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차길진_못다한 영혼이야기_03

醉月 2010. 12. 5. 10:40

스승보다 친구

인생의 모든 배역 중 가장 바람직한 배역은 서로 대등한 '친구'일 겁니다.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서 마음 터놓고 웃을 수 있는 ‘친구’가 누가 뭐래도 제일입니다.
모든 처지와 조건을 떠나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가 스스로 떳떳해야합니다.

 

둘러보면, 인생의 무대위에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일인다역을 맡고 있습니다. 가정에선 부모나 자식으로, 회사에서는 상사이자 부하로, 사업가는 사장님으로, 차를 몰 땐 운전기사로, 백화점이나 식당에 가면 고객으로, 명절에는 후손으로, 자식이 다니는 학교에 가면 학부형으로, 모임에서는 집사로 총무로....
한 역할만 소홀히 해도 전체가 와르르 무너지는 낭패를 당하기 때문에 현대인은 수많은 배역에 시달리는 일상을 탈출하려는 꿈을 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많은 배역들은 상대방에게 자기를 숨겨야하는 면종복배(面從腹背)일 뿐입니다. 존경하는 스승마져도 신성한 사제지간 이전에 상하관계의 일종입니다. 제자는 스승에게 무엇인가 배우고 얻어가려하고, 스승은 체면을 지키고 무언가 가르쳐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회에서 아귀다툼해야 하는 이해관계가 지겨울때 우린 친구가 그립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모든 배역 중 가장 바람직한 배역은 서로 대등한 '친구'일 겁니다.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서 마음 터놓고 웃을 수 있는 ‘친구’가 누가 뭐래도 제일입니다. 부모와 처자식이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 안 된다’고 아무리 말려도, 단숨에 친구 따라 강남가지 않습니까.

저는 종종 말하길, 부모도 버리고, 처자식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도 버리라고 해서 오해를 사기도 하는데, 호적정리하란 뜻이 아니라 타이틀에 얽매이지 말고 단순하게 살아가라는 것이고 허심탄회한 ‘친구’로 거듭나라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친구같은 부모, 친구같은 스승, 친구같은 상사....

그런데 이 좋은 친구를 우리는 살아가면서 왜 더 많이 늘리지 못할까요? 늘려도 시원찮은데 기왕의 친구마저도 서도 등져서 친구를 줄여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첫째, 처지가 달라져서 그렇습니다.
한동네에서 고추 내놓고 같이 멱 감고, 같은 교복에 같은 책가방을 메고 담치기를 하던 친구들이, 세월이 흘러 한사람은 고위관직인데 한사람은 말단이거나, 한사람은 빌딩이 몇 채인데 한사람은 전세방을 면치 못할 때, 두 사람은 더 이상 옛날의 친구이기 어렵습니다. 세월은 흘러도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서먹한 이유는 물질을 가치 기준으로 두고 차별하는 카르마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정하는 명예의 높낮이와 부의 차액만큼 인간관계가 멀어지게 됩니다. 동병상련이라고 비슷한 환경의 사람들이 모여 다시 친구가 되고, 처지가 변하면 다시 이합집산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둘째,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나도 어려운 처지에 빚을 내서 도와주었더니, 이제 와서 친구를 배신하다니.”
주위에서 가끔 듣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상대방 친구가 배신해서 그런 게 아니라, 친구가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믿은 스스로를 배신해서 그렇다는 걸 아셔야합니다. 친구가 배신을 할 거라는 사실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자기 잘못을 탓해야합니다. 친구를 도와주기로 했으면 기부했다 생각하고 대가 없이 뒤돌아보지 말고 그냥 주어야합니다. 친구가 배신할 걸 미리 알았다면 친구가 배신을 하더라도 적어도 자기 스스로는 배신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친구는 사랑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사랑은 자기열정이며 착각입니다.
작년 일본 아사히야마 음악제때 폭우가 멈춘 것도, 이번 백두산이 쾌청했던 것도 모두 여러분들이 저를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편하시려면 스승으로 받들려하거나 사랑하려 하지 마시고 친구로서 신뢰해주십시오.

셋째, 서로의 성격을 배려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친구라면 상대방의 성격을 알고 서로 배려해줄 줄 알아야합니다. 찍어 누르려하지 말고 상대방에 맞추어 주어야합니다. 친할수록 말로 마음의 상처를 줄 기회가 느는 것이니 만큼 주의해야합니다.


처지가 다르면 친구가 될 수 없고, 깨져야만 할까요?
모든 처지와 조건을 떠나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가 스스로 떳떳해야합니다. 알렉산더대왕과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디오게네스는 아리스토포스와 함께 당대 쌍벽을 이룬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아리스토포스는 왕에 아첨하여 부유하게 살았고, 디오게네스는 큰 술통을 뉘여서 그 속에서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어느 날 디오게네스가 저녁밥으로 콩까지를 삶아 먹고 있었는데, 아리스토포스가 이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왕의 비유를 맞출 줄 알면, 그 형편없는 콩깍지나 먹고살지 않아도 되련만.”
이 말을 들은 디오게네스가 답했습니다.
“콩깍지를 먹고 살줄 알면, 왕에게 아첨하지 않아도 되련만.”

알렉산더대왕이 어느 날 술통 속에 사는 디오게네스를 찾았습니다.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다 들어 드리리다.”
“나는 아테네인도 그리스인도 아닌 세계시민이오. 서있는 곳에서 한 걸음만 옆으로 비켜나서, 나에게 비친 햇빛을 가리지 않으면 고맙겠소.”
알렉산더대왕은 자신이 선택권이 있다면 황제가 아니라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대왕은 황실에서 아첨 떠는 그 누구보다도 디오게네스의 말에 귀 기울이게 됩니다.


