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염화실의 향기_22 봉녕사 승가대학장 묘엄스님

醉月 2010. 12. 9. 08:35

[염화실의 향기](22)봉녕사 승가대학장 묘엄스님

푸른 하늘 아래 단풍 낙엽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가을날. 표정이 맑고 단아한 노비구니 스님이 환한 가을 볕을 쬐면서 수원 광교산 자락 봉녕사(奉寧寺) 경내를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노스님은 800년 수령의 고목 향나무를 지나 주석처인 향하당(香霞堂) 염화실에 든다. 묘엄(妙嚴·77·봉녕사승가대학장) 스님. ‘청담 스님의 딸, 성철 스님의 유일한 비구니 제자’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스님이다.
수원|이상훈기자
스님은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옛날을 회상했다. 스님의 삶은 우리나라 불교계를 대표하는 고승들과 씨줄날줄로 얽혀 있다. 결혼 후 출가한 청담 스님은 대를 이을 아들 하나 낳아달라는 노모의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아내와의 하룻밤 파계로 인순을 낳았다.

인순은 열네살이 되던 1945년 봄 어머니의 편지를 들고 문경 대승사를 찾아갔다. 청담 스님은 평생의 도반인 성철 스님과 함께 대승사 쌍련선원에서 수행중이었다. 인순은 그곳에서 성철 스님의 권유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 ‘묘엄’으로 다시 태어났다. 출가자로서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사사로운 정이라고는 한푼어치도 없었지요. 평생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도 없어요. 언젠가 한 벌뿐인 무명 두루마기를 빨아 둔 탓에 주지스님이 빌려준 고급 옷감의 두루마기를 입고 스님을 뵌 적이 있어요. 스님께서 ‘네 옷이 그게 뭐냐’라고 묻기에 사정을 이야기 하니까 ‘신랑도 주면 좋아라 하고 갖겠네’라고 혀를 차셨어요.”

스님은 항상 무덤덤하기만 한 청담 스님이 자신을 살펴보고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고 한다. 청담 스님은 평생 절약과 검소한 생활을 했던 선사로 유명하다. 청담스님의 청빈 수행은 지금까지 그에게 매서운 가르침으로 남아있다. 스님은 지금도 사미니 시절 배운 솜씨대로 승복을 손수 바느질해 입는다.

그는 비구니로서는 드물게 1947년부터 청담·성철·향곡·자운 스님 등이 주도한 ‘봉암사 결사’에도 참여했다. 당시 묘엄을 중심으로 한 7~8명의 비구니들은 봉암사 뒤편 백련암에서 봉암사를 오가며 비구승들과 똑같이 ‘부처님 법대로’ 수행정진했다.

“희양산을 쩌렁쩌렁 울리던 큰스님들의 법거량과 무섭게 공부하던 모습이 늘 그립습니다. 봉암사 결사 정신인 ‘부처님 법대로’는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출가자들의 변함없는 규범입니다. 출가자는 무상(無常)을 철저하게 느끼고 부처님 뜻이 자신의 인생관이 되도록 살아야 해요.”

스님은 예불, 참선, 운력을 통해 불교의 새로운 기풍을 세웠던 ‘봉암청규’와 느닷없이 “한마디 일러라!” 하면서 멱살을 잡아 흔들던 성철 스님의 일화 등을 자상하게 설명해준다. 스님은 조계종단 비구니 역사에서 ‘첫번째’ 기록을 숱하게 갖고 있다. 한국 불교 계율의 중흥조로 불리는 자운 스님으로부터 비구니 가운데 첫번째로 ‘식차마나니계’를 받 은 뒤 ‘사미니율의’ ‘범망경’ ‘비구니계율’ 등을 배웠다. 당대 최고의 강백이었던 운허 스님을 따라 공주 동학사, 부산 금수사,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등으로 옮겨 다니며 7년여 동안 경전 공부를 했다.

운허 스님은 1957년 묘엄 스님에게 ‘전강(傳講)’을 했다. 전강이란 불교에서 경전을 가르치는 자격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전에도 경전을 가르치는 비구니 스님이 없지 않았지만 정식으로 인가를 받아 강맥을 이은 비구니는 묘엄 스님이 처음이다.

