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윤태중의 과학풍수

醉月 2010. 12. 9. 08:35
[과학풍수] 풍수지리학은 과학이자 효 사상
조상 유골 오랫동안 온전하게 보존할 목적에서 출발
 
우주 만물은 하늘과 땅 사이의 조화로 영위되어 존재하고 있다. 특히 인간은 외기인 천기(天氣)와 내기인 지기(地氣)의 교합으로 인한 생기를 받아 살아가는 생명체의 한 존재다. 내기를 품고 있는 땅은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자 인간이 죽어 되돌아가는 유골(遺骨=體魄)의 안식처다.

지구가 태초에 무극(無極)일 때는 길흉이 없다가 양과 음의 양의(兩儀)가 나타나면서 이(理)의 운행으로 형상을 이루게 되면서 기(氣)가 나타나게 되어 길흉이 생겼다. 이러한 음양의 논리에 의해 땅도 길지가 있는가 하면 흉지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어떻게 하면 나를 낳아서 길러주신 부모님과 내가 있기까지의 뿌리에 해당하신 조상님을 길지의 땅을 찾아 유골이 오랫동안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도록 선조의 유택(幽宅)을 용사(用事·매장하는 일련의 과정)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기본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이 저버릴 수 없는 천륜에서 나오는 효 사상이며, 이를 실행하는 것이 도리인 것이다.
▲ 명당같이 보이는 계곡에 놓인 묘.

풍수지리학이 미신이나 방술로 오인되는 이유 

또한 길지의 땅을 찾아 집을 지어 생활하거나 공장이나 사무실을 지어 활용함으로써 좋은 기를 받아 혹 미래에 있을 각종 흉화를 면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 마음이다. 여기에서 풍수지리학 사상이 발생했다.

이처럼 인간 생활에 기본이 되는 풍수지리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면서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는 자연친화적 학문으로서, 인간이 살아가는 데 근본이 되는 땅(地氣·영적인 힘)에 대해 음양의 논리에 입각한 오행(五行)의 이론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이러한 풍수지리학이 아직도 일부에서 미신이나 방술로 믿고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풍수지리학의 이론 자체가 중국에서 처음 들어올 때부터 애매모호하게 된 잡이론들이 많이 수용되었다. 그 이유는 오랜 문헌을 통해 알아보면 알겠지만, 혈 자리에 장사를 지내어 인재가 많이 태어나면 천자의 자리가 위태롭게 되는 것을 염려하여 왕실에만 풍수학의 진본을 보관하고 나머지 풍수 관련 문헌들을 모두 수합하여 만인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 흉지에 있던 유골로서 수렴과 목근의 무서운 현장을 볼 수 있다.

이후 일부 내용을 애매모호하게 바꾼 이론을 지어내어 이 법을 적용하게 되면 산비탈이나 산등성 또는 골짜기마다 묘지(인골)로 넘쳐날 수 있게 되어 인재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유도하게 되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를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적용하게 되었고, 아직도 깊은 연구와 분석 없이 그러한 내용의 풍수지리문법을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풍수지리문법에 대해 신라 말 도선국사는 ‘오서’니 ‘잡오행’이라 표현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이를 경계하라는 의미로 경세록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둘째, 풍수지리학의 이론 자체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다 보니 이를 적용하는 사람들 간에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정확히 터득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체계가 제대로 안 갖춰진 상태로 전해져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면만을 주로 보고 듣다보니 풍수지리학의 오묘한 원리를 모르는 사람들 중에서는 아직도 미신 내지는 방술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다 막상 자기에게 일이 닥치면 누가 올바른 풍수법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적용하여 자연의 이치를 알고 있는 풍수가(명사 내지 법안자 이상)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가까운 주변에서 미숙한 풍수가를 찾아 인연을 잘못 가지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인연에 따라 결정되는 풍수지리

모든 것이 자기 입맛에 맞아야 하는 것처럼 풍수지리학도 우리나라에 맞는 풍수법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풍수지리학을 깊이 있게 연구해 보면 중국 풍수법으로 우리나라 산천에 적용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 중국 풍수법보다 한국적 풍수법으로 우리나라 산천에 적용하면 신비로울 정도로 합당함을 느낀다. 명당으로 알려져 있는 산천을 찾아 확인해보면 과거 우리나라 선사들의 풍수적용법이 얼마나 정확하고 자연의 이치에 맞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오행의 원리에만 의존한 방위 위주의 중국 풍수법을 가르치고 배우고 있으니 풍수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볼 때는 어느 것이 더 정확한 풍수적용법인지 알 수 없다. 또한 풍수지리의 근본 목적은 뒤로 하고 오로지 조상의 묘를 잘 쓰면 발복 받을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어 풍수지리의 목적이 훼손되어 전해지고 있다.

풍수지리는 인연에 따라 결정된다. 풍수지리학의 이론과 실전을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배우고 익히느냐와, 또 어느 풍수와 인연이 닿느냐에 따라 조상을 길지에 모실 수도 있고, 흉지에 모실 수도 있는 것이다.

▲ 도로 옆 계곡에 있는 묘.

자연의 이치를 잘못 적용하면 조상의 유골이 물, 나무뿌리, 벌레의 충, 바람 등으로 손상을 받으며, 이로 인해 후손들에게 각종 흉화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의사는 환자의 치료에서 실수하게 되면 환자 한 명에게 피해를 주지만 풍수가는 실수하여 흉지에 점지하면 그 한 가족은 물론 가문 대대로 흉화를 가져다주는 결론이 될 수 있다.

풍수지리학에서 말하는 땅의 길지, 즉 명당은 산진수회(山盡水回)하고 환포장풍(環抱藏風)된 곳이다. 다시 말해 산(풍수에서 산은 용)이 태조산에서 소조산을 거쳐 행룡하다가 멈추는 곳인 산진처(山盡處)에 지기(地氣)가 응결된 곳으로, 물이 궁체(弓體)로 감아 주고, 청룡 백호가 감싸 안아주어(環抱藏風) 지기의 누설을 방지해 주고, 또한 외부의 흉살로부터 방어되어 보호된 국내(局內)가 바로 명당이다.

이런 곳에 음택(陰宅·묘지)은 반 평에 불과한 일선의 혈장(穴莊)으로 형성되고, 양택(陽宅·주택과 건물)은 일편(一片)의 평포(平鋪)로 넓게 형성된다.

과학이란 자연의 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하여 여기에서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원리로 확증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한 것이라 볼 때, 풍수지리학은 명당 내 생기로 뭉쳐져 있는 혈토에 함축된 지기가 체백(體魄)의 정기와 조화롭게 융합하여 응축된 오묘한 영기가 동질의 원소를 가진 그 후손들에게 감응되어 여러 가지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연찬(硏鑽)하는 현응학(玄應學)적인 학문이다.

▲ (왼쪽)십수 년 동안 수렴에 의해 냉동 손상된 유골. (오른쪽)토관작업을 하는 인부들과 이들 지켜보는 윤태중 박사.

즉, 좋은 생기가 응결된 혈 자리에 선조의 체백을 모시고, 유골이 황골(黃骨·紫骨이라고도 함)로 오랫동안 보존됨은 바로 과학적 현상이다. 이로 인하여 동기감응(同氣感應·동질의 원소 간에 일어나는 반응)으로 자손이 어떠한 음우(蔭佑)를 받게 되는 것이 곧 현응학적 결과다. 그러므로 풍수지리학의 정론은 자연의 이치에 합당하게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과학임을 실증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생활에서 과학적으로 설명을 다 못하는 것이 너무나 많이 존재한다. 풍수지리학이 바로 여기 일부분에 해당하지 않을까? 따라서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 중구난방적인 제반 이론(異論)들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풍수지리학이 미신이나 방술이 아니라 바로 과학이요 진리라는 인식을 현장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지구 내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초기부터 위도 측량 및 지세에 따른 자연환경의 관찰에 천문학과 인문지리학을 이용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풍수지리학이 매우 과학적 사고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요즘 우리 주위에는 자칭 풍수가라는 지관들이 많다. 풍수지리학도 다른 학문처럼 인정된 교육기관에서 일정한 교육과정을 받으면서 깊게 연구하여 명실상부하게 형기(形氣)와 이기(理氣)를 확연히 정립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정된 교육과정으로 일정기간의 교육을 받지도 않고, 불과 수개월 내지 몇 학기 정도의 교육을 받은 자들이 그저 천박한 이론에 불과한 몇 가지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 큰 비법(秘法)이라도 지닌 듯한 사람들이 있다.

 

또 풍수의 실력가인 척하면서 풍수지리학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지도하거나 현혹시키고,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 곳에 남의 선영을 만들어 주어그 집안을 망쳐 놓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역장(逆葬)이 반드시 절손지화(絶孫之禍)일까

하물며 애초에 건물이나 주택을 구축해서는 안 되는 흉지에 건물이나 집을 건축함은 물론 잘못된 구조의 건물과 주택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고 있는 예가 많다. 이러한 사건들이 일반인들에게 풍수지리학을 점점 더 불신하게끔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자(知者)는 지(知)요, 부지자(不知者)는 부지(不知)라’ 는 이 말은 강의를 마칠 때 마다 즐겨 사용한다. 이 단어의 의미를 잘 이해한다면 우리가 왜 교육을 받아야 하며 왜 배워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풍수지리학에 대해서는 더욱 중요성이 강조된다.

▲ 16년 동안 물바닥에 잠긴 유골.

풍수지리학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원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해한다면 일정한 수준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속칭 풍수쟁이(풍수에 대한 문헌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겨우 수법 몇 가지 알면서 마치 풍수에 대해 도통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풍수지리학은 결코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학문은 아니다. 하지만 옳은 인연이 닿지 않아서 잠시 미루어 두고 있는 것이다.

세간 사람들 중에는 풍수지리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 많다. 대표적으로 역장(逆葬)이다. 풍수문전에서 역장이면 절손지화(絶孫之禍)라 했다. 즉 역장으로 용사하면 절손이 되는 흉화가 미친다는 것이다. 여기서 역장이라는 것은 용세(龍勢)의 흐름을 거역해서 장사를 하였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간에서는 할아버지 묘소보다 높은 곳에 할아버지보다 아랫대의 사람을 장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름 있는 문중의 선산에는 선대 묘가 있는 위에 명혈이 비어져 있는 곳이 많음을 현장답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풍수지리가 잘못 전달되어온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내용에 대한 글은 다음 기회에 좀더 구체적으로 연재할 계획이다. 앞으로 지면을 통해서 풍수지리학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이고 상세히 접근해 보기로 하자.