 

장학금을 타고 싶니?

나의 대학생활은 입학부터가 남달랐다.
고3의 힘든 고비를 막 넘고 나자, 찾아온 행복한 고민. 그 행복한 고민의 정체는 두 학교에서 날아온 합격통지서였다. 한 학교도 합격하기 힘들다는데, 두 학교에서 동시에 합격통지서가 날아왔으니 당연히 행복할 수밖에… 하지만 그 행복은 머지 않아 나를 방황으로 몰아넣었고, 어렵게 선택한 학교에서 ‘니나노’ 허송세월만 보내다 이내 학교를 그만두고야 말았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을지 모른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지만,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던 그 대학에서 ‘영능력자’인 내가 버텨나 갈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번의 파란을 겪은 뒤, 이듬해, 나는 건국대 야간대학교에 원서를 냈다. 주간대학이 아닌 야간을 선택한 것은 나름대로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 영능력자라면 모두 아실 테지만, 낮시간은 영능력자에겐 고역, 그 자체이지만, 밤시간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주체할 수 없는 힘과 영성으로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대학원서를 내는 순간까지도, 영성(靈性)을 고려해야 한다니!
그러나 이런 까탈스런 속사정을 신께서 알아주셨는지, 차석입학이라는 행운을 안고 입학하게 되었고,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눈도장까지 찍혀 고시생만 들어간다는 ‘법학연구실’에 1학년생인 내가 당당히 입성하게 되었다.
이보다 더 좋은 순 없는 ‘시작!’ 하지만 시작이 너무 좋았던 탓일까. 곧이어 닥칠 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평범한 대학생활의 묘미에 푹 빠져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서 ‘평범’이라는 말을 너무 곧이 곧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아무리 평범했다 해도 나는 분명 영능력자니 말이다. 여기서 평범한 생활이란, 되도록 다른 사람이 나의 존재를 눈치채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생활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완전범죄’란 없는 법. 그 평범한 대학생활 속에서도 나는 은근히 ‘범죄’를 저지르고 다녔다. 캠퍼스에서 일어난 그 은밀한 영적 범죄에 대한 나의 고백, 그 첫 번째는, ‘장학금’사건이다.
‘장학금’은 모든 대학생들의 꿈이요, 희망이요, 목표이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은 넉넉한 학생들보다 생활형편이 넉넉잖은 고학생들에게는 더 큰 의미였다.
당시 각별한 사이였던 친구도 ‘장학금을 위한 고학생들 모임’ 중 한명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꾸준히 장학금을 타오던 그 친구가 한 시험에서 좋지 않은 점수가 나와, 그만 장학금을 놓치는 사태에 봉착했던 것이다.
장학금에 의지해 학교를 다니던 친구가 절망에 빠진 것은 당연했다. 나는 그런 친구를 돕자는 순수한 의도에서, “마지막 남은 시험이 있잖아! 그 시험만 잘보면 장학금도 가능해!”라고 위로하곤 “자자, 내가 시험문제를 예상해 볼 테니까 잘 받아 적어! 혹시 또 알아? 정말 시험문제에 나올지?”
친구는 의아해하면서도 급한 마음+고마움, 거기에 ‘혹시나?’하는 생각가지 겹쳐 정신없이 내 말을 받아적었다.
며칠 뒤, 과 사무실 앞에 붙은 ‘장학금 수령자 명단’에 내 친구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너무나 뿌듯했다. 곧 있으면 친구가 기쁜 얼굴로 반갑게 날 찾겠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친구는 그때부터 슬금슬금 나를 피하는게 아닌가. 나의 영능력을 눈치챘는지, 아니면 나 때문에 받은 장학금 때문에 죄책감이 들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순수한 의도에서 사용한 영능력 때문에 소중한 친구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 사건 이후, 다시는 이런 일, 그리고 이런 일과 비슷한 일일지라고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또다시 영능력 때문에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두 번째 ‘사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는 슈퍼모델감이야!

대학시절, 우리 학교에는 유독 미인이 많았다. 지금도 가끔씩 학교에 찾아가곤 하지만, 지금보다 그때가 더 미인이 많았던 것 같다. 이 말을 들으면 후배들이 섭섭해할진 몰라도 사실이다.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영능력 때문이다. 만약 스무살 남학생에게 영능력이 생겼다고 하자. 가장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드넓은 캠퍼스 안을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걸어 다니는 여대생, 그 여대생이 예쁠면 예쁠수록 호기심이란 놈도 그 강도가 높아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그것을 외적으로 드러낸다면야 명백한 ‘성희롱’이겠지만, 내적으로 승화시킨다면 누가 알겠는가.

지금은 하도 오래 전 일이 되어서 무엇을 봤는지 전혀 기억은 안나지만(거짓말 같은 사실이다), 이것저것 느끼는 바로는 예날 미인이 진짜 미인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드는 것은 왜일까.

여기서 털어놓는 캠퍼스 영적 범죄, 그 두 번째 고백은 ‘패션모델’ 사건이다.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잘못한 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 친구에겐 정말 잘된 일이었으니 말이다.
우리과 학생중 유독 키가 훤칠한 여학생이 있었다. 여학생이 키가 크면 어디서나 눈에 잘 보이듯, 그 친구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키에 비해 얼굴은 조금 약했다고나 할까. 가무잡잡한 피부에 굵은 선을 가진 얼굴 탓에 남학생들이 선호하는 타입의 미인형에는 조금 비켜 나 있었다.

