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에게 보이다
學道如初莫變心 도를 배울 적엔 처음 마냥 마음을 변치 말고
天魔萬難愈惺惺 온갖 마와 어려움이 있을수록 더욱 정신 차려라.
直須敲出虛空髓 모름지기 허공의 골수를 두들겨내고
拔却金剛腦後訂 금강의 뇌후에 박힌 못을 뽑아 버려라.
고봉 원묘(高峰原妙, 1238-1295)
남송(南宋)말 원대(元代) 스님. 임제종 양기파. 속성은 서씨.
강소성 소주부 오강현 출신. 15세에 삭발하고, 17세에 가화 밀인사 법주 문하에서 수학하여 천태를 배움. 단교 묘륜에게 참구하고, 다시 앙산 조흠에게 참구하여 득법함.
남송 함순 2년에 임안의 용수에서 은둔 수행하여, 5년 후 확연히 깨달음.
동 10년 무강의 쌍계봉에 머물렀고, 지원 16년에는 천목산 서봉에 들어가, 사자암에서 홍법에 힘씀. 사자,대각 두 사찰을 열어 제자가 수백 명, 수계자만도 수만 명에 달함. 저서로는 고봉대사어록(高峰大師語錄)2권이 있음. 원 원정 원년 12월 1일 입적. 세수 58,법랍 43. 시호는 보명 광제. 지손이 탑명을 짓고, 직옹홍교가 행장을 씀.
구름가나 하늘은
雲走天無動 구름 가나 하늘은 움직이지 않고
舟行岸不移 배 가도 언덕은 옮겨 가지 않네
本是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何處起歡悲 기쁨과 슬픔은 어느 곳에 이는가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
조선 스님. 속성은 장(張)씨. 어려서 출가하여 현빈(玄賓)에게 구족계를 받고 청허 휴정에게 심법(心法)을 이어 받음. 남쪽으로 돌아 다니며 여러 선장로들을 찾아 참구한 후, 금강산, 구룡산, 묘향산 등에서 개당하고 선교(禪敎)를 강의함. 그의 문하에는 법을 이은 풍담 의심을 비롯하여 인물이 많아서 휴정의 법맥을 이은 4대파 중에서 가장 성한 편양파를 이룸. 인조 22년 5월 10일 묘향산 내원암(內院庵)에서 입적. 세수 64, 법랍 53.
저서로는 <편양당집(鞭羊堂集)>이 있음.
첫눈
梧木花開劫外春 고목에 꽃 피는 세월 밖의 봄이여
山河一片白銀團 이 산하는 한 조각 흰 눈덩이네
神光久立安心處 신광(神光)이 오래 서서 안심처를 구했지만
豈似今朝徹骨寒 어찌 오늘 아침 뼈에 닿는 추위만 하랴.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
고려 스님. 속성은 아(牙)씨. 이름은 원혜(元惠). 헌호는 강월헌(江月軒). 영해(寧海)출신.
20세에 이웃의 친구가 죽는 것을 보고,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를 어른들에게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자, 비통한 생각을 품고 바로 공덕산 묘적암의 요연 법명(了然法明)에게 출가함. 이후 명산대찰을 편력하다가 양주 회암사에서 4년간 수도한 끝에 깨달음을 얻음.
28세에 원(元) 연경 법원사에서 인도의 고승 지공에게 2년간 배운 뒤, 호남지방을 편력하며 정자사의 처림과 무주 복룡산의 천암원장 등에게 참학함. 다시 지공에게 돌아와 그 법을 이어받음. 도행(道行)이 황제에게까지 알려져 광제선사 주지로 있으면서 설법함. 39세에 귀국하여 오대산 상두암에 머물고, 42세에 왕명으로 내전에서 설법했으며, 신광사(神光寺) 주지로 있었음. 52세에 왕사가 되고 조계산 송광사에 있다가 다시 회암사 주지가 되어 이를 중수하고, 57세에 문수회(文殊會)를 개최함. 왕명으로 밀성의 영원사로 옮겨가다가 신륵사에서 입적. 저서로는 나옹화상가송(懶翁和尙歌頌) 및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각 1권이 있음.