“그 시절 비구니에게는 문자 공부도 못하게 했어요. 비구니가 강사를 한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내던 때였지요. 그런데도 큰스님들이 미래를 내다보고 비구니 승가를 제대로 세우겠다는 뜻으로 저에게 강사의 길을 열어주었으니 부지런히 보답을 해야지요.”

묘엄 스님은 “엄격한 성철 스님, 올곧고 분명한 자운 스님, 점잖으면서도 철저한 운허 스님 밑에서 투철하게 공부에만 매달릴 수 있었다”며 “큰스님들을 모두 똑같은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곁에서 모신 것이 가장 큰 복”이라고 했다.

묘엄 스님은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교학의 내공을 키운 뒤 본격적으로 강사의 길에 들어섰다. 운문사 비구니 강원에서 4년여 동안 스님들을 가르쳤다. 봉녕사로 옮긴 것은 1971년. 봉녕사는 고려 희종 때 창건된 고찰이지만 그가 처음 왔을 때는 쓰러져가는 작은 법당 몇채가 전부인 폐사 직전의 사찰이었다. 묘엄 스님은 대대적인 불사와 운력을 시작했다. 길을 내고, 전각을 고치고, 나무와 꽃을 심었다. 주변의 논밭을 메우고 새 전각을 지어 오늘날 국내 대표적인 비구니 도량으로 키워냈다.

수원시 우만동 월드컵경기장 근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면 너른 분지에 봉녕사가 있다.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향하당, 청운당(靑雲堂), 현대식 도서관인 소요삼장(逍遙三藏) 등이 늘어서 있다. 비구니 사찰답게 나무와 연못, 화초들이 아기자기하고 아름답다. 공원처럼 잘 가꾸어진 조경과 석조물들이 운치를 더하는 정갈하고 그윽한 도량이다.

묘엄 스님은 이곳에서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고승들에게 전수한 선·교·율 삼장의 맥을 후학들에게 전하고 있다. 74년 개원한 봉녕사비구니강원은 봉녕사승가학원을 거쳐 84년 봉녕사승가대학으로 승격됐다. 현재 100여명의 학인들이 수학중이다. 99년에는 국내 ‘최초’의 비구니 율원인 금강율원을 열었다. 여든 가까운 세수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젊은 스님보다 더욱 부지런하고 바쁘게 지낸다. 날마다 강원 치문반부터 승가대학, 율원 스님들을 직접 지도해 지금까지 800여명의 제자를 키워냈다.

올해는 운허 스님으로부터 강사 자격을 인정받은 지 50년이 되는 해다. 지난 9월 제자들은 ‘주강(主講) 50년 기념 논총’을 봉정했다. 봉암사 결사에도 함께 참여했던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은 이날 “묘엄니(妙嚴尼)가 있어 광교산이 비로소 참으로 광교산이 되었구나”라고 그의 공덕을 기렸다. 광교산은 고려 태조 왕건이 산에서 솟아오르는 광채를 보고 부처님(光)의 가르침(敎)을 주는 산이라고 해서 이름 붙였다고 한다.

스님이 광교산에서 설하는 불법의 핵심은 무엇일까. 스님은 “불교는 궁극적으로 마음을 깨치는 것”이라며 ‘사대허가(四大虛假) 비가애석(非可愛惜)’이라는 ‘무상계(無常戒)’의 한 구절을 들려줬다. ‘몸뚱이는 거짓되고 헛된 것이니 조금도 애석해 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우주는 성주괴공하고 중생은 생로병사합니다. 그러나 원자탄으로 우주 전체를 박살내도 마음만은 부서뜨리지 못하지요. 엉겹결에 태어나고 죽지만 마음은 그대로 있는 겁니다. 언제 다시 몸을 받을 지 모르니까 몸이 있고, 선악을 분별할 때 마음의 복혜를 닦으며 잘 살아야 합니다.”

스님은 “사람들이 당장 편하고 쉽게 사는 길만을 택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부처님이 전생을 알려면 금생을 보고, 내생을 알고 싶거든 금생을 살피라고 하신 뜻은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이지요. 현재를 충실하게, 바르게, 진실하게 살면 과거,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면 외롭고 힘든 생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스님은 “사람들이 물질을 탐하지만 탐심은 눈덩이처럼 끝도 없이 불어나기만 할 뿐 만족을 모르는 것”이라며 “크게 비우는 것이 가득 채우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인생은 순환도로 같은 겁니다. 출발지가 바로 목적지이지요. 출발과 도착이 따로 있지를 않아요. 첫걸음이 바로 목적지인 줄 아는 마음가짐을 가지세요.”