당시 미인형은, 동글동글한 얼굴에 하얗고 뽀얀 피부, 살집도 어느 정도 있으면서 동시에 부드러운 여성미가 넘쳐야 하는 그런 스타일이었고, 이를 기준으로 볼 때, 그 친구는 그다지 미인형에 가까운 얼굴은 아니었던 것이다.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친구는 분명, 몸과 얼굴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너, 패션모델 한번 해 봐라. 그러면 왠지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넌지시 얘기를 꺼냈더니,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친구가 다음 학기 등록금을 안 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었다. 그 등록금으로 그 당시 필동에 있는 복장학교에 입학했다는 게 아닌가.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말이다.
농담처럼 건넨 내 말을 즉각 행동으로 옮길 줄이야…

나는 그때부터 그 친구의 소식이라면 아테나를 빼고 민감하게 정보를 수집하게 되었다. 내가 던진 한 마디에 그 친구의 인생이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물론, 진심으로 그 친구가 걱정된 것도 사실이었지만.

하지만 얼마 안가, 그 친구에게 좋은 소식이 날아왔다. 패션모델이 되는 카메라 테스트에 통과했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 친구는 잘 나가는 모델계의 스타로 자랐고, 나는 그 친구의 팬이 되었다. 무엇보다 내 말을 믿고 용감한 행동을 보여준 그 친구의 결단력이 참으로 고마워서였다.
미인을 알아보는 영능력 탓에, 그야말로 평범하게 살아갔을지 모르는 한 친구를 ‘스타’의 길로 안내한 사건.
이 사건 이후, 나는 이제부터 학교에서 영능력을 쓰는 것은 되도록 삼가자고 마음먹게 되었다. 이대로 나가다간, 우리 학교가 ‘스타군단 밀집지역’으로 선정될지 모른다는 기우에서였다.

여하튼 ‘미인 알아보기’ 내지는 ‘스타 예견하기’ 등의 영능력을 학교에서 사용하는 것은 이쯤해서 철저히 내재화시켰기에, 아쉽게도 더 이상의 스타양성 케이스는 없었다.
사실 캠퍼스에서의 영적 활동이 줄어든 가장 큰 이유는 나의 활동 영역이 학교에서 직장으로 ‘체인지 업’ 됐기 때문이었다.


 