[과학풍수] 왜 권력·부·명예 가진 문중은 화장 안 할까
음덕과 동기감응 이치 알면 조상 유골 매장으로 안장
 
지난 호에서 풍수지리학의 근본 목적이 조상에 대한 효(孝) 사상에서 출발했다는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이번 연재 내용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풍수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친자감응론 親子感應論)과 생기론(生氣論)에 대해 공감해야 한다.
 
온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나 소질을 개발하고 능력에 따라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다. 풍수지리학의 음택풍수에서는 태어날 후손이 돌아가신 조상의 유골에 의한 동기감응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즉, 유골이 놓인 위치에 따라 산천생기의 영향이 다르므로 후손의 발복은 물론 절손이 되거나 빈부의 차이가 생기고, 각종 길흉 등에 큰 영향을 미친다.

▲ 오히려 자연훼손을 가져오는 가족묘와 납골묘.
일반적으로 조상의 동기감응(친자감응)이 살아 있는 자에게만 미칠 뿐 아니라 다음 세대에 태어날 후손의 남녀 성별이나 일생 운명을 어느 정도 결정짓는, 소위 사주팔자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때문에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가 운명을 마치게 될 때, 그 유골을 어떻게 모시느냐가 그 집안의 인물이나 부귀영화에 영향을 가져와 대대로 삶의 질을 결정짓게 되는 것이다. 나의 뿌리가 되는 조상의 유골을 편안히 모시기 위한 방법은 각 나라의 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다.

 

풍수지리학적인 측면에서 매장문화와 화장문화에 대해 알아보고 그에 대한 방안을 제시하여 가정은 물론 국가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방안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만 해도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조상의 유골을 불에 태워 처리하는 화장문화가 널리 보급되어 내려오다가 조선시대로 접어들어 유교사상으로 전환되며 매장문화로 바뀌게 되었다. 매장문화는 오랫동안 생전에 부모님을 지극 정성을 다하여 모시고, 사후에는 길지에 모셔 유골이 손상됨이 없이 영면(永眠)하여 오랜 세월 동안 온전하게 보존하는 것을 후손으로서 도리라 믿어왔다.

 

특히 유골을 길지에 모심으로써 잘 보존되어 황골(黃骨=자골 紫骨)이 되기를 원했다. 만약 길지가 아닌 흉지에 모셔져 수렴의 침범을 받아 체백이 불에 탄 것처럼 시커멓게 되거나, 목근이 들어 나무뿌리가 유골을 칭칭 감는 것을 극히 경계해 왔다. 길지에 모신 유골(遺骨=황골 黃骨)은 기의 파장 논리에 따라 동기감응으로 후손에게 음우(蔭佑)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믿어왔다. 이것이 앞서 설명한 동기감응론이다.

▲ 영원히 썩지 않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납골묘.
풍수지리학의 근본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고, 그 맥이 계속 이어져 오늘날 과학적인 학문으로 인정되어 발전하게 된 것이다.

 

매장문화는 바로 조상을 좋은 지기가 뭉쳐있는 곳에 모셔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목적이다. 여기에 다른 이기적인 목적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 전달되어 언젠가부터 조상이 모셔져 있는 광중의 유골에는 관심이 별로 없고, 오직 산소 꾸미기에 혈안이 되어 산천을 마구 훼손하거나 석물로 치장하면서 외형에만 관심을 가지는 잘못된 풍습이 생겨나 풍수지리학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사례를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어 안타깝다.

 

납골묘는 자연산천에 엄청난 흉측물

▲ 선대합동묘의 토관작업을 지시하고 있는 필자. 이 선대합동묘는 대구의 어느 중학교 교장의 선대합동묘를 경북 안동에 있는 문중산에 옮겨 조성하기 위해 작업했다.
매장에 따른 조상의 묘소는 개인의 가정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조상에 대한 효의 교육장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후손들이 선대의 묘소를 찾아가 성묘나 제사 등으로 예를 표하면서 자녀들에게 조상에 대한 충효사상의 교육은 물론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와 미풍양속을 유지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좁은 국토의 잠식이나 자연훼손 등과 같이 이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는 부분이 있다. 반면에 화장문화가 도입되면서 선대에 대한 증표가 없을 때에는 조상에 대한 예는 물론 가족이나 문중간의 인화를 도모할 기본을 잃게 된다.

 

화장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조상의 묘소를 찾아 벌초를 하거나 예를 갖추는 조상숭배가 쉽지 않은 측면 때문에 많이 한다. 또 앞서 설명한 동기감응론에 대한 이해와 사고의 부족으로 지기의 오묘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경제적 어려움과 현실 속에서 편리성만 내세워 이를 선호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게다가 정부정책도 한 몫 하고 있다. 자연의 지기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다보니 국토가 잠식되어 간다는 단순한 생각만으로 화장을 권유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일이 있다. 정부정책에 관여하는 사람은 물론 권력이나 명예를 가진 사람들의 이중적 처신에 관한 문제다. 만약 화장문화로 가려면 권력, 명예, 부를 가진 사람이 먼저 선조의 묘소를 개장하여 화장하거나 가족들을 화장하는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런 후 점차 확대하여 어느 누구나 똑같은 조건으로 화장한다면 평등한 조건이 되지 않겠는가?

 

스님들은 혈통계승이 없고, 또한 불교의 교리이기 때문에 화장문화를 제도화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후손이 없는 자나 미혼자도 화장하여 강이나 바다에 뿌려 묘의 증표를 만들지 않으면 부모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할 것이다. 증표를 만드는 일이 한을 달래는 데 다소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즈음은 수목장도 많이 하고 있다.

 

1990년대 말에 화장문화를 권장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개개인의 조상 유골을 화장하여 납골묘를 조성할 때 정보 보조금까지 지급한 적이 있다. 이 보조금은 2003년 12월31일 중단됐다. 국가시책인 화장문화에 많은 국민들이 뜻을 같이 하여 현재 납골당 또는 납골묘, 수목장으로 조상의 유골과 부모의 시신을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권력, 부, 명예를 가진 상류층에서는 이에 아랑곳 않고 매장문화를 선호하고 있는 것이 뚜렷한 현실이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전 국민이 화장을 하고 있다. 평범한 서민이나 국가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나 똑같이 화장을 한다. 이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그 중 풍수지리학적으로 살펴보면 섬나라인 일본은 우리나라와 같은 아름다운 산천이 없어 산천 생기가 응집된 곳, 즉 지기가 약하여 사람의 시신을 매장해 둘 생기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섬나라이다 보니 땅을 파고 구멍을 내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따라서 음택(묘지) 문화가 발달할 수 없어 불교의 교리인 화장문화를 도입하여 실제 생활에 적용하게 된다. 때문에 조상의 유골을 모두 화장하여 납골당에 조그마한 위폐를 만들어 모시게 되는 문화를 가진 민족이다. 우리나라와 본질적으로 다른 환경의 차이에 의해서 생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태양에너지를 이용한 양택풍수(살아있는 자에게 적용하는 풍수)를 많이 연구하여 삶의 지혜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지기가 충만한 자연의 축복을 받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이웃나라가 우리보다 선진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를 무작정 뒤따르려고 하는 것은 우리 고유 문화와도 맞지 않으며, 풍수지리학을 전혀 모르는 무지의 소치인 것이다.

 

화장문화를 처음 도입할 때 매장문화의 단점으로 국토잠식과 자연훼손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으나, 실제 현장에 나가보면 돌로 지은 납골당 또는 납골묘는 멀지 않은 미래에 큰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후손들이 관리를 잘 하고 있을 때는 큰 문제점이 없겠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후손이 돌보지 않을 때 대리석 납골묘나 가족묘의 돌집은 아름다운 자연 산천에 엄청난 흉측물로 남게 된다. 누군가에 의해 처리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산천의 오염은 물론 산천을 더 훼손하게 되는 것이다.

▲ 선대합동묘 토관작업. / 선대합동묘 토관작업과정을 지켜보는 제자들.
그러나 매장문화로 인한 묘지는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매장문화로 인한 동기감응에 대한 이론이 오랜 세월동안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전해져 내려오는 반면 오늘날에 이르러 화장문화를 도입하면서 확실한 근거도 없고 증명해본 사람도 없으면서 화장을 해도 10~20% 정도의 기는 살아 있으므로 조금은 동기감응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풍수지리학은 그냥 막연한 생각과 추측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매장된 지 백 년이 넘은 유골 한 조각은 DNA로 확인할 수 있어 누구의 선조 유골인지 알 수 있지만, 화장으로 인한 유골은 화장되는 순간부터 DNA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론 망인이 매장이나 화장에 대한 무지에 의해 지나치는 말로 “내가 죽으면 화장해라”고 말한 것을 마치 유언이라는 핑계로 화장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진정 조상을 편안히 잘 모시기 위한 방법일까? 아니면 후손이 자신의 편안함, 즉 벌초나 조상 묘 관리에 대한 부담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화장을 택하는 것이 아닌가를 냉철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피치 못할 이유로 조상의 유골을 화장한다면 화장한 유골을 구태여 항아리에 넣어서 기도 통하지 않는 대리석에 안치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화장한 유골 가루를 한 그루의 나무 밑에 뿌리거나 묻어 주는 것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데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수목장이라는 것이다.

 

풍수지리 강의 도중에 많은 분들이 하는 질문 중 하나가 “조상의 유골을 화장하면 매장문화의 단점인 흉지에 모셔 놓은 것 보다는 좋은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말은 맞을지 모르지만 “지자(知者)는 지(知)요, 부지자(不知者)는 부지(不知)”라는 말을 이해한다면 조상의 유골을 함부로 화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진 훌륭한 집안에서는 지자에 해당되어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 선대합동묘의 내부도.
옛 고전에 조상의 유골을 명당(좋은 곳)에 모시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 첫째가 망인 본인이 살아 있는 동안 선한 일을 많이 하고, 둘째 그 자손은 효심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위 두 가지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추어졌을 때 정심으로 땅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풍수지관을 만나야 한다고 한다.