백척의 장대 끝에서
百尺竿頭能闊步 백 척의 장대 끝에서 활보하며
千尋壁善經行 천 길 절벽을 거침없이 거니네
又如獨木橋邊過 그러나 또한 외다리를 건너는 것 같아
一念乖不保生 한 생각만 어긋나면 그것으로 끝장이네.
월봉 책헌(月奉策憲, 1624-?)
1624년 경상도 성주에서 태어났다.
1634년 (인조 12년) 11세에 가야산 해인사로 입산하여 1639년 송파(松坡)에게서 불경공부를 했고, 1652년 금강산의 풍담의심(楓潭義諶)에게서 선을 수행했다.
이후 성주의 불영사(佛靈寺)를 비롯, 전국의 명산대찰을 편력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했다
연선자에게(示演禪者)_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
妙道堂堂何處在 묘한 도는 당당하여 어느 곳에 있는가
莫從外去苦追尋 밖을 향해 번거롭게 치닫지 말라
一朝兩眼能開豁 어느 날 아침 문득 두 눈을 뜨고 보면
水色山光是本心 물빛 산빛 이 모두가 본마음이네.
마음은 언제나 새벽같이
心常了了口常默 마음을 항상 밝고 밝게 하고, 입은 항상 침묵해야 하며
且作伴痴方始得 또한 어리숙한 사람과 도반을 해야, 비로소 도를 얻을 것이니라
師藏錐不露尖 스승의 살림살이는 송곳을 감추어, 뾰족한 부분을 드러내지 않아야
是名好手眞消息 참으로 사람을 다루는, 명수(名手)라 할 수 있다
진각혜심(眞覺慧諶, 1178∼1234)
고려 스님. 진각은 시호. 호는 무의자(無衣子). 자는 영을(永乙).
속성은 최씨. 이름은 식(寔). 화순 출신.
24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출가를 반대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보조 지눌(普照知訥)국사를 찾아가 삭발함.
오산(鷔山) 지리산(智異山), 금당암(金堂庵) 등에서 각고의 수련을 쌓고 깨달음을 얻음.
보조 국사 입적 후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의 2대 법주(法主)를 맡아 현풍을 크게 떨침.
월등사(月燈寺)에서 입적. 탑호는 원소(圓炤).
저서로는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심요(心要),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금강경찬(金剛經贊) 등이 있음.
해젯날에
結時石女夢 解時木人歌 묶을 때는 돌계집의 꿈이요 풀 때는 나무 사내의 노래네
夢歌都放下 望月明如漆 꿈과 노래를 모두 놓아 버리면 달 밝기가 칠흑과 같네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
근대스님. 속성은 송(宋)씨. 전북 태인읍 출신.
13세때 천장사(天藏寺) 태허(太虛)에게 출가, 34세 때 경허 성우(鏡虛惺牛)의 법을 이어 받음.
덕숭산(德崇山) 정혜사(定慧寺)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揄岾寺) 등에서 선풍을 떨쳤고, 1930년 태화산(泰華山) 마곡사(麻谷寺) 주지를 거쳐 1935년 선종 수좌 대회에서 종정에 추대됨.
사리탑이 덕숭산 수덕사(修德寺)에 있음.
마음의 등불(心燈)
歷劫傳之無盡燈 역겁토록 전해오는 무진한 등불이여.
不曾挑剔鎭長明 일찍이 심지를 돋우지 않아도 영원토록 밝다네.
任他雨灑兼風亂 비 뿌리고 바람 몰아쳐도
漏屋虛窓影自淸 허물어진 빈 창에 그림자마저 청정함이로다.
환성지안(喚惺志安, 1664∼1729)
조선스님. 자는 삼낙(三諾). 속성은 정(鄭)씨. 춘천출신.
15세에 출가한 뒤 금강산에서 설제(雪霽)에게 배워 심법을 얻음.