직장으로부터의 도주

내가 ‘체인지 업!’을 구사하며 옮긴 활동무대는 ‘고속도로 건설사무소’로 도로공사의 전신이었다. 물론 아무나 ‘체인지 업’을 던질 수 없는법. 당시 그곳은 재학생인 내가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은 1968년부터 시작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총괄하는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거니와, 이곳에서 일한 사람들은 고속도로 건설이 끝남과 동시에 전원 도로공사 직원으로 편입될 예정이었기에 앞날까지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 나 역시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다. 영능력을 절대 사용하지 않은, 나 자신의 순수한 실력으로 떳떳하게 시험을 통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당시 총무과에서 실시한 공채시험에 재학생인 내가 붙은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도 ‘역사적 현장’을 움직이는 또 하나의 인물이 되기 시작했다. 단군 이래 가장 큰 공사를 벌이는 엄청난 사업에 중추적 역할을 하는 이곳 사무실에서의 의미있는 일을 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기고 말았다. 당시 내가 일하던 총무과 직원 중 L주사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선생님은 아무래도 큰집에 가시게 될 것 같은데요”라고 말해버린 것이었다. ‘아차!’싶어 당황하고 있을 때, 그분은 화도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동생이 사고를 쳐서 큰집에서 콩밥먹고 있소”라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는 영성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일주일 후, 갑자기 L주사님이 검찰에 연행되셨다. 까닭은 공채시험 답안지 유출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이었다.
내 말대로 진짜 ‘큰집’으로 가신 직후, L주사님은 면회 온 가족분에게 “꼭 차길진 주사보고 면회 좀 와달라”고 부탁하셨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그분을 뵈러 태어나 처음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가게 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면회실에 앉아 있으려니까 L주사님이 야윈 얼굴로 나를 반기며 내 앞에 앉으시더니, 다짜고짜 “나 언제 나갈 것 같소?”라고 묻는게 아닌가. 그 순간, 면회실을 지키던 간수가 엄한 목소리로 “그런 말 하면 안 됩니다!”고 소리치는 통에 당황하긴 했지만 작은 목소리로 “큰 죄는 없으시니 조금만 있으시면 나오게 되십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작은 목소릴 또 어떻게 들었는지 재차 간수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은 집행유예로 출소하시게 되었다. 그러나 진짜 사건은 여기서부터였다. 이 소문을 들은 사무소 관리과장님은 나를 불러 어떤 부인과 만나게 한 것이었다. 그 부인은 내게 소문을 들었다면서 남편이 현재 공병단 단장인데 이번에 공병감(공병직에서 가장 높은 자리)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게 아닌가.
상사의 부탁이고 해서, 나는 또 한번의 영능력을 희생하며 “틀림없이 7월 14일 정도쯤에 공병감이 되실 겁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관리과장님은 얼굴을 붉히며 “차 선생도 틀릴 때가 있구먼! 이번 공병감은 Y씨가 되었다는구먼”이라며 부인의 얼굴을 힐금 쳐다보며 웃으셨다. 내 예언이 틀려 민망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잘됐다!” 싶었다. 이유인즉, 그 동안 예언이 잘 맞는 통에 사람들한테 시달리는 정도가 도를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찾아 마음같아서는 숨고 싶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래서 ‘틀렸다’는 말에 안도하며 지냈는데…7월 중순께, 무심코 신문을 펼쳐보곤 짧았던 평온도 깨지고야 말았다. 내가 부인에게 말했던 대로 부인의 남편께서 공병감이 되었던 것이다. Y씨는 당시 군내 파벌이 달랐기에 승진명단에서 제외되어서, 그 다음번 승진자인 남편이 공병감으로 승진에 골인했다는 것이었다. 또 한번 예언이 맞는 순간 청소부 아줌마부터 시작해서 전직원이 몰려와 마구마구 미래를 물어보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나는 직장으로부터의 도주를 감행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직장을 그만 둔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와 ‘반드시 사법고시에 합격하겠다!’는 생각으로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사법연구실에서 공부하던 중, 갑자기 코에서 피가 주루룩 흐르는 게 아닌가. ‘이게 뭐지?’하고 피를 닦는 순간, 나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정신을 깨어보니, 병원 응급실 안. 나는 단순히 ‘너무 무리했구나’하는 생각에 누워 있었는데, 담당의사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더니, “그 몸으로 어떻게 공부하실 생각을 했습니까?”고 묻는 것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제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습니까?”고 되물었더니, 의사는 ‘아직 몰랐냐’는 듯, “폐결핵 말기입니다.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됐습니다만, 한쪽 폐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언제 때가 올지 모르니, 준비해 두시는 게 좋겠습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제가 시한부 인생이란 말입니까?” 내 말에 의사는 할말을 잃은채, “안타깝게 됐습니다”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는 병원에서 퇴원한 뒤, 곧바로 학교로 가, 자퇴원서를 냈다. ‘곧 있으면 죽을 놈이 학교는 무슨 학교!’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무렵, 기침과 각혈은 점점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절을 했고, 정말 가능하다면 누군가가 죽여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폐에 물이 차, 썩어가는 동안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스물한 살의 청년에게 허락된 시간이 3개월뿐이라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웩-’
폐 저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져나온 썩은 피들. 내 몸에서 나오는 그 죽음의 흔적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정말 죽는 거라면, 아버지 곁에서 죽자고….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공주의 금강.
내가 열한살 때, 아버지께선, 내게 보여줄 것이 있다며 금강 저 깊은 곳으로 다이빙하신 뒤 다시는 떠오르지 않으셨다. 그 슬픈 금강에 스물한 살의 내 몸을 묻기 위해, 나 역시 그 곳을 찾았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몸을 던지셨던 그 바위 위에서 아버지와 나만의 끈끈한 추억들을 떠올리면서, 마지막으로 기도했다. “아버지, 저 아버지 만나러 갑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보여줄 것이 무엇이었는지…이제 대답해주십시오!”
그리고 막 몸을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길진아!”
아버지의 음성이었다.
거짓말 같았다. 설마, 아버지께서…. 그러나 분명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길진아, 마곡사로 가거라! 어서!”
나는 알 수 없었다. 마곡사로 가라니….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께선 더 이상 내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는, 나는 죽으려고 했던 나를 질책했다. 그것도 감히 아버지께서 보시는 앞에서 죽으려고 했다는 사실이 정말로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 길로 나는 약국에서 박카스 한 병을 사서,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것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래, 처음 먹은 ‘약’이었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마곡사. 나에게 마곡사는 그 이름만으로도 내게 최고의 ‘명의’가 되어 주었다.


 