 

천기는 아무에게나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명당은 돈만 있다고 해서 구해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풍수지리학 경전에서 ‘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적선지가 필유여경, 적불선지가 필유여앙)’이라 했다. 즉, 적선을 많이 하는 가정에는 복을 주고, 선을 쌓지 않는 가정에는 불행을 가져다준다고 하여 윤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선을 베푼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 서로에게 선을 베풀면서 살아가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화장 땐 수목장이 나을 듯

 

지금까지 설명한 매장문화와 화장문화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선대합동묘에 대해서 알아보자. 선조합동묘는 중국에서 활용한 장법 중 하나였다. 이를 연구 개발한 방법으로 하나의 묘 속에 수십 구를 안장하는 장법이다. 때문에 조상의 유골을 화장하지 않으면서 한 묘소 내에 여러 분의 조상 유골을 동시에 모실 수 있는 장법이다. 선조합동묘의 내부는 사진처럼 가로 30cm×세로 40cm의 토관을 별도로 만들어 조상 한 분 한 분의 유골을 각각 안장시킨다. 잘 이해하고 활용한다면 화장문화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중국 진나라 곽박의 장서 금낭경(金囊經)에는 ‘葬者乘生氣也면 同氣感應이라’(장자승생기야면 동기감응이라)하여 사자는 정기를 승하여야 자손에게 그 기가 감응되어 번창함을 강조했다.

 

우리나라 풍수비조라 할 수 있는 도선국사는 ‘통맥풍수법에서 길지에 모신 조상 묘소가 후손에게 미치는 영향은 몇 십대까지 친자반응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실증적으로 입증되고 있으며, 현장 답사를 통해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보다 과학적인 풍수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적어도 몇 대 내에 한 자리 정도만이라도 명당에 선조의 유골을 모시게 되면 지기의 힘으로 가운이 이어져 간다고 예부터 전해오고 있는 건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례(家禮)를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고조 묘까지는 방안 제사로 모시고, 그 후 5대조의 현조부터는 시제로 모셔오고 있다. 조상을 모신 이후 동기감응에 따른 그 지기는 후손이 가까울수록 영향이 크며, 세대가 멀어질수록 영향력도 점차 감소된다. 그러나 실제 나라에 큰일을 하시는 분들의 선산을 찾아 풍수지리학적으로 살펴보면 그 보다 훨씬 윗대 조상분이 모셔져 있는 묘소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때문에 세상을 떠난 분의 유골은 물론 몇 대가 지난 조상의 유골을 함부로 화장이나 기타 방법으로 처리할 것이 아니고 문중세장묘(선대합동묘)에 모셔 시향(時享)을 한다면 후손들의 효사상의 교육장과 문중화목의 장으로 활용될 것이다. 아울러 무연고 묘는 별도로 무연총(無緣塚)을 조성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정책적으로 봉안함으로써 국토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음은 물론 개인의 조상숭배에도 도움이 되어 국민들의 정서를 순후케 함으로써 국가적 차원에서도 큰 성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선조합동묘를 조성하는 현장작업을 해본 결과 풍수를 하는 분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로부터 타당성과 합당성에 상당한 동감을 얻고 있다. 선조 묘에 대한 벌초와 성묘 과정에서 보여주듯이 묘지 난에 처해있는 오늘날 매장문화는 우리 모두의 중대한 관심사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곳에서 이어온 오랜 전통의 매장(묘지)문화에 대한 정서를 하루아침에 바꾸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는 자연의 산천이 아름다워 어느 나라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충만하고 오묘한 지령을 가진 나라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자연의 축복이 주어진 지기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여 천혜의 지기를 헛되지 않도록 값있게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과 연구를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국토의 훼손을 막고 나아가 개인의 발전은 물론 국가 발전에도 큰 기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과학풍수] 남원의 수호신 거북바위와 명당

 백두대간 따라 좌청룡과 우백호로 나뉜 장풍 잘 된 길지

 

이번 호는 풍수적 답사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세상에 묘한 인연이라 할 수 있는 필자와 같은 성씨 문중은 물론 같은 세(世)로 이름마저 동일한 남원문화재연구학회를 운영하고 있는 분의 초청으로 현장을 답사하게 되었다.

전라북도 남원시는 예로부터 충효(忠孝)와 절의(節義)의 고장이라 한다. 남원에 대한 풍수적 고찰에 대해 옛 문헌을 참고하여 계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에 옥룡자 도선국사가 ‘남원의 지세를 살펴보고는 동쪽의 요천(蓼川)과 서쪽의 율천(聿川)에 의해 둘러싸여 남원성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배의 형세를 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남원의 주산은 원래 백공산(百工山)이며, 서북쪽의 교룡산(蛟龍山)은 객산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개발로 인해 본래 주산인 백공산은 학교 자리로 내어주고 사라지고 없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볼 때 주산보다 안산이 높으면, 이는 주인보다 노복(奴僕) 힘이 더 강함을 의미한다. 이곳 남원은 주산보다 주변 사격이 더 높은 지세를 가지고 있다. 서북쪽에 있는 교룡산(518m)은 주산인 백공산보다 높아 백호세가 강한 지형이다.

▲ 지형도에서 살펴본 명당을 사진으로 촬영해서 구체적으로 조망했다.

 

그에 비해 멀리 외청룡은 세가 좋으나 내청룡은 낮고 힘이 약하다. 그래서인지 도선국사는 남원에 대해 약한 주산의 기는 북돋워주고, 우측의 강한 백호세는 눌러야하니, 좌측 청룡쪽에 큰 사찰을 지어 기세가 조화되도록 했다고 한다. 이 사찰이 바로 남원에서 유명한 선원사(禪院寺)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볼 때 이것이 바로 비보풍수(裨補風水)에 의해 창건된 비보사찰(裨補寺刹)인 것이다.

남원의 안산은 덕음봉(德音峰·288.6m)으로 주변 사격에 비해 다소 높은 감이 있다. 남원시가지와 안산 사이에 요천이 유유히 휘어 감고 흐르고 있다. 요천 건너 안산에 남원시가지를 수호해 온 특이한 명당이 형성되어 있어, 이를 답사하여 풍수적으로 해석해 보았다.

우리나라 백두대간이 남원시 동쪽을 휘감으며 고리봉(1,304.5m)을 기봉하여, 정령치(1,172m)를 거쳐 만복대(1,433.4m)에 올라서 숨을 고른 뒤 다시 노고단을 거쳐 지리산 천황봉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남원시는 만복대를 올라서기 전 1,300m 고지에서 소간룡을 만들어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개장하여 만군(萬軍)을 거느리고 삼천분대(三千粉袋) 팔백연화(八百蓮花)를 이루어 기복(起伏), 과협(過峽), 위이(逶迤)로 행룡하면서 다름재(1,044m)를 힘차게 넘어간다. 다시 솔재(800.4m)와 숙성치를 거쳐 다시 한번 큰 과협을 한 후 329.3m봉을 기봉한다.

좋은 생기처는 좌우에서 감싸 안아

강한 기운의 용세(龍勢)를 멈출 수 없어 주변 보호사의 보호를 받으며 위이와 기복으로 행룡하면서 303m봉에 올라서 살기의 일부를 떨친 뒤 다시 행룡하여 덕음봉에 올라선다. 이곳에서 숨을 고르고 살기를 떨치고 순화된 기운을 품고 길지(명당)를 형성하기 위해 다시 굴곡한다.

위이하다가 좌우의 지룡을 벌려 좌측의 청룡은 관광단지가 조성되어 있는 곳을 휘어 감으며 행룡하고, 우측으로 벌린 용은 다시 분맥하여 한 지룡은 우측 백호를 형성하여 감싸고 행룡하다가 요천을 만나 멈추었다. 또 한 지룡은 비록 다소 짧은 백호의 보호를 받으며 멀리 백두대간에서부터 흘러온 생기(生氣)를 품고 행룡하여 내려오다가 남원시가지를 흐르는 요천을 만나 멈추게 된다.

▲ 덕음봉 아래 명당의 형성과 거북바위(A지점)를 지형도에서 살펴봤다. 백두대간이 뻗어오다 세 개의 줄기, 즉 맨 위쪽이 백호(지형도 c지점), 거북바위의 좌측이 청룡(지형도 b지점)으로 나눠져 중간에 있는 천심(지형도 a지점)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풍수고전 금낭경에서 ‘界水則止(계수즉지)’라는 말이 있다. 즉 생기를 품고 행룡하던 용이 물의 경계를 만나면 멈춘다는 이야기다. 덕음봉에서 생기를 품고 흘러오던 용이 물을 만나 생기를 멈추면서 자연적으로 거대한 거북바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지형도상 A지점). 그러므로 이 거북바위는 풍수적으로 볼 때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우연인지는 모르나 이곳 바위에 천문학이나 풍수와 관련이 있는 별자리(북두칠성으로 추정)가 천공되어 있어 과거의 역사를 이해하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 용맥이 천심하여 행룡하다가 용진처(龍盡處)에 이르러 생기가 뭉쳐진 곳에 거대한 거북이 형상으로 바위가 놓여 있다.

강한 기운이 여기서 멈추지 못하고 거북바위 아래로, 지금은 도로확장으로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거북이 알 형태의 바위들(생기의 용출현상)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그 아래로 물길이 흐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산기가 강하면 석맥(石脈)을 통해 물을 건너서 기(氣)가 이어진다는 붕홍(崩洪)의 원리로 볼 때 이곳 역시 여기서 끝나지 않고 춘향교 아래에서 거대한 바위가 형성되어(지금도 현장에서 볼 수 있음) 요천을 건너가 광한루 및 남원시가지를 통과해 교룡산까지 생기가 이어져 남원 시가지의 대명당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풍수지리학에서 ‘氣乘風則散(기승풍즉산)’이라 하여, 기는 바람에 의해 흩어지기 때문에 좋은 생기처는 좌우에서 감싸고 있게 된다. 만약 어느 한 쪽에 용맥이 없거나 약하게 감싸고 있으면 대신 물이 환포하게 된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다. 사람도 중요한 것은 양손으로 감싸안는 것과 같이 자연의 원리에 따른 인간의 본능인 것이다.

