 자기 소유로 했던 전임자들과는 달리 개경으로 오는 도중에 낳은 새끼 1마리까지 합해 말 8마리를 승평부로 다시 돌려 보냈다. 이에 승평부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워 ‘팔마비’라 이름하였는데, 여기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송덕비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선정비는 조선시대로 오면서 급작스럽게 많아졌는데, 명종 때는 이미 한 고을에 4~5개의 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로 오면 고을마다 선정비, 송덕비가 지천으로 깔려, 개혁 군주 정조는 세운 지 30년 이내의 비석은 모두 뽑아버리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백성들은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신음하며 초근목피로 근근히 목숨을 유지해가고 있고, 가혹한 가렴주구로 요원의 불길처럼 민란이 일어났던 바로 조선 후기에 ‘선정비’가 그토록 많이 세워졌다니 참으로 시대의 블랙 코미디일 것이다. 나는 수십 가지의 산해진미로 한상을 그득 채우는 호남지방의 상차림 역시 봉건시대 민중 수탈의 유물이자 그 반증이라고 추정한다. 즐길거리가 다양하지 못한 봉건시대에 관리들이나 지방 호족들이 위락으로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먹고 마시는 일이었을 것이다. 호남지방은 산이 깊으면서도 들이 넓고, 또 바다가 연해 있어 물산이 풍부하고 다양했다. 이러한 조건들과 봉건 지배층의 맛을 찾는 욕구가 맞아떨어지면서 백성들은 이를 채집, 조달하는 부역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흉년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백성들이 목구멍으로 억지로 넘겼던 구황식품들 또한 ‘특미’로 개발되어 호남의 상차림을 풍부하게 하는 데 한몫을 했던 것이다.
콩나물해장국- “박정희 같은 놈이 잘도 처먹네” 인목대비의 한이 서린 모주와 전주 콩나물 해장국… ‘다래콩나물국밥’이 자랑하는 ‘남부시장식’국밥
화가 장욱진 선생은 기이한 일생을 살면서 특출한 그림을 남긴 우리 시대의 거장이다. 선생은 일생을 술을 벗삼아 해와 달, 까치와 참새를 주로 그렸는데, 술과 관련된 선생의 일화는 끝이 없다. 1970년 정초 며칠을 술을 들며 명륜동 집에서 불경을 공부하던 부인의 모습을 본 뒤, 갑자기 구상이 떠올라 덕소 화실로 돌아와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한 채로 냉방에서 부인의 초상화 <진진묘>를 그린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 전주식 콩나물 해장국에는 모주 한잔이 곁들여져야 제격이다. 모주(母酒)란 청주를 뜨고 나서 막걸리를 거르고 난 술 지게미에 다시 물을 부어 만든 찌끼 술이니, 실은 술이라 할 것도 없는 맹물을 조금 면한 ‘술물’이다. 요즈음에는 양조장 막걸리에 계피와 흑설탕을 넣어 끓인 것을 전주에서는 모주라 하지만, 바로 이러한 알코올 도수가 낮은 모주를 해장술로 한잔 마심으로써 지난 저녁의 알딸딸한 명정 상태를 유지하면서 서서히 술을 깨고 속을 확 풀어주는 것을 술꾼들은 즐긴다. 그렇기 때문에 전주 한옥생활체험관의 관장으로 있는 풍류가객 이동엽(55) 선생은 전주에서 마시는 해장술은 모주(母酒)가 아니라 새벽 어두컴컴한 때 마시는 술이라 하여 모주(暮酒)라고 주장하는데, 듣고 보니 그도 그럴듯하다.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은 <조선문화총화>에서 모주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대동야승>에 의하면, 선조의 왕비였던 인목대비가 광해군 때에 피위되자, 인목대비의 어머니요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부인인 노씨가 제주도에 귀양가게 되었는데, 귀양 간 사람에게 배급해주는 양식만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동네에서 술지게미를 얻어서 싸구려 술을 만들어 팔아 생활했다고 한다. 이 술을 처음에는 대비의 어머니가 만든 술, 곧 대비모주(大妃母酒)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대비’ 두자를 빼버리고 그냥 ‘모주’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주 콩나물 해장국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욕쟁이 할머니 버전이 전해온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창 위세를 부리던 70년대 어느 날 전주에서 하루를 묵었다 한다. 이튿날 새벽 지난밤의 술로 헝크러진 속을 풀려고 경호원을 시켜 전주에서 유명하다는 콩나물 해장국집에 전화를 걸어 해장국을 배달해달랬다 한다. 그러나 배달 대신 “술 처먹었으면 직접 와서 뜨끈뜨근한 해장국을 먹어야지, 어떤 시러배놈이 배달해달라는 거야!” 욕만 한 사발 먹어버렸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박정희가 직접 와서 해장국을 시켜 훌훌 맛있게 먹는데, 그것을 보고는 욕쟁이 할머니 왈 “박정희같이 생긴 놈이 잘도 처먹는다. 이젠 속 풀렸지?”라고 했다나.
중정에 끌려간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 ‘광교할매집’을 문화재로 지정하라
첫 경험이 중요하다. 어느 때 어디서 누구하고 어떤 기분으로 첫 경험을 겪었는지 말이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입이 짧은 사람들은 육회, 간천엽, 순대국, 보신탕 등 약간은 ‘엽기스러운’ 음식들을 어떤 상황에서 처음으로 대하였는지에 따라 그 음식에 대한 고정관념이 머리에 박혀버리기 때문에, 그런 음식들은 꼭 전문집에서, 제철에, 편안한 사람들과, 기분 좋게 먹어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다. 물론 입에 끌리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지만, 문화의 다양성 속에서 그러한 음식들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관용의 입맛’을 보일 수 있다면 더 다채로운 사회생활이 전개되지 않겠는가 생각해본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스러운 첫 경험이 아니라 모종의 ‘원통함’ 때문에 첫 경험을 하고야 만 사람이 있다. 지금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있는 나의 친구 유인태씨가 그다. 1974년 4월, 이철·유인태 등 수많은 전국의 청년 학생들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반유신운동을 압살하기 위해 4월 초부터 시작된 고문과 구타, 협박과 날조의 이 허망한 놀음은 6월에 이르러 막바지에 왔는데, 이때쯤에는 사건은 그들의 ‘기획안’대로 대개 마무리되어 중앙정보부 각 취조실은 제법 파장 분위기가 연출됐다. 그때 서울대 이현배 선배와 유인태의 취조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한다. 6월 어느 날 저녁 이현배 취조실의 중정 요원들과 유인태 취조실의 요원들이 밤참으로 개고기와 소주를 시켜 먹었다. 그러나 아무리 피의자라 해도 한 방에 있는 사람을 놓고 자기들끼리만 먹기가 뭐했던지, 유인태에게 “너 개고기 먹니?” 물었다. 당시 유인태는 개고기를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 곧이곧대로 못 먹는다고 대답했단다. 유인태 담당 요원이 이현배 담당 요원에게 하는 말. “얘는 못 먹는대. 그 새끼는 먹는대?” “음, 먹는대.” 이리하여 두 방의 요원들이 한곳에 모여 개고기 파티를 여는데, 피의자끼리는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법. “유인태! 벽 보고 꿇어앉아 있어!” 이리하여 이현배는 중정 요원들과 쩝쩝거리며 개고기에 소주 한잔을 걸치고 있는데, 유인태는 그들이 마지막 고기 한점을 다 먹어치울 때까지 벽을 향해 꿇어앉아서 침만 삼켰단다. 그날 이후 유인태는 개고기를 배우지 못한 것을 철천지 한으로 여기고 옥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개고기를 먹기 시작해 이제는 마니아가 되었다고 언젠가 나에게 그 ‘통한의 역사’를 밝히며, 국가정보원은 개혁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침을 튀겼다. 서울 광교의 삼일빌딩 건너편에 가면 ‘광교할매집’(02-776-4603)이라는 40년 된 보신탕집이 있다. 골목안 조그만 한옥에 오무라니 방들이 이어 있는 폼이 보신탕집의 전형 같은 곳이다.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같이 온 친구들에게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할 집이라고 극구 주장했는데, 아깝다! 청계천 개발로 조만간 헐릴 예정이란다. 이 집은 뭉근 불에 24시간 푹 끓인 탕이 아주 좋은데, 씹는 맛이 없어 별로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담백한 해장국맛과 비슷해 ‘첫 경험자’도 별다른 느낌 없이 접할 수 있다.
