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윤제학_불명산 화암사

醉月 2010. 12. 12. 11:48

불명산 화암사

부처의 광휘 드리운 꽃바위 절

▲ ㅁ자 형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화암사의 전각들. 처마를 맞붙여 놓을 정도로 폐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리하여 열린 공간은 '하늘!'
 ‘길(道)’의 시작과 끝, 그곳은 ‘집’입니다. 가야 할 길의 끝도 집이고, 떠나온 길의 시작도 집입니다. 어떤 종류의 길이든, 길은 집 떠난 자의 몫입니다만, 역설적이게도 길은 집과 집 ‘사이’에 있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결국 ‘이 집(有爲)’과 ‘저 집(無爲, 自然)’ 사이의 길항(拮抗) 작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절로 가는 길은 늘 설렙니다. ‘이집살이’의 곤고함이 짙을수록 ‘저집살이’에서 위안을 얻고픈 탓이겠지요. 불명산 화암사 가는 길도 그랬습니다. ‘부처의 광휘(佛明)가 드리운 꽃바위(花巖) 절’로 가는 마음이 목석 같을 수는 없겠지요. 더욱이 화암사의 대표적 당우인 극락전(보물 제663호)과 우화루(雨花樓·보물 제662호)에 대한 앞선 답사객들의 상찬은 설렘을 더욱 부풀렸습니다. 하지만, 어떤 권위나 확신에 찬 해석일지라도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느끼지 않는 한, 풍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가파른 계곡을 올라 첫 대면을 했을 때의 느낌은 경이였습니다. 절의 정문격인 우화루는 불쑥 솟아오르는 산처럼 다가왔고, 나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놀람은 곧 ‘이 깊은 산중 아스라한 기슭에 어떻게 이토록 우람한 건물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의문으로 바뀌더니 고난도의 수수께끼로 이어졌습니다.


그 수수께끼란, 훤칠한 높이의 누문이면서 왜 누하진입(樓下進入)이 불가능하게 석축으로 막았을까? 2층 누각은 왜 벽을 열어두지 않고 판벽과 판문으로 막았을까? 왜 행랑채 같이 곁달린 집 사이의 좁은 문으로 출입구를 삼았을까? 의도적인 우각(隅角·모퉁이) 진입이라면 왜 출입문을 들어서자마자 중심 공간을 곧장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하는 것들로, 건축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하나같이 벅찬 질문들이었습니다. 일단 모든 걸 놓아버리기로 했습니다. 그냥 몸 가는대로 마음 가는대로 느낄 양으로.


그러나 뜻밖에도 ‘들을 복’은 있어서 마침 극락전의 기단을 수리하는 고건축 전문가로부터 건물의 구조적 특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금상첨화로 함께 길을 나선 건축가 이일훈 선생께서 공간구성에 대한 이해의 맥을 짚어 주셨습니다. 이 글의 상당 부분은 이일훈 선생의 안목에 비전문가의 용감한 상상력을 보탠 것임을 미리 밝혀 둡니다.


어쨌거나 여기서 잠깐, 수수께끼 풀이가 아무리 중요해도 절로 드는 초입의 오솔길과 계곡을 걷는 즐거움을 빼선 안 될 것 같습니다. 불명산 주름에 옴살스레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는 그 길을 걷는 일이야말로 ‘저집살이’의 즐거움이니까요.


건축적 중심공간은 마당


경부고속도로를 대전에서 버리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추부 나들목에서 버리고, 17번 국도를 타고 가다 대둔산의 아기자기하고도 우람한 암릉이 만들어내는 스카이라인을 잠시 즐긴 다음 그 길마저 버리면,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화암사의 아랫마을입니다. 요즘은 영화에서나 봄직한 흙벽을 간직한 마을에는 유난히 감나무가 많은데 이미 가을을 물들이고 있더군요. 아마 그 빛깔을 보면 누구라도 ‘가을입니다’ 하고 시작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질 겁니다.


마을을 완전히 벗어나면 다시 길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내처 산을 휘돌아 오르는 찻길을 버리면 오른쪽으로 오솔길이 열립니다. 소나무가 도열하듯 서 있는 개심사 길이나, 우람한 전나무가 하늘을 이룬 월정사 길과도 다른 아기자기한 오솔길입니다. 푹신한 흙길에 발이 익숙해질 즈음 보랏빛 물봉선이 계곡의 시작을 알립니다. 물길에 맨 가슴을 다 열어준 암반의 미세한 층이 가는 물줄기에도 경쾌한 박동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계곡이 허리를 곧추 세울 즈음 물줄기는 폭포에 가까운 모습으로 바뀝니다. 그 위로 벼랑에 기댄 철계단이 둔한 인간의 발을 연어의 꼬리 짓이 되게 합니다. 이렇게 15분쯤 오르면 다시 평평한 오솔길, 숨을 고르고 나면 홀연히 화암사가 꽃피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누하진입은 어둠과 밝음의 극적 대비로 금당을 돋보이게 하는 건축적 고려입니다. 그런데 우화루는 다른 사찰보다 높은 누문인데도 왼쪽으로 조그만 돌계단을 만들어 모퉁이로 들게 합니다. 그런데 사각(斜角)으로 들어서서 얻는 건축적 노림인 깊이 있는 전경이 확보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우화루와 적묵당의 처마가 포개진 좁은 공간으로 확보되는 시야는 극락전의 귀퉁이와 적묵당의 툇마루로 한정됩니다. 정면은 수직의 절개면이 가로막습니다.