이곳 거북바위를 중심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팔각정에서 거북바위의 좌측 청룡(지형도 b지점)이 아주 순하고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높이로 포근하게 감싸고 있으며, 팔각정 아래에서 천심(穿心·지형도 a지점)하여 우측으로 백호(지형도 c지점)를 형성하였으나 거북바위를 완전히 감싸안아 주지 못한 것이 풍수적으로 다소 단점이라 할 수 있다.

▲ (왼쪽)필자를 초청해 남원의 명당을 함께 살펴본 남원문화재연구학회 회원들./(오른쪽)청룡을 받치고 있는 용의 모습을 한 요석.

 

그러나 묘하게도 시가지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요천이 거북바위 우측을 감싸고 유유히 흐르고 있다. 풍수에서 혈장의 보호사인 청룡이나 백호 중 어느 한 쪽이 부족하거나 없을 때 물이 부족한 쪽을 감싸고 있으면 이를 물 백호 또는 물 청룡이라 한다. 이는 혈장의 기가 설기되지 않도록 하는 데 충분하다. 이곳이 바로 그러한 곳이다. 자연의 이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것을 볼 때 풍수지리학은 자연의 이치에 따른 과학적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길지에는 좌우, 청룡 백호를 지탱하여 받쳐주는 지룡이나 암석이 있다. 이를 풍수학에서는 요석(曜石)이라 부른다. 거북바위를 감싸고 있는 청룡 자락에는 거대한 요석이 있다. 이 요석이 마치 기이한 용의 형상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나 풍화작용에 의한 훼손이 아쉽다.

옛 선사들에 의해 풍수지리학에서 지세의 기를 제압하거나 화기를 제압하기 위한 것으로 많이 등장하는 상징적 동물에는 호랑이, 사자, 해태, 거북이 등이 있다. 특히 화재억재의 비보풍수로 해태상이나 거북이를 사용한 예는 우리나라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풍수지리학 상 흉기를 억제하기 위한 노력의 흔적으로 서울의 광화문 앞에 놓여진 해태상, 과거 대구부(大邱府)의 진산(鎭山)이었던 연귀산(連龜山)에 남두북미(南頭北尾)로 북쪽의 산과 지맥이 통하고 남쪽 앞산의 화기를 억제하기 위해 거북바위를 만들어 놓아 화기를 억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연귀산, 고려 초기에 충청도 청안현(淸安縣)이 건읍(建邑)될 당시 남동쪽에 우뚝 솟은 속리산의 화기를 억제하기 위해 청안읍 남쪽 산에 절을 창건하여 그 이름을 구석사(龜石寺)라 붙이고 그 산명을 좌구산(座龜山)이라 붙인 것 등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거북이는 장수의 상징이며, 수신(水神)의 기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 (왼쪽)풍수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는 북두칠성 모양을 띤 거북이 형태의 바위와 천공상태./(오른쪽)밑에서 바라 본 거북이바위.
 
기이한 용 형상 요석이 거북바위 받쳐

남원에서도 광한루 내 누각 아래 오른쪽에 있는 석상은 역시 수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남원시의 동남방에 위치한 지리산쪽에서 불어오는 동남풍과 그 방위에서 흘러오는 큰 홍수로부터의 재앙을 벗어나려고 하는 비보풍수 차원에서 놓은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남원의 덕음산 아래에서 발견된 자연적인 거북상은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놓인 것이 아니라 바로 자연의 이치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남원시에서는 개발의 논리에만 현혹될 것이 아니라 남원시의 장래를 위하고 남원시민들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라도 잘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계획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덕음산 아래 현재 남원관광단지가 조성되어 있는 이곳은 풍수지리학에서 말하는 혈의 사상(四象·窩 와, 鉗 겸, 乳 유, 突 돌) 중에서 전형적인 와혈지(窩穴地·소쿠리 터)에 해당하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중심 용맥인 백두대간을 따라 분맥하여 과협과 기복으로 행룡하면서 생기가 뭉쳐진 풍수적 길지로, 장풍이 잘된 길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러나 태조산격인 지리산까지의 용맥을 모두 답사하지 못해 보다 정확한 해석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풍수적인 길지는 나라 시설이나 군사 관련 시설로 많이 활용되어 왔음을 전국의 유명지 답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곳도 역시 과거 백제시대엔 중요 물자보관 및 보급처로, 또 6.25 동란 때에는 인민군 1개 사단이 점령하기도 했던 곳이다. 청룡 줄기에 있는 요석 바로 옆에는 아직도 인민군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반공호가 잘 보존되어 있다.
[과학풍수] 큰 인물 나오는 '용의 땅'은 어딘가?

용세론(龍勢論) 알려면 조종(祖宗)부터 파악해야…대혈지가 명당

 

풍수지리학에서는 산을 용이라 부른다. 태조산으로부터 혈장(생기처인 혈을 만든 마당)까지 산이 행룡하여 내려오는 용맥의 모습이 삼천분대 팔백연화처럼 천형만상을 이루면서 크거나 적게 기복(起伏), 순역(順逆)하면서 숨었다가 나타나고(隱現), 또 산줄기의 체단이 지척간이라도 움직임이 있어 그 형태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용의 몸짓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말이다.


▲ 주산과 혈장 사이 과협처에 자리 잡은 미원그룹 조양임씨 선산.

 

풍수지리학에서 중요한 용을 찾으려면 반드시 조종(祖宗)을 찾아야하며, 이를 알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또 조종(祖宗·태조산과 소조산)을 나무의 뿌리와 물의 근원에 비유하여 나무의 뿌리가 크면 가지가 많고, 물의 근원이 깊으면 물줄기가 장원한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용의 조종을 알게 되면 그 용의 원근장단과 기의 경중 및 역량의 대소를 이에 준하여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용을 찾을 때는 먼저 용의 조종을 살펴야 한다.

 

용 속에는 맥이 있다. 용 속에 감추어진 산의 정기인 지기(地氣)가 유행하는 것을 맥이라 한다. 용과 맥은 외면상으로는 한 가지로 보인다. 그러나 용을 보고 맥의 선악은 알 수 있으나 맥을 살펴 용의 길흉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용은 형태가 보이지만 맥은 용 내부에 지기가 은밀하게 흘러 다니고 있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맥을 찾기가 쉽지 않다. 용이 있어야 맥이 있고 만약 맥이 없으면 죽은 사체와 같은 용이다.

 

사람의 몸에서도 맥을 통해 진행하는 혈의 이치가 겉으로 몸에 나타나 그 사람의 귀(貴)와 천(賤)함은 물론 그 사람의 건강여부를 판단할 수 있듯이 풍수지리에 있어 맥도 지중에서 용의 생기가 지표면 부근에 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어 겉으로 나타난 용맥의 형세를 보고 길흉과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의사가 사람의 맥을 통해 건강을 보살피는데, 실수하게 되면 환자 본인에게만 영향이 미치지만 풍수지리학을 하는 사람이 만약 용의 맥을 잘못 살펴 생룡(生龍)이 아닌 사룡(死龍)에 어느 집안의 선조 묘를 쓰거나 사람이 살아야 할 집을 짓도록 한다면 현재의 집안 식구들에게는 물론 미래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더욱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풍수지리학은 중요하며 과학적 학문이므로 깊은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용을 살필 때 나무에 많이 비유하여 적용하게 된다. 나무의 뿌리에서 가운데의 바른 것이 줄기다. 이 줄기를 풍수지리에서 간룡(幹龍)이라 하고, 나무줄기에서 옆으로 뻗은 가지를 지룡(支龍)이라 한다. 즉, 지룡은 간룡의 좌우에 있는 것이다.

 

간룡은 정상이 단정한 것이 많고, 지룡은 정상이 비스듬히 비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또 간룡은 좌우양변에서 호위를 받으며 나아가거나 머물면서 여러 용(支龍)들이 시위(侍衛)로 따른다.

▲ 보통 무슨 고개라고 부르는 과협은 생기를 한 곳에 모으는 역할을 하는 혈의 장소로 풍수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용의 형태는 다양…평지에도 있어

대체적으로 용맥의 장단에 따라 장룡에는 혈이 크게 만들어지고, 단룡(短龍)에는 혈이 작다는 것이 이치상으로는 타당하지만, 장룡은 대간룡(大幹龍)이고, 작은 것은 소간룡(小幹龍)이므로 길지를 찾을 때에는 혈의 결지여부를 찾는 것이지 용의 장단원근에 의함이 아니다.

 

진룡(眞龍)에 진혈이 있고, 가룡(假龍)에는 가혈이 있는 법이므로, 진룡이란 조종이 활동적이고 성봉(成峰)이 수려하면서 속기(束氣), 기복(起伏), 과협(過峽), 박환(剝換), 지현굴곡(之玄屈曲)으로 행룡하다가 개장천심(開帳穿心)하여 입수(入首)에 이르러 혈증이 명백하고 원훈이 뚜렷하며, 안대 및 주변 사수(砂水)가 유정하고 수구(水口)가 잘 관쇄(關鎖)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또한 사람에 있어 앞과 뒤가 있듯이 용에도 앞과 뒤가 있다. 용의 앞면은 광채가 있고 수려하여 보기가 좋고, 정이 있어 보이는 곳으로 길지가 있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용의 후면은 자연이 높고 파쇄되어 거칠고 추하고 아름답지 못하며, 마치 사람이 등을 돌린 것과 같이 생동감이 없다. 이런 곳은 길지가 없는 곳이다. 풍수지리를 바로 알고 올바른 진혈처를 찾기 위해서는 용의 배면을 반드시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용은 지표에 융기한 산맥은 물론, 평지 또는 평야 가운데 돌기한 곳에도 존재한다. 즉, 용은 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지표의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고로 풍수지리에서 산이라 함은 고산준령은 물론 낮은 둔덕, 심지어는 한자 높이의 밭두렁까지 산으로 본다. 용이 만약 산에만 있다면 생기의 흐름은 산에만 있고 평지에는 없다는 결론이 된다.