밀가루의 원수는 메밀가루? 밀이 귀해 메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은 시절… 서울 입맛에 도전하는 대구 ‘국시’
“국수와 국시는 어떻게 다른가?”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좀 썰렁한 ‘난센스 퀴즈’인데, 그 답은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고 국시는 밀가리로 만든다”이다. 그러나 ‘센스 퀴즈’로 생각하고 그 답을 정확히 구하자면, 국수는 메밀가루, 밀가루, 또는 감자가루 등을 반죽하여 얇게 밀어서 가늘게 썰든가, 국수틀 구멍으로 내리 눌러서 흘러 빠지게 한 식품, 또는 그것을 삶아 국물에 말거나 혹은 비벼먹는 음식을 일컫는다. 그리고 국시는 국수의 경상도·함경도 사투리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왜 면을 국수라고 하였을까? 밀은 중국을 통해 삼국시대에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 재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고려에는 밀이 적어 화북지방에서 수입하고 있으며, 밀가루의 값이 매우 비싸서 잔치 때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 즈음까지는 밀의 생산량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밀가루보다는 비교적 흔한 메밀가루로 국수를 만들었다. 삼국·통일신라시대까지의 문헌에는 국수를 가리키는 면이 보이지 않다가 중국의 송나라와 밀접하게 교류했던 고려시대부터 면 이야기가 나온다. 앞의 <고려도경>에 “음식에는 10여 가지가 있어 그 중 면 음식을 으뜸으로 삼았다”는 구절이 보이고, 고려 말기의 중국어 회화교본인 <노걸대>에 “우리 고려 사람은 습면(濕麵)을 먹는 습관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19세기 초 서유구가 지은 <옹희잡지>에는 “우리나라 풍속으로 건한 것을 병(餠)이라 하고 습한 것을 가리켜 면(麵)이라 한다. 건한 것은 시루에 찌는 것이고 습한 것은 끓는 물에 삶거나 물에 넣은 것이다”라고 되어 있어, 습면과 면 모두 국수를 가리키는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우리의 옛 문헌에서는 국수를 (菊에서 머리 뗄 것)水,(앞의 국에서 손수변 붙일 것)水,또는 麴讐라고 표기하였는데, 저자와 연대 미상으로 우리말의 어원을 해석한 <동언고략>에서는 국수는 한자 麴讐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밀가루(麵)로 국수(麵)를 만든다. 밀가루(麵)로 밀기울(麴)도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국수(麵)는 주로 메밀가루로 만든다. 그런데 메밀가루는 술을 내는 맛이 없다. 그러므로 밀기울(麴)로서는 메밀가루가 원수(讐)이니 메밀가루 국수는 밀기울의 원수, 곧 국수(麴讐)라 한 것이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건설회관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밀가리’로 ‘국시’를 만드는 ‘가람국시’(02-541-8822)가 있다. 이 집의 여주인 채양자(51)씨는 대구에서 10여년간 유명한 한정식집 ‘가람’을 운영해왔는데, 1년 전 강남으로 진출해 손칼국수·잔치국수·콩국수 등을 전문으로 서울 입맛에 도전하고 있다. 꼬들꼬들하면서도 쫄깃쫄깃한 면발에 국물맛이 담백한 칼국수, 그리고 채씨가 서울시내의 한다 하는 콩국수집을 모두 찾아다니며 비교·검토·연구해 계절음식으로 자신 있게 내놓은 콩국수도 무척 고소하고 시원하다.
5미·발효미·손맛까지 다양한 맛의 세계… 손으로 찢은 족발이 일품인 ‘동광식당’
‘김학민의 음식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지 이번호로 꼭 1년이 된다. 처음에는 독자들의 반응이 별로 없었으나 요즈음은 제법 많은 의견이 메일로 들어온다. 다양한 의견에 성의껏 답변을 드리고 있지만 이 자리를 빌려 독자들께 ‘면피’ 삼아 몇 마디 양해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 ‘김학민의 음식이야기’는 특정한 식당을 소개하거나 특별한 음식을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하는 곳의 정보를 제공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보다는 특정한 식당이나 음식의 역사·문화적 배경, 그리고 이에 사회·경제적으로 얽힌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루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잘하는 식당, 맛있는 음식에 대한 정보를 기대하는 분들에게는 가끔 좀 허전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는 맛의 보편성 문제다. 맛은 어떠한 물질을 입에 넣었을 때 느끼는 감각이다. 넓은 의미의 맛은 감각적·감상적 관념을 표현하는 언어였으나 감상적인 정서는 ‘멋’으로 분화되고, ‘맛’은 감각적 경험, 특히 식품의 감각을 표현하는 말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음식의 맛은 여러 가지가 복합된 것이므로 과학적으로 정확히 그 기준치를 세우기가 쉽지 않다. 또 식습관, 풍습, 편견, 정서 및 생리적 상태에 따라 맛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맛에 대한 느낌은 개인차가 크다. 곧 맛은 일부는 감각적이지만, 다른 일부는 주관적인 것이다. 음식의 맛은 몇 가지 기본 맛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단맛·신맛·짠맛·쓴맛으로 이를 4원미라 하는데, 이 네 가지 맛은 각기 특성 있는 맛을 가지면서 서로 복합되어 여러 가지 다른 맛을 만들어낸다. 동양에서는 이 네 가지 맛에 매운맛을 더하여 5미를 기본 맛이라 한다. 단맛은 인간을 비롯한 동물, 곤충이 가장 강하게 원초적 욕구와 집착을 갖는 맛이다. 신맛은 향기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본래의 맛과 어울려 식품의 맛을 좋게 하고 식욕을 증진시킨다. 쓴맛은 심하면 불쾌감을 느끼게 하지만 적당히 희석되면 입맛을 돋우고, 다른 맛에 혼합되어 독특한 풍미를 형성한다. 인간이 가장 집착하는 것은 단맛이지만, 짠맛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맛이다. 그리고 매운맛은 순수한 미각이라기보다는 생리적인 통각이라 할 수 있다. 즉, 미각신경을 강하게 자극함으로써 느끼는 기계적 현상이다. 이 다섯 가지 맛 이외에도 떫은 맛, 구수한 맛, 아린 맛 등 음식의 복합적인 맛에 크게 영향을 주는 맛이 더 있다. 또 “잊혀지지 않고 늘 마음에 감돌다”라는 뜻의 ‘감치다’ 에서 온 감칠맛도 있다. 감칠맛은 특정한 맛이 아니라 4원미나 5미가 향기 등과 잘 조화된 맛으로, 여러 가지 정미성분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복잡하고 미묘하면서 구수한 짠맛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맛은 5미 이외에 발효미를 더 보태서 논해야 한다. 장·술·김치·젓갈 등과 같이 단순한 재료의 맛 이외에 발효와 분해 과정에서 생긴 다양하고 독특한 풍미가 지방과 각 가정의 개성을 나타낸다.
얼마 전 강원도 동해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양성평등교육을 하러 가는 아내를 ‘수행한’ 길에 친구 김영준군이 소개해준 정선읍 ‘동광식당’(033-563-3100)에 들렀다. 송계월(59)씨가 20여년 전부터 운영해온 이 집은 엄나무·칡뿌리·황기·오갈피를 넣어 삶은 돼지족발이 유명한데, 다른 지방의 족발집들과는 달리 ‘칼맛’ 이 아니라 ‘손맛’을 보여준다. 곧 채반에 수북이 쌓아놓은 식어서 굳어진 족발을 칼로 썩썩 썰어주는 것이 아니라 솥에서 바로 꺼내 굳기 전에 먹기 좋게 손으로 찢어 내오기 때문에 육질이 아주 부드럽다. 또 이 집의 칼국수는 면발이 굵고 길어 후루룩 면발을 빨아들일 때 콧등을 친다 하여 콧등치기국수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토속된장으로 끓이는 그 국물은 정말로 ‘감칠맛’이 난다. ‘웬수 단골’ 조태일과 그의 ‘애인’ 낙짓집 ‘대교나루터’가 카페 ‘대교’로, 다시 보신탕집 ‘대교’로 변신하기까지
시인 조태일(1941~2002)씨는 6척 거구에 검고 완강한 얼굴을 가진 무골형 인물이다. 아담한 체구에 파리한 얼굴, 이른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고도 감동하고, 비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면서 눈물짓는 감수성을 시인의 전형으로 떠올린다면 조 시인은 시와는 영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오죽하면 조 시인조차 자기의 시 <석탄·국토 15>에서 “이 조가야, 그 거창한 체구엔/ 노동을 하는 게 썩 어울리는데/ 시를 쓴다니 허허허 우습다, 조가야”라고 읊었겠는가. 그러나 조 시인은 그 우람한 체구와는 달리 목소리도 다정다감하고 마음씨가 비단결처럼 곱고 여리다. 그의 시도 초기의 모더니즘 경향에서부터 서정시, 그리고 유신 독재시절의 저항시에 이르기까지 섬세한 감수성과 고졸한 품격이 유감 없이 보인다.