향하당 문밖 오랜 세월을 짊어진 향나무(香) 너머로 노을(霞)이 번지고 있었다. 일락서산(日落西山)의 풍경 속에 엷은 미소를 띤 황혼녘 노스님의 청정한 향기가 보태진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노랗게 빛나는 은행나무 잎새들이 시나브로 쏟아졌다.

〈김석종 선임기자 sjkim@kyunghyang.com〉

▲묘엄스님은

1931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1945년 문경 대승사에서 성철 스님을 계사로, 월혜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61년 통도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전국비구니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봉녕사 주지와 봉녕사 승가대학 학장·강주를 맡고 있다.

 

대중엔 자상, 학문엔 엄격
-제자 적연스님이 본 묘엄스님-

“비구니 후학들을 한치의 어긋남 없이 교육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투철하신 분입니다. 평소에는 도량을 자상하게 살피고 대중을 인자하게 이끌지만 학문과 계율에는 엄격하고 단호하시지요.”

봉녕사 금강율원장 적연 스님은 “스님께서는 늘 부처님 계율을 몸과 마음에 익혀서 습관화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며 “말씀과 행동 그대로가 곧 법인 분”이라고 말했다.

“수행자로서 해이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언젠가 학인들이 활짝 웃으면서 찍은 사진을 보여드렸어요. 스님은 희로애락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중생을 교화하느냐고 지적하셨지요. 출가자는 몸은 여성이지만 대장부의 길을 가는 것이니까 행동과 말부터 대장부의 위의를 나타내야 한다는 뜻이지요.”

적연스님은 “스님이 워낙 나무와 꽃을 좋아하는데다 오랫동안 봉녕사를 손수 일구신 탓에 거의 조경 전문가 수준”이라며 “봉녕사의 나무 한그루, 돌 하나, 풀 한포기까지 어디에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 꿰뚫고 있다”고 전한다.

79년 출가한 적연스님은 80년 봉녕사 강원에 들어와 처음 묘엄 스님을 만났다. 86년 봉녕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87년 묘엄스님에게 전강을 받았다. 금강율원 제1기 졸업생으로 지난 5월 신해스님과 함께 전계식을 갖고 묘엄스님으로부터 율맥을 전수받았다. 비구니가 비구니에게 율맥을 전수한 일은 한국 불교 사상 처음이다. 적연스님은 “비구니를 통한 율맥의 전수는 비구·비구니 이부승 제도에서 비구니 승단의 위상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자주성을 확고히 하는 중요한 계기”라며 “비구니 교육의 선구적 역할과 비구니 승가에 계율을 지키는 자세를 확고히 한 것이 스님의 큰 공로”라고 말했다. 묘엄스님에게는 적연스님을 비롯해 일운(울진 불영사 주지), 본각(한국비구니연구소장), 일연(완주 안심사 주지), 탁연(전 조계종 문화부장) 스님 등 한국 비구니계의 차세대를 이끌 전강·전계·수계 제자들이 많다.

-승랍 40년이상 비구니 최고 법계-

비구니 ‘명사’란

묘엄 스님은 지난 10월23일 합천 해인사에서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으로부터 조계종 최초의 비구니 ‘명사(明師)’ 법계를 받았다. 스님과 함께 명사 법계를 받은 스님은 혜운(전 운문사 주지), 광우(전 견성암 선원장), 지원(금련사 주지), 명성(전국비구니회장), 정훈(정각사 주지), 정화(전 견성암 선원장) 스님 등 모두 7명이다.

명사는 비구의 대종사(大宗師)에 해당하는 비구니 최고의 법계로 조계종 비구니 스님의 수행력과 지도력을 상징한다. 승랍 40년 이상 된 비구니 원로 가운데 중앙종회의 동의와 원로회의 특별심의를 거쳐 종정이 품서한다.

조계종은 올해 처음으로 비구니 법계 제도를 체계화했다. 비구니 법계는 승랍 10년 미만이거나 승가고시 4급 합격자인 계덕(戒德)과 정덕(定德·승랍 10년 이상·3급), 혜덕(慧德·승랍 20년 이상·2급), 현덕(顯德·승랍 25년 이상·1급), 명덕(明德·승랍 30년 이상), 명사 등 다섯 품계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