 

산과 물은 음양의 조화로 ‘一寸高爲山이요 一寸低爲水’(일촌고위산, 일촌저위수)라 하여 땅의 높이가 한 치만 높아도 산이 되고, 한 치만 낮아도 물로 인정한다. 그러므로 땅의 높고 낮음에 있어 높은 곳은 산이요, 낮은 곳은 물로 봄으로써 지표에 약간의 높낮이가 있으면 산과 물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음양인 것이다.

 

용이 행룡할 때는 기복(起伏)을 반복하게 되는데, 솟은 성봉을 기(起)라 하고, 엎드린 모양(과협 또는 결인)을 복(伏)이라 한다. 기(起)한 곳에서는 개장하거나, 청룡과 백호가 되어 주룡과 혈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고, 복(伏)한 곳에서는 용을 따라 호종해온 물을 나누어 털고, 지기를 결속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용의 개장은 장막을 연다는 뜻이다. 즉 사람이 양 팔을 옆으로 뻗거나 새가 날개를 펴는 형태와 같이 용이 조종을 떠나 행룡하면서 양쪽으로 뻗어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때 용맥의 기가 모여 가운데로 뚫고 나아가는 것을 천심(穿心)이라 한다. 행룡하던 용이 봉만을 이루어 크게 좌우로 개장하여 천심한 용일수록 더 대귀룡(大貴龍)이다.

 

개장한 성봉의 봉만이 풍후하여 창고형을 이루면 대부격(大富格)이고, 천심한 용이 힘 있게 빠져나와 높고 빼어난 봉우리를 만들면 대귀격(大貴格)이라 했다.
비록 개장천심은 아닐지라도 용이 지현자형(之玄字形), 학슬(鶴膝·학의 무릎), 봉요(蜂腰·벌의 허리) 모양으로 행룡하면 길격이다.

 

산협처(山峽處)인 과협(過峽)은 산과 산을 잇는 산줄기 부분으로 마치 벌의 허리(蜂腰)나 학의 무릎(鶴膝)처럼 잘록한 부분을 가리킨다. 보통 무슨 고개라고 부르는 곳이다. 과협은 주룡이 행룡하면서 조악한 살기를 탈살하여 생기를 한 곳으로 모아 혈을 만드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과협처가 없으면 탈살을 하지 못하므로 올바른 생기를 공급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과협은 용과 맥, 그리고 기를 단단하게 묶어 놓은 곳이다. 과협을 보고 용맥의 길흉과 혈의 진가(眞假)를 가름하는 것이다.

 

결인(結咽)은 멀리 태조산에서부터 행룡하던 용이 혈을 만들기 직전에 최종적으로 산천의 정기(精氣=地氣)를 모아 묶고 건수(乾水)를 틀어주는 취속(聚束)를 말한다. 즉 주룡(主龍)의 최종적 변화현상으로 혈장 입수의 만두(巒頭) 바로 뒤에 용의 잘록한 부분이다. 마치 아름다운 미인의 목처럼 가늘고 부드럽고 깨끗하고 힘차면서 손상된 곳이 없어야 한다.

 

사람의 목과 같은 것으로 사람의 머리에서 하나로 좁게 오는 단맥과 같은 것이며, 과일에 비유하면 과일의 꼭지(果柄=과병)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만약 결인처가 파상되거나 지나치게 길면 속기가 되지 않아 생기를 혈장에 공급하지 못하므로 혈을 맺을 수 없다.

▲ 용이 기복을 반복하는 행룡의 대표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용에는 태조산, 중조산, 소조산으로 구분하고, 간룡과 지룡, 생룡과 사룡, 정룡과 방룡 등 다양하며, 길지를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태조산은 용의 근원지이며, 혈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고대(高大)하고 웅위(雄偉)하여 100여리를 뻗어 큰 것은 오악과 같고 작은 것은 한 골의 으뜸되는 산이고, 더 작은 산은 한 지방의 으뜸가는 산이다.

 

소조산은 일명 주산이다. 태조산을 떠난 용은 여러 지룡을 만들면서 행룡하다가 혈장을 만들기 2~3절 전에 우뚝 솟은 산을 말한다. 그러므로 혈장 가까이 있는 산으로 역시 고대하다. 만약 그 산의 분맥이 많아 혈장이 멀면 이것은 소조산이 아니고 주필산(駐   山·다리가 머무는 산)이라 한다. 소조산은 혈장이 있는 곳에서 불과 몇 절의 가까운 곳에 있다.

 

생기 모이는 산줄기 과협과 정기 모이는 결인
용을 나무에 비유하여 설명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용은 나무의 줄기에 해당하는 간룡과 가지에 해당하는 지룡으로 나눈다. 즉, 가운데 큰 줄기는 간룡, 옆으로 뻗은 가지는 지룡이다.

 

간룡은 다시 대간룡(간룡에서 간룡으로 행룡하는 것으로 줄기룡으로 이어져 있는 용)과 소간룡(간룡에서 지룡으로 행용하는 것으로 줄기룡에서 가지룡으로 이어지는 용)으로 나누고, 또 지룡은 다시 대지룡(지룡에서 간룡으로 행룡하는 것으로, 가지룡 중에서 줄기룡으로 이어지는 용)과 소지룡(지룡에서 지룡으로 행룡하는 것으로, 가지룡에서 가지룡으로 이어지는 용)으로 나눈다.

▲ 용의 본신을 둘러싸서 혈장까지 보호를 받으며 행룡하는 용이 바로 정룡이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합천의 어느 지형이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백두대간과 13정맥은 대간룡에 해당되며, 일부 소간룡에 해당하는 곳도 있다. 소간룡은 대간룡에서 분룡될 쯤 대성진을 정하여 일어난다. 그러므로 소간룡들은 대소의 차이만 있을 뿐 대간룡과 같은 것이다. 간룡이 행룡하면 주변에서 호종(護從)하는 용들이 많다. 즉, 용이 발원하여 행룡할 때 가운데 바른 것은 간룡이요, 좌우에 호종하는 용은 지룡인 것이다.

 

간룡은 큰 두 강을 가로지르는 형태로 행룡하는 용이므로, 물은 역수가 없이 용을 따라 흐르다가 마지막 혈을 결지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역수하여 혈을 감싸게 된다. 그러므로 군왕지지와 같은 대지는 간룡에서 혈이 만들어지며, 또한 특별시나 광역시와 같은 대도시도 간룡 아래에 형성되는 것이다. 지룡은 섬세하고 기복과 지현자형(之玄字形)으로 생동감이 있고 재주를 잘 부려 아름다운 룡이다.

 

모든 사물이 생과 사가 있듯이 용에도 생룡과 사룡으로 구분한다. 유기(有氣)면 생룡이요, 무기(無氣)면 사룡인데, 맥이 활동성이 없어 게으르고 느리고 곧게 쭉 빠져 나아가고, 기복(起伏)과 과협(過峽)이 없고, 결인(結咽)도 없어 죽은 미꾸라지와 같은 형상에서는 생기가 없으므로 모두 사룡이다(如死鰍死횄善而皆無生意也). 또한 거칠고 뻣뻣한 것도 모두 사룡이다.

 

지현자형으로 분개(分介)한 용은 왕성하여 생과 왕(旺)의 기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위에 흐르는 물과 사각이 옹호하면 생룡이다. 다시 말해 생룡은 산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한번 일어나고(起) 한번은 엎드리고(伏) 말이 달리듯, 새가 날갯짓 하듯, 고기가 살아 움직이고 뛰어오르듯 하면서 단정한 혈을 품고 있다. 이에 조응하는 청룡 백호 안산이 분명하면 생기가 모인 생룡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울어지고 비틀어지거나 답답하게 막히고 취약하고 파쇄되면 사룡이다. 그러므로 용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풍후하여 국세가 아름다운 생룡에서는 귀한 혈을 맺게 될 것이고, 천박하고 경직된 사룡에서는 기운이 쇠잔하여 옳은 혈을 결지할 수가 없다. ‘지리에서 땅을 보는 일은 모두 다 용이 주(主)이고, 다음이 혈(穴)이며, 사(砂)와 수(水)가 그 다음’이라고 했다.

 

또한 정룡(正龍)은 곧고 올바르게 행룡하는 줄기로서, 용의 본신을 둘러싸서 혈장까지 보호를 받으며 행룡하는 용이 바로 정룡인 것이다. 앞서 설명한 간룡과 비슷한 의미로 보면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대개 정룡에서 큰 인물이 배출되는 대혈지가 있다.

 

방룡(傍龍)은 정룡의 조건에 벗어나고 편벽되게 기울어진 용을 말한다. 가끔 명당이 형성되기도 하지만 방룡에 비해서는 용의 역량이 많이 적다. 그러므로 큰 인물이 배출되지 않으며 동기감응에 따른 발복도 짧다. 대체적으로 정룡에 종속적이 되므로 앞서 설명한 지룡과 비슷하게 표현된다. 일반적으로 방룡은 좋은 생기가 뭉쳐진 혈장의 안산 역할을 하거나 수구의 한문(햵旱門)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과학풍수] 지형만 봐도 태어날 인물 보인다

청룡 머리가 안산이면 장자발복…백호가 머리 들면 재살(災殺)로 흉

 

풍수지리학에서 말하는 4개의 신이란 뜻의 사신사(四神砂)는 주작(朱雀), 현무(玄武), 청룡(靑龍), 백호(白虎)를 말한다. 이 사신사는 천성의 28성수 배열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문도에 나타난 28성수와 사신사의 관계를 살펴보면, 중앙은 황제가 자미원을 관장하고, 동서남북 4곳에 각각 일곱 별자리를 배정하여 그 별을 다스리는 이름을 붙였다.

동방의 일곱 별자리의 형상은 용과 같으며, 동방을 주재하는 장소를 동궁이라 한다. 동방에는 창룡(蒼龍)으로 형상이 표현되는 청제(靑帝)가 일곱 별자리를 관장하고 있다. 이런 방법으로 남방에는 주작 형상이 표현되는 적제(赤帝)가 남방의 일곱 별자리를 관장하고 있고, 서방에는 백호로 형상되는 백제(白帝)가 서방의 일곱 별자리를 관장하고 있다. 북방은 현무로 형상되는 흑제(黑帝)가 북방의 일곱 별자리를 관장하고 있다.