두주불사에 어눌한 가운데 위트가 번쩍이는 그의 말솜씨 때문인지 조 시인의 주위에는 항시 문인들이 북적거렸다. 또 조 시인은 군사독재 시절 ‘불온한’ 사회과학 원고들을 도맡아 조판해 주었던 ‘창제인쇄공사’를 운영하고 있어서 그의 사무실에는 의식화 서적을 출간하려는 소위 ‘빵잽이’ 출신 출판인들이 득실거렸다. 1970년대까지 창제인쇄공사는 서울 중구 오장동에 있었는데, 집세가 너무 비싸고 또 주요 거래처인 창작과비평사, 한길사 등이 마포에 있었기 때문에 1981년 초에 공덕동 5거리 서울대동창회관 앞으로 이사를 왔다. 창제인쇄공사에서 공덕시장쪽으로 가면 지금은 없어진 ‘쇼도 보고 영화도 보는 재재재개봉관’ 경보극장이 있었고, 그 옆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면 ‘대교나루터’란 낙짓집이 있었다. 대교나루터의 여주인 오금일씨는 목포 출신으로 항시 모나리자 같은 은은한 미소를 짓는 20대 후반의 예쁜 모습이었는데, 그녀의 미모와 상냥함은 살아 꿈틀거리는 낙지를 가차 없이 식칼로 저며대는 그 엽기스러움을 덮고도 남았다. 조 시인은 그녀를 항시 자기 애인이라 부르며 문단·출판계 후배들을 대교나루터로 끌고 갔는데, 들어가는 시간은 달랐지만 나오는 시간은 밤 12시 항상 일정했다. 그러나 조 시인을 고정 축으로 해서 경제학자 박현채, 소설가 이호철·황석영·송기원, 시인 이시영·정희성·김정환, 평론가 채광석·김사인, 해직기자 김종철, 학생운동 출신 나병식·최민화 등이 교체 멤버로 그 좁은 식당을 차지하고 주야장창 박정희, 전두환 욕이나 하고 있었으니, 으스스한 그 시절에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겠는가? 그리고 조 시인을 비롯해서 나이살이나 먹은 축들은 다투어 오금일씨를 자기 애인이라 하며 틈만 나면 손을 잡으려고 하니, 다른 손님들이 보기에 얼마나 눈꼴이 시었을까? 초보 식당주인에 이런 ‘웬수 단골’들 때문인지 낙짓집은 1년도 못가 문을 닫고, 82년 가을 오금일씨는 식당을 수리해 카페 ‘대교’를 열었다. 그러나 카페 대교도 매일 저녁 마른안주에 병맥주 몇병 놓고 한없이 침방울을 튕기는 조 시인과 그의 일행이 독과점하니 장사가 제대로 되겠는가.
공자 사모님 힘드셨겠네 한·중·일에서 발전한 회의 모양… 한국에서 가장 많이 회를 준다는 ‘삼다도회집’
공자님의 사모님은 식사 때만 되면 꽤나 스트레스를 받으셨을 것 같다.인간사회의 윤리·도덕·규범 등에 대해 완벽하리만큼 철저하게 내용과 형식, 그리고 실천을 주장한 공자님은 식사에 관해서도 꽤 ‘잔소리꾼’이었던 듯 형식에 딱 짜인 음식밖에 입에 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논어> ‘향당’편에 아래와 같이 전해져오니, 공자님의 상차림에 대한 ‘사모님의 고충’이 미루어 짐작된다.
공자님이 ‘싫어하지 않으셨다’는 회는 고기육(肉=月)변이 들어간 膾이니,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생선회가 아니라 쇠고기회 곧 육회다. <예기> ‘내칙’에도 “고기의 날것을 잘게 썰은 것을 회라고 한다”라고 했으니, 회는 육회이며 그 조리법은 고기를 가늘게 채 써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에는 옛날부터 회라는 음식이 있었고, 이를 즐겨 먹었음이 확실한데, 지금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동물이나 생선의 날것을 먹는 일이 거의 없다. 중국의 역사소설가 진순신은, 11세기 송나라 시대 대시인 매요신의 시 ‘회를 차려놓고 좌객을 대접한다’에 ‘회’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이때까지는 회라는 음식이 중국에 건재하였으나 그 즈음에 창궐했던 대역병으로 말미암아 곧 사라진 것으로 추정한다.
<어우야담>에 “임진왜란 때 중국 군사 10만명이 오랫동안 우리나라에 주둔하였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회를 잘 먹는 것을 보고 중국 군사들이 더럽다고 모두 침을 뱉었다. 그것을 보고 우리나라 한 선비가 말하기를 ‘<논어>에 보면, 회는 가늘게 썰은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다고 하면서, 그 주에도 짐승과 물고기의 날것을 썰어 회를 만들었다. 일찍이 공자께서도 좋아한 것인데 어찌 그대들의 말이 그렇게 지나친가’라고 논박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처럼 회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되 중국에서는 사라져버렸고, 우리나라에 와서는 육회·생선회 외에 강회·두릅회·송이회 등 그 조리 대상이 다양하게 확장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그들의 입맛에 맞게 육회는 받아들이지 않고 ‘사시미’라는 이름으로 생선회를 크게 꽃피워 이제는 세계적 음식으로 발전시켰으니, 동양 삼국에서 회의 발전형태가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생선회를 제일 많이 주는 집이라는 어느 친구의 소개로 강원도 강릉 경포대 옆 사천항 삼다도회집(033-644-0234)을 찾았다. 제주도 출신으로 사천항 앞바다에서 해녀 일을 하는 이 집의 여주인 정순화씨가 직접 채취한 성게·해삼 등을 식당에 공급하고, 아들 최병관(30)씨가 주방 일을 하고, 올케 최필수씨가 서빙하는 가족경영 때문에 회를 많이 주는 것이 가능한 것 같다. 삼다도회집은 생선회도 좋지만 밑반찬에 따라 나오는 성게알 미역국이 몇번이고 앙코르를 하게 만든다.
회접시에 휘날리던 깃발 회가 일본에서 사시미로 불리게 된 사연… 강구미주구리막회집의 투박하고 고소한 맛
일본인은 장수하는 민족이다. 특정한 장수촌이 있다거나 세계 최고령의 노인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본 국민의 평균수명이 세계의 어느 나라들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이다. 일본 후생노동성 발표에 의하면, 2002년 현재 일본 여성의 평균수명은 85.23살로 세계 1위이고, 남성의 평균수명은 78.32살로 홍콩에 이어 두 번째라 한다. 유아기나 젊은날에 질병이나 사고 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나이까지 넣어 계산하는 것이 평균수명이고 보면, 보통 일본 노인들의 경우 ‘살았다면’ 90살 정도는 산다고 예측할 수 있다.
지난호에서 이야기했듯이, 생선회는 일본에서 꽃피워 이제는 ‘사시미’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 원형은 육고기 날것을 채로 썰어 먹는 중국 고대의 회(膾)에 닿아 있다. 회는 당나라의 문명과 함께 나라(奈良) 시대 이전에 일본에 유입되었는데, 육류를 싫어하고 생선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입맛에 따라 변용되어 생선회, 곧 사시미로 발전하였다. 우리나라는 중국·일본의 회 문화를 모두 받아들여 육고기이든 물고기이든 날것으로 먹는 것은 모두 회라고 하였고, 더 나아가 데치거나 날것으로 초장에 찍어 먹는 일체의 채소류 음식도 회라 한다. 그러면 생선회에 왜 ‘사시미’(刺身)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일본의 중세 막부정권 시절, 오사카성의 영주인 어느 쇼군에게 멀리서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쇼군은 요리사에게 식사를 준비시켰는데, 요리사는 주인의 귀한 손님을 위해 지지고 볶고 최대한 실력을 발휘하여 진수성찬을 마련했다. 산해진미로 가득찬 상에는 10여 가지 귀한 생선으로 뜬 회도 올라왔다. 쇼군과 손님은 모두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생선회를 맛있게 먹었는데, 손님이 쇼군에게 물었다. “이 생선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주인으로서 손님에게 대접한 음식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없었으니 쇼군이 무척 당황하였다. 이 상황을 눈치채고 요리사가 들어와 각각의 생선들의 이름과 회 뜨는 법 등을 자세히 설명하니 손님이 칭찬하여 쇼군의 체면이 살았다. 그리하여 요리사는 이후에도 쇼군이 생선 이름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맛을 즐길 수 있도록 묘안을 냈는데, 그것은 종이로 작은 깃발을 만들어 생선 이름을 쓰고 그 깃발을 생선회 접시에 꽂는 것이었다. 곧 ‘사시’는 ‘刺’이니 ‘찌르다, 꽂다’는 뜻이고 ‘미’는 ‘身’이니 ‘몸, 물고기·짐승의 살’이라는 뜻이므로, 생선의 살에 작은 깃발을 꽂았다 하여 생선회가 ‘사시미’(刺身)로 불리게 되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삼성역 근처에 가면 ‘강구미주구리막회집’(02-568-9430)이 있다. 막회란 울진·영덕 등의 동해안 포구에서 어부들이 갓 잡은 자연산 잡어들을 채썰어 초장에 버무려 먹던 음식인데, 그때그때 물 좋은 물가자미(미주구리)·청어·전어·한치·학꽁치·고동 등을 채썰고, 무채·무순·실파·부추·배·양파 등을 적당히 섞어 버무리는 것으로 모양과 맛을 발전시킨 것이 강구미주구리 막회다. 파르스름한 접시에 하얀 무채, 가지런한 생선회에 꽂은 형형색색의 작은 종이 깃발이 상징하는 일본적 미학의 ‘사시미’에 비하면 투박스럽지만 뼈째 씹히는 고소한 막회 맛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민중의 구황식품이자 밑반찬 돼준 들풀들… ‘예촌’에서 들풀 샤브샤브의 향기를 맛보라
“…산을 향해 가는 들길엔 이름 모를 잡초들이 여름을 과시라도 하는 듯 우거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서는 이름 없는 들꽃들이 나를 반기듯이 살포시 미소짓는다. …산에 오르니 우거진 숲 속에서 이름 없는 산새들이 쉴 새 없이 지저귀는 것이 마치 불협화음의 교향악을 듣는 것 같다.…” 나에게는 유명무명 문인들의 작품집 증정본이나 출간을 의뢰하는 원고들이 자주 우편으로 부쳐오는데, 우리 문단의 꽤 유명한 시인이 보내온 수필집에서 본 대목이다. 자기가 밟고 있는 이 땅, 그리고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에 대해 무한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문학적 미학으로 표현해야 할 시인이 풀포기 하나, 산새 한 마리 이름조차 모르고 두루뭉수리 ‘이름 모를’ ‘이름 없는’이라 횡설수설하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자기가 모르면 이름이 없는가? 잡초는 없다! 두루뭉수리 ‘이름 없는’ 풀 한 포기가 아니라 풀 하나하나에 모두 이름이 있다. 그리고 풀마다 각기 특성과 기능이 있어 ‘이름 모를’ 이 풀 한 포기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면 약초로도, 먹거리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대충 인간에게 유용한 ‘이름 모를’ 들풀들의 ‘이름’을 찾아보자.