▲ 극락전(보물 제663호) 내부. 닫집의 정교하면서도 화려한 조각과 금모루 단청이 구름 위 세계를 연상시킨다.
극락전을 향해 적묵당의 처마 밑으로 걸음을 옮기면 마치 회랑(回廊)을 걷는 듯합니다. 다분히 폐쇄적인 느낌입니다. 적묵당 툇마루의 가운데쯤 오면 비로소 ㅁ자 형으로 배치된 당우들이 다 드러나지만 폐쇄성은 더욱 짙어집니다. 사방이 다 막혀 있습니다. 남북으로 우화루와 극락전, 동서로 불명당, 불명당의 좌우로 트인 공간에는 철영재와 명부전이 시야를 가로막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실마리가 잡힙니다. 그리 넓지 않은 마당이 오롯이 드러나면서 우화루로 확장되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전면에서는 2층이었던 우화루가 내부에서는 완전히 1층처럼 보이는 데다 누마루의 높이가 거의 마당과 수평을 이루고 있습니다. 강당과 행사장의 구실을 겸한 공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화암사의 건축적 중심 공간은 ‘마당’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함정입니다. 함정에서 빠져나올 열쇠는 우화루의 폐쇄성에 있습니다. 누각이라면 탁 트인 시야를 확보하게 해야 할 텐데, 널벽에 널문까지 달아 놓았습니다. 이 정도라면 분명한 의도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제야 선명한 무언가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늘’입니다.


 


부처의 지음(知音)으로서 선(禪)적 구경(究竟)의 건축적 구현


폐쇄성의 극적 강조, 응결된 내부의 활화산 같은 분출, 이것이 화암사의 건축적 진실일 것입니다. 사방으로 불명산이 울울한데 그 안에 전각을 또 산처럼 높게 둘러싸서 하늘과 땅을 맞닿게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화루(雨花樓)는 이름 그대로 ‘꽃비’가 됩니다. 실제로 화암사의 내부 영역에서 어느 건물에서 봐도 마지막 눈길은 저절로 하늘로 향하게 됩니다. 건축적 진실에 감응하는 몸의 진실입니다.


좀더 그 근거를 찾자면, 적묵당과 극락전의 처마는 위 아래로 포개져 있고, 남쪽으로 적묵당의 추녀마루는 우화루의 측면 합각판을 뚫고 하나의 지붕골을 이룰 정도로 폐쇄성을 겹겹이 강조합니다.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을 지으면서 실수로 그랬다고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수수께끼는 풀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건축의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효용성과 미감(美感)입니다.


화암사의 건축적 효용성은 극락전의 ‘하앙(下仰)’ 구조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화암사를 유명하게 한 것도 국내 유일의 하앙 구조 때문입니다. 중국과 일본에는 흔한 구조여서 일본 학자들이 중국 건축술이 한국을 거치지 않고 직수입됐다는 근거로 삼기도 했는데, 화암사 극락전이 발견됨으로써 그들의 논리가 머쓱해져 버렸습니다.


하앙은 외형상 공포의 한 부분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구조적 역할에 주목해야 할 부재입니다. 하앙은 처마와 기둥 사이의 공포와 달리, 천장 내부에서부터 서까래와 같은 방향으로 길게 뽑아 공포부분에서 지렛대와 같은 작용을 하여 처마를 길게 빼는 역할을 하는 부재입니다. 실제로 극락전의 처마 깊이는 3m가 넘습니다.


그런데 강우량이 많은 남쪽지방에서 긴 처마의 필요 때문에 사용된 부재라고 말들 하지만, 왜 화암사 극락전밖에 없느냐에 대해서는 명쾌한 설명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앙 구조의 특성은 긴 처마뿐 아니라 내부에 고주(高柱)가 필요 없는 단순한 가구 수법에 있는데, 간단함에 비해 시공이 힘들고 고주 없이 버틸만한 큰 목재의 수급이 어려운 데 그 원인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화암사의 건축적 미감을 이해하는 데 ‘대교약졸(大巧若拙)’보다 적절한 개념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큰 기교는 어눌해 보인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듯, 화암사의 모든 당우는 막돌 기단에 덤벙주초(다듬지 않은 자연석 주초)입니다. 특히 우화루는 무기교적 기교의 절정을 보여 줍니다. 길이가 모두 다른, 대충 자귀질을 한 듯한 투박한 민흘림 기둥, 들쑥날쑥한 뺄목들. 디테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투입니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튼실함은 보는 이를 숙연하게 할 정도입니다. 오만을 느낄 수 없는 대가의 당당함이 바로 이런 것이겠지요. 적묵당 툇마루에 앉아 하늘과 불명산을 보면서, 화암사란 절’집’이야말로 부처의 지음(知音)으로서 선(禪)적 구경(究竟)의 건축적 구현이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현재 조계종 제17교구의 말사인 화암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는 전해오지 않습니다. 중창기에 원효와 의상이 주석했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7세기에는 창건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존 극락전은 1981년 해체 수리시 발견된 종도리의 묵서명에 의해 1605년(선조 38)에 중건된 것으로 밝혀졌고, 현존 우화루는 1611년(광해군 3)에 세워졌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