이처럼 각 방위를 주재하는 임금의 이름을 주역에서 말하는 각 방위의 색상을 적용하여 각각 붙인 이름이다. 즉, 목은 동방으로 푸른 색이기 때문에 청자(靑字), 남방은 붉은 색이므로 적자(赤字), 서방은 흰 색이므로 백자(白字), 북방은 검은 색이므로 흑자(黑字), 가운데는 토의 황색이므로 황자(黃字)를 각각 붙인 것이다.

하늘의 천성과 땅의 지형은 같다고 한다. 그러므로 땅에도 위와 같은 법을 적용하여 자오묘유(子午卯酉)를 제왕의 자리로 정하여 판단한다. 하늘에 천성이 황제를 중심으로 앞뒤좌우를 둘러싸 보호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땅에서는 앞뒤좌우에서 혈을 둘러싸고 있다.

태조산에서부터 출발한 용이 기복굴곡, 과협, 질단(跌斷), 위이(     ), 지현자형(之玄字形)을 거듭하면서 행룡하는 도중에 ‘계수즉지(界水則止)’, 즉 ‘물을 만나면 용은 멈춘다’는 원리에서 마치 호박덩굴에 호박이 달리듯이 혈을 결지하게 된다. 이때 각종 살로부터 혈을 보호하기 위해 혈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있는데, 이를 풍수지리학에서는 사격(砂格)이라 하고, 용혈(龍穴)의 보호사로 노복에 해당한다. 용혈의 부족을 보완해주는 역할은 물론 악살로부터 방어를 담당하게 된다. 이러한 사격을 기준으로 용혈에 대한 길흉을 판단한다.

이러한 사격 중 혈을 중심으로 혈 뒤에 있는 봉우리를 현무(玄武)라고 한다. 일명 주산(主山)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현무와 주산은 별개다. 이는 28성수 중 북방칠수의 이름이다.


▲ (위)안동 풍천면 가일 마을 전경을 바라보며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의 사신사를 살펴봤다. (좌)경북도청 이전 예정지의 사신사. (우)충장공 김덕령 묘소의 조·안산. 일명 주작으로 불린다.

 

조산은 안산 너머 수려한 산, 일명 주작

도읍이나 마을, 또는 묘지 뒤의 현무와 주산의 형태를 보고 그 지방의 인물배출과 부귀, 후손들의 역량을 판단한다.

좌우에는 청룡과 백호가 있다. 청룡은 혈장의 좌측을 감싸 보호하는 산맥이다. 사람의 왼팔에 해당하는 것이며, 형체는 용과 같은 형태이면 좋은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보지는 못했지만 관념적으로 용은 살아 꿈틀거리는 것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혈을 중심으로 좌측의 산도 위이, 굴곡, 기복, 과협을 많이 한 것을 훌륭하게 본다.

백호는 혈장의 우측을 호위(護衛)하는 용맥이다. 사람의 경우 오른팔에 해당한다. 그 형체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과 같으면 길하다. 용용호호(龍龍虎虎)가 없어도 길할 수 있고, 청룡백호(靑龍白虎)가 있어도 흉할 수 있다. 무엇보다 혈장(穴場)이 적합하지 않으면 청룡백호가 아무리 좋아도 허화(虛花)일 뿐이다.

또한 청룡백호는 본신룡(本身龍)에서 좌우로 출각(出脚)한 것도 있고, 외산(外山)에서 생래(生來)하여 형성된 것도 있다. 이 중 본신용호(本身龍虎)를 더 좋은 것으로 보고, 외산용호(外山龍虎)로 형성된 것이 다음이지만 첩신근혈(貼身近穴) 되어야 길하다.

이처럼 청룡과 백호는 혈장을 호위하여 보호하고 있는 산인데, 좌우의 청룡 백호가 읍양(揖讓)하고 고저가 상칭(相稱)하면 길하고, 힘이 너무 강하고 너무 높아 내룡(來龍)과 혈을 압(押)하거나 능멸하는 것은 흉한 청룡 백호로 취급된다. 특히 서로 쟁투, 첨사(尖射), 파쇄(破碎), 달아나고(飛走), 사비직장(斜飛直長), 고압저함(高壓低陷), 단요절비(斷腰折臂), 조악단축하면 흉하다.

이러한 청룡과 백호를 보고 자손의 수가 많고 적음과 흥망성쇠를 가름한다. 청룡의 머리가 안산 역할을 하면 장자가 발복하고, 백호의 머리가 혈장 앞에 먼저 이르러 안산을 이루면 지손(支孫)이 발복하고, 청룡이 머리를 높게 들면 관성(官星)이라 하여 길로 보지만, 백호가 머리를 들면 재살(災殺)이 되어 흉하다.

안·조산(案·朝山)은 혈장 앞 가까이에 있는 산이고, 조산은 안산 너머 있는 수려한 산을 호칭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명 주작(朱雀)이라 하며, 혈장 앞을 마치 만마(萬馬)가 달리는 듯 삼천분대 팔백연화처럼 펼쳐져 있으면서 혈을 감싸고 있는 것이 좋다.
▲ 충장공 김덕령 묘소의 청룡. / 충장공 김덕령 묘소의 외백호.

 

사정사강 합행 맥 많으면 제왕·장상 태어나

 

이러한 사신사에 대해 방위적으로 논하여 길흉을 가름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의 원은 360도이다. 360도를 24방위로 나누어 오행을 부여하여 적용하게 된다.

건(乾), 곤(坤), 간(艮), 손(巽)은 성수오행으로, 목성 기운을 가진 문성의 별이다. 이를 사태(四胎) 또는 사유(四維)라 하고, 인륜의 도덕과 도를 다루는 별자리이며 모든 법령을 주관한다. 고로 건곤간손(乾坤艮巽)을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라 하여 4주천(柱天)이라 한다. 지도(地道)에서는 천도행룡(天道行龍)이라 하여 성인과 문성을 관장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 사태(四胎)가 혈을 둘러싸고 있으면 승상지위(丞相之位), 영웅(英雄), 성현다출(聖賢多出), 문천무만야(文千武萬也), 왕자(王子)의 사전출(師傳出) 등 귀인과 우두머리가 태어나는 군왕지지 같은 큰 인물이 태어난다.

▶인(寅), 신(申), 사(巳), 해(亥)는 성수오행으로 수성(水星)의 기운을 가진 별자리다. 수성은 만물을 잉태하는 기운을 가져 생명을 관장하는 별이다. 이 별을 사포(四胞), 사생(四生)이라 하며, 만백성의 어머니인 황후나 왕비의 별자리라고 본다. 이 사포로 사격이 형성되어 있으면 직간지신(直諫之臣), 왕자사전(王子師傳) 부절(不絶)하며, 특히 자손이 많이 태어난다.

▶자(子), 오(午), 묘(卯), 유(酉)는 사정(四正)이며 성수오행으로 화성(火星)이다. 하늘을 주관하는 28수의 우두머리이며 4방위를 각각 주제하는 제왕의 별자리다. 사정(四正)으로 된 사격은 천하명장불절야(天下名將不絶也), 장구지지(長久之地)로, 즉 절터로 영구지지(永久之地)다.

▶갑(甲), 경(庚), 병(丙), 임(壬)은 성수오행으로 역시 화성이며, 사순(四順) 또는 사신(四神)이다. 문필의 문성으로 성인의 가르침과 제왕의 좌측에서 문신으로 제왕을 보좌하고 따른다. 공후대대불절야(公侯代代不絶也)로 문관이 태어난다. 특히 사정(四正)과 사순(四順)은 세상에 빛을 주는 화성이므로 일월행룡(日月行龍)이라 한다.

▶을(乙), 신(辛), 정(丁), 계(癸)는 사강(四强)이며 성수오행은 토성이다. 하늘의 무성(武星)으로 병사를 관장하고, 28수의 우두머리인 사정을 우측에서 무장으로 보좌하는 장군의 별이다. 이 사강을 인도행룡이라 한다. 외방지신(外方之臣), 수령방백불절야(守令方伯不絶也)로 무관이 많이 태어난다.

▶진(辰), 술(戌), 축(丑), 미(未)는 성수오행으로 금성(金星)이며, 사고장(四庫藏) 또는 사금(四金)이라 한다. 황제의 모든 재산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창고로 모든 재물을 관장하는 별이다. 역시 지도(地道)에서도 재물을 관장한다. 제왕지위(帝王之位), 부귀장상(富貴將相), 국모다출야(國母多出也)로 부(富)를 가져다준다.

4방의 4격 중에서 3개 방의 사격이 길사에 조응하여도 위에 설명한 것에 영향을 받은 인물이 태어나게 되고, 아울러 현재 있는 자손에게도 잠재력이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최관(催官)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신사는 음택(묘지)풍수는 물론 양택(주거)풍수에 모두 적용된다. 그러므로 어떤 도읍이나 마을에서 어떤 인물이 태어날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읍성의 조룡(祖龍·뒤에서 행룡해 오는 산)이 사강(四强·즉 자오묘유 子午卯酉)으로 행룡하여 읍성을 이루면 그 읍성 내에는 무인이 흥하고 문인은 쇠하고, 사순(四順·갑경병임 甲庚丙壬)으로 행룡하면 문인은 흥하고 무인은 쇠한다.

사고(四庫·즉 진술축미 辰戌丑未)의 국으로 터가 형성되면 평민이 흥하고 양반이 쇠퇴하며, 사순(四順)의 기가 형성된 터에는 양반이 흥하고 평민은 쇠한다. 사정(四正·자오묘유 子午卯酉)의 국에서는 양반과 평민이 함께 흥한다. 이것은 역시 천리다.