고들빼기, 씀바귀, 냉이, 소루장이, 물쑥, 달래, 쑥, 무릇, 제비꽃, 순채, 벼룩나물, 미나리아재비, 꿩의다리, 속속이풀, 꽃다지, 가락지나물, 양지꽃, 딱지꽃, 개소시랑개비, 짚신나물, 갈퀴나물, 깨풀, 벌완두, 며느리밑씻개, 마디풀, 명아주, 자리공, 벼룩이자리, 점나도나물, 쇠별꽃, 선밀나물, 사상자, 파드득나물, 까치수염, 메꽃, 꽃마리, 광대나물, 구기자, 까마종이, 주름잎, 질경이, 솔나물, 마타리, 뚝갈, 떡쑥, 담배풀, 옹굿나물, 망초, 뽀리뱅이, 방가지똥, 민들레, 조뱅이, 뻐꾹채, 지칭개, 비름, 말, 소귀나물, 칠면초, 나문재…. 이 ‘이름’들은 우리가 그냥 지나쳐버리는, 이름을 부를 가치조차 없는 잡초들로 여기는 것들이지만, 그 옛날 흉년이 들면 쌀 한줌에 듬뿍 죽 끓여 민중들의 생명을 잇게 한 귀중한 구황식품이었으며, 평시에는 세끼 밥상에 올라 입맛을 돋우는 서민들의 밑반찬이었다. 고정옥의 <조선민요연구>에는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채보한 들나물을 소재로 한 민요가 있다.
지난 6월 문화기획가 이두엽, 연극인 김혜련씨와 함께 전주 풍남제에 갔다가 전주술박물관 관장의 안내로 김제의 아주 기막힌 식당에 들릴 기회가 있었다. ‘예촌’(063-546-5586)이 그곳이다. 주인 박태순(43)씨는 돌미나리, 민들레, 취나물, 쑥부쟁이, 두릅, 갓꽃, 달래, 칡순, 죽순 등의 들나물로 샤브샤브를 개발했다. 소, 염소, 토끼가 먹을 수 있는 들풀은 사람도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는 김제 들판에 널린 ‘이름 있는’ 들나물들을 손수 채취해와 토속 된장으로 샤브샤브를 만드는데, 그 향기가 기가 막히다. 된장비빔밥, 청국장, 무우밥, 콩나물밥, 국수 등은 바로 시켜먹을 수 있지만, 들풀 샤브샤브는 꼭 예약을 해야 가능하다.
밥이 하늘이다 사람에게 밥 한 그릇처럼 가깝고도 먼 것은 없어… ‘밥집 모시는 사람들’의 ‘진짜 밥맛’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갈라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먹는 것
그러나 그해 5월, 김지하는 자기에게 들씌워진 터무니없는 공산주의자 모략에 저항하기 위해 몰래 감옥에서 집필한 원고지 100여장에 가까운 그 유명한 ‘양심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박정희 독재정권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리고 이 ‘양심선언’은 사르트르, 보부아르, 촘스키, 몰트만, 카를 라너, 하버마스, 오에 겐자부로 등 세계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지지 서명하고 5개국어로 번역된 뒤, 그해 8월15일 일본·미국·유럽 세곳에서 일제히 전 세계 매스컴을 통해 발표되었으니, 이로써 수억원을 들인 중앙정보부의 공작은 폭삭 망하고 말았다. ‘양심선언’에는 김지하가 민청학련사건 당시 옥중에서 구상한 장시 <장일담>의 시작 노트에 얽힌 대목이 들어 있다. 백정과 창녀의 아들인 장일담은 도둑질을 하며 감옥을 들락거리다가 어느 날 득도, 혁명을 꿈꾸며 해동극락교를 선포한다. 그는 무리와 함께 마귀가 있는 서울을 향하여 ‘극락이란 밥을 나눠먹는 것’이며 ‘밥이 하늘이다’라고 선포하고 진군하지만, 이는 실패하고 배신자의 밀고로 잡혀 죽는다. 그는 한마디 변명도 없이 반공법·국가보안법·내란죄 등의 죄명을 쓰고 목이 잘리는데, 장일담은 이때 바로 위와 같은 ‘밥이 하늘이다’라는 노래를 부른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 밑에 가면 경치도 좋고 인심도 좋고 음식맛도 좋은 ‘밥집 모시는 사람들’(031-774-8910)이 있다. 동학의 시천(侍天), 양천(養天), 체천(體天)에서 따온 ‘모시는[侍]’인데, 명함에 ‘밥대장 지광철’ ‘밥주인 남용미’라고 되어 있는 부부 모두 천도교 신자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파괴하지 않고 모시고, 손님을 자기 식구처럼 정성들여 모시고, 유기농 채소를 참생명이 스며 있는 먹을거리로 ‘모시는 사람들’에 가거들랑 너무 밥맛에만 취하지 말라. 한번쯤은 어려운 우리 이웃들,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과 어떻게 밥을 나눠먹을 것인가 고민해보시라.
정약용의 개고기 사랑 유배 중 형 정약전에게 보낸 개고기 요리법… ‘능안골’에서 실학파의 ‘입맛’을 떠올리다
조선을 개창한 이성계 쿠데타 세력의 ‘이데올로그’는 단연 정도전이었다. 그는 사회생활을 소홀히 함으로써 봉건 윤리를 지키지 않고, 이로써 국가마저 위태롭게 하였다고 보아 불교를 철저히 배척하고, 신흥조선의 통치원리로 “옛 사람의 덕을 밝히고 국민을 새롭게 할 실학”으로서 성리학을 채택했다. 고려왕조의 문란과 배원친명의 춘추대의적 의리관에서 쿠데타 합리화의 근거를 찾으려 했던 이데올로그들이 조선조의 기틀을 확립하기 위해 선정·덕치·예치의 성리학을 내세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성리학은 조선조가 완전히 기틀을 잡은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말까지 1세기간 성리학 특유의 의리의 실천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실천’은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예(禮)의 절대시, 명분론적 사고의 팽배, 기성질서에의 맹종·맹신으로 흐르면서 민중들의 삶과는 무관하게 지배층의 공리공담으로 치달았으니, 어지러운 당쟁, 참혹한 사화, 피폐한 민중생활이 그 극한에 닿아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 사회의 이러한 질곡을 혁파하고, 실사구시와 이용후생, 기술의 존중과 민중 경제생활의 향상을 지향하며 대두된 사상체계가 바로 실학이다. 이 ‘진짜 실학’은 정약용·정약전 형제, 이익, 유형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에 의하여 사회정책, 자연과학, 국학, 훈고학, 농학을 학문의 대상으로 하면서 실생활에서 상공업을 장려하고 각종 산업기술의 혁신을 강조하였다. 또 이들은 당시 봉건질서하에서 철저히 하층민이나 부녀자의 역할이었던 식품 가공이나 조리 등에 대해서도 상당한 연구결과들을 남겼는데, 박제가의 <북학의>, 이익의 <성호사설>에 그 내용들이 들어있다. 이러한 기풍은 18세기 초 서유구 일문에 이어져, <고사십이집> <해동농서> <규합총서> <옹희잡지> <임원십육지> 등의 조리·농서들을 찬술케 했으니, 우리 전통 음식의 전승에도 실학파는 큰 공헌을 한 것이다.
실학파 중 가장 우뚝한 분이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경집·문집 합하여 500권 이상의 저서를 집필함으로써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정인보)로 평가받는다. 다산은 18년이라는 극한적인 유배생활에서 끝없는 절망과 참혹한 고통과 싸우면서도 아들과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둘째형 정약전에게 올바른 삶의 방향과 학문적 이슈, 인간적 고뇌의 편지를 주고받는다. 다산이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 하나가 흥미롭다. 이 편지를 보면 다산은 무척이나 개고기를 좋아하였을 뿐 아니라 개잡는 법, 개 요리법에도 정통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요리법을 박제가에게서 들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박제가는 다산보다 한수 위의 ‘꾼’이었던 것 같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짐승의 고기는 전혀 먹지 못한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어찌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도라고 하겠습니까? 섬 안에 들개가 천 마리, 백 마리뿐이 아닐 텐데, 제가 거기에 있었다면 5일에 한 마리씩 삶는 것을 결코 빠뜨리지 않겠습니다. …5일마다 한 마리를 삶으면 하루 이틀쯤이야 생선요리를 먹는다 해도 어찌 기운을 잃는 데까지야 이르겠습니까? 1년 366일에 52마리의 개를 삶으면 충분히 고기를 계속 먹을 수가 있습니다. …들깨 한말을 이 편에 부쳐드리니 볶아서 가루로 만드십시오. …또 삶는 법을 말씀드리면, 우선 티끌이 묻지 않도록 달아매서 껍질을 벗기고 창자나 밥통은 씻어도 그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 속에 넣어서 바로 맑은 물로 삶습니다. 그러고는 일단 꺼내놓고 식초, 장, 기름, 파로 양념을 하여 더러는 다시 볶기도 하고 더러는 다시 삶는데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박초정(박제가)의 개고기 요리법입니다.” 경부고속도로 기흥나들목 근처에 있는 보신탕집 ‘능안골’(031-286-7080)은 대추·은행·인삼까지 곁들여 내놓는 수육이 일품이다. 주인 차문영(52)씨는 경기도 토박이로 같은 자리에서 10여년째 이 식당을 열고 있는데, 경기도 토박이인 나의 입맛에 딱 맞아 혹 대부분이 경기도 출신이었던 실학파들이 요리해 먹은 개고기도 이 맛이 아니었나 추측해본다.