27세에 직지사(直指寺) 화엄법회에서 진언으로부터 자리를 물려받아 화엄대강백으로 이름을 떨침.
62세에 금산사(金山寺)에서 1,400여 대중이 모인 화엄대법회를 열었으나,
그 일로 무고를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어 도착한 지 7일만에 입적.
저서로는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 ·환성시집(喚惺詩集)이 있음.
심춘(尋春) 杖藜踏破萬重山 명아주 지팡이 짚고서 이 산 저 산 헤매면서
終日尋春不見春 종일토록 봄을 찾아도 봄은 보이질 않네!
歸來持把梅梢看 집에 돌아와 뜨락의 매화가지 만져보니
春在枝頭已十分 아-아- 봄은 벌써 매화 꽃망우리를 터뜨리네.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
조선스님. 자는 현응(玄應). 속명은 여신(汝信). 묘향산(妙香山 즉 西山)에 오래 있어 서산대사라 함. 속성은 최씨. 안주출신.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안주목사(牧使) 이사증(李思曾)의 양자로 입적.
성균관에서 공부하다 진사과에 낙방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숭인(崇仁)에게 출가하여, 이후 영관에게서 법을 얻고, 30세에 승과에 급제하고 이어 선교양종판사의 지위에 오름.
이후 여러 곳을 유력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8도(道) 16종(宗) 도총섭이 되어 승병을 모집,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움.
75세에 제자 사명 유정에게 병사를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
휴정은 좌선 견성을 중히 여기며 교종을 선종에 포섭함으로써 조선 불교가 조계종으로 일원화되는 기틀을 마련함.
저서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鑑), 선교석(禪敎釋), 삼가귀감(三家龜鑑), 청허집(淸虛集) 등 4권이 있음.
숨어있는 장거사(張居士)를 찾아
春山無伴獨相求 伐木丁丁山更幽 봄산에 짝 없이 친구를 찾아가니 나무찍는 소리 쩡쩡거려 산이 더욱 깊어 보이네!
澗途餘寒歷永雪 石門斜日到林丘 얼음과 눈 속을 하염없이 지나서 석양이 石門에 비추일 때 그대곁에 이르렀네!
不貪夜識金銀氣 遠害朝看 鹿遊 그대 탐심이 없으니 밤마다 금은이 비칠 것이요 그대 자비심이 충만하니
乘興杳然迷出處 對君疑是泛處舟 아침 저녁 사슴이 찾아드네! 나 또한 세속 길 잃어버려 마음이 덩그렁 비어 버리네!
두보(杜甫, 712~770)
중국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華州]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畿內)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甘肅省]의 친저우[秦州]·퉁구[同谷]를 거쳐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에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완화초당(浣花草堂)을 세웠다.
일시적으로는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동쓰촨[東四川]의 쯔저우·랑저우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하행하여 쓰촨성 동단(東端)의 쿠이저우[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에서 나와, 이후 2년간 후베이·후난의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대표작으로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의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우음
心頭不許到纖塵 裳涉思惟便失眞
要識西來端的意 落花啼鳥滿山春
마음 가운데에
가는 티끌도 일으키지 말지니
겨우 생각을 일으키면
한마음을 잃어 버린다.
아- 아
祖師의 한마음을 알고져 하는가!
꽃 피고 지고 새 울어대니
산마다 봄이 가득함이여!
인악 의첨(仁嶽 義沾, 1746-1796)
조선스님. 자는 자의(子宜). 속성은 이(李)씨.
18세에 용연사의 헌공(軒公)에게 출가, 벽봉에게서 구족계를 받았고, 금강경, 능엄경 등 대승경을 배움.
서악(西嶽), 홍유(泓宥), 농암(聾巖) 등에게서 수학, 영조 44년 강당을 열어 설법함.
뒤에 화엄의 종사 설파(雪坡)에게 화엄경을 듣고 선송(禪頌)을 배워, 여러 곳에서 강경. 정조 14년 (1790) 수원 용주사를 창건할 때 증사(證師)가 됨.