또한 후룡에 사태(四胎·건곤간손 乾坤艮巽), 사포(四胞·인신사해 寅申巳亥)의 맥이 많이 솟으면 현인이 태어나고, 사정사강(四正四强)이 합행하는 맥이 많으면 제왕과 장상이 태어난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다. 우주의 천성에 의해 땅에는 지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때문에 아름다운 산천을 개발의 논리로 마구 훼손하는 것은 그 지방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예를 들면 처음 마을이 들어 형성되어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 사회나 국가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는데, 혹 교통의 편리성이나 개발의 논리에 밀려 훼손되어 흉화는 물론 악인이 태어나 사회적인 문제를 유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을 책임지고 계시는 분들과 그 주변 분들의 자연에 대한 이해력 정도에 따라 그 지역 주민들의 길흉은 물론 나아가 국가의 발전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다는 것을 첨언해 본다. 도심에 짓고 있는 고층건물과 아파트 건축물에도 사신사의 작용이 이루어짐을 안다면 처음부터 도시 설계를 잘 만들고 그에 따른 기준을 적용해 나간다면 먼 미래의 후손들에게도 좋은 기운을 남겨주는 결론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과학풍수] 청도 김씨 중시조 묘는 전형적 와혈 명당 

 성지대사가 점혈한 명당을 찾아서…묘역 조성과정서 현릉 손상 안타까워

 

성지(聖智·?~1623)대사에 대한 자세한 문헌은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경북 군위군청에서 보존하고 있는 자료와 역사적인 참고 자료에 의하면 그는 경북 군위군 소보면 봉황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남양 홍씨다. 용궁현감을 지낸 홍석귀의 서얼(庶孼·첩의 자식)이다. 15세에 경북 군위군 소보면에 지금은 없어진 월영사에 입산수도하여 출가했다가 훗날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대가가 된 분이다.


설화에 의하면 홍성지가 서당을 다니는 길에 여자로 변장한 여우가 매일 밤 나타나 구슬을 자기 입에 넣었다가 성지 입에 넣었다가 하는 것 때문에 성지가 쇠약해지는 것을 알아차린 후 훈장이 “구슬을 입에 넣어 주면 삼켜 버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내려다보라”고 일러 주었다. 다음 날 여자로 변장한 여우가 나타나 입에 넣어주는 구슬을 삼키고는 하늘을 쳐다보는 것을 잊고 땅만 쳐다보았기 때문에 지리에 도사가 되어 명풍수가 되었다고 한다.


성지대사는 두뇌가 명석하고 뛰어난 추진력을 가진 분으로, 임진왜란 후에 우리나라 궁궐을 복원하신 분으로도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왜병들에 의해 궁궐이 모두 불타 버린 뒤 광해군은 성지대사에게 궁궐을 복원하도록 명했다. 이것은 사전에 성지대사가 명풍수로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때 성지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자리를 잡았다. 실학자이며 풍수지리에도 능숙한 박상의(朴尙義)와 김일룡(金馹龍), 그리고 서철(徐喆) 등을 지휘하여 궁궐을 재건했다. 그 궁궐이 바로 오늘날 서울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이다.


▲ 입수처에서 바라본 청도 김씨 중시죠 묘의 혈장 주변 청백과 파구, 물의 환포. 즉 조산과 안산의 전경.

그는 이처럼 나라에 큰일을 한 분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큰 인물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성지대사도 그 중의 한 분이었다. 성지대사는 인조반정 때 서인들에 의해 참수를 당했다.

이처럼 유명한 풍수인 성지대사가 점혈한 곳에 바로 대구 근교 청도 김씨 중시조가 모셔져 있다. 이번에 이곳을 답사했다. 청도 김씨 시조는 경북 청도읍 상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중시조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군 청천면에 소재하고 있다.


▲ 청도 김씨 중시조 묘 전경.
성지대사가 점혈한 이곳은 명혈지로 알려져 있고, 혈의 사상(四象)중에서 전형적인 와혈에 해당하는 곳이다. 혈의 형태를 와·겸·유·돌의 사상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가 있어 상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혈의 사상에서 와혈은 일명 ‘소쿠리터’ 또는 ‘소쿠리 명당‘이라 부르고 있으며, 마치 제비집과 같은 형태에 혈이 결작되는 것을 말한다.

 

와혈 중 변격에 해당하는 좌변와

 

바로 청도 김씨 중시조 묘는 혈의 사상 중에 와혈(窩穴)에 해당하는 곳이다. 와혈형 중에서도 특히 좌변와(左邊窩)에 해당하는 곳이다. 참고로 와혈 중 변격에 해당하는 좌변와와 우변와에 대한 형태를 그림으로 표시했다. <그림 1, 2 참조>

혈장을 답사하기 위해 아침 일찍 회원 두 분과 함께 목적지의 초입처 부근에 도착하여 먼저 원경을 살펴본 후 차량을 이용하여 초입처까지 진입했다.

 

항상 그러하듯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천신(天神)과 산신(山神)께 오늘도 명혈지를 찾아볼 수 있는 기운을 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리고 출발했다.

 

명혈지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다 보니 초입 길을 찾지 못해 산을 헤치며 한참을 걸어 어느 봉우리에 올라서서 한숨을 돌리며 주변 산세를 관망하는 도중 좀 멀리 보이기는 하지만 첫눈에 대혈지로 짐작되는 혈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명혈지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은 마음이었다. 또한 자연의 원리 및 이치에 따른 풍수지리 학문에 대한 옛 선사들의 현장 적용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소 동요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여 현장에 도착하니 오늘 답사하고자 했던 성지대사가 점혈한 곳임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대명당(穴地)으로 보였다.

 

혈장에 대한 상세한 관찰을 뒤로 하고 먼저 내룡을 살펴보기 위해 입수룡을 따라서 올라가면서 산세에 대해 회원에게 설명했다. 한참을 올랐을 때 어느덧 몸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주산에 해당하는 봉우리에 올라 땀을 식히며 주변을 관망하니 그야말로 과협, 질단(跌斷), 기복, 성봉(成峰)으로 삼천분대가 펼쳐져 있는 것 같고, 만마가 달리는 듯한 형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자연의 오묘함에 다시 한번 감탄과 겸허한 마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혈장으로 들어오는 용에 대해 살펴보니, 멀리 팔공산(1192.9m)에서 동남향으로 머리를 돌려 질단과 과협(過峽), 기복(起伏), 성봉을 거듭하며 인봉과 관봉을 거쳐 갓바위에서 낙맥하여 능성고개에서 크게 과협을 거쳐 힘차게 762.1m의 봉우리를 만든다. 여기서 개장하여 하나는 동쪽으로 행룡하여 무학산(574.5m)을 기봉하고, 또 하나는 남쪽으로 행룡하다가 솟은 봉우리가 환성산(811.3m)이다.

 

계속 남하하면서 설령에서 큰 과협을 거친 후 머리를 동남으로 방향을 바꿔 기복을 거치면서 행룡하다가 다시 개장하여 한 방향은 고려 태조 왕건과 인연이 많은 초래봉(635.7m)을 기봉하고, 한 방향은 계속 동남으로 달려 428m의 주산을 기봉한다. 나경을 이용하여 방위를 측정하니 해임(亥壬)으로 기봉(起峰)했다. 한숨을 돌린 용은 여기서 다시 개장하여 혈장의 외백호를 형성하고, 다른 한 용은 혈장의 외청룡을 형성하게 된다. 본룡은 술건(戌乾)에서 해임으로 3봉을 거치며 행룡하다가 자계(子癸)로 낙맥(落脈)하여 다시 힘 있는 용세로 기봉한다. 여기서 개장하여 좌우 청룡과 백호가 만들어져 혈장을 포근히 감싸주게 되고, 해임으로 천심하여 크게 낙맥한 자리에 전형적인 와혈 중에서 특히 좌측현릉이 혈장을 감싸주는 좌변와의 혈처를 결작한 곳에 청도 김씨 중시조의 묘역이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조성되어 있다.

 

현릉은 심장·가슴 보호하는 왼쪽 팔과 같아

사격을 살펴보면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적당한 거리와 높이로 각종 살로부터 혈장을 보호하고 있다. 또한 금성형의 원봉(圓峰)으로 되어 있어 후손들에게 부를 안겨다 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특히 청룡과 백호의 형체가 비슷할 뿐만 아니라 높이와 거리도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산중이지만 장풍(藏風)이 잘 갖추어진 곳이다.


▲ 혈장 뒤에서 바라본 파구와 백호.
안산은 중중첩첩하며 혈장을 조응하고 있지만 대도시와 인접해 있다 보니 이미 낮은 산은 개발이 되어 밭으로 변해 있어 다소 멀어 보인다. 공교롭게도 일기가 좋지 못해 사진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음이 안타깝다.

 

풍수지리에서 길지는 산진수회하고 환포장풍된 곳이라고 강조했다. 이곳을 두고 하는 말 같다. 역시 도안(道眼)이상의 눈을 가지신 분이 점혈한 곳이라 아니할 수 없을 정도로 풍수지리 이론에 합당한 자리이다.

▲ 와혈 중 왼쪽 팔이 혈장을 감싸고 있는 좌변와인 현릉과 백호 전경.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멀리서부터 질단, 과협, 기복, 개장, 위이 등으로 만군을 거느리고 호위를 받으며 내용해 오다가 멈춘 곳이다. 명당수는 지현굴곡으로 흐르다가 청룡 백호가의교쇄로 한문(햵旱 門)했으며, 외명당에는 금호강이 좌수우도(左水右到)로 혈장을 둥글게 환포하여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이번 답사지에 해당하는 문중에서는 선조가 이처럼 좋은 길지에 모셔져 있으므로, 지금까지 가문의 번영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며, 또한 잘 보존해야 된다는 것도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답사를 통해 현장에서 풍수지리학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한 혈장 내에 여러 조상님을 모시다 보니 혈장에서 보존되어야 하는 혈증들을 많이 훼손시켰다. 특히 와혈에서는 현릉을 손상시켜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초(莎草) 내지는 묘역 조성을 하는 과정에서 현릉에 해당하는 곳의 흙을 파헤쳐 사용한 점은 너무나 안타까운 현장의 모습이었다. 이곳은 사람에 비유하자면 왼쪽 팔이 심장이나 가슴의 중요 부분을 감싸 안으면서 품어 보호하는 형국인데, 그 왼쪽 팔뚝을 손상시켰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혈장 내기(內氣)의 누설(漏泄)은 물론 외부의 각종 살로부터 보호를 하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처음 성지대사가 점혈하여 작묘할 때는 절대로 현릉을 이렇게 손상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현릉사에서 바라본 혈장과 입수.
어느 문중이든 윗대 조상님의 묘소에 의해 후손들의 길흉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 대해 여러 차례 설명을 드린 바 있다. 가문이 번창하고 훌륭한 인물이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조상님의 유골이 생기응집처에 놓여져, 오랫동안 보존되어 동기감응에 의한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후손들이 무지(無知)로 인해 천기(天氣)에 의해 형성된 혈장을 파손시킨다면 그 가문의 흉화는 물론 나아가 국가적으로도 손실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꼭 명심하여 묘역을 보기 좋게 꾸민다는 이유로 혈장에 손실을 가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만약 사초나 묘역 조성을 위해 흙을 사용해야 할 경우가 있더라도 손상해서는 안 되는 곳이 있으니 신중하기 바란다.