무능한 조정을 대신해 울릉도 지킨 안용복… 절경을 바라보며 ‘보배식당’의 홍합밥을 먹어보라
낡은 소재를 재탕삼탕 우려먹는 TV 사극을 보노라면 한여름의 무더위가 더욱 무덥게 느껴질 정도로 짜증이 난다. 왕이 근무처에서 정무를 보는 허구한 날, 대신들이 패거리를 지어 권력투쟁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근정전에서 몇백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에서는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왕비와 후궁들이 찧고 빻는 암투로 밤을 지새운다. 왜 TV나 영화에서는 이런 소재들만을 다룰까? 우리 역사에는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해내기 위해 활약한 민중 영웅들의 이야기가 없는 것일까? 숙종 시대에 살았던 안용복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동래 출신의 어부로 일찍이 수군에 들어가 복무하던 중 부산의 왜관에 자주 출입하여 일본말을 잘하였다. 안용복은 1693년 동래 어민 40여명과 함께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고기를 잡으러 침입한 일본 어민들을 힐난하다가 일본으로 끌려갔다. 안용복은 에도 막부에게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당당히 주장하고, 조선과 에도 막부 사이에서 대마도주가 쌀의 말과 베의 척을 속이는 등 농락이 심한 것을 밝혔다. 에도 막부는 안용복에게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써주었으나, 나가사키에서 대마도주에게 그 서계를 빼앗기고 귀국했다. 대마도주는 울릉도를 차지할 목적으로 서계를 위조하여 같은해 9월 사신을 동래에 보내어 안용복의 소환을 요구하는 동시에, 예조에 조선의 어민이 일본 영토인 울릉도에서 고기 잡는 것을 금지시켜달라고 요청하였다. 울릉도는 조선 초부터 왜구의 거점이 된다 하여 섬 전체를 비워두는 공도정책을 펴왔는데, 당시 조정은 무사주의 외교정책을 펴 비워둔 땅으로 인해 왜인과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며 일본에게도 조선의 공도정책에 협조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의 답서를 보냈다. 1696년 봄, 안용복은 다시 10여명의 어부들과 울릉도에 출어하여 마침 고기잡이 중인 일본 어선을 발견하고 독도까지 추격해 침범 사실을 문책하였다. 또 안용복은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 자칭하고 일본의 호키주에 가서 태수에게 일본 어민의 침범 사실을 항의해,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아, 이 늠름한 민중 영웅이여! 그러나 제 나라도 지키지 못해 땅을 비워둔 무능한 조정은 안용복이 나라의 허락 없이 국제분쟁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서울에 압송하여 사형까지 논의했으나 영의정 남구만의 만류로 귀양을 보냈다. 안용복의 활약으로 이듬해인 1697년, 대마도주는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했고 에도 막부는 울릉도를 조선 땅으로 확인한다는 통지를 조선에 보냈으나, 안용복은 끝까지 ‘죄’가 풀리지 않은 채 귀양지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1953년, 3대에 걸쳐 울릉도에서 살아온 홍순칠은 6·25전쟁의 혼란을 틈타 독도에 침입, 영토 표식을 하고 가는 일본으로부터 독도를 사수하고자 울릉도민 33명으로 ‘독도사수특수의용대’를 조직하였다. 이 의용대는 3교대로 독도에 주둔하면서 1954년 경찰이 정식으로 수비를 맡게 될 때까지 독도를 지켜냈으니, 오늘날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에서 우리나라가 우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분들의 공헌이다. 이 모두는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이야기다. 지난해에 타계한 서지학자 이종학 선생은 독도가 우리나라 영토임을 밝히는 울릉도, 독도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는 데 평생을 바친 분이다. 이 자료들은 현재 도동에 소재한 독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한번쯤 들린다면 독도에 대해 아는 사람은 더 잘 알게 되고, 모르던 사람은 알게 된다.
우리 고유의 음식 쌈밥은 어떻게 태어났나… ‘미소쌈밥’에서 떠올린 전통의 제조법
한국 음식의 상징적인 것으로는 탕,찌개,김치 그리고 쌈을 들 수 있다.그 중에서도 쌈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들 중에서 우리만이 즐기는 독특한 음식문화다.일본에 배춧잎이나 그 비슷한 야채로 들깨장아찌나 매실짱아찌를 넣고서 밥을 꼭꼭 말아 김초밥처럼 썰어 먹는 ‘메아리스시’란 것이 있지만 우리의 쌈과는 전혀 다르다.우리 민족은 채소 가운데 잎이 넓은 것은 모두 날것으로나 데쳐서 즐겨 쌈을 먹는다.쌈은 무엇을 ‘싼다’는 의미이므로,서민들은 쌈에 싸는 것을 ‘복’으로 상징화해 더욱 쌈을 즐겼는데,<동국세시기>에는 “정월 대보름날 나물잎에 밥을 싸서 먹으니 이것을 ‘복쌈’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추는 날로 먹을 수 있는 야채, 곧 생채(生菜)에서 나온 말이다.생채가 상치가 되고,상치가 상추로 되어 표준말로 굳어졌지만,원래 상추는 상치의 서울 사투리일 뿐이다.상추는 유럽과 서아시아 등지에 자생하는데 그 지역이 원산지로 추측되고 있다.기원전 4500년경의 이집트 벽화에 상추가 그려진 것으로 보아 그 재배가 오래 전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지며,우리나라에도 중국을 거쳐 오래 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그러나 중국의 고서인 <천록지여>에 ‘고려의 상추는 질이 매우 좋아서 고려 사신이 가져온 상추 씨앗은 천금을 주어야만 얻을 수 있다고 해서 천금채(千金菜)라 한다’고 했으니,중국에서 들어온 상추가 품종이 개량되어 다시 중국으로 역수출된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상추쌈은 상당히 일찍부터 먹어온 듯,고려시대에 원나라로 끌려간 고려 출신 궁녀들이 원나라 왕궁의 뜰에 상추를 심어 밥을 싸서 먹으며 강제로 끌려온 머나먼 이국 땅에서 목숨을 이어가는 슬픔을 달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바,원나라 시인 양윤부가 이를 눈여겨보아 다음과 같이 시로 읊기도 했다.
살구는 빛이 누래서 보기 좋구나 더 좋은 것은 고려의 상추로서 마고의 향기보다 그윽하구려
우리의 옛 기록에는 쌈을 먹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어우야담>에는 “손바닥에 상춧잎을 놓고 숟가락으로 오려 밥을 떠 들고 붉은 장으로 적시고 익게 구운 고기를 잎에 합하여.…입시울을 벌리니 종루 파루 친 후에 남대문이 열리듯 하니…”라고 약간 ‘상스럽게 쌈 싸먹는 광경’을 그리고 있으며,영·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는 <사소절>에서 “상추,취,김 따위로 쌈을 쌀 적에는 손바닥에 직접 놓고 싸지 말라.…그리고 입에 넣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싸서 볼이 불거져 보기 싫게 하지 말라”고 하여 ‘점잖게 쌈 싸먹는 법’을 권하고 있다.그리고 조선 말기의 조리서인 <시의전서>에는 ‘표준으로 상추쌈 먹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상추를 정히 씻어 다른 물에 담고 기름을 쳐서 개어 담고,고추장에 황육을 다져놓고 웅어나 다른 생선을 넣어 파를 갸름하게 썰고 기름 쳐서 실파와 쑥갓을 항상 곁들여 담으라.” 전남 여수에 가면 <시의전서>에 기록된 것과 같이 밥과 함께 생선조림을 싸먹는 쌈밥집 ‘미소쌈밥’(016-652-49000)이 있다.주인 김영신씨(53)가 이 쌈밥을 9년 전에 개발하여 식당을 열었는데, 여수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여수항에 그날그날 들어오는 싱싱한 고등어나 멸치(징어리)에 우거지와 고구마순을 깔고 국물이 자잘하게 되도록 매콤달콤새콤하게 졸여낸 생선조림을 밥 위에 얹어 각종 싱싱한 야채로 싸먹는 그 감칠맛이라니,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같은 재료, 같은 맛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분점을 열어 서울에서도 여수 ‘미소쌈밥’을 맛볼 수 있다(02-553-5556).