저서로는 화엄사기, 원각사기, 금강사기, 능엄사기, 기신론사기(起信論私記) 및 인악집(仁嶽集)이 있음.
청야음(淸夜吟)
月到天心處 風來水面時
一般淸意味 料得少人知
달은 하늘 中心에 걸리고
맑은 바람은 물 위를 스칠 때여!
이 같은 맑고 청정한 뜻을
아-아
아는 사람이 없음이여!
소강절(邵康節)
중국 송(宋)나라의 학자, 시인. 활동분야는 철학, 주요저서로는《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관물내외편(觀物內外編)》이 있음.
호는 안락선생(安樂先生). 자는 요부(堯夫). 시호는 강절(康節), 소강절(邵康節)이라 불릴 때도 많다.
허난[河南]에서 살았으며, 주염계(周濂溪)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이지재(李之才)로부터 도서 ·천문(天文) ·역수(易數)를 배워 인종(仁宗)의 가우연간(嘉祐年間:1056∼1063)에는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로 추대받았으나 사양하고, 일생을 뤄양[洛陽]에 숨어 살았다.
사마 광(司馬光) 등의 구법당(舊法黨)과 친교하면서 시정(市井)의 학자로서 평생을 마쳤다.
남송(南宋)의 주자(朱子)는 주염계,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과 함께 강절을 도학(道學)의 중심인물로 간주하였으며, 강절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 역철학(易哲學)을 발전시켜 특이한 수리철학(數理哲學)을 만들었다.
즉, 역(易)이 음과 양의 2원(二元)으로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있음에 대하여, 그는 음(陰) ·양(陽) ·강(剛) ·유(柔)의 4원(四元)을 근본으로 하고, 4의 배수(倍數)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이 철학은 독일의 G.W.F.라이프니츠의 2치논리(二値論理)에 힌트를 주었다고 전한다.
그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62편을 저작하여 천지간 모든 현상의 전개를 수리로서 해석하고 그 장래를 예시하였으며, 또 《관물내외편(觀物內外編)》2편에서 허심(虛心), 내성(內省)의 도덕수양법을 설명하였다.
또한 자유로운 시체(詩體)의 시집(詩集)《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20권)의 작품이 있고, 《어초문답(漁樵問答)》(1권) 등이 있어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청명한식(淸明寒食)
淸明時節雨紛分
路上行人欲斷魂
借問酒家何處有
牧童笑指杏花村
청명한식 때에 봄비는 추적추적 내리니
고향에 못 간 길거리 나그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여
묻노니 목축일 술집 어드메뇨
목동이 빙그레 살구꽃 피어있는 마을을 가리키네
두목(杜牧)
중국 만당전기(晩唐前期)의 시인. 호는 번천(樊川), 자는 목지(牧之), 활동분야는 문학이며, 출생지는 중국 경조부 만년현(京兆府 萬年縣 : 陝西省 西安市)이다.
이상은(李商隱)과 더불어 이두(李杜)로 불리며, 또 작품이 두보(杜甫)와 비슷하다 하여 소두(小杜)로 불린다.
26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굉문관교서랑(宏文館校書郞)이 되고, 황주(黃州) ·지주(池州) ·목주(睦州) 등의 자사(刺史:지방장관)를 역임한 후, 벼슬이 중서사인(中書舍人)까지 올랐다.
매사에 구애받지 않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당나라의 쇠운을 만회하려고 무한히 노력하였다.
정치와 병법을 연구하고, 《아방궁(阿房宮)의 부(賦)》라는 시를 지어 경종왕을 충고하려고 애썼다.
산문에도 뛰어났지만 시에 더 뛰어났으며, 근체시(近體詩) 특히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잘 했다.
만당 시대의 시인에 어울리게 말의 수식에 능했으나, 내용을 보다 중시하였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소재를 빌어 세속을 풍자한 영사적(詠史的) 작품이 나오고 함축성이 풍부한 서정시가 나왔다.