때 밀어 드릴까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학교를 다니다가, 폐결핵으로 학교마저 휴학하고 정처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밤, 갑자기 타게 된 부산행 열차. 열차안에서도 몇 번이나 죽을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스무살 청년에게 폐결핵이라는 병이 찾아왔을 때 느끼는 절망감은 상상을 초월했기에…
얼마나 흘렀을까. 열차는 어느덧 부산역에 도착했다. 힘들게 옮긴 발걸음 뒤로, 천천히 동이 터오려는 듯, 푸르스름한 새벽하늘이 펼쳐지고 있었다. 모두들 익숙한 발걸음으로 하나 둘 부산역 광장을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난생 처음 온 이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냔 말이다. 그렇게 고개를 떨구는데, 갑자기 내 눈에 새벽별처럼 ‘반짝’하고 들어온 곳이 있었다. 바로 ‘목욕탕’이었다.
부산역 광장 바로 옆에 있던 큰 규모의 공중목욕탕. 그렇게 해서 나는 그곳에서 1년 6개월 도안 ‘때밀이’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탕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손님들의 온몸 또한 구석구석 청소하는 일. 하루종일 땀을 물처럼, 물을 땀처럼 흘려야 하는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반드시 가장 강력한 ‘프로정신’이 요구됐다.
부산 시민의 위생을 책임진다는 마음가짐으로 정말 열심히 일했다. 모든 것을 깨끗하게 만드는 이 일을 하는 동안만큼은 삶의 고통에서 잠시 벗어날 수도 있었다. 또, 곡두새벽부터 일어나 손님을 받는 목욕탕일이 밤잠없는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기에 때밀이 생활을 비교적 잘 보내지 않았나 싶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새벽에 일어나 독고기국(돼지고기로 만든 국)을 한그릇 후딱 먹어치우고, 목욕탕에 들어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탕에서 ‘꺄악!’하는 비명소리가 들리는게 아닌가! ‘사고다!’ 싶어 허겁지겁 여탕으로 들어갔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사건인즉, 아침 일찍 불공을 드린 비구니 스님 한분이 목욕탕 속에서 머리만 내밀고 있으니까, 그때 들어온 여자분은 비구니 스님이 남자인 줄 알고 비명을 질렀는데, 스님 또한 이 비명에 놀라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남자인 나가지 목욕탕에 나타나자 이번에는 두 사람이 동시에 ‘꺄악!’하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이렇게 사건에 사건을 낳는 목욕탕 때밀이 생활을 하면서, 힘든 일도 많았고 또 재미있는 일도 많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다 목욕탕 사장님 덕분이었다.
당시, 부산역 광장 바로 옆에 위치했던 그 목욕탕은, 부산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부산을 대표하는 목욕탕이었다. 그런데, 그 거대한 목욕탕의 사장님은 정말 곱게만 생기신 여성분이셨던 것이다. 사장님께서는 일제시대 때 경성사범대학교를 졸업하시고 교직에 근무하시다가, 당시 무사시 음대를 졸업하신 문인이셨던 부군을 만나 결혼하셨다 한다. 부부가 되신 후에도, 모든 농토와 재산을 어려운 이들에게 고루 분배하는 등 지속적으로 사회개혁 운동을 주도해 가셨다 한다.
그러나 두분이 꿈꾸셨던 유토피아는 오지 않았다. 결국, 두분은 사상과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하셨고, 부군마저 6.25때 돌아가시는 등 이데올로기 시대에 철저히 희생당하셨던 것이다.
그러게 부군없이 사업을 시작하신 사장님께선 그 당시 직물공장 두 개와 목욕탕을 운영하시는, 부산에서는 꽤 유명한 사업가가 되셨지만, 정작 사장님께선 목욕탕 청소도 손수하시는 등 삶에 늘 겸손하셨다. 그분께 나는 겸손과 인내, 관용과 배려를 배웠다. 때밀이 생활동안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사장님께서 가르쳐주신 ‘지혜’일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다른 사람의 때를 보고도 ‘더럽다’말하지 않고, 깨끗이 닦아줄 줄 아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고,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서도 그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진 않나 늘 반성하며 지내게 되었다.
1998년 3월 26일 <눈물의 여왕> 공연 시연회 때, 사장님을 초청해 테이프를 끊어주십사고 부탁드렸더니,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으시고 흔쾌히 해주셨다. 목욕탕 주인과 때밀이의 30년 만의 해후. 이데올로기와 사랑을 담은 악극 <눈물의 여왕>과 함께 이뤄진 그 만남은 사장님께 드리는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


 

구걸 말고 거래하라

남의 복(福)을 허락 없이 훔쳐오면 도둑질이요, 남의 복(福)으로 빌어먹으면 구걸입니다.
도(道)는 단지 정직한 거래라고 했습니다.상대방이 큰 운과 복을 주었는데도 자신은 변변치 않은 대접을 했다면 구걸이나 도둑질과 다를 바 없습니다. ‘거래’를 잘못하면 ‘소원을 비는 일’이 자칫 구걸이나 도둑질이 된다는 사실에 절대 주의해야합니다.

 

‘폐백’이란 신부가 혼례 때 시부모나 그 밖의 시댁 어른들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기 위해 준비해가는 특별음식입니다. 신부가 음식을 대접하면 시부모는 대추나 돈을 답례로 주며 새신부의 앞날을 축원해줍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폐백의 전통 속에는 복(福)을 늘리는 지혜가 숨어있습니다. ‘거래’를 통해서 복을 늘려가는 노하우가 들어있습니다.

도둑질을 하면 도둑이고, 구걸을 하면 거지라고들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도둑질이고 무엇이 구걸인지 한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의 복(福)을 허락 없이 훔쳐오면 도둑질이요, 남의 복(福)으로 빌어먹으면 구걸입니다. 도둑질이나 구걸이나, 자기 복을 늘리지 못하고 남의 복으로 구차하게 살아가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늘어나는 복이 없으니 복을 빌려 사는 처지가 되어 날이 갈수록 더욱 곤궁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알게 모르게 큰 사랑을 베푸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려운 살림을 피게 운을 빌려주고,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위로해주고, 병약했을 때 기(氣)를 넣어주고, 일이 막혔을 때 길을 제시해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음주가무에 카드 빚을 내가면서도, 아무 조건 없이 소리 없이 주고 또 주는 사랑을 하시는 분들에겐 기껏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나 밥 한 끼로 돌아섭니다. 상대방이 큰 운과 복을 주었는데도 자신은 변변치 않은 대접을 했다면 구걸이나 도둑질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운과 복이 빚이 되어 빚쟁이 인생이 됩니다. ‘거래’를 잘못하면 ‘소원을 비는 일’이 자칫 구걸이나 도둑질이 된다는 사실에 절대 주의해야합니다.

도(道)는 단지 정직한 거래라고 했습니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이득을 남기는 것이 거래입니다. 복을 늘리는 거래를 잘해야 복되게 살수 있습니다. 복을 내려준 상대방을 잘 대접하면 운을 복으로 돌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복이 늘게 됩니다. 새댁이 시부모를 잘 대접해서 윗사람의 내리사랑을 듬뿍 받는 거래를 배우는 풍습이 바로 <폐백>입니다. 한약을 공짜로 얻어먹으면 약효가 떨어집니다. 비싸도 제 돈 내고 정성스럽게 먹어야 약효가 좋습니다. 상처를 치료한 의사에게는 기꺼이 치료비를 내면서 난관에서 구해준 은인에게는 왜 그리 야박하게 구는지 모르겠습니다. 흰 가운을 입지 않으면 의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성직자의 제복을 입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면 거래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내려준 큰 운이나 복만큼 에는 못 미치지만, 복 준분께 일정의 대접을 해 주어야 이득이 남는 정직한 거래가 성사되는 것입니다. 복을 준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잘 대접해야합니다.