김치의 이름을 찾아… 고려 · 조선시대 거치며 변천 거듭, 피로를 ‘죽여주는 동치미 국수’집
무나 배추 따위를 양념하지 않고 통으로 소금에 절여서 묵혀두고 먹는 김치를 흔히 ‘짠지’라고 하는데, 황해도·함경남도 지방에서는 보통의 김치 자체를 짠지라고도 부른다. 또 경기도 지방에서는 무를 절이지 않고 소금물에 짜지 않고 삼삼하게 담근 김치를 ‘싱건지’라고 부른다. 오이를 짠지 비슷하게 담근 것은 ‘오이지’다. 이 밖에 부추도 고춧가루와 젓갈로 버무려 김치를 담그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이 부추김치를 ‘솔지’ 또는 ‘정구지’라고 한다. 장아찌는 무, 배추, 오이 등을 썰어 말린 뒤에 간장에 절인 반찬을 말하는데, 우리의 옛 조리서에는 ‘장지’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지’가 ‘저’로 되었을까?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신라의 문물과 국가정신을 이어받아 불교를 사회안정의 수단과 봉건제의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였다. 불교는 고려 왕실의 전폭적 후원으로 몽골이 침입하기까지 명실 공히 국교로서 전 고려사회를 지배했으나, 고려 중기 주자학의 유입으로 점차 유교 세력에 눌리게 되었다. 그러나 유교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예에서 보듯이, 철저히 복고주의·사대주의·모화사상으로 흘러서 사회 전반에 걸쳐 우리 것을 버리고 중국 것만 숭상했으니, <시경>에 나왔다 하여 김치를 중국에서도 6세기 이후에는 거의 쓰지 않았던 글자인 ‘저’로 불렀다. ‘딤채’라는 말은 조선 초기에 보인다. 1518년 <벽온방>에 “무딤채국을 집안 사람이 다 먹어라”라는 구절이 나오며, 1525년 <훈몽자회>에는 저(菹)를 ‘딤채 조’라 하였다. 그러면 ‘딤채’는 무엇일까? 이때의 김치는 고춧가루와 젓갈을 쓰는 오늘날의 김치와는 달리, 소금을 뿌린 채소에다 마늘 같은 몇 가지 향신료만을 섞어서 절임으로써 채소의 수분이 빠져나오고, 채소 자체는 소금물에 침지(沈漬)되는 형태이거나, 동치미처럼 소금의 양이 많으면 마침내 가라앉는 형태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김치는 가라앉은 채소 곧 ‘침채’(沈菜)로 불리고, 침채가 ‘팀채’로, 다시 이것이 ‘딤채’로 변하고, 딤채가 구개음화하여 ‘김채’가 되었으며, 이것이 변해 오늘날의 ‘김치’가 되었으니, 김치가 중국으로부터 ‘김치 주권’을 회복하여 자기 이름을 갖기까지의 길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진다. <여씨춘추>에 의하면 “주나라 문왕이 저를 즐겨 먹었다 하므로, 이 말을 들은 공자께서 주 문왕을 존경하는 나머지 모든 행위를 그를 따르기 위하여 콧등을 찌푸려가면서 저를 먹어서, 3년 뒤에는 이 맛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2500년 전, 시어빠진 피클을 김치랍시고 상을 찌푸려가며 드시는 공자님의 모습과, 지난 봄 ‘사스’에는 김치가 특효라는 소문에 새콤매콤한 우리나라 김치를 허겁지겁 구해 먹어대는 공자님 후손들의 모습을 오버랩하며 상상해 보는 맛이 참으로 고소하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새콤매콤한 배추 물김치로 국수를 말아내는 ‘죽여주는 동치미 국수’(주인 이순명·031-576-4070)집이 있다. 얼음을 동동 띄운 새콤한 김치 국물에 쫄깃한 면발의 국수가 말아나오고, 여기에 다진 청양고추를 곁들여 먹으면 가슴속까지 시원해 무더위, 피로, 스트레스쯤은 이 한 그릇으로 ‘죽여준다’.
용호봉황탕과 중국의 헤아릴 수 없는 음식들… ‘동해반점’은 진짜배기 산둥요리의 맛
용호봉황탕(龍虎鳳凰湯)이라? 중국을 여행하다가 광둥성 어느 도시의 식당에 들어갔는데, 메뉴에 용호봉황탕이라는 음식이 올라 있다면 도대체 무슨 재료로 어떻게 조리한 음식인지 알 수 있을까? 우리 식으로 생각하면 용과 호랑이, 봉황의 섞어찌개인 것 같은데, 호랑이 고기는 그렇다 치고 신화에나 나오는 용과 봉황의 고기는 또 무어란 말인가? 중국음식의 이름은 대개 재료, 조리법, 첨가 조미료나 향신료, 재료의 모양이나 배합 형태 등을 조합해 붙여진다. 조리법으로서 탕(湯)은 ‘찌개와 같이 국물은 적고 건더기가 많이 들어간 국’이고, 차오(炒)는 ‘중간 불로 기름에 볶는 것’, 사오(燒)는 ‘기름에 볶은 뒤 삶는 것’ 등이다. 또 조미료로서 더우장(豆醬)은 된장, 추(醋)는 식초, 라자오(辣椒)는 고추를 말하며, 요리의 재료로서 룽(龍)은 뱀고기, 후(虎)는 너구리고기, 펑(鳳)은 닭고기, 톈지(田鷄)는 개구리고기를 일컫는다.
중국음식이 이토록 다양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중국은 광활하다. 광대한 국토인 만큼 기후도 열대에서 한대까지 다양하며, 티베트 같은 고원지대에서 끝없는 평야와 사막, 수많은 강과 호수, 바다에 연한 긴 해안선을 갖고 있으므로 다양한 먹을거리가 생산된다. 둘째, 중국은 5천년 이상의 역사문명을 유지해오면서 음식문화를 축적해왔고, 또 중국 각지에서 각기 토착문화를 유지해오는 55개 소수민족들 또한 자기들의 음식문화를 독창적으로 발전시켜왔다. 셋째, 중국은 유사 이래 중앙집중적 국가체제를 지향해왔는데, 이에 모든 산물이 제왕들이 있는 수도로 집중되고 동시에 역대 제왕들의 호화로운 미식성과 불로장수에 대한 염원이 ‘최고의 요리’를 발전시켜온 것이다. 넷째, 중국은 인구는 많은데 전쟁, 한재, 수재 등의 재해가 자주 있어 서민들은 곡식, 육류, 채소는 물론 야생동물, 곤충까지도 구황식품으로 장기 저장, 비축해왔다. 이 과정에서 특수요리나 그 조리법이 다채롭게 개발되었으니, 오리알 등 조류의 알을 썩혀서 저장하는 삐딴류가 그 예이다. 중국요리와 프랑스요리가 쌍벽을 이룬다 하지만, 둘의 단순비교는 무리이다. 중국의 넓이가 유럽에 상당하고, 또 수십개의 소수민족으로 나뉘어져 있는 만큼 프랑스요리는 중국으로 치면 한 지방의 요리인 셈이다. 곧 프랑스요리가 북경요리라면 이태리·독일 요리격인 산둥요리, 광둥요리, 사천요리 등이 있다. 우리나라 중국집들은 우리 입맛에 맞는 북경·산둥 요리, 사천요리를 주로 한다. 북경·산둥 요리는 면류·육류·해산물 요리가 많고, 조미료를 듬뿍 넣어 맛이 강하다. 그리고 사천요리는 매운맛이 많이 난다. 고교 친구 김기창군이 자기 단골인 서울 대림동 ‘동해반점’(02-832-4430)을 침이 마르도록 추천하기에 며칠 전에 다녀왔다. 주인 장수산(張守山)씨는 산둥성 출신으로 38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이 집을 지켜왔다고 한다. 50여 가지에 이르는 이 집의 중국요리는, 맛은 어느 특급호텔에도 뒤지지 않고 양은 서너명이 먹기에 충분하지만 모두 3만원을 넘지 않으니, ‘띵호아(挺好)!’다.