 

[과학풍수] 영천 이씨 시조묘 조금 위에 있었더라면…

 

조선 명풍수 성지대사가 점지…당시 폭설로 못 올라갔다는 說 있어

 

우리나라 풍수의 비조라 하면 당연히 신라 말의 승려인 도선국사(827~898년)다. 그는 신라 흥덕왕 2년 전남 영암군의 김씨 성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호는 옥룡자다. 도선국사는 15세에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도선국사의 음양지리설과 풍수상지법은 신라뿐만 아니라 조선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에 명풍수가 많이 탄생했다. 무학대사, 일지대사, 일이대사, 일견대사, 학조대사, 성지대사, 박상의, 남사고, 이의신, 박문수, 이지함 등 이름만 들어도 역사적 인물로 기록된 이들을 여럿 꼽을 수 있다. 여기에서 보아 알겠지만 초창기 우리나라 풍수는 처음 승(僧)에서 승(僧)으로 전수되었다.

 

조선시대의 많은 명풍수 가운데 경북 군위군에서 출생해 월영사에 입산한 성지대사의 자취를 찾아보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성지대사 역시 15세에 입산했다. 성지(聖智 또는 性智)는 본관이 남양이며, 용궁현감을 지낸 홍석귀와 고씨 성을 가진 어머니 사이에서 서얼(庶孼)로 태어났다. 15세에 월영사에 입산해 선사의 대경을 공부하고 구계(九戒:불교의식)를 받았다.

▲ 성지대사가 출가한 월령곡 월령사 옛 터에서 본 국세.
설화에 의하면 성지대사가 15세 때 입산한 월영사는 소보면 봉소리 연방산 월령곡에 있는 옛 사찰이지만 지금은 없다. 현장을 답사해 살펴보니 옛 선사들이 사찰터를 선정할 때 기준으로 삼은 입지 조건을 알 수 있었다. 위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소보면 하소리 마을을 통과해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골이 바로 월령곡이다. 좁은 농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가다 우측으로 넓은 국세가 눈에 들어왔다. 우거진 잡초를 헤치며 자취를 찾아 월령사가 있었던 곳에 도착하니 풍수적 국세가 다소 좁긴했지만 그야말로 와혈형의 국세가 잘 갖추어져 있는 곳이었다.

 

오랜 세월 월령사를 위해 온갖 풍파를 이겨낸 기왓장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잡초가 많이 우거져 있어 월령사가 있었던 정확한 지점은 확인이 어려웠지만 월령사 당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로 옆에 어느 분의 선조가 모셔진 묘소가 3기 자리하고 있었다.

 

성지대사는 서얼이다 보니 괄대를 많이 받아 어머니 고씨와 부황리 골짜기에 들어가 살았다. 여기에서 산을 넘어 월령사로 수학을 위해 다녔다. 월령곡과 부황리 골짜기는 연방산(290.3m) 아래에 있는 골이며 서로 반대편에 있는 계곡이다.

 

성지골이라는 곳은 현재 연방골로 통하고 있으며, 골짜기가 끝나는 곳에 안락정사의 사찰이 자라잡고 있다. 성지대사는 풍수술법에 능통했다. 그의 풍수법은 바로 도선국사의 음양지리설과 풍수장지법을 숙독해 적용한 것이었다.

▲ 월령곡 월령사 옛터와 영천 이씨 묘역.

 

경북 군위군 소보면 봉황리에 나은 이려(羅隱 李麗·1384~1455년)의 묘소가 있다. 이 묘소는 바로 성지대사가 점혈한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월령사는 와혈형 명당이나 흔적뿐

 

이려는 고려가 망한 이후 군위로 낙향해 이름마저 려(麗)로 바꾸었다. 이곳에 경북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지정돼 있는 광석재(廣石齋)는 이려의 애국충절과 그의 증손인 우암 이세헌(牛巖 李世憲·1476~1555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 만옹 이정기(漫翁 李廷機·1613~1699년)가 건립한 재사가 있다.

 

재사 옆을 휘감고 내려오는 산줄기 끝자락 부근에 영천 이씨 묘역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 묘역 제일 상단에 이려의 묘소가 놓여 있으며, 그 아래로 후손들의 묘소가 여러 기 조성돼 있다.

 

현장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과연 정확한 혈자리에 재혈돼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물론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에 의해 당시의 현장 상태가 많이 변질돼 지금의 상태와는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다.

 

도선국사의 지리법을 통달해 도안(道眼)을 가진 유명한 성지대사가 점혈했으니 올바른 자리가 잡혔을 것이라 믿고 싶을 뿐이다. 이유는 필자가 풍수지리학을 현장에 적용하는 방법이 바로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술법이기 때문이다.

▲ 영천 이씨 이공 려의 묘소 전경.

 

현재의 지형을 기준으로 살펴본다면 지금의 묘소보다 조금만 올려진 곳에 보면 혈증이 약하게 나타나 있다. 물론 주변을 훼손시켰기 때문에 가증(假證)일 수는 있다.

 

이곳에 대한 설화에 의하면 성지대사가 묘소를 점지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도저히 더 올라갈 수가 없어 이곳을 점지했다고 한다.

 

또 이려를 시조격으로 하는 영천 이씨 묘역을 살펴보면 주산의 역량에 넘칠 정도로 많은 묘소가 한 묘역에 만들어져 있어 안타까움이 있다. 이런 것은 자연의 이치에 반하는 것으로 성지대사와 같은 유명하신 분이 풍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땅의 산천정기를 못 받아 훌륭한 인재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해서 영원히 지배할 목적으로 처음 시도한 것이 바로 일제강점기 공동묘지제도였다는 것은 이미 많은 분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풍수지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봄이 되면 과실나무에 많은 꽃이 피고 이 꽃이 지고 나면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열매들을 모두 수확하기 위해 그냥 두면 상품가치가 높은 열매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자연을 아는 농부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한 가지에 몇 개의 열매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제거해 버린다. 나무의 역량에 한계가 있고 또한 한 가지가 열매를 키우기 위한 역량도 한정돼 있으며 과일들이 서로 너무 가까이 있으면 영양부족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다.

대혈지 보면 자연의 신비에 감탄


풍수지리학을 적용하는 산도 역시 마찬가지다. 산천의 정기는 무한정이 아니므로 주산의 역량에도 한계가 있다. 때문에 옛 명문가 집안은 조상의 유골을 이 산줄기, 저 산줄기에 흩어 모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이러한 자연의 이치에 대한 풍수지리를 아는 일본인들이 고을마다 어느 한 산줄기를 정해두고 그곳에만 묘소를 쓰게 했다. 비록 자기의 선산이 있어도 임의적으로 길지를 찾아 조상의 묘소를 모시는 것을 금지하면서 생겨난 것이 바로 공동묘지다. 그러므로 풍수적으로 볼 때 하나의 산줄기에 많은 묘소가 들어서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특히 조상 묘 바로 옆에 많은 묘소를 놓는 것은 더욱 좋지 않다.


이려 묘소에 대한 용맥을 살펴보기 위해 묘소 위를 밞아 올라가니 풍수지리에서 소위 중요한 것을 감추어 놓았다는 의미로 ‘천장지비(天藏之秘)’라고 하는 길지가 필자의 눈앞에 들어왔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이런 대혈지를 볼 때면 자연의 원리와 신비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 영천 이씨 이공 려의 묘소와 지나치게 많은 후손들의 묘소.
만군을 거느리고 낙동정맥을 따라 행룡하던 용이 팔공산에서 크게 한 번 기봉한 후 북진으로 몇 차례의 과협을 거치면서 행룡하다가 끝 부근에 가서 적라산(352.1m)과 물부리산(353.9m)을 기봉한 후 다시 서북향으로 행진해 기봉한 산이 연방산이다.

 

멀리 연방산에서 기복굴곡해 행룡하다가 병오로 기봉했다. 다시 묘을로 박환낙맥해 진손(辰巽), 손사(巽巳)로 위이(      ) 기복(起伏)으로 행룡하다가 횡작혈을 만들어 놓은 곳이 현재 천장지비돼 있는 곳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은 용은 다시 혼합용이 되어 진손으로 행진하다 을진(乙辰)으로 위이하면서 용기를 묶은 깨끗한 결인을 거쳐 아름답고 수줍은 모습으로 또 하나의 혈장이 갖춰져 있었다. 아직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혈장을 보고 미래의 주인이 누구일까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 뒤에서 본 이공 려의 묘소와 그 후손들의 묘소 전경.
그러나 이 산이 만약 영천 이씨 문중산이라면 어쩌면 영원히 비워져 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아직도 풍수의 원리를 단순히 미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산줄기를 중심으로 조상의 묘소 위 어느 자리에 후손의 묘소를 만드는 것은 역장(逆葬)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힘차게 행진하던 용이 이곳에서 또 멈추지 않고 진손으로 입수해 용진하다가 기운을 묶는 결인처가 현재 상태로 보아 조금은 핍산(逼山) 형태지만 마지막에 살짝 묶은 후 결작되는 곳에 이려의 묘소가 놓여 있으며 그 앞으로 많은 후손의 묘소가 도열돼 있다.

▲ 이려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이 건립한 광석재. 경북문화재 제 214호로 지정돼 있다.
오늘도 천장지비의 혈자리에 앉아 풍수지리학에서 강조하고 있는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는 말을 생각해본다. 미래에 적선을 많이 하는 누군가에게 하늘이 이 자리를 허락해 조상을 모시면 훌륭한 후손이 태어날 것이며 그 후손 또한 국가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이처럼 풍수지리학자는 지역사회는 물론 국가적으로 큰 발전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인재 육성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