구걸이나 도둑질보다 한 술 더 뜨는 것이 강도질입니다. 상대방의 이득을 노리고 대접한다면 강도질입니다. 그래서 저는 ‘속셈이 있는 친절은 강도보다 더 무섭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 서로 감동이 남는 거래를 해야 합니다. 거래를 잘한 역사 속의 유명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신라의 김유신에게는 보희와 문희라는 누이 동생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언니가 서산 꼭대기에서 오줌을 누워서 서라벌이 전부 잠기는 망측한 꿈을 꾸었다고 동생에게 말했습니다. 동생은 언니에게 꿈을 자기에게 팔라고 말하고는 옷장에서 아끼던 귀한 비단 치마를 꺼내 언니에게 주었습니다. 누이는 치마를 받아들며 흔쾌히 꿈을 팔았습니다. 어느 날 김춘추가 김유신 집에 놀러 와서 공놀이를 하다가 옷이 터지게 되었습니다. 김유신은 언니 보희에게 옷을 꿰매라고 했으나 보희는 거절했습니다. 동생 문희는 거리낌 없이 옷을 꿰매서 김춘추에게 대령하였습니다. 나중에 김춘추는 무열왕이 되었고 문희는 그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만약 문희가 꿈을 그냥 말로만 샀다면 기회를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끼던 비단치마를 왕후자리와 서로 거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거래만 거래가 아니라는 것도 명심해두어야 합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삼고초려(三顧草廬)>는 정성스런 마음을 직거래한 좋은 일례입니다.

관우와 장비와 같은 무적의 장수가 있었음에도 유비는 조조에게 매번 패하게 됩니다. 유비는 사마휘의 천거로 제갈 량을 책사로 얻기 위해 관우 장비와 함께 예물을 싣고 그의 초가집으로 떠납니다. 그러나 제갈 량은 고의로 집을 비워서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후 다시 찾았으나 출타 중이었습니다. 관우와 장비는 지난번에 분명히 오겠다는 전갈을 남겼음에도 다시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해 분개했습니다. 유비는 극구 만류하는 관우와 장비를 돌려보내고 다시 한번 제갈 량을 찾았습니다. 제갈 량은 비천한 신분이고 나이도 어린 자신을 유비가 세 번씩이나 몸을 낮추어 찾은 것에 감복하여 그를 따라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유비는 제갈 량의 기지로 천하를 얻게 됩니다

 

소중한 첫걸음

사람에게는 누구나 ‘처음’이 있는 법. 나에게도 ‘처음’으로 기억되는 구명시식이 있다. 그 구명시식은 바로 어머니와의 일종의 ‘내기’처럼 이루어진 의식이었다.
그때가 1985년으로 벚꽃이 한창 피어올랐을 무렵으로, 당시 어머니께서는 내가 종교계로 귀의한 사실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셨다. 어머니 마음도 이해가 되는 것이, 나를 가지셨을 때 꾸셨던 태몽이 참으로 길해, 분명 큰 인물이 될 거라 믿으셨는데, 당시 나의 모습은 어머니 욕심에 크게 미치지 못해, 실망이 이만저만 한 게 아니셨던 것이다. 아들이 행하는 법회에 단 한번도 참석하지 않으셨으니,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굳게 닫혀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는 법. 이 일로 인해, 어머니께서는 그 때 이후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구명시식을 참관하게 되셨다.
그 기회란 불의의 사고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조카가 공사현장에서 중장비 보조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그만 트레일러가 오작동 돼, 척추가 탈골되는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조카의 상태는 더 이상 나아지지 않았고, 병원에서는 ‘하체가 마비되었다’며 재활 노력을 해보자는 말만 했던 것이다.
어머니께서 조카의 병실에 다녀오신 뒤, 답답하셨는지 내게 찾아오셨다. 어린 나이에 하체불구가 된 조카의 딱한 사정을 말하시며 안타까워하시더니 갑자기 내게, “니가 그만큼 영능력이 있다면, 좋은 곳에 쓴다 생각하고 조카를 다시 정상으로 만들어 봐라.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내 너에게 삼배를 올리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말씀도 말씀이지만, 조카의 사정이 너무 딱해, 나로서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 최초의 구명시식이었던 것이다. 그후 며칠 뒤, 어머니께서는 고운 한복을 입으시고 내가 있는 후암정사로 찾아오셨다. 반갑게 맞는 나의 인사를 뒤로 미루시고는 내 앞에 서시더니, 삼베를 풍성하게 올리시는 게 아닌가.
어머니께 받은 삼배. 그 절의 의미는, 지금부터 종교인으로서의 아들을 인정하겠다는 것 그 이상이었다. 어머니께서 반대하셨던 길을 가야 했기에, 본의아니게 저질렀던 불효를 조금이나마 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내게 삼배를 올리시는 동안, 내 마음은 어머니께 만배를 올리고 있었다.
지금도 조카 소식을 종종 듣는다. 장가도 가고, 아기도 낳아 잘살고 있는 조카. 아직도 병원 정형외과 의사가 하던 말이 생생하다고 한다. “정상인처럼 걸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몇백만분의 일의 확률입니다.” 그때의 구명시식은 그 확률에 도전하기 위한 것 이상이나 귀중한 것을 얻었기에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나 어머니로부터 ‘삼배’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처럼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거나, 내가 접하는 영혼세계를 믿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님을 설득하는 과정 또한 이처럼 쉽지 않은데, 하물며 내 안사람이라고 쉬웠을까.
올해로 25년째 접어드는 나의 결혼생활. 그동안 고생고생하며 나를 내조해 온 내 아내 ‘능인각보살’이라 해서, 처음부터 나의 영능력과 영혼세계를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내를 지금처럼 진실되게 믿게 한 데에는 다 그만큼의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딸 소영이가 막 태어났을 때 일이다. 아기가 많이 울면, 그만큼 건강하다고 했던가. 처음에는 밤낮을 바꿔가며 우는 아기를 보며, ‘건강해서 그렇거니’ ‘나중에 가수가 되겠구나’ 했는데,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는 것이었다. 결국 아내는 아기 울음소리만 들으면 경기가지 일으킬 정도로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이쯤되자, 아내는 나한테 “당신 영능력이 있으면 저렇게 울어대는 딸 좀 고쳐봐요!”라고 항의하기에 이르렀다. ‘좋은 기회다’ 싶어, ‘나를 믿고, 영혼세계를 믿으면, 소영이를 고쳐보겠다’고 했더니 아내는 ‘믿는다!’고 얼른 대답했다. 이에 나는 ‘예술적 재능이 풍부해, 배우를 꿈꾸셨던 고모분께서 젊은 나이에 이상이 맞지 않은 분과 결혼한 뒤, 폐결핵으로 2주만에 돌아가셨다. 그분을 위로해 드리면 아마 소영이의 울음도 그치게 될 것’이라고 말한 뒤, 아내가 보는 앞에서 고모님을 위로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 올렸다.
그랬더니, 그 후부터는 거짓말처럼 아기가 울지 않는 게 아닌가. 밤이 되어도 곤히 자는 모습이 너무나 귀엽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아내에게 “어때? 이제 나의 능력을 믿겠어?” 라고 말했더니, 아내는 “편지 때문이 아니라, 때가 되어서 울지 않는 거예요!”라고 말하는게 아닌가! 여하튼 그 뒤부터는 아내의 내조가 달라졌으니…‘편지’덕을 톡톡히 본 것 같다.