계란 빠뜨린 짜장면에 응징을 가하는 운동본부… 대창반점의 감칠맛에 ‘이적행위’를 저지르다
짜장면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면서 인천에 청국지계가 만들어지고, 이때 물밀 듯이 들어온 중국인들이 부두 노동자들을 상대로 팔았던 싸구려 음식이다. 곧 중국 산둥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밀가루장을 볶아 국수 위에 얹어 비벼 먹게 한 것이 짜장면인데, 그래서 한자로 쓰면 불에 튀길 작(炸), 간장 장(醬), 밀가루 면(麵)하여 ‘작장면’(炸醬麵)이다. 그런데 ‘작’(炸)은 혀를 입 안으로 깊이 말아올리면서 ‘짜’에 가깝게 발음되기 때문에 현재의 표준말인 ‘자장면’보다는 ‘짜장면’이 더 맞다. 안도현은 어른을 위한 동화 <짜장면>에서, 자기는 어떤 글을 쓰더라도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표기하지 않겠다고 한다. ‘자장면’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것일 뿐, ‘짜장면’의 추억이 가득한 아이들에게 맞춤법이라고 하여 ‘자장면’이라 할 수는 없을 뿐더러 어느 중국집도 ‘짜장면’일 뿐이라고 말한다. 회원이 14명인 다음카페의 ‘짜장면되찾기국민운동본부’(jjajjajjajang)도 “짜장면을 잃어버린 것을 허탈해하며, 자장면에게 빼앗긴 짜장면이란 우리 고유의 서민 명칭을 수구학자들에게서 되찾아 다시 회복하기를 바라는” 목표를 갖고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중국 산둥인들의 요리법과 우리의 기호가 습합하여 독창적인 ‘한국적 짜장면’을 만들어냈으니, 새하얀 대접에 쫄깃한 국수 사리를 가지런히 넣고, 그 위에 초콜릿색의 짜장을 부은 다음, 정갈하게 썰은 오이채, 파르스름한 완두콩 몇알, 노오란 옥수수 알갱이 약간, 그리고 삶은 달걀 반쪽을 살포시 얹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한국적 짜장면’이 사라져가고 있다며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있다. 다음카페의 ‘자장면계란회복전국민운동본부’(jajanggohost)의 회원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옛날과는 달리 짜장면에 계란 반쪽을 올려주지 않는 집이 대부분인 데 분개하여, 각 회원이 파악한 계란 올려주는 중국집을 소개하고, 계란을 올려주지 않는 중국집에 대해서는 불매운동을 펼친다. 이들은 또 계란을 올려주지 않는 중국집에 대한 ‘테러’ 활동도 권장한다. 엉뚱한 집으로 짜장면 배달시키기 등등. 짜장면을 취재하러 짜장면의 태생지 인천의 차이나타운엘 갔다. 짜장면을 좋아하는 인천 아이 박용훈, 이우재와 함께 미식가 윤영수씨의 안내를 받아 ‘대창반점’(032-772-0937)의 짜장면 맛을 보았는데, 산둥 출신 주인 유순화씨의 50년 내공이 느껴진다. 돼지고기와 감자만을 넣어 볶은 짜장에 쫀득한 국수를 비벼 먹는 그 감칠맛에 ‘자장면계란회복전국민운동본부’ 회원인 나는 회원으로서의 임무 수행은커녕 이렇게 그 집을 소개하는 글까지 쓰고 있으니, ‘운동본부’ 회원들이여, 나의 ‘이적행위’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라..
보리 맥(麥)자에는 왜 올 래(來)자가 들어 있을까… ‘송풍정’에서 맛본 푸슬푸슬한 보리밥
<논어> ‘미자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끼니때가 되어 공자에게 드릴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도중에서 일행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급히 일행을 뒤쫓아가다가 자로는 긴 작대를 메고 옆에 바구니를 차고 가는 노인을 만나 “우리 선생님을 보지 못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런즉, 노인은 “손발도 움직이지 않고 오곡의 구별도 모르는 자가 무슨 선생님이란 말인가”라고 중얼대며 그대로 작대기를 밭에 놓고 열심히 풀만 뜯기 시작했다. 이 노인은 실은 은자로, 공자가 노동을 하지 않고 하늘의 가르침이니, 땅의 이치니, 인간의 근본이니 하며 찧고 빻지만, 인간의 목숨을 이어주는 밭에 심어 있는 곡물이 조인지 피인지 구별조차 못하는 공자를 비웃은 것이다.
오곡 중에서 보리는 ‘맥’(麥)이라고 쓰는데, 갑골문이나 청동기의 명문에는 ‘래’(來)라는 자형이 보리를 의미하였다. 곧 보리는 최초에는 ‘來’라고 씌었고, 후세에 ‘來’ 아래에 ‘(뒤쳐올 치)’를 보태 ‘麥’으로 되었는데, ‘뒤쳐올 치’는 인간의 발을 본뜬 상형문자로, 여기서 발의 모양을 더해 쓴 것은 보리의 웃자라는 것을 막고 뿌리가 잘 펴지도록 늦가을에 ‘보리밟기’를 행하기 때문이다. 왜 ‘오다’라는 의미의 ‘來’가 보리를 지칭하게 되었을까? 중국 신화에 의하면, 보리는 하늘에서 인간계에 내려진 멋진 곡물이라 한다. 곧 천상의 세계에서 ‘온’(來) 것이므로 ‘오다’(來)라는 말로 그 곡물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경>의 시 <사문>(思文)에 “나에게 래모(來牟·보리모종)를 보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주석에 의하면 주나라의 무왕이 포악한 은나라의 주왕을 쳐부수고 주나라를 세워 이상적 세상을 실현했을 때, 하늘이 무왕의 공적을 치하해 내린 가곡(嘉穀)이 보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來’는 은나라 시절의 갑골문자에 이미 들어 있으므로, 주나라의 건국과 함께 “보리가 하늘에서 왔다”는 것은 허구이고, 다만 보리가 지중해 동부 연안이 원산지여서 서쪽에서 보리가 전해져 왔으므로 ‘먼 곳에서 온 곡물’이라는 의미로 ‘래’(來)가 되었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10여년 전 광주대학교 총장이셨던 고 성내운 선생님과 무등산을 등산하다가 토끼등 초엽 커다란 당산나무 아래서 등산객들이 보리비빔밥을 시퍼런 열무잎에 쌈싸 먹는 것을 보고 끼어들었다. 갖은 나물에 푸슬푸슬하게 지은 보리밥을 고추장에 썩썩 비벼 먹으니, 그 옛날 굶주림의 기억조차 맛스러움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며칠 전 무명산악회의 무등산 등산길에 일행을 졸라 당산나무 집 송풍정(062-227-1859)을 찾았다. 22년 전 전국 최초로 보리밥집을 열었던 박형민씨는 몇년 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박승운씨가 대를 잇고 있는데, 한 그릇에 300원 하던 것이 5천원으로 오른 것 이외에는 아직도 옛날 맛, 옛날 인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무척 반가웠다.
제물을 골고루 나눠먹다 발전한 비빔밥… 전주비빔밥 원형을 찾아 ‘가족회관’으로
1800년대 말의 조리서 <시의전서>에는 비빔밥을 ‘부밥’(汨董飯)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골’(汨)은 어지러울 골이고 ‘동’(董)은 비빌 동이다. 곧 골동은 여러 가지 물건을 한데 섞는 것을 말하므로, 골동반이란 이미 지어놓은 밥에 여러 가지 찬을 섞어서 한데 비빈 음식이다. 이 책에 나오는 우리 비빔밥은 이렇다. “밥을 정히 짓고, 고기는 재워 볶고, 간납은 부쳐 썬다. 각색 남새를 볶아놓고, 좋은 다시마도 튀각으로 만들어 부숴놓는다. 밥에 모든 재료를 다 섞고 깨소금·기름을 많이 넣어 비벼서 그릇에 담는다. 위에는 잡탕거리처럼 계란을 부쳐서 골패짝만큼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부쳐 얹는다. 장국은 잡탕국으로 해서 쓴다.”
중국, 일본 음식과 비교해 우리나라의 잡탕찌개를 비판한 글을 보았다. 식품 하나하나의 독특한 맛을 살리지 못하고 몽땅 쏟아넣고 끓이니 그게 제대로 된 음식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모르는 소리다. 우리에게 잡탕에 들어가는 재료 하나하나의 별개의 음식이 없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또 육고기 찌개는 각기 지방의 조성이 달라 이 고기 저 고기 섞어 잡탕찌개를 하면 맛이 이상해지지만, 해산물은 이것저것 넣은 잡탕이라야 감칠맛이 난다. 비빔밥도 마찬가지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찬 하나하나를 따로이 먹어도 맛있지만, 이들이 뒤섞여 나오는 오묘한 맛은 또 새로운 것이다. 대한항공의 기내식으로 제공되는 비빔밥이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높고, 몇년 전 공연차 내한한 마이클 잭슨이 우리의 비빔밥 맛에 반해 체류기간 내내 비빔밥으로 끼니를 때웠다지 않은가?
지난주 전주산조예술제에 들른 길에 전주 문화예술인들의 추천으로 비빔밥 전문집 ‘가족회관’(063-284-2884)을 찾았다. 김연임(65)씨가 25년 전부터 연 이 집은 사골국물로 밥을 짓기 때문에 밥알 하나하나 윤기가 나고 밥맛이 아주 고소하다. 이 집도 차림표에 돌솥비빔밥이 있지만, 내가 비빔밥의 원형이라고 생각하는 유기비빔밥도 따로 있어서 시식해 보았는데 그런대로 보아줄 만했다.
[회] 왜 유명 요리사는 다 남자지? 제사장부터 프랑스 왕실로 이어지는 요리사의 역사… 취미도 직업도 요리뿐인 횟집 ‘율도’ 주인
호텔 음식점이나 중국요리집, 일식집에 가보면 요리사가 대부분 남자다. 그리고 고급 음식점일수록 요리사는 여자보다 남자가 많다. 주방에서 여자들도 일하지만 대개 조리재료 준비, 그릇 씻기 등 남자 주방장의 보조 역할을 할 뿐이다. 또 집안에서도 남편이 요리하는 것은 ‘특별한 취미생활’이고, 아내가 요리하는 것은 ‘당연한 가사노동’이다. 곧 요리가 ‘일’이 될 때는 여성의 차지이고, ‘직업’이 될 때는 남성의 전유물이 되니, 여성들로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그러나 여성들이여, 만물에는 다 그럴 만한 사연과 이치가 있는 것이니, 너무 흥분하지 말고 아래의 글을 읽어보시라.