대표작으로 시《아방궁의 부》 이외에 《강남춘(江南春)》 《번천문집(樊川文集)》(20권) 등이 있다.
간경유감(看經有感)
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門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
조그마한 밭두둑 옆에 거울같이 맑은 연못이여
파란 하늘 흰 구름이 자유로이 넘나드네
연못이여 어찌 그리 맑고 깨끗하뇨
그 길은 근원에서 生水가 솟구쳐 나옴이라네
주희(朱熹)
자는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산인(雲谷山人)·창주병수(滄洲病戒) 둔옹(遯翁). 이름은 희(熹). 푸젠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생.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徽州張源:安徽省)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자는 이 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을 저서를 통해서 관찰해 보면 46세까지를 전기, 이후 60세까지를 중기, 61세 이후를 후기로 하는 3기(三期)로 대별할 수 있다.
주자연보(朱子年譜)에 의해 전기 저서를 순차적으로 열거하면《논어요의(論語要義)》《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정씨유서(程氏遺書)》《논맹정의(論孟精義)》《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서명해의(西銘解義)》《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통서해(通書解)》《정씨외서(程氏外書)》《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로 이어져 《근사록(近思錄)》의 편차(編次)로 끝맺었다.
이 전기는 북송의 선유(先儒)인 주염계(周濂溪)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의 저서교정과 주례에 전념하고, ‘논어 ·맹자’ 등은 차기(次期)의 예비사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시기로서 그것이 《근사록》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 논적이었던 육상산 형제와의 아호사(鵝湖寺) 강론에서 존덕성(尊德性)에 대해 도학(道學)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에는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역학계몽(易學啓蒙)》《효경간오(孝經刊誤)》 《소학서(小學書)》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서(四書)의 신주(新註)’가 완성된 점이다. 60세 때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上古)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聖賢)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후기에는 오경(五經)에 손을 대어 《석존예의(釋尊禮儀)》 《맹자요로(孟子要路)》 《예서(禮書:儀禮經傳通解)》 《한문고이(韓文考異)》 《서전(書傳)》 《초사집주후어변증(楚辭集註後語辨證)》 등이 있다. 더욱이 71세로 생애를 마치던 해 3월,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개정(改訂)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사서집주(四書集注)》에 대한 지정(至情)이 어느 정도였는지 엿볼 수 있다.
범어사 보제루(梵魚寺 普濟樓)에서
神光豁如客 金井做淸遊
破袖藏天極 短杖劈地頭
孤雲生遠岫 白鳥下長洲
大塊誰非夢 憑欄自悠
신광이 활달한 나그네 금정산에서 맑게 노닐네라.
떨어진 장삼 자락에 하늘 끝을 감추고,
짧은 지팡이로 땅머리를 두드린다.
외로운 구름 먼 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
흰 산새는 물가에 내리네.
세상사 알고 보면 꿈속인 것을,
홀로 깨어나 부질없이 홀로 한가롭네.
경허 성우(鏡虛 惺牛)
근대 스님. 처음 이름은 동욱(東旭), 속성은 송씨. 본관은 여산. 전주 출신. 9세에 광주 청계사 계허에게 출가.
14세에 동학사 만화에게 경학을 배우고, 23세 때 동학사에서 개강하였으나, 31세 때 역병이 창궐한 마을을 지나다가 생사의 긴박함을 깨닫고 학중들을 해산한 뒤, 문을 닫고 좌선하여 묘지를 크게 깨달음.
32세에 홍성 천장암에서 용암 혜언의 법을 잇고, 그 후부터 도처에서 선풍을 떨치면서 가야산 해인사,금정산 범어사,금강산 마하연,설봉산 석왕사 등 여러 절에 머뭄. 59세에 강계,삼수 등지에서 자취를 감춘 후 머리를 기르고 유관을 쓰고 스스로 난주라 이름하다가, 갑산 웅이방에서 입적. 세수 67, 법랍59.
문하에 만공 월면. 혜월. 수월 음관. 한암 중원 등의 제자를 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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