 

웃을 수밖에

나는 웃음이 많다. 그 때문에, 사람들한테 영매자라기보단 ‘쌀집아저씨’에 가깝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하지만, 난들 처음부터 웃음을 달고 태어났겠는가. ‘영능력’이 보여준 현실이 너무나 코미디 같아,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데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대다수가 절대 웃으면 안 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 곤란한 상황을 무사히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의미심장한 ‘웃음’의 노하우가 필요했다.
영능력 때문에 웃을 수 밖에 없었던 여덟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우리집은 다른 친척분들보다 풍족한 편이어서, 이종사촌형들까지 우리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형들은 그것으로 인해, 자존심이 상했는지 매일같이 나만 괴롭혔다. 말 그대로 ‘왕따가 된 것이었다. 형들의 괴롭힘이 점점 심해지자, 내 마음도 점점 틀어지게 되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형들이 이유없이 놀리자, 나는 속으로 ‘머리나 다쳐라!’고 했는데, 저녁 무렵, 형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게 아닌가. 그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다리나 부러져라!’고 하면 축구하다 다리가 다쳤다며 깁스를 하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형들한테만이 아니었다. 하루는 학교선생님께서 이유없이 나에게 가혹한 벌을 내리셨다. 벌을 받는 동안, ‘제발 일주일 동안 선생님을 안 봤으면…’했는데, 다음날 학교에 가보니 선생님께서 심한 몸살로 일주일간 못 나오신다는 거였다. 그 말에 당황한 나는 누구에게도 나의 속내를 말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벌을 받건, 누구에게 맞았건 간에, 나쁜 마음은 품지 말고 되도록 웃음으로 넘어가자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쌓이게 된 나만의 웃음 노하우. 내가 다른 사람을 향해 설령 나쁜 마음이라도 품게 되면, 그 결과는 언제나 같았기에,
되도록 영능력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의의 사고를 최대한 막아보자는 마음이 내 웃음의 비결이 되었다.
그만큼 영능력이라 함은 다른 사람에게 뜻하지 않은 해를 입힐 수 있는 만큼 그 힘의 크기는 무한해, 영능력자인 본인 스스로도 힘을 주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오죽하면, 영능력으로 인한 불의의 사고를 막고자 ‘웃음’을 선택했겠는가. 그만큼 영능력의 무서움을 알기에 나는 영능력을 쓰기 전에 수십번 생각하고, 고민한다. 잘못 사용할 때는 ‘웃음’으로도 해결 못할 사건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 사건의 결과들로 인해 공교롭게도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작년에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 밝혀져 세간에 적잖이 충격을 주셨던 한 유명한 지관어른과 나와의 마지막 만났던 이야기를 잠간 해보겠다.
작년, 아버지 차일혁 총경의 공덕비를 화엄사에 세우기 두달 전. 김일성 사망 예언과 명당찍어주기로 유명했던 역술인 S씨, 대학 교수 K씨와 사회유력인사 한 분과 함께 모 호텔에서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때도 때인만큼 그분들께 아버님의 공덕비가 세워지니 꼭 한번 오시라고 말씀드렸더니, 제일 먼저 역술인 S씨께서 “그렇게 경사스런 일이 있다니! 나도 화엄사에 가서 축하드리고 싶네”라고 말씀하시는게 아닌가.
그때, 문득 그분의 얼굴을 본 나는 몇 번이고 머뭇거리다가, 정중히, “죄송하지만, S씨께선 화엄사에 못 오실 것입니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S씨께선 ‘무슨 말이냐? 꼭 가겠다’고 하시기에 참다못해, “기분 나쁘게 듣지 마세요. 선생께선, 두달 안으로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 까닭에 화엄사에는 못 오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더니, 그분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무슨 까닭으로 내가 죽는다는 거요?”하고 되물었고, 나는 다시 “선생께선 영능력자로서 천기를 너무 많이 누설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늘에서 일찍 당신을 부르는 것입니다”고 사실대로 알려드렸다.
이쯤되자, 함께 계셨던 분들은 좌불안석이 따로 없었다. 당사자인 S씨도 불쾌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지 두달도 채 못되어, 그분의 부음을 듣게 되었다.
이렇듯, 영능력자는 함부로 천기를 누설하면 안 된다. 사실, 세상사는 것이 모두 하늘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이를 어기며, 악착같이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이들을 볼 땐,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다. 자신만을 아는 자들에게 천기를 말해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그들을 향해 쌀집아저씨처럼 웃는 것이다.