그런데 제의 의식에서 신에게 바쳐진 음식이란 무엇인가 신을 인격화해 가장 좋은 식품, 가장 진귀한 식품, 가장 맛있는 식품을 바쳐 신에게 드시라 하지만 실상 신에게 바쳐진 건 코를 찌를 듯 풍기는 음식 냄새뿐이고,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은 제의를 주관하는 제관과 일반 백성들이다. 먹을거리가 넉넉지 못한 그 시절 음식을 나눠주는 권한 역시 남자인 제관이 가지고 있으니 그 위세가 높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고대 유습은 로마시대를 거쳐 중세까지 이어져왔으니, 서양 중세사회 사람들에게 있어 연회석에서 고기를 잘라 나누어주는 일은 선택된 자의 특권이었고 중요한 기술이었다. 이를테면 무술 경기에서의 승리자는 선물로서 자기가 숭모하는 귀부인의 총애를 받는 외에 승리의 보상으로 연회석에서 고기를 잘라 참석자에게 나눠주는 특권을 부여받기도 했다. 또 귀족 가문에서는 고기를 나누는 역할을 신사 계급의 아들에게 맡겼고, 왕실에서도 음식을 잘라 나누는 일과 조리하는 일 모두를 귀족 계급에게 맡겼는데, 그들은 음식을 나눈 뒤 독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손에 묻은 음식물을 핥아먹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이14세부터 루이16세 시기까지 왕실과 귀족층의 프랑스 요리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으로 귀족층이 몰락하자 이들 저택에서 요리를 하던 ‘유명 요리사들’이 생존을 위해 식당을 개업했으니, 이때부터 본격적인 직업 요리사가 등장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진 것이다. 서울 여의도의 일식집 ‘율도’(02-784-8877)의 사장 이춘형(52)씨만큼 자기 직업에 긍지를 갖는 사람도 없다.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요리사로 일해온 그는 자수성가해 제법 큰 일식집을 경영하고 있지만, 지금도 직접 주방을 지휘해 정성스레 음식을 손님께 내놓는다. 그가 개발한 도톰하게 써는 ‘율도식’ 생선회, 각종 젓갈무침, 얼큰한 갈치탕, 시원한 생선뼈 미역국 등이 여의도 샐러리맨들을 쉴 새 없이 ‘율도’로 끌어들인다. 사람 사귀기를 좋아해 취미도 요리, 직업도 요리인 이춘형씨와 잘 사귀면 2차는 무조건 공짜다!
[따로국밥] “니들 따로국밥 묵어봤나?” 서울의 육개장을 변형한 대구의 자존심… 60년 세월 동안 한결같은 ‘국일식당’의 맛
10여년 전 미술사학자 유홍준, 소설가 유시춘, 경상대 교수 김덕현 등 천하의 말쟁이 7~8명이 인사동 어느 한정식 집에서 어울린 적이 있었다. 정치 이야기에서부터 대학 이야기, 문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말쟁이들답게 동서고금 세상만사를 넘나들다가 마지막에는 음식 이야기에 이르렀는데, 자연스레 각자가 자기 고향의 특별한 음식이나 자기가 먹어본 맛있는 음식 이야기를 풀어놓기에 바빴다. 유홍준 교수는 남도 문화유산 답사길에서 맛본 해남 천일식당의 떡갈비 예찬에 열을 냈고, 유시춘씨는 설악산 단풍구경 길에 들린 하진부 부일식당 산채정식의 담백한 맛을 기억해냈다. 이렇게 술꾼은 술꾼대로, 맛꾼은 맛꾼대로 자기가 접해본 ‘진미’를 이야기하는데, 안동이 고향인 김덕현 교수만이 할 말이 없는 듯 입맛을 쩍쩍 다셨다. 이러고저러고 말의 성찬이 한바탕 훑고 지나간 뒤 잠시 화제가 끊어질 즈음 김덕현 교수가 한마디 불쑥 던졌다. “니들 간고등어 먹어봤나?”
안동에 간고등어가 있다면 대구에는 따로국밥이 있다. 대구의 따로국밥은 서울의 육개장이 변한 것이다. 1700년대 말의 백과서 <경도잡지>에 의하면 “개장이란 개고기에 흰파를 넣고 끓인 구장(狗醬)을 말하는데, 국을 끓여 고춧가루를 뿌리고 흰밥을 말아서 먹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개고기를 끓인 개장(狗醬)이 식성에 맞지 않는 사람은 대신 쇠고기를 쓰고, 이를 육개장이라 했다고 한다. ‘육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서는 ‘육’(肉)자가 들어가면 쇠고기를 가리킨다. 대구의 따로국밥은 서울식 육개장처럼 고기를 잘게 찢어서 얹는 것이 아니고, “고기를 썰어서 장에 풀어 물을 많이 붓고 끓이되 썰어 넣은 고기점이 푹 익어 풀리도록 끓인다. 파잎은 썰지 않고 그대로 넣고 기름 치고 후춧가루를 넣는다”는 1869년의 조리서 <규곤요람>에서 소개한 육개장 조리법에 가깝다. 지난 9월 말, 30여년 전 민청학련 사건에서 고문과 조작으로 무고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세상을 떠나신 여정남, 하재완, 송상진, 도예종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러 이철, 여익구 등과 함께 대구를 찾았다. 1974년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투옥된 이래 지금까지 줄곧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임구호, 강기룡, 임규영 등 대구의 친구들과도 오랜만에 만나 밤새 통음하며 회포를 풀었다. 일반적인 경북·대구 정서와는 ‘따로’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그 고장 출신 독재자들과 맞서온 이들의 외로운 투쟁이 눈물겨웠다. 이튿날 쓰린 속도 풀 겸 음식이야기 취재도 할 겸 나만 ‘따로’ 20여년 전 한번 들렸던 ‘국일따로국밥’(053-253-7623)을 찾았다. 그때는 그저 짜고 매웠다는 느낌뿐이었는데, 가만히 국밥에 들어간 쇠고기·파·선지·기름 등을 음미하면서 먹으니 목으로 넘어가는 국물맛이 시원하고도 개운하다. 1946년 고 서동술씨로부터 시작되어 이제 손자 서경덕(40)씨까지 이어오니, 국일식당이 어느새 60년의 역사를 자랑하게 되었다. 대구 시민들이여, 어느 자리에서든 음식 이야기가 나오면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게 말하시라. “니들 국일식당 따로국밥 묵어봤나?”
2천년 전부터 동양에서 재배된 ‘밭고기’ 콩… ‘등나무집’에서 비지에 존경을 표하라
중국의 화북 일대는 기름진 토지와 황하를 비롯한 풍부한 수원으로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동한(東漢)의 역사가 반고가 지은 <백호통의>에 의하면 “농신(農神) 신농씨가 나무를 깎거나 휘어 쟁기와 보습을 만들고, 모든 풀을 먹어보고 평소에 늘 먹어도 해가 되지 않는 풀을 선택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재배하게 함으로써 농경을 번창케 했다”고 한다. 이때 온대지방에서 널리 자라고 있던 강아지풀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 조가 되었고, 야생의 기장과 남방으로부터 전해져온 벼도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하여 농경생활이 꽃피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화북에서 싹튼 농경문화는 만주 우리 민족의 고토에도 파급되기 시작하였는데, 만주의 남부나 한반도는 화북지방보다 더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해 농경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 농경이 유목보다 안정된 식생활을 위해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로써 이들의 식생활은 유목의 육류 단백질·지방에서 농경의 전분 위주로 점차 바뀌게 됐다. 그러나 곡물 전분 위주의 식생활은 단백질과 지방의 결핍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야생동물을 가축화하고, 야생식물의 종자를 파종해보는 가운데 들콩의 작물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콩은 뿌리혹박테리아를 갖고 있어서 특별히 거름을 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재배가 쉬운데다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기 때문에 유목에서 농경으로 옮겨가 육류 섭취가 줄어든 사람들에게 ‘밭에서 나는 고기’로 환영받았다.
콩은 콩밥과 같이 음식의 한 재료도 되나 그 자체로 하나의 식품이 되기도 한다. 곧, 삶은 풋콩은 그대로 간식거리, 술안주로 쓰이고, 간장에 졸여 콩자반이 되고, 발효시켜 된장·간장 등 장류를 만들어낸다. 분쇄하면 콩가루요, 용매로서 추출하면 콩기름, 물에 불려 추출하면 두유, 두부, 비지가 나온다. 비지는 두부를 만들고 난 찌꺼기다. 음식 이름을 고증한 <명물기략>에 “비지는 부재(腐滓)가 속전(俗傳)된 것이다. 곧, 두부(腐)의 찌끼(滓)다”라고 그 어원을 밝히고 있다. ‘싼 게 비지떡’이란 말처럼 비지는 말 그대로 한낱 찌꺼기일 뿐, 맛도 없고 그 속에 아무런 영양 성분도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비지는 섬유질이 많고 단백질과 지방도 많이 남아 있으며, 특유한 풍미가 있어 찌개 형태로 조리하면 좋은 음식이 된다. 고려 말에 나옹선사가 월정사 북대암에 머무르고 있을 때, 나옹은 매일 비지로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어느 겨울 월정사로 가는 길가의 소나무가 가지에 얹혀 있던 눈을 비지 위로 떨어뜨렸단다. 나옹이 “이 산에 살면서 부처님 은혜를 입고 있거늘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고 호통을 쳤는데, 그 뒤부터 오대산에서 소나무가 떠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니. 당대의 고승 나옹이 ‘싼 비지’를 부처님께 올렸을 리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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