 

무인카메라에 찍힌 인연

운전자들이 신나게 속도를 내다가도, 한순간 브레이크를 슬며시 밟는 곳이 있다. 바로 ‘무인카메라’ 앞에서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사정없이 과속차량의 번호판을 찍어버리는 경찰보다 무서운(?) 이 존재는 언제부턴가 운전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운전자가 두려워하는 이 무인 카메라는 교통사고도 30%이상, 사망자수 40% 이상 줄이고 6개월 동안 범칙금으로 3백억원 가량 챙겨 국고에 환납하는 등 그야말로 ‘님도 보고 뽕도 따고’의 진리를 실천하는 인간보다 나은 명물이 된 지 오래다. 얼마전에는, 롯데그룹 신회장의 부친묘를 훼손한 범인도 과속으로 무인카메라에 적발되자, 이를 두려워하던 중 자수해 버리지 않았는가. 참으로 기특한 물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갑자기 웬 무인카메라 이야기?하며 의아해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운전하시는 분들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내가 ‘무인카메라 탄생의 주범’임을 고백하기 위해서다. 전국 무인카메라의 90%를 생산해 내고, 최근에 뉴스에도 소개된 바 있는, ‘주행형 자동영상 속도측정기’를 개발해 낸, ‘(주)오성INC’의 회장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은행빚 없는 부채비율 0%의 튼튼한 재무구조를 갖춘 벤처기업, 오성 INC. 국내 무인카메라 공급률 98%의 위업을 달성하며, 세계 12개국에 3천만 달러 수출계약을 성사시킨 한마디로 ‘잘나가는 벤처기업’의 회장직을 맡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 모든 것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난관은 ‘종교인’이라는 신분상의 제약이었다. 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버는 ‘세속인’으로서 생활이 가능할지가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민하길 수만 번. 나의 뇌리에는 이 모든 것이 ‘인연의 뜻’이라는 생각이 찾아들었다. 오성 INC라는 회사 자체도, 모두 ‘인연’이라는 질긴 끈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인연의 시작은 내 나이 21세 때. 당시 사법고시를 준비중이었던 나는 갑작스럽게 ‘시한부선고’를 받게 되었다. 병명은 ‘중증 폐결핵’. 회생불가 판정을 받은 뒤, 자살을 결심하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금강까지 찾아가게 되는데.
퍼런 강물로 몸을 던지려던 순간,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생한 음성이 들렸다. “길진아, 마곡사로 가거라, 어서!” 간곡한 부탁이 서려있는 그 말씀을 듣고는 자살을 포기하고 마곡사로 향했다. 마곡사에서 시작된 나의 투병생활. 21세에 생을 포기하기엔 너무나 억울했다고나 할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과 사를 넘나들며, 피를 토해 내던 그때, 개구리나 뱀같은 보양식을 잡아와 정성껏 구워주며, 아낌없이 간호해 주던 14세의 소년이 있었다.
바로 그 소년이, 지금의 오성INC 사장, 권택일 씨다. 하지만, 다른 산사(山寺)로 옮겨가면서, 14게 소년과는 연락이 끊어지게 되었고…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그후 언 30년이 지난 뒤 미국에서였다. 아프리카 사업에 성공한 그가 우연찮게 뉴욕 후암정사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그와 함께 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 마음을 신께서 알아주셨는지, 운좋게 닿은 또 다른 인연을 통해 척박한 ‘무인카메라’ 분야에 뛰어들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업의 시작은 어쩌면 8년 전부터 예고된 것인지 모른다. 8년 전 어느날, 마산 모 수출 중소기업 사장님의 선친 영혼을 위한 구명시식을 하게 되었는데, 그분은 생전에, 일제때부터 죽 전자업체를 운영하셨던 전자분야의 ‘대가’셨다 한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남영호 해양사고’때 그만 물귀신이 되셨던 것이다. 속사정을 듣고, 나 역시 마음이 아파 정성껏 천도해 드렸더니, 그 영혼께서는 “내가 도와줄 테니, 자네도 사업을 해보시게”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그때까지만 해도, 사업에는 전혀 생각이 없었기에, 마음만 감사히 받았는데, 그분의 말씀대로 이렇게 전국적인 규모의 사업을 하게 되다니.
이렇듯, 사람과의 인연뿐 아니라 영혼과의 인연까지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가짐 덕택에 오늘같이 사업이 번창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잘 나가는 ‘무인카메라’사업을 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업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둑을 잡는 사업은 망하지만, 도둑을 쫓는 사업은 성공한다”는 진리 말이다. 앞으로도 생명을 도둑질하는 ‘과속’운전을 막기 위한 이 사업에 ‘인연’을 대하듯 최선을 다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